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8(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단상】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취재 가다 보면 은퇴 목사들이 순서를 맡는 경우가 있다. 이때 대부분 말이 길다. 설교든, 축사든, 격려사든....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고, 사회자가 “짧게하라”고 요구해도 대놓고 듣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은퇴 후 말할 기회가 없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회중들이 탄식하거나 몸을 비트는 일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라는 말이 있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고 남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짧게 한다고 싫어할 회중은 없다. 짧을수록 회중이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나이 든 사람의 길어진 말 때문에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노인들은 행사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8
  • 【칼럼】 양대식 목사 인생철학
    나의 인생철학이 있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내게 도움 준 자 기억하고 은혜를 아는 자 되자. 배은망덕하지 말자. 주면서 살자. 손해는 입을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매사에 성실하자. 부지런하고 책임감을 가지자. 기도하며 살자. 고난은 힘이 드는데 지나고 보면 유익하다. 지나친 고집 버리고 융통성을 가지자. 주님께 지혜를 구하자. 남에게 상처 주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자. 정직하자. 주님의 은혜 사모하고 긍휼을 구하자. 주님께만 소망을 두자. 샬롬!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7
  • 【단상】 4개월 만에 북토크가 300 권이 됐다
    지난 7월 북토크가 250권이 되었을 때 “북토크의 호응에 감사드리며”라는 기사를 썼었다. 4개월이 안 되어 50권을 더 읽어 이제 300권이 됐다. 책은 늘 대출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 취재하러 갈 때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다니며 지하철, 버스에서 읽고, 집에서도 열심히 읽고 있다. 왜 읽는가?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읽는다. 물론 대단한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고 관심 있는 책을 주로 읽는다.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다. 딱히 다른 취미가 없으니, 책을 읽기도 한다. 물론 유튜브가 재밌기에 자주 보지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 앞으로 얼마나 더 책을 읽을지는 모르나 아마도 죽기 전까지 읽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것인가 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3
  • 【단상】 20년 된 차의 폐차를 앞두고...중고차를 사려고 한다
    20년 된 차를 폐차하려고 한다. 얼마 전 받은 자동차 종합검사에서 불합격됐다. 앞바퀴 한쪽 캘리퍼가 고착되었는데 수리비가 재생 부품을 사용해도 70만 원 이상이다. 다른 쪽도 수리가 필요한데 문제는 하부 부식이 심해서 수리 기사가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권해 결국 폐차로 방향을 잡았다. 이 차는 담임 부임했을 때 교회가 사준 차였다. 당시 승합차가 없어 9인승을 구매했고, 15년 만에 나올 때 받을 비용을 차감하고 차를 받아왔다. 현재 16만 킬로 중반인데 더 타고 싶어도 탈수가 없다. 이 차는 현대의 대표적인 부식차이기도 하다. 조만간 폐차하고 새로 차를 사야 하는데 작은 차를 살려고 한다. 그동안 20년을 함께한 차를 폐차하려니 심난하다. 적당한 차를 구하려고 열심히 당근을 보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0-30
  • 【단상】 나는 부자다
    내가 가는 세탁소는 집에서 멀지만, 가맹점으로 주로 수요일에 간다. 집 가까운 곳에는 가맹점이 없어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곳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수요일에는 7% 할인하기에 이날 이용하려고 한다. 겨울옷을 맡기러 세탁소에 갔는데 20벌 남짓하니 세탁비가 8만 원 이상이 나왔다. 비용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 세탁소 주인이 “그래서 드라이 맡기는 사람은 부자”라고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돈 없는 사람은 드라이도 맡기지 못하고 집에서 그냥 세탁해 입는다.”라고 했다. 집에 와 아내에게 말하니 “그래서 우리도 가능하면 집에서 세탁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처음 알았다. 어쨌든 나는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는 부자다. 이것도 부자인가? 세탁소 주인이 부자라고 하니 부자인가 보다. 부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기분은 좋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0-23
  • 【단상】 기록이 사라졌다!
