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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칼넷 정기총회...조정희 목사 칼넷 전국대표 추대
- 제자훈련 목회자 네트워크 CAL-NET 2025년 정기총회가 12월 8일 오전 11시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 그레이스홀에서 열려 조정희 목사를 칼넷 전국대표, 고동훈 목사를 전국 부대표, 최상태 목사를 고문, 홍동필 목사를 자문, 이병철 목사를 신임 지역대표, 13명을 지역총무로 추대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CAL-NET(Called to Awaken the Laity-Network, 제자훈련 목회자 네트워크)는 1999년 1월에 열렸던 "제1회 제자훈련 지도자 컨벤션"에서 결성된 제자훈련 지도자들의 전국 네트워크다. 故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철학에 동의하고 한 사람 철학으로 목회하는 칼세미나 수료자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처음 태동되었으며, "한 영혼"을 깨워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키우라! "한 성령" 안에서 "한 교회"됨으로 서로를 돌보아 연합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라! 가 비전이다. 이사장 오정호 목사가 “오늘 오신 모든 회원들을 환영한다. 대전에서 모이는 것이 교통이 편리해 새로남교회에서 모이게 됐다. 오신 분들에게 교회 서점에 있는 책과 팬시 용품 등을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다.”라고 환영 인사말했다. 칼넷 신임 대표 조정희 목사가 “그동안 칼넷을 통해 저와 아내가 목회에 많은 힘을 얻었는데, 회원들에게 힘이 되는 칼넷 모임이 되도록 잘 섬기겠다.”라고 대표 취임사했다. 1부 예배는 칼넷 전국대표 김종원 목사의 인도로 칼넷 이사 임종구 목사가 기도 후 다같이 딤후 4:7-8을 봉독했다. 총신대학 박성규 총장이 ‘어떤 목사로 남을 것인가?’란 제목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에는 룰이 있다. 믿음의 룰을 따라야 한다. 바울은 승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했다. 의로운 일을 하는 자에게 주신다. 우리는 어떤 목사로 남아야 하는가? 연말을 맞아 우리 사역의 종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주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칼넷 사무총장 조성민 목사의 광고 후 칼넷 이사 최상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는 칼넷 이사장 오정호 목사의 사회로 오주환 목사가 기도, 회원 호명 후 개회해 칼넷 전국대표, 전국 부대표, 고문, 자문, 지역대표, 지역총무 추대의 건과 2025년 결산보고 및 2026년 예산보고의 건, 2025년 감사 소견 발표 후 마무리했다. 신임 지역 총무에게 추대패 전달 3부 칼넷 추대패 전달식은 칼넷 사무총장 조성민 목사의 사회로 오정호 이사장이 전 칼넷 전국대표 김종원 목사에게 감사패 전달, 칼넷 전국대표, 전국부대표, 고문, 자문, 지역 대표, 지역 총무에게 추대패를 전달했다. 새로남교회 조예송 성도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축하공연 후 신임대표 조정희 목사가 섬기는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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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식 GMS이사장·진주성남교회, 2026년에도 선교헌신
- 선교에 앞장서는 진주성남교회(양대식 GMS이사장 시무) 선교위원회가 지난 선교사역을 돌아보며 다가오는 2026년 새해에 더 선교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고 독려하는 선교 노래를 만들어 화제다. 총 1분 23초 분량의 노래는 진주성남교회가 101년 전 알렌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 현재 13 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 담임 양대식 목사가 GMS이사장이 되고 그동안 32권의 책을 저술한 것을 언급하고 이어 파송 선교사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2026년에도 양대식 담임목사의 말처럼 “쉽고 행복한 선교”에 다같이 동참할 것을 담고 있다. 짧고 경쾌한 노래에 진주성남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담겨있다. 가사처럼 2026년에도 선교의 큰 사역을 감당하기를 기대해 본다. 가사와 사진들 알렌 선교사에 의해 101년 전 설립된 진주 성남교회 13가정의 선교사를 세개 각국에 파송하여 선교하고 있습니다. GMS 이사장을 배출하여 선교행정과 문서 사역에도 힘을 쓰는 진주성남교회 우리 성도들의 후원과 협력으로 2025년을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이명희 선교사, 인도 김태숙 선교사, V국 안드레 김루디아 선교사, M국 김영욱 제유란 선교사, 일본 김용민 최상옥 선교사, P국 이갈렙 박사랑 선교사, 캄보디아 최도연 배경연 선교사, 필리핀A 김동철 정복희 선교사, 영어사역 스캇 라빈슨 다이안 라빈슨 선교사, 필리핀B 김제선 이연옥 선교사, N국 서산 장강 선교사, 국내다문화 김태영 최은혜 선교사, 몰도바 황진우 박성은 선교사. "선교는 쉽고 행복합니다". 2026년에도 함께 선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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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 은혜로운 제17회 정기연주회
-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단장 지동빈 장로)가 제17회 정기연주회를 12월 6일 오후 3시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에서 가졌다. 이번 정기연주회는 인도네시아(땅그랑) 꿈나무학교에 장학금을 후원하는 목적도 있으며 사랑의교회, 장로신문사, 전국장로성가합창단협회가 후원했다. 강변교회 오인환 목사가 기도 후 단장 지동빈 장로(강변교회)가 “정기연주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참석하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오늘은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장학금 후원을 위한 연주회이기도 하다.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는 34년 전에 창단되어 격년제로 국내와 해외에서 연주회를 갖고 있다. 오늘 정기연주회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오신 분들에게는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하모니의 찬양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할렐루야!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심이니이다(시 59:17). 창단 35주년을 맞이하여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가 제17회 정기 연주회를 개최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매주 화요일 새벽 6시 사랑의 교회에 모여서 찬양연습을 하면서 이번 17회 정기연주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은혜의 찬양을 준비하며 열심히 연습하신 우리 장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주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드리기를 원하며 오늘 찬양을 드리는 장로님들과 오늘 연주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동을 주는 은혜의 찬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연주회에 특별히 찬조 출연 해주신 GOOD TV 권사 찬양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주회는 특별히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장학금 후원을 위한 연주회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으로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후원 부탁드립니다. 연주회를 위하여 수고하신 지휘자와 반주자, 그리고 모든 장로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프로그램 합창 • 주께 찬양드림이 선하도다(Joseph M. Martin) • 믿음으로 주 따르리(Don Besig) • 찬양의 삶(Pepper Choplin) 중창 • 새롭게 변화되어(Mosie Lister. arr. Kamp Kirkland) 듀엣/tenor 김정복 장로 bass 정관종 장로 • 사랑의 주님(Joseph M. Martin) 합창 • 은혜의 강가로(오성주 arr. 김준범) • 보혈을 지나(김도훈 arr. 정한결) •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Douglas Nolan) 찬조 | GOOD TV 기독교복음방송 권사합창단 • 지휘자: 이광석 • 반주자: 홍아라 • 하나님께 찬양드리세(Edwin Willmington) • I will folow Him(작사: Norman Gimbel 작곡: Franck Pourcel) 합창 • 깨뜨린 옥합(김석균 arr. 이현철) • 하나님의 전신갑주(이근호) • 주님나라 이루게 하소서(김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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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교총 제9회 총회개최, 신임 대표회장에 김정석 감독회장 추대
-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은 2025년 12월 4일(목)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글로리아홀에서 제9회 총회를 갖고 대표회장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김정석 감독회장을, 공동대표회장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 총회장 김동기 목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홍사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총회장 정정인 목사를 추대했다. 사무총장으로는 김철훈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가 신임 취임했으며, 법인사무총장에는 정찬수 목사(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연임됐다. 제9회 총회에 보고된 주요 사업으로는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사업’과 ‘종교문화자원 보존을 위한 근현대문화유산법 개정 추진’, ‘포괄적 차별금지법(일명 평등법) 제정 반대, 건강가정기본법, 사립학교법 개정 등 법제화 대응 활동’, ‘통일 관련 및 동북아 교회 협력사업’, ‘다음세대 공감호도 : 근대문화유산 탐방 축제’를 전개하며, 전문인초청 문화유산 탐방, 기후환경 보전 사업과 저출생 극복을 위한 사업, 우리마을 공감음악회, 평화음악회, 부활절 퍼레이드, 다문화합창대회 등을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이번 총회에서 제8회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직전총회장)는 설교를 통해 “오늘 이 자리는 한국교회 하나됨을 확인하는 자리이자 함께 나아가는 영적 결단의 자리이다. 하나님께서 한교총을 이루게 하신 이유는 이 시대가 연합없이는 결코 버텨낼 수 없는 위기의 시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합의 영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연합의 힘을 드러내자. 연합의 힘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이자 복음의 문을 여는 결정적 통로이며, 한교총의 선언이다”라고 설교했다. 이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 국회조찬기도회 회장 송기헌 의원은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이 10대 강국에 서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힘이 컸으며, 지난 1년 동안 국가가 어려울 때 한교총이 중심을 잡아줘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발전하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조언을 잘 듣고, 많은 역할을 감당하겠다. 한교총 제9회 정기총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라고 했다. 한편 지난 18권의 선교사 전기에 이어 ‘제임스 게일과 함께한 마지막 식사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 ‘복음을 따라 한국을 섬기다 : 헐버트 선교사 전기’, ‘오순절 신앙으로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된 체스넛 선교사’ 이상 3명의 선교사 전기를 출판하였음을 보고했다. 이밖에도 CTS기독교TV 회장으로서 지난 30년간 복음 방송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 헌신한 감경철 회장을 표창했고, 한일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서 역할을 감당한 요시다 선교사와 역사적인 교회와 유적을 소개하여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에게 공로패를 증정했으며, 굿피플, 한국교회세무재정연합 등 20개 협력 기관의 기관장들이 초청되어 축하했다. 제9회 대표회장에 취임한 김정석 감독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한교총의 중요한 역할은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복음전파에 추진력을 더하는 것”이라며, “교회의 제1사명은 복음전파에 있기 때문이며, 한국교회가 복음 안에서 개인의 저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묶어내는 역할이 한교총의 존재 이유”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짧은 1년의 임기지만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연합하는 일에 힘쓸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고 십자가의 은총으로 화목을 이루도록 통합과 화합의 길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취임사를 전했다. 한교총은 제9회 총회를 마무리하며 제8회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공동대표회장 김영걸 목사, 이 욥 목사, 박병선 목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고, 지난 8년 동안 한교총을 섬겨 온 신평식 사무총장은 임기만료로 이임했다. 또한 한교총은 총회에서 ▲ 한국교회의 연합과 지속가능한 부흥, ▲ 대한민국 초갈등 사회 극복을 위한 국론통합, ▲ 무속 행위 확산과 창조 질서에 반하는 법제화 반대, ▲ 한반도 복음적 평화통일과 생명존중 문화 확산, ▲ 근대 문화유산 보존 등 공적 책임을 위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결의문과 취임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9회 총회 결의문 한국교회는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의 어두운 역사의 고비마다 복음의 빛과 열방을 향한 영광스러운 소명을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제9회 총회를 개최하며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우리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가치로 교회의 세속화를 배격하며, 다음 세대 부흥과 선교의 지평을 확장하므로, 한국교회의 지속 가능한 부흥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치적ㆍ경제적 양극화와 극단적 혐오와 분열을 깊이 우려하며, 초갈등 사회 극복을 위해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조성하고, 국론 통합을 위해 힘쓸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건강한 사회를 기만하는 무속 행위의 확산을 단호히 거부하고, 창조 질서에 따른 생태 환경을 보존하며, 비성경적 입장을 강제하는 법제화에 반대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데 힘쓸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전쟁 종식과 한반도의 복음적 평화통일 실현을 위해 기도하며, 동북아 교회 교류와 통일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낙태와 자살 방지, 저출산 위기 극복 등 생명존중 문화 실현에 전력하며, 근대 문화유산 보존을 통한 민족 문화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공적 책임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 2025년 12월 4일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 제9회 총회 대의원 일동 한교총 제9기 대표회장 취임사 한교총 제9기 대표회장에 취임하면서 감사의 마음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를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잘 감당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한교총을 잘 이끌어주신 역대 대표회장님들의 고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향해 함께가는 한교총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복음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개신교의 근간이 되는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을 생각해 봅니다. ‘오직 성경말씀’(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으로써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시 복음의 능력으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토대에서 기도의 영성을 회복함으로써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한교총의 중요한 역할은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복음전파에 추진력을 더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제1사명은 복음전파에 있기 때문이며, 한국교회가 복음 안에서 개인의 저력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묶어내는 역할이 한교총의 존재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짧은 1년의 임기지만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연합하는 일에 힘쓸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고 십자가의 은총으로 화목을 이루도록 통합과 화합의 길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회원 교단의 대의원들과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12월 4일 대표회장 김정석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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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 대다수는 앞으로 더 가난해 질 것이다...남의 일이 아니다
-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가난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일부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 구도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로 없는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 세상이 됐다. 사회 구조로 인한 가난을 자신의 능력 부재 탓으로 돌리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사회는 결국 불행해 진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제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세계 경제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어요.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거예요. 신자유주의는 경제 영역에서 국가 간 장벽의 높이를 낮추어 자본이 활동한 수 있는 '시장'이란 무대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넓혀야 한다는 발상을 담고 있어요.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시장은 크면 클수록 좋다.' 라고 말했어요. 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시장이 힘을 발휘한다는 거죠. 아담 스미스가 상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인 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시장', 바로 '지구적 시장 global market' 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가 요구하고 실행한 이런 발상을 우리는 '경제적 지구화'라고 표현해요. 이 지구화를 '세계화' 혹은 원래 용어 그대로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on' 이라 부르기도 하죠.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 두 가지를 잠시 짚어 볼게요. 첫째, '지구화'와 '경제적 지구화'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구화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세(p. 87)제가 연결되고 상호 의존하는 현상이에요.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는 고유한 작동 원리가 있죠. 각 영역이 온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같은 원칙 아래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경제적 지구화는 이 지구화라는 현상의 한 영역 일 뿐이죠, 다만 경제 영역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 지구화와 경제적 지구화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두 번째,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는 우리의 것을 밖으로 널리 알린다는 의미로 쓰이는데요, 이건 지구화와 사실상 전혀 다른 의미예요. 예를 들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한류는 우리의 것이 밖으로 퍼져 나가는 세계화의 일부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한류와 자신이 연결되는 현상'으로서 문화적 지구화 현상인 거예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라는 이름 아래 지구화를 주도한 미국과 영국은, 경제 영역에서 모든 개인과 국가가 서로 의존하며 연결되는 지구화를 요구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경제적 지구화가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죠.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부당한 요구를 담은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좌파들은 '더 왼쪽' 노선을 주 장하며 맞섰지만 영국을 필두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죠. 점점 막강해진 자본은 자신들이 국적을 초월해 점점 더 강해질수록 국가도 같이 강해진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이제 개인들도 국가의 보호라는 우산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복지국가가 확장되며 국가가 져야 하는 재정적(p. 88) 부담이 늘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정말 강력한 것이었죠. 그리고 자본은 개인들을 향해서도, 국가에게 사회보장을 요구하는 대신 시장에서 판매하는 보험에 가입하라고, 그러면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보다 훨씬 더 양질의 서비스를 받게 될 거라고 설득했죠.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현상이 벌어져요. 그러니 유럽의 좌파들이 주장했던, '더 왼쪽' 노선 전략이 먹힐 수가 없었던 거죠. 이렇게 영국 총리 대처와 미국 대통령 레이건이 앞장서 초석을 놓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 불리며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버렸어요. 이런 흐름 앞에 좌파들조차 '제3의 길', '신노동당, '신 중도노선' 등 중도 개혁 노선을 내걸었죠(p. 89). 이렇게 시작해 볼까요? 앞에서 공유 플랫폼은 노동자들을 부업으로 일하는 독립 사업자로 여긴다고 했어요. 새로운 플랫폼 자본에게 부업과 '독립 사업자'는 마법의 단어예요. 이를 통해 '4대 보험'으로 상징되는, 기업이 고용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보호의 의무에서 간편하게 벗어날 수 있거든요. 플랫폼 분야의 종사자들은 일터에서 노동자로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독립 사업자' 즉, 사장님이에요. 반면 자신들은 중간에서 단순히 수수료(최대 20~30%)만 챙기는, 노동을 중개하는 업체에 불과하다는 게 이 공유 플랫폼 업체들의 주장이죠. 그런데, ‘유휴자산’, '부업', '독립 사업자'라는 이 마법의 단어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보호하던 전통적인 사회보장 혜택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아요. 플랫폼에서 일하는 이들이 마땅히 누려(p. 121)야 할 '노동자'라는 지위를 '사업자'라는 말 뒤에 교묘히 숨겨서, 이들이 노동조합 등을 만들어 행사할 수 있는 '노동 3권'까지 박탈해 버려요. 각자 모두 사장님들인데 무슨 노동 3권의 보호가 필 요하냐는 거죠. 이처럼 공유 경제가 채택한 용어들은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 연대의 감성과 행동을 공유할 수 없도록 사전에 차단해 버리죠. 공유 경제의 플랫폼에서 실제로 공유되고 있는 건 '건당', '분당', '시간당'처럼 짧은 시간만 사용할 노동력이 필요한 이들과 '별점의 감시 아래 경쟁하며 상시 대기하고 있는 노동력'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만남뿐이에요. 간단히 말해 보호가 필요한 곳에선 독립 사업자로, 작업이 필요한 곳에선 노동자로 남게 되는 거죠. 켄 로치 Ken Loach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는 이런 상황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어요(p. 122). 그럼 디지털 기술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 우리 나라의 소득 불평등을 볼까요?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과 관련(p. 135)해서는 연구마다 다른 결과들을 내놓고 있어요. 어떤 연구는 불평등이 감소했다, 어떤 연구는 심해지고 있다고 말하죠. 그렇다면 이런 엇갈린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 이뤄지고 있는 소득 분배가 받아들일 만한 수준인지 살펴보도록 하죠. 2019년 국세청은 '2017 귀속연도 통합소득(근로소득과 종합소득) 천분위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어요. 천분위 단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0.1%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였죠. 이 자료에 따르면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금융•임대 소득 등을 합친 통합소득 기준으로 상위 0.1%에 속하 는 2만 2,000여 명이 하위 27%에 속하는 629만 5,000명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만큼 버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이들의 소득을 중간 계층과 비교하면, 상위 0.1%의 1인당 평균 소득은 14억 7,400만 원이었던 반면 중위 소득은 2,301만 원으로, 상위 0.1%가 중위 소득의 64배를 벌었어요. 소득이 가장 적은 계층이 아니라, 소득 수준에서 딱 가운데 즉, 50%에 해당하는 이보다 64배를 더 벌었다는 거예요. 어떤가요?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수치 인가요? 이런 소득 불평등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해요. 소득 불평등이 자산 불평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소득에서 쓰고 남는 돈이 있어야 투자를 해서 자산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어요? 쉽(p. 136)게 말해 저축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 거죠. 1년에 15억 원 가까이 버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10억 원 정도는 투자할 여유가 있을 거예요. 근데 앞서 본 중위 소득, 한 해에 2,301만 원 정도 버는 걸로는 평생 투자라는 결 할 수 없겠죠. 소득은 크게 '일해서 버는 소득'과 '투자해서 버는 소득' 즉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으로 나뉘는데 이 중 자본 소득이 커지면 자산 불평등이 심화돼요. 노동 소득이 일정 규모의 자산을 만들어 내면, 이 자산이 각종 투자의 형태로 불로소득을 만들어 내니까 부의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물론 노동 소득 대신 유산을 물려 받아 일정 규모의 자산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죠.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에서 자본 소득이 자식에게 세습되는 현상이 당대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말하죠. 제2 기계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전형적인 불평등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어요.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 낸 '울트라리치'들 우리나라에서 연봉을 제일 많이 받는 월급쟁이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의 권오현 회장이에요. '초격차',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기술의 차이를 벌린다는 개념으로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죠. 2017년 그가 받은 연봉은 243억 8,100만 원이었다는군요. 월급으로 계산하면 20(p. 137)억 3,175만 원, 하루에 6,680만 원을 번 셈이에요. 상상이 잘 가지 않네요. 연봉만으로 이런 돈을 벌었다는 게 말이죠. 2014년에서 2016년까지 상장 기업 동기 임원의 보수를 분석해 보니 여기서도 권오현 회장이 1등이었다고 하는데, 5년간 연평균 124억 9,100만 원을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지구상엔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어요. 243억 원쯤이야 소위 껌 값에 불과한 사람들이죠. 우리 돈으로 치면 '조' 단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슈퍼리치super rich'라 불리는 이들이에요.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부자들을 '리치rich'라고 불렀어요. '백만장자'라고도 하는데 요즘 환율로 우리 돈 12억 원 정도가 그 기준이었죠. 그 뒤를 이어 '천만장자'들이 나타났고요. 근데 21세기에 들어서며 이 천만장자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람들, 이른바 '억만장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이들을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죠. 그렇게 탄생한 단어가 바로 슈퍼리치예요. 지금은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문서 프로그램들은 이를 '없는 용어', '잘못된 용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경제지라면 모두 슈퍼리치 섹션을 따로 두고 이들과 관련된 보도를 하고 있어요. 근데 슈퍼리치라(p.138)고 하면 이 말만으로는 감이 잘 안 오죠? 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슈퍼맨'을 떠올려 보는 거예요. 인간man 앞에 슈퍼super라는 접두어를 붙여 보세요. 영화에서 슈퍼맨은 외계에서 온 존재죠. 원래 이 지구에는 없던, 그런 존재예요. 음속보다 빨리 하늘을 날아다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내죠. 짝사랑하는 여인 '로이스'를 구하기 위해 지구의 회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요. 슈퍼리치들이 바로 그런 존재예요. 이전에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 인류가 탄생한 이래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이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트럼프 역시 이 슈퍼리치 중 한 명이죠. 그럼 이들이 얼마나 부자냐고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예요. 2019년에 이혼을 하며 그는 자신이 가진 아마존 지분의 25%를 전 부인에게 넘겼어요. 이 액수가 얼마쯤 될까요? 대략 375억 달러, 우리 돈으로 40조 6,000억 원 정도예요. 이게 얼마나 큰 규모냐고요? 뭐랑 비교해 볼까요? 이해하기 쉽게 서울 시 예산과 비교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2019년 서울시가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예산 규모는 39조 5,282억 원이었어요. 예산 안보다 더 많이 책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1년 동안 최대 이(p. 139)정도 쓰겠다는 거죠. 1,00만 명이 사는 도시의 한 해 예산이 40조 원이 채 안 되는데, 한 명의 슈퍼리치가 이혼하며 위자료로 넘긴 돈이 이보다 더 큰 거예요. 근데 이 돈이 베이조스가 가진 자산의 25%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요. 결국 계산해 보면 베이조스는 160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슈퍼리치라는 존재, 이제 조금 감이 오나요? 그래서일까요, 최근에는 이들을 부르는 용어가 또 생겼어요. '울트라리치 ultrarich' 이 정도면 이들은 이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 드네요(p. 140). 디지털 기술이 이렇게 독점적 경향을 띠는 건 정보가 만드는 네트워크 효과 즉,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큰 효용을 가지기 때문이에요. 네이버와 카카오톡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가 될 거에요. 네이버는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전체 검색량의 75.2%를 차지하고 있어요. 사실상 독점 체제나 다름없죠. 2018년 기준으로 카카오톡은 한국 메신저 시장의 95% 이상을 장악하고 있어요.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디지털 분야는 전형적인 '승자독식' 시장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모아 주는 정보는 '독점'을 만들어 내고 소비자의 기호를 더 잘 파악 할 수 있도록 해 계속해서 독점을 유지해 나가죠. 이런 까닭에 디지털 업계에서는 후발 주자들이 앞서가는 업체를 따라잡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경향을 고려하면, 또 다른 혁신적인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 기존의 강자들이 선두 자리를 한동안 굳건하게 지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죠(p. 143). 국가는 부유해졌는데 정부는 왜 가난해진 것일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공공 부문의 부가 민간 부문으로 대거 이전되는 현상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는 '민영화'라 부르죠. 많은 국가에서 전기, 교통, 의료, 교육 등과 같은 대규모 산업이 민간 부문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런 국가 기간산업을 민간이 차지하며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낸 거죠. 2000년대 들어 민영화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종의 트렌드였어요(p. 145).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철도, 의료, 공항, 수도 분야의 민영화가 추진된 적도 있지만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죠. 정말 다행이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산업들이 민영화되었어요. 한국담배인삼공사가 KT&G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KT로, 한국중공업이 두산중공업으로, 포항제철이 포스코로, 대한송유관공사와 고속도로관리공단도 같은 이름으로 민영화되었어요. 최근 우리나라에서 민영화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늘어난 건 민영화된 기업들이 그 효율성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죠.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사례 하나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모두 KT라는 통신 기업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KT는 2002년에 민영화한 이후 2014년까지 9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당기순이익을 냈어요. 그런데 그 이익을 어떻게 낸 줄 아세요? 세 차례에 걸친 사상 최대의 인적 구조 조정을 통해서였어요. 직원들을 잘랐다는 거죠. 그리곤 이렇게 벌어들인 돈(수익의 평균 50%)을 주로 외국인들이 주축인 주주들에게 배당했어요. 실제 금액을 보면 총(p. 146)배당금 4조 9,000억 원 중 외국인 주주가 가져간 돈은 2조 9,000 억 원에 달해요.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여 챙긴 이익을 외국인들이 가져간 거예요. 이 기간 동안 KT 이사회의 의장은 모두 3차례에 걸쳐 미국인, 미국 국적의 한국계가 맡았어요. KT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민영화를 통해 기업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이윤이 지배하는 결과만 남는 거죠. 이건 하나의 사례에 불과해요.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에 서는 '민영화=실패'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해요. 민영화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익을 얻는 방식 이란게, 지속적인 투자는 기피하면서 이용 요금만 올리는 식이에요.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은 공공이 운영할 때보다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고용 인원을 줄이는 것과 시설 투자를 최소화하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직원 수가 줄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이 향상되겠어요? 국가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공항이나 철도 같은 기간산업을 운영했던 이유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만 서비스의 질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일 철도가 민영화된다면, 기업은 이(p. 147)윤이 되는 노선만 남기고 그렇지 않은 노선은 당연히 없애 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결국 소외된 지역에 사는 이들은 더욱더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겠죠. 여기서 '왜 민영화된 기업이 시설 투자를 소홀히 하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네요. 그건 단기적 이익을 노리는 민간 주주를 때문이에요. 순이익이 발생할 때마다 민간 주주들에게 배당을 많이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미래를 위한 시설 투자의 몫은 줄어들 수 밖에 없어요. 민간 주주들은 한 기업의 장기적 미래보다는 단기적으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수익에 집중하죠. 만약 자신이 투자하고 있는 기업에서 이익을 다 취했다고 생각하면 자금을 빼서 다른 곳에 투자하면 그만이니까요. 특히 이런 민간 주주들이 앞서 KT의 사례에서 보듯이 해외 투자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호주에 사는 민간 투자자가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한국의 기간 시설이 제공하는 서비스 질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니 시설 투자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p. 148).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포퓰리즘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권력을 빼앗아 갔다. 그 권력을 다시 찾아 돌려주겠다.'는 거예요. 이 시대의 좌파 포퓰리즘은 이 원칙 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 왔어요. 이들은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연대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죠.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제3의 집단을 설정해요. 여기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등이 포함되죠.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국 내 다수인 '우리, 평범한 사람들' 대신 이 '제3의 집단'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주장해요. 이들이 '평범한 우리'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 하다는 여론을 조장해 지지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거예요(p. 161). 쉽게 말해 사회의 최약층인 '더 배제된 자'를 이용해 평범한 이들로 구성된 '덜 배제된 자'들을 결집하는 방식이죠.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바로 이런 우파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에 기댄 대표적 사례예요(p. 162). 능력주의, 2020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 중 하나예요. 영어로는 '메리토크라시 meritcracy'라 부르는데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이 만든 용어죠. 라틴어의 meritum에서 온 meri(훌륭함)라는 말과, 그리스어의 kratia에서 유래한 cracy(통치) 라는 말을 조합해 만든 단어로, 글자 그대로 옮기면 '훌륭함이 통치하는 정치체제' 정도로 옮길 수 있겠네요. 1958년에 발간된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y』에서 이 표현이 처음 쓰였죠. 