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2(월)
 
  • 권순웅 총회장,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자”
  • 정명호 노회장, "지난 노회 역사는 선배에 대한 감사와 후배로서의 부담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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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단체 사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 112년·200회 기념예배 및 역사세미나가 4월 11일 오후 2시 30분 혜성교회(정명호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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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인도하는 정명호 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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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김영구 부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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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하는 이은호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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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가 찬양 

기념예배는 노회장 정명호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김영구 장로의 기도 후 서기 이은호 목사가 행 13:32-39를 봉독한 후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가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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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는 권순웅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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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하는 유병수 증경노회장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당시 하나님의 뜻’이란 제목으로 “그 당시 조상 시대 하나님의 뜻은 오실 메시야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단, 뱀의 머리를 치실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았다. 그런데 바울 당시 사람들은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뜻을 주장했다. 반면 다윗은 당시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겼다. ‘창발의 시대’란 책에서처럼 역사가 때로 대변혁을 하는데 과거 100여년 전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총회와 경기노회가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주셔서 교회를 허락하셨다. 주기철 목사도 당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고 순교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설교했다. 이어 증경노회장 유병수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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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순서 사회하는 임은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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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하는 장차남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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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축사하는 오정호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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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하는 최효식 서울지역노회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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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하는 최재형 종로구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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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중창단 

축하는 행사분과장 임은진 목사의 사회로 기념영상을 시청 후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가 “ 경기노회는 총회의 주축이며 수도권에 위치하고 있기에 중요성이 있다. 이제 경기노회가 112년이 됐다. 과거 일제시대 경기노회가 독립운동에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이후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 교단은 건강한 신학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노회는 현재 총회 160여개 노회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노회이다. 앞으로도 회기를 넘기면서도 많은 일 감당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가 “저는 과거 목사 후보생시절 경기노회에 속해 있었다. 과거에도 경기노회는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다. 앞으로 더 큰 일을 감당하시기 바란다 ”고 영상 축사 후, 서울지역노회협의회장 최효식 목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영광이다. 200회 동안 노회를 지키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노회 200회를 기념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큰 발전을 기원한다”고 축사한 후, 종로구 국회의원 최재형 장로가 “경기노회 200회기를 축하드리고 200회기에 노회장이 되신 정명호 목사님도 축하드린다. 혜성교회가 경신학교를 위해 건물을 지은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근래 자유라는 미명하게 신앙에 반하는 것들이 많이 주장되고 있으며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다. 이런 때 교회들이 바르게 서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과거 어려운 때 빛을 발했다. 경기노회가 민족 부흥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경기노회여전도회연합회 가브리엘중창단이 축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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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구호금 전달 

노회장 정명호 목사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에 특별구호금 2,000만원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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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사회하는 김요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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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이용재 역사분과장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와 함께하는 경기노회 역사세미나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김요섭 박사의 사회로 역사분과장 이용재 목사의 기도 후 한국교회와 경기노회란 주제로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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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하는 이영식 박사 

제1발제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이영식 박사가 ‘사회와 민족을 섬긴 노회: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과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교안의 '맺는말' 전문이다.

