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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26 00:47

    돈인가? 하나님인가? 선택의 길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물이나 하나님 중에서 오로지 하나만을 선택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이지, 둘 다 얻을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면 재물을 버릴 수밖에 없고, 재물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적 삶이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고, 오로지 가난한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한 정신에 따라 스스로 가난한 삶을 추구했던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맨발의 최춘선 할아버지는 가난한 삶을 실천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찍은 다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김우현 작품)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래서 그렇게 자기도 살아보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불교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얻을 수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적어도 하나님을 믿으려면 가난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성경에는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섬기는 대상”에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앉을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 하나님이 앉으시면 재물이 들어설 수 없고, 재물이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앉을 자리가 없다. 재물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이고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재물이 너무 좋은 나머지 우상이 되어버리고, 섬김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결국 재물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된 사람들을 향하여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돈을 앉혀버린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언제 재물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되는가? 언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것인가? 우리는 재물이 우상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만일 재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칙에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 얼마 전 영국 레스터-노팅엄 포레스트 FA컵 4라운드 경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레스터는 2부 리그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1-4로 패배하였는데, 전반 32분 3-0을 만들며 승리를 확신한 노팅엄 선수들은 기쁨에 겨워 골 세리머니를 펼쳤을 때였다. 레스터 팬 한 명이 뛰어들어가 선수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안면을 가격했다. 그에게 있어서 스포츠는 단순히 여가를 즐기는 수단이 아니라, 어느새 우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들의 자녀들도, 우리들의 직장도,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도, 때로는 심지어 교회에서의 사역도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우상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악을 행하면서도 악한 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좋아함을 넘어서서 우상의 단계로 올라가 버린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국진 목사 - 현,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 - 총신 대학교 신학과 졸업 - 총신 신대원 졸업(M.Div. 목회학) - 고든콘웰 신학교 졸업(Th.M. 신약학)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해석학 박사 과정 수학 - 노쓰웨스트 대학교 졸업(Ph.D.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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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29 00:54

    바른 결정과 선택

    바른 결정과 선택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많은 결정들을 내리고 살아간다. 어떤 학교를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어디에 집을 구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와 같은 큰 결정들을 내리기도 하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잠을 조금 더 잘 것인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와 같은 작은 결정들을 수도 없이 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결정들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결정들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으나 나중에 그 결정이 큰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주라고 하는 곳으로 이민을 가기로 하는 결정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는 결정일 수 있다. 호주에 와서 사는 곳, 친구, 직업 등 삶의 대부분의 것이 완전히 바꿔 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어떤 결정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한다’ 라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용서함으로 인해 오는 마음의 평안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과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도 영향을 미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정과 선택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 중 좀 더 탁월하고 완벽해지고 싶은 성향으로 인해 오히려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사람들은 때로 배우자나 타인이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이 면밀한 준비와 조사를 다하고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정권은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바른 선택을 연습하지 않으면 늘 후회와 회피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때로는 선택의 결과가 주는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삶의 선택을 내어주어 버린다면 나의 삶은 자유와 자율성을 상실해 버림으로 더 이상 나의 삶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자꾸 선택하고 결정하는 연습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까? 이 질문에 쉬운 답은 없지만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이익 추구’의 관점이 많다.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필자는 상담을 하면서 종종 내담자의 결정을 돕게 되는데 내담자가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된 결과를 가져올 지를 생각하게 할 때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적 차원이 아닌 이성적 차원에서 손익을 생각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 주의의 논리와도 비슷하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더 이윤이 남으면 그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나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이어지면 나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 나는 어떤 불의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수 있다. 