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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 불편한 것은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도 한 방법
-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때로는 직면하고 맞대응해야 하나 그렇지 않고 회피해야 할 때도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저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괴로우면 참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도망 치세요. 현재를 유지하려고 마냥 참거나 변화를 일으키지 않다 보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가스 유출 탐지기가 없던 시절, 카나리아는 탄광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카나리아는 냄새에 굉장히 민감하여 인체에 해가 없는 극소량의 유독 가스에도 반응(p. 16)합니다. 유독 가스를 감지하게 된 카나리아는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기절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카나리아의 위험 감지 능력 덕에 수많은 탄광 작업자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카나리아가 자기 몸을 바쳐 작업자들에게 도망치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아직 괜찮다'라며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머뭇거리다 보면 자칫 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p. 17). 지금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약한 소리를 못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면 안 됩니다. 긍정심리학 이론을 제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in Bias Peter Seligman, 1942~)은 개를 이용하여 학습된 무기력과 관련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라고 스스로 여기는 학습된 인지를 말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Pyodor Mikhailovich Dacerskit, 1821~1881)의 후기 작품 중에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인간에게 가장 괴로운 고문은 '흙을 파서 만든 구멍을 다시 메우는 작업을 반복하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p. 64). 그리고 셀리그먼 씨는 인간의 행복에는 '성취', '긍정 정서', '몰두', '원만한 인간관계', '의미' 등 다섯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섯 번째의 '의미'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가치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실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의미가 없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너무도 의미가 없어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면 절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p. 65). 생활사건(Live Events, 102~105쪽 칼럼에서 생활사건별 피로도를 측정하는 스트레스 평가 척도를 소개합니다.)을 계기로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은 마음속에 시야협착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고 합니다. 터널 비전이란 여유와 냉정, 유연성을 잃고 상황을 넓게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특정 선택지 내에서만 고민하게 됩니다(p. 80). 심적 시야협착 상태가 몇 달간 지속되는 동안 시야는 점점 좁아집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올바른 판단력을 잃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맙니다. 그러다 결국 '난 이제 글렀어', '죽을 수밖에'라며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밟기 시작합니다. 이는 스스로 판단하여 죽음을 결심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결과입니다. WHO(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자살자의 약 97%는 모종의 정신장애를 앓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중 약 30퍼센트(70퍼센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가 우울증을 포함한 기분장애입니다. 약물 및 알코올 의존증, 조현병, 인격장애가 그 뒤를 이었으며, 이들 4가지가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4대 정신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p. 81). 그 자리에 머무르며 도망치는 방법 내 편 20퍼센트에 집중하기 여러분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20퍼센트). 중립 입장인 사람도 있습니다(60퍼센트). 그리고 여러분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20퍼센트). 2·6·2는 인간관계의 기본 법칙입니다. 터널 비전 상태일 때는 나를 공격하는 20퍼센트만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나는 몹쓸 인간이라며 자기부정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대다수가 '중립 입장'에 있습니다. 상황을 보며 옮겨 다니는 사람들입니다(p. 146). 그저 딱 한 명만 나를 싫어하는 건데 모두에게 미움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진 않나요? 일주일 중 고작 하루 실수한 건데 '난 실수투성이'라며 자신을 비하하진 않나요? 여러분의 편, 20퍼센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2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세요.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집니다. 힘들 때는 내 편을 들어주는 20퍼센트의 사람들을 떠 올리세요(p.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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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자와 홍보자로서의 기자의 역할....잘 활용하시길
-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소식을 접한다. 개인 간 소식을 나누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 기사를 통해 소식을 접한다. 그것이 방송이든, 신문이든, 포털이든 접하는 모든 소식에는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있다. 기자(記者)는 누구인가?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쓰는 사람이다. 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 가야 한다. 그리고 보고 들으며 취재한다. 이후 이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사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기자이기에 수많은 곳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한다. 내가 운영하는 ‘빛과소금뉴스’ 행사 기사의 특징은 내용이 자세하고, 사진을 많이 올리며 동영상을 첨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사를 글로,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잘 남기기 위해서이다. 글만으로는 부족해서 사진을 첨부하고,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동영상까지 촬영해 기사에 첨부하는 것이다. 신문 기자든 방송 기자든 와서 행사를 취재하지 않고 보도해 주지 않으면 행사 후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사를 취재해 달라고 먼저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광고 등으로 알려진 행사에는 기자들이 취재하러 간다. 그렇다면 기자들을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 행사를 잘 취재해 홍보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단회적으로 하고 잊혀져도 될만한 수준의 행사라면 취재와 보도는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인터넷 신문을 관리하는 섹션에 가면 각 기사에 대한 조회수가 나온다. 어떤 기사는 수천 명이 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각 기사를 수백 명이 본다. 그만큼 홍보 효과가 있다. 준비하는 데 노력했고, 또 남들에게도 알릴만한 가치가 있는 행사라면 적극적으로 기자를 잘 활용해 기록하고 홍보하도록 하자. 적은 비용으로 큰 홍보 효과를 보게 된다. 나도 구두 계약을 통해 몇 년간 고정적으로 취재하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다. 언론의 홍보 효과를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기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행사가 잊힐 수도 있고 알려지고 기록으로 남을 수도 있다. 기자를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록으로 남길만한 행사를 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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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지역남전도회연합회 정기총회, 임성원 장로 회장 선출
- 제6회 영남지역남전도회연합회 정기총회가 7월 11일 오전 11시 참품한우에서 모여 임성원 장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회장 인사하는 임성원 장로 신임회장 임성원 장로가 “저를 믿고 지지해준 모든 회원들께 감사드리고, 중책을 잘 감당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겠다”라고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회장 박영규 장로의 인도로 부산노회남전도회연합회 회장 김진태 장로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표어제창, 명예회장 최병도 장로가 기도, 서기 김동권 장로가 느 7:1-4을 봉독, 경청한울림 섹스폰이 특주, 다산교회 김준영 목사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 후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인사 및 축하는 회장 박영규 장로의 사회로 증경부총회장 신수희 장로 · 고문/전국장로원로회 회장 양 원 장로가 격려사, 증경회장 신영수 장로가 축사, 총무 박상일 장로가 내빈소개 및 광고했다. 3부 회무는 회장 박영규 장로의 사회로 수석부회장 임성원 장로가 기도, 서기 김동권 장로가 회원점명, 회의록서기 김오환 장로가 전 회의록 낭독, 총무 박상일 장로가 사업보고, 감사 송태엽 장로가 감사보고, 회계 김인수 장로가 회계보고했다. 임원선출 후 신구임원교체, 회기 및 고퇴 이양, 명예회장 추대 및 뺏지 증정한 후 잔무는 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신임회장 임성원 장로의 기도로 폐회했다. 회장 임성원 장로(다산교회) • 대구•경북지역남전도회연합협의회 명예회장 • 대구•경북장로회연합회 증경회장 • 대구지역장로회연합회 증경회장 • 남대구장로회 증경회장 • 남대구노회남전도회연합회 명예회장 • 영남협의회 회계 • 영남지역장로회 수석부회장 • 남대구노회 증경부노회장 • 전국장로회연합회 총무 • 전국남전도회연합회 부회장 • 대구광역시장로회총연합회 감사 • 기독신문사 임원회 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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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정인 작가 시화 · 그림 전시회, 성황리 개최 중
- 성정인 작가(성남제일교회 김태웅 장로 부인)의 '행복한 그림의 노래' 시화 · 그림 전시회가 성황리에 개최 중이다. 성 작가는 백석 상담대학원 가족상담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고, 내적 치유를 위한 CCM 앨범 '주님 나를 만지소서'를 발표했다. 또한 마음 치유와 영혼에 새 힘을 주는 어른들이 읽는 동시 1집 『맛있어져라』와 2집 『행복해져라』를 출간했다. 성 작가는 시화에 캘리 글씨로 시를 멋지게 써 주신 현원숙 선생님과 그림을 격려와 친절함으로 지도해주신 '미술 소풍' 임수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과거의 추억을 아름답게,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미래는 소망을 담뿍 담아 그린 시화와 그림들을 통해 감상하시는 분들의 삶이 맛있어지고 행복해지시길 기원했다. 언제: 2025.7.1~7.31(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카페 앤드 티(cafe&T), 성남시 중원구 산성대로 594 (3층-네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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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 “개혁주의 신학”공개세미나 개최
-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위원장 신종철 목사)가 주최한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보수와 확장을 위한 우리 교단의 역활 모색” 공개세미나가 7월 11일 오전 11시 판암장로교회(홍성현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홍성현 목사와 판암장로교회는 중부권의 거점 교회로서 총회의 많은 행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부 예배는 부위원장 강창훈 목사의 인도로 회계 고정식 장로가 기도, 서기 송광현 목사가 엡 2:20-22을 봉독했다.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함께 지어져 가다’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함께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함께 모든 일을 감당한다. 함께 고민하며 연구하는 일들이 함께함을 확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110회 총회준비위원장 한수환 목사가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위원장 신종철 목사와 이국진 목사를 통해 좋은 강의를 기대하고, 110총회도 개혁주의적인 일들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격려사, 홍성현 목사(판암장로교회)가 “환영하며 좋은 시간 되시기 바라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서기 송광현 목사가 광고 후 증경총회장 오정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세미나는 서기 송광현 목사의 사회로 총무 최규정 장로의 기도로 시작했다. 제1강은 이국진 목사가 ‘세계 개혁교회의 현황과 전망, 그리고 우리 교단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주, 중남미 교회의 현황과 교단 교류 현황을 살피고,WEA 와의 교류문제에 대해서는 “범 개신교 연합단체로서 반대 근거가 없다”라고 강의했다. 제2강 신종철 목사가 ‘한국장로교회와 개혁주의’란 제목으로 “우리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이다. 우리 합동 교단은 누가 뭐라고해도 개혁주의 신앙 위에 기초하고 이 신학을 사수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강의 후 중부협의회 대표회장 김종원 목사의 식사기도 후 판암장로교회에서 제공하는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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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부, '현대 교회론의 위기와 대안' 세미나 및 신학포럼
- 109회기 총회 신학부(부장 박의서 목사)가 “현대 교회론의 위기와 대안”이란 주제로 지역별신학세미나 및 4차 신학포럼을 7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총회회관 2층에서 개최했다. 신학부장 박의서 목사가 “신학부가 4번에 걸쳐 세미나와 포럼을 했다. 참여하신 분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 계속해 총회의 신학 기조를 이어가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개혁 교회의 미래와 신학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할렐루야!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과 109회 신학부에서 '신학과 교회'라는 주제로 실시하는 지역별신학세미나 및 신학포럼에 참석할 모든 분들에게 풍성히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겨울의 추위도 물러가고 새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와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시대는 변해도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도전해 나가야 할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런 시기에 신학부에서 지역별로 실시하는 신학과 교회 지역별세미나 및 신학포럼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본 교단 총회의 신학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론의 부재 속에 점점 혼탁해져가는 위기 상황을 돌아보며, 그 뿌리를 튼튼하게 세워가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로 세상을 향해 도전해 나가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강사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목회 현장에 실제적인 유익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신학적 정체성이 흔들리는 조국 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개혁 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성경적 원리를 제시함으로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신학적 이해와 목회 적용 사례를 제시할 것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총회 산하 12,000여 교회와 목회자들이 개혁 교회의 미래와 신학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워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신학과 교회를 주제로 하는 지역별세미나와 포럼을 위하여 수고해주신 총회 교육 전도팀 관계자들과 장소를 제공하고 후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총회와 산하 교회들을 섬기는 109회 신학부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예배는 신학부 서기 윤00 목사의 인도로 신영호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딤전 1:12-14을 봉독했다.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값 비싼 은혜’란 제목으로 “바울의 회심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하나님을 오해했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목회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목회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삶으로 개혁주의를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같이 우리도 붙드심을 굳건히 믿자.”라고 설교 후 총회신학정체성위원회 회계 양민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세미나는 신학부장 박의서 목사의 사회로 총신대학 김길성 교수가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의 특징과 의의’란 제목으로 “벌코프 조직신학 교회론은 110페이지에 불과하나 박형룡은 조직신학 교회론에서 415페이지로 다루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충실하게 따라 조직신학 책을 기술했다. 박형룡 박사는 창조 원리에 근거해 여성 임직에 대해 반대했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은 여전히 우리 교단 신학에 유용성을 갖고 있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기초해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대신대학 임종구 목사가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현대교회의 위기와 대안’이란 제목으로 “4차 혁명 시대를 보내며 환경오염과 이상기후가 심각해지고 있다. 현대교회는 성경관에 위기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여러 차례 변경이 있었으며 이로인해 신학의 변질이 생기게 된다. 세상의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교회 역할을 해야한다. 병든 도시를 품고 이웃이 되며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라고 강의하고 세미나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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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S, 제28회 선교사 자녀(MK) 수련회 개최
-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는 한낮에 월문리 GMS(이사장 양대식 목사)본부를 찾았다. 제28회 선교사 자녀 수련회가 지난 월요일부터 다음주 화요일까지 8박 9일 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침 예배실에서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30여분 그들을 지켜 보면서 마음이 짠했다. 만약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들이 선교사를 부모로 선택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선교사 자녀들은 부모가 선교사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출국하거나 또는 선교 현지에서 태어난다. 성장하면서 문화적인 충격과 자기 정체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아 선교사들이 자녀로 인해 선교 사역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선교사 자녀 문제는 관심있게 들여다 보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GMS는 1994년부터 선교사 자녀 수련회를 시작해 올해로 28회기를 맞이한 국내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선교사 자녀 수련회다. GMS 선교사 자녀 수련회 특징은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수련회가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주도하는 수련회라는 점이다. 모든 스태프는 선배 MK들이며, 이들의 주도하에 수련회가 기획되고 운영된다. 또한, 이들을 지도하는 선교사 역시 MK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GMS 선교사 자녀 수련회가 필요한 이유는, 청소년기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로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심리사회적 위기라고 말한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선교사 자녀들은 다문화적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반 청소년들보다 더 혼란스러워한다. 선교사 자녀들의 이러한 특수한 상황들로 인하여 선교사 자녀들의 정체성 문제는 일관성 있는 정체감을 형성하는 본국의 청소년에 비해 어렵고 심각한 상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문화적 상황에서 자기의 고유성, 소속감을 찾는 정체성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녀들에게 정체성 확립에 대한 교육과 프로그램 즉, 수련회가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음의 목적을 갖고 수련회로 모인다. ① 정체성 회복 (하나님의 자녀/ 선교사 자녀/ 한국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선교사 자녀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을 발견한다. ② 신앙 회복 (믿음/ 구원의 확신/ 신앙생활): 개인의 믿음을 점검하고, 구원의 확신을 통해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③ 공동체성 회복 (GMS MK): GMS MK 공동체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며, 함께 신앙을 나누고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④ MK 네트워크 형성: 다양한 MK들과의 교제를 통해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평생의 동역자 관계를 맺는다. ⑤ 선교적 삶: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올해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를 주제로 GMS총회세계선교회 선교 본부와 원주중부교회에서 진행된다. 대상은 GMS 청소년 선교사 자녀(중고등학생)로 학생 45명이 전 세계에서 와 참여했고, 스텝은 30명으로(대학생, 직장인 선교사 자녀) 교사 20명(정교사, 보조교사) + 진행 10명(진행, 촬영, 찬양, 의료), 총괄 3명(MK담당 선교사, MK전문 사역자)이 섬긴다.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축복의 선물은 MK(Missionary Kids)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단지 부모님이 선교사라는 이유 하나로 그 땅을 밟아야만 했던 여러분들은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로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편 37편 25절~26절). 제가 지금까지 본 MK들은 이 말씀과 같이 축복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들의 눈물이 여러분들을 세상의 가장 귀한 보배들로 세워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번 수련회 기간 7박 8일 동안 여러분들의 삶의 가장 귀한 분,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만남을 넘어 좋은 관계로 이어져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늘 머무르는 삶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의 손에 귀하게 쓰임 받아 여러분들이 발로 밟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말했다. 서정수 행정사무총장은 “자녀들이 선교사 부모에게 떠밀려 억지로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련회를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일이 많으며, 부모를 이어 선교사에 지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며 선교사 자녀 수련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선교사들이 자녀로 인해 사역에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선교사 자녀와 가정에 대한 관심과 배려, 기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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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총도 외면하는 전광훈을 계속 추종하는 합동측 인사들
- 최근 기독교연합회관 15층에 있는 한기총 사무실에 가보니 대표회장을 역임했던 전광훈의 사진이 없어졌다. 사무실 입구에 역대 대표회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전광훈만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2020년 대표회장에서 사퇴했었다. 보수주의 단체인 한기총 입장에서도 전광훈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黑歷史,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럼에도 합동측에는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 예장합동교단은 2021년 106회 총회에서 전광훈과 관련해 집회 참여 금지를 결의했었다. "발언 내용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까지 신앙적 집회 참여 금지를 촉구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광훈을 추종하는 자들을 어찌해야할 것인가? 오죽했으면 보수 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왜 전광훈과 절연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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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15 21:11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 제62회 목장기도회 - 셋째날 폐회
제62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를 주제로 5월 13일 오후 1시 30분 부터 15일까지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3000여명이 참석해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하며 강의 듣고 은혜받는 시간을 가졌다. 셋째날 오전 경건회는 김신근 목사의 인도로 김흥선 장로가 기도, 황지희 사모가 특송, 박노섭 목사가 왕상 3:23-28을 본문으로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소서!'란 제하로 “솔로몬은 왕이 되자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 얻었다.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다른 것도 더해 주셨다. 솔로몬은 아이 문제로 송사가 왔을 때 산 아이를 반으로 나눠 주라고 명령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제가 속한 충남노회 문제를 잘 처리 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사랑하면 보호하게 된다. 교회의 분쟁이 사라지고, 다음세대에 집중할 때 한국교회는 쇠락의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아들을 포기하는 이 여인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기도회 조승호 목사가 기도회 인도, 한수환 목사 · 강문구 목사 · 조형민 목사가 특별기도 후 양대식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강의 6은 최찬용 목사의 사회로 정상혁 목사가 기도, 김성민 장로가 특송, 고정민 장로가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란 제목으로 광고를 통한 복음 전도에 대해 강의했다. 기도회 박승남 목사가 기도회 인도, 한민수 목사 · 윤삼중 목사 · 유웅상 목사가 특별기도 후 한기영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강의 7은 이주백 목사의 사회로 이광재 장로가 기도, 김기성 목사가 색소폰 특주, 도원욱 목사가 ‘기본으로 돌아가자’란 제목으로 “교회 만이 갖고 있고,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이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다. 전도와 선교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본질이요 정체성이다. 그래서 ‘선교적 제자도’가 중요하다. 막 1:38 전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 교회의 위기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본질에 충실해야 교회가 건강해진다. 요 8:29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빌 4:1 바울은 교인들을 향해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했다. 롬 1:16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자랑하는가? 바울처럼 십자가와 복음을 자랑해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기도회 조영기 목사가 기도회 인도, 박철수 목사 · 맹인중 목사 · 송광현 목사가 특별기도 후 정창수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폐회예배는 부회록서기 안창현 목사의 인도로 조형국 장로가 기도, 최광영 목사가 겔 36:37-38을 봉독, 서울노회 연합찬양대가 찬양했다.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사람, 사건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의 말을 많이 들어봤자 남는 게 없다. 내 말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말 많이 듣기를 원치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주권적 지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한 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 내 역량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입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본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시작도 끝도 하나님이 행하심을 알고 믿고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입증하고,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한다. 감동과 눈물은 다가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고 살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 하심을 믿고 아멘해야 한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담대하게 이루어지심을 위해 기도하자.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기도하며 경험하자”라고 설교했다. 기도회 박기준 목사가 기도회 인도, 이승희 목사 · 황재열 목사 · 황성건 목사가 특별기도 후 기침 총회장 이 욥 목사가 축복의말씀한 후 증경총회장 전계헌 목사의 축도로 폐회예배를 마쳤다. 이어 총회장상 시상, 푸짐한 경품추첨 후 은혜로운 제62회 목장기도회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