지금까지 언더우드학당 및 경신학교 설립과 발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고, 3.1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경기노회 소속 교인들 및 경신학교 출신자들의 역할을 보았다. 이제 본 연구에서 논의해온 내용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언더우드, 헤론, 게일, 마펫을 비롯하여,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헌신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 이 땅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교 스테이션을 개설했으며, 인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교육, 의료,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등의 다양하고 중요한 사역을 감당해냈다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경기노회와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둘째, 언더우드학당 및 경신학교는 경기노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미션스쿨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학교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언더우드, 헤론, 게일, 마펫, 에비슨, 민로아, 밀의두 등의 설립자 및 역대교장들 그리고 핵심교사들이 경기노회의 초기 노회장 혹은 회원이었다. 그들 자신이 경기노회를 설립하고 기초를 놓았으며 발전에 기여했던 노회 역사 자체이기도 했다. 셋째, 언더우드학당의 설립과 발전을 통하여, 초기 한국교회 선교부가 관심을 갖고 근대적 교육을 실천해왔던 교육선교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선교는 복음의 접촉점을 삼고, 기독교 인재양성을 하여, 이후 한국기독교뿐만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경과 신앙의 토대위에 선진화된 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쳤고,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고 조국의 근대화에 공헌을 했다. 또한 자유 및 남녀평등과 같은 시민사회의 선진적인 사고를 소개하여 나라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한 결실을 맺고 있었던 교육사역을 선교본부의 주도로 폐쇄했다는 것은 그 역할과 위상을 고려하지 못한 속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넷째, 언더우드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근대적 고아원이며 학당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거처할 곳 없이 배회하는 고아들과 사생아들을 모아 양육했던 고아원이며 학당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복지적인 측면에서도 선구적인 기관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일각에서 국내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고아원시설이라고 주장하는 '경성고아원'(1905년)보다 10년이 앞선다. 또한 1876년 천주교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교육보다는 일반적인 형태의 고아원도 1885년에 집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 언더우드학당이 배재학당보다 앞서 개원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 경신학교에서 '경신수공부'의 개설은 당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실업교육을 도입을 통해서 학생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서의 진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 발전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 준비를 위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시도와 헌신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서 사회의 계몽과 변혁에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한말 조국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언더우드학당으로 시작하여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경신학교를 거쳐 오면서, 그 출신자들과 경기노회 교인들의 3.1독립운동에 대한 역할을 살펴볼 수 있었다. 김규식, 안창호, 서병호, 이갑성, 김상덕, 함태영, 김원벽, 정재용, 최재화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2.8독립선언 및 3.1독립운동을 비롯하여 이후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 상황에서 민족복음화와 함께 교회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초기에 신앙의 선진들이 하나님 말씀을 생명같이 여기며 복음전파의 열정이라는 이 본질에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그다지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오늘날의 본 연구자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본질에 충실하면서 사회와 민족을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시대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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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하는 김효남 박사 

논평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김효남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평 후반부 전문이다. 

본 논문의 장점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째, 한국의 근대 교육에 있어서 경기노회의 경신학교의 탄생과정을 매우 소상하게 알려준다. 언더우드학당에서 수차례 명칭이 변경되어 경신학교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이 겪어야 했던 고민과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르고, 운영의 주체가 변경되면서 학교의 역할과 지향점이 변화를 겪는 동시에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서 경신학교가 시대적 필요를 잘 반영하여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신학교의 설립과 발전과정을 통해서 배출된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경신학교가 한국 근대사에서 감당했던 놀라운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과 김규식 선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경신학교가 한국 근대화 시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셋째,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에 이어서 경신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에 가르쳐졌던 교과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어 실제적인 교육내용을 알 수 있다. 넷째, 민족사에 위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기미년 독립운동에 경신학교와 경충노회 출신들이 기여한 내용은 경신학교가 당시에 한국 사회에 미쳤던 실제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저자는 3.1 운동의 준비에서부터 만세운동이 시행되고, 그 이후 제2차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경신학교와 경충노회 출신들이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학당의 태동과 발전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한국 근대교육에서 경신학교와 경기노회가 가지는 위상과 공헌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3.1만세 운동을 경신학교와 경기노회 출신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한국 근대화 시기에 사회적인 기여와 공헌을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영식 박사의 본 논문은 경기노회가 담당했던 경신학교의 태동과 성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경신학교가 한국근대교육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물론이요, 경신학교를 통해서 배출된 인물들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의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특히 3.1운동을 통해서 잘 소개하고 있는 논문이다. 비록 경기노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역사이기에 경기노회가 학교의 정체성 형성과 학교의 영향력에 어떤 구체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신학교와 경신학교를 담당했던 초기 경기노회(경충노회)가 이 민족과 사회에서 감당했던 귀한 역할과 사역은 훗날 200회기를 맞이하는 오늘날의 경기노회에 속한 모든 회원과 교회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 경기노회가 21세기 한국사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중요한 지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본 논문이 이 일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이미 감당하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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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하는 이은선 박사 

제2발제는 안양대학교 이은선 박사가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나가는 말' 전문이다.