나의 이익이 타인의 이익이나 모두의 이익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사재기를 한 사람에게는 유익이고 안심을 가져다 주는 행동이었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어려움을 주게 되었다. 다수를 위한 결정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공리 주의’의 관점을 띄게 된다. 공리주의에서는 다수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수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한 개인의 인권이 다수의 유익을 위해 희생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무조건 문을 닫아야 한 많은 비즈니스 운영자들은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결정의 피해자일 수 있다.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정부는 그런 결정을 내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고 받아들여야 했으며 누군가는 그런 결정의 결과로 ‘자살’을 선택하는 일도 생겼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는 ‘미덕 추구’의 관점이 있다.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이고 사회의 정의에 가깝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인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정의롭고 청렴하고 사랑과 자비와 존중과 배려와 같은 덕목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어버리고 특히, 임시 비자 소지자들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많은 한국인 상인들이 유학생들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 음식이나 비상용품들을 제공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또한 정부도 어려운 시기에 정부 예산을 다른 것에 쓰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돕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있고 그것에 따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작은 개인의 삶의 결정과 큰 사회적 구조안의 결정과 선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하게 모든 결정에는 개인의 가치관 또는 사회적 담론 (social discourse)그리고 그 이면에는 철학적 이슈와 함께 가는 윤리적 부분이 함께 따라간다. 개인 모두가 성인군자처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이 나 뿐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이라면 전체의 유익과 결정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 전체를 건강하도록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 코로나로 인한 중국의 위상이 내려간 부분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중국이 대처한 방법에 대한 윤리적 부분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그들이 내린 결정이 집단 이기 주의의 결정이 아니라 좀 더 큰 사회의 공익을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복지를 존중하는 윤리적 결정을 할 수 있었다면 전 세계는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나비 효과’처럼 작은 결정이 큰 효과를 가져오는 결정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내리는 결정을 나의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큰 관점으로 바라보고 살펴봄으로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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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4-28 14:50

    『화제의 신간』 내일 맑음

    < 책 소개 > * 발행 : 씽크스마트 * 제목 : 내일 맑음 * 부제: 좋아해 감사해 행복해 * 발행일 :2022년 5월 8일 * 지은이 : 김민홍 * 시리즈 : 스토리 인 시리즈 ⑫ * 판형 : 130*210 / 쪽수 :300쪽 * 가격 :13,000원 * ISBN :978-89-6529-318-7 03810 '한계 상황 속에서 겪은 고통을 극복한 어느 치유자의 이야기' <30년이 넘는 투병 생활> 한창 젊음을 꽃피울 대학생 시절, 저자는 당뇨의 합병증으로 왼쪽 눈을 실명했다. 또한 만성 신부전증으로 10년 동안 혈액 투석을 받고 아내의 신장을 기증받았다.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것도 익숙하다. 아직도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저자는 자신이 겪은 질병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목표는 애인 백 명 만들기?> 아내에게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받고 지방의 어느 치유 센터에서 요양하던 저자는 암과 싸우는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과 같이 투병 생활을 하면서 허락을 받아 ‘애인’이라고 불렀다. 저자가 말하는 ‘애인’은 서로 사랑하는 애인이 아닌,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저자는 치유 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첫 번째 애인을 시작으로 백 명의 애인들 만나 돌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오늘도 애인들을 만나러 간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하는 사람으로> 저자는 오랜 투병 생활로 깨달은 것을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눴다. 투병 생활로 인해 암울한 삶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저자는 <내일 맑음>을 통해 어두웠던 과거와 투병 생활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며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사람으로 변한 저자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자. < 출판사 서평 > '상처받은 치유자' 어두웠던 학창시절, 젊은 나이에 찾아온 실명, 혈액 투석과 신장 이식 수술까지. 파란만장한 삶이 주는 고통에 넘어지면서도 언제나 다시 일어나는 저자의 모습은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내일 맑음>은 상처와 시련에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저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자신의 상처를 가감없이 드러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힘쓴다. 이 책이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주길 바란다. < 책 속으로 > p24. ‘프롤로그 – 상처가 사명이다’ 중에서 요즘 나는 수많은 암 환자들과 당뇨, 고혈압, 만성 신부전증 같은 만성 질환자들, 그리고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같은 마음이 아픈 분들을 계속해서 애인으로 만나고 있다. 세상에는 환자들과 미래의 환자, 이렇게 두 부류만 살고 있는 것 같다. 환자는 갈수록 많아지고 질병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상상할 수 없는 희귀질환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런 질병의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원인을 찾아가다보면 한 가지 이유를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마음이다. 마음이 상하고 아프면서 이것이 질병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p39. ‘이제 진짜 시작이다’ 중에서 치료가 이렇게 드러난 증상만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치유는 그 증상이 일어나게 된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일이다. 