영에 따르면, 능력을 중시하는 발상은 신분 사회였던 산업혁명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p. 264) 신분을 넘어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려는 노력은 항상 있었죠. 세종 때 장영실 같은 인물이 바로 이 능력주의 때문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예죠. 그런데 왜 민주주의 시대에서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걸까요? 신분 말고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영이 도전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민주적 사회에서 '하층계급과 상층계급을 가르는 심연이 더욱 넓어지는 데도 왜 사회는 이토록 안정을 유지하는가?' 영의 대답은 명쾌해요. 지금의 이 불평등은 '능력에 따라 계층이 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유된 가치 아래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을 유지 한다는 거예요.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라 여겨지죠. 그래서 개인의 실패를 두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탓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아요. 사회를 탓하려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일은, 오히려 '능력 없는 자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아요.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침묵하게 되죠. 죽음을 택할 만큼 가난해도 사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착한 빈민들' 이야기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런 상황 앞에 영은 다시 질문을 던져요.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의 능력이(p. 265) 모자란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재화와 권력을 적게 할당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영의 문제 제기는 일리가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 보면, '평범한 사람들'이 엘리트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민주주의가 정당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평범한 이들을 주권자로 내세우는 민주주의는 플라톤 시대부터 엘리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체제였어요. 그런데 왜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조차, 능력에 따라 자원과 권력을 할당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영은 이렇게 답해요. '능력주의란 평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골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불평등이란 모순을 비켜 가기 위해 작동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평등을 추구하는 사 회에서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정당하다. 혹은 제한되지 않는다.' 고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마땅한 자격을, 권력 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겐 저항 없이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더해, 영은 이런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 내고, 새롭게 등장한 계층 사이에 높은 벽을 만들어 결국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하죠.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깜짝 놀라게 돼요. '아니 능력주의가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능력주의를 불평등의 해결책처럼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게 불평등을 만(p. 266)들어 내고 있다니 놀라울 수밖에요. 여기에 이르면 이런 의심도 들 것 같아요. '이런 주장은 마이클 영만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또 다른 예를 볼까요?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대니얼 마코 비츠Daniel Makovits 역시 『능력주의의 함정 The Meriocracy Trap』 (2019)에서, 당대의 불평등은 능력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해요. 그 또한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이 라는 마이클 영의 주장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마코비츠는 1950~60년대 서구 사회에서 능력주의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주목하며, 이때 일어난 가장 큰 변화 하나를 지적해요. 바로 엘리트 계급이 자식에게 신분과 재산 대신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준다는 거예요. 우리가 엘리트라고 부르는 이들은 오랜 기간 교육을 받으며 능력을 갖춰 나가요. 일례로, 마코비츠는 미국을 건설할 당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이를 35세로 규정했음을 상기시키죠. 그런데 요즘엔 35세에도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그는 지적해요. 자신이 예일대에서 경험한 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건데, 저도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똑같은 현상을 목격하고 있어요. 수많은 학생들이 대학 교육을 넘어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있는 실정이죠. 앞으로 엘리트가 되려면 박사 학위가 적어도 2개 정도는 필요하다는 농담이 현실이 되고 있어요. 당장 우리나라 만 봐도 3~4세에 조기교육을 시작하고 한글도 모르는 5~6살 아이들에게 영어로 글 쓰는 법을 가르치죠. 엘리트 부모들은 아이(p. 267)들의 교육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자녀에게 능력을 '만들어서' 물려주려 하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s』(2013), 번역하자면 '부로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책에서, 소수의 엘리트 부모들뿐만 아니라 중산층 부모들까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자녀들의 교육에 쏟아붓고 있다고 이야기해요. 왜 그럴까요? "대도시에서 상위 0.1%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산층 부모들이 엘리트 교육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서 유치원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향한 적자생존 투쟁이 시작되는 건 바로 이 때문이죠. 많은 연구, 통계 자료들도 교육이 주도하는 승자독식 체제에서는 18세에 해당하는 인구의 1%만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1% 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어요. 부모들이 이런 현실을 체감하며 살고 있기에 교육비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돈을 쏟아붓는다는 거예요. 결국 이런 현실 속에서 '능력'이란 것 또한 엘리트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세습되며 계층 이동을 가로막 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능력주의가 퍼져 나갈 때 민주주의 사회는 두 가지 문제를 마주하게 돼요(p. 268). 첫째, 중산층이 무너진다. 둘째, 혐오와 차별이 퍼지며 구성원들 간의 연대가 가로막힌다. 우선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 문제부터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이미 디지털 기술 시대가 양극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저와 함께 살펴보았어요. 소수가 부와 소득, 명예를 독점하는 양극화 시대에 능력주의가 최상의 가치가 된다면, 소수의 능력 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부와 소득, 명예가 몰리게 되는 건 자명한 이치겠죠. 이건 결국 소득 수준이 20~80%에 속하는 중산층에게 부와 소득, 명예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아요. 앞에서 보았지만 우리나라의 하위 50%가 전체 부의 1.7%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50~80%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중산층일 수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민주주의의 기반은 중산층이잖아요. 상위계층에게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에서 최대한 성과를 얻고자 하는 자신들을 제약하려 드는 귀찮은 것일 수 있고, 하위계층은 먹고 살기 바빠 자유와 평등 같은 사회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 상대적으로 적죠. 이런 상황에서 능력주의가 중산층이 받아야 할 혜택을 줄이고 소수가 자원을 독점하는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된다면 당연히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도 위험해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더 큰 문제는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다수를 능력도 없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자들로 만들어,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전락시킨다는 점이에요. 마이(p. 269)클 영은 능력주의가 '지능(I.Q)+노력(effort)=능력(merit)'이라는 등식 아래, '개인이 지닌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성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라고 말해요. 언뜻 공정해 보이는 이 공식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있어요. '지능'이란 게 타고난 운에 좌우되는 유전적 요소와 관련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공정'을 말하며 능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이유는 '금수저' 나 '부모 찬스'같은 것들이 '출생'이라는 운에 좌우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다면 절반이 유전이라는 운에 좌우되는 능력주의는 이미 공정하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능력주의에 대한 주장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지능이라는 '유전적 요소'는 은연중에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노력'만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능력주의가 노력주의로 변신할 때,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죠. 결국 능력주의는 사회적 다수를 능력 없는 자들로 만들어 무기력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들로 취급하며 도덕적 수치심까지 안기는 거예요. 이를 두고 마이클 영은 이렇게 말해요. "능력을 결정적 요소로 보는 만연한 인식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는 다수가 무기력한 나락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학자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사회에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돌리게 되며, 결국 무기력해지면서(p. 270) 더더욱 확실하게 절망에 빠진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무기력과 자기혐오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공정하다고 말하는 능력주의의 실체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게 있어요. 바우만은 자기혐오를 두고 이렇게 말해요. '누구도 자신에 대한 분노를 끝까지 자기 안에 담아 둘 수는 없다. 그 분노는 바깥으로 분출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기혐오가 타자혐오로 이어진다는 거죠. 더 최악인 건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능력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연대 대신 능력 없는 자는 차별 받아도 괜찮다는 비뚤어진 의식을 키우고, 평범한 다수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그들이 수치심과 혐오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 거죠. 이런 점에서 2001년, 토니 블레어가 '영국을 능력주의 사회로 만들자.'고 역설했을 때 『가디언』에 실린 마이클 영의 반응은 의미심장했어요. "비판의 의미로 만든 이 용어가 찬사의 말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 실망스럽다." 영이 애초에 이 용어를 만들었던 의도가,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능력주의가 알고 보면 불평등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블레어는 몰랐거나 무시했던 거죠. 우리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한다면, 불평등의 문제를, 공정성의 문제를 능력주의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p. 271)순이 아닐까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연대할 때 열리는 게 아닐까요? 코로나19라는 위기의 시대는 평범한 우리들에게 서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더욱 고립될 거예요. 디지털 장비들 을 사용할 돈이 없거나 그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이 순간에도 기업은 위기를 핑계 삼아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며 규제 완화를 주장하고,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동 현장에 내몰린 이들은 더욱더 소외되겠죠. 이런 환경이 지속되고 능력주의가 더 심하게 기승을 부린다면, 우리의 연대는 점점 더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지금 우리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어요. 질병이 우리가 행동 할 수 없게 발목을 묶는다면 해결책은 제도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망을 세우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 나가는 것이 그 첫걸음이지 않을까요?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우리는 이미 첫 경험을 했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내 곁에 있는지 확인하려 하죠. 손 내미는 자와, 그 손길이 필요한 자는 한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제2 기계 시대가 그어 놓은 모호한 노동의 경계 위에서 각자도생의 윤리로 분열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라는 한 번(p. 272)도 겪어 보지 못한 거대한 위기 앞에, 국가가 동등하게 내미는 보호의 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위기의 시대엔 배제되는 자들이 더 늘어 날 수밖에 없어요. 비상구를 찾아 나가는 길에 어떤 이유로든 뒤에 남겨진 자들은 더 이상 동료 시민들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죠. 우리가 이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불신으로 분열된 사람들 사이에, 동료 시민으로서 갖는 사회적 신뢰가 새롭게 재구성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보호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야말로 경계의 불확실성을 마주하며 대다수가 불안에 떠는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일 아닐까요? 이 일을 과연 능력주의가 해 낼 수 있을까요? 평범한 우리들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길은, 첫 번째도 연대, 두 번째도 연대, 세 번째도 연대가 아닐까요? 그런 연대가 가능하게 제도적 보호 장치를 만들고, 그 제도가 다시 연대를 강화해 나가는 선순환. 비록 지금은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지라도, 우리가 내딛을 수 있는 첫걸음은 바로 서로의 손을 맞잡는 '연대'일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 이웃들, 아이들을 떠올려 보세요. 사랑하는 이들에게 능력이란 덕목을 요구하는 대신, 보호라는 제도의 우산을 씌워 주세요. 그리고 그 우산 아래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퍼붓고 있는 이 시대의 위기들을 함께 견뎌 냈으면 해요. 어쩌면 우(p. 273)리의 어깨마저 비에 젖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차별 대신, 혐오 대신, 각자의 가슴속에 서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맞닿은 마음의 온기가 여러분을 지켜 줄 거라 믿어요. 이런 맘으로,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을 씁니다. '위기에 뒤로 남겨지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라.'(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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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 한국은 강고한 계급사회이다
- 세습(世襲)은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을 말한다. 소위 말하는 상류층 - 단지 돈이 많은 계층이다 - 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세습한다. 이는 주로 교육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통해 이뤄진다. 그럴수록 하류층 - 단지 돈이 적은 계층이다 - 은 중산층에 진입하기가 어렵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나기는 어렵다. 개천이 복개공사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젊은이들을 절망하게 한다. 어찌할거나? 10퍼센트만이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다 20대 가운데 노동시장의 '내부자'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번듯한 또는 '괜찮은 decent' 일자리를 초임 기준 월 300만 원 이상을 주는 일자리라고 한다면, 2017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연 7만 2,000명만이 내부자라고 할 수 있다. 이(p. 38)는 동일 연령에서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의 11.4 퍼센트 정도로 추산된다. 단순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전체 취업자(자영업자 포함) 가운데 1차 노동시장의 종사자라고 추정되는 비율인 16.5퍼센트보다 턱없이 낮은 수치다. 지금의 20대들은 이 전보다 훨씬 더 중산층이 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p. 39). 결국 지금의 20대는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이전 세대보다 더 치열하게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경쟁 과정에서 성별, 계층별, 학력별, 거주 지역별로 누가 더 '기회'를 많이 잃는지 그리고 누가 '선방'하는 지에서 그들의 운명은 갈린다. 중산층 또는 중상위층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제 '명문대' 졸업장을 요구하는 고급 사무직 또는 전문 기술직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90년대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어려워졌다. 예전처럼 지방 국립대를 졸업해서 지방에 위치한 대기업에 취직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거나 또는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p. 86) 전자 산업 대기업 생산직으로 서울의 대졸 화이트칼라 부럽지 않은 고소득을 얻는 삶의 기회는 오늘날 20대에게는 거의 존재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p. 87). 여러 차례 언론 기사로 알려졌다시피 사교육 산업은 80년대 학번 운동권들의 호구지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의 대치동을 만들었다. 시작은 1992년 서울 시내 중고교 재학 생의 학원 수강 허용과 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였다. 「신동아」 2018년 10월호의 '사교육 철옹성 대치동' 기사는 수능이 "기존의 암기식 학력고사와 달리 학생의 사고력, 논리력, 비판 능력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으면서 "대학 시절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토론과 세미나를 반복한 운동권 출신에게 최적화된 입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서술한다. 대치동이 한국 교육산업의 실리콘밸리 같은 입지를 확고히 한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쉬운 수능'과 '논술 강화'였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상위권 대학이 그나마 변별력 있는 논술 비중을 늘리면서 전직 운동권 출신들이 대학교 재학 당시 '세미나(사회과학 서적을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의식화하는 학습 과정)' 하듯 학생들을 가르치는 논술학원이 급격히 세를 불려나갔다. 대학의 수시 전형 확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치동 논술(p. 128) 학원계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장민성 씨의 유레카논술학원처럼 프랜차이즈를 내며 기업화를 시도한 곳이 생겨나던 것도 이 시점이다. 손주은, 이범, 故 조진만 씨 등이 2000년에 세운 메가스터디는 스타 강사와 인터넷 동영상 강의의 확산에 힘입어 2000년대 초중반 급성장한다(p. 129). 흔히 이야기하는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양육 환경이 좋은, 즉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학력이나 직업 등 사회적 지위도 뒷받침되는 계층 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는 인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비인지적 능력도 다른 계층의 자녀들보다 더 뛰어나다. 그리고 비인지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대치동 학원가 등을 통한 교육 투자 는 결실을 맺는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p. 144). 정상가족 형성 과정에서 부모의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점은, '독립적 20대'라는 개념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한다. 특히 중산층에게 '가족주의'는 정상가족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다. 자신의 정상가족을 구성할 수 없는 취약한 경제적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현재의 가족(주로 부모)이 제공하는 자원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표현대로 오늘날의 20대는 "가족을 만들 수도, 가족을 떠날 수도 없는" 개인이다. 그들은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현재의 가족과 미래의 가족 모두를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가족을 만들려고 시도하든 그 시도를 단념하든 언제건 현재의 가족에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현재 20대 담론의 주된 접근방식 과 달리, 재생산을 위한 보급기지 또는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의 제공처로서 그들에게 가족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중산층에서는 동류혼(같은 계층끼리 결혼하는 행위)이 많아 졌는데, 이는 결혼이 가족 단위의 계급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4인 단위 핵가족을 꾸리는 것 자체가 '울타리' 안에 있는 중산층의 특권적 행위가 되고 있다(p. 154). 자동차 산업에서 고용 증가가 주로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모듈화의 영향이다. 조성재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2년 보고서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완성차 부문의 고용은 외환위기 이전과 거의 동일한 수준이며 부품 부문의 고용 확대에 의해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또 현대차가 2000년대 중반 해외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부품 부문 고용 확대의 원인이다. 국내 생산설비를 늘린 것은 1996년 현대차 아산공장 건설과 2013년 기아차 광주 공장 증설이 마지막이다. 해외에서 생산하는 완성차용 부품 가운데 다수가 국내에서 만들어진다. '귀족 노조'라고 비난받기까지 하는 완성차 조립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2000년 이후 뚝 끊긴 건 노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듈화는 품질 개선과 생산 효율 개선을 위해 현대차 경영진이 내린 결정이었다. 또 해외 공장 증설도 현대차의 해외 진출과 현대차의 주력 시장이 한국에서 먼 미국이나 유럽이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하지만 50~60년대생이 주력이었던 현대차 생산직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가 자동차 공장의 탈숙련화와(p. 210) 그에 반대급부처럼 이루어진 블루칼라 기능공 역할 축소- 화이트칼라 엔지니어 역할 강화를 가속화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블루칼라에서 '번듯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길이 끊기게 된 것이다(p. 211). 지금의 문제가 '세습 중산층의 독주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면, 세대 간 양보론과 교육의 공정성 확보론만큼 그들의 영향력과 독주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세대와 공정 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여 '세습'이라는 진짜 문제를 숨기면서 적당히 양보하는 척하며 실질적인 손실을 보지 않는 노회한 86식 정치 투쟁의 구호가 한국 사회를 뒤덮는 양상이다. 문제는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그대로 관철되고, 유지되는 2019년 한국 사회의 시스템 그 자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양보와 공정이 아니라 의무와 공평이 아닐까. 시작 단계에서부터의 공평과 그것을 위한 세습 중산층의 경제적• 사회적 의무 부담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가장 분명하게 요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 equality of opportunity 이다. 단순히 입시제도의 공정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수준의 교육 기회와 능력 배양의 기회에서 하위 90퍼센트도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OECD, IMF, 세계은행 등에서 나오는 관련 보고서에서 으레 등장하는 표현이라 식상해 보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급진적인 주장이 가능해 보인다. 가령 기회의 평등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영유아기에서부터 공공 보육이나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p. 291)은 교육을 통한 계층 재생산이 매우 어린 시기부터 이루어짐을 보일 수 있으며, 교육 과정이나 교육 재정 구조 개편을 촉발시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최소 수준 social minimum에 대한 합의와 그에 따른 적극적인 세원 확보다. 노동시장의 변화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부조하자는 것이다. 이는 그들 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도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중요하다. 또 재원 마련을 위해 현재 노동시장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상위 10퍼센트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 심상정 의원실이 지난 2018년 9월에 공개한 2016년 근로소득 1000분위(0.1 퍼센트 단위)별 급여와 결정세액(실제로 납부한 근로소득세액)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근로소득 상위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급여는 연 7,200만 원이었는데 연말정산 등을 감안한 실효세율은 5.76퍼센트에 불과했다. 실효세율이 10퍼센트를 넘기 위해서는 연 1억 500만 원 이상을 벌어 상위 3.2퍼센트 내에 진입해야 했다. 흔히 이야기되는 상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연1억 4,700만 원을 버는데, 그중 15.6퍼센트를 세금으로 냈다. 결과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상위 1~10퍼센트를 대상으로 걷을 여력이 충분한 셈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불평등이 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p. 292)의 격차뿐만 아니라 상위 10퍼센트와 나머지 90퍼센트의 심각한 격차 문제에 기인한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세습 중산층은 그 격차를 '능력의 차이'로 포장하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층 지위를 물려주고자 노력한다. 그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 해결의 단초가 있을 것이다(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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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 세상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그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차별의 근거일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의 한 평가 방식이 시험이다.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정당한가를 이 책은 묻고 있다. 기존의 생각을 흔드는 관점이라 좋았다. 허구적인 능력주의의 논리 능력주의를 이루고 있는 논리들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한 능력(지능/재능과 노력 또는 성취)이 존재 한다. • 능력은 시험과 같은 적절한 절차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p. 19)있다. • 현대 사회는 (학교교육 등을 통해) 동등한 출발선, 즉 성장과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 각자의 능력은 오직 개인의 책임이다. • 사회의 불평등과 차등은 (대부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것, 즉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이러한 명제들은 능력주의에서는 명백한 진실이거나 상식인 것 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결코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으며, 현실과 매우 어긋나는 허구적인 명제인 경우도 많다. 능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부터가 그러하다. 먼저, 게임 캐릭터의 설정 수치마냥 개인에게 고유한 능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전적 요소나 소위 타고난 재능을 인정하더라도, 유전자의 요소가 발현되는 것이나 어떠한 능력이 발달하는 것은 성장 환경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문화적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 역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같은 사람이 컨디션에 따라, 누구와 같이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성과를 보이는 사례들을 접하지 않던가. 또한 무엇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인지 자체가 사회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능력은 본질적으로 사회 제도(p. 20)와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개념이다. 능력은 환경적 ·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 그러므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나 절차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잘 준비된 평가 도구들은 어떤 상황에서의 한정된 영역의 능력은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한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측정 결과가 촘촘하고 '변별력' 있을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인지 능력을 평가하는 지필 시험 성적과 실제 작업 성과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는 사례를 자주 겪지 않던가. 평가의 방식이나 기준 자체에 내재된 차별, 편향이 유불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규모가 큰 회사에서 표준화된 성과 평가에 의해 급여를 정한 경우에도, 여성과 소수 인종은 편견 때문에 백인 남성보다 인상 폭이 더 낮게 정해졌다는 사례도 있다. 우리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고 능력의 차이도 불평 등도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는 믿음은 어떨까? 한국 사회를 비롯해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교육비의 격차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는 물론,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주거 환경이 어떤지 등에 따라 배움의 기회부터 건강까지 격차가 생긴다. 개인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목표(p. 21)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격차와 불평등은 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맥이나 상속 등의 요소를 더하면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과연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일까?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과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정당한가? 비록 우리가 이런 원리에 아주 익숙하긴 하나, 이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흔히 나오는 것은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이 보상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노력의 과정이 아닌 시험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차별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실상과는 다를뿐더러 앞뒤가 바뀐 논리이기도 하다. 개인이 어떤 노력을 했다고 해서 사회가 반드시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만일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했다면, 그 보상이란 성장하고 변화한 자기 자신 자체이다. 노력하니까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면 더 많이 보상한다는 시스템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에 맞춰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나 기업 등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따르고 역량을 개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보상을 약속 한다.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는 방식은 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직위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가령 중국에서 시작된 과거 제도는 인재를 선발 하여 통치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능력주의의 정당성은 바(p. 22)로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다. 기업의 경우라면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고 승진시킴으로써 기업의 이익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함으로써 노력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논리 역시,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하고 노력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과 개인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 국가나 기업 등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바람직한지를 얼마든지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p. 23). 능력의 측정 또는 입증 과정, 시험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단'을 요구 한다. 앞서 말했듯이 능력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개인의 전적으로 고유한 능력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적 보상을 약속하기 때문에, 개인의 재능이나 잠재적 능력, 최소한 특정 시점의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고 가시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지능 검사 등의 평가 도구와 함께 발달해 왔다. 능력주의의 신뢰성은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평가 시스템 -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식으로는 시험, 특히 인지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필 시험 -에 의지한다. 개인이 홀로 시험지 앞에 앉아서 답을 적어 내고 채점을 받는 과정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개인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믿음을 주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시험은 "교육할 의무는 묻지 않고 응시자 개인(p. 26)이 학습한 결과만 따지"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묻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 이 때문에 능력주의를 강화하려고 할수록 시험이라는 방식도 강조되기 쉽다. 시험은 한국 사회의 불투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점수화되는 시험, 특히 지필 고사를 거치지 않은 채용은 그 자체로 특혜나 비리가 있었으리라는 의혹을 받곤 한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논거 중 하나는 기간제 교사들 중 일부가 인맥에 의해 채용되었으리라는 의심이었다. 일부 학교에서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과장이나 시험 부정 의혹 사건은 '대입 수능 비중 확대'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의심과 불신 때문에 비리나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한 방법인 시험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확실하며, '흙수저'인 개인도 노력 하여 승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각종 통계나 연구가 이를 부정하고 시험 역시 가정 환경이나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지적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쨌건 승리하고 성공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자신이 그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0%가 아니라면 실패는 자기 책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학교는 물론 노동 영역에서도 '공정한 시험'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가장 정당한 방법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시(p. 27)험의 기회가 평등을, 성적에 따른 보상이 권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존엄과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너의 자격과 능력을 증명하라.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으로' 이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력' 그 과정에서의 고생과 인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노력과 인내를 강조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공정한 능력주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서사를 들여다보면 보상 심리와 인지 부조화적 태도가 곧잘 발견된다. 