김병중(Th.D) 05-15 01:24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 제62회 목장기도회 - 둘째날
제62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를 주제로 5월 13일 오후 1시 30분 부터 15일까지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3000여명이 참석해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하며 강의 듣고 은혜받는 시간을 가졌다. 14일 둘째날 오전 경건회 1은 정신길 목사의 인도로 손원재 장로가 기도, 소프라노 최예은 교수가 특송했다. 노원석 목사가 슥 12:10-11을 본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라는 제하로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찌른 것이다. 아니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찌른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에 어느 정도의 통회의 고통이 있는가? 마음이 메마르지는 않았는가? 애통과 통곡의 회복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를 다시 사용하신다.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보고 주님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목장기도회가 미스바의 기도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기도회 축도하는 장재덕 목사 이어 강창훈 목사가 기도회 인도, 진두석 목사 · 이규섭 목사 · 한병지 장로가 특별기도 후 장재덕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 강의 사회하는 배현수 목사 전체 강의 3은 배현수 목사의 사회로 홍승철 장로가 기도, 유은성 전도사 · 김정화 사모가 ‘결국’이란 제목으로 유은성 전도사가 “뇌종양에 걸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감당하며 감사하고 있음”을 간증하며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찬양했다. 기도회 축도하는 변충진 목사 고석찬 목사가 기도회 인도 신덕수 장로 · 여성구 목사 · 이기영 장로가 특별기도 후 변충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트렉강의 2는 이은호 목사의 사회로 조평제 장로가 기도, 이형만 목사가 ‘기도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강의했다. 기도회 이병현 목사가 기도회 인도, 조상철 목사 · 박의서 목사 · 조현석 목사가 특별기도 후 이두형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 강의 사회하는 양성찬 목사 전체강의 4는 양성찬 목사의 사회로 조현우 장로가 기도, 박종의 장로가 색소폰 특주, 서태상 목사가 마 10:1-8을 본문으로 ‘전도자를 세우신 예수님’이란 제하로 “예수님은 전도자를 세우시고 파송했다. 교회에 매일 전도자를 세우고 유급 전도인을 둬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기도회 축도하는 김동관 목사 조성민 목사가 기도회 인도, 하정민 장로 · 김낙선 목사 · 태준호 장로가 특별기도 후 김동관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트랙강의 9는 박은제 목사의 사회로 김정수 장로가 기도, 진용훈 목사가 ‘주일이냐, 안식일이냐?’란 제목으로 강의, 양충만 목사가 기도회 인도, 현상오 장로 · 김종일 목사 · 백종성 목사가 특별기도 후 박종탁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저녁집회는 부서기 서만종 목사의 인도로 배원식 장로가 기도, 임병만 목사가 합 3:2을 봉독, 총신 목회자평신도 연합 오케스트라&합창단이 찬양, 장순직 목사가 ‘하박국의 부흥론’이란 제목으로 설교, 전승덕 목사가 기도회 인도, 이억희 목사 · 이재천 목사 · 남해길 목사가 특별기도했다. 이어 김대원 목사가 요 7:37-39을 봉독, 김상기 목사가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제목으로 설교, 남서호 목사가 기도회 인도, 허 은 목사 · 정여균 목사 · 이종석 목사가 특별기도, 오광춘 장로가 헌금기도, 헤세드중창단이 헌금특송, 합신 총회장 박병선 목사 · 순장 총회장 이재성 목사가 축복의 말씀 후 증경총회장 배광식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
김병중(Th.D) 05-13 23:57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 제62회 목장기도회 - 첫째날 개회
제62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십자가, 다시 복음 앞에’를 주제로 5월 13일 오후 1시 30분 부터 15일까지 수영로교회(이규현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3000여명이 참석해 간절히 기도하고 예배하며 강의 듣고 은혜받는 시간을 가졌다. 총회장 김종혁 목사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기도회가 되기를 바란다. 바울처럼 십자가와 복음만 자랑하자. 십자가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십자가만이 유일한 빛이다. 부흥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복음과 십자가만 붙잡고 살자. 십자가 앞에 나아가 모든 것을 고침 받도록 하자”라고 개회사 했다. 앞서 개막식은 김경환 장로의 진행으로 각 노회 및 기관 기수단이 입장하고 김종혁 총회장이 각 노회장에게 당선 축하패를 전달했다. 개회예배는 서기 임병재 목사의 인도로 부총회장 김형곤 장로가 기도, 박영만 목사가 대하 14:9-13을 봉독 후 수영로·명성·우정교회 연합찬양대가 찬양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기도 불패, 기도가 답이다’란 제목으로 “아사 시대를 통한 교훈은 평강할 때가 위험할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도와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니 기도로 반드시 답을 구하자. 전력투구해 기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기도회 민찬기 목사가 기도회 인도, 김용대 목사 · 김종학 목사 · 정영기 목사가 특별기도 후 직전총회장 오정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총신대 박성규 총장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것이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절대적인 분이시며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해 하나님의 때에 응답받자”라고 축복의 말씀을 전한 후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광고로 개회 예배를 마쳤다. 기도회 전체강의 1은 이철우 목사의 사회로 김경환 장로가 기도, 테너 서철수 장로가 특송, 김재원 장로가 ‘어느 산에 오르시겠습니까?’란 제목으로 강의(강의자의 요청으로 동영상 촬영 안함) 후 홍순율 장로가 기도회 인도 고상석 목사 · 김용길 목사 · 임성원 장로가 특별기도한 후 임용택 목사가 축도했다. 기도회 전체강의 2는 류명렬 목사의 사회로 김완겸 장로가 기도, 유해석 교수가 ‘토마스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 신학적 유산’이란 제목으로 강의 후 김호겸 목사가 기도회 인도, 조대천 목사 · 이양수 목사 · 권택성 장로가 특별기도한 후 김성환 목사가 축도했다. 저녁집회는 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의 인도로 회계 이민호 장로가 기도, 이창수 목사가 성경 봉독, 이천은광교회 찬양대가 찬양, 소강석 목사가 ‘다시 십자가, 다시 복음’이란 제목으로 설교, 이은철 목사가 기도회 인도, 김재철 목사 · 윤영민 목사 · 이원호 목사가 특별기도했다. 이어 류춘식 목사가 성경봉독, 대명교회 찬양대가 찬양, 장창수 목사가 ‘배 안의 사람, 배 밖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 후 김한욱 목사가 기도회 인도, 오범열 목사 · 김정호 목사 · 신규태 목사가 특별기도 후 부회계 남석필 장로가 헌금기도, 경신노회 연합찬양대가 헌금특송, 통합총회장 김영걸 목사가 축복의 말씀, 증경총회장 이승희 목사가 축도했다. -
김병중(Th.D) 05-13 23:05
“선거 규정을 지키며 사회법에 제소하지 않겠다”
제110회 총회 선거에 나서는 예비 후보들의 공명선거 서약식이 5월 13일 오전 11시 30분 수영로교회 희락홀에서 있었다. 후보들은 “총회 헌법과 총회 규칙 및 선거 규정 등을 비롯한 제반 결의에 대하여 성실히 준수할 것과 선거와 관련하여 총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대하여 사회법에 의거 민, 형사상 제소(고소, 고발) 등을 하지 않기로” 서약했다. 또한 이를 위반할 때 “접수일로부터 자동 입후보자 상실은 물론 당 회기로부터 향후 10년간 총대권 제한에 대해 이의 없음”도 서약했다. 통상 후보 확정 이후 했던 서약식을 앞당긴 이유는 노회에서 추천받은 예비 후보이기에 이미 선거법을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개회 예배는 서기 김한욱 목사의 인도로 부위원장 김영구 장로가 기도,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가 갈 1:6-10을 봉독, 위원장 오정호 목사가 ‘그리스도의 종의 결단’이란 제목으로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고백이 생활의 고백이 돼야 한다. 사람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신앙의 잣대, 가치로 살자. 복음의 종답게 살자. 예비 후보들인 여러분을 통해 노회와 총회가 좋아지기를 바란다. 빛 된 열매를 남기자”라고 설교 후 오정호 위원장의 축도로 마쳤다. 서기 김한욱 목사가 “단독 입후보자라도 8월에 후보 등록하고 확정이 될 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또한 선관위나 재판국 등 미등록인 경우 추가 모집자만 경선에 붙인다. 그리고 선거 활동은 선거법에 따라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공명선거 서약식은 김한욱 목사의 사회로 회계 김영식 장로가 기도, 서기 입후보자 서만종 목사가 대표 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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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4-23 16:52
한교총,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다시 복음으로”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이하 한교총)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가 4월 23일 오전 10시 30분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번 기념대회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회 소속의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와 그 신앙의 유산을 돌아보며 ‘다시 복음으로’ 한국교회의 사명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마련되었다. 예배는 소강석 목사(기념대회 상임대회장, 예장합동 증경총회장)의 인도로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의 기념사, 이상규 목사(예장개혁 총회장)의 기도, 김만수 목사(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의 성경봉독, 이영훈 목사(명예회장, 기하성 대표총회장)의 설교,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데스다 찬양대의 찬양, 박병선 목사(공동대표회장, 예장합신 총회장)의 비전선언, 김정석 감독(기감 감독회장)의 축사, 우원식 국회의장,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국기독교협회 회장 우웨이 목사, 일본복음동맹 미즈구치 이사오 이사장의 축전이 이어졌다. 축도는 김영걸 목사(공동대표회장, 예장통합 총회장)가 맡았다.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는 기념사를 통해 “140년 전 당시 사회는 반상의 법도에 따라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였고, 무속이 민간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였다면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선포하며 전근대적 구습을 물리치고 민주공화체제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듯이,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우리의 삶의 형식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임대회장 소강석 목사는 “선교사들을 통해 우상과 미신, 가난과 차별이 가득하였던 이 땅에 복음의 빛이 전해지면서 새 아침이 밝았다”라며,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한국교회 연합과 부흥의 원년으로 삼아 복음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이 다시 타오르게 해야한다”며 대회사를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설교를 통해 “십자가 신앙으로 견고히 서 있으면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도전하며 편 가르기를 뛰어 넘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해야 한다”며, “정치인, 예술인, 사업가, 학생 그 어떤 일을 하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인이 되자”라고 강조했다. 특별히 기념예배에서 창작 칸타타 <빛의 연대기>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소강석 목사의 대본과 작사, 김대윤 작곡가의 창작곡으로 구성되었으며, 류형길 지휘자가 이끄는 뉴월드심포니오케스트라와 뉴월드합창단, 소프라노 임경애, 테너 이다윗 등의 출연으로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 창작 칸타타 <빛의 연대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 평양대부흥, 일제강점기의 신앙 저항, 해방과 한국전쟁, 현대 교회의 성찰과 연합의 비전을 아우르며 140년의 신앙 여정을 칸타타 형식으로 담아 큰 감동을 전했다. 또한 한교총은 한국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비전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대회 비전선언문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14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위대한 부흥과 선교의 역사를 써왔습니다. 한국교회는 미신과 구습을 타파하고, 제국주의의 유산을 물리치며 민주 공화정에 입각한 자유 대한민국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일제 제국주의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근면과 성실로 부강한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헌신해 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입각한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면서 국내 1대 종교로 자리하며, 세계 선교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몰아치는 인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복음의 가치를 공고히 하며, 다시 복음으로 혼란스러운 나라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다가올 세대의 비전을 선언합니다. 1. 오직 고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우리는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범죄한 우리를 살리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 꿇어 타락한 이 땅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오직 우리의 치료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미래의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2. 정의로운 나라가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이사야 11:4,5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복음은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므로 이웃의 생존을 해치지 않는 사회, 정직과 온유와 겸손으로 재판하며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는 정치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3. 무속과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사도행전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회는 너무도 빨리 모두가 모두를 대적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140년 전처럼 무속이 문화의 탈을 쓰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의 영으로 서로 불신을 조장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이 가난해지는 역설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무속을 타파하고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며 오직 진리의 말씀이 세상의 길이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4. 땅끝까지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8:19, 20a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 삼는 선교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시대 열방을 향한 선교의 성과는 내려두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들과 거역하는 나라를 향해 달려가며, 복음적 통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민과 이주민을 이웃으로 맞아 환대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헌신하겠습니다. 5. 복음 전도에 매진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는 천국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회개와 치유의 복음을 담대하게 세상에 전파하겠습니다. 교회를 보다 건강하게 하며, 새로운 교회를 세우며, 다음 세대 전도에 헌신하겠습니다.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에 넘치도록 힘쓰겠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창조 질서를 허무는 제도를 훼파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2025년 4월 23일 한국교회총연합 -
김병중(Th.D) 04-20 19:22
"교회를 특정 정치의 도구로 삼는 시도 단호히 거부"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4월 20일 오후 3시 광림교회에서 있었다. 이날 1,200만 성도를 대표하여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여한 72개 교단장 일동이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온 인류의 희망임을 밝히고, 한국교회는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민족의 아픔과 성장에 함께 했음을 돌아보며 현재 교회가 현실 정치에 극단적으로 나서는 것을 우려했다. 이는 전00, 손00 등이 교회와 기독교를 등에 업고 극단적인 정치 개입을 한 것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담화문은 “어떤 정치 세력도 교회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특별담화문 전문이다. 선교140주년 부활절 예배 특별담화문/한국교회와 사회에 드리는 말씀 "부활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국교회를 다짐합니다" 부활절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절은 온 인류의 희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오직 그 분만을 따르고 그 분의 사역을 이어가기로 다짐하는 '거룩한 결단의 날'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활신앙'에 힘입어 어둠과 절망의 시대와 문화 앞에서도 빛과 생명을 향한 소망을 민족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습니다. 교회는 근대화 운동, 3.1 독립만세운동을 비롯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국가 재건, 전쟁기의 구제와 위로, 경제 회복과 민주화 운동, 소외된 계층 섬기기 등에 앞장서 민족의 고난과 희망의 역사에 함께 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뒤돌아보면 때때로 교회가 권력 지향 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세속적 가치관을 따름으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소홀히 하였음을 통열히 반성하며, 참회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부끄러움은 '부활신앙'으로 상징되는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욕심과 이념에 편승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최근 일부 극단적 정치 행위에 교회가 연루되고 있다는 사회의 비판과 우려는 국민의 신뢰와 교회의 선교를 위한 토대를 뒤흔드는 심각한 경고입니다. 이 점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반성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수 1:7)을 벗어나 한편으로 치우친 극단의 극우-극좌 비성경적 정치 행위를 멀리해야만 할 것 입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정치적 결정과 권리를 존중하지만, 교회를 특정 정치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의 거룩성과 시민의 주권을 함께 보존해 왔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치 세력도 교회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2025년 부활절을 맞이하며 1) 그리스도 중심, 성경중심, 사랑실천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회복하고, 2) 사회적 약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3) 극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망국적 편가르기를 종식시키고, 4) 국민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힘쓰며, 5) 세계교회 앞에 다시금 영적 부흥과 세계선교의 횃불을 높이들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1200만 성도를 대표하여 2025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72개 교단장 일동 -
김병중 11-18 18:12
한장총 제40회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상임회장 천 환 목사 선출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11월 18일 오후 2시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제40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임원 선출,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을 통과했다. 이번 정기총회에서 한장총 현 상임회장인 정서영 목사를 제40회 대표회장으로 추대했고, 고신 증경총회장인 천 환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추대했다. 개회예배는 상임회장 정서영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권오헌 목사가 기도 후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부터 23절까지를 본문으로 '사방관계신앙'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성탄절을 맞이하면 후회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성결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선물, 믿음의 선물, 축복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방관계신앙을 잘해야 이러한 복을 받는다"고 설교한 후 증경대표회장 황수원 목사의 축도 후 총무 고영기 목사가 광고한 후 개회예배를 마쳤다. 회무진행 총회는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의 사회로 "하나님의 은혜로 정기총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개회 인사 후 서기 조강신 목사가 회원점명 후 대표회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공동회장 김만형 목사가 개회기도 후 전회의록, 각종회의 보고, 사업 보고는 유인물로 받기로 하고, 강세창 목사가 감사보고, 회계 김충무 장로가 결산보고했다. 선거관리위원장 김종준 목사 사회로 대표회장 및 상임회장 선거를 해 당선증을 수여하고 당선 공포하고, 신구임원을 교체했다. 39회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가 "2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도 한장총을 위해 관심갖고 협력하겠다.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이임사 후 정서영 신임대표회장이 선서하고 "부족한 저를 대표회장으로 추대해 주신 뜻을 잘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취임사 후 신 임원 소개한 후 공로패와 감사패를 증정한 후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을 임명하고, 신임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의 폐회기도로 정기총회를 마쳤다. -
김병중 10-20 07:11
종교개혁 기념, 한영훈 한장총 대표회장 메시지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대표회장이 메시지를 발표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2022년 종교개혁 기념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오는 10월 30일 주일은 루터의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505년 전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은 그릇된 전통이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었고, 성경 말씀에 의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믿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의 실천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교세감소와 사회적 신뢰가 하락하는 오늘날 개혁교회는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심전력의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중심으로 성경적 교리를 확립하고, 성직 교권주의, 교회 안에 파고든 세속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성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 등 온갖 세속주의를 배격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합시다. 개교회 중심주의와 교회의 분열과 파벌, 부패와 타락이 가져오는 갖가지 참상들을 바로잡고 교회 연합과 일치의 바탕인 공교회성 회복에 힘씁시다. 그리고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서 노력합시다. 교회의 공공성이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더 높은 도덕성으로 떳떳해지며, 자기성찰에 엄격해지고, 더 많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전통을 회복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개혁교회는 분열과 분쟁을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나갈 때에 한국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와 나라의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2022. 10. 18.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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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11 12:04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 “개혁주의 신학”공개세미나 개최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위원장 신종철 목사)가 주최한 “변화하는 세계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보수와 확장을 위한 우리 교단의 역활 모색” 공개세미나가 7월 11일 오전 11시 판암장로교회(홍성현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홍성현 목사와 판암장로교회는 중부권의 거점 교회로서 총회의 많은 행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부 예배는 부위원장 강창훈 목사의 인도로 회계 고정식 장로가 기도, 서기 송광현 목사가 엡 2:20-22을 봉독했다.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함께 지어져 가다’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함께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함께 모든 일을 감당한다. 함께 고민하며 연구하는 일들이 함께함을 확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110회 총회준비위원장 한수환 목사가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위원장 신종철 목사와 이국진 목사를 통해 좋은 강의를 기대하고, 110총회도 개혁주의적인 일들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격려사, 홍성현 목사(판암장로교회)가 “환영하며 좋은 시간 되시기 바라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서기 송광현 목사가 광고 후 증경총회장 오정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세미나는 서기 송광현 목사의 사회로 총무 최규정 장로의 기도로 시작했다. 제1강은 이국진 목사가 ‘세계 개혁교회의 현황과 전망, 그리고 우리 교단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주, 중남미 교회의 현황과 교단 교류 현황을 살피고,WEA 와의 교류문제에 대해서는 “범 개신교 연합단체로서 반대 근거가 없다”라고 강의했다. 제2강 신종철 목사가 ‘한국장로교회와 개혁주의’란 제목으로 “우리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이다. 우리 합동 교단은 누가 뭐라고해도 개혁주의 신앙 위에 기초하고 이 신학을 사수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강의 후 중부협의회 대표회장 김종원 목사의 식사기도 후 판암장로교회에서 제공하는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
김병중(Th.D) 07-10 12:12
신학부, '현대 교회론의 위기와 대안' 세미나 및 신학포럼
