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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사진사인가?
- 취재가면 대놓고 자기 사진 찍어 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어이가 없을 때가 있다. 친분이 있거나 필요시에는기꺼이 찍어 줄 수 있으나 별 친분도 없는데 당연한 듯 부탁(?)한다. 행사장에 본인 인증샷 찍으러 왔나? 기자는 취재하러 간 것이며 사진은 기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찍는 것이다. 그리고 행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설교자는 초기에만 사진 찍어 주고 자리에 앉아 설교에 집중해 기록한다. 설교하는 설교자와 설교듣는 청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목사 기자로서 설교할 때 누군가 돌아 다니면 설교에 방해가 된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중해 설교를 듣다보면 은혜를 받든지, 구설수 거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설교자는 기자가 불편할지도 모른다. 기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례할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예의범절은 지나쳐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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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중부교회사태15】 공동의회 개최 연기, 총회장 교회 앞 시위
- 이상규가 주춤했다. 5월 28일 본인과 주진만을 놓고 천안중부교회 담임청빙 투표를 하는 공동의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법원의 금지 가처분 판결을 받고 일단 미루었다. 그러면서 다음주에는 김종천 목사에 대한 신임투표를 하겠다고 광고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지난 3월에도 법원이 금지 가처분 판결을 했지만 몸싸움까지 하며 공동의회를 강행해 해임시켜놓고 뭔 신임투표를 하겠다는 것인가? 앗! 주진만이 사라졌다. 이상규와 함께 천안중부교회 담임 청빙 투표하기로 한 주진만이 3주 전부터 천안중부교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욕만 먹는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이런 가운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권순웅 총회장이 시무하는 주다산교회 길 맞은편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주일 오전 9시 30분부터 12시 정도까지 30여명이 우비를 입고 다양한 현수막을 펼쳐놓고,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확인결과 이들은 천안중부교인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 시간에 김종천 목사 지지파는 교회 정문 앞 계단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고, 김종천 목사 반대파는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자기 교회와 천안중부교회의 합병을 선언한 이상규가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국 이상규 측이 보낸 용역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이상규를 지지하는 천안중부교회 당회원들의 협조나 묵인을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이미 주다산교회에 용역이 한 차례 와서 시위를 했는데 이상규 측을 그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 최근 5월 18일 총회 임원회에서 구 충남노회 문제를 다뤘다. 임원회는 사회소송시행세칙에 따라 대표권을 부여한 고영국 목사의 노회 소집이 원만하지 못하므로 기존에 부여한 권한을 중지키로 했다. 아울러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위원장:김상현 목사)로 하여금 다시 각 측의 입장을 듣고 협상을 지시하기로 했다. 단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가 천안중부교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아마도 이에 불만을 품은 이상규 측이 용역을 통해 시위를 한 것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 문제는 그들의 현수막 내용이 너무나 과격하다는 것이다. “불법 선두주자 총회장 권순웅 사퇴하라. 정치 브로커 선거 브로커 총회장 권순웅 물러나라. 발람같은 총회장 권순웅 사퇴하라. 총회장 권순웅은 목사 맞습니까?. 돈 뿌린 총회장 불법의 선봉왕” 재적 성도가 5천여명인 주다산교회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 드리러 와서 이 현수막을 봤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더더군다나 현재 권순웅 총회장은 미국을 비롯한 브라질 등의 해외 노회 재건 및 협력을 위하여 출타 중이며 6월 17일 귀국 예정인데 말이다. 지난 임원회에서 “충남노회 사건과 관련해 총회장과 총회임원, 충남노회폐지후속위원회 위원 교회에서 시위할 경우 사법 대응과 언론 대응을 총회에서 지원하기로 했다”고 결의했다. 과연 권순웅 총회장이 귀국하면 어떤 식으로 이 일을 처리할지 궁금하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주에도 주다산교회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 충남노회와 천안중부교회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선을 넘을 때 정당성과 지지를 잃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상규 측은 지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렇게 한다고 자기 뜻대로 일이 되겠는가? 그러면 누구나 시위하면 통하는 총회가 될 것이다. 총회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주일”이다.(시위에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인데 자금 출처가 궁금하다. 현재 교회 재정은 김종천 목사 반대 측이 관리하고 있다. 합법한 김종천 당회장의 결재 없이 사용된 모든 비용은 처벌 대상이다) (사진 이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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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연등회와 부활절 퍼레이드
- 긴 봄비가 내리고 있다. 그동안 메말랐던 대지를 적셔주는 반가운 비다. 이 비는 26일 시작해서 29일까지 내릴 예정이다. 27일 토요일은 사월초파일이었다. 전날부터 비가 내려 연등행사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니 지난 20일 벌써 했다. 다른 종교 기념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생겨진 착각이다. 과거 5년간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으며 매년 벌어지는 초파일 연등행사를 봤다. 가서 행사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행사로 인해 벌어진 교통 통제의 불편함을 봤다는 것이다. 차선을 통제하고 벌이는 축제로 인해 벌어지는 교통 혼잡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래서 ‘도대체 왜 자기들의 행사를 대중 교통을 통제하면서까지 하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이 그곳에서 5년을 보냈다. 부처가 자기 탄생일이라고 이렇게 민폐를 끼쳐가며 하는 행사를 좋아할까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리고 역으로 올해 처음 있었던 부활절 퍼레이드를 생각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여 이르는 말로, 남은 비난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목사지만 부활절 퍼레이드 행사에 대해 결코 내로남불할 생각은 없다. 올해 뜬금없이 한교총에서 4월 9일 주일 부활절 오후 2-4시에 광화문 광장을 출발해 세종대로를 따라 서울광장까지 간 뒤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오는 『2023 부활절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퍼레이드는 언약궤 행렬, 교단 대표 행진, 십자가 조형물 이송 등과 타악기 밴드, 캐릭터 퍼포먼스, 풍물놀이단 공연에 이어 K-POP, 트로트 콘서트로 진행됐다고 한다. 당일 기자는 다른 행사를 취재하느라 현장에 가지는 못했다. 이 행사의 실무대회장을 맡은 소강석 목사는 이 행사를 정례화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론부터 말해서, 기자는 이 행사의 정례화에 반대한다. 일차적으로, 기독교가 그동안 이런 행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런식으로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하지 않은 것이지, 못해서 안한 것이 아니다. 이런 구성의 행사를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축하되는가? 행사의 마지막이 “K-POP, 트로트 콘서트”였다면 “용두사미”아닌가? 또한, 거룩한 주일에 각자의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와 행사를 하는데 굳이 서울 한복판에 성도들을 불러모아 이런 행사를 할 필요가 있는가? 합동교단은 주일성수를 위해 별도의 행사를 금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소강석 목사는 합동 교단 증경총회장이면서도 주일에 트로트 콘서트 등 많은 행사를 하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이제 곳곳에서 주일에 임직식 등을 하면서 소강석 목사를 핑계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헌법은 주일에는 임직식 등의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교통통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행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통 통제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예외없이 쌍욕이 나온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부활절 행사를 한다고 교통 통제를 하면 좋은 소리를 하겠는가?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서민들의 발을 묶어 놓고 하는 기독교 행사가 과연 기독교 전파에 도움이 되겠는가? 결국, 『2023 부활절 퍼레이드』는 그 행사를 원하는 “그들”만의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불교 연등행사는 저녁 시간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불빛으로 인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의 발길을 잡지만 한낮에 하는 『2023 부활절 퍼레이드』는 공공의 도로를 점거한 그들만의 행사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부활절 퍼레이드는 불교 연등회의 초라한 "기독교 버전"인가? 과연 내년에도 또 할려나? 답은 실무대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에게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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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조직 『합동포럼』, 또 하나의 총회인가? 총회임원 등용문인가?
- 요즘 총회의 핫 이슈는 두 개라 생각한다. 첫째, 작년 총회 때 1,600여명의 총대에 의해 폐지된 구 충남노회가 부활을 시도할려다가 지지부진한 것. 둘째, 구 충남노회 소속 천안중부교회가 점점 아수라장이 되가는 것이다. 그동안 본지 빛과소금뉴스는 구 충남노회 부활과 천안중부교회 사태를 꾸준하게 연속기사로 쓰고 있다. 앞으로 3개월 남짓남은 108회 총회에서 이 두 문제는 핫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총회는 총회장과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의 이름으로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 공문을 노회장 고영국 목사와 서기 이상규 목사에게 발급했다. 그러나 새로 노회를 구성하기로한 53개 교회는 전혀 동조하고 있지 않아 유야무야됐다. 어르고 달래도 그동안 너무나 시달렸기에 더 이상 함께 하고자 할 마음이 1도 없는 것이다. 결국 “충남노회 정상화”는 안하니만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일 큰 피해를 본 것은 천안중부교회이다. 2년여간 내분을 하고 있는 가운데 3월 발급된 공문을 근거로 이상규가 임시당회장으로 가서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자신이 담임이 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태에 한 사조직인 합동포럼에 같이 있는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상현 목사, 부위원장 지동빈 장로, 서기 고광석 목사, 회계 원태연 장로, 총무 박태천 목사, 전문위원 주진만 목사. 그리고 천안중부교회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 둘 있다. 임시당회장을 자처하는 이상규와 주일 설교를 하고 있는 주진만이다(이 둘은 5월 28일 공동의회를 통해 한 명이 담임 청빙될 예정이다. 그러나 법원은 공동의회를 금지하는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전 행태를 보아 강행할 것으로 보여진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합동포럼이라는 한 사조직이 최근에 기독신문에 처음으로 임원조직광고를 냈다. 구성 면면을 보면 참으로 화려하다. 증경총회장들, 현 총회임원들, 상비부 임원들, 총회 임원 출마 예정자 등등. 마치 또 하나의 총회를 보는 듯하다. 이 사조직이 자신있게 기독신문에 광고를 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력을 과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앞으로 총회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조직에 가입해야할 것 같은 유무형의 압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기, 차차기 목사 부총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들도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구성원들 중에 총회적으로 큰 물의를 끼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조직에서는 그냥 그들을 방치해 둘 것인가? 물의를 끼치는 인물을 제재하거나 내보내는 규정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인물들에게 어떤 제재도 하지 않고 그냥 간다면 결국 합동포럼이라는 사조직도 함께 동일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권순웅 총회장은 지난 3월 14일 총회회관에서 「샬롬부흥 클린개혁 성명서」를 발표했다. 둘째는 총회본부에 대한 클린개혁이며, 셋째는 총회산하 교회의 윤리에 대한 클린개혁이고, 첫째는 총회 선거운동의 클린개혁이다. 다음은 첫째 항 전문이다. “총회선거 입후보자는 총회 선거관리법을 준수해 주기 바랍니다. 금권선거 및 부정 선거를 금합니다. 후보자들의 선거운동은 선거관리위원회뿐 아니라 전 총회가 주시하며 부정선거를 추방할 것입니다. 입후보자는 정책과 인물중심으로 허락된 범위 안에 운동을 하고 전 총회 구성원은 샬롬의 개혁적 정신으로 선거에 참여해 주십시오. 먼저 투명하고 깨끗한 선거문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총회를 섬길 일꾼을 선출하는 과정을 보면 임원선거에 출마 의지를 보이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각 총회 내에 각종 조직의 수련회, 세미나, 기도회 모임의 강사초청을 통해 후원금, 협찬비를 요구하는 관행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또 총회 선거가 일부 사조직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우려할 일입니다. 이에 각종 사조직의 선거 개입은 단절 되어야 하고, 총회 정치 개입을 차단해야 합니다. 총회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총회임원회는 허락된 권한을 십분 발휘하여 클린개혁을 시행하겠습니다” 총회장은 사조직의 선거 개입은 단절 되어야 하며 차단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 임원으로 출마하는 자들이 지난 4월 20일 대전판암교회에서 있었던 합동포럼 모임에 가서 인사를 했다. 이것은 총회장이 금지한 사조직의 선거개입으로 볼 수 있지 않는가? 아니라면 오해받을 짓을 해서는 안된다. 사조직 합동포럼에게 요구한다. 구성원 중에 현재 총회적으로 물의를 끼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합당하게 제재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제 식구 감싸기”나 하는 그렇고 그런 사조직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또한 총회임원 등용문의 역할을 하지 말기 바란다. 무슨 의도로 합동포럼을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보여지는 모습은 총회임원 등용문처럼 보인다. 그러니 총회 임원 후보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과거 군대내 “하나회”처럼 총회내 또 하나의 사조직이 되는 것이다. 하나회가 선후배로 서로 끌어주며 주요 보직을 차지해 결국 군사반란(쿠데타)을 일으켜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던가? 총회장이 총회 선거운동의 클린개혁을 목 터지게 외쳤다. 그러나 “0야 짖어라 기차는 간다”는 심보로 며칠 후 버젓이 합동포럼 광고를 교단지에 광고했다. 합동포럼은 총회와 상관없는, 총회장의 말도 대놓고 무시하는 막강하고 막나가는 사조직인가? 그 속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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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 임봉교회, 자금난으로 공사 중단...도움 손길 절실!
- 자금난으로 공사 중단된 임봉교회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임봉교회는 과거 교회와 관계된 사고 배상으로 모든 것을 넘겨주고 어렵게 마련한 부지에 교회를 짓고 있다. 지난 4월 24일 직영으로 공사를 시작해서 어렵게 골조 공사를 완성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자신처럼 공사일을 하는 다른 3명의 목사와 함께 직접 작업 해 한달 만에 교회 외형 틀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적은 재정으로 공사를 하다보니 판넬공사, 실내 인테리어, 타일공사, 이층 사택 공사등을 못하고 중단됐다. 공사금액의 일부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한도까지 받아 더이상 받을 수 없는 형편이며 그간 경북노회 교회들의 헌금과 몇몇 교회들의 후원이 있었으나 많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한번 전국교회에 후원을 요청하고 있다. 예배당 건축이 중단되지 않고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린다. 후원계좌: 농협 임봉교회 351-2629-06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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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중부교회사태14】 5월 28일 공동의회 금지 가처분 판결!
- 이상규·주진만을 대상으로한 천안중부교회 담임청빙을 위한 공동의회가 결국 법으로 금지됐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유아람 재판장은 판결문을 통해 “채무자(이상규)는 2023. 5. 28. 천안시 서북구 도원3길 15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천안중부교회에서 개최예정인 공동의회를 개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상규는 지난 3월 19일 주일에 김종천 담임목사 해임 건을 다루는 공동의회를, 개최해서는 안된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강행했기에 이번에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는 이미 이판사판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것으로 보여진다. 불법이더라도 공동의회를 진행해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얻는다면 이후 법적으로 불리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지세력을 통해 불법으로라도 담임 청빙 가결 하면 이후 지분싸움을 벌일 명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기자의 뇌피셜이다. 이번 판결문은 여러 가지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판결문의 채권자는 천안중부교회 담임 김종천 목사이고, 채무자는 이상규이다) 신청취지 주문 제1항 및 집행관은 위 명령의 취지를 적당한 방법으로 공시하여야 한다. 1. 사안의 배경 가. 당사자들의 지위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남노회(이하 '충남노회'라 한다)는 천안, 아산, 예산, 당진, 서산, 태안, 내포 일원의 각 지교회 목사들과 각 지교회의 당회에서 파송한 총대장로를 회원으로 하였던 단체이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이하 '총회'라고 한다)는 그 산하 모든 노회들의 상위 단체이다. 채권자는 충남노회에 소속되어 있던 지교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천안중부교회(이하 '이 사건 교회'라 한다)의 위임(담임)목사로 재직해오던 사람이고, 채무자는 충남노회가 2023. 3. 6. 이 사건 교회의 당회장으로 파송한 사람이다. 나. 충남노회의 채권자에 대한 면직판결의 효력 관련 가처분결정 충남노회는 2022. 3. 31. 채권자를 목사직 면직 및 수찬정지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는데, 채권자는 이 법원 2022카합10112호로 위 면직판결의 효력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하였다. 이 법원은 2022. 8. 2. 위 면직판결은 권한을 상실한 임원들이 구성한 재판국에 의하여 이루어진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봄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채권자의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이하 '제1선행가처분결정'이라 한다)을 하였다. → 충남노회 이름으로 김종천 목사를 면직 시켰으나, 법원은 권한을 상실한 임원들로 구성한 재판국에 의한 것으로 절차상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판단했다. 다. 채권자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개최 관련 가처분결정 채무자는 2023. 3. 12.경 이 사건 교회의 주보를 통하여 정관개정의 건, 채권자 해임의 건을 안건으로 하는 2023. 3. 19.자 공동의회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채권자는 이 법원2023카합10034호로 위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하였다. 이 법원은 2023. 3. 17. 제1선행가처분결정이 취소되지 않고 있는 이상 채권자가 이 사건 교회 당회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위 공동의회는 정당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되지 아니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채권자의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이하 '제2선행가처분결정'이라 한다)을 하였다. 채무자는 2023. 3. 19. 예정대로 공동의회를 개회하여, 출석 교인 262명 중 찬성 234표, 반대 0표, 기권 28표로 채권자 해임 안건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이하 '이 사건 해임결의'라 한다). → 법원은 지난 3월 19일에 소집된 공동의회가 법원의 결정을 어긴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라. 채무자의 공동의회 소집 공지 채무자는 2023. 5. 21.경 이 사건 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신임 목사 청빙을 위해 2023. 5. 28. 주일 2부 예배 후 공동의회(이하 '이 사건 공동의회'라 한다)를 개최한다고 공지하였다. 2.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가. 당사자의 주장 1) 채권자 채권자는 이 사건 교회에 파송된 이래 적법하게 해임되거나 그 자격을 상실함이 없이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 채무자 채권자는 2023. 3. 19. 이 사건 해임결의에 의하여 해임되었고, 2023. 4. 22. 충남노회의 목사직 면직 및 제명 판결(이하 '이 사건 면직판결'이라 한다)에 의하여 자격을 상실하였다. 이 사건 교회의 적법한 당회장은 채무자이다. 나. 판단 1) 이 사건 해임결의의 효력 2023. 3. 19.자 공동의회는 그 개최금지를 명한 제2선행가처분결정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된 중대한 절차상 하자가 있어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채권자가 이 사건 해임결의에 의하여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없다. → 이상규는 3월 19일의 공동의회와 4월 22일 “소위” 충남노회 판결로 김종천 목사가 해임되었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이라고 말하나 이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2) 이 사건 면직판결의 효력 이 사건 기록에 의하면 충남노회는 총회의 2022. 9. 18.자 정기총회 의결에 의하여 폐지되었음이 소명된다. 한편 소을 제3호증의 1의 기재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가 2023. 3. 2. '총회임원회가 본 위원회에 부여한 결의(제11차 임원회의)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거 정기회측(노회장 고영국 목사, 서기 채무자)에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하기로 하다'라는 취지의 결의를 한 사실은 소명된다. 그러나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가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은데다, 위 소위원회 결의 내용 자체도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과정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므로, 위 소위원회의 결의만으로 앞서 총회의 정기총회에서 이루어진 충남노회 폐지 결의의 효력이 상실되었다거나 폐지된 충남노회가 새롭게 설립되었음이 소명되지 아니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자료가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면직판결은 총회에 의하여 폐지된 충남노회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으로서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채권자가 위 면직판결에 의하여 목사 자격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없다. → 충남노회는 총회에 의해 폐지 되었으며, 총회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 이름으로 발부된 공문은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것이며, 이후 김종천 목사에 대한 노회의 면직은 충남노회가 이미 폐지되었기에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3) 소결 채권자가 이 사건 해임결의 또는 이 사건 면직판결에 의하여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없고,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그 밖의 사정을 살펴보아도 채권자는 여전히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 법원은 김종천 목사가 어떠한 경우에도 현재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임을 증거하고 있다. 3. 이 사건 공동의회 소집 절차의 하자 이 사건 교회 정관에 의하면 공동의회는 당회의 소집 요청, 제직회의 청원, 입교인 3분의 2 이상의 청원, 상회의 지시가 있을 때에 당회의 결의로 소집한다. 채권자가 이 사건 교회 당회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 공동의회는 적법한 당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정당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되지 아니한 절차상 하자가 있고, 달리 채권자를 배제하고 절차를 진행함이 허용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점에 대한 소명도 없으므로 이 사건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명할 피보전권리가 인정되고, 채권자의 위임목사, 당회장 직을 둘러싼 분쟁의 경위에 비추어 가처분으로 이 사건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명할 보전의 필요성도 인정된다. 다만 채권자는 집행관공시명령도 함께 구하나 채무자에 대한 실효적 수단이 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채권자의 이 부분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천안중부교회 당회장 김종천 목사를 배제한 체 공고한 5월 28일 공동의회 개최는 절차상 하자가 있기에 개최금지 가처분 판결한다. 4.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신청은 위 인용 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신청은 이유 없어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법은 명백히 김종천 목사가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임을 밝히고 있으며, 폐지된 “충남노회”이름으로 행해진 어떤 결정도 효력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물러날 “자칭” 천안중부교회 당회장 이상규가 아니다. 이번 주 천안중부교회에서 또 어떤 불법이 벌어질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리고 그 모든 법적 책임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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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된 명예욕(?)...앞길 막는 부메랑 되나?
- 전국주일학교연합회(회장 이해중 장로) 제68회기 2차 중앙위원회가 5월 25일 오후 1시 면목중앙교회(양우석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개회예배를 은혜스럽게 드리고 회무가 잘 진행되다가 마지막 기타안건에서 돌발상황이 생겼다. 증경회장 김석태 장로가 “주일학교에서 시상하는 근속교사 시상에 관해 정확하게 조사를 해서 당사자가 근속교사가 되는지, 교회와 주교연합회에서 정확히 살펴서 올려주고 전국주교연합회에서도 잘 살피고 심사숙고를 해야 하겠다”고 발언했다. 그 이유는 지난 62회기 총회 때 50년 근속상을 수여했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50년 근속교사상은 모두 3명에게 주어졌다. 이 중 2명의 교사들은 나이가 60대 후반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명은 60년생으로 당시57세 였는데 50년 근속교사상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당사자는 7세부터 교사를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자 당사자는 실제 나이가 60년생이 아니라 58년생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고해도 9살 밖에 안되는데 그 나이에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는 말은 수긍하기가 어렵다. 김석태 장로는 “그 사람의 연령을 따지면 도저히 맞지 않다는 이의제기가 있어 전국주교연합회의 위상에 심각한 악영향이 될 수 있으며 해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회의 사회자 회장 이해중 장로는 "당사자에게 소명을 받았는데 다 포함하면 50년이 되는데 교회를 옮기면서 빠진 기간도 있는데, 당사자는 상을 반환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앞으로 잘 살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7살이 됐든, 9살이 됐든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 연령은 아니다. 단지 주일학교 학생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에 근거해 영예로운 50년 근속상을 받은 당사자나 시상한 전국주교연합회나 “난감한 상황”이 됐다. 도대체 왜 뻔히 보이는 일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헛된 명예욕(?)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6년만에 그것이 돌고돌아 부메랑으로 당사자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당사자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른다. 당사자는 총회회계를 거쳐, 금년 11월에 있는 제53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수석부회장에 도전하고 있다. 신학생 때 교수님들과 선배 목사님들은 “돈, 여자, 명예”에 대한 욕망을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이것에 대한 욕망이 바로 패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헛된 명예욕은 언젠가 결국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 당사자나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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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신과 부전교회, 그 깊고 아름다운 인연이여!
- 5월 25일 오전 11시, 총신대학교 종합관 백남조홀에서 박성규 박사가 22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날 재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축하객들이 홀을 가득 채우고 박 총장의 취임을 축하했다. 1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오정호 부총회장의 설교도중 크게 “아멘”하는 중년 여성들의 목소리가 홀 뒷자석에서 자주 들렸다. 이때 오 부총회장은 그들이 부전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아침 일찍 버스를 대절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깊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부전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박 총장이 2006년 3월부터 2023년 4월까지 17년간 담임했던 교회이다. 박 총장은 부임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또 크게 교회를 건축했다. 그동안 안정적으로 목회를 했으며 3년만 있으면 원로목사가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에 순종해 담임자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표차로 총장에 당선됐다. 박 총장이 학교를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자 할 때 교인들은 반대했지만 결국 성숙한 자세로 한국교회와 총신대학을 위해 사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버스를 대절해 올라와 총장이 된 담임목사를 축하했다. 총장 취임식이 진행된 백남조홀은 부전교회와 깊은 인연이 있다. 백남조 장로가 부전교회 장로였기 때문이다. 종합관 구 건물을 헐고 신축 후 홀을 백남조홀로 정했다. 국민일보 2019년 9월 4일자 기사는 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총신대 초석 놓은지 54년 만에 대강당 ‘백남조 기념홀’ 명명 “목사님, 누군가 신학교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텐데 미력하지만 제가 학교 부지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고 백남조(부전교회) 장로가 1964년 노진현(당시 총신대 이사장) 목사에게 전한 이 한마디가 총신대의 초석이 됐다. 이듬해 3월 백 장로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부지 1만8000평(약 5만4000㎡)을 구입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에 헌납했다. 부지 구입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0만원. 사당동 캠퍼스 건축을 위해 당시 노회들이 모았던 헌금이 평균 12만원이었다는 기록에 비춰보면 얼마나 큰 기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부전교회 시무장로로 사역하며 광목을 표백하는 기업을 운영하던 백 장로는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지 않고 공장 안에 있는 작은 공간에 기거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총신대 부지 마련에 사용한 재원은 노모에게 집을 지어드리려고 모았던 돈이었다. 총신대는 3일 백 장로의 헌신을 기리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총신대 구성원들의 영적 산실인 종합관 대강당의 이름을 ‘백남조 기념홀’로 명명(命名)하는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다. 예배에는 백 장로의 후손, 부전교회(박성규 목사) 성도, 총신대 학생들과 교수, 예장합동 총회 임원 등이 참석해 고인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되새겼다. 박성규 목사는 “54년 전 채플실조차 없어 학생들이 복도에서 설교를 들어야 했던 시절, 장로님은 민족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훌륭한 기독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며 결단을 내리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 예배를 계기로 총회와 총신을 넘어 한국교회에 제2, 제3의 백남조 장로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승희 예장합동 총회장은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라’를 주제로 설교했다. 그는 “백 장로는 총신대 부지를 헌납한 후에도 21년간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성지순례여행, 회갑·고희연 등도 마다하며 절약해 오로지 총신이 세워지는 일에 헌신했다”고 말했다. 또 “삶을 던져 하나님을 사랑했던 신앙선배로서 현시대에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정표가 된다”며 “지식 몇 줄을 쌓는 것보다 백 장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갈고닦는 총신인이 되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이재서 총장과 정용덕 법인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총신대 학생들이 백 장로가 보여준 섬김의 리더십을 추구할 것을 요청했다. 백 장로의 장남 백성기(부전교회) 장로는 답사에서 “선친이 목적한 것은 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전도와 선교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며 “소천 31주년 되는 올해 선친의 헌신을 기억해줘 감사하다”고 전했다. 부전교회 백남조 장로가 헌납해 세워진 총신대학의 백남조홀에서 부전교회 6대 담임목사 박성규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고, 부전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참여해 축하해준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끝까지 부전교회 목회를 함께하지 못한 박 총장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총신대학을 위해 크게 물질을 내놓은 백남조 장로의 마음으로 부전교회는 기꺼이 박성규 담임목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백남조홀에서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박 총장은 17년간 부전교회를 성실하게 목회해 큰 부흥을 이뤘듯이 앞으로 총장으로서 총신대학을 크게 발전 시킬 것이다. 그의 삶의 이력을 보면 우리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전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모시기 위한 청빙공고를 냈다. 박성규 담임목사보다 더 좋은 목회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해 본다. 총신대학 설립을 위해 헌금을 드리고 담임목사를 드린 부전교회여, 길이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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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18 08:53
권순웅 총회장,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 시위
권순웅 총회장이 5월 18일 오전 8시 국회의사당 6문 앞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며 반대 이유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는 여러 관계자들이 함께 했고 다수의 언론들이 취재했다. 권 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경제부흥을 이루고 성장했다. 이 배경에 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재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인해 많은 갈등이 있다. 물론 우리는 많은 차별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현재도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으로도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는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독소 조항들이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한 개를 허용하면 이후 더 많은 것들을 허용해야하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애완 동물에 대해 ‘반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결국 동물이 사람을 대체하는 반려자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경에서 금지하는 많은 성적인 것들을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제 손자가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는데 동성애자 선생으로 인해 가치관에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막지 않으면 더 많은 것들을 양보해야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한다. 또한 계속해서 변형된 차별 금지법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도 계속 연구하고 대응하고 있다. 합동측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때 신자들에게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야한다. 현재 총회적으로 샬롬부흥운동을 하면서 성경적으로 샬롬을 정의하고 진행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샬롬은 말씀과의 샬롬이다.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이다. 잘못된 가치관은 샬롬을 가져올 수 없다. 이 세상과 문화에 대해 지혜를 가지고 대처해야한다. 총회는 전도 운동, 세계관 가치관 운동을 실행하고 있다. 저도 한교총 공동대표로서 바른 신학과 정신, 운동으로 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 반대에 진력하고 있다.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다. 거룩한 운동이 일어나야하고 실천해야한다. 올해 퀴어축제는 서울시의 반대에도 강행하겠다고 한다. 퀴어축제는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교회를 해체하는 운동이다. 종교의 자유와 시민의 평등의 자유를 위배하는 것이다. 동성애 운동은 성적취향의 운동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해야하지만 그분들의 위치가 국민과 교회에 악한 영향을 준다면 반대할 수 밖에 없다. 다음세대에게 거룩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 거룩 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서기를 이 법의 반대자들은 원하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들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신고된 1시간 시위 후 권순웅 총회장의 기도로 마쳤다. 악법인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에 온 교회와 교인들의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
김병중(Th.D) 05-16 09:12
총회총무 후보 등록을 바라보며
총회총무 등록이 끝났다. 입후보 등록 첫날인 5월 15일 오전 10시경 고영기 목사가, 같은 날 오전 11시경 박용규 목사가 서류를 접수했다. 총회임원회는 6월 10일 이전까지 후보를 추천해 선관위에 선거를 위탁하고 제108회 총회 현장에서 총대들의 투표로 선출된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지난 3년간 공(功)도 있지만 과(過)도 없지 않은 현 총무와 새로운 총무가 맞붙었다. 과연 총대들의 생각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누가 유리할까를 생각해본다. 결국 총대들은 현 고 총무에 대해 공과의 무게를 잴 것이다.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하여 “새술은 새부대에”의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이제 교계 언론은 총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출마 후보를 검증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취재하면서 얻은 정보와 제보를 통해 후보를 검증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일단은 적잖은 등록비와 담임목사 사임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등록한 두 후보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박수는 여기까지만이다. -
김병중(Th.D) 05-10 16:51
목장기도회-오전예배 및 강의 모음
제60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5월 8일 전체강의1은 김진하 목사의 사회로 진용훈 목사가 기도 후 총신대학교 라영환 교수가 '샬롬부흥'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고 이도형 목사가 특별기도 후 증경총회장 전계헌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5월 9일 둘째날 오전예배는 김한성 목사의 인도로 현상오 장로가 기도 후 박순석 목사가 마 8:1-4을 봉독한 후 문상무 목사가 ‘주님이 원하시는 세 가지’라는 제목으로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와서 자신의 병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믿었고 나음을 받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가지를 원하신다. 첫째, 주님은 나병환자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행복한 삶은 기쁘게 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둘째, 우리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신다. 셋째, 주님은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나병환자는 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상실했다. 갈 5: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다. 믿음으로 살아 삶의 멍에에 메이지 말아야한다”고 설교 후 전 총신대학 이사장 김기철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전체강의 2는 김미열 목사의 사회로 김동관 목사가 기도 후 한기승 목사가 ‘장로교 정치 제도의 원리와 회의법’이란 제목으로 강의했다. 한 목사는 “장로회 정치는 중도의 정치제도이며,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이며 치리권이 있는 당회가 지교회를 주관하도록 하는 정치이다. 성직자들의 직분이 평등하다는 것과 모든 성도는 만인제사장으로서 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하고 그 대표자로 장로를 세워 교회 정치에 참여하는 대의적 제도를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 장로 정치의 원리는 대의 정치의 원리, 자율성의 원리, 연합성의 원리, 평등성의 원리이다. 담임목사는 당회원이 아니고 당회장이다. 노회에서 파송한다. 당회장과 당회원 과반수가 참석해야 당회를 할 수 있다. 지교회에 자치권을 인정해야한다. 투표시 백표는 총 투표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24시간이 지나야 재론동의할 수 있다. 동의는 재청이 있어야 의안이 될 수 있다. 회장에게 비상 정회권이 있다”고 말한 후 권희찬 목사가 특별기도한 후 김정훈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강의3은 이창수 목사의 사회로 원태윤 장로가 기도 후 민찬기 목사가 행 10: 9-16을 본문으로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비전’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편견으로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한다. 물론 미래가 예상한대로 오지는 않지만 미래를 준비한 사람은 충격을 훨씬 덜 받게 되나 위기의 시간이 빨리 오고 있다. 설교의 진부함을 극복해야한다. 교회 생활이 지겹지 않으면 부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담임목사가 합리적인 사고와 리더십을 발휘하면 부흥할 수 있다. 설교가 재밌고 감동이 있어야한다. 억지로 3대지 설교를 하면 안되며 변화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주중앙교회 홍성헌 목사가 특별기도 후 남부전원교회 박춘근 목사의 축도로 강의를 마쳤다. 전체강의4는 허 은 목사의 사회로 박영만 목사가 기도 후 한규삼 목사가 '누가복음과 기도 신학'이란 제목으로 강의 후 홍성현 목사가 특별기도한 후 나학수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전체강의5는 이성화 목사의 사회로 이해중 장로가 기도 후 총신대학교 함영주 교수가 ‘신앙교육의 혁신으로 다음 세대 신앙의 위기를 돌파하라’란 제목으로 “현재 세대가 건강해야 다음세대가 건강해진다. 개인 신앙의 문제, 교회의 상황에 의한 문제로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다. 교육체계의 위기, 교육과정의 위기, 교육자원의 위기로 인해 다음세대 교육 위기가 생긴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담은 그릇은 변해야한다. 다음세대 교육이 정체기에서 재성장, 정체, 쇠토의 갈림길에 있다. 이제 온세대 예배와 무학년제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온라인 오프라인을 포함하는 신앙교육 멀티플레이스를 개발해야한다. 노회의 교육역량을 강화해야한다. 준사역자 교사교육 과정을 개설 및 운영해야한다. 조부모가 손주세대를 교육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들교회 김호겸 목사가 특별기도 후 강진상 목사의 축도로 전체강의를 마쳤다. 전체강의6은 김관선 목사의 사회로 이종철 목사가 기도 후 옥수중앙교회 호용한 목사가 ‘그리스도인과 나눔’이란 제목으로 “부임해서 받은 거금과 심방시 받은 도서비 3,350만원으로 나눔사역을 하고 이후 동네 어르신들에게 우유를 나누는 사역을 하게됐다. 한 교인이 ‘배달의 민족’을 창업하고 이후 우유 배달 일에 헌신했다. 주면 받는 선경의 원리로 나눔 사역을 통해 교회가 더 은혜 충만하게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강의했다. 박재신 목사가 GMS에 대해 보고 후 권규훈 목사가 특별기도 인도한 후 김상현 목사의 축도로 전체강의를 마쳤다. 5월 10일 셋째날 오전예배2는 서현수 목사의 인도로 동현명 장로가 기도 후 배정환 목사가 약 1:5를 봉독한 후 진주성남교회 양대식 목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자’란 제목으로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한 것이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연단하신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겸손해진다. 그래서 문제는 축복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쁨이요 축복이다. 하나님께 문제 해결의 은혜를 구하자. 기도하면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 엎드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 해결받았다. 문제는 기도하라는 싸인이다. 생각, 고민만 하지 말고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한다. 인생은 문제이고 하나님은 대답이다. 다윗은 어려울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해결받았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아뢰야한다. 리더는 문제 해결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를 구하고, 담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고 설교 후 김정설 목사의 축도로 오전예배를 마쳤다. 전체강의7은 신종철 목사의 사회로 김영헌 장로가 기도 후 대구에 소재한 대흥교회 정명철 목사가 ‘다음 세대가 행복한 교회’란 제목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에 행복한 목회,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제자 만드는데 올인하고 절박하게 기도하며 개척교회를 했다. 가정에서도 제자훈련을 해야한다(수직제자훈련). 교회에서도 제자를 키워야한다(수평제자훈련). 전도를 위한 다음 세대 사역의 장을 위해 CMS영어수학학원, 하늘꿈어린이집, 엘음악미술학원 등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토요학교, 여름·겨울 스쿨, ART School을 병행하고 있다. 기독대안학교인 제자비전아카데미를 실시하고 있다. 청년들에게도 공적예배를 철저하게 드리게한다. 또한 새벽예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5가지의 특별기도회 운영, 3년간 집중 기도회를 통해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했다. 한 영혼을 제자 삼는데 전력해야한다”고 말했다. 이형만 목사가 특별기도 후 김상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트랙강의2는 정영교 목사의 사회로 정신길 목사가 기도 후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 대표 이박행 목사가 ‘기후대기 대응을 위한 실천 지침’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해 생태적인 회개를 해야한다. 앞으로 7년 후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놓일 수 있다. 인구, 기후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사상누각이 된다. 문화명령이 제자훈련명령보다 앞서는 것이다. 생태정의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벌어진다. 코로나로 문을 닫은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큰 교회로 옮겨오고 있다. 교회 생태계를 위해 분립개척을 해야하며, 미자랍교회의 자립을 위해 더 큰 관심을 가져야한다. 기성세대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다음세대에게 최악의 환경을 넘겨주게 될 것이다. 복음의 대상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고 모든 피조 세계이며 세상 자원 사용에 절제가 필요하다. 108회 총회 때 환경 부서가 상설기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김중수 목사의 특별기도 후 변충진 목사의 축도로 강의를 마쳤다. -
김병중(Th.D) 05-09 22:46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둘째날 저녁집회
제60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5월 9일 둘째 날 저녁집회는 부서기 김한욱 목사의 인도로 정채혁 장로가 기도 후 피승민 목사가 시 85:6을 봉독한 후 서대문교회 찬양대가 ‘부흥’을 찬양했다. 서대문교회 장봉생 목사가 ‘부흥을 기도하자’란 제목으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게 하는 것이 부흥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전에 죄 가운데서 살려 주셨듯이 다시 살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너무 좋으니까 예배하는 것이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60년만에 다시 첫 기도회로 모였던 충현교회에 모여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70년대에도 한국교회에 부흥이 있었고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 앞에 교회와 국가를 세워 놓는 것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기독 청년들이 고려대에 모여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기도했었다. 이후 기류가 바뀌어 영적 기운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오늘 모여 함께 기도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기도할 때 내 가슴에 불이 붙을 것이다. 내 자신이 먼저 부흥해야한다. 통성기도는 한국 고유의 기도 형태로 선교 초기부터 통성으로 기도해왔다. 간절히 기도하자”고 설교 후 찬양하고 합심해 간절히 기도했다. 특별기도 예천중앙교회 강전우 목사, 행복한교회 이규섭 목사, 태인교회 태준호 장로가 특별기도 후 홍석환 장로가 헌금기도한 후 신델라 교수가 특송했다. 법인경영국장 송기덕 장로가 총회연금에 대해 설명 후 총회총무 고영기 목사가 광고한 후 증경총회장 길자연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둘째날 저녁집회를 마쳤다. 이모저모 사진 -
김병중(Th.D) 05-09 01:01
전국목사장로기도회, 첫째날 저녁집회
제60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5월 8일 첫째날 저녁집회는 회록서기 한기영 목사의 인도로 회계 지동빈 장로가 기도 후 안창현 목사가 왕상 18:30-40을 봉독한 후 사랑스러운교회 찬양대가 ‘여호와의 불’이라는 곡을 찬양했다. 사랑스러운교회 배만석 목사가 ‘여호와의 불’이란 제목으로 “주일학교 이후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 이후 교회가 많이 어려워졌는데 탕자가 돌아올 때 맞아준 아버지같은 역할을 목사가 해야한다. 잃은 양도 있지만 버림받은 양도 있다. 버림받은 양은 목자가 찾지 않는 양이다. 목사와 장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가 되야한다. 교회의 문제는 잃은 양을 찾지 않는 목사에게 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히 여기고 찾아야한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우리는 힘을 다해 예배를 드려야한다. 또한 하나님을 사모해야하며 예배 드리기를 기뻐해야한다. 목사 장로의 헌신이 회복되어야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원 받았다. 선한 목자는 헌신한다.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양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 기도는 생명이고 모든 문제의 답은 기도이다. 목사 장로가 함께 기도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 교인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한다. 여호와의 불에 먼저 목사 장로가 불타야한다”고 설교했다. 제주수양관 건립을 위한 헌금을 부회계 김화중 장로가 헌금기도 후 드리고 새에덴교회 김문기 장로가 특송한 후 전 국정원장 김승규 장로가 ‘저출산대책과 한국교회’란 제목으로 “일본은 1995년부터 저출산 문제에 대해 대책을 모색해 현재 1.3명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출산률은 0.78명이다. 현재 이슬람이 우리나라에 27만명 들어와 있다. 영국은 저출산으로 인해 현재 무슬림 국가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의 동성애자는 55만명이다. 이것이 저출산의 한 이유이다. 급진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비혼주의를 주장한다. 그리고 애완동물을 좋아한다. 현재 우리나라 애완동물은 544만 마리이다. 반려동물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 자유로운 성을 가르친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저출산 해결책은 국가인권위원회를 해체하는 것이다. 교회가 돌봄센터를 운영해야한다. 이스라엘은 출산률이 3.8명이다. 교회는 시127편을 자주 설교해 가정과 출산을 독려해야한다. 2.1명을 낳아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목장기도회 60주년 감사기도 후 기념케잌을 컷팅한 후 주다산교회가 기도를 위한 뮤지컬을 공연했다. 이천은광교회 김상기 목사가 뜨겁게 합심기도회를 인도하고 권순웅 총회장이 목회자 축구대회 우승기를 전달 받은 후 총회총무 고영기 목사가 광고한 후 증경총회장 김선규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첫날 저녁집회를 마쳤다. 기도회 사진 이모저모 -
김병중(Th.D) 05-09 00:37
전국목사장로기도회, 개회예배
제60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샬롬을 누리고 부흥하라!"를 주제로 5월 8일부터 10일까지 충현교회(한규삼 목사 시무)에서 모였다. 개회예배는 서기 고광석 목사의 인도로 부총회장 임영식 장로가 기도 후 김인환 목사가 시 114:1-8을 봉독한 후 충현교회 찬양대가 찬양했다.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샬롬부흥기도’란 제목으로 “애굽은 고대국가 중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칼빈은 그들을 야만 국가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반 기도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애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국가였다. 홍해, 요단강은 하나님의 백성을 막는 반 기도자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산아제한, 막시즘 등이 반 기도자이다. 교회 안에도 반 기도자의 모습이 있다. 샬롬은 주님을 만나 살아가면서,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생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샬롬의 부흥이다. 우리는 샬롬부흥을 위해 기도해야한다. 코로나를 맞아 다중위기의 시대에 107회 총회는 샬롬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한다”고 설교했다. 특별기도 송영식 목사, 윤영민 목사, 오광춘 장로, 김경환 장로가 특별기도 후 증경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축시했다. 시상식 이어서 여러 항목으로 총회장상을 시상 후 총회제주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시무하는 주다산교회에서 1억을 헌금했다. 동서울노회장 박성은 목사가 환영사한 후 충현교회 당회원 일동이 환영인사하고 총회 총무 고영기 목사가 광고 후 직전총회장 배광식 목사의 축도로 개회예배를 마쳤다. 사진 이모저모 -
김병중(Th.D) 04-06 17:03
김영구 장로, 『기업인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비전』 강연
『저출산 극복을 위한 개혁주의 신학포럼』이 4월 6일 오전 10시 30분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 시무)에서 모여 예배하고, 권순웅 총회장의 기조강연, 김영구 장로의 찬조강연 후 6개의 강의가 진행됐다. 김영구 장로(CBMC 중앙회장, 장위제일교회)는 『기업인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비전』이란 제목으로 "기업인으로서 많은 대학과 단체와 MOU를 맺으며 활동하고 있다. 인구는 국력이고 출산은 애국인데 소멸 위기 1순위가 대한민국이라고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문제 연구소가 예측했다. 제 회사의 직원들 중에도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 자기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자녀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 위해, 내 부모만큼 할 자신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출산을 마다하고 있다. 그리고 비혼족도 늘어나고 있다. 세상살이가 치열하고, 자녀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고, 가정불화를 보고 자랐기에 비혼족이 된다는 것이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서는 3R이 필요하다. Reset-잘못된 관행, 생각을 과감히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한다. Remind-새로운 생각을 가져야한다. Revival-꿈을 갖게 해야한다. 그리고 저출산 극복을 위해 교회와 기업, 정부가 협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CBMC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찬조 강연했다. 김영구 장로는 경기노회 소속 장위제일교회 시무장로로서 4월 11일에 있는 정기노회에서 제108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추천될 예정이다. 다음은 강의안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김영구 장로입니다. 저는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으로 섬기고 있으며 (주)엘림비엠에스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입니다. (주)엘림비엠에스는 23년째 전국에 사업장을 두고 있습니다. 매출 500억에 약 2,000여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는 기업이고, 중증 장애인 일터 창출을 위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개설하였으며 매출 1%와 임직원 급여 1%를 선한 이웃이 되자는 사명으로 파키스탄에 선교사 2명을 파송하였고 과부와 고아, 취약계층을 돕는 일에 열심히 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저출산 극복을 위한 기업인의 비전을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총회장 권순웅 목사님과 다음 세대 목회부흥 운동본부 이성화 목사님과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구는 국력이고 출산은 애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합계출산율은 1.59명입니다. OECD에서 한국처럼 합계 출산율이 1명 미만인 회원국은 없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잠정)” 자료를 보면,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아이의 예상 수인 합계출산율이 지난해 0.78명으로 집계됐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동의 꼴찌이자,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한국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내내 OECD에서 출산율 꼴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습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사망원인 1위가 자살로 나타났습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작년 한 해 출생아가 수백 명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가 학령 인구 감소로 다음 달 개교 40년 만에 문을 닫습니다. 화양초등학교는 지난 2011년 이후 소규모 학교(240명 이하)로 운영되다가 지난해 2월 통·폐합이 확정됐습니다. 영농과 산업 생산 중단 위기? 통계청에서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인구는 올해 5200만 명에서 2070년에는 3800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같은 기간 세계 인구는 79억 7000만 명에서 103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문제연구소의 데이비드 콜먼 교수가 한국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라며,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해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저출산 국면 타개를 위해 지난 16년간 약 280조 원의 세금을 쏟아부었습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기업인의 저출산 극복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저출산 무엇이 문제인가?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혼인 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혼인건수는 19만 1690건으로 전년인 2021년 19만 2507건 대비 817건, 0.42% 감소했습니다. 1.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로서, 1) 내 인생으로 살겠다 2) 자유를 실천하겠다 3) 희생하기 싫다 4) 내 부모만큼 할 자신 없다 5) 육아를 하면 모든 일상이 아이 위주... 원하는 삶 아냐! 2. 비혼족: 1) 세상이 너무 치열하고 각박하며 성적 지상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게 싫다 2) 대한민국에서 애를 낳아 초, 중, 고 사교육, 대학 등을 부담할 자신이 없어 선택한 비혼 3) 부모님이 많이 싸우셨다(가정불화) 저출산 극복을 위한 3R *리셋(RESET): 잘못된 관행, 생각을 과감히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1.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과이불개(過而不改)하는 것은 개혁주의 신앙에도 맞지 않습니다. 2. 정부, 교계, 젊은 세대를 책임지고 있는 대학의 잘못된 관행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리마인드(REMININD): 새로운 생각. 1. 잘 될 것이라는 합리적 생각을 부부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 매개체를 가질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줘야 하고 사회 시스템이 부모로 사는 삶과 나 자신의 삶의 밸런스를 맞춰 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에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리마인드 해줘야 합니다. 2. 어느 날 하나가 없어지면 나 혼자된다는 생각과 함께 가족을 더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리바이벌(REVIVAL): 꿈을 갖게 해야 합니다. 1. MZ 세대.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것에 캠퍼스에서부터 소그룹 활동을 통해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리바이벌해야 합니다. 2. 가정마다 식탁 교제를 알아야 하고 식탁 교제를 통해 가정의 소중함과 가정공동체 중요성을 갖게 합니다. 저출산 극복을 위한 비전 1. 종교단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으로 회복. 1) 어린이집. 돌봄센터 운영 2) 자살방지 상담소 운영 3) 결혼이 행복이고, 자녀가 행복이다.(소그룹 활성화) 2. 기업: 1) 육아지원금 제도 2) 사내 어린이집 만들기 3) 자유로운 출퇴근(탄력근무제, 단축근무) 3. 정부: 1) 종교단체 지원금 법안 개정. 년 예산 30조 중 50% 지원 2) 교회 건물 내 돌봄시설 법 개정 3) 육아 지원금 지급 4) 성적 우선주의 교육정책 개선(대학입시. 대학 졸업 후 보장) 4. CBMC 사역 주제: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전 11:1) 1) 캠퍼스 소그룹 모임 활성화 적극 추진(교계캠퍼스-BMS) 2) 사회적 시스템 개선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 3) 창업 선교와 중소기업 일자리 선호도 향상 -
