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8(월)

NEWS ON AIR

2025 칼넷 정기총회...조정희 목사 칼넷 전국대표 추대
뉴스 12-08 19:58
양대식 GMS이사장·진주성남교회, 2026년에도 선교헌신
뉴스 12-07 19:02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 은혜로운 제17회 정기연주회
뉴스 12-06 16:11
한교총 제9회 총회개최, 신임 대표회장에 김정석 감독회장 추대
뉴스 12-05 17:43
【북토크】 대다수는 앞으로 더 가난해 질 것이다...남의 일이 아니다
오피니언 12-05 02:56
【북토크】 한국은 강고한 계급사회이다
오피니언 12-05 01:53
【북토크】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오피니언 12-05 01:19
미래목회포럼 22회 정기총회, 황덕영 대표·이상대 이사장 유임
뉴스 12-04 12:22

핫채널

총회더보기 +

  • 김병중(Th.D) 11-20 10:05

    총회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시간은 미래 편이다.

    총회 임원 내 갈등이 일단 봉합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월 20일 모인 총회 임원회에서 총회 임원회에 제기된 관련 건은 “총회장과 부총회장에게 위임해 합의하여 처리키로” 결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얼마 전 기독신문은 총회 임원들의 갈등에 대해 언급했다. 총회임원회의에서 제110회 임원선거 건과 관련된 정·부 임원들의 논쟁이 격렬했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정·부임원이 두 패로 나뉘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110회 총회 초반부터 임원들 내부 싸움은 이제 총회 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옛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말이다. 9명밖에 안 되는 총회 임원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패가 나뉘었다면 이미 볼 장 다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국의 일차적인 책임은 장봉생 총회장에게 있다. 총회장으로서 모두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기 총회장인 현 부총회장과 연관된 문제를 그것도 이미 총회 현장에서 결론 난 문제를 총회장이 재론했기 때문이다. 이에 모든 부임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총회 정임원은 현재 권력이다. 그러나 부임원은, 장로부총회장은 제외하고 미래 권력이다. 정임원의 임기는 1년이나 내년 5월 목장기도회를 하면 총회 권력은 미래 권력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시간은 미래 권력 편이다. 총회 임원들은 임명직이 아니다. 각자 선거해서 당선됐다. 그러므로 총회장은 그들의 협조와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거부하고 반발한 ‘권리’가 있다. 부임원들이 반대하기 시작하면 총회장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총회 임원 내부의 갈등은 일단 봉합이 되었지만, 이는 없었던 것만 못한 일이었다. 총회장은 예민한 안건을 내놓고자 한다면 임원회 전에 사전 조율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결과로 인한 후유증은 클 것으로 보인다. 총회장은 많은 총회원들이 110회 총회를 우려하고 있다는 현실을 파악해야 한다. “정책총회”라는 슬로건이 오히려 자신을 평가하고 공격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총회장과 주변 세력이 총회 임원 내분 사태를 뼈저리게 돌아보지 않는다면 임원 내 갈등은 언제라도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총회원들이 110회 총회 임원회를 걱정해야하는 현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 교계더보기 +

  • 김병중(Th.D) 11-18 19:31

    한장총 정기총회, 이 선목사 대표회장·강대석목사 상임회장 선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정기총회가 11월 18일 오전 10시 30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개최해 이 선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목사를 강대석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전임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43회기가 잘 진행하도록 42회기가 길을 닦았다. 한국장로교회는 복을 받았다. 뿌리가 같은 장로교가 연합해 부흥해야 한다. 장로교의 부흥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라고 이임사, 대표회장 이 선 목사가 “뽑아 주셔서 감사하다. 한장총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최선 다해 섬기겠다.”라고, 상임회장 강대석 목사가 “대표회장을 도와 한장총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취임 인사말했다. 개회예배는 상임회장 이 선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신용현 목사가 기도, 공동회장 김동기 목사가 롬 11:36-12:2을 봉독했다.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장로교여 부흥하라!’란 제목으로 “한국장로교회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부흥했다. 하나님의 부흥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탈종교화, 저출산, 반성경적 사상, 교회 안의 문제, 잘못된 영성 등으로 인해 유럽 교회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위기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한국장로교는 회개와 기도를 통해 계속해 부흥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신앙으로 부흥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다는 주권신앙을 가져야 한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예배자의 삶으로 부흥해야 한다.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해 선교로 부흥해야 한다. 성령께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셨으니 이 사명을 감당하자.”라고 설교 후 공동회장 김성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광고했다. 총회는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의 사회로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원 127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공동회장 안상운 목사가 개회기도, 회록서기 조세영 목사가 전회의록 낭독,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의 보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사업 보고, 감사위원 이홍섭 장로가 감사 보고, 회계 김재선 장로가 결산 보고, 임원 선거, 신구임원 교체, 공로패·감사패 증정,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 임명, 이사장 및 신임 이사 인준, 기타 안건 심의 후 신임 대표회장의 기도로 폐회했다.
  • 기관더보기 +