자신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했으니 마땅히 그러한 고통에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그런 노력과 고생 없이 결실을 얻(으려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처럼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경우 역시도 능력주의 논리의 자장 아래 있음은 분명하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경력은 물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수하고 일한 고통과 인내 또한 합당한 대가로 인정받지 못 한다. 오직 시험이라는 능력을 입증하는 과정에 연결된 노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고 지능•학력을 숭배하던 관습 그리고 뿌리 깊은 '자기계발'의 논리와도 연관되어 있을 터이다(p. 28). 교육 문제의 해결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더불어 가야 한다. 불공정에 항의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제국대학 입학 시험의 불공정성에 항의 하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1961년 쿠데타 직후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에도 입학 비리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문제는 불공정에 분노하는 걸 넘어 불평등 해소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자이자 의사인 킴블리 노블은 한 가정의 소득이 아이의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며 저소득층 가정에 소득을 더 보장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은 삶의 모든 영역에 불평등을 낳는다. 가난 속에서도 능력을 한껏 펼치는 일은 전교 꼴찌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직장 규모와 학벌, 성별, 지역 등 유무형의 암묵적인 기준으로 층층이 차별화된 임금 제도를 교정해서, 전체 사회에서 노동자의 몫을 높이며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더불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여, 혹시 직장을 갖지 않았더라도 인간으로서 죄악은 아니게 해야 한다. 직장을 갖지 않았어도 인간이 할 일은 차고 넘친다. 독립운동가들이 어디 직장을 제대로 가진 적 있었던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사실상 직장 밖에서 더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려면 우선 단기적으로는 복지의 기반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복지 정책은 개인별 복(p. 61)지보다 소속 직장별 복지에 가까워서 열악한 직장일수록 복지조차 매우 빈곤하다.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고 그들의 휴식과 임신·육아마저 헐값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모든 시민들이 공적 활동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누구나 희망한다면 몇 년쯤 공공 기관에 근무하거나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러면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고 삶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 전체의 공공성도 높일 수 있다. 세금 내고 4~5년에 한 번씩 하는 선거로 끝나는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공적 활동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한평생 동안 얼마 동안은 있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공적 시민이 되고, 공적 시민으로서 기본금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당장 실현 될 리는 없으나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만약 이런 상상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듀이와 파커 파머가 강조했듯이 학교교육은 더욱 중요한 공적 사회 기구가 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시민교육을 강화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비판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고 직접 시민으로서 적절한 제도적 제안 과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p. 62). 결론적으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빠른 산업화 전략에 따른 엘리트의 양성, 민주주의에 대한 희생 속에서, 근대화가 전근대적 신분의 해체가 아니라 '나도 노력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평등'으로 변형되면서 강력해졌다. 따라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교육 현상이라기보다는 정치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시험 문화는 사회 상황이 왜곡되면서 형성된 지위 상승의 평등주의이고, 사회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인적 적응과 지위 상승 전략을 추구하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이들 나라(p. 78)에서 진행된 불균등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행위 주체는 개인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을 둘러싼 격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가족 수준의 자원 결속과 지원,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된 한국 등의 나라에서는 특별히 '헬리콥터 맘'과 같은 현상으로 대표되는 온 가족이 동원되는 입시 문화가 나타난다. 문제는 이처럼 가족이 동원되는 평가 집착적 시험 문화가 사회적으로 보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를 해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lism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시험 문화를 특징짓는 가족 교육열이며, 지위 상승을 향한 열병이 국가 차원의 종교 의식처럼 치러지는 이유이다. 요컨대,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와 불평등, 능력주의적 교육과 시험이 시험 문화를 초래하는데, 이러한 시험 문화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동원되는 양상을 띠게 되며 능력주의의 발현을 저해한다(p. 79).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학벌이 전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문벌 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학벌과 패거리 문화를 사회적 합리화와 합리적 개인주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연고주(p. 107)의, 정실주의, 파벌주의에 대한 대응 논리로 개인주의, 합리주의, 능력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동문'으로서의 '학연'이 다 '학벌'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IMF 사태 이후의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든 공동체적 관계와 사적 친분과 연결을 통한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회 윤리로 구축되고 있던 시기였다. 가족, 친구, 이웃 관계가 다 무너지고,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가 왔음에도 학벌없는사회는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곤 했다. 우리가 꿈꾼 것은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였고,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분명 있다.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에 의해 패퇴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의해 무너졌어야 했다. 능력주의는 민주교육•평등교육의 이념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능력주의가 학벌주의의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점은 우리의 한계였고 오류였다. 당시에도 '스펙'이라고 불리는 사회 현상은 문제가 되고 있었고, 성적 경쟁이 스펙 경쟁으로 변질된 것을 비판했지만, 그것이 총체적인 사회 통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위력을 발휘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2016년 해산까지 학벌없는사회의 경험은 민주화 이후 한국(p. 108)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재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투쟁과 패배, 한계와 오류의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p. 109). 현재의 계급 위치를 지키려면 결국 지금과 같은 불평등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희망이 되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에겐 급격한 변화는 불안의 요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장 질서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위에서 일정한 기득권과 지분을 갖고 있는 '범민주 시민'이라 불리는 계급이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가장 강력히 갈망하는 것이며, 그 임무를 수행할 정권을 중심으로 가족주의적으로 결속하여 체제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실력 덕분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을 다른 계급들에게 주입시킨다. 이 믿음은 기득권을 세습한 보수 기득권층보다 자력(?)으로 취득한 자유주의 진보 기득권층에서 더 강하다. 능력주의는 고소득 전문직의 '강남 좌파'나 능력 있는 '민주 시민'들이 추종하는 자기 신앙이 된다. 이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에는 민감성을 보이지만 능력 차별과 계급 차별은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급 차별을 가려 주기 때(p. 112)문이다. 능력주의는 상층부의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은 완화한다. 하지만 계급의 진입 장벽은 더 높아진다. 지배자들이 평등을 깨트리고 서열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데 서열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인민을 다수로서 단결하게 한다. 서열화는 피지배 계급 서로가 서로를 착 취하도록 만든다. 자기 위의 사람은 복종하고 동경하며, 자기 아래의 사람에 대해서는 군림하고 무시한다. 위계는 지배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멸시를 힘을 합쳐 되갚는 대신 아래로 향하도록 만든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너보다는 낫다는 것이 사회적 심리의 기저를 이룰 때 지배자들은 손쉽게 전체를 다스릴 수 있다. 지배자에게 두려운 것은 사다리를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평평해지려는 사람들이다. 저들보다 못하지만 이들보다는 낫다는 것은 중간 계급의 심리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중간 계급에 대해 '상류층에 대해서는 도덕적 우월감과 문화적 열등감을 가치고 하층 계급에 대해서는 도덕적 열등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갖는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간 계급에게 이 쌍방의 열등감으로부터의 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지적 우월감'이다. 지식 자본은 그 누구보다 중간 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p. 113). '경쟁력'이라는 시장 논리로 대학을 도태시키고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성'의 논리로 대학을 모두의 것으로 탈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식과 금융의 결탁을 끊어 내고 학벌의 자본화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벌의 가치를 무가치화하고 반대로 학벌주의/능력주의가 무가치화한 것들의 가치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노동에 대한 가치와 능력에 대한 가치, 양자의 교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와 재협약이 필요 하다. 학벌이 개인의 자산이 아니게 하려면 대학교육 공공화가 필수적이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대학 공공화를 위한 필수 정책이다. 교육에서 수혜자 비용 부담 원칙은 교육을 투자로 보는 관점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막대한 등록금과 교육비를 개인이 부담 하는 제도하에서는 개인들에게 공공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당신들을 교육시키는 데 드는 돈은 국민이 부담했다. 그러(p. 126)니 국민을 위해 일하라'라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에 요구 되는 비용과 노력의 값이 커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진입 장벽도 그 만큼 높아진다. 비싼 교육 비용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기회를 차단하고 계급 간 불평등을 초래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이것은 원한다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다. 독일은 전국적 위헌 소송으로 대학 등록금을 무상화했다. 반값 등록금이나 학자금 대출, 소득 분위에 따른 차등적 국가 장학금 제도가 아니라, 대학 무상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빈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넘어서는 계급 간의 정치 협약이다(p. 127). 2020년 '인국공 사태'도 서울교통공사 사례와 유사한데, 하나 차이가 있다면 주로 정규직을 목표 삼은 취업 준비생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도 서울교통공사 사태 당시 반발했던 정규직들의 주장과 판박이처럼 똑같다. '깜냥도 안 되는 비정규직이 감히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보안 요원은 공사 공채 시험을 통해 선발 하는 직원과 직무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며 기존 정규직의 몫을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취준생들은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들고 일어났다. 무엇이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그 멘탈리티를 투명하게 드러낸 글이 있다(p. 139). 연대숲 #68384번째 외침: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인재를 찾는가? - 취업과 엘리트주의의 담론에 대한 견해 이번 인국공 사태와 소위 '지방 인재'의 취업 할당 법안 발의 이후로, 대한민국은 노동의 가치, 경쟁의 가치 등을 놓고 의견 대립을 보이는 듯싶다. 그러나 그 대립의 과정에서 어이없는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 제보를 적어 보려 한다. 그 어이없는 담론이란, 기업이 '학벌과 무관한' 실무 능력을 중시해 개인의 고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실무 능력 및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 바로 그 학벌을 얻어 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했으며, 그 이상으로 특출나게 '뛰어나야' 했다. 누가 인재인가? 필자의 주변에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1년을 꼬박, 자는 시간만 빼고 20시간가량을 서서 살았던 누나가 있다. 지방에서 3수를 해 입학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보다 유식한 형도 있다. 가장 힘든 전공 과목과 복수 전공까지 챙기면서도 취미로 작가 수준의 유화를 그리던 누나도 있다. 이들의 노력에 대해 보상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역량을 보자.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정말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과 학벌이 무관한가?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의 역량을 발굴하고 증명했기에 소위 학벌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입을 위해 경쟁하던 전체 인구의(p. 140) 상위 5% 안에 우리가 있었던 것은, 그저 머리 좀 좋아서가 아니다. 총체적인 역량의 우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트가 스스로를 엘리트라 칭하는 것에 거리낄 이유가 뭐 있을까. 우리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우리와 함께 경쟁했던 이 사회의 그 누구도, 태연히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현 정부는 어디에서 지방 인재를 찾는가. 어디에서 여성 인재를 찾는가. 지방에서 3수 해서 기어코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그 형이 진짜 지방 인재다. 사람 몸에 저 정도 재능이 다 들어가나 싶은 그 누나가 진짜 여성 인재다. 현 정부의 고질적인 병폐인 포퓰리즘과 대중주의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대학, 시민단체 등에서 소위 인재를 발굴하겠다는 모순을 야기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학우들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제쳐 놓고 인재를 논할 수 없다. 이는 오만한 말이지만 동시에 사실이다. 아직 직무에서 역량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일개 취업 준비생이 지닌 자의식치고는 지나치게 비대하다. 그 자의식은 오직 대학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소위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저 글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개인의 실무 능력과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라고 물은 다음 어떤 논증도 없이 '나는 특출(p. 141) 나게 뛰어나다'라는 선언으로 비약하는 부분이다. 근거처럼 제시한 게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인데, 정작 글쓴 이는 이것이 왜 학벌 좋은 사람만의 자질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 또는 '화용론적 모순'이라 부른다. 화자의 주장과 행동이 상충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저 횡설수설하는 주장은 글쓴이가 사실관계나 추상적 개념을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본인이 원하는 업무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p. 142).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 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 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코레일에서 매표 업무를 하는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과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역무원의 차별은 지속된다. 설령 정규직의 노동 조건이 더 나은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은 정당한가. 게다가 근속이 길어질수록 격차는 더 확대되고 있다. 입직 통로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격차가 벌어지는 이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격차의 확대를 설명할 정당한 근거는 과연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능력주의는 답을 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근거가 되는 시험 자체의 공정성에도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노동자들은 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생각 한다. 흔히 말하는 '수저론'은 젊은 노동자들이 능력주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점차로 공개 채용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사회가 더 불안정해질수록 안정적인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안정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과 그런 조건이 되지 않는(p. 174) 사람들 간의 경쟁이 과연 공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험'을 매개로 한 능력주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에서의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직무급제'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 사람이 어떤 직무에서 일을 하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해 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능력주의 요소가 있다. 병원을 예로 들면 의사와 간호사, 의료 인력과 비의료 인력 사이에 격차가 있고 이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승진과 승급, 임금 체계를 달리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직무급제는 여기에 더해 직무에 따라 고용 형태를 세분화하고 위계를 만든다. 어떤 직무는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그보다 하위 위계의 직무는 면접을 통해 무기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등 시험과 직무와 고용 형태를 연계 하면 그러한 능력주의 구조는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노동 조건에서 차별을 당한다. 이런 경우를 차별이라고 말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 문제가 되지만, 직무에 따른 차별은 잘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여성이 주로 하는 직종인 돌봄 노동은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잘 인정받지 못한다. 이때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받는 차별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가 낮은 일을 하니까 받는 대우로 간주된다. 즉 차별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차별이 마치 '차이'인 것처(p. 175)럼 인식되고, 차별의 책임도 개인에게 전가된다. '네가 능력을 키워서 더 좋은 자리에 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p.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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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목회포럼 22회 정기총회, 황덕영 대표·이상대 이사장 유임
- 미래목회포럼 제22회 정기총회가 12월 4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강당에서 모여 현 황덕영 대표와 이상대 이사장을 유임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황덕영 대표가 “부족하나마 한해 더 섬기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는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겠다.”라고 인사말했다. 이상대 이사장이 “이사장을 4년째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답을 제시하는 일을 계속 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상임고문 오정호 목사가 ‘AI 시대 참목회자상’이란 제목으로 “대체불가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둘째, 거룩한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인간의 부패와 AI가 결합되면 더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때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 ”라고 설교했다. 1부 총회 회무처리는 대표 황덕영 목사의 사회로 중독사역위원장 송용현 목사가 기도,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정기이사회 결의안 보고, 사무총장 백낙균 목사가 사업결과 보고, 감사 김희수 목사가 감사보고, 실행위원 양인순 목사가 회계보고,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22회기 대표 및 임원 인준, 신구 임원 교체, 신입회원 소개, 2026년 정책자문위원 추천보고, 사업계획안 보고, 기타 안건토의 후 중앙위원 이요한 목사가 폐회기도했다. 이어 가진 취임 및 위촉 감사예배는 다문화사역위원장 김인환 목사의 인도로 정책위원장 조희완 목사가 기도, 실행위원 임시영 목사가 딤후 2:19-26을 봉독했다. 고문 정성진 목사, CBS 사장 나이영 목사가 축사, 고문 이영훈 목사와 이사 고명진 목사가 영상축사 후 축하 케익 커팅식 후 고문 최이우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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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1-12 14:51
“함께 총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력해 나아가자”
제110회기 제1차 총회정책협의회가 11월 12일 오후 2시 서대문교회에서 모였다. 장봉생 총회장이 “각 부서의 계획을 규합해 일정 조정, 협업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전체의 몫을 키우고자 한다. 총회 전체가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 각 파트가 협업하고 같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한 부서가 독주하고 인정 받을려고 하지 않고 정책을 전략적으로 조정해 주기 바란다. 이후 기독신문에 발표해 큰 그림을 보여줄려고 한다. 내년 신년회, 봄 등에 다시 정책협의회로 모여 점검하고 함께 맞추어 나가고자 한다. 함께 모여 정책을 말하고 논의해 나아가고자 한다.”라고 정책총회를 위한 비전을 설명했다. 예배는 서기 김용대 목사의 인도로 부총회장 홍석환 장로가 기도, 회록서기 안창현 목사가 마 26:46을 봉독했다. 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셨다. 총회장으로서 들뜨지 않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함께 총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장봉생 총회장이 상설위원장, 특별위원장 임명장을 수여하고 장소를 옮겨 분과별 토의 시간을 가졌다. -
김병중(Th.D) 11-05 14:29
김용대 목사의 행복한 고민? 총회의 난감함? 교회는?
김용대 목사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최근 광신대 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임됐다. 그런데 총장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직을 내려놔야 한다. 영광대교회 담임목사직과 110회 총회 서기직이다. 겸직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대 목사가 속한 노회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직 사임을 만류하고 있다. 노회에서나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이 세 가지를 겸직하면 안 되겠느냐는 황당한 제안도 들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혹시 김 목사가 총장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다면 총회 임원회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다. 서기를 새로 선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서기가 서기직을 대행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김 목사는 110회 총회에서 서만종 목사의 서기 후보 탈락, 현장 선거를 통한 서기 선출을 통해 쉽게(?) 서기직을 맡았는데 결국 중도 사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교회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 경험과 사례를 종합해 보면 이미 이 상황이 공개된 상황에서 주저앉아버리면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딴마음을 가졌다는 것에 이미 마음에 상처받았을 것이다. 담임목사로서의 리더십은 이미 손상을 입었다. 역사와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직, 총회 서기직, 광신대학 총장직. 이 중에서 김용대 목사는 선택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빠른 결단이 그나마 파장을 줄일 것으로 보인다. -
김병중(Th.D) 09-30 18:05
총준위 조용히 물러나며 해단식, 이제는 총회 임원들과 함께
제110회 총회준비위원회(이하 총준위) 해단식이, 장봉생 목사의 총회장 취임을 축하하며 9월 30일 낮 12시 반포 채빛 퀴진에서 열렸다. 장봉생 총회장은 총준위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고 이제 임원들과 함께 110회 총회를 이끌어 갈 것을 밝히며 “총준위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무난히 총회를 마치게 되어 감사하다. 앞으로도 잘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총준위원장님 말씀처럼 총준위가 이제는 조용히 물러난다는 말씀에 감동받았는데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인사말했다. 해단식은 총준위 서기 박기준 목사의 사회로 정영교 부총회장이 기도하고 총준위 위원장 한수환 목사가 “그동안 수고한 총준위원들에게 감사하며 이제 우리는 조용히 물러나고 장봉생 총회장께서 임원들과 함께 110회 총회를 잘 이끌어 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총준위 총무 김미열 목사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라고 말한 후 케익 축하 시간을 인도했다. 이후 애찬을 나누며 친교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모든 경비는 장봉생 총회장이 섬겼다. -
김병중(Th.D) 09-26 11:22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 교회 지도자 대회 포럼 개최
제110회 총회(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주최한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 교회 지도자 대회 포럼이 둘째 시간인 9월 26일 오전 10시에 삼정호텔에서 개최됐다. 포럼은 준비위 총무 이국진 목사의 사회로 김홍석 목사가 개회 기도했다. 강의 1은 증경총회장 ·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가 ‘한국교회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란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역사는 길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다. 첫째, 성경과 기도의 복이 있었다. 복음보다 먼저 번역된 성경이 들어왔다. 유례없는 기도에 대한 헌신이 있었다. 둘째 선교 정책의 복이 있었다. 의료 선교, 교육 선교가 사회를 변화시켰다. 셋째, 사람의 복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적 부흥운동을 전했고, 학문적 탁월성과 인격적 신실함으로 한국교회를 세웠다. 넷째, 섭리적 시련과 도전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첫째, 세계 선교에 대한 헌신으로 나가야 한다. 둘째, 복음의 심화와 확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셋째, 거룩한 연대의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강의 2는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안인섭 교수가 ‘개혁주의 유산과 미래; 글로벌 연대를 향한 서울 개혁주의 네트워크의 신학적 제언’이란 제목으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 신학적 일치가 쉽지 않다. 행사도 단발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서구지향적인 면도 있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첫째, 아시아 발(發) 세계 교회 연대가 필요하다. 세계 인구 60%가 아시아에 있다. 둘째, 개혁주의 연대가 필요하다. 성경의 절대 권위, 신앙고백의 일치, 신앙과 공적 책임, 국제적 연대의 역사적 증거 등이 있다. 셋째, 글로벌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역사적 모델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작으나 열려 있는 조직을 구성하고자 한다.”라고 강의했다. 강의 3은 준비위원장 신종철 목사가 ‘개혁주의와 함께하는 세계교회’란 제목으로 “개혁주의신앙은 복음주의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예정론이다. 개혁주의 신앙은 포괄적인 하나님의 언약의 주되심을 가르친다. 그러면 개혁주의는 한국 장로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오직 성경 사상의 고취, 정통 부수주의 신학의 확립,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신앙의 토대가 됐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주의자들이 남긴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으로 오늘날에도 전 세계 속에서 전파되고 지켜지며 더욱 부흥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회의 주제를 ‘개혁주의와 함께 하는 세계교회’로 정한 것이다.”라고 강의했다. 준비위 총무 안인섭 교수가 ‘서울 개혁주의 네트워크’ 조직 후 나성균 목사가 애찬기도한 후 오찬을 나누고 폐회했다.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교회 지도자대회 취지문(초안) • 서언 •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주권적으로 섭리하심을 믿으며, 오늘 우리는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교회 지도자대회로 이 자리에 모였다. 급변하는 시대, 불확실성의 도전 속에 교회의 본질과 사명, 정체성을 되새기며, 진리의 기반 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 만남이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나가는 새로운 선교적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국제적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힘쓸 것을 다짐한다. • 우리의 고백 • 1. 우리 신앙의 토대는 오직 성경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정확무오하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최종 권위임을 분명히 고백한다. 2.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속,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는다. 3.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부활은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과 화해를 완성하신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임을 믿으며, 그 중심에 복음의 능력이 있음을 선포한다. 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교통과 사역 안에서 하나 됨과 거룩함을 소명으로 받았다.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교회는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역사를 지녔으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로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한 공동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5. 우리는 급격히 발전하는 디지털 사회를 복음 전파와 다음 세대 양육, 창조 질서의 회복뿐 아니라, 성경적 삶을 지향하는 장으로 삼아 이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6.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와 전쟁의 불안, 생태 위기와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소외감이 팽배한 이때,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세계 시민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책임 있는 소명을 깊이 새긴다. 7.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면서, 종말론적 소망 가운데 완성될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신실한 증인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할 것을 다짐한다. • 결의 및 다짐 • 이에 본 대회에 모인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교회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기도와 교제, 개혁신학에 근거한 교회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와 정기적인 포럼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곳 서울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선교적 과제에 능동적이고 책임 있게 응답하기 위하여 개혁주의적 연대와 협력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한다. 이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끊임 없이 교류하며 동역할 것을 엄숙히 선포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이 길을 끝까지 감당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 주여 우리로 하나님의 성실한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2025년 9월 26일 세계 개혁주의 교단 및 아시아교회 지도자대회 참석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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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1-18 19:06
한기총 (직전)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긴급 기자회견 가져
