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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전투구된 부총회장 선거, 성총회 해법은....
    지난 8월 9일 서대전노회가 한기승 목사를 고발했다. 이는 전남제일노회가 먼저 오정호 목사를 고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대응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인해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후보간, 노회간 다툼이 됐다. 이를 바라보는 총대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이제 공은 선관위로 넘어갔다. 선관위가 두 후보 중 한 명을 낙마시키든지, 혹은 두 후보 다 낙마시키든지 또는 대승적 차원에서 두 후보를 다 경선에 올려 총대들이 결정하게 하든지 세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노회간 고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 경중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총회 선거법에는 경중에 따른 처벌이나 제제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오직 후보 등록이냐, 탈락이냐 둘 중 하나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한 규정 위반을 한 후보가 중하게 규정 위반을 한 후보와 같은 처벌을 받으면 그 후폭풍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남제일노회는 오 목사를 선관위에 고발하면 낙마되어 한 목사가 쉽게 당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 전남제일노회는 같은 사안을 한데 묶지 않고 나열해 22건으로 만들어 고발하고 또 허위사실까지 적시해 이로인해 자충수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은 오 목사를 고발 안하느니만 못한 일을 한 것이다. 반면 한 목사의 학력위조는 세상법정에 가면 처벌될 수 있다. 한 목사의 학력위조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은데 세상이 이 문제를 얼마나 엄격히 다루는지 알아야한다. 혹시 한 목사가 부총회장에 당선된다해도 직무정지 되고 세상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 이후 총회는 이 사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서울신문은 지난 8월 9일자 기사에서 허위학력 문제를 다뤘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809500062) ‘학벌이 뭐길래’ 최경식 남원시장 허위학력으로 낙마 위기 최경식 남원시장이 허위 학력 혐의로 낙마 위기에 처하면서 재선거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북경찰청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최경식 남원시장을 송치했다고 9일 밝혔다. 최 시장은 선거 출마 당시 학력을 ‘한양대 졸업’이라고 허위 기재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실제 도내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것으로 파악됐다. 또 최 시장은 선거공보물에 '원광대 소방학 박사'를 '원광대 소방행정학 박사'로 기재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지난 2일 최 시장을 불러 5시간에 걸친 조사를 진행했다. 최 시장은 당시 경찰 조사를 마치고 “고의성은 없었다. 경찰 조사에서 상세히 소명했고 수사기관이 현명한 판단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메일을 압수수색 하는 등 확보한 증거물과 참고인 진술 등을 토대로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최근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전주 설정욱 기자 이처럼 세상의 법과 기준이 결코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다. 먼저 고발한 측이 앞서서 서로간의 고발건을 취하하도록 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본다. 선관위도 이 사태를 잘 수습하는 묘안을 찾아야한다. 솔로몬의 재판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두 후보 모두 총회를 위해 일해보겠다고 나섰으니 적어도 총대들의 판단과 선택을 받을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공멸”(共滅)이 아닌 “공생”(共生)의 길을 찾아야한다. 후보와 노회간 고소 고발로 인해 각 후보의 공약은 관심밖이 되버렸다. 이제 소모전은 그치고 후보의 자질과 정책, 삶의 이력으로 냉정히 후보를 검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107회 총회가 며칠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주 기독신문 1면 하단에 총회 소집 공고가 났다. 그런데 윗면에는 오정호, 한기승 목사 모두 후보 보류 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기승 목사는 이미 지난 7월 22일 있었던 선관위 전체 회의에서 후보 등록되었으나 고소 건으로 결국 십여일만에 후보 보류로 강등(?)된 것이다. 남을 때리면 내 주먹도 아프게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아닌가? 이러한 총회 현실이 웃프다! 가수 김민기의 “작은 연못” 가사 중 일부가 생각난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 더 늦기 전에 두 입후보자의 상생의 길을 찾자!
    • 뉴스
    • 총회
    2022-08-10
  • 광복 77주년 한장총 대표회장 메시지
    오는 8월 15일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광복된 지 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우리 민족에게 77년 전에 주어진 8.15 광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광명을 회복했던 1945년 8월15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만큼 잊지 말아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겼던 국치일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에 한국을 병합하는 조약(한일병합조약)을 맺고, 1910년 8월 29일에 한국병합에 대한 조약이 공포됨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제국에 흡수되어 나라가 없어지는 수치를 당했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광복 77주년을 맞이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조상들의 눈물과 피땀을 되새깁시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 국내외에서 펼쳐나갔던 독립운동과 3.1만세운동, 국채보상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저항과 희생을 잊지 맙시다. 과거 우리 민족은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맞이했음에도 하나의 나라를 세우기는커녕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했으며, 아직도 군사적 대결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화합과 통일은 멀어지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로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평화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국가안보를 위해 깨어 기도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복음으로 남북이 하나 되는 일에 한국교회가 앞장서야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복음통일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지속되는 코로나19 감염증의 팬데믹속에 광복 77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은 커다란 도전과 위기 앞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약화되었으며, 교세감소와 다음세대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지교회들은 성장동력이 약화되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예배인원 감소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이은 평등에 관한 법률은 헌법상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에 충돌하며 혼란과 선교적 위축을 초래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인구감소가 시작되어 인구절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으며, 생태계의 교란 및 기후 위기로 인해 폭염과 집중호우와 폭염 등 기상이변이 빈발하며, 대기오염과 동물과 인류를 위협하는 신종 전염병과 질병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와 세대간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위기가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위기와 도전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광복77주년을 맞아 우리는 당면한 커다란 도전과 위기 앞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며 통회하고 자복하며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와 민족에 비전을 제시하며,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2년 8월 9일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한영훈 목사
    • 뉴스
    • 기관
    2022-08-09
  • 언론은 정론직필 해야한다
    본 동영상은 합동투데이 김성윤 기자가 촬영한 것을 허락받아 게재합니다. 개혁타임즈(김창연 목사)가 지난 8월 5일 있었던 서대전 임시노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목사 부총회장 예비 후보 오정호 목사는 격앙된 표정으로 임시노회에서의 신상발언을 통해” 문제는 과연 '오정호 목사가 격앙된 표정으로 작심 신상 발언을 했는가?'이다. 촬영된 동영상을 통해 독자들이 판단해 보시기를 바란다. 단지 평소 오 목사의 성량이 크고, 마스크를 한 상태로 음성을 높여 말했다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개혁타임즈는 오 목사가 전남제일노회에 고발당해 어쩔 수 없이 노회원을 보호하기 위해 고발해야하는 서대전노회에 이러한 훈수를 했다. “총회선관위와 상대측을 향해 감정 호소나 열정과 의욕보다 법리로 나서야 한다” 서대전노회가 무엇을 했길래 이런 조언을 하는가? 현장에 없던 독자들은 오로지 기사를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기자의 사사로운 편견이 들어가지 않은 정론직필이 필요하다. 동영상을 보고 오 목사가“격앙된 표정”으로, “작심 신상 발언”을 했는지 판단해 보기 바란다. 사족으로, 개혁타임즈는 지난 7월 25일 절차상 실수로 무산된 서대전노회 임시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전화위복이 될지 악재가 될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지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곧바로 10일 후 임시노회를 연다고 공고했고 이후 별 문제 없이 임시회가 개최됐다. 개혁타임즈 기사처럼 호들갑 떨일이 아니었다. 기자의 바램이나(?), 누군가의 바램을(?) 적어봤는지는 모르지만 별일 없이 임시회가 개최됐으니 지금이라도 기사를 수정하는 것은 어떨지.... "개혁주의는 끊임없이 개혁해야한다" 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 뉴스
    • 노회
    2022-08-08
  •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개혁타임즈(김창연 목사)가 서대전노회 임시노회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썼다. 이날 열린 서대전노회 임시노회는 앞서 밝혔듯이 법을 지키려는 모습이 매우 강하게 느껴졌지만 "옥의 티"라면 상대측 목사 부총회장 예비 후보인 전남제일노회 한기승 목사에 대한 비방 유인물이 특정 인터넷 언론사의 기사 형태로 거의 모든 노회원들에게 배포되었고, 한 노회원은 인터넷이나 SNS에서 이 유인물을 잘 숙지해서 맞대응하자고 발언하기도 한 점이다. 이날 서대전노회에서 참석 회원들에게 자료로 준 것은 4개 신문사 기사였다. 기독교종합신문, 합동투데이, 빛과소금뉴스, 합동타임즈이다. 이들 신문이 한기승 목사에 대해 다룬 기사를 “비방 유인물”이라고 폄하하고 이러한 기사를 노회원들에게 배부한 것은 “옥의 티”라고 지적했다. 어떤 신문이 어떻게 한 목사를 비방했는가? 한 목사의 ‘학력위조’와 ‘교회 간 거리 위반’은 팩트이다. 그래서 한 목사도 광주중앙교회 홈페이지에서 학력을 변경했으며(이또한 잘못 기재했다), 교회 주소도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눈가리고 아옹’이다. 어차피 허위학력으로 서류를 제출했기에 이제 아무리 홈페이지를 변경해도 소용없다. 제출서류가 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홈페이지에서 교회 주소를 변경했는데 이미 매각한 교회 주소이니 이 또한 허위이다. 참으로 이러한 노력이 서글프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기사로 쓴 신문사들을 가리켜 “비방”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동종 업계의 신문사가 지켜야할 도를 넘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신문에 대한 반박 기사를 써서 서로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에 관한 기사를 개혁타임즈가 쓴 적이 없으니 이제라도 반박 기사를 써 보기를 권한다. 또한 개혁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특히 본 노회의 목사 부총회장 예비 후보 오정호 목사도 공개적으로 확전보다는 중재를 원하고 있는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런 비방 유인물을 앞세워 상대측을 비방하고 자극하는 모습은 분란만 키울 뿐 사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혁타임즈는 유인물에 기사 인용된 4개의 신문사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라고 했다. 서대전노회는 노회원들에게 실상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 때 본인에게 전화를 해서 기사 사용에 대한 허락을 받았고 유인물에 기사의 출처 신문사를 밝혔다. 아마 다른 신문사에게도 그런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합동타임즈는 신생 언론사이지만 설마 단톡에 활발하게 기사를 올리고 있는 기독교종합신문, 합동투데이, 빛과소금뉴스를 모르는가? 언론인으로서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보고 비교 검토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도 수시로 개혁타임즈 기사를 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는다. 개혁타임즈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언론사들을 공개적으로 ‘듣보잡’ 언론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당한 기사를 ‘비방’이라고 했다. 상대 언론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언론사의 수준은 기자가 쓴 기사이다. 비방만 하지 말고 기사로 실력을 보이길 바란다. 개혁타임즈의 대응 기사를 기다려 보겠다. 사족으로, 이번 기사와 지난번 서대전노회 임시회 무산 기사는 지금까지의 개혁타임즈 스타일과 다르게 보이기에 대필인가(?) 생각들 정도로 많이 놀랐음을 밝힌다. 이 정도로 본인은 개혁타임즈의 열혈 구독자이다. 또 하나의 사족으로, 오정호 목사가 “격앙된 표정으로 작심신상발언” 했다고 기사를 썼던데 같이 현장에서 취재했던 본인은 1도 그런 생각 들지 않으니 무엇이 팩트인지 현장에 참석하지 않은 분들은 궁금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먼저 고발당해 어쩔 수 없이 고소하고, 이제 노회가 고발해야하는 현 상황에 대해 참담한 심정으로 발언하는 오 목사의 녹취를 단톡에 올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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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회
    2022-08-06
  • 제96차 세계선교연대포럼 개최
    제96차 세계선교연대포럼이 8월 6일 오전 10시 30분 프린스호텔 컨벤션홀 2층에서 열려 예배하며 선교보고하고 선교비를 전달하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예배는 전 세선연총회장 박용옥 목사의 인도로 시민단체총재 고종욱 장로가 기도 후 GMS세계여성선교회장 유진숙 선교사가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10절까지 봉독한 후 한희성 장로, 조윤하 권사(서울명동교회)가 특별연주하고 찬양사역자 김보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 총장 정인찬 목사가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시대적 사명'이란 제목으로 "코로나로 인해 예배와 선교가 위축됐다. 코로나 뒤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질병을 통해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보편화 되어 있는데 예배는 대면으로 해야한다. 우리 나라가 경제대국, 군사대국은 되지 못한다해도 선교대국, 복음의 대국이 되야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남겨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한다. 바울의 선교 방향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선교사역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자"고 설교했다. 대만 김혜옥 선교사가 헌금기도 후 정은영 찬양사역자가 헌금특송한 후 국제선교신문사장 김주덕 장로가 광고하고 세선연이사장 이선구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2부 선교포럼은 세선연 대표 최요한 목사가 "과거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했는데 53개의 신학교를 세우고 600명의 제자를 키웠다. 지금도 위챗을 통해 다양한 중국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뇌졸증으로 어려웠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건강을 회복해 사역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최태선 목사가 기도한 후 노벨문학상 후보 김소엽 회장이 시 낭송을 하고 우간다 유학생 스코비아가 찬양하고 16개국 17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특송했다. 이선구 이사장이 사랑의 쌀 나누기 지부장들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세선연을 통해 30개국이 사랑의 쌀 나누기 사역을 동역하고 있다. 내일 케냐로 제1 빵공장을 만드는 일과 사랑의 왕진 가방 전달을 위해 출국하는데 아무 일 없이 업무 잘 감당하고 귀국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부탁드린다"고 인사말하고, 전 예하성총회장 김용덕 목사가 선교사들에게 선교헌금을 직접 전달했다. 멕시코 양주림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사역을 이양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잘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탄자니아 유진숙 선교사가 "교회개척 유치원 사역을 하고 지부의 행정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 후 베트남 임도마 선교사가 "비자 받는 것이 어려워지고 이단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한 후 지선협이사장 강영준 목사가 "세선연이 큰 일 하고 있어 감사드린다. 지선협은 15가지 사역을 하며 신학교 사역, 부흥회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다. 앞으로 세선연과도 잘 연합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신학 협의회 탁명진 목사가 "한국신학 협의회 총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에 신학을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군소교단을 위해 도움 되는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고, 대만 김혜옥 선교사가 "교도소 사역을 하고 있으며 정신병동의 지도 목사를 하고 있다. 대만에 제일 큰 십자가를 세우는 일을 했다“고 말한 후 신상철 목사가 "열심히 협력하고 봉사하겠다"고 말하고, 케냐 조규보 선교사가 "케냐에 1호 빵공장이 생기게 되어 감사드린다. 이를 통해 말씀 읽는 것이 활성화 되기 바란다"고 말한 후 세선총회신학원 원장 강창렬 목사가 "선교사님들을 통해 도전을 받는다. 신학교가 잘 되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태국 김진명 선교사가 "물가가 많이 올라 사역에 조금 어려움이 있다.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기도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차드공화국 김장섭 선교사가 "차드는 서부 아프리카에 있으며 극빈국이다. 70%가 사하라 사막이다. 앞으로 빵공장이 만들어지기를 기도하겠다. 200개 부족이 있다. 학교를 통해 900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고, 인도 원현숙 선교사가 "28년째 사역하고 있다. 2016년 추방 당해 현재 국내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 후, 전 세선연총회장 박용옥 목사가 "코로나로 교회사역에 어려움을 당했는데 자주 포럼에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감비아 유재동 선교사가 "서울명동교회에서 후원해 주어 잘 사역하고 있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인도 A 선교사가 "최요한 목사님과 계속해서 선교에 협력해 감사드린다. 현지인 목회자 가정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155개 교회가 지어지게 되어 감사드린다. 남편 선교사가 구속되는 어려움 가운데도 계속해 사역하고 계신다"고 말한 후 백종욱 서양화가는 "오늘 모임이 큰 감동을 줬다.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김용덕 목사가 "38년째 목회하고 있다. 최목사님과 함께 선교 사역을 하고자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한 후, 필리핀 원치현 선교사가 "세계선교신문을 창간해 더 넓게 선교사역을 하고자한다"고 말했다. 최석수 선교사가 "세계 여러곳에 신학교를 세우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국내의 좋은 목사님과 교수님을 강사로 세워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캄보디아 정바울 선교사가 "교육 전도 의교 구제사역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휠채어를 공급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한 후, 에디오피아 박종국 선교사가 "현정부와 전정부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내전이 끝나고 선교사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이강철 회장이 "선한열매란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이곳에 계신 분들의 선한 열매를 담고 싶다"고 말한 후 서예가 홍덕승 장로가 인사하고, 필리핀 배성미 선교사가 "교회 개척, 종족 사역, 어린이 사역, 빈민구제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전지용 목사가 “목사님과 교인들의 헌신으로 서울명동교회가 사역하고 있어 감사드린다. 큰 교회도 하지 못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다. 오늘 모임은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후 주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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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6