경기노회는 113주년을 맞이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노회이면서, 한국장로교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노회이다. 경기노회는 경충노회로 출발하여 1924년에 경기노회와 충청노회로 분립하였고, 그 이후에 노회의 규모가 커질 때마다 지속적으로 분립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노회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장로교회 총회를 섬겼던 훌륭한 총회장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1회 총회장인 언더우드는 총회가 7개 노회의 화합 속에서 잘 출발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12대 총회장인 되었던 함태영 목사는 법관 출신으로 활동하다가 목회자가 된 지 1년 후에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봉사하였다. 1929년에 총회장이 되었던 차재명 목사는 1928년에 장로교역사를 정리한 『장로교 사기』를 출간하여 교회사 정리에 이정표를 남겼다. 1935년에 정인과 총회장은 첫 번째 총대로 총회에 참석했다가 부총회장을 물리치고 총회장이 되었던 총회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다. 정인과의 총회장 선출은 당시에 서부 지역의 강한 교세의 후원도 있었지만, 당시 새로 설립되어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총회 종교교육부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인 1950년에 총회장인 된 권연호 목사는 당시 창신교회 담임목사였다. 권연호 목사는 형목제도와 군목제도 등 다양한 제도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WCC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1955년에 한경직, 1956년에 이대영, 1957년에 전필순 목사가 연속으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한경직은 영락교회 담임목사였고, 이대영은 승동교회 담임목사였으며, 전필순은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다. 그러므로 이 3년간은 서울시내의 가장 대표적인 목사들이 연속으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1962년에 고신과의 통합을 이끌었던 이환수목사와 분열 후에 교단발전에 기여한 박찬목 목사, 1970년에는 후에 충현교회를 강남의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이끌었던 김창인 목사가 총회장을 하였고, 1985년에 청량리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던 박명수 목사가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이후에 경기노회에서 아직까지 총회장이 나오지 않고 있다. 경기노회가 다시 한 번 총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배출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노회역사를 정리하며 재도약을 할 때, 경기노회가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고 총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학교 발전 과정에 기여한 노회 인물은 1969년 총신대학교가 문교부 인가를 받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김인득 장로와 성도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가 1972년에 학장이 된 김희보 목사가 있다. 김희보 목사는 성도교회 담임목사로 있다가, 박형룡박사가 물러난 후에 새로 교권을 잡은 이영수 목사에 의해 발탁되었다. 그는 구약학자로서 목회에 도움될 실용적인 소선지서의 주석책들을 내면서 총신의 교수진의 확대와 학과들의 확장과 발전을 이끌었다. 김인득 장로는 학교의 인가, 사당동 기숙사 건립, 양지도서관 건립 등에서 재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앞으로 경기노회에서 학교의 발전을 위해 학문적으로, 재정적으로 기여할 인재들이 나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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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하는 정원래 박사 

