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4(금)
 
  • 마린을 찾아서, 유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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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주 시인의 글은 몇권을 봤다. 시, 수필, 이번에는 소설이다.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현재는 절판됐다. 나는 한 작가에 꽂히면 그 작가가 쓴 책을 계속 찾아본다. 이 책도 모처럼 그가 쓴 수필을 읽다가 시와 함께 읽게 된 초기의 소설이다. 소위 자전적 소설로 그가 가난한 살림살이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야학을 통해 검정고시를 보게 되었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광화문에 있는 정동교회에서 야학을 했다. 요즘같이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에 그래도 교회가 잘한 일중 하나는 야학이었다. 교회는 고립된 게토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와 소통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한다. 그것이 과거에는 야학이었다. 이 시대에는 무엇으로 이 세상과 이웃을 품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pp. 154-157.) 1978년 9월, 드디어 정동 제일교회 배움의 집에 입학을 했다. 은근하게 깊어가는 가을이었다. 노래로만 들었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덕수궁 돌담길보다 건너편에 있는 미 대사관저 담장이 훨씬 높고 경비도 삼업했지만 가을은 낙엽이 있어 아름다웠다. 배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많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정동교회는 1885년, 그 유명한 아펜젤러 목사가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였다. 국가 사적 제256호로 지정된 문화재 예배당은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키 큰 버드나무가 전봇대를 압도하고 담쟁이덩굴이 붉은 벽돌을 핥아 먹으며 휘감아 돌아 이끼와 함께 푸르렀다. 하얀 아치형 창문 앞에는 돌계단이 있고 정원에는 향나무와 진달래가 소담스레 가꾸어져 있었다. 배움의 집은 정동교회의 장기 선교계획에 포함된 불우 청소년 선도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9월 2일, 처음 문을 열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불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을 일 년간 가르쳐서 고 등학교에 진학케 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프로그램의 하나로, 1977년 8월에 제1기 수료생 스물네 명을 배출하였으며, 제3기부터는 학생수가 많아져서(우리 3기는 이백 명이 넘었다) 젠센기념관에서 문화재 예배당으로 옮겨 수업을 했다. 예배당은 넓고 서늘했지만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반짝거렸다.

입학식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자, 기도합시다." 고개 숙인 자세에서 실눈을 뜨고 길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옆 사람들을 엿보았다. 동료들도 나처럼 교회 의식에 낯선 표정들이다. 기도라는 말을 듣자 우선 전포동 살 때 전도관이 떠올라 슬그머니 웃음부터 삐져 나왔다. 여기는 신발 훔쳐가는 교회가 아니다, 여기는 우리를 위해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 주는 곳이다, 엄숙한 자리다, 진지해져야지, 마음을 다잡았으나 '길 잃은 양떼를 저희에게 보내사....' 대목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도를 집전하는 목사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곱게 늙어 점잖은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아멘'을 연발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선생님 한 분이 가만히 다가와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기억이란 얄궂은 놈인가 보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부산 전도관과 누나 친구들이 생각날 게 뭐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더니 눈물이 나왔다. 첫날부터 실수를 하다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우리들은 긴 시간을 참회하고 반성하고 뉘우쳤다. 공장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수없이 만들었지만 한번도 기도하거나 참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그저 만들기도 쉽고 광내기도 쉬워 편하게 생각했다. 첫날부터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다. 기분 좋아서 크게 웃어야 할 때 오히려 울음이 나오고, 정작 슬퍼 울어야 할 때 웃음이 나 오질 않나, 말을 꼭 해야 할 때 바위덩어리로 돌아앉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거짓말이 술술 나와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얼마나 많은가. 녹여서 다시 만들든지 보링을 하든지 갈아치워야 제 명대로 살 것 같다. 주기도문 낭독을 마지막으로 입학식은 끝이 났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손들이 다가와 격려의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선생님들과 학생들만 남았다.

"아까 목사님 기도하실 때 웃었던 사람 일어나요." "......" 화사하게 화장을 한 여선생님이 싸늘하게 좌우를 훑었다. 뜨끔했다. 물개똥을 싼 강아지처럼 엉거주춤 일어났다. "앞으로 나오세요." 여전히 군복 바지에다 재홍이 형이 산에 갈 때 신었던 등산화 차림이었다. 쭈뼛쭈뼛 앞으로 나갔다. 마룻바닥에서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백여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다. 여기저기서 튀밥 튀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앞으로 여러분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가장 많이 할 사람인데요, 배움의 집 실무간사를 맡고 있는 정수진이라고 합니다." 숱 많은 퍼머넌트에다 늘씬한 키다. 여선생님 중에서는 제일 키가 컸다. 정수진 선생님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첫 인상은 차고 쌀쌀하고 매웠다. "여러분, 어때요? 이 학생을 3기 회장으로 뽑고 싶은데, 다른 의견이 없는 사람은 박수를 쳐주세요." "좋아할 필요 없어요. 회장은 여러분을 위해 저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일꾼이에요. 체격이 좋아서 많이 부려먹어도 괜찮을 것 같죠?" 한바탕 웃음바다가 넓은 예배당 안을 넘실거렸다.

각 과목별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부회장을 뽑고 반을 편성했다. 반 편성은 성적순도 아니고 키순서도 아니고 주로 사는 동네와 버스정류장을 같이 이용하는 사람들끼리 묶었다. 시장 좌판에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열무 단이나 배추 단, 쪽파 단 속에는 오이나 가지나 풋고추나 씨감자도 너댓 개씩 들어 있어, 늦은 시각에 집으로 돌아갈 때 여학생들 안전까지도 책임을 지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힘든 일과 영양 부족으로, 자라기도 전에 타들어가 비쩍 마른 마늘쪽들은 얼떨결에 맡은 반장이라는 감투에 싯누렇게 웃었다. 

우리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는 선생님들은 서울 시내 중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현직 교사들이었고 상업이나 음악과 미술은 대학생으로 충당했다.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이분들은 낮 시간 동안 파김치가 되도록 근무하고 밤늦게까지 우리들을 위해 온 정열을 다 쏟았으니 나도 뜻밖에 얻어 쓴 감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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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그래도 교회가 잘한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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