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 박우란, 유노라이프, 256쪽

9791191104523.jpg

 

모처럼 땡기는 책을 만났다. 심리, 상담에 관심이 많은데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책이다. 상당한 수준의 책이기에 정독이 필요하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목사의 설교가 이만한 질적 수준이 되는가 반성해본다. 모든 내용이 좋은데 맛보기만 실어본다.

 

"한 말씀만 하소서"(p 70-73)

근원적인 결여감에 몸부림치는 여성인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남근화시키거나 팔루스를 가정한 절대적 대상으로 결여를 메우는 선택입니다. 스스로를 남근화 시킨다는 뜻은 능력이나 지위, 역량 등을 개발하고 그것을 가지려는 의지입니다. 부성적 동일시와 동시에 아버지와 경쟁하는 딸이 되는 것이지요. 절대적 대상을 통해 팔루스를 가지려고 할 때 그 대상은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고 기름을 부어 줄 대상을 끝없이 갈구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은 끊임없이 정체성의 문제로 혼란과 고통을 겪습니다. 항상 의존할 팔루스(남근)나 신탁의 언어를 쫓지요. 스스로가 가진 자가 아니라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체성을 보증받고자 하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확인해 줄 절대적 대상에게 무한한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저는 여성의 희생과 헌신에는 항상 함정과 속임수가 내재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온전한 희생, 온전한 퍼부음은 스스로의 결여를 타자를 메우는 방식으로 보상하는 행위의 이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성이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온전히 헌신할 때 그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비단 사랑의 차원이 아닙니다. 남편이라는 절대적 팔루스, 남근을 소유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상상적 환상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신을 있는 힘껏 소비하고 소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수의 남성들, 즉 강박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쏟아부어지는 채워짐과 자기중심적 만족을 이루면서 가족이라는 합이 맞아지지요. 이런 합의 상태에 균열이 생기고 다시 구멍이 출현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할 때, 여성은 쇼핑 중독이나 명품 중독 등가질 수 없는 팔루스를 상징적 물건으로 대체해 끝없이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채우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히스테리적 주체인 여자는 집요한 요구와 증상의 길을 완고하게 갑니다. 그것은 분석 임상에서 어렵잖게 만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여자의 요구(소녀들의 집요한 요구)를 포기할 수 있도록 안내하려는 기운만 느껴져도 더욱 집요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의식적 여자의 요구가 얼마나 타당하고 합당한지를 의식적으로 설득하는 데 에너지를 할애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결코옳지 못한 방법이지만 많은 분석가들은 여자의 요구 앞에서 어떤 해답이나 행로, 경로를 제시하도록 또한 요구받습니다. 히스테리 담화에서 그녀들은 끝없이 자신의 결여를 언어의 세례로 메우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전형적인 언어적 요구가 그것이지요. 해답을 요구하는 말에 분석가나 치료자들은 반드시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쉼 없이 전문적 솔루션과 해결책들을 제시하지요. 그래야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히스테리증자의 게임에 충실히 반응하는 단계에 그치는 일입니다. 더 이상의 언어적 세례, 언어적 지식이 전문가로부터 얻을 수 없다는 알아차림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일어나면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제시하며 그를 떠날 테니까요. 언어를 요구하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언어의 결핍에 시달리는 그녀들은 끝없이 멘토와 스승, 종교 지도자들을 찾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 어떤 이상적인 제안에도 우리를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그것을 반박하거나 빠져나갈 출구를 찾아내기 때문이지요. 히스테리적 여성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불만족에 대한 해답을 타자에게 요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가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탐닉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언어는 아이의 세계가 된다 (p 78 – 81)

아버지인 남성이 전달하는 언어 중에 자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언어는 자녀에게 사회적으로 위축되지 않는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에는 단순히 말이 아닌 그 사람의 정신과 태도, 욕망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이룬 대단한 성취에도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소위 낮은 자존감을 보입니다. 이미 사회적 성취를 이룬 여성이지만 부끄러운 아버지를 두었다는 생각에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보이는 타자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뜻은 능력이나 재력,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과는 무관합니다.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아버지라도 경박한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청소 노동자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당당한 태도와 언어로 전달한다면 그의 자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부심으로삼으니까요. 이토록 아버지의 언어가 중요한데 만약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멸과 경멸을 겪는 장면을 목격한다든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끊임없이 폄하하고 훼손하는 언어로 대한다면, 자녀는 아버지를 잃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정체성을 잃고, 라깡적 언어로 풀자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을 방해하고, 스스로 설 자리를 못찾게 합니다. 자녀는 큰 결여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계속 반복하는 말입니다만, 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음성과 언어 속에서 이런 아버지의 기능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성적 언어를 준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우리는 평생을 위축되고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에게서 얻지 못한 언어적 정체성은 우리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의 기능이 담긴 언어를 스스로 발화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40대를 넘긴 중년 남성임에도 아버지의 사회적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자존감 높은 아버지 밑에서 남자아이가 자존감 높게 자랐을지라도, 그 아버지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안하지 못하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아빠를 내세우는 소년에 불과합니다. 자식의 언어는 부모의 언어를 토대로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마저도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고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내 속에 빼곡한 비난과 판단의 언어들, 가치를 매기는 세속의 언어들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언어를 스스로 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쪼그라진 아버지를 두어서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렸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아버지의 기능을 스스로 복원하며 단단한 사회인으로 자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누구로부터가 아닌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려면 몸에 힘을 빼야한다” (p 244 – 245)

우리는 어리석은 질문을 혼잣말처럼 반복적으로 되뇌일 때가 있습니다. '왜 혼자가 되면 안 되고, 왜 나는 고통받아서는 안 되고, 왜 나는 불행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 물론 프로이트의 기본 명제인 현실 원칙에 따라, 사실 우리는 불쾌한 상황을 피하고 안정된 상황으로 가려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본성을 지녔다고 해서 내가 가진 기준이 완고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테지요. 절대로 나에게 고통이나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퇴행적 고집은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 닥쳐오지도 않은 외로움에 과도한 불안을 일으키며 갖가지 증상을 만들어 낼 테니까요. 물론 이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충동이 붙들고 있는 어떤 욕망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불행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일어나는 고통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들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가난은 얼마든지 나에게도 닥칠수 있는 일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고통으로부터, 불행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 줄 듯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해지는 일을 꼭 배워야 할까요? 정말 불행은 찾아오면 안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안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죽을 듯한 소외와 고립,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막상 다다르면, 많은 것이 물러나고 죽을 듯한 공포감마저 고요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어떤 불행이든 닥쳐올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가 오히려 세상에 서 있는 나를 담담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저 힘을 빼기만 해도 새로운 가능성이 많이 열리기도 합니다. 파도로부터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도 물보라에 압도되지만, 몸에 힘을 빼는 순간 하늘을보며 파도를 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KakaoTalk_20230303_231433545.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독서일지〗 「여자의 심리코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