  • 김병중(Th.D) 12-08 19:58

    2025 칼넷 정기총회...조정희 목사 칼넷 전국대표 추대

    제자훈련 목회자 네트워크 CAL-NET 2025년 정기총회가 12월 8일 오전 11시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 그레이스홀에서 열려 조정희 목사를 칼넷 전국대표, 고동훈 목사를 전국 부대표, 최상태 목사를 고문, 홍동필 목사를 자문, 이병철 목사를 신임 지역대표, 13명을 지역총무로 추대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CAL-NET(Called to Awaken the Laity-Network, 제자훈련 목회자 네트워크)는 1999년 1월에 열렸던 "제1회 제자훈련 지도자 컨벤션"에서 결성된 제자훈련 지도자들의 전국 네트워크다. 故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철학에 동의하고 한 사람 철학으로 목회하는 칼세미나 수료자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처음 태동되었으며, "한 영혼"을 깨워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키우라! "한 성령" 안에서 "한 교회"됨으로 서로를 돌보아 연합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라! 가 비전이다. 이사장 오정호 목사가 “오늘 오신 모든 회원들을 환영한다. 대전에서 모이는 것이 교통이 편리해 새로남교회에서 모이게 됐다. 오신 분들에게 교회 서점에 있는 책과 팬시 용품 등을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다.”라고 환영 인사말했다. 칼넷 신임 대표 조정희 목사가 “그동안 칼넷을 통해 저와 아내가 목회에 많은 힘을 얻었는데, 회원들에게 힘이 되는 칼넷 모임이 되도록 잘 섬기겠다.”라고 대표 취임사했다. 1부 예배는 칼넷 전국대표 김종원 목사의 인도로 칼넷 이사 임종구 목사가 기도 후 다같이 딤후 4:7-8을 봉독했다. 총신대학 박성규 총장이 ‘어떤 목사로 남을 것인가?’란 제목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에는 룰이 있다. 믿음의 룰을 따라야 한다. 바울은 승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했다. 의로운 일을 하는 자에게 주신다. 우리는 어떤 목사로 남아야 하는가? 연말을 맞아 우리 사역의 종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주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칼넷 사무총장 조성민 목사의 광고 후 칼넷 이사 최상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는 칼넷 이사장 오정호 목사의 사회로 오주환 목사가 기도, 회원 호명 후 개회해 칼넷 전국대표, 전국 부대표, 고문, 자문, 지역대표, 지역총무 추대의 건과 2025년 결산보고 및 2026년 예산보고의 건, 2025년 감사 소견 발표 후 마무리했다. 신임 지역 총무에게 추대패 전달 3부 칼넷 추대패 전달식은 칼넷 사무총장 조성민 목사의 사회로 오정호 이사장이 전 칼넷 전국대표 김종원 목사에게 감사패 전달, 칼넷 전국대표, 전국부대표, 고문, 자문, 지역 대표, 지역 총무에게 추대패를 전달했다. 새로남교회 조예송 성도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축하공연 후 신임대표 조정희 목사가 섬기는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 노회더보기 +

    교회더보기 +

  • 김병중(Th.D) 12-07 19:02

    양대식 GMS이사장·진주성남교회, 2026년에도 선교헌신

    선교에 앞장서는 진주성남교회(양대식 GMS이사장 시무) 선교위원회가 지난 선교사역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2026년 새해에 더 선교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고 독려하는 선교 노래를 만들어 화제다. 총 1분 23초 분량의 노래는 진주성남교회가 101년 전 알렌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 현재 13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 담임 양대식 목사가 GMS이사장이 되고 그동안 32권의 책을 저술한 것을 언급하고 이어 파송 선교사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2026년에도 양대식 담임목사의 말처럼 “쉽고 행복한 선교”에 다같이 동참할 것을 담고 있다. 짧고 경쾌한 노래에 진주성남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있다. 가사처럼 2026년에도 선교의 큰 사역을 감당하기를 기대해 본다. 가사와 사진들 알렌 선교사에 의해 101년 전 설립된 진주 성남교회 13가정의 선교사를 세개 각국에 파송하여 선교하고 있습니다. GMS 이사장을 배출하여 선교행정과 문서 사역에도 힘을 쓰는 진주성남교회 우리 성도들의 후원과 협력으로 2025년을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이명희 선교사, 인도 김태숙 선교사, V국 안드레 김루디아 선교사, M국 김영욱 제유란 선교사, 일본 김용민 최상옥 선교사, P국 이갈렙 박사랑 선교사, 캄보디아 최도연 배경연 선교사, 필리핀A 김동철 정복희 선교사, 영어사역 스캇 라빈슨 다이안 라빈슨 선교사, 필리핀B 김제선 이연옥 선교사, N국 서산 장강 선교사, 국내다문화 김태영 최은혜 선교사, 몰도바 황진우 박성은 선교사. "선교는 쉽고 행복합니다". 2026년에도 함께 선교합시다!
  • 인물더보기 +

