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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선교연대, 제119차 포럼 개최
- 제119차 세계선교연대(대표 최요한 목사, 세선연) 포럼이 3월 7일 오전 10시 30분 명동 소재 프린스호텔 컨벤션홀 2층에서 열려 예배하며 기도하고 선교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축사 최요한 세선연 대표가 “말한대로 됩니다. 긍정적인 말, 생산적인 말, 창조적인 말, 믿음의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선교연대가 119차 포럼을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말, 세선연 이선구 이사장이 “우리는 사명자의 길을 가야한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사역하기를 바란다. 복음 전하는 일에 죽도록 충성하자.”라고, 대전 침신대 박호용(요한) 원장이 “그동안 47권의 책을 썼지만 본업은 선교사이다. 앞으로 유튜브를 통해서도 말씀을 전하고자 하며 남은 생애 북한 선교에 힘쓰고자 한다. 자기 자리에서 사명 잘 감당하자.”라고 축사, 박재천 목사가 축시 낭송했다. 1부 예배는 총회신학교 원장 강창렬 목사의 인도로 시민단체 총재 고종욱 장로가 기도, 인도자가 계 1:8을 봉독, 찬양사역자 김보미 전도사가 특송, 조윤하 전도사가 바이올린 특주했다. 전 외교관 · 이란 대사 채원암 장로가 'MAGA 정책 이해와 복음통일'이란 제목으로 “트럼프의 미국 우선 정책으로 중국과 갈등하고 있는데 중국은 내분으로 힘을 잃고, 언젠가 남북 통일이 될 것인데 이때 김일성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8천여개의 기념관을 교회로 사용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라고 설교했다. 가나 유정미 선교사가 헌금기도, 찬양사역자 정은영 전도사가 헌금송, 국제선교신문 사장 김주덕 장로가 광고 후 이선구 목사(사랑의쌀나눔 이사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선교포럼 및 사역 소개는 세선연 대표 최요한 목사의 사회로 선교사들 일동이 찬양 후 선교사 사역소개 및 발표했다. 우간다 황선희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해서 가르칠 계획이다. 어린이합창단을 창단할려고 미리 연습 중에 있다.”라고, 일본 이형우 선교사가 “동경 주재원으로 간 후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고, 일본 신자들과 북한 사역을 하고 있다. 과거 원수 일본을 사랑하고 함께 복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멕시코 양주림 선교사가 “GMS에서 은퇴한 선교사지만 계속해 사역하고 있다. 현지에서 개척한 교회들이 지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어 감사하다. 은퇴한 선교사들이 염창동에서 모여 같이 예배하고 있다.”라고, 탈북민 사역 권바나바 선교사가 “탈북자 제자를 통해 세계 복음화 사역을 하고 있다.”라고, 가나 유정미 선교사가 “하나님께서 가나를 사랑하셔서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북부 지역의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많이 어려운데 지하수 개발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라고, 캄보디아 홍시환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순종해 가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일하게 하셨다. 오지 마을에 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라고, 장정옥 선교사가 “미국에서 태국을 선교하고 있다.”라고 보고 후 샘물교회 최태선 목사의 인도로 합심기도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하고 식당으로 옮겨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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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말아야 할 학도병들의 희생, 뮤지컬 「매산 153 학도병」
- 지난 3월 6일 순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뜻깊은 「매산 153 학도병」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당일 오후 3시에는 매산학교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했고, 오후 6시 30분에는 일발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관람했다. 6·25 전쟁 당시 순천 매산중학교(현재의 순천매산고등학교 및 매산중학교) 학생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1950년 7월, 순천 지역에서 참전한 학도병 56명 중 매산중학교 학생이 32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전투에서 매산중 출신 11명이 전사하고 5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매산 학도병들은 입대 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담아 태극기에 혈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자 '153'은 전장으로 향하기 전 '혈서'를 쓰며 결의를 다진 초기 학도병 인원수 등을 상징하며, 이후 참전 인원은 더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남 지역 학도병들의 희생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순천매산고등학교 벽면에는 당시 10대 학도병으로 출병한 선열들을 기리는 '6.25참전 학도병 충혼 벽화'가 조성되어 그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뮤지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6.25 기습 남침으로 서울과 대전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 가운데 호남 지역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한다.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항일 투쟁 중 희생당한 한 가정의 세 남매(형, 여동생, 남동생)가 자원 입대하고 전쟁에서 모두 희생된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그들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버티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뮤지컬은 막을 내린다. 작/연출 신동일, 조연출 손현재, 영상감독 한의섭 출연: 김민정 김기령 안재완 김경택 오우철 최지인 김총명 김가희 김현지 민재이 은별 손현재 장승식 주기쁨 주혜린 이도윤 제작/후원: 사랑컴퍼니, 더웨이 기독 문화선교단, 순천 시청, 분당 전하리교회(임흥옥 목사) 주관: 순천남•순천노회 장로회 제작 후원한 분당 전하리교회 임흥옥 목사는 예장합동 총회군선교회 25대 회장을 역임했다. 군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 산하 기관으로, 국군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군 복음화를 위해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는 선교 조직이다. 전국에 18개 지회를 두고 있으며, 군부대 위문, 진중 세례식 지원, '사랑의 온차' 전달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와 나라가 산다'는 기치 아래 다음 세대를 깨우는 군선교에 주력하며, 군부대 내 교회 리모델링이나 교육관 신축 등 장병들의 신앙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전방 부대 장병들을 위한 위문 방문과 겨울철 '사랑의 온차'를 지원하고 있다. 임흥옥 목사는 “「매산 153 학도병」을 통해 학생과 일반인들이 애국심을 고취하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실 것을 굳건히 믿는 신앙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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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인교회 • 구이중앙교회 • 유상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 한민수 목사)가 주관한 제48호 중인교회 • 제49호 구이중앙교회 •제50호 유상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감사예배가 3월 6일 오후 2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소재 중인교회 예배당( 조무영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한민수 목사의 인도로 역사위원회 회계 김흥선 장로가 기도, 역사위원회 전 서기 최찬용 목사가 히 12:1-2을 봉독, 찬양대가 찬양했다.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현재의 사명을’이란 제목으로 “과거 믿음의 선조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했었다. 우리는 그 신앙을 계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와 선조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감사해야 한다. 누군가의 헌신으로 오늘까지 교회가 있게 된 것에 감사하자. 셋째, 살아있는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사적에 지정되어도 계속해서 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라고 설교했다. 역사위원회 총무 김종운 목사가 광고 후 전북노회장(한소망감수교회) 석명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사적지 지정 증서 전달 2부 사적지 지정식은 총회역사위원회 부위원장 김기현 장로의 사회로 역사위원회 서기 이진근 목사가 사적지소개, 정영교 부총회장이 당회장에게 지정증서를 증정했다. 축하패 전달 전북노회 증경노회장 윤희원 목사가 “역사는 사실보다 의미이다.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교회들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총회재정부장 이민호 장로가 “역사 의식이 있어야 하며 과거 역사를 통해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 비판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라고 격려사, 역사사적지 협의회장 고관규 목사가 “사적지 지정 후 관리를 위해서는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돕기 위해 역사사적지가 조직되었다.”라고 축사 후 축하패를 전달했다. 3부 현판 제막식은 총회역사위원회 서기 이진근 목사의 사회로 순교분과장 김성원 목사가 기도하고 사적지 내부를 관람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중인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8호 처음은 그야말로 미미하였다. 중인리는 선교의 불모지였다. 영적으로 혼탁한 땅이었다. 그런 데, 이곳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다. 어디서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은숙(순) 씨 외 6명의 작은 자들이 작은 사랑채에 모여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어설픈(?)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사 크신 은혜와 긍휼하심 가운데 1907년 중인교회가 시작 되었다. 중인교회는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60년에서야 장로를 세우고, 조직교회가 되었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66년에서야 제1대 담임목사가 부임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중인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였다. 역사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와 싸워야 했고, 지역적으로는 모악산 주변이 미륵신앙의 본산지였기에 치열하게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했다. 총회적으로는 교권 다툼과 분열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합동총회와 개혁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기도의 무릎으로, 신학과 신앙으로 맞서 싸워야 했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회적으로는 청년들의 지역 이탈, 성도들의 노령화, 지역과의 갈등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크신 은혜 가운데,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믿음의 발자취가 자랑스럽다. 이런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 이렇게 전투적인 교회로 남아서 최후에 이기는 자(교회)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한다. 구이중앙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9호 구이중앙교회는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 간 ‘이래수’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고향에 있는 동생 '이흥원'에게 서신으로 전도하였다. 서신을 통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시작으로 미국 전 선교사(한국명 전위렴)에게서 도리를 자세히 배우고 전도하므로 신도가 증가하였다. 이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여(1905년) 지금까지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현재 대한 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뜨겁게 예배하고 영육간에 안식을 얻으며 세상을 향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이다. 유상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50호 한국의 초대교회는 당시 많은 교회들이 그러했듯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어지고 설립되어지던 시절이었다. 전주가 속해 있는 전라도 지역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를 통해 1894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상교회는 조금 특이함이 있었는데, 1906년 당시 허허벌판과도 같은 전주군 유상리 부락에 ‘기역자(ㄱ)’ 교회가 세워지는 데 선교사에 의한 설립이 아니라, 순수 현지인들이 교회를 건축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이일문 씨가 복음을 접하고 열정적인 전도를 하게 되는데, 그 신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를 건축하고 함께 모여 예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교인들은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고, 이일문 씨는 1920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어 유상교회(유상리교회)의 초대 담임목사가 된다. 그렇게 유상리 지역에 복음의 중심이 되어가던 유상교회에서는 드디어 첫 직분자가 나오게 되는데, 1933년에 홍원조 씨가 장로로 장립하게 된다. 이후로 전도사들이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1946년에는 동산부락에 동산교회를, 1965년에는 발산부락에 팔복중앙교회를 분립하게 된다. 그렇게 유상교회는 설립자를 제외하고 첫 번째 위임목사가 시무하게 되는데, 제 96회 총회를 이끌었던 증경총회장 이기창 목사이다. 이기창 목사가 1982년 현 유상교회 터에 건축을 하게 되는데, 과거 기역자(ㄱ) 교회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시(1945년도) 타종했던 좋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새롭게 종탑을 만들고 타종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2대 위임목사 이길우 씨가 부임하여 35 년간의 성역을 마치고 은퇴하고, 이후 3대 위임목사 방관전 씨가 2017년 4월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처럼 유상교회는 120년 역사동안 초대 설립자를 빼고는 위임목사가 3대째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성도들은 목회자를 사랑하고, 목회자는 성도를 사랑하며 복음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만을 사랑하기에 힘쓰는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다. 이후로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 받으며 후대에도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하여 제110회 총회에서 지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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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린 신학교, 신학사 10명·목회학석사 4명·목회학박사 2명 졸업
- 인도 코린(Kor-In)신학교 졸업식이 2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열려 신학사 10명 · 목회학석사 4명 · 목회학박사 2명의 졸업을 축하했다. KOR-IN 신학교(Kor-In Theological College & Seminary)는 한국(Korea)과 인도(India)의 화합과 복음화를 위해 인도에 설립된 초교파 신학 교육 기관으로 1991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1호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된 故 이기섭 선교사(대길교회 장로)에 의해 1994년 인도 벵갈루루에서 개교했다. 신학교 이름은 한국(Korea)과 인도(India)의 합성어로, 두 나라의 우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상징한다. 이 신학교는 특정 교단에 매이지 않는 초교파 신학교로, 인도 현지인 목회자 및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전국남전도회와 여러 기관과 개인들의 도움으로 만평의 대지 위에 17개 교사 건물에서는 초, 중, 고등학교 코린 영어 학교와 코린 신학교 그리고 기숙사, 예배실, 기도원 강당을 구비하여 장차 남인도의 인재들을 발굴하여 주의 종으로 양성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현재 영어 학교 700명 재학 중이며, A.T.A 인가를 받은 코린 신학교에는 교수 12명, 학생 40여명이 수학하고 있다. 졸업 예배는 Dinesh Stephen 목사의 인도로 Samir Kumar Singh 목사가 기도, Kor-In 대학 합창단이 특송, 염은철 목사가 딤후 4:6-8을 봉독, 한국 선교팀 (장군길 장로)이 특송했다. 박현식 박사가 설교 후 Lalit Kumar Nayak 박사가 연례 보고, Voola Sunayana 여사 (교무처장)가 졸업생 소개, 박현식 박사, Lalit Kumar Nayak 박사가 학위 수여했다. 재단이사장 최수용 장로, 이남준 장로가 선물 증정 후 졸업생 답사, 졸업생 특송 후 R. Sudhakar Rao 목사, 조형국 장로, 최수용 박사, 관영기 박사, Naresh 전도사가 축사, Lalit Kumar Nayak 박사가 감사 인사한 후 박현식 박사의 축도로 졸업식을 마무리했다. 최수용 장로는 환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감사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먼저 타밀나두의 바르구르 복음주의 나병교회에 한국인 교우들을 데려오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어려운 나병환자들에게 사랑의 쌀과 밀가루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나병환자들에게 점심을 두 번 제공하겠다는 의미에서 180달러를 헌금 받았습니다. 저희를 응원해주시는 모든 회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제102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최수용 장로와 45회기 전국남전도회(회장 조형국 장로) 회원들이 마을을 방문해 사랑의 쌀을 전달했다. 학사 및 석·박사 학위 수여 명단 신학 학사 (Bachelor of Theology) Ms. Ni Chin Tial Ms. Manita Toppo Mr. Tluang Awi Mr. Zabidi Laymay Mr. Henry Bawi Hmun Thang Mr. Bingi Ejjrashastri Mr. Lalropuia Mr. Thang Tung Tuang Mr. Sasikumar K Mr. Valluri Suresh 목회학 석사 (Master of Divinity) Mrs. Srimanthula Rechal Jyothi Ms. Khevitoli Assumi Ms. Kethose-E Ms. Linoka Kinimi 목회학 박사 (Doctor of Ministry) 조형국 장로 (Elder Cho Hyung Kook) 방경해 장로 (Elder Bang Kyung 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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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정책협의회, 3차 모임 가져
- 총회 정책협의회 운영위원회(위원장 윤두태 목사)가 주최한 제3차 총회 정책협의회가 3월 5일 오후 1시 혜성교회 언더우드기념관(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열려 발제를 듣고, 부서별 현황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1부 예배는 정책협의회 운영위원장 윤두태 목사의 인도로 정책협의회 운영위원 김대훈 목사가 기도, 정책협의회 운영위원 이상화 목사가 마 5:13~16을 봉독했다.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거룩한 영향력으로’란 제목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명이 있기에 그것을 감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국민의 74%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활이다. 우리 신자는 이 세상에서 빛과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 거룩한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 우리가 받은 축복이 사명이니 기쁨으로 감당하자.”라고 설교 후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세미나 발제1은 장봉생 총회장이 ‘제110회기 정책총회의 방향성’이란 제목으로 “정책총회는 첫째, 정책이 있는 총회이며 둘째, 정책 시스템이 작동하는 총회이다. 그래서 셋째, 정책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총회 일에 나섰으면 좋겠다.”라고 발제했다. 발제2는 통합교단 전 사무총장 김보현 목사가 ‘예장통합 교단의 정책총회 방향성과 현황’이란 제목으로 “장로교에서 모든 목회자는 동등하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두 왕국 사상을 갖고 있다. 장로교는 대의제이다. 정책총회를 위해서는 신앙정체성에 근거한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 정책은 목표를 세우고 수단을 정하고 주체와 대상을 정해야 한다. 정책총회는 교회의 상황에 대해 노회를 통해 듣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 노회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교회, 노회의 의견을 총회 실무자들이 동의안으로 만들어야 한다. 총회의 정책은 노회가 실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발제3은 정책연구소장 노재경 목사가 ‘실현 가능한 정책총회 방향성 모색’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발제 전문이다. 들어가며 총회는 조직이다. 조직이 그의 정체성에 맞게 운영될 때 그 ‘조직은 살아 있다’고 한다. 이제 일반조직 이론을 참고하여, 현재 우리 총회를 나름대로 진단, 분석해 보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조직의 일반적 원리 조직의 일반적 원리는 다양한 이론가들의 논의를 통해 정립되어 왔으며,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 규범으로 이해된다. 첫째, 목표의 원리이다. 조직은 명확한 공동목표를 전제로 하며, 모든 활동은 목표 달성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전문화의 원리이다. 프레더릭 테일러가 강조했듯이 업무를 세분화하고 각 구성원이 전문적 역할을 수행할 때 효율성이 높아진다. 셋째, 권한과 책임의 일치 원리이다. 앙리 페이욜은 권한을 부여할 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넷째, 명령 통일의 원리로서, 구성원은 한 사람의 상급자로부터 지시를 받아야 혼란이 줄어든다. 다섯째, 계층제의 원리이다. 막스 베버가 설명한 바와 같이 위계 적구조는 권한의 흐름과 통제를 명확히 한다. 여섯째, 통솔범위의 원리이다. 한 관리자가 효과적으로 감독할 수 있는 부하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일곱째, 조정의 원리이다. 분화된 부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목표를 통합해야 한다. 여덟째, 균형의 원리이다. 중앙집권과 분권, 안정과 혁신 사이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조직의 일반 원리는 구조•권한•의사소통•통제를 합리적으로 설계하여 효율성과 효과성을 동시에 달성하려는데 그 핵심이 있다. 2. 조직(시스템)분석의 일반적 원칙 조직분석의 원칙은 조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기본 준칙을 의미한다. 첫째, 목적 지향성의 원칙이다. 조직은 일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 존재하므로, 분석은 반드시 공식적•비공식적 목표를 함께 파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표면적 목표와 실제 운영 목표가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체계성의 원칙이다. 조직은 상호의존적 요소로 구성된 개방체계이므로 구조·기능•인간관계 환경을 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는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의 일반체계이론이 강조한 관점과도 연결된다.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 맥락 속에서 이 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상황 적합성의 원칙이다. 조직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므로 기술•시장•정치•문화적 조건이 구조와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야 한다. 상황이론이 강조하듯 환경에 대한 적합성이 성과를 좌우한다. 넷째, 구조와 행태의 연계성 원칙이다. 공식적 규칙과 위계뿐 아니라 구성원의 동기·권력관계·비공식 네트워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는 엘튼 메이요 이후 인간 관계론이 제기한 시사점이다. 다섯째, 동태성의 원칙이다. 조직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므로 정태적 상태가 아니라 변화 과정과 학습 능력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객관성과 비교성의 원칙이 있다. 자료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유사 조직과 비교함으로써 특성과 문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조직의 구조·과정•성과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비영리 단체의 특성 정치적 행정조직이나 경제적 체제와 다른 비영리 단체가 있다. 비영리 단체는 이윤의 분배가 아니라 공익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설립•운영되는 조직으로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첫째, 목적(사명) 중심성이 핵심 특징이다. 수익 창출은 수단일 수 있으나, 그 성과는 구성원이나 설립자에게 배분되지 않고 조직의 사명 달성을 위해 재투자 된다. 둘째, 공익성과 사회적 가치 지향성이다. 비영리 단체는 사회문제 해결, 복지 증진, 교육•문화 발전 등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 셋째, 재원 조달의 특수성이다. 주된 재원은 회비, 후원금, 기부금, 보조금 등으로 구성되며, 시장에서의 판매 수익이 중심이 되는 영리 단체와 구별된다. 따라서 재정의 안정성과 투명성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넷째, 책임성과 신뢰성이다. 대중의 자발적 기부와 참여에 기반하므로 운영의 투명성과 윤리성이 조직의 존립에 직결된다. 다섯째, 자원봉사와 참여성이다. 많은 경우 자원봉사자가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작용하며, 민주적 의사결정과 참여적 운영이 강조된다. 여섯째, 성과 측정의 어려움이다. 이윤이라는 명확한 지표 대신 사회적 영향이나 공익적 효과를 평가해야 하므로 성과 측정이 복합적이다. 이처럼 비영리 단체는 공익성과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며, 사회적 책임과 투명성이 특히 강조되는 조직 형태라 할 수 있다. 4. 교회 조직의 특성 교회조직은 종교적 신앙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특수한 조직으로, 일반 영리• 비영리 조직과는 다른 독자적 성격을 지닌다. 첫째, 신앙과 사명 중심성이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복음 전파와 신앙 공동체로 교회의 형성에 있으며, 이는 조직 운영의 모든 기준이 된다. 둘째, 가치•규범 지향성이다. 교회는 성경과 교리에 근거한 윤리와 규범을 중심으로 조직이 유지된다. 따라서 효율성보다 신앙적 정당성과 영적 권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셋째, 이중적 구조성이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법적•행정적 조직의 성격을 지닌다. 예배, 교육, 선교와 같은 영적 기능과 재정•인사 시설 관리 등의 행정 기능이 함께 운영된다. 넷째, 자발적 참여성이다. 신도들의 헌신과 봉사, 현금이 주요 자원이 되며, 구성원은 신앙적 동기에 의해 참여한다. 다섯째, 권위 구조의 특수성이다. 목회자나 성직자의 영적 지도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교단에 따라 감독제·장로제•회중제 등 다양한 운영 형태가 나타난다. 여섯째, 공동체성 강조이다. 교회는 단순한 기능 조직이 아니라 신앙과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친교와 돌봄을 중시한다. 이처럼 교회조직은 신앙, 사명, 공동체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치지향적 조직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5. 각 조직을 움직이는 결정적 동인은 무엇인가? 조직 운영의 동인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핵심적 요인을 중심적으로 분석한다면, 정치 조직이나 정부 조직은 힘(법과 위계적 힘)에 의해 움직이고, 회사조직은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조직은 그 규모가 크더라도 쉽게 단순화하여 움직일 수 있다. 핵심 요인 하나를 중심으로 구조화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영리 조직은 사명과 기부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한 복잡한 구조를 가진 다. 교회 조직은 비영리 조직으로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영적, 실체적 공동체로서 그 움직이는 동인이 더욱 복잡하다. 