  • 미래목회포럼, 광복절 메시지 발표
    미래목회포럼(대표 이상대 목사. 이사장 박경배 목사) 광복절 메시지 오는 8월 15일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광복 된지 77주년이 되는 날이다. 왜 나라를 뺏겼으며, 어떻게 수모를 겪었고, 어떤 힘으로 광복이 된 것일까? 눈에 보이는 나라 잃은 설움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1910년 8월 23일과 29일에 한일합방에 조인함으로서 그때부터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고, 해방되기까지 36년간 주권 없는 민족으로 슬픈 역사가 진행됐다. 이 나라의 국권, 즉 통치권, 국토, 국민 주권이 송두리째 일본에게 넘어간 것이다. 36년간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우리나라는 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상실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등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했다. 또한 우리민족 고유의 역사와 언어 및 우리의 이름까지 빼앗기는 노예 상태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 패권주의 망상은 날로 득세하기 시작하여 저들은 마침내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후 이 땅과 이 나라 백성은 완전히 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누이들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성 노예가 되었고, 건강한 청년들은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거나 일본 본토로 끌려가 탄광 노동자로 강제 노역을 했다. 또한 신앙의 자유도 말살 당해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 등이 참혹한 고초를 겪고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광복절을 제대로 보려면 성경에 나타난 광복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즉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광복을 어떻게 이루어 가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한국의 광복절과 같은 사건이 성경에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오던 사람들의 감격스러운 모습이 시편 126편 1절부터 6절까지 등장한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단이 되어 서로 질시하고 있던 중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먼저 패망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라는 기간이 있었기에 모진 고난에도 신앙을 지킨 남은 자가 있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떠밀려 들어간 것과 다니엘이 사자 굴에 떠밀려 들어간 것만 봐도 얼마나 탄압이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금을 버드나무꼭대기에 걸어두고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포로 생활이 끝나고 돌아 올 때 이들은 다시 수금을 켰다. 유대 민족이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레스 왕에 의하여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 올 때, 너무 기뻐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유는 삶보다 중요하다. 사실 고레스왕은 자기 나라의 형편 때문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포로생활을 겪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을 불 속에 들어가 없어질 불순물이 아니라 더욱 더 깨끗하게 단련될 금으로 보셨다. 그러면 이 민족의 광복은 무엇인가? 일반 세상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군국주의 압제 아래에서의 자유와 해방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천조태신’, 이른바‘태양신의 아들’ 숭배에서 해방을 받은 신앙 자유이다. 일제 때 기독교는 이중 수난을 겸하여 받았다. 그 하나는 국권을 빼앗긴 민족으로서 받은 민족적 수난이었고, 또 하나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받은 수난이었다. 한국에 있는 여러 교파들을 1945년 8월 1일에 통폐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속하게 하였다. 미국 장로교 외지 선교 보고에 의하면 이러한 핍박 때문에 당시 5천여 곳의 개신교회 중에서 1천 2백여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2천여 신도가 투옥이 되고, 50여 명의 목회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 결과 70만을 헤아리던 교회 신자의 수는 그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일반 역사의 눈으로 보면 식민지 생활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상과의 영적 싸움이었다. 바로 8월 15일은 하나님이 이 땅에 해방을 주신 날이다. 이 날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 저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저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게 되었다. 광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였다. 일제 때 많은 순교자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광복 선물이 있었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축복이 있었던 것이다. 폭정을 당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해방의 가치와 감격을 모른다. 우리는 그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전쟁을 이긴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이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됨의 역사를 한국교회가 먼저 보여 줘야 한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일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변해야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믿는 우리들을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귀한 사명을 이뤄나가야만 한다. 또한 이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반목과 분열의 정치를 종식하고 화합과 대타협과 통합의 정치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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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관
    2022-08-06
  • 오정호 목사, "허위사실 고발로 명예를 실추시키고 교회 전도의 문을 막았다"
    서대전노회 140회 1차 임시노회가 8월 5일 오전 11시 서대전노회 회관 2층 예배실에서 모여 제107회 총회 부총회장 예비후보 오정호 목사의 선거와 관련한 고발 대응에 관하여 노회 임원회에 위임키로 가결했다. 오정호 목사는 신상발언을 통해 "그동안 금권선거를 멀리하는 선거운동을 해왔다. 그런데 7월 18일 전남제일노회가 저를 22건으로 고발했다. 그래서 7월 27일 심의분과에 출석해 성실히 소명했다. 저는 그동안 목회자로 비루하게 살지 않았다. 아들 목사에게 '목사다운 목사'라는 평을 들으며 살고자 했다. 그런데 허위사실 고발을 통해 제 명예를 실추시키고 교회에 부덕을 끼치고 전도의문을 막았다. 그럼에도 고소 고발은 하지 않으려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선관위에서 고소장을 제출하라는 요청에 따라 고소장을 제출하게 되었다. 저는 '총회가 필요한 목사'가 아니라 '총회가 찾는 목사'가 되기를 바란다. 저로 인해 임시노회로 모여주신 모든 회원들에게 송구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한 후 노회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하고 본인과 관련된 건이라 임시노회 자리를 떠났다. 결국 먼저 전남제일노회가 오정호 목사에 대해 사전불법선거 운동 건으로 고발했기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서대전노회에서도 어쩔 수 없이 노회적으로 대응키로 가결한 것이다. 두 후보간 정책 선거를 기대했는데 결국 노회간 고소 고발로 비화된 것에 대해 총대들은 안타까워하며 그런 가운데서 시시비비가 잘 가려져 공정한 조사와 판결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가능하다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덕이 안되는 고발건을 서로 취하하고 정책 대결로 나가기를 소망하는 바램도 있다. 회의 전에 있었던 예배에서 노회장 강지철 목사는 성총회가 되기를 위해 시찰별로 연속 금식기도할 것을 제안하며 설교 후 총회를 위해 간절히 합심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배는 서기 성옥석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유영만 장로가 기도 후 회의록서기 도남철 목사가 역대하 20장 3절부터 4절까지 봉독한 후 노회장 강지철 목사가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란 제목으로 "여호사밧 왕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우리 노회도 선거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시찰별로 하루 1끼씩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설교하고 합심기도한 후 부노회장 양현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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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회
    2022-08-05
  • 후보 확정은, 먼저 꼼꼼한 서류 심사로
    제107회 총회 임원 입후보자들이 7월 4일-8일 주간에 후보등록을 했다. 그리고 7월 22일 총회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소강석 목사)는 전체회의를 열어 1차 입후보자 심의를 진행해 권순웅 목사를 비롯한 45명을 제107회 총회선거 후보로 확정했다. 하지만 오정호 목사는 후보확정이 보류됐다. 전남제일노회에서 고발장을 선관위에 접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목사는 지난 27일 선관위 심의분과에 출석해 고발내용에 대해 소명했다. 이제 8월 4일 있을 선관위 전체 회의에서 오정호 목사의 후보 문제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선관위 위원장 소강석 목사는 지난 7월 22일 전체회의에서 “입후보자에게 하자가 없다면 빠르게 후보로 확정하는 게, 입후보자뿐만 아니라 총회와 총대들을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라면서, 공정하고도 신속한 심의를 주문했다. 총회 선거 입후보자는 당선 되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쳐야한다. 그 첫 번째 단계가 후보 확정이다. 후보가 확정되야 그 이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정호 목사는 전남제일노회가 7월 18일 임시노회로 모여 고발하기로 가결하고 고발장을 선관위에 접수했기에, 4일 후에 있은 전체회의에서 후보 확정 보류가 됐다. 물론 후보로 확정됐다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확정된 후보들도 선관위에 고발 건이 접수될 경우 추가로 심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발장이 접수된 한기승 후보는 곧 심의분과에 출석해 소명해야한다. 결국 후보간에 고소 고발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먼저 고소를 하면 상대방 후보를 후보 등록 보류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상대방 후보에게는 심적인 부담감을 주고 총대들에게는 그 후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고소 고발 당한 상대 후보가 대응할 시간이 없이 선관위 전체 회의를 하게 되면 후보 확정 보류의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고소 고발 당한 입후보자가 맞대응해 상대방을 고발하더라도 후보확정자 신분과 후보확정 보류자 신분으로 조사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의분과에서는 1차적으로 서류 심사를 해서 하자가 없으면 입후보자를 선관위 전체 회의에 올려 후보로 확정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이후 고소 고발건에 대해 처리하면 된다. 지금처럼 먼저 고소 고발한 입후보자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서는 안된다. 서류 심사만으로 후보를 확정하고 추후 고소 고발건에 대해 다뤄야 공평하다. 만약 역으로 오정호 목사 측 서대전 노회가 먼저 한기승 목사를 고소 고발했다면 오정호 목사는 후보 확정되고 한기승 목사는 고소 고발건으로 인해 후보확정 보류가 됐을 것이다. 결국 선빵을 날린 사람이 유리하게 되어있는 선거법이기에 이에 대해 검토하고 수정 보완하기를 촉구한다. 권투 시합을 위해 두 선수가 링 위에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한 선수는 올라가 휘젓고 있고 한 선수는 올라가지도 못한채 링에 올라 갈려고 진을 빼고 있다. 이는 두 선수의 페어 플레이 경기를 보기 원했던 군중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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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3
  • 전남제일노회, 허위사실 유포로 역풍 자초
    전남제일노회가 오정호 목사를 사전선거운동으로 고발하면서 허위 사실을 적시했기에 이로인한 역풍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전남제일노회는 고발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17. 금품 제공으로, 선거규정 제6장 제28조 7항 위반 피고발인 오정호 목사는 선거규정 제6장 제28조 7항(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의 추천을 받은 후 일체의 금품요구 및 수수를 할 수 없다)을 위반하였습니다. 오정호 목사는 2022년 6월 5일 오후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모이는 소수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광주집회에 5,000만원을 금품으로 제공하여 목사 부총회장 선거에 홍보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효과를 노리는 불법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입증자료 17. 금품 제공 사실확인서) 그런데 확인결과 오 목사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고, 전남제일노회는 금품제공 사실확인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결국 전남제일노회는 기본적인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오 목사를 허위고발한 것이다.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선거관리 규정은 다음과 같다. 선거관리 규정 29조 1항 허위사실 유포자에 대해서는 향후 10년간 총회 총대 및 총회 공직을 제한한다. 총회 선거관리규정은 허위사실 유포 범죄행위에 대해 매우 무겁게 처벌한다. 성경도 십계명 중 9 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전남제일노회는 버젓이 없던 일을 있던 일인양 꾸며 허위 고발을 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사회법에서도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1. 법규요약[「공직선거법」(이하 ‘법’이라 함) 제250조ㆍ제251조]1. 허위사실공표 금지(법 제250조) 가. 당선목적 허위사실공표(법 제250조제1항) ❍ 주 체 : 누구든지 ❍ 주관적 요건 : 당선되거나 되게 할 목적으로 ❍ 금지행위 ◈ 연설ㆍ방송ㆍ신문ㆍ통신ㆍ잡지ㆍ벽보ㆍ선전문서 기타의 방법으로 ◈ 후보자(후보자가 되려는 사람 포함. 이하 같음)에게 유리하도록 ◈ 후보자, 그의 배우자 또는 직계존ㆍ비속이나 형제자매의 출생지ㆍ신분ㆍ직업ㆍ경력등ㆍ재산ㆍ인격ㆍ행위ㆍ소속단체 등에 관하여 ◈ 허위의 사실[학력을 게재하는 경우 법 제64조제1항에 따른 방법으로 게재하지 아니한 경우 포함]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 ◈ 허위의 사실을 게재한 선전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자 ☞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나. 낙선목적 허위사실공표(법 제250조제2항) ❍ 주 체 : 누구든지 ❍ 주관적 요건 :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 금지행위 ◈ 연설ㆍ방송ㆍ신문ㆍ통신ㆍ잡지ㆍ벽보ㆍ선전문서 기타의 방법으로 ◈ 후보자에게 불리하도록 ◈ 후보자, 그의 배우자 또는 직계존ㆍ비속이나 형제자매에 관하여 ◈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와 허위의 사실을 게재한 선전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자 ☞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자기 노회 후보 한기승 목사를 부총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교단과 모든 총대를 기망한 이 일에 대해 전남제일노회와 한기승 목사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는 사이 역풍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과연 허위고발로 스스로 자초한 이 역풍을 노회와 한기승 목사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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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3
  • 월기총,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