한기총 (직전)사무총장이었던 김정환 목사가 11월 18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에 대한 의혹인 ‘재정문제’, ‘월급 셀프 인상’, ‘변00 목사 건’에 대해 반박하고,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한기총 전 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입니다. 최근 한기총을 둘러싼 여러 잡음과 특히 저와 관련한 여러 이슈로 많은 궁금증과 오해가 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저는 불법 부당하게 사무총장에서 면직된 이후에도, 상황이 정상화 되기를 기다리며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해 왔습니다. 허나 최근 한기총이 저를 사무총장에서 면직한 것도 모자라 회원에서도 제명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되기에 이렇게 기자님들을 모시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을 결심하기까지 매우 큰 고민과 기도가 있었고. 나 하나가 침묵하면 그저 한기총이 잘될 수 있을까 갈등도 했지만, 저의 피해가 선례가 되어 그 후에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집단 권력으로 한기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에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기자회견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이유를 막론하고 한국교회 앞에 저의 문제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저는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지난 시간동안 한기총의 정상화와 발전만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이런 논란이 생긴 것 같아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사실을 바로 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 뿐 아니라 목회자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 대한 명예를 지키는 것이기에 이 자리에서 한 치의 거짓없는 사실만을 밝히겠습니다. 1. 재정 문제 일각에서는 한기총 사무총장에 무슨 큰 재정비리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기총 사무총장 면직 사유를 재정 문제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대체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떠한 비리가 있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맹세코 한기총 재정을 단 1도 사사로이 쓴 적 없고. 그 어떤 비리도 저지른 적 없습니다. 오히려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수많은 부당한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단호히 비리를 배격해 왔습니다. 본래 한기총은 이전까지 관례적으로 사무총장이 모든 위원회 회의에 배석하고, 그에 따른 회의비를 수령해 왔습니다. 저 역시 재임 1년여 동안 관례에 따라 회의에 참석하고 회의비를 수령했으나, 이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판단에 1년 후 이를 스스로 모두 한기총에 반납하고. 이후 한기총 사무총장은 회의비를 받지 않기로 스스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대체 어떠한 재정 비리를 묻는 것입니까? 재정비리를 거론하는 자들은 현재 아무런 실체 없이 재정비리만 운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비리가 있다면 정확히 무엇이 비리인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당당합니다. 단 1원도 유용한 적 없고, 내 주머니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사무총장이 돈을 횡령하거나 유용한 비리 사실이 없다면, 대표회장은 즉시 사과하고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2. 월급 셀프인상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인 '월급 셀프인상'과 관련해, 단언컨대 저는 스스로 월급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재임하기 전 직전 사무총장의 월급은 500만원이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당연히 월급을 500만원으로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그 당시 전광훈 목사 사건 등으로 한기총이 큰 혼란이 있었고, 임시대표회장으로 온 김현성 변호사의 신변에 위협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어 비서실장을 두어 임시대표회장을 보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기총의 재정은 파탄 상태였기에 비서실장을 고용할 여력이 안되어. 부득이 사무총장 월급 500만원을 쪼개어 사무총장 300만원, 비서실장 200만원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후 정서영 목사님이 대표회장으로 오시면서 한기총의 정상화가 시작되어 정 목사님께 보고하고 사무총장 월급을 정상적으로 복구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해당 내용을 보고 받고 이를 허락했으며, 관례대로 모든 재정 관리를 사무총장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월급 인상은 대표회장님의 일임하에 이뤄진 것이며 사무총장 뿐 아니라 전 직원의 월급이 인상 되었습니다. 이 역시 결코 부당치 않은 것은 한기총이 과거 너무도 힘든 상황을 지나올 당시 직원들이 월급 인상이 전혀 없이 이를 버텨줬기 때문입니다. 2019년 1월부터 전혀 월급이 인상되지 않다가 2023년에 7% 인상해줬고. 이후에도 한기총이 재 정적 어려움으로 상여금 400%를 지급하지 못해. 2024년에 기본급을 8% 인상해 줬습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 임기였던 올해 3월에 월급을 인상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기총은 그간 다른 직원과 달리 사무총장만 4대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지 난 2025년 1월 8일, 정서영 대표회장 임기 당시 총무국장에 기본급 인상없는 4대 보험 가입을 지시했고, 그 적용이 3월에서야 이뤄졌습니다. 더욱이 사무총장 월급을 2025년 2월부터 받지 못했기에, 보험 가입 이후의 월급은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3. 00 목사 건 한기총 재정은 사무총장 취임 후 단 한 번도 온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적자운영이었고, 늘 쪼들렸습니다. 정서영 대표회장님은 늘 한기총의 인건비와 월세 운영비를 마련키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고, 저 역시 이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 늘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실제 한기총이 재정 파탄으로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미안하게도 직원들 월급은 제때 주지 못했던 적이 더 많았고, 제 월급은 수 개월 밀리는 것은 기 본이었습니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 제 사비를 털어 일단 직원들 월급을 준 적도 다반사입니다. 그런 중에 사무총장은 한기총 운영을 위해 회원들에 한기총 후원금을 늘상 요청해 왔습니다. 운영비 뿐 아니라 행사비 등 연간 수 억원 이상이 필요한 한기총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당시는 한기총 재정을 충당키 위해 전국을 안간 곳 없고, 무릎만 안 꿇었지 만나는 분들에게 빌다시피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후원을 얻는 방식에는 개별 차이가 있지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한기총을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얻은 후원금 중 단 1월도 제가 취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한기총의 운영비로 활용됐고, 그것이 바로 현재 한기총이 경매에 넘어가지 않고 직원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됐습니다. 지난 2년 간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정말 자기 재산을 헌신하셔서 한기총을 운영하셨습니다. 회원들께서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은 한기총이 돈이 결코 많아서 현재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하시는 개혁도 이런 치열한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조차 못했을 겁니다. 허나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린가요? 00 목사 건은 이미 수년이 지난 일로 당시 이것이 한기총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모든 회원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AI'를 운운하며, 이를 다시 꺼내 저를 죽이는데 사용하나요? 한기총 회원들께 묻고 싶습니다. 한기총의 험난했던 지난 날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한기총을 지켜내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불살랐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기총을 얼마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지 기억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당시의 제가 진정 잘못된 것이라면 제게 차라리 돌을 던지십시오. 4.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해 저는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추진하는 개혁에 대해 원론적으로 지지합니다. 저 역시 한기종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당장 오늘 내일을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닌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런면에서 한기총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결단을 지지합니다. 허나 그 개혁 과정에서 불의한 희생이나 정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적법한 절차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불법이 지배하는 개혁은 결코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올해 한기총에서는 사무총장과 회계 면직이라는 매우 큰 이슈가 있었습니다. 허나 이 과정에 어떠한 설명도 무엇보다 당사자에 대한 소명의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여론을 몰아 단두대에 목을 치는 행태였습니다. 회계였던 박지숙 목사는 심지어 임원회에 단 한 번도 출석치 않다는 거짓 증언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음 임원회에서 당사자의 강력한 항의로 복귀되는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저는 단 한마디 소명할 시간도 없이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한 마디로 면직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면직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직원인 사무총장에게 대표인 고경환 목사님은 어떠한 사유도 고지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해고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한편에서는 사무총장을 직원이 아닌 종교인이라 하는데, 사단법인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직원이 아닙니까? 심지어 고경환 목사님 스스로도 사무총장을 상근 직원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한기총 임원회는 올해들어 결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임원회가 안건을 다루고, 이를 결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회장이 아무도 수임하지 않은 안건을 스스로 들고 나와 이를 임원회에 결의를 강요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특히 대표회장 본인이 임원회의 허락이나 위임없이 특정 사안들을 변호사에 법적 해석을 받아오며 이를 '강력한 변호사'라며 임원회에서 무조건 받으라고 강요하고는 했습니다. 허나 변호사의 해석은 각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의뢰인의 구미에 맞춰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면직되던 임원회 당시 대표회장은 제게 공동회장과 사무총장 둘 중 하나를 내려놓도록 종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결국 석연치 않았지만, 공동회장을 내려 놨고 그로부터 30분 후 사무총장에서 면직됐습니다. 이것이 과연 의도된 것이 아닙니까? 반대로 대표회장님 본인은 정작 자기 교회 정치를 한기총에서 구현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본인 교회의 모 장로님은 현재 명예회장이자 한기총의 가장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질서위원회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고 대표회장이 기존 감사를 낙마시키고, 새롭게 임명한 감사는 바로 해당 교회의 소속 목사이자 변호사입니다. 자신을 가장 충성스럽게 따르는 최측근들이 질서위에서 철퇴를 휘두르고 감사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입니까? 법은 평등히 적용되고, 절차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기총에 이러한 것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부족한 탓이 큽니다. 그간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제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는 한기총을 위해 아무 사심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안에 어떠한 사익도 비리도 없었습니다. 질서위가 최근에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임원회 회의 방해와 경찰 출동 사태에 대해 해명하라고 말입니다. 임원회 회의는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방해했고, 경찰은 한기총에서 불렀는데 왜 제게 해명을 요구 합니까? 이것이 바로 한기총이 처한 모순의 단면입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개혁 추진은 적극 지지하지만,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법과 편법, 모순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한기총을 사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진정으로 한기총을 사랑하는 김정환 목사의 진심이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Th.D) 07-09 11:26
한기총도 외면하는 전광훈을 계속 추종하는 합동측 인사들
최근 기독교연합회관 15층에 있는 한기총 사무실에 가보니 대표회장을 역임했던 전광훈의 사진이 없어졌다. 사무실 입구에 역대 대표회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전광훈만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2020년 대표회장에서 사퇴했었다. 보수주의 단체인 한기총 입장에서도 전광훈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黑歷史,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럼에도 합동측에는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 예장합동교단은 2021년 106회 총회에서 전광훈과 관련해 집회 참여 금지를 결의했었다. "발언 내용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까지 신앙적 집회 참여 금지를 촉구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광훈을 추종하는 자들을 어찌해야할 것인가? 오죽했으면 보수 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왜 전광훈과 절연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
김병중(Th.D) 04-23 16:52
한교총,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다시 복음으로”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이하 한교총)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가 4월 23일 오전 10시 30분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번 기념대회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회 소속의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와 그 신앙의 유산을 돌아보며 ‘다시 복음으로’ 한국교회의 사명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마련되었다. 예배는 소강석 목사(기념대회 상임대회장, 예장합동 증경총회장)의 인도로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의 기념사, 이상규 목사(예장개혁 총회장)의 기도, 김만수 목사(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의 성경봉독, 이영훈 목사(명예회장, 기하성 대표총회장)의 설교,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데스다 찬양대의 찬양, 박병선 목사(공동대표회장, 예장합신 총회장)의 비전선언, 김정석 감독(기감 감독회장)의 축사, 우원식 국회의장,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국기독교협회 회장 우웨이 목사, 일본복음동맹 미즈구치 이사오 이사장의 축전이 이어졌다. 축도는 김영걸 목사(공동대표회장, 예장통합 총회장)가 맡았다.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는 기념사를 통해 “140년 전 당시 사회는 반상의 법도에 따라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였고, 무속이 민간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였다면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선포하며 전근대적 구습을 물리치고 민주공화체제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듯이,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우리의 삶의 형식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임대회장 소강석 목사는 “선교사들을 통해 우상과 미신, 가난과 차별이 가득하였던 이 땅에 복음의 빛이 전해지면서 새 아침이 밝았다”라며,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한국교회 연합과 부흥의 원년으로 삼아 복음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이 다시 타오르게 해야한다”며 대회사를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설교를 통해 “십자가 신앙으로 견고히 서 있으면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도전하며 편 가르기를 뛰어 넘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해야 한다”며, “정치인, 예술인, 사업가, 학생 그 어떤 일을 하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인이 되자”라고 강조했다. 특별히 기념예배에서 창작 칸타타 <빛의 연대기>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소강석 목사의 대본과 작사, 김대윤 작곡가의 창작곡으로 구성되었으며, 류형길 지휘자가 이끄는 뉴월드심포니오케스트라와 뉴월드합창단, 소프라노 임경애, 테너 이다윗 등의 출연으로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 창작 칸타타 <빛의 연대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 평양대부흥, 일제강점기의 신앙 저항, 해방과 한국전쟁, 현대 교회의 성찰과 연합의 비전을 아우르며 140년의 신앙 여정을 칸타타 형식으로 담아 큰 감동을 전했다. 또한 한교총은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비전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비전선언문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14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위대한 부흥과 선교의 역사를 써왔습니다. 한국교회는 미신과 구습을 타파하고, 제국주의의 유산을 물리치며 민주 공화정에 입각한 자유 대한민국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일제 제국주의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근면과 성실로 부강한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헌신해 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입각한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면서 국내 1대 종교로 자리하며, 세계 선교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몰아치는 인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복음의 가치를 공고히 하며, 다시 복음으로 혼란스러운 나라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다가올 세대의 비전을 선언합니다. 1. 오직 고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우리는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범죄한 우리를 살리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 꿇어 타락한 이 땅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오직 우리의 치료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미래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2. 정의로운 나라가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이사야 11:4,5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복음은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므로 이웃의 생존을 해치지 않는 사회, 정직과 온유와 겸손으로 재판하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는 정치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3. 무속과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사도행전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회는 너무도 빨리 모두가 모두를 대적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140년 전처럼 무속이 문화의 탈을 쓰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서로 불신을 조장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이 가난해지는 역설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무속을 타파하고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며 오직 진리의 말씀이 세상의 길이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4. 땅끝까지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8:19, 20a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 삼는 선교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시대 열방을 향한 선교의 성과는 내려두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과 거역하는 나라를 향해 달려가며, 복음적 통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민과 이주민을 이웃으로 맞아 환대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헌신하겠습니다. 5. 복음 전도에 매진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는 천국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회개와 치유의 복음을 담대하게 세상에 전파하겠습니다. 교회를 보다 건강하게 하며, 새로운 교회를 세우며, 다음 세대 전도에 헌신하겠습니다.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에 넘치도록 힘쓰겠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창조 질서를 허무는 제도를 훼파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2025년 4월 23일 한국교회총연합 -
김병중(Th.D) 04-20 19:22
"교회를 특정 정치의 도구로 삼는 시도 단호히 거부"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3시 광림교회에서 있었다. 이날 1,200만 성도를 대표하여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여한 72개 교단장 일동이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온 인류의 희망임을 밝히고, 한국교회는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민족의 아픔과 성장에 함께 했음을 돌아보며 현재 교회가 현실 정치에 극단적으로 나서는 것을 우려했다. 이는 전00, 손00 등이 교회와 기독교를 등에 업고 극단적인 정치 개입을 한 것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담화문은 “어떤 정치 세력도 교회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특별담화문 전문이다. 선교140주년 부활절 예배 특별담화문/한국교회와 사회에 드리는 말씀 "부활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국교회를 다짐합니다" 부활절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절은 온 인류의 희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오직 그 분만을 따르고 그 분의 사역을 이어가기로 다짐하는 '거룩한 결단의 날'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활신앙'에 힘입어 어둠과 절망의 시대와 문화 앞에서도 빛과 생명을 향한 소망을 민족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습니다. 교회는 근대화 운동, 3.1 독립만세운동을 비롯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국가 재건, 전쟁기의 구제와 위로, 경제 회복과 민주화 운동, 소외된 계층 섬기기 등에 앞장서 민족의 고난과 희망의 역사에 함께 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뒤돌아보면 때때로 교회가 권력 지향 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세속적 가치관을 따름으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소홀히 하였음을 통열히 반성하며, 참회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부끄러움은 '부활신앙'으로 상징되는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욕심과 이념에 편승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최근 일부 극단적 정치 행위에 교회가 연루되고 있다는 사회의 비판과 우려는 국민의 신뢰와 교회의 선교를 위한 토대를 뒤흔드는 심각한 경고입니다. 이 점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반성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수 1:7)을 벗어나 한편으로 치우친 극단의 극우-극좌 비성경적 정치 행위를 멀리해야만 할 것 입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정치적 결정과 권리를 존중하지만, 교회를 특정 정치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의 거룩성과 시민의 주권을 함께 보존해 왔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치 세력도 교회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2025년 부활절을 맞이하며 1) 그리스도 중심, 성경중심, 사랑실천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회복하고, 2) 사회적 약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3) 극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망국적 편가르기를 종식시키고, 4) 국민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힘쓰며, 5) 세계교회 앞에 다시금 영적 부흥과 세계선교의 횃불을 높이들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1200만 성도를 대표하여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72개 교단장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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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2-06 16:11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 은혜로운 제17회 정기연주회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단장 지동빈 장로)가 제17회 정기연주회를 12월 6일 오후 3시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에서 가졌다. 이번 정기연주회는 인도네시아(땅그랑) 꿈나무학교에 장학금을 후원하는 목적도 있으며 사랑의교회, 장로신문사, 전국장로성가합창단협회가 후원했다. 강변교회 오인환 목사가 기도 후 단장 지동빈 장로(강변교회)가 “정기연주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참석하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오늘은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장학금 후원을 위한 연주회이기도 하다.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는 34년 전에 창단되어 격년제로 국내와 해외에서 연주회를 갖고 있다. 오늘 정기연주회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오신 분들에게는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하모니의 찬양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할렐루야!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심이니이다(시 59:17). 창단 35주년을 맞이하여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가 제17회 정기 연주회를 개최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매주 화요일 새벽 6시 사랑의 교회에 모여서 찬양연습을 하면서 이번 17회 정기연주회를 준비하였습니다. 은혜의 찬양을 준비하며 열심히 연습하신 우리 장로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주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찬양을 드리기를 원하며 오늘 찬양을 드리는 장로님들과 오늘 연주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동을 주는 은혜의 찬양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연주회에 특별히 찬조 출연 해주신 GOOD TV 권사 찬양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주회는 특별히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장학금 후원을 위한 연주회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정성으로 인도네시아 꿈나무학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후원 부탁드립니다. 연주회를 위하여 수고하신 지휘자와 반주자, 그리고 모든 장로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프로그램 합창 • 주께 찬양드림이 선하도다(Joseph M. Martin) • 믿음으로 주 따르리(Don Besig) • 찬양의 삶(Pepper Choplin) 중창 • 새롭게 변화되어(Mosie Lister. arr. Kamp Kirkland) 듀엣/tenor 김정복 장로 bass 정관종 장로 • 사랑의 주님(Joseph M. Martin) 합창 • 은혜의 강가로(오성주 arr. 김준범) • 보혈을 지나(김도훈 arr. 정한결) • 산을 향해 눈을 들리라(Douglas Nolan) 찬조 | GOOD TV 기독교복음방송 권사합창단 • 지휘자: 이광석 • 반주자: 홍아라 • 하나님께 찬양드리세(Edwin Willmington) • I will folow Him(작사: Norman Gimbel 작곡: Franck Pourcel) 합창 • 깨뜨린 옥합(김석균 arr. 이현철) • 하나님의 전신갑주(이근호) • 주님나라 이루게 하소서(김기영) -
김병중(Th.D) 12-04 12:22
미래목회포럼 22회 정기총회, 황덕영 대표·이상대 이사장 유임
미래목회포럼 제22회 정기총회가 12월 4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강당에서 모여 현 황덕영 대표와 이상대 이사장을 유임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황덕영 대표가 “부족하나마 한해 더 섬기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는 가운데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겠다.”라고 인사말했다. 이상대 이사장이 “이사장을 4년째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답을 제시하는 일을 계속 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상임고문 오정호 목사가 ‘AI 시대 참목회자상’이란 제목으로 “대체불가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둘째, 거룩한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인간의 부패와 AI가 결합되면 더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때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 ”라고 설교했다. 1부 총회 회무처리는 대표 황덕영 목사의 사회로 중독사역위원장 송용현 목사가 기도,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정기이사회 결의안 보고, 사무총장 백낙균 목사가 사업결과 보고, 감사 김희수 목사가 감사보고, 실행위원 양인순 목사가 회계보고,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22회기 대표 및 임원 인준, 신구 임원 교체, 신입회원 소개, 2026년 정책자문위원 추천보고, 사업계획안 보고, 기타 안건토의 후 중앙위원 이요한 목사가 폐회기도했다. 이어 가진 취임 및 위촉 감사예배는 다문화사역위원장 김인환 목사의 인도로 정책위원장 조희완 목사가 기도, 실행위원 임시영 목사가 딤후 2:19-26을 봉독했다. 고문 정성진 목사, CBS 사장 나이영 목사가 축사, 고문 이영훈 목사와 이사 고명진 목사가 영상축사 후 축하 케익 커팅식 후 고문 최이우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12-02 16:11
총회(합동)부흥사회 박승주 증경회장, 부흥사대상 수상
총회(합동)부흥사회 회장을 역임한 박승주 목사가 세계복음화중앙협의회가 주최한 제30회 한국기독교 선교대상 시상식에서 부흥사대상을 수상했다. 12월 2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그레이스홀에서 부흥사대상, 목회자대상, 선교사대상, 특수선교대상, 평신도지도자대상 수상식이 있었다. 박승주 목사는 총회(합동)부흥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사)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이사장, (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부흥사대상을 수상한 박승주 목사가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 모든 부흥사를 대신해 받은 것으로 여기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수상자 인사말했다. 목회자대상 신용대 목사가 “수상하게 되어 감사하다. 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목회하도록 하겠다.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라고 수상자 인사말했다. 선교사대상 오석재 선교사가 “모든 선교사를 대신해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혼 구원하는 선교의 길을 걷는데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라고 수상자 인사말했다. 특수선교(탈북민선교)대상 태영호 전 국회의원이 “남한에 내려와 신앙을 갖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통일이 되어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수상자 인사말했다. 평신도지도자대상 박홍자 장로가 “수상하게 되어 감사드린다.”라고 수상자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대표회장 김영신 목사의 인도로 준비위원장 김수읍 목사가 기도, 공동회장 강성희 목사가 민 14:28을 봉독, 하늘꿈 연합중창단이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를 특별찬양했다. 총재 엄기호 목사가 ‘말의 힘’이란 제목으로 “말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은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한다. 말은 병들게도 하고 치료하게도 한다. 말은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라고 설교 후 상임부총재 윤부환 감독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시상식은 사무총장 황연식 목사의 사회로 이사장 이규학 감독이 “선교대상 수상자들은 한국교회를 살리는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축하 인사, 총재 엄기호 목사, 대표회장 김영신 목사가 선교대상시상했다. 이어 베레카 싱어즈가 ‘You raise me up'을 축가, 케이크 커팅 후 상임회장 최길학 목사가 오찬기도 후 시상식을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12-01 22:21
FIM국제선교회 창립29주년 기념예배 및 이슬람 세미나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슬람권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FIM국제선교회가 창립29주년을 맞아 기념예배 및 이슬람 세미나를 12월 1일 오후 6시 30분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 1종합관 주기철기념홀에서 갖고 베들레헴교회 최광영 목사가 신임이사장에 취임하고, 법인 이사와 신임 후원 이사를 위촉했다. 전 이사장 천 환 목사가 “FIM 선교회 29년의 역사 가운데 20년간 이사장으로 섬겼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수고하셨다. 신임 이사장님이 잘 하실 것이라 기대하며 감사드린다.”라고 이임사했다. 신임 이사장 최광영 목사가 “설교한 대로 개인 철학이 아닌 무익한 종의 자세로 섬기겠다.”라고 취임사했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이 “FIM선교회는 이슬람선교를 하기에 너무나 귀하다. 전임 천 환 이사장님께서 오랫동안 많은 수고를 하셨다. 신임 최광영 이사장께서 설교하신대로 잘 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베들레헴교회가 더욱 선교 감당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1부 예배 및 신임 이사 위촉식은 본회 이사 노태진 목사의 인도로 본회 이사 임동현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눅 17:1-10을 봉독했다. 신임 이사장 최광영 목사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란 제목으로 “선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하는 것이다. ‘무익한 종’이라는 것은 종으로서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선교는 철학을 가질 필요 없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맡겨주셨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선교를 명령하셨으니 은혜로 알고 감당하자. 하나님 사역은 콩고물과 같은 것이다.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이 있다.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사역하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선교대학원 김정민 목사가 봉헌 찬양, 초대 FIM 이사장 김진웅 목사의 봉헌기도와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위촉패 증정 이사장 천 환 목사가 신임 법인이사장 및 이사를 위촉했다. 이사장 : 최광영 목사(베들레헴교회), 서기 : 김은수 목사(온사랑의교회), 감사 : 김성도 목사(창원우리교회), 법인이사 : 김용덕 목사(새생활교회), 박성호 목사(인천신광교회), 임동현 목사(아델포이교회), 이창용 목사(원당교회) 감사패 증정 이사장 최광영 목사가 감사패를 증정했다. 천 환 목사(예일교회 원로), 노태진 목사(영동제일교회 원로), 박기천 목사(인천사랑의교회 원로), 김성봉 목사 신임 후원 이사 위촉패 증정 이사장 최광영 목사가 신임 후원 이사를 위촉했다. 김영주 목사(동대문제일교회), 류치형 목사(대구엘림교회), 박덕영 목사(배곧동산교회), 손진우 목사(자양동교회), 안효진 목사(전민새생명교회), 이명규 목사(일산아름다운우리교회), 최성원 목사(서울중앙교회), 홍석균 목사(천안삼은대길교회) 2부 이슬람 세미나 강의 1은 강재춘 박사가 ‘이슬람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통한 다와에 관한 고찰-마울라나 말릭 아브라힘의 활동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다와는 전도를 일컫는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포교에 정화가 많은 역할을 했다. 반면 기독교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명확하게 분리된 구조적 한계 속에서 선교를 우선 순위로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선교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성경에 기초한 전통적인 선교 방법이니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를 해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강의 2는 김요한 박사가 ‘중세 이슬람 지배하 레반트 기독교의 변증과 선교적 함의-안디옥 바울과 알카라피의 논쟁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유럽은 오랜 기간 이슬람에 대해 기독교를 변증해왔다. 무슬림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중세의 변증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한다. 안디옥 바울은 쿠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다. 이슬람 신학을 ‘내부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이슬람의 언어로 복음을 번역해야 한다. 선교는 공격이 아니라 번역이며 상대 세계관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안디옥 바울은 그 일을 했었다.”라고 발표했다. 강의 3은 유해석 박사가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이슬람 이해-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이슬람을 혐오하지도 말고 무조건 맞다고도 해서도 안 된다. 레이몬드 룰은 회심 후 철학, 꾸란 등을 배웠다. 룰은 이슬람에 대해 무슬림은 지적인 정교함이 부족하다고 입증하고, 무슬림의 진술을 토대로 낙원의 육적인 쾌락을 반복해서 강조한다고 했다. 룰은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는 이슬람에 대해 폭 넓고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며, 기독교의 진리가 더 진실하며 합당함을 체계적인 집필로 논증해야 하고, 생명을 내놓더라도 자발적으로 무슬림들과 살며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증거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레이몬드 룰의 공헌은, 룰의 이슬람을 유대교 및 기독교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종교로 보는 관점은 신학적 논쟁의 여지를 남으나 룰의 선교전략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이슬람과의 평화적 교류를 촉진 하고자 한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공헌을 하였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에게 기독교와 이슬람 간 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슬람선교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였고 이슬람권 선교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정표가 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최광영 이사장이 “선교사들이 번아웃 되지 않도록 물질적인 후원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한데 물질적으로 많이 후원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마무리 발언 후 온사랑의교회 김은수 서기의 기도로 모든 행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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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1-24 00:20
김태웅 회장, “열심히 하겠으니 회원들의 참여 부탁드린다”