  • 김병중(Th.D) 10-15 10:44

    【心콕】 강재식 목사가 목사와 강도사에게 주는 권면

    평양노회(노회장 황석형 목사) 제197회 정기회가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동대문구에 소재한 홍릉교회(이철승 목사 시무)에서 개회해 회무를 처리하고 오후 3시 목사 안수 및 강도사 인허식을 가졌다. 이날 원로목사 추대 청원이 허락된 광현교회 강재식 목사가 목사와 강도사들에게 권면의 말을 했는데 감명 깊게 들었다. 강재식 목사는 “처음처럼의 자세를 갖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땅끝까지 사명 감당하고, 새벽기도 후 자지 말라”라고 권면했다. 다음은 권면의 전문이다. 오늘 노회에서 원로 목사 추대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라톤과 같은 경주의 마지막 지점을 오늘 통과한 날입니다. 38년 전에 여러분과 같이 목사 안수를 받았던 그 시간들이 이렇게 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으나 간략하게 해야 하겠다는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좋아하는 떡볶이집에 갔는데 앞치마를 주더라고요. 그 앞치마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처음처럼 그래서 그게 뭔지 처음에 모르고 잘 먹고 며칠 후에 또 갔더니만 그걸 또 주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그게 글이 좋아서 내용도 좋고 그 서체도 좋아서 주인한테 “혹시 이거 나한테 팔 수 있느냐?” 했더니 그냥 가져가라 그러더라고요. 가져다가 제 담임목사실에다 걸어 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일에 당회를 하는데 장로님들이 저를 쳐다보지 않고 그것만 쳐다봐요. 그래서 제가 왜 그럴까 하고 물어봤더니만 목사님 처음처럼이 뭔지 아세요? 너무 좋아서 그랬더니만 소주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처음이라고 하는 것이 제 마음에 꽂혀있었는데 우리 강도사님 목사님들에게 오늘 드리고자 하는 권면의 말씀은 처음처럼, 소주 많이 먹자 이런 내용이 아니라 처음처럼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작은 어디부터인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아무든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다. 그 내용이 굉장히 많아요. 그중에 한 가지만 이야기할게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아를 해고한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왕된 자리에서 나를 잘라내는 거예요. 우리 사람들은 조금 지나게 되면 주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 되어 있어요. 그걸 해고하는 겁니다. 얼마나 자주 해야 되느냐? 날마다 작심하고 날마다 날마다 자기를 해고하는 일. 제가 두 주 전에 총신대학에 가서 설교하면서 “50년 전에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50년 후에 여러분들 중에 누가 이 자리에서 설교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여러분들 가운데서 30년, 40년이 지나서 은퇴할 때 “나는 처음 한결같이 그 마음을 갖고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제가 작년에 미국의 북한 선교회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세 번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이야기할게요. 블랙마운틴이라는 지역에 갔는데 우리나라 지리산과 비슷한 지역이에요. 그래서 그 지역에 가서 이 조선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조선 땅 그리스도인들의 벗들’이라고 하는 큰 창고가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1880년에서 1930년까지 미국의 젊은이들이 땅끝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소명을 받고 땅끝이 조선 땅이라는 것을 알고 조선 땅으로 3,600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복음에 들고 왔어요. 50년 동안. 그리고 이 땅에 600명이 묻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갔던 3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바로 블랙 마운틴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지리산과 너무 비슷한 지역입니다. 산장을 짓고 그 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밤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어요. 오늘 우리 강도사, 목사 되는 분들. 여러분의 땅끝은 어디입니까? 우리에게 땅끝이 있어야 해요. 주님이 우리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얘기했을 때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고, 사마리아에 머물지 말고, 땅끝에 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땅끝이 북한일 수도 있고 땅끝이 오지일 수도 있고 땅끝이 이웃일 수도 있지만 땅끝까지 가는, 처음 나를 부인하고 나를 해고하고 땅끝까지 가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새벽 기도 끝나고 아침에 잠자지 마세요. 제가 오랫동안 새벽 기도 끝나고 아침에 잠을 안 자고 늘 성경 연구하고 기도하고 그렇게 지내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몸이 좀 아파 갖고 아침에 잠을 자기 시작했어요. 영성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근데 어느 날 잠을 자다 꿈꿨는데 이런 음성을 들었어요. “자는 자요, 어찜이뇨?” 저는 그날 깜짝 놀라서 깨어나서 “내가 지금 영적인 잠을 자고 있구나.” 다시 아침에 안 자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은퇴했으니까 자도 되겠죠. 여러분 아침에 새벽기도 끝나고 자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 목회 멋지게 될 겁니다. 자면 책임 안 집니다. 자지 마세요. 자지 마세요. 권면은 끝입니다. 아멘.
  • 논단더보기 +

  • 김병중(Th.D) 08-29 23:18

    "합동"교단은 聖 총회인가? 聲 총회인가?, 가해자vs피해자

    나는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8월 25일 오전에 총회에서 벌어진 난장판 때문이다. 이날은 선관위원회 전체 모임에서 고광석 목사의 자격 문제를 다룬 날이다. 당일 오전에 총회 회관에 가보니 호남 측 인사들 수십 명이 고광석 목사를 지지하기 위해, 혹은 선거관리위원들을 압박하기 위해(?) 모여 있었고, 한편 고광석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확정을 반대하는 천안중부교회 교인들도 와 있었다. 이들은 총회 회관 1층 카페에서 벌써 말싸움하고 있었다. 호남 측 인사들은 “왜 총회 회관으로 시위하러 왔느냐?”, “밖에서 시위하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천안중부교회 교인들의 시위를 말싸움, 몸싸움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충돌을 막고, 총회 총무의 중재로 시위를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 40여 분간 총회회관 1층은 아수라장이었다. 이 와중에 이를 취재하고 촬영하던 본 기자도 폭언과 몸싸움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제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천안중부교회 교인들이 세 번씩이나 총회에 올라왔는가? 그리고 고광석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확정을 반대하고 있는가? 고광석 목사가 이상규 목사에게 7,000만 원을 받고 107회 총회에서 폐지된 충남노회 소집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상규 목사는 노회원 소집에는 실패했다. 강압적인 그를 대부분의 노회원이 거부했다. 이후 이상규 목사는 천안중부교회에 임시 당회장으로 가서 김종천 담임목사를 불법으로 면직하는 등 온갖 일을 했다. 이에 담임목사 측은 소송을 통해 불법행위를 무효로 해야 했다. 천안중부교회 담임목사 측 교인들은 고광석 목사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인 고광석 목사가 교단을 대표하는 부총회장으로 출마한다니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서기 신분으로도 교회를 어렵게 했는데 이후 부총회장, 총회장이 되면 그 막강한 힘을 갖고 천안중부교회에 또다시 개입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천안중부교회 교인들은 2차, 3차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고광석 목사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 총회에 모인 호남 측 인사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을 몰아세웠고, 거칠게 대했으며, 불법자 취급을 했다. 아무리 자기 지역 후보가 부총회장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이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과거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정부와 일베들은 어떻게 했는가? “시체 장사”를 한다고 매도하고, 건져 올린 시신들을 “어묵”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게 사람으로서 할 일인가? 천안중부교회 교인들은 피해자이며, 고광석 목사는 가해자이다! 고광석 목사는 이상규 목사에게 7,000만 원을 받고 폐지된 충남노회를 되살리려고 함으로 총대를 기망했다. 7,000만 원을 고광석 목사에게 전달한 이상규 목사는 철저하게 천안중부교회를 짓밟았다. 그리고 뜻대로 안 되자 "선교헌금" 명목으로 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 모 신문 기자에게 기사를 쓰게 하고 돈을 돌려받은 후 그 기사는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고광석 목사는 총회 임원들에게 뇌물수수를 시인하고 "앞으로 선출직에 나오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호남 지역 후보로 나섰다. 고광석 목사의 발언을 들었던 임원들이 현재 선거관리위원회 당연직들이다. 아직도 고광석 목사의 이같은 말을 생생히 기억하는 그들은 부총회장이 되고자 구차하게 자기 변명을 하는 고광석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과연 우리 총회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聖총회인가? 아니면 자기 지역 후보를 위해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聲총회인가? 당시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단 총회의 현실이며 수준이다. 참으로 절망스러우며, 앞으로 더 절망스러워질까 더 절망스럽다! "합동"교단 총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해자 고광석 후보를 지지하는 지역의 소수자들에 의해 기어이 자멸의 길로 가려는가! 전 총대들은 우리가 속한 총회가 파멸의 늪으로 빠져가는데 손 놓고 있을 것인가? 자랑스러운 우리 "합동" 총회는 저들만의 총회가 아닌 바로 우리의 총회이다. 그런데 수수방관하는 사이 함께 몰락을 향해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선량한 다수가 바른 소리를 내는 聲 총회가 되어 이제라도 聖 총회를 지켜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가해자 고광석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치밀하고 집요하다.
  • 칼럼더보기 +

