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후에 어떻게 살지? - 이춘재
일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젠가 퇴직 해야한다. 그리고 수명이 늘어난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퇴직에 대한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그런면에서 이미 퇴직한 사람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인터넷 교보문고를 찾아보니 2018년에 나온 이 책은 절판됐다. 혹시 읽기를 원한다면 동네 도서관을 검색해 보시기를...
처음부터 다시 출발이다
퇴직을 하면서 당면하는 가장 큰 과제는 역시 노후자금이다. 주머니 사정이 든든해야 인생설계가 제대로 되는 것이지, 호구지책을 고민해야 한다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재무 상태와 수입, 지출 구조 등을 점검해 보고 인생설계의 골격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퇴직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을 버리면 인생관이 달라진다.
경력개발센터를 갔다 온 후, 원점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동안 막연하게 혹은 어렴풋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계획들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었다.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는데 재무적인 문제는 특히 더 그랬다. 지출은 현실이고 수입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지출 규모를 명쾌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낭패 볼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퇴직자의 재무 계획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연금을 타기 전까지 은퇴 보릿고개라 불리는 노후 절벽을 무사히 넘기기 위함이니 예전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허례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정기적으로 나가는 지출의 슬림화였다. 여기에는 저축성 보험 상품들이 해당되었다. 자동차나 실손 같은 필수 보험을 제외하고는 통폐합하였다. 아이들이 다 컸으므로 그동안 납부해 오던 보험이나 저축 상품도 각자에게 넘겨주었다. 외식의 횟수를 줄이고, 충동구매는 지양하기로 했다. 습관화된 생활 패턴을 일순간에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적응 될 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렇게 해도 기본 지출액이 적지 않았다. 최대한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지출을 줄임과 동시에 새로운 수입원도 반드시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한 것은 통장의 통합과 신용카드의 폐기였다. 통장이 여러 개이면 수입과 지출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 통장을 모아 보니 6개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은행 일을 볼 때마다 만들었던 모양이다. 사용하지 않거나 빈도가 낮은 것은 아예 없애고 주거래은행 통장 하나로 통합하니 지출 내역이 명확하게 정리되었다. 신용카드도 사정은 비슷하여 특정 업체의 할인 혜택을 보기 위해 만든 것들이 많았다. 사실 혜택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고 오히려 연회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 교통카드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없애 버렸다. 신용카드는 가계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지출하게 되는 주원인이다. 아예 신용카드를 안 쓰고 현금카드를 쓰게 되자 나쁜 소비 습관을 버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바꾸자 과다한 지출이 억제되고 합리적인 소비 습관을 형성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퇴직하고 보니 모임의 비용을 참석자들이 공평하게 내는 더치페 이 방식이 맘에 들었다. 소위 'n분의 1'이라고 하는 방식이다. 우리 세대의 관행으로는 어느 한 사람이 대표로 지불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철저하게 n분의 1 방식이라 참석자 모두 부담이 없었다. 1만 원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끼면서 이런저런 모임에도 빠지지 않게 되었다.
퇴직 후 재취업을 원한다면 과거의 대우를 생각해선 안 된다. 눈 높이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빨리 깨우쳐야 한다. 기대치만 높은 고령의 퇴직자가 재취업하기는 매우 힘들다. 나도 처음에는 그럴듯한 자리, 폼나는 자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한 중소기업체에 들어갔는데 2주 만에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다. 너무 짧아 아쉬웠지만 그 기간이 몇 개월처럼 길게 느껴질 정도로 심적인 갈등이 많았기에 마음은 후련했다. 경제적인 풍요보다는 여유로운 삶에의 갈망이 더 크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과거의 소비 패턴에 변화가 생기면서 수입 목표도 덩달아 낮아졌다. 고수입에 상응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생계유지 정도의 적은 수입이지만 여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선택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수입에 대한 기대치를 확 낮추자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니 적은 수입에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움직이고 노력한 만큼만 수입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 부터 땀방울의 소중함도 느꼈다. 목표를 확 낮추니 세상이 달리 보이고 소소한 행복들이 곳곳에서 다가왔다. 적은 금액이지만 미소로 화답하는 아내를 보면 행복이 느껴지니, 나의 노후는 이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컴퓨터도 가끔은 리부팅을 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리부팅이 필요할 때가 있다. 퇴직은 바로 리부팅 시간이다.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노후에도 일을 하면서 아무 탈 없이, 마음 편하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워라밸' 아니겠는가?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전 충분한 인생설계를 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함께 뛰기를 기대한다(pp. 6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