그래서 때로 교회 안에서의 권위를 일반 권위와 혼동할 때 리더십이 위기를 겪기도 하기에 리더십 발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6. 각 교단 총회의 개략적 분석 1) PCA 모형 조직을 살펴보면 총회장은 총회 회의 의장으로서 총회 때만 회무를 주관하고, 평상시에 모든 일은 총무가 처리한다. 성책적인 일은 총회 전 관련 위원회가 모여 충분한 토의를 거치고 총회 때는 거수로 결정한다. 2) 통합교단 모형 사무총장 중심의 행정 체제를 갖추고 있으나 총회임원회 및 각 위원회가 분배된 권한을 가지고 인사 문제 등 중요사항을 결정하는 구조이다. 즉 총회장, 위원회, 사무총장의 협업 체제로 볼 수 있다. 전체 총대 구성을 남녀 할당제를 시행하고 있는 특성을 가진다. 7. 대한예수교 장로총회(합동) 조직의 특성과 평가 1) 리더십: 명실상부한 총회장 중심의 '원 포인트 톱 리더십' 체제이다. 합동 총회의 리더십은 총회장에게 힘과 권한이 막강하게 실린 강력한 '원 포인트 리더십'이다.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한정되는 단기간이다.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점은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총회를 막강하게 통솔하여 강력한 힘과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더십이 잘못 발휘될 때 그 영향력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돌은 이'로서 좋은 참모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안고 있다. 이것은 리더십 발달 이론에서 카리스마형에 가까운 것으로 리더의 개인 자질에 따라 총회의 성격이 결정될 수 있다. 2) 조직(체제 system) 형태 분석 총회 조직의 형태 특성은 2중 매트릭스 구조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직무 이상을 맡는 것이 매트릭스 구조이다. 이 구조는 상당한 전문가들이 감당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구조 속에 있다면 그 일들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다. 이 매트릭스 구조는 상비부나 위원회 등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총회본부 직원에게도 해당된다. 한 직원이 여러 가지 일을 맡게 되므로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업무를 치러 내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결론적으로 직무 관점에서 총회 구조 형태는 2중 매트릭스 구조로 심도 있는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한계를 가진다. 책임성이 불명확하고 업무 범위에 대한 인식도 혼잡하다. 이러한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면 탁월한 전문가가 의사결정 그룹과 실행 그룹에 동시에 배치되어야 하는 데 쉬운 일은 아니다. 3) 동태 분석: 정치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큐빅 시스템〉 총회가 움직일 때는 직무의 다면성을 가진 2중 매트릭스 구조이지만, '정치'가 또 다른 요인으로 작동하게 될 때 입체적 ‘큐빅 체제’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은 극히 드문 형태로 사회에서는 거의 활용되고 있지 않지만, 초대형 글로벌기업에 서는 아주 탁월한 전문가가 해외 사업을 펼쳐 나갈 때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가 없는 경우 방향성과 목적성이 없이 시간축만 따라가는 일만 하고 말게 된다. 종합적으로 총회 조직을 평가한다면 직무처리를 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으 로 만든 조직이라기보다는 여러 외부적 상황과 요인에 따라 대응체제로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단적인 예가 의사결정과 행정 그룹의 직무에 대한 혼돈을 들 수 있다. 4) 행정체계의 분석 현재 총회 총무는 3년 연임제이다. 총회 일은 1년을 한 단위로 돌아간다. 일 년 동안에 업무를 파악하기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3년이 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제 겨우 총회를 알 것 같다며 연임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단점을 없애고자 5년 단임도 시행했으나 이것 또한 한 번에 그치고 말았다. 총회 발전을 위한 사무총장제도를 도입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총회의 규모가 크고 매우 복잡한 사실이다. 일을 계속성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체제 정착이 필요하다. 5) 총회의 정책 흐름 분석 총회 정책의 발의는 노회의 현의와 상비부와 위원회의 청원을 통하여 된다. 총회에 상정된 정책은 그 성격에 따라 상비부에 배정되거나 대부분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맡기게 된다. 문제는 정책 해결을 위한 관리 체계이다. 상비부나 상설위원회로 간 정책은 연구를 통하여 다음 회기 총회에 보고된다. 그러나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임한 건은 위원회가 폐지되면 함께 소실되고 만다. 정책 의제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된 정책은 계속 단기적 생성 소멸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위원회가 계속 부침하고, 늘어나는 것이다. 정책은 단기적 처방에 그치고 심도 있는 정책개 발과 운영은 약하다. 6) 현 총회 체제에 대한 평가 첫째, 젊은 세대의 동공화 현상내지 세대 단절현상이다. 총회 조직을 들여다보면 젊은 세대가 매우 미미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 개발이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리더십 승계를 위해 반드시 젊은 세대가 참여하게 해야 한다. 둘째, 정책이 지속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관리되지 않는 정책은 유명무실할 뿐이다. 셋째, 정책 어젠다가 약화되어 있고 정치 중심적인 경향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지 정치와 정책은 병행된다. 문제는 상황에 맞는 균형성이다. 총회는 이러한 균형성을 상실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정치중심의 색채를 띤다는 것이다. 넷째, 리더십의 평균 연령이 높고, 젊은 사람들의 참여가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책임성이 명확하지 않아 문제 해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거대 총회'로 발전한 총회는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몸집이 커졌으면 거기에 맞는 옷을 새로 입어야 한다. 총회는 자기에게 걸맞은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 8. <미래적 총회 시스템>은 현대적 도전 과제들을 고려하는 구조여야 한다. 1) 총회적 메타 스킬(분석 비판적 사고능력, 학습능력, 협업능력, 팀워크)과 통합적 사고 능력으로 질문력과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2) 인류가 가장 크게 직면할 문제인 AI의 도전을 극복하여 대안을 만들어 내는 체제여야 한다. '인간지능' VS '인공지능'을 '인간지능' and '인공지능'으로 만들어 내는 구조여야 한다. 지금 AI 앱인 몰트북에서는 인공지능이 자기들끼리 암호화한 종교를 만들자는 얘기를 주고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대하여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지능의 가소성을 무기로 새로운 비전을 창조적으로 제시해 나갈 때 AI는 교회의 사명을 깨우는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3) 다문화 다층적 구조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교회 생태계는 급변하고 있다. 기술문명의 도전뿐 아니라 다문화 가정 증가와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 문화 생태계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4) 급격한 메가 트렌드 시대, 초가속도 시대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상상 할 수 있는 것은 다 만들 수 있다는 과학의 명제가 활개를 치는 시대이다. 모든 상상력은 창조성이고 시도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흐름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5) 세계주의 내지 직접 민주주의를 함의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은 세상을 맞춤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대중'으로 취급되지 않고 존귀한 한 사람으로 양육할 필요가 있다. 6) 코호트 구조를 이해하고 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알파 세대에서 Z세대 까지 있다. 그들은 다른 가치관과 생활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과 연결되고 포용하는 체제 개발이 필요하다. 7) 청년과 다음 세대가 떠난 미래 교회를 다시 젊은 교회로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 떠날수록 교회 약화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70세 넘으신 분들이 임원을 다 할 수밖에 없다면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정책총회는 다음 세대와 청년 및 3040세대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구조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령별 '쿼트제' 도입과 활용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8) 조직 무용론을 극복해야 한다. '총회가 왜 필요해?'라는 소리가 사라지게 해야 한다. 세상에서 교회조직만큼 강력할 수 있는 조직은 없다. 〈정책총회〉는 조직을 확고하게 변혁시켜야 할 것이다. 9. 실현 가능한 〈정책총회〉 방향성 모색 상기 기술한 내용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책총회》 방향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1) 최근 정부 행정기관이나 연구원의 정책 개발 방향은 행정그룹과 전문가 그룹 및 시민 참여단이나 숙의단, 시민 혁신위원회까지 참여하는 '거버넌스 체제'이다. 〈정책총회〉의 방향성은 이러한 거버넌스를 포함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2) 실효적이고 살아 있는 총회 정책은 사용자이며 수요자인 교회와 성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책 성과 판단자는 교회이며, 성도이다. 이들이 함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제 개발이 되어야 한다. 10. 거버넌스란? 거버넌스(governance)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시정•시민사회 등 다양한 행위자가 함께 공공문제를 해결하는 협력적•네트워크형 관리 체계 및 의사결정 구조를 의미한다. 전통적 '거버먼트(government)'가 위계적 명령과 통제를 중심으로 했다면, 거버넌스는 참여•협력•조정을 중시한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다원화 속에서 단일 주체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에서 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정부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기업, 전문가, 시민단체와 협의체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을 확대하고 있다. 국제 차원에서는 국제연합이 국가•NGO•기업과 협력하여 환경, 인권, 개발 문제를 다루는 것이 글로벌 거버넌스의 사례이다. 거버넌스의 운영방식은 첫째, 다원적 참여 구조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정책 형성과 집행에 참여한다. 둘째, 네트워크 운영이다. 상하 명령 체계보다 협의 파트너십•공동책임이 강조된다. 셋째, 분권과 권한 공유이다.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정부나 민간에 이양하여 현장 대응성을 높인다. 넷째, 투명성과 책임성 확보이다. 정보 공개와 성과 평가를 통해 신뢰를 구축한다. 요컨대 거버넌스는 많은 구성원의 참여를 통하여 통치의 주체를 확장하고, 협력과 조정을 통해 공공가치를 창출하려는 현대적 운영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11. 정치와 정책의 병행 구조: 〈세대 통합 정책총회(노회/교회) 거버넌스 모형〉 1) 현재 총회 총대 구조 구성과 정치적 역할은 그대로 둔다. 2) 〈(가칭)세대통합 정책총회 거버넌스〉를 각 단위마다 총회장/ 노회장/ 당회장 산하에 별도로 만든다. 3) 역할은 총회, 노회, 교회의 정책 개발, 진행, 평가, 관리, 재적용이다. 4) 인적 구성은 예를 들면 남녀 간 각각 연령별 쿼터제를 실시하여 구성한다. 예를 들면 1020세대 20%, 30세대 20%, 40세대 20%, 50세대 20%, 60세대이상 20% 등으로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비율을 고민할 수도 있다. 연령별 쿼터제는 교회 상황이나 지역 상황에 따라 조정하되, 핵심은 모든 연령과 세대가 소외됨이 없이 함께 〈정책운용〉에 참여하는 것이다. 각 협의회나 속회도 리더십 확보를 위한 대안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12. 〈세대 통합 정책총회 거버넌스〉의 역할 1) 정책 발의 및 회기 중 과정 및 진단 평가 단위당 최고 지도자에게 보고 2) 매년 8월 초 최종 평가 3) 8월 중 자체 진단 평가 및 정책 관련 헌의안을 속의 권고안 작성, 총회 청원 4) 〈정책총회〉 행정 진행을 위하여 총회본부 행정 시스템의 정책적 기능보완 [결론 및 제언] 미래학자들은 인류가 특이점에 도달하는 연도를 2035년에서 5년을 앞당겨 2030 년으로 잡고 있다. 그만큼 기술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5년은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총회도 이 5년을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충실히 대비해야 한다. 이에 하나의 제안으로 〈세대 통합형 정책총회 거버넌스〉 이행을 위한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책 운영위 중심(각 위원장, 주요 위원 포함)의 〈(가칭)세대통합 정책총회 거버넌스 구축 위원회〉 구성 2. 설문조사 및 평가 : 지금까지 〈정책총회〉 진행상황에 대한 설문지를 통해 의견 수렴 3. 총회, 노회, 교회, 협의회, 속회 및 총회 산하 각 기관서 〈거버넌스 파일럿 실행 및 평가〉와 정책연구소 전문가 세미나를 통한 시스템 연합 설계 4. 최종 시스템 공유, 평가 및 제안 5. 111회 총회 헌의를 통한 제도화 : 총회 규정에 명문화함으로 지속 가능성 확보 위의 기술은 논문이 아닌, 관련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총회〉를 위한 한 모색이다. 총회는 현재 세계적으로 몰려오고 있는 위기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선재적 대응이 필요하다. 3부 정책협의회 전체회의는 장봉생 총회장의 사회로 각 부서 보고 후 한수환 목사가 기도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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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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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원 목사3】 IMF 풍랑 속에서 선교
- IMF 풍랑 속에서 선교 1997년에 한국에 IMF의 풍랑의 파도가 덮쳤다. 갑자기 다가오는 풍랑의 파도에 국민 모두가 힘들었다. 이 파도가 교회에도 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들이 선교사 파송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선교사들에게 후원하는 후원금이 줄어들거나 후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을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금 모으기 운동으로 어린아이들의 돌잔치에 마련했던 금반지를 비롯한 귀한 것들을 내어 놓으면서 국민들이 힘을 모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교회들도 일부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미루거나 후원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교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을 중단하지 않고 우선으로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도 1997년에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그 해 9월에 답사를 요청하였다. 9월에 몽골에 처음으로 방문하여 몽골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교회에 보고하여 우리 가정을 몽골의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교회가 결정하였다. 우리 가정을 몽골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그 다음 주에 IMF가 발생하였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파송을 연기하자는 의견과 파송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그 다음해인 1998년 2월에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몽골에 선교사로 나아가는 목표는 한국에서 만났던 몽골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다. 당시에 한국에서 많은 몽골인들이 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이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교회의 섬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 한국에 출석했던 필리핀 성도들이 필리핀에 돌아간 이후에 이들을 방문해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후에 결심하게 되었다. "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막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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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교육부 주관,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 개최
- 총회 교육부(부장 이경조 목사)가 주관한 총회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가 3월 4일 오후 2시 총회회관 5층에서 열려 주일학교 예배가 어려운 교회를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주일학교 대상 아동은 있으나 인력 부족으로 주일학교 운영이 어려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교회 중심 e-주일학교의 운영 방향을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위함이다. 이경조 교육부장의 환영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총회장님과 총회 임원 여러분, 노회장님들과 교육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총회 교육부장으로서 e-주일학교 추진을 위한 뜻깊은 공청회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시스템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다음세대를 어떻게 말씀 위에 바로 세울 것인가, 그리고 교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마련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한국교회는 인력과 재정의 한계,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사역의 약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e-주일학교는 교회 중심의 예배를 지키면서도 현장을 돕는 실질적인 지원 체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는 이 사역이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각 교회에서 실제로 적용 가능한 구조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플랫폼 구축, 보안 문제, 노회 협력, 현장 지원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될 때 비로소 다음세대 사역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총회-노회-개교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건강한 협력 모델이 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교육부는 이 길을 끝까지 책임 있게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논의 위에 지혜를 더하시고, e-주일학교가 우리 교단 다음세대를 세우는 든든한 기초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인도로 회계 임계빈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시 78: 70~72을 봉독, 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다윗처럼’이란 제목으로 “다윗처럼 손의 능숙함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축사 총회자립개발원 이사장 박윤성 목사가 “기성세대는 다음세대를 멀리 날아가는 활로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 기관도 다음세대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라고, 전국주일학교연합회장 김충길 장로가 “총회가 다음세대를 위해 걱정하고 방법을 찾아주는 것에 감사하다. 주일학교를 살리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한다.”라고, 총회교육개발원 홍승영 목사가 “총회 하나바이블이 좋은 호평을 받고 있다. 온라인과 잘 연계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후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공청회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사회로 발제1은 안기성 교수(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가 ‘온라인 주일학교의 실천신학적 의미와 실천방안’이란 제목으로 “사회보다 교회의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르다. 또한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주일학교의 감소는 교회와 총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를 준다. 미자립교회 주일학교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주일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주일학교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교역자 수급도 쉽지 않다. 총회 차원에서 교회 교육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 총회가 주일학교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노회 차원에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일에 사용할 수 있는 주일학교 예배를 총회가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총신대에서도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해야한다.”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첫째, 총회 교육부 내에 ‘미래자립교회 교육지원 상설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뒷받침할 예산을 최우선순위로 배정해야 한다. 다음 세대 교육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예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죽어가는 주일학교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연계하여 ‘교회교육 전문 평생교육사’ 자격 과정을 신설하고, 헌법 및 규칙을 개정하여 이들의 사역 범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평신도를 깨우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그들에게 합당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동역자로 세워야 한다. 셋째, 전국 노회와 협력하여 주일학교 미운영 교회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온라인 교육 송출 시스템을 조속히 가동해야 한다. 데이터 없는 정책은 실패한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선행하고, 가장 시급한 곳부터 디지털 복 음을 송출해야 한다.” 발제2는 김수환 교수(총신대 기독교 교육•컴퓨터&AI)가 ‘안심하고 맡기는 플랫폼: 데이터 보안과 지교회 보호’란 제목으로 “교회 교육-가정 교육-개인 생활-교회 교육으로 이어지는 교회학교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 필드의 의견을 반영해 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시스템은 AI가 포함된 온라인으로 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지식의 전파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정보 보호 기능이 강화되어 있기에 교회에서 교인들의 개인정보를 사용하는데 매우 조심해야 한다. 교육은 오랜 기간 투자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이며, 본질은 영혼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온라인 주일학교를 통하여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발제3은 김종석 목사(은석교회)가 ‘노회 IT 헬프데스크 운영안 : 큰 교회 청년부와 작은 교회의 영적 연대’란 제목으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는 총회-노회-대형교회-소형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 협력하여 다음세대를 세우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시대 속에서 구현해야 할 전우주적 교회의 실천 모델이다. 온라인 플랫폼이라는 기술적 특성 때문에 IT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며, 이는 총회 차원의 IT 헬프데스크 운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동시에 노회 e-주일학교 헬프데스크는 교육적 전문성을 갖춘 관리교사와 수업교사를 확보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총회 e-주일학교는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 총회 e-주일학교는 소형교회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서로의 강점을 나누며 영적 연대를 이루는 장이 되어야 한다. 대형교회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소형교회는 지역사회와의 밀착성을 통해 복음의 현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노회는 두 교회를 연결하는 허브(Hub)가 되어야 하고, 총회는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 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낸다. 또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히 주일교육에 머물지 않고, e-성경학교, 온라인 캠프, 노회대회 준비반, 글로벌 선교 교육 등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녹화 콘텐츠는 온라인 도서관으로 발전하여 교사교육과 장년교육까지 포괄할 수 있으며, 실시간 수업은 국내외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가진 교육 역량을 세계 선교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총회 e-주일학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다음세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한국교회 교육의 미래를 재구성하는 장기적 전략이다. 기술적 기반과 교육적 기반이 균형을 이루고, 총회-노회 교회가 지속적으로 협력할 때,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을 넘어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결국 총회 e-주일학교의 성공은 시스템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총회와 노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상호 협력, 그리고 교사와 간사들의 헌신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총회 e-주일학교는 주의 몸된 교회의 하나 됨을 실천하는 역사적 교육 사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 사역은 단지 한 세대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다음세대를 향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래지향적 모델이며, 교회가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연합하고 협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한 다음 세대 교육의 실천적 선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제4는 나현규 목사(총회교육전도국장)가 ‘왜 e-주일학교인가? 교단적 명분과 시대적 소명’ 이란 제목으로 “본 연구는 수축사회라는 거시적 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 주일학교가 직면한 교육 양극화의 실태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e-주일학교' 모델을 제안하였다. 앞서 확인한 통계적 실상은 참담했다. 주일학교 운영이 불가능한 교회가 급증하고 있으며, 현장 목회자의 약 절반(47~51%)이 거점형 교육 위탁 의사를 밝힐 만큼 현장은 절박하다. 지금 현장에 필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을 인격적 소외의 도구가 아닌, 신앙 전수의 '매개적·보조적·관계적' 수단으로 재정립하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를 토대로 한 실행 가능한 추진 안이다. 따라서 총회가 콘텐츠를 공급하고 노회가 IT 인프라를 책임지는 '협력적 행정 구조'와 2027년 1월 전면 시행을 향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한 시스템 도입 이 아니라, 교단의 공적 책임을 다하는 '서번트 행정'의 실천적 고백이다. 본 사역이 단기적인 이벤트를 넘어 한국 교회 교육의 근간을 바꾸는 '디지털 공공재'로 자리 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제언을 남기고자 한다. 첫째, 노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e-주일학교의 성패는 하드웨어를 보급하고 현장의 IT 헬프데스크 역할을 수행할 노회의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는 지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장비 나눔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소속 교회들이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현장 밀착형 행정'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튜터(교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교사는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 조력자(High-Touch)'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총회는 튜터들이 기술적 부담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 하는 일에 모든 행정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셋째, 지속 가능한 자원 순환 모델의 정착이다. 예산의 논리를 넘어, 대형 교회의 유휴 자원을 작은 교회로 흘려보내는 '성경적 나눔'이 e-주일학교 플랫폼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는 재정적 격차를 신앙 공동체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한국 교회 교육의 새로운 상생 모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수축사회의 파고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 등불이 꺼져가고 있을지 모른다. e-주일학교는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총회와 노회가 함께 기름을 붓고 불꽃을 지키는 '거룩한 공조'이다. 디지털이라는 차가운 통로에 우리의 뜨거운 복음과 인격적인 사랑을 실어 보낼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비전의 세대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질의응답 및 현장 의견 수렴 시간을 갖고, 종합 정리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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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2-13 11:17