    월기총 주최로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가 8월 1일 오전 10시 30분에 시흥시에 소재한 새하늘의교회(박승식 목사 시무) 창조자연사박물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창조적인 체험으로 복음전파 월드선교 인재양성’을 주제로 있었다. 제1부 개회예배는 유수현 선교사의 찬양 후 정도출 목사의 인도로 이종득 장로가 기도한 후 김복례 목사가 요한복음 9장 4절을 봉독하고 박재천 목사가 성시낭독 후 김현자 목사가 찬양율동하고 피종진 목사가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피종진 목사는 “하나님은 사사시대에 미디안에게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드온을 불러 사용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월기총으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주역이 되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바란다"며 "첫째,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가르쳐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줘야한다. 둘째, 모든 도우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셋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한다”고 말했다. 백이삭 목사가 헌금기도 후 윤정순·손찬헌 목사가 헌금특송하고 김영달 목사가 광고 후 피종진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2부 환영 인사 및 격려는 정진희 목사의 사회로 꾸미오리찬양선교단(김창숙 목사 외 2명)과 조에스더 목사가 특별찬양한 후 박승식 목사가 “박물관이 세워진지 20년이 지나 건물이 낡았지만 유물은 그 어디보다 많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로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다른 자연사 박물관은 진화론에 근거해 만들어졌지만 이곳은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창조론의 기초 위에 모든 기독교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쳐야한다”고 환영사 한 후 정진희 목사가 “월드기독교총연합회(약칭, 월기총) CWC(Christian World Council) 주최로 열리는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창조적인 체험으로 복음전파 월드선교 인재양성’이며 주제성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1:1,20~31절)’입니다. 이 좋은 창조자연사박물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창조적인 CWC한국인물사 기획단 출범식 개최를 감사하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먼저, 다양한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국내 최초 창조론 중심의 박물관 탐방을 통해 홍보의 극대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취재 보도하여 진화론 교육의 문제를 개선토록하고,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과 자연사 유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역사와 과학적으로 증거하고 전파하며, 창조국제적인 월드선교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CWC한국인물사는 제1차로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 (월기총,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국회조찬기도회, 국가조찬기도회, CBMC, 세직선, 한직선, 미래자연사환경학회, 한국창조과학회 등 전.현직 대표와 국내 100대교회(담임, 원로), 100대 신학교와 연대, 이대, 숭실대, 한세대, 나사렛대, 서울한영대 등 미션스쿨 포함(전,현직 총장 및 이사장), 100대 기도원장(평화의동산, 연수원, 수양관 포함) 중에 신청을 선착순으로 받아 각본을 만들어 순회하며, 기도성회와 대담 등을 하고, CWC한국인물사 심사위를 통해 100인을 선정하여 원고를 받고, 문서선교 약정서를 받은 후 정보를 입수 하면서 편찬위를 구성, 세미나와 연합성회 및 인터뷰와 시상식 등을 통해 자료를 보충 편집발행해 국회도서관에 기증, 전국 시도와 학교 등 도서관, 서점 등에 온ㆍ오프라인 보급을 통해 설교, 강의, 논문 등 자료와 창조론 학술정보를 공유하고자합니다“라고 인사말했다. 김춘환 목사가 “인물대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선조의 좋은 신앙 유산을 잘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격려한다"고 격려사하고, 김종수 목사가 “귀한 모임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힘을 다해 충성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하고, 김복만 목사가 “88올림픽 때 이것을 기념해 부산에서 울산까지 마라톤을 했었다. 앞으로 구국기도회를 열고자한다"고 인사말했다. 3부 축사와 특별기도는 이관호 목사의 사회로 최태선 목사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피조물을 경배한다. 창조박물관을 통해 창조 신앙을 굳건히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박영수 목사가 "창1:1을 보여주는 것이 이곳 창조자연사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어렵더라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고 축사하고, 김종구 장로가 "월기총을 위해 정, 김 목사님이 많은 수고를 하셨다. 세상에서 큰 일을 감당하는 월기총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한 후 박갑출 교수가 "그동안 정부를 위해 많은 발언을 해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 후 이 수 교수가 성시낭독했다. ‘국가와 교회를 위하여’ 정지현 목사가,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과 홍보를 위하여’ 김겸손 목사가, ‘CWC한국인물사 편찬위 기획단 출범을 위하여’ 임재천 대표가 특별기도했다. 제4부 설명회 시간에 박승식 목사와 실무진이 창조자연사박물관 및 창조국제기독학교에 대해 설명회를 갖고 박승식 목사가 정성껏 대접한 중식 후 모든 모임을 마쳤다. 자연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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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1

목회 검색결과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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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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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9
  • 평등법에 나타난 마귀의 간계(엡 6:11-12)-황선우 교수
    (평등법에 대한 설교를 부탁드려 받은 설교 원고입니다. 기꺼이 자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듯이 보이지 않지만 악한 영도 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악의 영들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사탄은 마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는 “큰 용이 내쫓기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고 말씀합니다. 이 사탄, 즉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꾀는”의 의미는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뱀으로 나타난 마귀가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 한 것은 무엇입니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인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속이는 것이죠.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도 마귀의 속임을 대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여기서 “마귀의 간계”가 “마귀의 꽤”,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지 말고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가 대적하는 이 마귀의 졸개라 할 수 있는 악한 영들 또한 우리가 대적해야 할 상대임을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사람들과 싸울 때가 많지만 사실 우리의 궁극적인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언뜻 보면 여기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 이 어둔 세상의 통치자들을 말하는 것 같지만 바로 앞에서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싸워야 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은 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싸워야 할 궁극적인 싸움은 영적싸움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과의 싸움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치열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듯이 마귀도 사람을 통해서 일합니다. 이 세상의 영적전쟁을 적나라하게 펼쳐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의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이 영적 전쟁의 대표적인 예는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과의 싸움입니다. 작년 6월 29일에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서 교회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노력으로 하나님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막아주신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올해 6월 16일에 24명의 국회의원이 이번에는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거의 동일한 법안을 발의했고 이어서 최근 8월 9일에도 13명의 국회의원이 또 다른 평등법을 발의했습니다. 조금 전에 본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 속이는 자라고 말했는데 마귀는 너무나 그럴듯한 이름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속이는 법안을 제정하게 했습니다. 포괄적차별금지, 평등 이러한 말 자체는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안의 이름이 너무 좋아서 이 법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덮어놓고 좋은 법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마귀의 전형적인 속임수,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의 용어로 말하면 마귀의 간계, 아주 간사한 계획입니다. 북미와 유럽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으로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사회를 더욱 타락시켜서 재미를 본 마귀가 우리 한국 사회도 같은 전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마귀의 간계를 분별하고 대적하지 않고 마귀의 꾀에 넘어가 버리면 이 사회는 더욱 타락하고 교회는 성경대로 말씀을 전할 때 극심한 핍박을 받고 성도들은 신앙의 양심을 갖고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평등법이 어떤 법인지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는 법이고 올해 발의된 두 개의 평등법도 대동소이하여 올해 6월 16일에 첫 번째 발의된 평등법에 기반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평등법을 반대한다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에 찬성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아닌 개별적 차별금지법들이 이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 차별금지법, 여성차별금지법, 인종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고용차별금지법, 고용평등법, 유전자정보차별금지법, 임신차별금지법 등입니다. 이런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교회에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이름 평등법을 반대하는 것의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이 동성애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함으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초래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평등법의 독소조항들을 보면 평등법 안에 마귀의 간계가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등법안 제4조 2항에서는 여러 사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적지향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의 성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동성애라고 말하겠지요. 성별정체성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자신의 인식을 말하는데 평등법 3조 1항에서는 성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은 제 3의 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예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인데 자신이 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인데 자신이 남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트랜스젠더 중에는 성전환수술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성이 남자와 여자 둘 뿐이라고 말하는데 평등법에서는 트랜스젠더와 같은 제3의 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등법 4조에 보면 이러한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과 관련한 차별의 예로 괴롭힘을 말합니다. 평등법에서는 그 괴롭힘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경우로 정의하고 그 예로 부정적 관념의 표시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성애자가 목사의 설교 가운데 동성애는 죄라며 부정적으로 말하는 말을 들어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차별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목사가 평등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년 전에 포괄적차별금지법에도 이와 같은 내용의 법이 있었는데 평등법에도 동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입각하여 동성애는 죄이고 트랜스젠더는 성경에 없는 성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차별적 법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법, 이 법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마귀의 간계가 숨어있는 법입니다. 22페이지 분량의 평등법안을 보면 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매우 강합니다. 제9조를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에 반하는(즉 평등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을 조사, 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기존의 우리사회의 여러 법이나 제도도 이 평등법에 취지에 맞게 다 뜯어 고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의 군형법에는 군에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 만약에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평등법이 통과되면 이 평등법의 취지에 맞게 군에서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야 함을 말합니다. 또한 이 평등법이 통과되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취지에 부합하도록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혼만 인정하는 현행 민법을 개정하여 동성간의 결혼도 인정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을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성경의 창조섭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성경적인 가족제도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우리는 이 포괄적차별금지법 혹은 평등법이 먼저 통과된 서구의 나라들에서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된 안타까운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세속화된 서구사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평등법 13조에 보면 여러 이유로 인하여 모집과 채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데 여기서 여러 이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라든지 기독교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모집을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자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영국에서 2007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성공회의 청소년 사역자 포지션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성공회 사제가 자신이 불합격한 이유는 동성애자였었음을 밝힌 것 때문이었다고 소송을 진행했고 결국 영국 법원은 지원자의 손을 들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역자로 동성애자를 뽑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했다면 기독교 기업이나 기독교 학교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등법 25조에서는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때에도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별 등을 이유로”라고 말하는 것은 성별 이외에 다양한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 의사에게 성전환 수술을 의뢰했는데 이 의사가 자신의 신앙의 양심상 성전환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서 차별한 것으로 간주되고 법적인 제재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 평등법 29조에서 말하는 교육내용에서의 차별금지입니다. 29조에 따르면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관련하여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못하게 됩니다.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대학교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동성애나 동성혼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서구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별금지법의 교육내용 차별금지 조항 때문입니다. 이는 교육내용에 대한 차별금지가 아니라 교육내용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교육내용에 대한 독재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 공교육을 통해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 하나의 옵션으로 배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법을 통해 이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마귀의 간계입니다. 평등법에서는 이러한 법들이 실제적으로 잘 작동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33조에 보면 앞에서 말한 차별의 예들에 대해서 그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 3자인 그 사람을 아는 주위 사람들 고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차별을 당했다라고 호소하는 피해자를 위해 나라에서 소송지원변호인단을 운영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어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고소, 고발할 때 나라의 세금으로 변호인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누가 차별했다고 고소할 때 고소를 당한 사람이 피해자가 피해를 받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승소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이는 차별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자가 승소하기에 매우 용이하게 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설교한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그 목사를 고소한다면 그 목사는 그 고소한 사람이 괴로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차별을 했다고 고소, 고발당한 사람이 손해배상액을 내야 하는데 36조를 보면 그 최소 손해배상액이 500만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적지 않은 손해배상액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유튜브에 올려진 동성애의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설교자를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최소 5백만원의 손해배상액을 벌금으로 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가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만약에 100명이 모여 집단으로 그 설교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5억의 손해배상금을 벌금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 진리의 선포를 막는 이 평등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평등법은 평등을 위한 법이 아니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과 관련하여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양심, 사상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 사회를 더욱 세속화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법입니다. 