그래야 암이나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방구석에 곰팡이가 생기면 락스로 닦아 곰팡이를 제거하는 것은 치료이다.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는 방에 곰팡이가 생긴 원인을 찾아 환기도 시키고, 구들장에 뜨거운 불을 피워 곰팡이 생길 환경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시는 방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락스로 백날 열심히 닦아봤자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는 다시 생길 것이다. p115. ‘웃어야 산다’ 중에서 지금 돌이켜봐도 우리 아들이 손주를 낳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지 못했으리라고 100% 확신한다. 앞을 보지 못하고 장님으로 살았던 2년, 그리고 이틀에 한 번씩 해야 하는 혈액 투석은 고통 그 자체였다. 살고 싶지 않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자연히 웃을 일이 없어졌고 삶 속에서 기쁨이 없었다. 그런데 손주가 태어나니 이 세상이 환히 밝아졌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이 생긴 것이다. 자연스럽게 웃을 날도 많아지고, 기쁨이 회복되니까 내 건강에도 청신호가 켜지는 것 같았다. p207.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다’ 중에서 이렇게 대학교 2학년 때 당뇨병에 걸리고 심한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7살 먹은 막내의 죽음, 그리고 유일한 목격자로서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로 인해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해서 모범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나도 모르게 걸린 모범생 콤플렉스, 그리고 어머니의 자살 시도와 대학 시절 친구 집에서 약 5년 동안 빈대 아닌 빈대생활을 하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가난의 상처들, 마지막으로 학비를벌려고 시작한 장사 때문에 어머니께서 폭력을 당하고 내 마음속에 용솟음쳤던 죽이고 싶을 만큼의 미움과 분노.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내 몸을 집어삼켰다. p250. ‘삶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 중에서 당뇨병으로 고생한 지 벌써 35년이 지났고, 장님처럼 2년을 살았으며, 10년 동안 혈액 투석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신장 이식 수술까지 받았다. 이런 세월을 지내면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아프셨던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치열하게 투병생활을 하셨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하셨고 그때마다 내가 발견해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 비록 이렇게 삶의 마지막에 가서는 마음이 약해지셨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투병생활은 대단하셨다. 삶의 의지가 대단하셨다. 질병에서 일어나려는 아버지의 노력은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러므로 나 또한 그 어떤 질병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 목 차 > 추천의글 애인들의 응원 메시지 프롤로그 : 상처가 사명이다 1. 염증과의 싸움 2. 이제 진짜 시작이다 3. 마음이 먼저다 4. 가장 무서운 것 5. 환자의 주권 찾기 6. 기다려야 한다 7. 눈물이 치료제이다 8. 눈물은 영혼의 해독제이다 9. 울어야 산다 10.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11. 웃음의 힘 12. 웃어야 산다 13. 애인 만들기 프로젝트 14. 반드시 길이 있다 15. 치유의 핵심은 동역자이다 16. 사랑받는 세포가 치유된다 17. 스트레스에는 원인이 있다 18. 착하게 살지 말자 19.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다 20. 자존심을 버리자 21. 이왕 할 거라면 즐겁게 하자 22.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23. 삶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 24. 삶의 목표가 있는 자는 쓰러지지 않는다 25. 상처가 사명이다 에필로그 : 덕분입니다 < 저자 > 김민홍 상처 입은 치유자 한창 대학교에 다닐 때 당뇨병에 걸려 합병증으로 왼쪽 눈을 실명하고 만성 신부전증으로 10년 동안 혈액투석을 받았다. 결국 아내의 신장을 기증받아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고혈압, 심근 경색 등 다양한 성인병 경험을 통해 전인 치유에 관심이 생겼다. 백 명의 애인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지방에 있는 치유 센터에서 요양하였다. 여기서 암으로 투병 중인 한 자매를 만났는데 그 자매의 허락을 받아 애인이라고 부르면서 함께 투병생활을 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환자들을 ‘애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표는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 즉 애인 백 명을 돌보고 섬기며 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멘토링 현재 하는 사역은 멘토링을 통한 치유 사역이다. 환자가 되면 외롭다. 건강과 치유에 대한 정보도 필요하다. 애인들과의 교제와 상담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 인간은 영·혼·육으로 이루어진 전인적인 존재이므로 몸과 마음과 영성까지도 돌보는 치유 사역을 하고 싶다. 정체성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천안에서 새백성교회를 개척하여 현재까지 목회하고 있다. 치유 사역을 위해 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동양의학을 접목하고 싶어 이혈(耳穴) 전문 대학원에서 이혈치유 상담학을 공부하여 이혈 지도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목사로 목회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치유 사역자로 활동하며 치유 세미나, 치유 캠프, 강의, 상담 등의 사역을 통해 열심히 애인들을 만나며 교제하고, 섬기고 있다. < 추천사> <누구나 일독해야 할 책> 추천사를 부탁받고 원고를 몇 편 읽으며 글 속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저자는 신장병으로 10년 간 투석을 하고 결국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겪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길어 올린 주옥같은 깨달음의 글들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치료와 치유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치료란 증상을 완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에 치유는 병의 원인을 밝혀내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 깨끗이 완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환자는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현대의료는 치유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저자도 책에서 고백했듯이 목사님으로 일생을 살아오며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저자는 ‘상처가 사명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사명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깨닫는다는 말이겠지요. 사명적 존재란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게 사명을 부여한 분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생을 바르게 산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누구나 꼭 일독해야 할 책입니다. 건강한 분들에게는 건강을 위하여, 환우들에게는 실제적인 도움을 위하여, 그리고 의학적인 지식도 쉽게 전해 주고 있기 때문에 추천을 드립니다. 끝으로 목사님의 소중한 글의 출판을 축하드리며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귀한 깨달음과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건양대학원 치유선교학과 학과장 김찬기 교수 <다큐멘터리이자 육필원고> 이 책은 ‘치유일지’입니다. 