김병중(Th.D) 03-29 13:33
남태섭 목사 관련, 근거 없는 흑색선전 난무
제108회 총회 부총회장 출마 예정자인 남태섭 목사(대구서부교회, 대구노회)에 대한 흑색선전이 도를 넘고 있어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흑색선전은, 고등학교 졸업 건이다. 남태섭 목사는 현풍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의 페이스북에는 대구서부고등학교 졸업으로 기재되어 있었다(현재는 페이스북을 사용하지 않음). 그러자 남태섭 목사에 대한 의혹 제기에 앞장서고 있는 남태영 집사는 “남태섭 담임목사의 고교학력이 위조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대구서부고등학교 졸업으로 기재 되어 있는데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남태섭 목사는 “그 내용은 해킹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태섭 목사의 페이스북을 자세히 살펴봤다면 남태영 집사의 담임목사를 향한 공격이 잘못됐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구서부교회에서 37년째 목회하는 남태섭 목사가 다른 곳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흑색선전은, 건축업자 거액 수수 건이다. 남태영 집사는 3월 28일에 기자들에게 '성명서' 내용을 PDF 파일로 보냈다. 이 성명서에서 "남태섭 목사는 2022년 3월 30일 남태영 집사로부터 울산시 소재 시공사 대표 강0헌으로부터 받은 금품 1억6천8백만원에 대하여 ‘배임수재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이 2023년 3월 23일 대구중부경찰서에서 송치하여 대구지검 2023형제9856호(주임검사 김0주)로 접수된 바, 향후 기소될 가능성이 아주 크므로, 지금 당장 제108회 총회 부총회장 출마 선언을 취소함이 타당하다고 판단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남태섭 목사에 관한 '배임수재'는 대구중부경찰서에서 지난 2022년 9월 2일에 '불송치(혐의없음)' 결정이 내려졌다. '혐의없음 결정'은 증거 부족 또는 법률상 범죄가 성립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이다. 경찰에서 '불송치(혐의없음)'의 처분도 고소(고발)인이 불만족하면 얼마든지 검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하면서 사건을 경찰에서 검찰로 넘기는 행위인 '송치'를 하게 된다. 눈여겨 볼 대목은 '경찰의 불송치(혐의없음)는 고소(고발)인에 의해 검찰 송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면, 검찰 송치가 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건축업자 강0헌도 “남 목사님에게 돈을 줬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일에 대해 남태섭 목사는 "건축업자가 2020년 3월 경에 저를 찾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돈 봉투를 두고 간 것도 사실이다. 건축업자가 제 손에 준 것도 아니고, 나가면서 일방적으로 목양실 테이블 위에 두고 나간 것이다. 봉투가 수표임을 알았더라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텐데 그 봉투가 상품권과 같은 형태였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봉투를 두고 가는데 그를 불러 세워서 봉투의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가 떠난 후 테이블 위에 일방적으로 두고간 봉투가 수표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즉시 건축업자 강O헌에게 전화하여 ‘왜 이런 수표를 두고가서 나를 곤란하게 하느냐? 당장 도로 가져가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차일피일 미뤄졌고 아내는 사무실에서 건축업자가 두고 간 봉투를 보고 ‘불안하다. 빨리 돌려줘야 한다. 우리가 OO에 찾아가서 돌려주자’고 했다. 그런데 제가 OO에 찾아가는 것 자체도 후에 문제가 될 수 있고, 또 업자가 다시 방문하여 회수해 간다고 약속하였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그래서 재차 전화하여 ‘도로 가져간다더니 왜 안 가져 가느냐? 빨리 가져가라’ 했다. 그 업자는 '일정 때문에 방문을 못했다. 빠른 시일 내 찾아가겠다' 고 약속했고, 후일 약속대로 저를 찾아와서 다시 한번 사과 한 후 봉투(1억원 수표와 함께)를 회수해 갔다"고 했다. 그러므로 남태섭 목사가 건축업자에게 거액을 수수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흑색선전으로 봐야할 것이다. 남태섭 목사는 금번 108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 출마 예정자로 다음 주 4월 3일 대구노회에서 추천을 받아야한다. 이를 앞두고 근거없는 거짓 흑색선전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총회와 총회 선거를 어지럽히는 근거없는 이러한 흑색선전에 현혹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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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11-18 18:12
한장총 제40회 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상임회장 천 환 목사 선출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는 11월 18일 오후 2시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제40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임원 선출, 사업계획안 및 예산안을 통과했다. 이번 정기총회에서 한장총 현 상임회장인 정서영 목사를 제40회 대표회장으로 추대했고, 고신 증경총회장인 천 환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추대했다. 개회예배는 상임회장 정서영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권오헌 목사가 기도 후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부터 23절까지를 본문으로 '사방관계신앙'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께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서 성탄절을 맞이하면 후회없이 한해를 마무리 할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성결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선물, 믿음의 선물, 축복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방관계신앙을 잘해야 이러한 복을 받는다"고 설교한 후 증경대표회장 황수원 목사의 축도 후 총무 고영기 목사가 광고한 후 개회예배를 마쳤다. 회무진행 총회는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의 사회로 "하나님의 은혜로 정기총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개회 인사 후 서기 조강신 목사가 회원점명 후 대표회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공동회장 김만형 목사가 개회기도 후 전회의록, 각종회의 보고, 사업 보고는 유인물로 받기로 하고, 강세창 목사가 감사보고, 회계 김충무 장로가 결산보고했다. 선거관리위원장 김종준 목사 사회로 대표회장 및 상임회장 선거를 해 당선증을 수여하고 당선 공포하고, 신구임원을 교체했다. 39회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가 "2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도 한장총을 위해 관심갖고 협력하겠다.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이임사 후 정서영 신임대표회장이 선서하고 "부족한 저를 대표회장으로 추대해 주신 뜻을 잘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취임사 후 신 임원 소개한 후 공로패와 감사패를 증정한 후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을 임명하고, 신임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의 폐회기도로 정기총회를 마쳤다. -
김병중 10-20 07:11
종교개혁 기념, 한영훈 한장총 대표회장 메시지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대표회장이 메시지를 발표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2022년 종교개혁 기념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오는 10월 30일 주일은 루터의 종교개혁 505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505년 전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은 그릇된 전통이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었고, 성경 말씀에 의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믿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의 실천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교회의 개혁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교세감소와 사회적 신뢰가 하락하는 오늘날 개혁교회는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심전력의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중심으로 성경적 교리를 확립하고, 성직 교권주의, 교회 안에 파고든 세속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성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 등 온갖 세속주의를 배격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합시다. 개교회 중심주의와 교회의 분열과 파벌, 부패와 타락이 가져오는 갖가지 참상들을 바로잡고 교회 연합과 일치의 바탕인 공교회성 회복에 힘씁시다. 그리고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서 노력합시다. 교회의 공공성이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더 높은 도덕성으로 떳떳해지며, 자기성찰에 엄격해지고, 더 많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전통을 회복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개혁교회는 분열과 분쟁을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나갈 때에 한국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와 나라의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2022. 10. 18.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 -
김병중 06-06 00:25
강헌식 목사, 기하성 총회장 취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광화문) 제70차 총회장 정경철 목사 이임과 제71차 총회장 강헌식 목사 취임식이 6월 5일 오후 5시 평택순복음교회(강헌식 목사 시무) 대성전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총회 총무 기용성 목사의 인도로 총회 서기 백용기 목사의 기도 후 총회 회계 백 충 목사가 사도행전 1장 6절 부터 11절 까지 봉독한 후 평택순복음교회 찬양대가 찬양했다. 정경철 목사(제70차 총회장)가 '주님의 약속과 성취'란 제목으로 설교 후 총회 재무 김상찬 목사가 헌금기도하고 테너 하만택 집사(유럽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헌금송했다. 2부 이취임식은 기용성 목사의 사회로 교단기 인수인계 후 정경철 목사가 "저는 부족했는데 강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셔서 이제 덕분에 저도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감사드린다. 우리 교단은 성령 교단이다. 원래의 명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이임사하고 강헌식 목사가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겸손히 섬기는 총회장이 되겠다"고 취임사 했다. 취임 총회장 강헌식 목사가 이임 총회장 정경철 목사에게 공로패와 증서를 전달하고 이병옥 목사가 취임 총회장을 소개 후 강헌식 목사에게 취임패를 증정하고 각 기관이 꽃다발을 증정했다. 3부 축하 권면 격려는 총회 전 부총회장 송종철 목사의 사회로 하만택 집사가 축하송을 하고 갈릴리형제회 회장 김삼환 목사가 축하패를 전달하고(대신 전달함) 안산제일교회 원로 고 훈 목사가 축시를 낭송했다. 총회 증경총회장 함동근 목사가 "강헌식 목사님은 탱크 목사님이다. 탱크는 길을 가리지 않고 같은 속도로 간다. 탱크는 지치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다. 강 목사님은 성령이 원동력 되셔서 탱크 목사님이 되셨다. 그 동안 총회 일을 위해 많이 힘쓰셨다. 성령께서 언제나 원동력이 되셔서 앞으로도 강 목사님이 잘 달려가실 것이다. 더 힘을 얻으시고 성령의 도움으로 큰 일 이루시기 바란다"고 격려사 후 강 목사가 금배지를 전달했다. 총회 정책위원장 백종선 목사가 "총회장의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강 목사님을 하나님이 세우셨다. 바울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았듯이 주님만 바라보며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하게 교단 발전의 비전을 이루시기 바란다. 평택순복음교회 교인들은 강 목사님이 총회장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로 밀어드리고 영육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과 물질로 헌신해 주시기 바란다"고 권면하고,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이사장 안준배 목사가 "강 목사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과거 故 한경직 목사님을 도와 수련회를 진행할 때도 시종일관하셨고 목회자로서 부임한 교회에 늘 시종일관하셨다. 강 목사님은 늘 하나님의 부르심, 성령의 감동에 늘 순종하신다. 강 목사님은 1990년 4월에 평택순복음교회에 부임해 2달간 간절히 기도하시며 목회를 시작하셨다. 목사님과 함께 성령 운동을 하면서 미국에서 성회를 하게 됐는데 폭설이 내려 공항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했다. 8 시간 지나 비행기가 이륙했는데 저는 겁이 나 못가겠다고 했는데 강 목사님은 약속했기에 가자고 해서 간 적이 있다. 이처럼 강 목사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강 목사님은 교단 총무로서 교단 일을 하며 예배 마지막 곡으로 신학교 때 은혜 받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을' 늘 부르셨다. 강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지만 변함이 없으시기에 성령운동의 기수로 초지일관, 시종일관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권면했다. 예장통합 증경총회장/명성교회 원로 김삼환 목사가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신다. 준비된 종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강 목사님은 그릇이 깨끗하며 헌신된 정금같은 종이다. 강 목사님으로 인해 교단과 한국교회가 큰 발전을 이룰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을 기다리고 있다. 강 목사님이 그 역활을 하시리라 믿는다"고 영상으로 격려 및 축사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이 철 목사가 "총회장 되신 강 목사님을 축하드린다. 교단장은 한국교회 회복에 대해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한국교회가 어려움 당하는 이유에 대해 조사하면 첫째는 한국교회에 갈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뜨거운 기도의 열정이 사라졌다. 두번째는 희생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기적이 됐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이것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부흥은 어렵다. 강 목사님은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이기에 세움받으셨다고 생각한다. 열정과 희생을 통해 이루실 것이다. 귀한 사명 감당하는 강 목사님과 평택순복음교회가 되시기를 바란다. 성령 운동으로 시작한 감리교와 앞으로 함께 손잡고 한국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협력하기를 바란다"고 축사했다. 경동교회 원로/국민문화재단이사장 박종화 목사가 "아라비아의 한 동네에 아들 셋이 있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양 17마리를 남겼다. 이들의 옆 친구는 가난해 양 한마리 밖에 없었다. 큰 아들은 양의 절반을 상속하고, 둘째는 3/1을, 셋째는 9/1을 상속하라고 했다. 이때 옆집의 양을 한마리 포함해 잘 나누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웃 친구의 양 한 마리가 없으면 양 17마리를 나눌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마리의 은혜로 한 마리는 예수님이시다. 강 목사님도 예수님처럼 한 마리 양이 되시기 바란다. 오늘은 오순절 주일인데 강 목사님이 성령의 종이 되시기 바란다"고 축사하고, 오세아니아기하성 총회장 홍요셉 목사가 "강 목사님과 오래 교제해 왔다. 목사님은 VIP(Vision, Inspiration, Passion) 탱크이다. 여호수아와 같은 대장군이시다. 힘과 열정으로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셔서 어디에서도 이기게 하셨듯이 강 목사님을 통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믿는다. 또한 선구자, 선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실 줄로 믿는다"고 축사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 장기철 목사가 "강 목사님은 종의 자세로 왕의 권세를 사용하실 분이시다. 섬기는 종이 되실 것이다. 강 목사님께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21대 대표회장을 역임하셨다. 그때 난감한 상황에서도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셨다. 성령의 일하게 하심을 따라 단체를 이끌어 가셨다. 그래서 평화롭게 감당하셨다. 총회장으로 큰 일 하실 것이라 기대하며 축하드린다"고 축사하고,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가 "강 목사님은 부드럽고 온유하시나 포스가 있으시다. 보통 분이 아니시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으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권능이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성령의 권능으로 탱크처럼 쓰임 받으시기 바란다. 사람을 얻는 자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무너진다. 강 목사님을 통해 교단이 크게 흥왕하시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평택시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신용현 목사가 "고전15:10에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으로 총회장이 되셨기에 축하드린다. 강 목사님과 평택에서 30년을 함께 지냈다. 강 목사님은 긍정적이며 탁월하신 분이시다. 이처럼 좋은 지도자를 총회장으로 세운 교단에도 축하드린다"고 축사 후 평택시 정장선 시장이 "평택시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바이든이 평택 미군 기지를 방문했다. 이러한 때 강 목사님이 총회장이 되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든 평택 시민과 함께 총회장 되신 강 목사님을 축하드린다. 앞으로 성공하는 총회장 되시기를 바라며 많이 협력해 드리겠다"고 축사했다. 다음은 영상 축사이다. 전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취임을 축하드린다. 강 목사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으로 지금은 애국운동에 앞장서고 계신다. 강 목사님과 교단이 함께 '예수한국 복음통일'에 큰 기여를 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평택순복음교회도 더 크게 성장해 큰 역할 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세계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김상복 목사가 "총회장 되심 축하드린다. 교단 총무로 그동안 많은 수고를 하셨다. 평택 성시화, 경기도 성시화 운동에도 많은 일 하셨다. 하나님께서 기회 주셔서 총회장이 되셨는데 잘 준비된 총회장이시니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으로 교단이 크게 발전될 줄 믿고 축하드린다"고 축사하고, 기하성여의도 대표총회장 이영훈 목사가 "코로나 여파로 한국교회가 어려웠다. 이제 코로나가 끝나는 시점에 재정비하고 새로운 역사를 이끄실 강 목사님을 축하드린다. 목회에 큰 부흥의 역사를 이루신 목사님을 통해 승리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축사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고명진 목사가 "한 사람의 지도력이 한 시대를 좌우한다. 강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단에 선한 영향력이 있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기하성 신수동 총회장 우시홍 목사가 "총회장 되심을 축하드린다. 강 목사님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교회를 성장 시키셨고, 부흥사의 큰 일을 감당하셨다. 총회장으로 교단의 위상을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축사하고, 미하나님의성회 한국 총회장 김웅철 목사가 "강 목사님의 총회장 되심을 축하드린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귀하게 쓰시고자 큰 일꾼으로 세우셨다. 모든 임원, 회원들이 한 마음 되어 교단이 든든히 세워지기 바란다. 또한 큰 일 하시는 담임목사님과 협력해 큰 일 감당하는 평택순복음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했다. 미하나님의성회 한미 총회장 이병진 목사가 "강 목사님은 선한 목회자이시며 탁월한 지도자로서 세계선교에 많은 수고를 하시고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일하셨다. 강 목사님을 통해 교단이 발전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예수마을교회 담임 장학일 목사가 "강 목사님은 끈기와 열정이 있으신 분이시다. 교단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총회장이 되셨다. 앞으로 잘 하실 것이기에 축하받아 마땅하시다. 교단을 위해 큰 일을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시기 바란다"고 축사하고, 대전중문교회 담임 장경동 목사가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란다. 마지막 때이기에 성령의 충만으로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된다. 강 목사님의 리더십으로 교회와 교단에 크게 쓰임 받으시기 바란다"고 축사했다. 평택순복음교회 장로회장 이창근 장로가 광고한 후 수원순복음교회 원로 이재창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총회장 이취임식을 마쳤다. -
김병중 03-16 23:09
'성령님과 함께 특별기도회 및 대토론회' 개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신수동측) '성령님과 함께 특별기도회 및 대토론회'가 청주에 소재한 순복음청원진주초대교회(담임 박성하 목사)에서 11월 15일 오전 10시에 있었다. 오전10시부터 11시까지 제70-3회 정기실행위원회로 모였다. 허중범 목사(제1부총회장)의 사회로 이경은 목사(부총회장)가 기도한 후 시편18편 1-3절을 본문으로 남종성 목사(증경총회장)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오전11시부터는 행정세미나와 교회세법세미나를 이기봉 목사(부총회장)가 사회하고 김행형 세무사가 강의했다. 오후1시부터는 행정, 조직, 재정, 복지, 학교법인에 대한 대토론회가 우시홍 목사(총무)의 사회로 회원들이 질의하고 강희욱 목사(총회장)가 답변했다. 오후 2시 30분 부터는 특별기도회를 전태식 목사(부총회장)가 사회하고 김낙귀 목사(순복음영성훈련원 원장)가 요한복음6장 67절을 본문으로 '너희도 가려느냐'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합심 기도 후 서안식 목사(증경총회장)의 축도로 마쳤다. 이날 모임을 준비한 순복음청원진주초대교회에서는 코로나 방역을 위해 참석자들의 코로나 접종 확인, 체온 체크, 마스크 및 일회용 장갑 착용 등 만전을 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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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5 18:06
박성규 박사, 총신대학교 22대 총장 취임
총신대학교 총장 이취임 감사예배 및 이취임식이 5월 25일 오전 11시 총신대학교 종합관 백남조홀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법인이사장 화종부 목사의 인도로 총회서기 고광석 목사가 기도 후 대학 부총장 손병덕교수가 히 13:5-9을 봉독한 후 교회음악과 전체 학우가 ‘거룩한 성’을 찬양했다.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가 ‘총신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란 제목으로 “제 삶의 중심에 총신이 있다. 저는 1977년에 총신에 입학했다. 지난 4년간 총신이 과도기일 때 수고한 이재서 총장에게 감사한다.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 새로운 총장이 선출되도록 수고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린다. 과거 총신이 어려울 때 선배들이 많은 수고를 했다. 이제 박성규 총장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총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총신에 입학 후 주님과 더 친밀해졌는가? 손양원 목사처럼 예수 중독자가 되어야한다.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혼탁한 시대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야한다. 신앙이 삶의 고백으로 나타나야한다. 총신은 돈과 정치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돈이 필요하나 노예가 되지 말고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한다.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일어나 걸어야한다. 성도들의 생명 근거는 예수님이시다”라고 뜨겁게 설교했다. 이어 증경총회장 배광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이취임식은 대학 부총장 손병덕 교수의 사회로 내빈 소개 후 기획혁신본부장 김희석 교수가 이임총장 사역을 보고한 후 이임총장 이재서 목사가 “지난 4년을 돌아보니 아쉬움도 있고 보람도 있는데 훌륭한 박성규 박사가 총장으로 세워지는 일에 미력을 보탠 것이 감사하다”고 고 이임사하고 법인이사장 화종부 목사가 공로패를 증정했다. 이어 법인이사회 서기 류명렬 목사가 총장선출 경과를 보고 후 신학대학원 부총장·신학대학원장 김상훈 교수가 취임총장의 약력을 보고한 후 취임 서약하고 취임패를 증정한 후 총장 박성규 박사가 “합동교단 총회의 직할대학으로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며, 세상을 변혁하는 실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쓰겠다”며 "첫째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학교가 되는 비전, 둘째 신앙의 부흥을 경험하는 학교가 되는 비전, 셋째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며 개혁신앙으로 사는 비전, 넷째 세상을 변혁시키는 실력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는 비전, 끝으로 글로컬(glocal, global과 local의 합성어) 사회를 잘 돌보는 예수님의 심장과 손을 가지는 비전" 등 5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이어 총신대학교 제12대 학장 정성구 박사가 격려사를, 증경총회장·법인이사 소강석 목사와 피터 릴 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총장이 영상으로 격려사를 했다. 축사는 이수진 국회의원(동작구), 나경원 전 원내대표, 박일하 동작구청장, 총신대 신대원 총동창회장 황재열 목사, 총신대 총동창회장 김미열 목사가 했다. 또한 박성규 총장과 동기인 총신대 신대원 제80회 동창회장 이종석 목사가 학교발전기금 1억 2천만원을 전달했다. 이어 소프라노 김수진 교수 외 6명이 축가 후 법인국장 권주식 목사가 광고한 후 총회 교회자립개발원 이사장 이현국 목사의 기도로 마쳤다. 이어 열린 이임 및 취임 리셉션은 장로부총회장 임영식 장로가 기도 후 총장 및 내빈 대표의 케이크 커팅으로 진행됐다. 22대 총장 박성규 목사 취임사 “총신, 시대의 희망 되겠습니다” 부족한 종을 모교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특히 지난 4년간 학교를 크게 발전시켜 오신 이재서 총장님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총장님께서 이루신 토대 위에 학교를 더욱 발전시켜 나아가겠습니다. 총장님의 앞날에 하나님의 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소중한 순서를 맡아 수고하여 주신 분들과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내외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른 아침 부산에서 출발하여 와주신 사랑하는 부전교회 성도님들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임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저의 신학대학원 동기이신 80회 목사님들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동기 목사님들까지 동참하여 큰 발전기금을 전달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동작구민 중 어려운 분들을 위한 쌀을 기부해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자랑스러운 총신대학교 교직원 여러분과 학우 여러분들이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친애하는 교직원 여러분,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고도로 발달하는 과학 문명의 시대, 저 출생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라는 여러 위기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학교육협의회가 주관하는 대학기관인증평가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주관하는 교원양성평가도 잘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제시하는 비전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위기의 파고를 헤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비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학교가 되는 비전입니다. 성경의 핵심 곧 개혁신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시며 인간은 그 왕께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종으로 삽시다. 그러면 우리 학교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장 좋은 기독교 명문 대학이요 신학대학원이 될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부흥을 경험하는 학교가 되는 비전입니다. 대학은 지성의 요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대학에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부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도 살리시는 부흥의 능력을 경험하면 그 어떤 인생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도 해결하는 인재들이 우리 대학과 신대원을 통해 배출될 것입니다. 셋째,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굳게 지키며 개혁신앙으로 사는 비전입니다. 총회의 직할대학으로서 총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겠습니다. 개혁신학은 성경의 절대 무오,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통치,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성화 등을 믿는 가장 성경적 신학입니다. 1901년 사무엘 마펫 선교사님이 우리 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이후 지금까지 지켜온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신학입니다. 이 개혁신학을 확고히 지키겠습니다. 나아가 개혁신학대로 사는 개혁신앙을 확산시키겠습니다. 개혁신학의 요체인 하나님의 통치와 성화를 경험하는 학교구성원이 된다면 세상의 대학과는 차원이 다른 성숙한 인격을 가진 구성원으로 가득 찬 학교가 될 것입니다. 넷째, 세상을 변혁시키는 실력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는 비전입니다. 개혁주의는 교회 안에만 머무는 신학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3대 신학자의 한 분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처럼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 중에 그리스도께서 ‘내것이야’라고 외치지 않는 곳은 단 1 평방인치도 없습니다” 변혁은 다른 말로 건강하게 살리는 것입니다.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우리 학교 출신이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목사님입니다. 남강 이승훈 장로님도 1917년 1년간 우리 신학교에서 수학하셨습니다. 개혁신학은 교회가 게토가 아니라, 세상 속에 스며 들어가는 빛처럼,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가는 소금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살리는 신학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장이 필요로 하는 실력을 갖춘 융복합 인재를 배출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닌, 세상을 살리기 위한 융복합 인재를 배출해야 합니다. 끝으로 글로컬 사회를 잘 돌보는 예수님의 심장과 손을 가지는 비전입니다. 가깝게는 동작구민과 서울 시민, 나아가 우리 겨레와 지구촌 이웃들을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랑하며 예수님의 손으로 섬기는 우리 학교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학교의 가장 큰 가능성과 희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유능할 수는 있지만 전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고자만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상 다섯 가지 비전을 이루어 나간다면 사랑하는 총신대학교는 이 시대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총신대학교의 왕이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
김병중(Th.D) 05-25 17:06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중앙위원회 개최
전국주일학교연합회(회장 이해중 장로) 제68회기 2차 중앙위원회가 5월 25일 오후 1시 면목중앙교회(양우석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회장 이해중 장로의 인도로 명예회장 손근식 장로의 기도 후 부서기 이형우 장로가 수 6:1-3을 봉독한 후 교육부장 노경수 목사가 ‘장벽,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란 제목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문제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나놓고 보면 문제가 별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대는 건물 보다 다음세대를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하나님이 하시면 되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닫힌 문만 보지 말고 열쇠를 갖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도우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나아가자”고 설교했다. 찬양사역자 이경미 사모가 특송 후 부회계 김충길 장로가 기도한 후 헌금하고 예능분과가 특송 후 증경회장 신신우 장로가 “내 앞의 장벽인 고정관념을 깨야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한다. 금식기도하며 남은 회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회기를 준비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한 후, 주증총무 박인규 장로가 “주교가 나날이 부흥하기를 원하며 작지만 마음을 담아 격려금을 드린다”고 말하고 격려금을 전달 후 수도권협의회장 박찬성 집사가 환영사한 후 면목중앙교회 담임 양우석 목사가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환영인사했다. 회장 이해중 장로가 면목중앙교회와 환영위원장에게 감사패를 증정 후 총무 박종일 장로가 광고 한 후 수도노회 노회장 맹일형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의는 회장 이해중 장로의 사회로 수석부회장 김방훈 장로가 기도 후 서기 이병하 장로가 48개 노회, 회원 91명이 출석한 것을 보고한 후 개회하여 “남은 기간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고 이해중 장로가 인사하고 회의록서기 이광재 장로의 전회의록 낭독, 총무 박종일 장로의 사업보고, 회계 김명식 장로의 회계보고는 유인물로 받기로 했다. 안건토의 시간에 ▲해외 어린이 성경학교의 건은 실무임원회에 위임키로 허락 ▲공천위원회의 건은 실무임원회에 위임키로 허락 ▲제69회 정기총회의 건은 보고로 받다 ▲부울경·호남협의회 간담회 결과는 보고로 받다 ▲교사 및 지도자 해외 수양회 건은 총 209명이 등록한 것으로 보고 받다 ▲불가리아 어린이 성경학교·교사 강습회 및 선교지 방문 건은 보고로 받다 ▲회칙개정위원 선정의 건은 회장 자벽으로 위원 선정 ▲기타안건으로 ‘교사 근속 시상시 실사해서 잡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논의했다. 협의회장 및 중앙위원 상견례 이어 협의회장 및 중앙위원 상견례 후 전국원로장로회 정훈길 장로가 인사한 후 총무 박종일 장로가 광고하고 이충만 장로의 기도로 은혜롭게 폐회했다. -
김병중(Th.D) 05-24 19:19
본월드미션 선교동행예배-서상진·조봉경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월드미션이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5월 24일 오전 11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찬양사역자 강 찬 목사가 인도하는 경배와 찬양 후 브라질 유기원 선교사가 기도한 후 학생들로 구성된 노아 찬양댄스팀이 특순을 했다. 대만에서 선교 사역하는 서상진, 조봉경 선교사 부부가 인사 후 조봉경 선교사가 엡 5:18-21을 본문으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교회를 개척해 사역하고 있다. 전기료가 없었는데 대신 내주고, 밥이 떨어지면 어느 자매가 와서 먹을 것을 전달해 주기도 해 어려울 때 기도하면 채워진다는 것을 체험했다. 교회에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귀국하며 많은 헌금을 남겨주고 가기도했다. 현지에 먀오리교회를 개척했는데 잘 유지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 은혜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선교 초기 몸도 아프고, 말도 통하지 않아 어려웠었다. 이때 성령충만하라는 말을 듣고 도전 받아 34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교우들이 몸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 하고 있으며 교인들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변화되어 가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때로 낙심도 되지만 성령의 충만을 통해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간증했다. 이어 서상진 선교사가 "대만 선교는 180년이 됐지만 기독교는 미미한데 대만 교역자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해 성령의 충만함과 기도를 사모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이 대만교회에도 있기를 그들이 갈망하게 됐다. 이후 대만교회는 부흥했다. 현재 5,000개의 교회가 있고, 신자 비율이 8-10%가 됐다. 98%가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성령충만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다. 선교사역하면서 교회를 찾아온 알콜중독자, 척추병자 등을 위해 기도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선교를 더 많이 해야 부흥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교회에는 선교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본월드미션이 선교사들을 섬기는 귀한 사역을 해 주어 감사하다. 앞으로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위해 이사장과 직원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간증 후 서상진 선교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치고, 본월드미션에서 대접하는 고기를 배불리 먹고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
김병중(Th.D) 05-21 21:11
GEM·GVCS, 분당갈보리교회와 교육선교협정서 체결
사)글로벌선진교육(Global Education Ministry, GEM)은 지난 5월 16일(화)에 갈보리교회 목양실에서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한 교육 선교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는 협정식을 체결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가 기독교 대안학교로서 학력 인정을 받는 ‘글로벌선진학교’는 2003년에 설립된 ‘음성캠퍼스’, 2011년에 설립된 ‘문경캠퍼스’, 2015년에 설립된 ‘미국(메릴랜드)캠퍼스’ 그리고 2020년에 설립된 ‘세종창의캠퍼스’ 등 4개의 캠퍼스를 운영하며 매년 100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글로벌인재 역량교육’과 ‘STEAM 창의융합교육’, ‘뿌리깊은 영성교육’, ‘지정의영(知情意靈) 균형교육’, ‘인간관계 역량 및 근성교육’ 등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매년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아시아권 명문대학에 학생들을 장학생으로 진출시키고 있다. 분당갈보리교회(담임목사 이웅조)는 다양한 전문 선교단체들과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교회(Local-church)와 선교단체(Para-church)의 조화를 이루는 모범교회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교회 직영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영어 프리스쿨과, 초등과정의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번 GEM·GVCS와의 교육선교 협정을 통하여 수준 높은 중고등학교 설립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향후 양 기관은 중고등학교 설립에 따른 전문기획팀(TF)을 구성하여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1~2년 이내에 탁월한 크리스천 글로벌인재 양성을 위한 본격적인 중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해 갈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2018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의 재 복음화에 대한 각성과 이를 위한 다음 세대의 유럽 선교 비전을 심어주기 위하여 2018 유럽교육대회(Global Education Fair in Europe)를 개최한 바 있는 사)글로벌선진교육은, 이번 6월 26~30일까지 중미의 고통과 신음을 현장에서 듣도록 기회를 주고 현지 교사 1,000여 명을 초청하여 STEAM 융합교육을 연수시키고 영적인 도전을 주고 순수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매일 저녁 KC-Pop 복음 전도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4박 5일 동안 교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하는 데 따르는 비용을 후원할 후원자를 찾고 있다. STEAM 융합교육과 다양한 교육연수를 시키게 되는데 이들을 도울 1,000명의 재정후원자를 찾고 있다. (후원문의: 070-4422-6284) -
김병중(Th.D) 05-20 18:12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 설립, 양호영 대표회장 · 현광욱 상임회장 선출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가 5월 20일 오후 2시 남현교회(윤경배 목사 시무)에서 설립총회로 모여 양호영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현광욱 장로를 상임회장으로 선출했다. 다음은 초대 대표회장 양호영 장로의 취임사 전문이다. 부족한 저를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 초대 대표회장으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 설립 총회를 축하하기 위해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드린 고백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를 밝히 드러내는 장로회가 되기를 힘쓰겠습니다. 용납하고, 배려하고, 격려하며, 기도하며, 선교하는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서북지역노회협의회와 뜻을 같이하여 장로의 권익을 찾으며 장로의 위상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울, 서북지역장로회 연합회와 함께 서로 상생하기 위해 협력하여 선한 사역을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준비위원장 주홍동 장로의 인도로 현광욱 장로가 기도 후 주상환 장로가 시 137:1-7을 봉독한 후 CTS 장로합창단이 찬양했다. 서북지역노회협의회 대표회장 김상윤 목사가 '승리의 그날'이란 제목으로 "이스라엘이 폐망해 바벨론에서 당한 고통을 기록한 시가 바로 시 137이다. 이스라엘이 넘어졌듯이 우리도 많은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그동안 서울지역노회장로회와 함께 잘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 더 발전하기 위해 서북지역노회장로협의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첫째,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한다. 본분을 잃어버리면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정체성에 맞게끔 지역 교회를 섬기고, 총회를 섬겨야한다. 둘째, 가치성을 잃으면 안된다. 목적에 맞는 역할을 해야한다. 이 협의회에 관계된 분들을 믿기에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셋째, 사명성을 잃으면 안된다. 그래야 승리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 협의회가 모두의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헤세드중창단이 특송 후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실무회장 변충진 목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장로증경상임회장 이재천 장로가 '총회와 총신을 위하여',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실무회장 황석산 목사가 '서북지역노회협의회와 장로회를 위하여', 장로증경상임회장 최윤진 장로가 '한국교회와 북한교회를 위하여',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상임총무 이영민 장로가 'GMS와 해외선교를 위하여' 특별기도했다. 이어 손원재 장로의 광고 후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김철중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축하는 김덕수 장로가 기도 후 김기현 장로가 "용납하라! 배려하라! 격려하라! 선교하라! 기도하라!"는 서북지역장로협의회 사명 고백 후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최재우 목사가 "이제 때가 되어 42개 노회로 서북지역노회 장로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준비위원들이 큰 수고를 했다. 단합해 은혜로운 협의회를 만들어가기 바란다. 각 교회 목사님과 뜻을 같이해 대외활동에 큰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고,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김응선 목사가 "설립을 축하드린다. 잘 연합하기 바란다. 늦게 출발하지만 이 협의회가 크게 쓰임 받기 바란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보기에 좋은 협의회가 되기 바란다"고,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김봉용 목사가 "서북지역은 전국구이다. 진작에 조직이 됐어야했다. 이제 출발하지만 남북통일될 때 무너진 제단을 재건하도록 충성하자"고,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이춘복 목사가 "저희 교회에서 창립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협의회 고백대로 하시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고 격려사했다. 축사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실무회장 이종철 목사가 "선배를 존경하고 따르며 동료들은 격려하면서 아름다운 협의회를 만들기 바란다"고, 총회 부서기 김한욱 목사가 "설립총회를 축하드린다!"고, 경북교직자협의회 회장 강전우 목사가 "서북지역노회에서 총회의 많은 일을 하기에 축하드린다. 복된 역사가 있을 것이기에 축하드린다"고, 전국남전도회 증경회장 양성수 장로가 "설립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지만 이렇게 창립해 축하드린다. 총회를 위해 큰 역할 하기 바란다"고, 호남지역장로회 명예회장 오광춘 장로가 "칭찬 받으며 서로 섬기는 협의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호남 중부지역장로회 회장 홍춘희 장로가 "협의회가 큰 일 하시기 바라고 신임회장 양호영 장로를 축하드린다"고 축사했다. 서북지역노회협의회 부서기 여성구 목사가 임원 명단을 보고하고 회원들의 동의 재청 후 대표회장 양호영 장로가 취임사한 후 공로패를 전달하고, 손원재 신임총무가 광고 후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증경회장 김동관 목사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
김병중(Th.D) 05-18 13:51
미목,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 포럼 개최
미래목회포럼(이하, 미목)이 주최하는 제19-3차 정기포럼이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5월 18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있었다. 청년선교본부장 조희완 목사가 포럼좌장을 하고, 이성준 목사가 개회기도 후 미목 대표 이동규 목사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동독과 서독의 모습이 매우 달랐다. 통일 후에도 많은 반목이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이 과정이 30년이나 걸렸다. 요즘 세대는 통일에 많은 관심이 없다.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온전한 평화인 샬롬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교회가 통일운동에 앞서 가기를 바란다”고 인사말했다. 첫 번째 발제는, 자유통일문화원 원장 이애란 박사가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북한은 300만이 굶어 죽어도 아무 소요 없이 나름 평화로웠다. 지금 코로나 봉쇄로 더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반면 남한은 늘 소요로 난리 상황이다. 과연 남북이 평화로울 수 있을까? 탈북신분자로서 북한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해 굳이 탈북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당시 북한이 망하면 사회주의가 망하고 자본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끌려 갈 위기가 있어 결국 탈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남한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그 당시는 김대중 정부였었다. 10년 걸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했다. 그런데 북한의 김일성 왕조가 있는 한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북한 주민들 스스로 김일성 왕조를 제거하는 것이 통일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26년간 남한에 살면서 자유경제 시장주의가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제도를 채택하면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35,000명의 탈북자가 남한에 살고 있다. 최근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을 공개처형했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기독교를 믿어 잘 산다고 생각한다. 탈북자를 통일의 역군으로 교회가 키워야한다. 교회가 통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발제했다. 패널 지도위원 최이우 목사가 이 박사의 발제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지만 눈에 띄는 열매가 없다해도 평화통일은 ‘진행중’이며 ‘공사중’인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와 헌신을 보시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우리의 모든 지각을 뛰어넘어’ 일하고 계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발제는, 정책자문위원 이용희 교수가 ‘북한의 영적 이해와 복음통일’이란 제목으로 “북한은 김일성을 신으로 믿고 있으며 우상화에 몰두하고 있다. 김정일도 하느님으로 믿는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인데 김일성을 신으로 믿고 있다. 세습은 계급 개념이기에 공산주의에서는 세습이 없다. 그러나 북한은 봉건왕조, 신정국가이다. 북한은 김일성 주체사상교 집단이다. 북한이 자유, 언론 등에서 세계적으로 최악이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마음을 찢고 기도해야한다. 누가 북한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현재 북한 동포 직접 돕기 운동을 하고 있으며, 북한구원 한끼 금식기도운동을 하고 있다. 동서독 자유평화통일 기도운동으로 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러므로 교회마다 통일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한다. 그때 하나님의 때에 북한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발제했다. 부대표 황덕영 목사가 이 교수의 발제에 대해 “통일이 어렵다는 생각이 통일에 대한 장애물이다. 강도 만난 자와 같은 북한을 지혜롭게 잘 살펴야한다.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한국교회의 사명이다. 직간접 돕기 사역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한다. 한국교회가 통일의 피스메이커가 되야한다. 통일 이후 갈등을 잘 해결해 다시 나누자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민족교회를 통해 배워야한다. 지역사회, 다문화를 품어 지역친화적인 교회로 변신해 통일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 북한은 계급사회이기에 교회 직분이 계급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기에 조심해야한다. 통일을 염두에 둔 교육과 사역을 진행해야 통일이 될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미목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한국교회에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로 포럼을 준비했다. 발표하시고 참석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자문위원 이성철 장로의 기도로 포럼을 마치고 박병득 사무총장의 광고로 모든 시간을 마쳤다. -
김병중(Th.D) 05-18 00:10
『교육정책 심포지엄』 개최
총회미래정책전략개발위원회(위원장 장봉생 목사)가 주최한 『교육정책 심포지엄』이 5월 18일 오후 2시 혜성교회 언더우드기념관(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모여 이기룡 박사와 오경환 교수 그리고 함영주 교수가 발제했다. 다음은 위원장 장봉생 목사의 환영사 전문이다. "한국교회 미래교육의 초석을 마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인구절벽 시대, 저출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자연스레 주일학교 학생 수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습니 다. 숫자의 감소보다 더욱 큰 문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 사사기 시대가 바로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현 주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부적으로도 한국교회의 부흥은 끝났다고 말하고 있으며,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은 타락해도 너무 타락했습니다. 피자 한 판 값으로 청소년이 30분이면 마약을 구입할 수 있는 환경, 길거리에서 청소년들에게 집중력을 높여준다며 속여 무료로 마약을 제공하는 환경. 마약청정국은 이미 옛말이 되었고, 왕따, 일진 문화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으며, 공부만 잘하면 인성은 좀 나빠도 된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때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음세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육이나 환경정책 같은 비교적 큰 사안에서 먼 훗날까지 고려하여 세우는 계획을 뜻합니다. 각개전투로는 역부족입니다.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상비부(교육부, 면려부, 학생지도부)와 기관(교육개발원, 다음세대목회부흥운동본부), 속회(주일학교연합회), 총회본부(교육국)가 모이는 플랫폼을 마련하였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각계각층의 교육 전문가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아무쪼록 금번 심포지엄을 통하여 현 총회교육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비전을 세우며 전략을 수립하고 대책을 제시하여 한국교회 미래교육의 초석을 마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길 소원하며, 세속화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는 심정으로 심포지엄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2부 심포지엄은 서기 정명호 목사의 사회로 발제 1은 고신총회 교육원장 이기룡 박사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총회교육정책의 방향 - 예장고신 총회교육원을 중심으로’란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위기가 기회가 되게 하려면 어떤 변화를 선택해야 하는가? 코로나 후 1)세대급감-학령인구의 감소, 주일학교의 감소, 최근 2년 사이 주일학교가 급감했다. 30-40대 부모가 교회를 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2)교사와 사역자의 문제-교사의 노령화, 신학교의 위기이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교사가 없어진다. 교회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앞으로 교사가 되고 목회자가 된다. 3)가정, 공동체의 변화-가정 공동체의 인식 변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다음세대 교육방향은 부모교육이다. 총회교육정책 네 가지 관점은 1)이념형(과거중심), 현실형(현실중심), 이상형(미래중심), 통합형(전세대중심)이다. 고신은 5년 단위로 총회교육정책서를 발간해 총회의 중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교육에 반영한다. 3년 단위로 전국단위 센서스를 조사한다. 총회의 현실과 필요를 돌아보고 중장기적인 계획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 이후 매년 조사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단기계획으로 1년 단위로 교육정책 세미나를 한다. 기타 총회교육정책에 따른 총회보고서를 기획한다. 고신총회는 유일하게 전학년 큐티교재를 발간하고 있다. 그리고 교사 평신도 리더십 개발을 하고 있다. 총회교사대학 온라인 강의도 실시하며 총회성경대학을 온라인 강의로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교회학교 교재 개발에 힘쓰고 있다(킹덤 스토리 등). 출판사역을 통해 매년 50종 이상의 책을 보급하고 있으며 교육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평가해 보면 정책이 안정되고 현장성이 있고 정책이 실재하다. 지난 70년간 고신총회는 단 한번도 교회교육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제 교단간에 연합해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제 2는 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오경환 교수가 ‘해외 교단 교육정책 모델-미국 남침례교(SBC 교단)를 중심으로’란 주제로 발제했다. 오 교수는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하 SBC)에서 라이프웨이가 교육을 담당하는데 연구를 수행하고 통계를 수집하여 교회를 돕는 것까지 하고 있다. 교단은 교육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필요에 반응해 많은 예산을 통해 운영했다.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는 라이프웨이를 통한 커리큘럼 및 교회 교육 자료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현재 교회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SBC의 교육정책 평가 및 의의는, ■ SBC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핵심 사역으로 인식하고 동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교단 내 모든 기관과 위원회가 함께 협력하여 사역을 실행하고 있음. 교단에 소속된 지역교회는 회중 정치의 형태로 자치권과 자결권을 행사하며 주 대회와 전국 대회(총회)에 자발적 참여를 하며 협력하고 있는 형태임 ■ SBC는 설립 초기부터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는 교육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 긴급성과 교회의 교육과 양육에 대한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음. 이에 따라 상당한 재정을 투자하였으며 이는 지난 100여년 이상 동안 교단 내 교회와 교회의 교육 사역이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매우 유의미한 결과로 나타났음 ■ SBC에 속한 모든 교회는 라이프웨이를 통한 커리큘럼 및 교회 교육 자료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음. 라이프웨이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교단의 직접적인 관심과 적극적 재정 지원이 유효하였음. 이제는 라이프웨이가 재정을 포함한 교단의 다양한 사역을 실제적으로 지원하는 유의미한 효과를 만들어 냈음 ■ 라이프웨이는 SBC 교단 내 기관으로 교단의 지도 및 관리·감독을 받고 있으나 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 시사점 및 정책 제언으로는, ■ 교단 내의 교육의 목적과 내용, 범위와 수준을 유관 기관들이 함께 논의하고 동의하여 협력할 수 있는 방안과 기반·기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정과 구조가 필요함. 교단 내 현재 교회의 교육의 필요성, 중요성, 긴급성에 대해 인지하고 이를 적절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통합 기관 혹은 협력 기관이 필요함 ■ 라이프웨이의 모델을 우리 교단에 당장 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라이프웨이 모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장점 및 특징에 대해 파악하고 이를 현 우리 교단의 맥락과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고 이를 향후 구체화할 수 있는 교육 중심의 통합 기관을 고려해 볼 수 있음 ■ SBC와 라이프웨이와의 관계의 모델을 토대로 하여 교단의 관리 및 감독과 지도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권한을 가진 중립적인 교육 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하여 SBC의 CP와 같은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재정 투자 지원을 실시해야 함. 라이프웨이 초창기에는 SBC가 CP를 통해 재정적 도움을 주었지만 성장 이후에 교단 내 다른 정책에 재정적 지원을 통해 사역의 활력을 불어넣은 것처럼, 우리교단 역시 교육 독립기관의 성장을 통해 교단 내의 다양한 사역을 지원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모델의 개발을 고려해 볼 수 있음 ■ 라이프웨이는 SBC교단 내 사역의 방향과 정책을 가늠하고 다양한 사역의 가능성을 개발하고 제공하는 핵심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음. 이처럼 우리 교단의 교육 독립 기관은 교단 내의 다양한 사역적 필요와 선교 사역, 교육과 양육 개발 등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여 이에 대한 적실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싱크탱크의 모델로 구상해 볼 수 있음 ■ 라이프웨이 산하의 리서치 기관은 교단의 즉각적이고 다양한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목회자와 성도에게 유의미한 통계 조사를 발표하여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목회와 교회의 성장 및 교육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음. 우리 교단 역시 교회의 교육과 교회의 성장을 위한 리서치 기관이 설립된다면 향후 다양한 영역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됨 ■ 위의 제안한 리서치 기관을 통해 수요자 조사, 4차산업 혁명의 변화에 따른 교육의 변화 및 개별 교회의 구체적인 교육의 필요성 인식 등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향후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일관성 있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교육정책이 필요함. 교육정책은 중장기적이며 동시에 단기적으 로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투트랙(two-track)전략이 필요함 ■ SBC는 교단 내 다양한 교회교육 전문가들을 여섯 개의 신학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있으며 이들은 졸업 후 라이프웨이 기관을 비롯해 다양한 기독교 학교 및 기관과 교회에서 교회교육 전문가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음. 우리 교단 역시 중장기적 전략을 수립하여 향후 우리 교단의 교회교육 및 기독교학교 교원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음 ■ 교육의 정책은 ‘일년소계(⼀年⼩計)’가 아니라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計)’의 정신을 가지고 세워져야 함. 현재의 교단 교육의 방향과 정책이 향후 우리 교단의 미래와 생존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심포지움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됨.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논의와 협의를 통해 건강하고 건전한 결과와 열매를 만들어 가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발제 3은 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함영주 교수가 ‘2023 미래정책전략개발위원회 총회교육정책 제안’이란 주제로 발제했다. 함 교수는 “현재 총회 교육은 교육관련 부서들간 업무가 중첩되는 현상이 있고, 미래 신앙교육 전략을 위한 기본 데이터가 부재하며, 신앙교육예산이 비효율적으로 분배되어 있으며, 노회의 교육적 기능이 약하다. 총회 교육정책 제안은 다음과 같다. ① 신앙교육 컨트롤 타워 설립– 신앙교육통합지원위원회. 총회 교육을 보다 체계적이고 혁신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신앙교육 통합지원 위원회’를 설립하여 교육조직을 일원화하고 업무분장을 새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다. 신앙교육 통합지원 위원회 내에 정책 업무, 연구개발 업무, 부모교사지원 업무, 학생운동 업무 등을 구분하고 기존에 총회 내에 있던 교육관련 부서 및 조직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 정책업무는 주로 교육부와 교육전도국이 맡아서 수행하도록 한다. 연구개발 업무는 총회교육개발원이 주축이 되도록 하되 데이터 기반 리서치를 가능하도록 하는 R&D 센터를 추가적으로 개원하여 연구와 개발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조직을 구성한다. 부모교사지원 업무는 주일학교 연합회와 면려부에서 담당하되 교사교육은 주교연합회에서하고 부모 및 장년 교육은 면려부에서 담당하도록 한다. 학생운동 업무는 학지부와 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에서 담당하도록 하되 기독교학교(초중고대) 운동과 관련된 업무는 학지부에서하고 교회학생운동과 관련된 업무는 다음세대 목회운동본부에서 담당하도록 한다. 사실 이러한 재배치는 각 부서들이 기존에 하던 고유한 영역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컨트롤 타워 아래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게 되어 다음세대 신앙 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② 신앙교육 R&D센터 설립.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남침례교회를 들 수 있다. 남침례교단은 www. lifeway. com을 통해 교단의 신앙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 연구 플랫폼은 K-12를 포함하여 청장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교회교육 뿐 아니라 가정, 학교, 미디어, 세상의 다양한 영역에 관한 기초연구를 통해 교단의 교육정책 수립 및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교단도 www.총회교육.com을 통해 정규교육과정 및 계절공과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총회교육개발원이 ‘개발업무지원’ 플랫폼으로서 연구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각종 연구를 통해 다음 세대와 관련한 정책 및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앙교육 R&D센터’를 설립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총회에서 매년 조사하는 교회별 교세 조사 항목에 다음세대 및 주일학교 운영과 관련된 조사 항목을 신설하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노회 및 교회의 상황에 맞는 맞춤형 교육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③ 교육예산 편성의 효율성 확보. 신앙교육 컨트롤 타워를 설립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교육예산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이다. 현재 총회 내 교육관련 기관에서 집행하는 행사들이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점이 있어 이를 일원화 한다면 교육행사에 들어가는 예산을 절감하거나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총회에서 지원하는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지교회 및 단체들에게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선 총회 신앙교육통합지원위원회가 구성이 되면 교육정책 및 프로그램을 확정 하고 이를 재정부에 통보하여 예산편성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한다. 예산이 편성이 되면 다시 총회교육 센터는 확정예산을 각 기관에 분배하여 개별 교육단체들이 행사를 진행하고 예산을 지출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예산의 효율적 사용은 신앙교육통합지원위원회에서 교육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되면 자연 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부족한 예산은 교단 내 기업인 연합단체 등과 MOU를 맺어 다음세대 신앙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기금을 모금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④ 총회 주관 교육정책 제안. 교육데이터 제출 의무화 및 신앙교육 R&D센터 설립 외에도 총회적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다음세대 관련 교육정책 중 인적자원 교육과 관련된 두 가지 제도를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교회교육사 제도이다. 현대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기반으로 조직운영을 한다. 이제는 신앙교육의 영역도 그러해야 한다. 현재 각 교회의 교육목사 혹은 교육디렉터는 부서를 맡고 있는 교육전도사 및 교육목사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독교교육과 관련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총회적 차원에서 교회교육사 제도를 시행하여 보다 전문성을 갖춘 교육자를 통해 각 교회의 신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지방의 작은 교회의 경우 사역자 자체를 구하기 힘든 현실에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으로 ‘교사 준사역자 제도’를 신설하여 운영할 필요가 있다. 즉 총회나 총신이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각 교회에서 신실한 교사를 선발하여 준교역자 수준으로 교육하고 이들로 하여금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 교역자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면 큰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총회, 총신과 연계된 교육 시스템을 활용하여 최근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뱃지제도(badge)’를 통한 교육 인증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⑤ 노회 주관 교육정책 제안. 학령인구의 감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리고 세속화된 가치관의 침투 등으로 인해 다음세대가 교회에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더 가속화 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한 교회에서 교회학교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회 연합교회학교 제도’를 전격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교역자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노회는 근거리에 있는 교회들이 연합하여 무학년제의 방식으로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교육과정, 교육예산은 노회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경우 현재의 교회학교 운영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 더불어 앞서 언급했던 교회교육사 제도를 통해 배출된 교육 디렉터를 노회에 소속된 기관목사로 배치하는 ‘노회 교육디렉터 제도’를 실시하여 노회 내 교회학교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노회가 해야 할 중요한 교육사역중 하나는 바로 ‘강도사 재교육 과정 신설’이다. 공식적으로 강도사 기간은 노회가 교육하는 기간이다. 이에 노회는 공식적인 강도사 집체교육 과정을 만들어 실천신학적 역량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가령, 세례 집례법, 성찬식 인도법, 장례식 인도법, 유치부 교육과정 설계법, 청소년부 교육과정 설계법, 노년부 교육과정 설계법 등 교회의 교육현장에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을 집체교육을 통해 교육해야 할 것이다. ⑥ 국가 대응 교육정책 제안. 다음세대 교육은 미시체계적 접근을 넘어 외체계와 거시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외체계란 대중문화, 교육위원회 등과 같은 것들의 영향이며 거시체계는 문화, 법 등의 영향을 의미한다. 그동안 교회, 가정, 학교와 같은 미시체계의 분석과 대안은 많이 있었으나 거시체계에 대한 대응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가정, 학교와 같은 미시-단일체계적 접근으로는 다음세대 신앙교육을 건강하게 만들기 어렵다. 이에 총회에서는 다음세대를 둘러싸고 있는 거시체계에 대한 대응으로 총회적 차원에서 총회국가교육자문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개정중인 2022 교육과정과 교과서 문제에 대한 대응, 공교육 안에 편입되어 있어서 정상적인 기독교교육을 실천할 수 없는 사학법에 대한 대응, 학생들의 실제 생활과 관련된 학생인권조례 등에 대한 대응을 통해 다음세대 신앙성장을 위한 건강한 신앙생태계를 구축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석자의 질의응답에서 “30-40대 부모의 교회 결정 요인은 주일학교가 잘 운영되고 있느냐이다. 미자립교회는 언약적 공동체로 공동으로 한 아이를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고신 총회에는 리서치 전문가가 있어 매년 필요한 리서치를 실시해 이것을 교육에 반영하고 있다. 합동교단도 이것을 받아들이면 유익이 있을 것이다. 고신측은 리서치를 통해 통계 자료를 가지고 필요한 교재를 만들고 있다. 평생교육 커리큘럼이 만들어져야한다. 신앙교육통합위원회가 있어야한다. 거기서 교회별, 지역별 맞춤형 교육을 논의해야한다. 고신 측 교단 교육 부서는 독립 부서로서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언급이 있었으며, 노영주 총회교육원장은 “정책이 먼저이고 돈은 후순위다. 총회는 표준화된 정책을 제안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후 장봉생 위원장이 발제자와 참석자들에게 감사 후 신현수 목사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앞서, 1부 예배는 부위원장 김미열 목사의 인도로 회계 권택성 장로가 기도 후 총무 이종석 목사가 삼상 3:7-9을 봉독한 후 다음세대목회부흥운동본부장 이성화 목사가 ‘교사가 교재다’란 제목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무엘의 어린 시절의 때와 같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무디어졌으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 말씀을 전하게 했다. 요즘 교육에 대한 열정이 식어져 안타깝다. 그 당시 엘리는 눈이 어두웠는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돌아봐야한다. 오늘날 공교육과 교회교육이 무너졌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엄청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비혼주의자 등 여러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이 바르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도 방향에 소홀했다고 생각한다. 엘리 제사장은 비록 자기 아들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으나 사무엘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오늘의 심포지엄이 교육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김미열 목사의 광고 후 위원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
