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조한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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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세상을 본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돈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따뜻한 카페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맞으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과연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런 책은 처음 봤다. 여러 만성 질병으로 시달리는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것들을 다르게, 낯설게 보는데 “아 그렇구나”하는 공감을 했다. 아마 나도 어떤 큰 질병에 걸리면 더 이 책에 공감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삶과 경험이 소중하고 필요하며 이렇게 책을 통해서라도 다른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독서는 하면 할수록 필요한 것임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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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고통은 없다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비정규직 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을수록 건강이 나쁘다.

IMF 구제금융 직후 80퍼센트 이상의 가구가 소득 감소를 경험했다고 하니, IMF 위기는 전 국민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질병이환율(질병에 걸리는 비율)을 비교한 조사에서도 IMF 이전인 1995년에 비해 1998년에는 전체적으로 2.8배가 늘었고 급성의 경우 2.2배, 만성은 1.9배 늘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었다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모두 힘들었지만, 그중 누가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들의 희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기록되지 않으면, 이렇듯 희생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역사는 더 쉽게 반복된다.

‘IMF 20년'을 주제로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언론과 전문가의 의견이 대대적으로 쏟아진 바 있다. 그러나 맨 앞줄에서 희생을 감당하도록 떠밀려나간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과 분노가 일렁인다. IMF 구제금융을 한국 사회가 빠르게 극복했다면 그것은 분명 희생자들을 밟고 올라선 결과다. 당시 사회의 위험에 맞서 안전판과 에어백 역할을 하던 여성들은 그 고통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쌓이면서 통증과 질병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그 고통은 몸에 스며들어 질병으로 확장 되기 쉽다.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들의 건강이 더 나쁜 것은 분명한 차별의 결과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더 길다지만, 실제 건강수명은 그다지 나은 게 없다는 보고들은 사회적 차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아야 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IMF 구제금융 당시, 여성 우선 해고와 일방적인 희생 분담으로 삶과 몸이 아팠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당신들의 고통과 질병이 개인의 운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폭력의 결과였음을 분명히 전하고 싶다(큰글자책 pp. 240-242).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은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나는 할머니 손에 많이 자라서,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죽음은 내가 닮고 싶은 죽음이라는 점이다. 그해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자주 두통이나 어지럼증을 호소했고, 결국 입원을 하셨다. 의사는 할머니의 몸 이곳저곳을 검사했고, 몸에 연결되는 기계가 하나둘 늘어났다. 검사를 위해 89세 노인의 팔에서 매일 피를 뽑자 손등과 발등은 온통 푸르고 붉은 멍으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다"며 집에 가고 싶어 했지만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집에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의사가 안 된다는데 할머니를 퇴원시킬 수 없었다. 의사가 선택한 검사를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며 의료진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손가락에 연결시킨 기계를 뽑아 버리거나, 피검사를 하러 오면 받지 않겠다고 팔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여러 상황 끝에 의사는 할머니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제거했고, 퇴원을 허락했다. 마침내 할머니는 손수 링거 바늘을 뽑아 병실 바닥에 내던지고는 당당히 퇴원에 성공하셨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메주콩을 사오도록 했다. 그리고 예전보다 느려진 손으로 어느 해보다 많은 양의 된장을 담갔다. 그렇게 얼마간 된장 담그기를 끝내고 장독대 정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평생 아들에게만 의지해온 당신답게, 이번이 아들에게 담가주는 마지막 장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뒤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찬거리를 위해 시금치와 콩나물을 잔뜩 다듬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입맛이 없다며 끼니를 건너고 누웠다. 어머니가 죽을 챙겨드렸지만 한 모금도 들지 않고 그렇게 꼬박 하루 반을 보냈다. 이틀째 저녁 할머니는 찬물 한 잔을 아주 맛있게 들고, 주무시다가 영면에 드셨다. 그 이틀 내내 어머니는 할머니 곁에서 손과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50년 가까이 당신의 며느리로 살면서 서럽고 맺혔던 일에 대해 한없이 마음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그 모든 일에 대해 마음으로 사과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평생 처음으로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다른 가족과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만 나누었으나, 자신이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사과하고 조금은 가벼이 떠나셨다. 인간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떠나갈 때를 알고, 살아온 세월을 마무리하며, 사랑과 사과와 이별을 전하고 떠나는 죽음은 얼마나 온전함으로 충만한 일인가!

하지만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제 드물다. 현대의학은 노화조차 질병으로 규정하고,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중환자 다루듯 치료하려 든다. 노인이 죽음과 가까워지며 겪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에 대해 표준 수치를 들어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요즘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집에 머물다가도 입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경우도 빈번하다.

대부분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실제로는 서걱거리는 환자복을 입고 낯선 병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소생 불가능한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 치료 효과도 없는 인공호흡기와 약물 등으로 연명치료를 시행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환자는 결국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가기도 한다. 그나마 이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평소 거부 의사를 밝혀놓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이 모두는 일상이나 종교 영역에 머물던 죽음을 의료가 관장하며 생긴 문화다.

나도 할머니처럼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죽음이 삶을 마무리하기 시작했을 때, 몸으로 가늠하며 준비하고 싶다. 선명하게 찾아온 죽음을 첨단 의료로 늦추지 않고, 살아온 나날 속의 사람 관계 공간에 작별을 전하고 싶다. 병원이 아닌 내 집에서 몸의 흐름에 따라 가볍게 곡기를 줄이고, 홀가분하게 생을 떠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인류가 맞이해온 존엄한 죽음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죽음을 맞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죽음의 과정에서 의료와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연의 흐름대로 죽어갈 권리'를 의료에 뺏기지 않으려면 나도 어쩌면 할머니처럼 투쟁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에서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자기결정권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료는 죽음을 무조건 지연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만든 듯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의료와 죽음의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내가 병원 침대가 아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는 돌봄노동이다. 할머니에게는 일방적인 헌신을 감내한 며느리가 있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할머니가 마지막 세대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보편화된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 삶의 과정이 아니라 의료의 과정으로 흡수된 데 있지만, 죽어가 는 이를 집에서 돌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도 있다. 요양보호사 등 가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돌봄 노동을 100퍼센트 사회화하기는 어렵다. 집안 내 여성이 도맡아온 돌봄노동을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죽어가는 이를 돌보고 애도할 시간을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도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손상이 아닌, 삶의 충만한 결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언젠가 맞이할 우리 모두의 죽음이 자연에 스미는 평온함이길 기원한다(큰글자책 pp. 33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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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병자의 입장에서 본 질병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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