    기고더보기 +

  • 김병중(Th.D) 11-14 19:33

    【설교】 양대식 목사-“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사무엘하 9장 1-13절) 관계가 너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배신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다윗은 실수도 하고 죄를 지은 죄인이나 회개했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우정을 가지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해하려는 아버지의 편을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도와주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의리 지킨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상 18:1-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의리가 무너지고 서로 배신하는 시대에 의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의리의 하나님이시고 의리를 지키는 자들이 신뢰 얻고 성공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의리를 지키면 사람을 얻게 됩니다. 배신은 사탄의 성품입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에서 의리를 지키고 받은 은혜를 갚는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의 인격과 삶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은망덕은 받은 사랑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자는 짐승보다 못한 자입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은혜를 알고 끝까지 주인을 지키다가 죽기도 합니다. 충견입니다. 사무엘하 9:1-13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도와주고 끝까지 의리 지킨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도와주고 함께 식사했던 아름다운 인격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데 다리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므비보셋의 평생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가족 식구처럼 섬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므비보셋을 먹이고 큰 도움이 되어 준 다윗입니다. 요나단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갚는 다윗,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사랑에 감격하여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본다고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아는 므비보셋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사람에게 도움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의 기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복 받은 이유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려 하고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은혜 입고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없고 손해가 된다고 해서 받은 은혜 버리고 의리가 없이 배신하면 복을 받을 수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홉 가지 잘 해준 것은 잊어버리고 한 가지 서운하다고 의리를 버리고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섭섭하고 서운한 것이 있어도 내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고 감사하며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 귀신 들린 병을 고쳐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에 보답하려고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려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저의 인생철학 중의 하나가 ‘의리지키자,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은혜 보답하자’입니다.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인간관계에서 부부관계, 친구관계, 목사와 성도, 직장 안에서의 관계에서 의리 지키고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사랑과 은혜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의리 지키고 감사하고 배은망덕하지 않음은 덕을 세우고 선행의 실천이기에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예수님은 연약하고 흠이 많은 므비보셋 같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도와주신 사랑의 목자와 의리를 지키신 신실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 책소개더보기 +