김병중(Th.D) 05-16 17:34
총신96회, 홈커밍데이 행사 성대히 개최
총신대학신학대학원 96회 졸업생이 주최한 개교 122주년 기념 제36회 홈커밍데이 기념예배가 5월 16일 오전 11시 30분 양지캠퍼스 100주년 기념관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96회 회장 김태식 목사의 인도로 수석부회장 77회 황재열 목사가 기도 후 96회 수석부회장 손용우 목사가 삼상 16:7을 봉독한 후 96회 부부찬양단이 ‘이 믿음 더욱 굳세라’를 특송했다. 총동창회장 78회 김진하 목사가 ‘어셈블리지(Assemblage)’란 제목으로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악조건에 도전해서 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울의 후계자로 부족한 다윗을 선정하셨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를 들어 사용하신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고 설교 후 증경회장 71회 김창근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축하 및 감사는 준비위원장 정태문 목사의 사회로 총장 93회 이재서 목사가 “모교를 방문하신 졸업생들을 환영한다. 부족한 사람이 4년간의 총장 임기를 이제 마치게 된다. 그동안 많은 협력에 감사드리고 신임총장 박성규 목사님께도 많은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총장 인사 후 김진하 총동창회장이 총장 이재서 목사에게 공로상을 전달한 후 총장 당선자 80회 박성규 목사가 “학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겠다. 수고하신 총장님께도 감사드리고, 여기 참석한 졸업생들의 모교 사랑에 감사드린다. 원우 여러분들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라고 인사하고, 증경회장 72회 하귀호 목사가 “저는 홈커밍데이를 구상한 1회 목사이다. 올해 매우 잘 준비해 주어 감사하다. 참 잘했다. 동문회관을 짓기 위해 그동안 23억을 모금했다. 앞으로 동문회관이 지어져 전액장학금을 지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격려사 후 증경회장 76회 옥성석 목사가 “현 총장과 후임 총장이 함께 자리해서 감사하다. 현 총장은 성실, 정직하셨다. 후임 총장은 오랜 교분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귀한 분으로 예비 된 종이다”라고 축사했다. 자랑스런 동문산 시상 공로패 전달 자랑스러운 동문상에 김진하 총동창회장이 교수 부문 박건택 목사(72회 총신신대원 은퇴교수), 목회자 부문 이춘복 목사(75회 남현교회 원로), 선교사 부문 강인중 선교사(80회 케냐 GMS사무총장)를 시상 후 김진하 총동창회장이 이번 홈커밍데이를 주관한 96회 회장 김태식 목사, 준비위원장 정태문 목사, 실행위원장 김근영 목사, 진행위원장 최종운 목사, 후원이사장 김열방 목사, 운영위원장 오태봉 목사, 운영위원장 김두환 목사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예배위원장 목재봉 목사가 96회 회원을 소개하는 가운데 의료사고로 소천한 동기 김상호 강도사 소식을 영상으로 전하며 참석한 사모와 아들을 위로하고, 김태식 목사가 김진하 목사에게 총동창회 발전기금 전달 3000만원을 전달 후 실행위원장 김근영 목사가 이재서 총장에게 지명장학금을 전달한 후 준비위원장 정태문 목사가 원우회장 김찬양 전도사에게 사랑의 식권 전달하고 후원이사장 김열방 목사가 78회 신대원장 김상훈 목사에게 교수 선물을 전달했다. 상임총무 79회 남서호 목사와 96회 진행위원장 최종운 목사가 광고 후 96회 운영위원장 정진목 목사의 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친 후 그 자리에서 정기총회를 진행했다. 식사 후 운동장에서 푸짐한 상금과 상품이 준비된 배구, 족구 등 기수별 체육대회를 하며 친목을 다지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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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4-22 11:47
육수복 목사, “총회 부회록서기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
육수복 목사(전곡충현교회)가 제108회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됐다. 강북노회(노회장 이찬영 목사)는 지난 4월 11일 경기 양주시에 소재한 덕계교회(이찬영 목사 시무)에서 제61회 정기회를 열고 육수복 목사를 박수로 기립 만장일치 추천했다. 육수복 목사는 “부족한 사람에게 총회를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노회원들에게 감사하다”며 “만장일치로 적극 지지해준 만큼 당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육수복 목사는 총신신대원 83회로 1997년 전곡충현교회를 개척해 26년째 섬기면서, 총회 101회기 총회전도부장, GMS 이사, 총신대 운영이사, 총회부흥사회 37대 대표회장 등을 지냈으며현재는 총회 헌의부 서기와 총회은급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
김병중(Th.D) 04-18 10:47
박용규목사, 총회총무 후보 추천받아
대구중노회 지난 4월 11일 제74회 정기회를 갖고 박용규목사(가창교회 시무)를 총회총무 후보로 추천했다. 이날 노회원들은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박목사를 추천했다. 이로써 올해 108회 총회 총무 선거는 현 총무인 고영기목사와 영남지역 후보인 박용규목사의 대결로 확정됐다. 박용규 목사는 총회를 바르게 섬기겠다고 말하고, 총회 행정과 재정의 실무책임자로서 원칙과 신뢰를 지키는 깨끗한 총무, 인공지능(AI) 시대에 맞게 행정 시스템의 혁신을 이루는 총무, 총회 산하 교회와 구성원들을 섬기고 희망을 주는 총무가 되겠다고 공약했다. 박용규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83회)을 졸업하고 미국 풀러신학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96년 가창교회에 부임해 27년 째 목회하고 있다. 총회세계선교회 제22회기 이사회 서기를 역임했고, 총회 상비부의 학생지도부장(99회기), 고시부장(106회기)과 총회준비위원회 총무(105회기), 세계교회교류협력위원장(105회기)을 역임했다. -
김병중(Th.D) 04-11 21:51
경기노회, 112년 · 200회 기념예배 및 역사세미나 성대히 개최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112년·200회 기념예배 및 역사세미나가 4월 11일 오후 2시 30분 혜성교회(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기념예배는 노회장 정명호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김영구 장로의 기도 후 서기 이은호 목사가 행 13:32-39를 봉독한 후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가 찬양했다.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당시 하나님의 뜻’이란 제목으로 “그 당시 조상 시대 하나님의 뜻은 오실 메시야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 뱀의 머리를 치실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았다. 그런데 바울 당시 사람들은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뜻을 주장했다. 반면 다윗은 당시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다. ‘창발의 시대’란 책에서처럼 역사가 때로 대변혁을 하는데 과거 100여년 전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총회와 경기노회가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주셔서 교회를 허락하셨다. 주기철 목사도 당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고 순교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이어 증경노회장 유병수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축하는 행사분과장 임은진 목사의 사회로 기념영상을 시청 후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가 “ 경기노회는 총회의 주축이며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기에 중요성이 있다. 이제 경기노회가 112년이 됐다. 과거 일제시대 경기노회가 독립운동에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이후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 교단은 건강한 신학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노회는 현재 총회 160여개 노회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노회이다. 앞으로도 회기를 넘기면서도 많은 일 감당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가 “저는 과거 목사 후보생시절 경기노회에 속해 있었다. 과거에도 경기노회는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다. 앞으로 더 큰 일을 감당하시기 바란다 ”고 영상 축사 후, 서울지역노회협의회장 최효식 목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영광이다. 200회 동안 노회를 지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노회 200회를 기념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큰 발전을 기원한다”고 축사한 후, 종로구 국회의원 최재형 장로가 “경기노회 200회기를 축하드리고 200회기에 노회장이 되신 정명호 목사님도 축하드린다. 혜성교회가 경신학교를 위해 건물을 지은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근래 자유라는 미명하게 신앙에 반하는 것들이 많이 주장되고 있으며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다. 이런 때 교회들이 바르게 서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과거 어려운 때 빛을 발했다. 경기노회가 민족 부흥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경기노회여전도회연합회 가브리엘중창단이 축가했다. 노회장 정명호 목사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에 특별구호금 2,000만원을 전달했다.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와 함께하는 경기노회 역사세미나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김요섭 박사의 사회로 역사분과장 이용재 목사의 기도 후 한국교회와 경기노회란 주제로 발제했다. 제1발제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이영식 박사가 ‘사회와 민족을 섬긴 노회: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과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교안의 '맺는말' 전문이다. 지금까지 언더우드학당 및 경신학교 설립과 발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고, 3.1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경기노회 소속 교인들 및 경신학교 출신자들의 역할을 보았다. 이제 본 연구에서 논의해온 내용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언더우드, 헤론, 게일, 마펫을 비롯하여,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헌신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 이 땅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 스테이션을 개설했으며, 인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교육, 의료,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등의 다양하고 중요한 사역을 감당해냈다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경기노회와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둘째, 언더우드학당 및 경신학교는 경기노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미션스쿨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학교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언더우드, 헤론, 게일, 마펫, 에비슨, 민로아, 밀의두 등의 설립자 및 역대교장들 그리고 핵심교사들이 경기노회의 초기 노회장 혹은 회원이었다. 그들 자신이 경기노회를 설립하고 기초를 놓았으며 발전에 기여했던 노회 역사 자체이기도 했다. 셋째, 언더우드학당의 설립과 발전을 통하여, 초기 한국교회 선교부가 관심을 갖고 근대적 교육을 실천해왔던 교육선교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선교는 복음의 접촉점을 삼고, 기독교 인재양성을 하여, 이후 한국기독교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경과 신앙의 토대위에 선진화된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쳤고,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고 조국의 근대화에 공헌을 했다. 또한 자유 및 남녀평등과 같은 시민사회의 선진적인 사고를 소개하여 나라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한 결실을 맺고 있었던 교육사역을 선교본부의 주도로 폐쇄했다는 것은 그 역할과 위상을 고려하지 못한 속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넷째, 언더우드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근대적 고아원이며 학당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거처할 곳 없이 배회하는 고아들과 사생아들을 모아 양육했던 고아원이며 학당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복지적인 측면에서도 선구적인 기관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일각에서 국내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고아원시설이라고 주장하는 '경성고아원'(1905년)보다 10년이 앞선다. 또한 1876년 천주교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교육보다는 일반적인 형태의 고아원도 1885년에 집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 언더우드학당이 배재학당보다 앞서 개원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 경신학교에서 '경신수공부'의 개설은 당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실업교육을 도입을 통해서 학생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서의 진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 발전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 준비를 위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시도와 헌신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서 사회의 계몽과 변혁에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한말 조국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언더우드학당으로 시작하여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경신학교를 거쳐 오면서, 그 출신자들과 경기노회 교인들의 3.1독립운동에 대한 역할을 살펴볼 수 있었다. 김규식, 안창호, 서병호, 이갑성, 김상덕, 함태영, 김원벽, 정재용, 최재화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2.8독립선언 및 3.1독립운동을 비롯하여 이후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 상황에서 민족복음화와 함께 교회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초기에 신앙의 선진들이 하나님 말씀을 생명같이 여기며 복음전파의 열정이라는 이 본질에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오늘날의 본 연구자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본질에 충실하면서 사회와 민족을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시대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길 원한다. 논평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김효남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평 후반부 전문이다. 본 논문의 장점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째, 한국의 근대 교육에 있어서 경기노회의 경신학교의 탄생과정을 매우 소상하게 알려준다. 언더우드학당에서 수차례 명칭이 변경되어 경신학교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민과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고, 운영의 주체가 변경되면서 학교의 역할과 지향점이 변화를 겪는 동시에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서 경신학교가 시대적 필요를 잘 반영하여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신학교의 설립과 발전과정을 통해서 배출된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경신학교가 한국 근대사에서 감당했던 놀라운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과 김규식 선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경신학교가 한국 근대화 시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셋째,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에 이어서 경신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에 가르쳐졌던 교과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어 실제적인 교육내용을 알 수 있다. 넷째, 민족사에 위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미년 독립운동에 경신학교와 경충노회 출신들이 기여한 내용은 경신학교가 당시에 한국 사회에 미쳤던 실제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저자는 3.1 운동의 준비에서부터 만세운동이 시행되고, 그 이후 제2차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경신학교와 경충노회 출신들이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학당의 태동과 발전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한국 근대교육에서 경신학교와 경기노회가 가지는 위상과 공헌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3.1만세 운동을 경신학교와 경기노회 출신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한국 근대화 시기에 사회적인 기여와 공헌을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영식 박사의 본 논문은 경기노회가 담당했던 경신학교의 태동과 성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경신학교가 한국근대교육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물론이요, 경신학교를 통해서 배출된 인물들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특히 3.1운동을 통해서 잘 소개하고 있는 논문이다. 비록 경기노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역사이기에 경기노회가 학교의 정체성 형성과 학교의 영향력에 어떤 구체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신학교와 경신학교를 담당했던 초기 경기노회(경충노회)가 이 민족과 사회에서 감당했던 귀한 역할과 사역은 훗날 200회기를 맞이하는 오늘날의 경기노회에 속한 모든 회원과 교회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 경기노회가 21세기 한국사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중요한 지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본 논문이 이 일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이미 감당하였다고 생각한다. 제2발제는 안양대학교 이은선 박사가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나가는 말' 전문이다. 경기노회는 113주년을 맞이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노회이면서, 한국장로교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노회이다. 경기노회는 경충노회로 출발하여 1924년에 경기노회와 충청노회로 분립하였고, 그 이후에 노회의 규모가 커질 때마다 지속적으로 분립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노회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장로교회 총회를 섬겼던 훌륭한 총회장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1회 총회장인 언더우드는 총회가 7개 노회의 화합 속에서 잘 출발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12대 총회장인 되었던 함태영 목사는 법관 출신으로 활동하다가 목회자가 된 지 1년 후에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봉사하였다. 1929년에 총회장이 되었던 차재명 목사는 1928년에 장로교역사를 정리한 『장로교 사기』를 출간하여 교회사 정리에 이정표를 남겼다. 1935년에 정인과 총회장은 첫 번째 총대로 총회에 참석했다가 부총회장을 물리치고 총회장이 되었던 총회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정인과의 총회장 선출은 당시에 서부 지역의 강한 교세의 후원도 있었지만, 당시 새로 설립되어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총회 종교교육부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인 1950년에 총회장인 된 권연호 목사는 당시 창신교회 담임목사였다. 권연호 목사는 형목제도와 군목제도 등 다양한 제도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WCC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1955년에 한경직, 1956년에 이대영, 1957년에 전필순 목사가 연속으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 담임목사였고, 이대영은 승동교회 담임목사였으며, 전필순은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다. 그러므로 이 3년간은 서울시내의 가장 대표적인 목사들이 연속으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1962년에 고신과의 통합을 이끌었던 이환수목사와 분열 후에 교단발전에 기여한 박찬목 목사, 1970년에는 후에 충현교회를 강남의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이끌었던 김창인 목사가 총회장을 하였고, 1985년에 청량리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던 박명수 목사가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에 경기노회에서 아직까지 총회장이 나오지 않고 있다. 경기노회가 다시 한 번 총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배출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노회역사를 정리하며 재도약을 할 때, 경기노회가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고 총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학교 발전 과정에 기여한 노회 인물은 1969년 총신대학교가 문교부 인가를 받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김인득 장로와 성도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가 1972년에 학장이 된 김희보 목사가 있다. 김희보 목사는 성도교회 담임목사로 있다가, 박형룡박사가 물러난 후에 새로 교권을 잡은 이영수 목사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는 구약학자로서 목회에 도움될 실용적인 소선지서의 주석책들을 내면서 총신의 교수진의 확대와 학과들의 확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김인득 장로는 학교의 인가, 사당동 기숙사 건립, 양지도서관 건립 등에서 재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앞으로 경기노회에서 학교의 발전을 위해 학문적으로, 재정적으로 기여할 인재들이 나오기를 소망해 본다. 논평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정원래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문에 대한 평가 및 기여' 전문이다. 이은선 교수가 고찰한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로 대한예수교합동 교단의 역사에 제200회기의 의미는 매우 크다. 총회의 역사 113년 그리고 격동의 한반도 상황에서 몇 차례의 노회를 개최하지 못하였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노회의 역사는 제200회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노회가 한국개신교 역사와 한국현대사의 증인이자 주역이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기노회 제200회기는 한국개신교의 역사와 한국현대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자는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로 논문의 내용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구자가 제시한 경기노회의 간략한 분립 확장의 역사는 한반도의 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성장 및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매우 의의가 크다. 특히나 노회의 분립/발전을 경기노회와 총회의 지도자였던 분들의 역점 사역을 함께 고찰하면 한국교회의 복음 사역과 활동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였는지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예를 들면, 농어촌 선교, 주일학교 교육, 형목제도, 군목제도 등. 셋째로 이은선 교수의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은 120여년의 한국개신교의 역사에서 각 지역의 노회들의 역사를 들려준다. 1912년에 처음 시작한 7개의 노회에서 제200회기 기념 세미나를 개최한 노회는 경기노회가 처음이며, 또한 노회의 역사를 학술토론의 형식으로 고찰한 경우도 (논평자가 아는 한) 처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장차 교단의 노회들이 각각 자신들의 역사를 수집, 편찬하는 것을 넘어서 학술적 토론의 장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는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이은선 교수의 연구는 경기노회 출신으로 합동교단의 총회장으로 봉사한 분들의 삶과 사역이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연결되어 있음도 드러내고 있다. 즉 총회를 섬기는 동안 혹은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현대사의 아픔 앞에 노출되어 있었고, 영향을 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논평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 경기노회가 가진 장소적 특성은 훨씬 더 외부의 파고가 거칠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다섯째는 연구자는 경기노회 출신으로 총회의 발전과 섬김에 헌신했던 분들을 언급하며 “1대 총회장이 언더우드 선교사였고, 1923년에 12대 총회장으로 함태영 목사가 선출되었다. 해방 전 경기노회 시절에는 18회(1929) 차재명 목사와 24회(1935) 정인과 목사가 총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 경기노회가 총회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시기는 1950년대였다. 권연호목사가 36회(1951) 총회장이었고, 40회(1955) 한경직, 41회(1956) 이대영, 42회 (1957) 전필순으로 4분을 배출하였다. 총회장을 배출한 측면에서 보면 경기노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으로 볼수 있다.” 21세기에 이르러 경기노회의 총회적 활동이 조금 연약해진 것은 아쉬움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여섯째는 경기노회는 총회와 교단의 신학교육과 정통신학을 견지하는데 누구보다도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열정과 헌신은 지금도 총신대학과 신학대학원을 통해 지속해 교단의 신학과 신앙을 책임질 후진의 양성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총신대학교는 경기노회에 많이 빚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일곱째는 연구자의 당부를 인용한다: “경기노회가 선진들의 좋은 신앙의 유산을 잘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들에 능동적으로 부응하여 노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면 서 총회와 총신대학교 발전에 기여하는 노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제3발제는 광신대학교 김호욱 박사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한 경기노회의 역할 고찰’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결론' 부분 전문이다. 예장의 제2차 분열(기장측 분열)과 제3차 분열(합동과 통합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살펴보니, 과연 경기노회는 그 당시 "장로교의 뿌리와도 같은" 노회였으며, “한국교회의 커다란 물줄기" 같은 매우 중요한 노회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면 예장총회에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 경기노회가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 장로회의 신학적 정체성 수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평가해 보자. 첫째, 예장의 제2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개혁주의 수호 노력에 관한 평가이다. 경기노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한 김재준 교수 조치 문제로 발생한 제2차 장로회 분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기장총회가 분열한 예장의 제2차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는 개혁주의 신학 노선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 주장한 김재준 교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노회는 예장총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 수호보다는 노회 소속 회원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둘째, 예장의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개혁주의 수호 노력에 관한 평가이다. 예장총회가 WCC의 신학적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회원으로 가입한 것에 대해 경기노회 소속 대부분의 목회자는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기노회는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를 위해 회원 다수가 매우 노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장총회가 제2차와 제3차로 분열할 때의 경기노회는 예장총회의 중심 노회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경기노회의 신학적 행보는 총회의 신학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경기노회는 그 당시와 규모나 노회 관할 범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노회의 중요한 역사성을 감안하여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역사를 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경기노회는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합동총회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해 지속으로 노력할 사명감을 깊이 인식해 주기 바란다. 또 하나는 불만이 있다고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투표장을 집단으로 탈퇴하는 일은 참으로 무모한 일임을 기억해서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의 역할은 추가로 더 살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장로회 제2차 분열 과정에서의 역할이다. 경기노회가 김재준 교수를 심사한 후 문제가 없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재준 교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임을 알고 있었지만 노회 소속 목사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인가? 아니면 총회가 경기노회 소속 목사를 노회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면직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차원이었는가? 그것이 아니면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을까? 둘째, 장로회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역할이다. 본 논문은 예장총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한 근원 원인은 WCC 가입 여부에 있었고, 경기노회의 총대 파송 사건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더 연구할 부분은 경기노회의 총대 파송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있다. 제72회 경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 명단에 황금천 목사가 81표를 득표하고도 누락되었다고 했는데, 제72회 임시노회에서 황금천 목사는 겨우 6표를 득표하여 총대(정)이 아니라 총대(부)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즉 황금천 목사가 제72회 경기노회에서 80표를 득표한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 간다. 임원들이 재개표한 결과에 대한 증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논평은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먼저 귀한 논문을 쓰신 김호욱 교수의 논문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제한된 시간 내에 몇 가지 논평을 하도록 하겠다. 우선 경기노회에 대한 자리매김이 필요할 것 같다. 저자는 경기노회를 “장로교회의 뿌리와도 같다”라는 문구를 그대로 서론과 결론에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의미는) 좀 수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교회는 당연히 장로교 전체가 아니라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를 의미하며, 이 표현을 사용한 강석근 교수의 의도를 따르면 수도권 지역(심지어 강원도와 충청도 포함)에 속하는 모든 노회의 뿌리라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의 커다란 물줄기”라는 표현 역시 경기노회에 속한 익명의 목사가 한 말을 재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소 과대평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경기노회는 오늘날 수도권 지역에 있는 모든 장로교 노회들의 뿌리이고, 해방 직후에는 가장 중심되는 노회였고, 지금은 그 물줄기가 오늘까지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논문은 첫 부분에서 경기노회의 역사를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 경기 노회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역사만 간단하게 다루고 그것이 논문의 주제에 미치는 영향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노회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가 이 논문의 주제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 저자는 해방 이후 두 개의 장로교 분열(기장 측의 분열과 통합 측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두 분열 사이에 경기노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립이 있었다. 바로 경기노회와 한남노회의 분립이다. 강원노회의 분립도 있었지만 규모를 고려했을 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따라서 1959년의 통합과 합동의 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전에 있었던 노회분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장의 분리에 있어서 중심 이슈는 자유주의 신학이고, 통합의 분리에 있어서 중심이슈는 WCC이다. 물론 이에 더하여 지역주의, 파벌주의, 3000만환 사건도 3차 분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후자는 치리에 관한 문제이고, 전자는 신학에 관한 문제이다. 이 두 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슈는 성경론(기장)과 교회론(통합)이었다. 김 교수는 이 두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좀 더 적합한 용어나 표현이 필요하다. 개혁주의신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오늘날 대부분 주류 개혁교회는 성경의 절대적 무오성을 부인하고 WCC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당시 경기노회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수호하였는지 의문이다. 만약 있다면 논문을 통해서 충분히 논증을 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44회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임시노회 총대 명단이 선정되었고, 그 결과 개혁신학을 수호하려는 경기노회의 노력이 무산되었다고 간단히 마무리하는데 이 역시 약간의 수정이필요하다.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결국 정회와 분열로 이어졌다. 경기노회의 노력은 장로교회 총회 전체에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승동 총회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어졌고 고려파와 합동으로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 결론부에서 논문이 제시하듯이 비록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교회 정치의 중요성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첨예하게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돌의 불씨를 던진 것은 총대 투표였다. 투표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최종적 행위인데 경기노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것을 가볍게 처리하였고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하였고)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 문제 못지않게 교회질서가 얼마나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중요한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점에서 경기노회는 한국 장로교회에서 총대 투표를 가장 모범적으로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시행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이어 역사분과위원 최영수 장로의 기도 후 정명호 노회장이 순서를 맡아준 교수들에게 감사하고 경기노회 역사 세미나를 마쳤다. -
김병중(Th.D) 04-11 19:39
경기노회, 감격의 200회 정기노회 개회
경기노회가 112년 · 제200회 정기노회를 4월 11일 오전 9시 30분 혜성교회(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개최해 임원과 총대를 선출하고 김영구 장로를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기립 추천 후 회무를 진행했다. 개회예배는 부노회장 정명호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황응진 장로의 기도 후 서기 신헌재 목사가 막 14:33-34를 봉독한 후 시온찬양단이 찬양했다. 노회장 김성규 목사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란 제목으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제자들과 함께 나눴다. 우리도 주님처럼 자신의 연약함과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한다.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기에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알아줬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나눌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강할 때 강해야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강해야한다. 예수님은 강하셨기에 약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강한 분이 될 수 있었다”고 설교했다. 이어 원남교회 권기웅 목사가 성찬식을 집례 후 증경노회장 정우길 목사가 ‘스코틀랜드 웨스턴아일노회 위해’, 증경노회장 황연호 목사가 ‘총회와 노회를 위해’ 특별기도한 후 증경노회장 김기선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회무는 노회장 김성규 목사의 사회로 개회하여 임원을 개선하고 총대를 선출한 후 김영구 장로를 제108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기립 박수로 추천하고 회무를 진행했다. 이날 선출된 노회임원과 총대는 다음과 같다. ▲노회장: 정명호 목사, 부노회장: 이용재 목사, 부노회장: 김영구 장로, 서기: 이은호 목사, 부서기: 위재용 목사, 회의록서기: 선정규 목사, 부회의록서기: 김상준 목사, 회계: 강한범 장로, 부회계: 이충열 장로 ▲목사 총대: 정명호, 이은호, 김기선, 김성규, 김영복, 김오용, 이용재, 임은진, 황연호 ▲장로 총대: 김영구, 강한범, 남석필, 박진우, 이주성, 이충열, 임대원, 전종옥, 황응진 -
김병중(Th.D) 04-11 19:24
오정호 목사, 총회장 후보 추대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서대전노회가 4월 10일 오전 9시 30분 대전새미래교회당에서 제142회 정기회를 개최하고 현 부총회장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를 제108회 총회 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박수로 추대했다. 오 목사는 “서대전노회의 위상을 높이며 막중한 총회장의 사명을 겸손히 잘 감당하겠다”며 “전 노회원들이 이전처럼 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대전 새로남교회는 9월에 있을 108회 총회를 위해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김병중(Th.D) 04-11 07:39
김영구 장로,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추천받아
노회역사 112년, 200회기를 맞이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경기노회가 4월 11일 혜성교회(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정기회를 열어 임원을 선출하고, 김영구 장로를 108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기립 박수 추천했다. 김 장로는 “ 총회장을 잘 보필하면서 교단 소속 교회들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모든 역량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영구 장로 인사말 전문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거나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연약한 죄인이었던 저를 장로로 기름 부어 세워주신 것만 생각해도 너무 큰 영광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제40회기 회장을 역임하게 하시고, 총회 ‘헌의부, 재정부, 감사부, 제106회 선관위원’ 등으로 총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저는 총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섬기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경기노회 제200회 정기회라는 특별한 회기에 노회장 정명호 목사님과 노회원들께서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제108회 총회 장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해 주시는 극진한 은혜에 감사드리며, 제가 섬기는 장위제일교회 담임 목사님과 당회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장로 부총회장으로 당선이 된다면, 총회장이 되시는 오정호 목사님을 잘 보좌하면서 총회 임원들의 마음을 한마음으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장로 부총회장이 총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기업을 하는 장로들이 총회를 섬길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더욱이 제가 CBMC 중앙회장으로서 기독교대학교나 교단 내의 신학대학들과 MOU를 맺음으로 ‘청년들을 살리고, 다음세대에 희망을 심고, 저출산 문제의 해결이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더 확산되게 될 것입니다. 총회장을 잘 보필하면서 교단 소속 교회들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모든 역량을 다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노회장과 노회원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오늘까지 인도하시고 계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2023년 4월 11일(화) 김영구 장로 拜上 김영구 장로 약력 (현)경기노회 장위제일교회 시무장로 (현)경기노회 부노회장 (현)한국기독실업인회(CBMC)중앙회 회장 (현)주)엘림비엠에스 대표이사 (현)국가조찬기도회 운영이사 (현)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 이사 (현)인간개발연구원 운영이사 (현)총회유지재단감사 (현)총회 대외협력위원회 부위원장 (현)총회다음세대목회부흥운동본부 부위원장 (전)총회감사부부원(104~105) (전)총회106회기선거관리 홍보분과장 (전)전국남전도회 연합회 회장 (전)서울지역남전도연합회 회장 (전)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현)서울지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이날 선출된 노회임원과 총대는 다음과 같다. ▲노회장: 정명호 목사, 부노회장: 이용재 목사, 부노회장: 김영구 장로, 서기: 이은호 목사, 부서기: 위재용 목사, 회의록서기: 선정규 목사, 부회의록서기: 김상준 목사, 회계: 강한범 장로, 부회계: 이충열 장로 ▲목사 총대: 정명호, 이은호, 김기선, 김성규, 김영복, 김오용, 이용재, 임은진, 황연호 ▲장로 총대: 김영구, 강한범, 남석필, 박진우, 이주성, 이충열, 임대원, 전종옥, 황응진 -
김병중(Th.D) 04-10 20:26
김종철 목사,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 받아
전 노회원들이 기립 박수하며 김종철 목사 임원 후보 추천을 축하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용천노회가 4월 10일 오전 10시 세광교회(채수영 목사 시무)에서 제131회 정기회를 개최해 임원을 선출하고, 김종철 목사를 108회 총회 부회록서기후보로 만장일치 기립 박수 추천했다. 김 목사는 "작년에 이어 올해 총회 임원 후보로 추천해 주신 노회원들께 감사를 드리고 노회와 총회를 위해 수고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종천 목사의 출마 인사말 전문이다. ‘터널은 끝이 있다’는 말처럼 끝나지 않을것같던 고통의 긴터널을 지나고 보니 돋는 해 아침빛같고 구름 없는 광선같고 비온 뒤 움이 돋는 새풀같은 새아침의 밝은 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나온 터널은 어쩌면 더 빠른 지름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선거에서 낙선은 큰 충격이었고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새힘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다시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건만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다시 하나님 말씀을 피를 토하듯, 절규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처럼... 다 내려놓았지만 총회를 섬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라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임원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아프고 아팠던 시간들이 지금의 저로 하여금 더 뜨거운 열정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좀 더 성숙한 자세로 더 겸손하게 총회를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부활의 계절에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이’ 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부활하기를 소망하며 노회와 총회를 섬기기 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날 선출된 노회임원과 총대는 다음과 같다. ▲노회장: 채수영 목사, 부노회장: 김두환 목사, 장로부노회장: 오태헌 장로, 서기: 임경택 목사, 부서기: 김 진 목사, 회록서기: 정채광 목사, 부회록서기: 신형섭 목사, 회계: 김도현 장로, 부회계: 주영호 장로 ▲목사총대: 채수영, 김종철, 진석재, 이남훈, 류춘식 ▲장로총대: 오태헌, 김도현, 박용신, 조홍래, 권기선 -
김병중(Th.D) 03-14 01:28
【구 충남노회 사태4】구 충남노회 속회 측, 총회 공문 대응 모임 가져
구 충남노회 속회 측이 3월 13일 오후 2시 모처에서 회원 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 공문에 대한 대응 모임을 가졌다. 현재 속회 측에 속한 교회는 53교회로 정기회 측에 속한 8개 교회보다 숫적으로 우세하다. 작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총대들의 가결로 충남노회는 폐지됐다. 그리고 후속 처리를 임원회에 일임했다. 임원회는 곧 김상현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정기회 측과 속회측에 “교회와 목사는 공동의회 결의를 통하여 근처 노회로 가입”하거나 “충남노회 소속이었던 당회 중 21개 이상 당회가 총회임원회로 노회 신설을 청원할 시 신설한다”고 알렸다. 그런데 2월 28일까지 양 측이 노회 신설을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정기회 측은 21당회를 구성하지 못했고, 속회 측은 악용을 우려해 목사 명단과 교회 이름을 가린채 냈기에 결국 정한 기한내 노회 신설을 하지 못했다. 이어 3월 2일 총회장 권순웅 목사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 김상현 목사의 이름으로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거 정기회 측 노회장 고영국 목사와 서기 이상규 목사에게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한다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으로 인해 구 충남노회 속회측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됐다. 총회 파회 직후 이들은 노회신설을 위해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회가 상대인 정기회 측에 소집권을 주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에 이들은 과거 혼란이 다시 반복될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이에 속회 측은 3월 13일 모처에서 모여 총회 공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긴 시간 논의 했다. 이들은 그동안 총회를 사랑하고 지도를 잘 따랐는데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해 매우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 10년간의 다툼 끝에 결국 충남노회를 폐지한 가운데도 총회가 이후 이 문제를 잘 처리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노회 신설 서류가 미비했다면 보완을 요구하고 시한을 더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적용하지 않았던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을 갑자기 적용해 총회 결정을 뒤집었는데 이것이 가능한지, 절차상 문제가 없는지 이에 대해 질의하고 소원을 낼 계획이다. 총회 임원회의 이러한 결정이 전혀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총회가 속회 측의 입장을 잘 헤아려 심사숙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지교회의 안정을 위해 총회가 신중하고 바르게 판단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108회 총회에서 총회적으로 이 문제를 다시 다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동안은 현 조직을 잘 유지하면서 회원간 단합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기회 측과의 대화 채널을 열어두기로 했다. 반면 정기회 측 이상규 목사는 "이제라도 총회 임원들이 바른 판결을 해 다행"이라고 하며 "속회 측이 불안해하지 않게 기득권과 재판권을 내려 놓고 충남노회를 정상화 하고 하나되게 하겠다"고 했다. 또한 "과거 서로 고소, 고발이 난무했는데 법률 논쟁없이 속회 측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기회 측과 속회 측의 입장차가 크기에 과연 앞으로 양 측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총대들은 작년 107회 총회 결의로 끝난줄 알았던 구 충남노회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에 대해 당혹해하며 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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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8 18:12
【천안중부교회사태15】 공동의회 개최 연기, 총회장 교회 앞 시위
이상규가 주춤했다. 5월 28일 본인과 주진만을 놓고 천안중부교회 담임청빙 투표를 하는 공동의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법원의 금지 가처분 판결을 받고 일단 미루었다. 그러면서 다음주에는 김종천 목사에 대한 신임투표를 하겠다고 광고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지난 3월에도 법원이 금지 가처분 판결을 했지만 몸싸움까지 하며 공동의회를 강행해 해임시켜놓고 뭔 신임투표를 하겠다는 것인가? 앗! 주진만이 사라졌다. 이상규와 함께 천안중부교회 담임 청빙 투표하기로 한 주진만이 3주 전부터 천안중부교회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욕만 먹는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생각인 것일까? 이런 가운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권순웅 총회장이 시무하는 주다산교회 길 맞은편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주일 오전 9시 30분부터 12시 정도까지 30여명이 우비를 입고 다양한 현수막을 펼쳐놓고,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확인결과 이들은 천안중부교인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 시간에 김종천 목사 지지파는 교회 정문 앞 계단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고, 김종천 목사 반대파는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자기 교회와 천안중부교회의 합병을 선언한 이상규가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국 이상규 측이 보낸 용역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이상규를 지지하는 천안중부교회 당회원들의 협조나 묵인을 의심해 볼 수도 있다). 이미 주다산교회에 용역이 한 차례 와서 시위를 했는데 이상규 측을 그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 최근 5월 18일 총회 임원회에서 구 충남노회 문제를 다뤘다. 임원회는 사회소송시행세칙에 따라 대표권을 부여한 고영국 목사의 노회 소집이 원만하지 못하므로 기존에 부여한 권한을 중지키로 했다. 아울러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위원장:김상현 목사)로 하여금 다시 각 측의 입장을 듣고 협상을 지시하기로 했다. 단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가 천안중부교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아마도 이에 불만을 품은 이상규 측이 용역을 통해 시위를 한 것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 문제는 그들의 현수막 내용이 너무나 과격하다는 것이다. “불법 선두주자 총회장 권순웅 사퇴하라. 정치 브로커 선거 브로커 총회장 권순웅 물러나라. 발람같은 총회장 권순웅 사퇴하라. 총회장 권순웅은 목사 맞습니까?. 돈 뿌린 총회장 불법의 선봉왕” 재적 성도가 5천여명인 주다산교회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 드리러 와서 이 현수막을 봤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더더군다나 현재 권순웅 총회장은 미국을 비롯한 브라질 등의 해외 노회 재건 및 협력을 위하여 출타 중이며 6월 17일 귀국 예정인데 말이다. 지난 임원회에서 “충남노회 사건과 관련해 총회장과 총회임원, 충남노회폐지후속위원회 위원 교회에서 시위할 경우 사법 대응과 언론 대응을 총회에서 지원하기로 했다”고 결의했다. 과연 권순웅 총회장이 귀국하면 어떤 식으로 이 일을 처리할지 궁금하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주에도 주다산교회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 충남노회와 천안중부교회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선을 넘을 때 정당성과 지지를 잃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상규 측은 지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렇게 한다고 자기 뜻대로 일이 되겠는가? 그러면 누구나 시위하면 통하는 총회가 될 것이다. 총회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주일”이다.(시위에 비용이 많이 들었을 것인데 자금 출처가 궁금하다. 현재 교회 재정은 김종천 목사 반대 측이 관리하고 있다. 합법한 김종천 당회장의 결재 없이 사용된 모든 비용은 처벌 대상이다) (사진 이능규 목사) -
김병중(Th.D) 05-26 18:06
농촌 임봉교회, 자금난으로 공사 중단...도움 손길 절실!
자금난으로 공사 중단된 임봉교회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임봉교회는 과거 교회와 관계된 사고 배상으로 모든 것을 넘겨주고 어렵게 마련한 부지에 교회를 짓고 있다. 지난 4월 24일 직영으로 공사를 시작해서 어렵게 골조 공사를 완성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자신처럼 공사일을 하는 다른 3명의 목사와 함께 직접 작업 해 한달 만에 교회 외형 틀 작업을 끝냈다. 그러나 적은 재정으로 공사를 하다보니 판넬공사, 실내 인테리어, 타일공사, 이층 사택 공사등을 못하고 중단됐다. 공사금액의 일부는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한도까지 받아 더이상 받을 수 없는 형편이며 그간 경북노회 교회들의 헌금과 몇몇 교회들의 후원이 있었으나 많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한번 전국교회에 후원을 요청하고 있다. 예배당 건축이 중단되지 않고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린다. 후원계좌: 농협 임봉교회 351-2629-0691-93 -
김병중(Th.D) 05-26 17:41
【천안중부교회사태14】 5월 28일 공동의회 금지 가처분 판결!