110회기 총회신학부, 1차 서울지역 세미나 및 신학포럼
110회기 총회신학부(부장 윤삼중 목사) 지역별 세미나 및 신학포럼이 1차 서울·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2월 13일 오전 10시 상도제일교회(조성민 목사 시무)에서 ‘성경과 장로회 헌법에 입각한 개혁신학의 목회적 적용’이란 주제로 열렸다. 다음은 신학부장 윤삼중 목사의 인사말 전문이다. 말씀 안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를 할렐루야!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새 생명이 태동하는 봄의 길목에서 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동역자 여러분 위에 성삼위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2026년이라는 엄중한 시대적 파고 앞에 서 있습니다. 국가적 사회적 격랑 속에서 세상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으며, 교회를 향한 도전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졌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곧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시대의 유행을 좇기보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 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제 110회기 총회 신학부는 총회 산하 12,000여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한 시대적 소명감을 가지고 지역별 신학세미나 및 신학포럼을 개최합니다. 이번 포럼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닙니다. 첫째, 무너져가는 교회론의 성벽을 재건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점점 혼탁해지는 신학적 정체성 위기 속에서, 우리 교단의 뿌리인 개혁주의 교회론을 다시 견고히 세워 세상을 향해 당당히 도전하는 지도자로 세워드릴 것입니다. 둘째, 목회 현장을 사수할 실제적인 영적 무기를 제공할 것입니다. 현장의 치열한 고민을 담아 세워진 강사진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할 생생하고 역동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개혁 교회의 역사적 가치와 성경적 원리가 어떻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실마리를 공유할 것입니다. 셋째, 12,000여 교회가 하나로 묶이는 공존과 소통의 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번 세미나 및 포럼을 통해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동일한 신학적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강력한 영적 네트워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자리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한 신학부 임원들과 총회 교육전도국 관계자, 장소를 제공해주신 모든 지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자리는 한국교회의 내일을 결정지을 골든타임 입니다. 사명의 현장을 지키느라 고단한 여러분의 발걸음을 이 은혜의 자리로 옮겨주십시오. 그곳에서 다시 일어설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부 예배는 신학부 서기 이종구 목사의 인도로 신학부 회계 이정화 목사가 기도, 신학부 총무 박인식 목사가 롬 12:1-2을 봉독했다. 장봉생 총회장이 ‘분별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계속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지성의 영역이 믿음을 표현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을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상도제일교회 조성민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세미나는 신학부 서기 임종구 목사의 사회로 신학정체성위원회 회계 박인성 목사가 기도 후 진행했다. 1강은 김길성 총신대 명예교수가 ‘개혁교회의 나아갈 방향’이란 제목으로 “책임 있는 다음 세대 지도자들의 육성에 힘쓰자. 개혁주의 세계관에 충실한 인물들을 양육하자. 역사적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자.”라며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를 위해 쉬운 우리말로 작성된 신학정체성 선언문을 활성화 하자. 우리 교회의 표준문서인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강의했다. 2강은 신학부장 윤삼중 목사가 ‘하나님 나라와 교회 연관성 연구’란 제목으로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깃발은 구원론이었다면 21세기 종교개혁의 깃발은 교회론이다. 올바른 교회관이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각 교회마다 진통을 겪고 있으며,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 되는 올바른 교회관을 정립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없는 교회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맛을 잃어버린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교회로 하여금 권태감에 빠지지 않도록 생기를 불어넣어 줄 뿐만 세속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소망과 기대감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둘째,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서 조화와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며, 결국엔 교회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의 사역은 항상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상호보완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모이는 교회관과 흩어지는 교회관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화석화되어가고 있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도성, 즉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과 목표가 없으니 세상 속에 들어가서 종이 호랑이가 되며, 세상속에서 벙어리가 된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공의에서 조화와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잔인하며, 덕을 세울 수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공의가 없는 사랑은 무기력하며, 방향성을 잃어버린 배와 같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는 한 짝이 되어 함께 동행하며, 주안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교회의 두 기둥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제자도가 무너진 교회는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 결국에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기 소원성취를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며, 또 다른 우상숭배가 되는 변질된 신앙생활이 될 것이다.”라고 강의했다. 3강은 이상원 전 총신대 교수가 ‘챗 GPT와 설교’란 제목으로 “설교 시에 챗GPT를 사용하는 문제는 설교의 독특성과 챗GPT가 지닌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극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설교자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다. 영혼과 육체라는 실체를 가진 인격체, 구원을 받은 실체적 경험, 하나님의 생활지침을 수행한 실체적 경험, 교회의 위임 등이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챗GPT는 영혼과 육체가 없는 전류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구원의 경험도 전무하고, 윤리적 실천 경험도 전무하며, 교회의 위임도 받은 적이 없으므로 챗GPT가 작성한 설교는 페이크에 불과하다. 페이크 설교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설교자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며, 이 설교자의 설교는 영혼에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성령을 분노하게 만든다. 모든 교인들에게 열려 있는 챗GPT의 설교안은 모든 교인들이 언제든지 확인대조할 수 있으며 설교자의 설교안이 챗GPT가 작성한 것임을 교인들이 파악하는 순간 목회자의 생명은 순식간에 끝난다. 설교자가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점검하기 위한 도구로 챗GPT를 이용할 수는 있으나 종교적 신학적 분별력이 없는 챗GPT의 신학적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중대한 혼란 속에 빠질 우려가 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답변하는 챗GPT의 특성상 거짓 정보가 참된 정보로 둔갑할 우려가 있고, 이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자의 본연의 직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라고 강의했다. 강의 후 질의 응답 시간을 갖고, 인근 식당으로 옮겨 애찬을 나눴다. 지역별 일정 1차 서울지역-2월 13일(금) 10:00 상도제일교회(조성민 목사 시무) 2차 강원지역-3월 6일(금) 10:00 원주중부교회(김미열 목사 시무) 3차 영남지역-3월 26일(목) 10:00 덕천제일교회(김대환 목사 시무) 4차 호남지역-4월 21일(화) 10:00 정읍성광교회(김기철 목사 시무) 5차 신학포럼-5월 28일(목) 10:00 개포동교회(이풍인 목사 시무) -
김병중(Th.D) 02-08 18:48
천안중부교인들, 장봉생총회장·서대문교회 앞 2차 시위
천안중부교회의 합법적 담임목사인 김종천 목사 측 장로와 성도들이 2월 8일 장봉생 총회장이 시무하는 서대문교회를 찾아 2차 시위를 했다. 이들은 총회장이 주관·묵인한 성탄절 불법 위임식에 대해 공식 사과와 위임식 무효화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진행했다. 이날 시위 현장에는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성도들이 산타 복장을 하고 피켓을 들었다는 것이다. 피켓에는 “불법 위임식 무효화하라” “제명·출교자의 위임은 헌법 위반” “총회 결의로 불법 덮지 말라”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작년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불법 임직식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며 “오늘 우리가 산타 복장을 하고 시위하는 것은 그 기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면서, “기적은 불법 위에 세워질 수 없고, 교회의 거룩함은 침묵이 아니라 진실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했다. 이번 평화시위는 조용히 진행되었으며, 참여자들은 끝까지 질서와 품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분명했다. 불법은 사라져야 하며, 총회는 책임 있는 사과와 시정 조치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회장과 일부 임원들이 불법 위임식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일으켰다면, 오늘 산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크리스마스다운 방식으로 정의와 진실을 세상에 다시 알리고 있었다. -
김병중(Th.D) 02-05 19:15
총회정책연구소 노재경 소장, 총신대 박성규 총장과 목회자 재교육논의
총회정책연구소(이사장:신용기 목사) 소장 노재경 목사가 2월 5일 오후 3시 30분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을 총장실에서 만나 위촉장을 전달하고 목회자 재교육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했다. 총회정책연구소는 지난 1월 19일 총회회관에서 연구소 자문위원과 상임연구원 위촉식을 거행했다. 자문위원: 총신대 칼빈대 대신대 광신대 총장 상임연구원: 신국원 양현표 손병덕 안인섭 김덕현 김찬영 김주원 김희석 박재은 유은희 김수환 배춘섭 교수, 윤영민 이풍인 권준호 정충길 마상욱 안철현 김병수 이정현 최광영 목사 노재경 소장은 총신대학 박성규 총장을 시작으로 차례로 칼빈대와 대신대, 광신대 총장을 찾아 면담할 계획이다. 노재경 소장은 작년 12월 16일 대전중부교회(조상용 목사)에서 모인 임원회와 전체 이사회에서 “전 세계 개혁주의 교단들 가운데 교단 차원에서 정책을 연구하는 곳은 우리 교단이 유일하다”라면서, “교단과 교회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 현장성 있는 사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고, “연구 결과물 역시 이론 위주가 아니라, 교회 현장에서 당장 집행할 수 있는 연구가 되도록 주문하겠다”라고 계획을 말했다. 노재경 소장은 지난 1월 기독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책 개발에 있어 크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 첫째는 실제성. 허공을 치는 정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행가능한 정책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정책 개발의 주목적이 교회를 살리는 것인 만큼, 목회 현장에서 실천가능한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총회정책연구소 이사회가 최근 임명한 상임연구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현장 목회자인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는 개방성이다. 탑다운(Top-down) 방식이 아니라, 바텀업(Bottom-up)을 추구하며, 정책 개발 ‘파이프라인’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탁월한 리더 한 사람에 의해 정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110회기 ‘함께 하는 정책총회’는 시의적절하고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비전”이라며, “열린 자세로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부터 어르신들의 목소리까지 경청하고, 정책 개발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걸음으로 노재경 소장은 자문위원 총장들의 제안을 듣고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노재경 소장: 목회자 재교육에 대한 총장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박성규 총장: 교육은 수혜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담임목회 3-5년 후, 코로나 이후, 목회 15년 차, 은퇴를 앞둔 경우 등 시기와 상황별로 목회에 어려움이 있다. 이 시기에 맞게 영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첫째, 멘토링이 필요하다. 목회자 재교육 과목에서 모든 것을 물을 수 있는 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등 은퇴를 앞둔 목회자들을 통해서 목회에 관해 묻고 듣는 멘토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 학기, 학점 은행제, 평생교육원, 계약학과 등 목회자들이 재수업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학위를 받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설교에 대한 도움도 필요하다. 저만해도 부전교회 부임해서 몇 년이 지나서야 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담임목사가 부임한 교회에서 자기의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교회법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당회, 공동의회 운영에 대해, 재정, 조직관리 등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실수가 생기면 목회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AI(인공지능)의 사용과 분별이 필요하며, 청중의 다양한 필요에 대해 깊이 있는 응답이 필요하다. 여섯째, 인문학적인 역량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부족하면 남의 것을 베끼거나 어설프게 할 수 있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으면 핵심을 모르고, 요약하거나 논지를 잡아낼 수 없다. 책 읽기와 글쓰기 지도가 절실하다고 본다. 노재경 소장: 목회자 재교육 건에 대해 상시 소통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박성규 총장: 위와 연관된 사항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총회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 총회 인력 풀을 찾아보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총신 교수 중에서도 가교 역할을 잘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 노재경 소장: 끝으로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박성규 총장: 이 시대를 분별하고 개혁신학을 목회에 녹여낼 수 있는 융합적이며 통전적인 리더를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교회와 교단이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분들을 위해 온라인 교육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였다. 목회자 재교육 때에도 불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학기 중 한 번이라도 뜨거운 부흥회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화란 교회는 5년마다 의무적으로 목회자 재교육을 한다. 내용이 알차면 총회 소속 목회자들이 환영할 것으로 생각한다. 노재경 소장: 긴 시간 귀한 제안과 말씀 감사하다. 박성규 총장: 총회 정책 수립과 실천을 위한 수고에 감사드린다. -
김병중(Th.D) 02-01 14:08
북일교회, 장봉생총회장 서대문교회 앞 평화시위
교회 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북일교회 이 진 담임목사 측 교인들 80여명은 2월 1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장봉생 총회장이 시무하는 서대문교회를 찾아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이들은 사법적으로 이진 목사가 담임목사임을 인정받았으나 북일교회가 속한 이리노회가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불법 행정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북일교회 교인들은 총회 임원회가 '정치적 조정'이 아닌 '객관적 감사'를 시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감사부 조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끝으로 그들은 즉각 이진 목사에 대한 '대표자 증명서'를 발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교인들은 평화적으로 시위했으며 충돌은 없었다. 또한 북일교회 비상대책위원회들이 교회 로비에서 장봉생 총회장을 만나 대화했으으나 총회장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북일교회는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 계속해서 올라와 시위할 계획이다. 또한 총회서기 김용대 목사가 시무하는 영광대교회 앞에서도 시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 서기는 이리노회 감사 촉구 서류를 감사부로 즉시 이첩하지 않고 지연시킨 의혹을 받고 있다. 다음은 북일교회 교인들의 호소문 전문이다. 총회장님과 서대문교회 성도님께 드리는 간곡한 호소문 "우리는 정치적 화해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와 법에 따른 조사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서대문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총회 임원 여러분 저희는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이리노회 북일교회 성도들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추위 속에서도 저희가 이곳까지 달려온 이유는, 지난 2년간 저희 교회가 겪어온 피눈물 나는 사태를 알리고 총회의 공의로운 결단을 간청하기 위함입니다. 1. 사법부는 이미 '이진 목사님의 정당성'을 수차례 확인했습니다. • 서울중앙지법과 전주지법 군산지원은 이리노회의 직무정지, 면직, 출교 판결이 모두 중대한 절차적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 또한, 이진 목사님이 북일교회의 정당한 당회장임을 법적으로 명확히 판시 하였습니다. "이리노회 임원임사부가 한 이 사건 이리노회 직무정지결의 및 당회장 파송 결의는 그 하자가 중대 · 명백하고 현저히 정의관념에 반하여 무효라고 봄이 타당하므로, 채권자 이진은 여전히 채권자 교회의 당회장의 지위에 있다고 판단된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2024카합 10055 결정" 2. 그러나 이리노회는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불법 행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이리노회는 헌법에도 없는 '본당 폐쇄' 명령을 내려 성도들의 예배권을 침해 했습니다. • 자격 없는 자의 고소를 접수하고, 적법한 절차 없이 담임목사님을 현장 기소 하는 등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3. 총회 임원회는 '정치적 조정'이 아닌 '객관적 감사'를 시행해 주십시오. • 저희는 이미 두 차례나 이리노회의 위법 행위에 대해 감사부 조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 총회 임원회는 불법을 덮으려는 '화해 조정'을 중단하고, 즉시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실관계를 명백히 밝혀주십시오. 4. 장봉생 종회장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 북일교회 280명 성도는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정당한 당회장권을 보장하기 위해 즉각 '대표자 증명서'를 발급해 주시고, 무너진 교단 헌법 질서를 바로 세워주십시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가 법과 원칙 안에서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저희 북일교회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공의로운 총회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2026년 2월 1일 이리노회 북일교회 비상대책위원회 및 성도 280명 일동 이리노회 북일교회 사태 관련 총회 임원회 소환에 대한 불참 통보 및 감사 촉구의 건 수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 110회 총회장 및 임원회 참 조: 총회 서기 발 신: 이리노회 북일교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임종무 외 성도 280명 1. 귀 총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북일교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리노회의 중대한 행정 및 재판 절차 위반 사례에 대하여 이미 두 차례나 감사부의 철저한 감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총회 서기 측은 해당 서류를 감사부로 즉시 이첩하지 않고 지연시켜 왔으며, 이제 와서 본질인 '이리 노회의 불법성 조사'가 아닌 '양측 화해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2월 5일 소환을 통보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3. 본 비상대책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2월 5일 임원회 소집에 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첫째, 화해 조정은 '불법을 덮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합니다.현재 총회 특별재판국의 판결과 이리노회의 권징과 행정 조치의 불법성은 이미 사회법정(서울중앙지법,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의해 수차례 무효임이 판시되었습니다. 불법이 명백히 드러난 상황에서 총회가 이진 목사의 대표자 증명을 내주지 않고, 이리노회가 불법을 시정하지 않고, 무작정 화해 조정을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노회와 총회 일부 인사들의 과오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정의 핵심은 '노회의 불법성'이지 '교인 간의 갈등'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출한 진정서는 이리노회가 자격 없는 자의 고소를 접수하여 정당한 목회자에게 불법적으로 계속해서 위해를 가하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 없었고 있어서는 안 되는 예배당에 대한 폐쇄 명령을 내리는 등 노회의 위법한 행정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단순히 '양측의 말을 듣고 조정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처사입니다. 셋째, 감사가 가장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총회 임원회가 진정으로 교회를 살리고자 한다면, 불필요한 소환과 조정을 중단하고 즉시 감사부에 서류를 넘겨 감사를 시행하게 하십시오. 무엇이 두려워 감사를 피하고 자꾸만 '화해'라는 이름으로 직접 개입하려 합니까?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만이 이 사태를 종결짓는 유일한 길입니다. 4. 우리의 요구 사항 • 총회 임원회는 북일교회 사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를 즉각 중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 접수된 진정서 및 감사 요청 건을 절차에 따라 즉시 감사부로 이첩하여, 법과 원칙에 따른 객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 총회는 ‘정책총회’라는 슬로건에 맞게 행정 절차를 불법화 하지 말고, 성도들의 정당한 권리인 감사 요청을 법대로 이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5. 결론 북일교회 280명의 성도는 불법을 덮기 위한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합니다. 총회 임원회가 화해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공의를 저버리고 끝내 감사를 거부하며 정치적 수단을 동원한다면, 우리는 교단의 정체성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력히 저항할 것임을 분명히 알려드립니다. 2026년 1월 29일 이리노회 일교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임종무 외 성도 279인 일동 호소문 원문 감사 촉구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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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12-15 18:00
한기총 임시총회...정관 · 실행위원회 구성 개정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제36-1차 임시총회를 12월 15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아가페홀에서 개최해 정관을 개정하고 실행위원회 제출 안건을 가결했다. 정관 개정의 건: 가결 제19조(임원의 선출과 임기) 1. 대표회장 나. 임기는 1년,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36조(사무총장) - 삭제 37조(실, 국 및 직원) - 1. 필요에 따라 대표회장의 결재로 사무처에 실, 국을 둘 수 있다. 2. 직원은 대표회장이 임명하되, 공채를 원칙으로 한다. 제38조(정관개정) - 2. 정관개정은 실행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총회에서 출석 총회대의원 2/3이상의 찬성으로 가결하되 반드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한다. 제41조(운영 세칙 및 제반규정) - 2. 2. 실행위원회에서 출석위원 2/3의 찬성으로 가결하되 반드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한다. 실행위원회 제출 안건: 가결 공인회계사 1인 더 선정은 대표회장에게 위임키로, 인사위원회 구성은 인사위원 3명 · 증경회장 3명 · 명예회장 3명 이내로 하는 것으로 임시총회는 대표회장 고경환 목사의 사회로 서기 이용운 목사가 회원 점명, 전 회의록 채택, 경과 및 사업 보고 후 안건을 처리하고 증경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의 기도로 폐회했다. 앞서, 예배는 명예회장 박승주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서기원 목사가 기도, 명예회장 박홍자 장로가 성경봉독, 증경대표회장 엄기호 목사가 설교, 비서실장 이의현 목사가 광고 후 증경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