논평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정원래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문에 대한 평가 및 기여' 전문이다. 이은선 교수가 고찰한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로 대한예수교합동 교단의 역사에 제200회기의 의미는 매우 크다. 총회의 역사 113년 그리고 격동의 한반도 상황에서 몇 차례의 노회를 개최하지 못하였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노회의 역사는 제200회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노회가 한국개신교 역사와 한국현대사의 증인이자 주역이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기노회 제200회기는 한국개신교의 역사와 한국현대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자는 잘 드러내고 있다. 둘째로 논문의 내용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구자가 제시한 경기노회의 간략한 분립 확장의 역사는 한반도의 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성장 및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매우 의의가 크다. 특히나 노회의 분립/발전을 경기노회와 총회의 지도자였던 분들의 역점 사역을 함께 고찰하면 한국교회의 복음 사역과 활동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였는지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예를 들면, 농어촌 선교, 주일학교 교육, 형목제도, 군목제도 등. 셋째로 이은선 교수의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은 120여년의 한국개신교의 역사에서 각 지역의 노회들의 역사를 들려준다. 1912년에 처음 시작한 7개의 노회에서 제200회기 기념 세미나를 개최한 노회는 경기노회가 처음이며, 또한 노회의 역사를 학술토론의 형식으로 고찰한 경우도 (논평자가 아는 한) 처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장차 교단의 노회들이 각각 자신들의 역사를 수집, 편찬하는 것을 넘어서 학술적 토론의 장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는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이은선 교수의 연구는 경기노회 출신으로 합동교단의 총회장으로 봉사한 분들의 삶과 사역이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연결되어 있음도 드러내고 있다. 즉 총회를 섬기는 동안 혹은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현대사의 아픔 앞에 노출되어 있었고, 영향을 받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논평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 경기노회가 가진 장소적 특성은 훨씬 더 외부의 파고가 거칠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다섯째는 연구자는 경기노회 출신으로 총회의 발전과 섬김에 헌신했던 분들을 언급하며 “1대 총회장이 언더우드 선교사였고, 1923년에 12대 총회장으로 함태영 목사가 선출되었다. 해방 전 경기노회 시절에는 18회(1929) 차재명 목사와 24회(1935) 정인과 목사가 총회장을 지냈다. 해방 후 경기노회가 총회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시기는 1950년대였다. 권연호목사가 36회(1951) 총회장이었고, 40회(1955) 한경직, 41회(1956) 이대영, 42회 (1957) 전필순으로 4분을 배출하였다. 총회장을 배출한 측면에서 보면 경기노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것으로 볼수 있다.” 21세기에 이르러 경기노회의 총회적 활동이 조금 연약해진 것은 아쉬움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여섯째는 경기노회는 총회와 교단의 신학교육과 정통신학을 견지하는데 누구보다도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열정과 헌신은 지금도 총신대학과 신학대학원을 통해 지속해 교단의 신학과 신앙을 책임질 후진의 양성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총신대학교는 경기노회에 많이 빚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일곱째는 연구자의 당부를 인용한다: “경기노회가 선진들의 좋은 신앙의 유산을 잘 계승하고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들에 능동적으로 부응하여 노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면 서 총회와 총신대학교 발전에 기여하는 노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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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하는 김호욱 박사 

제3발제는 광신대학교 김호욱 박사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한 경기노회의 역할 고찰’이란 제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결론' 부분 전문이다.

예장의 제2차 분열(기장측 분열)과 제3차 분열(합동과 통합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살펴보니, 과연 경기노회는 그 당시 "장로교의 뿌리와도 같은" 노회였으며, “한국교회의 커다란 물줄기" 같은 매우 중요한 노회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면 예장총회에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 경기노회가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 장로회의 신학적 정체성 수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평가해 보자. 첫째, 예장의 제2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개혁주의 수호 노력에 관한 평가이다. 경기노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한 김재준 교수 조치 문제로 발생한 제2차 장로회 분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기장총회가 분열한 예장의 제2차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는 개혁주의 신학 노선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 주장한 김재준 교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노회는 예장총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 수호보다는 노회 소속 회원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둘째, 예장의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개혁주의 수호 노력에 관한 평가이다. 예장총회가 WCC의 신학적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회원으로 가입한 것에 대해 경기노회 소속 대부분의 목회자는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기노회는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를 위해 회원 다수가 매우 노력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장총회가 제2차와 제3차로 분열할 때의 경기노회는 예장총회의 중심 노회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경기노회의 신학적 행보는 총회의 신학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경기노회는 그 당시와 규모나 노회 관할 범위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노회의 중요한 역사성을 감안하여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경기노회의 역사를 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경기노회는 역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합동총회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해 지속으로 노력할 사명감을 깊이 인식해 주기 바란다. 또 하나는 불만이 있다고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투표장을 집단으로 탈퇴하는 일은 참으로 무모한 일임을 기억해서 다시는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장로회 제2차와 제3차 분열 과정에서 경기노회의 역할은 추가로 더 살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장로회 제2차 분열 과정에서의 역할이다. 경기노회가 김재준 교수를 심사한 후 문제가 없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재준 교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임을 알고 있었지만 노회 소속 목사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인가? 아니면 총회가 경기노회 소속 목사를 노회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면직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차원이었는가? 그것이 아니면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을까? 둘째, 장로회 제3차 분열 과정에서의 역할이다. 본 논문은 예장총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한 근원 원인은 WCC 가입 여부에 있었고, 경기노회의 총대 파송 사건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더 연구할 부분은 경기노회의 총대 파송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있다. 제72회 경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 명단에 황금천 목사가 81표를 득표하고도 누락되었다고 했는데, 제72회 임시노회에서 황금천 목사는 겨우 6표를 득표하여 총대(정)이 아니라 총대(부)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즉 황금천 목사가 제72회 경기노회에서 80표를 득표한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 간다. 임원들이 재개표한 결과에 대한 증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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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하는 이성호 박사 