이상규·주진만을 대상으로한 천안중부교회 담임청빙을 위한 공동의회가 결국 법으로 금지됐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유아람 재판장은 판결문을 통해 “채무자(이상규)는 2023. 5. 28. 천안시 서북구 도원3길 15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천안중부교회에서 개최예정인 공동의회를 개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상규는 지난 3월 19일 주일에 김종천 담임목사 해임 건을 다루는 공동의회를, 개최해서는 안된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강행했기에 이번에도 밀어붙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는 이미 이판사판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것으로 보여진다. 불법이더라도 공동의회를 진행해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을 얻는다면 이후 법적으로 불리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지세력을 통해 불법으로라도 담임 청빙 가결 하면 이후 지분싸움을 벌일 명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기자의 뇌피셜이다. 이번 판결문은 여러 가지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판결문의 채권자는 천안중부교회 담임 김종천 목사이고, 채무자는 이상규이다) 신청취지 주문 제1항 및 집행관은 위 명령의 취지를 적당한 방법으로 공시하여야 한다. 1. 사안의 배경 가. 당사자들의 지위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남노회(이하 '충남노회'라 한다)는 천안, 아산, 예산, 당진, 서산, 태안, 내포 일원의 각 지교회 목사들과 각 지교회의 당회에서 파송한 총대장로를 회원으로 하였던 단체이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이하 '총회'라고 한다)는 그 산하 모든 노회들의 상위 단체이다. 채권자는 충남노회에 소속되어 있던 지교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천안중부교회(이하 '이 사건 교회'라 한다)의 위임(담임)목사로 재직해오던 사람이고, 채무자는 충남노회가 2023. 3. 6. 이 사건 교회의 당회장으로 파송한 사람이다. 나. 충남노회의 채권자에 대한 면직판결의 효력 관련 가처분결정 충남노회는 2022. 3. 31. 채권자를 목사직 면직 및 수찬정지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는데, 채권자는 이 법원 2022카합10112호로 위 면직판결의 효력정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하였다. 이 법원은 2022. 8. 2. 위 면직판결은 권한을 상실한 임원들이 구성한 재판국에 의하여 이루어진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봄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채권자의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이하 '제1선행가처분결정'이라 한다)을 하였다. → 충남노회 이름으로 김종천 목사를 면직 시켰으나, 법원은 권한을 상실한 임원들로 구성한 재판국에 의한 것으로 절차상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판단했다. 다. 채권자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개최 관련 가처분결정 채무자는 2023. 3. 12.경 이 사건 교회의 주보를 통하여 정관개정의 건, 채권자 해임의 건을 안건으로 하는 2023. 3. 19.자 공동의회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채권자는 이 법원2023카합10034호로 위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구하는 가처분신청을 하였다. 이 법원은 2023. 3. 17. 제1선행가처분결정이 취소되지 않고 있는 이상 채권자가 이 사건 교회 당회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위 공동의회는 정당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되지 아니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채권자의 신청을 인용하는 결정(이하 '제2선행가처분결정'이라 한다)을 하였다. 채무자는 2023. 3. 19. 예정대로 공동의회를 개회하여, 출석 교인 262명 중 찬성 234표, 반대 0표, 기권 28표로 채권자 해임 안건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이하 '이 사건 해임결의'라 한다). → 법원은 지난 3월 19일에 소집된 공동의회가 법원의 결정을 어긴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라. 채무자의 공동의회 소집 공지 채무자는 2023. 5. 21.경 이 사건 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신임 목사 청빙을 위해 2023. 5. 28. 주일 2부 예배 후 공동의회(이하 '이 사건 공동의회'라 한다)를 개최한다고 공지하였다. 2.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가. 당사자의 주장 1) 채권자 채권자는 이 사건 교회에 파송된 이래 적법하게 해임되거나 그 자격을 상실함이 없이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2) 채무자 채권자는 2023. 3. 19. 이 사건 해임결의에 의하여 해임되었고, 2023. 4. 22. 충남노회의 목사직 면직 및 제명 판결(이하 '이 사건 면직판결'이라 한다)에 의하여 자격을 상실하였다. 이 사건 교회의 적법한 당회장은 채무자이다. 나. 판단 1) 이 사건 해임결의의 효력 2023. 3. 19.자 공동의회는 그 개최금지를 명한 제2선행가처분결정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된 중대한 절차상 하자가 있어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채권자가 이 사건 해임결의에 의하여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없다. → 이상규는 3월 19일의 공동의회와 4월 22일 “소위” 충남노회 판결로 김종천 목사가 해임되었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이라고 말하나 이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2) 이 사건 면직판결의 효력 이 사건 기록에 의하면 충남노회는 총회의 2022. 9. 18.자 정기총회 의결에 의하여 폐지되었음이 소명된다. 한편 소을 제3호증의 1의 기재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가 2023. 3. 2. '총회임원회가 본 위원회에 부여한 결의(제11차 임원회의)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거 정기회측(노회장 고영국 목사, 서기 채무자)에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하기로 하다'라는 취지의 결의를 한 사실은 소명된다. 그러나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가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은데다, 위 소위원회 결의 내용 자체도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과정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므로, 위 소위원회의 결의만으로 앞서 총회의 정기총회에서 이루어진 충남노회 폐지 결의의 효력이 상실되었다거나 폐지된 충남노회가 새롭게 설립되었음이 소명되지 아니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자료가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면직판결은 총회에 의하여 폐지된 충남노회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으로서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채권자가 위 면직판결에 의하여 목사 자격을 상실하였다고 할 수 없다. → 충남노회는 총회에 의해 폐지 되었으며, 총회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 이름으로 발부된 공문은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것이며, 이후 김종천 목사에 대한 노회의 면직은 충남노회가 이미 폐지되었기에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3) 소결 채권자가 이 사건 해임결의 또는 이 사건 면직판결에 의하여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없고,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그 밖의 사정을 살펴보아도 채권자는 여전히 이 사건 교회의 담임목사, 당회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 법원은 김종천 목사가 어떠한 경우에도 현재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임을 증거하고 있다. 3. 이 사건 공동의회 소집 절차의 하자 이 사건 교회 정관에 의하면 공동의회는 당회의 소집 요청, 제직회의 청원, 입교인 3분의 2 이상의 청원, 상회의 지시가 있을 때에 당회의 결의로 소집한다. 채권자가 이 사건 교회 당회장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 공동의회는 적법한 당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정당한 소집권자에 의하여 소집되지 아니한 절차상 하자가 있고, 달리 채권자를 배제하고 절차를 진행함이 허용되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점에 대한 소명도 없으므로 이 사건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명할 피보전권리가 인정되고, 채권자의 위임목사, 당회장 직을 둘러싼 분쟁의 경위에 비추어 가처분으로 이 사건 공동의회의 개최금지를 명할 보전의 필요성도 인정된다. 다만 채권자는 집행관공시명령도 함께 구하나 채무자에 대한 실효적 수단이 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채권자의 이 부분 신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천안중부교회 당회장 김종천 목사를 배제한 체 공고한 5월 28일 공동의회 개최는 절차상 하자가 있기에 개최금지 가처분 판결한다. 4.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신청은 위 인용 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이를 인용하고 나머지 신청은 이유 없어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법은 명백히 김종천 목사가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임을 밝히고 있으며, 폐지된 “충남노회”이름으로 행해진 어떤 결정도 효력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물러날 “자칭” 천안중부교회 당회장 이상규가 아니다. 이번 주 천안중부교회에서 또 어떤 불법이 벌어질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리고 그 모든 법적 책임은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김병중(Th.D) 05-25 16:36
【천안중부교회사태13】 이상규 새0교회와 천안중부교회 합병설 파문
이상규 목사가 시무하는 새0교회와 천안중부교회가 합병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그 증거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증거는, 최근 새0교회 장로 출신 이00 목사가 천안중부교회 이00 장로에게 “두 교회가 합병하게 되니 앞으로 잘 해보자”는 전화를 했다. 이00 장로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금시초문이다”라고 하자 이00 목사는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고한다. 두 번째 증거는, 충남노회 소속 목사가 충남노회 목사 단톡방에 올린 글이다. “지난 주에 중부교회에서 이상규가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새0교회에서는 이미 이상규가 새0교회와 천안중부교회가 합치기로 광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습니다” 이상규 목사는 사석에서 주진만 목사에게 “앞으로 총회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천안중부교회로 가야한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다. 현재 이상규 목사가 시무하는 새0교회는 교세가 크지 않은 교회이다. 결국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서는 천안중부교회처럼 큰 교회가 필요하다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주일(5월 28일) 예고된 불법 공동의회에서 새로운 담임으로 "주진만 목사와 이상규 목사"를 후보로 투표하는 데 이것도 요식행위인가? 이상규 목사가 되기로 짜여진 것인가? 참으로 치밀하고 사악하다! 또한 이상규 목사는 이전에 천안중부교회가 문용권 원로목사 후임을 청빙할 때 천안중부교회에 지원했지만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고, 이에 대해 장로들에게 강하게 항의했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 이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는 이렇게 막 가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를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배경으로 사용할려고 하는 이상규 목사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막장도 이런 막장은 없다. 막장의 끝을 보고 있는 것 같다. -
김병중(Th.D) 05-24 11:40
【천안중부교회사태12】 얼척없다! 주진만•이상규가 천안중부교회담임으로?
결국 이럴려고 그랬나? 돌아오는 주일 5월 28일에 천안중부교회가 공동의회로 모여 주진만, 이상규 목사를 투표해 담임을 정하게 된다. 참으로 얼척이 없으며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른다. 이상규 목사는 지난 3월에 총회에서 구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만 받았음에도 천안중부교회 임시당회장으로 가서 불법으로 공동의회를 개최해 김종천 담임목사를 해임했다. 그리고 반대자들을 출교하고 드디어 담임후보가 됐다. 김종천 목사가 담임으로 지원했을 때 이상규 목사도 같이 지원했다가 떨어졌는데 재수해서 드디어 소원을 이루는가? 주진만 목사는 또 뭔가? 뜬금없이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에 "간사"로 들어가더니 설교 목사를 하다가 "담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짜고치는 고스톱인가? 이것이 합동교단의 수준인가? 문제를 해결하라고 보냈더니 자기가 그 자리를 탐하는 꼴이 아닌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다! 이에 대한 1차 책임은 임원회와 소위원회에 있다. 엉뚱한 공문을 뜬금없이 보내 이런 사태를 만든 것이다. 2차 책임은 관계된 당사자이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든 공동의회가 불법이다. 이후 모든 일들은 결국 다 불법이다. 그러나 "담임"자리에 눈이 먼 자들에게 그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멸망을 향해 불 속으로 들어가는 불나방인가 보다. 법이 그리 만만한가? 무법, 불법 천지인 천안중부교회 사태를 보며 깊이 탄식한다. 주여! 마라나타! -
김병중(Th.D) 05-15 20:47
【천안중부교회사태11】 목장기도회에서 호소문 전달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있었던 7월 8일 충현교회 본당 앞에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2년여 동안 분쟁에 휩싸여 갈등하고 있는 천안중부교회 김종천 목사 측 교우 10여명이 올라와 교회 소식을 알리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많은 목사, 장로들은 유인물을 받고 교회 분쟁 사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나눠주는 교우들에게 교회 상황에 대해 묻기도 했다. 천안중부교회 교인들은 3시간 가량 유인물을 나눠주고 교회로 돌아갔다. 속히 교회의 분쟁이 해결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
김병중(Th.D) 05-13 14:43
성암교회,노한상 목사 원로추대·강원화 목사위임
노한상 목사 원로추대식과 강원화 목사 위임식이 다산성암교회에서 5월 13일 오전 11시에 있었다. 1부 예배는 위임국장 강조훈 목사의 사회로 노회서기 최문진 모사의 기도 후 성동시찰 서기 최재현 목사가 요 15:1-5를 봉독한 후 테힐라 사모합창단이 찬양했다. 이영재 노회장이 ‘주 안에서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2부 원로목사 추대식은 안동천 장로의 추대사 후 정재돈 목사가 기도한 후 노회장이 공포하고 추대패를 증정하고 노한상 원로목사가 답사했다. 노 원로목사는 몇년 조기은퇴하여 캄보디아 선교사로 남은 생애를 살고자 곧 출국하게 된다. 3부 목사위임식은 목사, 교우 서약 후 공포하고 위임패를 증정 후 증경노회장 김두형 목사가 위임목사에게 권면 후 증경노회장 이성무 목사가 “새로운 사역하시는 원로 목사가 부럽다. 강원화 목사는 성암교회의 부목사로, 선교사로 사역하다 담임이 되셨다. 선교사의 마음을 잘 헤아리실 것이다. 교인들은 담임목사에게 잘 순종하고 복종하고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교우들에게 권면했다. 강원화 위임목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리며 원로목사님과 교우들에게 감사드린다. 기쁘고 행복한 교회를 만들겠다.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 답사했다. 4부 축하는 증경노회장 이상협 목사가 "캄보디아 환경이 좋지 않아 그곳으로 떠나시는 노한상 원로목사님의 건강이 염려된다. 사역을 위임받는 강원화 목사님을 축하드리고 교회가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 교인 숫자를 많이 늘리시기 바란다“고, 은혜샘교회(총신대학원 교수) 담임 김영욱 목사가 ”바울은 교회를 집이라고 했다. 집처럼 따듯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교회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전하고 따른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 후 위임목사가족이 특송한 후 유영주 장로가 광고하고 증경노회장 최용범 목사의 축도로 은혜로운 모든 예식을 마쳤다. -
김병중(Th.D) 05-08 00:36
【천안중부교회사태10】 지금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몇 년째 내분을 겪고 있는 구 충남노회 소속 천안중부교회는 작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폐지된 충남노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올 3월 발급된 총회 공문으로 인해 더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총회 공문은 6개월 전에 총대들의 결의로 폐지된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해 "고영국 노회장"과 "이상규 서기"에게 소집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이로인해 새롭게 노회를 만들려고한 구 충남노회 소속 53개 교회와 천안중부교회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구 충남노회 사태에 대해 5번의 기사와, 천안중부교회에 대해 연속 기사를 써온 본 신문은 10번째로 교회의 안타까운 실상을 알리고자 한다. (관련 기사 링크【구 충남노회 사태1】폐지된 충남노회, 좀비로 부활?) 1. 공동의회개최금지가처분 판결이 있었음에도 이상규 목사는 공동의회(2023년 3월 19일)를 강행했다. 용역 6명을 고용하여 교회 예배당에 무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천 담임목사를 몸으로 밀쳐서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혔다. 천안 서북경찰서에서 폭행사건을 현장에서 접수했고 경찰 조사 결과 2023년 4월 29일 피의자 이상규 목사의 혐의가 인정되어 이 사건을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시켰다. 제 107회 총회 때, 충남노회는 폐지되었다. 그런데 충남노회폐지 수습위원회가 이상규 목사측에 소집권을 주었다는 것을 빌미로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채 목사로서 할 수 없는 용역을 동원하여 불법을 강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폭행까지 저질러 검찰에 송치되는 경악할 만한 일을 자행하고 있다. 2. 이상규 목사는 자칭 천안중부교회 당회장이라고 주장하며 교회 분열 세력측의 장로들과 불법 당회를 개최하여 2023년 4월 16일 김종천 담임목사 외 47명의 회원권을 정지하고 교회출입을 막았다. 이 공고문에 찍힌 천안중부교회 직인은 가짜 직인이기에 현재 사문서 작성죄로 고소당한 상태이다. 지금까지 윤익세 목사 측과 긴 법정 다툼을 이어오면서 윤익세 목사가 불법을 자행한다고 주장하던 이상규 목사가 본인도 동일한 불법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스피커 소리를 통해 계단 예배를 방해함 3. 교회 전체를 폐쇄하고 예배를 막자 김종천 담임목사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자, 급한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잠시만 급한 일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조차도 냉정하게 거절했다. 전쟁 포로나 감옥에 있는 죄수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기본도 지키지 않는 무뢰한이었다. 교회 출입이 막히자, 김종천 담임목사와 성도들은 교회 정문 앞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상규 목사측은 이런 간절한 예배마저도 방해를 했다. 주일 예배 때, 노약자들과 주일학교 학생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앉아서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정문 앞 계단에 물을 뿌려서 예배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심지어 교회 정문 위에 스피커를 설치해서 찬양을 시끄럽게 틀어 놓고 김종천 담임목사가 설교 할 때는 주진만 목사의 기도 소리나 설교 음성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게 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큰 소음 때문에 경찰까지 출동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4. 지금 교회의 모든 문들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종이와 현수막으로 물 셀 틈 없이 가리고 있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완전 문을 폐쇄한 채 밖에서 전혀 볼 수 없게 단절시켜 놓고 있다. 코로나 시국에도 한국교회는 교회를 폐쇄할 수 없고 예배는 멈출 수 없다고 부르짖었는데, 이상규 목사측은 지금 무엇을 얻기 위하여 교회를 폐쇄하고 예배를 막고 있는가! 점점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분쟁과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망가져가는 주님의 몸된 천안중부교회를 위해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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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4-28 22:39
김영구 장로, 유럽 한인CBMC 파리대회 참석 출국
제108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자인 김영구 장로가 제17차 유럽 한인 CBMC 파리대회 참석차 출국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정은 4월 27일부터 29일까지다. 출마 후보자들이 여러 모임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으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국제 행사이며 한국 CBMC 회장이기에 부득이 출국해 출마 인사를 다니지 못하게 됐다. 다음은 행사 축사 전문이다. 김영구 회장. 한국 CBMC 중앙회장 너희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 10:12) 제17차 유럽 한인CBMC 대회를 개최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회를 준비하고 개최하신 유럽총연 손 회장님과 총연 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와 격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계 각지로 보내신 경로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된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신 겁니다. 여러분들을 아브라함이나 요셉처럼 전 세계의 비즈니스 현장에 복의 근원이요 일터사역자로 삼으시고자 세계 곳곳으로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CBMC 사역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수 있도록 차세대 양육과 활성화를 위한 수고와 현신을 다하고 있는 유럽총연에 응원과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CBMC는 차세대 사역의 일환으로 CCC, 숭실대학교, 총신대, 칼빈대, 대구신학대, 광주신학대, ISF(국제학생회)와 MOU를 가졌습니다. CBMC와 대학교의 협약을 통해 일터 선배로서 복음을 잃어가는 캠퍼스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일터 현장에서 승리하는 CBMC 회원들의 모습을 나누고 협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학생들은 우리 CBMC의 미래입니다. 한국CBMC 회원뿐만 아니라 전 세계 CBMC 회원들이 다 같이 모이는 CBMC 세계대회 2023(12차 CBMC 세계대회), 제49차 CBMC 한국대회가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3박 4일 동안 오산리 영산수련원에서 개최됩니다. 이곳에 모이신 모든 회원들을 은혜의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CBMC의 정체성과 비전이 공유되며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은혜의 대회가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CBMC 회원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사업과 일터 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항상 함께 임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병중(Th.D) 04-03 11:31
남태섭 목사, 부총회장 후보 기립 만장일치 추천!
대구노회가 제103회 정기노회를 4월 3일 오전 10시 대구성명교회(배준현 목사 시무)에서 개최해 남태섭 목사(대구서부교회 시무)를 제108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기립 박수로 추천했다. 이로써 김종혁 목사(울산명성교회 시무)와의 경선은 불가피하게 됐다. -
김병중(Th.D) 02-08 22:06
김영구 장로, 한국교회 부흥 위한 Reset · Remind · Revival 운동 전개
김영구 장로가 교단과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비전 3R(Reset, Remind, Revival)을 제시했다. 지난 2월 8일 본인이 속한 바나바선교회 모임에서 김 장로는 “예장합동 교단이 개혁주의 신앙을 회복하고, 한국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3R이 필요하다”며 특히 “젊은이를 살리는 구체적인 사역을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김 장로가 말하는 3R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Reset이다. 우리 교단 140년 역사를 생각하면 대한민국에 장로교가 전파되고 세워졌던 그 시대, 그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하는 Reset이 필요하다.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고쳐야 한다. 이미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지만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서 즉시 고쳐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우리 교단이 진정한 회개를 통해 첫 신앙을 회복함으로 하나님께 칭찬 듣는 교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Reset’과 ‘Rebooting’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는, Remind이다. ‘Reset’ 혹은 ‘Rebooting’ 즉, 철저한 회개를 한 다음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정도의 순수한 신앙으로 눈물의 회개 이후에 부어주신 부흥의 은혜를 누렸던 한국교회 부흥의 열기를 회고하며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선배들이 경험했던 부흥의 은혜를 돌아보며,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부흥의 원인이 무엇인지 되짚어 봐야한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역사에는 부흥을 되새길 수 있는 기적적인 사건들과 은혜로운 역사가 여러 지역, 여러 교회에 많이 있다. 이 아름다운 부흥의 역사를 기억하며 회복시켜 나아가면서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해야한다. 셋째는, Revival이다. 우리는 다시 부흥한국의 꿈을 키워야 한다. 흔히 말하는 MZ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교회에서, 사회에서 청년 대학생들이 너무 방황하고 힘들어한다. 미래의 불안도 있지만, 신앙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대학들의 MZ세대 대학생들이 예배(채플)는 거부하지만, 소그룹활동은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CBMC(Connecting Business & Marketplace to Christ, 사단법인 한국기독실업인회)를 통한 캠퍼스 사역을 활성화함으로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고자 한다. 이 사역은 캠퍼스 사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훈련된 MZ세대 대학생들이 각 교회에 파송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도 CBMC를 통해 지속성을 가지도록 할 것이다. MZ세대 대학생들이 가지는 미래사회를 향한 불안감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CBMC의 일터 사역으로 인도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미 '캠퍼스 복음화 사역'을 위해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및 '숭실대학교'와 선교 및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대학 캠퍼스의 복음화와 일터 선교의 동반자적 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CBMC 회원들을 통해 복음을 심을 수 있는 훈련되어 있다. 이 가운데 100명을 선발해 숭실대학교 학생 7~8명을 하나의 소그룹으로 구성하고, 12주 과정으로 100개의 셀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청년들이 외면하는 기독교 신앙을 회복해 나아갈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700~800명의 훈련된 대학생들이 캠퍼스 복음화와 교회 청년부 활성화에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그야말로 '다음 세대 부흥의 새로운 전략'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김영구 장로는 장위제일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주) 엘림BMS 대표이사, 국가조찬기도회 이사, 인간개발연구원 이사, 제19대 한국 CBMC 중앙회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김병중(Th.D) 02-05 14:03
주일학교를 살립시다-이해중 장로(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코로나로 인해 한국교회가 큰 타격을 받은 가운데 주일학교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코로나 3년, 이제 엔데믹을 맞아 조금씩 모임을 재개하는 가운데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는 부서가 총회 전국주일학교연합회(회장 이회중 장로)이다. 주교연합회는 지난 1월 12일 사랑의교회에서 제68회기 전국대회를 학생, 학부모, 교사 등 6000여 명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어 지난 2월 3-4일에는 ‘2023년 신년 교사 세미나’를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수원 라비돌리조트에서 뜨겁게 개최했다. 이 두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많은 관계자들과 임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회장 이해중 장로의 수고가 있다. 주일학교를 향한 그의 열정을 그가 쓴 글에서 느낄 수 있다. 주일학교를 살립시다 어린 시절, 십자가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고 두 손 모아 기도할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의 일이다. 신앙을 물려주신 부모님과 열정을 쏟으면서 가르친 교회 선생님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감동과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 교회 생활과 연합회와 교단 총회를 섬기면서 이성적인 판단과 분석이 앞서고 일의 효율성만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순수한 신앙이 사라지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주일학교가 폭발적인 부흥을 하던 시절 교회를 다녔다. 교회 부흥의 황금어장이 주일학교였다. 현재는 그 주일학교 출신들이 교회의 중진이 되어 교회와 교단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주일학교는 ‘위기에 빠진 상태’라고 진단하는 속상함이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게 한다. 입버릇처럼 주일학교가 위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그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현실적인 시대의 분석과 감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첫째, 무엇보다 양질의 교사 양성이 필요하다. 주일학교의 위기는 곧 교사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교사는 메꿀 수 없는 공백이 있다. 그 공백에는 시대의 변화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내일이라고 하는 미래의 주일학교는 기대 속의 현재 주일학교’라는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교사 교육에 전념해야 한다. 우물이 메말라 버렸다. 교사들의 사명감을 강하게 붙들고, 영혼 사랑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교사 교육이 대형교회를 제외하면 힘든 실정이다. 이것을 교단 교육국에서 준비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2030년쯤이면, MOOC(무료 인터넷 강좌), AIT(인공지능 강사)가 등장한다고 한다. 즉, 학업에 대한 새로운 플랫폼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국주일학교 유관기관 간담회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교단 교육국에서 인터넷(유튜브 강좌)을 통한 주일학교 교사 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저출산으로 말미암는 초고령화 시대’로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현실적 문제다. 현재 주일학교의 어린 학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MZ 세대’보다 더 어린 세대이다. 지금은 알파세대가 이미 출몰했다고 한다. 이들을 이해하고 전도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을 교회가 발굴해야 한다. 아주 짧은 순간에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올 수 있는 복음전도의 대안이 필요하다. 셋째, 목회자의 생각 변화가 필요하다. 강단에서는 ‘다음세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적용에서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교회의 ‘교육에 관한 예산’에서 순수하게 주일학교 예산은 몇 %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예산의 투자도 없이 주일학교의 부흥을 갈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신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주일학교 운영, 주일학교 부흥방안, 다음세대의 이해와 대안’ 등과 같은 교과과정의 변화와 더불어 ‘주일학교 관련 연구기관’도 있어야 한다. 주일학교의 경험이 부족한 초보 전도사들이 교사들을 이끄는 것은 역부족이다. 시대의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대안을 교단과 신학교에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췄던 전국대회에서 아직 우리의 희망을 발견했다. 이 희망이 결실되도록 지도자들이 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아낌없는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신앙교육의 투자’를 통해 주일학교 부흥의 백년대계를 이뤄야 한다. 교단에서는 총회장의 ‘샬롬 부흥! 전도운동’과 ‘다음세대목회부흥운동과 스말로그교사대학’, ‘교육개발원의 하나바이블’ 등을 통해 다음세대 양육과 성장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고무적이다. 이제 우리 교단이 새로운 부흥을 준비하기 위한 대안을 가져야 할 때이다. 주일학교가 어린 학생만 대상이 아니라 전 교인이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맞춤형 신앙학습’(PBL, Personalized Belief Learning)을 통해 신앙의 낙오자와 같은 ‘가나안 성도’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고기를 잡는 일에 그치지 말고, 어장을 잘 관리해 괴사하거나 폐사하지 않고 건강하고 당당한 신앙의 용장을 길러야 한다. 골리앗 같은 세상에 맞설 수 있는 다윗을 교회에서 교육이라는 도구로 양육하는 일에 기도와 후원과 노력을 교단 총회와 전국 교회가 동참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
김병중 01-13 03:33
주일학교 부흥을 위한 절박한 호소
본 기사는 1월 12일 있었던 '2023년 주일학교 전국대회' 책자에 있는 대회장 이해중 장로의 대회사이다. 내용 중에 깊이 새겨야할 내용들이 있기에 단독으로 기사를 만들었다. 대회사에서 이해중 장로는 대면으로 대회를 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고, 코로나로 인해 떠난 교인들이 아직 다 회복되지 못했기에 총회의 샬롬부흥에 적극 동의하며, 전국주교에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라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밝혔다. 다음은 전문이다. 대회사 부르심에 합당한 교사가 되자(엡4:1)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2023년 새해 벽두에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제68회기가 코로나 가운데서도 절치부심(切齒腐心) 기도하며 전국대회를 실시한 것은 3년 동안 온라인 비대면으로 대회를 하였기에 올해는 기필코 코로나를 넘어 부르심에 합당한 전국주교와 임원 및 교사 그리고 학생과 어린이가 되기 위한 몸부림과 40일간 임원들과 분과장들이 하루 한 끼 금식하며 이루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사랑의교회 담임 오정현 목사님의 다음세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으로 장소와 편의를 제공하시고 선물까지 조건 없이 해마다 기부하시는 모습은 한국교회와 다음세대에 큰 귀감과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세계를 통틀어 전국성경고사와 찬양 율동 워십 및 암송대회를 기획하고 실시하는 단체는 유일하게 우리 합동교단 교육부산하 전국주일학교 밖에 없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 확장과 다음세대를 위하고 미래 교회의 소망을 펼치기 위해서는 타 교단도 우리들을 본 받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전국대회가 있기까지는 앞서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통한 증경회장님들의 노고와 섬김에 깊이 감사드리며 교단적으로는 총회장님과 교육부장님을 비롯한 전국교회가 큰 관심을 가지고 협력 해 주시고 특별히 교육개발원을 통하여 하나바이블을 집필하여 수준 높은 교재를 발간하여 양질의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허락 하셔서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았지만 위드 코로나에 잘 대응하여 4차 혁명시대에 맞는 교육관을 재정립하여 기독교 세계관으로 다음세대를 교육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예배와 성경공부 전도방법을 연구하여 컨텐츠개발, 보급과 현장에서 적용하는 모든 과정을 교육부와 교육개발원을 비롯한 해당 기관에서 연구하여 하회기관에 하달하는 것이 당면과제 이기도 합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교회가 70%정도 출석이 회복되었다는 통계도 있지만 주일학교는 43%라는 실망스러운 지표가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앞장서고 교회마다 주일학교 회복과 다음세대 부흥을 위하여 샬롬!부흥을 외치며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다음세대는 생물과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도 같습니다. 총회적으로 큰 결단이 있어야 하고 교육부가 통큰 결단으로 다음세대의 방향을 설정하고 전국교회가 힘쓸 때라고 여겨 집니다. 특별히 68회기 주제로 삼은 에베소서 4:1절을 포함하여 4장 전체는 각자의 분량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새사람이 될 것과 서로 용서하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명령에 더하여 목사와 교사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게 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교사는 사명을 넘어 소명의식을 가지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시대를 앞서 다음세대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양육할 수 있다고 사려 됩니다. 전국에 계시는 목사님과 장로님, 지도자 여러분! 다음세대를 우리가 케어 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요원할 것입니다. 총회장님 이하 유관기관에서 힘쓰고 계시지만, 전국에 계시는 목사님들께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음세대교육에 관심과 협력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전국에 161개 노회가 있지만 전국주교에 등록된 노회는 100여개 노회와 성경고사에 참여하는 노회는 절반의 수준도 되지 않은 72개 노회에 불과 합니다. 성경고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성경공부와 다음세대교육이 저조하다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근 보도에 우리교단 성도수가 230만이고 통합측이 240만이라는 보도에 잠시 귀를 의심했습니다. 장자교단이라고, 세계에서 최고의 성도수를 자랑하던 것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니 실망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통계 역시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마저 듭니다.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우리교단이 107년의 역사가 있지만 전국에 있는 주일학생 수가 통계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겨지지 않습니다. 10년 전부터 전국에 교사가 20만이라고 했지만 이 역시 현재로서는 신빙성이 없다고 봅니다. 주일학교 교사와 주일학생 인원이 정확한 통계로 나와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저 출산 고령화로 인한 위기라고 하지만 진정한 위기는 통계조차 없으니 관리와 대책이 미진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이행이 되지 않아 이 역시 지면을 통하여 건의 드립니다. 전국주교 35명의 임원들은 2023년 새해에도 변함없이 다음세대와 교사교육을 위해서 힘쓰겠습니다. 총회와 교단적으로 협력을 구하며 지 교회별 주일학교 활성화를 위하여 목사님들 힘써 주시고 혹, 주일학교가 없는 노회는 설립을 전국주교에서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30세 이하 교사가 결혼하면 출산장려금도 작지만 일정금액을 지원하는 제도도 만들었으니 지역 임원이나 전국주교에 문의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모쪼록 전국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하며 일선에서 수고하신 선생님들과 학부모님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특별히 교육부장 노경수 목사님과 임원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감사를 드리며 마지막까지 섬겨주신 사랑의교회 부교역자님들과 섬겨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전국주일학교연합회는 다음세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기독교세계관으로 잘 양육하여 세계를 선도하는 영향력있는 지도자 배출을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교단과 함께 회복을 넘어 샬롬! 부흥을 기대하며, 전국주교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모든 분들 위에 하나님의 평강이 세세토록 임하시길 기원하며 대회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병중 12-16 18:59
전광훈 목사 이단 규정, 조건부 유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2차 실행위원회가 12월 15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주요 안건 중 하나는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규정이었다. 이날 실행위가 열리는 회의장 앞에서는 전 목사의 이단 규정을 반대하는 신도들이 대거 몰려 ‘실행위는 불법이다. 전광훈은 이단이 아니다’ 등으로 목청 높여 시위했고, 출동한 경찰과 뒤엉켜 난장판이 됐으며 회의가 끝날 때까지 시위는 계속됐다. 실행위원회에서 전 목사 이단 규정 건에 대해 열띤 공방이 있었다. 이런가운데 전 목사 이단 규정 건 상정 직전 언론출판위원장 이흥선 목사가 “이단규정 문제는 신중해야 한다. 오늘 이단 상정 안건은 실행위에 상정하지 말고 다시한번 이대위를 통해 전 목사에게 청문기회를 주고 그 결과와 결의를 임원회에 일임해 주자”고 제안해 이의 없이 만장일치 가결해 가까스로 이 문제를 처리했다. 이번에 전 목사 이단규정 건이 상정되어 표결로 부쳐질 경우 100% 통과될 상황이었지만 재검증 기회를 줌으로서 전 목사 입장에서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됐다. 결국 앞으로 전 목사가 이 청문 절차에 얼마나 진실함과 성의를 보이느냐에 따라 이단 여부가 판가름날 전망이다. 그러나 과거 전 목사는 소명의 기회를 모두 거부했다. 한기총 이대위는 전 목사에게 문제된 내용들을 적시하여 출석해 소명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1차 공문을 발송했을 당시 전 목사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1개월의 기간을 주면 출석하겠다고 한기총에 정식 공문을 보내왔다. 이에 이대위는 전 목사의 요청을 존중하여 1개월간 이상의 충분한 기간을 주었다. 그런데도 전 목사측은 아무런 답변 없이 2차에 이어 3차에도 불출석하였다. 이는 한기총과 이대위를 우롱한 처사였다. 전 목사측은 공문으로 요청한 약속까지 지키지 않았다. 한기총 이대위의 지적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고치겠다는 약속 등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심각한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비록 유예기간이 주어졌지만 과연 전 목사가 성실하게 소명할지는 미지수이며 그 경우 한기총 이대위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어찌되었든 전 목사에게 씌어진 “이단”이라는 굴레는 어떻게해서든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그리고 설혹 이단이라고 규정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한 이 발언을 과연 어떻게 해명할지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이렇게 말한 목사나 신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에하나 전 목사가 이단으로 규정될 경우 그 후폭풍은 본인에게나 지지자들 그리고 전 목사 반대자들 그리고 전 목사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정치권에 큰 태풍이 될 전망이다. -
김병중 11-30 09:39
추태화 교수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 만화 출판 기념회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교수를 역임한 추태화 교수가 저술한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를 누구라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화로 제작해 출판 기념 북콘서트 및 기자간담회를 11월 29일 오후 5시 종각역 근처 문화공간 온에서 가졌다. 안계정 박사(틸리케 전문가)의 사회로 1부 감사 예배는 문정식 목사(열린교회/ 증산동)의 기도 후 유종성 목사(사랑의교회, 카이퍼연구소 소장)의 인도로 성경을 같이 읽고 찬송한 후 주기도로 마쳤다. 저자 추태화 교수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오늘 이 모임을 하는 이 곳은 고등학교 때 데모를 하기 위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그때부터 권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대학 때도 데모를 많이 했고 독일로 유학 가서 뮌헨에 거주하며 역사적 유물을 보는 가운데 유대인의 피해를 기념하는 것들을 많이 보게 됐다. 뮌헨에서 나치가 출발했는데 그때 과거 데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문학이 어려운 시대에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 생각으로 이 책을 쓰게 됐다. 책을 만화로 만든 이유는 많은 분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치가 활동하던 때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를 당하던 때였다. 나치는 기독교를 활용하기 위해 회유책을 사용했다. 초기에 이에 동의했던 교인들이 후에 그들의 의도를 알고 돌아서게 됐다. 이 시대를 하나님 기뻐 하시는 시대로 만들기 위해 만화로 만들게 됐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책이 되기를 바라서 만화 1권의 표지는 파란색으로 2권의 표지는 빨간색으로 만들었다”고 인사말했다. 이 책을 만든 위성 만화 작가가 "교수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분들이 봐주시면 좋겠다"고 인사 후 안양대 김광수 교수가 “정치와 종교는 밀접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할지를 고민해야한다. 이 책이 좋은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리뷰하고, 김자현 작가가 시낭송을 했다. 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박병득 목사가 “책 출간을 축하드린다. 만화는 친근한 매체이다. 이 책을 통해 교인들과 교회가 각성하기를 바란다”고, 권오일 교장이 “한국교회에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 뉘우치지만 말고 이제는 고쳐야한다. 이 책이 회개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김세준 교수가 "이 책은 과거 독일 교회가 했던 잘못을 보여주기에 매우 유익하다. 앞으로 만화 영화로도 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축사했다. 기념사진들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 만화 1)원작 2012년 만화 [권력과 신앙: 히틀러 정권과 기독교] (저자: 추태화, 그림: 위성, 에스디지북스 2022)는 동명의 원작 (추태화, 2012)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2)내용은 독일 나치즘의 기독교 정책과 기독교의 반응에 관한 이야기다. 나치주의는 히틀러로 대표되는데 이는 맞으면서도 틀리다. 오해와 왜곡이 가미되어 있다. 나치주의는 무비판적 집단이 일으킨 광기의 이데올로기, 극우파 파시즘이라 하겠다. 히틀러 개인이 할 수 없는 괴물적 권력의 참혹한 총체적 오작동이었다(역사상 다시 있어서는 안될 토탈 정치 시스템인데 현재도 지구촌 곳곳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심각하게 경계해야 한다). 당시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제국”으로 다시 재기하려는 극우파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이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선전선동의 대중조작, 집단무의식, 집단 히스테리로 확산되더니 급기야 집단 광기로 변질되어 전국을 게르만 신화와 민족주의, 제국 이데올로기의 광풍으로 몰아 넣었다. 여기에 찬성하면 애국자, 반대, 저항하면 민족의 배신자 취급 당하는 몰상식이 판치는 세상으로 돌변하였다. 1933년1월 나치당이 선거에서 승리, 히틀러가 수상이 되므로 비극은 시작된다. 민중은 아무 것도 모르고 환호했다. 3)권력 투쟁과 희생양 나치주의의 이념은 아리안-게르만족의 제국 건설이라는 소위 영광스런 제국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민족이 중심이 되어 모든 사회를 경영한다는 국가사회주의 체제, 즉 전제통치를 내세웠는데 이는 나치즘 일당독재, 나중에는 히틀러 독재로 돌변하고 정치기술적 하수인들로 채워졌다. 그들의 목표는 정권 탈취와 절대 지배였다. 전체가 개인에 앞선다는 강령으로 국가 민족 집단이 우선시 되고 개인은 철저히 무시되는 사회이다. 나아가 아리안, 게르만족이 아니면 모든 공직에서 퇴출되고, 무가치한 생명이라 판단한 이들에게 비인간적 행동을 자행하였다. 외국인, 장애인, 특히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행동은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4)편가르기 전략과 탄압 나치주의자들은 철저하게 나라를 갈라치기 하였다. 나치찬동자는 내편, 나치반대자는 네편,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하여, 권력을 쥔 나치주의자들이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인, 당원, 군인, 경찰, 산업체, 사업체, 학교 등등 나치가 아니면 활약하기 힘든 구조로 변해갔다.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독일 기독교계는 역시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야합과 저항이라는 비극을 맞는다. ‘국가와 민족이 우선이다’는 이론에 굴복한 기독교는 제국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었고, 복음에 서서 이에 반대하는 저항기독교인은 고백교회를 형성했다. 5)종교의 정치화, 정치의 종교화 나치주의자들은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기독교를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파악했다. 이미 정치를 종교적 대중운동으로 작동시키려는 나치는 기독교를 그렇게 이용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합법적 투표라는 빌미를 내세워 점점 권력을 차지해갔다. “기독교인은 나치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복음적 판단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반나치운동이 일어나게 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를 국가 기관에 종속되는 과정에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저항 운동을 펼쳐나갔다. 개신교 목사들을 중심으로 ‘목사긴급동맹’이 결성되어 전국에서 나치반대 성명을 내며 투쟁에 돌입하였고, 이어 바르멘신학선언을 통해 그 정당성을 공포하여 고백교회 결성이 구체화 되었다. 가톨릭계는 침묵에서 점점 저항으로 정세를 판단하였다. 당시 교황 피우스 12세는 “타는 근심으로”하는 교서를 발표하여 나치주의를 경고하였으며 사제단과 교인들에게 바른 판단력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계열은 이미 제국교회와 고백교회로 나뉘어져 혼란스런 상황에서 복음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6)저항운동에서 제거작전으로 나치가 정권을 잡는 1933년 1월부터 기독교계는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나치당이 내세운 아리안법은 사회 모든 영역, 교계에서도 적용되어 아리안족에 속하지 않으면 퇴출되어야 했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이에 수많은 교계지도자들이 항거 항변 하였으나 절대 권력을 쥔 나치당을 이길 수 없었다. 이로서 독일 시민 사회, 교계는 선택해야 했다. 해외 이민, 내부 망명(재야에서 침묵, 방관, 또는 저항), 야합이 선택지였다. 의식있는 교인들은 재야에서의 저항을 선택했고, 개신교의 경우 고백교회를 형성했다. 이들 중 “내 양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믿음으로 해외 망명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본회퍼 등). 나치의 탄압이 거세지고, 비인간적 만행과 전쟁 도발이 이어지자 사회 여러 분야에서 저항을 넘어 히틀러 암살이라는 악의 제거를 구체화 하였으니 이는 히틀러와 그 하수인들은 적그리스도라는 신학적 판단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안에서도 “악의 제거는 살인”이라는 딜레마에 부딛쳤으나 유대인 핍박과 학살을 알게 되면서 악의 중심에 있는 히틀러를 적그리스도의 한 분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쉬츠 목사는 “사탄의 자기부정”으로 시대의 혼돈을 경고하였고, 틸리케 목사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적 상황”을 지적하였으며, 본회퍼 목사 역시 그러한 판단에 수긍하였다. 그가 경고한 “값싼 은혜”는 지금도 반성해야할 점이다. 악의 본성으로 세상을 종말적 상태에 몰아넣던 히틀러, 여러 암살 작전은 그만 실패하고 만다. 총통이라 불리던 이는 1945년5월 베를린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고 나치의 패망과 함께 정권의 종말을 맞는다. 7)한국 사회와 유사한 점 1930/40년대 독일과 한국은 유사점이 있다. ▲독일은 나치파시즘에 지배당했고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에 지배 당했다. ▲탄압 과정 속에서 특히 기독교계가 문제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독일은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려 했다는 점, 한국은 3.1운동과 같이 민족적 저항의 심장이 되었다. ▲정권의 반응으로 사회가 야합과 저항으로 나뉜 것처럼. 교계도 그랬고 한국 상황도 유사했다. ▲독일은 민족신앙을 기반으로 민족종교 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민족적 요소가미를 통해 사이비 이단적인 주장들이 생겨났다. 한국도 일제 시대와 그 후에 유사한 현상이 생겨난 것은 분명했다. ▲1945년 8월. 전쟁 이후 독일과 연합군은 탈나치화 정책을 실행했지만 한국은 친일부역자, 친일반역자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8)현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 ▲독일 나치즘 지배시에 행해졌던 친나치, 반나치 갈라치기 현상이 우리 사회에 좌파-우파, 진보-보수, 여당-야당, 극좌파-극우파, 주사파, 중도진보, 중도보수 등등. 또한 친미, 친일, 친북, 친중 등등 사분오열 되어 국론 분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국가가 교회를 지배, 통제하려는 나치 정책이 있었다면, 우리의 정권들 또한 기독교를 정치에 활용하려는 “종교의 정치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 교계가 야합과 저항이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므로 교계의 분열만 아니라 교리, 신학의 대립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면, 한국은 다양한 교단의 다양한 대응이 어떻게 복음 안에서 연합할 수 있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난제이다. ▲나치가 소련 사회주의 위협을 빌미로 불안 조성 및 방어를 정책으로 삼아 정권 탈취에 성공, 그 이후 전쟁으로까지 도발했다면, 한국에게 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존재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판단, 대응해야 하는가? 깊은 성찰과 행동이 요구된다. ▲다양한 국론,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여 진정한 평화와 대동의 대한민국을 후대에 물려주려면 현 교계가 분열을 어떻게 봉합하며, 구체적으로 취해야할 행동은 무엇인가? ▲나치는 복음을 이용하여 교계를 컨트롤 하려 했다. 현 한국의 분열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정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은가? 당시 제국교회는 정권을 이용하면 선교에 유익하다는 오판을 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정권에 의지하려는 자세부터 값싼 은혜의 폐단이다. ▲정치 투쟁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행태를 회개하고,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음적으로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백교회는 완벽한 지상의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교회에서 배워야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치에 항거한 목사긴급동맹과 같은 선지자적 행동은 한국 교계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기타 남는 질문들: 이 만화를 통해 과거 역사를 불러와 현재를 조망, 투영,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려면 어떤 질문들을 던져야 하는가? -
김병중 11-28 14:55
대놓고(?) 법을 무시하는 증경총회장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권순웅 목사) 제104회 총회장을 역임한 김종준 증경총회장(꽃동산교회)이 은퇴를 앞두고 타교단 목사를 후임으로 내정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몇몇 언론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지난 11월 19일 있었던 꽃동산교회 제14차 임직감사예배에서 명예장로를 장립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김종준 증경총회장은 교단지 기독신문에 임직감사예배 광고를 내면서 명예장로장립자를 사진과 함께 '버젓이' 게재했다. 그런데 제105회 총회장을 역임한 소강석 증경총회장(새에덴교회)도 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여러명의 명예장로를 게재하고 있다. 현재 합동측 헌법에 의하면 명예장로는 없다. 그런데도 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증경들이 명예장로를 둔다는 것은 총회법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더군다나 교단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야할 증경총회장들이 법을 무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교단 목사들이 이들을 따라할까봐 우려된다. 모든 합동측 목사들이 교단 법을 잘 준수해야하나 증경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교단은 증경총회장들을 예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임자 선정 과정이나 또는 목회에 있어 끝까지 바른 본을 보이는 것이 증경총회장들의 역할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인 것을 물을 수 밖에 없는 증경들의 처신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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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12-31 10:23
전광훈 목사, 징역 4년 구형 후 윤 대통령에게 선처 호소
검찰은 지난 12월 21일 결심 공판에서 2020년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전 목사는 그해 8월 15일 코로나로 인해 집회금지명령을 받았음에도 대규모 집회를 주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됐었다. 전 목사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자신이 윤 대통령을 당선 시켰다고 공공연히 발언었했다. 투표율이 저조할 때 사람들을 차로 실어날라 투표 시켰다는 선거법 위반 사실도 자랑 삼아 말하기도 했었다. 또한 24만표의 저조한 차이로 윤 대통령이 당선되었기에 반대측을 대항하는데 자기가 적격자라고 하며 호위무사를 자처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사랑제일교회 교인들과 추종자들에게 국민의힘당에 입당해 당원이 되어 당대표 선출 등에 관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자기 딴에는 윤 대통령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집행유예를 받기 어려운 징역 4년이 구형되었기에 구속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 문 대통령 때 구속이 될 때는 문 정권과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탄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자기가 지지하는 윤 대통령에 의해 구속이 되면 뭐라고 말하지 입장이 딱하게 됐다. 그는 한 유튜브 동영상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선처를 구하는 발언을 해 현재 상황이 녹녹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시각각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목줄을 피할 수 있을까? -
김병중 09-27 22:18
한국 자살률, OECD 국가 중 1위..교회의 대안은 없는가?