109회기 총회 신학부(부장 박의서 목사)가 “현대 교회론의 위기와 대안”이란 주제로 지역별신학세미나 및 4차 신학포럼을 7월 10일 오전 10시 30분 총회회관 2층에서 개최했다. 신학부장 박의서 목사가 “신학부가 4번에 걸쳐 세미나와 포럼을 했다. 참여하신 분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되시기 바란다. 계속해 총회의 신학 기조를 이어가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개혁 교회의 미래와 신학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할렐루야!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과 109회 신학부에서 '신학과 교회'라는 주제로 실시하는 지역별신학세미나 및 신학포럼에 참석할 모든 분들에게 풍성히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겨울의 추위도 물러가고 새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와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시대는 변해도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도전해 나가야 할 지혜와 통찰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런 시기에 신학부에서 지역별로 실시하는 신학과 교회 지역별세미나 및 신학포럼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본 교단 총회의 신학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론의 부재 속에 점점 혼탁해져가는 위기 상황을 돌아보며, 그 뿌리를 튼튼하게 세워가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로 세상을 향해 도전해 나가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강사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목회 현장에 실제적인 유익이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신학적 정체성이 흔들리는 조국 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고, 개혁 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성경적 원리를 제시함으로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신학적 이해와 목회 적용 사례를 제시할 것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총회 산하 12,000여 교회와 목회자들이 개혁 교회의 미래와 신학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워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신학과 교회를 주제로 하는 지역별세미나와 포럼을 위하여 수고해주신 총회 교육 전도팀 관계자들과 장소를 제공하고 후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총회와 산하 교회들을 섬기는 109회 신학부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예배는 신학부 서기 윤00 목사의 인도로 신영호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딤전 1:12-14을 봉독했다.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값 비싼 은혜’란 제목으로 “바울의 회심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하나님을 오해했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목회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목회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삶으로 개혁주의를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같이 우리도 붙드심을 굳건히 믿자.”라고 설교 후 총회신학정체성위원회 회계 양민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세미나는 신학부장 박의서 목사의 사회로 총신대학 김길성 교수가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의 특징과 의의’란 제목으로 “벌코프 조직신학 교회론은 110페이지에 불과하나 박형룡은 조직신학 교회론에서 415페이지로 다루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충실하게 따라 조직신학 책을 기술했다. 박형룡 박사는 창조 원리에 근거해 여성 임직에 대해 반대했다.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은 여전히 우리 교단 신학에 유용성을 갖고 있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기초해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대신대학 임종구 목사가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현대교회의 위기와 대안’이란 제목으로 “4차 혁명 시대를 보내며 환경오염과 이상기후가 심각해지고 있다. 현대교회는 성경관에 위기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여러 차례 변경이 있었으며 이로인해 신학의 변질이 생기게 된다. 세상의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교회 역할을 해야한다. 병든 도시를 품고 이웃이 되며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한다”라고 강의하고 세미나를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07-09 22:01
GMS, 제28회 선교사 자녀(MK) 수련회 개최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는 한낮에 월문리 GMS(이사장 양대식 목사)본부를 찾았다. 제28회 선교사 자녀 수련회가 지난 월요일부터 다음주 화요일까지 8박 9일 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침 예배실에서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30여분 그들을 지켜 보면서 마음이 짠했다. 만약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들이 선교사를 부모로 선택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선교사 자녀들은 부모가 선교사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출국하거나 또는 선교 현지에서 태어난다. 성장하면서 문화적인 충격과 자기 정체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아 선교사들이 자녀로 인해 선교 사역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선교사 자녀 문제는 관심있게 들여다 보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GMS는 1994년부터 선교사 자녀 수련회를 시작해 올해로 28회기를 맞이한 국내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선교사 자녀 수련회다. GMS 선교사 자녀 수련회 특징은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수련회가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주도하는 수련회라는 점이다. 모든 스태프는 선배 MK들이며, 이들의 주도하에 수련회가 기획되고 운영된다. 또한, 이들을 지도하는 선교사 역시 MK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GMS 선교사 자녀 수련회가 필요한 이유는, 청소년기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로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심리사회적 위기라고 말한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선교사 자녀들은 다문화적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반 청소년들보다 더 혼란스러워한다. 선교사 자녀들의 이러한 특수한 상황들로 인하여 선교사 자녀들의 정체성 문제는 일관성 있는 정체감을 형성하는 본국의 청소년에 비해 어렵고 심각한 상황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문화적 상황에서 자기의 고유성, 소속감을 찾는 정체성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녀들에게 정체성 확립에 대한 교육과 프로그램 즉, 수련회가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음의 목적을 갖고 수련회로 모인다. ① 정체성 회복 (하나님의 자녀/ 선교사 자녀/ 한국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선교사 자녀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을 발견한다. ② 신앙 회복 (믿음/ 구원의 확신/ 신앙생활): 개인의 믿음을 점검하고, 구원의 확신을 통해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③ 공동체성 회복 (GMS MK): GMS MK 공동체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며, 함께 신앙을 나누고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④ MK 네트워크 형성: 다양한 MK들과의 교제를 통해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평생의 동역자 관계를 맺는다. ⑤ 선교적 삶: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올해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를 주제로 GMS총회세계선교회 선교 본부와 원주중부교회에서 진행된다. 대상은 GMS 청소년 선교사 자녀(중고등학생)로 학생 45명이 전 세계에서 와 참여했고, 스텝은 30명으로(대학생, 직장인 선교사 자녀) 교사 20명(정교사, 보조교사) + 진행 10명(진행, 촬영, 찬양, 의료), 총괄 3명(MK담당 선교사, MK전문 사역자)이 섬긴다.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축복의 선물은 MK(Missionary Kids)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단지 부모님이 선교사라는 이유 하나로 그 땅을 밟아야만 했던 여러분들은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로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편 37편 25절~26절). 제가 지금까지 본 MK들은 이 말씀과 같이 축복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신 부모님들의 눈물이 여러분들을 세상의 가장 귀한 보배들로 세워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번 수련회 기간 7박 8일 동안 여러분들의 삶의 가장 귀한 분,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만남을 넘어 좋은 관계로 이어져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늘 머무르는 삶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의 손에 귀하게 쓰임 받아 여러분들이 발로 밟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말했다. 서정수 행정사무총장은 “자녀들이 선교사 부모에게 떠밀려 억지로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련회를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일이 많으며, 부모를 이어 선교사에 지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며 선교사 자녀 수련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선교사들이 자녀로 인해 사역에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선교사 자녀와 가정에 대한 관심과 배려, 기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
김병중(Th.D) 07-06 22:21
한장총 한국장로교의날, ‘연합과 일치 통해 새롭게 도약하자’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이 주최한 제17회 한국장로교의날 기념식이 7월 6일 오후 4시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시무하는 주다산교회에서 열려 예배하며 자랑스러운 장로교인상을 시상하고 한국장로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뮤지컬 “빛의 길”을 공연했다. 대회장 ·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오늘 행사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한국장로교회가 샬롬 부흥하기를 원한다. 오늘은 맥추절로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첫 열매이다. 한국장로교회는 형제이다. 연합해 하나님나라 부흥을 섬기자. 또한 빛과 소금으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며 살롬부흥하자.”라고 대회사했다. 다음은 대회사 전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샬롬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샬롬 제17회 한국장로교의 날 행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26개 회원교단 산하 노회와 지교회 위에 그리고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한국 기독교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장로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로교 연합과 일치를 위해 시작된 한국장로교의 날이 17회를 맞이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한국장로교의 날은 성경, 찬송, 교회, 주일학교, 기독교학교, 사회봉사, 해외선교, 비전 8가지 주제를 가지고 회원 교단 총회장님들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회원교단의 연합과 일치를 통해 한국장로교회의 위상을 제고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형제와 자매입니다. 한국장로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여 경건과 균형잡힌 영성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17회 한국장로교의 날을 맞아 장로교회가 더욱 하나되어 힘을 모아 한국사회에 실추된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론분열, 저출생, 고령화, 기후 환경, 경기침체, 고실업율, 외교안보 등 시급한 당면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 선출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관계의 단절, 소통의 부재, 갈등의 심화 모두가 죄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샬롬이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샬롬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6개 교단이 함께하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장로교의 신앙을 정신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혜롭게 섬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샬롬 부흥!'을 주제로 모이는 제17회 한국장로교의 날 다함께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장로교회가 한마음되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며 새롭게 도약하는 귀한 시간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제17회 한국장로교회의 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한국장로교총 연합회의 선교적 사명의 부흥을 이루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는 상임회장 이 선 목사의 인도로 기수단 기수 입장, 개혁개신 총회장 김 선 목사가 기도, 전국장로성가합창단이 찬양했다. 기장 부총회장 이종화 목사가 히 4:12을 본문으로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마 16:18을 본문으로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자”라고, 호헌 총회장 김종주 목사가 눅 2:52를 본문으로 “부모와의 통합 예배를 통해 바른 신앙을 전수하자”라고, 대신 부총회장 정정인 목사가 마 28:29-20을 본문으로 “교회가 학교를 세워 입학하는 학생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자”라고, 합신총회장 박병선 목사가 마 28:20을 본문으로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을 의지해 다시 세계선교에 힘을 내자”라고, 합동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창 22:14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천하만물을 붙들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굳건히 믿자”라고 주제 설교했다. 재정위원장 김재선 장로가 헌금기도, 김민숙 소프라노가 특별찬양했다. 주제 기도 합동동신 총무 강세창 목사가 ‘샬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장로교회 되게 하소서’, 개혁 총무 김순귀 목사가 ‘샬롬, 다음세대에 믿음의 유산과 소망을 이어가게 하소서’, 웨신 총무 김복래 목사가 ‘샬롬, 이 땅에 평화와 복음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주제기도했다. 기장 총회장 박상규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을 하고 직전대표회장 천 환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자랑스러운 장로교인상 한국장로교의날 기념식은 준비위원장 김영구 장로의 사회로 시상식 위원장 이영한 목사가 대독하고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목회부문 안봉웅 목사, 선교부문 이성화 목사, 교육 및 신학부문 김병훈 교수, 복지부문 정신길 목사, 기업인 부문 전우수 장로에게 시상했다. 축사 한국교회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가 “장로교 신학은 거룩한 교회를 회복하는 기초가 된다. 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고 말씀에 굳게 서자”라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고경환 목사가 “장로교가 끝까지 노력해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라고, 한국기독교교단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선규 목사가 “샬롬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라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한국교회는 장로교와 함께 했다. 민족복음화를 위해 수고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라고, 서울시 오세훈 시장이 “이 시대 필요한 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예배위원장 김종명 목사와 비전선언위원장 정성엽 목사가 비전선언문을 낭독했다. “2025년은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지 140주년이 되고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선교 초기 교파를 초월해 선교사들이 자신의 몸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평양대부흥 성령의 불길이 퍼져 나갔던 사실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신앙선배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는 제17회 한국장로교의 날을 맞아 ‘샬롬 부흥!’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 그리고 세계를 섬기는 참된 장로교회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하나님 앞과 모든 성도들 앞에 엄숙히 선언한다. 1. 우리는 ‘샬롬 부흥’으로 한국장로교회의 회복과 연합을 이루어 거룩한 교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부터’, ‘날마다’ 개혁을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고 장로교정치체제를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장로교회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3. 우리는 교회에서 청년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넘쳐나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믿음을 이어가게 하는 책임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4. 우리는 약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역할에 힘쓴다. 또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5. 우리는 북한 교회 재건의 원칙을 세워 일체감을 가지고 복음통일을 위해 노력하며,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한다. 2025년 7월 6일 제17회 한국장로교의날 참석자 일동 뮤지컬 "빛의 길" 한국장로교의 날 뮤지컬은 언론위원장 박용규 목사의 사회로 “빛의 길”(한국장로교희 역사)를 공연 후 개혁 부총회장 이빛나 목사가 파송의 기도 한 후 운영위원장 강동규 목사의 알림하고 감동적이며 은혜로운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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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4 18:21
목사의 은퇴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중서울노회(노회장 최문진 목사) 은퇴위원회(위원장 강조훈 목사)가 주최한 『목회자 은퇴준비와 재정관리』 세미나가 5월 24일 오후 2시 신용산교회(오원석 목사 시무)에서 개최되어 미래희망 가정경제연구소 김남순 컨설팅 소장의 강의를 듣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세미나는 위원장 강조훈 목사의 사회로 신현수 목사가 기도, 김성수 장로가 강사를 소개했다. 김남순 소장이 “은퇴 준비는 빨리 해야 한다. 고령화가 심각하다. 주식, 코인 등 투자는 공부하고 해야 한다. 비재무적인 은퇴준비도 해야한다. 은퇴 후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자산 투자를 하지 말아야 한다(부동산, 교회 짓는 것, 리모델링하는 것 등등). 교회 부채를 빨리 갚아야 한다. 목사 은퇴 준비도 빨리 해야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로 교회 재정은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노후에 주거, 생활비, 의료비가 필요하다. 국민임대주택은 소득 및 자산보유액이 낮은 목회자들에게 유리하다. 목사는 헌금 줄여서 개인 연금에 가입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18세부터 60세 미만까지 가능하니 국민연금은 작게 기간은 길게 넣고 연기 신청은 하지 않는다. 노후생활비는 따박따박 나오는 연금이 최고다”라고 강의 후 은퇴위원회 위원장 강조훈 목사의 폐회기도로 마쳤다. -
김병중(Th.D) 05-10 21:35
중서울노회남전연, 서울비전교회에서 순회예배 및 월례회
중서울노회 남전도회연합회(회장 최동균 장로) 제45회기 제1차 순회헌신예배 및 월례회가 5월 10일 오후 5시 용산구 원효로에 소재한 서울비전교회(신현수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순회헌신예배는 회장 최동균 장로의 인도로 부총무 최재승 집사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표어 제창, 1부회장 박재석 장로가 기도, 정동석 장로가 창 1:1을 봉독, 남전도회연합회 임원일동이 특송했다. 서울비전교회 신현수 담임목사가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교회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있어 무릎 꿇고 전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 우리 삶에 큰 시작 ‘태초’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을 수 있으나 직접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 잘 믿는 것이 최고이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거래이다. 하나님 만나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회계 김남석 장로가 헌금 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 지교회 부흥과 중서울남전도회연합회 부흥을 위하여 / 서울비전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다 같이 뜨겁게 합심기도 후 29대 증경회장 장덕용 장로가 마무리 기도한 후 총무 장성규 집사가 광고하고 신현수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월례회는 회장 최동균 장로의 사회로 34대 증경회장 조윤성 장로가 기도, 서기 이금재 장로가 11개 교회 회원 32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해 개회, 총무 장성규 집사가 전 회의록 낭독 · 사업 보고, 회계 김남석 장로가 회계보고 했다. 안건토의 ①전남연 순회 헌신예배: 5월 25일(주) 오후 3시, 금곡교회 ②중서울노회남전도회연합회 찬양제: 11월 15일 오후 3시(제4차 순회헌신예배와 병행 시행) ③야외예배: 예년처럼 산행 실시 효행상 시상 회장 최동균 장로가 효행상 시상, 임원동 장로가 서울비전교회를 소개 후 주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
김병중(Th.D) 04-22 19:50
서울동노회 정기회, 김관범 목사 노회장 선출
서울동노회 72회 정기회가 4월 22일 오전 10시 성산교회(유병용 목사 시무)에서 개최해 김관범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개회예배는 노회장 소재혁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김관범 목사가 기도, 서기 최영봉 목사가 시 78:28을 봉독, 성산교회 찬양대가 찬양 후 소재혁 목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란 제목으로 설교 후 성찬식을 집례(분병: 이동규(성문) 박시현(고덕제일) 오명환(명문) 김상용(하남) / 분잔: 추해천(이천신하) 이석관(주영광) 서승택(광주중앙) 최종만(혜림))한 후 직전노회장 정안민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사무처리 시간에 임원개선, 총대선거, 신구임원을 교체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임원 노회장: 김관범 목사 부노회장: 유경목 목사, 성낙형 장로 서기: 안성일 목사 부서기: 전만수 목사 회의록서기: 김기홍 목사 부회의록서기: 김정식 목사 회계: 박태선 장로 부회계: 홍원호 장로 목사총대: 김관범 방성일 김영우 유병용 김윤동 장로총대: 최종만 김상용 김대영 정영용 전우용 -
김병중(Th.D) 04-22 18:42
고광석 목사,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부총회장 예비후보 추천
동광주노회 제125회 정기회가 4월 22일 오전 10시 광주서광교회(고광석 목사 시무)에서 모여 고광석 목사를 110회 총회 부총회장 예비 후보로 추천하고, 김종식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한 후 회무를 처리했다. 고광석 목사는 “먼저 이 자리에 서게 해 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광주노회에서 4년 전에 부서기로 추천해 주셨는데 노회원들의 기도와 선배 목사님들의 지도로 부서기에 당선되어서 직무를 잘했으나 4년 만에 다시 또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해 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이 자리의 추천은 전남제일노회 한기승 목사님이 서야 할 자리인데 급박한 건강상의 이유로 제가 대신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병상에서 나를 대신해서 출마해 달라는, 울먹이면서 했던 그 당부를 무거운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가 받아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남 중부 지역에서 우리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오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우리 지역 총대들의 강력한 지지와 권면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출마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 제가 섬기는 광주서광교회의 당회가 전적으로 지지해 주시고 또 우리 노회가 이렇게 만장일치로 격려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바쁜 일정 중에 우리 호남 지역의 단체장님들이 많이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또 바쁘신 중에 우리 많은 언론인이 이곳 광주까지 오셔서 취재해 주셔서 언론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부총회장으로 출마하면서 약 20년 동안 총회를 섬기며 배웠고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을 경험으로 그리고 제107회 총회 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총회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의 주요 교단들이 시무 목사들에 대한 연금을 실시하고 있는데 우리 총회는 아직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총회 소속 시무목사들의 전면적인 연금 제도를 실시하는데 초석을 놓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 장로교 정치 원리는 목사와 장로가 대등하게 총회를 섬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총회 실행위원회 등 모든 총회 활동에 목사와 장로가 대등하게 섬길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겠습니다. 이왕에 출마했으니 노회원 여러분들 많이 기도해 주시고 조언해 주시고 꼭 당선되어서 우리 노회의 자랑이 되고 총회에 유익을 주는 임원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 앞에 다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추천인사말했다. 예배는 서기 박성식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이만석 장로가 기도, 광주서광교회 남성4중창의 찬양 후 노회장 박종철 목사가 '서로 사랑하라(요 13:31-35)'라는 제목으로 설교, 부노회장 김종식 목사의 축도 후 직전노회장 함형규 목사의 집례로 성찬예식을 했다. 회무는 목사 회원 75명, 장로 회원 28명의 참석으로 개회해 노회 임원을 개선하고, 고광석 목사를 제110회 총회 부총회장 예비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천하기로 결의했다. 고광석 목사 소개 ▲ 출생 : 전남 구례에서 3대째 신앙의 가문에서 출생 ▲ 학력 : 1) 개신대학원대학교, Asian Theological Seminary(M.Div) 졸업 2) 미국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Ph.D) 3) 2005년 교단 합동으로 총회신학원(M.Div. Equiv)을 편입하여 졸업 ▲ 목회자 경력 - 1991년, 개혁교단 강북노회에서 준목(강도사) 인허 및 목사 안수 - 필리핀 선교사 파송 - 2002년 후원교회의 청빙으로 한국 목회 시작 - 現, 광주서광교회(동광주노회) 담임목사 ▲ 지역협의회 경력 - 동광주노회 노회장, 호남제주지역 노회장협의회 회장 역임 - 現, 전국호남협의회 수석부회장 ▲ 총회 경력 - 정치부, 재판국 등 여러 상비부의 임원으로 다양한 경험 - 지방신학교활성화연구위원회 위원장 역임 - 총회 빅데이터구축위원회 위원장 역임 - 편목위원회 위원장 역임 - 제107회 총회 서기 역임 - 現, 아시아지역노회신설위원회 위원장 - 現, 기독신문사 60주년기념 아카이브 위원회 위원장 - 現,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총동창회 부회장 ▲ 학자 경력 - 필리핀 마닐라, 안드레신학교(Andrew Theological Seminary) 설립 → 매년 1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는 건실한 신학교로 성장 → 필리핀과 아시아지역 복음화에 기여 → 現, 안드레신학교 후원회장 - 광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목회신학전문대학원 교수(現) → 약 20년 동안 전임교수(산학중점, 부교수)로 사역 ▲ 출판 및 학술지 논문 - 『이슬람, 기독교와 뿌리가 같은가?』(2016년) - 『개혁주의 선교신학과 문화론』(2018년) - 한국연구재단(KCI) 등재 학술지에 영어 논문 2편과 한글 논문 6편 등재 임원 노회장 : 김종식 목사 부노회장 : 제광온 목사, 김준석 장로 서기 : 이찬규 목사, 부서기 : 정제명 목사 회록서기 : 손경대 목사, 부회록서기 : 조성진 목사 회계 : 송경근 장로, 부회계 : 문병길 장로 목사총대 : 김종식 홍용희 고광석 박성수 김용수 / 부총대 : 이승범 제광온 장로총대 : 김준석 김정호 김철중 김원식 이선희 / 부총대 : 박영규, 송경근, 오수홍 축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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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7-08 16:47
윤영민목사 대한교회, 지역주민 위한 서울형키즈카페 개관