김병중(Th.D) 11-18 19:31
한장총 정기총회, 이 선목사 대표회장·강대석목사 상임회장 선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정기총회가 11월 18일 오전 10시 30분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개최해 이 선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목사를 강대석 목사를 상임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전임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43회기가 잘 진행하도록 42회기가 길을 닦았다. 한국장로교회는 복을 받았다. 뿌리가 같은 장로교가 연합해 부흥해야 한다. 장로교의 부흥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라고 이임사, 대표회장 이 선 목사가 “뽑아 주셔서 감사하다. 한장총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최선 다해 섬기겠다.”라고, 상임회장 강대석 목사가 “대표회장을 도와 한장총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취임 인사말했다. 개회예배는 상임회장 이 선 목사의 인도로 공동회장 신용현 목사가 기도, 공동회장 김동기 목사가 롬 11:36-12:2을 봉독했다.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가 ‘장로교여 부흥하라!’란 제목으로 “한국장로교회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부흥했다. 하나님의 부흥은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탈종교화, 저출산, 반성경적 사상, 교회 안의 문제, 잘못된 영성 등으로 인해 유럽 교회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위기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한국장로교는 회개와 기도를 통해 계속해 부흥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 신앙으로 부흥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다는 주권신앙을 가져야 한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예배자의 삶으로 부흥해야 한다.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해 선교로 부흥해야 한다. 성령께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셨으니 이 사명을 감당하자.”라고 설교 후 공동회장 김성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광고했다. 총회는 대표회장 권순웅 목사의 사회로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원 127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공동회장 안상운 목사가 개회기도, 회록서기 조세영 목사가 전회의록 낭독, 서기 장인호 목사가 회의 보고, 총무 강동규 목사가 사업 보고, 감사위원 이홍섭 장로가 감사 보고, 회계 김재선 장로가 결산 보고, 임원 선거, 신구임원 교체, 공로패·감사패 증정,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 임명, 이사장 및 신임 이사 인준, 기타 안건 심의 후 신임 대표회장의 기도로 폐회했다. -
김병중(Th.D) 11-18 19:06
한기총 (직전)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긴급 기자회견 가져
한기총 (직전)사무총장이었던 김정환 목사가 11월 18일 오후 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대강당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에 대한 의혹인 ‘재정문제’, ‘월급 셀프 인상’, ‘변00 목사 건’에 대해 반박하고,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한기총 전 사무총장 김정환 목사 입니다. 최근 한기총을 둘러싼 여러 잡음과 특히 저와 관련한 여러 이슈로 많은 궁금증과 오해가 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저는 불법 부당하게 사무총장에서 면직된 이후에도, 상황이 정상화 되기를 기다리며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해 왔습니다. 허나 최근 한기총이 저를 사무총장에서 면직한 것도 모자라 회원에서도 제명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에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되기에 이렇게 기자님들을 모시고 긴급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을 결심하기까지 매우 큰 고민과 기도가 있었고. 나 하나가 침묵하면 그저 한기총이 잘될 수 있을까 갈등도 했지만, 저의 피해가 선례가 되어 그 후에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춰 집단 권력으로 한기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에 부끄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기자회견 자리에 섰습니다. 먼저 이유를 막론하고 한국교회 앞에 저의 문제로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저는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지난 시간동안 한기총의 정상화와 발전만을 위해 노력해 왔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이런 논란이 생긴 것 같아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사실을 바로 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 뿐 아니라 목회자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 대한 명예를 지키는 것이기에 이 자리에서 한 치의 거짓없는 사실만을 밝히겠습니다. 1. 재정 문제 일각에서는 한기총 사무총장에 무슨 큰 재정비리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일방적으로 이를 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기총 사무총장 면직 사유를 재정 문제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대체 제가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떠한 비리가 있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맹세코 한기총 재정을 단 1도 사사로이 쓴 적 없고. 그 어떤 비리도 저지른 적 없습니다. 오히려 한기총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수많은 부당한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단호히 비리를 배격해 왔습니다. 본래 한기총은 이전까지 관례적으로 사무총장이 모든 위원회 회의에 배석하고, 그에 따른 회의비를 수령해 왔습니다. 저 역시 재임 1년여 동안 관례에 따라 회의에 참석하고 회의비를 수령했으나, 이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판단에 1년 후 이를 스스로 모두 한기총에 반납하고. 이후 한기총 사무총장은 회의비를 받지 않기로 스스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 제게 도대체 어떠한 재정 비리를 묻는 것입니까? 재정비리를 거론하는 자들은 현재 아무런 실체 없이 재정비리만 운운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비리가 있다면 정확히 무엇이 비리인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당당합니다. 단 1원도 유용한 적 없고, 내 주머니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사무총장이 돈을 횡령하거나 유용한 비리 사실이 없다면, 대표회장은 즉시 사과하고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2. 월급 셀프인상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인 '월급 셀프인상'과 관련해, 단언컨대 저는 스스로 월급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재임하기 전 직전 사무총장의 월급은 500만원이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당연히 월급을 500만원으로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그 당시 전광훈 목사 사건 등으로 한기총이 큰 혼란이 있었고, 임시대표회장으로 온 김현성 변호사의 신변에 위협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어 비서실장을 두어 임시대표회장을 보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기총의 재정은 파탄 상태였기에 비서실장을 고용할 여력이 안되어. 부득이 사무총장 월급 500만원을 쪼개어 사무총장 300만원, 비서실장 200만원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후 정서영 목사님이 대표회장으로 오시면서 한기총의 정상화가 시작되어 정 목사님께 보고하고 사무총장 월급을 정상적으로 복구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해당 내용을 보고 받고 이를 허락했으며, 관례대로 모든 재정 관리를 사무총장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월급 인상은 대표회장님의 일임하에 이뤄진 것이며 사무총장 뿐 아니라 전 직원의 월급이 인상 되었습니다. 이 역시 결코 부당치 않은 것은 한기총이 과거 너무도 힘든 상황을 지나올 당시 직원들이 월급 인상이 전혀 없이 이를 버텨줬기 때문입니다. 2019년 1월부터 전혀 월급이 인상되지 않다가 2023년에 7% 인상해줬고. 이후에도 한기총이 재 정적 어려움으로 상여금 400%를 지급하지 못해. 2024년에 기본급을 8% 인상해 줬습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 임기였던 올해 3월에 월급을 인상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기총은 그간 다른 직원과 달리 사무총장만 4대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지 난 2025년 1월 8일, 정서영 대표회장 임기 당시 총무국장에 기본급 인상없는 4대 보험 가입을 지시했고, 그 적용이 3월에서야 이뤄졌습니다. 더욱이 사무총장 월급을 2025년 2월부터 받지 못했기에, 보험 가입 이후의 월급은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3. 00 목사 건 한기총 재정은 사무총장 취임 후 단 한 번도 온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적자운영이었고, 늘 쪼들렸습니다. 정서영 대표회장님은 늘 한기총의 인건비와 월세 운영비를 마련키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고, 저 역시 이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 늘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실제 한기총이 재정 파탄으로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도 미안하게도 직원들 월급은 제때 주지 못했던 적이 더 많았고, 제 월급은 수 개월 밀리는 것은 기 본이었습니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 제 사비를 털어 일단 직원들 월급을 준 적도 다반사입니다. 그런 중에 사무총장은 한기총 운영을 위해 회원들에 한기총 후원금을 늘상 요청해 왔습니다. 운영비 뿐 아니라 행사비 등 연간 수 억원 이상이 필요한 한기총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당시는 한기총 재정을 충당키 위해 전국을 안간 곳 없고, 무릎만 안 꿇었지 만나는 분들에게 빌다시피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후원을 얻는 방식에는 개별 차이가 있지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한기총을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얻은 후원금 중 단 1월도 제가 취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한기총의 운영비로 활용됐고, 그것이 바로 현재 한기총이 경매에 넘어가지 않고 직원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됐습니다. 지난 2년 간 정서영 대표회장님께서는 정말 자기 재산을 헌신하셔서 한기총을 운영하셨습니다. 회원들께서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은 한기총이 돈이 결코 많아서 현재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하시는 개혁도 이런 치열한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조차 못했을 겁니다. 허나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린가요? 00 목사 건은 이미 수년이 지난 일로 당시 이것이 한기총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모든 회원들이 다 알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AI'를 운운하며, 이를 다시 꺼내 저를 죽이는데 사용하나요? 한기총 회원들께 묻고 싶습니다. 한기총의 험난했던 지난 날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한기총을 지켜내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불살랐던 것을 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기총을 얼마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지 기억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당시의 제가 진정 잘못된 것이라면 제게 차라리 돌을 던지십시오. 4. 한기총 운영과 개혁에 대해 저는 고경환 대표회장님께서 추진하는 개혁에 대해 원론적으로 지지합니다. 저 역시 한기종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당장 오늘 내일을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닌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그런면에서 한기총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결단을 지지합니다. 허나 그 개혁 과정에서 불의한 희생이나 정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적법한 절차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불법이 지배하는 개혁은 결코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올해 한기총에서는 사무총장과 회계 면직이라는 매우 큰 이슈가 있었습니다. 허나 이 과정에 어떠한 설명도 무엇보다 당사자에 대한 소명의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여론을 몰아 단두대에 목을 치는 행태였습니다. 회계였던 박지숙 목사는 심지어 임원회에 단 한 번도 출석치 않다는 거짓 증언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음 임원회에서 당사자의 강력한 항의로 복귀되는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저는 단 한마디 소명할 시간도 없이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한 마디로 면직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면직의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직원인 사무총장에게 대표인 고경환 목사님은 어떠한 사유도 고지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해고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한편에서는 사무총장을 직원이 아닌 종교인이라 하는데, 사단법인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직원이 아닙니까? 심지어 고경환 목사님 스스로도 사무총장을 상근 직원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한기총 임원회는 올해들어 결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임원회가 안건을 다루고, 이를 결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회장이 아무도 수임하지 않은 안건을 스스로 들고 나와 이를 임원회에 결의를 강요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특히 대표회장 본인이 임원회의 허락이나 위임없이 특정 사안들을 변호사에 법적 해석을 받아오며 이를 '강력한 변호사'라며 임원회에서 무조건 받으라고 강요하고는 했습니다. 허나 변호사의 해석은 각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의뢰인의 구미에 맞춰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면직되던 임원회 당시 대표회장은 제게 공동회장과 사무총장 둘 중 하나를 내려놓도록 종용했습니다. 두 가지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결국 석연치 않았지만, 공동회장을 내려 놨고 그로부터 30분 후 사무총장에서 면직됐습니다. 이것이 과연 의도된 것이 아닙니까? 반대로 대표회장님 본인은 정작 자기 교회 정치를 한기총에서 구현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본인 교회의 모 장로님은 현재 명예회장이자 한기총의 가장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질서위원회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고 대표회장이 기존 감사를 낙마시키고, 새롭게 임명한 감사는 바로 해당 교회의 소속 목사이자 변호사입니다. 자신을 가장 충성스럽게 따르는 최측근들이 질서위에서 철퇴를 휘두르고 감사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입니까? 법은 평등히 적용되고, 절차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기총에 이러한 것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부족한 탓이 큽니다. 그간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제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는 한기총을 위해 아무 사심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안에 어떠한 사익도 비리도 없었습니다. 질서위가 최근에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임원회 회의 방해와 경찰 출동 사태에 대해 해명하라고 말입니다. 임원회 회의는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방해했고, 경찰은 한기총에서 불렀는데 왜 제게 해명을 요구 합니까? 이것이 바로 한기총이 처한 모순의 단면입니다. 고경환 대표회장님의 개혁 추진은 적극 지지하지만,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법과 편법, 모순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한기총을 사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진정으로 한기총을 사랑하는 김정환 목사의 진심이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Th.D) 07-09 11:26
한기총도 외면하는 전광훈을 계속 추종하는 합동측 인사들
최근 기독교연합회관 15층에 있는 한기총 사무실에 가보니 대표회장을 역임했던 전광훈의 사진이 없어졌다. 사무실 입구에 역대 대표회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전광훈만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2020년 대표회장에서 사퇴했었다. 보수주의 단체인 한기총 입장에서도 전광훈은 지우고 싶은 흑역사(黑歷史,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이다. 그럼에도 합동측에는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 예장합동교단은 2021년 106회 총회에서 전광훈과 관련해 집회 참여 금지를 결의했었다. "발언 내용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까지 신앙적 집회 참여 금지를 촉구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광훈을 추종하는 자들을 어찌해야할 것인가? 오죽했으면 보수 연합단체인 한기총이 왜 전광훈과 절연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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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3-07 03:09
잊지 말아야 할 학도병들의 희생, 뮤지컬 「매산 153 학도병」
지난 3월 6일 순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뜻깊은 「매산 153 학도병」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당일 오후 3시에는 매산학교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했고, 오후 6시 30분에는 일발 시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관람했다. 6·25 전쟁 당시 순천 매산중학교(현재의 순천매산고등학교 및 매산중학교) 학생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1950년 7월, 순천 지역에서 참전한 학도병 56명 중 매산중학교 학생이 32명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전투에서 매산중 출신 11명이 전사하고 5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매산 학도병들은 입대 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담아 태극기에 혈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자 '153'은 전장으로 향하기 전 '혈서'를 쓰며 결의를 다진 초기 학도병 인원수 등을 상징하며, 이후 참전 인원은 더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남 지역 학도병들의 희생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순천매산고등학교 벽면에는 당시 10대 학도병으로 출병한 선열들을 기리는 '6.25참전 학도병 충혼 벽화'가 조성되어 그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뮤지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의 6.25 기습 남침으로 서울과 대전이 그들의 손에 넘어간 가운데 호남 지역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한다.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항일 투쟁 중 희생당한 한 가정의 세 남매(형, 여동생, 남동생)가 자원 입대하고 전쟁에서 모두 희생된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그들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버티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뮤지컬은 막을 내린다. 작/연출 신동일, 조연출 손현재, 영상감독 한의섭 출연: 김민정 김기령 안재완 김경택 오우철 최지인 김총명 김가희 김현지 민재이 은별 손현재 장승식 주기쁨 주혜린 이도윤 제작/후원: 사랑컴퍼니, 더웨이 기독 문화선교단, 순천 시청, 분당 전하리교회(임흥옥 목사) 주관: 순천남•순천노회 장로회 제작 후원한 분당 전하리교회 임흥옥 목사는 예장합동 총회군선교회 25대 회장을 역임했다. 군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 산하 기관으로, 국군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군 복음화를 위해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는 선교 조직이다. 전국에 18개 지회를 두고 있으며, 군부대 위문, 진중 세례식 지원, '사랑의 온차' 전달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와 나라가 산다'는 기치 아래 다음 세대를 깨우는 군선교에 주력하며, 군부대 내 교회 리모델링이나 교육관 신축 등 장병들의 신앙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전방 부대 장병들을 위한 위문 방문과 겨울철 '사랑의 온차'를 지원하고 있다. 임흥옥 목사는 “「매산 153 학도병」을 통해 학생과 일반인들이 애국심을 고취하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실 것을 굳건히 믿는 신앙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
김병중(Th.D) 03-06 17:59
중인교회 • 구이중앙교회 • 유상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 한민수 목사)가 주관한 제48호 중인교회 • 제49호 구이중앙교회 •제50호 유상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감사예배가 3월 6일 오후 2시 전북 전주시 완산구 소재 중인교회 예배당( 조무영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한민수 목사의 인도로 역사위원회 회계 김흥선 장로가 기도, 역사위원회 전 서기 최찬용 목사가 히 12:1-2을 봉독, 찬양대가 찬양했다.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현재의 사명을’이란 제목으로 “과거 믿음의 선조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했었다. 우리는 그 신앙을 계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와 선조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감사해야 한다. 누군가의 헌신으로 오늘까지 교회가 있게 된 것에 감사하자. 셋째, 살아있는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 사적에 지정되어도 계속해서 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라고 설교했다. 역사위원회 총무 김종운 목사가 광고 후 전북노회장(한소망감수교회) 석명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사적지 지정 증서 전달 2부 사적지 지정식은 총회역사위원회 부위원장 김기현 장로의 사회로 역사위원회 서기 이진근 목사가 사적지소개, 정영교 부총회장이 당회장에게 지정증서를 증정했다. 축하패 전달 전북노회 증경노회장 윤희원 목사가 “역사는 사실보다 의미이다.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 교회들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총회재정부장 이민호 장로가 “역사 의식이 있어야 하며 과거 역사를 통해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 비판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라고 격려사, 역사사적지 협의회장 고관규 목사가 “사적지 지정 후 관리를 위해서는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돕기 위해 역사사적지가 조직되었다.”라고 축사 후 축하패를 전달했다. 3부 현판 제막식은 총회역사위원회 서기 이진근 목사의 사회로 순교분과장 김성원 목사가 기도하고 사적지 내부를 관람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중인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8호 처음은 그야말로 미미하였다. 중인리는 선교의 불모지였다. 영적으로 혼탁한 땅이었다. 그런 데, 이곳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다. 어디서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은숙(순) 씨 외 6명의 작은 자들이 작은 사랑채에 모여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어설픈(?)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사 크신 은혜와 긍휼하심 가운데 1907년 중인교회가 시작 되었다. 중인교회는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60년에서야 장로를 세우고, 조직교회가 되었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66년에서야 제1대 담임목사가 부임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중인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였다. 역사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와 싸워야 했고, 지역적으로는 모악산 주변이 미륵신앙의 본산지였기에 치열하게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했다. 총회적으로는 교권 다툼과 분열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합동총회와 개혁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기도의 무릎으로, 신학과 신앙으로 맞서 싸워야 했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회적으로는 청년들의 지역 이탈, 성도들의 노령화, 지역과의 갈등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크신 은혜 가운데,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믿음의 발자취가 자랑스럽다. 이런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 이렇게 전투적인 교회로 남아서 최후에 이기는 자(교회)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한다. 구이중앙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9호 구이중앙교회는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 간 ‘이래수’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고향에 있는 동생 '이흥원'에게 서신으로 전도하였다. 서신을 통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시작으로 미국 전 선교사(한국명 전위렴)에게서 도리를 자세히 배우고 전도하므로 신도가 증가하였다. 이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설립하여(1905년) 지금까지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현재 대한 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모여 뜨겁게 예배하고 영육간에 안식을 얻으며 세상을 향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이다. 유상교회-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50호 한국의 초대교회는 당시 많은 교회들이 그러했듯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어지고 설립되어지던 시절이었다. 전주가 속해 있는 전라도 지역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를 통해 1894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상교회는 조금 특이함이 있었는데, 1906년 당시 허허벌판과도 같은 전주군 유상리 부락에 ‘기역자(ㄱ)’ 교회가 세워지는 데 선교사에 의한 설립이 아니라, 순수 현지인들이 교회를 건축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이일문 씨가 복음을 접하고 열정적인 전도를 하게 되는데, 그 신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를 건축하고 함께 모여 예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교인들은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고, 이일문 씨는 1920년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어 유상교회(유상리교회)의 초대 담임목사가 된다. 그렇게 유상리 지역에 복음의 중심이 되어가던 유상교회에서는 드디어 첫 직분자가 나오게 되는데, 1933년에 홍원조 씨가 장로로 장립하게 된다. 이후로 전도사들이 교회를 섬기게 되었고, 1946년에는 동산부락에 동산교회를, 1965년에는 발산부락에 팔복중앙교회를 분립하게 된다. 그렇게 유상교회는 설립자를 제외하고 첫 번째 위임목사가 시무하게 되는데, 제 96회 총회를 이끌었던 증경총회장 이기창 목사이다. 이기창 목사가 1982년 현 유상교회 터에 건축을 하게 되는데, 과거 기역자(ㄱ) 교회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시(1945년도) 타종했던 좋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새롭게 종탑을 만들고 타종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2대 위임목사 이길우 씨가 부임하여 35 년간의 성역을 마치고 은퇴하고, 이후 3대 위임목사 방관전 씨가 2017년 4월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처럼 유상교회는 120년 역사동안 초대 설립자를 빼고는 위임목사가 3대째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성도들은 목회자를 사랑하고, 목회자는 성도를 사랑하며 복음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만을 사랑하기에 힘쓰는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다. 이후로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 받으며 후대에도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하여 제110회 총회에서 지정받게 되었다. -
