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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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보여준다. 요즘 이 저자에 꽂혀 책을 찾아 읽고 있는데 독서량이 어마어마한 것을 느낀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글쓰기를 삶의 형태라고 할 때, 글을 쓰는 이유(자기 표현)는 인구 수만큼 다양할 것이다. 글은 몸의 형식(form)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재현의 양식이 다를 뿐이다. 다만, 글쓰기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만의 특징이 있다. 인간은 모차르트처럼 네 살부터 작곡을 하고, 강-약을 조절하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있는 존재다. 수많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유년 시절 부터 스케이트를 탈 수도 있다. 그러나 네 살부터 글을 쓰는 사람은 없다(낱말을 익힐 수는 있다). 글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 말이 생각으로 조직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 가지 요건은 적어도 10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들이 극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역시 1970년대 훈육 세대에서나 가능하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쥔 요즘 10대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글쓰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삼십 세를 이립(而立), 삶의 기초가 확립되는 때라고 하지만 그것은 공자의 생각이고, 현대 철학에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다. 나는 서른 살에 어렴풋이 나 자신에 대해 알았 다. 나의 위치(position)를 깨달았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특정한 사유나 사람 등 의미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를 언제 어떻게 만나는가는 운에 달렸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페미니즘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다.

나의 계급과 젠더, 건강과 나이, 심리적으로 취약한 개인적 캐릭터.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당시 나는 서울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거의 모든 면에서 약자라고 생각했다. 한마 디로, 나는 '돈 없는+ 여자'였다. 나는 약자로서 먹고살 방도를 찾으면서도, 그 방법이 성차별 사회에서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나를 보호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답'은 금 방 나왔다. 글쓰기였다. 물론 지식인이었던 부모님의 영향, 제도 교육의 세례, 당시 이삼십 대의 몸, 그리고 기호 식품과 여행, 미팅, 소비 생활 등이 전무한 초간단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남들에 비해 무한히 많은 시간 같은 자원이 있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글쓰기라는 직업 훈련'은 다른 분야에 비해 비용이 덜 든다.

한때 외국 유학 준비를 위해 딱 한 달 학원에 다닌 것 외에는 나는 평생 사교육비를 쓴 적이 없다. 나는 걸어서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책을 찾고 읽을 수 있었 다. 메모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메일로 전송했다.

문제는 '작가'가 다소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글쓰기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르고, 나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온갖 논쟁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젠더 관련한 글은 여성도 남성도 불편하게 한다. 당파성이 뚜렷한 글이라 당파성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틀리면 틀리는 대로' 욕을 먹는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글쓰기와 관 런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는 두 가지다. 사회적 편견(무지), 난센스. 어처구니없는 이들과 싸워야 할 때, 그리고 간혹 독자나 출판 관계자로부터 내 글이 내가 가장 비판하는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지구를 탈출하고 싶을 정도로 노동 의욕이 사라진다.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말은 당연히 논쟁적이다. 나부터 의심스럽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선악과 시비, 승부는 누가 정하는가.

선악은 규범적이지만, 강약은 맥락적인 개념이다. 갑을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세상은 갑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갑을에 속하지 않은, ‘병정무기경신임계’도 있다. 이는 본디 순서(위계)가 아니라 순환이다. 고정된 약자나 강자는 없다. 관계 속에서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기를 찾아야 한다.

피터 패럴리 감독의 2018년작 영화의 제목 ‘그린 북(Green Book)’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업소, 주유소, 식당 등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은 ‘흑인 전용 여행 가 이드북’을 가리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장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백인’, 비고 모텐슨 분)와 돈 셜리 박사(‘흑인’, 마허살라 알리 분)가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이다. 극중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로 나오는 주인공은 말한다. “품위(dignity)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 대사가 좋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정의는커녕 의리도 찾기 힘든 세상에서 품위라니? 

나 역시, 토니처럼 '욱' 하는 성격에,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한다. 결국 내 분노는 다시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방관자이고 싶지 않은 정의감(?)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린 적 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 설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참고 사는데, 당신은 하루도 못 참냐."고. 그렇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 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pp.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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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왜 글쓰기를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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