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4(금)
 
  •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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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이창동 감독은 내가 신일고등학교 다니던 1982년도에 국어 선생님이셨다. 직접 배우지는 않고 다른 국어 담당 변인식 선생님께 배웠다. 이분은 유명한 영화평론가로 가끔 영화 얘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기억은 없다.

신일고등학교는 한국유리 재단 소속으로 지금은 서울사이버대학교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 당시 넓은 교정은 대학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대학을 설립하지는 못하고 대신 사이버대학을 운영하는 것 같다. 신일고는 미션 스쿨이라 이창동 선생님도 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신자로서 기독교의 값싼 은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한다.

 

갓 신앙을 갖게 된 여주인공이 자기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죄자를 기독교의 용서를 실천하기 위해 찾아 갔는데 그 ‘물건’은 감옥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며 자기 죄는 이미 다 용서 받았다는 ‘막말’을 한다. 이에 여주인공은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냐?”고 실성한다. 누가 그 살인자에게 기독교를 그렇게 전했는지 모르지만 잘못 가르쳐 준 것이다. 살인자는 피해자에게도 용서를 구해야지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용서 받았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용서가 얼마나 천박해지고 값싸질 수 있는지, 그리고 범죄자의 이런 반응을 볼 때 피해자가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밀양은 값싼 은혜에 만족하는 한국교회와 신자를 가시같이 찌르는 영화다.

 

이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본 책이 있어 소개해본다. 같은 영화지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한 특징이다.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pp. 113-118)

밀양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 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둘 다 어려운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년)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광주 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반드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소설에서, 아이를 살해한 남성은 피해자 가족에게 “제 영혼은 이미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저는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간증하고, 이 말을 들은 아이 엄마는 자살한다. 작품은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와 가해를 이야기 할 때의 주제들-더는 인간의 선을 믿지 않으며,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 저주, 복수심이라는 현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용서마저도 가해자의 권리인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 반이다. 처음 볼 때는 유괴 살인범(조영진 분)과 아이의 엄마(전도연 분)의 교도소 면회 장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중에 나왔다. 나의 어떤 경험과 겹치면서 더 볼 수 없었다. 극장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했다. 나는 그녀와 동일시했지만, 내 몸은 그녀를 담을 수 없었고 당연히 몸이 비틀리고 다리가 풀리고 휘청거렸다. 다행히 다음 두 번은 온전히(?) 다 보았다.

나는 이 영화의 두 장면을 가슴에 담고 산다. 하나는 여자 주인공이 경찰서에서 가해자와 마주쳤을 때의 태도이다. 가해자 앞에서 겁먹고 주눅 들었던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에 분노한다. "내가 왜 그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을까!" 이 장면은 그녀가 '부동산이 좀 있다고 자랑'한 것이 유괴의 원인이었다고 자책할 것이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다. 감독은 범인과 마주쳤을 때 피해자의 반응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엄마의 이전 행동이 어떠했든 간에, 그것은 아이의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는 이 간단한 윤리, 아니 상식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흔히 사회가 보이는 반응은 "당신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평소 네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런 일에 휘말리다니,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인데...)"이다.

자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머니의 고통과 대비되는 가해자의 마음의 평화. 이 이야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80년 광주'를 연상한 것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 즉 피해자 비난, 낙인, 고립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더구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구원'을 받은 데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반민특위의 실패부터 ‘나쁜 사람들’, ‘기회주의자’만이 살아남았던 것이 한국 현대사이고 우리의 일상이었다. ‘악한 자의 승리, 악한 구조의 승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 4·3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세월호, 최근 포항 지역의 지진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는 몸을 숨기고 사죄했다. ("저희들 때문에 수능이 연기되어 죄송해요.")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 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문제는 두 장면 중 나머지 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신앙의 힘으로 잠시 구조된 듯한’ 여주인공이 교인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의기양양하게 소회를 밝힌다. "하느님이 제게 구원을 주셨으니, 저도 그분께 뭔가를 드려야겠어요."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의미다. 나는 이 장면에서 '피해자'라는 주제(主題)를 깨달았다. 맙소사.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과 동급인 줄 알고 있었다.(여기서 하느님은 절대성, 운명. 인생이라는 짧은 시간... 을 뜻한다.) 그녀는 '하느님'과 대적하려고 한다. 일 대일로 주고받는 관계. 그러니 자기도 하느님께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는가. 더 큰 고통만이 그녀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하느님(우주)’은 모든 것을 관장하는 원리지, ‘나(우주의 먼지)’와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상대가 아니다. 아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감히’ 갚겠다는 것인가. 이런 황당하고, 망상적이고, 확대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이후에도 그녀는 물건을 훔치고, 유부남을 '유혹'하고, 집회 마이크를 끄는 등 계속 하느님과 협상하고, 대결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피해자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잃고 피해자가 되었을 때, 너무나 억울할 때, 고통이 숨통을 죄고 있을 때, 죽음만이 육체의 구원일 때····고통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일상인데도 고통은 줄지 않는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 고통은 쌓여만 간다.

이때 유일한 출구는, "나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다.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데 이 우월함의 근거는 피해자가 생각하는 정의(justice)가 전부다. 피해=정의도 아닐뿐더러 누가 그것을 공감해주겠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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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영화 『밀양』...값싼 은혜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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