김병중(Th.D) 03-05 22:27
코린 신학교, 신학사 10명·목회학석사 4명·목회학박사 2명 졸업
인도 코린(Kor-In)신학교 졸업식이 2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열려 신학사 10명 · 목회학석사 4명 · 목회학박사 2명의 졸업을 축하했다. KOR-IN 신학교(Kor-In Theological College & Seminary)는 한국(Korea)과 인도(India)의 화합과 복음화를 위해 인도에 설립된 초교파 신학 교육 기관으로 1991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1호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된 故 이기섭 선교사(대길교회 장로)에 의해 1994년 인도 벵갈루루에서 개교했다. 신학교 이름은 한국(Korea)과 인도(India)의 합성어로, 두 나라의 우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상징한다. 이 신학교는 특정 교단에 매이지 않는 초교파 신학교로, 인도 현지인 목회자 및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전국남전도회와 여러 기관과 개인들의 도움으로 만평의 대지 위에 17개 교사 건물에서는 초, 중, 고등학교 코린 영어 학교와 코린 신학교 그리고 기숙사, 예배실, 기도원 강당을 구비하여 장차 남인도의 인재들을 발굴하여 주의 종으로 양성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현재 영어 학교 700명 재학 중이며, A.T.A 인가를 받은 코린 신학교에는 교수 12명, 학생 40여명이 수학하고 있다. 졸업 예배는 Dinesh Stephen 목사의 인도로 Samir Kumar Singh 목사가 기도, Kor-In 대학 합창단이 특송, 염은철 목사가 딤후 4:6-8을 봉독, 한국 선교팀 (장군길 장로)이 특송했다. 박현식 박사가 설교 후 Lalit Kumar Nayak 박사가 연례 보고, Voola Sunayana 여사 (교무처장)가 졸업생 소개, 박현식 박사, Lalit Kumar Nayak 박사가 학위 수여했다. 재단이사장 최수용 장로, 이남준 장로가 선물 증정 후 졸업생 답사, 졸업생 특송 후 R. Sudhakar Rao 목사, 조형국 장로, 최수용 박사, 관영기 박사, Naresh 전도사가 축사, Lalit Kumar Nayak 박사가 감사 인사한 후 박현식 박사의 축도로 졸업식을 마무리했다. 최수용 장로는 환우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를 하며 다음과 같이 감사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먼저 타밀나두의 바르구르 복음주의 나병교회에 한국인 교우들을 데려오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어려운 나병환자들에게 사랑의 쌀과 밀가루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나병환자들에게 점심을 두 번 제공하겠다는 의미에서 180달러를 헌금 받았습니다. 저희를 응원해주시는 모든 회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사역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제102회 총회 장로부총회장 최수용 장로와 45회기 전국남전도회(회장 조형국 장로) 회원들이 마을을 방문해 사랑의 쌀을 전달했다. 학사 및 석·박사 학위 수여 명단 신학 학사 (Bachelor of Theology) Ms. Ni Chin Tial Ms. Manita Toppo Mr. Tluang Awi Mr. Zabidi Laymay Mr. Henry Bawi Hmun Thang Mr. Bingi Ejjrashastri Mr. Lalropuia Mr. Thang Tung Tuang Mr. Sasikumar K Mr. Valluri Suresh 목회학 석사 (Master of Divinity) Mrs. Srimanthula Rechal Jyothi Ms. Khevitoli Assumi Ms. Kethose-E Ms. Linoka Kinimi 목회학 박사 (Doctor of Ministry) 조형국 장로 (Elder Cho Hyung Kook) 방경해 장로 (Elder Bang Kyung Hae) -
김병중(Th.D) 03-04 15:29
총회교육부 주관,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 개최
총회 교육부(부장 이경조 목사)가 주관한 총회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가 3월 4일 오후 2시 총회회관 5층에서 열려 주일학교 예배가 어려운 교회를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주일학교 대상 아동은 있으나 인력 부족으로 주일학교 운영이 어려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교회 중심 e-주일학교의 운영 방향을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위함이다. 이경조 교육부장의 환영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총회장님과 총회 임원 여러분, 노회장님들과 교육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총회 교육부장으로서 e-주일학교 추진을 위한 뜻깊은 공청회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시스템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다음세대를 어떻게 말씀 위에 바로 세울 것인가, 그리고 교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마련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한국교회는 인력과 재정의 한계,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사역의 약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e-주일학교는 교회 중심의 예배를 지키면서도 현장을 돕는 실질적인 지원 체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는 이 사역이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각 교회에서 실제로 적용 가능한 구조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플랫폼 구축, 보안 문제, 노회 협력, 현장 지원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될 때 비로소 다음세대 사역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총회-노회-개교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건강한 협력 모델이 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교육부는 이 길을 끝까지 책임 있게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논의 위에 지혜를 더하시고, e-주일학교가 우리 교단 다음세대를 세우는 든든한 기초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인도로 회계 임계빈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시 78: 70~72을 봉독, 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다윗처럼’이란 제목으로 “다윗처럼 손의 능숙함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축사 총회자립개발원 이사장 박윤성 목사가 “기성세대는 다음세대를 멀리 날아가는 활로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 기관도 다음세대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라고, 전국주일학교연합회장 김충길 장로가 “총회가 다음세대를 위해 걱정하고 방법을 찾아주는 것에 감사하다. 주일학교를 살리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한다.”라고, 총회교육개발원 홍승영 목사가 “총회 하나바이블이 좋은 호평을 받고 있다. 온라인과 잘 연계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후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공청회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사회로 발제1은 안기성 교수(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가 ‘온라인 주일학교의 실천신학적 의미와 실천방안’이란 제목으로 “사회보다 교회의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르다. 또한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주일학교의 감소는 교회와 총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를 준다. 미자립교회 주일학교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주일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주일학교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교역자 수급도 쉽지 않다. 총회 차원에서 교회 교육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 총회가 주일학교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노회 차원에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일에 사용할 수 있는 주일학교 예배를 총회가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총신대에서도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해야한다.”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첫째, 총회 교육부 내에 ‘미래자립교회 교육지원 상설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뒷받침할 예산을 최우선순위로 배정해야 한다. 다음 세대 교육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예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죽어가는 주일학교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연계하여 ‘교회교육 전문 평생교육사’ 자격 과정을 신설하고, 헌법 및 규칙을 개정하여 이들의 사역 범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평신도를 깨우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그들에게 합당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동역자로 세워야 한다. 셋째, 전국 노회와 협력하여 주일학교 미운영 교회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온라인 교육 송출 시스템을 조속히 가동해야 한다. 데이터 없는 정책은 실패한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선행하고, 가장 시급한 곳부터 디지털 복 음을 송출해야 한다.” 발제2는 김수환 교수(총신대 기독교 교육•컴퓨터&AI)가 ‘안심하고 맡기는 플랫폼: 데이터 보안과 지교회 보호’란 제목으로 “교회 교육-가정 교육-개인 생활-교회 교육으로 이어지는 교회학교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 필드의 의견을 반영해 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시스템은 AI가 포함된 온라인으로 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지식의 전파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정보 보호 기능이 강화되어 있기에 교회에서 교인들의 개인정보를 사용하는데 매우 조심해야 한다. 교육은 오랜 기간 투자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이며, 본질은 영혼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온라인 주일학교를 통하여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발제3은 김종석 목사(은석교회)가 ‘노회 IT 헬프데스크 운영안 : 큰 교회 청년부와 작은 교회의 영적 연대’란 제목으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는 총회-노회-대형교회-소형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 협력하여 다음세대를 세우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시대 속에서 구현해야 할 전우주적 교회의 실천 모델이다. 온라인 플랫폼이라는 기술적 특성 때문에 IT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며, 이는 총회 차원의 IT 헬프데스크 운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동시에 노회 e-주일학교 헬프데스크는 교육적 전문성을 갖춘 관리교사와 수업교사를 확보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총회 e-주일학교는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 총회 e-주일학교는 소형교회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서로의 강점을 나누며 영적 연대를 이루는 장이 되어야 한다. 대형교회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소형교회는 지역사회와의 밀착성을 통해 복음의 현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노회는 두 교회를 연결하는 허브(Hub)가 되어야 하고, 총회는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 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낸다. 또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히 주일교육에 머물지 않고, e-성경학교, 온라인 캠프, 노회대회 준비반, 글로벌 선교 교육 등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녹화 콘텐츠는 온라인 도서관으로 발전하여 교사교육과 장년교육까지 포괄할 수 있으며, 실시간 수업은 국내외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가진 교육 역량을 세계 선교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총회 e-주일학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다음세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한국교회 교육의 미래를 재구성하는 장기적 전략이다. 기술적 기반과 교육적 기반이 균형을 이루고, 총회-노회 교회가 지속적으로 협력할 때,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을 넘어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결국 총회 e-주일학교의 성공은 시스템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총회와 노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상호 협력, 그리고 교사와 간사들의 헌신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총회 e-주일학교는 주의 몸된 교회의 하나 됨을 실천하는 역사적 교육 사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 사역은 단지 한 세대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다음세대를 향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래지향적 모델이며, 교회가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연합하고 협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한 다음 세대 교육의 실천적 선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제4는 나현규 목사(총회교육전도국장)가 ‘왜 e-주일학교인가? 교단적 명분과 시대적 소명’ 이란 제목으로 “본 연구는 수축사회라는 거시적 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 주일학교가 직면한 교육 양극화의 실태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e-주일학교' 모델을 제안하였다. 앞서 확인한 통계적 실상은 참담했다. 주일학교 운영이 불가능한 교회가 급증하고 있으며, 현장 목회자의 약 절반(47~51%)이 거점형 교육 위탁 의사를 밝힐 만큼 현장은 절박하다. 지금 현장에 필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을 인격적 소외의 도구가 아닌, 신앙 전수의 '매개적·보조적·관계적' 수단으로 재정립하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를 토대로 한 실행 가능한 추진 안이다. 따라서 총회가 콘텐츠를 공급하고 노회가 IT 인프라를 책임지는 '협력적 행정 구조'와 2027년 1월 전면 시행을 향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한 시스템 도입 이 아니라, 교단의 공적 책임을 다하는 '서번트 행정'의 실천적 고백이다. 본 사역이 단기적인 이벤트를 넘어 한국 교회 교육의 근간을 바꾸는 '디지털 공공재'로 자리 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제언을 남기고자 한다. 첫째, 노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e-주일학교의 성패는 하드웨어를 보급하고 현장의 IT 헬프데스크 역할을 수행할 노회의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는 지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장비 나눔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소속 교회들이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현장 밀착형 행정'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튜터(교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교사는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 조력자(High-Touch)'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총회는 튜터들이 기술적 부담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 하는 일에 모든 행정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셋째, 지속 가능한 자원 순환 모델의 정착이다. 예산의 논리를 넘어, 대형 교회의 유휴 자원을 작은 교회로 흘려보내는 '성경적 나눔'이 e-주일학교 플랫폼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는 재정적 격차를 신앙 공동체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한국 교회 교육의 새로운 상생 모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수축사회의 파고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 등불이 꺼져가고 있을지 모른다. e-주일학교는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총회와 노회가 함께 기름을 붓고 불꽃을 지키는 '거룩한 공조'이다. 디지털이라는 차가운 통로에 우리의 뜨거운 복음과 인격적인 사랑을 실어 보낼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비전의 세대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질의응답 및 현장 의견 수렴 시간을 갖고, 종합 정리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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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1-10 21:00
중서울노회남전연, 동대문중앙교회에서 순회예배 및 월례회
중서울노회 남전도회연합회(회장 최동균 장로) 제45회기 제5차 순회헌신예배 및 월례회가 2026년 1월 10일 오후 5시 중구 마장로에 소재한 동대문중앙교회(김은천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순회헌신예배는 회장 최동균 장로의 인도로 부서기 박승국 집사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표어 제창, 5부회장 양흥철 장로가 기도, 임명상 장로가 엡 3:14-21을 봉독했다. 동대문중앙교회 김은천 담임목사가 '우리 기도에 더욱 역사하실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한국교회는 기도로 유명하다. 기도를 통해 교회가 부흥됐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첫째,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바울은 감옥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강건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기를 위해 기도하자.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큰 사랑을 믿고 염려하지 말자.”라고 설교했다. 총무 장성규 장로가 헌금 기도, 동대문중앙교회 남전도회원들이 특송,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 지교회 부흥과 중서울남전도회연합회 부흥을 위하여 / 동대문중앙교회와 동대문중앙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다같이 뜨겁게 합심기도 후 20대 증경회장 정찬홍 장로가 마무리 기도한 후 총무 장성규 장로가 광고하고 김은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2026년 신년하례식을 했다. 월례회는 회장 최동균 장로의 사회로 42대 증경회장 최은한 장로가 기도, 서기 이금재 장로가 14개 교회 회원 41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해 개회, 총무 장성규 장로가 사업 보고 후 회계보고는 유인물로 받았다 우수 교회 및 우수 회원 시상 우수 교회: 금곡, 후암, 돌다리 우수 회원: 이영철 집사, 김성덕 장로, 최동균 장로, 이금재 장로, 정기영 집사, 정인성 집사, 장성규 장로, 박재석 장로 동대문중앙교회 및 남전도회 소개 후 주기도로 모든 월례회 모든 순서를 마쳤다. -
김병중(Th.D) 01-08 20:48
성남노회, 목사장로 2026 신년감사예배 · 인사회로 모여
2026년 새해를 맞아 성남노회(노회장 김승언 목사)가 제29회 목사장로 신년감사예배와 신년인사회를 1월 8일 오후 6시 서광교회(최영진 목사 시무)에서 가졌다. 이날 만찬과 친교는 서광교회가 기쁨으로 섬겼다. (장로회장, 성남제일교회) 김태웅 장로가 “작년에도 목사님들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다. 장로회는 섬기며 선교하고자 한다. 올 한해 모든 교회 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신년인사, (부노회장, 광주사랑의교회) 문선용 장로가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를 통해 일을 이루신다. 올해 더욱 준비된 자세로 하나님께서 일 하시는 한해가 되기 바란다.”라고 신년사, (직전노회장, 도서관교회) 장대은 목사가 “우리노회는 목사와 장로들이 잘 연합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올해 더 큰 기대를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라고 축사, (서광교회) 최영진 목사가 “저희 교회 오신 것을 환영하고 축하드린다.”라고 환영사했다. 1부 예배는 (부회장, 금광교회) 임흥식 장로의 인도로 (명예회장, 서광교회) 신용렬 장로가 기도, (서기, 더사랑의교회) 양준모 장로가 말 4:2을 봉독, 김보성 테너가 특송했다. (노회장, 열방교회) 김승언 목사가 ‘그러나의 은총’이란 제목으로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는 의로운 해는 치료하는 힘이 있고, 하나님의 빛이 닿는 곳에 살아 역사하는 은혜가 있다. 둘째, ‘그러나’의 은총이 있다. 어렵지만 ‘그러나’의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셋째,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될 것이다. 외양간은 우리를 제약하는 한계이다. 그런데 주님은 외양간 문을 열어 우리로 뛰게 하신다. 그러므로 새해 기쁨으로 뛰며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자.”라고 설교했다. (장로회증경회장, 성남제일교회) 박만희 장로가 ①나라와 민족 ②교회, 노회 ③총회를 위하여 특별합심기도, (총무, 사랑과은혜교회) 김승용 장로가 광고 후 (증경회장, 한남교회 원로) 문찬호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인사회는 (수석부회장, 산성의빛교회) 김용직 장로의 사회로 장로회 임원일동이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를 특송, 남전도회연합회장 · 여전도회연합회장 · 주일학교연합회장이 인사, 노회장, 직전노회장, 부노회장(목사, 장로), 장로회장이 케익커팅, 목사 · 장로 인사 악수례 후 (장로회증경회장, 금광교회) 양재훈 장로의 기도로 폐회했다. -
김병중(Th.D) 01-05 23:18
중앙노회원들, 총회 임원회 불법 관련 항의 시위 벌여
지난 1월 5일 중앙노회원 50명이 총회 본부 앞에서 “총회 임원회가 제110회 총회 결의를 짓밟고 중대한 법치를 파괴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번 시위는 수서 경찰서에 집회신고 후 이루어진 합법적인 시위였다. 지난 해 12월 3일 임원회가 중앙노회 관련 건을 처리한 결의가 “불법/무효”인 것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중앙노회는 영하의 강추위에도 일심동체가 되어 총회 임원회의 불법을 성토했다. 중앙노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간략한 개요를 본다. 중앙노회 소속 혜린교회 관련 건은 지난 9년 간 총회 내 교권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재(人災)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분쟁의 시작은 평안했던 당시 중부노회가 2018년 3월 혜린교회 장로들의 재판 건을 노회에서 재판한 적이 없는데, 당시 서기가 총회에 상소장을 제출한 데서 불거졌다. 이른바 “불법 문서”를 접수한 총회 본부, 이를 받아 헌의부로 이첩한 총회 임원회, 불법 문서를 재판국으로 이첩한 헌의부, 하회가 재판한 적이 없는 불법 상소장으로 불법 판결한 총회 재판국 등 총체적인 불법판에서 시작되었다. 이 불법 사태가 발생한지 8년이 지났는데도 제110회 총회 임원회 결의에서 다시 약속이나 한 듯이 불법 결의가 나온 것은 총회가 총체적으로 불법판이며, 불법을 척결하거나 해소할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중앙노회가 8년간을 억울하게 당하면서도 참고 기다린 것은, 총회에 대한 한가닥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느다란 기대감을 갖고 매회기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임원 선거에 나선 후보마다 “임원이 되면 반드시 중앙노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장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년간 모든 임원 후보자들이 당선만 되면 돌변했다. 그런 식으로 중앙노회는 8년간 임원들에게 상처받고, 절망에 처했다. 매년 실망하고 낙심했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다가 지난 회기 때는 절망 중에 가느다란 희망을 보았다. 제109회 총회 임원회가 제110회 총회 때 위법조사처리위원회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기로 보류했다는 결의가 나왔다. 제110회 총회는 아래와 같은 위법조사처리위원회의 보고 9가지(요약)를 받았고, 그에 대한 처리는 임원회에 맡기기로 결의했다. 이와 같은 총회 결의에 따르면 제110회기 임원회는 즉각 중앙노회 청원(이바울 목사 신분 회복 및 노회 소속으로 등재)을 받아 처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3일 임원회 결의는, 중앙노회 청원건에 대해 “사회소송 중임으로 소송이 끝날 때까지 보류하거나 양측의 화해---”를 결의하여 중앙노회에 공문을 보냈다. 이는 불법자들이 제출한 효력없는 문건을 받아 처리한 결의이며, 제110회 총회 결의를 정면으로 뒤집은 불법 결의다. 따라서 중앙노회는 지난해 12월 3일 임원회 결의는 무효이며, 불법이라는 주장을 담은 각종 피켓을 들고 영하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총회 본부에서 시위를 강행한 것이다. 이날 시위 외에도 중앙노회는 총회 임원회의 불법에 대해 분노하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6가지 대응책을 내놨다. 중앙노회 관련 건에 대해 총회 임원회의 결의는 다음과 같은 위법성이 명백하다. 첫째, 총회를 뒤집는 결의, 둘째, 총회 결의 위반, 셋째, 받을 수 없는 문서를 받은 행정상 불법, 넷째, 효력 없는 문서를 근거로 불법자들을 옹호함, 다섯째, 총회 결의에 따라 임원 전원 불법 동조자가 됨, 여섯째, 정당한 하회의 청원을 무시하여 장로회 정치원리 파괴, 일곱째, 불법 문서를 처리하여 총회의 헌법 질서를 무너뜨림, 여덟째, 헌법을 짓밟아 개혁신학 훼손함, 아홉째, 정책총회가 순식간에 정치총회로 추락, 열째, 직전 총회 임원회 결의를 무시한 독단과 아집 드러냄, 열한번째, 총회장의 고퇴가 총회질서 훼손의 도구로 변질, 전락, 열두번째, 불법자들을 처리하기로 결의한 총회 결의를 이행하지 아니하여 총회결의 거부함. 중앙노회는 이와같은 12가지 불법으로 총회의 법질서를 무너뜨리고, 장로회 정치원리를 허물며, 개혁신학을 파괴한 총회 임원들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로 정책총회를 지향하는 제110회기 임원회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 위 기사는 중앙노회의 입장이며 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시 반론권을 보장함 -
김병중(Th.D) 11-27 11:44
새한서노회, 임시노회 열어 꽃동산교회 관련 안건 처리
새한서노회 제88회 2차 임시노회가 11월 27일 오전 11시 꽃동산교회(김종준 목사 시무)에서 개최되어 안건을 처리했다. 안건 꽃동산교회 김종준 목사 원로목사 추대의 건 - 가결 꽃동산교회 임 광 목사 위임목사 청빙의 건 - 가결 부전지에 의한 고소의 건 - 정치부에서 목사 4인, 장로 3인으로 재판국 설치해 처리키로 가결해 회원 동의로 재판국 구성 앞서, 예배는 서기 이모세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전홍배 장로가 기도, 부서기 서병석 목사가 잠 4:23을 봉독, 노회장 박현철 목사가 ‘네 마음을 지키라’는 제목으로 “어떤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마음이 지배당한다. 아담은 뱀의 말을 듣고 결국 선악과를 먹는 범죄를 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의 말을 거부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전해야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한다.”라고 설교 후 직전노회장 길윤구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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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2-21 12:21