사람들이 이 악한 법안을 만들었지만 그 뒤에는 마귀의 간계가 있고 그러므로 이 싸움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제 발의된 평등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도록 기도해 주시고 주위에 평등법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악한 실체를 알려주셔서 많은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이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 법에 실체를 알리시길 바랍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는 진영에서는 평등법에 찬성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이용하는데 많은 국민들은 평등법의 실체를 모른 채 이름만 듣고 좋은 법이라 생각하고 찬성한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망가뜨리는 이 악법의 실체를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알려서 전 국민적으로 평등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명과 같은 반대의견 표명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역사가 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물리치실 수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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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본 소논문은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 시의적절해 파일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좋은 논문을 공유허락해준 윤 교수에게 감사합니다. 추후 교수들의 좋은 논문을 종종 게재할 계획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된 기후변화는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다. IPCC가 발간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포함한 여러 자료는 우리 시대가 기후변화가 초래할 총체적 재앙에 직면했음을 경고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는 깨어진 창조세계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태적 인식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류세’나 ‘지속가능발전’과 같은 개념에 반영된 인간중심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생태계와 역사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기독교 섭리적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무관심이나 과민함 대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독교적 확신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깨어 있는 선지자로 설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가 초래할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소외당할 기후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관심과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태적 약자를 존중하고 지탱하면서 동반자적 삶을 일구는 법을 터득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거스르는 기독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이면에 도사린 부정의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의와 평강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이자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상에 잠시 머물면서 다른 손님들을 환대하는 나그네 왕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다양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해 올바르게 번성해갈 수 있도록 활동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인식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환기하고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활성화하고 공동체적 운동을 일으키는 거룩한 생태적 선순환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Ⅰ. 들어가는 말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에서 CG로 그려진 천재지변이 뉴스 화면과 일상에 실제로 등장하는 일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그 공포의 전조와 같은 이상 기후 현상이 세계 각처에서 발생하면서 코로나 사태를 능가하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이제까지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보다 모호하고 우화적인 언어 속에 있었다. 기후변화는 북극곰이나 펭귄, 산호초와 꿀벌의 생존을 위협할 뿐 사람 사는 세상과 무관한 것인 양 취급되었다. 애먼 북극곰이 지구온난화의 상징동물 역을 도맡은 것도 그런 탓이 크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사이 기후위기는 우화 속에서 현실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이상기후 현상들이 고대 신화 속 괴물처럼 인간의 땅을 짓밟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호주 산불(2019-2020), 미국 서부 산불(2021), 중국 남부의 호우 사태(2020), 서유럽 홍수(2021), 시베리아와 캐나다의 고위도 지방에서 관측된 이상고온현상(2021), 초거대 모래폭풍과 황사(2021) 등 기상관측 이래 최초라는 재앙들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바야흐로 기후재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화적 어법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언어의 불완전함 탓일 수 있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얽힌 기후 현상을 제대로 이해해서 짚어낼 인간의 언어가 빈곤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후현상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인식을 훌쩍 넘어서다 보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는 계속 흔들리며 변화했다.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와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다분히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는 ‘기후위기’(climate emergency)라는 절박한 용어로 바뀌더니, 이내 당혹감과 절망감이 완연한 ‘기후재앙’(climate disaster)이 되었다. 기후변화가 굶주린 북극곰이 민가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영상을 TV 모니터 너머로 보던 사람들의 용어라면, 기후위기나 기후재앙은 북극곰을 덮친 비극에서 자신들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사람들의 용어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 증후군’(The Boiled Frog Syndrome)1에 걸린 것처럼 기후변화에 절박한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듯하다. 실감 나지 않는 위기에 적절한 대응이 뒤따를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용어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후변화는 환경 전문가의 난해한 보고서를 벗어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우화적 문법에 갇혔던 담론이 마침내 현실 문법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기후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 있는 한, 기후위기 담론은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생태계 전체와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기에 사회과학과 인문학과 신학과 일상의 대화가 덩달아 참여하는 담론장에 올릴 ‘모두의 화제(話題)’이다. 지금 당장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분석과 예측을 공부하고 위기의 시대를 살아낼 담론과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무지한 공포나 탈속적 신비주의를 조장하기보다 기독교의 신념과 가치에 걸맞은 합리적 담론과 실천적 삶을 제시해야 한다. 이 글에서 논자는 한국교회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기후위기 시대를 대처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고자 한다. Ⅱ. 현실이 된 기후위기 1.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가 중차대한 글로벌 의제로 부상한 것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간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가 기후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1972년에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인류 환경에 관한 유엔 제1차 회의’, 일명 ‘스톡홀름 회의’)에서 처음으로 국제 회의에서 진지하게 다뤄졌다. 1979년에 제1차 세계기후회의가 개최되고 10여 년이 지난 1988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기변화에 관한 세계회의’는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동의 인식에 도달했다. 그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기상기구(WMO)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설립되었다. IPCC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차례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18년에 특별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했다.2 오늘날 IPCC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추이에 대한 분석과 예측에 관한 가장 과학적인 자료와 긴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IPCC가 1990년에 발간한 1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으로 인한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급격한 증가로 지구 표면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1992년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일명 ‘리우회의’)는 처음으로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세계협력의 기본원칙을 채택했고, 1994년에 세계 각국의 기후정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체결에 이르게 된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각국의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강제성 있는 제약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었고, 대신 시행령에 해당하는 의정서를 통해 의무적인 배출량의 제약을 시도했다. 1997년에 체결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 정식 명칭은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여섯 종류의 감축 대상 가스의 배출감소 목표를 지정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기간에 전체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기준 5.2% 이하로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최다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 중국, 인도는 협약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적 협의의 실효성을 무력화시켰다. 교토의정서 채택 이후에도 기후변화는 인간의 예측을 조롱하며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IPCC의 1차 보고서와 2차 보고서는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입증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부각하는 데에는 신중했다. 그럼에도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리우회의가 열리고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되었고 2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에서 채택되는 성과를 거뒀다. 유엔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채택이 실질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이에 IPCC 보고서의 기조도 변했다. IPCC의 3차 보고서와 4차 보고서는 지구온난화와 인간 활동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은 인위적인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에서 기인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명시하고 인간의 활동이 이런 수준으로 지속되는 한 기후변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IPCC의 5차 보고서(2013)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개입으로 심화한 현상이며 지구온난화의 해결도 인간의 결단과 행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거의 단정적으로 내리는 것으로 그 임무를 종결했다. IPCC의 5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기 위해 2016년에 체결된 파리기후협약(Paris Climate Agreement)에서 채택되었다. 파리기후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여 2021년부터 적용될 기후변화 대응을 담았는데,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부여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전 지구적 기후 합의안으로 자리 잡았다. 파리협약은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이 1.5℃를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 2018년 10월에 인천에서 개최된 제48차 IPCC 총회에서 승인되고 채택된 「지구온난화 1.5℃」특별보고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특별보고서는 현 추세대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10년마다 0.2℃씩 증가해서 2050년까지 지구 온도가 1.5℃ 상승하고 2100년에는 4℃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설령 파리협약을 통해 국가별로 제시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대로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는 2.9℃∼3.4℃ 상승하게 될 것이며 이는 전 지구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으로 전망했다.4 특별보고서는 지구 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는 경우와 2℃ 상승하는 경우 지구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해서 제시하면서 2100년까지 전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특별보고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파리기후협약이 대변하는 이전까지의 대응 방식으로는 ‘1.5℃ 제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며, 지금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획기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IPCC의 특별보고서는 2100년까지 지구 온도 4℃ 증가라는 끔찍한 종말 시나리오를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안일하고 편향된 인식으로 현 상황에 안주하고 현실을 낙관적으로 외면해온 관행에 충격을 가했다. 2021년 8월 6일에 승인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제1 실무그룹(과학적 기반) 보고서’는 앞서 특별보고서에서 제시했던 ‘지구 평균 기온 상승 1.5℃ 이하 제한’이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전망한다.5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현재와 같이 지속된다면 1.5℃ 상승하는 시점이 특별보고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10년 앞당겨진 2021∼2040년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보고서에서 IPCC는 온실가스 배출경로를 예측하는 5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온실가스 감축을 철저히 시행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로도 이 세기의 중반에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6℃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100년까지 5.7℃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도 보고서는 전망한다. IPCC의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기후변화가 초래할 문제를 경고했다. 최근에 나온 두 보고서는 그런 위기가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으며, 인류가 위기를 앞두고 실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질책한다. 전 세계의 전문적 지성이 총동원돼서 작성한 IPCC의 보고서 논조를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신뢰할 만한 연구는, 안타깝게도 발견하기 힘들다. 2. 전례 없는 수준의 거대한 재앙 IPCC의 보고서에는 과학적 도표와 그래프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세상에 기후변화의 실상을 알리는 데 북극곰보다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후변화를 도표와 그래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기후라는 문제가 티모시모턴(Timothy Morton)이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6라고 명명한 초거대 실체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행성 단위의 공간’과 ‘문명을 넘어서는 시간’ 동안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수들이 얽혀서 발생하기에 인간의 지성이 인과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일상과 건강, 식량과 식수, 산업과 에너지, 고용과 경제, 정치와 경제 등 모든 인간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나 체제가 제어할 수도 없다. 17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이 폭발하며 분출한 엄청난 화산재로 인해 유럽 지역 온도가 상승하고 각종 질병과 기근과 흉작이 발생하면서 결국 불안해진 유럽 사회에 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는데,7 화산폭발과 프랑스 혁명 사이의 인과관계는 당시에 예측하거나 분석하기 불가능했다. 오늘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부조화하는 이유는 거대함뿐만 복잡함 탓도 크다. 기후와 같이 거대한 생물학적 체계는 수많은 상호작용이 파악 불가능한 구조로 얽혀있는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를 형성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개별 현상은 다른 현상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기상현상이 다른 현상을 촉진하거나 억제할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대처가 되먹임을 일으켜 기후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기후변화는 사회갈등, 경제 불평등 심화, 에너지 위기, 전쟁과 폭동의 위협, 난민 문제, 패권 갈등과 정치지형의 변화, 전염병 대유행, 세계 경제 체제의 변화 등 모든 문제에 작용하고, 이에 대처한 인간의 반작용은 다시 불가해한 연쇄작용을 거쳐 전 세계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8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는 기후위기 담론이 특정 전문분야가 독점하는 사안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기후위기를 논하는 담론 테이블에는 거의 모든 문제가 놓인다. 국가 간의 협력을 통한 글로벌 시스템의 개선, 선제 대응의 중요성,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발적 협력, 외부적 충격에 대비한 사회적 공공 시스템의 필요성, 탄소제로 관련 기술의 개발, 미디어의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 기후위기 리스크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대처 능력 들은 수많은 층위와 연관을 이루는 논의 중 가장 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와 관련해 하이퍼오브젝트나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 개념은 여러 기후 현상들이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순식간에 임계점(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급격한 충격을 가해서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고, 우리는 그런 과정이나 시점을 제대로 예측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간헐적으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보면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표면적 징후만 감지할 뿐 그 이면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임계점에 근접할수록 기후재앙은 부정할 수 없게끔 ‘감춰진 미래’에서 ‘드러난 현실’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ª2050거주불능지구4(The Uninhabitable Earth)에서 전례가 없는 ‘대량 학살’로 현실화할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준다. 