제29회 성남노회장로회 정기총회가 11월 23일 오후 6시 30분 성남제일교회(천동원 목사 시무)에서 열려 김태웅 장로(성남제일교회)가 회장으로 취임하고, 김용직 장로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출되고, 김승용 장로가 총무로 지명됐다. 명예회장 신용렬 장로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협력해 주신 모든 회원들께 감사드린다. 증경회장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라고 이임사했다. 다음은 이임사 전문이다. 제 28회기를 마무리 하면서 성남노회장로회 회장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좋은 노회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기쁨이고 보람이었습니다. 임원으로 여러 해 섬겨 왔지만 회장으로 취임할 때는 무거운 책임감이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부족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건강과 지혜와 담대한 믿음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것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노회장 김승언 목사님과 노회에 감사드립니다. 늘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기도와 격려로 협력해 주신 증경회장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임원들의 협력으로 1년 사업계획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합니다. 회원친교회, 노회 찬양제, 부부수련회, 순회예배 및 월례회 등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준비위원장으로 수고하신 임흥식 장로님, 정건수 장로님, 김태웅 장로님, 총무 김승용 장로님과 모든 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28 회기는 성남노회 장로회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고, 29회기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태웅 회장님을 중심으로 임원들의 헌신을 통해서 장로회가 더욱 활성화되고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겠습니다. 끝으로 응원하고 기도해 주신 서광교회 당회와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신임회장 김태웅 장로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임원을 보강했다. 저와 임원들이 열심히 하겠지만 회원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라고 취임사했다. 다음은 취임사 전문이다. 존경하는 성남노회 장로님들과 사랑하는 노회장 목사님,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먼저 지난 28회기를 섬기시며 헌신과 열정으로 장로회를 이끌어 주신 신용렬 회장님과 임원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노고, 그리고 아름다운 섬김의 정신을 잘 계승하여 더욱 발전된 장로회로 세워 가겠습니다. 우리 성남 노회 산하 149개 교회, 그리고 400여 명의 장로님들은 하나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29회기 성남노회장로회는 노회와 교회, 그리고 목사님들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장로회의 부흥과 연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단순한 조직의 운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동역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기도로 하나 되어 성남노회 장로회가 표어대로 “섬기는 자로” 믿음의 본이 되는 공동체로 우뚝 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저를 세워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수석부회장 김태웅 장로의 인도로 성남제일교회 양충열 장로가 ‘섬기는 자가 되자’ 표어 제창, 부회장 김용직 장로가 기도, 서기 김선홍 장로가 롬 16:23을 봉독, 성남제일교회 당회원이 찬양했다. 노회장 김승언 목사가 ‘잘 돌보아 주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가이오는 다른 사람과 교회를 잘 섬겼던 사람이었다. 장로는 교회를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이오처럼 온 교회를 돌아봐야 한다. 직분은 섬기는 자리이다. 가이오는 헌신의 사람으로서 교회를 세웠다. 장로는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 또한 교회를 잘 섬기는 장로가 되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내빈 인사 부회계 서진석 장로가 헌금기도, 임무성 테너가 특송 후 인도자가 내빈 소개했다. 증경부노회장 이형우 장로가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앞선 분들의 수고로 장로회가 든든히 세워졌다.”라고 격려사,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 이해중 장로가 “잘 하셨고, 잘 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전장연은 올해 ‘본질에 충실한 장로가 되자’는 표어로 활동할 것이다. 적극 협력해 모든 연합기관들이 발전하기를 바란다.”라고,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 회장 이희근 장로가 “한 회기 큰 일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기를 바라며 귀한 협력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김승언 노회장이 신용렬 회장에게 공로패 증정, 총무 김승용 장로가 광고 후 성남제일교회 천동원 담임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감사패/감사장 증정 2부 시상식은 총무 김승용 장로의 사회로 회장 신용렬 장로가 감사패와 감사장을 증정했다. ▲친교회 준비위원장 / 부회장 임흥식 장로 ▲찬양제 준비위원장 / 부회장 정건수 장로 ▲수련회 준비위원장 / 부회장 김태웅 장로 ▲실무임원 / 총무 김승용 장로, 서기 김선홍 장로, 회록서기 안용환 장로, 회계 이우경 장로 3부 회무처리는 회장 신용렬 장로의 사회로 부노회장 문선용 장로가 기도, 서기 김선홍 장로가 13개 교회 40명 참석 보고, 회록서기 안용환 장로가 전회록낭독, 총무 김승용 장로가 사업보고, 감사 김광수 장로가 감사보고, 부회계 서진석 장로가 회계보고했다. 이어 임원을 선출하고, 휘장분배, 신구임원교체, 장로회기 전수 후 명예회장을 추대, 돌봄여행사와 성남노회장로회가 업무협약, 사업계획 및 예산안 심의 후 신임총무가 광고하고 신임회장 김태웅 장로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11-17 18:52
한남노회, 총신신대원 유학생들과 함께 글로벌추수감사예배
글로벌 사역에 앞장서는 한남노회가 총신신대원에 재학중인 유학생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글로벌 추수감사절 예배를 11월 17일 오전 10시 양지캠퍼스 교수식당에서 드리고 과일 바구니와 금일봉을 전달하고 식사를 제공했다. 현재 영어로 수업하는 M.div 과정에 20여명, 한국어로 수업하는 과정에 20여명의 유학생들이 있다. 예배는 서기 최재연 목사의 인도로 장로부노회장 김승학 장로가 기도, 부서기 김동천 목사가 수 14:10-15을 봉독했다. 노회장 안해선 목사가 ‘하늘 신앙의 가치관’이란 제목으로 “배에 방향타가 중요하듯이 인생에도 방향타처럼 중요한 것이 가치관이다. 가치관이 달라지면 인생의 목적지가 달라진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땅의 가치관이다. 신자는 하늘 신앙의 가치관으로 산다. 갈렙도 그러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요구했다. 이 땅은 최악의 땅이었다. 강력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어 정복하기 어려웠는데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다. 이곳에는 막벨라 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고 그 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이전에도 하늘의 가치관을 갖고 살았다. 45년 전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하늘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총신의 보수주의 신학을 배우러 왔기 때문이다. 갈렙이 헤브론 땅을 요구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여러분들의 선택을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이다.”라고 설교 후 증경노회장 안기성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유학생들에게 추수감사 과일 바구니와 금일봉을 전달하고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하며 친교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과일 바구니와 금일봉 전달 -
김병중(Th.D) 11-11 17:52
한남노회, 총신신대원 섬김의 날로 학생들 격려
한남노회(노회장 안해선 목사)가 11월 11일 노회의 날로 총신신대원을 방문해 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전체 원우들에게 간식(빵, 우유)을 제공하고, 한남노회 소속 원우들에게 소정의 장학금과 도서비 지원, 글로벌 원우들에게 happy box를 전달했다. 예배는 증경노회장 안기성 목사의 인도로 서기 최재연 목사가 기도, Caleb Jules Iyonsenga원우가 특송, 부서기 김동천 목사가 행 13:1-3을 봉독했다. 노회장 안해선 목사가 ‘함께 이루어 가는 교회’란 제목으로 “안디옥교회는 작고 약한 교회였으나 최초로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로 함께 이루어가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 교회 구성원들은 하나 되기 어려웠으나 신앙으로 연합했다. 이들은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졌다. 원우들도 주님 안에서 비빔밥처럼 서로 잘 비벼지기를 바란다. 둘째, 성령에 민감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관계를 맺었다. 원우들에게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어 서로 성령 안에서 관계 맺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증경노회장 이두형 목사가 “한남노회는 전국 노회 중 가장 평온하고 좋은 노회”라고 소개하고,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예배에 참석한 원우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글로벌 원우들에게 happy box를 전달했다. -
김병중(Th.D) 10-14 19:57
평양노회 197회 정기회, 목사안수 및 강도사인허식
평양노회(노회장 황석형 목사) 제197회 정기회가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동대문구에 소재한 홍릉교회(이철승 목사 시무)에서 개회해 광현교회 강재식 목사와 비전왕성교회 박철한 목사의 원로 추대 청원을 허락하는 등 회무를 처리하고, 오후 3시 목사 안수 및 강도사 인허식을 가졌다. 안수 및 인허식 1부 예배는 서기 길요나 목사의 인도로 회계 최영일 장로가 기도, 회의록서기 이철승 목사가 창 1:1-5을 봉독했다. 증경총회장 길자연 목사가 ‘말씀의 힘’이란 제목으로 “목회자는 설교자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갖게 된다. 목회의 성공은 설교에 달려 있다. 교회는 설교에 의해 세워지고 무너질 수 있다. 임직자는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야 한다. 말씀 사역을 잘 감당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증경노회장들이 인허증 수여 2부 강도사 인허는 노회장 황석형 목사의 인도로 서기가 강도사 인허자 호명, 서약, 기도, 공포 후 인허증을 수여했다. 노회장이 목사임직패 증정 목사 안수는 서기가 안수 대상자 호명, 서약, 안수기도, 성의착의, 악수례 후 노회장이 공포하고 목사임직패를 증정했다. 증경노회장 강재식 목사가 “저는 오늘 노회에서 원로 추대 허락을 받았다. 늘 처음처럼 오늘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 자아를 해고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가라하신 땅끝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새벽기도 후 잠을 자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라고 권면, 증경노회장 고영기 목사가 “엡 6:24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은혜가 있다. 평양노회에서 인허받고 안수 받게 됨을 축하드린다. 길자연 증경총회장의 설교를 들은 것도 축하드린다.”라고 축사 후 서기가 광고한 후 증경노회장 김진하 목사의 축도로 목사 안수 및 강도사 인허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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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2-03 17:06
은혜를 흘려보내는 옥련중앙교회 · 한종근 목사, 연수구 400세대 도와
추운 겨울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하는 12월 연말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있다. 옥련중앙교회는 매년 연말 사랑의 라면을 나눈다. 얼마 전까지는 쌀 20킬로 하다가 라면이 더 좋다 해서 진행하다 이제는 생필품 쪽으로 섬김의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 올해는 교회가 위치한 인천 연수구 관내 1인 가정을 도왔다. 한종근 목사는 “관내에 어려운 1인 가정이 7010세대나 된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라며 “이번에는 400세대만 도와 너무나 죄송하다. 내년에는 더 많이 흘려보내려고 한다.”라고 다짐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교인들과 지역 경로당 16곳에 겨울 난방비를 지원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르신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시기를 기원했다. 이처럼 옥련중앙교회와 한종근 담임목사는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나눔의 사역을 기쁨으로 잘 감당하고 있다. -
김병중(Th.D) 11-15 19:19
혜림교회, 95명 임직 및 은퇴 감사예배
혜림교회(김영우 목사 시무) 임직 및 은퇴 감사예배가 11월 15일 오후 2시 사랑성전(2층)에서 있었다. 혜림교회 김영우 담임목사 및 교우일동은 "크신 은혜로 장로, 집사, 권사 임직 및 은퇴 감사예배를 허락하신 하나 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묵묵히 그 어려웠던 목회여정을 함께 했던, 금번에 은퇴하시는 분들과 가족들에게 교회를 대표하여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오늘 새롭게 귀한 직분을 받으며 임직하는 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전보다 더욱, 교회와 담임목사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과 동역의 마음을 넉넉히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임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오셔서 임직과 은퇴를 축하해주시고 기쁨을 함께 나눠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순서를 맡아서 기도와 권면과 사랑으로 함께 해주신 목사님들게 감사드립니다. 혜림 가족들은 더욱 주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달려가겠습니다.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김영우 담임목사의 인도로 임직식 교독문을 다함께 교독 후 혜림교회연합찬양대가 ‘은혜’를 찬양했다. 증경노회장 방성일 목사가 시 122:1-6을 본문으로 ‘평안을 심고 형통을 거두라’는 제목으로 “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주님을 사랑하거나 교회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 했듯이 교회의 평안을 구하는 임직자들이 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2부 임직 및 은퇴식은 김영우 담임목사의 사회로 임직자(장로/안수집사/권사/명예권사) 호명, 임직자 서약, 교우 서약, 장로·안수집사 안수식, 악수례, 권사 취임기도, 은퇴자(은퇴장로/은퇴집사/은퇴권사) 호명 후 기도하고 공포했다. 축사 증경노회장 김광탁 목사가 임직자들에게 “귀한 임직을 축하드린다. 직분 주심은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민 11장에 모세를 위한 협력자로 장로를 세우는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담임목사와 함께 무거운 짐을 나눠지기 위해 임직을 받은 것이다. 또한 교회 부흥을 위해 하나가 되기 바란다.”라고, 증경노회장 한달수 목사가 은퇴자들에게 “힘들 때도 화목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가기 바란다. 주님이 끝까지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기 바란다.”라고, 증경노회장 김윤동 목사가 교우들에게 “예수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혜림교회에 대를 이어 신앙생활 하는 가정이 많은 것이 복이다. 신앙의 모델들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축사 후 신호순 장로가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충성스럽게 섬겨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겠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답사했다. 당회장이 임직패를 증정, 임직자들이 교회에게 · 교회가 임직자들에게 기념품 증정, 당회장이 은퇴패 및 기념품을 증정했다. 당회서기 최종만 장로가 광고 후 노회장 김관범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10-19 15:19
박병득 목사 예수기쁨교회, ‘간이역’ 연극 예배 드려
문화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와 목사가 있다. 바로 예수기쁨교회의 박병득 목사이다. 박 목사는 개그맨 출신이다. 그는 개그맨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었으나 목회자가 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목회 가운데 본인이 가진 문화 사역 달란트를 통해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예수기쁨교회와 박병득 목사는 문화사역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19일 선교드라마 연극 ‘간이역’을 공연하는 연극예배를 오전 11시, 오후 1시 30분 드렸다. 박병득 담임목사가 “오늘은 교회가 설립된 이후 가장 의미있는 시간 중 하나이다. 오늘 연기하는 두 배우는 대학로에서 인정받는 탄탄한 배우이다. 연극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어 감사하다. 큰 깨달음이 있는 시간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기도 후 연극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최빛나 연출, 김무준 · 유학승 출연작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순간 우리를 부르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보여준다. 연극 후 박병득 목사가 “인생은 짧다. 천국에 가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내 방식대로 살다가 삶을 후회하게 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을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주인공은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단했다. 오늘부터 인생을 새롭게 디자인하자. 새로운 결심을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바란다.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라고 설교 후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예수기쁨교회 담임목사 박병득(Ph.D.) 교육목사 박인재 / 선교목사 추태화(독일, 군선교) 시무장로 윤성용 / 명예장로 금병호 협동장로 박노수 / 협동명예장로 이종구 / 피아노 홍예영 담임목사 약력: 경희대학교 졸, 설교학 박사, 대한신대 석좌교수 및 명예박사원 원장 신앙상담 : 010-8751-3453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31길 14(미라클아트홀) -
김병중(Th.D) 10-18 18:34
성산교회, 현상민 원로목사 추대 · 이아벨 담임목사 위임
성산교회를 28년간 담임한 현상민 목사의 원로목사 추대, 후임 이아벨 목사의 담임목사 위임 감사예배가 10월 18일 오후 2시 성남시 중원구에 소재한 성산교회에서 있었다. 성산교회 원로 현상민 목사가 “그동안 사역했던 교역자들을 다시 보니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은퇴를 준비했다. 후임 목사님과 1년 동역했다. 사역을 잘 마무리해 감사하다. 후임 목사님이 여러 가지로 월등하다. 동역한 아내에게 감사하고, 자녀들과 함께 복된 찬양을 하기 원한다.”라고 인사말 후 현상민 목사 자녀들이 찬양했다. 성산교회 담임 이아벨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변 분들의 도우심으로 성산교회에 부임하게 되어 감사하다. 원로목사님께 감사드리고,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동안 지도해 주신 주평강교회 정귀석 담임목사님께도 감사드린다. 모든 순서를 맡아주신 목사님들께도 감사드린다. 하나님 눈치 보며 교회에 필요한 목사가 되도록 힘쓰겠다.”라고 인사말했다. 제1부 예배는 노회장 김승언 목사의 인도로 노회서기 나영진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고전 16:15-18을 봉독, 찬양대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찬양했다. 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라는 제목으로 “바울은 특정인들에 대해 알아 주라고 부탁했다. 현상민 목사님은 많은 수고를 하셨다. 교인들은 이에 대해 알아주어야 한다.후임자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잘 사역하시기를 바란다. 함께 가기 위해서는 아껴주고 챙겨주는 것이 필요하다. 원로목사의 이후의 사역을 위해,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교우들은 기도하며 알아주고,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제2부 원로목사 추대식은 노회장의 기도, 사역영상 시청, 공포, 추대패 증정, 교인대표 이정헌 장로가 추대축하패를 증정 후 총신대학교 총장 박성규 목사가 “현 목사님은 제게 형님같은 목사님이시다. 리더십을 잘 발휘해 사역을 마무리하고 후임자를 잘 선정하신 것은 복된 일이다. 축하드린다.”라고, 총회 세계선교회(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가 “교회를 잘 심기시고 원로가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또한 명예선교사로 인준 받으셨는데 라오스에서도 잘 사역하시기 바란다.”라고,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같은 성남노회에 현상민 목사님이 계셔서 감사하다. 많은 귀한 일을 감당해 오셨다. 후임 목사님도 사역 잘 계승하기를 바란다.”라고 영상축사, 증경노회장 김영삼 목사가 “시작보다 끝이 좋은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현 목사님이 그러하셔서 축하드린다. 은퇴는 retire로 타이어를 바꿔 끼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말한다. 이후가 더 좋을 것을 믿고 축하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성남노회 중원시찰회 목사들, 성산교회 역대 교역자들이 찬양했다. 제3부 담임목사 위임식은 노회장 서약, 공포, 위임패를 증정했다. 제4부 권면 및 축하시간에 증경노회장 김재호 목사가 위임목사에게 “현 목사님께서 성산교회 1대 원로가 되셨다. 후임 목사님께서 바톤을 잘 이어받아 훌륭한 목회를 하시기 바란다. 말씀에 능력있는 목회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엎드려 기도하기 바란다. 건강 관리도 잘 하시기 바란다.”라고, 증경노회장 김형배 목사가 교우에게 “오늘은 성산교회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귀한 날이다. 원로목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기 바란다. 라오스 선교 사역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위임목사님께는 존경과 협력을 부탁드린다.”라고 권면, 주평강교회 정귀석 목사가 “현 목사님의 선교를 위한 열정이 부럽다. 목회를 잘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아벨 목사와는 7년간 동역했다. 할 일을 잘 해내는 사역자였다. 좋은 성도들과 함께 목회를 잘 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축사했다. 성남노회 목사부부합창단이 찬양, 당회서기 이재춘 장로가 광고 후 노회장 김승헌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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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9-25 08:56
총신 80회 유광철 목사, 총신 기숙사 건축 1000만 원 약정
총회 셋째 날 점심때 총신 80회(회장 최기성 목사) 동기들이 한 식당에 모여 점심을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유광철 목사(안산제자교회 시무, 총회 군선교부 부장)가 총신 기숙사 건축 기금 1,000만 원을 약정해 동기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 동기 모임에는 오정호 목사, 박춘근 목사, 김동관 목사, 김영복 목사, 호용한 목사, 양대식 목사, 유광철 목사, 이종석 목사, 김학목 목사, 조대천 목사, 이충원 목사, 박성규 목사 등을 포함 20여 명이 모였다. 식사 후 돌아가면서 그동안의 근황을 말하는 가운데 박성규 총장이 “기숙사 설계는 곧 맡겨 착공을 준비하고 있는데 기금이 부족한 가운데 있다”라고 말하자 유광철 목사가 그 자리에서 1,000만 원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유광철 목사는 원래 79회인데 졸업에 임박해 졸업자 명단이 누락된 것을 알고 학교에 확인해 보니 행정의 잘못으로 수강한 여러 과목에 대한 근거가 없어 결국 다음 해에 졸업하게 됐다. 80회는 이전에 본인들의 목회 일화를 담은 “목회행전”을 발간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신목회행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오정호 목사가 많은 금액을 후원했는데 이번 책 발간을 위해서도 1,000만 원을 후원했다. 이처럼 총신 80회는 꾸준히 모임을 이어가며 우정을 나누고 선한 일에 협력하고 있다. -
김병중(Th.D) 09-02 19:20
【내기준 명설교】 새빛교회 이철우 목사, 엡 4:25 ‘거짓말의 효용성?’
‘내 기준 명설교’는 말 그대로 내 기준으로 본 명설교이다.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의 명설교이다. 한 번 명설교를 했다고 언제나 그 설교자가 명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마침 그 설교를 들을 때 내 상황하고 맞았던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임을 다시 한번 밝힌다. 제55회기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회장 이해중 장로) 부부수련회가 “본질에 충실한 장로회가 되자”(벧전 5:1-3)란 주제로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8월 28일(목)-29일(금) 휘닉스파크 평창에서 개최됐다. 둘째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새빛교회 이철우 목사가 엡 4:25을 본문으로 ‘거짓말의 효용성?’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거짓이 통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원하는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대로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 진실을 말할 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거짓말은 안 된다. 아무리 거짓이 통해도 신자는 거짓을 피해야 한다. 거짓말은 관계를 파괴한다. 자기방어 기제로 거짓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스트레스, 불안을 가중하고 혼란에 빠뜨린다. 성경은 거짓말을 죄로 규정한다.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게 된다. 거짓말은 정체성의 문제이다. 거짓말은 마귀의 속성이다. 거짓을 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분별력이 필요하다. 총회는 거짓 이슈를 통해 갈라치기 해서는 안 된다. 진실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 예수님은 진실하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다. 신자는 진실을 말해야 자신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거짓은 효용이 있을 수 있으나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진실을 통해 상처를 입을 수 있지만 진실을 통해 회복된다.” 나는 목회하면서 거짓말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아무튼 거짓말에 대한 설교는 당시 거짓 기사로 스트레스받고 있던 상황에서 큰 위로가 됐다. -
김병중(Th.D) 09-02 12:47
【내기준 명설교】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행 16:1-5 ‘세 가지를 기억하라’
‘내 기준 명설교’는 말 그대로 내 기준으로 본 명설교이다.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의 명설교이다. 한 번 명설교를 했다고 언제나 그 설교자가 명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마침 그 설교를 들을 때 내 상황하고 맞았던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임을 다시 한번 밝힌다.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소장 유해석 박사)와 총회 군선교부(부장 유광철 목사)가 주최한 “변화하는 시대, 군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 포럼이 9월 1일 오전 11시 삼일교회(송태근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이때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가 행 16:1-5을 본문으로 ‘세 가지를 기억하라’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첫째, 잘 나갈 때, 잘 될 때 조심해야 한다. 경험과 결과가 말씀을 덮어 버린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계속 그 지역에서 선교를 진행했다. 그러자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바울의 선교 방향을 바꾸게 된다. 내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 ‘너 힘으로 할래? 내 힘으로 할까?’ 둘째, 잘 할 수 있을 때 조심해야 한다. 마귀는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다. 예수님은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기준은 성경이다. 셋째, 잘 하고 싶을 때 조심해야 한다. 기특한 생각이 일어날 때 목회에 문제가 생긴다. 자기 과욕, 의욕일 수 있다. 목회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설교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 임팩트가 강했다. -
김병중(Th.D) 08-07 05:07
유병희 목사, 제110회 총회 부서기 입후보 등록
유병희 목사가 금년 9월 22일(월) 충현교회에서 모이는 제110회 총회 부서기 입후보 등록했다. 유 목사는 등록 첫날인 8월 4일 오전 지지자들과 함께 총회를 찾아 등록 절차를 밟았다. 유병희 부서기 입후보자는 지난 4월 21일 팀수양관 (벚나무 관)에서 모인 제144회 황서노회 정기회에서 회원들의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110회 총회 부서기 예비 후보로 추천 받았다. 유병희 목사는 “생명력있는 총회로 섬기겠습니다. 첫째, 우리 교단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인 개혁주의 신앙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우리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은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습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개혁주의 신앙을 허무는 세속주의, 배금주의, 신비주의와 수많은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개혁주의 신앙의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의 신학의 정체성인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단 차원에 신학과 헌법, 규칙, 정치, 교회 예배와 성례, 선교, 행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이 전 영역에 미치도록 개혁되어야 합니다. 둘째, 부흥하며 전도하는 총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부서기 후보로 출마한 것은, 교단 차원에서 노회와 교회들이 강력하게 전도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존폐가 위협받는 긴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각 교회마다 출석 성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실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총회 차원에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부흥되지 않습니다. ‘불은 타지 않으면 불이 아니다. 전도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 R.B 카이퍼 - 셋째, CE 및 SCE 활성화를 돕겠습니다. 본 총회의 CE(기독청장년운동), SCE(기독학생운동)는 지금까지 우리 교단 교회들의 부흥 운동의 중추적 기능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점점 주일학교와 젊은 세대는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CE와 SCE 발전을 위해 전국 노회와 교회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단의 미래가 전도운동과 평신도 연합운동에 달려 있습니다. 본인이 부서기로 당선되면 총회에서 노회별로 CE 및 SCE 조직을 세우도록 행정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현재의 CE 및 SCE 지도부의 의견을 수렴하여 CE 및 SCE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돕겠습니다.”라고 추천 감사인사말했다. 유병희 목사 1964년 전라북도 순창 출생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90회 총회 경력: 위기대응본부 서기, 총회선거관리 심의분과 서기 역임 109회기 총회교단합병추진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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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구도의 ‘이현령비현령’
제110회 총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각 후보와 지지 세력들은 총대들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고심하고 있다. 과연 어떤 선거 전략을 써야 자기에게 유리할지 방법을 찾고 있다. 인간이란 꽤나 합리적인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은 허당기가 있다. 지난 109회 목사 부총회장 선거 때 나온 말 중 하나는 “영남 독식론”이었다.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비영남인이 부총회장에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06회 총회장 배광식 목사,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 제109회 총회장 김종혁 목사는 모두 영남인이다. 그런데 109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 구도는 서울·서북이었는데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도 영남 출신이었다. 그래서 서북지역의 김동관 목사 캠프 측에서는 영남 출신의 독식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영남인인 김동관 목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현재 총회 선거는 3구도로 돌아간다. 해당 지역의 노회에서 후보들이 나오는데 후보들의 고향은 지역과 상관없다. 그러다보니 지역이 순환됨에도 불구하고 다섯번이나 영남 출신 목사들이 총회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번 중 2번은 영남 지역 구도였다. 나머지 3번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올해 부총회장 출마 지역은 중부·호남이다. 중부지역에서는 정영교 목사가, 호남지역에서는 고광석 목사가 출마했다. 그러자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 돌고 있다. 중부 지역의 두 총회장은 제105회 소강석 목사와 제108회 오정호 목사이다. 그런데 출신 지역으로 보면 소강석 목사는 호남 출신이며 오정호 목사는 영남출신이다. 그러므로 5년간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출신별” 주장에 따르면 소강석 목사는 비록 중부지역이지만 호남인으로 분류해야한다. 이처럼 지역으로 분류하느냐, 출신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됨을 이르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정영교 목사는 중부지역에서 나왔지만 호남인이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해 조선대학교 공과대학을 나왔다. 고광석 목사는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지만 서울에 있는 개신대학원대학교를 나왔다. 중부·호남 구도이지만 결국 같은 호남인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단순히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우리가 남이가?”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영남인이 3지역구도에도 불구하고 내리 5년간 총회장을 했다는 것은 서울지역의 권순웅 목사와 중부지역의 오정호 목사,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가 영남출신으로서 타지역에서 목회의 뿌리를 잘 내렸다는 것이다. 두 지역이 묶여 있는 서울·서북, 중부·호남은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한다. 단순히 한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왔으니 다른 지역에서도 총회장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無논리이다. 물론 해당 지역에서 부총회장이 나오기를 다 원하겠지만 나머지 서울·서북, 영남 지역 총대들은 이들 지역과 큰 상관관계없이 투표한다. 그러므로 단지 지역민심에 호소하는 것은 표 확장성이 없어 보인다. 하필이면 두 후보 모두 호남출신이다보니 “신토불이 후보론”도 나온다. 호남지역에서 나고 자라 계속 호남에 있어야 “찐” 호남인이라는 것이다. 선거란 이처럼 합리도, 논리도 없는 구석이 있다. 그러므로 너무 지역 구도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2026년 제111회 총회를 이끌어갈 교단 수장을 뽑는 예비 단계인 부총회장 선거에서 대표 자격이 있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부총회장으로, 총회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후보를 뽑는 투표가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 구도 없이 전국구로 가자는 말이 나온지 이미 오래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합동 총회 부총회장 선거는 국가로 치면 지역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선거 관련 기사 링크: 110회 총회 목사 부총회장 입후보자: 정영교 vs 고광석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660김병중(Th.D) 08-06 01:59 -
1027연합예배, 전광훈 재 뿌리거나 숟가락 얹거나 우려
기대 반 우려 반인 1027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이 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 교계의 반응은 “필요하다”는 것과 “왜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양분된 견해는 여전하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입되어 있는 한 동창회 단톡에서는 누군가 내일 행사를 생중계하는 방송사를 소개하자 몇 명의 회원이 반발하고 탈퇴했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행사를 진행할 때 교계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과 걱정은 이미 광화문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전광훈 측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화면세점 앞쪽을 매 주일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인원이 모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전 측은 일간지를 통해 10월 27일 오전 11시에는 예배를 하고, 오후 2시에는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 국민대회”를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결국 1027연합예배와 시간이 겹치고 장소도 겹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0월 24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도 질의했을 때 “그들이 기도회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답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기자는 전 측이 이 행사에 재를 뿌리거나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고 예견한다. 전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이날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좋은 기회이며 먹을 게 많은 잔칫날이다. 전 측이 강력한 앰프를 사용하면 그 소음으로 1027행사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방해 받을 수 있다. 또한 저들이 저들의 시그니처인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기도회 집회 장소로 밀고 들어오면 1027행사는 결국 전 측의 모임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크다. 내가 전광훈이라도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순수한” 예배와 기도 집회는 전 측의 정치집회로 "오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 측 좋은 일만 시킬 것 같은 우려가 크다. 과연 1027 집회 측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며 우려스럽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내일 집회에 참석해야 할 것 같다. 내 예측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래본다.김병중(Th.D) 10-26 14:51 -
“목사 면직”, “노회 문제 제기”, "소송"....기자를 겁박하나?