천안중부 김종천목사 "가처분 기각"...본안에서 다루라는 것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제10민사부는 2월 20일 김종천 목사가 제기한 직무방해금지 등 가처분 사건에서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결정문 어디에도 김종천 목사의 담임목사 지위를 부정했다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법원은 기존 확정판결의 존재를 전제로 판단을 진행했다. 법원이 한 말 결정문은 명확하다. •공동의회 해임결의는 무효 확정 •불신임결의는 상급 치리회 승인 없어 효력 없음 •해당 판결은 항소·상고 모두 기각되어 확정 법원은 이를 뒤집지 않았다. 다만, 이후 발생한 노회 면직 판결 및 총회 임원회의 승인 결의 등 새로운 사정이 있어, 담임목사 지위 문제는 “본안에서 충분한 심리를 거쳐 확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이것은 “김종천 목사의 지위가 흔들렸다”거나 “박요한 측이 법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판결문 어디에도 없는 내용이다. “이유 없어 기각”은 ‘패배’가 아니다. 법원이 사용한 “이유 없다”는 표현은 가처분 요건에 관한 법률적 판단이다. 이번 사건은 본안판결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는 ‘만족적 가처분’이었다. 이런 유형의 가처분은 일반 가처분보다 훨씬 엄격한 요건이 요구된다. 법원은 단지 현 단계에서 긴급성과 회복불능 손해가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이는 본안 패소가 아니다. 지위 부정도 아니다. 상대방의 적법성 확정도 아니다. ‘가처분 남발’ 프레임은 판결문에 없다. 결정문 어디에도 “남발”이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원이 설명한 것은 단지 만족적 가처분의 일반 법리, 즉 “본안 전 단계에서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는 처분은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를 두고 가처분 남용의 사례처럼 묘사하는 것은 판결문에 없는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법원이 한 판단은 단 하나. 법원의 판단은 명확하다. •지위 문제는 본안에서 판단하라. •현 단계에서 직무정지를 명할 만큼의 긴급성은 충분히 소명되지 않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번 결정은 분쟁의 최종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법원은 본안에서 충분한 공방과 심리를 거쳐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번 가처분 결정은 김종천 목사의 담임목사 지위를 부정한 판결이 아니다. 또한 박요한 측의 적법성을 확정한 판결도 아니다. 법원은 단지 본안 판단 전 단계에서 직무정지를 명할 정도의 긴급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
김병중(Th.D) 01-31 17:46
방주교회, 김두형 목사 원로추대식 · 권순웅 목사 위임식
중서울노회 소속 방주교회 김두형 목사의 원로추대, 권순웅 목사의 위임식이 1월 31일 오후 2시에 있었다. 김두형 목사는 방주교회에서 27년간 목회를 잘 감당하고 원로로 추대되었다. 김두형 원로목사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교우들과 동역자들,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앞으로 방주교회가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기를 기도하겠다.”라고 인사말했다. 권순웅 위임목사가 “원로목사님께서 가셨던 길을 잘 이어가도록 하겠다. 말씀 앞에 서고, 하나님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목사가 되기 원한다. 같이 힘을 모아주시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1부 예배는 위임국장 이성무 목사의 인도로 서기 정찬용 목사가 기도, 경동시찰장 김동권 목사가 왕상 3:25-28을 봉독, 시온찬양대가 찬양했다. 노회장 최문진 목사가 ‘교회를 사랑합시다’란 제목으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친권을 포기한 어머니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첫째, 교회의 고통을 보며 동참해야 한다. 둘째,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설교했다. 2부 원로목사 추대식은 박정수 장로의 추대사, 부노회장 이학영 장로가 기도, 노회장이 공포하고 추대패를 증정했다. 3부 목사 위임식은 위임국장의 사회로 목사와 교인 서약 후 부노회장 김정현 목사가 기도, 위임국장이 공포, 위임패 증정, 꽃다발 증정했다. 권면 증경노회장 호용한 목사가 위임목사에게 “위임을 축하드린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를 위해 성령충만하게 예배를 잘 드리자. 둘째, 이웃을 사랑하자. 섬기고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권면, 증경노회장 정귀석 목사가 “오늘은 좋은 날이다. 교회를 사랑해 더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기 바란다. 목사님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바란다.”라고 교우들에게 권면했다. 4부 축하 시간에 前 GMS행정사무총장 강인중 목사가 “김두형 목사님은 총신대 74한번 동기이다. 첫째, 김두형 목사께서 목회를 끝까지 감당한 것에 감사하다. 둘째, 목양일념으로 헌신한 것을 축하한다. 셋째, 제가 선교할 때 저를 후원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라고 축사, 방주교회 정수민 집사·문장탁 집사가 축가·축주, 원로목사·위임목사 가정 인사 후 이학영 장로가 광고하고 증경노회장 최용범 원로목사의 축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
김병중(Th.D) 01-30 00:25
김상기목사·이천은광교회, 총회농어촌부 섬김예배 드려
총회에 속한 어려운 농어촌 교회를 살피고 돕는 농어촌부(부장 이철우 목사)가 직전부장 김상기 목사가 시무하는 이천은광교회에서 1월 28일 저녁 7시 20분 ‘총회농어촌부 섬김예배’를 드렸다. 이날 김상기 목사와 교회는 물심양면으로 농어촌부를 후원하고 격려했다. 김상기 목사가 “우리 교회에 섬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사명감을 갖고 오늘 설교 말씀을 잘 실천하도록 하겠다.”라고 환영사했다. 예배는 서기 김종수 목사의 인도로 회계 김경환 장로가 기도, 이천은광교회 목자·총무 전체가 ‘나는 주를 섬기는 것에 후회가 없습니다’를 특송 후 총무 김명오 장로가 행 4:32을 봉독했다. 농어촌부장 이철우 목사가 ‘희년의 영성으로’란 제목으로 “희년은 해방의 은혜이다. 종으로 팔렸다가 자유를 얻고, 팔렸던 땅이 원주인에게 회복되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이다. 그런데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성취하셨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희년 자체로서 매우 열악한 지역인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며 그들에게 희년의 은혜를 베푸셨다. 우리도 희년의 정신을 실천해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 살아가야한다. 작년에 김상기 목사님께서 부장으로서 농어촌 교역자들을 잘 섬겨주셨다. 그래서 저도 농어촌에 희년의 생명을 심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농어촌 교역자 부부에게 희년의 안식을 주고자 한다. 둘째, 희년 행정을 실천하고자 한다. 도와주는 금액이 예산을 초과될 때 임원들이 이를 감당할려고 한다. 셋째, 다문화가정을 통해 농어촌에 사회적 희년을 함께 일구고자 한다. 농어촌이 살아야 한국교회가 산다. 농어촌교회는 우리가 함께 지켜나가야할 영적 자산이다. 희년의 정신으로 계속해서 농어촌교회를 살리는 이천은광교회와 농어촌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라고 설교했다. 부총무 배현수 목사가 “우리 합동 총회에는 165개 노회와 11,788여개의 교회가 있다. 농어촌부는 16개 상비부 중 하나인데 가장 핫하고 주목받는 상비부이다. 총회의 여러 인물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김상기 목사님께서는 농어촌부 부장을 하면서 많은 일을 하셨고 특히 부부수양회를 잘 진행하셨다. 지금 농어촌부 임원들의 면면은 훌륭하다. 이천은광교회와 김상기 담임목사님께서 농어촌부를 많이 협력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축사 후 이철우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
김병중(Th.D) 01-26 00:45
오정호목사·새로남교회, GMS 차량구입 5천만원 후원
국내외 선교에 앞장서는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가 1월 25일 저녁 7시 30분 “GMS와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며 GMS에 차량 구입비 5,000만원을 후원하고, 전직원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는 훈훈한 시간을 가졌다. GMS(총회세계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의 공식 선교부로, 96개국에 2,6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며 세계선교를 주도하고 있다. 오정호 목사가 “새로남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총회세계선교회와 계속해 동역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예배는 오정호 목사의 인도로 아삽의 자손들이 경배와 찬양, 곽규현 집사(노은11다락방 순장)가 기도, 부부26교구(교구장: 이태규 집사)가 ‘해같이 빛나리’를 특송 후 다같이 행 20:35를 봉독 했다.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가 ‘선교와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귀한 오정호 목사님께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 새로남교회에 와서 설교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특히 선교를 위해 많이 헌신해 주셔서 감사하다. 줄 때 기쁜데 새로남교회는 국내외 많은 곳에 주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새로남교회는 주는 교회이기에 더욱 부흥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주면서 살자. 주님께서도 ‘주는 자가 복되다’라고 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줄줄 안다. 리더는 밥 사는 사람이다. 새로남교회는 카페 수익금(지금까지 28억)을 많이 베풀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이를 배워야 한다.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이다. 인생이 짧기에 사는 동안 좋은 일 하며 살아야 한다. 선교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면 되기에 쉽고, 행복하며, 부흥된다. 인생은 사건보다 해석이다. 시련도 믿음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축복이다. 인생은 고난이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다. 그런데 고난은 지나고 보면 유익이다. 고난 때문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낮아지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관계가 실패하면 인생이 실패하게 된다.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이다. 친절하면 길이 열린다. 감사하며 나누며 베풀고 살자”라고 설교했다. 이어 오정호 목사의 인도하에 ‘사랑, 기도, 말씀, 생명을 주는 교회가 되고, 선교사들을 힘 있게 후원하는 새로남교회가 되도록, 대학부·청년부들 중 선교 지원자들이 구름떼같이 일어나도록, 안디옥교회와 같이 선교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도록’ 다같이 간절히 기도하고 양대식 목사의 축도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GMS와 함께 하는 저녁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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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1-13 15:56
회의 사회의 달인,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 이해중 장로
이해중 장로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장로회연합회 제55회기 ‘실행위원회 및 신년기도회’를 취재하러 갔다. 회장으로 위원회 회무를 처리하는데 역시 깔끔하게 진행했다. 다시 한번 이해중 장로가 사회의 달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해중 장로가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서울·서북장로회연합회 회장 그리고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회의를 주재하는 것을 봤는데 어떤 안건에 대해 이견이 있더라도 잘 정리하면서 깔끔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고 노련하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민감해 보이는 안건이 있었지만 역시 잘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사회를 잘 보는 은사’를 타고난 것으로 보였다. 어떤 의견이라도 잘 경청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듣고 합리적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회의 진행 강사로 나서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취재하러 가서 수많은 회의를 보는데 이해중 장로만큼 잘하는 목사나 장로를 본 적이 없다. 이전 단체에서도 회장직을 잘 수행했기에 올해 전장연도 잘 이끌어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이해중 장로를 사회의 달인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이해중 장로의 매끄러운 사회 덕분에 순서가 많았던 전장연 실행위원회 및 신년기도회가 제 시간에 끝나 식지 않은 점심을 먹게 된 것도 감사하다. -
김병중(Th.D) 01-01 10:17
정영교 부총회장, 새해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자
제110회 총회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2026년 새해에는 이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주는 교회와 총회가 되자”라고 다짐했다. 정 목사는 송구영신예배 설교에서 마 5:13-18을 본문으로 ‘거룩한 영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정 목사는 “신자는 거룩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국민 74%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이러한 가운데 총회와 교회가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원해서 늘 양복 윗도리에 교단 마크를 부착해 다니는데 이는 교단 소속 목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세상 속에 영향력을 미쳐야 비신자가 교회로 오게 된다.”라고 했다. 계속해서 “오늘날 교회 안에 역사(役事)와 능력이 소멸하고 있는데,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며 능력 받아 밖으로, 세상 속으로, 이웃에게로 나가야 한다.”라면서 “신자는 개인의 번영 신앙에서 벗어나 공적인 책임을 지고, 삶으로 신뢰를 증명해 신뢰를 되찾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자.”라고 설교했다. -
김병중(Th.D) 12-12 18:46
이승현 목사, 자랑스런 부흥사 상 수상
여러 부흥사 연합단체의 대표회장 등을 역임하며 부흥사 사역에 앞장서는 이승현 목사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랑스런 부흥사 상을 수상했다. 재미재단 세계복음화협의회(세복협)가 제25차 국민대상 시상식을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한영대학교(총장 한영훈 목사) 7층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이승현 목사에게 자랑스런 부흥사 상을 수여했다. 이날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에 장현승 목사, 자랑스러운 교육자 상에 최대해 박사,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에 윤승지 장로가 수상했다.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 이승현 목사(한샘교회)가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설교를 하며 부흥사의 길로 들어서게 돼 25년이 됐다. 교회를 세우고 담임목사를 돕는 부흥사로 섬기고 있다. 부흥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사명 잘 감당하겠다. 목회자로 본을 보이신 아버님께 감사드리며 한샘교회 성도들에게도 감사드리며, 가족에게도 감사하다.”라고 수상소감했다. 본회 상임총재 한영훈 목사가 “세복협은 1988년 설립되어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다. 피종진 대표총재님께서 오랜 세월 같이 해오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오범열 수석총재께서도 많이 협력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오늘 수상자들은 각 분야에서 큰 일을 하신 분들이시다. 앞으로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본회 수석총재 오범열 목사가 “국민대상 25년 시상 가운데 오늘 4분이 수상하신다. 이분들은 각 분야에서 귀하신 분들이다. 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기쁨을 선사하시기를 기원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앞서, 1부 예배는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의 인도로 총재 민한근 장로가 기도, 회장 김다은 목사가 시 126:1-6을 봉독, 서울한영대학교 박일권 교수가 특송했다.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님 안에 있어야 절로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과 함께하면 주의 일은 어렵지 않고 쉽다. 오늘 수상자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분들이기에 시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이어 회장 김준호 목사가 봉헌기도 후 예장(한영글로벌)총회 당회장 이원해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시상식은 실무총재 고영기 목사의 사회로 운영총재 장향희 목사가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을, 실무총재 박승식 목사가 이승현 목사(한샘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을,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가 최대해 박사(대신대학교 총장)에게 자랑스러운 교육자 상을, 국민일보 김경호 사장이 윤승지 장로(규빗건축사사무소)에게 자랑스런 기업인 상 상패와 부상을 수여했다. -
김병중(Th.D) 12-12 17:43
대신대학교 최대해 총장, 자랑스런 교육자 상 수상
대신대학교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최대해 총장이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랑스런 교육자 상을 수상했다. 재미재단 세계복음화협의회(세복협)가 제25차 국민대상 시상식을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한영대학교(총장 한영훈 목사) 7층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최대해 대신대학 총장에게 자랑스런 교육자 상을 수여했다. 이날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에 장현승 목사,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에 이승현 목사, 자랑스러운 기업인 상에 윤승지 장로가 수상했다. 최대해 박사가 “시126:1에 꿈꾸는 것 같다는 말씀이 있다. 저는 꿈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부족한 제가 받아도 되는가하는 생각을 한다. 힘내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33년 함께하는 대신대학과 가족에게 감사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꿈을 꾸는 것 같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고 이 상을 주신 것 같다. 감사드린다.”라고 수상소감했다. 본회 상임총재 한영훈 목사가 “세복협은 1988년 설립되어 그동안 많은 일을 해왔다. 피종진 대표총재님께서 오랜 세월 같이 해오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오범열 수석총재께서도 많이 협력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오늘 수상자들은 각 분야에서 큰 일을 하신 분들이시다. 앞으로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환영사했다. 본회 수석총재 오범열 목사가 “국민대상 25년 시상 가운데 오늘 4분이 수상하신다. 이분들은 각 분야에서 귀하신 분들이다. 수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기쁨을 선사하시기를 기원드린다.”라고 축사했다. 앞서, 1부 예배는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의 인도로 총재 민한근 장로가 기도, 회장 김다은 목사가 시 126:1-6을 봉독, 서울한영대학교 박일권 교수가 특송했다. 대표총재 피종진 목사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님 안에 있어야 절로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과 함께하면 주의 일은 어렵지 않고 쉽다. 오늘 수상자는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분들이기에 시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설교했다. 이어 회장 김준호 목사가 봉헌기도 후 예장(한영글로벌)총회 당회장 이원해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시상식은 실무총재 고영기 목사의 사회로 운영총재 장향희 목사가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목회자 상을, 실무총재 박승식 목사가 이승현 목사(한샘교회)에게 자랑스러운 부흥사 상을, 대표회장 임다윗 목사가 최대해 박사(대신대학교 총장)에게 자랑스러운 교육자 상을, 국민일보 김경호 사장이 윤승지 장로(규빗건축사사무소)에게 자랑스런 기업인 상 상패와 부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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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구도의 ‘이현령비현령’
제110회 총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각 후보와 지지 세력들은 총대들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고심하고 있다. 과연 어떤 선거 전략을 써야 자기에게 유리할지 방법을 찾고 있다. 인간이란 꽤나 합리적인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은 허당기가 있다. 지난 109회 목사 부총회장 선거 때 나온 말 중 하나는 “영남 독식론”이었다.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비영남인이 부총회장에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106회 총회장 배광식 목사,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 제109회 총회장 김종혁 목사는 모두 영남인이다. 그런데 109회 부총회장 선거 지역 구도는 서울·서북이었는데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도 영남 출신이었다. 그래서 서북지역의 김동관 목사 캠프 측에서는 영남 출신의 독식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영남인인 김동관 목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현재 총회 선거는 3구도로 돌아간다. 해당 지역의 노회에서 후보들이 나오는데 후보들의 고향은 지역과 상관없다. 그러다보니 지역이 순환됨에도 불구하고 다섯번이나 영남 출신 목사들이 총회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5번 중 2번은 영남 지역 구도였다. 나머지 3번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올해 부총회장 출마 지역은 중부·호남이다. 중부지역에서는 정영교 목사가, 호남지역에서는 고광석 목사가 출마했다. 그러자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말이 돌고 있다. 중부 지역의 두 총회장은 제105회 소강석 목사와 제108회 오정호 목사이다. 그런데 출신 지역으로 보면 소강석 목사는 호남 출신이며 오정호 목사는 영남출신이다. 그러므로 5년간 내리 영남인이 총회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출신별” 주장에 따르면 소강석 목사는 비록 중부지역이지만 호남인으로 분류해야한다. 이처럼 지역으로 분류하느냐, 출신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됨을 이르는 말)이 되는 것이다. 정영교 목사는 중부지역에서 나왔지만 호남인이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해 조선대학교 공과대학을 나왔다. 고광석 목사는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지만 서울에 있는 개신대학원대학교를 나왔다. 중부·호남 구도이지만 결국 같은 호남인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단순히 “중부 지역에서 총회장이 두 분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호남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와야 된다”는 “우리가 남이가?”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영남인이 3지역구도에도 불구하고 내리 5년간 총회장을 했다는 것은 서울지역의 권순웅 목사와 중부지역의 오정호 목사, 서울지역의 장봉생 목사가 영남출신으로서 타지역에서 목회의 뿌리를 잘 내렸다는 것이다. 두 지역이 묶여 있는 서울·서북, 중부·호남은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한다. 단순히 한 지역에서 총회장이 나왔으니 다른 지역에서도 총회장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無논리이다. 물론 해당 지역에서 부총회장이 나오기를 다 원하겠지만 나머지 서울·서북, 영남 지역 총대들은 이들 지역과 큰 상관관계없이 투표한다. 그러므로 단지 지역민심에 호소하는 것은 표 확장성이 없어 보인다. 하필이면 두 후보 모두 호남출신이다보니 “신토불이 후보론”도 나온다. 호남지역에서 나고 자라 계속 호남에 있어야 “찐” 호남인이라는 것이다. 선거란 이처럼 합리도, 논리도 없는 구석이 있다. 그러므로 너무 지역 구도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2026년 제111회 총회를 이끌어갈 교단 수장을 뽑는 예비 단계인 부총회장 선거에서 대표 자격이 있는 후보를 뽑아야 한다. 부총회장으로, 총회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후보를 뽑는 투표가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 구도 없이 전국구로 가자는 말이 나온지 이미 오래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합동 총회 부총회장 선거는 국가로 치면 지역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선거 관련 기사 링크: 110회 총회 목사 부총회장 입후보자: 정영교 vs 고광석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660김병중(Th.D) 08-06 01:59 -
1027연합예배, 전광훈 재 뿌리거나 숟가락 얹거나 우려
기대 반 우려 반인 1027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이 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 교계의 반응은 “필요하다”는 것과 “왜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양분된 견해는 여전하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입되어 있는 한 동창회 단톡에서는 누군가 내일 행사를 생중계하는 방송사를 소개하자 몇 명의 회원이 반발하고 탈퇴했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행사를 진행할 때 교계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과 걱정은 이미 광화문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전광훈 측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화면세점 앞쪽을 매 주일 집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인원이 모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전 측은 일간지를 통해 10월 27일 오전 11시에는 예배를 하고, 오후 2시에는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 국민대회”를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결국 1027연합예배와 시간이 겹치고 장소도 겹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지난 10월 24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도 질의했을 때 “그들이 기도회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답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기자는 전 측이 이 행사에 재를 뿌리거나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고 예견한다. 전 측의 입장에서 볼 때 이날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좋은 기회이며 먹을 게 많은 잔칫날이다. 전 측이 강력한 앰프를 사용하면 그 소음으로 1027행사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방해 받을 수 있다. 또한 저들이 저들의 시그니처인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기도회 집회 장소로 밀고 들어오면 1027행사는 결국 전 측의 모임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크다. 내가 전광훈이라도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순수한” 예배와 기도 집회는 전 측의 정치집회로 "오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 측 좋은 일만 시킬 것 같은 우려가 크다. 과연 1027 집회 측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하며 우려스럽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내일 집회에 참석해야 할 것 같다. 내 예측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래본다.김병중(Th.D) 10-26 14:51 -
“목사 면직”, “노회 문제 제기”, "소송"....기자를 겁박하나?