월러스 웰즈는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기후재난 시대의 시나리오를 12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9 ① 살인적인 폭염: 여름 최고기온이 평균 35℃ 이상인 도시가 현재 354개에서 2050년까지 970개로 증가하고, 2100년까지 세계 인구 2분의 1 혹은 4분의 3이 극심한 폭염에 노출되어 온열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② 빈곤과 굶주림: 지구 온도가 1℃ 상승할 때마다 전 세계 곡물 수확량은 10% 감소하는데 4℃ 상승한다면 절반으로 감소한다. 파리기후협약의 목표대로 진행되더라도 2050년경 개발도상국 거주 국민 중 1억 5천만 명이 단백질 부족 상태에 처하는 등 세계는 식량부족 사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③ 집어삼키는 바다: 파리기후협약의 1.5℃ 상승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해수면은 최대 1.8m까지 상승하고 홍수피해는 160∼240% 증가하게 된다. 지구 온도가 4℃ 상승하는 경우 해수면은 최대 2.4m까지 상승하고 대부분의 해안 도시가 물에 잠기면서 세계 지형이 바뀌게 될 것이다. ④ 치솟는 산불: 화염 폭풍 수준의 전례 없는 대형 산불이 지구 곳곳에서 연중 수시로 발생할 것이다. 특히 그린란드나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 북극권 화재가 잦아질 것이다. 대형 산불은 이산화탄소 증가와 기온 상승, 산림의 메탄흡수 능력 저하, 해충 확산으로 인한 질병 확산 등 연쇄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⑤ ‘날씨’가 되어버릴 재난들: 슈퍼 태풍, 대규모 폭우와 홍수, 뇌우 등 생각하지 못한 특수재난이 훨씬 자주 일어나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재난으로 일상적인 날씨처럼 닥칠 것이다. 이로 인해 재난으로부터 재건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⑥ 갈증과 가뭄: 물부족 상황이 심화하고, 담수호와 대수층(지구 지표 아래의 지하수 저장고)의 수량이 고갈될 것이다. 기후변화의 연쇄작용을 물효율성이 저하되면서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10 ⑦ 사체가 쌓이는 바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량의 4분의 1 이상을 흡수한 바다의 해양 산성화가 심각하게 악화하고, 전 세계 해양생물 4분의 1을 지탱하는 산호초가 백화 현상으로 파괴될 것이다. 해안 도시는 악취로 뒤덮이고 해양 무산소화로 인해 해양생물 멸종과 어장 파괴가 연 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해류가 변화하면서 바다 순환 시스템이 붕괴되는 징조가 현저해질 것이다. ⑧ 마실 수 없는 공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로 어린이의 정신질환 가능성과 성인의 치매 가능성이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사막화로 인해 미세먼지가 증가하면서 호흡기 질환 감염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⑨ 질병의 전파: 일종의 기후 장부와 같은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미지의 박테리아 유출 가능성이 고조되고, 황열병이나 말라리아 발병지역이 이동하면서 전염병의 세계화가 진행될 것이다. ⑩ 무너지는 경제: 화석연료의 힘으로 일으킨 경제성장은 기후변화로 인해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이다. 현 추세대로 탄소 배출량을 유지한다면 남아시아 국민 8억 명의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전 세계에 초래하는 경제적 손실로 대공황을 넘어서는 경제 대몰락을 겪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세계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기술혁신의 영향을 현저하게 줄이거나 완전히 상쇄할 것이다. ⑪ 기후분쟁: 메콩강을 둘러싼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 국가 사이의 분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가 간의 자원 전쟁 위협이 고조될 것이다. 가정폭력이 늘고 범죄율이 증가하는 등 개인 간의 분노와 폭력도 심화할 것이다. ⑫ 시스템의 붕괴: 기후변화는 후진적 체제 국가나 빈곤국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2050년까지 2억 명에서 최대 10억 명까지 기후난민을 발생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붕괴하고 부유한 나라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독점하게 될 것이다. 사회 시스템뿐만 아니라 몸의 시스템과 정신의 시스템도 붕괴될 것이다. IPCC 보고서의 차분한 과학적 분석에 비해 월러스 웰즈의 시나리오는 극적으로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2020년도 배출량 격차보고서’(Emission Gap Report 2020)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2100년 이전에 지구 온도가 3.2℃ 상승하리라 예측함으로써11 웰즈의 시나리오가 허황한 것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미 세계는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시기보다 1℃ 상승한 2017년부터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50도에 육박한 북미의 폭염, 중국을 강타한 폭우, 중동지역의 가뭄, 시베리아의 이상고온현상, 호주와 미국서부, 터키와 그리스를 강타한 초대형 산불 등 기상이변이 속출하자, 전 세계 과학자 1만 3800여명이 바이오사이언스에 공동 성명문을 내고 “[기후변화가] 지구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한 임계점에 점점 가까워지거나 이미 넘어섰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라며 세계 각국 정부에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12 기후 비상 선언처럼 읽히는 성명서에서 객관적인 중립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과학자들조차 위기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절박함을 방증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학자들은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신세였다. 기후위기론은 조작된 공포나 강박적인 위기 조장이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후학자들의 경고는 인위적인 기후재앙론에 불과하고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는 반대론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라기보다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류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변하는 기후조건에 적응할 수 있다는 기후회의론자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13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후붕괴를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늘어났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던 사람들도 전 세계에서 속출하는 이상기후에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기후위기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급격한 기상현상이 신학적 사유의 동기로 작용하고 종교적 관습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볼프강 베링어의 문명사적 통찰에 귀기울 필요가 있다. 베링어에 따르면, 17세기 소빙하기의 유럽에서 극단적인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흉작과 전염병, 폭동과 전쟁이 빈번했을 때, 독일 지역에서 죽음의 예술(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이 유행하고 불안한 사회를 통제하려는 강압적인 법률이 쏟아졌으며, 도덕적 절제를 강조하거나 세속적 삶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유대인 박해나 마녀사냥으로 희생양을 찾는 종교적 광신주의가 등장했다.14 17세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사유와 체제가 이상기후가 일으킨 사회적 문제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무력함을 노출했을 때, 서구사회에서 “사유의 세속화”와 “세계의 탈주술화”가 일어나서 사제와 신학자와 연금술사와 점성술가가 독점했던 담론 주도권이 국가관료와 과학자에게 넘어갔다.15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기후위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위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도전을 던지며 새로운 담론과 실천의 대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며 깨어 있는 선지자 기후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무관심과 과민함의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와 달리 현재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로 기후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며 애써 낙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임박한 기후재난을 해결할 수준으 로 급격하게 발전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200년 동안 인류의 발전을 이끈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청정에너지 기술로 대체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지 예측하기조차 힘들다. 인류가 이룬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기후재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는 심리적인 아노미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기후위기로 인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요동치면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가 급격히 물러가고 궁핍과 혼돈의 시대가 닥친다면, 편안함에 익숙했던 사회와 개인은 패닉상태에 빠질 것이다. 과민한 두려움 못지않게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는 정서적 무관심과 현실도피이다. 천적이 쫓아오는 위기 상황에서 땅에 머리를 묻고 꼼짝하지 않는 타조처럼, 기후위기의 현실을 외면하고 기술적 판타지나 종교적 판타지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거주가능한 지구형 행성으로 이주를 꿈꾼다거나, 생물학적 조건을 탈피하여 가상현실과 사이버 라이프로의 디지털 전환을 꿈꾸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그런 예이다.16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기후위기 문제에 둔감하거나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로 도피하거나 윤리적 책임성과 사회적 신뢰에 둔감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기후재앙이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앙과 같은 현실의 참혹함에만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후위기와 그것이 초래할 총체적 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담론에 뛰어들어 인간중심의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기후변화를 포함하여 생태계와 역사전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섭리적 관점과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첫째, 기독교 섭리적 관점으로 기후문제를 대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인간 중심적 사고로부터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영호가 지적하듯, 기후변화는 인간이 일군 문명과 진보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이다.17 기후변화에 인간 활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개입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어떤 이들은 기후변화가 지구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소위 ‘인류세’(Anthropocene)18에 해당하는 현상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기후위기를 불러왔다는 자각과 반성을 넘어서, 기후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또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 진다면 중독을 일으킨 독(毒)으로 해독(解毒)도 하겠다는 무모함이 될 뿐이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라는 거짓 신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화로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불씨를 담아둔 채 기후변화를 해결하겠다는 난센스를 재생산해내고 있다. 기후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사고뿐만 아니라 성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지속가능발전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 사회, 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을 뜻한다.19 지속가능발전의 사고 틀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자본주의적 성장이란 대의의 부수적 문제(collateral damage)에 불과하다. 앞서 살펴본 IPCC의 보고서들은 지속가능발전이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현세대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되 미래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닭을 잡아먹고도 달걀을 계속 얻을 수 있는’ 신기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룰렛 게임’이나 ‘시한폭탄 돌리기’에 빗대는 기후변화를 대처하는 데에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은 사안의 본질을 흐려놓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통해 기후위기가 인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과정이라는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관점에서 기후는 자연적인 초거대물(natural hyperobject)이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신적 초거대물(divine hyperobject)이다.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구속의 역사를 뛰어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것이 설령 재난과 재앙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왕 되심과 거룩하심과 언약과 사랑을 드러내실 것이다.2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무책임한 무관심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선지자적 경각심’ 으로 기후위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교회는 위기와 혼란의 시대마다 곰팡이처럼 퍼졌던 컬트적 사고와 사이비 종말론이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기후위기시대에 기독교적 담론과 실천은 개인과 사회, 신학과 인문학, 독립과 연대, 저항과 공조의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될 테지만, 가장 근본적인 정서와 태도에 있어서 ‘두려움으로부터 섭리적 확신으로의 전환’, ‘인간중심적 오만으로부터 선지자적 경각심으로의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자연과 약자를 돌아보는 제사장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위기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로부터 기인해서 문명 자체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로 퍼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생태친화적 소비, 그린뉴딜 정책, 저탄소녹색경영 등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전략은 자연과 노동에서 이윤을 추출하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녹색’ 자본주의니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니 하는 환경친화적 명명만으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없다.21 그런 탓에 기후 전문가들과 환경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글로벌 체계 전체가 대전환을 맞이하지 않는 한 소용돌이와 같은 기후재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의 활동이 극단적으로 제약될수록 지구의 환경이 개선되는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 해결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22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각계의 외침에도 지지부진했던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전 세계가 셧다운 상태에 돌입했을 때 일시적으로 극적인 진전을 보였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자 전 세계 탄소배출량이 25% 이상 감소했고, 인도의 수질개선으로 멸종위기종이었던 갠지스강 돌고래가 발견되고, 관광객의 급감으로 최악으로 치닫던 베네치아의 수질이 개선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회복이 관측되었다.23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동시에 노출했다. 한편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생물 다양성이 파괴된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의 어두운 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 정부와 산업과 의료와 과학이 일사불란하게 협력하여 공동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극복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낙관적인 전망은 시기상조이다. 전염병 대유행은 기후변화가 불러올 재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스템이 붕괴할 임계점에 이르면 보호무역주의와 자급자족경제를 강화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해지고 글로벌 협력의 유대는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몇몇 선진국이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보여준 치졸한 행태는 자국중심주의와 국가 이기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집단본능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줬다. 인류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탈탄소사회로의 급격한 변침의 모멘텀을 조속하게 마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24 오히려 기후위기는 부정의와 불평으로 인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이 찌를 것이다. 재난은 보편적으로 닥치지만, 그 영향은 차별적으로 미친다. 기후재난 앞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는 1995년 미국 시카고를 덮친 폭염 사태에서 1인 가구, 노인, 빈곤층, 노숙자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취약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실에 주목했다.25 클라이넨버그는 폭염과 같은 기상 참변이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이지만 연령, 성별, 인종, 경제력, 거주지역 등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요인과 결합하여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26로 나타난다고 통찰했다. IPCC의 4차 보고서도 역시 기후변화의 일차적 희생자가 빈곤국가, 빈곤계층, 어린이와 여성, 일용직과 비정규직 육체노동자, 장애인과 경제적 소외 계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회적 약자는 곧바로 생태적 약자로 직결되는 셈이다. 기후재앙이 심화하여 수많은 기후빈민과 기후난민이 쏟아져 나올 때 사회와 국가의 대처와 별도로, 교회의 제사장적 돌봄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더 크게 고통받을 기후 약자를 돌봐야 한다. 