9월 10일은 ‘세계자살예방의 날’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생명의 소중함과 국가적, 사회적으로 증가되고 있는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2003년 9월 10일을 ‘세계자살예방의 날’로 제정했다. 우리나라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에 따라 ‘세계자살예방의 날’과 같은 매년 9월 10일을 ‘자살예방의 날’로 제정했다. 그러나 올해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2003년 이후 2번 빼고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갖고 있다. 특히 10대부터 30대까지 사망원인 1위가 자살로 나타났다. 9월 2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사망원인통계'를 보면, OECD 국가 간 연령표준화 자살률(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에서 한국은 23.6명을 기록해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이는 OECD 평균 11.1명의 두 배가 넘는 수치이며 한국을 제외하면 해당 통계에서 20명이 넘은 나라는 리투아니아(20.3명, 2020년 기준)가 유일했다. 지난해 한국의 자살 사망자는 총 1만3352명이었다. 이는 전년 대비 157명(1.2%) 증가한 결과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인한 사망자를 뜻하는 자살 사망률은 26.0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대비 0.3명(1.2%) 증가한 결과다. 연령별로 보면, 자살은 10대부터 30대까지 사망원인 1위였다. 지난해 전체 사망의 외인(사고나 타살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사망)에 의한 사망률(인구 10만 명당)은 50.9명으로 나타났으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26.0명이 자살로 인한 사망자였다. 남녀별로 나눠 보면 지난해 남성의 사망의 외인에 의한 사망률은 69.5명이었고 이 가운데 자살 사망률은 35.9명이었다. 여성의 사망의 외인에 의한 사망률은 32.5명이었고 자살 사망률은 16.2명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 나눠 보면, 10대 이상 전 연령에서 사망의 외인에 의한 사망률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았다. 10대의 경우 전체 사망의 외인에 의한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명)은 10.1명이었고 이 가운데 자살은 7.1명이었다. 20대의 사망의 외인에 의한 자살률은 30.1명이었고 이 가운데 23.5명의 외인이 자살이었다. 30대는 34.1명 가운데 27.3명이, 40대는 38.5명 가운데 28.2명의 사망의 외인이 자살이었다. 전체 자살의 60~80% 정도는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한다. 한국인의 우울증 환자는 전국민의 5%(여자 5~9%, 남자 2~3%) 정도며, 전국민의 20% 정도는 일생동안 한 번 이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추정된다. 그 밖에 알코올 중독증, 정신분열증, 강박증, 불안 장애 등의 정신과적인 문제도 자살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런데 정신질환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치료 가능한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이 우울한게 아니라 뇌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감소해서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므로 반드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이며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자살 대국이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40명꼴로 매일 자살하며 분으로 환산 하면 35분에 1명씩 자살하고 있다. 특히 60세 이상의 노년층의 자살률이 10만 명당 45명에 육박하고 75세 이상 자살률은 평균치의 3~4배를 기록하고 있다. 자살충동을 느낀 사람 중에서 약 40% 정도는 경제적 문제였고 20%는 신체나 정신적 장애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살자의 50~80% 정도는 정신과적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 최근 한국 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 10년간 1282건의 자살 원인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울증(20.8%), 심리불안(20.6%) 등 정신과 및 정신과 관련질환으로 인한 자살이 41.4%였다. 정신분열병 환자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도 자살이다. 특히 정신분열병이면서 피해망상, 죄책망상, 지시환청 등 증상이 심할수록 자살을 결심하기 쉽다. 이들은 증상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죄책감 등 괴로움을 피하려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알코올은 우울증, 인격장애 등과 더해져 자살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정신과 질환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살자의 약 50%가 술에 취한 상황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알코올 의존자의 40% 정도가 평생 동안 적어도 한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다는 보고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코올 의존환자이면서 50세 이상 남성, 한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 경험, 주요우울증 등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알코올 의존환자에 비해 자살률이 높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자살자들이 선택한 장소는 집과 그 주변이 57.4%로 나타났다. 이같은 행동은 자살자가 목숨을 끊는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의 자살을 말려 주기를 원하는 심리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자살을 실행하기 전 자살자의 약 75%가 주변에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등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자살 가능성이 큰 정신분열병이나 우울증 환자의 가족들은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대화나 설득만으로 우울증이나 정신분열병 환자의 자살을 막기는 어렵기 때문에 약물치료 등 전문의의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도 자살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최후의 탈출구지, 최선의 해법이 아님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자살자의 80% 정도는 주위 사람에게 자살의사를 넌지시 표현하거나 직접적으로 밝힘으로써 ‘구조’를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의 위험 징후는 다음 12 가지로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자살 위험을 염두에 두고 전문적인 도움을 청하는 등 조처를 취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극도로 우울하고 불안해하며 지쳐 있다. ▲자신의 죽음이 가족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부쩍 늘었다. ▲자살할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다 갑자기 차분해지고 편안해 한다. ▲최근 가족의 죽음이나 건강 상실 등 힘든 일이 있다. ▲가족 중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있다. ▲삶의 무가치 성을 강조하며 의기소침해 한다. ▲식사, 성, 수면 등 생물학적 욕구가 현저히 줄었다. ▲알코올 의존이 있다. ▲별거나 이혼, 사별로 혼자 살고 있다. ▲평소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아낌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자살도 예방 치료할 수 있다. 자살의사를 넌지시 또는 직접적으로 내비치면 피하지 말고 자살의 동기와 방법 등을 꼬치꼬치 캐물어 자살에 관한 생각을 털어놓게 해야 한다. 충분히 말을 들어주고 정서적으로 공감해준 뒤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평가해 주면 자살 결심을 돌이키는 경우가 많다. 또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당사자에겐 자살기도가 병의 결과임을 설명하고 전문의에게 상담·약물 치료를 받도록 권유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자살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엔 즉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 급성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결심은 수시간 내 행동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크므로 응급 입원의 대상이 된다. 입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혼자 내버려두지 말고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자살을 못하게 해야 한다. 이처럼 자살공화국인 우리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생명을 어떻게 자살 시도자들에게 전해 그들을 살려야하는가? 한국교회는 자살 예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그들을 살리는 일에 노력해야할 것이다. 자살 시도자들을 살리는 것은 교회가 관심 가져야할 또 하나의 전도 영역이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샬롬'(평안)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신자들의 사명이다. (기사 참조: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92713574355237 https://sundayjournalusa.com/2021/11/03/ ) -
김병중 04-06 18:16
중도 연대, 불송치 결정 이의신청
중도유적보존범국민연대회의 본부장 오정규 씨는 강원도의회 기획행정위원장과 춘천시 문화콘텐츠과장을 상대로 불송치 결정 이의신청서를 춘천경찰서에 접수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불송치 결정 이의신청서 사 건: 2022-000532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등 피의자: 강원도의회 기획행정위원장 김규호 신청인: 중도유적보존범국민연대회의 본부장 오정규 위 피의사건에 대한 춘천경찰서 2022. 3. 22.자 불송치 처분에 대하여 신청인(고발인, 이하 ‘고발인’이라고만 합니다)은 불복이므로 이의 신청을 제기함과 아울러 다음과 같이 이의신청 이유를 개진합니다. 다음 1. 피의사실의 요지 및 불송치 결정 이유 가. 피의사실의 요지 이 사건 피의사실의 요지는 1) 중도 역사유적지위에 레고랜드 놀이터를 짓는 반역적인 범법자들이 놀이터로도 부족하여 초대형 컨벤션센터를 유적지위에 짓겠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불법 부동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컨벤션센터는 일종의 공공기관 시설물이므로 강원도가 자기 소유의 부지였던 컨벤션센터 부지(춘천시 중도동 357-41번지 등을 포함하는 54,200m²(이하 해당부지))에 강원도비로 그냥 지으면 되는 것인데도, 주식회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에 공사비를 밀어주기 위해 해당부지를 평당 58만원에 팔고 다시 5배 이상 올려서 평당 304만원에 되사기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억원의 강원도민의 혈세가 탕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부동산 범죄는 지난 수년동안 수차례나 자행되어 왔습니다. 피의자 김규호는 강원도의회 기획행정위원장으로써 기획행정위의 심의와 강원도의회 본회의에서의 상기 불법사항에 대한 의결을 주도하였습니다. (특가법, 배임, 직무유기, 공직자윤리법, 부동산법 등 위반) 2) 강원도가 해당부지 중의 357-41번지 등을 평당 약 58만원에 판 시점이 2021.4.28.인데 5배 이상 올려서 다시 되사겠다고 도의회에서 심의한 시점이 2021.04월에 열린 강원도의회 제299회 임시회였으며 결국 의결 통과시킨 시점이 2021.05월에 열인 300회 임시회였습니다. 즉 거의 같은 시기 시점에서 강원도는 357-41번지 자기소유 토지를 평당 약 58만원에 팔았고 거의 동시에 357-41번지를 포함하는 인접부지인 컨벤션센터 부지를 평당 약 304만원에 되사기를 하겠다며 도의회에서 의결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관청이 주도하는 부동산 매매가격 조작입니다. 컨벤션센터 부지매입비 명목으로 이렇게 탕진되어지는 강원도민 혈세만도 499억입니다. (특가법, 배임, 직무유기, 공직자윤리법, 부동산법 등 위반) 나. 불송치 이유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이 사건 불송치 결정의 요지는 상기 피의자의 배임의 범의 등을 찾기 어려워 고발을 각하한다는 입장입니다. 2. 불송치 결정 이유의 부당성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이 사건 불송치 결정의 부당함을 아래와 같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1)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배임의 범의를 찾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상기 피의자는 도의원으로써 “강원도민의 민의를 대변하고 잘못된 행정에 대한 감시”라는 본연의 임무를 배신하고 불법적인 컨벤션센터 부지매입비 499억을 통과시키는 의결을 주도하여 (주)강원중도개발공사에게는 막대한 재산상의 이익을 강원도민에게는 큰 손해를 가하였으므로 이는 명백히 배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2)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피의자의 부지 매입 절차상 불법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춘천 레고랜드 사업의 투자구조를 보면 강원도는 중도 땅을 현물출자하게 되어있으므로 그냥 1회에 걸쳐 현물출자만 하면 되는데도, 지난 수년동안 강원도는 자기 소유의 중도 땅을 (주)강원중도개발공사에 싸게 팔고 다시 수배를 올려서 되사주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밀어주며 천문학적인 도민혈세를 탕진해 왔습니다. 이러한 부동산 범죄가 한두 건이 아닙니다. 더구나 컨벤션센터는 레고랜드 놀이시설이 아니고 공공기관시설물이므로 강원도가 가기 소유의 부지에 그냥 컨벤션센터를 지으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강원도는 자기 땅을 레고랜드 놀이시설 기반공사 시행사인 (주)강원중도개발공사에게 싸게 팔고 다시 공공시설 컨벤션센터 부지 명목으로 비싸게 사주며 혈세를 탕진하는 불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지 매입 절차는 명백히 불법입니다. 3)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강원컨벤션센터 신축사업 진행으로 인해 지역경제와 발전에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면”라고 하면서 범법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고 있습니다만, 고발인은 국가에 묻습니다! 국법을 위반하면서까지 부동산 비리를 저지르면서까지 경제효과가 의문시되는 컨벤션센터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까? 초대형 건축물인 컨벤션센터를 왜 선사유적지 위에 지어야 합니까? 문화재보호법 위반 아닙니까? 유적지위에 컨벤션센터를 짓는 방안에 대하여 지금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심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 또한 절차상 위법 아닙니까? 또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춘 관광지에 컨벤션센터를 짓는게 타당합니까? 이것은 오히려 관광지와 관광자원을 훼손하는 행위 아닙니까? 관공서나 비즈니스 구역에 짓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습니까? 4)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감정평가하여 매입한 것은 배임의 고의가 인정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강원도가 중도동 357-41번지 부지를 판 시점과 피의자가 해당부지 매입을 심의 의결한 시점이 거의 동일하므로 즉, 감정평가하여보니 평당 304만원으로 5배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당연히 처음부터 땅을 팔지 말아야지요! 뻔히 오를 것을 알면서도 강원도 자기 소유 땅을 평당 58만원에 팔았다가 다시 304만원에 사겠다는 의결을 하여 도민혈세 수백억을 탕진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배임입니다. (특가법, 배임, 직무유기, 공직자윤리법, 부동산법 등 위반) 5)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고발인의 상기 진술을 보면 강원도민 혈세가 수백억 탕진되는 것이 명백합니다. 6)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마땅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도의회에 제출된 동의안과 도의회 회의록 그리고 피의자의 발언 기록 등은 명백한 증거자료입니다. 7)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없고”라고 하였으나, 피의자는 기획행정위원장으로써 컨벤션센터 부지 매입 안건이 기획행정위를 통과한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며 본회의에서도 의결되도록 주도하였으므로 피의자는 마땅히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결 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피의자의 범죄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도,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법리를 오해하거나 또는 피의자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믿고서 부당하게 불송치 결정을 하였는바, 고발인의 억울함이 없도록 반드시 이 사건을 재수사하여 피의자를 엄히 처벌해 주시기 바랍니다. 4. 별 첨 없음. 2022. 04. 05 . 위 신청인 오 정 규 (인) 춘천경찰서장 귀중 불송치 결정 이의신청서 사 건: 2021-007674 직무유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피의자: 강원도 문화유산과장 김 맹 기 피의자: 춘천시 문화콘텐츠과장 안 효 란 신청인: 중도유적보존범국민연대회의 본부장 오 정 규 위 피의사건에 대한 춘천경찰서 2022. 2. 28.자 불송치 처분에 대하여 신청인(고발인, 이하 ‘고발인’이라고만 합니다)은 불복이므로 이의 신청을 제기함과 아울러 다음과 같이 이의신청 이유를 개진합니다. 다 음 1. 피의사실의 요지 및 불송치 결정 이유 가. 피의사실의 요지 이 사건 피의사실의 요지는 1) (피의자 김맹기에 대한 피의사실과 고발내용을 수정 보완합니다.) 피의자 김맹기는 중도적석총(강원도 기념물 제19호) 외곽경계로부터 300미터 이내의 역사문화환경보존구역 내에서 (주)강원중도개발공사(이하 GJC)가 현상변경 허가를 득하지 않고 수년동안 무허가 불법공사를 해오다 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현상변경허가를 해줌으로써 행정절차를 위반하였고, GJC의 불법행위를 지원하였으며 또한 수년동안 무허가 불법공사가 진행되어 왔음에도 이를 단속하지 않는 등 관리감독 직무를 유기하였고, 행정적 실익과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불법을 정당화 함으로써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였습니다. (형법 제91조, 형법 제122조, 문화재보호법, 절차법 등을 위반.) 피의자 김맹기의 2021.7.12. 사후 현상변경허가는 피의자 안효란의 2021.4.22. 사후 현상변경허가 신청에 따른 것이므로, 피의자 김맹기가 춘천시청의 적법한 행정행위를 방해하였다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고발 사항을 취하합니다. 2) (피의자 안효란에 대한 피의사실과 고발내용을 수정 보완합니다.) 피의자 안효란은 상기 사건과 관련하여 GJC에 대해 공사중지 및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적법하게 조치하였으며 GJC를 고발까지 해놓고도 이후에 자신의 적법한 결정을 뒤집고 사업자인 GJC를 위해 사후 현상변경 신청을 대행해 준 것은 명백히 공직자윤리법 위반이며 또한 사후 현상변경을 신청하고 공모한 것은 명백히 행정절차 위반입니다. (공직자윤리법, 형법 제91조, 형법 제122조, 문화재보호법, 절차법 등을 위반.) 나. 불송치 이유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이 사건 불송치 결정의 요지는 상기 피의자들의 직무에 대한 의식적 방임·포기·거부를 찾을 수 없고 직권을 남용한다는 인식을 포함한 범의를 찾을 수 없어 고발을 각하한다는 입장입니다. 2. 불송치 결정 이유의 부당성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이 사건 불송치 결정의 부당함을 아래와 같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1)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강원도의 허가서 통보를 받아 춘천시는 그 허가서를 GJC에 통보하여 적석총 주변 공사를 재개한 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였으나, 강원도의 그 사후 현상변경 허가서가 바로 행정절차를 위반한 불법이므로 피의자들의 주장처럼 적법한 절차가 절대로 성립되지 않겠습니다. 2)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조서에 의하면 “강원도는 2021.4.22. 춘천시청으로부터 현상변경 허가신청을 받고”로 되어 있는데, 이는 춘천시청이 행정절차를 위반하는 사후 현상변경허가를 신청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GJC의 무허가 공사에 대한 공사중지 및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적법하게 발동하였던 춘천시청이 스스로 자신의 적법한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춘천시청 자신이 고발까지 하였던 GJC의 무허가 범법행위를 지원하는 것이 되는 등 이중삼중의 자기모순 자가당착 상태에서 행정절차와 법질서를 심히 위반하고 있는 것이 되고 더구나 사업자인 GJC가 해야 할 현상변경 허가신청까지 대행하여 주는 공직자윤리법 위반까지 하고 있습니다. ( 행정절차 위반, 공직자윤리법 위반, 직무유기 등) 3)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조서에 의하면 강원도 문화재위원들이 원상복구를 하지 않은 이유가“(단순누락)현상변경 심의관련 기반시설 허가사항 미신청”로 되어 있는데, 설사 현상변경신청 누락이라 치더라도 위법은 위법입니다. 형법 제91조 국헌문란의 방지를 위해서도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후 심의는 행정절차를 위반하는 위법행위이므로 사후 현상변경허가를 즉각 취소하고 해당부지의 그 현상을 원상복구해야 하겠습니다. 4)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조서에 의하면 강원도 문화재위원들이 원상복구를 하지 않은 이유가“행정적 실익, 공공의 이익”때문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어떤 이익 때문에 위법이 정당화 되는 것이 바로 국헌문란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불법을 정당화 하는 행위는 헌정질서문란 행위로 반란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형법 제91조 위반 등) 사후 현상변경심의에 관련된 자들을 전부 공개할 것을 요구하며 반란행위를 추가하여 처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5) 원처분 사법경찰관의 조서에 의하면 “강원도의 심의허가가 났으므로 불법공사는 아니다”라고 되어 있으나, 바로 그 사후 현상변경심의허가 자체가 행정절차를 위반한 불법이므로 GJC의 중도적석총 인근 공사는 불법공사가 맞다 하겠습니다. 6)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피의자 안효란은 GJC에 대한 고발조치를 전결한 사람으로써 직무에 대한 의식적 방임·포기·거부를 찾을 수 없다 ”라고 하였으나, 피의자 안효란은 무허가 불법공사중인 GJC에 대해 공사중지 및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적법하게 발동하고 심지어는 고발조치까지 하고서도 곧이어 GJC의 그 무허가를 지원하여주는 사후 현상변경허가신청을 한 자로써 스스로 자신의 정당한 결정을 뒤집는 자가당착 이율배반에 빠지며 직무유기를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업자 GJC를 위해 사후 현상변경허가신청을 대행하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직무유기, 공직자윤리법 위반 등) 7) 추가 고발합니다. 별첨1. 강원도고시 제2014-531호의 도면을 보면 범법자들은 중도적석총 도지정 문화재보호구역 외곽경계로부터 300미터이내 역사문화환경 원지형보존구역내에서 현상변경 허가를 득하지않고 무허가 불법공사를 해왔을 뿐만 아니라, 도지정 문화재보호구역 자체를 관통하는 도로공사를 하고 옹벽을 쌓는 등 문화재를 파괴하였습니다. 상기 피의자들은 문화재 보호 및 관리 책임자들로써 그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 8) 법은 법이기 때문에 법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행정적 실익이나 공공의 이익을 핑계로 불법을 정당화 하는 것이 바로 형법 제91조 국헌문란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정당화 하게 되면 국민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정당화 하게 될 것이며 결국 국가의 법질서는 무너지게 될 것이고 법치국가의 법치 또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경제적 이익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법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결 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피의자의 범죄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도, 원처분 사법경찰관은 법리를 오해하거나 또는 피의자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믿고서 부당하게 불송치 결정을 하였는바, 고발인의 억울함이 없도록 반드시 이 사건을 재수사하여 피의자를 엄히 처벌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피의자 안효란으로 하여금 당초 자신의 적법한 결정이었던 공사중지 및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도록 사법부와 검찰과 경찰은 올바른 수사와 판결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4. 별 첨 - 강원도고시 제2014-531호.끝. 2022. 04. 06 . 위 신청인 오 정 규 (인) 춘천경찰서장 귀중 -
김병중 04-05 08:18
레고랜드에 짓밟힌 문화 유적지, 춘천 중도!
레고랜드에 짓밟힌 문화 유적지, 춘천 중도! 춘천시에 위치한 테마파크 레고랜드가 2022년 3월 26일 준공되었으며 2022년 5월 어린이날에 정식 개장한다. 레고랜드는 대한민국에 정식 개장하는 최초의 "외국 프랜차이즈 테마파크"다. 그동안 대한민국에 무수히 많은 외국 테마파크 프랜차이즈들이 입점을 시도했으나 여러 이유로 줄줄이 무산되었는데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테마파크가 레고랜드이다. 레고랜드 부지는 하중도의 5분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레고랜드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큰 레고랜드이다. 그런데 레고랜드를 지을 곳을 찾지 못해 그나마 춘천 하중도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 세계 최대 규모의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되는 바람에 엄청난 난관을 겪었다. 한반도 최대 규모 선사 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이를 갈아버리고 지을 것인지, 아니면 이를 보존할 것인지 논란이 심한 가운데 공사가 진행되었고 결국 개장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꾸준히 중도 레고랜드 건설을 반대했던 '중도유적 보존 범국민연대회의'에서는 계속해서 다방면으로 중도의 복원을 위해 싸울 것을 밝혔다. 그 한가지 방법으로 연대회의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에게 역사문화분야 정책을 제안했다. 다음은 제안서 내용이다.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역사문화분야 정책 제안 영토보다 근본인 우리역사문화를 지켜냄으로써 헌법을 수호하고 성공한 대통령! 성공한 정부!를 위한 제20대 대통령 정책과제를 첨부와 같이 요청 드리오니 국민의 간절한 뜻을 받으시고 반드시 정부 실행과제로 선포하여 주시기를 청원 드리는 바입니다. 별첨1. 우리 역사문화 말살시대를 멈추어야 합니다! 1. 춘천 중도유적을 원상복원하여 중도시국으로 만들어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명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2.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시 임나일본부론에 따른 일본서기 지명인 기문국과 다라국을 삭제하고 등재. 3. 김포 장릉 역사문화환경보존구역의 그 현상을 원상복구. 4.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신설된 “강원도 예맥역사문화권”에 “중도 전체”를 포함. 5.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고조선 역사문화권”을 추가로 신설 6. 대선과 총선에 출마하는 입후보자들의 역사의식 검증절차를 제도화. 7. 역사청 신설. 별첨 2. 헌법 제9조 “전통문화 계승발전 민족문화 창달”에 입각한 제 20대 대통령 역사문화 분야 정책 과제 우리 역사문화 말살시대를 멈추어야 합니다! 1. 중도유적 원상복원! 1-1. 춘천 레고랜드는 헌법을 위반하고 수많은 불법과 비리로 얼룩져 있으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즉각 철거해야 함! 1-2. 중도유적 가치평가 재실시를 통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한 후 차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3. 중도 선사유적지를 중도의 천혜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명소로 만들어야 함! 1-4. 우리역사를 통사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중도유적을 수십년을 두고 정밀히 발굴조사해 나가야 함. 1-5. 중도시국 건설! 대한민국 안에 중도시국!을 건설하여 바티칸시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 명물로 만들어야 함! 2.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시 임나일본부론에 따른 일본서기 지명인 기문국과 다라국을 삭제하고 등재! 3. 김포 장릉 역사문화환경보존구역의 그 현상을 원상복구! 4.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신설된 “강원도 예맥역사문화권”에 “중도 전체”를 포함하여야 함! 4-1. 상기 특별법은 2020년 6월에 공표되어 2021년 6월부터 시행되었는데, 강원도만 누락되어 있어 강원도민들의 요구에 따라 얼마전 지역구 허영의원이 대표발의하여, 강원도를 예맥역사문화권으로 하여 특별법에 추가하는 개정 발의가 이루어 짐. 5.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고조선 역사문화권”을 추가로 신설해야 합니다! 5-1. 상기 특별법에 고조선 역사문화권을 신설하여 중도와 전국의 고인돌들과 암각화들을 고조선 역사문화권에 포함하여 영구히 보존하여야 합니다. 6. 대선과 총선에 출마하는 입후보자들의 역사의식 검증절차를 제도화! 7. 대통령 직속의 청을 두되 어떤 정권이나 정부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학문과 학자들 위주의 우리민족사 보존과 발굴에만 목적을 두는 역사청 신설. 별첨 3. 레고랜드 건설로 파괴되고 있는 1만년 우리역사_춘천 중도유적을 복원하라 (중도유적은 왜 특별한 유적인가?) 1만년춘천중도역사유적살리기백만국민서명운동본부 중도유적 8000년! (로마유적 2000년!)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낼 춘천 중도유적! 역사와 문화재는 그 나라의 영혼이요 심장이다! 고인돌이 무려 166기가 모여있는 선조들의 고대 현충원! 고인돌 집단군_ 지금은 해체되어 잡석 처리되어 비닐하우스에 야적되어 있다. 중도유적은 고대 도시유적이라 한다! 세계 최고의 관광자원! 춘천 중도유적! 중도섬(39만평) 전체가 유적지 그러나 중도유적지는 무참히 파괴당하고 있다! 1만년 우리역사와 중도유적을 파괴하는 레고랜드 몰아내자! 중도유적을 짓뭉개고 레고랜드를 짓고 있다. 영국 해적들에게 중도땅을 100년간 무상임대(할양)해준 최문순 강원도청! 중도는 제2의 홍콩이 되었다! ○ 춘천 중도(中島)유적은 왜 특별한 유적인가? 유물유적 몇점이 나온 유적지가 아니고 39만평 중도 전체적으로 1만여점 이상의 유물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전일적인 체계를 갖춘 고대 도시유적이 출현한 것임. 중도 고대 도시유적지는 중도 주변의 천혜의 자연경관과 더불어 세계최고의 관광자원이며 후대들에게 만년 관광자원이 됨. 최고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유적부터 청동기, 철기,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및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유적들이 겹쌓여있는 층층이 유적지로써 매우 희귀한 유적지이며 우리민족의 1만년 역사를 통사적으로 관측해볼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역사유적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침탈을 막아낼 우리역사의 증거 유적임. 고인돌이 무려 166기가 모여있는 선조들의 고대 현충원 또는 국립묘지임. ○ 영토를 빼앗길지언정 역사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빼앗긴 영토는 힘을 길러 다시 되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그 민족이 해체되어버리므로 영원히 되찾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 강대국들의 역사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 증거인 유적이 있으면 역사왜곡을 못한다. 유적이 있으면 심지어는 왜곡된 역사를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다. ○ 온갖 불법과 탈법이 난무한 레고랜드 건설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중도유적 문화재 원형보존점수가 91.77점(기준점수 74.31점)으로 매우 높았음에도 원형보존을 하지 않고 개발을 허락한 점. 별첨 4. 대한민국 역사 청 신설에 대한 정책 제안 역사청의 신설은 왜 필요한가? 1. 배경 우리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정한론에 발맞추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강변한 식민사관의 역사를 지금까지 교육의 현장에 그대로 인용하고 반영시켜 후대 역사교육을 시키다 보니 고대 우리 선조들의 실로 위대하고 찬란했던 위업과 발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륙을 누비며 위용을 뽐냈던 우리 동이민족의 홍익의 기상과 이치와 덕치의 높은 정신문화도 이미 사라져 버렸거나 왜곡 변형되고 축소되어 이제는 더 이상 그 본질을 찾아보거나 흔적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폐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선뜻 그 폐단을 외치는 자 없어 우리 조상대대로 이어져온 민본의 이념마저 흔들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이대로 조상님들의 정신과 정맥을 잇는 올바른 과거사를 외면하고 식민사관의 폐단을 방치한 채로 제국의 식민사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 역사관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역사를 잃고 선조님들과 자신의 뿌리마저 망각한 채 치열하게 전개되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부초처럼 헤매다가 결국에는 우리의 맥과 역사는 허공 속에 사라지는 한낱 산울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 역사청의 역할 1) 우리역사 발굴과 연구. 2) 식민사관 척결과 역사편찬. 3) 올바른 우리역사와 문화 보전활동. 4) 우리문화 살리기 각종 행사 주관 및 주최. 5) 우리역사의 이론 정립과 학술대회. 6) 초·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편찬과 보급. 7) 우리역사 찾기 문화탐사 및 탐방활동 지원. 8) 우리역사 알리기 대내외 홍보활동과 보급. 9) 향토문화와 향토역사의 체계적 관리 및 자료정리 보관. 10) 상시적인 남북 역사토론과 학술대회 개최로 민족통합의 기틀 마련. 3. 역사청의 구조 1) 대통령 직속의 청을 두되 어떤 정권이나 정부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학문과 학자들 위주의 우리민족사 보존과 발굴에만 목적을 두는 청. 2) 청장은 덕망 있는 민족주의 학자 중에서 우리민족사 발굴과 연구 및 업적에 몸 바친 자로 민족진영의 의견수렴과 추천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 3) 청 산하에 역사청의 역할에 따른 부서를 신설한다. 4) 청의 예산과 집행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한다. 5) 청의 예산과 집행 및 활동을 감시하는 감사과를 둔다. 6) 청의 효율적인 운영을 관장하기 위해 산하에 지자체별로 지청을 둘 수 있다. 7) 그 외 공직기관에 준하여 운영한다. 4. 역사청의 효과 1)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2) 우리의 새로운 역사관을 가짐으로써 민족통합의 바탕을 다질 수 있어 차후 통일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3) 나라의 위급이 닥쳤을 때 나라를 구할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4)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관과 위대한 민족유산을 물려줌으로써 후대 만대 세세토록 귀감이 될 수 있다. 5) 식민사관을 벗어난 진정한 역사해방과 민족문화의 광복을 찾을 수 있다. 6)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 민족사를 집대성함으로써 고대 찬란했던 선조들의 위업을 되찾고 독도문제나 동북공정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고 국제적으로도 대마도나 간도 땅이 우리의 역사임을 역사적으로 밝혀 국제적으로 우리의 영토를 찾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얼을 심을 수 있다. 7) 세계 속에 올바른 우리역사관을 정립함으로써 우리의 독창적인 얼과 문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5. 결어 결과적으로 우리문화의 발굴과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는 첫 단추는 역사청의 신설이며 이는 그토록 소원했던 우리민족의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본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어 새로운 역사 새로운 우리의 미래를 갖게 될 것이며 남북통합에 밑거름이 되어 우리의 후손들은 세계 최강국 통일된 나라에서 조상들의 은덕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세계의 평화와 질서도 비틀어진 역사관을 바로잡는 데에서 시발하는바 반드시 지금 역사 청을 신설하여 우리시대에 우리민족의 적대적인 대립과 분열의 장벽을 허물고 그 비운의 역사를 끝내야 될 것이다. 새로운 미래의 시작은 역사청의 신설임을 명심하자.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진리임을 망각하지 말자. - 민족사학자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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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9 10:50
기자가 사진사인가?
취재가면 대놓고 자기 사진 찍어 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어이가 없을 때가 있다. 친분이 있거나 필요시에는기꺼이 찍어 줄 수 있으나 별 친분도 없는데 당연한 듯 부탁(?)한다. 행사장에 본인 인증샷 찍으러 왔나? 기자는 취재하러 간 것이며 사진은 기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찍는 것이다. 그리고 행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설교자는 초기에만 사진 찍어 주고 자리에 앉아 설교에 집중해 기록한다. 설교하는 설교자와 설교듣는 청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목사 기자로서 설교할 때 누군가 돌아 다니면 설교에 방해가 된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중해 설교를 듣다보면 은혜를 받든지, 구설수 거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설교자는 기자가 불편할지도 모른다. 기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례할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예의범절은 지나쳐도 지나치지 않다. -
김병중(Th.D) 05-28 09:12
불교 연등회와 부활절 퍼레이드
긴 봄비가 내리고 있다. 그동안 메말랐던 대지를 적셔주는 반가운 비다. 이 비는 26일 시작해서 29일까지 내릴 예정이다. 27일 토요일은 사월초파일이었다. 전날부터 비가 내려 연등행사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색해 보니 지난 20일 벌써 했다. 다른 종교 기념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생겨진 착각이다. 과거 5년간 종로에 있는 승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으며 매년 벌어지는 초파일 연등행사를 봤다. 가서 행사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행사로 인해 벌어진 교통 통제의 불편함을 봤다는 것이다. 차선을 통제하고 벌이는 축제로 인해 벌어지는 교통 혼잡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래서 ‘도대체 왜 자기들의 행사를 대중 교통을 통제하면서까지 하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이 그곳에서 5년을 보냈다. 부처가 자기 탄생일이라고 이렇게 민폐를 끼쳐가며 하는 행사를 좋아할까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리고 역으로 올해 처음 있었던 부활절 퍼레이드를 생각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여 이르는 말로, 남은 비난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목사지만 부활절 퍼레이드 행사에 대해 결코 내로남불할 생각은 없다. 올해 뜬금없이 한교총에서 4월 9일 주일 부활절 오후 2-4시에 광화문 광장을 출발해 세종대로를 따라 서울광장까지 간 뒤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오는 『2023 부활절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퍼레이드는 언약궤 행렬, 교단 대표 행진, 십자가 조형물 이송 등과 타악기 밴드, 캐릭터 퍼포먼스, 풍물놀이단 공연에 이어 K-POP, 트로트 콘서트로 진행됐다고 한다. 당일 기자는 다른 행사를 취재하느라 현장에 가지는 못했다. 이 행사의 실무대회장을 맡은 소강석 목사는 이 행사를 정례화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론부터 말해서, 기자는 이 행사의 정례화에 반대한다. 일차적으로, 기독교가 그동안 이런 행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런식으로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하지 않은 것이지, 못해서 안한 것이 아니다. 이런 구성의 행사를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축하되는가? 행사의 마지막이 “K-POP, 트로트 콘서트”였다면 “용두사미”아닌가? 또한, 거룩한 주일에 각자의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와 행사를 하는데 굳이 서울 한복판에 성도들을 불러모아 이런 행사를 할 필요가 있는가? 합동교단은 주일성수를 위해 별도의 행사를 금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소강석 목사는 합동 교단 증경총회장이면서도 주일에 트로트 콘서트 등 많은 행사를 하면서 우려를 자아냈다. 이제 곳곳에서 주일에 임직식 등을 하면서 소강석 목사를 핑계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헌법은 주일에는 임직식 등의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교통통제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행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통 통제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예외없이 쌍욕이 나온다.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부활절 행사를 한다고 교통 통제를 하면 좋은 소리를 하겠는가?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서민들의 발을 묶어 놓고 하는 기독교 행사가 과연 기독교 전파에 도움이 되겠는가? 결국, 『2023 부활절 퍼레이드』는 그 행사를 원하는 “그들”만의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불교 연등행사는 저녁 시간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불빛으로 인해 볼거리라도 있어 관광객의 발길을 잡지만 한낮에 하는 『2023 부활절 퍼레이드』는 공공의 도로를 점거한 그들만의 행사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부활절 퍼레이드는 불교 연등회의 초라한 "기독교 버전"인가? 과연 내년에도 또 할려나? 답은 실무대회장이었던 소강석 목사에게 있는 것 같다. -
김병중(Th.D) 05-27 16:06
사조직 『합동포럼』, 또 하나의 총회인가? 총회임원 등용문인가?
요즘 총회의 핫 이슈는 두 개라 생각한다. 첫째, 작년 총회 때 1,600여명의 총대에 의해 폐지된 구 충남노회가 부활을 시도할려다가 지지부진한 것. 둘째, 구 충남노회 소속 천안중부교회가 점점 아수라장이 되가는 것이다. 그동안 본지 빛과소금뉴스는 구 충남노회 부활과 천안중부교회 사태를 꾸준하게 연속기사로 쓰고 있다. 앞으로 3개월 남짓남은 108회 총회에서 이 두 문제는 핫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총회는 총회장과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의 이름으로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 공문을 노회장 고영국 목사와 서기 이상규 목사에게 발급했다. 그러나 새로 노회를 구성하기로한 53개 교회는 전혀 동조하고 있지 않아 유야무야됐다. 어르고 달래도 그동안 너무나 시달렸기에 더 이상 함께 하고자 할 마음이 1도 없는 것이다. 결국 “충남노회 정상화”는 안하니만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일 큰 피해를 본 것은 천안중부교회이다. 2년여간 내분을 하고 있는 가운데 3월 발급된 공문을 근거로 이상규가 임시당회장으로 가서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자신이 담임이 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사태에 한 사조직인 합동포럼에 같이 있는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상현 목사, 부위원장 지동빈 장로, 서기 고광석 목사, 회계 원태연 장로, 총무 박태천 목사, 전문위원 주진만 목사. 그리고 천안중부교회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 둘 있다. 임시당회장을 자처하는 이상규와 주일 설교를 하고 있는 주진만이다(이 둘은 5월 28일 공동의회를 통해 한 명이 담임 청빙될 예정이다. 그러나 법원은 공동의회를 금지하는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전 행태를 보아 강행할 것으로 보여진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합동포럼이라는 한 사조직이 최근에 기독신문에 처음으로 임원조직광고를 냈다. 구성 면면을 보면 참으로 화려하다. 증경총회장들, 현 총회임원들, 상비부 임원들, 총회 임원 출마 예정자 등등. 마치 또 하나의 총회를 보는 듯하다. 이 사조직이 자신있게 기독신문에 광고를 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력을 과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앞으로 총회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조직에 가입해야할 것 같은 유무형의 압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기, 차차기 목사 부총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들도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구성원들 중에 총회적으로 큰 물의를 끼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조직에서는 그냥 그들을 방치해 둘 것인가? 물의를 끼치는 인물을 제재하거나 내보내는 규정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인물들에게 어떤 제재도 하지 않고 그냥 간다면 결국 합동포럼이라는 사조직도 함께 동일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권순웅 총회장은 지난 3월 14일 총회회관에서 「샬롬부흥 클린개혁 성명서」를 발표했다. 둘째는 총회본부에 대한 클린개혁이며, 셋째는 총회산하 교회의 윤리에 대한 클린개혁이고, 첫째는 총회 선거운동의 클린개혁이다. 다음은 첫째 항 전문이다. “총회선거 입후보자는 총회 선거관리법을 준수해 주기 바랍니다. 금권선거 및 부정 선거를 금합니다. 후보자들의 선거운동은 선거관리위원회뿐 아니라 전 총회가 주시하며 부정선거를 추방할 것입니다. 입후보자는 정책과 인물중심으로 허락된 범위 안에 운동을 하고 전 총회 구성원은 샬롬의 개혁적 정신으로 선거에 참여해 주십시오. 먼저 투명하고 깨끗한 선거문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총회를 섬길 일꾼을 선출하는 과정을 보면 임원선거에 출마 의지를 보이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각 총회 내에 각종 조직의 수련회, 세미나, 기도회 모임의 강사초청을 통해 후원금, 협찬비를 요구하는 관행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또 총회 선거가 일부 사조직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우려할 일입니다. 이에 각종 사조직의 선거 개입은 단절 되어야 하고, 총회 정치 개입을 차단해야 합니다. 총회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공명선거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총회임원회는 허락된 권한을 십분 발휘하여 클린개혁을 시행하겠습니다” 총회장은 사조직의 선거 개입은 단절 되어야 하며 차단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 임원으로 출마하는 자들이 지난 4월 20일 대전판암교회에서 있었던 합동포럼 모임에 가서 인사를 했다. 이것은 총회장이 금지한 사조직의 선거개입으로 볼 수 있지 않는가? 아니라면 오해받을 짓을 해서는 안된다. 사조직 합동포럼에게 요구한다. 구성원 중에 현재 총회적으로 물의를 끼치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합당하게 제재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제 식구 감싸기”나 하는 그렇고 그런 사조직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또한 총회임원 등용문의 역할을 하지 말기 바란다. 무슨 의도로 합동포럼을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보여지는 모습은 총회임원 등용문처럼 보인다. 그러니 총회 임원 후보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과거 군대내 “하나회”처럼 총회내 또 하나의 사조직이 되는 것이다. 하나회가 선후배로 서로 끌어주며 주요 보직을 차지해 결국 군사반란(쿠데타)을 일으켜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던가? 총회장이 총회 선거운동의 클린개혁을 목 터지게 외쳤다. 그러나 “0야 짖어라 기차는 간다”는 심보로 며칠 후 버젓이 합동포럼 광고를 교단지에 광고했다. 합동포럼은 총회와 상관없는, 총회장의 말도 대놓고 무시하는 막강하고 막나가는 사조직인가? 그 속내가 궁금하다. -
김병중(Th.D) 05-26 00:45
헛된 명예욕(?)...앞길 막는 부메랑 되나?
전국주일학교연합회(회장 이해중 장로) 제68회기 2차 중앙위원회가 5월 25일 오후 1시 면목중앙교회(양우석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개회예배를 은혜스럽게 드리고 회무가 잘 진행되다가 마지막 기타안건에서 돌발상황이 생겼다. 증경회장 김석태 장로가 “주일학교에서 시상하는 근속교사 시상에 관해 정확하게 조사를 해서 당사자가 근속교사가 되는지, 교회와 주교연합회에서 정확히 살펴서 올려주고 전국주교연합회에서도 잘 살피고 심사숙고를 해야 하겠다”고 발언했다. 그 이유는 지난 62회기 총회 때 50년 근속상을 수여했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50년 근속교사상은 모두 3명에게 주어졌다. 이 중 2명의 교사들은 나이가 60대 후반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명은 60년생으로 당시57세 였는데 50년 근속교사상이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당사자는 7세부터 교사를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자 당사자는 실제 나이가 60년생이 아니라 58년생이라고 해명했다. 그렇다고해도 9살 밖에 안되는데 그 나이에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는 말은 수긍하기가 어렵다. 김석태 장로는 “그 사람의 연령을 따지면 도저히 맞지 않다는 이의제기가 있어 전국주교연합회의 위상에 심각한 악영향이 될 수 있으며 해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회의 사회자 회장 이해중 장로는 "당사자에게 소명을 받았는데 다 포함하면 50년이 되는데 교회를 옮기면서 빠진 기간도 있는데, 당사자는 상을 반환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앞으로 잘 살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7살이 됐든, 9살이 됐든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 연령은 아니다. 단지 주일학교 학생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에 근거해 영예로운 50년 근속상을 받은 당사자나 시상한 전국주교연합회나 “난감한 상황”이 됐다. 도대체 왜 뻔히 보이는 일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헛된 명예욕(?)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6년만에 그것이 돌고돌아 부메랑으로 당사자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당사자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른다. 당사자는 총회회계를 거쳐, 금년 11월에 있는 제53회 전국장로회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수석부회장에 도전하고 있다. 신학생 때 교수님들과 선배 목사님들은 “돈, 여자, 명예”에 대한 욕망을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이것에 대한 욕망이 바로 패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헛된 명예욕은 언젠가 결국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 당사자나 우리 모두. -
김병중(Th.D) 05-25 19:47
총신과 부전교회, 그 깊고 아름다운 인연이여!
5월 25일 오전 11시, 총신대학교 종합관 백남조홀에서 박성규 박사가 22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날 재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축하객들이 홀을 가득 채우고 박 총장의 취임을 축하했다. 1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오정호 부총회장의 설교도중 크게 “아멘”하는 중년 여성들의 목소리가 홀 뒷자석에서 자주 들렸다. 이때 오 부총회장은 그들이 부전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아침 일찍 버스를 대절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깊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부전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박 총장이 2006년 3월부터 2023년 4월까지 17년간 담임했던 교회이다. 박 총장은 부임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또 크게 교회를 건축했다. 그동안 안정적으로 목회를 했으며 3년만 있으면 원로목사가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에 순종해 담임자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표차로 총장에 당선됐다. 박 총장이 학교를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자 할 때 교인들은 반대했지만 결국 성숙한 자세로 한국교회와 총신대학을 위해 사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버스를 대절해 올라와 총장이 된 담임목사를 축하했다. 총장 취임식이 진행된 백남조홀은 부전교회와 깊은 인연이 있다. 백남조 장로가 부전교회 장로였기 때문이다. 종합관 구 건물을 헐고 신축 후 홀을 백남조홀로 정했다. 국민일보 2019년 9월 4일자 기사는 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기사 전문이다. 총신대 초석 놓은지 54년 만에 대강당 ‘백남조 기념홀’ 명명 “목사님, 누군가 신학교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텐데 미력하지만 제가 학교 부지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고 백남조(부전교회) 장로가 1964년 노진현(당시 총신대 이사장) 목사에게 전한 이 한마디가 총신대의 초석이 됐다. 이듬해 3월 백 장로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부지 1만8000평(약 5만4000㎡)을 구입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에 헌납했다. 부지 구입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0만원. 사당동 캠퍼스 건축을 위해 당시 노회들이 모았던 헌금이 평균 12만원이었다는 기록에 비춰보면 얼마나 큰 기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부전교회 시무장로로 사역하며 광목을 표백하는 기업을 운영하던 백 장로는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지 않고 공장 안에 있는 작은 공간에 기거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총신대 부지 마련에 사용한 재원은 노모에게 집을 지어드리려고 모았던 돈이었다. 총신대는 3일 백 장로의 헌신을 기리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총신대 구성원들의 영적 산실인 종합관 대강당의 이름을 ‘백남조 기념홀’로 명명(命名)하는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다. 예배에는 백 장로의 후손, 부전교회(박성규 목사) 성도, 총신대 학생들과 교수, 예장합동 총회 임원 등이 참석해 고인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되새겼다. 박성규 목사는 “54년 전 채플실조차 없어 학생들이 복도에서 설교를 들어야 했던 시절, 장로님은 민족과 세계복음화를 위해 훌륭한 기독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며 결단을 내리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 예배를 계기로 총회와 총신을 넘어 한국교회에 제2, 제3의 백남조 장로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승희 예장합동 총회장은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라’를 주제로 설교했다. 그는 “백 장로는 총신대 부지를 헌납한 후에도 21년간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성지순례여행, 회갑·고희연 등도 마다하며 절약해 오로지 총신이 세워지는 일에 헌신했다”고 말했다. 또 “삶을 던져 하나님을 사랑했던 신앙선배로서 현시대에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정표가 된다”며 “지식 몇 줄을 쌓는 것보다 백 장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갈고닦는 총신인이 되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이재서 총장과 정용덕 법인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총신대 학생들이 백 장로가 보여준 섬김의 리더십을 추구할 것을 요청했다. 백 장로의 장남 백성기(부전교회) 장로는 답사에서 “선친이 목적한 것은 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전도와 선교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며 “소천 31주년 되는 올해 선친의 헌신을 기억해줘 감사하다”고 전했다. 부전교회 백남조 장로가 헌납해 세워진 총신대학의 백남조홀에서 부전교회 6대 담임목사 박성규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고, 부전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참여해 축하해준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끝까지 부전교회 목회를 함께하지 못한 박 총장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총신대학을 위해 크게 물질을 내놓은 백남조 장로의 마음으로 부전교회는 기꺼이 박성규 담임목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백남조홀에서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헌신인가? 박 총장은 17년간 부전교회를 성실하게 목회해 큰 부흥을 이뤘듯이 앞으로 총장으로서 총신대학을 크게 발전 시킬 것이다. 그의 삶의 이력을 보면 우리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전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모시기 위한 청빙공고를 냈다. 박성규 담임목사보다 더 좋은 목회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해 본다. 총신대학 설립을 위해 헌금을 드리고 담임목사를 드린 부전교회여, 길이 복이 있으라! -
김병중(Th.D) 05-24 20:53
기자여, 용비어천가를 불러라?