의사가 자신이 치유한 환자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자신의 질병을 어떻게 치유 받아 왔는가를 기록한, ‘병상일지’ 같은 기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글을 대할 때, ‘어, 뭐지? 드라마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다큐멘터리이며, 온몸으로 쓴 ‘육필원고’입니다. 저자의 글을 한 편씩 읽어 갈 때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견디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을까?’ 또 다른 한 권의 ‘욥기’를 보는 것 같아 독자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있는 이 글의 주인공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게도 합니다. 이 글은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특이한 내용입니다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이해하고 납득 할수 있을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치유일지’를 읽어 나갈 때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느끼게 되며, 나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또 이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글들이 정말 귀하면서도 감사한 것은 저자 자신이 온갖 고난과 질병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도리어 어렵고 힘든 역경과 질병 가운데 있는 다른 이들을 가슴에 품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어떤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병들고 상처받은 몸과 영·혼이 온전히 치유 받을 수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이 귀한 책을 온 정성을 다해 발간하게 되신 김민홍 목사님께 큰 박수를 보내며, 온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 소망 이비인후과 손영규 원장 <환우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사랑> 질병으로 김민홍 목사님만큼 오랫동안 극단적인 고생의 체험을 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과정들을 자세히 관찰해 두었다가 정확히 기억해서 기록한 용기와 냉철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다양한 병증과 치료 이력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동료 인간으로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간결하고 읽기 쉬운 문체로 재미있게 쓰여 있다.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잘 읽힌다. 한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싫을 정도이다. 솔직담백한 글이다. 자신의 체험과 상태를 보통 사람들은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것까지 환우들을 위해 진솔하게 기록했기에 생생하고 실감이 난다. 그 체험들이 예사롭지 않고, 놀랍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단순히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최근에 읽은 것들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책이다. 목사님 자신이 3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병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환우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사랑이 진하게 느껴진다. 질병, 특히 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암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해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놀랍다. 단지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 통찰들이 건전하고 우리의 이성과 상식, 그리고 신앙적 원리에 부합되는 것들이라 느껴진다. 그러므로 만성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교수 <민홍이의 감사의 노래> 김민홍 목사님은 지난 2년간 함께 공부했던 우리 학회 지도사 과정생들에게 치유일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공유하여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후 학회밴드에서 파장이 휘몰아치더니 이어 라는 작은 잡지에 몇 편의 글이 실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구입하여 텃밭에서 여름내 땀흘려 수확한 것들과 함께 과정생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들깨의 기름을 기쁨의 눈물로, 볶은 참깨는 행복의 미소로 칭하며 잡지에 실린 목사님의 글을 <민홍이의 감사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목사님의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비마다 숱한 역경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그 이상의 것이었다. 이 글은 애간장이 끊어지듯 땅을 치고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지난 삶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목사님에게 그 삶은 역경과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낸 삶이 아니라 먼저는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고, 세상의 모든 아픈 이들의 위로와 회복과 치유를 위한 감사의 노래인 것이다. 이제 그 노래를 아픈 이들과 함께 부르고 얼싸안고 보듬어 춤을 추며 노래하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이 책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한다. 김민홍 목사님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니 죽음 이후에도 이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에게 주어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명이기 때문이다. - 한중 이혈 건강 요법 학회 이현중 학회장 영혼육의 상처와 아픔을 지닌 이 땅 순례자들의 고백과 회복의 대언, 가족들과 걸어온 인생의 숲길에서 정직한 참회의 소리만큼 우리를 울리는 파동이 있을까? 김민홍 목사님을 통해 전달되는 삶의 시간과 여정을 묻는 절대자의 물음에 숲속 그루터기에서 상처 입은 발을 감싸는 우리의 정직한 고백이 쏟아지고 회복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축복과 은혜가 가득하시길. Where are you? - 경주 숲속유향의원 임부돌 원장 <상대방을 위한 배려나 이해, 사랑으로 느낀다는 것> 치유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전체로 들어가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목소리. 거부하고 감추어 두었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고 포용하며 초대한다. 치유는 자신의 내면의 견고함을 발견하게 하는 신뢰의 여정이다. 자신의 삶이 부분이 아닌 전체적 삶으로 초대될 때 잃어버렸던 우리의 목소리는 비로소 즐거운 노래로 발견되고, 잊어버렸던 자신의 존재는 춤과 웃음으로 변하게 된다.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껴안고 상처받은 마음을 부드럽게 감쌀 때 우리는 또 다른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은 내 자신의 정직한 본성의 발견이며 만남이고 구원이며 자유이다. 치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healing’은 그리스어 홀론(holon)에서 나왔는데 이는 healing, health, wholeness, holiness, holy 등으로 파생되었다. 따라서 치유는 건강과 전체, 신성, 그리고 구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질병은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질병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disease’에서 ‘dis-’의 의미는 ‘떨어져 나감’, ‘분리 됨’을 말한다. 그리고 ‘ease’는 ‘편하다’, ‘쉽다’, ‘일상적 삶’을 말한다. 