교회는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한 자기성장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체계 안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 ‘중보적 위치’에 선 교회는 사회와 제도에서 소외당하는 기후 약자를 찾아서 그들의 영적, 심리적, 물질적 어려움을 돌 봐야 한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그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난민에 대한 기독교적 섬김과 선교의 방안을 지금부터 고민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27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확신하면서도, 영성과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여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제사장적 삶에 힘써야 한다. 자연과 타인(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존중과 섬김의 자세로 서로 지탱하고 반영하고 치유하며 동반자적 관계성을 맺는 삶의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기독교적 생태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친환경적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삶의 양식과 결별하고 기독교의 가치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개발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연과 타인과 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중보 윤리는 개인, 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차원에서 구조적 형성과 공동체적 참여를 도모해야 한다. 개인 윤리의 차원에서 절약과 재활용을 실천하는 친환경적 생활을 습관화하도록 서로 독려하는 한편, 기후변화에 관한 진실을 공유하는 환경세미나를 열고 환경운동단체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환경단체들끼리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28 더 나아가 환경입법을 지지하는 국민청원 등을 통해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고 국민적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29 3.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는 순례자 왕 기후변화는 세속주의와 자본주의, 관료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세계를 재편한 현대성이 지닌 탐욕과 폭력이 전 지구적 파괴로 귀결된다는 폭로이고 징후이다. 현대성이 자연과 환경에 가장 적대적 파괴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인간의 횡포와 무차별적 파괴를 정죄할 수 있는 악과 불의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는다.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듯 분배하는 유엔기후협약에 정의와 평등과 인권에 대한 윤리적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후정의네트워크가 “유엔 기후 변화협약의 원칙인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 세대 간 형평성, 오염자 부담은 시장 메커니즘을 위해 훼손됐다”라고 지적하는 것 역시 ‘정의’의 관점에서 기후변화의 인식과 해결에 접근해야 한다는 촉구이다.30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이면이자 어쩌면 더 본질적인 측면이다.31 기후위기는 '정의의 부재'라는 세상의 민낯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의와 불평등은 이익창출의 유일하고 정당화된 방식이다. 막대한 화석연료를 소비하며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국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들이다. 그들은 제삼 세계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미래세대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해왔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사회경제적 비용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자원과 이익의 분배 양상이 부담과 위험의 재분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선진국들이 챙긴 이익에 대한 비용이 개발도상국과 빈곤국가에게 청구되는 것이다.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 재난에 대한 완충시스템이 미비한 사회, 신에너지 친환경 정책을 수행할 기술과 자본을 갖추지 못한 저개발국,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약소국가들의 가난하고 소외된 국민들이 기후변화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가 기후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아 발생한 어마어마한 환경비용이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고스란히 부과된다.32 ‘정의의 부재’로 사람들이 통곡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방식을 어떻게 드러내고 실현할 것인지 도전받는다. 하나님 나라 서사는 현실도피를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삶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속적이고 신비적 이상주의로 현실을 각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구는 세상과는 다른 시선으로 역사와 현재를 통찰하고 현실을 위협하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삶과 대안적 공동체를 일구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세상 가운데 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가치를 다양하고 풍부한 방식으로 구체화하는 삶을 통해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기후위기는 기독교의 본질을 되물으며 그 존재 이유를 위협할 수 있다.33 하지만 기후위기는 복음의 복됨과 교회의 교회다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재앙과 같은 현실 속에서 인간의 고귀함과 품격을 지키며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종말론적 삶의 비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가 드러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종말을 사는 나그네 왕의 행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뤄지는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시고 주인이시고 우리는 나그네와 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간다고 믿는다. 나그네 된 우리는 다른 피조물을 동일한 손님과 객 으로 겸손과 존중으로 환대하며, 이후에 머물 이들을 유념하고 섬겨야 한다. 종말론적 나그네는 순례자 왕이기도 하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심부를 좀먹는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의 를 사모하는 만큼 이 땅의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로 고통받는 약자를 잊지 않는다. 정의가 없이는 다양한 생명들의 가치가 존중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번성해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기업의 전문가적 관료주의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기후위기 극복에 하나님 나라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고, 세상의 불의를 해소하는 정의와 해방의 구속을 구해야 한다. Ⅳ. 나오는 말 기후위기는 우리 시대에 종말의 아포칼립시스처럼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견된 위기는 도래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비관적 전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쏟아져나오는 재난 시나리오의 극히 일부만 실현될지라도 인간의 삶은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된다. 기후위기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을 꼽아보는 자위적 외면으로 버틸 문제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현실을 인식하고 머리를 맞대고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인식이 전환되어야 관심을 일으키고 담론이 펼쳐지고 대안적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전례가 없는 수준의 위기 예고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 인식과 삶의 전환을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일굴 준비를 해야 한다. 즉, 시대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을 확신하는 선지자적 경각심을 통해서, 기후약자들을 향한 제사장적 돌봄과 동반자적 유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며 기후 부정의에 맞서는 나그네 왕의 결단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회개와 같은 수준의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한다.34 기후재앙 혹은 기후붕괴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폭력으로 멍들고 무너져가는 현실을 애통해하고 거룩한 분노와 애절한 슬픔을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종말론적 경고를 남발하며 두려움의 연기를 피우는 컬트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품고 깨어진 창조세계에 희년과 같은 치유와 재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 1. 미국 코넬대의 비이커 실험에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곧바로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 넣은 개구리는 체온을 조절해가면서 머물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데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여기서 착안하여 작가 올리비에 클레르크(Olivier Clerc)가 점진적으로 증폭되는 위기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거나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채 나쁜 상황을 맹목적으로 견디는 삶을 가리켜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2. 1차 보고서부터 5차 보고서까지 중요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로,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철학」 29 (2016), 229를 참고하라. 3. 파리기후변화협정에 대해 간단하고 쉬운 해설은, Greenpeace 홈페이지에 나온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을 참고하라.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4.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기후변화 홍보포털에서 제공하는 요약본을 참고하라.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pdf (2021.6.21.접속). 특별보고서에 대한 간략한 해설은,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4-181을 참고하라. 5. IPCC는 3개의 실무그룹 보고서 및 특별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통합하여 종합보고서를 작성한다.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보고서이고, 제2 실무그룹(WG I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영향과 적응 및 취약성에 관한 것이고, 제3 실무그룹(WG III) 보고서는 기후변화 완화에 관한 것이다. 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I) 보고서는https://www.ipcc.ch/report/ar6/wg1/을 참고하라(2021.7.21. 접속). 6.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Morton은 하이퍼오브젝트의 예로 블랙홀, 아마존 밀림, 유전(oilfield), 인터넷과 함께 기후변화를 꼽는다. 7. 인류의 역사에 기후가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수행되었다. 기후와 역사의 관련성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Hubert H. Lamb, Climate, History and the Modern World, 김종규 역, ª기후와 역사: 기후, 역사, 현대 세계4 (서울: 한울, 2004)를 참고하라. 유사한 연구로, Wolfgang Behringer,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ㆍ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가 있다. 기상학자인 Lamb과 달리 역사학자인 Behringer는 기후변화가 문명의 전환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인다. 8. 복잡한 피드백 고리의 한 예로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를 들 수 있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화재는 많은 경우 농경과 목축을 위한 고의적 방화에 기인한다. 아마존 우림 지역에 단기간에 광범위한 콩 재배지를 확보하려고 저지르는 방화는 브라질 정부에 의해서 조장되거나 묵인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작용한다. 중국에서 쇠고기 수요가 급증 하면서 사료용 콩 수요가 증가했지만 미중 간 무역 갈등으로 인해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대체할 브라질산 대두의 수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친중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환경보호구역 지정 해제, 국립공원과 국영발전소의 민영화, 수력발전소 건설 등 반(反)환경ㆍ친(親)시장 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 결과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는 2008년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들을 참고하라. 9. David Wallace-Wells,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60-212. 10. 유럽의 정치지형까지 바꾼 시리아 내전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가뭄과 흉작으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 요인이 증가한 이유도 크다. 흉작과 기근으로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하고 민심이 돌아서면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유혈진압으로 내전으로 비화하는 악순환의 기점에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11.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은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http://greenacademy.re.kr/archives/9027 (2021.7.2. 접속) 12.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13.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기후위기론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 Hans Labohm은 IPCC를 비롯한 세계 기후학자들이 기후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기우론자’라고 비판하며 기후위기론의 자료나 통계가 허위 내지는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한스 라붐 “지구 온난화 ‘환상과의 싸움” 세계일보 2010년 12월 1일 자 기사 참고). 기후연구 분야의 전문가 중에서도 위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는 견해에 대해서, Roy W. Spencer,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을 보라. 10년 전과 달리 최근에 기후위기론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4.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27. 15.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64-269. 베링어의 역사 분석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기후현상이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영향에 대한 통찰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16. 포스트휴머니즘이 전제하는 인간과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하여,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 (2021), 31-46을 참고하라. 17.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9. 18. 지질학상으로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신생대 제4기의 지질시대를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른다. 인류세(anthropocene)는 현생인류의 활동이 시작된 최근의 시기가 지구의 지질과 기후에 불가역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홀로세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고안되었다. 인류세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없으며 인류세의 기점으로 ① 약 6천 년 전 농경시대 ② 17세기 신대륙의 발견 ③ 18세기 산업혁명 ④ 20세기 인구 대폭발 등이 거론된다.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인류세라는 용어는 ‘인류세 워킹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 AWG)을 출범시킨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에 의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0년대 이후 인류세는 지질학의 범위를 넘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발표한 브룬트란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21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환경 패러다임적 개념이 되었다.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43을 보라. 논문의 표현은 국내에서 2018년에 제정되어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법(법률 제17326호) 제2조의 정의를 따른다. 20. 구약의 재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다루는 연구인,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를 참고하라. 21. David Travis,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55. 22. “코로나의 역설...인간이 멈추자 지구가 건강해졌다”. (2020년 4월 3일자 동아사이언스 기사).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00402/100480182/1 (2021.7.2. 접속) 23. “코로나19로 수질 개선...인도서 사라졌던 ‘갠지즈강 돌고래’ 발견” (2020년 4월 24일자. 뉴스펭퀸 기사)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8 (2021.7.2. 접속); “코로나의 역설...관광객 줄자, 60년 만에 맑아진 베네치아 운하” (2020년 3월 18일자 중앙일보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3732593 (2021.7.2. 접속) 24.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6-18. 이 보고서는 2008-2009년 금융위기가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환의 모멘텀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코로나19 사태를 기후위기 대비 대전환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5. Eric Klinenberg,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26.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가 창안한 개념이다. 모스는 법률, 관습, 의례, 신화, 제도 등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같은 요소들이 총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개념을 통해 모스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나 표상이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모스의 사상을 소개하고 해설한 책으로, Bruno Karsenti,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을 참고하라. 27. 장훈태는 다양한 난민 발생 요인 중 자연재해와 같은 환경적 요인을 언급하면서, 환경난민의 경우 국외 난민보다 국내 난민이 더 빈번하고 규모도 훨씬 크다고 지적한다.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75. 28. 2021년 5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여러 교단과 교계 단체는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선포식”을 열고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의 협력과 비상 행동을 다짐했다. 