    요즘 카톡이 말이 많다. 본인들의 이익 창출을 위해 소비자에게 불편한 업데이트를 단행했다. 이로인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이들은 이전 상태로 돌려놓겠다고 했다가 방법이 없다는 말도 하고 있다. 업데이트하지 않으려고 거부를 눌렀는데 카톡이 아예 삭제됐다. 멘붕이었다. 다시 앱을 내려받으니 다행히 목록은 살아났으나 그 안에 기록은 사라졌다. 그동안 여러 사람하고 오갔던 대화가 다 날아갔고, 내 카톡 안에 모아둔 자료들이 사라졌다. 내가 앱을 삭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또한 노트북은 자동으로 카톡을 업데이트시켰다. 결국 카톡 업체는 사기업이다. 이윤 창출이 목적이고 이들은 막대한 자산을 갖고 있으며 카톡을 토대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야 어떻든 말든 자기들 마음대로 카톡을 변경했다. 그동안 국가 정부나 개인들이 얼마나 카톡을 이용하고 의지하며 살았던가? 국가가 공익 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닌 사기업의 카톡을 너무 믿고 의지했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 독점이다 보니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기업의 사적 이익 앞에 나는 자료를 상실하는 큰 손해를 봤다. 어디다 하소연 할 수도 없다. 다른 경쟁 업체가 생기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기업의 이런 오만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0-23

실시간 칼럼 기사

  • 【내이야기】 나는 왜 정신과를 찾아 갔는가?
    “혹시 이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물었다. 1992년 말이거나 1993년 초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양쪽 4차선 도로 옆이었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차 소음이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동안 그 집에 여러해 살면서 그런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싶어 우선 정신과를 찾았던 것이다. 마땅한 진료 과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 질문 외에도 “혹시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것도 물었지만 1983년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간단한 약 처방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기계식 손목시계도 잘 때는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두고 잤다. 벽시계도 다 무소음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아마도 1993년 4월 군목을 위한 입대를 앞두고 알게모르게 신경이 쓰여 평상시와 같은 집 옆 도로 소음이 더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후 군입대해 경북 영천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 받을 때 조용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는 “미친”사람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듯 마음과 정신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물 처방도 받아야한다. 대학 때 상담과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때 상담학을 전공할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내게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싸우는 주사를 부렸다. 4남매 앞에서도 주사를 부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때로 그냥 주무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끚은 어머니에게 트집을 잡아 험악한 말과 행동을 하셨다. 이때 큰 누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었고 나는 무서워 도망갔다. 이것이 지금의 내 “회피성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전 교회 문제로 교인들과 갈등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7개월만에 관둔 이유도 이 내 성향 때문이다. 내가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다. 아마 내가 적극적이고 과감했다면 반대편 교인들을 다 내쫓고라도 지금도 목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 했을 때 나와 함께 반대편 교인들과 싸웠던 한 권사는 크게 실망해 나를 외면했다. 지금도 그 권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다. 나는 지금도 어느 싸늘한 밤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망갔던 동네 놀이터의 그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자주 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고 3년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작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신대원 이후인지, 결혼해서 인지 어느때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내게 친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신 후 1년도 안되어 할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위로 형과 누나가 한분씩 계셨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셨는데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셔서 땅과 소들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어려운 때 간신히 속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친척 오빠의 말을 듣고 “땅 파먹고 살면 되지 공부가 무슨 소용 있느냐?”며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20살에 아버지는 형과 크게 다툰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곧 중매로 결혼해 4남매를 낳으셨다. 할머니께 아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친척은 자기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친척 어른을 원망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할려면 배워야하는데 왜 할머니께 아들을 교육 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자기는 자기 자식들은 가르쳤는가? 이후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머니 땅 팔아 사업을 하면서 여러번 망해먹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께도 주사를 부렸다. 머리를 방 벽에 부딪히며 “내 눈을 빼달라”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할머니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설음을 갖고 사셨다. 