따라서 질병은 삶에서 분리되고 파괴된 것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 구속을 뜻하는 ‘salvation’은 ‘완전함’과 ‘전체’를 말하는데 이는 신과 떨어져 있다가 다시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치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 의학은 질병 치료에 중점을 둔 나머지 환자의 남아 있는 생명과 삶의 문제와 인간관계 회복의 문제, 감정 치유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한 경향이 있었다. 이제 현대의학이 이런 요소까지 의료범주에 넣어 치료를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성숙한 ‘인간다움’으로 진화할 것이다. 고통과 상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고통과 상실은 우리가 인간임을,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과 상실은 치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치유는 질병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삶의 질과 생활의 기술, 삶의 존재방식의 문제에 더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고통과 상실의 순간에 그동안 밀봉되었던 마음의 본성을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신마저 소외될 때 자신의 실존만이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인다. 습관화되고 마음이 만들어 낸 거짓된 자아와 집착이 고통과 상실의 바람에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 자신의 정직한 본성과 만나게 된다. 이제 고통과 상실은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된다. 슬픔은 슬픔으로, 아픔은 아픔으로, 눈물은 눈물로 해결할 때 비로소 치유가 안착된다. 슬픔과 아픔, 눈물과 온전히 대면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회피한다면 증환은 다시 왜곡되고 인간의 실존마저 박탈된다. 치유는 공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공감은 타자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타자의 이해는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반성으로부터 여과되지 않은 것은 공감이 아니다. 공감의 보편성과 실천적 태도는 자신의 주체적 반성을 거쳐 시작한다. 반성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자율적 제한의 절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공감의 출발은 객관적인 대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주체의 반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자기점검의 성찰은 공감의 기초가 되고 사적 감정이 비로소 보편적 감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의 감정은 사적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자기 자신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상대방의 관계 속에서 제한해야 한다. 무제한적 사랑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자기제한’을 부자유나 제한, 억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배려나 이해, 사랑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와 이해, 사랑의 대상인 타자로 인정할 때 공감이 일어난다. 이 때 상대방은 나의 중심적 계교에 포섭되거나 수단화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인 타자로 존재한다. 이제 타자는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을 때 쌍방 간의 관계가 치유 회복되기 시작한다. 김민홍 목사님이 쓴 이 책은 한계 상황 속에서 겪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자와 함께 일구어 낸 우리들 삶의 진솔한 내러티브이다. 그래서 울림이 크다. 이 이야기는 환자와 치유사 간에 이루어지는 증환의 이야기이지만, 오늘 이 순간 우리가 맞이하게 될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에 등장한 분들이 앞서 행한 일과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경험에 어떻게 대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따뜻한 위로가 된다. - 고려대학교 임병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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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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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18 18:00

    바보처럼 살라고요?(시편 37:1~11)

    I. 도입 우리나라 고전소설 가운데는 춘향전, 흥부전, 홍길동전처럼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제인 것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악당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조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약자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칠 때 환호성을 지릅니다. 권선징악은 사람들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양심의 소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온유하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온유하게 사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데 왜 온유하게 살아야 할까요? II.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복 있는 사람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 세 번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시간적, 문화적 간격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온유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2)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3)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시편으로 돌아가서 온유한 자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주된 독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2000년 전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태복음이 사용한 복(μακάριος)이라는 말 속에 담긴 히브리적 개념부터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대표적인 성경은 시편 1:1입니다. 여기서 복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쉐르(אֶשֶׁר)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세속적인 복을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와 함께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청중들은 모두 시편 37편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회당에서 이 성경을 여러 번 읽고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말을 하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 37편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III. 온유한 자는 의인이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시편 37편은 두 가지 이미지(image)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데 첫째는 풀이고(2절) 둘째는 빛입니다(6절). 풀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농부들은 풀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조그마한 주말농장만 해도 이것을 실감합니다. 그런 풀들도 겨울이 오면 다 죽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가을부터 봄까지 우기(雨期)입니다. 그러다가 봄에 건기(乾期)가 시작되면 온 세상은 메마르고 강렬한 햇볕이 내리쪼입니다. 