그즈음 기독교환경운동연대도 7주간 기후위기 집중 대응을 위한 그린 엑소더스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교회와 교계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려고 노력했다. 29.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입안된 국내 정책과 법률에 관한 간단한 설명은,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17 (2020), 91-96을 참고하라. 30.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253. 기후정의네트워크(Climate Justice Now Network, CJN)는 제삼 세계, 원주민, 여성 그룹, 좌파 운동단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급진적인 기후운동을 지향한다. 이들은 기후협상이 자본주의가 초래한 부정의를 해소하고 소외된 약자의 권리를 세우는 방향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최근 기후변화 담론은 환경과 경제 위주에서 정의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도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 담론에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서,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263-282.를 참고하라. 32. 2018년 스웨덴 의회당 바깥에서 결석시위를 시작한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2019년에 전 세계 2천여 개 도시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파업시위’를 주도하면서 다음 세대의 환경운동가로 급부상했다. 2019년 9월 열린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툰베리는 각국 정상들 앞에서 기성세대와 선진강국의 무책임을 질타했다. 스스로 대멸종의 시대에 살아야 하는 세대라고 말한 툰베리는 젊은 세대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렇게 대변했다.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너무도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정치적 해법을 마련해야 마땅했는데도, 당신들은 방관하기만 했으면서 어떻게 감히(How dare) 여기까지 와서 할 만큼 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습니까?…어떻게 감히 당신들은 이 문제가 ‘일상의 비즈니스’와 같은 몇 가지 기술적 해법으로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까?…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로 결정한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당신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Greta Thunberg의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transcript 중에서 발췌인용함).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 ummit (2021.7.23. 접속). 33.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12. 34. 송준인은 이것을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라고 부른다.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 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참고문헌 Behringer, Wolfgang.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 Karsenti, Bruno.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 Klinenberg, Eric.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Morton, Timothy.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Spencer, Roy W.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 Travis, David.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48-157. Wallace-Wells, David.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25.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1-203.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 (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 17 (2020): 87-108. . “기후정의와 성경적 정의.” 「종교문화학보」 18 (2021): 159-185.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 철학」 29 (2016): 221-246.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2021): 26-61.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9-17.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63-199.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8-29.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웹사이트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 https://www.greenpeace.org/ko-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17 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기후변화 홍보포털의 요약본. 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 pdf (2021.6.21. 접속). IPCC 제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 https://www.ipcc.ch/report/ar6/wg1/ (2021.7.21. 접속).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을 수록한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 http://greenacademy.re.kr/ar- chives/9027 (2021.7.2. 접속).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Greta Thunberg. “Transcript: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ummit (2021.7.23. 접속) Abstract The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s in the Age of Climate Crisis Yoon, Hyung Chul Climate change, which is related to the survival of all living things on the planet, is not a problem that only climatologists, policy makers, or environ-mental engineers are concerned with, but is a problem facing all humankind. Several sources, including a series of reports published by the IPCC, warn that our time is facing the total catastrophe of climate change. In the era of climate crisis, the church must promote the following ecological trans-formation in order to appear as a community of restoration and hope that participates in God’s work of healing the broken creation. First, Christians should challenge the anthropocentrism reflected in concepts such as the ‘anthropocen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and express our conviction that what happens to ecosystems and history as a whole depends on God’s sovereignty. Through Christian conviction of God’s providence instead of indifference or hypersensitivity to climate change, Christians will be able to stand as awake prophets in times of crisis. Second, Christians should practice priestly interest and care for the climate vulnerable, who are apt to be marginalized due to the deepening polarization caused by the climate crisis. Christians must learn to live a life of com-panionship while respecting and supporting the ecologically weak, and develop a communal lifestyle that conforms to Christian values, not capitalist desires. Third, Christians should sharply point out the injustice and inequality behind the climate crisis and strive to reflect the values of the kingdom of God, such as righteousness and peace, in reality. We must see ourselves as an intermediary king with an infinite responsibility for nature and the world, and also a sojourner king who welcomes other guests while staying in the world where God is the Master. We need to be the medium of action so that the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can respect the value of various lives and prosper properly toward the glory of God. Through this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I hope that a holy eco-logical virtuous cycle that arouses collective interest, revitalizes Christian climate discourse, and provokes community movement takes place in the Kore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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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2
  • 구약성경의 동성애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구약성경의 동성애1)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 1. 들어가는 말 구약성경에 동성애를 언급한 본문은 창세기 19장 1-11절, 레위기 18장 22절, 20장 13절, 신명기 23장 17-18절, 사사기 19장 16-30절, 열왕기상 14장 22-24절, 15장 11-12절, 22장 43-46절, 열왕기하 23장 7절, 욥기 36장 13-14절, 에스겔 16장 48-50절이다. 이 본문들에 대한 퀴어신학의 구약해석을 잘 보여주는 책은 2006년에 발간된 The Queer Bible Commentary로서 이 책은 Deryn Guest 외 세 명의 퀴어신학자들이 편집하였고 다수의 퀴어신학자들이 참여하여 구약과 신약 66권에 관해 주석한 것이다.2) 필자는 이 글에서 위의 동성애 관련 구약본문들이 동성애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해설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하여 본문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퀴어신학자들의 주요 논지를 비판하고자 한다. 2. 소돔의 동성애 동성애에 관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은 타락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이다.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있는 소돔이 기록된 것을 볼 때 동성애의 시작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동성애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domy’도 바로 창세기 19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창세기 19장 1-11절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사람의 모습(남자)으로 나타난 두 명의 천사가 소돔에 나타나자 소돔에 거주하던 롯이 그들을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한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자기 전에 소돔의 백성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이 맞이한 두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말한다. 이 때 그 집을 둘러싼 소돔의 백성들을 “노소를 막론 하고 원근에서 다” 모인 소돔인들이라고 기록한 것(창세기 19장 4절)은 소돔 땅에 동성애가 얼마나 편만하게 퍼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개역개정에서 “소돔의 백성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안쉐 쏘돔”으로, 직역하면 “소돔의 남자들”을 의미한다. 롯의 집을 둘러싼 소돔인들은 롯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세기 19장 5절). 여기서 “상관하리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로서 그 원뜻은 “알다”(know)인데 이 “야다”가 문맥에 따라 ‘성교’(intercourse) 혹은 ‘동침’을 의미할 수 있다.3) 바로 이 본문에서 ‘성교’의 의미로 쓰였다. 히브리어 “야다”가 ‘성교’ 혹은 ‘동침’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예는 창세기 4장 1절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에서 “동침하매”로 번역된 것이 바로 ‘알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이다. 이러한 소돔 사람들의 악한 요구에 롯이 자신의 손님인 이 두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말하자 그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한다. 이 때 사람의 모습으로 온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천사들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문 밖의 소돔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 후 소돔 땅은 고모라와 함께 하나님의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3. 죄는 동성애가 아니라 집단 성폭력인가? 소돔인들이 롯에게 손님으로 온 두 사람을 내어놓으라는 요구에 롯은 그들에게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Michael Carden은 이와 관련하여 일방적인 성폭력과 합의하에 갖는 동성애를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4) 즉, 창세기 19장은 폭력으로 동성애를 강제하려 한 것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간에 합의하에 동성애를 나누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9장을 언급한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살펴보면 롯이 말한 소돔 사람들의 악은 단순히 집단 성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소돔의 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 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위 본문의 화자인 여호와는 소돔의 여러 가지 죄 중에 “가증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 19장 1-11절에서 기록한 소돔의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소돔에 퍼져 있는 동성애와 소돔 남자들이 롯의 집에 방문한 두 사람에게 강제적인 동성애를 요구한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가 동성애와 강제적인 동성애 요구인데 여호와가 소돔의 죄를 나열하면서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를 생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소돔의 “가증한 일”은 바로 동성애와 그와 관련된 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가증한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에바”인데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에서 동성애를 지칭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토에바)이니라 (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토에바)을 행함인즉 반 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토아보트-토에바의 복수형)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4)" 히브리어 “토에바”는 매우 강한 혐오(abhorrence, abomination)를 의미하는 단어로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 매우 혐오스러운 범죄임을 알려준다.5) 물론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토에바” 가 동성애만을 지칭하는 가증함은 아니다. 가나안 신상(신 7:26), 부정결한 짐승(신 14:3), 악인의 제물(잠 21:27), 율법을 듣지 않고 드리는 기도(잠 28:9), 악행을 저지르면서 드리는 분향(사 1:13), 이웃의 아내와 음행(겔 22:11) 등 여러 가증한 일을 “토에바”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토에바”가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기에 소돔의 “가증 한 일”을 동성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 선명하게 소돔의 죄가 동성애임을 말해 주는 구절은 신약 유다서 7절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 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다른 육체를 따라”의 의미는 정상적인 이성의 육체가 아닌 동성의 육체를 쫓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서 7절에서는 소돔의 음란한 동성애가 불의 형벌의 원인이었음을 말한다. 결국 소돔의 죄를 언급한 에스겔 16장 49-50절, 유다서 7절, 그리고 동성애를 “가증한 일”(토에바) 로 일컬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을 고려하면 창세기 19장 1-11절의 소돔의 죄는 단순히 강제적인 성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동성애 금지명령 동성애를 율법으로 기록한 구절은 위에서 언급한 레위기 18장 22절과 레위기 20장 13절인데 이 두 구절은 구약에서 동성애를 행하는 죄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레위기 18장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 것을 명령한 부분이다. 레위기 18장 22절에서는 가나안의 풍속인 동성애를 따라 행하지 말것을 명령한 것인데 이 명령문은 히브리어 부정어 “로”와 “동침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카브”의 미완료 형이 결합된 구조로 절대적 금지를 나타내는 구문이다. 히브리어 “로”와 미완료 동사의 결합은 히브리어 금지명령 중에서도 영구적 금지를 암시하는 강한 금지명령문으로 십계명의 “-하지 말라”의 계명들이 이 구조를 갖고 있다.6) 히브리어 원문의 문장 순서를 보면 일반적인 금지명령문의 순서와 달리 문장 맨 앞에 “남자와 함께”(히브리어, “베에트 자카르”)가 위치해 있어서 여자가 아닌 “남자와 함께” 동침하는 것의 가증함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레위기 18장 29절에서는 가증한 행위를 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레위기 20장 13절 역시 동성애가 매우 무거운 죄임을 말해준다. 레위기 20장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의 목록이다. 여기에 속하는 죄로는 자식을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죄, 부모를 저주하는 죄,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죄, 어머니와 동침하는 죄 등이 속하는데 이 목록 가운데 13절에 동성애가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 하반절에서는 동성애를 행한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구절의 구문과 문맥을 통해 살핀 바와 같이 동성애의 죄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매우 무거운 죄이다. 5. 동성애 금지명령은 구약시대와 남자에 한정되는가? 퀴어신학의 주장 중 하나는 동성애를 금하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두 명령은 구약시대에 한정된 율법이므로 신약시대인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7) 마치 구약율법 가운데 부정한 돼지고기를 금한 율법(레위기 11장 7-8절)이 신약시대에 더 이상 효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마가복음 7장 15-16절) 동성애 금지명령은 신약시대에 더 이상 구속 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구약의 율법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이다.