그당시 관공서에 가면 대부분이 한자인데 그것을 읽을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래서 결혼하시면서 어머니께 ‘아들을 낳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딸을 낳으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시키자’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그 다짐대로 나와 내 남동생은 대학을 나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느날부터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그런 다짐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사부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빨리 죽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아버지와 목욕을 가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1년이 넘게 병원에 계셨지만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큰 누나와 싸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모델이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비록 어머니에게는 주사를 부렸지만 4남매에게는 손찌검 한번 안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짐대로 대학까지 보내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 앞뒤로 보내 벌을 주었는데 빌려서라도 주셔서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셨던 것도 감사했다. 부목사 때 아내가 먼저 시작한 「치유상담연구원」을 다니면서 상담을 더 공부하며 더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 집단상담 치료과정에서 어려서 아버지를 피해 한밤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을 때 멀리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눈물이 났고,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그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한밤에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중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싫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그 "하늘" 아버지가 좋아 고1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또 상담과 심리에 대한 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지만 그래도 집단상담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상담치유기법에 의해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상황을 보고, 또 아버지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서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치유경험을 했다. 나처럼 “역기능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축복이다. 자신 안에 “성인아이”가 없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가정,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몸도 완전히 100% 건강할 수 없듯 마음과 정신도 완벽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취재가서 모처럼 한성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또 한 교수님이 운영하는 「예상」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특별히 한 교수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장로로서 목사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요즘같이 목회가 어려운 때 목회자는 번아웃되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한 원가족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목회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 교수는 목사들도 상담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기도만하면, 성령충만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신령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마음의 문제, 심리의 문제 등은 기도와 아울러 상담이 필요하다. 과거에 한번 정신과를 간 이후 나는 정신과를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필요하면 정신과를 갈 수도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상담도 받고 싶다. 상담의 유익함을 경험한 자로서 그렇다. 그러나 상담 비용은 매우 비싸다. 요즘 뜨고있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 받을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데도 예약자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과를 찾고 상담 받는 것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삶에 치여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수는 없다. 내가 굳이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경험자로서 상담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과 목회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기에 상담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주변에 보면 상담이 필요한 목사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책을 통해 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치유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길에 상담을 받았던 것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싶다. 당신에게도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 오피니언
    • 칼럼
    2023-10-07
  • 【내이야기】 “형이 왜 기자하는거야?”
    “형, 형이 왜 기자하는 거야?”하고 오랜만에 만난 1년 후배가 물었다. 한국군종목사단장을 역임하고 해군 대령으로 예편해 김포에 규모있는 교회로 부임한 학교, 동아리, 군목 후배였다. 그날은 아직 친구 밑에서 취재부장이라는 직함으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군선교사 모임이 있으니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만 후배를 만난 것이었다. 후배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동안 왜 하고 있던 담임목회를 안하고 기자를 하는지 물은 것이다. 잠시 부끄러웠다. 기자라는 신분이 초라해 보였다. 가수 현진영이 노래한 “저 여자가 내 여자여야하고, 저 가정이 내 가정이어야 하는데”같이 “순서 맡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야하고, 박수 받는 자리가 내 자리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된 것이다. 후배에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고 헤어졌다. 이후 이 후배를 한 취재현장에서 또 보게 됐다. 그러자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는 시간 여유가 있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만 나이 39세에 서울 시내 중심가 용산에 있는 동암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군목 4년, 경기노회 소속 혜성교회에서 부목사 3년, 또 같은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에서 부목사 5년을 보내고 처음 지원한 곳에 설교 한번 하고 부임했다. 