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여서 좋은 직업 – 권남희
요즘 이 작가에게 꽂혀 열심히 책을 찾아 읽고 있다. 나의 독서는 고구마 줄기 캐는 것 같다. 어떤 책을 보다 소개된 책이 있으면 관심 두고 찾아본다. 이 작가의 책들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쓴 책이 별로 없어 다 읽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아쉽지만 패스한다. 그렇다고 돈 내고 사볼 생각은 없다. 한번 읽고 말 책에 돈을 들이기도 뭐하고 둘 장소도 마땅치 않다.
이 작가는 30년 차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이다. 그러면서 이런 에세이를 쓰고 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이 결국 본인의 생업이 됐다. 그 계기는 초등학교 1학년 때 5학년이었던 남자아이가 쓴 글을 들은 것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꽂혀 결국 번역가와 작가의 길을 가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말과 글은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도 영향을 받았고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남학생은
예닐곱 살에 한글을 깨친 뒤로 활자에 빠진 나는 주로 옆집인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읽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 아직 세상에 그림책, 동화책이란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부모님이 교육에 관심이 없어서 우리 집에 책이라곤 언니와 오빠의 교과서뿐이었다. 그렇게 만화책만 읽던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글을 보고(정확하게는 듣고) 감동받은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애국 조회 시간에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1등한 5학년 남학생이 단상에 올라가서 수상작을 읽는데, 여덟 살 어린 마음에 그 글이 그렇게도 감동이었다. 그 남학생은 보육원에 살았다. 보육원은 우리 집에서 가까워서 내가 그 앞을 지나다닐 때도 많았다. 높고 큰 철문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부모님이 없는 아이들이 사는 집이란 걸 취학 전에도 알고 있었다.
1등 한 남학생이 쓴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골목 안에 우뚝 서 있는 양옥집 한 채, 저 집이 우리 집이라면.” 그 첫 문장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따따따단~ 하는 베토벤의 <운명> 첫 소절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것과 같았다. 높고 큰 철문 안에 사는 소년이 골목을 걸어가다 양옥 집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첫 문장과, 첫 문장을 들었을 때의 감동만 가슴에 박제되어 있다. 그리고 글짓기라는 게 뭐지? 글짓기 대회는 뭐지? 나도 글짓기해서 저렇게 상 받을래,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게 와서 꽂힌 ‘글짓기’라는 단어가 지금 이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보육원 남학생이 단상에서 수상작을 읽을 때만 해도 우리 집은 보육원에서도 보이는 큰 건물이었지만, 이듬해 폭삭 망해서 고아만 아닐 뿐 나도 그 남학생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런 나에게 글짓기는 유일한 오락이고 자존심이고 구원이었다. 그 남학생에게도 글짓기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어른이 되어 멋도 뭣도 없이 지어서 성냥갑처럼 높이 쌓은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저기 내 집 한 칸 있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여덟 살 어린 마음으로 들었던 그 첫 문장이 떠올랐다. 나보다 네 살 많았던 그 남학생은 이제 집이 생겼을까. 부디 지금쯤은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전교생 5,000명 가까운 학생 중에 1등 한 실력이라면 그 후로도 수많은 글짓기 상을 탔을 테니. 본인은 그 글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조회대 앞에 조그맣게 앉아 있던 1학년이 몇십 년째 당신이 그때 그 양옥집보다 좋은 집에서 살고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pp. 186-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