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홍민기, 규장, 223쪽

9791165044022.jpg

 

많이 알려진 홍민기 목사가 쓴 산상수훈 설교집이다. 마 5-7장을 큰 단락으로 나눠 설교했다. 평이하면서도 건질 것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남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물론 실수로 표절할까봐 아예 안듣는 음악인도 있지만. 살교자로서 남의 설교를 읽고 보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겸손하면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삶으로 지키라(p 83-97)

맹세하지 마라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레 19:12 참조)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보통 우리는 불리할 때 맹세를 한다. 또 우리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들을 강조할 때 맹세를 많이 한다. 그래서 맹세할 때 이어지는 대화는 거짓이거나 과장일 경우가 많다.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데…”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일단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진실되면 맹세를 하지 않는다.바리새인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였다. 그들은 말만 많이 하고,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멀었다. 종교적인 삶에는 말과 정죄가 무성하다. 그들은 많은 율법들을 따랐지만, 또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규칙들로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놓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다. 말로 하나님을 따르다 보니 정죄가 무성하다. 삶으로 살면 정죄할 수 없다. 그 거룩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정죄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본 자의 입술에서 뱉어지는 언어가 아니다. 해보면 안다. 살아보면 안다. 내가 제일 안 된다는 것을...진실되게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본질을 붙잡지 않는 것, 겉모습만 반지르르한 종교적인 삶을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삶을 전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맹세가 필요없다. 우리는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거해봐야 한다.

 

목표를 바로 세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사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윤리와 도덕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이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다. 거룩은 전투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거룩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과 충돌하고, 때로는 세상에 저항해야 하지만,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도덕과 윤리가 우리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구별된 자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게 아니다. 좀 더 윤리적으로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살아 있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 생각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부분을 드리면서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제가 이 부분을 드립니다'라면서 삶의 한 부분을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통째로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산 제사가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협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입으로 맹세하지 말고,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네가 행하고자 하는것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맹세는 신과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하는 약속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없는, 약한 인생들이다. 그럼에도 "내가 맹세한다"라고 입에 담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일 때가 많다. 맹세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신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 삶으로 증명하는 것, 삶이 산 제사가 되는 것.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서 상대방을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신앙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한 사투

우리는 우리의 삶에 조금 더 엄격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를 긍휼과 은혜로 바라보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는 엄격과 거룩의 두 기둥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 긍휼과 은혜만 붙잡는다. 맨날 나의 연약함을 긍휼과 은혜로 손쉽게 덮으려고한다. '하나님, 제가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어요. 절 긍휼히 여겨주실 거지요?' 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기대어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너무 엄격하지 않게 잡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엄격하지 않고 유연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거룩한 삶을 위해 날마다 사투하며 거룩한 몸부림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만 한다고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예배만 드린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거룩한 사투가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사실 쉽진 않다. 너무 너무 어렵다. 언젠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한 장로님을 만났는데, 이분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막 토로하셨다. 그래서 내가 "근데 왜 계속 다니세요?"라고 물어 봤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너무 놀라운 얘기를 하셨다. “내 나이에 다른 데 가면 장로님이라고 인사나 받겠습니까? 여기 있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와서 '장로님, 장로님'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문제 있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도 놀라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다니면 되지 문제 제기는 왜 하는가 싶었다. 본질을 분별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다 보니까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우리의 영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 다. 세상과 충돌할지라도 구별되는 것, 세상의 정을 맞을지라도 구별되는 것. 구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구별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의 중심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원하는지를 진솔하게 돌아보라. 이 본질을 놓치는 순간, 우리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아닌 것은 아니다. 맞는 것은 진리다. 야고보서 5장 12절 말씀처럼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말씀 위에 있을 때 말이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드리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21.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우리 삶에도 꼭 적용해야 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당신의 인생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신가? 당신의 인생이 입으로 맹세하며 '내가 이렇게 믿는다, 저렇게 믿는다' 말만 앞서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선택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갈급함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존귀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선포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신앙의 모습이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8.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데나 얹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내 주장에 끼워 넣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산 제사가 되어 일어나는,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 수 없다. 우리는 종교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신앙 공동체다. 소그룹으로 만날 때, "그냥 나는 연약해서 이렇게 됐어", "그래, 너도 연약해서 이렇게 됐지", "우리 다 약해서 괜찮아.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실 거야"라고 위안하며 넘어가지 말자. 엄격하게 자신을 보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정말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자고 외치고, 뉘우치고, 돌이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연약함을 핑계로 나의 죄를 덮지 말고, 은혜와 사랑이란 단어로 나의 죄를 덮지 말자.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덮는 것은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리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덮어주실 거예요'라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다. 산상수훈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설교이기 때문에, 그 강도가 세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에 셀 수밖에 없다. 우리 이 말씀을 꼭 명심하여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살자. 말로 하는 종교인에서 벗어나 본질을 붙잡자.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영이 죽는다. 그러니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라. 항상 깨어 있게 해달라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계속해서 이뤄지게 해달라고.