이 교회는 함남노회의 중심교회로서 당시 한석지 증경총회장이 원로목사로서 생존해 계셨었다. 공교롭게 내가 교육전도사로 있었던 람원교회가 같은 함남노회라 1992년 목사 안수를 동암교회에서 받았는데 13년만에 담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1992년 한석지 목사님께서 원로로 물러난 이후 이 교회는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내쫓았다. 그리고 15년만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유라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며, 자기들이 싫어하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때 정치부장이었던 이호현 목사님(거짓이 아닌 팩트이기에 실명을 거론한다)은 이때도 정치부장을 하고 계셨는데 교회 상황을 알리자 안타까워하시며 개입을 하셨다. 15년 전 내가 동암교회에 부임하기 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추후 담임목사를 이유없이 내쫓는 경우 노회는 즉각 시무장로를 치리할 것이다”와 같은 대자보가 교회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전임자는 총신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목회를 잘했는데 시무 투표를 1년 연기하자는 말에 그만 1년 만에 사임하게 되어 노회가 깊이 개입해 장로들을 문책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나는 목사를 습관적으로 내쫓는 이러한 교인들의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가졌다. 이호현 목사님은 이 일을 책임맡은 노회장과 부노회장에게 “만약 동암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이유로 담임목사가 나가야한다면 함남노회 목사의 80-90%는 다 나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주동이된 한 장로는 70이 넘어 시무장로가 아니고, 또 한 장로는 10여년간 교회를 떠나 있다가 잠시 연로한 어머니 때문에 다니고 있는 상태라 이들을 치리한다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은 경험들이 있는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란 7개월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여기까지 말하자, 후배는 “그때 내게 연락하지, 나도 현역으로 있을 때 이상한 교인들이 있어가지고 다 법적으로 싸워 처리했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 못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냥 사임한 거야”라고 말하자 “그렇구나,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기는 하지”라고 후배가 말했다. 사임 후 이미 교계 기자를 하는 대학동기를 우연히 만나 “발이 넓을테니 갈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너가 기자가 되어 교회를 알아보라”는 말에 덜컥 기자가 됐다. 그래서 나는 자칭 “얼떨결 기자”이다. 기자가 뭔지도, 교계에 기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빛과소금뉴스라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형, 형이 왜 목회하지 않고 기자하는거야?” 하던 후배가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해주니 고맙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04
  • 【내이야기】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함이 은혜라
    “그러면 에미 집으로 이사를 오너라” 어머니께서 전화를 걸어 하신 말씀이다. 갑작스러운 담임목회 사임으로 당장 거처할 집이 문제였다. 2020년 1월부터 있었던 교인과의 갈등을 7월에 마무리하고 10월 노회 때 시무 사면 처리를 한 후 12월 말까지 사택을 비워주기로 했다. 그동안 거처를 마련해야했다. 그런데 언제나 사택을 주는 교회에서만 부목사 사역을 했기에 어떤 식으로 집 문제를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내와 이런저런 논의를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께서 결단하셨다. 어머니는 20여년전 적은 돈으로 전세를 안고 지하1층, 지상 3층, 옥상이 있는 다가구 주택을 구입했다. 큰 교통사고 이후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집세를 받아 생활하시기 위해서였다. 지하 1층과 1층은 각각 2가구가, 2 · 3층은 전체를 다 쓰는 구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3층에서 사셨는데 2층을 내보내고 우리 식구를 살게 할려고 하셨다. 그러나 2층 세입자가 작은 금액의 반전세로 살고 있기에 나가지 않겠다고해서 할 수 없이 1층의 한 가구를 이사비를 주어 내보내고 부모님께서 그리로 옮기시고 우리 식구는 3층에 살게 됐다. 가까스로 12월 말까지 집 수리를 끝내고 이사했다. 뜻하지 않게 부모님께 얹혀 살면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게 됐다. 곧이어 허리가 늘 아프신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셔서 X-ray를 찍어보니 척추에 금이 가 있었다. 그래서 의료용 시멘트를 주사하는 시술을 받으시게 됐다. 이어 작년 9월에는 계단에 있는 빗물에 넘어져 구르는 바람에 우측 대퇴부가 두 군대 골절됐다. 마침 107회 총회 취재차 출타한 상황이라 아내와 아들이 병원으로 모시고 가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한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그동안 아버지 간병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1984년 당한 교통사고로 다리 뼈가 으스러져 철심을 박았는데 이후 연로하시자 더 이상 걷지 못하시고 7년째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오전에는 간병인이 오지만 저녁에는 없기에 한달 정도를 내가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이후 어머니가 퇴원하셨는데 그만 올해 3월에 직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체력이 급격히 약해지셨다. 그리고 두 주 전에는 아버지께서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오늘 보름만에 퇴원하셨다. 의사는 아버지가 점점 더 기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늘 “늙은 부모 모시느라고 아들이 고생이 많다”고 말씀하신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듯이 부모님들은 연로해지고 계시다. 80대 중반을 향해 가면서 부모님들의 몸은 연약해질대로 연약해지셨다. 나는 4형제인데 누님들은 다 아랫지방에서 살고 있고, 남동생은 서울에 살지만 직장생활에 메여 있어 그동안도 부모님 가까이 사는 내가 도왔었다. 부모님은 강북구 번동에 사시고 나는 혜화동, 인사동에서 부목사를, 후암동에서 담임목회를 했기에 일이 생기면 수시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병수발이나 일상을 돕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이 연로해지셨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은 가끔 뵈서 몰랐는데 가까이서 뵈니 일상을 살아가시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아는 동네분들에게 인사하면 “아들이 함께 살아 든든하겠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하니 감사한 일이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의지가 되니 다행이다. 또한 자식으로서 더더욱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제는 같이 살아 늘 대하는 부모님이 언젠가 세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피며 나 또한 언젠가 부모님처럼 연로해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은혜이다. 어머니는 언젠가 때가 되면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하시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사시던 집에서 부모님이 눈을 감으셨으면한다. 갑작스러운 목회 중단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언젠가 떠나실 부모님과 함께 남은 시간 정을 주고 받으며 사니 감사하다. 어머니의 굽은 등과 마른 몸을 보면 눈물이 난다. 침상에만 계셔서 몸이 굳어지신 아버지를 보면 눈앞이 흐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내 노년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노년을 보낼 때 내 아들들이 함께, 혹은 가까이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또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02