기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나무위키에 따르면 “기자(記者, reporter, journalist)는 사회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기자(記者)는 한자로 쓰는 사람이다. “기자가 쓰지 않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누군가 그에 대해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영상이든, 신문이든 우리는 어떤 기자가 취재하고 썼길래 소식을 접하는 것이다. 또한 기자는 영어로 reporter로서 “알리고, 보고하는 자”이다.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고 했다. 그래서 기자는 다양하게 취재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로 표현해 기사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사가 사람들에게 읽혀지면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한다. 기자는 무엇보다 보고, 듣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글을 쓴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주관적인 글을 쓴다. 읽는 사람이야 쉽게 읽지만 그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사가 만들어지면 그 기사는 때로 널리 읽히기도 하고 때로 소수만 읽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때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긍정하거나 부정한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그래서 기사에 항의를 하거나, 기사를 내리라고 하거나, 또는 고소하겠다고 핏대를 올린다. 그래도 기자는 자신의 양심에 기초해 기사를 쓴다. 마치 판사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듯이 말이다. 기사가 틀렸다고 지적하면 검토해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기사를 고쳐줄 수는 없다. 독자가 왜 그 기사가 불편한지 먼저 생각해야한다. 자신의 치부와 잘못을 드러내는 기사라면 자신이 고칠 생각을 해야지 기자를 밟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다고 기자가 밟혀지겠는가? “감시없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기자는 약자를 대변하고 강자를 감시한다. 기자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만큼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제대로 쓰라고 기자는 감시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왕관을 쓰기 원하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다. 기자에게 자신에 대해 용비어천가를 부르라고 하는 것은 기자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잘하면 어련히 용비어천가를 불러주지 않겠는가? 기꺼이 춤이라도 춰줄 수 있다. Shall we dance? -
김병중(Th.D) 05-24 10:08
만시지탄, 구 충남노회•천안중부교회 사태
최근 기독신문은 108회 총회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구 충남노회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총회임원회(총회장:권순웅 목사)가 제24차 임원회를 5월 18일 총회회관에서 갖고, 충남노회 폐지 후속처리 건 등 안건을 처리했다. 지난 107회 총회에서 폐지키로 결의한 충남노회에 대한 후속처리가 난항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임원회는 사회소송시행세칙에 따라 대표권을 부여한 고영국 목사의 노회 소집이 원만하지 못하므로 기존에 부여한 권한을 중지키로 했다. 아울러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위원장:김상현 목사)로 하여금 다시 각 측의 입장을 듣고 협상을 지시하기로 했다. 단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위원회가 천안중부교회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참으로 만시지탄할 일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어떤 일에 알맞은 때가 지났음을 안타까워하는 탄식'을 의미한다. 그간 8개월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남은 4개월 동안 해결되겠는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총회장 이름으로 발급된 지난 3월 노회 소집 공문으로 인해 구 충남노회와 천안중부교회는 쑥대밭이 됐다. 이 사태에 대해 교단지 기독신문은 외면했고 임원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본지를 포함해 소수의 교계 언론만이 소리를 냈다. 샬롬부흥의 107회 총회도 이제 저물어 간다. 공을 세우기 보다는 과를 줄여야 할 때 이제서야 구 충남노회와 천안중부교회 문제를 다시 다루겠다는 것이다. 면피를 위한 눈가리고 아웅이다. 지난 3월 발급된 공문을 쥐고 소위 충남노회 서기 이상규 목사가 어떤 망나니 칼부림(?)을 했는지 모르는가? 몰랐다면 임원회의 직무 유기다. 이제 분노에 찬 당사자들은 임원들과 후속처리위원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자 한다. 이걸 알고 임원회는 보신용 결의를 했다. “또한 충남노회 사건과 관련해 총회장과 총회임원, 충남노회폐지후속위원회 위원 교회에서 시위할 경우 사법 대응과 언론 대응을 총회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참으로 비루하다. 시간은 묵묵히 108회 총회를 향해 가고 있다. 떨고 있는가? -
김병중(Th.D) 05-23 17:52
기독교 연합기관 통합, 가능하고? 필요한가?
소강석 증경총회장은 기독교 연합기관 통합에 사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 목사는 한교총 대표회장을 할 때도 한교총과 한기총, 한교연 세 기관의 통합을 위해 애썼었다. 현재도 소 목사는 한교총 기관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난 5월 13일 새에덴교회에서 가진 회기 첫 모임에서 한교총과 한기총, 한교연 세 기관의 통합 필요성을 공유하고, 이를 연구·추진키로 결의했다. 이어 한교총은 5월 19일 한교총 회의실에서 제6-3차 상임회장회의를 개최해 기관통합에 관한 건을 다뤘다. 이 자리에서 이영훈 대표회장은 “소강석 위원장이 한기총과 한교연을 대표하는 사람들과 만나 의논한 결과 각 기관이 먼저 임원회를 열어 통합에 대해 결의한 뒤 공증을 받으면, 추후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각각 임시총회를 열어 대의원들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기로 했다”며 이후에는 통합 총회를 열고 법인을 합치는 것까지를 로드맵으로 제시했다. 연합기관이 분열될 때는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다. 그리고 분열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어있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이 분리됐고 이후 한교총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한기총은 2년간의 임시대표체재에 있다가 최근 정서영 목사가 대표로 선출됐다. 그런데 정 목사는 현재 한장총의 대표회장도 겸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한교연의 대표회장도 역임했다. 한기총은 현재 대부분의 주요 교단이 탈퇴한 상태라 과거의 영향력이 진작에 사라진 상태이다. 한교연은 어떠한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정도로 친(親)청치적이며 현재 가장 규모가 작은 연합기관이다. 한교총은 어떠한가? 한국교회 교단장회의를 모태로 출범한 한국교회 교단연합기관이다. 현재 대한민국 최대의 교회 협의체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개신교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다. 개신교계 주요 대형 교단 대부분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회원 교단의 규모는 대한민국 전체 개신교인 수의 95% 가량에 해당한다. 이것이 현재 연합기관의 실태이다. 연합기관마다 성향이 다르고 지향점도 다르다. 그런 가운데 3개 기관을 통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통합하고자 하는가? 설사 통합이 된다해도 과연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 어떤 사안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통합하고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교나 불교같이 한 집단의 목소리를 내고자 함인가? 나눠질 때는 그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통합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각자의 성향이 다른데 무리하게 통합한들 얼마나 유지될 것인가? 또 “탈퇴한다”, “분립한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 뻔하다. 사안별로 함께 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억지로 통합해 시끄러운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기관이 삼위일체식으로 존재해야한다. 연합기관 통합이 지상명령인줄 알고 뛰어다니는 소강석 증경총회장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한편 고영기 총무는 지난 4월 23일 소강석 목사의 새에덴교회 저녁 예배에서 ‘한국교회 연합의 꿈, 반드시 이루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총회총무 재선에 도전하면서 “한국 교회 연합사역에 가시적 열매를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연합사역이 총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인가? 소강석 목사의 꿈에 유익한 것인가? 이 선거 전략이 본인에게 득이 될까, 독이 될까? 총대들이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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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3 20:02
인생, 그것 참...
어제 오후에 장례식장에서 연락이 왔다. ㅇㅇ호실 상주(부인)가 꼭 나에게 장례식을 부탁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고인의 부인이 '10여년 전에 목사님이 주례를 해 주셨는데, 장례식까지 해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급차가 집 근처 병원에서 다른 장례식장으로 운구했지만, 다시 우리 병원 장례식장으로 왔다고...깜짝 놀라서 직원에게 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ㅇㅇ. 아~~~다시 물었다. "사인이 뭐에요?" 직원이 하는 말, "결혼 후 아들 하나 낳고 외국계 회사 다니며 잘 살았는데, 어제 밤에 집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오늘 오후 4시 입관예배. 내일 아침 6시 발인예배. 주례예배와 장례예배를 10년만에...참 얄굳다. 인생이란 뭘까? 사는게 뭘까? 소위 말하는, 잘 사는 것은 뭘까?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병원에서 사역을 하다보니 그런건가? 아님 나의 삶이 별난건가? 환갑이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참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많은 장례 중에서 마음에 남아 있는 장례는, 태중에서 사산된 아이의 장례. 2살된 아이의 장례. 오히려 엄마와 아빠를 위로하던 11살 소년. 그토록 살기를 원했던 22살, 26살, 27살 ...코에 발병한 암의 통증으로 인해 괴로움 중에도 요한계시록 21장을 묵상하던 32살 자매. 이 땅에 두고가야 할 11살 아들 걱정에 암의 무서운 고통을 끝까지 참으며 아들을 향해 웃던 39살 엄마. 그 외에도 마음에 남은 수많은 분들. 후에 천국에서 만날 사람들... 아무튼지 결혼 주례에 이어 10년만에 장례 집례를 하면서 오늘이라는 삶의 소중함을 알고 지금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늘 마지막, 곧 죽음을 기억하는 삶(Memento mori)을 살아야 함을 다시 마음에 새겨본다. -
김병중 11-28 20:26
선교사나 신학대학 교수가 담임으로 가는 점프대인가(?)
과거 한때 선교사 출신들이 국내의 규모있는 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안식년 등을 통해 미국 등에서 교육 받을 기회가 있고, 때로 학위를 취득한다. 또한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인정으로 국내에 있는 목사들보다 더 유리하게 큰 교회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내 교회 목회 경험이 없었던 이유로 교회에 갈등을 유발해 지금은 그러한 유행(?)이 지나간 듯하다. 필자가 담임목회를 할 때 몇몇 선교사들을 후원했는데 내 기준은 ‘국내 교회 담임자리를 기웃거리지 않고 선교지에 뼈를 묻을 각오가 되있는 선교사’였다. 오죽했으면 이러한 기준으로 선교사 후원자를 선정했을까? 선교사들은 반성해야한다. 국내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중국에서 몇 년간 선교사역을 했던 최요한 목사(명동교회)는 한달에 한번 선교포럼을 개최하는데 국내에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한다. 그때마다 최 목사는 “선교사들은 편한 줄 알라”고 말한다. 또한 "국내 개척교회 목사는 평생 비행기 한번 타보지 못하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 목회하는데 선교사는 수시로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다니며 선교비 후원을 받아 자녀들을 영어권 대학에 보내 교육을 시키니 얼마나 대단한 혜택이냐"고 선교사들에게 말한다. 본인이 선교사 출신이기에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학대학, 신대원 교수들도 담임으로 종종 간택(?)된다. 대부분 외국박사학위 소시자이기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권성수 교수와 유상섭 교수가 큰 교회에 부임했다. 권 교수에서 배웠던 필자는 이것 또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수를 가르치는 코치가 어떻게 자신이 선수로 뛸 생각을 하는가? 이것은 선수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선교사나 신학대학 교수가 소명에 의해 작은 교회에 부임하거나 개척을 했다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화려한 스펙으로 대부분 큰 교회에 부임했다. 선교사든 신학대학 교수든 담임목회 자리 기웃거리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기대해 본다. -
김병중 10-13 08:21
낄끼빠빠
요즘 사용하는 말 중에 ‘낄끼빠빠’가 있다. ‘낄 때 끼고빠질 때 빠져라’를 줄여 이르는 말로, 모임이나 대화 따위에 눈치껏 끼어들거나 빠지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회식이 있을 때 상사는 적당한 때에 빠져줘야한다. 그래야 부하 직원들이 편한 시간을 갖는다. 카드를 건내주며 “난 일이 있어 먼저 가니 남은시간 즐겁게 보내라”고 한다면 얼마나 센스있는 상사로 인정 받겠는가? 직원들과 끝까지 남아 있으면 속으로 얼마나 많이 욕하겠는가? 노회도, 교회도 그렇다. 낄끼빠빠가 안되는 목사들이 있다. 최근 어느 노회가 분립 청원으로 논란이 있었다. 이유 중 하나는 증경총회장 때문이다. 90세가 다 되었는데 여전히 실권을 갖고 노회를 좌우하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국 노회 분립이라는 논란 앞에 자신이 더 이상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사태를 진정시킬려고 했으나 적잖은 노회원들은 반발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여전히 임원회도 참석하고 싶고, 선교위원회도 관여하고 싶다고했다. 이것이 얼마나 지겨웠으면 노회를 가르자고 했을까? 진작에 그 분이 낄끼빠빠를 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총회가 목회자 정년 문제로 시끄럽다. 매년 목회자 정년을 연장하자는 헌의안이 올라오고 있다. 당장은 3년 연장하자고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까? 3년이 5년 되고 5년이 10년 되지나 않을까? 그러다가 정년제를 폐지하는 쪽으로 갈려고 할 것이다. 물론 요즘 70대는 과거보다 건강하다. 그래서 목회를 몇년 더 하고 싶은 욕심을 부린다. 그리고 평생 목회만 했기에 은퇴 이후가 두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노회 묵인하에 조직교회 목사가 정년을 지나 목회하는게 유행과 꼼수가 되고 있다. 총회 법을 무시한 노욕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낄끼빠빠를 무시한 처사다. 낄끼빠빠만 잘해도 노회와 교회가 얼마나 평안할까?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모세를 낄끼빠빠 시키셨겠는가? 나이들수록 낄끼빠빠하자. ‘나이들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말이 왜 있을까? 나이 먹는 것은 서글프나 늙을수록 낄끼빠빠를 잊지 말아야 그나마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
김병중 09-28 10:44
자나깨나 말 조심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뉴욕 글로벌펀드 재정공약 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48초 만난 후 한 비속어 발언이 방송에서 공개됐다. 이후 청와대 대변인이 15시간 지나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만, 이제는 대통령도 자신이 뭔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보도한 방송국을 조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준석 전 대표도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자신을 비속어로 부른다고 말한적이 있다. 즉 윤 대통령의 비속어 발언 파문은 평소 그의 언어습관으로 결국 터질게 터진 것이다. 교계 기자로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목사, 장로들을취재한다. 아직은 말실수를 한 경우를 보지 못했으니 다행이다. 요즘은 기자들이 취재지에서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말실수는 '빼박'이 된다. 지도자나 교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매사 조심해야하니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래도 공인이고 알려진 인물이라 기자들이 취재해주니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한다. 그래도 총회나 행사장을 취재하며 모든 총대들의 말과 행실 수준이 높은 것을 보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앞으로도 품격있는 언행으로 교단의 품격이 잘 유지 되기를 바래본다. 약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김병중 09-24 18:37
주다산교회 집사님, 감사합니다!
107회 총회가 열린 지난 9월 21일 수요일 저녁 7시 총회 장소인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 시무)에서 권순웅·배광식 목사 이취임 감사예배 후 『샬롬부흥 한국교회』 창작 뮤지컬 취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늦었다. 함께 차로 이동하기로 한 팀은 미리 가버렸다. 숙소까지는 1.8키로미터라 걸어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고 대중교통도 불편하고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다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총회 행사에 봉사하는 한 여집사가 선뜻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신다고했다. 덕분에 본 기자와 기독신문 사진 기자는 편히 목적지에 갈 수 있었다. 이름모를 여집사는 차를 운전하면서 권순웅 담임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에 대해 쉬지 않고 말했다. 새가족이 등록하면 권 목사님이 심방을 하고, 또 금요일에 해외를 다녀오시더라도 공항에서 교회로 바로 와 금요기도회에 참석해 기도하시는 등 참으로 훌륭한 목사님이시라는 것이었다. 본인도 등록한지 많이 되지는 않았지만 교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숙소에 가깝게 데려다 주고 가셨다. 성함을 여쭤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초면인 기자에게 차량 봉사를 해주시고, 권순웅 담임목사와 주다산교회를 자랑하는 것을 보고 권 총회장이 목회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총회장이든 어떤 임원이나 부장이든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양지이며 교인들이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목사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목회를 잘 하고, 교인들에게 존경 받고 인정 받는 목사가 총회를 섬기고 봉사해야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와 담임목사를 자랑하는 교인을 갖는 것이 목회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이름모를 집사님께 받은 사랑과 교회와 담임목사에 대한 애정과 자랑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이렇게 글을 써본다. 행사 후 본당 출입구 맞은 편 정문 쪽에서 봉사하셨던 이름모를 집사님 고마워요! -
김병중 03-26 00:47
돈인가? 하나님인가? 선택의 길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물이나 하나님 중에서 오로지 하나만을 선택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이지, 둘 다 얻을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면 재물을 버릴 수밖에 없고, 재물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적 삶이란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고, 오로지 가난한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실제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러한 정신에 따라 스스로 가난한 삶을 추구했던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맨발의 최춘선 할아버지는 가난한 삶을 실천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찍은 다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김우현 작품)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래서 그렇게 자기도 살아보겠다는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불교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얻을 수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적어도 하나님을 믿으려면 가난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성경에는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섬기는 대상”에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앉을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 하나님이 앉으시면 재물이 들어설 수 없고, 재물이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앉을 자리가 없다. 재물은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이고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재물이 너무 좋은 나머지 우상이 되어버리고, 섬김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결국 재물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리고,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된 사람들을 향하여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돈을 앉혀버린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언제 재물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되는가? 언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것인가? 우리는 재물이 우상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만일 재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칙에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 얼마 전 영국 레스터-노팅엄 포레스트 FA컵 4라운드 경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레스터는 2부 리그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1-4로 패배하였는데, 전반 32분 3-0을 만들며 승리를 확신한 노팅엄 선수들은 기쁨에 겨워 골 세리머니를 펼쳤을 때였다. 레스터 팬 한 명이 뛰어들어가 선수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안면을 가격했다. 그에게 있어서 스포츠는 단순히 여가를 즐기는 수단이 아니라, 어느새 우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들의 자녀들도, 우리들의 직장도,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도, 때로는 심지어 교회에서의 사역도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우상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악을 행하면서도 악한 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좋아함을 넘어서서 우상의 단계로 올라가 버린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국진 목사 - 현,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 - 총신 대학교 신학과 졸업 - 총신 신대원 졸업(M.Div. 목회학) - 고든콘웰 신학교 졸업(Th.M. 신약학)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해석학 박사 과정 수학 - 노쓰웨스트 대학교 졸업(Ph.D. 신약학) -
김병중(Th.D) 03-18 15:14
또 다른 넷플릭스 K-드라마, 지옥
솔직히 말해 별로였다. <오징어 게임>은 흥미진진해서 다음 편이 기대되고 또 기대되었지만, <지옥>은 플롯의 전개가 밋밋하고 진행이 느려서 지루했다. 기대를 뒤엎는 반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깊은 감동을 주는 장면도 없고, 그냥 연상호다운 괴기스러운 장면들만 펼쳐질 뿐이었다. 늘 한국 영화에서 느끼는 스토리의 부재가 문제였다. 겨우겨우 1편을 참아가며 마친 후에는 더 이상 볼 동력이 내 안에 없음을 발견하고 이만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본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에, 그리고 <오징어 게임>에 이어서 또다시 1등을 했다는 소리에, 그리고 주제 자체가 종교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끝까지 보았다. 2편부터는 그래도 1편보다는 진행이 좀 빠르긴 했지만 지루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종교적 질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아니었더면 안 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옥>이 다루고 있는 주제만큼은 관심이 갔다. 아무튼 연상호의 <지옥>은 왜 전능하고 선하시며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가라는 문제인 신정론(theodicy)을 다룬다. 드라마에서는 새진리회라는 이단종파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죽을 날짜와 시간을 예고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시간이 되면, 죽음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사람을 태워버린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정진수 의장(유아인 분)은 그건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신(神)이 있다면 분명 공의로운 신(神)일 것이고, 그런 신(神)의 사자(使者)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분명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고지당한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자신이 정말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나보다 더 악하게 산 다른 사람들은 왜 멀쩡하게 살아가는가? 죽음이 신(神)의 심판이라는 해석이 그럴 듯 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고지를 받은 송소현의 아기이다. 변호사 민혜진은 송소현의 아기 케이스야말로 종교단체 새진리회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상호는 이 드라마를 통해, 이 세상에 신(神) 따위는 없는 것이라고 외치는 셈이다.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인데 사람들의 약한 심성을 이용해 종교권력을 사용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훈계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자에 의한 죽음의 고지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사람의 고통들이다. 누구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누구는 암에 걸리고, 누구는 이혼을 하고, 누구는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누구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결국 어느 때인가는 죽는다. 도대체 그런 불행한 일이 그 사람에게 왜 일어나는 것일까? 연상호는 말한다. 그거 그냥 일어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의 잘못을 책벌한다는 것은 저 새진리회라는 사이비 종파나 화살촉 회원들과 같은 사악한 무리들의 주장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를 비웃는다. 사실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를 까는 셈이다. 그는 하나님이란 없다고 외친다. 그러니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죄책감에 시달릴 것도 없고 그냥 무덤덤하게 그게 인생이려니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상호의 메시지는 들을 게 있다. 종종 탐욕적인 종교인들이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종속화시키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은 종종 사람의 탐욕을 위해 봉사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그건 이단종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통 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지도자에게 대들어서 병에 걸렸다느니, 헌금을 충분히 바치지 않아서 사고가 났다느니, 종교적 의무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해석"에만 무조건 맹목적으로 추종할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그게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성경의 해석을 교회로부터 일반인에게로 돌려준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지옥> 드라마는 우리의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참된 사랑뿐이라고 제시한다. 송소현의 아기는 죽음의 고지를 받았지만, 죽음의 사자들이 죽이러 왔을 때 배영재와 송소현은 아기를 감싸 살리고 아기 대신 죽는다.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사랑만이 소망이란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에게 죽음의 고지가 온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박정자가 부활하는 것일까? 그는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사랑만이 소망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C. S. 루이스는 영화나 소설 같은 것들은 우리 안의 절대자(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메시야를 영화나 소설에서나마 그려냄으로써 그러한 갈망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영화는 – 심지어 반기독교적 영화라 할지라도 – 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연상호의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황당한 엉터리 ‘개독교’에 소망이 없다고 묘사하면서, 동시에 어디 우리를 구원할 참 사랑이 없는가를 외쳤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너만은 살아 나가라” 했던 그런 지영이와 같은 사람 어디 없느냐고 외친다. 그런데, <지옥>도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표방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는 새진리회같은 엉터리 종교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아무런 힘도 없이 죽어나가게 되어 있던 아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을 당하면서까지 아기를 지켜낸 그런 부모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외친다. 그런 참 사랑만이 우리를 살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현실 속에서 부모는 어설픈 사랑뿐이다. 사랑으로 한 일인데, 오히려 아이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정말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참 사랑은 어디 없는가? 그게 <지옥>이 부르짖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여기 참 사랑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분은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고 천한 이 땅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 자신의 살을 내주고 피를 내주어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게 참 사랑이다. 전능하시면서 동시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왜 이 세상이 이 모양 요 꼴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새진리회식 섣부른 대답은 조롱만 당할 뿐이다.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을 믿는다.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함부로 정죄할 것도 아니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만할 것도 아닐 뿐이다. -
김병중 03-16 23:26
“애국목회자들”이라... 답답하네요
김동일 목사 1. “교파를 초월한 애국목회자들이 부산 세계로 교회로부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약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회개대성회를 개최하였다.” 이 따옴표는 친구목사님께서 답답해하면서 올려주신 한 기독교언론사의 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11월 11일 세계로 교회라는 곳에서 “국가 비상 긴급 기도대성회”라는 집회가 열린 모양입니다.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스럽고 한숨만 나옵니다. 2. 우선 기자양반에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기사 첫머리부터 비문(非文)인건 알고 계시려나... “부산 세계로 교회로부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가 무슨 뜻입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애국목회자’와 ‘국민회개대성회’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합니다. ‘애국’ 목회자님들 회개할 일이 있으면 당신들 회개하시면 되지 왜 ‘국민’을 회개시키려고 하나요? 우리나라가 기독교국가입니까? 우리나라가 비상사태라고 말하면 세계가 웃어요... 3. 포스터를 보니,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의 용사들이여, 영적 전쟁 낙동강 전선 세계로 교회로 모입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포스터대로 하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그리고 경상도 일부는 무슨 영적전쟁에서 이미 패한 듯합니다. 도대체 무슨 영적 전쟁에서 이렇게 나라를 다 빼앗기고 자기들만 남았다는 것인지 알아듣게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라면 나머지는 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인데... 저는 제가 왜 ‘무릎 꿇은’ 목사가 되었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어요. 4.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깨닫지 못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치를 하면서 자신들의 극우적 입장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할 목사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삶을 통해 예수를 드러내야할 목사들이 철지난 ‘공산주의’ 타령하면서 결국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 가지 가르쳐드릴까요? ‘목사’라는 타이틀에는 ‘애국’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어요. 그냥 담백하게 ‘목사’면 됩니다. 5. 한국교회가 희망을 회복하려면 우선적으로 태극기 기독교가 망해야 합니다. 신학도, 기독교 역사도 모른채... (어쩌면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해석과 편협한 지식에 경도되어)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마치 자신들에게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는 듯이 행동하는 ‘애국’목사들에게 회개의 영이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당신들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로도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정립된 ‘정교분리’의 역사적 배경과 내용을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6. ‘애국목사’가 아닌 그냥 ‘목사’로서 부끄럽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화평을 주도해야 할 텐데, 오히려 분열과 갈등과 혐오와 배제에 주력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강화시키는 주동적인 정치목사들, 이념으로 장사하는 목사들에게 마태복음 23:13-36으로 ‘권면’드립니다. ‘Woe to you, 화있을진저’... 『예수로 성경읽기』의 독특성은 저자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성경의 각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 어려운 성경이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고 성경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드러내준다. 이런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대 교회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분명히 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제시하는 그런 책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타내러티브를 집어냄으로 우리에게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가를 잘 짚어준다. 책 속으로 [저자 서문]『예수로 성경읽기』는 성경공부다. 먼저, 역사와 함께 읽는 성경공부다. 아브라함을 수메르-아카드 문명과 함께, 출애굽기를 이집트 문명과 함께, 신약을 그리스-로마 문명과 함께 읽음으로써 각 시대의 삶의 자리(Sitz im Lseben)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신학과 함께 읽는 성경공부다. 초대 교회 이래로 사도적 전통 하에서 성경을 연구해온 수많은 신학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수고가 오늘날 우리의 바른 성경 읽기와 건강한 신앙의 초석이 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통전적으로 읽는 성경공부다. 성경을 부분이 아닌 통(전체)로 읽으며, 신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촘촘하게 탐구하고 연결하고자 한다.『예수로 성경읽기』는 인본주의(Anthropocentric) 성경읽기가 아닌 신본주의(Theocentric) 성경읽기다. 인본주의 성경읽기란 인간중심(man-centred) 또는 내 중심(me-centred)으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자유주의와 번영 신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신적 저작권을 부인하고 인간의 기록으로만 치부했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을 무의미한 조각들의 모음으로 해체하는 우를 범했다. 번영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함의 목적을 땅에서 형통한 복, 자녀들이 잘되고 번성하는 복과 같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들에 둔다. 샤머니즘의 기독교적 버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와 번영 신학은 다른 출발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중심의 성경읽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에 비해 신본주의 성경읽기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다. 성경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올바른 성경읽기란 성경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을 깨닫는 것이다.『예수로 성경읽기』는 통전적 성경읽기다. 성경전체의 목적,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통일성을 읽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서는 구약과 신약을 부분적(partial), 분석적(analytic)이 아닌 통전적(holistic)으로 읽어냄으로써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자 한다.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는 “거대담론, 전체적 그림, 전체를 포괄하는 이야기, 전체의 주제”를 의미하는데 통전적 성경읽기의 최종적 목표는 바로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곧 메타내러티브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큰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밝힌다. 목차 추천사·5프롤로그·9제1부 통전적 성경읽기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19제1장 통전적 성경읽기를 위한 두 개의 핵심용어·37제2장 예수 그리스도와 새창조의 시작·65제2부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제3장 첫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구원·87제4장 세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십자가·119제5장 다섯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부활·151제6장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181제7장 절기의 종말론적 성취와 예수·213제3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제8장 다윗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247제9장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275제10장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303제11장 예수의 육체로 일으킨 참 성전·337제12장 종말과 요한계시록·369제4부 믿음의 결국제13장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진 예수의 교회·411제14장 교회의 이중적 지위·451제15장 구원의 확신·485제16장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511에필로그·540참고문헌·542미주·545 추천사 심창섭(역사신학 교수) 30년 전, 신학교에서 만난 김동일 전도사님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원우회장으로 좋은 리더십을 가진 실천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곧 도미한 김동일 목사님과는 미국에서 호주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만남을 가지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내가 아는 김동일 목사님은 학위나 여타 스펙을 쌓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만나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신학교 시절의 순수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교회와 목회 현장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진단하는 날카로움과 예리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김동일 목사님의 목회 여정과 닮은 책입니다. 올바로 말씀을 가르치고 자신의 삶을 그 가르침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그의 인생관과 목회관이 이 책에서도 그대로 묻어납니다.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김동일 목사님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성경을 보는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성경해석학적 안목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어냅니다. 또한 성경을 통해 시대를 읽어갈 수 있는 역사적 지식과 안목도 겸비했습니다. 역사 연구가로서 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책은 그 결정체입니다.이 책의 독특성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성경의 각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 어려운 성경이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 점입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고 성경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드러내 줍니다. 이런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대에 교회로써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분명히 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제시하는 그런 책입니다. 쉽게 읽히면서도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타내러티브를 집어냄으로 우리에게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가를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성경과 교회와 삶의 현장이 괴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전달되는 그의 책이 무디어진 우리의 가슴과 지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모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평신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합니다.[전 총신대신학대학원 원장 및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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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15 08:16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치고
2023년도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쳤습니다. 초등부4-6학년 아이들이 한학기 동안 노래 교실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배운다는건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아이들이 꿈을 꾸고 교사인 우리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그런 학교를 꿈꾸며 한학기를 달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지켜보며 가슴이 벅찼습니다. 먼 타국에서 한국 땅을 향해 온 어머니들이 낳은, 다문화 자녀라 불리우는 이 아이들이 꿈을 노래하는 모습에서 룻도 생각나고 나오미도 생각 났습니다. 바울이 키운 영적 아들 디모데도 떠올랐습니다. 그도 이방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출신이었죠. 이류 취급 받고, 제국에서는 주변인 처럼 살아간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꿈을 꾸듯 달려 왔습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며, 없는 길을 만들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달의 방학을 보내고 여름학기를 또 시작 합니다.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아이들 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
김병중(Th.D) 05-15 08:04
아버지 자리
"어버이날 선물" 어버이날인 오늘 막내딸은 늦었다고 아침에 학교태워달라고 눈치 줘서 엄마가 태워줬고 집으로 올쯤 냉면 먹고 싶다해서 아빠가 삶아 먹게했더니 깜짝 이벤트 해 주었습니다. 역삼동까지 가서 사온 어버이날 맞춤케익이라 하면서요. 노래를 듣는데 저는 자꾸 천국가신 어무이 생각나서 울컥했습니다 “아버지 자리” 1. 나는 가난한 농부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45세였다. 줄줄이 딸만 낳다가 느지막하게 형과 나를 3년 터울로 낳았던 아버지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 결혼 할 때 아버지는 이미 70대 중반이셨다. 워낙 나이차가 많다보니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같았다. 그 시대 아버지상은 무뚝뚝하고 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밥상 한번쯤은 마당으로 던졌던 것을 자랑삼아 말하던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따뜻함,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늘 먼데 계신 분이셨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것이 없던 아버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 종종 인상 쓰셨고, 걱정과 염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오래된 옛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물론 농협 대출 받았다. 대출 상품은 20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으면 되는 농민들에게 좋은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 집에 사는 기쁨보다 빚으로 인한 염려가 더 크셨다. 일찍부터 철이 든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염려가 많으시고, 돈이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인 형과는 달리 나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 길을 선택해 속 썩인 일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어릴 때가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착하다’였다. 그때 형성된 착한 아이 이미지는 보름 전, 40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커리어도 어느 듯 30년이 가까워진다. 어느 날, 대학 다니는 막내딸이 용돈을 좀 달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뜩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속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냐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 상이 내 모습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공납금이나 학용품 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면 언제나 엄마가 대신하여 옆집으로 달려가 돈을 꿔와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난했고, 고단한 인생길을 사셨다. 하지만 언제나 정직하셨고 진실하셨다. 경우를 벗어난 행동과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셨다. 더군다나 인생 후반에는 믿음에도 큰 진전을 가지면서 새벽을 깨우며 항상 기도하셨다. 지금도 새벽예배 후에 소죽을 쇠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찬송의 소리가 들린다. ♪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 온지도 벌써 21년째다. 누나들은 내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내가 나를 봐도 얼굴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요즘 아내가 나를 보면서 ‘미’라고 소리 내라고 한다. ‘미’라고 소리 내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상 쓰신 아버지상보다 웃는 아버지상이 보기 좋다. 3. 언제부턴가 엄혹한 사회의 톱니바퀴에 끼인 채 제자리를 맴돌며 점점 주변을 서성이는 아버지들의 늘어나고 있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표현할 줄 몰라 함께 있으면 서먹해지는 아버지, 가족들의 대화에 당최 끼지 못해 가정에서조차도 왕따 되어가는 아버지, 아내 없인 금방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 그래서일까? 자식들 입장에서 어머니보다 멀리 계신 분이 아버지다. 5월만 되면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그립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또한 딸들에게도 친근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어제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친구 목사를 보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생각했다. 멋진 아버지로, 친근하면서 웃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은 삶을 살기를 다짐해본다. -
김병중(Th.D) 05-15 07:49
밀린 숙제를 하다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한 지 꼭 12,000일 되는 날이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그동안 바쁜 관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 먼저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신경직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지 벌써 올해로 만 11년 하고도 10개월째, 그리고 2017년 3월 17일 금요일, 김선호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지 만 6년하고도 2개월째, 두 친구를 보고 싶어서 각각 오산리에 있는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와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는 청아공원을 찾았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신경직 목사를 보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묵상하고 아내와 사진 한장을 찍고, 나온 후 영산수련원에 새로 생긴 "아리아1968"이라고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점심겸 커피한 잔과 빵으로 점심을 먹은 후 많이 변한 영산수련원과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트레킹 길로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 걸리더라). 그 옛날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서 내가 먼저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후 이듬해 사랑하는 아내가 이곳 최자실 기념금식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많이 변한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아공원으로 향했다. 청아공원에 도착하여 예전대로 기독교관 1층(내 느낌엔 지하 2층 같은 느낌이지만, 그곳에서는 1층이라고 부르더라)에 위치한 <은혜홀 파> 방으로 들어갔더니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김선호 목사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사무처로 문의 후 3층의 <믿음홀 다>방으로 아들 예찬 군이 작년에(5주기 때)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음홀 다 A1-02 > 김선호 목사가 새롭게 자리잡고 위치한 방이다. 김선호 목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을 생각하다가 묵상기도를 한 후 아내와 간단하게 사진 한 장을 찍고 청아공원 주변을 잠시 걸었다. 누가 가보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꼭 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이 두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끊을래야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인연인 것 같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이 두 친구와 지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잠시 이야기 해 주었다. 언젠간 나도 먼저 간 두 친구처럼 저렇게 추모공원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있겠지...그때 잊지 않고 날 찾아줄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악착같이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오래 살아 남아야겠지...먼저 간 두 친구는 참 배짱도 좋다. 그렇게 먼저 가 놓고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숙제를 주는 것인가... 오늘 나는 두 친구가 내게 준 숙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한다. -
김병중(Th.D) 05-07 22:55
『생활동반자법』, 무엇이 문제인가?