논평은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박사가 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먼저 귀한 논문을 쓰신 김호욱 교수의 논문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제한된 시간 내에 몇 가지 논평을 하도록 하겠다. 우선 경기노회에 대한 자리매김이 필요할 것 같다. 저자는 경기노회를 “장로교회의 뿌리와도 같다”라는 문구를 그대로 서론과 결론에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의미는) 좀 수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교회는 당연히 장로교 전체가 아니라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를 의미하며, 이 표현을 사용한 강석근 교수의 의도를 따르면 수도권 지역(심지어 강원도와 충청도 포함)에 속하는 모든 노회의 뿌리라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의 커다란 물줄기”라는 표현 역시 경기노회에 속한 익명의 목사가 한 말을 재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소 과대평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경기노회는 오늘날 수도권 지역에 있는 모든 장로교 노회들의 뿌리이고, 해방 직후에는 가장 중심되는 노회였고, 지금은 그 물줄기가 오늘까지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논문은 첫 부분에서 경기노회의 역사를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 경기 노회의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역사만 간단하게 다루고 그것이 논문의 주제에 미치는 영향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노회가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가 이 논문의 주제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 저자는 해방 이후 두 개의 장로교 분열(기장 측의 분열과 통합 측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두 분열 사이에 경기노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립이 있었다. 바로 경기노회와 한남노회의 분립이다. 강원노회의 분립도 있었지만 규모를 고려했을 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따라서 1959년의 통합과 합동의 분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전에 있었던 노회분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장의 분리에 있어서 중심 이슈는 자유주의 신학이고, 통합의 분리에 있어서 중심이슈는 WCC이다. 물론 이에 더하여 지역주의, 파벌주의, 3000만환 사건도 3차 분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후자는 치리에 관한 문제이고, 전자는 신학에 관한 문제이다. 이 두 분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슈는 성경론(기장)과 교회론(통합)이었다. 김 교수는 이 두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좀 더 적합한 용어나 표현이 필요하다. 개혁주의신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오늘날 대부분 주류 개혁교회는 성경의 절대적 무오성을 부인하고 WCC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당시 경기노회가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수호하였는지 의문이다. 만약 있다면 논문을 통해서 충분히 논증을 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44회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임시노회 총대 명단이 선정되었고, 그 결과 개혁신학을 수호하려는 경기노회의 노력이 무산되었다고 간단히 마무리하는데 이 역시 약간의 수정이필요하다.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결국 정회와 분열로 이어졌다. 경기노회의 노력은 장로교회 총회 전체에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승동 총회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이어졌고 고려파와 합동으로 더욱 확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 결론부에서 논문이 제시하듯이 비록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교회 정치의 중요성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첨예하게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돌의 불씨를 던진 것은 총대 투표였다. 투표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최종적 행위인데 경기노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것을 가볍게 처리하였고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하였고)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 문제 못지않게 교회질서가 얼마나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중요한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점에서 경기노회는 한국 장로교회에서 총대 투표를 가장 모범적으로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시행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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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회기도하는 최영수 역사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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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인사하는 정명호 노회장 

이어 역사분과위원 최영수 장로의 기도 후 정명호 노회장이 순서를 맡아준 교수들에게 감사하고 경기노회 역사 세미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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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노회, 112년 · 200회 기념예배 및 역사세미나 성대히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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