  • 【내이야기】Memento mori
    Memento mori(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다. 추석 연휴에 장인, 장모가 모셔져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장인께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서 1996년에 소천 후 댁 근처 묘지에 매장했다가 이곳으로 이장했고, 장모님은 작년 5월 소천하셔서 합장하게 됐다. 나는 1994년에 결혼해 장인과는 2년 남짓 시간을 함께 했고, 장모님과는 28년을 함께 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장모님은 여러 사위 중에 제일 나를 좋아하셨는데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입관 전 장모님의 모습을 뵐 때 만감이 교차했었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장례예배를 했지만 고인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장모님이 처음이었다. 어르신들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소설 10권은 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목회를 할 때 한 권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길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줌의 재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계신다. 장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가끔 모시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가면 장인 어른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애틋해 하셨는데 이제 사랑하던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부부의 마음은 자식도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한평생 부부의 연을 맺고 살다 사별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모님은 장인 어른의 소천 후 26년을 홀로 사셨다. 그 허전했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할 때마다 묘비는 늘어났고 묘지는 줄어들었다. 이전에 비어있던 곳에 묘비가 빽빽하다. 그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때가 되면 모두 죽어야한다. 오늘은 내가 성묘를 왔지만 언젠가 입장이 바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고 잊으면서 살려고한다. 그래서 묘지를 외진 곳에 두고, 화장장을 혐오시설이라고 외면하고 있다. 그런다고 그 누군들 죽음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앞서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묘비는 그것을 실체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死者의 장소를 벗어나 산자의 곳으로 나오자마자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지?’ 가족들과 말하면서 나는 죽음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습관에 또 다시 빠져든다. 아! "Memento mori"
    • 오피니언
    • 칼럼
    2023-10-02
  • 【단상】"海에게서 中年에게"
    다낭 미케비치 해변의 파도를 보면서 뜬금없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최초의 신체시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시는 근대 잡지의 효시인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각 연의 대응되는 행의 자수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창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으나, 한 연씩 떼어놓고 볼 때는 정형적 자수율을 전혀 갖지 않은 자유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와 문명개화를 상징하는 ‘바다’와 새 시대를 상징하는 ‘소년’을 통해, 개화와 계몽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계몽시라는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년의 나이이기에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아니라 “海에게서 中年에게”라고 쓰고 싶다. 미케비치 해변을 찾은 그날 파도는 쉼없이 내게 여러 말을 했다. 산에 올라도, 흐르는 강을 보아도 그들은 내게 무언가 말을 한다. 나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잊지 말라고. 수영을 못하기에 바다로 조금만 들어가 영상을 찍었다. 다낭 미케비치 해변은 백사장이 길어 멀리까지 바닥이 낮기에 가슴 높이까지 가본적도 있지만 쉼없이 변형되는 파도에 물을 먹으며 무서움이 들었다. 파도는 예상 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오기에 여러해 전 강원도 동해에서 파도 맞이 물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파도에 뒤집혀 안경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자연은 자신의 방식으로 내게 겸손할 것과 나의 왜소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자주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미케비치 파도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자 동영상으로 남겨봤다. 海에게서 少年에게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나폴레옹),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업거든 : ‘있거든’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통기 : 기별을 보내어 알게 함. 통지. 산모 : 산모퉁이. 순정한 : ‘純情’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최남선 : 서울 출생(1890), 일본 동경부립 제일 중학 입학, 2개월 만에 귀국(1904),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학과 입학(1906), 종합 월간지 『소년』 창간(1908), 종합 월간지 『청춘』 창간(1914), 3·1 운동시 「독립 선언서」 기초. 체포되어 다음 해 출옥(1919), 『동명』 발간(1922), 만주 신경에서 『만몽일보사』 고문 역임(1938),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병으로 보석 출감(1949), 사망(1957).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9
  • 【단상】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이 왜 총신대로?