지역사회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대한교회(윤영민 목사 시무)가 지하 1층, 지상 10층 교육관을 신축하고, 4층을 서울형키즈카페 양천구 신정4동점으로 개관하는 기념식을 7월 8일 오후 3시 구청 관계자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관 지하 1층에서 가졌다. 대한교회가 실버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계획한 곳을 다음세대를 위해 사용하는 큰 결정을 한 것으로 앞으로 교회가 위탁 운영하게 된다. 윤영민 담임목사가 “여기 신축한 교육관의 이름을 'Center WITH'로 정했다. 하나님과 다음세대 그리고 지역주민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형키즈카페는 구청 보육과와 협력으로 개관하게 됐다. 이곳을 잘 운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교회는 공간을 제공하고, 설치하는데 구청이 잘 협력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말했다. 이기재 양천구청장이 “윤영민 담임목사께서 미래 세대를 키우는 일에 진력하겠다고 말씀하셔서 참으로 존경스럽다. 덕분에 이곳에 키즈카페를 설치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현재 양천구에 6번째 개관했고 올해 9번째를 개관하기 원한다”라고 개관 축하 인사말했다. 개관식은 출생장려팀장의 사회로 구립 무지개 어린이집의 합창 공연, 내빈 소개, 보육정책과장이 경과 보고 후 기념촬영하고 4층 키즈카페 시설을 관람 후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서울형 키즈카페 소개 아동의 놀이권이 보장되는 행복한 보육도시 양천 1. 재미•안전 보장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어요!" • 신체놀이와 창의역할놀이의 균형 있는 배치 • 연령별 신체발달 수준을 고려한 놀이기구 구성 • 주기적인 안전점검 및 소독 2. 안심 돌봄 "급할 때는 아이를 대신 돌봐드려요!" • 36개월 이상 아동 대상 • 자격을 갖춘 돌봄요원 배치(돌봄비 2천원 별도) 3. 부담 없이, 즐겁게 "저렴한 요금으로 마음 편이 즐겨요!" • 2시간 기준 2천원(보호자 1천원 별도) • 2명 이상 다둥이가족, 어린이를 동반한 65세 어르신 무료 양천구 신정4동점 시설 안내 1. 주요놀이시설 • 신체놀이공간 아동의 대근육 발달을 돕고, 모험심을 기를 수 있는 그물놀이터(스카이포켓)와, 미끄럼틀, 오르기, 건너기 등으로 구성된 플레이파워존 • 창의놀이공간 인지능력 발달과 또래 유대관계 형성을 위한 칠판자석놀이, 블록•일상놀이 2. 이용대상 서울시 거주 2~6세 아동 ※ 2~6세 : 2025년 기준 2019년생~2023년생 3. 이용요금 2시간 기준 아동 2천원, 보호자 1천원 4. 운영시간 월~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휴관) 평일 10:00~18:00(3회차), 토요일 09:10~18:50(4회차) ※ 회차별 2시간 이용 5. 이용방법 온라인 예약 후 이용 (이용일 기준 7일 전부터 예약 가능, 우리동네 키움포털 https://icare.seoul.go.kr/icare/indexP.do 클릭, 터치 하면 사이트로 이동합니다.) -
김병중(Th.D) 07-06 22:02
진주성남교회, 설립101주년 맞아 몰도바공화국에 선교사 파송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진주성남교회(양대식 담임목사, 총회 GMS 이사장)가 설립 101주년을 맞아 7월 6일(주일) 한인 선교사가 거의 없는 지역인 몰도바공화국에 황진우 · 박성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날 파송예배는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의 사회로 드려졌으며, 1부 예배는 서정수 GMS 행정사무총장이 설교, 2부 파송식은 허성회 GMS 선교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어진 순서에서 GMS 전 총무 박춘근 목사와 진주성남교회 영어담당 선교사 스캇 라빈슨 선교사의 축사 후 사천교회 원로 정계규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은혜롭게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06-28 22:27
거룩한교회 · 발안제일교회, 교회 통합 및 임직 감사예배
거룩한교회 & 발안제일교회교회(당회장 황영환, 담임목사 김정길) 통합 및 임직 감사예배가 6월 28일 오전 11시에 있었다. 1부 통합감사예배는 김정길 담임목사의 인도로 드림교회 정현배 목사가 기도, 노예선 목사가 워십, 세계예수교총연합회 이사장 홍광표 목사가 ‘최고 최상의 통합’이란 제목으로 “첫째, 120명이 통합했다. 주님 중심의 통합이었기에 중요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 통합은 깨지지 않게 된다. 말씀 중심의 통합이었기에 최고 최상이었다. 마음 중심의 통합이었다. 기도 중심의 통합이었다. 영적인 통합이었다. 둘째, 3천명의 통합이었다. 성령충만의 통합, 교회 중심의 통합이었다. 셋째, 5천명의 통합이었다. 두 교회가 최고 최상의 통합을 이루어가기 바란다”라고 설교 후 봉헌하고 서울시교회와시청협의회 상임부회장 정연석 목사가 봉헌기도했다. 2부 임직식은 당회장 황영환 목사의 집례로 취임 받을 자 소개, 서약, 안수기도, 공포 후 임직패 및 꽃다발을 증정했다. 권면 축사 3부 권면과 축하는 당회장 황영환 목사의 인도로 아름다운교회 당회장 노상호 목사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큰 복을 받기 바란다”라고, 안양성문교회 당회장 윤노원 목사가 “ 교회가 통합했으니 한 마음 되어 아름다운 교회를 이뤄가기 바란다. 고전 1:10 말씀을 드린다. 같은 말, 뜻, 마음으로 열매 맺기 바란다”라고 권면, 용인혜성교회 당회장 최본우 목사가 “하나님의 때에 두 교회가 합병하고 거룩한 일꾼을 세웠다. 소풍가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임직자들이 앞장 서기 바란다”라고, 순복음 성남교회 당회장 양병열 목사가 “은혜스러운 교회 통합 및 임직 감사예배이다. 시너지를 만들어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진리 총회장 윤석경 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하고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
김병중(Th.D) 06-28 21:04
용신교회, 원로목사추대·담임목사위임·출판기념 감사예배
설립 37년을 맞이하는 용신교회가 이정훈 목사의 원로목사 추대 · 이믿음 목사의 담임목사 위임, 이정훈 목사의 「얼떨결의 은혜」 · 이명순 사모의 「마음 엄마」 출판 감사 기념예배를 6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드렸다. 이정훈 원로목사가 “얼떨결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에 감사드린다. 사모에게 가족과 교인들에게 감사하다. 목회를 대를 잇는 아들에게 감사하고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라고 감사인사했다. 이믿음 담임목사가 “축하하러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원로목사님의 수고로 귀한 교회가 세워졌다. 2대 목사로 많은 부담감이 있지만 달려가야할 길을 있는 힘껏 달리도록 하겠다. 기도를 부탁드린다”라고 감사인사했다. 1부 예배는 김성기 목사(안산서현교회, 위임국장)의 인도로 이승주 목사(세우는교회, 노회서기)가 기도, 백남천 목사(복음풍성한교회, 상록시찰장)가 살전 1:1-5을 봉독, 호산나성가대가 찬양했다. 이진근 목사(사랑샘교회, 경기서노회장)가 ‘은혜와 평강’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은 평강이다.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평강도 또한 있어야 한다. 이정훈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해서 지금까지 잘 감당해 오셨다. 용신교회가 계속해 평강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이정훈 목사 원로목사 추대 2부 이정훈 목사 원로목사 추대식은 이승주 목사(세우는교회, 노회서기)가 추대사, 김광이 목사(기쁨의동산교회, 증경노회장)가 기도, 노회장이 공포·추대패 증정, 79동창회 상임부회장 백근기 목사가 축하패 전달, 조성환 장로(용신교회)가 예물증정, 사역 영상 시청, 남서호 목사 (79동창증경회장단 회장)가 “원로목사 추대를 축하드린다. 요 10:4 말씀을 드린다. 좋은 분위기 가운데 원로추대하게 되어 축하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이믿음 담임목사 위임 3부 이믿음 담임목사 위임식은 위임국장 서약, 공포, 위임패 증정, 구본수 장로(용신교회)가 예물증정했다. 이규현 목사(은혜의동산교회, 증경노회장)가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달려가기 바란다”라고 위임목사 권면, 유재명 목사(빛나교회 원로목사)가 “하나님께서 담임목사를 세우셨음을 믿고 인정하자. 담임목사와 협력하며 교회를 세워가기 바란다. 더 좋은 목사를 요구하기 보다 더 좋은 성도들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교인 권면했다. 출판감사 4부 출판감사식은 김성겸 목사(동산교회, 경기서부노회장)가 축하 및 감사기도, 이정훈 목사 (얼떨결의 은혜)가 “얼떨결에 이 책이 나왔다. 유익한 책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이명순 사모(마음 엄마)가 “좋은 분을 만나 쓰고 싶었던 책을 쓸 수 있어 감사했다”라고 감사인사말했다. 축하 및 인사 축사 5부 축하 및 인사는 보아너게중창단의 축가, 김인중 목사(동산교회원로목사)가 “이정훈 목사님을 45년 전부터 알아왔다. 몬 1:7 말씀을 드린다. 후임자는 더욱 큰 목회를 하기 바란다. 출판한 두 권의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많이 소개하기 바란다. 담임목사로서 귀한 사역 잘 감당하기 바란다”라고, 김호성 목사(세교중앙교회, 수원신학교학장)가 “원로와 위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벧엘, 이스라엘, 브니엘과 임마누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백동조 목사(목포사랑의교회)가 “이정훈 목사와는 오랜 시간 함께 했다. 원로 되심에 축하드리고, 목포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다 목회를 승계한 이믿음 목사의 위임도 축하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이국병 목사의 축가, 김영억 장로(용신교회, 준비위원장)가 인사 및 광고 후 조상구 목사(시화동산교회, 증경노회장)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하고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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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6-12 22:41
성정인 작가, '행복한 그림의 노래' 시화 · 그림 전시회 개최
성정인 작가(성남제일교회 김태웅 장로 부인)가 7월 한 달 동안 시화, 그림 전시회를 갖는다. 성 작가는 백석 상담대학원 가족상담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고, 내적 치유를 위한 CCM 앨범 '주님 나를 만지소서'를 발표했다. 또한 마음 치유와 영혼에 새 힘을 주는 어른들이 읽는 동시 1집 『맛있어져라』와 2집 『행복해져라』를 출간했다. 십 년간 색소폰을 취미로 불다가 시집 2집에 시화와 그림을 그려 넣게 되었는데 취미 부자가 되어 급기야 개인 시화, 그림 전시회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성 작가는 시화에 시를 캘리 글씨로 멋지게 써 주신 현원숙 선생님과 그림을 격려와 친절함으로 지도해주신 '미술 소풍' 임수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그림들 안에 과거의 추억을 아름답게,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미래는 소망을 담뿍 담아 그려 보았으니, 시화와 그림을 감상하시는 분들의 삶이 맛있어지고 행복해지시길 기원했다. 성정인 작가는 성남제일교회 권사로 섬기며 예배 찬양 인도자로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다. 또한 성남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장을 역임했고 지역 교회 여성 사역의 연합과 부흥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음악을 사랑해 색소폰 연주를 취미로 즐기며, 선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문학적 감성을 신앙과 일상에서 꽃피워 두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시집에는 소소한 일상의 감동과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앙과 예술, 삶을 노래하며 걸어온 작가의 길은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언제: 2025.7.1~7.31(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카페 앤드 티(cafe&T), 성남시 중원구 산성대로 594 (3층-네파 건물) -
김병중(Th.D) 06-05 21:26
장봉생 부총회장, 행사 설교의 바람직한 모델
오늘 경북 청송으로 취재하러 갔다. 지난 3월 있었던 경북 지역의 큰 산불로 전소된 성지교회가 3개월 만에 재건축 기공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었다. 행사는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 예배, 2부 기공식, 3부 시삽 행사. 그런데 이 모든 행사가 1시간도 안 되어 은혜롭게 끝났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장봉생 부총회장의 설교가 짧았기 때문이었다. 6분 정도의 짧은 설교였다. 그러나 핵심이 압축된 설교로 임팩트가 있었다. 장 부총회장은 학 2:8-9을 본문으로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란 제하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이 앞으로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성전을 말하는 것이다. 산불로 교회가 전소된 후 모두가 마음을 모았다. 우리 교회 성도도 퇴직금을 성지교회 재건을 위해 드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지교회가 그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이 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전소된 교회의 재건축 기공 예배에 잘 맞는 설교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필요한 내용만 설교했기에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행히 2부 기공식의 모든 순서도 빠르게 진행됐다. 개식사, 경과보고, 축사, 격려사, 답사 등이 지루하지 않게 이어졌고, 3부 시삽(첫 삽 뜨는)하는 행사까지 다 포함해 1시간이 안 걸렸다. 대부분의 기독교 관련 행사는 1부 예배 후 나머지 본 행사를 진행한다. 이때 설교자가 시간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나머지 순서는 결국 늦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행사에는 수상자, 격려사, 축사 등 순서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니 설교를 길게 해서는 안 된다. 짧을수록 아멘 소리도 크게 나오고 심지어 박수갈채도 받는다. 이전에 장 부총회장은 한 운동회 행사에 등단해 10초 정도 설교하고 하단하기도 했다. 이때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었다. 이것이 설교자가 행사 설교에 가져야 할 “쎈스”이다. 상황에 맞게 시간과 내용을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장봉생 부총회장이야말로 "짧고 굵게 임팩트 있는" 행사 설교의 바람직한 모델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남이 잘하는 것은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
김병중(Th.D) 05-26 22:20
【心콕】 유해석 교수, ‘너 잘생겼구나. 공부 잘하게 생겼다’
5월이면 생각나는 스승이 있다. 중학교를 가야하는데 교복이 없었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누가 입던 교복을 가지고 오셨다. 나는 낡은 교복이 창피했는지 늘 혼자있었다. 키가 작아서 8번이고 공부를 못했다. 새벽에는 신문을 배달해야 했기에 수업시간에 조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 새로 부임하신 역사 선생님이 한 손에는 회초리와 한 손에는 좋은 볼펜을 한 움큼 들고 오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역사 성적이 90점 이상이면 볼펜이 선물이야, 90점 이하면 회초리야"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셨다. "너 잘생겼구나. 공부 잘하게 생겼다" 나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기에 충격이었다. 그 뒤로 역사점수가 90점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교직을 이수하였고, 영국 웨일즈 대학교에서는 역사신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 강의가 시작될 때, 종종 그 선생님을 생각하곤 한다. 나 또한 격려하고, 응원하는 선생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총신대학 선교대학원 교수로 계신 유해석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이 글이 내 마음을 울렸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이해 학생들의 축하를 받고 이 글을 올리신 것 같다. 유 교수는 어려웠던 환경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말 한마디로.... 참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유해석 교수가 한없이 부럽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용기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살고 싶다. -
김병중(Th.D) 05-21 21:59
직전총회장 오정호 목사, 한남대학교 ‘대학장 금장’ 수상
직전총회장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가 대전 소재 한남대학교의 최고의 상인 ‘대학장 금장’을 수상했다. 한남대학교 이승철 총장과 학교 관계자들이 5월 21일 새로남교회를 방문해 수요 저녁예배 전에 오정호 목사에게 그동안 학교에 많은 관심과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대학 최고의 상을 전달한 것이다. 다음은 ‘대학장 금장’ 수상 문구이다. 오정호 목사님은 지난 1994년부터 현재까지 새로남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회의 성장과 지역사회 봉사에 헌신해 오셨습니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CTS 대표이사, 대전성시회운동본부 대표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섬김의 리더십으로 교계 및 학계, 언론계에 이르기까지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한남대학교 총장자문위원 및 ‘아너스클럽'의 회원으로 2008년부터 현재 까지 학교발전기금을 기탁하여 한남대학교가 창학 정신에 맞는 참된 기독교적 인재를 배출 할 수 있도록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이에 오정호 목사님께서 보여주신 본교에 대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기독교 창학 이념에 따른 총회 사역과 한국 교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 등 목사님의 지대한 공적을 기리고자 한남대학교 모든 구성원의 마음을 담아 「한남대학교 대학장 금장」 을 수여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례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18~19) 2025년 5월 21일 한남대학교 총장 이승철 한남대학교 이승철 총장이 “오정호 목사님께서 저희 학교에 대한 애정으로 많은 헌신을 해 주셨는데 그동안 오 목사님께서 대학장 시상을 많이 사양하셔서 부득이 새로남교회로 직접 와 전달해 드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오정호 목사가 “우리 교우들 중에는 한남대에 재직하시는 교수님들도 계시고, 재학생들도 많다. 한남대학은 교단의 분열로 현재 통합교단에 속해 있지만 복음의 깃발 아래 우리는 하나라는 마음으로 동반성장을 꿈꾸고 있다. 우리 교회와 한남대학은 가까이 있으며 중부권의 자랑이 되고 있다. 오늘 이 큰 상을 받는 저의 기쁨이 성도들의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매 주일 저녁마다 행사가 있어 오늘 수요 저녁 예배 시간 전에 이 행사를 갖게 되었다”라고 감사인사했다. 당회 서기 김상배 장로가 “오정호 담임목사님과 새로남교회가 그동안 한남대학을 후원해왔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오늘 이런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계속해서 우리 교회와 한남대학이 지역사회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인사말, 김용태 원로장로가 “저희 담임목사님께 큰 상을 주신 한남대학교에 감사하다. 서로 도우며 하나가 되어 대전을 발전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기를 바란다”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진 수요예배는 이한균 목사의 인도로 송여옥 권사(에바다다락방 순장)가 기도, 16 ·17 여전도회(회장: 임현미, 김은희M 집사)가 특송, 한남대학교 교목실장 반신환 목사가 마 1:20~23을 본문으로 ‘함께’란 제하로 “전에 가끔 새로남교회를 방문하면 오정호 목사님께서 청년부 설교를 하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 목사님은 한남대학교를 방문하면 교직원들을 많이 칭찬하시며 저희 대학에 해외 유학생들이 많은데 글로벌 장학금을 지원해 주시고 계시다. 저희 한남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학생들이 이후 교수가 되면 똑같이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게 된다.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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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면직”, “노회 문제 제기”, "소송"....기자를 겁박하나?
한 통의 내용증명 문서를 받았다. 북일교회 사태에 관해 쓴 기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상대방이 문제 제기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관련기사링크: 북일교회 담임 반대 측, 노회 수습처리위 지시 묵살 난동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00 그러면 기사에 대한 것만 언급해야지 기자인 내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선 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관련한 전문이다. 총신대학교 신대원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H노회 소속의 동암교회를 사임하신 후에 J노회 소속의 C교회에 소속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관련하여 교단법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교단법은 목사님이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근거 규정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첫째, 목회자가 노회의 소속을 바꾸려면 타 노회 소속 교회의 청빙을 받아 이명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C교회의 청빙을 받으신 겁니까? 목사님이 C교회의 청빙을 받았다면 그 교회에서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둘째, 목사는 임직서약할 때 신자 목사'로 열심히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목사님이 현재 출석하시는 교회와 그 교회에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의 근거 서류를 가지고 계십니까? 주일을 범하고 헌금을 포함한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면직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말미에 민형사상 소송을 걸고 내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이 무슨 겁박인가? 2024년 10월 31일까지 목사님의 답변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민형사상 소송과 아울러서 목사님께서 교단 결의를 어기고 일방적으로 취재하여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신 일과 목사님의 현재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24년 10월 24일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 드림 이처럼 “목사 면직 ”, “민형사상 소송 제기”,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 제기” 등등 다양하게 기자를 겁박하는 이들이 바로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정체인가? 저들이 궁금해하는 내 신상은 저들이 민형사상 소송을 하면 그때 밝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 면직 사유가 아니니 그때 내가 그들을 “명예훼손, 협박”으로 맞 소송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끝으로 나는 북일교회를 이미 2번 취재하러 갔었다는 것도 밝힌다.김병중(Th.D) 10-25 12:47 -
총회 임원들은 공과사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109회 총회에서 GMS 선관위원회(위원장 이성화 목사) 조사처리위원회가 가결됐다. 이미 여러 언론들이 GMS 행정사무총장 선거와 관련해 선관위원장의 처신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로인해 조사 처리를 받게 된 것이다. 곧 임원회에 의해 조사처리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성화 목사는 지난 10월 6일 교회설립 4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가졌다. 초청된 인사는 김종혁 총회장을 비롯해 화려하다. 장봉생 부총회장, 권순웅 증경총회장, 박용규 총회총무 등등. 혹시나 이것이 앞으로 그가 받아야 할 조사 처리에 하나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임원들은 공사를 잘 구분해야 할 것이다. 진행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순수한 선교 조직인 GMS의 명예를 실추시킨 당사자가 어떤 조치를 받을지 총회원들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밝혀둔다.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김병중(Th.D) 10-07 16:20 -
그래도 교회 세습은 안 된다
예장합동은 20여 년 전에 만든 70세 정년제를 상향하거나, 폐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예장통합은 만든 지 몇 년 안 된 세습금지법을 변경하거나 폐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세습(世襲)은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을 말한다. 이 뭔 코미디인가? 그 당시 법을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찬반 격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각 지교회와 노회가 동의해 법을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 법을 폐지해 보려고 매년 총회 때마다 격론을 벌여야 하는가? 그나마 예장합동측 교회들은 세습금지법이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합동교단은 세습금지법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나이 든 목사, 특별히 개척교회 목사는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세습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세습금지법이 없다고 해도, 아무리 봐도 교회 세습은 “아니다”. 교회는 목사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데 어찌 가업을 물려주듯이 세습한단 말인가? 어느 교회는 세습에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그 일로 인해 난리가 나기도 한다. 교회 세습은 요즘 사람들이 예민한 “공정과 상식”에 맞지도 않는다. 제사장들은 세습했다는 말은 하지도 말자. 어떻게 성경을 그렇게 취사선택해 왜곡할 수 있는가? 남 주기 아까우니 자기 자식 주는 게 아닌가? 평생 목회하고 마지막에 목회를 망치는 세습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목사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다. 내 것인 양 마음대로 하지 말자. 그럼에도 여전히 "뻔뻔하게" 교회를 넘겨주는 아버지 목사들과 "즐거이" 넘겨받는 아들 목사들이 많으니 할 말이 없다. 있던 정년제 마저 변경하거나 폐지할려고 하는 합동교단은 과연 교회 세습 금지법을 만들 수 있을까?김병중(Th.D) 10-0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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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반복되는 목사 정년 갈등…해법은 있는가?
매년 전국장로회연합회 하기부부수련회가 끝날 때 결의문을 채택한다. 올해도 그랬는데 역시나 장로들은 목사들의 정년제 연장을 적극 반대했다. “우리는 항존직 정년 연장을 적극 반대한다. 우리 교단은 헌법에 항존직 정년을 70세로 명시하고 있다. 급변하는 AI시대에 걸맞게 젊고 열정이 있는 목회자가 더욱 필요한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정년 연장을 적극 반대한다.” 이것을 가리켜 혹자는 노(장로)사(목사)갈등이라고 했다. 정년을 앞둔 목사 중에는 연장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장로들은 결사반대하고 있다. 지난 109회 총회에서 잠시 정년 연장안이 통과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장로들의 벌떼 같은 항의로 곧 무효가 됐다. 올해도 정년 연장안과 고수안이 헌의될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소모전이 되풀이되어야 하는가? 목사들은 인디언 기우제처럼 될 때까지 매년 연장안을 올리고 거기에 목을 매달 것인가? 사회 통념상 보면 70세까지 목회하는 것은 많이 하는 것이다. 젊어서 개척한 경우는 30년, 40년 목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상 40대 후반에 담임으로 나가는 지금 현실에 부임하면 25년 정도 목회를 한다. 그러면 일반 직장인 보다 많이 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교단마다 정년이 없거나 긴 경우도 있으니 70 정년제에 해당하는 목사들은 이래저래 심난할 것이다. 목사는 70이 넘어서도 더 목회하고 싶고, 장로들은 안 된다고 하니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 매년 총회에서 1시간 넘게 설전을 벌이는데 올해도 재탕이 될 것 같아 취재하는 기자 입장에서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해법은 그 어디에 있는가? 뭐든 만들기는 쉬워도 없애기는 어렵다. 과거 정년제를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제 왜 그것을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있지 않는 한 이 노사갈등은 매년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다가 노년 정년 연장에 대한 힌트를 주는 내용이 있어 소개해 본다(『모두가 힘들다고 할 때 기회가 있다』 - 한근태. 글의온도 · 2025년)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은행권에서는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피크제를 적용한다. 공평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공평하지 않은 제도다. 또한 로테이션이라는 명목하에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수한 인력이 왔다가도 뚜렷한 주특기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반면 정치권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어 있다. 기업이라면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늘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현역이다 보니 실천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대교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의 주장은 들어볼 만하다.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부터 원래 담겨 있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이런 것이 세대교체다. 컵에 있는 물을 전부 비우고 새로 넣는 게 아니다. 세상일은 원래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하는 것이고, 젊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한다. 가득염은 1969년생, 2007년 SK 왔을 때 내일모레 마흔이다. 그런데 4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경력이 많으니 위기에도 떨지 않고 대범하게 자기 볼을 던졌다. 한 마디로 나이 먹었다고 자르고, 젊다고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가득 같은 선수는 기용하고, 젊어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르라는 것이다. 컵에 있는 물을 쏟고 새 물을 채우는 대신 계속 새로운 물을 부으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젊기만 한 사람을 채우는 게 세대교체가 아니다. 제 역할을 잘하고 발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대교체다(pp. 176-177).김병중(Th.D) 07-05 10:53 -
차카게 살자!