(“율법은 장 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속죄와 관련한 의식법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의식법의 그림자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구약에는 속죄와 관련된 율법 외에도 다양한 율법이 기록되었는데 많은 율법은 그림자의 성격을 띠고 있고 그 실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럴 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의 율법의 실체를 파악하여 신약시대의 삶의 원리로 적용할 수 있다. 요한일서의 두 구절은 구약의 속죄의 제물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명하게 말해준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 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 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어떤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 설명, 율법과 관련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려주시기도 한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 이 경우에 속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 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여기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17절을 말씀하신 이후에 일련의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더 완전하게 가르치신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마 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5:33-3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 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 며...(마 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율법이 그림자인 경우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난 경우도 있다. 구약의 율법 중 도덕법이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너희는 거룩하라”(레 19:2)는 구약의 율법이지만 실체를 탐구해야하는 그림자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곧 바로 신약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실체적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이 율법은 가감 없이 신약 성도들이 지켜야 할 신약의 계명으로 기록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 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 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도 그림자로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중 하나로 말씀하신 이 율법은 로마서 13장 18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기록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 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구약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경우도 구약의 율법이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신약의 로마서 1장 26-27절과 같은 구절에서도 동성애가 죄임을 기록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 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 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퀴어신학자 David Stewart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문자적으로는 모두 남성의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동성애자(lesbian)는 이 율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말하는데 이 또한 적절치 못한 해석이다.8) 두 율법에서 모두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고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전제 하듯이 본문의 남성은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예컨대 출애굽기 20장 14절의 제 7 계명, “로 티느아프”(히, 너는 간음하지 말라)의 경우에 사용된 동사, “티느 아프”는 동사 “나아프”의 2인칭 남성단수형인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남성형이기 때문에 이 계명이 남성에게만 적용되고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위의 로마서 1 장 26절에서는 여자 동성애(“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를 부끄러운 일 로 규정하고 있다. 6. 사사시대의 동성애 구약에는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 이외에 동성애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내러티브, 사사기 19장 16-30절이 있다. 사사기 19장 16-30절의 플롯 전개는 창세기 19장 1-11절과 매우 흡사하다. 한 레위인이 그의 첩과 함께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가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지역을 지나가게 된다. 이 때 기브아의 한 노인이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인다. 이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말한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 여기서 동사, “관계하리라”는 창세기 19장 5절의 “상관하리라”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인 “야다”(알다)이다. 이 노인은 자기 집에 온 손님에게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청하며 이 남자 대신 자신의 딸과 손님의 첩을 내어주겠다고 말한다. 결국 손님인 에브라임 사람은 자신의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 주고 그 첩은 밤새도록 그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새벽에 돌아왔지만 결국 죽게 된다. 이에 에브라임 사람은 그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잘라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고 이스라엘 민족은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와 민족전쟁을 벌이게 된다. 7. 동성애-타락의 바로미터 구약의 동성애 관련 두 내러티브가 각각 소돔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동성애가 한 사회의 타락의 정도를 나타내는 바로미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구약에서 타락한 사회의 상징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여러 지역으로 보내면서 만약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지역에서 나가서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하였다(마 10:15).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지역은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한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가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은 가버나움에게,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3). 타락의 상징인 소돔을 언급하며 가버나움의 완악함을 비판한 말씀이다. 사사시대는 또 어떠한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사사시대는 가장 타락한 시대였다. 사사시대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은 사사기의 맨 마지막 절,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법이 된 시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가 사사시대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웃 민족에게 붙여 심판하고 나면 그제야 하나님을 부르짖고 이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평화의 시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고 타락하는 것을 반복했던 시대가 사사시대였다. 동성애로 인하여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사사기 19장의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께 큰 심판을 받았다. 소돔 땅에는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려서 그 지역의 성을 멸하셨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진멸되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가 600명의 남은 용사가 지파의 씨가 되어 극적으로 회생하게 된다(삿 21장). 구약의 두 개의 동성애 내러티브가 공간적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시간적 타락의 상징인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을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은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관점으로 본다면 동성애의 확산은 영적 어두움이 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 동성애-개혁의 대상 구약에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남색하는 자(동성애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개혁적인 왕들이 남색하는 자를 쫓아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남창” 혹은 “남색하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데쉬”로서 성전과 우상 신전에서 동성애를 유혹하던 개혁의 대상이었다. 퀴어신학자 Ken Stone은 “카데쉬” 혹은 복수형, “케데쉼”과 여성형 단수, “케데샤,” 여성형 복수, “케데쇼트”가 열왕기서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성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한다.9) 그러나 신명기 23장 17-18절에서는 “케데샤”(17절)를 “조나”(히, 창녀, 18절)로 지칭함으로서 “케데샤”가 성적관련성이 있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히, “케데샤”)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히, “조나”)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 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 임이니라(신 23:17-18)" 또한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도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창세기 38장 15절에서 유다는 얼굴을 가린 다말을 창녀(히, “조나”)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장 21절에서 유다는 그 창녀에게 맡긴 담보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히, “케데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조나”)로 여겨(창 38:15)"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케데샤”)가 어디 있느 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케데샤”)가 없느니라”(창 38:21) 이렇게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남성형 “카데쉬”는 개역개정에서 번역하듯이 “남창”, “남색하는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명기 23장 18절에서는 이 “카데쉬”를 경멸적으로 “개”(히, 켈레브)에 비유했고 이는 남창의 동성애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임을 잘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동성애를 행하는 남색하는 자가 없었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남색하는 자가 존재했다. 열왕기상 14장 24절에는 르호보암 시대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하는 남색하는 자(카데쉬)가 있었음을 기록한다.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아사와 여호사밧,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이러한 남색하는 자들(케데쉼)을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내는 개혁을 단행한 왕들로 기록되어 있다.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 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왕상 15:11-12) 그(여호사밧)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 아내었더라(왕상 22:46)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 장을 짜는 처소였더라(왕하 23:7, 요시야의 개혁)" 이렇게 가증스러운, 개혁의 대상이었던 남색하는 자(카데쉬)는 욥기에서 저주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욥기 36장 13-14절에서 엘리후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남색하는 자과 함께 있게 될 저주를 말한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케데쉼)과 함께 있도다” 9. 다윗과 요나단의 동성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구약성경에서 우정의 귀감으로 뽑힌다. 그런데 퀴어신학에서는 이 우정의 귀감을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한다.10)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사람 다윗이 동성애 자였다면 동성애가 성경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봐야 할 근거가 없다. 사무엘하 1장 26절과 같은 구절은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보는 퀴어신학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11)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 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이 말은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슬픔 가운데 한 말이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하바”로서 한국어의 “사랑”, 영어의 “love”와 같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12) 한국어와 영어에서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랑”과 “love"를 사용하듯이 히브리어에서도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아하바“를 사용한다.13) 그 예로 아래 두 구절을 들 수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아하브) 자기 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삼상 16:2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아하브) (왕상 5:1)" 사무엘상 16장 21절과 열왕기상 5장 1절 모두 동성이었던 다윗과 사울, 다윗과 히람의 관계를 사랑(아하브)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관계 모두 동성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신임과 다윗을 향한 히람의 정치적 신뢰를 나타낸 것이다.14) 이와 마찬가지로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언급한 요나단의 사랑은 요나단과 다윗의 깊은 우정을 말한 것이다.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나누는 관계였다면 성경브리어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야다”(알다)가 사용되었을 것이다.15) 그러나 구약에서는 다윗이 요나단이 서로 “알았다”(야다)고 표현한 구절이 없다. 10. 나오는 말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동성애에 관하여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이고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매우 무거운 죄로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로 기록되어 있다. 동성애와 관련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인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퀴어신학에서는 소돔 사람들과 같은 강제적인 성폭력이 아닌 동의하에 이뤄지는 동성애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를 해설하는 에스겔 16장 50절과 유다서 7절을 고려할 때 소돔의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동성애를 제외하고 논하기 어렵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부끄러운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퀴어신학에서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여자 동성애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여자 동성애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대표성을 갖기 때문에 동성애 금지명령을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을 읽는 것은 오독에 불과하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에서 가증하며 개혁의 대상으로 일컬어지는 카데쉬(남창)의 성적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카데쉬에 상응하는 여성형 명상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경 번역과 같이 카데쉬를 남창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퀴어신학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동성애일 것이라 주장하며 동성애의 성경적 토대를 마련하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기사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 관계임을 말해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사기 19장에는 창세기19장의 소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동성애 내러티브가 있다. 타락의 상징 도시 소돔과 타락한 시대의 상징인 사사시대에 비슷한 동성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한 사회의 타락과 동성애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구약에서 타락의 상징이며 죄 중에서도 가증한 죄로 기록된 동성애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 퀴어해석의 오류가 있다. ------------------------------------ 1) 이 글은 저자의 글, “구약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퀴어신학 비판』(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총회), 61-84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15). 3)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Leiden: Brill, 2001), 391. 4) Michael Carden, “Genesis,” The Queer Bible Commentary , Kindle ed., Location no. 1437. 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토에바”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I (Leiden: Brill, 2001), 1702-1704. 6) Ronald J. Williams, Williams’ Hebrew Syntax3 rd ed. (Tronto: University of Tronto Press, 2010, 143. 7)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21. 8)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43. 9) Ken Stone, “1 and 2 Kings,”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383. 10) Ken Stone, “1 and 2 Samuel,”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060, 6087, 6097. 11) Ibid., 6053. 12) P. J. J. S. Els, “’hb” i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I,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77-299. 13) Ibid., 293-294. 14) Ibid., 294-295. 1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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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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