    “그러면 500만원을 미리 내세요. 적금해서 모으나 미리 내고 모으나 같은 것 이니까요” 베트남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가 내게 한 말이다. 내년이 결혼 30주년이다. 그런데 모시고 사는 부모님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어 1년 앞당겨 미리 기념 여행을 가고 있다. 제주도 가는 비용이면 갈 수 있다는 베트남 다낭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108회 총회 기간에 학부, 신대원, 군목 5년 선배인 박성규 총장이 총신대학교에 대해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대원 전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할려면 매년 68억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총회에 참석한 예비역, 현역 군목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선배 총장께 웃으며 물었다. “총신대학 종합관 현관 벽에 도너월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을 올릴려면 최소 금액이 얼마입니까?” 500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적금을 들어서라도 모교에 이름을 남겨야겠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총신대학에 도너월이 있다는 것을 안것은 작년에 오정호 목사가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된 후 이어서 총신대학교 도너월(Donor Wall) 제막식에 참석했다 상대편 후보에게 고발을 당했을 때였다. 총신대 도너월은 대학을 위해 후원한 기부자들의 뜻을 기리고 이에 대한 예우를 위해 만들어졌다. 명패는 2017년부터 2022년 2월 28일까지 5년 간 대학에 기부한 교회 명과 개인 이름을 기재했으며 익명 기부자는 제외했다. 이날 제막식에서 오정호 목사는 총신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전달하는 기부금 전달식도 함께 진행했다. 이재서 총장은 제막식에서 “그동안 총신대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 사랑에 감사를 담아 도너월을 만들었다”며 “학교를 내 몸과 같이 도와준 사람들의 정성어린 뜻을 앞으로 소중히 여기겠다”고 강조했다(한국대학신문 - 429개 대학을 연결하는 '힘'(https://news.unn.net)에서 기사 인용) 이후 총신대학 종합관 로비를 지나갈 때 마다 비어있는 많은 자리를 보고 나도 저 자리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 날이 일찍 왔다. 총장과의 대화 후 이틀 만에 하늘같은 아내가 하늘에서 윤허했다. 나는 4년간 월 10만원씩 적금을 들어 만기가 되면 500만원을 기부할려고 했는데, 아내는 먼저 기부하라고 한 것이다. 결국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에서 엉뚱하게 선물을 받은 것은 총신대학이다. 그 기부금은 내가 나온 총신신대원 장학금으로 알지 못하는 후배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후배가 알지 못하는 선배가 기부한 돈으로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985년 총신대학 신학과 입학을 시작으로 학부 4년, 신대원 3년, 목회전문대학원 3년(박사 학위 논문 쓰는 기간이 길어 실제로는 7년)의 세월을 총신에서 보냈다. 중간에 Th.M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했는데 그 당시 군목에게 등록금 반액 할인을 해줬기 때문이다. 총신이 그때 같은 혜택을 줬으면 Th.M도 총신에서 했을 것이다. 지금은 총신도 군목에게 등록금 할인 혜택을 주어 여러 군목들이 총신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모교의 소중함을 몰랐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 부족한 시설과 교수진에 대해 비판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모교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거기서 교육받았기에 많은 것들을 얻었고 누릴 수 있었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조금이나마 모교의 소중함을 알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학부를 총신대학을 나왔든, 신학교를 나왔든, 일반대학을 나왔든 합동측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총신신학대학원을 나와야한다. 그래서 모든 합동측 목사에게 총신은 모교이다. 필자도 일반대학을 나온 후 신대원에 들어갈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일반대학에 떨어져 바로 총신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다행히 군목 시험에 합격해 군목생활을 경험했다. 돌아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총신을 나와 합동측 목사가 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모교에 기부하고자 하는데 감사하게도 학교는 그것을 도너월에 새겨 기념해 준다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결국 학교 기부가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이 된 것이다. 곧 학교에 연락해 기부 절차를 진행할 것이다. 기꺼이 허락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진짜 결혼 기념 3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아내에게 더 큰 선물을 해야 할 것 같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3
  • 【단상】한국 기독교 망국병, 지역감정
