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9(목)
 
  • 해질 무렵,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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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동네에서 친구 사이로 지냈던 한 여자의 소식을 중년이 되어 듣게 된다. 성인이 되어 기구한 인생을 살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먼저 자살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아들 여자 친구가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어린 시절 남자 친구에게 보내지 못한 글을 보고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지난 어린 시절을 떠 올리게 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고, 그 당시 풋사랑도 있다. 이후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그 모든 것들을 잊고 살다가 인생의 해질 무렵 문득 그 때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현재가 어려우면 과거는 아름답게 각색된다. 그리고 왠지 마음이 아련해 진다. 재미있게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pp. 195-196) 그리고 마당가 담장 밑에 자그마한 화단을 만들어 채송화, 봉숭아, 과꽃, 수국 등을 심거나 텃밭을 만들었다. 잔디는 사실 우리 기후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묘지에 떼를 입히는 용도로나 사용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마당에 잔디가 깔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중산층 정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어느 날 마당에 서서 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아버릴까, 궁리를 하다가 마당가에 심어놓은 꽃들 사이에서 몇 줄기 삐죽이 올라와 있는 솜털 모양의 익숙한 풀들을 발견했다. 일하는 아줌마와 아내가 미처 뽑아내지 못한 것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강아지풀이었다. 나는 그것을 뽑아 내려다가 내버려두었다. 일부러 심어놓은 화초들과 어우러져 있는 모양새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내와 나는 그 집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아내의 등쌀에 당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강남의 주거형 고층 오피스텔로 이사했고, 아내와의 관계는 점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져갔다. 아내가 딸에게 가서 지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지금의 타운하우스로 집을 옮겼다. 고충 오피스텔이 나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맘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다. 컴퓨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새로운 주택 부지를 찾으며 맞춤한 곳에 집 짓는 상상을 하는 게 요즘의 내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그 집에는 함께할 가족이 없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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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어느날 문득 돌아본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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