  • 김병중(Th.D) 12-05 02:56

    【북토크】 대다수는 앞으로 더 가난해 질 것이다...남의 일이 아니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가난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일부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 구도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로 없는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세상이 됐다. 사회 구조로 인한 가난을 자신의 능력 부재 탓으로 돌리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사회는 결국 불행해 진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제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세계 경제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어요.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거예요. 신자유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국가 간 장벽의 높이를 낮추어 자본이 활동한 수 있는 '시장'이란 무대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넓혀야 한다는 발상을 담고 있어요.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시장은 크면 클수록 좋다.' 라고 말했어요. 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시장이 힘을 발휘한다는 거죠. 아담 스미스가 상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인 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시장', 바로 '지구적 시장 global market' 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가 요구하고 실행한 이런 발상을 우리는 '경제적 지구화'라고 표현해요. 이 지구화를 '세계화' 혹은 원래 용어 그대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on' 이라 부르기도 하죠.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잠시 짚어 볼게요. 첫째, '지구화'와 '경제적 지구화'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구화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세(p. 87)제가 연결되고 상호 의존하는 현상이에요.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는 고유한 작동 원리가 있죠. 각 영역이 온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같은 원칙 아래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경제적 지구화는 이 지구화라는 현상의 한 영역 일 뿐이죠, 다만 경제 영역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 지구화와 경제적 지구화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두 번째,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는 우리의 것을 밖으로 널리 알린다는 의미로 쓰이는데요, 이건 지구화와 사실상 전혀 다른 의미예요. 예를 들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한류는 우리의 것이 밖으로 퍼져 나가는 세계화의 일부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한류와 자신이 연결되는 현상'으로서 문화적 지구화 현상인 거예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이름 아래 지구화를 주도한 미국과 영국은, 경제 영역에서 모든 개인과 국가가 서로 의존하며 연결되는 지구화를 요구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경제적 지구화가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죠.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부당한 요구를 담은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좌파들은 '더 왼쪽' 노선을 주 장하며 맞섰지만 영국을 필두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죠. 점점 막강해진 자본은 자신들이 국적을 초월해 점점 더 강해질수록 국가도 같이 강해진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이제 개인들도 국가의 보호라는 우산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복지국가가 확장되며 국가가 져야 하는 재정적(p. 88) 부담이 늘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정말 강력한 것이었죠. 그리고 자본은 개인들을 향해서도, 국가에게 사회보장을 요구하는 대신 시장에서 판매하는 보험에 가입하라고, 그러면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보다 훨씬 더 양질의 서비스를 받게 될 거라고 설득했죠.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현상이 벌어져요. 그러니 유럽의 좌파들이 주장했던, '더 왼쪽' 노선 전략이 먹힐 수가 없었던 거죠. 이렇게 영국 총리 대처와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앞장서 초석을 놓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 불리며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버렸어요. 이런 흐름 앞에 좌파들조차 '제3의 길', '신노동당, '신 중도노선' 등 중도 개혁 노선을 내걸었죠(p. 89). 이렇게 시작해 볼까요? 앞에서 공유 플랫폼은 노동자들을 부업으로 일하는 독립 사업자로 여긴다고 했어요. 새로운 플랫폼 자본에게 부업과 '독립 사업자'는 마법의 단어예요. 이를 통해 '4대 보험'으로 상징되는, 기업이 고용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보호의 의무에서 간편하게 벗어날 수 있거든요. 플랫폼 분야의 종사자들은 일터에서 노동자로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독립 사업자' 즉, 사장님이에요. 반면 자신들은 중간에서 단순히 수수료(최대 20~30%)만 챙기는, 노동을 중개하는 업체에 불과하다는 게 이 공유 플랫폼 업체들의 주장이죠. 그런데, ‘유휴자산’, '부업', '독립 사업자'라는 이 마법의 단어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보호하던 전통적인 사회보장 혜택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아요. 플랫폼에서 일하는 이들이 마땅히 누려(p. 121)야 할 '노동자'라는 지위를 '사업자'라는 말 뒤에 교묘히 숨겨서, 이들이 노동조합 등을 만들어 행사할 수 있는 '노동 3권'까지 박탈해 버려요. 각자 모두 사장님들인데 무슨 노동 3권의 보호가 필 요하냐는 거죠. 이처럼 공유 경제가 채택한 용어들은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 연대의 감성과 행동을 공유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해 버리죠. 공유 경제의 플랫폼에서 실제로 공유되고 있는 건 '건당', '분당', '시간당'처럼 짧은 시간만 사용할 노동력이 필요한 이들과 '별점의 감시 아래 경쟁하며 상시 대기하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만남뿐이에요. 간단히 말해 보호가 필요한 곳에선 독립 사업자로, 작업이 필요한 곳에선 노동자로 남게 되는 거죠. 켄 로치 Ken Loach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는 이런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어요(p. 122). 그럼 디지털 기술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 우리 나라의 소득 불평등을 볼까요?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과 관련(p. 135)해서는 연구마다 다른 결과들을 내놓고 있어요. 어떤 연구는 불평등이 감소했다, 어떤 연구는 심해지고 있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이런 엇갈린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 이뤄지고 있는 소득 분배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인지 살펴보도록 하죠. 2019년 국세청은 '2017 귀속연도 통합소득(근로소득과 종합소득) 천분위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어요. 천분위 단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0.1%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였죠. 이 자료에 따르면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금융•임대 소득 등을 합친 통합소득 기준으로 상위 0.1%에 속하 는 2만 2,000여 명이 하위 27%에 속하는 629만 5,000명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만큼 버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들의 소득을 중간 계층과 비교하면, 상위 0.1%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4억 7,400만 원이었던 반면 중위 소득은 2,301만 원으로, 상위 0.1%가 중위 소득의 64배를 벌었어요. 소득이 가장 적은 계층이 아니라, 소득 수준에서 딱 가운데 즉, 50%에 해당하는 이보다 64배를 더 벌었다는 거예요. 어떤가요?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수치 인가요? 이런 소득 불평등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해요. 소득 불평등이 자산 불평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소득에서 쓰고 남는 돈이 있어야 투자를 해서 자산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어요? 쉽(p. 136)게 말해 저축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 거죠. 1년에 15억 원 가까이 버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10억 원 정도는 투자할 여유가 있을 거예요. 근데 앞서 본 중위 소득, 한 해에 2,301만 원 정도 버는 걸로는 평생 투자라는 결 할 수 없겠죠. 소득은 크게 '일해서 버는 소득'과 '투자해서 버는 소득' 즉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으로 나뉘는데 이 중 자본 소득이 커지면 자산 불평등이 심화돼요. 노동 소득이 일정 규모의 자산을 만들어 내면, 이 자산이 각종 투자의 형태로 불로소득을 만들어 내니까 부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물론 노동 소득 대신 유산을 물려 받아 일정 규모의 자산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죠.