2023년 4월 26일에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이란 그 사람 자체가 곧 입법기관이며 법을 잘 만들라고 국회의원 본인과 보좌관에게 연간 약 8억 원의 세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세비 지원과 함께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은 나라를 위한 좋은 법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데 이번에 용혜인이 발의한 법안을 들여다보면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라 나라를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우리의 미래 세대를 망치는 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나쁜 법이다.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이란 도대체 내용이 무엇이며 그 속에 어떤 문제점이 들어있길래 그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그리고 용혜인은 국회의원으로서 도대체 왜 그런 악법을 발의했단 말인가? “여기 새로운 가족이 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의 정식 명칭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인데 해당 법안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권인숙, 김두관, 김한규, 유정주, 이수진 의원,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이 공동발의자들 가운데 정의당 장혜영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사람이며 그 법안은 지금도 국회에 계류중이다. 이처럼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있어서 다 한통속이다. 『생활동반자법』의 골자는 결혼하지 않아도 성인 2명이 합의해서 동반자 관계가 되면 이들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정춘숙 의원 두 사람이 2021년에 각각 대표 발의했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과 큰 틀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역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 개념을 삭제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다수 국민의 반대에 막혀 현재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용혜인이 주장하는 가족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하면 된다. 결혼식까지도 필요 없고 단순히 혼인신고만 해도 된다. 만일 결혼과 혼인신고 하는 것이 싫으면 혼자 살든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면 된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결혼제도를 파괴하려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혜인은 왜 그런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또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발의했을까? 용혜인이라는 사람을 따로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녀는 젠더 이데올로기, 성 혁명 세력의 일원이거나 혹은 그들의 지지와 사주를 받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성 혁명 세력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해체주의자들로서 국가와 교회와 가정이라는 기본 질서를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성 혁명 세력이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정상 가족 신화”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은 타파해야 할 “신화” 혹은 “미신”이다. 그래서 가정을 생명처럼 지키는 교회와 성경은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 성 혁명 세력은 집요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 해체를 추진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들은 우리나라에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23개나 존재함에도 동성애 합법화를 포함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저들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통해서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가정을 허물려는 자들이다. 저들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조기 성애화하고 유년기부터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듦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망치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5년마다 새로 만드는 교과과정에 성 혁명 사상을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발각되었고 우리가 사생결단 투쟁해서 바로잡아놓은 상태이다. 금번에 용혜인이 개인적 소신으로 발의했는지 혹은 성 혁명 세력의 지침에 따라 누군가 만들어준 법안에 이름만 올렸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사실이 어떠하든지 『생활동반자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악법이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이런 법이 제정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서서 이를 막아낼 것이다. (※ 해당 법안은 용혜인 의원이 국회 소통관에서 발의한다고 발표했고 KBS와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했으나 막상 의안현황에는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절한 발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듯하다.) -
김병중(Th.D) 04-26 10:52
가짜목사 전성시대
가짜목사 전성시대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사람이 감옥에서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었고, 목사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센세이셔널하다. 어쩌면 복음의 능력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생생한 증거일 수도 있다. 한때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세상의 영화를 다 버리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불교의 스님이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아주 흥미롭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 인기리에 초청되기도 한다. 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교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한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믿음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에, 디모데전서 3:6에서는 직분자를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함부로 세우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급하게 목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다. 그렇게 양산된 목사들이 사실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목사가 되었다던 그 사람은 여전히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목사가 되었다는 그 연예인은 불륜에 폭력에 온갖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고, 선교 사역을 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일까?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가짜 신앙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가짜 성도 가짜 목사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털을 입은 이리인지 분별하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니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사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돈과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이 땅에서 탐욕을 추구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먹고 배불렀던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사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가짜 목사들도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한다. 가짜 목사의 비리와 행태를 종종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같은 영적인 식구니까 감싸고 돌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도 똑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교회는 거룩성을 추구해야 한다(고전 5:11-13).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로 권징을 들었는데, 이는 거룩성을 추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시대는 가짜 목사 전성시대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럴 것이라고 예언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한다. -
김병중(Th.D) 03-04 20:40
건빵
어제 아침, 교회에 가니 택배 상자가 있었다. 택배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주소를 확인하니 내게 온 게 맞았다. 군용 건빵이었다. 그것도 무려 7종류의 건빵이었다. “21곡물 가득 참깨 건빵”, “땅콩건빵”, “참깨건빵”, “야채건빵”, “검은깨건빵”, “쌀건빵”, “건빵”. 총회 군선교사회에서 보낸 거였다. 보암직 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건빵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내 손이 간 곳은 아무 수식어도 없는 ‘건빵’ 봉지를 집고서 뜯었다. 건빵 2개에 별사탕 1개를 입 안에 넣고 어저께 산 ‘구쯔 커피’를 내려 한 모금을 마셨다. 환상적이다. 카페에서 달달한 빵과 먹는 것보다 이게 훨씬 맛있다.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는데 자꾸 옛 생각이 난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2월,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기 전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양주 가래비에서 훈련받았다. 따뜻한 경상도 사람이 전방에 가니 너무 추웠고, 배고픔에다가교육사단이라 훈련도 빡세고, 행군도 3번에 걸쳐 총 160km를 걸었으니 하루하루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전우들 때문이었다. 내 훈련번호는 67번이었고, 앞 66번은 착하고 순한 포항 출신 ‘양0원’이가 뒤 68번은 사회에서 유흥업소에서 지루박, 탱고 등 각종 춤과 여자를 일찍이 마스터한 ‘이0출’이란 친구가 배치되었다. ‘이0출’은 훈련하다가 휴식 시간이 되면 남들은 담배 한 개를 장전할 때 조교의 부름을 받아 앞에 나가 어김없이 멋진 춤사위를 벌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도 사회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웅담 삼아 내게 곧잘 이야기해 주었다. ‘이0출’의 영웅담은 교회에서 율동할 때 외에는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 없는 순둥이 청년인 내게는 신세계였다. 그렇게 종일 훈련을 마치고 저녁 먹고 10시 취침에 들면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좌우에 누운 66번과 68번 그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얼굴이 검고 담배를 많이 피워 검붉은 입술을 가진 우리 소대 선임하사인 그놈이 훈련병 누군가를 깨웠다. 그리곤 페치카 옆에서 단둘이 ‘아작아작 ’소리 내며 뭔가를 먹는 게 아닌가? ‘건빵’이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부러운지 밖에서는 쳐다보지 않았던 건빵이 너무 먹고 싶어 눈물이 찔끔거렸다. 나중에 보니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지난달 초에 동기 임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임 목사님은 우리 교단 군선교사회 회장이다. 임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 목사님들이 자비량으로 군선교사로 활동하시는데 2월말, 1박 2일로 전략 캠프 수련회를 준비하는 중에 후원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임목사님은 10년 넘게 군선교사로 활동하지만 단한번도 도와달라고 전화하지 않았던 분이다. 오죽했으면 전화까지 했을까 싶어 집에 있는 돈을 싹 끌어모아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편지와 함께 건빵을 보내 감사를 표했던 거였다. 요즘 군인들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만원 넘는 월급에 이렇게 맛난 건빵까지 마음껏 먹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우리에겐 배부른 요즘애들이 가질수 없는 건빵 추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 건빵 추억이 오늘 이렇게 글감이 되어 내 인생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건빵 다 먹었다. 은근히 배부르다. -
김병중(Th.D) 03-01 21:48
어머니 부재 1년
벌써 1년이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이사 가신지. 시골집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낡은 대문, 현관 경사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장독대, 집안에 가재도구 등...단지 어머니만 계시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계신 것처럼 구석구석 흔적은 여전히 묻어있다. 어저께 오전, 온 형제들이 시골집에 모여 어머니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누나들이 끓어 놓은 청도추어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내게 청도추어탕은 어머니 냄새다. 맑은 추어탕에 제피가루 듬뿍 넣어 먹는 맛은 시골 가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 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청도추어탕을 맛볼 수 없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웠다. 혹시 수도권에 청도 추어탕집이 있나 검색해 봐도 없었다. 청도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에 전화해서 가격도 물어봤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누나들은 아재 밭에서 냉이를 캐고, 나는 잠깐 동네 산책을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따뜻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인적이 예전만 못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빈집도 더러 보인다. 집은 곳곳이 무너졌고,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옛날 반들거리던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을 맨 위에 사시는 아재 집에 가면서 빈집을 가리키며 형에게 물어봤다. “이 집이 누구 집인교?” “내 친구 00집이다” 그 집 앞 담벼락에는 깨진 벽들이 두 개씩 겹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난 설에 보니 양지바른 그곳은 ‘미륵땡~’이라고 불리는 그 동네 아지매들이 겹쳐진 벽돌 위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 나누던 아지트였다. 아재를 뵙고 내려오면서 보니 옛 점빵도 보인다. 요즘으론 미니슈퍼다. 역시 텅텅 비어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라면부터 새우깡, 맛동산, 초코파이 등이 없는 것이 없었다. 밤마다 용띠 형들에 이어 양띠인 우리까지 뻔질나게 찾아가 내 친구 상이 어무이를 깨우며 많이들 외상으로 사 먹었다. 외상값은 다 갚았는지 모르겠다. 동네 냇가도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에는 물도 많았고 피레미, 버들치, 중태기 등 물고기들도 많았다. 초여름부터 우리들이 뻔질나게 멱감았던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향 생각날 때마다 보려고 몇 장 더 찍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 토요일을 바쁜 날이라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누나들이 어머니가 담은 마지막 된장이라 하면서 담아준다. 간수를 뺀 소금 자루도 있어 챙겼다.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수건 하나를 챙겼다. 수건이 없어서 챙긴 게 아니다. 집에는 삶아 뽀송뽀송한 깨끗한 수건이 많다. 하지만 시골집 수건이 좋다. 그 수건에는 고향 집 특유의 향이 나기 때문이다. 그 향은 내게 어머니 향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다 그 향을 맡고 싶다. 그날 하루 왕복 8시간 운전했다. 설교 준비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곧바로 꿈이 꾸였다. 꿈에 어머니가 옛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꿈결에 어머니 소리마저 들렸다. 너무 생생했다.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잠깐 내 곁에 내려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을 토닥여주고 간 것 같았다. 감사함이 넘치는 고향 나들이였다. -
김병중(Th.D) 02-19 11:37
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3년 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아는 게 없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공부 할래요” “무슨 공부?” “상담공부요.” 아내는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서울여자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가족상담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30년 만에 시작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컴퓨터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했고, 눈도 침침해 돋보기를 껴야만 책을 읽을 수 있어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평소 코를 전혀 골지 않았는데 공부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코를 골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교수에게 계속 질문하였고, 배운 내용은 끊임없이 내게 말하면서 익혔다. 덕분에 내가 야매로 상담 공부한 셈이다. 무엇보다 교수들이 추천한 전공서적은 모두 사서 줄을 치면서 읽고 또 읽었다. 솔직히 나도 학위공부 했지만 아내처럼 그렇게 전공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하지는 못했다. 예전에 내가 공부할 때 아내가 최선을 다해 도왔듯이 이제는 내가 도울 일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코로나 기간이라 시간적 여유로움이 생겨 도울 수 있었다. 라면과 김치찌개 정도 끓일 줄 알았는데, 유트뷰 선생들의 친절한 설명을 보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보니 재미있었다. 요리가 별것 없었다. 짠맛과 단맛의 적절한 조화와 그 맛을 내는 재료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공부할수록 컴퓨터 다루는 실력이 늘어가는 아내의 손놀림과 요리할수록 양파, 대파, 마늘 등을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는 나의 손놀림은 비례하였다. 집에 있는 세 여자는 모두 공부한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유일한 남자인 나는 어설픈 칼질을 하면서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역할의 역전이 코로나 기간 우리 가정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공부를 곧잘했다. 첫 학기부터 성적이 좋더니 꾸준하였다. 하지만 4학기 째 논문과목은 너무 힘들어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문은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다. 국제신대원에서 논문 지도한 경험을 살려 아내를 도와주니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무사히 그 과목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4-5학기 때가 되니 상담인턴 과정까지 겹쳐 아내는 정말 바빴다. 놀이치료를 통한 아이와 부모 상담, 게다가 교회 등록한 새 가족들 상담 등 아내의 일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더니 무사히 모든 학위과정을 마쳤다. 며칠 전 대학원 교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모든 과목에서 에이 플러스 받아 석사과정 전체에서 수석 했다고 하면서 졸업식 날 석사학위증을 대표로 받아야 한다고. 오늘 아내는 길고 길었던 학위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3년 만에 대강당에서 행해지는 서울여대 졸업식은 찬양과 기도와 축복이 어우러진 은혜롭고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두 딸과 함께 가서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최선을 다한 아내가 멋있었고 아름다웠다. 앞으로의 아내의 사역도 많아질 것 같다. 이전보다 깨어진 영혼들이 더 많은 시대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다쳐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내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녀와 28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아내를 믿는다. 아내는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러기에 내담자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고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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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5-21 19:33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지난 5월 20일 오후 행사취재로 남현교회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본당 앞 로비에서 남현교회 이춘복 원로목사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목사님께 기자임을 밝히고 목사님께서 쓰신 「쉬운 목회」를 한 권 얻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목사님께서 책 출간 기자회견을 했는데 오지 않았느냐고 묻길래 연락 받은바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담당자인 누군가가 일부 기자에게는 고의로 연락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다른 기자의 기사를 통해 출간 기자회견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책에 대한 관심이 있어 목사님께 한권 받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만에 다 읽고 내용이 너무나 훌륭해 이 책에 대한 기사를 싣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목사님의 인품이 참으로 훌륭하시다는 것이다. 인격목회, 화평목회, 인내목회, 섬기는 목회 등등이 개척해서 40년 목회를 가능하게 했고 크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탈무드에 보면 “노인은 다음 세대를 위해 책을 써야한다”는 말이 있다. 삶의 경험을 글로 남김으로써 다음세대에게 교훈을 주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목사님의 책은 40년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권으로 준비하고 있는 「쉬운 성장, 쉬운 은퇴」도 기다려진다. 책을 꼼꼼히 보면서 여러 군대의 오탈자를 잘 표시해뒀다. 다음번에 뵙게되면 전달해 드려 책이 재판될 때에 교정됐으면 한다. 모든 내용이 좋았지만 특히 교회 후임자 선정과 세습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이 귀하기에 이 부분의 전문을 게재한다. 이 목사님은 세습에 대해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전도 길이 막히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세습이 너무나 일반화되어있다. 그러나 결코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동안 목회한 아버지의 은퇴 말년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아들 목사에게 평생 “세습 목사”라는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결코 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명성교회처럼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된다. 아울러 후임자를 잘 선정해 교육시켜 목회를 이어받게 하는 것도 참 신선하다. 보통은 자격을 다 갖춘 목사를 후임자로 선정하는데 교회에서 후임자 유학비까지 부담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이것이 규모있는 교회의 트랜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에 “뼈가되고 살이되는” 이 책의 일독을 강추한다! 다음은 저자의 교회 세습에 대한 확고한 견해와 후임자 목회 승계에 대한 좋은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의 전문이다. 이 년만 배우게 해주세요(p 159-163) 2015년 연말에 아들을 우리 교회 부목사로 청빙하는 문제 때문에 큰 홍역을 치렀다. 아들이 신학을 하면서 나에게 부탁을 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 목회가 제 모델입니다. 아버지 밑에서 이 년만 배우게 해주세요. 아버지의 목회 철학과 목회 운영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내가 말했다. "나에게 와서 배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 교회 오려면 후계자가 다 결정된 다음에 와라. 그래야 오해를 받지 않는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세습 문제로 상처가 크기 때문에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면 오해를 받는다.” 남현교회는 내가 은퇴하기 십 년 전 후임을 정했고 유학까지 시켜 목회를 이양했다. 은퇴 십년 전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후임을 정하자고 했을 때 장로님들이 반대를 했다. "목사님, 지금 새 성전을 건축하고 입당해서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운데 후계자 문제는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목사님 은퇴가 십 년도 더 남았는데 벌써 후계자를 정해야 하나요? 목사님 은퇴 문제를 꺼내면 레임덕 현상이 있어 교회가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장로님들 말씀도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요 은퇴는 총회 헌법에 정한 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준비하는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은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교회들 후계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후계자를 미리 정하고 잘 키워서 은혜롭게 교회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당회에서 잘 말씀드려 허락을 받고 후임을 모셔오게 되었다. 오래 전 우리 교회에서 사 년을 시무했고 분당우리교회에서 육 년을 시무한 목사님이다. 목사님은 다시 남현교회에 오셔서 삼 년을 시무하고 유학을 떠났고 유학 사 년 후 돌아오셔서 이 년 동안 동사 사역을 하고 목회를 이양했다. 내가 후임을 일찍 정한 것은 네 가지 이유가 있다. 1) 후임을 일찍 정하고 잘 키워서 물려주고 싶었다. 한국 교회가 후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준비만 잘하면 되는데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후임을 정하니까 어려운 일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은퇴하기 십년 전에는 후계자를 정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 왔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은혜롭게 후임에게 이양한 모델 교회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2) 사람은 나이가 육십오 세가 넘으면 명예욕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3) 담임 목사 나이 육십오 세가 넘으면 본인이 원하는 후임을 정하기 힘들다. 4) 아들이 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전도 길이 막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은사도 덕이 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장로님들에게 여러 번 말씀드렸다. "만약 교회 전체가 아들을 후계로 결정해도 나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건덕상의 문제입니다." 후임을 정해서 유학 보냈고 은퇴할 때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목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목사로 청빙하려고 했다. 그것도 아들 목사를 이 년만 있다가 유학을 보내겠다고 당회에서 분명히 말했는데 이상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게 퍼져나갔다. "담임 목사님께서 아들 목사를 부목사로 데려오는데 세습할지도 모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일생 목회하면서 그래도 진실하게 목회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중직자 중에서 몇 분이 아들 목사 데려오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교역자들은 담임 목사 편을 들어야 한다. "우리 목사님 결코 세습하실 분 아니십니다. 이미 후임까지 결정하셨는데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십 년 동안 진실하게 목회하신 목사님을 못 믿으시면 누구를 믿습니까?" 그런데 그렇질 않았다. 부교역자 중 한두 명이 성도들에게 부채질을 했다. "어떤 교회는 세습 안 한다고 약속했다가 갑자기 세습했습니다." 나는 그래도 교역자들만은 적극적으로 내 편인 줄 알았다가 큰 실망이 왔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했다. "부교역자들은 내 자녀나 마찬가지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얼마나 말을 안 듣는가? 얼마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아빠! 이제부터 내 아빠 아냐? 아빠하고 안 놀 거야. 아빠 미워 투정부릴 자격이 없는데도 투정을 부린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부교역자들 아무리 속을 썩여도 내 자녀지. 성도들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내 자녀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거야! 자녀에대한 부모의 사랑은 짝사랑이야!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일방적으로 사랑만 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니 모든 소란이 잠잠해졌고 아들이 부목사로 왔다. 그리고 이 년 동안 잘 시무하고 후임 목사가 유학을 마치고 들어오기 두 주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부목사님 중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일 한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목사님을 불러 “그럴 수 있느냐? 왜 그랬느냐?" 한 번도 묻지도 책망하지도 않았고 다 용서하고 계속 시무하게 했다. 우리 교회는 부교역자가 오면 다른 교회 알아보라는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때까지 계속 있게 한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개척시켜주던지 선교사로 파송시켜 준다. 나는 문제를 일으켰던 부교역자들도 다른 부교역자와 똑같은 예우를 했다. 목사님들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나는 용서하고 사랑만 하면 된다. 이것이 짝사랑 아버지 사랑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목사님은 십 년 전에 후임을 정해 유학까지 시켰는데 목사님 은퇴하신 후 후임 목사님이 목사님을 배반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 “후임 목사님을 일찍 정한 것은 제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물려주어야 교회가 안정되고 유익할까? 오직 교회를 위해 일찍 정한 것입니다. "후임 목사님이 나를 배반하지도 않겠지만 혹시 배신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계속 일방적으로 사랑만 하면 됩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니까 마음이 편하고 성도들을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하나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기 때문이다. -
김병중(Th.D) 03-31 18:55
〖독서일지〗 「깊이 읽는 여덟가지 복」
김남준 목사는 여러 베스트셀러 책을 쓴 작가로, 이 책은 팔복에 대한 설교문이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하드 카바로 만들어 가격이 비싸지고, 여백 많은 편집으로 인해 페이지가 늘어났다. 맘 먹고 읽으면 몇 시간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팔복에 대한 설교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준비할 때 출판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더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을만한 설교, 내용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박해받는 자(p 219-236) 들어가는 말 죄가 들어온 후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세상에는 다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반목과 갈등, 분노와 억압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자 평화롭게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 만물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2).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첫걸음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 갑니다. 두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박해가 일어납니다. 박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 박해란 '약한 처지의 개인이나 세력을 억누르거나 괴롭혀 해를 끼침'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박해받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믿음이나 신념을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디오코에서 온것입니다. 신자의 부도덕한 행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진정한 의미의 박해는 하나님 나라의 의(義)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가리킵니다."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이때 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으로서, 사람의 내면 세계와 외면 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합치된 상태다." 박해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를 위해서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애쓰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은 먼저 신자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육체를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질 때는 욕망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둘은 한 마음 안에서 서로 싸움질하며 고통을 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의를 위한 고통은 마음의 갈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세상만사가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어떤 고통은 원인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세상 것들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릅니다. 신자의 마음은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구원과 함께, 삶에는 새로운 질서가 도입 됩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충돌하면 저항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박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형벌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이로써 신자는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박해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면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하늘나라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박해받을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커질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추구하던 것이 그 나라의 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핍박받아 흘린 눈물은 세상 사랑으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천국을 소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의 울음 속에 하나님이 함께해 위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박해라는 주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 공동체가 현재적으로 받고 있던 고난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박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세상이 그리스도를 박해했으니, 신자도 핍박받지 않겠습니까? 희생과 고난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눅 9:23-24) 핍박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박해의 피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원래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색으로 칠해졌던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박해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겼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의 불의함을 지적하였습니다(마 14:3-4).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어미의 지시를 따라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마 14:8).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의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헤롯의 불의를 꾸짖었을 뿐입니다. 그냥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과의 갈등을 의미합니다(히 11:36-38).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대의(大)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 노(老)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만나 목회에 헌신하였습니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목회자들은 가혹한 고문 끝에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 이 목회자는 약 15년 동안 수용소에서 죽음 같은 세월을 이어 갔습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단한 번도 면회는 물론 서신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만기 출소한 후 고향집에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없어졌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정든 집은 거의 폐허 상태였습니다. 큰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화병으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동네 주민으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목회자는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더욱 목 놓아 통곡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흐느꼈습니다. 스스로 떠올린 주님의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 바울의 평생 소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입니다(빌 3: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다음의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빌 3:10-11).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 황혼의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습니다(고전 11:1). 바울의 생애는 박해의 연대기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습니다.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여러번 여행하였습니다.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또한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어야 했습니다(고후 11:24-27).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마 6:33). 소명을 따라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습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5:41). 박해받는 것을 특권처럼 여겼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들이 그리스도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이 본향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박해받을 때 자기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단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확인합니다. 하늘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히 11: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혼과 정신에서, 육체와 생활에서 크고 작은 섭리로 나타납니다(약 1:17).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이것들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소망이 단지 세상에 있다면 어찌 인생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변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불멸할 영혼을 땅에 묶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날지 못하는 새가 되게 하니, 거기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자유가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사랑에서 옵니다. 행복은 악한 것을 올바르게 미워한 것이고, 불행은 선한 것을 그릇되게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선한 것이 늘 아름답고 악한 것이 항상 추루하게 보였다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박해는 우리를 깨어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살전 5:6). 박해를 견딜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쏟는 눈물에 세상 사랑은 씻겨 나가고, 흘리는 핏물에 사랑은 깊어져 갑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박해받는 자의 행복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에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어린 양처럼 애통하였으나 박해를 받을 때는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박해를 받는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동일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둘 모두 같은 선언으로 끝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팔복이 아니라 칠복(福)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핍박받는 자의 복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는 동일한 복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는 여덟 개지만, 행복의 선언으로는 일곱 개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의 종류와 관련해서 보면 칠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행복의 선언이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동일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조건으로 본다면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두 가지 복됨에 관해 동일한 선언,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첫 번째 복이 존재의 변화를 말해 준다면, 여덟 번째 복은 변화된 존재가 세상에서 무엇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도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찾아오는 모습이고, 후자는 세상나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천국을 두 국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마 12:18). 신자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박해받는 자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육체로는 박해를 받지만 영혼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로,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권세들이 있습니다(엡 6:12). 이러한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나라의 질서는 파괴되고 하늘나라의 질서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또한 상속받을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나라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초월성과 역사성입니다. 하나는 초월성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영적인 은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가진 이런 초월적인 은혜의 성격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또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시대적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역사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불의에 항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땅끝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사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비난과 멸시, 조롱과 고난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모든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강인함과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셨기에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 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세상 욕심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을 때만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박해가 아무리 거칠고 강해도 하나님은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의지하는 자를 더욱 강하게 하십니다. 신령한 은혜와 거룩한 능력을 주십니다. 매일 부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 합니다. 그래야 박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박해의 크기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잠시 머물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으로 이기며 사십시오. 맺는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한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 5:13-14).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 없어집니다.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마 5:13). 하나님을 누림으로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의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박해를 견디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은혜가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마10:28). 그 믿음으로 박해를 견딥니다. 그들이 욕하면 우리는 모욕받을 것이고, 때리면 맞을 것이며, 죽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팔복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렵니까? -
김병중(Th.D) 03-30 18:32
〖독서일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많이 알려진 홍민기 목사가 쓴 산상수훈 설교집이다. 마 5-7장을 큰 단락으로 나눠 설교했다. 평이하면서도 건질 것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남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물론 실수로 표절할까봐 아예 안듣는 음악인도 있지만. 살교자로서 남의 설교를 읽고 보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겸손하면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삶으로 지키라(p 83-97) 맹세하지 마라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레 19:12 참조)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보통 우리는 불리할 때 맹세를 한다. 또 우리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들을 강조할 때 맹세를 많이 한다. 그래서 맹세할 때 이어지는 대화는 거짓이거나 과장일 경우가 많다.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데…”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일단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진실되면 맹세를 하지 않는다.바리새인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였다. 그들은 말만 많이 하고,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멀었다. 종교적인 삶에는 말과 정죄가 무성하다. 그들은 많은 율법들을 따랐지만, 또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규칙들로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놓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다. 말로 하나님을 따르다 보니 정죄가 무성하다. 삶으로 살면 정죄할 수 없다. 그 거룩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정죄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본 자의 입술에서 뱉어지는 언어가 아니다. 해보면 안다. 살아보면 안다. 내가 제일 안 된다는 것을...진실되게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본질을 붙잡지 않는 것, 겉모습만 반지르르한 종교적인 삶을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삶을 전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맹세가 필요없다. 우리는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거해봐야 한다. 목표를 바로 세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사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윤리와 도덕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이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다. 거룩은 전투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거룩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과 충돌하고, 때로는 세상에 저항해야 하지만,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도덕과 윤리가 우리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구별된 자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게 아니다. 좀 더 윤리적으로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살아 있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 생각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부분을 드리면서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제가 이 부분을 드립니다'라면서 삶의 한 부분을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통째로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산 제사가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협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입으로 맹세하지 말고,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네가 행하고자 하는것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맹세는 신과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하는 약속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없는, 약한 인생들이다. 그럼에도 "내가 맹세한다"라고 입에 담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일 때가 많다. 맹세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신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 삶으로 증명하는 것, 삶이 산 제사가 되는 것.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서 상대방을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신앙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한 사투 우리는 우리의 삶에 조금 더 엄격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를 긍휼과 은혜로 바라보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는 엄격과 거룩의 두 기둥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 긍휼과 은혜만 붙잡는다. 맨날 나의 연약함을 긍휼과 은혜로 손쉽게 덮으려고한다. '하나님, 제가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어요. 절 긍휼히 여겨주실 거지요?' 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기대어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너무 엄격하지 않게 잡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엄격하지 않고 유연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거룩한 삶을 위해 날마다 사투하며 거룩한 몸부림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만 한다고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예배만 드린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거룩한 사투가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사실 쉽진 않다. 너무 너무 어렵다. 언젠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한 장로님을 만났는데, 이분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막 토로하셨다. 그래서 내가 "근데 왜 계속 다니세요?"라고 물어 봤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너무 놀라운 얘기를 하셨다. “내 나이에 다른 데 가면 장로님이라고 인사나 받겠습니까? 여기 있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와서 '장로님, 장로님'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문제 있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도 놀라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다니면 되지 문제 제기는 왜 하는가 싶었다. 본질을 분별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다 보니까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우리의 영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 다. 세상과 충돌할지라도 구별되는 것, 세상의 정을 맞을지라도 구별되는 것. 구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구별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의 중심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원하는지를 진솔하게 돌아보라. 이 본질을 놓치는 순간, 우리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아닌 것은 아니다. 맞는 것은 진리다. 야고보서 5장 12절 말씀처럼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말씀 위에 있을 때 말이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드리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21.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우리 삶에도 꼭 적용해야 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당신의 인생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신가? 당신의 인생이 입으로 맹세하며 '내가 이렇게 믿는다, 저렇게 믿는다' 말만 앞서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선택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갈급함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존귀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선포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신앙의 모습이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8.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데나 얹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내 주장에 끼워 넣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산 제사가 되어 일어나는,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 수 없다. 우리는 종교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신앙 공동체다. 소그룹으로 만날 때, "그냥 나는 연약해서 이렇게 됐어", "그래, 너도 연약해서 이렇게 됐지", "우리 다 약해서 괜찮아.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실 거야"라고 위안하며 넘어가지 말자. 엄격하게 자신을 보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정말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자고 외치고, 뉘우치고, 돌이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연약함을 핑계로 나의 죄를 덮지 말고, 은혜와 사랑이란 단어로 나의 죄를 덮지 말자.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덮는 것은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리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덮어주실 거예요'라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다. 산상수훈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설교이기 때문에, 그 강도가 세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에 셀 수밖에 없다. 우리 이 말씀을 꼭 명심하여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살자. 말로 하는 종교인에서 벗어나 본질을 붙잡자.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영이 죽는다. 그러니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라. 항상 깨어 있게 해달라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계속해서 이뤄지게 해달라고. 은혜와 긍휼은 예수님의 몫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16.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쓴 편지인데, 여기서 그가 뭐라고 고백하는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더 성숙해지고 성장했다. 그래서 자신을 '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이 '예수께서 먼저 보여주신 일체의 오래 참음의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긍휼과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에게 '오래 참아달라, 봐달라, 예수님 오래 참으셔야 합니다'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구별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가 아들 둘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어릴 때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두 번까지는 봐주지만 같은 내용으로 세 번 경고를 받으면 혼나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일로 아이들이 두 번째 경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날 내가 아주 크게 혼을 냈었다. 그러자 아이들 둘이 다 내게 항의를 했다. "아빠, 이번은 두 번째입니다. 이번은 경고여야지, 왜 혼내나요? 혼내면 안 되는 거예요." 잘못을 해서 혼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두 번이나 잘못을 봐주고 경고로 넘어간 건 아빠인 내게 속한 문제이고, 아빠가 베푸는 용서요 은혜다. 그런데 자신들이 잘못했으면서 '아빠 이건 부당해요'라고 하는 건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게 우리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일이다.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세요? 이것은 참아주셔야죠. 용서해주셔야죠. 넘어가주셔야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가 날마다 하고 있다. 우리는 잘못했으면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우리가 먼저 말해버린다. '하나님, 저 이거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실 거죠?' 이러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위해 애써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약속과 행위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산 제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의 모습이 일상의 삶에서 매일 매일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담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나의 생각도 다 아신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하라. 나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온전치 않다. 선한 척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라. 거룩함에 목표를 두고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거룩함을 위해 몸부림 치고,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본질에 붙잡힘 당하여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서 받은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는 나를 '네가 목사로 서 참 수고했다'라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직분보다 내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내가 진심으로 했는지, 하는 척 했는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분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네가 진짜였냐?' 이것으로 판가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평가는 '넌 착하고 충성되었어. 넌 진심이었어. 이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자 아니면 '넌 많은 사람들을 속였어. 하지만 난 안 속아'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이 땅의 도덕이나 윤리라면 하나님의 기준에 맞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유연하게 바라보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엄격한 거룩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선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거룩한 척하지 말고 거룩한 산 제사가 되라. 예배드리는 척하지 말고 임재 예배가 되라. 우리의 삶이 진짜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를 바란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서로 속고 속이다 죽고 나면 끝이다. 그때는 기회가 없으니, 지금 기준을 바로 세우고 목표를 바로 세워서 아무리 포장하고 화장해도 썩은 냄새가 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산 제사로 살자. 그렇게 살다가 죽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자. 우리는 한 치 앞을 못 보지만,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말로 맹세하여 사람을 속이지 말고, 결코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거룩함으로, 엄격함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붙잡아주실 것이다. -
김병중(Th.D) 03-28 00:55
〖독서일지〗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동영상 첨부
현직 정신과의사가 쓴 책이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사례와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목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하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을수록 좋을 것 같다. 어렵지 않게 평이하게 쓰여졌기에 읽는데 어려움은 없다. 마침 동영상이 있기에 첨부한다. 6. 자존감 관리(p 290-294) 생일이 되면 모두 모여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태어난 날을 축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소중하고 우리와 함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고 선물을 주는 것은 자존감self-esteem의 근원을 만든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이라고도 하며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뤄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된다. 야단을 맞고 시험에 떨어지기도 하며, 뜻하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때 자존감이 충분하지 않다면 예민해지고 좌절하며 심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더 가혹한 벌을 내릴 때가 많다.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근간은 어릴 때 형성된다. ‘안전기지secure base’의 형성과 ‘적당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의 경험이 자존감 형성에 중요하다. 두 경험 다 어릴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로 인해 겪게 되지만 다른 보호자도 마찬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안전기는 유명한 존 볼비의 '낯선 상황 실험'에서 알 수 있다. 14개월 된 아기와 엄마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한다. 엄마가 조용히 방을 나가면 아기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장난감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엄마를 찾으려고 운다. 엄마가 다시 들어오면 안아달라고 한 뒤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아기는 엄마에게 애착이 형성되어 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한 '안전기지' 역할을 한다. 안전기지가 없다면 세상을 탐구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 늘 예민한 상태가 된다. 어머니가 있다 하더라도 충분한 애착이 서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안전기지가 형성되지 않고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나라 의과대학 학생 7000명을 대상으로 의과대학 학생의 자살 충동과 관계된 요인을 연구한 적이 있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학업관련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처음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연구 결과 자살 충동과 관련 있는 것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였다. 그중에서도 '정서적 학대emotional abuse'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학대란 방임이나 차별 등 정서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한다.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았어요’. ‘어릴 때 항상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보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성적뿐이었고 못하면 심하게 야단을 맞았어요’. ‘의대생이 되니 주변 친구들이 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저는 뒤처지는 것 같아요’. ‘힘들면 곧잘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좌절은 인생의 어려운 점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자존감을 키워준다. 부잣집 딸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사업으로 성공한 집안의 외동딸로 자란 아이가 있었는데,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그 손녀를 몹시 예뻐했다. 아이에게 비서를 붙여서 항상 따라다니도록 했고 백화점 진열대의 물건을 아이가 보기만 하면 가격에 상관없이 물건을 사서 방에 넣어주었다. 방에 물건이 쌓여 더 이상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면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어떤 물건들은 내다 버렸다. 그 아이는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할아버지의 회사가 어려워져 이전처럼 원하는 물건을 사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열등감과 자존심 저하를 겪었다. 또한 이전에 자신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더는 관심을 안보이자 외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얼굴과 전신 성형을 거듭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을 의식해 집 밖에도 나오지 못한 채 혼자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십대에 벼락스타가 된 가수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상황이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곧 적응된다. 하지만 인기가 떨어지고 사소한 실수로 인해 비난을 받으면 급격한 자존감 하락을 겪게 된다. 안전기지로 생각했던 팬들마저 점점 등을 돌리고, 적당한 좌절이 아닌 급격한 좌절을 겪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인기와 상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한 친구들이 있거나, 신기루 같은 인기보다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면 위기에서 좀더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나 자식이 안전기지가 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많다.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안전기지가 되면 좋겠지만 그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어릴 적부터 만나온 친구나 혹은 종교 공동체, 마을 공동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이 만나서 상담받는 주치의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안전기지가 되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람을 평소에 잘 대하는 것이 좋다.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자존감을 북돋운다. 내 자존감이 중요한 것처럼 상대방의 자존감 유지도 중요하다. 배우자라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자존감을 낮추는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적당한 좌절은 어린 시절에 자존감을 만들고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 가풍이 있는 집안일수록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지 않고 적당한 좌절과 성취감을 얻도록 도와준다. 어릴 때부터 적당한 좌절을 안정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길 즐긴다. 하지만 좌절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잘한 일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데, 칭찬이나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의 좌절은 견디고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견딜 수 없는 심각한 좌절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안전기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나 친구 혹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하지 말자. -
김병중(Th.D) 03-24 12:04
〖독서일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내공이 만만치 않은 작가의 산문집이다. 그동안 써서 발표한 글들을 분야별로 모아놓은 책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보게하는 다른 시각을 줄만한 책이다. 이 자가가 쓴 다른 책도 읽어볼 계획이다. 국가의 살인(p 233-235) 김일란·홍지유 <두 개의 문> 제목은 어려웠고 포스터는 생경했다. 그렇더라도 영화 자체는 얼마간 익숙한 방식으로 찍었으리라 짐작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분노와 슬픔을 예감하면서, 그리고 그런 감정적인 반응에 머물고 말 나 자신을 미리 조금 냉소하면서. 그러나 영화 <두 개의 문>은 예상과 달랐다. 분노와 슬픔보다는 분석과 성찰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과 포스터는 정직한 것이었다. 이미 <씨네21> 이영진 기자가 이 영화의 목표와 성취를 다음과같이 정확히 요약했으니 인용으로 대신하자.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증명하는 방식에 있어 <두 개의 문>은 유사 주제의 다큐멘터리들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대개는 희생당한 이들의 편에 서서 억울함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에는 사지로 내몰렸던 철거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해자라고 불렸던 경찰들의 드러나지 않은 희생을 밝혀냄으로써 <두 개의 문〉은 면죄부를 받은 국가 폭력에 곱절의 중형을 선고하고자 한다.<씨네21>858호) 이 말 그대로다. 보고 나니 제목도 이해가 됐다.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 4층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두 개 있었는데, 건물에 진입한 특공대원들은 그 두 개의 문 중 어디를 열어야 망루로 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진압 지도부는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채 그저 올라가서 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즉, '두 개의 문'이란 말단 특공대원들이 체험한 현장의 부조리함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특공대원 중 하나는 현장을 '생지옥'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목의 1차적인 의미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문'이란 참사를 보는 '시선'의 은유이기도 하다. 일단은 다섯 명의 희생자와 유족들의 시선으로 이 참사를 봐야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명령을 받고는 생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던 특공대원들의 시선으로도 봐야 한다. 이 두 개의 시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두 개의 문'을 함께 열어야만 참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냐고 반문할 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특공대원 한 명을 죽인 것은 물론 현장의 철거민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철거민 다섯 명을 죽인 것도 현장의 특공대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희생자다. 가해자들은 그날 새벽 작전 명령이 떨어진 전화기 저편에 있었을 것이다. 이 여섯 명을 한꺼번에 죽인 범인은 '국가'라는 시스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국가'임을 자임하는 몇몇 인사들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력 진압을 강행한 지도부와 그 수장, 그리고 그들의 충성의 대상이 된 정부와 그 핵심 권력자들이다. 이 상황을 정확히 명명하려면 '국가 폭력'이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국가 살인'이라는 용어를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용산참사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일 것이다. 참사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일상화되어 있다.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중 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버리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나.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40명씩 자살한다. 입시 지옥 속에서 학생들은 자살하고, 정리해고와 가계 부채로 4, 50대는 자살하며, 극빈과 고독 속에서 노인들은 자살한다. 처음 한 명의 죽음은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부터는 '타살'이고, 수백 수천 번째가 되면 그것은 '학살'이다.(2012.7.5) -
김병중(Th.D) 03-24 11:56
〖독서일지〗 「여자의 심리코드」
모처럼 땡기는 책을 만났다. 심리, 상담에 관심이 많은데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책이다. 상당한 수준의 책이기에 정독이 필요하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목사의 설교가 이만한 질적 수준이 되는가 반성해본다. 모든 내용이 좋은데 맛보기만 실어본다. "한 말씀만 하소서"(p 70-73) 근원적인 결여감에 몸부림치는 여성인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남근화시키거나 팔루스를 가정한 절대적 대상으로 결여를 메우는 선택입니다. 스스로를 남근화 시킨다는 뜻은 능력이나 지위, 역량 등을 개발하고 그것을 가지려는 의지입니다. 부성적 동일시와 동시에 아버지와 경쟁하는 딸이 되는 것이지요. 절대적 대상을 통해 팔루스를 가지려고 할 때 그 대상은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고 기름을 부어 줄 대상을 끝없이 갈구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은 끊임없이 정체성의 문제로 혼란과 고통을 겪습니다. 항상 의존할 팔루스(남근)나 신탁의 언어를 쫓지요. 스스로가 가진 자가 아니라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체성을 보증받고자 하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확인해 줄 절대적 대상에게 무한한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저는 여성의 희생과 헌신에는 항상 함정과 속임수가 내재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온전한 희생, 온전한 퍼부음은 스스로의 결여를 타자를 메우는 방식으로 보상하는 행위의 이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성이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온전히 헌신할 때 그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비단 사랑의 차원이 아닙니다. 남편이라는 절대적 팔루스, 남근을 소유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상상적 환상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신을 있는 힘껏 소비하고 소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수의 남성들, 즉 강박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쏟아부어지는 채워짐과 자기중심적 만족을 이루면서 가족이라는 합이 맞아지지요. 이런 합의 상태에 균열이 생기고 다시 구멍이 출현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할 때, 여성은 쇼핑 중독이나 명품 중독 등가질 수 없는 팔루스를 상징적 물건으로 대체해 끝없이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채우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히스테리적 주체인 여자는 집요한 요구와 증상의 길을 완고하게 갑니다. 그것은 분석 임상에서 어렵잖게 만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여자의 요구(소녀들의 집요한 요구)를 포기할 수 있도록 안내하려는 기운만 느껴져도 더욱 집요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의식적 여자의 요구가 얼마나 타당하고 합당한지를 의식적으로 설득하는 데 에너지를 할애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결코옳지 못한 방법이지만 많은 분석가들은 여자의 요구 앞에서 어떤 해답이나 행로, 경로를 제시하도록 또한 요구받습니다. 히스테리 담화에서 그녀들은 끝없이 자신의 결여를 언어의 세례로 메우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전형적인 언어적 요구가 그것이지요. 해답을 요구하는 말에 분석가나 치료자들은 반드시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쉼 없이 전문적 솔루션과 해결책들을 제시하지요. 그래야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히스테리증자의 게임에 충실히 반응하는 단계에 그치는 일입니다. 더 이상의 언어적 세례, 언어적 지식이 전문가로부터 얻을 수 없다는 알아차림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일어나면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제시하며 그를 떠날 테니까요. 언어를 요구하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언어의 결핍에 시달리는 그녀들은 끝없이 멘토와 스승, 종교 지도자들을 찾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 어떤 이상적인 제안에도 우리를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그것을 반박하거나 빠져나갈 출구를 찾아내기 때문이지요. 히스테리적 여성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불만족에 대한 해답을 타자에게 요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가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탐닉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언어는 아이의 세계가 된다 (p 78 – 81) 아버지인 남성이 전달하는 언어 중에 자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언어는 자녀에게 사회적으로 위축되지 않는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에는 단순히 말이 아닌 그 사람의 정신과 태도, 욕망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이룬 대단한 성취에도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소위 낮은 자존감을 보입니다. 이미 사회적 성취를 이룬 여성이지만 부끄러운 아버지를 두었다는 생각에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보이는 타자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뜻은 능력이나 재력,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과는 무관합니다.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아버지라도 경박한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청소 노동자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당당한 태도와 언어로 전달한다면 그의 자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부심으로삼으니까요. 이토록 아버지의 언어가 중요한데 만약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멸과 경멸을 겪는 장면을 목격한다든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끊임없이 폄하하고 훼손하는 언어로 대한다면, 자녀는 아버지를 잃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정체성을 잃고, 라깡적 언어로 풀자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을 방해하고, 스스로 설 자리를 못찾게 합니다. 자녀는 큰 결여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계속 반복하는 말입니다만, 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음성과 언어 속에서 이런 아버지의 기능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성적 언어를 준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우리는 평생을 위축되고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에게서 얻지 못한 언어적 정체성은 우리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의 기능이 담긴 언어를 스스로 발화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40대를 넘긴 중년 남성임에도 아버지의 사회적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자존감 높은 아버지 밑에서 남자아이가 자존감 높게 자랐을지라도, 그 아버지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안하지 못하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아빠를 내세우는 소년에 불과합니다. 자식의 언어는 부모의 언어를 토대로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마저도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고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내 속에 빼곡한 비난과 판단의 언어들, 가치를 매기는 세속의 언어들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언어를 스스로 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쪼그라진 아버지를 두어서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렸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아버지의 기능을 스스로 복원하며 단단한 사회인으로 자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누구로부터가 아닌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려면 몸에 힘을 빼야한다” (p 244 – 245) 우리는 어리석은 질문을 혼잣말처럼 반복적으로 되뇌일 때가 있습니다. '왜 혼자가 되면 안 되고, 왜 나는 고통받아서는 안 되고, 왜 나는 불행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 물론 프로이트의 기본 명제인 현실 원칙에 따라, 사실 우리는 불쾌한 상황을 피하고 안정된 상황으로 가려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본성을 지녔다고 해서 내가 가진 기준이 완고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테지요. 절대로 나에게 고통이나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퇴행적 고집은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 닥쳐오지도 않은 외로움에 과도한 불안을 일으키며 갖가지 증상을 만들어 낼 테니까요. 물론 이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충동이 붙들고 있는 어떤 욕망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불행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일어나는 고통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들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가난은 얼마든지 나에게도 닥칠수 있는 일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고통으로부터, 불행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 줄 듯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해지는 일을 꼭 배워야 할까요? 정말 불행은 찾아오면 안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안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죽을 듯한 소외와 고립,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막상 다다르면, 많은 것이 물러나고 죽을 듯한 공포감마저 고요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어떤 불행이든 닥쳐올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가 오히려 세상에 서 있는 나를 담담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저 힘을 빼기만 해도 새로운 가능성이 많이 열리기도 합니다. 파도로부터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도 물보라에 압도되지만, 몸에 힘을 빼는 순간 하늘을보며 파도를 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
김병중(Th.D) 03-18 10:01
〖독서일지〗 「가족의 두 얼굴」
흥미있게 본 재미난 책이다. 심리학자가 본 가족의 적나라한 모습에 대한 해석과 대안이 많이 유익했다. 버릴 것 없는 내용들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봐야겠다. 감추고 부정할수록 더 커지는 상처(p 66-73) 트라우마(trauma)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마음에 난 정신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상처를 모두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날카로운 것에 살짝 손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당장은 아프고 피가 흐르지만, 잘 지혈하고 감싸 준 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아뭅니다. 그러나 깊이 베인 상처는 쉬 낫지도 않을뿐더러 치료가 끝난 뒤에도 두고두고 흉이 남습니다.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라고 할 때는 이처럼 지속적이고 어쩌면 항구적일 수도 있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말합니다. 트라우마는 익명의 대중이 붐비는 전철이나 공공장소보다 가정에서 더 자주 발생합니다. 가족은 한 번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접촉한 불쾌한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가족은 싫든 좋든 평생 함께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족심리학이 별도로 필요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열 살 이전의 네 아이 중 한 명꼴로 트라우마로 힘겨워하며 성인 두 사람 중 한 명이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주 운이 없거나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명한 프랑스 신경정신과 의사 보리스 시륄니크(Boris Cy-rulnik)는 트라우마는 피해자의 기억 속에 새겨져 마치 그를 따라 다니는 유령처럼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만든 사건은 일회적이었을지라도 피해자에게는 매일, 때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때의 생생한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특히 성인기보다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경험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보리스 시륄니크는 그의 저서 『유령의 속삭임」에서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자세가 상반된 두 인물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한 두 사람을 만나볼까요. 만인의 연인에게 숨겨진 비극 노마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은 36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16세에 처음 결혼했지만 4년 만에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이 '야구 영웅'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전설의 타자 조 디마지오였습니다. 야구 영웅과 헤어진 뒤 만난 세 번째 남편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입니다.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누구인지 감이 오지요. 그녀는 바로 마릴린 먼로입니다. 타고난 미모로 사진 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마릴린 먼로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출연한 영화마다 히트하면서 그녀는 곧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동시대 남성들의 영원한 연인이자 섹스 심벌이었고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움과 백치미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놀랄 만큼 비극적입니다. 미혼모였던 먼로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상적인 자녀 양육이 불가능했습니다. 먼로는 일찌감치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최근에 읽은 동물학 책에 따르면 주인이 두 번 이상 바뀐 경험을 한 애완견은 더 이상 애완견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버림받은 충격으로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갖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떠할까요? 먼로는 어린 시절 생모에게 버림받고 여러 고아원과 몇 곳의 위탁 가정에 연달아 맡겨졌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으며 아홉 살 나이에 이웃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성장하자 주위의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녀는 내게서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농락하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우글거렸습니다. 성장기가 불우했을지라도 배우로 성공한 뒤 먼로가 가진 아름다움과 스타로서의 명성은 오히려 남자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놀라운 무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먼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남자들에게서 보상받으려 했고 그것은 덫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Alice Mille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채워지지 못한 사랑에 집착한다고 말합니다. 먼로는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상처를 받았습니다. 숱한 염문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연인인 먼로는 끝내 약물 과다 복용으로 힘든 삶을 마감했습니다.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여운 여인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녀가 상처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행으로 인해 손상된 자아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성인이 되어서도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야!", "엄마의 외로운 삶에 가슴이 아프고 아버지의 불성실함에 화가 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엄마와 같은 삶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먼로는 스스로 자아상 회복을 위해 이런 주문을 외우며 자기 존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미운 오리새끼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먼로처럼 다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있습니다. 1805년 그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포주인 외할머니는 딸을 억지로 길거리로 내보내 돈을 벌게 했습니다. 딸이 안가려고 하면 뺨을 때려서라도 몸을 팔 것을 강요했습니다. 매춘을 하던 도중 임신이 된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인이었던 남편은 광기의 발작 속에서 자살하였으며 그녀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은 중독, 폭력, 매춘, 가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출발점에서 이보다 더 불행한 조건을 갖춘 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조건에서 안데르센은 먼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합니다. 비록 불행한 가정사를 가졌으나 글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떴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준 이들과 교감을 나누고 창작의 기쁨 속에 과거의 그림자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그는 결코 과거의 불행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 작품에는 불행과 행복이라는 두 세계가 모두 공존합니다. 만일 그가 어린 시절의 불행을 저주하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의 아름다운 동화 작품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행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복을 향한 날갯짓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안데르센의 내면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 대표작 「미운 오리새끼」입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주변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슬픈 과거를 지녔습니다. 안데르센은 이 불행을 없는 일로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불행을 인정하고 행복으로 향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백조로 변한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데르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안데르센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지만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안데르센은 그의 힘든 어린 시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고통을 단순히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행복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적극적 관점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트라우마와 불행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안데르센은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새끼」, 「왕자와 거지」 같은 슬프면서도 따뜻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명작 동화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불행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일종의 관점의 변화이자 가치관의 변화, 즉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입니다. 상처와 불행을 치유하는 데에는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꼭 필요합니다. 똥떡, 상처 치유의 지혜 오늘날처럼 과학과 심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풍습입니다. 똥떡은 어린이가 변을 보다가 똥통에 빠졌을 때 부모가 급하게 만들어 주는 떡을 말합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똥통, 즉 재래식 변소에서 어린아이가 변을 보다가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기곤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똥통에 빠지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혐오스러운 냄새, 수치스러움과 불안감까지 뭉쳐져 아이는 변소 가는 일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변소에 안 갈 수도 없는 일. 변소에 갈 때마다 아이는 똥통에 빠졌을 때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증폭되는 과정입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이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재빨리 집에 있는 재료로 똥떡을 만들었습니다. 똥떡으로 부모들은 제를 올려 부정한 귀신이 타지 않기를 빈 뒤 온 동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직접 떡을 들고 동네를 돌며 “똥떡, 똥떡” 하고 크게 소리를 칩니다. 예기치 않은 간식거리를 받아든 이웃들은 아이에게 좋은 덕담을 해주기 마련입니다. “녀석 놀랐겠구나” 하며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아이는 이웃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연히 똥통에 빠진 황당한 경험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극복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면'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없었던 일로 애써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보는 것을 말합니다. 똥떡은 변소에 빠진 아이의 불안, 수치, 공포를 치유하는 놀라운 트라우마 치료 메커니즘이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왜 똥떡이 특별한 재료나 형식 없이 급하게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은 사건이 발생한 즉시 똥떡을 만들어 아이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회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 준 똥떡을 통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 날 다시 변소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 치료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무엇보다 직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핵심은 가족의 따뜻한 배려와 공감,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조상들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에서 똥떡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에서 내려온 전통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에는 이러한 '똥떡'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를 입으면 우리 마음은 자동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고 회피시키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할뿐더러 대개 일을 더 키우곤 합니다. 따라서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전에 트라우마에 대한 조기 치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트라우마 피해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공감, 지지는 직면이라는 힘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
김병중(Th.D) 03-10 17:10
〖독서일지〗 「마흔에게 그림책이 들려준 말」