명도소송 모든 절차가 오늘로 마무리됐다. 내가 담임 사임 후 어머니 집으로 이사 온 후에 한 여자가 지하방에 세 들어왔다. 어머니 말씀에 돌싱인 것 같다고 했다. 이후 3층에 사는 나와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한동안 집을 비우더니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연락이 끊겼다. 오랜 기간 기다리다 결국 집을 비우기 위해 명도소송을 했고 내가 법원에, 집행관실에 들락날락했다. 그러면서 법무사에, 집행관실에, 짐 빼는 일에, 보관비에 등등 수백만 원이 들었고 나도 시간을 뺏겨야 했다. 오늘로써 소송 건 지 약 4개월 만에, 보관창고에 있던 짐을 30만 원 들여 폐기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수십년 세를 받아 생활하시는 어머니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셨다. 나야 더 문외한이다. 세를 밀리기 시작했을 때 바로 조처해야 했는데 무슨 사정이 있겠지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그간 받은 월세를 다 날려버렸다. 그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던 여자와 우연히 한번 통화가 됐다. 그 여자는 자기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 여자 목소리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다그치기도 애매했다. 이후 전화하니 다시는 받지 않았다. 집행관실에서 명도소송 진행 중인 것을 알리기 위해 그 여자의 초본을 뗘 주소를 알아냈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민사라 경찰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이상한 세입자로 인해 손해 본 것이 한두 푼이 아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차카게 살자는 것이다. 남에게 선을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피해는 주지 않고 살고 싶다. ‘남에게 눈물 흘리게 하면 자기는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말도 있다.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나부터 차카게 살아야지!김병중(Th.D) 07-03 14:33 -
설교 홍수...이제는 공해, 자중하시라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교회나 개인이나 온라인, 유튜브의 달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설교를 찍어 영상으로 보내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한다리 거쳐 알게 된 목사가 주일 낮이 되면 오전 예배 때 찍은 자신의 설교를 보내오고 있다. 차단해 버렸다. 도대체 목사에게 자신의 설교를 보내는 목사의 심리가 궁금하다. 카톡에 보면 심심치 않게 자신의 설교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제발 자중하시라. 타인이 설교를 올려준다면 그나마 봐줄만하지만 본인이 본인의 설교를 올리면 참 없어 보인다. 이제 설교는 홍수를 넘어 공해 수준이 되었다. 잘 하는 설교는 찾아서 듣는다. 맛집은 골짜기에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과 같다. 제발 자신의 설교를 본인이 올리는 일은 그만 두기를 바란다. 자신의 설교를 들으라고 강요하지 말라. 들어볼만한 설교가 너무나 많은데 도대체 왜 당신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 막상 들어봐도 별 내용이 없으니 참 담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설교에 자신감을 갖는 설교자가 가장 위험하다.김병중(Th.D) 06-3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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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109회 총회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09회 총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쳤다. 총회에 대해 총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몇 자를 남기고자 한다. 금번 109회 총회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기대 반으로 끝났다는 것은 1) 정년 연장, 여 강도사 인허 문제는 해결이 아닌 해법을 찾아서 결의했다는 점이고, 2) 회의 진행에서 총회장의 의사진행은 그대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가며 소통하면서 결의를 꾀하려고 했다. 그래서 찬, 반의 소통을 이루어 갔다. (이전 총회에서는 총회장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은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고 묵살하거나, 결의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진행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사례가 있다) 개혁신학적이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 정처 없음이 만연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총회의 결의가 우리의 삶과 신앙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우려 반은 또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게 했다. 1)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 하였기에 우려 반이다. 우리 선배들은 오랫동안 주류와 비주류라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정치를 했다. 10여 년을 넘게 주류의 정치적 독식은 비주류의 이탈을 낳았고, 우리 총회 안에는 총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기치를 걸고 교갱협이 출현되면서 교갱협 인사의 목사 부총회장 출마가 이루어지고, 교갱협 안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후보가 양립되면서 교회 영성목회의 후보를 내고 결국은 영성목회의 후보가 당선되면서 총회는 금권선거가 만연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러한 금권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비뽑기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7년 전에 분열되어 나간 비주류가 ‘신학과 신앙이 같으면서도 다른 교단을 형성하였기에 이제는 합병을 하자’고 하여 교회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단 합병을 하였다. 그리고 제비뽑기 방식에서 절충형 제비뽑기 방식으로, 다시 직접선거로 선거방식이 바뀌면서 영성목회에 가입한 분들이 총회장이 되었다. 사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된 것은 108회이다. 내가 알기로는 다른 회기에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교갱협과 영성목회의 힘겨루기(?)는 109 회기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합동포럼이라는 새로운 단체가 전면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우려 반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총회의 헌의와 처리에 대한 우려이다. 한쪽에서는 잘 준비된 총회라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완전히 기획된 총회라는 평가도 한다. 내가 봤을 때는 총회 자체의 회의와 결의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점수로 보면 B 학점이나 C 학점 정도는 되는 총회였다. 그러면서도 우려 반이 되는 것은 109회 총회가 한 집단과 단체에 카르텔화 될 소지가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특보체제가 잘 운영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특보들이 총회장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이 입이 되어 성경과 헌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말하고 시행하려고 한다면 109회 총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룩한 교회로 항해하지 못하고, 거룩한 산을 오르겠다고 돛대를 부러뜨려서 등산용 지팡이를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총회장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할 때다. 지혜가 없으면 어떤 지혜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증경총회장과 부총회장의 발언이 많았다. 원로들의 지혜와 지식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서는 어른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또 필요에 따라 요청했을 때와 잘못 결의하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발언하여 후배들에게 깨우침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우려가 된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발언은 조언이나 권고이어야 하지 참견이나 관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계속하여 어른 대접으로 발언을 주어서 결정해야 할 총대들의 발언에는 조금 소홀히 했다. 만일 직무상의 결정에 따른 결의를 다시 묻고 조언을 구한다면 총회는 개혁되지 않고 구태가 만연되게 될까 우려된다. 109회 총회는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리추얼이 종말을 고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되고 갱신되어서 리추얼이 힘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기점에 있다. 항상 우리의 삶인 리추얼은 관습과 전통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사실 관습과 전통은 겉으로는 동일하게 보일 때가 많다. 이러한 피상적 유사성은 우리의 인습주의 즉 전통을 해롭게 한다. 전통이 되어버린 관습, 특히 성경의 해석은 진짜인 정통을 죽이고 현실에서 숨통마저 끊어 놓는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여성 강도권에 대한 허용 결의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지만 그 전통 속에 있는 관습은 항상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이제는 관습이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나서 전통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역사적으로 전통 속에 관습이 되어 버린 전통은 어느 순간 정통의 자리에서 내려와 관습이 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판에 박힌 체 일상이 되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제109회 총회는 전통 속에 관습으로서 수동적으로 이해되는 여성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고 노력하며 고군분투하려는 모습이 총대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신학의 전통은 정통의 자리에서 관습이 되어 물러서게 될 때는 항상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각자가 책임을 지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상 지금의 전통이 된 정통은 한때는 분명 혁신이었다. 그런데도 전통이 되어 버린 정통은 혁신을 아니, 개혁을 마귀가 예수님을 싫어하듯 싫어한다. 혁신과 개혁이 정통이 되고 그 정통이 관습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매너리즘의 늪에 빠지고 결국은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병적인 공동체적 반응을 하며 소통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고 전통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며 분열하고 적대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견해든지 우리들의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 금번 제109회 총회는 신학적 진영논리에 빠지지는 아니했지만 결국은 주일성수의 문제와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는 벌써 진영논리로 변질되고 있다. 심지어 장신도 아닌 기장의 신학으로 이야기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다. 진영의 신학(조직신학)이 아닌 성경(성경신학)으로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은 진영의 논리로 서로가 무장하게 될 때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삶 속에서 의미도 뜻도 모른 체 주술화 되고 마법화 된다. 진영의 논리로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를, 주일성수의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로 바라보고 신앙적인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러한 기로에 놓여 있는 총회가 금번 총회이다. 그래서 우려 반 기대 반이다. 결국 기대도 우려도 다 지나갈 것이지만 그래도 기대도 해보고 우려도 해본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나 타당성을 그리고 적합성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고 둔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 제109회 총회에서는 신학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변해야 된다는 기대가 총대들 속에 있음을 감지했다. 기대와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15회 이상을 총대로 참석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은 우려도 기대도 다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총회가 그리고 그 결의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려는 아닌 것 같아서, 기대는 그럴 것 같아서이다.김병중(Th.D) 10-14 20:56 -
【기고】 정년제, 과연 성경적인가?
다음은 원 철 목사의 정년제 폐지를 주장하는 기고문이다. 본 기고는 빛과소금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은 성경말씀을 기본바탕으로 세워진 보수교단이며,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단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 원리로 해서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늘 염려하는 것들이 있다. 과연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이라는 것을 앞세워 정치와 사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슴에 품고 살려고 성도들도 몸부림치며, 목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회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이 우리 교단에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고 몹시 아프다. 교회와 기독교를 보는 사회에서의 시선 때문에 정년제를 사수해야 하거나 정년제를 지금보다 5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습제도가 마치 죄인인 것처럼 보는 것 역시 사회시선을 의식한 것 같다. 이유는 사회가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년을 연장하거나 세습을 하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천주교는 75세 정년이 있으나 자율에 맡겨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은퇴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천주교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에도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불교를 비난하는 소리나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히 기독교만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에서 비난할 것이라고 이유를 댄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사회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는지 교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나 근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왔다.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신앙을 본받아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분들의 영향으로 우리 교단이 보수교단이라는 명분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좋아서 합동이라는 교단이 태어났고 이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정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제108회 총회에서 박00 목사는 정년제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발언하기를 정년제 연장을 해서는 안 되며 40대 50대의 80%의 젊은 목사들이 담임목사 근처도 못 가고 있다며 지금 400~500여명이 담임목사 되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담임목사도 한번 못하고 은퇴해야할 형편”이라며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수 신학은 어디로 가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인간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주장하고 시도하려고 하는가? 우리의 사역과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사역인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젊은 세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 깊이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는(Baby Boom Generation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비붐이 일어난 시기에 출생한 세대를 말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여 이 몸 바쳐 주의 일을 하렵니다”라고 찬양하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이 빈곤한 살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하에 삭월세를 얻고 칸을 막아 살림을 하면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베이비붐 세대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40대, 50대, 80%의 젊은 목사들은, 개척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가 70세가 되어 은퇴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선배들이 열심히 사역하여 이루어 놓은 부흥된 교회에 청빙 받아 안전하게 목회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예로, 대형교회에 담임목사 청빙광고가 나오면, 100~200여통의 이력서가 접수된다고 한다. 중소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생활비를 얼마 주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사택은 몇 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 상여금은 얼마나 주느냐? 자가용은 제공하느냐? 월요일은 쉬느냐? 월요일에 출근하면 출근 수당은 주느냐? 새벽기도회에와 금요기도회를 하면 수당을 얼마나 주느냐? 부터 묻는다고 한다. 반면 시골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아예 이력서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시골교회와 소형교회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담임목사를 모시지 못하여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중소도시에서도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하여 힘들다고 한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도 이대로 가면 2026년부터 목회자가 모자라는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교회들도 교육전도사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은 적은데 베이비붐 세대가 열정적으로 개척하며 교회를 세웠던 분들이 앞으로 10년동안 계속 은퇴하시기 때문이다. 지방도시나 시골에는 부교역자가 없어서 사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담임목사 타령이나하고 있는 세대를 볼 때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박00 목사가 말한 것처럼 기성세대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듣기 좋은 말로서 군중들의 인기를 모으는 이야기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 분은 역사학자로 알고 있는데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유학 가는 신학생들이 부쩍 늘어났으며 유학파들이 40~50대에 주를 이루고 있다. 유학 다녀온 분들 가운데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들고 교회를 개척하려는 뜨거운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의 기성교회의 후임자로 가려고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으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우고,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더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꼭 큰 교회의 빈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대형교회 후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베이비붐 세대가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대안인가? 묻고 싶다. 제104회 총회에서 우리 대전중앙노회가 ‘정년제 연구위원회’를 두어 연구해서 보고하기로 제안하였다. 이를 총회가 받아들였고 결의해 주어 2년동안 정년제연구위원회(위원장 고영기 목사)가 조직되었고 신학자 4분에게 의뢰하여 그분들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공청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20년 4월 21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정년연구를 위한 공청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자 서창원 교수, 실천신학자 양현표 교수, 구약신학자 이희성 교수 3분과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발표하였다. 4분 중에, 한 분만 조심스럽게 사회의 관점이 있음으로 정년제를 현행대로 유지하거나 73세로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 서창원 교수, 이희성 교수, 김근수 교수는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 정년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보수교단들을 조사하여 본 결과 미국교단들도 정년제가 거의 없음을 보고하였다. 제108회기 신학부주최 대전중부지역 ‘교회와 신학세미나’에서 김길성 교수는 정년제에 대하여 ‘교회에는 2가지 직분이 있는데, 하나는 ’항존직‘으로서 영원히 있는 것으로서 목사나 장로가 은퇴하고 사역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목사를 목사로 장로를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무’가 있는데 시무는 기간을 정하여 사역을 하는 것으로서 우리 총회에서 시무연한을 정해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0년 사역을 하고 은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싶다. 시무 연한이 과연 성경적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70세가 되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하는가? 성경적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탕으로 보수를 지향하고 있으며 칼빈의 신학사상과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헌법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디로 가고 인간의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는가? 헌법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경이 우선인가?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정체성이 아닌가? 신학정체성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과연 신학정체성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왜 장로들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정년제 연장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를 나이가 들면 너무 시대적으로 낡은 생각과 열정이 사라져서 교회 부흥에 도움이 안 되므로 정년제를 65세로 하향해서라도 빨리 젊은 목회자로 담임목사를 교체하여야 교회가 신선해지고 젊어지고 부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성경적이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장로들이 이런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목사들이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므로 먼저 목사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성경에 어디에 70세가 되었으니 은퇴하라는 내용이 있는가? 필자가 제안하는 ‘정년제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고자 세워진 교단이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이며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제13장 제3조 장로. 집사 임직서약 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으로 믿느뇨?” 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을 가르켜 선지자라고 했고 모세 역시 선지자라고 했으며 120세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사무엘선지자 역시 죽기까지 사역을 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예언자 대선지자 소선지자 사사 왕 모두 정년이 없는 종신직이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정년이 없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 7집사들도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은사로 사역을 주실 때 사도 목사 교사들에게도 정년이 없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독 장로 집사를 임명할 때에도 정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사도요한은 오히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하고 96세에 순교하였다.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직분에 맞게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가랴제사장 역시 늙었으나(눅 1:8~9, 18) 하나님께서 맡겨준 성전에서의 사역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목사와는 사역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역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왜 성경에서는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사역에 대해서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행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사명을 선언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역자들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정년제를 시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디모데전서 3장에도 장로와 집사를 선발하는 기준에도 정년 규정이 없다. 항존직이란, 옛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終身)토록 시무한다.”고 되어 있다. 항존직(恒存職)이라는 말은 자신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시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창원 교수는 정년제법을 ‘제정하는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실천신학 양현표 교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주제에서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건강지수가 현격히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정년제는 성경과 헌법 정신에 어긋났다’고 지적했다. 지금 현행대로 가면, 2029년부터 목회자의 수가 179명이 모자라며 교회수를 현재대로 유지하고 신학교 지원자들이 감소하는 경우 당장 3년 후인 2027년부터 목사의 수가 140명이 모자라며 2035년에는 무려 2,960명이 모자랄 것이라고 통계를 통하여 전망하였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우며 각 노회마다 교회를 폐교하는 청원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전국신학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총신도 2021학년부터 정원미달이 되었으나 박성규총장이 열정적으로 홍보한 결과 미달은 겨우 면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2029년에는 100명정도 입학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성장이 퇴보하고 있으며 지금은 매년 3천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교인 수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박성규 총장 역시 신대원 입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시점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달로 심각한 현실로 가다오고 있다고 하였으며 유럽의 뒤를 따라 문을 닫는 교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희성 교수는 우리 교단 헌법에는 1992년 제77회총회에서 정년제를 시행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에서는 “목회자의 정년을 교단에서 규정하지 않고 개 교회에 일임하여 교회에서 정하는 것으로 한다”고 보고하였다. 대신교단은 현행 정년제가 성경적이 아님으로 성경말씀에 준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단호하게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개혁교단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교단으로서 당연하게 정년제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개혁, 대신을 비롯한 독립교단들은 일찍이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이희성 교수와 김근수 교수가 미국장로교 10개 보수교단을 조사한 결과 9개 교단이 정년이 없음을 발표했으며 초창기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교회들을 세우고, 우리 총회를 세우고 우리 교단 헌법을 만들 때에도 미국교회의 성경적인 헌법을 기준으로 하여 정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우리 총회는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부터 정년제를 시행하였다. 미국 R.C.A.교단 만이 70세 정년이 있지만 “70세가 된 목사나 은퇴한 목사라할지라도 교회와의 계약에 의하여 위임의 형식으로 사역을 지속할 수 있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미국 남침례교회는 ‘목회자의 청빙에서 은퇴까지 전적으로 개교회의 특성과 자율성에 일임하기에 교단적으로 목사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으며 목사 시무정년은 종신토록 시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년제 폐지를 반대하는 분들의 의견은 대부분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적인 관점에서 지탄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필자가 정치를 잘 하시는 목사님에게 고견을 들으려고 정년제는 성경적이 아님으로 정년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이야기 했더니 “목사님은 정치를 모르는구먼” 하면서 “정치적으로 안돼”하는 것이다. CTV에서 2주전에 “목사 장로 정년연장 필요한가?” 제109회 총회 특집 토론에서 함성익 목사와 박창식 목사가 패널로 나와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이 토론을 보면서 내가 왜 총회에 있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왜 이분들은 통계를 중요시하고 사회시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젊은 목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경청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기는 왜 한 마디도 안하는가? 이들이 우리 교단의 대표하는 목사들이 맞는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정체성을 주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개살구와 같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성경이다. 우리의 헌법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적인 것에 기준을 삼으면 안 된다. 지금의 우리 헌법은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70세 정년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렇다고 헌법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과 바탕으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경말씀에 비추어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성경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성경적이요 개혁주의 정신에 부합한 것이다. 교회법을 사회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전락하는 것으로서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했던 5500여년 전이나 사도들과 바울이 성경을 썼던 2000여년 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해서는 안 된다. 창조시대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기준을 따라야지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년제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보수를 지향하는 신본주의 우리 교단이 단호하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에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필자는 우리 교단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하였구나 충성된 종아! 칭찬받으며 하나님께서 배설한 천국잔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상급받는 신실한 사명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총회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이요, 보수적이며 개혁주의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매년 계속되는 정년제 폐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바로 세워지기까지는 계속 문제가 될 것이다. 정년연장이 아니라 폐지하여야 한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신본주의도 아니며 칼빈주의도 아니고 보수라는 말과 개혁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왜 해마다 수백 교회가 우리 교단을 탈퇴하고 떠나는지 생각해보라?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왜 눈치만 보고 있는가? 성경적으로 그 답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단이 정체성도 확립되고 세계 교단과 교회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신학교도 본래의 신본주의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제109회 총회에서 현명하게 결단해 주기를 바란다.김병중(Th.D) 09-18 14:07 -
【기고】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之)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종종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그런 교단으로 떠나가라고 겁박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칼빈주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어느 것도(교단헌법과 교리교과서 등등)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반박해야지, 교단 헌법으로 겁박한다면 너무 궁색해 보일 뿐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그리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행위언약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느냐고 정죄하지 않고 성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를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셨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108회 총회의 결정이 뒤로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는 반드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단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김병중(Th.D) 10-0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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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여전히 흥미로운 마음공부, 인생공부
젊었을 때부터 심리, 상담은 흥미로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관련한 책들은 꾸준히 읽고 있다. 한때 심리나 상담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책들은 흥미롭다. 재미있게 읽었다.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 나이든 나로 살아갈 시간이 길어진만큼 다양한 도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진료실에서 10대 청소년부터 90대의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한 사람의 삶을 10대부터 90대까지 한평생 동안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이를 위해서는 8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여러 연령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10대부터 90대까지의 인생사를 전 체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20여 년 동안 이들의 삶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본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필요 한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과거의 나와 화해하자. 나이가 들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젊은 시절 왜 그렇게 살았는지 혹은 왜 그러지 못했는지 후회하거나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또 책망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해서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시절의 선택을 50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이를 먹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 시절보다 지혜로워졌다. 세상사를 보는 관점과 가치가 변했기 때문에 후회와 아쉬움은 당연하다. 그때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노력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50 이후에도 꿈을 가져 보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목적의식이 필요하다. 50대 이후에도 꿈이 필요하다는 것은 삶의 목표, 목적성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p. 39). 5060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되고 싶다'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혹은 '어떤 삶을 살고 싶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거나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여러 차례 장래 희망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때 품었던 꿈에 대한 관심이 식기도 하고 또 좌절되기도 한다. 이처럼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변할 수 있으며 이루지 못할 수 있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고수하던 사람은 그것이 좌절되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겠다는 목적, 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좌절을 잘 극복해 낼 수 있다. 그 좌절된 목표가 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겠다는 것은 나의 조건과 상황이 달라져도 삶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내 삶의 목표는 내가 발견한 마음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사람들과 나누고, 이를 통해 그들의 성장을 돕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진료를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그 목표는 내 삶의 중심을 잡아 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나이 듦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는 공부하는 자세이다. 노년의 공부는 새로운 지식이나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생에 대한 배움이다. 50 이후 자신을 이해하고 나이 듦에 대해 배우겠다는 의지가 우리를 성장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물론 용기를 내고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해도 나이 듦과 관련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외모의 변화, 죽음, 은퇴, 신체 기(p. 40)능의 쇠퇴, 자녀의 독립,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나이 듦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것인가, 즉 나이 듦에 대한 태도이다. 내가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은 자녀를 포함한 인생의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오늘 내가 걸어간 발 자국은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의 삶을 통해 배웠듯이 자녀들과 인생의 후배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인생과 나이듦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잘 나이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은지 목표를 설정해 보자. 이것이 5060 이후 삶의 지향점이 되어 줄 것이다. 내 안의 소망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거나 글로 적어 보는 것은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것과는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다(p. 41).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더라도 심리적인 면에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반복되는 실패로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상담받는 것조차 거부한다. 이들은 일견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삶의 영역은 좁아져 있고 인간관계도 소수의 친구나 가족에 국한된다. 성취와 성장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녀의 모습에 부모는 당황하고 안쓰러운 동시 에 화가 난다. 그런 자녀를 외면하고 눈감고 살거나 억지로 끄집어내 등 떠밀어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심각한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자녀를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첫째,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을 선택한 자녀들에게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형제, 친구 누구라도 그를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둘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중요하다. 자신의 방 안에 숨어 버린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실패로 상처투성이인 모습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어야 마음을 열어 보인다. 셋째, 서로 간의 대화 즉 소통이 중요하다. 말로 하는 대화를 먼(p. 92)저 떠올리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심이다. 움츠러든 자녀는 그간 반복된 상처로 타인의 시선과 감정에 민감하게, 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아무리 친절한 말이라 하더라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진심이 전달되어야 마음을 열고 부모가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넷째, 자녀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자녀가 은둔하게 된 이유와 운둔의 상태는 다양하다. 일부는 비교적 단기간 지속되다가 스스로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와 달리 우울증이나 조현병처럼 비교적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잠복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은둔은 상당히 장기간 지속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회복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 뒤늦게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다행이다. 하지만 일부는 이러한 은둔을 회복하지 못하고 후유와 장애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혹시 자녀의 은둔이 회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남겨 앞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봐서는 많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임은 포기와 다르다.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가능한 성장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작은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 그것을 통해 나름의 성장을 할 수 있다. 여섯째,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심해서 앞으로 경제 활동이(p. 93)나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되는 경우라도 그 안에 도달 가능한 성장점이 반드시 있다.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삶의 기본이 되는 자조 능력을 키우는 것, 즉 스스로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하는 것을 돕고 빨래와 집 안 청소를 하는 것 등도 성장의 목표가 될 수 있다. 일곱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때 자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사는 것이 치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에게 네가 문제가 있으니 그걸 고쳐야 한다라는 자세보다는 '부모와 가족 모두가 서로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지 배운다'는 마음으로 진료실을 찾아야 한다. 이런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압력에 시달려 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치료받는 것을 어린 시절에 부모 손에 이끌려 가기 싫은 학원에 갔던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진료받는 것을 자신이 부족하고 문제가 있으니 변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을 그들은 기민하게 알아 차리고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 자녀들이 치료를 거부한다면 우선 부모라도 먼저 전문가를 만나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향후 치료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여덟째, 부모의 노력은 성실하게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를 하루 이틀 혹은 한두 달 실천하다가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실망하며 화를 낼 수도 있다. 그(p. 94)럴 때 '내가 이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너는 왜 달라지는 것이 없느냐' 혹은 '왜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라고 책망하기보다는, 내 마음 속에 현재 자녀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가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는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있다. 