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 뒷전의 주인공 - 황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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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속과 전혀 연관이 없다. 비록 부모님은 나보다 늦게 신앙을 가지셨지만 “무교”로서 무속과도 관계가 없으셨다. 그런데 이 정권에는 무속과 관계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도대체 무속이 무엇이길래 소위 배웠고 사회적 지위도 있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미신에 빠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틈틈이 무속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가 “뒷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뒷전은 굿의 마지막 단계로 소위 별 볼 일 없는 잡신들을 위한 굿이다. 대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혼백들이다. 이들은 힘 있는 신이 아니기에 굿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남의 굿에 얻어먹고자 찾아온 잡귀들이다. 그런데 굿에서는 이런 잡귀들도 잘 먹이고 대접해야 탈이 없다고 해서 굿의 마지막에 이들을 대접하는 굿인 뒷전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뒷전에서 언급되는 잡귀들은 다 힘없어 죽은 민중들이다. 그래서 굿에 참석하는 자들은 뒷전의 잡신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위로를 받는다. 굿에는 이런 기복과 위로의 두 면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알게 모르게 이 두 가지를 흡수했다.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비는 기복신앙과 신앙 외에는 소망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규가 있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처럼 초대형교회가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가난한 자들이 가기 어렵게 됐다. 있는 자들이 대접받는 곳이 교회가 됐다. 없는 자들은 교회에서도 무시당한다. 왜 굿에 뒷전이라는 순서가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교회가 없는 자들이 가기 어려운 곳이 된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참된 위로를 찾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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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전의 신격

무속신앙은 다신교이기에 많은 신을 믿고 있다. 굿은 무속에서 신앙하는 여러 신을 청하여 대접하고 복을 비는 의례이다. 흔히 열두 거리라든가 스물네 석 하는 굿거리는 다신교인 무속에서 모시는 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열두 거리라고 하면 중요한 열두 신격을 중심으로 굿을 한다는 의미이고 스물네 석은 24신격을 모시는 굿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열둘이나 스물넷이라는 숫자는 의례적인 것이다. 12차 농악, 판소리 열두 바탕처럼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부르는 것이고 실제 굿의 석수는 지역과 굿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서울을 예로 들어 본다면 재수굿은 열두 거리를 하지만 진오기 굿은 거기에 넋을 천도하는 굿이 첨가되어 훨씬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뒷전도 이 석수 안에 들어간다. 늘 마지막에 하는 굿이니까 열두 거리 굿이라고 하면 열두 번째 굿이 바로 뒷전이 된다. 하지만 뒷전의 대상이 되는 신격과 그를 대접하는 방법은 앞의 굿들과 큰 차이가 있다. 뒷전에서 대상이 되는 신격은 잡귀잡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잡귀잡신 은 단수의 신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신격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또한 신을 따라온 졸개 신격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존재로 정식 굿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무도 이들을 청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잡귀들은 장구소리를 반겨 듣고 기꺼이 굿판을 찾아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 거리인 뒷전에서 한꺼번에 굿을 받는 것이다. 잡귀신은 모시는 것이 아니라 풀어멕이는(먹이는) 존재이고 '너도 먹고 물러나라'의 대상이다. 비록 정식으로 초대하여 대접하고 복을 비는 대상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어 마지막에 단체로 대우를 해 주는 것이다.

뒷전에서 풀어먹이는 신격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과 기능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소원을 비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무속에서 일반적인 신의 속성과 완전히 배치된다. 원래 굿은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매우 현실적이다. 병의 목적은 치병에 있고 넋굿의 목적은 죽은 영혼의 한을 풀어 저승으로 보내는 데 있다. 재수굿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속의 신들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곳마다 존재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리마다 꼼꼼하게 신을 배치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무속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신마다 관장하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성주는 집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래서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가면 성주받이를 한다. 성주받이는 앞으로 가옥과 가족을 지켜 줄 새 성주를 모시는 굿이다. 천연두가 창궐하면 집집마다 손님배 송굿을 했다. 손님은 천연두와 홍역을 막아 주는 신이다. 손님을 모셔서 잘 대접한 뒤에 마을 밖으로 배송함으로써 질병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굿의 목적이다. 유난히 몸이 약하고 수명이 짧을 것으로 걱정되는 경우에는 칠성에게 무병장수를 빌고, 아기가 없는 집에서는 삼 신을 빌었다. 굿을 할 때 무당은 이런 신들을 차례로 모시고 대접을 하는데 해당 신이 주관하는 분야에 맞춰 인간의 소원을 빈다. 성주에게는 가운과 대주의 행운을 빌고 대감에는 재수를, 제석에게는 복을 비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신과 무당과 굿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굿의 의뢰자가 최종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곧 굿이다.