필자가 2000년부터 담임으로 나간 2005년까지 승동교회에서 함께 부목사 생활을 했던 목사님의 사모님이 쓰신 책이다. 그 당시 승동교회에는 4명의 부목사가 있었는데 때가 되어 각자의 길로 떠나갔다. 한분은 미국으로, 한분은 개척교회 후 다른 교회 합병하고 담임목회로, 또 나는 15년 담임 후 인터넷 신문사 발행인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사모님의 목사님은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사모이기에 생긴 여러 일들을 그림책을 통해 해결해 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일반책이든 그림책이든 그 안에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일독을 권하고, 담임목회 때 기회가 되면 사모님을 간증 강사나 그림책 강사로 모실려고 했는데 그만 사임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기사를 보고, 책 전체를 읽어 본 후 사모님을 강사로 초청하시기를 강추드린다. 최근 저자의 두 번째 책 『사춘기 엄마의 그림책 수업』이 나왔는데 곧 사볼 계획이다. "다시 가드를 올리고" (p 156-164) 그럼에도 다시 걷다 고정순 글·그림, 《가드를 올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어릴 적 거침없이 불렀던 찬양의 한 소절이다. 그때 저 찬양의 의미를 알았다면 웃으며 부를 수 있었을까? 내가 계획하고 바라던 것들이 무너지고 흔들려도 주님의 뜻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다고 그렇게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었을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는 건 치기 어린 고백이었음을 수원 생활을 시작하며 깨닫게 되었다. 당시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고정순 작가님의 《가드를 올리고》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삶을 링 위에 선 복서의 모습으로, 산을 오르는 여정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수원에서 살아낸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이 우리에게 날리는 주먹에 휘청거리고, 넘어지고, 때론 도망가고 싶었던 그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다시 가드를 올리고. 링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휘두른 주먹을 손쉽게 피한 상대가 사정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연이어 퍼붓는 주먹 세례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다. 남편과 결혼하고 나는 하루아침에 사모가 되었다. 모든게 조심스럽고 서툴렀다. 그렇게 사모로 산 지 10년, 나는 완벽하게 그림자로 살고 있었다. 교인 중에 속해 눈에 띄지 않으면서 교인 아닌 교인으로 사는 것이 사모로서 나의 사명인 양 살았다. 남편이 담임 목사가 되면 그때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 된다고 나를 다독이면서 아이들과 남편의 완벽한 도우미로 살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대전에 있는 한 교회에 담임 목사로 와 달라는 청을 받았다. 시간을 내어 온 가족이 교회를 보러 갔다. 대학교 앞에 위치한 교회라 청년도 많고, 재미있게 목회를 할 수 있는 교회였다. 나도 아이들도 우리 교회라며 몇 번을 바라보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몇 주 후 청빙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미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는 사표가 수리되었고 온 교인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던 터라 우리는 이 소식을 알리지않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대전의 교회를 원망할 사이도 없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교회 개척'이라는, 내가 꼭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바람이 부는 곳에 오르고 싶다던 그림책 속 그는 이제 더 이상 바람 부는 정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한참을 쓰러져 있던 멍든 얼굴의 사내는 지금 자기가 선 곳의 바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정상을 바라보며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다시 가드를 올린다. 시퍼런 멍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가득하다. 수원에 온지 10년,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 쉽게 오를 것 같았던 정상의 모습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내가 꿈꾸던 무대에서 강한 주먹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강한 주먹 대신 쏟아지는 삶의 주먹에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배웠다. 여전히 비틀거리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가 걷고 싶은 길이 어디인지,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한다. 쓰러지고 넘어지며 우리는 여전히 링 위에 서 있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한문화, p. 26.) 마흔의 시간을 통해, 창조된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내게 선물로 주신 오늘에 감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것을,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목회자로서의 본분이며 소명임을 배웠다. 이런 소명을 따르는 삶조차 내 믿음과 내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실패한 목회'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에게 꼭 맞는 우리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흔들림의 시간을 통해 나의 반짝이는 재능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내세울 만한 특별함이 없기에 무엇이든 꾸준히 했다. 《빨간 나무》를 처음 만나고 그림책을 더 깊이있게 알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 그림책과 관련 있는 강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교육기관의 강의 계획안을 살펴보며 그림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강의들을 모두 찾아 듣기 시작했다. 또 무작정 도서관에 가서 어린이 서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 줄 때와 달리, 오롯이 나의 그림책으로 만났다. 그림책을 찾아볼수록 새로운 그림책은 얼마나 많던지. 정신없이 그림책에 빠져들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 한 분야든 책 100권을 읽으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그림책 관련 이론서와 활용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단순하고 효율성 없는 방식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저 좋아서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시작한 그림책 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림책 관련 이론서를 챙겨 본다. 매달 신간 그림책을 구입해 읽고, 듣고 싶은 그림책 관련 강의를 찾아 수강한다. 때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했다. 초보 그림책 활동가 시절, 연말이면 여기저기 교육기관의 강사 채용 공고를 챙겨 보고 원서를 냈다. 나 같은 초보 강사에게 강의와 수업을 맡겨주는 기관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원서를 접수하는 것까지가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매해 접수를 했다. 그렇게 작성해 놓은 프로그램은 좋은 강의 자료가 되었다. 비록 당장 결과가 없을지라도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움직였다. 더디지만 움직이는 만큼 나는 조금씩 자랐다. 가끔 방향을 잃어버릴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의 꾸준함은 특별한 재능이 되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결국 다시 가드를 올리고 일어났던 그림책 속 주인공처럼, 그저 꾸준히 나도 그렇게 걸어간다. 그림책으로 품었던 처음 마음을 지키며 걸어간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그림책, 그림책이 건네준 위로와 즐거움을 전해 주는 통로이고 싶다던 그 마음을 지키며 걷는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 더 자리 잡은 것은 마지막 장에 나오는 주인공 사내의 모습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결말은 주인공이 다시 일어나 상대를 넘어뜨리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멍이 가득한 얼굴에 다시 가드를 올리고 있다.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자신의 소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이 여정의 끝에 안락하고 편안한 결승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삶을 시작할 때 10년만 버티면 무엇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우리의 목회도, 그림책 활동도.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때론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 대신, 걱정과 비웃음 을 받으며 걷는다. 시린 바람을 맞으며 아무 변화 없는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 바람 덕에 우리는, 나는 단단해진다. 이제 나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내가 꿈꾸는 대로 걸어가는 나의 삶이, 우리의 목회가 소중하다. 더 이상 산 위의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곳, 그곳이 좁은 길과 골짜기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 매일 매일 다른 내음과 빛깔로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다. 화려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모습을 부러워했던 내가, 나의 소박한 반짝임에 감사하며 오늘을 산다. 이제는 조금씩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다고 서툰 삶의 모습으로 고백한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인생의 주먹에 여전히 휘청이고 넘어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어나 가드를 올린다. 관련링크:마흔에게 그림책이 들려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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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 03-18 16:16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김병중 03-18 15:18
빈들에서의 감사(마태복음 14:13-21)
어느 날, 유대사회에 등장한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악을 행한 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각종 병든 이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때는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때가 저물었습니다.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거절하며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의외의 답을 들은 제자들은 난처해합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준비한들 어디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습니까? 바로 그때에 순진한 한 제자가 “예수님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내 밉니다. 그 도시락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1끼 먹을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작은 생선 2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은 도시락으로 그날 모든 자들이 배 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날 그 기적을 맛본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날의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일까요?어린 아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내민 도시락일까요? 먹거리를 찾아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을 갖고 온 한 제자의 부지런함일까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열심일까요? 모든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19절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축사’입니다. 축사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감사기도’, NIV는 'thanks'입니다. 헬라어 ‘유로게오’(ευλογησεν)는 ‘감사를 드리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앞에 두고서 감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빈들이란 광야요, 황량한 불모지요, 텅 빈곳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빈들에서는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오병이어는 아이 하나도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 모인 자들은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들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양식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빈들에서 감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날의 기적으로 해피엔딩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앞에서도 감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오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빈들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텅 빈 빈들 말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해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 인생이라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기란 요연해 보입니다. 언제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치고 나면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 될 때까지 휴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갑니다. 취업이 되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꿈꾸는데 현실이 이런 꿈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공시 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썼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는 삶이 있지만 삶의 현장은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빈 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빈들이라고 불평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절망하면서, 남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인상 쓰면서, 좌절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2. 빈들에서도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낡아지지 않게 입혀주셨습니다.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신겨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원했던 진로가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오히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부터 가지십시오. 빈들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단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얼어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발병이 나서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100% 책임져 주시구나!’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올해 우리 집 막내딸이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친 후에는 아쉬움이 남고 자신이 꿈꾸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찾아옵니다. 저희 부부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딸! 하나님이 네 길을 여신다. 걱정하지 말고 항상 힘내라”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제 인생을 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딸들의 길을 왜 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어디 우리 가정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빈들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주의 은혜로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감사’를 ‘구원’의 수준만큼이나 높이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내 삶에 행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서 감사 인생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김병중 03-16 23:05
"하나님의 목적과 성공이 있는 삶"(여호수아 14:5-15)
여섯 살 된 남자 아이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서 하던대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오줌'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들린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지저분한 단어를 쓰지 말고 다음부터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 후로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운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겁니다. 혼자 어두운데 나가는 게 무서워서 옆에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웁니다. 엄마를 막 흔들어 깨우며 "엄마,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 엄마가 잠이 덜 깨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중에 휘파람 불면 뱀 나와요, 휘파람은 아침에 불고 지금은 그냥 자거라." 그런데 아 아이가 너무나 참기가 힘들어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지금 휘파람을 불어야 되요." 그래, 엄마가 졸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엄마 귀에다 휘파람을 조용히 불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선배들, 선생들,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가 따라갈 귀한 지도자 갈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입니다. 지금 2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유일한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가나안 땅은 아직 싸워서 얻어야 될 땅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여호수아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좋은 땅, 이미 정복한 땅을 달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한 땅은 가장 정복하기 어렵고 힘든 땅입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열 정탐꾼이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바로 거인족 아낙 자손이었습니다(골리앗의 조상). 이곳 이름이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그 의미도 얼마나 힘센 거인이 살았는지 이름도 “거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땅을 요구합니다. 왜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을까요? 저는 이 갈렙의 모습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첫째, 갈렙은 끝까지 믿음의 비전을 놓치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갈렙은 민수기 14장 이후 광야를 떠도는 38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의식이 분명한 지도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꿈이 분명해졌고 이제는 목적지까지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정한 보이지 않는 목표, 내 자신만을 위한 뜬 구름 잡는 목표는 바뀝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고 분명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마라톤의 세계 최고 기록은 독일 BMW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2시간 2분 57초에 완주하며 사상 처음으로 2시간 2분대에 진입한 데니스 키메토(30·케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마라톤 선수가 2시간 10분 안에 42.195킬로를 뛰려면 100미터를 평균 17-18초 사이를 계속 유지하며 뛰어야 합니다. 그럼 마라톤 선수들이 전반부에 더 잘 뛸까요? 반환점을 돈 후반부에 잘 뛸까요? 예! 상식적으로는 전반부에 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잘 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빨리 뛰는 것은 반환점을 돌고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인지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인지점인 가나안 땅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자기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을 주고 같이 성공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둘째로, 갈렙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면 한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도우심 밖에는 없지만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10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 그 땅은 가장 강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또 골짜기입니다. 무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전쟁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85세지만 40년 전과 똑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땅을 당연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체력이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믿음이 똑같을 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땅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자기 조카인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통해 다른 지파의 땅 정복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큼은 직접 정복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직접 노년의 나이에 전쟁을 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이 40년 전 백성들이 포기한 땅이었는데 그 때 갈렙은 정복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는 백성 전체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갈렙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땅을 정복하므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강한 군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마치 갈렙은 이미 이 땅을 정복한 사람처럼 달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마치 정복한 것처럼 이제 가지라고 허락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떡 줄 사람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김칫국 신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김치국은 많이 마실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이런 김칫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씀이 8,9,14 절에 3번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나오는 본문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 요셉은 형통한 신앙처럼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갈렙의 신앙 특징은 온전히 좇은 신앙입니다. 좇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만족시켰다는 뜻이고, 하나는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찰떡 신앙, 주님께 찰떡처럼 달라붙어 만족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찰떡 신앙을 가진 사람이 김칫국 신앙, 곧 성공의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나안 정복이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이면서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노인이지만 바로 우리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후배와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렙처럼 살아가면 주님의 성공을 얻을 뿐 아니라 나의 성공도 같이 얻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누가 가장 좋습니까? 예!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갈렙 자신과 유다 지파가 제일 좋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공은 이루어도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사는 교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민을 오셨는데 목사님이 근황을 물어봅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요? 뭘 하시는데요? 저 요즘 청소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뭘 하십니까? 제가 요새는 미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뭘 하시는데요? 제가 요새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바지를 누비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운 겁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또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뭐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미국을 주름잡고 다닙니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 옷을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쓸고 다니든 누비고 다니든 주름잡고 다니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교포들뿐이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느냐?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올바른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막고 잘 입고 잘 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하여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갈렙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참된 성공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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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8-10 00:23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김병중 08-09 23:49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병중 03-16 23:19
『고난 중의 신자에 대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
ㅣ. 들어가는 말 청중은 하나님과 영생의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존재이다.1) 청중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설교자의 설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청중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설교자의 설명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이 들은 말씀과 모순되게 느끼는 현실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까닭을 알 수 없고 감당 하기 어려운 고난을 경험할 때이다.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팀 켈러는 고난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고 한다.2) 그렇다면 여러 가지 까닭 모를 고난을 경험할 때 언약 백성인 청중은 그 고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면 설교자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설명할 것인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 만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설교자의 태도 역시 중요한데 설교자는 고난을 겪는 청중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때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교자는 이런 상황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자는 먼저 로고테라피 개념으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본 다음,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각각의 모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3.2) 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 25, 16. 이어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을 제안 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침묵과 로고테라피 1.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의 침묵 20세기 최고의 문호(文豪) 가운데 한 사람인 C. S. 루이스(1898~1963)는 남달리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였고 그 후 그의 형은 술을 위안으로 삼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겪은 루이스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후 신앙을 잃어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랜 방랑 후에는 다시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한 불행한 여인과 결혼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꼈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부인은 3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이런 많은 고통을 경험한 루이스는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민을 표출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가 원하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 하지 않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선이 부족하든지, 능력이 부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가 지 다 부족한 것이다.4)이렇게 의문을 던진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하는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글자에 통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5)하지만 루이스는 “고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이 그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제기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6) 사람이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크게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강정훈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은 남의 배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흔적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 자국이 더 아프다고 한다.”7) 이처럼 청중은 각자가 누구보다 쓰라린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루이스와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캔 가이어(Ken Gire)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책에 The North Face of God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반가가 가장 오르기 힘든 북쪽 능선(the north face)처럼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캔 가이어에 의하면, 에베레스트산은 여러 개의 능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북쪽 능선이 등반하기 가장 어렵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8) 3) 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6-10.4) C.S. 루이스/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33.5) Ibid., 63.6) Ibid., 129.7)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 77. 성경 인물 가운데도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요셉이나 다윗은 긴 기간 동안 까닭도 모르고 그 끝도 모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 까”라고 부르짖은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세는 요셉이나 다윗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 왔을 때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명을 거절할 정도였다. 캔 가이어의 말처럼, 성경 인물들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보다 그들이 당한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9) 2. 언어의 기능과 설교자의 사명 하나님은 이처럼 청중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설교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에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로 밝히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설교 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언어의 기능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는 대신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드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을 방출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셨다.10)하나님으로부터 말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의 사명은 이 언어를 통해 ‘사물 언어’(language of things)를 ‘구술언어’(oral language)로 드러내는 것이다.11) 설교자의 사명은 우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들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의도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진 교수는 목회 사역의 핵심을 “구술언어와 사물 언어를 신자들 앞에서 서로 연결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표현한다.12) 그렇다면 청중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자는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내세에 천국의 영광을 누릴 성도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는 청중의 질문에 설교자는 어디에서 해답을 확보하여 청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해답을 성경에 담아 놓으셨기에 매번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그 해답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선,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팀 켈러의 말처럼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13)그러다가 막상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리처드 아스머는 자신이 목사요 실천신학 교수이면서도 모친이 교통사고로 갑작 8) 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 20-21.9) Ibid., 18.10)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84.11) Ibid., 78.12) 이승진,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223.1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6. 스럽게 사망했을 때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머는 고향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14) 아스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중이 고통스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럴 때 성경적 관점 에서 고통을 설명해 주어 고통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3. 고통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까닭 모를 고통 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교자는 어떻게 해석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우선 고통에도 값진 뜻이 있다고 한 옥한흠 목사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통은 거룩한 것이며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15)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들어보자. 빅터 E. 프랭클은 유대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악명 높은 나치(Nazi)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생존자이다. 그는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알몸 상태로 발가벗기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말살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악몽일지 라도 그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16)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빅터 E. 프랭클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한다.17) 빅터 E.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 개념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빅터 E. 프랭클은 고통이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절대 고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희생의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절대 고통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존재이다.18)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을 가진 존재인 청중은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옥 한흠 목사는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하면서 신자는 고난 배후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라고 충고한다.19)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선용이란 첫째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선용하시며,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 고난이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20) 옥한흠 목사와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고통에는 고통보다 더 큰 의미가 있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신자가 막상 고난을 겪을 때는 그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경험할 때 청중은 고난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삶에서는 왜 실현되지 않는지 회의(懷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 상황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14) 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 40-41.15)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234, 15-16.16)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 51.17) Ibid., 10.18)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47-48.19)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11, 16.20) Ibid., 18-19.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III.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들 1. 재난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관점 신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온 국가적으로 함께 당하는 대재앙도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여러 가지 정상(正常)이 비정상(非 正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비정상(Ab-normal)이었던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새로운 정상(New-normal)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경제가 무너지며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vaccine)에서조차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21) 이런 때에 신자들은 왜 이런 일이 왔으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싶어 한다. 코로나 팬 데믹 외에도 세상에는 종종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설교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대재앙의 의미를 해석하여 설명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 부터였다. 1755년,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많은 논의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당시 대지진이 의인 욥이 당한 고난처럼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성경적 설명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면 대재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사건과 2011년 동일본에 지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설교 사례를 살펴보자.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북부에서 모멘트 규모 9.1의 해저 지진과 15미터 높이의 쓰나미 재앙이 발생하여 28만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교회의 한 설교자는 성탄절과 주일이 연속되는 거룩한 날에 쾌락을 즐기러 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는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관점의 설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다.22) 한편,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진의 원인이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설교해서 역시 파문이 일기도 했다.23)이 두 사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결국 대재앙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 그러면 대재앙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인가? 이승진 교수는 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로서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 대속적인 고난 모델, 신비적인 합일 모델, 종말론적 전망 모델 등의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에 접근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21) 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93622)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37.23)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24)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267-76. 1) 우선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의 관점은 고난의 중요한 원인을 당사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이런 인과응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욥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물론 고통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죄를 범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죽어 있는 세계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로 본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악인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25) 그런데 오늘날 지성인들 가운데는 보응 사상이나 징벌 관념을 말소해 버리고 범인의 개과천선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모든 징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26) 하지만 모든 고난을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합당하게 징벌하시기보다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인간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며 그들이 당하는 재난 사건을 교훈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징벌적 고난의 모델은 모든 고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징벌적 고난 모델이 형평성과 일관성에서 모순점을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이다. 이는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반드시 자신의 죄악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고난 저변(底邊)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고난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미래의 가치로 무책임하게 희석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청중의 불평을 막는 효과는 있겠지만 고난 중에 처 한 신자를 만족시키는 설명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3) 징벌 모델과 섭리 모델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난의 목적이 교육 혹은 연단을 위해서 라고 설명하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이 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과함으로 신앙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연단 후에는 죄에 빠질 가능성도 줄어들어 그에 따른 징벌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생겨난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얻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배울 것이며,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27)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영적인 훈련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답게 성숙하여 간다는 이 설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 모델 역시 모든 고난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욥처럼 남달리 훌륭한 신자가 오히려 남보다 모진 고난을 받는 경우나, 고난을 통한 연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은 유아들이 당하는 고난 등은 이 모델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4) 대속적인 고난 모델은 모든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다가 희생을 당한 경우, 혹은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自取)한 경우에 대한 설명에 동원된다. 예를 들면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던 사람이 오히려 사고를 당해 희생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 유다의 경우처럼(창 44:33)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하지만 대속적 고난 모델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경우 이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은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5) 신비적인 합일 모델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인 합일 모델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전능을 포기하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능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해서만 생각되어야 한다.28) 이러한 십자가 신학을 수용한 학자 가운데는 우선 본회퍼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전능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설명한다.29) 한스 요나스 역시 하나님을 무능력한 하나님, 무저항의 하나님, 피조물로 인해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30) 팀 켈러 역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을 옹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고통과 악의 근원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움켜쥐셨다면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 내셨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31)팀 켈러에 의하면 “크리스천들이 역경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주님의 고난을 강조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거룩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놓쳐 버리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설명하는 신학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라면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32)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겪을 때 거기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고난을 제거하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새 하늘 과 새 땅의 목적지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신다.33) 그러므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적 합일 모델의 설명이다. 이 모델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신자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 심을 포기하고 무력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구원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신비적 합일 모델은 고난 속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해버린 약점이 있다. 6) 지금까지 시도한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들은 고난의 원인과 의미를 다 설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신자의 모든 문제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날에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는 종말론적 전망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승진 교수는 메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8) 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93.29) Ibid., 94.30) 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33 (2012), 262.31)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96.32) Ibid., 233, 240.33)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274. 메츠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츠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로부터 부활절의 아침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기에 부활로 넘어가는 것을 승리자의 신화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4)하지만 종말론적 전망 모델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설명이지만, 고난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고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3. 고통의 불가피성과 고난의 유익 앞에서는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모델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한계점이 있는 설명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중은 개인마다 혹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정황을 살펴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모델로 고통의 의미를 적용함으로 청중이 지불한 고통이라는 대가보다 더 큰 유익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을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런 관점은 우선 신약 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팀 켈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는 신약 저자 가운데 우선 야고보를 생각해보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는 언제나(ὅταν, whenever)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신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약 1:2-3). 이와 같은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데 있어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베드로 역시 신자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운 나쁘게 고난을 당한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고 한다(벧전 4:12-13). 한편, 사도 바울은 고난이 신자를 연단하여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 만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은 가벼운(혹은 견디기 쉬운 ἐλαφρός)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4:17). 고난이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면 신자에게 있어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에 종교 개혁자와 설교자들 역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역설(力說)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팀 켈러는, 고난이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는 루터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난에 맞서 이겨 내도록 도와줄 기쁨과 사랑을 얻기에 앞서, 고난은 우선 우리의 교만을 비워내게 해 준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35) 그러므로 악과 고통이 존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바라보아야 한다.36) 고난의 유익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팀 켈러가 소개하는 고난의 유익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37) 34)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53-54.35)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82-83.36) Ibid., 142.37) Ibid., 300-303.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흠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2) 고난은 우리 삶의 여러 좋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 준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C. S. 루이스도 말했듯이 형통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고난 속에 있을 때는 확성기로 소리치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막다른 길로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붙는 경험을 통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과 기 쁨을 맛보게 된다. 5)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몸소 고난을 경험하면서 고통당 하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품게 된다. 이상으로 청중에게 설명할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것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청중(신자)에게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청중이 고통당하는 때에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청중이 그 설교자를 신뢰하고 그의 설교에 경청(傾聽)할 여부(與否)를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선 신정론의 설명의 한계 점을 확인한 후에 그 대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겠다. IV. 신정론의 한계점과 타인의 얼굴 1. 신정론의 의의(意義)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의 공통점은 고난에 대해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 辯神論)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신정론으로 번역되는 theodicy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θεός와 의로움을 뜻하는 δίκη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정론은 때로 무고한 자의 까닭 모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신정론의 관점으로 볼 때 고통은 선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더 큰 선에 이바지하므로, 부분으로서의 고통은 전체로서는 선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신정론을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합리한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신정론을 피력하려고 노력하였다.38)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이 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악은 선의 허용된 결핍”이라는 해결책을 내어놓았다.39) 라이프니츠가 변신론에서 표방하는 것은 “고통과 죄악이 존재하는 세계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의 계산에 따르면 현존하는 악은 최선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0) 38) Gottfried Wilhelm Leibniz/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4), 28-31, 441-50.39)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55-56.40) Ibid., 62-63. 그러나 이런 변신론의 설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강영안은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대해 ‘낙관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는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리스본 대지진 때문에 왔다.42) 2. 리스본 대지진과 신정론의 한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포르투갈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首都)이다. 15세기 리스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화로 인해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도시의 2/3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43)리스본 대지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오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신정론이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리스본이 여타의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rady)는 당시 리스본의 경건함을 다음과 같이 묘하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주교좌성당 외에도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공소가 121곳, 수도 원이 90곳, 다양한 수도회들이 150곳이나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44)특히나 대지진이 발생한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서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이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 미사를 위해 길을 나선 인파로 리스본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45)이처럼 경건했던 도시가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된 첫 지진에 이어 몇 차례의 여진이 발생하자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건립된 리스본이 폐허로 변했다.46) 그리고 오전 11시경, 지진이 발생한 지 90분 뒤에 발생한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 다.47) 대지진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망한 인구는 약 4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48)리스본이 대지진 사건으로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이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볼테르까지도 생각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9) 이처럼 고난의 문제를 신정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4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210.42) Nicholas Shrady/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서재, 2009), 142.43) 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1.44) Shrady, 『운명의 날』, 18-19.45) Ibid., 21,46)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122.47) Shrady, 『운명의 날』, 30.48) 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8.49) Ibid., 11-12. 3.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설교자는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다가갈 한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선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청중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정훈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이 난소암으로 악화되어 5년간 투병하다가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정리해서 입을 연 강 정훈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슬픔에 빠졌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이 와서 사모님이 좋은 데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울고 있는 미망인들에게 울지 말라고 비정하게 요구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강정훈은 단호하게 말한다.50) 그러면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유대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1995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아우슈비 츠 대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설명하려는 변신론은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는 어떠한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레비 나스는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없고 의미 없으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만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51)물론 고통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을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은 고통을 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통받는 자가 ‘외부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나에게 도덕적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사건을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얼굴’은 존재 자체를 통해 나에게 호소하고 윤리적 의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52)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계시로 다가올 때 필요한 것은 대속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이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 이다.”53)고통받는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되는데,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향유를 포기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계, 즉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이 열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환대해야 한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벌써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의 자리에 세워지는 일을 레비 나스는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 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54) 50)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78-80.5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227.52) Ibid., 148.53) Ibid., 152. 54) Ibid., 186. 이처럼 레비나스는 고통이 담긴 타인의 얼굴의 현현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에서 벗어나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의 윤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청중을 위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먼저 청중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모델에 해당하는지 세심하게 분석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통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청중이 놓치지 않도록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때 설교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훈계하는 자의 자리에 아닌 고통당하는 청중과 ‘자리바 꿈’의 과정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청중을 체휼(體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청중이 고통을 통해 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고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세우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으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거나 장기화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거나 모세처럼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라고 설교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컨대 아스머 교수가 경험했듯이 설교자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면 신자는 잠시 방황하던 자리에서 돌아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설교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해석하는 여러 모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신자가 겪고 있는 개별적인 고난 사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유형이 적절할지 잘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지만, 신자의 성숙에 고난이 불가피함과 결국에는 고난이 유익임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에게 고난을 설명하는 모델들을 잘 이해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태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신정론의 주장을 강조하느라 자칫 고난을 겪는 신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이 ‘계시’라고 하는 레비나스의 설명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요긴한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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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4-26 11:04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Th.D) 01-22 17:14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 01-05 20:20
만만만 선교운동에 동참합시다!
총회세계선교회 GMS(이사장 박재신 목사)가 교단과 함께하는 세계선교운동을 실시한다. GMS는 전 세계 97개 나라에서 1433 가정 2579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2022년 12월 말 기준) 현재 GMS는 비자발적 철수와 팬데믹, 정년은퇴, 후원 중단과 건강악화로 인한 중도탈락의 이유로 선교사들의 수적인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사역적으로는 장기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내전,정국 불안 등으로 인해 그 지역(우크라이나, 러시아, 미얀마, 아이티 등)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신분적, 심리적, 경제적, 사역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세계적인 경제 불황, 금리 인상, 달러화 강세, 물가 급등(아르헨티나, 스리랑카, 튀르키예, 라오스 등)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사역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팬데믹으로 인한 영향 탓에 한국교회는 수적인 감소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고 있다. 이에 교단내의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고, 지상명령의 수행을 위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교단 내의 교회수는 1만1262개이다.(2022년 10월 기준)이 가운데 GMS를 통해 선교사를 단독 파송하는 교회는 608곳이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협력교회는 1570교회이다. 파송과 협력을 하는 교회의 합이 2178개로 전체 교단 교회의 19.3%에 불과하다. 우리 교단의 전체 교회 가운데 총회 GMS와 동역하는 교회가 20%도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교회들이 교단 GMS 선교회가 아닌 선교단체를 돕는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80%의 교회들이 세계선교에 동참 혹은 동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의 비전은 GMS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회들을 동원해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만만만 운동의 핵심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에 GMS는 교단의 모든 교회들을 세계복음화를 수행하는 선교사명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만만만 선교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만만만 선교운동은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1만교회, 1만성도가 매월 1만원씩 GMS에 후원금을 내는 운동이다. 만만만 운동의 비전은 GMS 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후원 링크 http://go.missionfund.org/gms10000 만만만 선교운동의 핵심 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동참하도록 하는 데 있다. 월 1만원은 한 달에 커피 2잔 정도의 금액으로 모든 교회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을 통해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역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세계선교에 한 부분의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 세계선교에 큰 모멘텀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 후원금은 선교사들의 긴급 의료발생, 재난, 전쟁, 사고 등을 위한 긴급위기 관리기금, 은퇴 선교사들의 주택과 연금, 후원 부족 선교사와 MK의 복지지원, 선교사 계속교육, 다음세대 훈련 및 파송 지원, 통일 선교와 이주민 선교, 디지털 선교를 위해 사용된다. 모금은 만만만 선교운동의 참여 확산과 모금의 투명성을 위해 기독교 모금단체인 미션펀드를 통해 하게 된다. 박재신 이사장은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 내 모든 교회들이 GMS와 함께 세계선교에 도약할 수 있게 하는 선교운동으로 농어촌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와 성도들이 큰 부담 없이 매월 1만원의 헌금으로 참여해 '우리도 선교를 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이제는 우리 교단이 교회 수나 역사만이 장자교단으로서의 이유와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요 교회 본질의 사명인 세계선교에 모든 교회들이 동참하는 것이 자랑이 돼 하나님께서 독노회부터 우리 교단에 주신 선교적 교단의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라며,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 전체에 큰 부흥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 기자는 '만만만 선교운동'에 미력이나마 동참하기 위해 이 기사를 만들었으며, 자비로 모든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홍보토록 하겠습니다) -
김병중 06-23 11:13
인도 선교소식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장 9절 말씀) 저희들은 지난 3월 29일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 람강가를 눈앞에 두고 코비드로 인해 바뀌어진 입국절차를 숙지하지 못해서, 켈커타 공항에서 서류미비로 2일을 억류된 뒤, 입국거부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만약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또 람강가는 어떻게 되나? 두려움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우리와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출국수속 중, 비자 거부를 당해 들어가지 못했고, 미국에 가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람강가로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3일 동안의 청년부 수련회를 준비하였고 신앙과 말씀에 백지같은 44명의 교회 청년들에게 “사도행전적 교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도전과,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대로 안 되어도 또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으로 인도해 가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난 5월 29일 주일에는 데보브로또 목사님이 목사 안수 받은 후 처음으로 6명의 세례식을 거행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3월에 임직 받은 산토스 안수집사의 딸 뿌스폰잘리가 세례를 받게 되어 산토스집사의 감격이 넘쳤습니다. 자기가 이 힌두 땅에서 마을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 크리스챤으로 성장하였고, 무남독녀 외동딸이 믿음으로 잘 자라서 세례 받게 되었으며 6월에는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켈리 신학교로 가게 됩니다. 신앙의 2세대가 이어지게 되어 더욱 감격이 넘칩니다. 지난 2년동안 하지 못한 성찬식도 하게 되어 그동안 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큰 은혜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함께 하지 못해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저희가 다시 한번 여행비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지금 코비드로 인해 잠시 열린 학생비자를 받아 장기 체류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부족한 저희들을 위해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여 주신 동역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2022년 6월에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올림 -
김병중 05-18 16:22
의료선교 한00 선교사
한 선교사는 침술 의료선교사로 중국,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힌두교, 불교, 무술림을 상대로 치료 선교를 하고 있다. 의료선교는 다른 현지 선교사와 협력해서 하며 치료시 다른 사람이 동행해서 전도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네팔 00 지역에서 약속된 10명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이때 예약 안된 한 분이 소문을 듣고 참석했고 마지막으로 그 분을 치료했는데 힌두교인이었던 그 분이 결국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한 선교사는 침례교 목사로서 미국과 중국에서 침술을 배웠으며 2010년부터 한사랑의료선교사로 미리 선교사하고 연락해 선교지를 방문해서 먼저 주변 지역 선교사들을 치료하고 이후 지역 선교사들의 현장을 방문해 침술 사역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역한지 5-6년이 경과하자 병원에서 치료 받지 못한 사람들이 믿고 와서 치료를 받게 됐고 한 사람에게 2-3시간 정도 걸려 100개 이상의 침을 놓아 치료하고 있다. 10년간 목회와 의료선교를 병행 하다가 이후 선교사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진료하고 사랑해서 구원받게 하는 것을 목표로 의료선교하고 있다. (한 선교사는 현재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 후원을 원하시는 분들은 본 기자에게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병중 03-29 00:42
인도 선교 소식
2022년 3월 기도편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이사야 26장 3절) 세상은 끝이 나지 않은 전염병과 전쟁의 소식으로 우리를 혼란케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지 함으로 주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다만 기도하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 도울 분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 없사오니 하나님이 공의의 손을 높이 드셔서 욕심으로 침략한 나라를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고 갑자기 당한 공포와 고통, 가족을 잃은 아픔과 슬픔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무고한 생명의 희생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하루 빨리 전쟁을 종식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람강가 소식은 3월3일 드디어 데보브로또가 목사 안수를 받고 초창기부터 저희와 함께 교회를 개척했던 산토스 고로이가 안수집사로 임직을 받게 되었습니다. 데보브로또는 지난 10 여년동안 2년 과정의 성경학교에서 시작하여 신학교 3년 신대원 2년 과정 가운데 늘 1등으로 졸업하면서 학교의 교수들의 칭찬을 받고 승승장구 했지만 지난 2년동안 아내의 난치병으로 결국 하나님 앞으로 먼저 보내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겪으면서 심령이 단련되어 지고 목사 안수 받을 준비가 더욱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목사안수식에 가기를 소원했지만 비행기가 없어서 못 가서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지만 드디어 3월 20일부터 비행기가 열려서 29일 들어가게 됩니다 저희들이 현장에 없는 동안 하나님이 직접 여러 모양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셔서 교회가 견고하게 서 가고 성도들도 많이 성장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보고싶은 얼굴들 만나기를 소원하며 또 저희들이 가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을 구상하느라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잠을 설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한편 현장 안에서의 연약한 부분들 개선해야 할 세밀한 부분들, 교회가 목회자가 세워짐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과외학교 체제에서 목회자 중심의 교회로 바뀌어 지는 과정 가운데 교회 구성원들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데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또한 새로운 시대상황 가운데 어떻게 미래지향적인 목회를 이끌어 가야 하나? 또 교회와 목회자가 어떻게 재정적인 자립을 하나? 등등 무거운 짐을 안고 갑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여 주신 후원자님과 동역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져 지역복음화를 이룰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 데보브로또 고로이가 섬기는 리더쉽으로 예수님 닮은 목회자로 성장하도록, 2, 이번 노회에서 안수집사로 임직을 받은 산토스 고로이가 교회를 잘 섬기고 장차 장로로 장립 되어질 수 있도록, 3, 저희들이 지혜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맡겨진 역할의 잘 감당하고 교회발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또 더위와 벌레와 바이러스 잘 이기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늘 감사를 드리며 2022년 3월에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 03-27 00:19
인도네시아 이야기 8
폭풍 속의 일주일 비자 상황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교수 비자 발급까지 15가지 서류가 준비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이러다가 지금 갖고 있는 방문 비자 기간이 끝나도록 새 비자를 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최악의 경우 비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코로나 시국에 국경을 한 번 더 넘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갖고 있는 방문비자의 연장을 위해 이민국에 또 방문했다. 최대 4번 연장해서 6개월까지 머물 수 있는 방문비자를 3번째 연장하려는데 이민국 직원이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한다. 혼인관계 증명서를 떼서 대사관 공증을 받아오라고 한다. 우리가 부부임을 증명하는 서류로 주민등록 등본과 가족 관계 증명서를 한국에서 영문으로 떼어 왔었다. 이제까지 그 서류로 부부가 비자를 내고 연장하는데 아무 문제없이 처리되었었는데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내가 준비한 서류가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하는 공식 증명서라고 설명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대사관 공증을 받으려면 비행기 타고 1시간 40분 거리의 수도 자카르타까지 가서 떼야만 한다고 읍소해도 통하지 않는다.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민국이다. 어제 이미 연장 접수가 끝났는데 다시 묻는다. 왜 방문비자를 계속 연장하느냐? 도대체 왜 장기 체류 비자로 바꾸지 않느냐? 혹시 불법으로 이미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니냐? 질문을 쏟아낸다. 나의 비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을 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나도 교수비자가 제 때에 나오지 않고 이렇게까지 늦어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생활이 너무 불편하다. 인도네시아는 정식 체류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생활에 제약이 많다. 비자 진행이 잘 안되고 있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있는데, 이민국이 아픈 내 마음을 한 번 더 후벼 파고 있다. “왜 교수비자가 안 나오고 있습니까?” 미뤄진 등판 이민국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판단에 신학교 학장, 폰티아낙 시니어 선교사님과 급히 모여 대책 협의를 했다. 일단 이번 학기 강의 계획을 중단하기로 했다. 아직 비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방문 비자의 목적에 맞지 않는 활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전혀 예상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자의 마지막 퍼즐인 학교 납세번호 발급이 늦어졌던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학교의 오랜 내부 갈등 때문이었던 것이다. 학교가 속해 있는 비영리재단 대표와의 10년도 더 된 갈등과 분쟁으로 학교는 매년 세금 신고도 제대로 못했고, 그래서 납세 번호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던 것이었다. 이런 사정들을 미리 알려주었으면 진작에 다른 루트로 비자를 받았을텐데 끌고 끌다가 눈 앞에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나서야 밝히고 있다. 믿고 기다렸지만... 뒤통수를 심하게 맞은 기분이다. 어찌되었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기존 방법은 그대로 계속 진행하고 새로운 길도 모색해 보는 투 트랙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중간에 더 빨리 되는 것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새로운 방법은 신학교가 속한 교단의 총회를 통해 목회자 비자를 받는 방법이다. 그 자리에서 노회장과 통화를 하고 노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노회장과의 상의 결과 노회장 이름으로 추천서를 쓰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총회를 통해서 해야 하지만 총회는 자카르타에 있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니 컨설팅회사와의 상의 결과 노회장 추천서로 진행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니 급하게 대책을 찾고 문제에 집중하느라 눌러 놓았던 감정이 폭발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이제까지 몇 번에 걸쳐 새로운 문제가 발견되었는지 모른다. 마치 양파 껍질처럼 까도 까도 계속된다. 처음부터 모든 문제를 말해주었으면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을텐데. 이런데도 따지거나,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러는 순간 이들과는 끝이고, 사역이 힘들어질 뿐 아니라 더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주변으로부터 많이 들었다. 이번주에는 현지인과 갈등이 있던 선교사가 현지 제자의 고발로 이민국의 조사를 받고 추방 조치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하튼 한 삼일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 하는 이유 왜 초기 주력 사역을 신학생 교육으로 잡았는가? 한국 교회의 희망은 젊은이들에게 있다고 믿었기에 젊은이들에게 집중했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신학생! 이들이 변화되고 바로 설 때, 오래 걸리지만 가장 확실하게 이 땅의 교회가 바로 서고, 힘있게 설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한 힘이지만 보태고 싶다. 최선을 다해 이 나라 교회의 미래를 위해 일하고 싶다. 본격적인 데뷔가 조금 미루어졌고, 또 인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시 한번 “사바르!” 오늘 큐티 말씀에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피해 다니신다. 두려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심이 분명한데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아니기에 잠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신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다. 그를 위해 절제하시고 조심하시고. 지금 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물러서는 훈련을 하고 있다. 내 생각, 간절함, 내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 쉽지 않다.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내 성격에 맞는데 너무 답답하다. 확진자 접촉 매주 3일 2시간씩 현지인 자매가 집에 와서 나의 인니어 공부를 도와준다. 최근에는 내가 만들고 있는 인니어 선교학 강의안을 함께 교정한다. 강의안을 읽고 발음을 점검하고 내용을 인도네시아인의 시각으로 교정한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2시간가량 한 테이블에서 교정 작업을 하고 돌아갔는데 토요일 밤에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교단내 헤브론 교회 18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주머니에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예배 후 식사가 시작되기 전 확인을 해보았는데 어제 우리 집에 왔었던 인니어 선생님이 확진이 되었다고 한다. 둘 다 기본적으로 공부할 때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음료나 다과를 먹을 때는 벗었기 때문에 감염위험이 있었다. 아내는 자매를 맞이하고 간식을 내오고 대화를 하는 동안 마스크를 쓰지 않았었다. 우리는 이렇게 밀접 접촉자가 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식사 시간이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식사 전에 이 사실을 확인 했다. 일단 주최측에 양해를 구하고 급히 빠져나왔다.돌아가는 길에 상황을 자세히 확인하고 귀가 후 안티겐 검사를 해보았다. 아내와 나 모두 긴장하며 15분을 기다렸는데...음성!위음성 확율이 높은 안티겐 검사여서 일단 일주일 자가격리를 하기로 했다. 요즘 왜 이러나 싶다. 비자가 늦어져 학교 강의도 미루어지고, 이제는 확진자 접촉으로 집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동안 힘들어도 주변의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어 그나마 위로를 받았는데 이제 그마저도 할 수 없다. 고마운 동지들 그래도 이곳에 함께 어려운 길을 가는 동지들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기에 외로울 수 있는데 그나마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더 자주 만나고 함께 식사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격려하며 함께 헤쳐나간다. 나의 비자문제도 함께 걱정해주고 해결책을 찾고 있다. 고마운 동지들. 헤브론 교회 창립 18주년 기념예배에서 선교사와 현지인으로 구성된GBT 성경번역선교회 팀을 만났다. 인도네시아에는 30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있다. GBT는 그들이 자기 언어로된 성경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뜻 모르는 부족의 언어로 찬양을 하는데, 나는 이들의 찬양을 통해 힘을 얻는다. 이 외진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기도제목 1. 건강 저와 아내는 격리를 풀었지만, 주변에 몇 분의 선교사님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또 몇 분은 확진자 접촉자로 격리 중에 있습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폰티아낙 지역도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저와 이곳에 계신 선교사님들 모두의 건강을 위해 기도 바랍니다. 2. 비자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빠른 시일 내에 발급되도록 기도 바랍니다. 3. 강의안 작업 선교학 강의안을 잘 마무리하고, 몇 가지 중요한 강의안들 번역 작업이 잘 되도록. 번역 작업에 참여할 준비된 현지인을 잘 만날 수 있도록. 4. 화인지부 화인(华人) 선교를 위한 지부를 인도네시아 안에서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
김병중 03-26 00:33
인도 선교 소식
2022년 새해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이 다 지나가고 있네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하였고, 새해 역시 여전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지금 인도 람강가 사역지는 데보부로또가 아내 핑키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사역에 몰두하면서 선한 열매가 많이 맺히고 있습니다. 그동안 드르보바잘교회학교에서 자라난 청년들을 주축으로 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글자를 모르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동네마다 그룹을 만들고 담당교사를 세워 매주 집집마다 돌아가며 만나서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즐거움과 서로 교제하는 즐거움을 맛보며 주민들이 결속력을 다지게 되고 또한 말씀으로 심령을 견고케 하고 교회공동체에 잘 붙어 있도록 잘 섬기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예배가 활기가 있고 예배 인원도 많이 늘어나고, 청년들도 성취감에 자신감과 믿음이 견고해 져서 일석이조의 결과가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교회 아동들은 방과 전후 학교를 통해서 학교 공부뿐 아니라 그림 그리기, 만들기 등 너무 재미있는 시간을 통해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그룹활동을 통해 협동과 경쟁을 배우면서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고 아동들이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결과로 데보부로또도, 교회도, 아동들도, 지역주민들도 한공동체로서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연말 16년만에 처음으로 추운 겨울에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더위로 적응된 몸이라 한국의 매서운 날씨가 너무 추웠습니다만 기도의 동역자들께서 보여준 따뜻한 사랑을 듬뿍 받고 목적하고 간 모든 일들을 순적하게 처리하고 지난 1월 27일 우선 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인도에는 오미크론 확장세가 좀 잠잠해지고 비행기 항로가 열리면 3월경 인도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태국으로 오기 전날에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방문하여 조선말기에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명을 드린 순교자들의 비문을 읽으며 다시 한번 도전을 받고 마음을 다잡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미디어 시대에 선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고 Zoom이나 SNS를 통해 접촉과 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이번에 들어가서 사역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헤어져 있었던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노고를 좀 들으면서 또한 비대면이 뉴 노말이 되어 있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선교의 선한 방향을 찾으려 합니다. 저희들에게 건강을 주시고 지혜와 통찰력을 주셔서 상황에 맞게 우리에게 맡겨진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세워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2022년 1월 김계응 오금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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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10-28 19:12
강의창 장로 부부 시
강의창 장로 시 에벤에셀 참으로 오랜 세월 방황하며 허우적거릴 때 미스바로 모여라 부르는 소리 가야만 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에 제단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얼굴에 홍수를 이루고 입술이 열리며 알 수 없는 천국 방언이 쉴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후로부터 모리아 산 이삭의 제물처럼 생(生)과 사(死)를 당신께 맡겼습니다 이제는 달려 갈길 다 가고 여기까지 도우신 기념비를 지워지지 않는 종이에 아로새깁니다 여명(黎明) 밤 새워 진통을 앓던 어둠은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에 희망의 나래를 펴고 날아든다 그림자 없는 어둠을 헤메이며 밤 새워 토해 내던 역겨운 세월들 하늘 눈물 쏟아 내고 눈이 열렸다 가지 끝에 매달려온 가느다란 빛줄기는 검붉은 심장을 터트리고 여명(黎明)의 호흡으로 벅차 오른다 해당화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해당화 장독 항아리 여는 엄마와 눈 맞춤한다 인생살이 고달파도 장독대에 가면 마음의 부자 해당화 꽃향기에 취해 얼굴에 미소 지으며 간장 된장 퍼와서 식구들에게 고운 정 퍼붓던 엄마 엄마의 향기 지금도 내 마음에 피어오른다 홍수임 권사 시 아버지 (1) 이름만 불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울림이 메아리쳐 옵니다. 밤늦게 귀가할 땐 딸 사랑에 잠 못 이루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당에 서성이셨다. 딸 발자국 소리 들려오면 모르는 척 방에 들어가 등잔불 끄고 아침이 오면 말없이 일거리 주시며 마음으로 안아주시던 아버지 예수 부활 (4행시) 예수 믿고 구원됨이 복중에 제일 큰 복이요 수확 중에 제일 많은 수확이다 부하게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활용하여 많은 상급으로 선한 사업에 부요하길 원합니다. -
김병중 10-17 11:41
이제 가을은 끝났다 - 손근식 장로
이제 가을은 끝났다. 기온이 뚝 내려간다고.. 아직 들판은 추수를 마치지않았는데... 누가 추수를 하러 갈런지.. 오이코스 초청 추수 대작전이 조용하게 개시되었다... -
김병중 03-30 00:59
아부지와 홍시
1. 오늘 아침 58년 개띠 ‘백형’이 시 한편을 보냈다. 하기야 오늘만 보낸게 아니다. 그 형은 매일 보내신다. 백형의 사랑의 수고로 나는 요즘 매일 시 한편을 읽는 멋스런 남자로 바뀌고 있다. 나름 감성 있다 자부하는 나에게 백형은 시적인 감각까지 겸비하도록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오늘 아침 보낸 시를 읽는데 고향과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백형이 보낸 시는 ‘피재현’ 시인의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서’였다. “아버지는 가을이 깊어지면 감 따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감 따는 게 싫어 짜증을 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아느냐고. 감 따위 따서 뭐 하냐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니 애비도 없는데 저 감은 따서 뭐 하냐. 나는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서 톱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울었다.” 2. 내 고향 청도는 감나무 천지다. 집집마다 서너 그루 있고, 밭에도 있고, 가로수도 감나무다. 가을이 되면 감나무마다 달린 빨간 홍시들은 장관을 이룬다. 달린 홍시를 하나 따서 쪼개면 촉촉하게 밴 감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입에 넣으면 세상을 다 얻은 맛이다. 난 감나무 밑에서 눈 깜짝 할 사이에 홍시를 단숨에 서너 개를 먹어 치운다. 고구마처럼 목 매이는 것도 없고, 사과처럼 껍질 깎을 필요도 없다. 그냥 중간을 쪼개어 입에 넣고 쭉 빨아먹고 껍질은 버리면 된다. 그렇게 홍시로 배를 채우며 자랐다. 나뿐만 아니다. 우리 청도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 근데, 그 흔한 감나무가 사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한 그루도 없었다. 겨우 닭장 옆에 깨양나무(고욤나무) 한 그루만 있었을 뿐이다. 깨양 열매는 감을 닮았지만 모양도 작고 씨도 많아 맛도 별로였다. 감나무 천지인 마을에 한 그루도 없는 우리 집이 늘 불만이었다. 그리고 자기 집 감나무에서 홍시 따 먹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나는 몇날 며칠 아부지(경상도 호칭)에게 투덜거렸다. “아부지, 우리 집도 감나무 좀 심어 주이소~ 맨 날 남의 집 감나무에서 홍시 따먹기 이젠 싫심더~” 3. 어느 날, 아부지가 감나무 접붙이기에 일가견이 있는 동네 전문가를 모셔 와서 깨양 나무를 베고, 청도 반시감나무 가지로 접붙였다. 그날부터 감나무가 자라는 것을 나는 매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역시 내 기대대로 감나무가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이 왔다. 봄부터 열매를 낸 감나무에서 제법 굵은 감들이 달렸고, 그 중에서 몇 개는 홍시가 되었다. 나는 얼른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서 어릴 때부터 터득한 기술로 둘로 쪼개어 입 안에 쏙 넣었다. 달달하게 흐르는 감물을 몇 번 쪽-쪽- 빨아먹고는 껍질은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행복했다. 매해 감나무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해 보니 옆집 친구 집의 감나무와 키 재기 할 정도로 컸었다. 뿌듯했다. 4. 감나무는 한창 잘 자라고 있었지만 아부지는 점점 늙어갔다. 시골집도 새집이 들어서는 주변 집들에 비해 점점 초라해졌고, 급기야는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바지런한 막내 자형이 시골집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서둘렀다. 읍내 농협에서 장기대출을 받고 넓은 거실에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실 평수 26평 정도의 아담한 집을 설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터가 워낙 좁아 집을 지으려니 감나무를 베어야만 했다. 감나무가 베어지던 날 난 속상하고 너무 아쉬워 울었다. 또 남의 집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 먹어야 할 신세가 된 것이 솔직히 서러웠다. 5. 지난 추석에 시골에 갔다. 여전히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없다. 아부지도 20년 전에 하늘 가시고 없으시다. 하지만 홍시는 여전히 천지삐까리다. 세월이 흐르고 낫살 먹어도 어릴 때 익힌 홍시 따 먹는 실력은 여전했다. 어머님께 아들 왔다고 인사하고는 곧바로 집 앞 남의 집 감 밭에 갔다. 익숙한 솜씨로 빨갛게 익은 홍시를 몇 개 땄다. 그리고 게 눈 감추듯 서너 개를 입에 넣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달달함인가? 그날 모처럼 홍시로 배 채웠다. 찬바람이 분다. 고향땅 감나무에는 까치 밥으로 남겨진 홍시 몇 개 외에는 남겨진 것이 없지 싶다. 홍시를 먹으려면 내년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근데, 오늘 따라 홍시가 또 먹고 싶다. 덩달아 우리 아부지도 눈물겹도록 보고 싶다. -
김병중 03-30 00:52
아부지
아부지 1. 내가 태어날 때 아부지는 45세였다. 이미 내 위로 4명의 누이와 3살 위의 까칠한 형아가 있었다. 그 시대 아부지들은 다 그렇듯이 울 아부지도 늦은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원했다. 하지만 그토록 바랬던 아들은 4명의 딸이 온 후 5번째 태어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을 보며 아부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거다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뻤던 아버지는 하나 더 얻기를 바랬는데 이번에는 희한하게 딸, 아들이 몇 분 사이로 태어났다. 그렇게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나는 누이들과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2. 내가 아부지의 존재를 인식할 때 아부지의 모습은 태산과 같았고, 천하장사였다. 상상할 수 없는 무게의 나뭇짐을 지셨고, 거대한 산과 같은 고봉의 밥을 드셨다. 주무실 때 코 고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했다. 매캐한 연기가 방구석의 사각 모서리의 장판 접힌 틈 사이로 꾸물꾸물 올라올 때쯤 콜록거리며 눈을 떠 보면 어느새 아부지는 콧노래로 찬송 부르며 소죽을 끓이고 계셨다. 그때 생각했다. 아부지는 잠도 없나 어떻게 저렇게 일찍이 일어나시지... 3. 아부지는 바지런하셨다. 얼마 되지 않는 논때기론 자식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늘 남의 집 일들을 하셨다. 고단한 날들의 연속이셨던 아부지의 모습은 늘 흙 묻은 옷을 입었고 풀냄새와 땀 냄새가 범벅이 된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겼다. 내가 머리와 몸집이 커갈수록 아부지의 존재는 점점 태산에서 야트막한 구릉으로 변했고, 천하장사와 같은 힘도 어느새 내가 범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평범한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날, 아부지가 뭐가 그래 화가 났는지 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