한 통의 내용증명 문서를 받았다. 북일교회 사태에 관해 쓴 기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상대방이 문제 제기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관련기사링크: 북일교회 담임 반대 측, 노회 수습처리위 지시 묵살 난동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00 그러면 기사에 대한 것만 언급해야지 기자인 내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선 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관련한 전문이다. 총신대학교 신대원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H노회 소속의 동암교회를 사임하신 후에 J노회 소속의 C교회에 소속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관련하여 교단법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교단법은 목사님이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근거 규정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첫째, 목회자가 노회의 소속을 바꾸려면 타 노회 소속 교회의 청빙을 받아 이명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C교회의 청빙을 받으신 겁니까? 목사님이 C교회의 청빙을 받았다면 그 교회에서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둘째, 목사는 임직서약할 때 신자 목사'로 열심히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목사님이 현재 출석하시는 교회와 그 교회에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의 근거 서류를 가지고 계십니까? 주일을 범하고 헌금을 포함한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면직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말미에 민형사상 소송을 걸고 내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이 무슨 겁박인가? 2024년 10월 31일까지 목사님의 답변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민형사상 소송과 아울러서 목사님께서 교단 결의를 어기고 일방적으로 취재하여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신 일과 목사님의 현재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24년 10월 24일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 드림 이처럼 “목사 면직 ”, “민형사상 소송 제기”,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 제기” 등등 다양하게 기자를 겁박하는 이들이 바로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정체인가? 저들이 궁금해하는 내 신상은 저들이 민형사상 소송을 하면 그때 밝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 면직 사유가 아니니 그때 내가 그들을 “명예훼손, 협박”으로 맞 소송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끝으로 나는 북일교회를 이미 2번 취재하러 갔었다는 것도 밝힌다.김병중(Th.D) 10-2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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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취재 가다 보면 은퇴 목사들이 순서를 맡는 경우가 있다. 이때 대부분 말이 길다. 설교든, 축사든, 격려사든....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고, 사회자가 “짧게하라”고 요구해도 대놓고 듣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은퇴 후 말할 기회가 없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회중들이 탄식하거나 몸을 비트는 일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라는 말이 있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고 남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짧게 한다고 싫어할 회중은 없다. 짧을수록 회중이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나이 든 사람의 길어진 말 때문에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노인들은 행사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김병중(Th.D) 11-08 10:32 -
【칼럼】 양대식 목사 인생철학
나의 인생철학이 있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내게 도움 준 자 기억하고 은혜를 아는 자 되자. 배은망덕하지 말자. 주면서 살자. 손해는 입을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매사에 성실하자. 부지런하고 책임감을 가지자. 기도하며 살자. 고난은 힘이 드는데 지나고 보면 유익하다. 지나친 고집 버리고 융통성을 가지자. 주님께 지혜를 구하자. 남에게 상처 주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자. 정직하자. 주님의 은혜 사모하고 긍휼을 구하자. 주님께만 소망을 두자. 샬롬!김병중(Th.D) 11-07 20:01 -
【단상】 4개월 만에 북토크가 300 권이 됐다
지난 7월 북토크가 250권이 되었을 때 “북토크의 호응에 감사드리며”라는 기사를 썼었다. 4개월이 안 되어 50권을 더 읽어 이제 300권이 됐다. 책은 늘 대출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 취재하러 갈 때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다니며 지하철, 버스에서 읽고, 집에서도 열심히 읽고 있다. 왜 읽는가?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읽는다. 물론 대단한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고 관심 있는 책을 주로 읽는다.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다. 딱히 다른 취미가 없으니, 책을 읽기도 한다. 물론 유튜브가 재밌기에 자주 보지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 앞으로 얼마나 더 책을 읽을지는 모르나 아마도 죽기 전까지 읽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것인가 보다.김병중(Th.D) 11-0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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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선교 동력 회복 전략" - 양대식 목사(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총회 세계 선교회 GMS 이사장 진주성남교회 담임목사 Ⅰ. 서론 1. 선교의 중요성 세계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순종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이 선교 명령에 기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2. 선교의 기초 선교의 기초는 기도와 영혼 사랑입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 받고 은혜받아 기쁨으로 선교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마다 기도 운동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선교가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교회 영적 지도자는 교회 성도들에게 선교를 위해 기도하도록 훈련 시켜야 합니다. 세계 선교와 선교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는 조직이나 행정도 중요하나 기도가 중요합니다. 영혼 사랑이 선교의 기초와 동력이 됩니다. 누가복음 15:8-10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한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실족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영혼 구원, 선교를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선교는 선한 사업이고 최고의 선행입니다. 디모데전서 6:18-19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한 영혼의 구원 받음이 세계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귀히 여겼습니다. 교회마다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Ⅱ. 본론 1. 리더와 선교 어느 공동체나 리더가 중요합니다. 로마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영적 리더는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가르치고 설득시키고 도전해야 합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리더는 열정이 있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교회 리더는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를 사랑해야 합니다.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문제없는 곳은 없으며 리더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문제를 해결하기에 지혜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전도서 10:10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1) 리더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입니다. 선교사도 리더입니다. 교회나 선교 현장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는데 리더는 때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면 사역이 잘되고 해결 못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전도서 10:1-3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2) 리더에게 필요한 것 (1) 담대함 리더는 담대함,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담대하지 못할 때 리더로서 실패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소심함과 두려움이 실패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담대함으로 선교에 도전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2) 융통성 리더는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친 자기주장과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나 선교 현장에서 진리 문제만 아니면 융통성을 가지고 사역해야 합니다. 융통성이 없으면 부딪치고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고 성령은 하나 되게 합니다. 융통성을 가진 것은 넓은 마음이고 삶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융통성의 리더십으로 선교하고 목회하고 사역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22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융통성을 가지는 것이 리더의 지혜입니다. (3) 관계 관계가 중요합니다. 리더는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한 것입니다. 목회와 선교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면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회복입니다. 고린도후서 5:20-2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관계의 책이라 불리울 정도로 관계에 대해 많이 기록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인간관계의 지혜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12:9-21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관계를 위해 투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사가 선교하다가 그만두는 이유는 관계의 고통,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는 서로 잘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잘되는 비결 찾아 실천해야 하고 왜 관계가 깨지는가 찾아보고 조심해야 합니다. 관계는 아슬아슬합니다. 관계가 세워지기는 시간이 걸리나 깨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삶의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나 선교 현장에서 관계의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는 교회 성장의 열쇠입니다. (4) 관계 리더십 예수님의 리더십은 관계 리더십입니다. 죄인들과 식사하고 대화한 것은 관계를 통해 구원시키려는 관계 리더십입니다. 누가복음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사랑과 섬김, 희생이 관계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해야 관계가 잘되고 리더십이 세워집니다. 고린도전서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5) 관계 리더십의 특징 ① 준다. 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는 삶이십니다. 사랑을 주고 격려해 주고 물과 피를 주셨습니다. 모든 것 다 주셨습니다. 주는 자가 복된 자이고 주어야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② 살린다. 살리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생명 사역, 살리는 사역을 했습니다. 병든 자, 낙심된 자 살리시고 교회와 공동체를 살리셨습니다. 정치를 해도 살리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③ 세운다.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교회 세우고 제자 세우고 전도 팀을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나 선교지에서 세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세우는 것은 위로와 격려입니다. 2. 선교 회복 전략 전략이 중요합니다. 관계 교육, 관계 훈련을 교재로 만들어 교육 시키고 훈련해야 합니다. 관계가 잘되는 것이 최고의 선교 전략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고 프로그램이 좋아도 관계가 깨지면 모든 사역의 실패입니다.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지혜서인 잠언은 관계의 책입니다. 잠언을 읽고 공부하면서 관계의 비결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잠언은 언어에 대해 강조합니다. 말 때문에 관계가 잘되고 깨지기도 합니다. 잠언 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신뢰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뢰가 깨지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신뢰 관계의 열쇠는 신실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7-8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1) 선교 도전 선교는 도전해야 합니다. 선교는 최고의 가치가 있기에 도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선교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초대 안디옥 교회는 선교의 모델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① 선교는 쉽다. 선교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무조건 순종만 하면 되기에 선교는 쉬운 것입니다. 쉬운 선교를 하지 못하는 것, 어리석음이요 불신앙입니다. ② 선교하는 자는 행복하다. 선교는 주는 것이고 주는 자가 행복합니다. 선교하는 공동체가 행복합니다. ③ 선교하는 교회 부흥됩니다. 부흥이 선교의 목적은 아니나 선교하는 교회가 부홍됩니다.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④ 선교하면 복 받는다. 하나님은 선교하는 나라와 선교하는 자를 크게 축복하십니다. Ⅲ. 결론 그리스도인은 선교하는 자입니다. 선교하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선교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주님 재림을 소망하며 교단의 교회마다 선교의 열정이 회복되고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것이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김병중(Th.D) 08-14 17:03 -
【기고】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1. 서론: 목회와 사회복지의 연관성 목회는 영적 돌봄과 신앙 공동체의 형성을 주된 사명으로 하며, 사회복지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한다. 이 두 분야는 인간의 내적, 외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지역사회의 사회복지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목회 성장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 목회 성장의 현황과 과제 (1) 목회의 변화와 성장 동력 현대 목회는 기존의 예배 중심 사역에서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사회적 책임 수행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2) 목회 성장의 주요 과제 ① 세대 간 단절 문제: 젊은 세대의 신앙 참여 감소로 교회의 지속 가능성에 위기가 제기되고 있다. ② 다양한 요구 충족: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예배와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사회적 지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③ 사회적 신뢰 회복: 일부 부정적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공공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뢰 회복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3. 사회복지와 교회의 역할 (1) 교회의 사회복지 사역 전통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병원 설립, 빈민구제, 교육 지원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는 복음의 실천적 표현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되었다. (2) 현대 사회복지의 새로운 요구 현대 사회는 고령화, 빈부격차, 정신건강 문제 등 다양한 복지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요구받고 있다. (3) 사회복지와 목회 간의 상호 보완성 사회복지는 교회의 목회 사역을 보완하며, 교회는 복지 활동을 통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한다. 4.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의 통합적 전망 (1) 목회적 접근에서의 사회복지 통합 목회는 단순히 신앙 교육에 머물지 않고, 교인들과 지역사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돌보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상담소 설치, 지역 사회를 위한 장학금 지원, 취약 계층을 위한 돌봄 사역 등이 있다. (2) 사회복지적 접근에서의 목회 성장 기회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때, 지역사회와의 신뢰를 쌓고 교회의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인 수의 증가와 영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실천 방안 ①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 지역 사회복지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교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② 교육과 훈련: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을 제공하여 복지 사역의 효과를 높인다. ③ 통합 프로그램 개발: 신앙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통합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5. 결론: 지속 가능한 목회와 사회복지의 동반 성장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며,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복지 사역을 통해 복음의 실천적 면모를 강화할 때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갖게 된다. 현대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목회와 복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신앙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김병중(Th.D) 11-18 08:14 -
【기고】 109회 총회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09회 총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쳤다. 총회에 대해 총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몇 자를 남기고자 한다. 금번 109회 총회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기대 반으로 끝났다는 것은 1) 정년 연장, 여 강도사 인허 문제는 해결이 아닌 해법을 찾아서 결의했다는 점이고, 2) 회의 진행에서 총회장의 의사진행은 그대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가며 소통하면서 결의를 꾀하려고 했다. 그래서 찬, 반의 소통을 이루어 갔다. (이전 총회에서는 총회장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은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고 묵살하거나, 결의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진행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사례가 있다) 개혁신학적이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 정처 없음이 만연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총회의 결의가 우리의 삶과 신앙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우려 반은 또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게 했다. 1)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 하였기에 우려 반이다. 우리 선배들은 오랫동안 주류와 비주류라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정치를 했다. 10여 년을 넘게 주류의 정치적 독식은 비주류의 이탈을 낳았고, 우리 총회 안에는 총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기치를 걸고 교갱협이 출현되면서 교갱협 인사의 목사 부총회장 출마가 이루어지고, 교갱협 안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후보가 양립되면서 교회 영성목회의 후보를 내고 결국은 영성목회의 후보가 당선되면서 총회는 금권선거가 만연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러한 금권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비뽑기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7년 전에 분열되어 나간 비주류가 ‘신학과 신앙이 같으면서도 다른 교단을 형성하였기에 이제는 합병을 하자’고 하여 교회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단 합병을 하였다. 그리고 제비뽑기 방식에서 절충형 제비뽑기 방식으로, 다시 직접선거로 선거방식이 바뀌면서 영성목회에 가입한 분들이 총회장이 되었다. 사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된 것은 108회이다. 내가 알기로는 다른 회기에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교갱협과 영성목회의 힘겨루기(?)는 109 회기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합동포럼이라는 새로운 단체가 전면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우려 반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총회의 헌의와 처리에 대한 우려이다. 한쪽에서는 잘 준비된 총회라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완전히 기획된 총회라는 평가도 한다. 내가 봤을 때는 총회 자체의 회의와 결의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점수로 보면 B 학점이나 C 학점 정도는 되는 총회였다. 그러면서도 우려 반이 되는 것은 109회 총회가 한 집단과 단체에 카르텔화 될 소지가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특보체제가 잘 운영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특보들이 총회장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이 입이 되어 성경과 헌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말하고 시행하려고 한다면 109회 총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룩한 교회로 항해하지 못하고, 거룩한 산을 오르겠다고 돛대를 부러뜨려서 등산용 지팡이를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총회장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할 때다. 지혜가 없으면 어떤 지혜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증경총회장과 부총회장의 발언이 많았다. 원로들의 지혜와 지식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서는 어른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또 필요에 따라 요청했을 때와 잘못 결의하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발언하여 후배들에게 깨우침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우려가 된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발언은 조언이나 권고이어야 하지 참견이나 관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계속하여 어른 대접으로 발언을 주어서 결정해야 할 총대들의 발언에는 조금 소홀히 했다. 만일 직무상의 결정에 따른 결의를 다시 묻고 조언을 구한다면 총회는 개혁되지 않고 구태가 만연되게 될까 우려된다. 109회 총회는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리추얼이 종말을 고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되고 갱신되어서 리추얼이 힘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기점에 있다. 항상 우리의 삶인 리추얼은 관습과 전통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사실 관습과 전통은 겉으로는 동일하게 보일 때가 많다. 이러한 피상적 유사성은 우리의 인습주의 즉 전통을 해롭게 한다. 전통이 되어버린 관습, 특히 성경의 해석은 진짜인 정통을 죽이고 현실에서 숨통마저 끊어 놓는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여성 강도권에 대한 허용 결의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지만 그 전통 속에 있는 관습은 항상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이제는 관습이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나서 전통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역사적으로 전통 속에 관습이 되어 버린 전통은 어느 순간 정통의 자리에서 내려와 관습이 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판에 박힌 체 일상이 되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제109회 총회는 전통 속에 관습으로서 수동적으로 이해되는 여성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고 노력하며 고군분투하려는 모습이 총대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신학의 전통은 정통의 자리에서 관습이 되어 물러서게 될 때는 항상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각자가 책임을 지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상 지금의 전통이 된 정통은 한때는 분명 혁신이었다. 그런데도 전통이 되어 버린 정통은 혁신을 아니, 개혁을 마귀가 예수님을 싫어하듯 싫어한다. 혁신과 개혁이 정통이 되고 그 정통이 관습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매너리즘의 늪에 빠지고 결국은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병적인 공동체적 반응을 하며 소통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고 전통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며 분열하고 적대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견해든지 우리들의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 금번 제109회 총회는 신학적 진영논리에 빠지지는 아니했지만 결국은 주일성수의 문제와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는 벌써 진영논리로 변질되고 있다. 심지어 장신도 아닌 기장의 신학으로 이야기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다. 진영의 신학(조직신학)이 아닌 성경(성경신학)으로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은 진영의 논리로 서로가 무장하게 될 때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삶 속에서 의미도 뜻도 모른 체 주술화 되고 마법화 된다. 진영의 논리로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를, 주일성수의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로 바라보고 신앙적인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러한 기로에 놓여 있는 총회가 금번 총회이다. 그래서 우려 반 기대 반이다. 결국 기대도 우려도 다 지나갈 것이지만 그래도 기대도 해보고 우려도 해본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나 타당성을 그리고 적합성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고 둔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 제109회 총회에서는 신학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변해야 된다는 기대가 총대들 속에 있음을 감지했다. 기대와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15회 이상을 총대로 참석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은 우려도 기대도 다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총회가 그리고 그 결의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려는 아닌 것 같아서, 기대는 그럴 것 같아서이다.김병중(Th.D) 10-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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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한국은 강고한 계급사회이다
세습(世襲)은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을 말한다. 소위 말하는 상류층 - 단지 돈이 많은 계층이다 - 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세습한다. 이는 주로 교육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통해 이뤄진다. 그럴수록 하류층 - 단지 돈이 적은 계층이다 - 은 중산층에 진입하기가 어렵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나기는 어렵다. 개천이 복개공사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젊은이들을 절망하게 한다. 어찌할거나? 10퍼센트만이 번듯한 일자리를 갖는다 20대 가운데 노동시장의 '내부자'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번듯한 또는 '괜찮은 decent' 일자리를 초임 기준 월 300만 원 이상을 주는 일자리라고 한다면, 2017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연 7만 2,000명만이 내부자라고 할 수 있다. 이(p. 38)는 동일 연령에서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의 11.4 퍼센트 정도로 추산된다. 단순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전체 취업자(자영업자 포함) 가운데 1차 노동시장의 종사자라고 추정되는 비율인 16.5퍼센트보다 턱없이 낮은 수치다. 지금의 20대들은 이 전보다 훨씬 더 중산층이 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p. 39). 결국 지금의 20대는 '번듯한 일자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이전 세대보다 더 치열하게 벌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경쟁 과정에서 성별, 계층별, 학력별, 거주 지역별로 누가 더 '기회'를 많이 잃는지 그리고 누가 '선방'하는 지에서 그들의 운명은 갈린다. 중산층 또는 중상위층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제 '명문대' 졸업장을 요구하는 고급 사무직 또는 전문 기술직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90년대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어려워졌다. 예전처럼 지방 국립대를 졸업해서 지방에 위치한 대기업에 취직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거나 또는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p. 86) 전자 산업 대기업 생산직으로 서울의 대졸 화이트칼라 부럽지 않은 고소득을 얻는 삶의 기회는 오늘날 20대에게는 거의 존재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p. 87). 여러 차례 언론 기사로 알려졌다시피 사교육 산업은 80년대 학번 운동권들의 호구지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들이 오늘날의 대치동을 만들었다. 시작은 1992년 서울 시내 중고교 재학 생의 학원 수강 허용과 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였다. 「신동아」 2018년 10월호의 '사교육 철옹성 대치동' 기사는 수능이 "기존의 암기식 학력고사와 달리 학생의 사고력, 논리력, 비판 능력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으면서 "대학 시절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토론과 세미나를 반복한 운동권 출신에게 최적화된 입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서술한다. 대치동이 한국 교육산업의 실리콘밸리 같은 입지를 확고히 한 결정적 계기는 2000년대 초에 이루어진 '쉬운 수능'과 '논술 강화'였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상위권 대학이 그나마 변별력 있는 논술 비중을 늘리면서 전직 운동권 출신들이 대학교 재학 당시 '세미나(사회과학 서적을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의식화하는 학습 과정)' 하듯 학생들을 가르치는 논술학원이 급격히 세를 불려나갔다. 대학의 수시 전형 확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치동 논술(p. 128) 학원계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장민성 씨의 유레카논술학원처럼 프랜차이즈를 내며 기업화를 시도한 곳이 생겨나던 것도 이 시점이다. 손주은, 이범, 故 조진만 씨 등이 2000년에 세운 메가스터디는 스타 강사와 인터넷 동영상 강의의 확산에 힘입어 2000년대 초중반 급성장한다(p. 129). 흔히 이야기하는 '집안 좋은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다'는 속설은 정말로 참이다. 양육 환경이 좋은, 즉 부모가 경제력이 있고 학력이나 직업 등 사회적 지위도 뒷받침되는 계층 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는 인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비인지적 능력도 다른 계층의 자녀들보다 더 뛰어나다. 그리고 비인지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대치동 학원가 등을 통한 교육 투자 는 결실을 맺는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p. 144). 정상가족 형성 과정에서 부모의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점은, '독립적 20대'라는 개념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한다. 특히 중산층에게 '가족주의'는 정상가족의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다. 자신의 정상가족을 구성할 수 없는 취약한 경제적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현재의 가족(주로 부모)이 제공하는 자원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표현대로 오늘날의 20대는 "가족을 만들 수도, 가족을 떠날 수도 없는" 개인이다. 그들은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현재의 가족과 미래의 가족 모두를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가족을 만들려고 시도하든 그 시도를 단념하든 언제건 현재의 가족에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을 전제로 하는 현재 20대 담론의 주된 접근방식 과 달리, 재생산을 위한 보급기지 또는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의 제공처로서 그들에게 가족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중산층에서는 동류혼(같은 계층끼리 결혼하는 행위)이 많아 졌는데, 이는 결혼이 가족 단위의 계급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4인 단위 핵가족을 꾸리는 것 자체가 '울타리' 안에 있는 중산층의 특권적 행위가 되고 있다(p. 154). 자동차 산업에서 고용 증가가 주로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모듈화의 영향이다. 조성재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2년 보고서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완성차 부문의 고용은 외환위기 이전과 거의 동일한 수준이며 부품 부문의 고용 확대에 의해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또 현대차가 2000년대 중반 해외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부품 부문 고용 확대의 원인이다. 국내 생산설비를 늘린 것은 1996년 현대차 아산공장 건설과 2013년 기아차 광주 공장 증설이 마지막이다. 해외에서 생산하는 완성차용 부품 가운데 다수가 국내에서 만들어진다. '귀족 노조'라고 비난받기까지 하는 완성차 조립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2000년 이후 뚝 끊긴 건 노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듈화는 품질 개선과 생산 효율 개선을 위해 현대차 경영진이 내린 결정이었다. 또 해외 공장 증설도 현대차의 해외 진출과 현대차의 주력 시장이 한국에서 먼 미국이나 유럽이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하지만 50~60년대생이 주력이었던 현대차 생산직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가 자동차 공장의 탈숙련화와(p. 210) 그에 반대급부처럼 이루어진 블루칼라 기능공 역할 축소- 화이트칼라 엔지니어 역할 강화를 가속화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블루칼라에서 '번듯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길이 끊기게 된 것이다(p. 211). 지금의 문제가 '세습 중산층의 독주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면, 세대 간 양보론과 교육의 공정성 확보론만큼 그들의 영향력과 독주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세대와 공정 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여 '세습'이라는 진짜 문제를 숨기면서 적당히 양보하는 척하며 실질적인 손실을 보지 않는 노회한 86식 정치 투쟁의 구호가 한국 사회를 뒤덮는 양상이다. 문제는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그대로 관철되고, 유지되는 2019년 한국 사회의 시스템 그 자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양보와 공정이 아니라 의무와 공평이 아닐까. 시작 단계에서부터의 공평과 그것을 위한 세습 중산층의 경제적• 사회적 의무 부담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가장 분명하게 요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 equality of opportunity 이다. 단순히 입시제도의 공정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수준의 교육 기회와 능력 배양의 기회에서 하위 90퍼센트도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OECD, IMF, 세계은행 등에서 나오는 관련 보고서에서 으레 등장하는 표현이라 식상해 보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급진적인 주장이 가능해 보인다. 가령 기회의 평등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영유아기에서부터 공공 보육이나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p. 291)은 교육을 통한 계층 재생산이 매우 어린 시기부터 이루어짐을 보일 수 있으며, 교육 과정이나 교육 재정 구조 개편을 촉발시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최소 수준 social minimum에 대한 합의와 그에 따른 적극적인 세원 확보다. 노동시장의 변화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부조하자는 것이다. 이는 그들 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도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중요하다. 또 재원 마련을 위해 현재 노동시장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수혜를 받고 있는 상위 10퍼센트 중상위층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 심상정 의원실이 지난 2018년 9월에 공개한 2016년 근로소득 1000분위(0.1 퍼센트 단위)별 급여와 결정세액(실제로 납부한 근로소득세액)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근로소득 상위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급여는 연 7,200만 원이었는데 연말정산 등을 감안한 실효세율은 5.76퍼센트에 불과했다. 실효세율이 10퍼센트를 넘기 위해서는 연 1억 500만 원 이상을 벌어 상위 3.2퍼센트 내에 진입해야 했다. 흔히 이야기되는 상위 1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연1억 4,700만 원을 버는데, 그중 15.6퍼센트를 세금으로 냈다. 결과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상위 1~10퍼센트를 대상으로 걷을 여력이 충분한 셈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불평등이 상위 1퍼센트와 나머지 99퍼센트(p. 292)의 격차뿐만 아니라 상위 10퍼센트와 나머지 90퍼센트의 심각한 격차 문제에 기인한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세습 중산층은 그 격차를 '능력의 차이'로 포장하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계층 지위를 물려주고자 노력한다. 그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사회적 계층 이동을 가로막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 해결의 단초가 있을 것이다(p. 293).김병중(Th.D) 12-05 01:53 -
【북토크】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세상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그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차별의 근거일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능력주의의 한 평가 방식이 시험이다.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정당한가를 이 책은 묻고 있다. 기존의 생각을 흔드는 관점이라 좋았다. 허구적인 능력주의의 논리 능력주의를 이루고 있는 논리들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한 능력(지능/재능과 노력 또는 성취)이 존재 한다. • 능력은 시험과 같은 적절한 절차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p. 19)있다. • 현대 사회는 (학교교육 등을 통해) 동등한 출발선, 즉 성장과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 각자의 능력은 오직 개인의 책임이다. • 사회의 불평등과 차등은 (대부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것, 즉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이러한 명제들은 능력주의에서는 명백한 진실이거나 상식인 것 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결코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으며, 현실과 매우 어긋나는 허구적인 명제인 경우도 많다. 능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부터가 그러하다. 먼저, 게임 캐릭터의 설정 수치마냥 개인에게 고유한 능력이란 존재할 수 없다. 유전적 요소나 소위 타고난 재능을 인정하더라도, 유전자의 요소가 발현되는 것이나 어떠한 능력이 발달하는 것은 성장 환경을 비롯하여 사회 경제•문화적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 역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같은 사람이 컨디션에 따라, 누구와 같이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성과를 보이는 사례들을 접하지 않던가. 또한 무엇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인지 자체가 사회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능력은 본질적으로 사회 제도(p. 20)와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개념이다. 능력은 환경적 ·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 그러므로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나 절차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잘 준비된 평가 도구들은 어떤 상황에서의 한정된 영역의 능력은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한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측정 결과가 촘촘하고 '변별력' 있을수록 더 그렇다. 우리는 인지 능력을 평가하는 지필 시험 성적과 실제 작업 성과 사이에 괴리가 나타나는 사례를 자주 겪지 않던가. 평가의 방식이나 기준 자체에 내재된 차별, 편향이 유불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규모가 큰 회사에서 표준화된 성과 평가에 의해 급여를 정한 경우에도, 여성과 소수 인종은 편견 때문에 백인 남성보다 인상 폭이 더 낮게 정해졌다는 사례도 있다. 우리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고 능력의 차이도 불평 등도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는 믿음은 어떨까? 한국 사회를 비롯해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교육비의 격차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는 물론,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주거 환경이 어떤지 등에 따라 배움의 기회부터 건강까지 격차가 생긴다. 개인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목표(p. 21)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현실의 격차와 불평등은 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맥이나 상속 등의 요소를 더하면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과연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일까?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과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정당한가? 비록 우리가 이런 원리에 아주 익숙하긴 하나, 이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은 아니다. 흔히 나오는 것은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이 보상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노력의 과정이 아닌 시험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차별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실상과는 다를뿐더러 앞뒤가 바뀐 논리이기도 하다. 개인이 어떤 노력을 했다고 해서 사회가 반드시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만일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했다면, 그 보상이란 성장하고 변화한 자기 자신 자체이다. 노력하니까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면 더 많이 보상한다는 시스템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에 맞춰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나 기업 등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따르고 역량을 개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보상을 약속 한다.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는 방식은 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직위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가령 중국에서 시작된 과거 제도는 인재를 선발 하여 통치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능력주의의 정당성은 바(p. 22)로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다. 기업의 경우라면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고 승진시킴으로써 기업의 이익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보상함으로써 노력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논리 역시,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하고 노력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능력주의는 공정성과 개인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 국가나 기업 등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 전체에,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바람직한지를 얼마든지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p. 23). 능력의 측정 또는 입증 과정, 시험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단'을 요구 한다. 앞서 말했듯이 능력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개인의 전적으로 고유한 능력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차등적 보상을 약속하기 때문에, 개인의 재능이나 잠재적 능력, 최소한 특정 시점의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고 가시화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지능 검사 등의 평가 도구와 함께 발달해 왔다. 능력주의의 신뢰성은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평가 시스템 -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식으로는 시험, 특히 인지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필 시험 -에 의지한다. 개인이 홀로 시험지 앞에 앉아서 답을 적어 내고 채점을 받는 과정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개인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믿음을 주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시험은 "교육할 의무는 묻지 않고 응시자 개인(p. 26)이 학습한 결과만 따지"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묻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한다. 이 때문에 능력주의를 강화하려고 할수록 시험이라는 방식도 강조되기 쉽다. 시험은 한국 사회의 불투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점수화되는 시험, 특히 지필 고사를 거치지 않은 채용은 그 자체로 특혜나 비리가 있었으리라는 의혹을 받곤 한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논거 중 하나는 기간제 교사들 중 일부가 인맥에 의해 채용되었으리라는 의심이었다. 일부 학교에서의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과장이나 시험 부정 의혹 사건은 '대입 수능 비중 확대'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의심과 불신 때문에 비리나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한 방법인 시험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이야말로 가장 공정하고 확실하며, '흙수저'인 개인도 노력 하여 승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각종 통계나 연구가 이를 부정하고 시험 역시 가정 환경이나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지적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어쨌건 승리하고 성공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자신이 그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0%가 아니라면 실패는 자기 책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학교는 물론 노동 영역에서도 '공정한 시험'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가장 정당한 방법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시(p. 27)험의 기회가 평등을, 성적에 따른 보상이 권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득세하고 있는 사고방식을 요약하면 이렇지 않을까. '존엄과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너의 자격과 능력을 증명하라.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으로' 이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험을 준비하느라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력' 그 과정에서의 고생과 인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노력과 인내를 강조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공정한 능력주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서사를 들여다보면 보상 심리와 인지 부조화적 태도가 곧잘 발견된다. 자신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했으니 마땅히 그러한 고통에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그런 노력과 고생 없이 결실을 얻(으려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처럼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경우 역시도 능력주의 논리의 자장 아래 있음은 분명하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경력은 물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수하고 일한 고통과 인내 또한 합당한 대가로 인정받지 못 한다. 오직 시험이라는 능력을 입증하는 과정에 연결된 노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고 지능•학력을 숭배하던 관습 그리고 뿌리 깊은 '자기계발'의 논리와도 연관되어 있을 터이다(p. 28). 교육 문제의 해결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더불어 가야 한다. 불공정에 항의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제국대학 입학 시험의 불공정성에 항의 하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1961년 쿠데타 직후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에도 입학 비리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문제는 불공정에 분노하는 걸 넘어 불평등 해소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자이자 의사인 킴블리 노블은 한 가정의 소득이 아이의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며 저소득층 가정에 소득을 더 보장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은 삶의 모든 영역에 불평등을 낳는다. 