자녀에 대한 실망감, 미움, 분노, 화, 후회, 자책, 수치심, 열등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식을 향해 미움을 느끼는 자신을 또 자책한다. 마치 헤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먼저 공감해야 한다. 인간이기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나의 감정을 처리하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 쏟아 내거나 억눌러서 우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의 꿈, 소망, 기대를 투영한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적인 자녀를 마음속에서 키워 온다. 이제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아 이를 떠나보내고, 내 앞에 있는 아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료실에서는 여러 유형의 부모를 만난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어머니들을 만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만난 어머니들 중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들은 자폐나 지적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다. 그분들은 성장의 한계를 예상할 수 있는 자녀들과 함께 평생을 걸어왔다. 수많은 실망의 날(p. 95)을 어떤 희망과 격려로 견뎌 오셨을까? 그분들은 매일 불행감에 압도되지 않고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해 오셨다. 그것이 힘든 날들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은둔해 있는 자녀를 대할 때 필요한 것은 결국 부모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부모의 노력으로 자녀가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마음을 써서 노력해야겠지만 그런 노력이 점차 자녀와 삶을 대하는 태도로 정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녀의 상태가 어떻든 마음의 평화를 찾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죄책감과 자책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걸 보는 자녀들 역시 마음의 짐을 안게 된다. 부모가 먼저 현재의 상황을 받아 들이고 그걸 성장의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작은 의미와 행복을 매일의 삶에 추가한다면 물줄기가 서서히 방향을 바꾸듯이 자녀와의 관계도 변화해 갈 것이며, 그 안에서 서로의 성장이 가능하다(p. 96). 사. 부부 싸움에는 여섯 명이 참전한다: 원가족의 그림자 부부가 싸움을 할 때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섯 명이 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여섯 명이란(p. 106) 남편과 아내, 그리고 두 사람의 부모를 뜻한다.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부부 싸움의 원인이 단순히 현재의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각자의 원가족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부모와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갈등과 상처는 성인이 되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이로 인해 현재의 배우자에게 과거의 부모와 얽힌 감정과 갈등을 투사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왜곡은 부부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 부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착각을 인식하고 걷어 내는 것이다.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사람 자체의 특성과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현재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부부 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성장이다(p. 107). 부부에게 외도 문제는 함께 극복해야 할 사건이다. 상처준 사람은 진정 어린 사과와 함께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보여야 한다. '성실하고 지속적'이라는 게 중요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한두 번의 사과로 사태가 일단락되기를 바라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다.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에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면 그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배우자를 공격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한다. 거친 감정 표현으로 부부 사이는 다시 갈등을 겪는다. 한두 번의 사과 후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처 준 사람은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 이야기를 꺼내네요. 이제 그만할 만도 한데...도대체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재방송할까요?'라고 말한다. 배우자의 진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쌓여서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 상처받은 사람의 재방송은 멈출 것이다. 진정성은 외도로 인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늘 변함없는 진심 어린 태도만이 마이너스가 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다(p. 119).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타인과의 소통은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을 통한 소통이다. 말이 다 담지 못하는 감정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며 이것을 알아차리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공감적 대화는 갈등을 줄이고 관계의 질을 높여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준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겉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공감적인 대화가 반복되면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마찰이 생기고 대화가 단절 되기에 이른다. 그런 관계는 깊은 소통과 이해에 한계가 있고 친밀한 관계로 깊어지지 못해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소개한 하버드 대학의 성인 발달 연구는 친밀함으로 맺어진 좋은 관계가 좋은 인생을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밝혀냈다. 50대 후반의 인생을 건강하고 의미 있게 가꾸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가 중요하다. 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공감적인 대화가 필수적이다. 공감적인 대화는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관계를 더욱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 50대와 60대가 감정과 공감을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감정적으로 성숙해지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중년 이후의 삶에서(p. 247)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p. 248). 나이가 들면 어린 시절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이 줄어 들면서 이전보다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된다. 10대 아이들은 자신이 20대에 어떤 삶을 살게 될지, 30대와 40대에는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 본다.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미루며 산다. 하지만 50 이후에는 미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린 시절보다는 인생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인 생의 멋과 맛을 알게 되는 다른 이유이다. 무엇보다 50 이후에는 이전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그런데 어릴 때보다는 죽음이 공포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며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며 두렵긴 해도 한편으로는 매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삶'은 한 봉지의 비스킷이다. 비스킷을 개봉해서 먹기 시작할 때는 맛이 어떤지 몇 개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고 허겁지겁 먹는다. 비스킷을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TV를 시청하거나 다른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맛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러다 문득 비스킷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소중함과 아쉬움을 느낀다.그제야 비스킷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아껴 먹게 된다. 즉 나이가 들고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무한정하지 않으며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이별이 예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인생(p. 259)을 이전보다 더 잘 음미하고 싶어지고 실제로 그럴 수 있게 된다(p. 260). 노년 초월성은 노화와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노년 초월성의 발달이 미약하면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중년기의 가치관, 신념, 관심사를 계속 유지하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동반되는 변화에 대해 저항하면 절망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나이 들어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운 삶의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다. 토른스탐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노년 초월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인구의 20% 정도만이 높은 수준의 노년 초월에 도달한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초월성을 키워 나가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초월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읽어 보면 짐작하겠지만 영적 성장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것은 영적(p. 313)성장과 노년 초월이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명상과 마음 챙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기를 쓰는 것은 간단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은 노년 초월을 촉진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독서나 철학 탐구, 인문학 공부, 높은 수준의 초월적 성향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 종교 활동을 통한 영적 성장도 노년 초월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악기 배우기, 사진 찍기 등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아 통합과 영적 초월을 도울 수 있다. 산책이나 등산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활동이나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여행을 하는 것도 좋다. 봉사 활동이나 재능 기부 등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활동이다. 친구나 가족, 혹은 동료와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불안을 줄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죽음 준비(유언장 작성, 장례 계획 등)는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고, 남은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해 준다(p. 314). 어린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가 이해 가능한 수준에 맞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감추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리지 않거나 그 주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아이가 그 상황을 이해하고 슬픔을 표현할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죽음을 당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건강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열린 대화는 필요하며 이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p. 315). 죽음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는 죽음을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기보다는, 삶의 마지막 단계로서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만족스러운 노년기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노년기 삶 전체가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질 가능성이 있다(p. 317).김병중(Th.D) 07-04 01:35 -
【북토크】 끊임없이 자기개발 하자
모처럼 자기개발서를 읽었다. 매우 유익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독을 권한다. 당연함을 의심할 때 혁신이 시작된다 통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이 책이 통념에 저항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통념을 의심하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새로운 기회가 열리며 남다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속담은 통념의 대표적 집합체다. 오랜 세월 데이터가 축적(p. 15)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검증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통념이 늘고 있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을 보자. 결혼보다 비혼을 선택하는 솔로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할까? 짚신도 짝이 있다면 결혼정보회사들이 성업할 리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은 더욱 그렇다. 가짜뉴스와 딥 페이크가 날뛰는 시대인데, 얼마든지 거짓 연기를 피울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제 통념에 저항해야 할까? 사업에서는 매출이 예전 같지 않을 때 통념을 의심해봐야 한다. 대부분은 "불황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불황 속에서도 잘되는 가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불황은 "기존의 상품, 서비스, 유통경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변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읽지 못한 채 낡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세상의 변화를 읽고,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그 변화에 맞춰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사업의 본질을 바꾸거나. 방법론에 혁신을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많은 통념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 변화하는 시대에 낡은 통념을 붙잡고 있는 한, 새로운 기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p. 16). 통념을 깨는 5가지 실천법 모든 변화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통념에 저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 한다. 1. 습관적으로 하는 일의 30%를 과감히 없애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불필요한 일을 정리하라. 가짜 일과 진짜 일을 구분하고,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재점검하라. 정리할 일을 4가지로 분류해보자. "하지 않아야 할 일", "하지 않아도 될 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나보다 남이 더 잘할 일". 이것들을 과감히 없애거나, 위임하거나, 외주를 주어라. 그리고 비로소 그 여유 공간에 새로운 도전을 채워 넣어라. 남들은 다 하는데 당신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 늘 하고 싶었지만 미뤄둔 일들을 시작하라. 2. 성공 경험에 안주하지 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나이가 많고, 직급이 높고,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실패 위험도 커진다. 잘나가던 개인과 조직이 몰락하는 이유는 대개 잘못된 경험과 과도한 자기확신 때문이다. 해결책은 낯섦'을 찾아가는(p. 17)것이다. 비슷한 부류보다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 자신과 상관 없던 책이나 영상을 접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라. 딱딱한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로 전환하라. 3. 생각의 자유를 지켜라 절대적 진리처럼 보이는 것도 의심하라. 모든 가설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라. 대중의 의견을 무작정 따르지 말고,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라. 특히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을 경계하라. 확신이란 때때로 무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4. 안 했던 일은 새롭게 시작하고, 하던 일은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것도 처음에는 낯설었다. 1818년 이전까지만 해도 정시 출발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화물선은 적재량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뉴욕의 해운사 블랙볼라인은 이 통념을 깼다. 벤저민 마셜은 엄청난 비용과 위험을 무릅쓰고 정시 출항을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사업에서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길을 과감히 나서야 한다(p. 18). 5. 당연한 것을 의심하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함에 머무는 것보다는 당연을 의심할 때 사업의 기회를 볼 수 있다. 위기에 처했던 레고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함'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왜 레고는 움직이면 안 될까?", "왜 어른은 레고의 고객이 될 수 없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이 혁신의 시작이었다. 다만 기억하라. 모든 의문은 고객의 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처럼 통념에 저항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비즈니스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는 곳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가능 하다고 말하는 일에 도전했다. 심지어 회의 자료도 남들이 다 쓰는 파워포인트 대신 워드를 고집했다. 통념을 깨는 순간,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p. 19). 7. 중간이 가장 위험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중간'을 선호한다. 강의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앞자리는 기피하고 뒷자리는 불안해하면서, 결국 중간쯤 자리를 잡는다. 이건 무리 속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이다. 하지만 이런 '중간 선호' 심리 가 직업 시장에서도 통할까?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과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값을 받지 못하고 끊임없는 원가 경쟁에 시달리다 결국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중간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강(p. 34)점, 즉 '나 아니면 안 되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중간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불안전한 자리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의 평균 키와 몸무게에 맞춰 제품을 만들면, 아무에게도 맞지 않는다. 평균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엣지'가 있는가? 아니면 그저 수많은 진열대 위의 평범한 제품 중 하나같은 존재인가? 평균 뒤에 숨거나 안주하지 말라.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해 보이는 '평균'이 실은 가장 위험한 자리다. 차별화가 곧 생존이다(p. 35). 9. 좋아하는 일보다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자기계발 강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라. 그러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된다." 일리가 있고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 말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돈 버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 일이란 본질적으로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남의 돈을 정당하게 받아내는 과정이 즐거울 리 없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진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0.01%도 안 될 것이다. 그런 행운이 당신에게 올 확률은 무척 낮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대부분, 특히 젊은이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세상(p. 38) 모두가 힘들다고 할 때 기회가 있다. 경험도 부족한 20대에게 이런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무슨 일이든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하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기본적인 일조차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낭만을 즐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전략을 바꿔보자.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싫어하는 일을 먼저 찾아라. 그리고 그 정반대 지점에서 당신의 진짜 열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실력을 쌓아라. 좋아하는 일은 그다음의 문제다(p. 39). 11. 글쓰기는 육체노동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회사원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일하는 작가다. 소설을 쓸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 작업한다. 오후에는 10km 달리기나 1.5km 수영을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아홉 시에 잠든다. 이 일과를 매일 반복한다. 긴 소설 쓰기는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하다. 신체적 강인함은 예술적 감수성만큼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연이어 히트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비결은 없다. 그저 44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왔고. 그 과정에서 독자들의 신뢰를 얻은 것뿐이다.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p. 42). 여전히 달리기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달린다. 글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루키의 성 공 방정식은 단순하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글과 싸우는 것. 요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잘못된 통념도 많다. 가령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조용히 앉아 명상하면 글이 저절로 나올 것이라는 착각도 있다. 진실은 다르다. 글은 치열한 메모와 자료 수집의 전쟁터에서 태어난다. 밑천이 많아야 비로소 글이 나온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글은 온몸으로 쓴다는 사실이다. 영감이란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매일 아침 전장에 출전하듯 책상에 앉아 몇 시간씩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머리보다는 몸으로 하는 일이다. 작가는 지식노동자이자 육체노동자인 셈이다. 50권이 넘는 책을 쓴 나 역시 작년에만 5권을 출간했는데, 하루키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글쓰기는 지적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육체노동에 가깝다(p. 43). 18. 책 읽는 당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 유튜브, 틱톡 같은 영상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챗GPT 같은 AI가 순식간에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시대에 독서가 제공하는 고유한 가치가 더욱 빛난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사고력을 기른다. 저자의 섬세한 유머 감각을 포착하고, 개성 넘치는 표현과 문장을 만난다. 또한 읽은 내용이 머릿속의 다른 지식과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예상치 못한 통찰이 솟아나는 경험은 독서만이 선사하는 특권이다. AI는 우리에게 정확하고 즉각적인 답변을 제공하지만, 그(p. 56) 과정에서 우연한 실수로 얻는 영감이나 스스로 고민하며 발견하는 재미는 주지 못한다. 이는 마치 요리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것과 직접 요리를 실험하며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와 같다. 현대인의 독서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기회가 생긴다. 독서를 통해 얻는 깊이 있는 사고력과 창의적 통찰력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능력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곧 책 읽는 당신만의 강력한 차별화 포인트가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독서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탕누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전문성이란 모르는 것, 확실하지 않은 것,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능력이다. 그런 안목이 있어야 타인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서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이러한 전문가적 통찰력과 안목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디지털 시대의 홍수 속에서, 독서는 당신을 차별화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p. 57). 24. 사람은 바뀔 수 있는가?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의견은 갈린다. 변하지 않는다는 이도 있고, 변한다는 이도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처럼 견해가 나뉜다. 대부분 자기 경험에 기대어 판단하지만, 나는 '습관'을 바꾸면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일란성 쌍둥이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중 한 명은 술과 담배에 찌든 삶을 살고, 다른 한 명은 법정스님처럼 공부와 수행에 매진한다면, 그들을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겉모습만 봐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걸 보고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논어의 ‘성상근야, 습상원야’를 떠올린다(p. 68). 사람은 태어날 때는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해 크게 달라진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비슷하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들이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 핵심은 바로 “배움, 학습"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책과 멀어진 사람과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워렌 버핏 과 찰리 멍거가 떠오른다. 매일 한 권씩 책을 읽은 워렌 버핏은 90이 넘은 나이에도 주주총회에서 몇 시간 동안 다양한 질문에 통찰력 넘치는 답변을 쏟아낸다.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 역시 20년 넘게 책을 소개하고 써오면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지만, 공부하면 변한다. 공부하면 유연해지고, 공부하지 않으면 고지식해진다. 변화의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p. 69). 28.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모르는 것 실패한 사람에게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든다. 그것이 진실일까? 정말 그 사람의 역량이 출중한 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걸까? 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세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너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괘념치 마라. 세상이 알아준다고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너를 몰라준다고 네가 못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p. 78). 나도 공감한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존감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알아줄 만하니까 알아주는 것이고. 만약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아직 때가 아니거나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상품 광고와도 같다. 정말 좋은 상품은 광고가 필요 없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입소문을 내고, 제품은 저절 로 팔린다. 반면 결함 있는 상품은 광고가 오히려 독이 된다. 단점이 더 빨리 드러나 시장에서 외면받기 때문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장관 후보가 되어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조용히 있었다면 모를 일을, 왜 자기를 드러내 저런 수모를 자초했을까? 스스로 한계를 알았다면 애초에 거절했어야 했는데.' 결국 진정한 실력자는 세상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실력을 쌓아갈 뿐이다. 때가 되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보다, 스스로 더 성장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p. 79). 29. 실패는 권장하되, 실수는 경계하라 혁신은 실패를 먹고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기에 실패를 권장한다는 얘기다. 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실패와 실수를 구분 하는 것이다. 흔히 실패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실수에 가깝다. 디테일이 부족하거나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 쓴맛을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 실패라기보다는 실수에 해당한다.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있지만, 두 번의 실수는 이미 습관이 된 것이다. 이런 실수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반면에 진정한 실패란 치밀한 준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p. 80)한다. 이런 실패는 오히려 혁신을 위해 필요하다. 새로운 시도에는 항상 실패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교훈과 경험은 다음 도전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물론 아무리 가치 있는 실패라 해도 그 횟수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실패가 반복되면 개인과 조직의 사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지인 중 한 명은 사회 초년에 크게 부도를 낸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처럼 실패가 주는 충격과 후유증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실수와 실패를 구분 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안일한 준비와 부족한 디테일에서 비롯된 실수는 단순한 시행착오에 불과하므로, 이는 철저히 예방해야 한다. 반면 치밀한 준비와 전략적 계획하에 시도했음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실패한 경우, 이는 오히려 혁신을 위한 값진 자산이 된다. 이러한 의미 있는 실패에서 얻은 깊이 있는 통찰은 다음 도전의 초석이 되며, 이런 경험들이 쌓여 결국 진정한 혁신의 발판이 된다(p. 81). 13. 착각도 때로는 약이 된다 인간은 왜 착각을 할까? 대부분 착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만, 착각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아는가? 《착각의 쓸모》(샹커 베단텀 지음, 반니)는 착각의 숨겨진 이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실제로 신체에 변화를 일으킨다. 미국 외과 의사 브루스 모슬리의 실험이 대표적이다. 그는 관절염 환자들에게 무작위로 플라시보 수술을 했다. 2년 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나 가짜 수술을 받은 환자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호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 수술 자체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p. 114)사의 믿음직한 말 한마디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이 실제 치료 효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와인 실험도 흥미롭다. 싸구려 와인에 비싼 가격표를 붙여 마시게 했더니, 실제로 비싼 와인을 마실 때처럼 뇌의 쾌락 중추가 반응했다. 이는 현실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기만이 실제 신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자기기만은 불안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감도 준다. 때문에 착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닌, 생존의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 시스템의 복잡성, 불확실한 미래···이런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전진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적정 수준의 착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성과 조직의 리더들은 종종 '과도한 자신감'이나 '비현실적 낙관'이라 불릴 만한 착각을 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런 착각들이 만드는 미세한 균형점 위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는 완벽한 진실보다 유용한 착각을 선택했고, 그것이 인류를 지금까지 생존하게 만든 진화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결국 '적절한 자기기만'이야말로 우리가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가장 영리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p. 115). 16. 비결을 알면 오히려 성공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온갖 비결과 노하우가 넘쳐난다. 출세, 장사, 돈 버는 법, 인간관계, 건강, 행복 등 무엇이든 그에 대한 비법을 알려준다고 난리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든다. 이런 비결을 잔뜩 늘어놓은 사람들이 정말 그 분야에서 성공 한 사람들일까? 돈 버는 비결을 쓴 사람이 실제로 부자일까? 리더십에 대해 책을 쓴 사람은 진정한 리더일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비결을 접한 사람들이 과연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출세 비법을 읽고 그대로 따랐다고 해서 정말 출세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비결만 알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다. 어(p. 120)떤 일이든 전제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체력, 능력, 인품 같은 기본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은 채 비결만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이 만든 비결을 참고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비결을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순 없다. 대신 기본에 충실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좌절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거치며 어느 순간 자신만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 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비결을 접한들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진정한 고수들은 남의 비결을 좇지 않는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깨달음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수될 수 없다. 마치 등산로를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해서 히말라야 정상 정복의 체험을 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누군가의 비결이 아닌, 자신 만의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통찰이야말로 당신만의 비결이 된다(p. 121). 25. 과거의 성공이 독이 되는 순간 길을 걷다 "의사 전원 서울대 출신"이란 간판을 본다. 연대, 고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광고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저 병원, 내세울 게 학벌뿐이구나. 실력이나 경험, 환자 치료 결과 같은 진짜 중요한 걸 내세우지 못하니 낡은 타이틀로 포장하는구나." 명함에 무슨 학위를 잔뜩 늘어놓은 사람도 비슷하다. 왜 작은 명함을 그토록 복잡하게 만들까? 현재의 성과나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과거의 학위로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한 명사는 서울대 졸업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먼 훗날 당신이 진정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면, 서울대 졸업장은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내세울 게 너무 많아서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p. 138)한다면, 서울대 졸업장이 유일한 자랑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여전히 학벌을 자랑하는가? 스카이 대학 나온 게 그렇게 뿌듯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갇혀 사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좋은 대학 다닌 게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그건 꽤나 초라한 성장 궤적이 아닐까? 진정한 고수는 과거의 영광에 의지하지 않는다. 학벌이라는 허상을 내세울수록 현재의 공허함만 더 도드라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벌을 잊을 때, 과거의 성공을 내려놓을 때 당신의 진짜 실력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아이러니다(p. 139). 13.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나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은행권에서는 전문성과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피크제를 적용한다. 공평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공평하지 않은 제도다. 또한 로테이션이라는 명목하에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수한 인력이 왔다가도 뚜렷한 주특기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반면 정치권은 전반적으로 노령화되어 있다. 기업이라면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늘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현역이다 보니 실천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대교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성근(p. 176) 감독의 주장은 들어볼 만하다.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부터 원래 담겨 있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이런 것이 세대교체다. 컵에 있는 물을 전부 비우고 새로 넣는 게 아니다. 세상일은 원래 헌 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 것이 있는 법이다.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계속하는 것이고, 젊어도 능력이 없으면 그만둬야 한다. 가득염은 1969년생, 2007년 SK 왔을 때 내일모레 마흔이다. 그런데 4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경력이 많으니 위기에도 떨지 않고 대범하게 자기 볼을 던졌다. 한 마디로 나이 먹었다고 자르고, 젊다고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가득 같은 선수는 기용하고, 젊어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르라는 것이다. 컵에 있는 물을 쏟고 새 물을 채우는 대신 계속 새로운 물을 부으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젊기만 한 사람을 채우는 게 세대교체가 아니다. 제 역할을 잘하고 발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은 남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내보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세대교체다(p. 177). 19. 사과를 잘하는 사람의 연봉이 높은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과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강자는 사과를 잘하는 반면, 약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사과를 피하며 고집을 부린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I am sorry"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한다. 연봉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가 연간 2만 5천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사과를 한다 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느냐"는 질문에 연봉 10 만 달러 이상자의 92%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소득 구간이 낮아질수록 그 비율도 점차 줄어들어 2만5천 달러 이하 소득자의 경우 52%에 그쳤다. 이는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p. 188) 실수에서 배우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고소득자들은 보다 총명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경향이 있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경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조차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탈무드의 이 말은 사과와 성공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사과는 강자의 언어인 것이다. 오직 강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다. 사과는 과오를 끝내겠다는 의미이자, 과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과란 무엇일까? 사과는 '쏠 사'에 '과오 과'가 더해진 단어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 하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사과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면에서 잘못했는지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과는 변명으로 가득 차 있다. 정작 자신은 빠져 있고, ,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는 사과가 아니라 변명이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p. 189). 21. 몸이 마음을 결정한다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나와 다른 나로 사는 건 효과도 없고 고통스러울 뿐 행복하지 않다." 이는 내가 한 때 의심 없이 믿었던 통념이었다. 그러나 백영옥의 칼럼을 읽고 나니,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그 칼럼에서는 《프레즌스》의 저자 에이미 커디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에이미 커디는 19살에 자동차 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기억력 장애에 시달리며 움츠러들어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은 해법은 바로 "너 자신을 속여라"라는 것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움츠러든 어깨와 가슴을 펴고 허리를 곧게 세우라(p. 194)고 조언한다. 즉,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속이라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찾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먼저 그려보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칼럼을 읽는 순간, 나는 골프선수 신지애의 일화가 떠올랐다. 슬럼프에 빠져 부진을 겪던 그녀에게 코치는 단 한 마디, "챔피언처럼 당당하게 걸으라"고 조언했다. 그 후 그녀는 본래의 기량을 되찾았다.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틀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잘못된 모습을 진짜 자기 모습으로 여겨 거기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진정 되고 싶은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상상하고 마치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의 조언은 단순하다. "위를 보고 걷자."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걷는 대신,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걸어보라. 그 걸음걸이 속에 당신이 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p. 195). 24. 굴러온 돌이 있어야 박힌 돌도 득을 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걸까? 아니다. 굴러온 돌은 정체된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역사를 살펴 보면, 개방적인 사회가 폐쇄적인 사회보다 더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어야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마케도니아 출신이란 이유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반면 로마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좋은 것이면 적의 것이라도 흡수 했고, 피지배민족인 그리스의 신들마저 받아들였다. 스페인은 달랐다. 순수한 사회를 지킨다며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배격했다. 처음엔 종교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모든 학문(p. 200)과 예술 분야로 확산되었다. 공포의 종교재판소가 커질수록 스페인은 역동성을 잃었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활력은 떨어졌다. 결국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두 종류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계속 드나드는 조직, 다른 하나는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도 않고 새로 들어오지도 않는 조직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 관이 후자에 속한다. 예전에는 대기업도 그랬지만, 공채제도가 사라지며 달라졌다. 이 두 조직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정체된 조직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은 고인 물을 빼고 새 물을 넣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며 반발한다. 하지만 박힌 돌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주기적으로 박힌 돌을 빼내고 굴러온 돌이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반짝이는 굴러온 돌들이 안주하는 박힌 돌을 자극해야 한다. 그때 박힌 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화하고 발전하거나, 물러나거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이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굴러온 돌이 계속해서 박힌 돌을 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조직은 발전한다(p. 201). 4. 인생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인사철이면 으레 승진자가 있는 만큼 퇴직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퇴직자들에게 소회를 물으면 너무 갑작스러워 당혹스럽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60을 앞둔 임원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남의 일로만 여겼던 퇴직이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모양이다. 몹쓸 병에 걸려도 사람들은 "하필 나한테 이런 병이 올 까?"라며 한탄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무슨 일이든 오늘 일어날 수 있다"Anything can happen today." 내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에게는(p. 222) 좋은 일만, 병은 없어야 하고, 내 자식들은 모두 잘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뜻밖의 일을 맞닥뜨리면 으레 'Why me' 라고 묻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말이다. 이는 잘못된 가정이고 잘못된 질문이다. 나만 피해 갈 수 있으리라 바라는 건 오만한 발상이다. 누구에게나 비슷비슷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부자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병마가 비껴가는 건 아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받아 들여야 한다. 중요한 건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를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다. 그래야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퇴직도, 질병도, 죽음도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죽음이 그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과,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삶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온다. 그때 우리는 "Why not me" 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을 지혜롭게 맞이하는 방법이다(p. 223). 16. 용서의 역설: 기억해야 자유로워진다 사람들은 종종 "다 잊고 용서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마음먹은 대로 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다 잊었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아직 잊지 못했음을 뜻한다. 진정 잊었다면 떠 올릴 일조차 없어야 한다.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의미 있는 사건일수록 더욱 그렇다. 잊힐 순 있어도 잊을 순 없는 법이다. 까맣게 잊었 던 일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망각이란 우리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설령 잊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용서일까? 용서의 한자를 보면 "담다, 받아들이다"는 뜻의 '용'과 "마음이 같(p. 248)다"는 뜻의 '서'가 합쳐져 있다. 즉, 용서란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단순히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떠올려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셈이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우르술라 누버 지음, RHK)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용서하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지만 있어야 할 곳. 즉 과거로 추방된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현재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그러므로 용서하려면 오히려 기억해야 한다. 자꾸 떠올리되, 원망이나 한탄에 빠지지 말고 객관적으로 바라 봐야 한다. 상처받은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의 입장도 헤아려 봐야 한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비록 그 행동이 잘못되긴 했어도, 그 심정만큼은 공감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밉기보다 불쌍해 보인다. 상대가 불쌍해지는 순간 내 마음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온다. 평정심이 생긴다. 그 일을 떠올려도 더는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 비로소 용서에 이른 것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불현듯 기억나도 아프지 않게 되는 것, 그(p. 249)것이 용서의 완성이다. 잊으려 하면 오히려 용서할 수 없다. 떠오를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용서하기 위해선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동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득 스쳐도 내 감정에 흔들림이 없다. 용서는 결국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평정심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참된 용서다(p. 250).김병중(Th.D) 07-04 00:53 -