우기 동안에 쑥쑥 자라던 풀들은 건기의 햇빛에 금새 말라 죽어 버립니다. 다윗이 보기에 지금 떵떵거리는 악인들은 우기 때의 풀과 같습니다(2절).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인들은 정오의 빛 같게 해 주실 것입니다(6절). 그러니까 악인들이 까불어 봐도 별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37편을 인용하여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하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프라우스(πραΰς)인데 이 말은 gentle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인용하신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란 인정 많고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것과는 다릅니다. 시편 37:11에서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아나우(עָנָו)인데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싸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실 것을 믿기에 가난하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이 사울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원수를 제거해 주실 때까지 가난하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이 복되며 결국 주인공이 되어 몽땅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9, 22, 29, 34절과 비교해보면 선명해집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9절을 보면 그들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은 주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 29절을 보면 그들은 의인이며, 34절을 보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의 문제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런 사람이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이긴 것은,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저는 제 일생에 이 싸움에 진 적이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딱 한 번만 눈 질끔 감으면 되겠지 했는데 그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한 번 눈 감으면 다음에 또 눈 감아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한 번 물리치면 다음에도 물리치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번 외쳐 보세요. “한번 눈 감으면 또 눈 감게 되고, 한번 물리치면 또 물리치게 된다. 한 번만 물리치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입니다. 그런 온유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IV. 진정한 기업(상속)은 영원한 천국이다. 이제는 ‘땅을 차지한다’ 혹은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말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이며 풍요롭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구약 시대에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 그래서 세상에는 악인이 순진한 사람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땅을 빼앗길지언정 악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악한 방법을 동원하기보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럴 때 이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며 어떤 조처를 내리실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 권리도 못 챙기는 너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래서야 어디 세상에 살아남겠니?”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5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일 뿐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느라 나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겨서 가난하고 고통당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고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놓칠 수 없는 다른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사느라고 손해를 본 것 가운데 이 땅에서 다 보상받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실까요? 그 이유는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만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영원한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방식으로 사느라 빼앗긴 것 가운데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신 것은 천국에 적립해 놓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월급을 받아서 다 써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국가에서 강제로 월급 일부를 떼어가서 적립해 놓습니다. 그렇게 떼어간 돈으로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리면 실업 급여를 지급해줍니다. 또 퇴직할 때는 퇴직금을 지급해줍니다. 은퇴 후에는 연금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상해 주는 대신 일부는 천국에 적립해 놓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V. 마무리 세상에는 악인이 있어 성도의 권리를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은 저 밖의 불신자 가운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같은 교회의 지체나 한 가정의 가족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나서서 그 사람을 혼 내주고 빼앗아 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은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온유한 사람을 돕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시편 37:1은 그렇게 바보처럼 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시편 37편에는 ‘왜냐하면(כִּי 키)’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오는데 첫 번째가 2절입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바보처럼 빼앗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의 복을 받고 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 설교 준비과정 1. 이 시의 카테고리는 전형적인 신뢰시이다. 2. 이 시의 패턴은 평행법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은 동의적 평행법이고 일부 구간에는 대조적 평행법도 사용하고 있다. 김창대에 의하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패널 구조로 되어있다. A.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은 공의와 의로 빛날 것 (1-8절) B. 의인의 복: 땅 상속, 화평을 누림 (9-11절) C. 의인을 해하려는 악인의 행동을 실패함 (12-15절) D. 의인과 악인의 대조: 의인의 기업은 영원함, 땅 상속 (16-22절) B’. 의인의 복: 여호와께서 잡아 줌, 땅 상속 (23-31절) C’. 의인을 해하려는 악인의 행동을 실패함 (32-33절) A’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은 땅을 차지하고 평안과 구원을 누림 (34-40절) 3. 이 시에 사용된 이미지는 풀(2절)과 빛(6절)의 대조이다. 풀은 한 낮의 빛에 말라버린다. 4. 시편 37편에서 왜냐하면(כִּי)이 8번 나온다. 즉 이 시는 반전의 시이다. 이 시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가 계시기에 의인은 반드시 성공하고 악인은 반드시 멸망한다. 5. 