    취재 갔다가 알게 된 목사가 있다. 모 선교단체를 이끄는데 그가 방장인 1000여명이 넘는 단톡에 강제 가입됐다. 그런데 주로 여권을 지지하고 야권을 욕하는 기사가 난무했다. 몇번을 나왔는데 또 불렀기에 “선교 단체 단톡이 너무 정치 편향적”이라고 말하고, 더 이상 부르지 말라는 글을 남기고 방금 탈퇴했다. 그러자 개인 톡이 와 몇 마디 주고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호남을 거론했다. 나를 호남 사람으로 단정한 것 같다. “나는 서울 사람이고 지역 감정이 부끄럽다”고 답하자 더 이상 대답이 없다. 지겹고 지겨운 것이 영호남 지역감정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도 서울 사람으로 사는 입장에서 볼 때 지방의 지역 감정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선거 때 그 지역 출신은 막대기만 세워도 당선 되고, 그 지역 출신 대통령이면 나라를 팔아 먹어도 지지한다는 말을 대놓고 한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어이없다. 그런데 지역 감정에 있어서는 신앙인도 일반인과 별반 다를게 없다. 그러면 영호남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전라도 하나님"과 "경상도 하나님"으로 나뉘어 있는가? 코딱지 만한 나라를 영호남으로 갈라 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휴전선은 영호남 사이에도 있다. 사탄은 분열의 영이다. 교단 안에서든 어디서든 지역 감정에 경도된 자는 분열의 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자. 지겹고 지겹다 영호남 지역감정! 결혼 30 주년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 비용으로 베트남 다낭에 왔는데도 “영호남 지역감정”을 겪어야 하니 지역 감정의 망령은 국경을 초월하나 보다. 어이가 없다. 그놈의 지역감정! Chán quá đi (베트남어로 "지겹다 지겨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3
  • 오정호 총회장의 탁월한 회의 진행 능력...많은 난제 해결
    총회가 중반을 향하고 있다. 올해도 산적한 문제와 논쟁거리가 있다. 1년에 한번 모이는 총회이다보니 한꺼번에 수많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해야한다. 그런데 오정호 총회장의 탁월한 회의 진행으로 인해 그 난제들이 해결되고 있음에 모든 총대들은 만족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정호 총회장은 여성 교역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향적인 결정을 이끌어 냈다. 여성사역자지위향상위원회가 상설위로,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고시 응시 자격이 허락되어 여성 준목 제도 신설이 결의됐다. 물론 여성 안수를 주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다른 진전된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10여년간 총회와 총대 그리고 해당 교회들을 괴롭혔던 구 충남노회 문제를 해결했다. 충남노회폐지후속대책소위원회 보고 시간에 위원장 김상현 목사와 서기 고광석 목사가 나와 인사 후 고광석 목사가 결과 보고를 했다. 이로인해 총대들간에 찬반 격론이 50여분간 벌어졌다. 이때 오정호 총회장은 양쪽이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노회 신설을 허락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두 사례는 굉장히 예민하고 논란 많은 안건이었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은 그 안건들에 대해 이미 해박하게 알고 있었고 복안을 갖고 있는 가운데 총대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뚝심있게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총대들의 동의와 본인의 소신이 이처럼 전향적인 결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면에서 오정호 총회장은 탁월한 회의 진행자이다.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총대들의 토론을 통해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신이 오랜 기간 총대로 활동했고 부총회장을 지내면서 그 건들에 대해 보고 듣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유를 갖고, 유머러스하게 또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다면 과감히 인정하고, 들어줄 것은 들어주되 과감히 밀고 나가야할 것은 밀고 나가는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과 회의 진행 방식이 1600여명의 총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 리더십이 바로 오늘날의 새로남교회라는 메가처치를 이룬 원동력이다.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은 소통의 리더십이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오정호 총회장은 취임사에서 “일방통행이 아니라, 마음을 얻고(이청득심/以聽得心), 사람을 얻겠습니다.(이청득인/以聽得人)”라고 밝혔다. 오정호 총회장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것은 리더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때로 상대방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경청하고자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또한 아울러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은 결단 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리더십니다. 리더는 결정하는 자이다. 많은 의견을 듣지만 최종 결정자는 리더이다. 총회장으로서 총대들의 의견을 듣고 최종 결정을 도출하는 것이 총회장이다. 총회장으로 자기의 견해가 있을 때 총대들로 하여금 총회장의 생각에 동의하게 하고 그에 따라 총대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것은 리더가 갖춰야할 자질이다. 그 면에 있어 오정호 총회장은 그 능력을 유감없이 총회진행에서 보여주고 있다. 물론 회의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어렵다. 총대들간 견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견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다수결로 결정한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이 충분히 자신들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에 총대들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이제 총회가 중반을 향해간다. 오늘도 아침부터 수많은 안건들을 쉼없이 처리해야한다. 남은 기간도 지난 이틀처럼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과 탁월한 회의 진행 능력으로 회무를 잘 처리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0