【북토크】 얼떨결의 은혜...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총신79회이신 이정훈 목사님이 37년 4개월의 목회 사역을 마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용신교회를 개척해 별 탈 없이 목회 여정을 보내고 그간의 사역을 돌아보는 책 ‘얼떨결의 은혜’를 출간했다. 얼떨결에 취재하러 가서 은혜로운 원로목사 추대, 위임목사 임직식을 보고 받아온 책을 몇 시간에 걸쳐 다 읽었다. 한 목회자의 일생, 목회 이야기를 몇 시간 만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책만이 줄 수 있는 혜택이다. 목사님의 좌충우돌 개척교회 목회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 모든 것이 목사님 표현처럼 ‘얼떨결의 은혜’였다. 영문으로 표현하면 An Unexpected Grace다. 담임목회 15년 하다가 중단하고 ‘얼떨결에 기자’가 된 내 입장에서 봐도 모든 것이 다 얼떨결의 은혜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시중 판매용이 아니기에 읽기를 원하시면 용신교회에 문의 전화해 보시기 바란다(031-409-7336). 이정훈 목사 원로목사 추대, 이믿음 목사 담임목사 위임, 출판감사예배 관련 기사 링크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583 3. 예수님을 만남 인쇄소 다니며 견습 과정을 거쳐 기술을 배워 정판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던 무렵, 이제 군 입대할 나이가 다가오던 1974년 가을, 직장을 마치고 올 때 집 앞에서 윗집 선배를 만났는데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 하는 전도를 받게 되었다. 선배의 만날 때마다 "정훈아, 교회 한 번 나와라" 하는 전도를 받으면서 마음 가운데 '교회 한번 나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75년 2월 2일 주일 아침에 윗집에 찾아가서 "오늘 교회 한 번 가보려고 한다." 고 하니 너무 좋아했다. 선배를 따라 처음으 로 교회 갔다. 첫날부터 교회가 너무 좋았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날 처음 교회를 나간 날부터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 청년예배, 토요일 중고등부 예배 모든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심지어 주일 학교 예배도 나갔다. 누가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그날부터 새벽예배도 나갔다. 내게 교회 생활은 새로운 세상, 너무 좋았다. 교회가 좋으니까 교회 가는 날, 교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전에는 직장 중심으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교회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내가 직장을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상도 많이 받고 선배 기술자들이 '저놈은 지독한 놈이야 어떻게 젊은 놈이 놀러 다니지도 않나? 할 정도였다(p. 61). 교회를 다니면서 수요일 주일에는 직장이 아닌 교회를 우선으로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처음 교회 나온 나에게 청년회장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권면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이원세 청년회장은 당시 서울 대학을 다녔다. 50년의 세월이 지난 그는 변호사로서 사역하고 있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대뜸 반감이 들었고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죄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직 성경이 말씀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죄 짓고 경찰서, 형무소 들어가는 그런 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안에서, 동네에서 '착하다'는 말을 듣던 나는 '죄에 대해서 회개' 하라는 말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청년회장은 이상하게 다음 주일에도 똑같은 말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나는 즉시 "지난 주에 말했는데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나에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안 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새벽 예배 때 체험하도록 하셨다. 나는 처음 교회 나가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새벽에도 예배가 있다고 하여 즉시 새벽기도를 나갔다. 어떻게 예배드리는지도 몰랐기에 먼저 오신 성도님들을 보면서 따라서 했다. 성도님들은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p. 62). 그래서 나도 교회에 오면 머리를 숙이는 줄 알고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우선 암송을 한 주기도문을 계속 암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교회에 오자마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는데 갑자기 환상으로 스크린 같은 것이 펼쳐지 면서 청년회장과 나의 대화 장면이 나오고 청년회장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하고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 스크린에 글자가 타이프로 치듯 글자가 쓰 였다. "죄란 무엇인가" 하면서 그 가운데 글자가 크게 두드러지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고 쓰였다. 나는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산 것이 죄구나" 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데 정말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듯 한동안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음에 평안이 몰려왔다. 죄를 용서받은 죄사함의 평안이 마음에 넘쳤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을 들으면 감사의 눈물이 흘러넘쳤다.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가대도 서게 되었고 주일 학교 보조교사도 했다. 여름성경학교 때 나를 전도한 홍경산 선배가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할 전할 때 보조교사로 뒤에 앉아 은혜받으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p. 63). 9. 용신교회 개척 수원 창훈대교회에서 사무장,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무렵, 총신신대원 79회 동창 방종현 전도사가 수원 우만동 지역에서 출석한 강소를 찾고 있었는데 동창인 나에게 연락이 와서 들이 함께 지역을 돌아보며 개척 장소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방종현 전도사가 함께 동역 개척하자는 제안에 내가 수락하였고 갑자기 교회 개척하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담임목사님인 한명수 목사님에게 상의를 못한 것을 보면 목사님이 외국 출타 중이든지 교회에 계시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의 했다면 목사님은 반대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전도사의 동역 개척은 교회부지는 내가 아는 집사님 땅을 빌리고 내가 아는 건축하는 집사님이 교회를 건 축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공 예배도 드리고 '다사랑교회'라는 교회 이름도 지었다. 반지하 본당에 위에는 똑같이 설계된 두 집이 지어졌고 가운데는 공동 서재도 만들었다. 성전을 짓고 개척 예배도 드리고 은혜롭게 공동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목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본래 교회 건축하고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방종현 전도사의 지인 권사님이 '개척하면 교회를 지어 주겠다'로 시작되었다(p. 90). 하지만 2400만원 든 건축비용에 못 미치는 1000만원 헌금만 해 주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200만원까지 해서 1200만원이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져 공동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수개 월이지만 교인들도 양분된 상황이었다. 나를 따라온 사람들, 방 전도사를 따라온 개척 멤버들, 그래서 방종현 전도사가 맡아서 교회를 잘 정리하기로 하고 나는 떠났다. 창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손충식 목사님이 목회하는 아주대 앞에 있는 경성교회로 옮겨 부교역자로 사역하게 되었다. 경성교회에서 청빙한 사역이 아니었기에 1년을 무보수로 사역했다. 그곳에서 강도사 인허도, 1987년 가을에는 목사안수도 받았다. 경성교회에서의 1년 사역은 비록 무보수에 어려운 여 건이었지만 청년부를 맡고 교회 여러 가지 사역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새해 1988년을 맞이하는데 손충식 목사님이 조용히 부르더니 "이 목사 개척을 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안 내용이지만 부 교역자로 내정해 놓은 친구 사역자가 있어 나까지 부교역자로 임명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혀 경험이 없는 나는 개척교회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경성교회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손 목사님과 함께 안산이라는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는 전도사님이 안산에 개척 교회를 하려고 지하실을 계약했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계약이 중단된 상태인 건물이었다. 안산 지금의 상록수역 근처 가구거리 중간쯤 되는 건물 지하였다(p. 91). 안산이 신도시로 개발되고 도로가 정비되고 건물이 몇 개 지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직 동네가 형성되지 않았다. 손 목사님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야 전망이 좋다"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는 순간 속으로 말했다. '전망 좋으면 자기가 와서 하지 집도 몇 채 없고 동네도 없는데 무슨 전망이 좋아'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개척교회가 뭔지? 어떻게 개척교회를 해야되는지 모르지만 안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세 800만원인데 수중에는 전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6만원으로 계약했다. 우선 보증금 500만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에 있던 창훈대교회 사모님께 500만원을 지인을 통해 빌려 달라고 부탁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100만원으로 지하실을 꾸몄다. 지하 3분의 1을 막아서 예배실과 사택을 꾸몄다. 지인의 도움으로 강대상과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1988년 1월 8일, 드디어 안산으로 이사 오는데 바람이 몹시 불었다. 당시 내 나이 서른 다섯 살, 이제 막 여덟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1988년 2월 24일이 개척 예배를 드렸다. 교회 명칭은 동네 지명을 따라서 지으려고 했는데 확정된 지명이 없었다. 당시 공사중이던 전철역이 '용신역'이다.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인 최용신 선생의 이름을 따서 용신역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이름을 '용신교회'로 지었다(p. 92). 막상 개통될 때는 '상록수역' 전철역이 되었다. 사람의 이름 보다 '상록수‘가 소설로 많이 알려졌기에 상록수역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도 감사한 것은 용신교회 이름은 전국에 단 하나뿐인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세워주신 용신교회, 이 용신의 이름 에는 아주 중요하고 좋은 세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얼굴 용자에 믿음 신으로 [믿음의 얼굴], 또 쓰일 용에 믿음 신으로 [쓰이는 믿음], 그리고 용신할 수 없을 만큼(마가복음 2장 2절)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뜻으로 정리했다(p. 93).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된 후 하나님은 더욱 부흥을 주셨다. 주일 낮 예배드리는 성도가 200명에 달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앞으로의 목회에 대한 비전을 구했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보내 주신 교인들을 관리하는 관계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번에도 하나님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목회가 아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도전 을 주시면서 성도들을 영적 지도자로 세우는 「훈련 목회」를 시도하도록 하셨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양육, 훈련과정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NCD - 자연적 교회 성장을 만나게 하셨다. 독일의 슈바르트 박사가 교회의 영적 건강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셀 교회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한국교회의 셀 교회의 전파자라 할 수 있는 빌백햄 목사와 셀 교회 이론을 정리하여 셀 교회 아버지라 불리는 랄프 네이버 목사의 방한으로 「셀 교회」 컨퍼런스가 여러 차례 열렸다. 교회마다 목회자들 사이에 건강한 교회와 교회 본질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p. 107).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세미나, 컨퍼런스, 소그룹 모임 등에 참석했다.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 「셀 교회」의 비전을 품고 교회에 비전을 선포했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에게는 훈련받는 신앙생활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 파장으로 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났다. 그래도 성경적인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를 꿈꾸며 훈련과정이 시작되었다. 2년의 양육과정을 통해 성도들이 변화하는 것 같았다. 사명감에 불타고 뜨거운 열정들이 생기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셀리더 양육과정 1기를 마치고 졸업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나 2기, 3기, 4기 기수를 거듭할수록 양자는 줄어들었다. 결론을 말하면, 교회가 기도의 동역화, 전도 집중에 실패하면 무슨 프로그램도 열매 맺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변화될 줄 알았던 셀리더들은 원위치로 돌아갔다. 셀리더가 목회자의 마인드를 갖고 셀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전처럼 친교 모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셀 교 회에 대한 명칭이나 시스템은 그대로 사용하고 전통교회의 형태로 다시 돌아갔다. 성가대를 다시 세우고, 남전도회 • 여전도회 조직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용신교회 첫 장로님을 세우고 당회를 조직했다.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위해서였다(p. 108). 나는 교회 생활에 대한 경험도 체계적인 말씀 훈련도 영적인 체험도 없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그래서 행인지 불행인지 뭔지를 모르고 그냥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대로... 그런데 하나님이 다 하셨다. 믿음대로 해 주셨다. 감사할 것 밖에는 없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감사합니다](p. 115). 22. 교회사역 마무리 새로운 사역의 출발 이제 2025년 6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우리 용신 교회에서 [이정훈목사 원로 추대식과 이믿음목사 위임식]이 진행된다. 이로써 1988년 2월 24일 용신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해 온 37년 4개월의 용신교회 담임목사의 사역을 내려놓는다. 많은 목사님이 교회 사역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하셨다'고 모두 말한다. 나 역시 '하나님이 용신교회를 시작하셨고 여기까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뿐이다. 1987년 목사 안수 받고 어느 교회에서도 사역자로 불러주지 않고 교회를 개척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게 된 교회 개척이었다. 그때 어느 교회든 어느 목사님이든 [우리 교회에 와서 사역을 하라]고 했다면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부교역자 사역을 했을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모르겠고 열심히는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전부니까. 그런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개척을 하게 하신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교회 개척을 하도록 다른 사역지를 주지 않은 것 같다. 용신 교회 37년 사역은 무엇도 모르고 무조건 이것저것 열심히 한 것 뿐이다. 열심히 배우러 다니고 열심히 가르쳤다. 좋다고 하는 것은 가서 배웠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쳤다. 물론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지만 열심히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p. 203). 성도들이 잘 배우든 못 배우든 나는 모른다. 나는 배운 것을 열심히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왜냐하면 나와 같이 배우려 다니고 나와 같이 하고 싶은 것을 다 가르친 목회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상황, 받아들이는 분위기 등을 고려해서 나와 같이 훈련받았는데 교회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목회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목사님 판단에 배운 것이라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고 싶은데 교인들 의 반대로 가르치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목회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다면,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역에 힘을 낼 수가 있겠는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함께 훈련받고 미국 비전트립을 함께 다녀와서 큰 꿈과 기대를 가지고 교회 목회에 적용해 보려고 했다가 교회에서 쫓겨나는 상황도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이 배움을 허락한 모든 것을 다 가르쳤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고, 만족하고, 후회가 없다.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봤으니까. 누구도 방해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속으로, 뒤에서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좋아서, 원해서 배우고 따라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럼에도 목회자를 믿고 따라와 주어서 감사하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것을 거의 다 한 것 같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교회가 크게 부흥했을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p. 204). 때론 부흥하다, 때론 한꺼번에 떠나기도 했다. 한꺼번에 35명, 90여명으로 교인 수가 늘다가 두 번째 교회를 지을 때 한꺼번에 교인 33명이 떠났다. 어떤 때는 60명이 이렇게 저렇게 떠났다. 교인이 몰려오는 것도 한꺼번에 떠나는 것도 사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점 때문에 떠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한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몰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어떤 성도가 우리 용신교회에 왔다가 떠났다. 이사 가야 할 형편 때문에, 교인 간에 시험이 들어서, 목회자의 목회 방향이 맞지 않아서 등등 많은 이유로 우리 용신교회를 왔다가 떠났다. 지금 37년의 목회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느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는 생각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찬송가 가사처럼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유기는 후 물로나 혹 불로나 정결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고백하며 목회 사역을 마무리할 뿐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p. 205)김병중(Th.D) 06-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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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 03-18 16:16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김병중 03-18 15:18
빈들에서의 감사(마태복음 14:13-21)
어느 날, 유대사회에 등장한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악을 행한 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각종 병든 이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때는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때가 저물었습니다.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거절하며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의외의 답을 들은 제자들은 난처해합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준비한들 어디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습니까? 바로 그때에 순진한 한 제자가 “예수님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내 밉니다. 그 도시락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1끼 먹을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작은 생선 2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은 도시락으로 그날 모든 자들이 배 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날 그 기적을 맛본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날의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일까요?어린 아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내민 도시락일까요? 먹거리를 찾아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을 갖고 온 한 제자의 부지런함일까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열심일까요? 모든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19절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축사’입니다. 축사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감사기도’, NIV는 'thanks'입니다. 헬라어 ‘유로게오’(ευλογησεν)는 ‘감사를 드리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앞에 두고서 감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빈들이란 광야요, 황량한 불모지요, 텅 빈곳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빈들에서는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오병이어는 아이 하나도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 모인 자들은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들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양식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빈들에서 감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날의 기적으로 해피엔딩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앞에서도 감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오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빈들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텅 빈 빈들 말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해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 인생이라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기란 요연해 보입니다. 언제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치고 나면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 될 때까지 휴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갑니다. 취업이 되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꿈꾸는데 현실이 이런 꿈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공시 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썼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는 삶이 있지만 삶의 현장은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빈 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빈들이라고 불평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절망하면서, 남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인상 쓰면서, 좌절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2. 빈들에서도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낡아지지 않게 입혀주셨습니다.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신겨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원했던 진로가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오히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부터 가지십시오. 빈들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단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얼어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발병이 나서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100% 책임져 주시구나!’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올해 우리 집 막내딸이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친 후에는 아쉬움이 남고 자신이 꿈꾸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찾아옵니다. 저희 부부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딸! 하나님이 네 길을 여신다. 걱정하지 말고 항상 힘내라”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제 인생을 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딸들의 길을 왜 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어디 우리 가정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빈들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주의 은혜로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감사’를 ‘구원’의 수준만큼이나 높이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내 삶에 행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서 감사 인생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김병중 03-16 23:05
"하나님의 목적과 성공이 있는 삶"(여호수아 14:5-15)
여섯 살 된 남자 아이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서 하던대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오줌'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들린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지저분한 단어를 쓰지 말고 다음부터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 후로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운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겁니다. 혼자 어두운데 나가는 게 무서워서 옆에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웁니다. 엄마를 막 흔들어 깨우며 "엄마,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 엄마가 잠이 덜 깨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중에 휘파람 불면 뱀 나와요, 휘파람은 아침에 불고 지금은 그냥 자거라." 그런데 아 아이가 너무나 참기가 힘들어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지금 휘파람을 불어야 되요." 그래, 엄마가 졸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엄마 귀에다 휘파람을 조용히 불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선배들, 선생들,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가 따라갈 귀한 지도자 갈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입니다. 지금 2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유일한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가나안 땅은 아직 싸워서 얻어야 될 땅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여호수아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좋은 땅, 이미 정복한 땅을 달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한 땅은 가장 정복하기 어렵고 힘든 땅입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열 정탐꾼이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바로 거인족 아낙 자손이었습니다(골리앗의 조상). 이곳 이름이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그 의미도 얼마나 힘센 거인이 살았는지 이름도 “거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땅을 요구합니다. 왜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을까요? 저는 이 갈렙의 모습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첫째, 갈렙은 끝까지 믿음의 비전을 놓치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갈렙은 민수기 14장 이후 광야를 떠도는 38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의식이 분명한 지도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꿈이 분명해졌고 이제는 목적지까지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정한 보이지 않는 목표, 내 자신만을 위한 뜬 구름 잡는 목표는 바뀝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고 분명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마라톤의 세계 최고 기록은 독일 BMW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2시간 2분 57초에 완주하며 사상 처음으로 2시간 2분대에 진입한 데니스 키메토(30·케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마라톤 선수가 2시간 10분 안에 42.195킬로를 뛰려면 100미터를 평균 17-18초 사이를 계속 유지하며 뛰어야 합니다. 그럼 마라톤 선수들이 전반부에 더 잘 뛸까요? 반환점을 돈 후반부에 잘 뛸까요? 예! 상식적으로는 전반부에 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잘 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빨리 뛰는 것은 반환점을 돌고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인지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인지점인 가나안 땅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자기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을 주고 같이 성공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둘째로, 갈렙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면 한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도우심 밖에는 없지만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10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 그 땅은 가장 강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또 골짜기입니다. 무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전쟁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85세지만 40년 전과 똑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땅을 당연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체력이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믿음이 똑같을 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땅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자기 조카인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통해 다른 지파의 땅 정복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큼은 직접 정복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직접 노년의 나이에 전쟁을 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이 40년 전 백성들이 포기한 땅이었는데 그 때 갈렙은 정복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는 백성 전체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갈렙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땅을 정복하므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강한 군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마치 갈렙은 이미 이 땅을 정복한 사람처럼 달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마치 정복한 것처럼 이제 가지라고 허락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떡 줄 사람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김칫국 신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김치국은 많이 마실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이런 김칫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씀이 8,9,14 절에 3번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나오는 본문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 요셉은 형통한 신앙처럼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갈렙의 신앙 특징은 온전히 좇은 신앙입니다. 좇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만족시켰다는 뜻이고, 하나는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찰떡 신앙, 주님께 찰떡처럼 달라붙어 만족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찰떡 신앙을 가진 사람이 김칫국 신앙, 곧 성공의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나안 정복이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이면서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노인이지만 바로 우리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후배와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렙처럼 살아가면 주님의 성공을 얻을 뿐 아니라 나의 성공도 같이 얻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누가 가장 좋습니까? 예!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갈렙 자신과 유다 지파가 제일 좋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공은 이루어도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사는 교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민을 오셨는데 목사님이 근황을 물어봅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요? 뭘 하시는데요? 저 요즘 청소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뭘 하십니까? 제가 요새는 미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뭘 하시는데요? 제가 요새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바지를 누비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운 겁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또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뭐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미국을 주름잡고 다닙니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 옷을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쓸고 다니든 누비고 다니든 주름잡고 다니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교포들뿐이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느냐?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올바른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막고 잘 입고 잘 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하여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갈렙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참된 성공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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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8-10 00:23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김병중 08-09 23:49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병중 03-16 23:19
『고난 중의 신자에 대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