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에서 자본 소득이 자식에게 세습되는 현상이 당대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말하죠. 제2 기계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전형적인 불평등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어요.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 낸 '울트라리치'들 우리나라에서 연봉을 제일 많이 받는 월급쟁이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의 권오현 회장이에요. '초격차',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기술의 차이를 벌린다는 개념으로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죠. 2017년 그가 받은 연봉은 243억 8,100만 원이었다는군요. 월급으로 계산하면 20(p. 137)억 3,175만 원, 하루에 6,680만 원을 번 셈이에요. 상상이 잘 가지 않네요. 연봉만으로 이런 돈을 벌었다는 게 말이죠. 2014년에서 2016년까지 상장 기업 동기 임원의 보수를 분석해 보니 여기서도 권오현 회장이 1등이었다고 하는데, 5년간 연평균 124억 9,100만 원을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지구상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어요. 243억 원쯤이야 소위 껌 값에 불과한 사람들이죠. 우리 돈으로 치면 '조' 단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슈퍼리치super rich'라 불리는 이들이에요.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부자들을 '리치rich'라고 불렀어요. '백만장자'라고도 하는데 요즘 환율로 우리 돈 12억 원 정도가 그 기준이었죠. 그 뒤를 이어 '천만장자'들이 나타났고요. 근데 21세기에 들어서며 이 천만장자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람들, 이른바 '억만장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이들을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죠. 그렇게 탄생한 단어가 바로 슈퍼리치예요. 지금은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문서 프로그램들은 이를 '없는 용어', '잘못된 용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경제지라면 모두 슈퍼리치 섹션을 따로 두고 이들과 관련된 보도를 하고 있어요. 근데 슈퍼리치라(p.138)고 하면 이 말만으로는 감이 잘 안 오죠? 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슈퍼맨'을 떠올려 보는 거예요. 인간man 앞에 슈퍼super라는 접두어를 붙여 보세요. 영화에서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존재죠. 원래 이 지구에는 없던, 그런 존재예요. 음속보다 빨리 하늘을 날아다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내죠. 짝사랑하는 여인 '로이스'를 구하기 위해 지구의 회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요. 슈퍼리치들이 바로 그런 존재예요. 이전에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 인류가 탄생한 이래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트럼프 역시 이 슈퍼리치 중 한 명이죠. 그럼 이들이 얼마나 부자냐고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예요. 2019년에 이혼을 하며 그는 자신이 가진 아마존 지분의 25%를 전 부인에게 넘겼어요. 이 액수가 얼마쯤 될까요? 대략 375억 달러, 우리 돈으로 40조 6,000억 원 정도예요. 이게 얼마나 큰 규모냐고요? 뭐랑 비교해 볼까요? 이해하기 쉽게 서울 시 예산과 비교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2019년 서울시가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예산 규모는 39조 5,282억 원이었어요. 예산 안보다 더 많이 책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1년 동안 최대 이(p. 139)정도 쓰겠다는 거죠. 1,00만 명이 사는 도시의 한 해 예산이 40조 원이 채 안 되는데, 한 명의 슈퍼리치가 이혼하며 위자료로 넘긴 돈이 이보다 더 큰 거예요. 근데 이 돈이 베이조스가 가진 자산의 25%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요. 결국 계산해 보면 베이조스는 160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슈퍼리치라는 존재, 이제 조금 감이 오나요? 그래서일까요, 최근에는 이들을 부르는 용어가 또 생겼어요. '울트라리치 ultrarich' 이 정도면 이들은 이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 드네요(p. 140). 디지털 기술이 이렇게 독점적 경향을 띠는 건 정보가 만드는 네트워크 효과 즉,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큰 효용을 가지기 때문이에요. 네이버와 카카오톡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가 될 거에요. 네이버는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전체 검색량의 75.2%를 차지하고 있어요. 사실상 독점 체제나 다름없죠. 2018년 기준으로 카카오톡은 한국 메신저 시장의 95% 이상을 장악하고 있어요.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디지털 분야는 전형적인 '승자독식' 시장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모아 주는 정보는 '독점'을 만들어 내고 소비자의 기호를 더 잘 파악 할 수 있도록 해 계속해서 독점을 유지해 나가죠. 이런 까닭에 디지털 업계에서는 후발 주자들이 앞서가는 업체를 따라잡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경향을 고려하면, 또 다른 혁신적인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 기존의 강자들이 선두 자리를 한동안 굳건하게 지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죠(p. 143). 국가는 부유해졌는데 정부는 왜 가난해진 것일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공공 부문의 부가 민간 부문으로 대거 이전되는 현상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는 '민영화'라 부르죠. 많은 국가에서 전기, 교통, 의료, 교육 등과 같은 대규모 산업이 민간 부문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런 국가 기간산업을 민간이 차지하며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낸 거죠. 2000년대 들어 민영화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종의 트렌드였어요(p. 145).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철도, 의료, 공항, 수도 분야의 민영화가 추진된 적도 있지만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죠. 정말 다행이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산업들이 민영화되었어요. 한국담배인삼공사가 KT&G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KT로, 한국중공업이 두산중공업으로, 포항제철이 포스코로, 대한송유관공사와 고속도로관리공단도 같은 이름으로 민영화되었어요. 최근 우리나라에서 민영화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늘어난 건 민영화된 기업들이 그 효율성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죠.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사례 하나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모두 KT라는 통신 기업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KT는 2002년에 민영화한 이후 2014년까지 9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당기순이익을 냈어요. 그런데 그 이익을 어떻게 낸 줄 아세요? 세 차례에 걸친 사상 최대의 인적 구조 조정을 통해서였어요. 직원들을 잘랐다는 거죠. 그리곤 이렇게 벌어들인 돈(수익의 평균 50%)을 주로 외국인들이 주축인 주주들에게 배당했어요. 실제 금액을 보면 총(p. 146)배당금 4조 9,000억 원 중 외국인 주주가 가져간 돈은 2조 9,000 억 원에 달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여 챙긴 이익을 외국인들이 가져간 거예요. 이 기간 동안 KT 이사회의 의장은 모두 3차례에 걸쳐 미국인, 미국 국적의 한국계가 맡았어요. KT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민영화를 통해 기업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윤이 지배하는 결과만 남는 거죠. 이건 하나의 사례에 불과해요.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에 서는 '민영화=실패'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해요. 민영화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익을 얻는 방식 이란게, 지속적인 투자는 기피하면서 이용 요금만 올리는 식이에요.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은 공공이 운영할 때보다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고용 인원을 줄이는 것과 시설 투자를 최소화하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직원 수가 줄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이 향상되겠어요? 국가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공항이나 철도 같은 기간산업을 운영했던 이유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만 서비스의 질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일 철도가 민영화된다면, 기업은 이(p. 147)윤이 되는 노선만 남기고 그렇지 않은 노선은 당연히 없애 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결국 소외된 지역에 사는 이들은 더욱더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겠죠. 여기서 '왜 민영화된 기업이 시설 투자를 소홀히 하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네요. 그건 단기적 이익을 노리는 민간 주주를 때문이에요. 순이익이 발생할 때마다 민간 주주들에게 배당을 많이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래를 위한 시설 투자의 몫은 줄어들 수 밖에 없어요. 