가난 속에서도 능력을 한껏 펼치는 일은 전교 꼴찌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직장 규모와 학벌, 성별, 지역 등 유무형의 암묵적인 기준으로 층층이 차별화된 임금 제도를 교정해서, 전체 사회에서 노동자의 몫을 높이며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고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더불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여, 혹시 직장을 갖지 않았더라도 인간으로서 죄악은 아니게 해야 한다. 직장을 갖지 않았어도 인간이 할 일은 차고 넘친다. 독립운동가들이 어디 직장을 제대로 가진 적 있었던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사실상 직장 밖에서 더 많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려면 우선 단기적으로는 복지의 기반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복지 정책은 개인별 복(p. 61)지보다 소속 직장별 복지에 가까워서 열악한 직장일수록 복지조차 매우 빈곤하다. 낮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고 그들의 휴식과 임신·육아마저 헐값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모든 시민들이 공적 활동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누구나 희망한다면 몇 년쯤 공공 기관에 근무하거나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러면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고 삶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참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 전체의 공공성도 높일 수 있다. 세금 내고 4~5년에 한 번씩 하는 선거로 끝나는 '민주 공화국'이 아니라, 공적 활동에 직접 참여할 기회가 한평생 동안 얼마 동안은 있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공적 시민이 되고, 공적 시민으로서 기본금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당장 실현 될 리는 없으나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만약 이런 상상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듀이와 파커 파머가 강조했듯이 학교교육은 더욱 중요한 공적 사회 기구가 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시민교육을 강화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비판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고 직접 시민으로서 적절한 제도적 제안 과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p. 62). 결론적으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빠른 산업화 전략에 따른 엘리트의 양성, 민주주의에 대한 희생 속에서, 근대화가 전근대적 신분의 해체가 아니라 '나도 노력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평등'으로 변형되면서 강력해졌다. 따라서 아시아의 시험 문화는 교육 현상이라기보다는 정치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시험 문화는 사회 상황이 왜곡되면서 형성된 지위 상승의 평등주의이고, 사회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인적 적응과 지위 상승 전략을 추구하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이들 나라(p. 78)에서 진행된 불균등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행위 주체는 개인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을 둘러싼 격렬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가족 수준의 자원 결속과 지원, 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구조화된 한국 등의 나라에서는 특별히 '헬리콥터 맘'과 같은 현상으로 대표되는 온 가족이 동원되는 입시 문화가 나타난다. 문제는 이처럼 가족이 동원되는 평가 집착적 시험 문화가 사회적으로 보다 좋은 삶을 위한 연대를 해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lism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시아의 시험 문화를 특징짓는 가족 교육열이며, 지위 상승을 향한 열병이 국가 차원의 종교 의식처럼 치러지는 이유이다. 요컨대, 신분제적인 직업 위계와 불평등, 능력주의적 교육과 시험이 시험 문화를 초래하는데, 이러한 시험 문화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족의 배경과 자원이 동원되는 양상을 띠게 되며 능력주의의 발현을 저해한다(p. 79).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학벌이 전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문벌 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학벌과 패거리 문화를 사회적 합리화와 합리적 개인주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연고주(p. 107)의, 정실주의, 파벌주의에 대한 대응 논리로 개인주의, 합리주의, 능력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동문'으로서의 '학연'이 다 '학벌'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IMF 사태 이후의 한국 사회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든 공동체적 관계와 사적 친분과 연결을 통한 사회 안전망이 다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회 윤리로 구축되고 있던 시기였다. 가족, 친구, 이웃 관계가 다 무너지고, 개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가 왔음에도 학벌없는사회는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곤 했다. 우리가 꿈꾼 것은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였고,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결과적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분명 있다. 학벌주의는 능력주의에 의해 패퇴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의해 무너졌어야 했다. 능력주의는 민주교육•평등교육의 이념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능력주의가 학벌주의의 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점은 우리의 한계였고 오류였다. 당시에도 '스펙'이라고 불리는 사회 현상은 문제가 되고 있었고, 성적 경쟁이 스펙 경쟁으로 변질된 것을 비판했지만, 그것이 총체적인 사회 통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위력을 발휘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2016년 해산까지 학벌없는사회의 경험은 민주화 이후 한국(p. 108)사회의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재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투쟁과 패배, 한계와 오류의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p. 109). 현재의 계급 위치를 지키려면 결국 지금과 같은 불평등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가 희망이 되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에겐 급격한 변화는 불안의 요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장 질서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위에서 일정한 기득권과 지분을 갖고 있는 '범민주 시민'이라 불리는 계급이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가장 강력히 갈망하는 것이며, 그 임무를 수행할 정권을 중심으로 가족주의적으로 결속하여 체제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실력 덕분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을 다른 계급들에게 주입시킨다. 이 믿음은 기득권을 세습한 보수 기득권층보다 자력(?)으로 취득한 자유주의 진보 기득권층에서 더 강하다. 능력주의는 고소득 전문직의 '강남 좌파'나 능력 있는 '민주 시민'들이 추종하는 자기 신앙이 된다. 이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 등에는 민감성을 보이지만 능력 차별과 계급 차별은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급 차별을 가려 주기 때(p. 112)문이다. 능력주의는 상층부의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은 완화한다. 하지만 계급의 진입 장벽은 더 높아진다. 지배자들이 평등을 깨트리고 서열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데 서열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은 인민을 다수로서 단결하게 한다. 서열화는 피지배 계급 서로가 서로를 착 취하도록 만든다. 자기 위의 사람은 복종하고 동경하며, 자기 아래의 사람에 대해서는 군림하고 무시한다. 위계는 지배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멸시를 힘을 합쳐 되갚는 대신 아래로 향하도록 만든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너보다는 낫다는 것이 사회적 심리의 기저를 이룰 때 지배자들은 손쉽게 전체를 다스릴 수 있다. 지배자에게 두려운 것은 사다리를 오르려는 상승의 욕망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평평해지려는 사람들이다. 저들보다 못하지만 이들보다는 낫다는 것은 중간 계급의 심리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중간 계급에 대해 '상류층에 대해서는 도덕적 우월감과 문화적 열등감을 가치고 하층 계급에 대해서는 도덕적 열등감과 문화적 우월감을 갖는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간 계급에게 이 쌍방의 열등감으로부터의 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지적 우월감'이다. 지식 자본은 그 누구보다 중간 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이다(p. 113). '경쟁력'이라는 시장 논리로 대학을 도태시키고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성'의 논리로 대학을 모두의 것으로 탈환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식과 금융의 결탁을 끊어 내고 학벌의 자본화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벌의 가치를 무가치화하고 반대로 학벌주의/능력주의가 무가치화한 것들의 가치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노동에 대한 가치와 능력에 대한 가치, 양자의 교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와 재협약이 필요 하다. 학벌이 개인의 자산이 아니게 하려면 대학교육 공공화가 필수적이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대학 공공화를 위한 필수 정책이다. 교육에서 수혜자 비용 부담 원칙은 교육을 투자로 보는 관점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막대한 등록금과 교육비를 개인이 부담 하는 제도하에서는 개인들에게 공공의 책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기 어렵다. '당신들을 교육시키는 데 드는 돈은 국민이 부담했다. 그러(p. 126)니 국민을 위해 일하라'라는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에 요구 되는 비용과 노력의 값이 커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진입 장벽도 그 만큼 높아진다. 비싼 교육 비용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 기회를 차단하고 계급 간 불평등을 초래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이것은 원한다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다. 독일은 전국적 위헌 소송으로 대학 등록금을 무상화했다. 반값 등록금이나 학자금 대출, 소득 분위에 따른 차등적 국가 장학금 제도가 아니라, 대학 무상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는 빈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넘어서는 계급 간의 정치 협약이다(p. 127). 2020년 '인국공 사태'도 서울교통공사 사례와 유사한데, 하나 차이가 있다면 주로 정규직을 목표 삼은 취업 준비생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도 서울교통공사 사태 당시 반발했던 정규직들의 주장과 판박이처럼 똑같다. '깜냥도 안 되는 비정규직이 감히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보안 요원은 공사 공채 시험을 통해 선발 하는 직원과 직무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며 기존 정규직의 몫을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취준생들은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들고 일어났다. 무엇이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그 멘탈리티를 투명하게 드러낸 글이 있다(p. 139). 연대숲 #68384번째 외침: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인재를 찾는가? - 취업과 엘리트주의의 담론에 대한 견해 이번 인국공 사태와 소위 '지방 인재'의 취업 할당 법안 발의 이후로, 대한민국은 노동의 가치, 경쟁의 가치 등을 놓고 의견 대립을 보이는 듯싶다. 그러나 그 대립의 과정에서 어이없는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긴 제보를 적어 보려 한다. 그 어이없는 담론이란, 기업이 '학벌과 무관한' 실무 능력을 중시해 개인의 고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실무 능력 및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 바로 그 학벌을 얻어 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했으며, 그 이상으로 특출나게 '뛰어나야' 했다. 누가 인재인가? 필자의 주변에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1년을 꼬박, 자는 시간만 빼고 20시간가량을 서서 살았던 누나가 있다. 지방에서 3수를 해 입학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보다 유식한 형도 있다. 가장 힘든 전공 과목과 복수 전공까지 챙기면서도 취미로 작가 수준의 유화를 그리던 누나도 있다. 이들의 노력에 대해 보상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들의 역량을 보자.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정말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과 학벌이 무관한가? 필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의 역량을 발굴하고 증명했기에 소위 학벌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입을 위해 경쟁하던 전체 인구의(p. 140) 상위 5% 안에 우리가 있었던 것은, 그저 머리 좀 좋아서가 아니다. 총체적인 역량의 우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트가 스스로를 엘리트라 칭하는 것에 거리낄 이유가 뭐 있을까. 우리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우리와 함께 경쟁했던 이 사회의 그 누구도, 태연히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현 정부는 어디에서 지방 인재를 찾는가. 어디에서 여성 인재를 찾는가. 지방에서 3수 해서 기어코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그 형이 진짜 지방 인재다. 사람 몸에 저 정도 재능이 다 들어가나 싶은 그 누나가 진짜 여성 인재다. 현 정부의 고질적인 병폐인 포퓰리즘과 대중주의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대학, 시민단체 등에서 소위 인재를 발굴하겠다는 모순을 야기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학우들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제쳐 놓고 인재를 논할 수 없다. 이는 오만한 말이지만 동시에 사실이다. 아직 직무에서 역량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일개 취업 준비생이 지닌 자의식치고는 지나치게 비대하다. 그 자의식은 오직 대학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소위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저 글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개인의 실무 능력과 자질과 학벌이 정말 무관한가?"라고 물은 다음 어떤 논증도 없이 '나는 특출(p. 141) 나게 뛰어나다'라는 선언으로 비약하는 부분이다. 근거처럼 제시한 게 "집중력, 끈기, 저변 넓은 배경지식, 다재다능함" 인데, 정작 글쓴 이는 이것이 왜 학벌 좋은 사람만의 자질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 또는 '화용론적 모순'이라 부른다. 화자의 주장과 행동이 상충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저 횡설수설하는 주장은 글쓴이가 사실관계나 추상적 개념을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본인이 원하는 업무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p. 142).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 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 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코레일에서 매표 업무를 하는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노동자들과 동일한 업무를 하는 정규직 역무원의 차별은 지속된다. 설령 정규직의 노동 조건이 더 나은 것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은 정당한가. 게다가 근속이 길어질수록 격차는 더 확대되고 있다. 입직 통로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평생에 걸쳐 격차가 벌어지는 이 현실은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격차의 확대를 설명할 정당한 근거는 과연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능력주의는 답을 할 수 없다. 능력주의의 근거가 되는 시험 자체의 공정성에도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은 노동자들은 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생각 한다. 흔히 말하는 '수저론'은 젊은 노동자들이 능력주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점차로 공개 채용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사회가 더 불안정해질수록 안정적인 노동 조건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안정적으로 시험공부를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과 그런 조건이 되지 않는(p. 174) 사람들 간의 경쟁이 과연 공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시험'을 매개로 한 능력주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에서의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직무급제'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 사람이 어떤 직무에서 일을 하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해 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능력주의 요소가 있다. 병원을 예로 들면 의사와 간호사, 의료 인력과 비의료 인력 사이에 격차가 있고 이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승진과 승급, 임금 체계를 달리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직무급제는 여기에 더해 직무에 따라 고용 형태를 세분화하고 위계를 만든다. 어떤 직무는 시험을 통해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그보다 하위 위계의 직무는 면접을 통해 무기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등 시험과 직무와 고용 형태를 연계 하면 그러한 능력주의 구조는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노동 조건에서 차별을 당한다. 이런 경우를 차별이라고 말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 문제가 되지만, 직무에 따른 차별은 잘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여성이 주로 하는 직종인 돌봄 노동은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잘 인정받지 못한다. 이때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가 받는 차별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가 낮은 일을 하니까 받는 대우로 간주된다. 즉 차별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차별이 마치 '차이'인 것처(p. 175)럼 인식되고, 차별의 책임도 개인에게 전가된다. '네가 능력을 키워서 더 좋은 자리에 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p. 176).김병중(Th.D) 12-05 01:19 -
【북토크】 다른 직업의 사람을 통한 통찰
나는 드라마를 거의 안 본다. 최근에 본 드라마는 ‘오징어 게임’ 정도이다. 드라마를 안 본지 오래됐다.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봐야한다는 것도 싫고, 별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에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쨌든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기획 피디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잘 만든 작품 하나는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이런저런 의미가 부여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과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반면 한순간에 무가치하게 사라지는 작품도 많다. 노력을 덜 해서라기보다는 부족해서다. 닿지 못해서이고, 노련하지 못해서다. 경력자와의 작업이라고 해서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완전한 제작 환경에 있거나 경험이 부족한 사람 들끼리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모두가 잘 될 거라고 확신한 것들이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기도 하고, 유치하다고 말도 안 된다고 내팽개쳤던 것들이 때론 생명(p. 6)력을 가지고 대중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정답을 찾는 데 능숙해지기는커녕 그저 최선을 다 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p. 7). 대본 개발 6부작이나 8부작 미니시리즈의 경우, 전체 대본을 완성한 뒤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보다 긴 장편 시리즈일 경우, 절반 정도의 대본을 기반으로 제작을 시작하되, 현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탄력성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드라마는 대본 그대로 찍어내는 고정된 조각이 아니라, 배우의 컨디션, 날씨, 계절, 장소, 예산, 시간 등 셀 수 없이 많은 변수 위에 떠 있는 유기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작가가 마지막 화 대본까지 완성했더라도 촬영 현장에서의 수정은 불가피하다. '부분적으로 수정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촬영된 장면들은 편집된 결과물 안에서 감정선이 끊기고 어긋나 보이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드라마(p. 37)는 줄거리보다 감정의 연결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한 장면의 대사와 리액션을 고치면, 앞선 장면의 감정 설정도 따라 바뀌어야 하고, 뒤따르는 행동과 선택도 새롭게 정렬해야 한다. 이 연쇄적인 조정은 결국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는 창작자만이 해낼 수 있다. 그러니 대본이 아무리 잘 쓰였다고 해도,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는 쉽게 균열을 일으킨다.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감각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기획 단계에서 프로듀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작가가 캐릭터의 변화를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작품의 중심을 함께 잡고, 연출과도 긴밀하게 호흡하며, 드라마의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조율하는 일. 이 작업 없이 뛰어난 몇몇 장면만으로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탄생하기는 어렵다. 박경수 작가는 〈추적자〉 대본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행 서사에서 극적 상황이 주어지면, 이야기의 속도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액션과 리액션이 반복되며, 이야기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p. 38)전개되고.." 드라마는 결국 창작자가 캐릭터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동력에 의해 창작자가 이끌려가는 어떤 경험이라고 느껴졌다. 인물의 선택과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결말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드라마란, '결말'이 아닌 '경로'로 기억되는 이야기다. 시청자는 마지막 장면보다도,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곡선을 따라왔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그렇기에 대본 개발은, 기획이 세운 뼈대에 감정의 혈류를 돌게 하고, 인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 인물이 현실처럼 숨 쉬고, 움직이고,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까지, 작가와 연출, 그리고 프로듀서가 함께 호흡해야 한다(p. 39). 결국, 관찰과 기록은 '양'을 만드는 습관이다. 많은 것을 보고, 남기고, 돌아봐야 비로소 자신만의 기준이 생긴다. 나는 '양이 질을 만든다'는 말을 믿는데, 단순히 콘텐츠를 많이 소비해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감정, 대중이 반응하는 정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들에 대한 누적된 감각이 쌓여야 비로소 판단 기준이 생긴다는 말이다. 예전엔 '이게 아니면 안 돼'라는 편협한 확신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프로젝트를 거치며,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도 전혀 다르게 풀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어떤 원작이 엉성하게 느껴졌다고 해도, 그 작품 안에서 감정의 동선을 읽어내고, 구조를 잡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획은 어느새 가능성 있는 설계가 된다(p. 58). 나는 "영감이 올 때만 쓴다"는 말로 책임을 미루는 작가와는 함께하기 어렵다. 책상 앞에 고집스레 앉아 인물의 감정을 묻고 듣고 다시 답하려 애쓰는, 그런 집요한 시간이 쌓일 때만 모호한 이야기 속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작가, 그리고 함께 점검하는 프로듀서. 그 두 사람이 함께할 때, 비로소 깊이 있는 이야기가 완성된다(p.111). 원작을 기반으로 작업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작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균형 감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 상대방의 시선에서 한 번 더 상상해 보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에서도 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 그렇게 생각을 보태고 변주하다 보면, 결국은 하(p. 128)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와 만나며 예기치 못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협업의 묘미이고, 원작 기반 제작이 단순한 번안 작업이 아닌 '새로운 창작'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p. 129). 나는 어떤 프로젝트든 충분히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고, 무엇보다 '마음'을 들인다. 그리고 나는 내 부족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몰입하지 않으면 해낼 자신이 없어 더 집중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배움과 깨달음이야말로 결과보다도 더 중요한 자산이라고 믿는다. 합리적인 워라밸을 추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한 만큼 요구하고 돌려받는 프로듀서들을 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일하고 있는 걸까? 턱없이 부족한 보상에도 왜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이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과정이 아무리 대단했더라도 '좋은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 면 그 모든 노력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노력한다. 내가 함께한 작가와 이야기, 함께한 시간과 관계가 모두 '유의미하게' 남을 수 있도록(p. 161). 결국 좋은 이야기는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디서 바라봤느냐'에 달렸다. 이미 다뤄진 이야기라도, 그 인물의 다른 면에서,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다시 살아나는 감정이 있다. 누구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던 주변 인물에게, 진부한 관계 속 숨겨진 결핍에서, 클리셰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감정에서 말이다. 그런 새로운 시선을 찾기 위해 나는 꾸준히 관찰하고, 읽고, 질문한다. 삶을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고, 감정의 결을 들여다본다. 그런 감정들이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나보다 훨씬 깊은 통찰을 가진 창작자(p. 172)들과 함께 고민한다. 가볍지 않게, 무겁지도 않게, 단단하지만 살아 있는 언어로 오늘의 우리를 말하고 싶다(p. 173). 세계의 책장 앞에서 기획자라는 직업의 특권 중 하나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원고를 먼저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추천 리스트를 먼저 받아보고, 이 책이 영상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살펴본다. 사람들이 어떤 감정에 반응할지, 어떤 세계를 궁금해할지, 그 미세한 흐름을 먼저 포착해서 그 이야기를 '지금 만들어야 할 이야기'로 꿰어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해외에서의 출판-기획 협업은 더 긴밀하고 이르게 진행된다. 한번은 출판 에이전시 대표님의 초대로 영국의 주요 출판(p. 180)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세계 최대의 출판 시장 중 하나인 그 곳에서 한 권의 소설이나 논픽션이 어떻게 유럽과 북미의 제작사, 할리우드 에이전시의 책상 위를 오가며 주목받는지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매일 밤 수백 권의 출판 리스트를 검토하고,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미팅을 소화하며, 단 한 권의 가능성을 발굴하려 애쓰는 에이전트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분야만 다를 뿐,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내가 매일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나라의 지성 트렌드를 짚어내는, 열정적인 여성 에이전트들과 함께한 경험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원작을 고르는 일은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붙잡아 기획자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내가 찾고 있던 감정의 결이 어떤 원작 속 리듬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치 눈앞에서 전구가 켜지는 듯한 경험이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 아직 값이 매겨지지 않은 감정, 아직 시작되지 않은 서사를 누구보다 먼저 만날 수(p. 181)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나의 기획과 시선으로 새롭게 구현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획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자 보람이 아닐까? 세상은 넓고, 아직 기획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끝없이 흩어 져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은, 결국 기획자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에 비례 한다(p. 182). 오래 기억될 첫 실패 칸 영화제는 영화인의 축제다. 드라마를 만드는 나는 늘 그 풍경의 바깥에 있었다. 개인 배지를 받기 위해 이력서를 내고 심사를 거쳐야 하는 이곳에서, 내 목적은 '칸 마켓'에 참가한 전 세계 제작자들과의 미팅을 통해 하지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칸에 도착하자마자 오전과 오후는 마켓 미팅으로, 저녁엔 미국 회사와의 줌 미팅으로 가득 찼다. 현지에서 만난 스위스 음악가, 프랑스 다큐 감독, 파리에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 연출가 등 다양한 파트너 후보들과의 약속도 출장 전부터 계획 되어 있었다. 잠과 싸우고, 언어와 싸우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작품의 '가능성'으로 설득하는 싸움을 벌이는 시간이었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실수 없이 응대해야 한다는 부담감. 칸(p. 187)에서의 5일은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꽉 찬 일정이었다. 파리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시차에 적응됐지만, 그 여유도 잠시였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숙소에 짐을 풀고, 새벽 사크레쾨르 성당에서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출발을 그려보았던 그날, 호텔 베드버그에게 물린 자국이 목과 팔, 다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상처는 붓고, 간지러움은 심해졌다. 전염성이 있을지 모르니 함께하기로 했던 프랑스 에이전시에 미팅 연기를 요청했고, 나는 옷을 세탁하고, 트렁크를 소독하고, 숙소를 살균하는 데 하루를 보냈다. 몸은 지쳐 있었고, 머릿속은 계약서 문제로 복잡했다. 원작 계약은 마무리됐지만, 공동제작을 위한 부속 합의서 작성은 에이전시의 일정 문제로 미뤄진 상태였다. 칸 영화제가 끝난 뒤에야 조건 조율이 다시 시작됐다. 에이전시는 원작이 웹툰 형식이라 매력적이지만 정리하기 어렵다며, 내가 미리 작성해 두었던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파일들을 요청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내가 공유한 시놉시스의 한 문장을 계기로, 에이전트는 세계관을 새로 정리 하고 주인공 설정까지 각색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러고는(p. 188) 자신이 실질적인 '창작 기여'를 했으니 크레딧을 표기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제작사와 연결된 한 감독이 흥미를 보이자, 에이전시는 "내가 정리한 시놉시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앞으로 모든 해외 커뮤니케이션과 자료 정리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로 제시했다. 처음에는 '첫 시도이니 경험 삼아 겪어보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점점 에이전시의 요구는 단순한 협력 범위를 넘어섰다. 사실 우리는 이제 막 부속 합의서를 통해 '함께 해보자'는 첫걸음을 내디딘 단계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자료에서 영감을 얻어 일부 비틀어 만든 시놉시스를 근거로 크레딧을 주장하는 일은 제작자나 창작자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상대가 무엇을 만들었고, 그 과정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신뢰가 생긴다. 이미 만들어진 결과는 언뜻 단순하고 쉬워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선택과 집중은 타인에게도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력은 단(p. 189)순한 이력이 아니라 신뢰의 근거다. 그 에이전트가 실력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잦은 조건 변경과 말 바꾸기를 보며,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에이전시와의 부속합의는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속상했다. 함께 잘해보자는 순수한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나의 아쉬움을 전하자, 에이전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정리한 새로운 시놉시스로 다른 영화를 만들면 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함께 할 '일'이 아니라, 함께 할 '사람'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사람은 좋을 수 있지만,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p. 190). 늘 무언가를 채우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요즘 의식적으로 시도해 보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빈둥거리기다. 모순적이게도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하기'는 연습해야 가능한 일이다. 오래도록 머릿속을 가득 채워온 창작의 중독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의 틈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현재와 미래에 쫓기지 않고, 감정을 비워내는 연습. 생각의 끈을 끊어내고, 흘러가도록 두는 훈련. 그렇게 텅 빈 자리에야 비로소 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기획이란 일이 결코 경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력은 때때로 기회가 되지만, 그 기회가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매번 새로 운 마음으로, 새로운 기획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멈추어서 사람을 보고 말하고 듣는다. 그 틈으로 일부러 차단하고 무시해 왔던 생활의 작은 갈등들이 다시 스며든다. 섬세하지 못했던 관계와 일들에 다시금 천천히 눈이 간다. 그동안 '생각'이 나를 얼마나 가로막고 있었(p. 202)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여전히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과 가족이 느끼는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어떤 감정이 밀려들 때 외면하지 않고, 그 감정을 달래주는 음악을 든고,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영화를 본다. 설령 모든 노력이 어떤 결실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내 편으로 두려고 한다. '빈둥거릴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랜 창작자의 체력이니까. 빈둥거리며 생각과 마음을 비워낸 내가, 또 다른 문화적 흐름과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기를. 생각만은 부디 늘 새롭고 싱싱하기를. 그 기운을 안으로 들이고, 다시 창작의 근육을 움직이길 바란다(p. 203).김병중(Th.D) 11-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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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 03-18 16:16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김병중 03-18 15:18
빈들에서의 감사(마태복음 14:13-21)
어느 날, 유대사회에 등장한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악을 행한 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각종 병든 이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때는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때가 저물었습니다.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거절하며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의외의 답을 들은 제자들은 난처해합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준비한들 어디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습니까? 바로 그때에 순진한 한 제자가 “예수님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내 밉니다. 그 도시락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1끼 먹을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작은 생선 2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은 도시락으로 그날 모든 자들이 배 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날 그 기적을 맛본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날의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일까요?어린 아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내민 도시락일까요? 먹거리를 찾아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을 갖고 온 한 제자의 부지런함일까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열심일까요? 모든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19절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축사’입니다. 축사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감사기도’, NIV는 'thanks'입니다. 헬라어 ‘유로게오’(ευλογησεν)는 ‘감사를 드리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앞에 두고서 감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빈들이란 광야요, 황량한 불모지요, 텅 빈곳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빈들에서는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오병이어는 아이 하나도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 모인 자들은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들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양식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빈들에서 감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날의 기적으로 해피엔딩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앞에서도 감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오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빈들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텅 빈 빈들 말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해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 인생이라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기란 요연해 보입니다. 언제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치고 나면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 될 때까지 휴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갑니다. 취업이 되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꿈꾸는데 현실이 이런 꿈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공시 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썼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는 삶이 있지만 삶의 현장은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빈 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빈들이라고 불평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절망하면서, 남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인상 쓰면서, 좌절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2. 빈들에서도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낡아지지 않게 입혀주셨습니다.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신겨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원했던 진로가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오히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부터 가지십시오. 빈들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단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얼어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발병이 나서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100% 책임져 주시구나!’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올해 우리 집 막내딸이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친 후에는 아쉬움이 남고 자신이 꿈꾸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찾아옵니다. 저희 부부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딸! 하나님이 네 길을 여신다. 걱정하지 말고 항상 힘내라”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제 인생을 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딸들의 길을 왜 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어디 우리 가정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빈들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주의 은혜로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감사’를 ‘구원’의 수준만큼이나 높이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내 삶에 행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서 감사 인생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김병중 03-16 23:05
"하나님의 목적과 성공이 있는 삶"(여호수아 14:5-15)
여섯 살 된 남자 아이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서 하던대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오줌'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들린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지저분한 단어를 쓰지 말고 다음부터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 후로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운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겁니다. 혼자 어두운데 나가는 게 무서워서 옆에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웁니다. 엄마를 막 흔들어 깨우며 "엄마,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 엄마가 잠이 덜 깨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중에 휘파람 불면 뱀 나와요, 휘파람은 아침에 불고 지금은 그냥 자거라." 그런데 아 아이가 너무나 참기가 힘들어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지금 휘파람을 불어야 되요." 그래, 엄마가 졸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엄마 귀에다 휘파람을 조용히 불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선배들, 선생들,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가 따라갈 귀한 지도자 갈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입니다. 지금 2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유일한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가나안 땅은 아직 싸워서 얻어야 될 땅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여호수아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좋은 땅, 이미 정복한 땅을 달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한 땅은 가장 정복하기 어렵고 힘든 땅입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열 정탐꾼이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바로 거인족 아낙 자손이었습니다(골리앗의 조상). 이곳 이름이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그 의미도 얼마나 힘센 거인이 살았는지 이름도 “거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땅을 요구합니다. 왜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을까요? 저는 이 갈렙의 모습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첫째, 갈렙은 끝까지 믿음의 비전을 놓치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갈렙은 민수기 14장 이후 광야를 떠도는 38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의식이 분명한 지도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꿈이 분명해졌고 이제는 목적지까지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정한 보이지 않는 목표, 내 자신만을 위한 뜬 구름 잡는 목표는 바뀝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고 분명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마라톤의 세계 최고 기록은 독일 BMW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2시간 2분 57초에 완주하며 사상 처음으로 2시간 2분대에 진입한 데니스 키메토(30·케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마라톤 선수가 2시간 10분 안에 42.195킬로를 뛰려면 100미터를 평균 17-18초 사이를 계속 유지하며 뛰어야 합니다. 그럼 마라톤 선수들이 전반부에 더 잘 뛸까요? 반환점을 돈 후반부에 잘 뛸까요? 예! 상식적으로는 전반부에 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잘 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빨리 뛰는 것은 반환점을 돌고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인지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인지점인 가나안 땅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자기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을 주고 같이 성공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둘째로, 갈렙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면 한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도우심 밖에는 없지만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10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 그 땅은 가장 강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또 골짜기입니다. 무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전쟁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85세지만 40년 전과 똑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땅을 당연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체력이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믿음이 똑같을 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땅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자기 조카인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통해 다른 지파의 땅 정복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큼은 직접 정복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직접 노년의 나이에 전쟁을 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이 40년 전 백성들이 포기한 땅이었는데 그 때 갈렙은 정복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는 백성 전체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갈렙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땅을 정복하므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강한 군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마치 갈렙은 이미 이 땅을 정복한 사람처럼 달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마치 정복한 것처럼 이제 가지라고 허락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떡 줄 사람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김칫국 신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김치국은 많이 마실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이런 김칫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씀이 8,9,14 절에 3번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나오는 본문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 요셉은 형통한 신앙처럼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갈렙의 신앙 특징은 온전히 좇은 신앙입니다. 좇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만족시켰다는 뜻이고, 하나는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찰떡 신앙, 주님께 찰떡처럼 달라붙어 만족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찰떡 신앙을 가진 사람이 김칫국 신앙, 곧 성공의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나안 정복이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이면서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노인이지만 바로 우리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후배와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렙처럼 살아가면 주님의 성공을 얻을 뿐 아니라 나의 성공도 같이 얻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누가 가장 좋습니까? 예!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갈렙 자신과 유다 지파가 제일 좋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공은 이루어도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사는 교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민을 오셨는데 목사님이 근황을 물어봅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요? 뭘 하시는데요? 저 요즘 청소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뭘 하십니까? 제가 요새는 미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뭘 하시는데요? 제가 요새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바지를 누비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운 겁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또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뭐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미국을 주름잡고 다닙니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 옷을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쓸고 다니든 누비고 다니든 주름잡고 다니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교포들뿐이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느냐?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올바른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막고 잘 입고 잘 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하여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갈렙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참된 성공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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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8-10 00:23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김병중 08-09 23:49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병중 03-16 23:19