  • 새로남교회 총회...지역 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
    요즘 총회가 열리는 새로남교회 주변 식당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총대만 1600여명과 총회 관련한 인원들까지 포함하면 약 2천여명의 사람들이 매 식사 시간마다 교회 주변 식당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한 거리에는 현수막을 붙이고 총대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새로남교회는 총대들의 식사 편의를 위해 교회 주변 여러 식당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식당업자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손님이 와서 매상을 올려주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인데, 약 2000여명의 사람들이 월요일 낮부터 금요일 낮까지 적어도 10끼는 식사해야한다. 한끼 식사비를 1만원으로 잡는다면 총회 기간 약 2억의 돈이 소비된다. 이는 지역 식당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또한 2000여명의 사람들이 주변 숙소에 머물면서 숙박업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적어도 지난 봄에 숙소를 예약해야할 정도로 방을 구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경기가 어려운 이 때 총회를 개최해 지역 상권에 큰 도움을 준 새로남교회에 대해 지역 업체들은 고마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수막에 표현된 것이다. 총회로 인한 지역 경제 활성화를 통해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또 이것이 그들의 전도로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20
  • “당연”인가? “감사“인가?
    저녁 10시경에 ‘띵’하고 문자 하나가 왔다. 알지 못하는 번호로 온 문자였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곧 열리는 총회를 위해 교회에서 만든 주차 안내를 기사로 만들어 자비로 전 총대들에게 단체 문자 전송했다. 주차 동영상까지 만든 새로남교회의 세심함에 감동 받아 교단 목사 기자로 총대들에게 서비스를 한 것이다. 몇몇 아는 분들이 고맙다고 톡으로 문자로 응답했다. 그런데 이게 왠 뚱딴지 같은 반응인가? 과연 총회를 개최하는 교회가 모든 총대들의 주차비를 부담해야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것은 교회적으로 큰 배려이며 섬김이다. 그러면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고 말하고 그걸 기사로 쓴 기자를 “깝깝”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 총대 전화번호가 있어 하루가 지난 후 망설이다. 검색해 봤다. 어느 목사의 이름이 검색됐고, 총회 홈페이지에서 경북 지역의 B교회라는 것을 알아냈다. 네이버 지도를 통해 교회 건물까지 볼 수 있었다. 지금이 그런 세상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고마운 것이고 감사한 것이다. 목회할 때 한 청년이 교육전도사에게 “전도사님은 사례를 받으니까 교회 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교역자가 받는 돈은 “월급”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례”라고 한다. 사례란 감사해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 청년은 자기가 교사를 하면서 월급을 받기에 교육전도사도 교회 일 해서 받으니 월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로남교회 담임인 오정호 목사가 총회장이 되니 오 목사나 전교인들은 총대들을 정성으로 섬기고자 한다. 건물 전체를 개보수하면서 “환대총회”를 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주차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당연”한 것인가? “감사”한 일이 아닌가? 왜 나는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목사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면식도 없는 내게 그렇게 “문자 지적질”을 하는가? 그 목사는 맥추감사절이든 추수감사절이든 감사절기에 도대체 무엇이라 설교할지 궁금하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도, 주시는 복도 “당연”하다고 설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는 그 목사가 부끄럽고 안타깝다. 그래도 1600여명의 총대중 한명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목사나 장로가 한 명 더 있었다면 나는 합동 교단에 절망했을 것이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 이름이 “땡큐 버스”인 것이 눈에 띄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9-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