민간 주주들은 한 기업의 장기적 미래보다는 단기적으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수익에 집중하죠. 만약 자신이 투자하고 있는 기업에서 이익을 다 취했다고 생각하면 자금을 빼서 다른 곳에 투자하면 그만이니까요. 특히 이런 민간 주주들이 앞서 KT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외 투자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호주에 사는 민간 투자자가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한국의 기간 시설이 제공하는 서비스 질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니 시설 투자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p. 148).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권력을 빼앗아 갔다. 그 권력을 다시 찾아 돌려주겠다.'는 거예요. 이 시대의 좌파 포퓰리즘은 이 원칙 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 왔어요. 이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연대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죠.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제3의 집단을 설정해요. 여기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등이 포함되죠.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국 내 다수인 '우리, 평범한 사람들' 대신 이 '제3의 집단'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주장해요. 이들이 '평범한 우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 하다는 여론을 조장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거예요(p. 161). 쉽게 말해 사회의 최약층인 '더 배제된 자'를 이용해 평범한 이들로 구성된 '덜 배제된 자'들을 결집하는 방식이죠.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바로 이런 우파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에 기댄 대표적 사례예요(p. 162). 능력주의, 2020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 중 하나예요. 영어로는 '메리토크라시 meritcracy'라 부르는데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이 만든 용어죠. 라틴어의 meritum에서 온 meri(훌륭함)라는 말과, 그리스어의 kratia에서 유래한 cracy(통치) 라는 말을 조합해 만든 단어로, 글자 그대로 옮기면 '훌륭함이 통치하는 정치체제' 정도로 옮길 수 있겠네요. 1958년에 발간된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y』에서 이 표현이 처음 쓰였죠. 영에 따르면, 능력을 중시하는 발상은 신분 사회였던 산업혁명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p. 264) 신분을 넘어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려는 노력은 항상 있었죠. 세종 때 장영실 같은 인물이 바로 이 능력주의 때문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예죠. 그런데 왜 민주주의 시대에서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걸까요? 신분 말고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영이 도전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민주적 사회에서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르는 심연이 더욱 넓어지는 데도 왜 사회는 이토록 안정을 유지하는가?' 영의 대답은 명쾌해요. 지금의 이 불평등은 '능력에 따라 계층이 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유된 가치 아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을 유지 한다는 거예요.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라 여겨지죠. 그래서 개인의 실패를 두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탓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아요. 사회를 탓하려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은, 오히려 '능력 없는 자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아요.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침묵하게 되죠. 죽음을 택할 만큼 가난해도 사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착한 빈민들' 이야기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런 상황 앞에 영은 다시 질문을 던져요.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의 능력이(p. 265) 모자란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재화와 권력을 적게 할당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영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민주주의가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평범한 이들을 주권자로 내세우는 민주주의는 플라톤 시대부터 엘리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체제였어요. 그런데 왜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조차, 능력에 따라 자원과 권력을 할당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영은 이렇게 답해요.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란 모순을 비켜 가기 위해 작동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평등을 추구하는 사 회에서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하다. 혹은 제한되지 않는다.' 고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마땅한 자격을,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겐 저항 없이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더해, 영은 이런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 내고, 새롭게 등장한 계층 사이에 높은 벽을 만들어 결국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하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돼요. '아니 능력주의가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능력주의를 불평등의 해결책처럼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게 불평등을 만(p. 266)들어 내고 있다니 놀라울 수밖에요. 여기에 이르면 이런 의심도 들 것 같아요. '이런 주장은 마이클 영만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또 다른 예를 볼까요?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대니얼 마코 비츠Daniel Makovits 역시 『능력주의의 함정 The Meriocracy Trap』 (2019)에서, 당대의 불평등은 능력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해요. 그 또한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이 라는 마이클 영의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마코비츠는 1950~60년대 서구 사회에서 능력주의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주목하며, 이때 일어난 가장 큰 변화 하나를 지적해요. 바로 엘리트 계급이 자식에게 신분과 재산 대신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준다는 거예요. 우리가 엘리트라고 부르는 이들은 오랜 기간 교육을 받으며 능력을 갖춰 나가요. 일례로, 마코비츠는 미국을 건설할 당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이를 35세로 규정했음을 상기시키죠. 그런데 요즘엔 35세에도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그는 지적해요. 자신이 예일대에서 경험한 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건데, 저도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똑같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어요.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넘어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있는 실정이죠. 앞으로 엘리트가 되려면 박사 학위가 적어도 2개 정도는 필요하다는 농담이 현실이 되고 있어요. 당장 우리나라 만 봐도 3~4세에 조기교육을 시작하고 한글도 모르는 5~6살 아이들에게 영어로 글 쓰는 법을 가르치죠. 엘리트 부모들은 아이(p. 267)들의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자녀에게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주려 하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s』(2013), 번역하자면 '부로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책에서, 소수의 엘리트 부모들뿐만 아니라 중산층 부모들까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자녀들의 교육에 쏟아붓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왜 그럴까요? "대도시에서 상위 0.1%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산층 부모들이 엘리트 교육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서 유치원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향한 적자생존 투쟁이 시작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죠. 많은 연구, 통계 자료들도 교육이 주도하는 승자독식 체제에서는 18세에 해당하는 인구의 1%만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1% 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어요. 부모들이 이런 현실을 체감하며 살고 있기에 교육비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돈을 쏟아붓는다는 거예요. 