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 힐링 사이코 드라마, 선원필

9791165190156.jpg

 

우리에게는 자신이 자각 못하는 자신의 일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인데, 알지는 못하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자신의 무의식 세계가 자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나도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이 무의식 속에 지금도 살아 있음을 상담공부를 통해 알게 됐다. 무엇인가 나를 이상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무의식 세계를 살펴 봐야한다. 상담을 하든, 책을 읽든 자신에 대해 알아가야한다. 쉽지는 않지만 분명 유익이 있다. 사이코드라마도 그 한 방법이다.

 

KakaoTalk_20250203_071242433.jpg

 

머리말

"원하지만 두려운 세계, 두렵지만 가야 할 세계. 그것은 자기만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사이코드라마는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떠나는 여정이다. 인간에게는 역사보다 오래된 신화가 있다. 내 안에는 나보다 오래된 인류의 신화가 존재한다. 그 신비한 숲속으로 걸어가면서 되돌아올 길을 위해 실 타래만 놓치지 않고 걸어간다면 숲속 어디에 있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위험하지만 그 무엇보다 안전하고 짜릿한 자아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참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마땅한 곳이 없는 현대인! 그래서 더욱 더 은밀한 방법으로 출구를 찾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현실에 몰두한다. 이렇듯 관계의 단절에서 우리 모두는 누구나 크고 작은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누가 누구를 측은히 여길 처지가 아니라는 이야 기다. 게다가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개인에게 부여되는 역할은 더 많아지고 우리는 더 많은 상황에 알맞은 가면을 바꿔 써야 한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역할을 해내어야 하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이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난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참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더 이상 운명이라는 이름에 지배당하지 않아!

 

사이코드라마! 일반인들이 들으면 무엇을 떠올릴까 생각해 본다. 생소하다? 어렵다? 무섭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난해한 연극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이코드라마란 참으로 우리 주변에서 많이 목격된다. 날마다 쏟아지는 비극적인 뉴스 또는 그와 반대로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뉴스들,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존재하는 사이코드라마다. 사이코드라마란 내게는 잉여현실이지만 타인에게는 실제현실이 되어 나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잉여현실이란 실제 현실세계에서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현실을 말한다. 실행되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잉여 현실이 아니다. 사이코드라마는 무대에서 그 잉여현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하고 싶지만 못하는 것도 있고, 싫지만 해야 하는 것도 있다. 잉여 현실은 다양한 형태로 욕구불만의 입을 벌리고 있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본능의 깊은 곳에 숨겨져 나조차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에 유배 되어 버린 것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잉여현실을 무대에서 표현하다 보면 무의식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내 경우를 보자면 이렇다. 나는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과 추락에 대한 공포가 컸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의존적인 사람을 한때는 경멸했다. 그것은 나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으로부터 기인했음을 뒷날 알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기 전이었으니 5~6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벼를 가득 싣고 추곡수매를 하러 마을 읍내로 가는 경운기 짐칸에 어머니와 함께 타고 있었다. 경운기는 마을을 벗어나 시골 개천 길을 아슬아슬하게 가고 있었고 둑 아래로는 수 미터의 경사로를 지나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덜커덩 덜커덩 잘도 가는가 싶더니 경운기가 기울었다. 운전을 하던 일꾼이 뛰어내리고 연이어 어머니가 내 머리 위에서 공중제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도 뛰어내린 것이다. 혼자 남겨진 나는 수 미터 둑 아래로 경운기와 함께 곤두박질쳐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날의 기억은 내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감당하기 큰 충격이었기에 그 사건은 기억할 수 없는 무의식의 공간으로 보내졌고, 잊혀졌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데는 거의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건 이후로 나도 모르게 버려짐에 대한 유기불안과 고소공포가 무의식 속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자라면서 그것은 독립심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나를 길들이고 타인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추락에 대한 두려움은 일상생활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났었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살았다. 아파트라는 신문물이 처음 들어섰을 때 꼬마들에게 엘리베이터라는 기계가 얼마나 신기했겠는가? 그러나 그 신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탈 수가 없었다. 추락하여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난하거나 겁쟁이라 흉을 보지 않았지만 12층까지 뛰어서 올라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함은 분명했다. 그때도 나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기억은 내가 서른을 넘겨 새롭게 시작한 사이코드라마와 다양한 형태의 무의식 작업의 결과로 결국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간 나의 행동패턴에 대한 의문점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무의식의 공간은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마! 비행기도 타지마! 혼자 남겨지는 것은 위험해! 그러나 혼자서 이겨내야 해! 삶은 네가 책임지는 거야! 의존적인 삶은 가치가 없어! 의존적인 사람은 싫어!” 이런 식의 메시지가 어디에서인가 날아왔었고 난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내 삶에는 이러한 것들로 넘쳐난다. 나는 이제 이런 유기불안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적 독립심에 더 이상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존적인 사람에 대한 경멸감은 오히려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무의식 저편으로 보내졌던 그 기억들이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닌 또렷한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와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이코드라마의 힘이다. 그 힘은 과거를 그대로 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를 재조명하고 현실의 수준에서 충실히 살 수 있게 한다. 또한 미래의 상황을 극화 하면서 미래를 담보로 현실을 희생하며 살게 하지도 않는다. 누가 먼저 자기에 대해 용감한 고백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처음 꺼내 놓기 쉽지 않지만 누군가 한 번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두가 자기만의 신화에 동참하게 된다. 확신하다. 그대 용기를 한 번 내시려는가? 그럼 사이코드라마의 무대로 오라! 아무도 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다울수록 환영받는 곳! 그곳이 사이코드라마이다.

 

KakaoTalk_20230303_231433545.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북토크】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알아야한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