ㅣ. 들어가는 말 청중은 하나님과 영생의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존재이다.1) 청중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설교자의 설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청중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설교자의 설명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이 들은 말씀과 모순되게 느끼는 현실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까닭을 알 수 없고 감당 하기 어려운 고난을 경험할 때이다.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팀 켈러는 고난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고 한다.2) 그렇다면 여러 가지 까닭 모를 고난을 경험할 때 언약 백성인 청중은 그 고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면 설교자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설명할 것인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 만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설교자의 태도 역시 중요한데 설교자는 고난을 겪는 청중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때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교자는 이런 상황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자는 먼저 로고테라피 개념으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본 다음,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각각의 모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3.2) 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 25, 16. 이어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을 제안 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침묵과 로고테라피 1.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의 침묵 20세기 최고의 문호(文豪) 가운데 한 사람인 C. S. 루이스(1898~1963)는 남달리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였고 그 후 그의 형은 술을 위안으로 삼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겪은 루이스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후 신앙을 잃어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랜 방랑 후에는 다시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한 불행한 여인과 결혼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꼈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부인은 3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이런 많은 고통을 경험한 루이스는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민을 표출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가 원하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 하지 않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선이 부족하든지, 능력이 부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가 지 다 부족한 것이다.4)이렇게 의문을 던진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하는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글자에 통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5)하지만 루이스는 “고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이 그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제기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6) 사람이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크게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강정훈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은 남의 배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흔적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 자국이 더 아프다고 한다.”7) 이처럼 청중은 각자가 누구보다 쓰라린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루이스와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캔 가이어(Ken Gire)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책에 The North Face of God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반가가 가장 오르기 힘든 북쪽 능선(the north face)처럼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캔 가이어에 의하면, 에베레스트산은 여러 개의 능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북쪽 능선이 등반하기 가장 어렵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8) 3) 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6-10.4) C.S. 루이스/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33.5) Ibid., 63.6) Ibid., 129.7)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 77. 성경 인물 가운데도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요셉이나 다윗은 긴 기간 동안 까닭도 모르고 그 끝도 모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 까”라고 부르짖은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세는 요셉이나 다윗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 왔을 때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명을 거절할 정도였다. 캔 가이어의 말처럼, 성경 인물들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보다 그들이 당한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9) 2. 언어의 기능과 설교자의 사명 하나님은 이처럼 청중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설교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에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로 밝히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설교 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언어의 기능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는 대신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드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을 방출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셨다.10)하나님으로부터 말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의 사명은 이 언어를 통해 ‘사물 언어’(language of things)를 ‘구술언어’(oral language)로 드러내는 것이다.11) 설교자의 사명은 우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들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의도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진 교수는 목회 사역의 핵심을 “구술언어와 사물 언어를 신자들 앞에서 서로 연결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표현한다.12) 그렇다면 청중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자는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내세에 천국의 영광을 누릴 성도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는 청중의 질문에 설교자는 어디에서 해답을 확보하여 청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해답을 성경에 담아 놓으셨기에 매번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그 해답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선,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팀 켈러의 말처럼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13)그러다가 막상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리처드 아스머는 자신이 목사요 실천신학 교수이면서도 모친이 교통사고로 갑작 8) 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 20-21.9) Ibid., 18.10)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84.11) Ibid., 78.12) 이승진,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223.1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6. 스럽게 사망했을 때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머는 고향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14) 아스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중이 고통스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럴 때 성경적 관점 에서 고통을 설명해 주어 고통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3. 고통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까닭 모를 고통 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교자는 어떻게 해석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우선 고통에도 값진 뜻이 있다고 한 옥한흠 목사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통은 거룩한 것이며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15)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들어보자. 빅터 E. 프랭클은 유대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악명 높은 나치(Nazi)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생존자이다. 그는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알몸 상태로 발가벗기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말살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악몽일지 라도 그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16)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빅터 E. 프랭클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한다.17) 빅터 E.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 개념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빅터 E. 프랭클은 고통이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절대 고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희생의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절대 고통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존재이다.18)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을 가진 존재인 청중은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옥 한흠 목사는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하면서 신자는 고난 배후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라고 충고한다.19)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선용이란 첫째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선용하시며,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 고난이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20) 옥한흠 목사와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고통에는 고통보다 더 큰 의미가 있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신자가 막상 고난을 겪을 때는 그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경험할 때 청중은 고난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삶에서는 왜 실현되지 않는지 회의(懷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 상황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14) 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 40-41.15)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234, 15-16.16)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 51.17) Ibid., 10.18)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47-48.19)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11, 16.20) Ibid., 18-19.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III.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들 1. 재난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관점 신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온 국가적으로 함께 당하는 대재앙도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여러 가지 정상(正常)이 비정상(非 正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비정상(Ab-normal)이었던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새로운 정상(New-normal)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경제가 무너지며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vaccine)에서조차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21) 이런 때에 신자들은 왜 이런 일이 왔으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싶어 한다. 코로나 팬 데믹 외에도 세상에는 종종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설교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대재앙의 의미를 해석하여 설명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 부터였다. 1755년,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많은 논의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당시 대지진이 의인 욥이 당한 고난처럼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성경적 설명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면 대재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사건과 2011년 동일본에 지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설교 사례를 살펴보자.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북부에서 모멘트 규모 9.1의 해저 지진과 15미터 높이의 쓰나미 재앙이 발생하여 28만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교회의 한 설교자는 성탄절과 주일이 연속되는 거룩한 날에 쾌락을 즐기러 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는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관점의 설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다.22) 한편,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진의 원인이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설교해서 역시 파문이 일기도 했다.23)이 두 사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결국 대재앙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 그러면 대재앙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인가? 이승진 교수는 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로서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 대속적인 고난 모델, 신비적인 합일 모델, 종말론적 전망 모델 등의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에 접근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21) 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93622)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37.23)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24)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267-76. 1) 우선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의 관점은 고난의 중요한 원인을 당사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이런 인과응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욥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물론 고통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죄를 범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죽어 있는 세계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로 본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악인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25) 그런데 오늘날 지성인들 가운데는 보응 사상이나 징벌 관념을 말소해 버리고 범인의 개과천선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모든 징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26) 하지만 모든 고난을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합당하게 징벌하시기보다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인간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며 그들이 당하는 재난 사건을 교훈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징벌적 고난의 모델은 모든 고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징벌적 고난 모델이 형평성과 일관성에서 모순점을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이다. 이는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반드시 자신의 죄악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고난 저변(底邊)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고난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미래의 가치로 무책임하게 희석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청중의 불평을 막는 효과는 있겠지만 고난 중에 처 한 신자를 만족시키는 설명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3) 징벌 모델과 섭리 모델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난의 목적이 교육 혹은 연단을 위해서 라고 설명하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이 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과함으로 신앙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연단 후에는 죄에 빠질 가능성도 줄어들어 그에 따른 징벌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생겨난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얻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배울 것이며,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27)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영적인 훈련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답게 성숙하여 간다는 이 설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 모델 역시 모든 고난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욥처럼 남달리 훌륭한 신자가 오히려 남보다 모진 고난을 받는 경우나, 고난을 통한 연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은 유아들이 당하는 고난 등은 이 모델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4) 대속적인 고난 모델은 모든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다가 희생을 당한 경우, 혹은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自取)한 경우에 대한 설명에 동원된다. 예를 들면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던 사람이 오히려 사고를 당해 희생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 유다의 경우처럼(창 44:33)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하지만 대속적 고난 모델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경우 이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은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5) 신비적인 합일 모델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인 합일 모델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전능을 포기하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능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해서만 생각되어야 한다.28) 이러한 십자가 신학을 수용한 학자 가운데는 우선 본회퍼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전능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설명한다.29) 한스 요나스 역시 하나님을 무능력한 하나님, 무저항의 하나님, 피조물로 인해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30) 팀 켈러 역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을 옹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고통과 악의 근원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움켜쥐셨다면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 내셨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31)팀 켈러에 의하면 “크리스천들이 역경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주님의 고난을 강조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거룩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놓쳐 버리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설명하는 신학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라면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32)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겪을 때 거기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고난을 제거하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새 하늘 과 새 땅의 목적지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신다.33) 그러므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적 합일 모델의 설명이다. 이 모델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신자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 심을 포기하고 무력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구원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신비적 합일 모델은 고난 속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해버린 약점이 있다. 6) 지금까지 시도한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들은 고난의 원인과 의미를 다 설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신자의 모든 문제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날에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는 종말론적 전망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승진 교수는 메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8) 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93.29) Ibid., 94.30) 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33 (2012), 262.31)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96.32) Ibid., 233, 240.33)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274. 메츠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츠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로부터 부활절의 아침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기에 부활로 넘어가는 것을 승리자의 신화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4)하지만 종말론적 전망 모델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설명이지만, 고난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고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3. 고통의 불가피성과 고난의 유익 앞에서는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모델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한계점이 있는 설명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중은 개인마다 혹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정황을 살펴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모델로 고통의 의미를 적용함으로 청중이 지불한 고통이라는 대가보다 더 큰 유익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을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런 관점은 우선 신약 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팀 켈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는 신약 저자 가운데 우선 야고보를 생각해보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는 언제나(ὅταν, whenever)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신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약 1:2-3). 이와 같은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데 있어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베드로 역시 신자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운 나쁘게 고난을 당한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고 한다(벧전 4:12-13). 한편, 사도 바울은 고난이 신자를 연단하여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 만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은 가벼운(혹은 견디기 쉬운 ἐλαφρός)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4:17). 고난이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면 신자에게 있어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에 종교 개혁자와 설교자들 역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역설(力說)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팀 켈러는, 고난이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는 루터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난에 맞서 이겨 내도록 도와줄 기쁨과 사랑을 얻기에 앞서, 고난은 우선 우리의 교만을 비워내게 해 준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35) 그러므로 악과 고통이 존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바라보아야 한다.36) 고난의 유익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팀 켈러가 소개하는 고난의 유익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37) 34)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53-54.35)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82-83.36) Ibid., 142.37) Ibid., 300-303.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흠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2) 고난은 우리 삶의 여러 좋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 준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C. S. 루이스도 말했듯이 형통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고난 속에 있을 때는 확성기로 소리치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막다른 길로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붙는 경험을 통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과 기 쁨을 맛보게 된다. 5)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몸소 고난을 경험하면서 고통당 하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품게 된다. 이상으로 청중에게 설명할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것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청중(신자)에게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청중이 고통당하는 때에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청중이 그 설교자를 신뢰하고 그의 설교에 경청(傾聽)할 여부(與否)를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선 신정론의 설명의 한계 점을 확인한 후에 그 대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겠다. IV. 신정론의 한계점과 타인의 얼굴 1. 신정론의 의의(意義)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의 공통점은 고난에 대해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 辯神論)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신정론으로 번역되는 theodicy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θεός와 의로움을 뜻하는 δίκη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정론은 때로 무고한 자의 까닭 모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신정론의 관점으로 볼 때 고통은 선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더 큰 선에 이바지하므로, 부분으로서의 고통은 전체로서는 선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신정론을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합리한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신정론을 피력하려고 노력하였다.38)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이 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악은 선의 허용된 결핍”이라는 해결책을 내어놓았다.39) 라이프니츠가 변신론에서 표방하는 것은 “고통과 죄악이 존재하는 세계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의 계산에 따르면 현존하는 악은 최선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0) 38) Gottfried Wilhelm Leibniz/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4), 28-31, 441-50.39)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55-56.40) Ibid., 62-63. 그러나 이런 변신론의 설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강영안은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대해 ‘낙관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는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리스본 대지진 때문에 왔다.42) 2. 리스본 대지진과 신정론의 한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포르투갈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首都)이다. 15세기 리스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화로 인해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도시의 2/3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43)리스본 대지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오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신정론이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리스본이 여타의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rady)는 당시 리스본의 경건함을 다음과 같이 묘하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주교좌성당 외에도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공소가 121곳, 수도 원이 90곳, 다양한 수도회들이 150곳이나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44)특히나 대지진이 발생한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서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이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 미사를 위해 길을 나선 인파로 리스본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45)이처럼 경건했던 도시가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된 첫 지진에 이어 몇 차례의 여진이 발생하자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건립된 리스본이 폐허로 변했다.46) 그리고 오전 11시경, 지진이 발생한 지 90분 뒤에 발생한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 다.47) 대지진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망한 인구는 약 4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48)리스본이 대지진 사건으로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이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볼테르까지도 생각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9) 이처럼 고난의 문제를 신정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4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210.42) Nicholas Shrady/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서재, 2009), 142.43) 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1.44) Shrady, 『운명의 날』, 18-19.45) Ibid., 21,46)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122.47) Shrady, 『운명의 날』, 30.48) 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8.49) Ibid., 11-12. 3.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설교자는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다가갈 한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선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청중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정훈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이 난소암으로 악화되어 5년간 투병하다가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정리해서 입을 연 강 정훈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슬픔에 빠졌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이 와서 사모님이 좋은 데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울고 있는 미망인들에게 울지 말라고 비정하게 요구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강정훈은 단호하게 말한다.50) 그러면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유대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1995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아우슈비 츠 대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설명하려는 변신론은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는 어떠한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레비 나스는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없고 의미 없으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만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51)물론 고통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을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은 고통을 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통받는 자가 ‘외부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나에게 도덕적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사건을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얼굴’은 존재 자체를 통해 나에게 호소하고 윤리적 의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52)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계시로 다가올 때 필요한 것은 대속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이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 이다.”53)고통받는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되는데,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향유를 포기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계, 즉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이 열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환대해야 한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벌써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의 자리에 세워지는 일을 레비 나스는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 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54) 50)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78-80.5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227.52) Ibid., 148.53) Ibid., 152. 54) Ibid., 186. 이처럼 레비나스는 고통이 담긴 타인의 얼굴의 현현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에서 벗어나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의 윤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청중을 위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먼저 청중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모델에 해당하는지 세심하게 분석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통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청중이 놓치지 않도록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때 설교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훈계하는 자의 자리에 아닌 고통당하는 청중과 ‘자리바 꿈’의 과정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청중을 체휼(體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청중이 고통을 통해 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고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세우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으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거나 장기화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거나 모세처럼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라고 설교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컨대 아스머 교수가 경험했듯이 설교자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면 신자는 잠시 방황하던 자리에서 돌아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설교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해석하는 여러 모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신자가 겪고 있는 개별적인 고난 사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유형이 적절할지 잘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지만, 신자의 성숙에 고난이 불가피함과 결국에는 고난이 유익임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에게 고난을 설명하는 모델들을 잘 이해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태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신정론의 주장을 강조하느라 자칫 고난을 겪는 신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이 ‘계시’라고 하는 레비나스의 설명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요긴한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C.S.Lewis /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2014.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 서재, 2009.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5-38.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 총」 33 (2012), 243-279.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85-11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0-75.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70-75. _____.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70-75. _____.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0-86. _____.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198-231.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144.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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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6-14 15:02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
김병중(Th.D) 06-07 15:19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
김병중(Th.D) 04-26 11:04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Th.D) 01-22 17:14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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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1-04 19:37
3代의 감 따기
2020년 12월 담임목회 사임 후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이듬해부터 가을에 감을 따고 있다. 올해도 감을 땄다. 20여 년 전 어머니께서 이 집을 사서 오신 후 종로 묘목상에게 어린 감나무를 사서 마당에 심었다가 아버지께서 집 밖 귀퉁이로 옮겨 심으셨다. 올해 4년째에는 이전처럼 감나무에 비료를 주지도 못하고 지냈는데 어머니가 막걸리 등 양분을 주셔서 그런지 깨끗하게 감이 열렸다. 이전에는 감 주위에 흰 것들이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감이 탐스러웠는지 동네 어떤 사람이 두 번이나 따는 것을 어머니 아는 분이 소리쳐 내쫓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손타기 전에 어머니, 아들과 함께 감을 땄다. 이사 올 때 감나무 잎 떨어지는 것이 지저분해 어머니는 잘라버리시려고 했는데 나는 살려 두자고 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감을 따는 재미와 먹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도 침대에 누워계시면서 잘 익은 감을 맛있게 드시니 다행이다. 70여 개는 딴 것 같다. 대봉이라 익혀 먹어야 한다. 매년 감 따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단톡에 어떤 사람이 감의 효능에 대해 올려 공유해 본다. "감" 많이드세요!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놀라운 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은 종합 영양제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과일이죠. 감 1개에는 사과 9.5개 분량의 비타민이 들어있는데 이는 최고의 천연 종합 비타민 과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비타민 A는 시각 유지에 필요한 로돕신을 만드는 영양소인데 이 비타민 A가 감 1개에 성인이 하루 섭취해야 할 양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눈을 많이 쓰는 수험생이나 노안으로 눈이 나빠지는 경우에 시력 보호용 과일로도 좋습니다. 감의 주성분은 당질(15~16%)인데 포도당과 과당의 함유량도 매우 높으며, 비타민 C와 A 그리고 탄닌,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알칼리성 식품입니다. 감은 최상의 건강 과일이라 해도 지나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최상의 건강 과일이 흔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무시하고 비싼 과일만 사드시고 있겠죠! 사과 10개 먹는 것보다 감 1개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증명하고 있어요. 잘 모르셨죠? 감은 자연 치유제로도 최상의 특급 과일이며 피부에도 최고랍니다. 심폐(心肺)를 녹여주며 갈증을 멈추고 폐위(肺痿)와 심열(心熱)을 치료합니다.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吐血)을 멎게 해 주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약입니다.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고 기침, 만성기관지염, 고혈압, 심장 질환 등에도 효능이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풍 예방약으로도 쓰입니다.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합니다. 감 많이 드세요. -
김병중(Th.D) 03-30 10:30
옥수수 파종
옥수수 파종 옥수수 두 알을 땅을 파고 묻는다. 끝! 어제 10년 같이 산 개를 장사했다. 밤나무 언덕에 땅 파고 사체 넣고 묻는다. 끝! 장례식도 비슷하다. 땅 파고 넣고 묻는다. 끝! 성도의 삶을 땅에 묻힌 밀알이라 했다. 땅에서 썩어 열매 맺는다. 땅에 묻히는 게 영광이다. 흙으로 가려지는게 시작이다. 나머지는 생명을 주관하는 주의 몫이다. -
김병중 10-28 19:12
강의창 장로 부부 시
강의창 장로 시 에벤에셀 참으로 오랜 세월 방황하며 허우적거릴 때 미스바로 모여라 부르는 소리 가야만 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에 제단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얼굴에 홍수를 이루고 입술이 열리며 알 수 없는 천국 방언이 쉴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후로부터 모리아 산 이삭의 제물처럼 생(生)과 사(死)를 당신께 맡겼습니다 이제는 달려 갈길 다 가고 여기까지 도우신 기념비를 지워지지 않는 종이에 아로새깁니다 여명(黎明) 밤 새워 진통을 앓던 어둠은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에 희망의 나래를 펴고 날아든다 그림자 없는 어둠을 헤메이며 밤 새워 토해 내던 역겨운 세월들 하늘 눈물 쏟아 내고 눈이 열렸다 가지 끝에 매달려온 가느다란 빛줄기는 검붉은 심장을 터트리고 여명(黎明)의 호흡으로 벅차 오른다 해당화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해당화 장독 항아리 여는 엄마와 눈 맞춤한다 인생살이 고달파도 장독대에 가면 마음의 부자 해당화 꽃향기에 취해 얼굴에 미소 지으며 간장 된장 퍼와서 식구들에게 고운 정 퍼붓던 엄마 엄마의 향기 지금도 내 마음에 피어오른다 홍수임 권사 시 아버지 (1) 이름만 불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울림이 메아리쳐 옵니다. 밤늦게 귀가할 땐 딸 사랑에 잠 못 이루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당에 서성이셨다. 딸 발자국 소리 들려오면 모르는 척 방에 들어가 등잔불 끄고 아침이 오면 말없이 일거리 주시며 마음으로 안아주시던 아버지 예수 부활 (4행시) 예수 믿고 구원됨이 복중에 제일 큰 복이요 수확 중에 제일 많은 수확이다 부하게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활용하여 많은 상급으로 선한 사업에 부요하길 원합니다. -
김병중 10-17 11:41
이제 가을은 끝났다 - 손근식 장로
이제 가을은 끝났다. 기온이 뚝 내려간다고.. 아직 들판은 추수를 마치지않았는데... 누가 추수를 하러 갈런지.. 오이코스 초청 추수 대작전이 조용하게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