이 시가 신약에 제공하는 신학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팔복에서 예수님이 설명하는 온유한 자의 기초를 제공한다. 온유한 자란 여호와를 의뢰하고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악을 떠나 선을 행한다. 6.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느냐 물리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서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셨다. 나는 평생에 한 번, 이 싸움에 진 적이 있다. 내 평생의 후회되는 경험이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낱낱이 신문 기사로 나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선택을 하라. 7. 시편 37편의 아웃라인은 악인과 의인의 반복되는 대조를 통해 점점 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진행이므로 하향 및 상향 그래프를 반복하면서 올라가는 모습이다. 8. 이 시를 통한 설교 제목은 8번의 왜냐하면(כִּי)을 생각하면서 “왜냐하면요?”가 적합하다. 9. 본문은 40절로 설교 본문으로는 너무 길기에 1~11절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설교 도중에 언급한다. 10. 설교 개요 I. 도입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전소설 가운데 심청전을 제외한 춘향전, 흥부전, 홍길동전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제이다. 권선징악은 모든 사람의 양심의 소리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서는 악인이 더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도는 전혀 다른 이유로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II.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태복음 팔복에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말에서 온유하다는 말은 오해받기 쉬운 표현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 역시 설명이 더 필요한 내용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두 가지 이미지는 태양과 풀이다. 팔레스틴에서 풀은 낮의 강력한 햇빛에 맥없이 말라버리는데 악인은 단지 풀과 같고 의인은 강력한 빛이다. III. 온유한 자는 의인이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에수님의 말씀은 바로 시편 37편의 사상을 그대로 펼친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동이 얼마나 착한가보다 여호와를 신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느냐 물리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서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셨다. 나는 평생에 한 번, 이 싸움에 진 적이 있다. 내 평생의 후회되는 경험이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낱낱이 신문 기사로 나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선택을 하라. IV. 진정한 기업(상속)은 영원한 천국이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1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궁극적으로는 천국 약속이다. 하나님 방식으로 사느라 빼앗긴 땅 가운데 이 땅에서 회복하지 못한 기업은 천국에 적금해 놓은 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V. 마무리 신자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자는 언제나 바깥 불신자가 아니다. 때로 같은 신앙공동체의 지체나 한 가정의 가족도 시험한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연단받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믿음을 지켜야 한다. 결론/ 내가 왜 바보 같이 빼앗기고 살아야 하느냐고?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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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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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중 03-18 16:31

    "주님 때문에 참으로 행복합니다"

    2009년 5월 가정의 달 옥인교회 말씀축제 시간에 저는 처음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가족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네 식구가 불광동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무엇에게 홀린 듯한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좋았고, 세상적으로도 잘 나가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즐겁고 행복했던 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도박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평상시에 술과 담배는 했었지만, 도박장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로부터 어느 순간에 유혹을 받아 카지노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많은 돈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도박에 중독되어 사업도 직원들에게 맡기고 악의 구렁텅이로 한없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가정불화로 인해 사업장에 그 많던 물건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제가 도박을 하니 가까운 친구들도 점점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경마와 경륜, 경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도박은 다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와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은 제가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도 도박을 계속 하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강에도 이상이 왔습니다. 당뇨가 생기고 간이 나빠지면서 몸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악의 구렁텅이에서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한탄하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더 이상 고통의 삶을 살지 말고 죽자는 생각으로 죽을 자리를 찾을 때 전혀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 죽더라도 아내와 자식들은 한번 보고 죽자는 생각에 오랜만에 집으로 가보니, 식구들이 이사를 가고 없더군요. 야속한 남편, 부족한 아버지였기에 나도 모르게 이사까지 했나보다 생각하고, 다음날 저녁에 아내의 가게로 가보니 아내가 저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아내는 이 못난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여 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푸대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 안부를 물으며 집은 어디로 이사했는지 물어보니 집은 저로 인하여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더군요. 아내와 함께 산동네 집으로 가던 길이 얼마나 힘이 들던지 다섯 번이나 쉬고 간신히 좁은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는 망가진 몸으로 걷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불면증에 시달렸으나 집에 돌아오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죽으려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온 제가 염치없이 먹고 자며 지내던 그 어느 날, 딸이 “아빠 나 소원이니 한번만 우리 같이 교회 가보자”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 한번 가보자’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딸은 모두 옥인교회에 다녔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기 바쁜 가족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이기에 주일 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한 동안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찾아간 교회에서 찬양과 말씀을 듣던 중에, 처음인데도 제 눈에는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 한없이 차올랐습니다.