한 통의 내용증명 문서를 받았다. 북일교회 사태에 관해 쓴 기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상대방이 문제 제기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관련기사링크: 북일교회 담임 반대 측, 노회 수습처리위 지시 묵살 난동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100 그러면 기사에 대한 것만 언급해야지 기자인 내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선 넘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관련한 전문이다. 총신대학교 신대원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H노회 소속의 동암교회를 사임하신 후에 J노회 소속의 C교회에 소속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관련하여 교단법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교단법은 목사님이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근거 규정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첫째, 목회자가 노회의 소속을 바꾸려면 타 노회 소속 교회의 청빙을 받아 이명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C교회의 청빙을 받으신 겁니까? 목사님이 C교회의 청빙을 받았다면 그 교회에서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둘째, 목사는 임직서약할 때 신자 목사'로 열심히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목사님이 현재 출석하시는 교회와 그 교회에 얼마의 헌금을 했는지의 근거 서류를 가지고 계십니까? 주일을 범하고 헌금을 포함한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면직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말미에 민형사상 소송을 걸고 내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이 무슨 겁박인가? 2024년 10월 31일까지 목사님의 답변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민형사상 소송과 아울러서 목사님께서 교단 결의를 어기고 일방적으로 취재하여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신 일과 목사님의 현재 신분에 대해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2024년 10월 24일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 드림 이처럼 “목사 면직 ”, “민형사상 소송 제기”, “교단과 소속 노회에 문제 제기” 등등 다양하게 기자를 겁박하는 이들이 바로 ‘북일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정체인가? 저들이 궁금해하는 내 신상은 저들이 민형사상 소송을 하면 그때 밝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목사 면직 사유가 아니니 그때 내가 그들을 “명예훼손, 협박”으로 맞 소송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끝으로 나는 북일교회를 이미 2번 취재하러 갔었다는 것도 밝힌다.김병중(Th.D) 10-2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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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김병중(Th.D) 03-02 15:11 -
【단상】 세월은 빠르다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김병중(Th.D) 02-09 11:35 -
【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김병중(Th.D) 02-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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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2】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담임목사의 선교이해 선교적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되는데 담임목사의 선교이해가 너무나 중요하다. 담임목사는 매주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목사님들은 해외선교만을 선교라고 이해한다. 목사님들처럼 성도들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이주민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지 않아서 이주민선교하는 많은 사역자들이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런데 나를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신 조원형 목사님(현재는 천산중앙교회 원로목사)은 국내에 온 이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가 이들을 품고 선교하시고 선교사로 파송하시고 국내에 들어 와서 선교하실 때에도 지원을 하여 주셨다. 그래서 몽골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페루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총회에서는 초대 총회 이주민선교협의회 회장을 맡으셔서 교단 내에 이주민선교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셨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는 연초에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부흥회를 하였다. 교회에 있는 필리핀, 몽골, 페루 성도들은 교회의 한 가족처럼 지냈다.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교회의 큰 행사에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필리핀 성도 중에 한 명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숙소에 와서 잠을 자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회사에서는 일을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무관심하였다. 이때에 담임 목사님은 필리핀에 있는 사망한 가족들만 아니라 필리핀 동료 가족들 모두를 모든 비용을 교회가 마련해서 한국에 초청하여 관광을 하면서 모든 가족을 위로하였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 교회에 축복하셔서 630평의 공장 부지를 주셔서 그 땅이 지금 그 교회의 교육관과 선교관이 되었다. 담임목사가 선교를 해외선교만 아니라 국내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도 중요한 선교로 이해하고 헌신 할 때에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나를 선교사로 파송한 천산중앙교회에서 눈으로 확인하였다.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1-22김병중(Th.D) 02-28 17:03 -
【양대식 목사 칼럼10】 성품과 문제
성품과 문제 사람마다 성품이 다릅니다. 어떤 성품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타고난 성품과 기질이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품이 나쁘고 과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온유와 양선은 좋은 성품입니다. 성품이 부드러우면 관계가 잘 되고 갈등이 적어집니다. 성품은 타고나면서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해 성품이 다듬어지게 됩니다. 성품의 변화가 최고의 기적입니다. 성령 받고 은혜받아야 성품이 변화됩니다. 모세는 성품과 기질이 고집스럽고 강했는데 40년 광야 연단 받은 후 성품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해결합니다. 사도행전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 착한 성품으로 격려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성품이 선해야 관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성품이 악하고, 강하고, 교만한 자는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성품이 악하고, 과격하고, 급하면 함부로 말하고 폭언하게 되어 공동체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한 번 쏟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절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언어는 성품과 인격의 열매입니다. 폭언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문제가 생기고 후회하게 됩니다. 성품이 온유한 자는 인내하고 누구와도 다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부딪치면 문제가 생기고 관계가 깨지며 후회하게 됩니다. 성품이 삶의 능력입니다. 성품이 좋은 자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덮어주고 해결합니다. 성품은 인격입니다. 사람이 되고 사역해야 합니다. 성품이 사납고 악하여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리더의 성품이 중요합니다. 성품이 선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인데 닮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삭은 온유한 성품으로 다투지 않고 양보함으로 존경받게 됐습니다. 외유내강의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됐습니다. 나쁜 기질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성품이 최고의 성품입니다.김병중(Th.D) 02-25 14:44 -
【서기원 목사1】 88 올림픽과 외국인 노동자 선교
88 올림픽과 외국인 노동자 선교 1988년은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함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국민의 응원의 함성과 성공적 개최는 국민의 사기를 높여 주었고 세계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Korean dream을 꿈꾸며 몰려 오기 시작했다. 당시의 한국의 경제 상황은 좋은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로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경제적인 부를 얻고자 하는 세계인들의 수요가 맞물려서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다수의 외국인들 중에 중국동포들이 많았다. 당시 서울역 근처는 한약을 판매하기 위해서 모여든 중국인들이 가득 메웠다. 그 이후 중국인들만 아니라 동남아의 여러 나라, 남미 등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몰려든 외국인들에게 많은 사회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돕기 시작했다. 이 때에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회를 찾은 외국인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교회가 돌보기 시작했다. 의료진료, 한글공부, 상담, 이미용 봉사 등 다양한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은 관광 비자를 가지고 들어와서 일하는 불법자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일부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불법자들을 보호하면서 돕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도와야 한다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고 헌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레위기 19:33-34 “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이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교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본인도 선교사로 헌신하고 훈련을 받는 중에 부목사로 부천의 천산중앙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이 때에 교회 근처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일에 교회를 찾아옴으로서 이들과 만나게 되어서 외국인노동자 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국동포가 약을 팔기 위해서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필리핀 노동자들. 그 후에는 몽골인 노동자들, 남미의 페루인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만나게 되었다. 당시에 천산중앙교회는 이들을 가족처럼 환영하고 모든 성도들이 이들을 맞이했다. 교회의 중강당을 외국인 노동자의 예배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어권별로 칸을 막아서 몽골어 권, 영어권. 스페인어 권으로 구분하고 동시 통역사들을 세우고 11시 예배에 한국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는 언어권별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며 성도들이 한 가족처럼 대하니까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 사랑이 넘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다. “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행 10:20김병중(Th.D) 02-24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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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김병중(Th.D) 03-03 14:17 -
【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김병중(Th.D) 03-02 14:53 -
【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김병중(Th.D) 03-02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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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3-29 09:46
“감사로 채워지는 인생!”(살전 5:18)
우리 신앙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과 뜻과 목적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보다 훨씬 큰 능력과 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일에 감사함이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언급합니다. 뜻이란 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 목적이 이 감사에 담긴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의 수준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어떤 일이 만족을 주거나 소원을 충족할 때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대한 감사는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는 내면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감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감사보다 깊고 넓은 의미가 담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도라면 더 이해하고 누려야 할 감사에 대한 의미와 삶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런 깊은 감사를 체험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남겼던 감사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이 만나서 함께 즐거이 고백하고 노래했던 것이 시 136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고백했던 것은 바로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을 뵙고 경배할 때 마다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이.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감사가 그들의 신앙 가운데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알게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인자 인애와 자비가 풍성함을 넘어 영원합니다.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착하다 순수하다 라는 개념으로만 알면 너무 적게 안 것입니다. 선하심은 그 존재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받으셔서 만족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선으로서 그 분의 선하심은 피조물 안에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십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좋은 것, 즉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원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선은 윤리적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를 위해 호의, 은혜를 베푸시며 관대하게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분의 선함에서 흘러오는 자비와 긍휼, 사랑, 인애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나옵니다. 영원하며 끝이 없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예가 바로 모성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규칙으로 정하여 윤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가 나옵니다. 은혜란 호의와 구별되는데,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호의입니다. 그런데 받을 자격이 없는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하여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긍휼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비참함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내가 나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림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그들에게 정착할 곳으로 인도하시며 그 땅의 소산물을 수확하도록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절기를 통해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즐기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옵니까? 하나님은 예수의 인격 안에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담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선하심을 따라 은혜와 진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즉 원수같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에 거하는 우리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창기와 세리라도 영접하고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긍휼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통해 흘러 나오는 사랑, 은혜, 긍휼, 자비를 담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받아들였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 안에서 하신 일과 행하실 일이 크고 놀랍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로 고백하며 살아갈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감사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 안에서 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골 2: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특성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령께서는 주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하심이 풍성한 사랑,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해 한 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한해의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한 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담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실의 가정과 일터, 직장, 그리고 삶의 터전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담아 우리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땅의 소산물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한 결과 얻은 열매는 하나님이 능하게 하시고 건강하게 견디게 하셔서 이룬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함께 하신 결과 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세례를 받고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한 살 더 먹고 한 해를 더 살아가는 것은 은혜의 삶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이 먹음에 대하여 한 해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일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후회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삶의 내용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 살 더 먹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치지 않는 사랑과 긍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지금 우리 곁에서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엡 5:18-20절을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함, 즉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 삶은 말씀과 찬송으로 예배하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과 감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 봉사 하는 것입니다. 감사 헌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더불어 감사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 아래 삶을 감사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거대하고 커 보이는 일을 성취하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어렵고 힘든 것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인도, 크고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당신의 크나큰 은혜를 담습니다. 다른 꽃 길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완벽한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실수하여 눈물짓는 우리의 삶 안에서 감사의 고백을 통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일에 감사로 당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고백을 당신의 삶에 채워야합니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감사함으로 그것을 행해야합니다. 할 수 있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합니다. 이럴 때 때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기도 합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감사로 채워진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감사하는 감사촌 마을에 삽니다. 마치 아이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함께 하는 존재로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즉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불평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통해 놀랍게도 예수와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성령의 충만한 일하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인생을 감사로 채워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합시다. 항상 감사합시다. 매주 마다 감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기쁨을 나눕시다. 그리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인생을 꽉꽉 채워내어 감사의 인생을 수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
김병중 03-18 16:16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김병중 03-18 15:18
빈들에서의 감사(마태복음 14:13-21)
어느 날, 유대사회에 등장한 예수님의 행보는 매우 이례적이었고,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악을 행한 자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의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따랐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은 각종 병든 이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해가 중천을 지나 석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경청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때는 저물어 가는데 먹을 것이 없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때가 저물었습니다.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거절하며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의외의 답을 들은 제자들은 난처해합니다. 이 많은 무리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준비한들 어디서 이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습니까? 바로 그때에 순진한 한 제자가 “예수님 여기 도시락 하나가 있습니다.”라고 내 밉니다. 그 도시락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었습니다. 아이가 1끼 먹을 수 있는 보리떡 5개와 작은 생선 2마리가 든 도시락이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잘 것은 도시락으로 그날 모든 자들이 배 불리 먹도록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날 그 기적을 맛본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날의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일까요?어린 아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내민 도시락일까요? 먹거리를 찾아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 어린아이 도시락을 갖고 온 한 제자의 부지런함일까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열심일까요? 모든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19절 말씀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축사’입니다. 축사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감사기도’, NIV는 'thanks'입니다. 헬라어 ‘유로게오’(ευλογησεν)는 ‘감사를 드리다’입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 도시락을 앞에 두고서 감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기적의 원동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기도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감사기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행동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은 빈들입니다. 빈들이란 광야요, 황량한 불모지요, 텅 빈곳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빈들에서는 절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들에서 감사했습니다. 오병이어는 아이 하나도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곳에 모인 자들은 장정만 5천명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들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2만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양식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빈들에서 감사한 예수님의 모습은 그날의 기적으로 해피엔딩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앞에서도 감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를 배부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오늘 우리들의 삶이 마치 빈들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텅 빈 빈들 말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수고해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든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는 흙수저 인생이라 지금의 환경을 벗어나기란 요연해 보입니다. 언제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기약이 없어 보입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수험생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치고 나면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 낙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또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도 취업이 잘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 될 때까지 휴학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지못해 이어갑니다. 취업이 되어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꿈꾸는데 현실이 이런 꿈도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여 공시 생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썼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질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소망하는 삶이 있지만 삶의 현장은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빈 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빈들이라고 불평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절망하면서, 남 탓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빈들이라고 인상 쓰면서, 좌절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2. 빈들에서도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낡아지지 않게 입혀주셨습니다. 신발이 해어지지 않도록 신겨주셨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책임져 주십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만큼 물질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원했던 진로가 펼쳐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을 벗어버리십시오. 오히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부터 가지십시오. 빈들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감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목회자로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자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단 한명도 굶어 죽은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입을 옷이 없어서 얼어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을 신발이 없어서 발병이 나서 죽은 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100% 책임져 주시구나!’ 그래서 저는 제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걱정하지 말라고... 올해 우리 집 막내딸이 지난 주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친 후에는 아쉬움이 남고 자신이 꿈꾸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걱정도 찾아옵니다. 저희 부부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딸! 하나님이 네 길을 여신다. 걱정하지 말고 항상 힘내라”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제 인생을 여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딸들의 길을 왜 여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어디 우리 가정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빈들과 같은 현실에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정말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감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인생을 주의 은혜로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아무리 믿으려 해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은 ‘감사’를 ‘구원’의 수준만큼이나 높이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고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내 삶에 행복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서 감사 인생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김병중 03-16 23:05
"하나님의 목적과 성공이 있는 삶"(여호수아 14:5-15)
여섯 살 된 남자 아이가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해서 수업을 듣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집에서 하던대로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오줌'이라는 단어가 껄끄럽게 들린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얘,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지저분한 단어를 쓰지 말고 다음부터 화장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 후로 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운대로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는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겁니다. 혼자 어두운데 나가는 게 무서워서 옆에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웁니다. 엄마를 막 흔들어 깨우며 "엄마, 휘파람이 불고 싶어요.". 엄마가 잠이 덜 깨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중에 휘파람 불면 뱀 나와요, 휘파람은 아침에 불고 지금은 그냥 자거라." 그런데 아 아이가 너무나 참기가 힘들어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나 지금 "나 도저히 못 참겠어요. 지금 휘파람을 불어야 되요." 그래, 엄마가 졸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엄마 귀에다 휘파람을 조용히 불어야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가는 선배들, 선생들,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가 따라갈 귀한 지도자 갈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입니다. 지금 2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유일한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고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가나안 땅은 아직 싸워서 얻어야 될 땅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여호수아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좋은 땅, 이미 정복한 땅을 달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요구한 땅은 가장 정복하기 어렵고 힘든 땅입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열 정탐꾼이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바로 거인족 아낙 자손이었습니다(골리앗의 조상). 이곳 이름이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그 의미도 얼마나 힘센 거인이 살았는지 이름도 “거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땅을 요구합니다. 왜 갈렙은 이곳을 요구했을까요? 저는 이 갈렙의 모습에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고 제가 받은 은혜를 나누려고합니다. 첫째, 갈렙은 끝까지 믿음의 비전을 놓치지 않은 지도자입니다. 갈렙은 민수기 14장 이후 광야를 떠도는 38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가나안 땅에 대한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의식이 분명한 지도자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꿈이 분명해졌고 이제는 목적지까지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정한 보이지 않는 목표, 내 자신만을 위한 뜬 구름 잡는 목표는 바뀝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매일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지고 분명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마라톤의 세계 최고 기록은 독일 BMW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2시간 2분 57초에 완주하며 사상 처음으로 2시간 2분대에 진입한 데니스 키메토(30·케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모릅니다. 마라톤 선수가 2시간 10분 안에 42.195킬로를 뛰려면 100미터를 평균 17-18초 사이를 계속 유지하며 뛰어야 합니다. 그럼 마라톤 선수들이 전반부에 더 잘 뛸까요? 반환점을 돈 후반부에 잘 뛸까요? 예! 상식적으로는 전반부에 힘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잘 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빨리 뛰는 것은 반환점을 돌고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인지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시간이 지날수록 골인지점인 가나안 땅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려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자기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확신을 주고 같이 성공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둘째로, 갈렙은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지도자였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면 한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도우심 밖에는 없지만 정복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10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지금 갈렙의 나이 85세입니다. 그 땅은 가장 강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또 골짜기입니다. 무기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전쟁을 해 본 사람도 없습니다! 등등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85세지만 40년 전과 똑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땅을 당연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체력이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믿음이 똑같을 뿐입니다. 나중에 보면 이 땅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직접 전쟁을 하지 않고 자기 조카인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통해 다른 지파의 땅 정복을 도와줍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만큼은 직접 정복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직접 노년의 나이에 전쟁을 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이 40년 전 백성들이 포기한 땅이었는데 그 때 갈렙은 정복할 수 있다고 당당히 외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도 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는 백성 전체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별로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제일 많은 갈렙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어려운 땅을 정복하므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하니 너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과 은혜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갈렙같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강한 군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마치 갈렙은 이미 이 땅을 정복한 사람처럼 달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마치 정복한 것처럼 이제 가지라고 허락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이 들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을 가리켜 떡 줄 사람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을 김칫국 신앙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김치국은 많이 마실수록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도 이런 김칫국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씀이 8,9,14 절에 3번 나옵니다. 그런데 갈렙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나오는 본문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특징짓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노아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 요셉은 형통한 신앙처럼 그 사람을 특징짓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갈렙의 신앙 특징은 온전히 좇은 신앙입니다. 좇았다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만족시켰다는 뜻이고, 하나는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의미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믿음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찰떡 신앙, 주님께 찰떡처럼 달라붙어 만족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찰떡 신앙을 가진 사람이 김칫국 신앙, 곧 성공의 신앙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나안 정복이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이면서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노인이지만 바로 우리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후배와 자녀들에게 바로 이런 모델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갈렙처럼 살아가면 주님의 성공을 얻을 뿐 아니라 나의 성공도 같이 얻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 누가 가장 좋습니까? 예!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갈렙 자신과 유다 지파가 제일 좋은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성공도 이루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공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성공은 이루어도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사는 교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이민을 오셨는데 목사님이 근황을 물어봅니다. 집사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요즘 미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그래요? 뭘 하시는데요? 저 요즘 청소 열심히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뭘 하십니까? 제가 요새는 미국을 누비고 다닙니다. 뭘 하시는데요? 제가 요새 봉제 공장에서 열심히 바지를 누비고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자리를 잡고 기술을 배운 겁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또 만났습니다. 집사님 요새는 뭐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미국을 주름잡고 다닙니다. 하루 종일 세탁소에 옷을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 분이 이제 돈을 모으고 기술을 배워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중요한 것은 미국을 쓸고 다니든 누비고 다니든 주름잡고 다니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미국 교포들뿐이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느냐?를 알고 사는 겁니다. 그 목적을 알고 살아야 올바른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막고 잘 입고 잘 살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내가 사는 모습을 통하여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갈렙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참된 성공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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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 08-10 00:23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김병중 08-09 23:49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김병중 03-18 17:55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김병중 03-16 23:19
『고난 중의 신자에 대한 설교자의 청중 이해』