 

은혜와 긍휼은 예수님의 몫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16.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쓴 편지인데, 여기서 그가 뭐라고 고백하는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더 성숙해지고 성장했다. 그래서 자신을 '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이 '예수께서 먼저 보여주신 일체의 오래 참음의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긍휼과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에게 '오래 참아달라, 봐달라, 예수님 오래 참으셔야 합니다'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구별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가 아들 둘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어릴 때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두 번까지는 봐주지만 같은 내용으로 세 번 경고를 받으면 혼나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일로 아이들이 두 번째 경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날 내가 아주 크게 혼을 냈었다. 그러자 아이들 둘이 다 내게 항의를 했다. "아빠, 이번은 두 번째입니다. 이번은 경고여야지, 왜 혼내나요? 혼내면 안 되는 거예요." 잘못을 해서 혼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두 번이나 잘못을 봐주고 경고로 넘어간 건 아빠인 내게 속한 문제이고, 아빠가 베푸는 용서요 은혜다. 그런데 자신들이 잘못했으면서 '아빠 이건 부당해요'라고 하는 건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게 우리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일이다.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세요? 이것은 참아주셔야죠. 용서해주셔야죠. 넘어가주셔야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가 날마다 하고 있다. 우리는 잘못했으면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우리가 먼저 말해버린다. '하나님, 저 이거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실 거죠?' 이러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위해 애써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약속과 행위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산 제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의 모습이 일상의 삶에서 매일 매일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담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나의 생각도 다 아신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하라. 나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온전치 않다. 선한 척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라. 거룩함에 목표를 두고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거룩함을 위해 몸부림 치고,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본질에 붙잡힘 당하여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서 받은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는 나를 '네가 목사로 서 참 수고했다'라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직분보다 내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내가 진심으로 했는지, 하는 척 했는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분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네가 진짜였냐?' 이것으로 판가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평가는 '넌 착하고 충성되었어. 넌 진심이었어. 이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자 아니면 '넌 많은 사람들을 속였어. 하지만 난 안 속아'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이 땅의 도덕이나 윤리라면 하나님의 기준에 맞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유연하게 바라보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엄격한 거룩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선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거룩한 척하지 말고 거룩한 산 제사가 되라.

예배드리는 척하지 말고 임재 예배가 되라. 우리의 삶이 진짜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를 바란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서로 속고 속이다 죽고 나면 끝이다. 그때는 기회가 없으니, 지금 기준을 바로 세우고 목표를 바로 세워서 아무리 포장하고 화장해도 썩은 냄새가 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산 제사로 살자. 그렇게 살다가 죽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자. 우리는 한 치 앞을 못 보지만,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말로 맹세하여 사람을 속이지 말고, 결코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거룩함으로, 엄격함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붙잡아주실 것이다.

 

 

KakaoTalk_20230303_231433545.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독서일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