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오면서 말하더군요. 우리 식구가 나를 위하여 3년째 새벽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그래 나도 새벽기도를 다니자 하고 딸과 아내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에 받은 마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예배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은혜의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교회 예배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운동만 하던 제가, 책과는 거리가 멀어 책 한번 읽어본 기억도 없었는데, 글자만 봐도 졸린 저에게 아내가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못이기는 척하며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를 폈는데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첫 구절부터 감동을 받아 그날부터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독을 거침없이 끝냈습니다. 1독을 끝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었던 저에게 성경은 큰 의미를 안겨주었고,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시들어가는 저에게 생명수와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성경과 말씀에 있었고, 그 이후로 저는 성경 말씀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내 인생의 관리자로 예수님을 붙잡았고, 기도로 그리스도를 저의 삶 가운데로 모셨으며,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다혈질이며 욱하는 성격도, 나만 알던 이기적인 성격도 변해갔습니다. 한 동안 저러다 말겠지 하던 가족과 친구들이 완전히 변한 제 삶을 보고 “하나님이 계신가보다!” 하더군요. 부모님과 형제들, 아내와 자식들도 이제는 저를 믿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족 간에도 대화로 벽을 허물며, 따뜻한 말로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안에서 변하니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기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매일 주님의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축복기도와 포옹을 해주고 있습니다. 부족한 남편, 못난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아내의 좋은 남편, 당당한 아버지로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죄의 쓴 뿌리를 뽑아내기 위하여 눈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모두가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도를 간절하게 드립니다. 앞으로도 삶 속에서 더욱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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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훈 목사, 서울한영대학교 제8대 총장 취임
    한영훈 목사의 서울한영대학교 제8대 총장 취임 감사예배가 7월 3일 오후 2시 서울한영대학교회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김천수 부목사의 인도로 오동록 장로가 기도 후 박일권 안수집사가 특송한 후 법인이사장 박승식 목사가 히브리서 13장 17절을 본문으로 '지도자가 즐거움으로 일하게 해야 하는 이유'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 목사는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하다. 북한은 김일성 세습으로 인해 많이 피폐했지만 우리는 좋은 지도자들로 인해 많은 성장을 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베네수엘라를 보면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리더 고래가 무리를 잘못 인도하면 따르던 고래들이 해변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가 달라진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게 된다. 서울한영대학교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한영훈 총장께서 그동안 많은 수고를 하셨다. 이제 8대 총장에 재취임하며 앞으로 비약적인 발전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지도자에게는 좋은 협력자가 필요하듯이 우리 모두 한영훈 총장에게 좋은 협력자가 되야한다. 다윗이 위대한 왕이 되었던 이유는 삼하23:13-17에 있는대로 다윗에게 목숨 거는 충성스러운 참모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도 크지는 않지만 온 교인들이 협력을 잘 해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 지도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때 교회나 학교나 잘 되는 것이다. 한영훈 총장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협력해 함께 유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설교 후 한 총장을 위해 합심해서 간절히 통성 기도했다. 2부 총장 인사 및 축하는 김천수 부목사가 사회하여 총장을 소개한 후 총장 한영훈 목사가 "많은 분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 오늘 주일에 조촐하게 총장취임감사예배를 드리게 됐다. 4일 후인 7월 7일에 장로교의 날 행사가 있기에 간소하게 했다. 오늘은 학교와 저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왔다고 생각한다. 이사장님을 통해 귀한 말씀을 들었다. 저는 8대가 마지막 총장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를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시간과 몸과 마음과 물질로 헌신하고자한다. 하나님 영광 위해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자 수고할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들이 제가 4년 동안 총장직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고 총장인사하고 박승식 박사가 축하패 및 선물을 전달하고 교회서기 오동록 장로가 축하패를 증정 후 가족 및 성도대표가 꽃다발을 증정했다. 전 이사장 박요일 목사가 "오랜 기간 서울한영대학교와 연관을 맺었다. 요즘은 대학교가 많이 어려운데 한영훈 목사가 총장의 중책을 맡으셨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순적히 책임을 감당하시기 바란다. 행27에 보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276명의 죄수들을 바울이 잘 이끌었다. 대학 현실이 바로 이와같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살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바울은 기도했다. 서울한영대학교가 사는 길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하면 하늘 보좌를 움직여 응답이 온다. 강소대학이 될 것이다. 총장과 이사장이 무릎꿇어 기도하고 동역자들이 함께 기도한다면 반드시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이다. 저는 백석대 이사장으로 매주 화요일에 출근해 법인에 가서 결재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대학을 위해 조직표에 손을 놓고 기도한다. 서울한영대학교와 백석대학이 함께 좋은 학교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 후 새하늘의 교회 샤론중창단이 축가를 한 후 박승식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취임 감사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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