결국 이런 현실 속에서 '능력'이란 것 또한 엘리트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세습되며 계층 이동을 가로막 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능력주의가 퍼져 나갈 때 민주주의 사회는 두 가지 문제를 마주하게 돼요(p. 268). 첫째, 중산층이 무너진다. 둘째, 혐오와 차별이 퍼지며 구성원들 간의 연대가 가로막힌다. 우선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문제부터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이미 디지털 기술 시대가 양극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저와 함께 살펴보았어요. 소수가 부와 소득, 명예를 독점하는 양극화 시대에 능력주의가 최상의 가치가 된다면, 소수의 능력 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부와 소득, 명예가 몰리게 되는 건 자명한 이치겠죠. 이건 결국 소득 수준이 20~80%에 속하는 중산층에게 부와 소득, 명예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아요. 앞에서 보았지만 우리나라의 하위 50%가 전체 부의 1.7%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50~80%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중산층일 수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민주주의의 기반은 중산층이잖아요. 상위계층에게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에서 최대한 성과를 얻고자 하는 자신들을 제약하려 드는 귀찮은 것일 수 있고, 하위계층은 먹고 살기 바빠 자유와 평등 같은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상대적으로 적죠. 이런 상황에서 능력주의가 중산층이 받아야 할 혜택을 줄이고 소수가 자원을 독점하는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된다면 당연히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도 위험해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더 큰 문제는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다수를 능력도 없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로 만들어,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전락시킨다는 점이에요. 마이(p. 269)클 영은 능력주의가 '지능(I.Q)+노력(effort)=능력(merit)'이라는 등식 아래, '개인이 지닌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성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라고 말해요. 언뜻 공정해 보이는 이 공식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있어요. '지능'이란 게 타고난 운에 좌우되는 유전적 요소와 관련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공정'을 말하며 능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이유는 '금수저' 나 '부모 찬스'같은 것들이 '출생'이라는 운에 좌우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다면 절반이 유전이라는 운에 좌우되는 능력주의는 이미 공정하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능력주의에 대한 주장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지능이라는 '유전적 요소'는 은연중에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노력'만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능력주의가 노력주의로 변신할 때,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죠. 결국 능력주의는 사회적 다수를 능력 없는 자들로 만들어 무기력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들로 취급하며 도덕적 수치심까지 안기는 거예요. 이를 두고 마이클 영은 이렇게 말해요. "능력을 결정적 요소로 보는 만연한 인식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는 다수가 무기력한 나락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학자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사회에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돌리게 되며, 결국 무기력해지면서(p. 270) 더더욱 확실하게 절망에 빠진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무기력과 자기혐오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공정하다고 말하는 능력주의의 실체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게 있어요. 바우만은 자기혐오를 두고 이렇게 말해요. '누구도 자신에 대한 분노를 끝까지 자기 안에 담아 둘 수는 없다. 그 분노는 바깥으로 분출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기혐오가 타자혐오로 이어진다는 거죠. 더 최악인 건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능력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연대 대신 능력 없는 자는 차별 받아도 괜찮다는 비뚤어진 의식을 키우고, 평범한 다수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그들이 수치심과 혐오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거죠. 이런 점에서 2001년, 토니 블레어가 '영국을 능력주의 사회로 만들자.'고 역설했을 때 『가디언』에 실린 마이클 영의 반응은 의미심장했어요. "비판의 의미로 만든 이 용어가 찬사의 말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실망스럽다." 영이 애초에 이 용어를 만들었던 의도가,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능력주의가 알고 보면 불평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블레어는 몰랐거나 무시했던 거죠. 우리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불평등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를 능력주의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p. 271)순이 아닐까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연대할 때 열리는 게 아닐까요? 코로나19라는 위기의 시대는 평범한 우리들에게 서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더욱 고립될 거예요. 디지털 장비들 을 사용할 돈이 없거나 그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이 순간에도 기업은 위기를 핑계 삼아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며 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동 현장에 내몰린 이들은 더욱더 소외되겠죠. 이런 환경이 지속되고 능력주의가 더 심하게 기승을 부린다면, 우리의 연대는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지금 우리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어요. 질병이 우리가 행동 할 수 없게 발목을 묶는다면 해결책은 제도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망을 세우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그 첫걸음이지 않을까요?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우리는 이미 첫 경험을 했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내 곁에 있는지 확인하려 하죠. 손 내미는 자와, 그 손길이 필요한 자는 한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제2 기계 시대가 그어 놓은 모호한 노동의 경계 위에서 각자도생의 윤리로 분열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라는 한 번(p. 272)도 겪어 보지 못한 거대한 위기 앞에, 국가가 동등하게 내미는 보호의 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위기의 시대엔 배제되는 자들이 더 늘어 날 수밖에 없어요. 비상구를 찾아 나가는 길에 어떤 이유로든 뒤에 남겨진 자들은 더 이상 동료 시민들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죠. 우리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불신으로 분열된 사람들 사이에, 동료 시민으로서 갖는 사회적 신뢰가 새롭게 재구성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보호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경계의 불확실성을 마주하며 대다수가 불안에 떠는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일 아닐까요? 이 일을 과연 능력주의가 해 낼 수 있을까요? 평범한 우리들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길은, 첫 번째도 연대, 두 번째도 연대, 세 번째도 연대가 아닐까요? 그런 연대가 가능하게 제도적 보호 장치를 만들고, 그 제도가 다시 연대를 강화해 나가는 선순환.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지라도, 우리가 내딛을 수 있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의 손을 맞잡는 '연대'일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 이웃들, 아이들을 떠올려 보세요. 사랑하는 이들에게 능력이란 덕목을 요구하는 대신, 보호라는 제도의 우산을 씌워 주세요. 그리고 그 우산 아래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퍼붓고 있는 이 시대의 위기들을 함께 견뎌 냈으면 해요. 어쩌면 우(p. 273)리의 어깨마저 비에 젖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차별 대신, 혐오 대신, 각자의 가슴속에 서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맞닿은 마음의 온기가 여러분을 지켜 줄 거라 믿어요. 이런 맘으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씁니다. '위기에 뒤로 남겨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라.'(p. 274)
  • 설교더보기 +

    신학더보기 +

    선교더보기 +

    포토에세이더보기 +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