『고난 중의 신자에 대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
ㅣ. 들어가는 말 청중은 하나님과 영생의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존재이다.1) 청중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설교자의 설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청중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설교자의 설명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이 들은 말씀과 모순되게 느끼는 현실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까닭을 알 수 없고 감당 하기 어려운 고난을 경험할 때이다.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팀 켈러는 고난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고 한다.2) 그렇다면 여러 가지 까닭 모를 고난을 경험할 때 언약 백성인 청중은 그 고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면 설교자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설명할 것인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 만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설교자의 태도 역시 중요한데 설교자는 고난을 겪는 청중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때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교자는 이런 상황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자는 먼저 로고테라피 개념으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본 다음,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각각의 모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3.2) 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 25, 16. 이어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을 제안 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침묵과 로고테라피 1.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의 침묵 20세기 최고의 문호(文豪) 가운데 한 사람인 C. S. 루이스(1898~1963)는 남달리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였고 그 후 그의 형은 술을 위안으로 삼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겪은 루이스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후 신앙을 잃어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랜 방랑 후에는 다시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한 불행한 여인과 결혼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꼈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부인은 3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이런 많은 고통을 경험한 루이스는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민을 표출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가 원하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 하지 않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선이 부족하든지, 능력이 부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가 지 다 부족한 것이다.4)이렇게 의문을 던진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하는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글자에 통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5)하지만 루이스는 “고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이 그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제기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6) 사람이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크게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강정훈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은 남의 배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흔적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 자국이 더 아프다고 한다.”7) 이처럼 청중은 각자가 누구보다 쓰라린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루이스와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캔 가이어(Ken Gire)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책에 The North Face of God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반가가 가장 오르기 힘든 북쪽 능선(the north face)처럼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캔 가이어에 의하면, 에베레스트산은 여러 개의 능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북쪽 능선이 등반하기 가장 어렵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8) 3) 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6-10.4) C.S. 루이스/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33.5) Ibid., 63.6) Ibid., 129.7)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 77. 성경 인물 가운데도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요셉이나 다윗은 긴 기간 동안 까닭도 모르고 그 끝도 모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 까”라고 부르짖은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세는 요셉이나 다윗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 왔을 때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명을 거절할 정도였다. 캔 가이어의 말처럼, 성경 인물들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보다 그들이 당한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9) 2. 언어의 기능과 설교자의 사명 하나님은 이처럼 청중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설교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에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로 밝히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설교 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언어의 기능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는 대신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드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을 방출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셨다.10)하나님으로부터 말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의 사명은 이 언어를 통해 ‘사물 언어’(language of things)를 ‘구술언어’(oral language)로 드러내는 것이다.11) 설교자의 사명은 우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들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의도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진 교수는 목회 사역의 핵심을 “구술언어와 사물 언어를 신자들 앞에서 서로 연결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표현한다.12) 그렇다면 청중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자는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내세에 천국의 영광을 누릴 성도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는 청중의 질문에 설교자는 어디에서 해답을 확보하여 청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해답을 성경에 담아 놓으셨기에 매번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그 해답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선,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팀 켈러의 말처럼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13)그러다가 막상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리처드 아스머는 자신이 목사요 실천신학 교수이면서도 모친이 교통사고로 갑작 8) 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 20-21.9) Ibid., 18.10)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84.11) Ibid., 78.12) 이승진,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223.1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6. 스럽게 사망했을 때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머는 고향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14) 아스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중이 고통스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럴 때 성경적 관점 에서 고통을 설명해 주어 고통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3. 고통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까닭 모를 고통 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교자는 어떻게 해석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우선 고통에도 값진 뜻이 있다고 한 옥한흠 목사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통은 거룩한 것이며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15)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들어보자. 빅터 E. 프랭클은 유대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악명 높은 나치(Nazi)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생존자이다. 그는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알몸 상태로 발가벗기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말살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악몽일지 라도 그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16)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빅터 E. 프랭클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한다.17) 빅터 E.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 개념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빅터 E. 프랭클은 고통이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절대 고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희생의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절대 고통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존재이다.18)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을 가진 존재인 청중은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옥 한흠 목사는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하면서 신자는 고난 배후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라고 충고한다.19)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선용이란 첫째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선용하시며,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 고난이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20) 옥한흠 목사와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고통에는 고통보다 더 큰 의미가 있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신자가 막상 고난을 겪을 때는 그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경험할 때 청중은 고난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삶에서는 왜 실현되지 않는지 회의(懷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 상황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14) 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 40-41.15)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234, 15-16.16)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 51.17) Ibid., 10.18)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47-48.19)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11, 16.20) Ibid., 18-19.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III.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들 1. 재난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관점 신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온 국가적으로 함께 당하는 대재앙도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여러 가지 정상(正常)이 비정상(非 正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비정상(Ab-normal)이었던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새로운 정상(New-normal)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경제가 무너지며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vaccine)에서조차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21) 이런 때에 신자들은 왜 이런 일이 왔으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싶어 한다. 코로나 팬 데믹 외에도 세상에는 종종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설교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대재앙의 의미를 해석하여 설명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 부터였다. 1755년,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많은 논의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당시 대지진이 의인 욥이 당한 고난처럼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성경적 설명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면 대재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사건과 2011년 동일본에 지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설교 사례를 살펴보자.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북부에서 모멘트 규모 9.1의 해저 지진과 15미터 높이의 쓰나미 재앙이 발생하여 28만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교회의 한 설교자는 성탄절과 주일이 연속되는 거룩한 날에 쾌락을 즐기러 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는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관점의 설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다.22) 한편,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진의 원인이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설교해서 역시 파문이 일기도 했다.23)이 두 사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결국 대재앙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 그러면 대재앙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인가? 이승진 교수는 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로서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 대속적인 고난 모델, 신비적인 합일 모델, 종말론적 전망 모델 등의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에 접근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21) 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93622)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37.23)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24)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267-76. 1) 우선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의 관점은 고난의 중요한 원인을 당사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이런 인과응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욥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물론 고통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죄를 범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죽어 있는 세계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로 본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악인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25) 그런데 오늘날 지성인들 가운데는 보응 사상이나 징벌 관념을 말소해 버리고 범인의 개과천선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모든 징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26) 하지만 모든 고난을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합당하게 징벌하시기보다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인간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며 그들이 당하는 재난 사건을 교훈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징벌적 고난의 모델은 모든 고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징벌적 고난 모델이 형평성과 일관성에서 모순점을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이다. 이는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반드시 자신의 죄악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고난 저변(底邊)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고난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미래의 가치로 무책임하게 희석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청중의 불평을 막는 효과는 있겠지만 고난 중에 처 한 신자를 만족시키는 설명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3) 징벌 모델과 섭리 모델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난의 목적이 교육 혹은 연단을 위해서 라고 설명하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이 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과함으로 신앙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연단 후에는 죄에 빠질 가능성도 줄어들어 그에 따른 징벌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생겨난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얻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배울 것이며,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27)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영적인 훈련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답게 성숙하여 간다는 이 설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 모델 역시 모든 고난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욥처럼 남달리 훌륭한 신자가 오히려 남보다 모진 고난을 받는 경우나, 고난을 통한 연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은 유아들이 당하는 고난 등은 이 모델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4) 대속적인 고난 모델은 모든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다가 희생을 당한 경우, 혹은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自取)한 경우에 대한 설명에 동원된다. 예를 들면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던 사람이 오히려 사고를 당해 희생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 유다의 경우처럼(창 44:33)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하지만 대속적 고난 모델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경우 이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은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5) 신비적인 합일 모델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인 합일 모델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전능을 포기하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능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해서만 생각되어야 한다.28) 이러한 십자가 신학을 수용한 학자 가운데는 우선 본회퍼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전능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설명한다.29) 한스 요나스 역시 하나님을 무능력한 하나님, 무저항의 하나님, 피조물로 인해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30) 팀 켈러 역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을 옹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고통과 악의 근원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움켜쥐셨다면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 내셨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31)팀 켈러에 의하면 “크리스천들이 역경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주님의 고난을 강조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거룩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놓쳐 버리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설명하는 신학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라면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32)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겪을 때 거기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고난을 제거하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새 하늘 과 새 땅의 목적지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신다.33) 그러므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적 합일 모델의 설명이다. 이 모델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신자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 심을 포기하고 무력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구원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신비적 합일 모델은 고난 속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해버린 약점이 있다. 6) 지금까지 시도한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들은 고난의 원인과 의미를 다 설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신자의 모든 문제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날에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는 종말론적 전망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승진 교수는 메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8) 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93.29) Ibid., 94.30) 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33 (2012), 262.31)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96.32) Ibid., 233, 240.33)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274. 메츠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츠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로부터 부활절의 아침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기에 부활로 넘어가는 것을 승리자의 신화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4)하지만 종말론적 전망 모델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설명이지만, 고난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고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3. 고통의 불가피성과 고난의 유익 앞에서는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모델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한계점이 있는 설명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중은 개인마다 혹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정황을 살펴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모델로 고통의 의미를 적용함으로 청중이 지불한 고통이라는 대가보다 더 큰 유익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을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런 관점은 우선 신약 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팀 켈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는 신약 저자 가운데 우선 야고보를 생각해보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는 언제나(ὅταν, whenever)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신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약 1:2-3). 이와 같은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데 있어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베드로 역시 신자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운 나쁘게 고난을 당한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고 한다(벧전 4:12-13). 한편, 사도 바울은 고난이 신자를 연단하여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 만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은 가벼운(혹은 견디기 쉬운 ἐλαφρός)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4:17). 고난이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면 신자에게 있어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에 종교 개혁자와 설교자들 역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역설(力說)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팀 켈러는, 고난이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는 루터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난에 맞서 이겨 내도록 도와줄 기쁨과 사랑을 얻기에 앞서, 고난은 우선 우리의 교만을 비워내게 해 준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35) 그러므로 악과 고통이 존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바라보아야 한다.36) 고난의 유익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팀 켈러가 소개하는 고난의 유익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37) 34)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53-54.35)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82-83.36) Ibid., 142.37) Ibid., 300-303.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흠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2) 고난은 우리 삶의 여러 좋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 준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C. S. 루이스도 말했듯이 형통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고난 속에 있을 때는 확성기로 소리치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막다른 길로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붙는 경험을 통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과 기 쁨을 맛보게 된다. 5)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몸소 고난을 경험하면서 고통당 하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품게 된다. 이상으로 청중에게 설명할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것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청중(신자)에게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청중이 고통당하는 때에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청중이 그 설교자를 신뢰하고 그의 설교에 경청(傾聽)할 여부(與否)를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선 신정론의 설명의 한계 점을 확인한 후에 그 대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겠다. IV. 신정론의 한계점과 타인의 얼굴 1. 신정론의 의의(意義)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의 공통점은 고난에 대해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 辯神論)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신정론으로 번역되는 theodicy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θεός와 의로움을 뜻하는 δίκη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정론은 때로 무고한 자의 까닭 모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신정론의 관점으로 볼 때 고통은 선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더 큰 선에 이바지하므로, 부분으로서의 고통은 전체로서는 선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신정론을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합리한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신정론을 피력하려고 노력하였다.38)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이 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악은 선의 허용된 결핍”이라는 해결책을 내어놓았다.39) 라이프니츠가 변신론에서 표방하는 것은 “고통과 죄악이 존재하는 세계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의 계산에 따르면 현존하는 악은 최선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0) 38) Gottfried Wilhelm Leibniz/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4), 28-31, 441-50.39)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55-56.40) Ibid., 62-63. 그러나 이런 변신론의 설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강영안은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대해 ‘낙관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는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리스본 대지진 때문에 왔다.42) 2. 리스본 대지진과 신정론의 한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포르투갈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首都)이다. 15세기 리스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화로 인해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도시의 2/3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43)리스본 대지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오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신정론이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리스본이 여타의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rady)는 당시 리스본의 경건함을 다음과 같이 묘하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주교좌성당 외에도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공소가 121곳, 수도 원이 90곳, 다양한 수도회들이 150곳이나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44)특히나 대지진이 발생한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서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이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 미사를 위해 길을 나선 인파로 리스본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45)이처럼 경건했던 도시가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된 첫 지진에 이어 몇 차례의 여진이 발생하자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건립된 리스본이 폐허로 변했다.46) 그리고 오전 11시경, 지진이 발생한 지 90분 뒤에 발생한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 다.47) 대지진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망한 인구는 약 4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48)리스본이 대지진 사건으로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이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볼테르까지도 생각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9) 이처럼 고난의 문제를 신정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4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210.42) Nicholas Shrady/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서재, 2009), 142.43) 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1.44) Shrady, 『운명의 날』, 18-19.45) Ibid., 21,46)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122.47) Shrady, 『운명의 날』, 30.48) 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8.49) Ibid., 11-12. 3.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설교자는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다가갈 한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선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청중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정훈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이 난소암으로 악화되어 5년간 투병하다가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정리해서 입을 연 강 정훈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슬픔에 빠졌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이 와서 사모님이 좋은 데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울고 있는 미망인들에게 울지 말라고 비정하게 요구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강정훈은 단호하게 말한다.50) 그러면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유대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1995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아우슈비 츠 대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설명하려는 변신론은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는 어떠한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레비 나스는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없고 의미 없으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만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51)물론 고통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을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은 고통을 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통받는 자가 ‘외부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나에게 도덕적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사건을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얼굴’은 존재 자체를 통해 나에게 호소하고 윤리적 의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52)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계시로 다가올 때 필요한 것은 대속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이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 이다.”53)고통받는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되는데,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향유를 포기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계, 즉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이 열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환대해야 한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벌써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의 자리에 세워지는 일을 레비 나스는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 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54) 50)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78-80.5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227.52) Ibid., 148.53) Ibid., 152. 54) Ibid., 186. 이처럼 레비나스는 고통이 담긴 타인의 얼굴의 현현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에서 벗어나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의 윤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청중을 위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먼저 청중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모델에 해당하는지 세심하게 분석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통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청중이 놓치지 않도록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때 설교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훈계하는 자의 자리에 아닌 고통당하는 청중과 ‘자리바 꿈’의 과정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청중을 체휼(體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청중이 고통을 통해 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고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세우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으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거나 장기화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거나 모세처럼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라고 설교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컨대 아스머 교수가 경험했듯이 설교자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면 신자는 잠시 방황하던 자리에서 돌아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설교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해석하는 여러 모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신자가 겪고 있는 개별적인 고난 사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유형이 적절할지 잘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지만, 신자의 성숙에 고난이 불가피함과 결국에는 고난이 유익임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에게 고난을 설명하는 모델들을 잘 이해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태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신정론의 주장을 강조하느라 자칫 고난을 겪는 신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이 ‘계시’라고 하는 레비나스의 설명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요긴한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C.S.Lewis /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2014.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 서재, 2009.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5-38.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 총」 33 (2012), 243-279.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85-11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0-75.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70-75. _____.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70-75. _____.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0-86. _____.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198-231.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144.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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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6-14 15:02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
김병중(Th.D) 06-07 15:19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
김병중(Th.D) 04-26 11:04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Th.D) 01-22 17:14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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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9-03 13:53
【포토에세이】 철도길
철길이 길게 놓여 있다. 비록 끝이 보이지는 않으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철길이 없으면 어떤 철도도 달리지 못하기에 같은 철길을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사용한다. 무궁화, 새마을 그리고 ktx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요금도, 소요 시간도 다르다. 이 철도길은 오늘 어떤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인가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기차에 오른다 -
김병중(Th.D) 08-27 10:20
【포토에세이】 부추도 꽃이다
옥상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께서 동네 친구분에게 얻어오신 부추가 심겨 있다. 어느 날 장독대 대형 화분에 몇 포기 옮겨 심었다. 이전에는 꽃을 심었었다. 가끔 자라난 부추를 잘라 먹었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져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흐느적거리는 풀같았던 줄기가 꼿꼿이 세워지고 키가 자라 끝 쪽에 뭔가 맺히더니 작은 꽃을 피웠다. 참 요물이다. 잘라 먹을 때는 풀같았는데 그냥 내버려두니 계절을 따라 생존을 위해 꽃을 피운 하나의 꽃이 되더니 신기해 유심히 보는 사이 벌도 날아와 꽃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추꽃은 처음 봤다. 늘 집이나 식당에서 음식 부재료로 먹던 풀 같은 것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다. 도심 옥상에서 부추꽃을 보니 서울 촌놈이 행복하다. 식물은 번식을 위해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통해 수정한다. 그렇게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사람도 꽃이다! 화려한 장미, 매혹적인 목련도 꽃이지만 부추도 꽃이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 -
김병중(Th.D) 08-23 11:34
【포토에세이】 안빈낙독은 안빈낙도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이란 말이다. 내겐 안빈낙독(安貧樂讀)이 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한다”는 뜻이다. 교단 기자는 담임목사 때보다는 가난하다. 담임목사로서 보장되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없다. 차량 유지비도, 통신비도 모두 교회가 부담했었다. 담임 부임 때 구입했던 트라제XG를 가져와 아주 가끔 사용하고 주로 세워둔다. 기자로 취재현장을 다닐 때 대중교통이 편하고, 취재비 받아서는 차를 운영할 수 없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은 있으나 늘 책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취재가방에 언제나 책을 갖고 다닌다. 집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은 책이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운전하는 것이 불편한다. 운전하느라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잠시 취재 갔다가 다음 취재까지 짬이 생겨 굳이 한 장소를 찾아 왔다. 종로쪽에 있는 저렴하고 넓직한 카페이다. 종로 쪽에 올 때 시간이 비면 와서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내게 독서 취미가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었다. 다행히 지금도 독서가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책을 읽으면 취재 현장까지 가는 것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비어도 좋다. 책 읽고 있으면 되니까. 모두 안빈낙독의 삶을 사시기를. 엉뚱한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책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래본다. -
김병중(Th.D) 11-04 19:37
3代의 감 따기
2020년 12월 담임목회 사임 후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이듬해부터 가을에 감을 따고 있다. 올해도 감을 땄다. 20여 년 전 어머니께서 이 집을 사서 오신 후 종로 묘목상에게 어린 감나무를 사서 마당에 심었다가 아버지께서 집 밖 귀퉁이로 옮겨 심으셨다. 올해 4년째에는 이전처럼 감나무에 비료를 주지도 못하고 지냈는데 어머니가 막걸리 등 양분을 주셔서 그런지 깨끗하게 감이 열렸다. 이전에는 감 주위에 흰 것들이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감이 탐스러웠는지 동네 어떤 사람이 두 번이나 따는 것을 어머니 아는 분이 소리쳐 내쫓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손타기 전에 어머니, 아들과 함께 감을 땄다. 이사 올 때 감나무 잎 떨어지는 것이 지저분해 어머니는 잘라버리시려고 했는데 나는 살려 두자고 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감을 따는 재미와 먹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도 침대에 누워계시면서 잘 익은 감을 맛있게 드시니 다행이다. 70여 개는 딴 것 같다. 대봉이라 익혀 먹어야 한다. 매년 감 따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단톡에 어떤 사람이 감의 효능에 대해 올려 공유해 본다. "감" 많이드세요!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놀라운 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은 종합 영양제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과일이죠. 감 1개에는 사과 9.5개 분량의 비타민이 들어있는데 이는 최고의 천연 종합 비타민 과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비타민 A는 시각 유지에 필요한 로돕신을 만드는 영양소인데 이 비타민 A가 감 1개에 성인이 하루 섭취해야 할 양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눈을 많이 쓰는 수험생이나 노안으로 눈이 나빠지는 경우에 시력 보호용 과일로도 좋습니다. 감의 주성분은 당질(15~16%)인데 포도당과 과당의 함유량도 매우 높으며, 비타민 C와 A 그리고 탄닌,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알칼리성 식품입니다. 감은 최상의 건강 과일이라 해도 지나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최상의 건강 과일이 흔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무시하고 비싼 과일만 사드시고 있겠죠! 사과 10개 먹는 것보다 감 1개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증명하고 있어요. 잘 모르셨죠? 감은 자연 치유제로도 최상의 특급 과일이며 피부에도 최고랍니다. 심폐(心肺)를 녹여주며 갈증을 멈추고 폐위(肺痿)와 심열(心熱)을 치료합니다.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吐血)을 멎게 해 주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약입니다.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고 기침, 만성기관지염, 고혈압, 심장 질환 등에도 효능이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풍 예방약으로도 쓰입니다.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합니다. 감 많이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