그런데 뒷전에 등장하는 잡귀잡신들은 이런 특정 기능이 없는 신격인 것이다. 특정 기능이 없는 잡귀잡신들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대상도 아니다. 독립된 하나의 굿으로 대접받는 신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한 존재들이기에 이름도 없다. 그저 귀신, 잡귀, 수비, 영산 등으로 부를 뿐이다. ‘떠덩 굿소리 반겨 듣고’ 스스로 떼를 지어 찾아왔으니 정식으로 초대 받은 존재도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실상 뒷전의 신격들은 굿을 하는 사람들과도 아무 연결고리가 없다. 집 안의 조상도 아니고 딱히 우리 마을 출신도 아니니 혈연, 지연을 살펴봐도 무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굿 현장에서 뒷전은 매우 중요하다. 무당들은 아무리 굿을 잘해도 뒷전을 잘못하면 뒤탈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무 무당이나 뒷전을 하지 못한다. 서울에는 뒷전무당이 따로 있었고 동해안지역에서 거리굿을 하는 양중(男巫)은 별도로 몫을 받는다. 그만큼 중요한 굿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pp. 23-27).

 

이런 존재를 정성스레 기억해 주는 것이 바로 굿이다. 집에서 굿을 하면 제일 먼저 무당이 하는 일은 죽은 조상을 챙기는 것이다. 무당은 혹시나 집안에 비참하게 가신 영혼이 있는지 가족들에게 묻고 굿을 할 때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모두 대접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배려한다. 굿을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떨어진 조상을 챙기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굿은 제사를 받지 못하는 조상을 기억하는 장치인 셈이다. 그리하여 집안의 어두운 역사를 짚어 내어 하나하나 풀어 주는 것이 바로 굿이다. 굿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 삶과 죽음이 화해하는 자리이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살아 있는 사람끼리의 화해도 중요하지만 죽음과의 화해도 못지않게 긴요하다. 그래야 죽음이 삶을 간섭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뒷전은 기억의 저 뒤편면으로 잊힌 뭇 죽음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자리인 것이다(pp. 140-141).

 

뒷전이 진행되는 동안 관중들은 자연스럽게 극에 참여하고 함께 웃으면서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굿의 관중들은 나이 든 여인들이 대다수이다. 굿판의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 호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대로 아이를 낳고 그 가운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경험을 공유한다. 동시에 지금은 며느리와 갈등을 겪고 있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조금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뒷전에 등장하는 인물이 곧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당은 지금 자신의 서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견뎌 온 지난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다. 배가 아프게 웃으면서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세월을 객관화하고 드디어 웃어 버릴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웃어 버릴 수 있는 힘을 받 고 살아갈 힘을 나눈다. 뒷전은 대부분 웃음을 매개로 표현된다. 막다른 절망에 부딪혔을 때 이를 웃음으로 극복하고 벗어나는 기지는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민중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이다. 해산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굿은 자식을 잃은 절망도 웃음으로 극복해 낸다. 그리고 그 웃음은 관객들이 다 함께 웃을 때 힘을 얻는다. 큰 웃음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웃음 가운데 동질감을 나누며 다시 살아갈 용기를 찾아내는 것이다(pp. 240-241).

 

뒷전은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의 다양한 삶을 재현한다. 무당은 놀이를 통해 이들의 삶과 죽음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으로 표현하지만 무당은 그들의 삶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죽음이 고통스러웠다면 그럴수록 마치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듯이 섬세하게 재현해 낸다. 그 속에 진정성이 있기에 관중들은 극에 몰입하고 그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설령 작은 존재,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해도 삶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말 굿을 받아야 할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수비 영산 들이다. 다른 신들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부탁할 일이 있어서 청한 존재들이다. 물론 무속의 신들은 항상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부르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그러다가도 일단 부르면 조금 화를 내기는 하지만 늘 용서하며 인간을 도와준다. 하지만 뒷전의 신격들은 그런 힘이 없다. 인간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가 못 된다. 그들은 아무 힘 없는 사회적 약자일 뿐이다. 그런 인물들을 보면서 관중은 동질감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희극은 상대의 열등함을 웃는 것이다. 그렇지만 뒷전은 다르다. 관중은 무당이 그려내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웃지만 웃음의 대상 속 에 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 대부분 굿의 관중들 또한 이 사회의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뒷전은 죽은 자의 한을 풀면서 동시에 산 자를 위로하는 굿이다. 그 연대의 끈끈함 속에서 죽은 수비 영산과 산 수비 영산이 만나는 굿이 바로 뒷전이다(pp. 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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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무속을 통해서 돌아보는 現 한국교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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