ㅣ. 들어가는 말 청중은 하나님과 영생의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존재이다.1) 청중이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설교자의 설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청중은 종종 자신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설교자의 설명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건이 자신이 들은 말씀과 모순되게 느끼는 현실 때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까닭을 알 수 없고 감당 하기 어려운 고난을 경험할 때이다.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팀 켈러는 고난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고 한다.2) 그렇다면 여러 가지 까닭 모를 고난을 경험할 때 언약 백성인 청중은 그 고난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면 설교자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설명할 것인가? 고난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 만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설교자의 태도 역시 중요한데 설교자는 고난을 겪는 청중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발견하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때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치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설교자는 이런 상황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하여 신자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 안에 있음을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점에 대하여 연구자는 먼저 로고테라피 개념으로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본 다음,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각각의 모델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이승진,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3.2) 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 25, 16. 이어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을 제안 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침묵과 로고테라피 1. 고통의 문제와 하나님의 침묵 20세기 최고의 문호(文豪) 가운데 한 사람인 C. S. 루이스(1898~1963)는 남달리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였고 그 후 그의 형은 술을 위안으로 삼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겪은 루이스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후 신앙을 잃어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랜 방랑 후에는 다시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59세의 늦은 나이에 한 불행한 여인과 결혼하여 크나큰 행복을 느꼈으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의 부인은 3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이런 많은 고통을 경험한 루이스는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민을 표출하였다.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완전히 행복해지기를 소원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가 원하시는 무슨 일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피조물들은 행복 하지 않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선이 부족하든지, 능력이 부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두 가 지 다 부족한 것이다.4)이렇게 의문을 던진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하는 문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글자에 통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5)하지만 루이스는 “고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하나님은 악한 인간들이 그 형제들을 그렇게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는지 의문을 제기한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6) 사람이란 타인의 고통보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크게 느끼는 존재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강정훈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은 남의 배에 커다랗게 남은 수술 흔적보다 내 손톱에 낀 가시 자국이 더 아프다고 한다.”7) 이처럼 청중은 각자가 누구보다 쓰라린 고통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루이스와 같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캔 가이어(Ken Gire)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그의 책에 The North Face of God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은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등반가가 가장 오르기 힘든 북쪽 능선(the north face)처럼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캔 가이어에 의하면, 에베레스트산은 여러 개의 능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북쪽 능선이 등반하기 가장 어렵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능선을 타고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8) 3) 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6-10.4) C.S. 루이스/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33.5) Ibid., 63.6) Ibid., 129.7)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 77. 성경 인물 가운데도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요셉이나 다윗은 긴 기간 동안 까닭도 모르고 그 끝도 모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 까”라고 부르짖은 후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하였다. 모세는 요셉이나 다윗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버림받음’을 경험했다. 그 결과 모세는 자신의 꿈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 왔을 때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소명을 거절할 정도였다. 캔 가이어의 말처럼, 성경 인물들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보다 그들이 당한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9) 2. 언어의 기능과 설교자의 사명 하나님은 이처럼 청중이 당하는 고난의 상황에서 침묵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설교자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에 설교자는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로 밝히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언어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설교 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언어의 기능에 대하여는 발터 벤야민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으신 모든 것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말씀으로 만드는 대신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드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을 방출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셨다.10)하나님으로부터 말의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의 사명은 이 언어를 통해 ‘사물 언어’(language of things)를 ‘구술언어’(oral language)로 드러내는 것이다.11) 설교자의 사명은 우선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를 청중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청중이 경험하는 사건들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의도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설교자의 중요한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이승진 교수는 목회 사역의 핵심을 “구술언어와 사물 언어를 신자들 앞에서 서로 연결 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표현한다.12) 그렇다면 청중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설교자는 어떻게 해답을 줄 수 있을까? 내세에 천국의 영광을 누릴 성도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하는 청중의 질문에 설교자는 어디에서 해답을 확보하여 청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해답을 성경에 담아 놓으셨기에 매번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가지 이유로 그 해답에 접근하지 못한다. 우선, 고통이 없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에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팀 켈러의 말처럼 인간은 “고난이 닥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제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13)그러다가 막상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순간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리처드 아스머는 자신이 목사요 실천신학 교수이면서도 모친이 교통사고로 갑작 8) 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 20-21.9) Ibid., 18.10)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84.11) Ibid., 78.12) 이승진,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223.13)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6. 스럽게 사망했을 때 몹시 당황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머는 고향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14) 아스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중이 고통스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럴 때 성경적 관점 에서 고통을 설명해 주어 고통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3. 고통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까닭 모를 고통 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교자는 어떻게 해석해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우선 고통에도 값진 뜻이 있다고 한 옥한흠 목사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옥한흠 목사는 고난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덧붙여 고통은 거룩한 것이며 대단히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15)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들어보자. 빅터 E. 프랭클은 유대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악명 높은 나치(Nazi)의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의 생존자이다. 그는 가진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알몸 상태로 발가벗기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말살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아무리 무서운 악몽일지 라도 그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16)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빅터 E. 프랭클은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라고 한다.17) 빅터 E. 프랭클이 창안한 로고테라피(Logo theraphy) 개념에 따르면,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이런 노력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그래서 빅터 E. 프랭클은 고통이란 그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 절대 고통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희생의 의미와 같은 어떤 의미를 찾는 순간부터 절대 고통이 아니며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존재이다.18)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을 가진 존재인 청중은 고통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옥 한흠 목사는 고난을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하면서 신자는 고난 배후에서 일 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라고 충고한다.19)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선용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선용이란 첫째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데 선용하시며,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격을 형성하는 데 고난이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20) 옥한흠 목사와 빅터 E. 프랭클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고통에는 고통보다 더 큰 의미가 있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가는 데 유익하다. 그러나 신자가 막상 고난을 겪을 때는 그 상황을 성경적 관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경험할 때 청중은 고난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삶에서는 왜 실현되지 않는지 회의(懷疑)하게 된다. 그러므로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 상황을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이다. 14) 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 40-41.15)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234, 15-16.16)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 51.17) Ibid., 10.18)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47-48.19) 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11, 16.20) Ibid., 18-19.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III. 대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들 1. 재난을 바라보는 설교자의 관점 신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때로는 온 국가적으로 함께 당하는 대재앙도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으로 여러 가지 정상(正常)이 비정상(非 正常)이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비정상(Ab-normal)이었던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새로운 정상(New-normal)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경제가 무너지며 코로나 우울증(Corona Blue)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백신(vaccine)에서조차 부작용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21) 이런 때에 신자들은 왜 이런 일이 왔으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고 싶어 한다. 코로나 팬 데믹 외에도 세상에는 종종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며 설교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대재앙의 의미를 해석하여 설명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 부터였다. 1755년, 전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대재앙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 많은 논의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당시 대지진이 의인 욥이 당한 고난처럼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하게 살았던 도시 리스본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이기에 성경적 설명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면 대재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 사건과 2011년 동일본에 지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설교 사례를 살펴보자.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북부에서 모멘트 규모 9.1의 해저 지진과 15미터 높이의 쓰나미 재앙이 발생하여 28만 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한국 교회의 한 설교자는 성탄절과 주일이 연속되는 거룩한 날에 쾌락을 즐기러 간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는 관점으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관점의 설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는커녕 교계 안팎에서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다.22) 한편,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가 지진의 원인이 일본 국민의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설교해서 역시 파문이 일기도 했다.23)이 두 사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결국 대재앙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들 그러면 대재앙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관점인가? 이승진 교수는 재앙과 고난에 접근하는 모델로서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 대속적인 고난 모델, 신비적인 합일 모델, 종말론적 전망 모델 등의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자의 고난에 접근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4) 21) 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293622)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37.23)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24)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267-76. 1) 우선 ‘징벌적인 고난의 모델’의 관점은 고난의 중요한 원인을 당사자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도 이런 인과응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집요하게 욥에게 회개를 요구했다. 물론 고통에 대한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죄를 범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C. S. 루이스는 고통을 죽어 있는 세계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로 본다. 루이스에 의하면 고통은 악인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25) 그런데 오늘날 지성인들 가운데는 보응 사상이나 징벌 관념을 말소해 버리고 범인의 개과천선이나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모든 징벌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26) 하지만 모든 고난을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합당하게 징벌하시기보다 심판을 유보하시면서 인간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며 그들이 당하는 재난 사건을 교훈 삼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징벌적 고난의 모델은 모든 고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징벌적 고난 모델이 형평성과 일관성에서 모순점을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대안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모델’이다. 이는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반드시 자신의 죄악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고난 저변(底邊)에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고난의 의미나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한 미래의 가치로 무책임하게 희석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청중의 불평을 막는 효과는 있겠지만 고난 중에 처 한 신자를 만족시키는 설명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3) 징벌 모델과 섭리 모델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고난의 목적이 교육 혹은 연단을 위해서 라고 설명하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이 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신자는 고난을 통과함으로 신앙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연단 후에는 죄에 빠질 가능성도 줄어들어 그에 따른 징벌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생겨난다. C. S. 루이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평안을 얻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배울 것이며, 주님께 돌아가는 길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27)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영적인 훈련을 받음으로 천국 백성답게 성숙하여 간다는 이 설명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 모델 역시 모든 고난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욥처럼 남달리 훌륭한 신자가 오히려 남보다 모진 고난을 받는 경우나, 고난을 통한 연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 같은 유아들이 당하는 고난 등은 이 모델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4) 대속적인 고난 모델은 모든 종류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다가 희생을 당한 경우, 혹은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自取)한 경우에 대한 설명에 동원된다. 예를 들면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던 사람이 오히려 사고를 당해 희생 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 유다의 경우처럼(창 44:33)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다. 하지만 대속적 고난 모델은 다른 사람의 죄나 실수로 피해를 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경우 이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모델은 특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5) 신비적인 합일 모델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인 합일 모델에 의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전능을 포기하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능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해서만 생각되어야 한다.28) 이러한 십자가 신학을 수용한 학자 가운데는 우선 본회퍼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등이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전능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설명한다.29) 한스 요나스 역시 하나님을 무능력한 하나님, 무저항의 하나님, 피조물로 인해 고통받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30) 팀 켈러 역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을 옹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고통과 악의 근원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움켜쥐셨다면 인간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 내셨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31)팀 켈러에 의하면 “크리스천들이 역경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주님의 고난을 강조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거룩한 주권이라는 개념을 놓쳐 버리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설명하는 신학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라면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우려도 표명하고 있다.32)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겪을 때 거기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고난을 제거하기보다는 인간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면서 새 하늘 과 새 땅의 목적지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신다.33) 그러므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적 합일 모델의 설명이다. 이 모델은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신자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 심을 포기하고 무력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며 구원할 수 있 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신비적 합일 모델은 고난 속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해버린 약점이 있다. 6) 지금까지 시도한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들은 고난의 원인과 의미를 다 설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신자의 모든 문제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날에 일순간에 해결될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 (Johann Baptist Metz)는 종말론적 전망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승진 교수는 메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8) 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93.29) Ibid., 94.30) 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총」 33 (2012), 262.31)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96.32) Ibid., 233, 240.33)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274. 메츠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츠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로부터 부활절의 아침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을 부정한다. 아직 인간의 세계는 십자가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기에 부활로 넘어가는 것을 승리자의 신화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4)하지만 종말론적 전망 모델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 미래의 소망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설명이지만, 고난 자체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고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3. 고통의 불가피성과 고난의 유익 앞에서는 고난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을 살펴보았는데 각각의 모델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한계점이 있는 설명이다. 고통을 당하는 청중은 개인마다 혹은 그들이 경험하는 사건마다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이 당하는 고통의 정황을 살펴서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모델로 고통의 의미를 적용함으로 청중이 지불한 고통이라는 대가보다 더 큰 유익을 누리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교육적인 고난의 모델’을 중심으로 고난의 유익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자 한다. 이런 관점은 우선 신약 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탁월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팀 켈러로부터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 환난과 고통의 의미를 설명하는 신약 저자 가운데 우선 야고보를 생각해보자.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는 언제나(ὅταν, whenever)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은 신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약 1:2-3). 이와 같은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신자가 온전하게 되는 데 있어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베드로 역시 신자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즉 고난은 신자에게 없어야 하는 것인데 운 나쁘게 고난을 당한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라고 한다(벧전 4:12-13). 한편, 사도 바울은 고난이 신자를 연단하여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 만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은 가벼운(혹은 견디기 쉬운 ἐλαφρός)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4:17). 고난이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면 신자에게 있어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에 종교 개혁자와 설교자들 역시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역설(力說)하기 를 주저하지 않는다. 팀 켈러는, 고난이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는 루터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난에 맞서 이겨 내도록 도와줄 기쁨과 사랑을 얻기에 앞서, 고난은 우선 우리의 교만을 비워내게 해 준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면 주님은 거기서 아무것도 빚어내실 수 없다.”35) 그러므로 악과 고통이 존재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부정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의 유익을 바라보아야 한다.36) 고난의 유익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팀 켈러가 소개하는 고난의 유익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37) 34) 이승진,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53-54.35) 팀 켈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82-83.36) Ibid., 142.37) Ibid., 300-303. 1) 고난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는다.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은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 보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흠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2) 고난은 우리 삶의 여러 좋은 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그 결과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게 해 준다. 3) 고난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C. S. 루이스도 말했듯이 형통할 때 하나님은 속삭이시지만, 고난 속에 있을 때는 확성기로 소리치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막다른 길로 우리를 몰아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단단히 붙는 경험을 통하여 상상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과 기 쁨을 맛보게 된다. 5)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통스러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몸소 고난을 경험하면서 고통당 하는 다른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품게 된다. 이상으로 청중에게 설명할 고난의 의미와 유익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설교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고통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 것뿐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청중(신자)에게 접근하는 태도와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청중이 고통당하는 때에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 청중이 그 설교자를 신뢰하고 그의 설교에 경청(傾聽)할 여부(與否)를 결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선 신정론의 설명의 한계 점을 확인한 후에 그 대안을 마련해보기로 하겠다. IV. 신정론의 한계점과 타인의 얼굴 1. 신정론의 의의(意義)와 평가 앞에서 살펴본 고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여섯 가지 모델의 공통점은 고난에 대해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 辯神論)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신정론으로 번역되는 theodicy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θεός와 의로움을 뜻하는 δίκη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신정론은 때로 무고한 자의 까닭 모를 고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신정론의 관점으로 볼 때 고통은 선을 더 두드러지게 하고 더 큰 선에 이바지하므로, 부분으로서의 고통은 전체로서는 선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은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 혹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신정론을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어거스틴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상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합리한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신정론을 피력하려고 노력하였다.38)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라이 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악은 선의 허용된 결핍”이라는 해결책을 내어놓았다.39) 라이프니츠가 변신론에서 표방하는 것은 “고통과 죄악이 존재하는 세계와 최선의 조화와 행복으로 구성된 세계는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의 계산에 따르면 현존하는 악은 최선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40) 38) Gottfried Wilhelm Leibniz/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아카넷, 2014), 28-31, 441-50.39)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55-56.40) Ibid., 62-63. 그러나 이런 변신론의 설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강영안은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1)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대해 ‘낙관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평가했다. 그런데 막상 그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 된 계기는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리스본 대지진 때문에 왔다.42) 2. 리스본 대지진과 신정론의 한계 리스본은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로 포르투갈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首都)이다. 15세기 리스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재화로 인해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렸으며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시가지와 건축물은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도시의 2/3가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었다.43)리스본 대지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왜 다른 사람보다 더한 불행이 찾아오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신정론이 비판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리스본이 여타의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건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시라디(Nicholas Shrady)는 당시 리스본의 경건함을 다음과 같이 묘하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주교좌성당 외에도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공소가 121곳, 수도 원이 90곳, 다양한 수도회들이 150곳이나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성당이나 노변의 십자가, 성모마리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리스본 인구 25만 명 중 10퍼센트가 수도사였다.44)특히나 대지진이 발생한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서 교회력에서 엄격하게 지키는 축일로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다. 이날 아침 종소리가 울리자 미사를 위해 길을 나선 인파로 리스본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45)이처럼 경건했던 도시가 오전 9시 30분경에 시작된 첫 지진에 이어 몇 차례의 여진이 발생하자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건립된 리스본이 폐허로 변했다.46) 그리고 오전 11시경, 지진이 발생한 지 90분 뒤에 발생한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휩쓸어갔 다.47) 대지진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망한 인구는 약 4만 명에서 6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48)리스본이 대지진 사건으로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이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볼테르까지도 생각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49) 이처럼 고난의 문제를 신정론만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4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210.42) Nicholas Shrady/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서재, 2009), 142.43) 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1.44) Shrady, 『운명의 날』, 18-19.45) Ibid., 21,46) 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122.47) Shrady, 『운명의 날』, 30.48) 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8.49) Ibid., 11-12. 3.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설교자는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레비나스의 철학 “타인의 얼굴”과 “대속의 고통” 개념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다가갈 한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선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해 고통당하는 청중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강정훈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가 골수암으로 시작한 병이 난소암으로 악화되어 5년간 투병하다가 ‘죽기에는 많이 아까운’ 41세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경험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을 정리해서 입을 연 강 정훈은 ‘아직도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그가 슬픔에 빠졌을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이 와서 사모님이 좋은 데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비인간적인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울고 있는 미망인들에게 울지 말라고 비정하게 요구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강정훈은 단호하게 말한다.50) 그러면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접근하는 바람직하고 성경적인 태도는 무엇인가? 프랑스의 유대교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년~1995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아우슈비 츠 대학살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설명하려는 변신론은 그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는 어떠한 쓸모도 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레비 나스는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없고 의미 없으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만이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51)물론 고통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을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다소 과격한 면이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주장은 고통을 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통받는 자가 ‘외부의 폭력’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나에게 도덕적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윤리적 사건을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얼굴’은 존재 자체를 통해 나에게 호소하고 윤리적 의무를 일깨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내보이는 방식을 레비나스는 ‘계시’라고 부른다.52) 레비나스가 여기서 ‘계시’라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한 까닭은, 얼굴의 현현은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얼굴은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이 계시로 다가올 때 필요한 것은 대속의 고통을 나눌 의무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이라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에게 질책하고 호소하는 타자의 저항을 대할 때, 나는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며 나의 의무이기 때문 이다.”53)고통받는 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되는데,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 요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향유를 포기할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계, 즉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이 열리게 된다. ‘나’는 이러한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환대해야 한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나’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벌써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졌다고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의 자리에 세워지는 일을 레비 나스는 대속이라고 한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 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54) 50)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78-80.5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227.52) Ibid., 148.53) Ibid., 152. 54) Ibid., 186. 이처럼 레비나스는 고통이 담긴 타인의 얼굴의 현현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합리적인 추론에서 벗어나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의 윤리적인 접근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레비나스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중요한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청중을 위한 설교자의 태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고통당하는 청중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먼저 청중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모델에 해당하는지 세심하게 분석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통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청중이 놓치지 않도록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때 설교자는 욥의 친구들과 같이 훈계하는 자의 자리에 아닌 고통당하는 청중과 ‘자리바 꿈’의 과정을 통해 고통 중에 있는 청중을 체휼(體恤)하고 위로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청중이 고통을 통해 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고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고통 없는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든든히 세우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이상으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설교자가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청중이 고난을 겪을 때, 그리고 그 고난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거나 장기화할 때, 다윗처럼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하거나 모세처럼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라고 설교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예컨대 아스머 교수가 경험했듯이 설교자가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면 신자는 잠시 방황하던 자리에서 돌아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설교자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해석하는 여러 모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신자가 겪고 있는 개별적인 고난 사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유형이 적절할지 잘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고난이 아프고 힘들지만, 신자의 성숙에 고난이 불가피함과 결국에는 고난이 유익임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에게 고난을 설명하는 모델들을 잘 이해하는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고난을 겪고 있는 청중에게 다가가는 태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신정론의 주장을 강조하느라 자칫 고난을 겪는 신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휼(體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이 ‘계시’라고 하는 레비나스의 설명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요긴한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C.S.Lewis / 김남식 옮김. 『고통의 문제』. 서울: 크리스천서적, 2001. 강영안.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서울: 문화과지성사, 2005. 강정훈. 『내게 왜 이러세요?』. 서울: 두란노, 2021.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근세 옮김. 『변신론: 신의 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관하여』. 서울: 2014.곽성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1건’ 추가.” 「청년의사」 인터넷신문(2021.07.26.) 접속 2021.08.05.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서울: 에코의 서재, 2009.리처드 아스머/ 김현애 옮김. 『실천신학의 네 가지 중심 과제』. 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12.민병원. “재난의 정치학: 리스본 대지진과 근대국가에 대한 21세기적 성찰.” 「평화연구」 28/2 (2020.10). 5-38.박영범. “신정론과 하나님의 고난: 신정론 문제의 응답으로써 하나님 고난이 주는 의미.” 「한국조직신학논 총」 33 (2012), 243-279.박영식.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8/1 (2013/07). 85-11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서울: 길, 2008. 빅터 E. 프랭클/ 정순희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울: 제일출판사, 2000.옥한흠. 고통에는 뜻이 있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이문원. “옛 해양대국의 자취가 남아 있는 리스본.” 「국토」 340 (2010/02), 70-75. 이상명. “라이프니츠: 변신론과 인간의 자유.” 「철학」 106 (2011/02), 이승진. “고난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35 (2015), 70-75. _____. “대재앙에 대한 신정론 관점의 설교.” 「복음과실천신학」 29 (2013), 70-75. _____. “청중에 대한 설교학적 이해.” 「복음과 실천신학」 6 (2003), 60-86. _____. “해석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성경 해석과 설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 관한 연구.” 「복음과 실천신학」 54권 (2020), 198-231.캔 가이어/ 마영례 옮김. 『하나님의 침묵』. 서울: 디모데, 2006.팀 켈러/ 최종훈 옮김.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서울: 두란노서원, 2018.허호익. “리스본 대지진과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문화」 21 (2012), 119-144.홍치모. “C.S. 루이스의 생애와 사상 – 루이스의 작품과 신념 세계.” 「신학지남」 65/3 (1998/09), 2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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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6-14 15:02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
김병중(Th.D) 06-07 15:19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
김병중(Th.D) 04-26 11:04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김병중(Th.D) 01-22 17:14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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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중(Th.D) 09-03 13:53
【포토에세이】 철도길
철길이 길게 놓여 있다. 비록 끝이 보이지는 않으나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철길이 없으면 어떤 철도도 달리지 못하기에 같은 철길을 다양한 이동 수단들이 사용한다. 무궁화, 새마을 그리고 ktx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요금도, 소요 시간도 다르다. 이 철도길은 오늘 어떤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인가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기차에 오른다 -
김병중(Th.D) 08-27 10:20
【포토에세이】 부추도 꽃이다
옥상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께서 동네 친구분에게 얻어오신 부추가 심겨 있다. 어느 날 장독대 대형 화분에 몇 포기 옮겨 심었다. 이전에는 꽃을 심었었다. 가끔 자라난 부추를 잘라 먹었다. 그러다 그것도 시들해져서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흐느적거리는 풀같았던 줄기가 꼿꼿이 세워지고 키가 자라 끝 쪽에 뭔가 맺히더니 작은 꽃을 피웠다. 참 요물이다. 잘라 먹을 때는 풀같았는데 그냥 내버려두니 계절을 따라 생존을 위해 꽃을 피운 하나의 꽃이 되더니 신기해 유심히 보는 사이 벌도 날아와 꽃을 어루만지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추꽃은 처음 봤다. 늘 집이나 식당에서 음식 부재료로 먹던 풀 같은 것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다. 도심 옥상에서 부추꽃을 보니 서울 촌놈이 행복하다. 식물은 번식을 위해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통해 수정한다. 그렇게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사람도 꽃이다! 화려한 장미, 매혹적인 목련도 꽃이지만 부추도 꽃이다. 우리 모두 각자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를 ..... -
김병중(Th.D) 08-23 11:34
【포토에세이】 안빈낙독은 안빈낙도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이란 말이다. 내겐 안빈낙독(安貧樂讀)이 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한다”는 뜻이다. 교단 기자는 담임목사 때보다는 가난하다. 담임목사로서 보장되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없다. 차량 유지비도, 통신비도 모두 교회가 부담했었다. 담임 부임 때 구입했던 트라제XG를 가져와 아주 가끔 사용하고 주로 세워둔다. 기자로 취재현장을 다닐 때 대중교통이 편하고, 취재비 받아서는 차를 운영할 수 없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은 있으나 늘 책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취재가방에 언제나 책을 갖고 다닌다. 집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은 책이 상당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운전하는 것이 불편한다. 운전하느라 책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잠시 취재 갔다가 다음 취재까지 짬이 생겨 굳이 한 장소를 찾아 왔다. 종로쪽에 있는 저렴하고 넓직한 카페이다. 종로 쪽에 올 때 시간이 비면 와서 기사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내게 독서 취미가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었다. 다행히 지금도 독서가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책을 읽으면 취재 현장까지 가는 것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비어도 좋다. 책 읽고 있으면 되니까. 모두 안빈낙독의 삶을 사시기를. 엉뚱한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책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래본다. -
김병중(Th.D) 11-04 19:37
3代의 감 따기
2020년 12월 담임목회 사임 후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이듬해부터 가을에 감을 따고 있다. 올해도 감을 땄다. 20여 년 전 어머니께서 이 집을 사서 오신 후 종로 묘목상에게 어린 감나무를 사서 마당에 심었다가 아버지께서 집 밖 귀퉁이로 옮겨 심으셨다. 올해 4년째에는 이전처럼 감나무에 비료를 주지도 못하고 지냈는데 어머니가 막걸리 등 양분을 주셔서 그런지 깨끗하게 감이 열렸다. 이전에는 감 주위에 흰 것들이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감이 탐스러웠는지 동네 어떤 사람이 두 번이나 따는 것을 어머니 아는 분이 소리쳐 내쫓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손타기 전에 어머니, 아들과 함께 감을 땄다. 이사 올 때 감나무 잎 떨어지는 것이 지저분해 어머니는 잘라버리시려고 했는데 나는 살려 두자고 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감을 따는 재미와 먹는 재미를 누리고 있다. 아버지도 침대에 누워계시면서 잘 익은 감을 맛있게 드시니 다행이다. 70여 개는 딴 것 같다. 대봉이라 익혀 먹어야 한다. 매년 감 따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 단톡에 어떤 사람이 감의 효능에 대해 올려 공유해 본다. "감" 많이드세요!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놀라운 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은 종합 영양제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과일이죠. 감 1개에는 사과 9.5개 분량의 비타민이 들어있는데 이는 최고의 천연 종합 비타민 과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비타민 A는 시각 유지에 필요한 로돕신을 만드는 영양소인데 이 비타민 A가 감 1개에 성인이 하루 섭취해야 할 양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눈을 많이 쓰는 수험생이나 노안으로 눈이 나빠지는 경우에 시력 보호용 과일로도 좋습니다. 감의 주성분은 당질(15~16%)인데 포도당과 과당의 함유량도 매우 높으며, 비타민 C와 A 그리고 탄닌, 칼륨, 마그네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된 알칼리성 식품입니다. 감은 최상의 건강 과일이라 해도 지나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최상의 건강 과일이 흔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무시하고 비싼 과일만 사드시고 있겠죠! 사과 10개 먹는 것보다 감 1개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증명하고 있어요. 잘 모르셨죠? 감은 자연 치유제로도 최상의 특급 과일이며 피부에도 최고랍니다. 심폐(心肺)를 녹여주며 갈증을 멈추고 폐위(肺痿)와 심열(心熱)을 치료합니다.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吐血)을 멎게 해 주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약입니다.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고 기침, 만성기관지염, 고혈압, 심장 질환 등에도 효능이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풍 예방약으로도 쓰입니다. 감만큼 다양한 치유력과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는 과일은 없다고 합니다. 감 많이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