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1(금)
 
  • 아빠의 아빠가 됐다 – 조기현(이매진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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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빠가 몸과 정신에 병이 나 이 모든 것을 아들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때의 막막함과 사회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때 꿋꿋하게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자신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럴 땐 차라리 무관심이 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고 또 쉽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당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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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스 검침을 받았다. 집을 둘러보던 검찰원이 물었다. "원래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이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대답했다. 검침원이 숫자를 입력하던 손을 멈추더니 목을 앞으로 쭉 뺐다. "무슨 병이라도?" "그냥 화상이에요. 약간 치매 초기라." "지금 할아버지가 아니라면 연세가?" "이제 쉰일곱.." "아니 어쩌다 벌써?"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밀고 들어왔다. 가족들은 어디 있느냐, 아버지의 과거는 어땠느냐, 당신은 지금 뭘 하느냐.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 계속되더니, 결국 종착지처럼 한 질문에 도착했다.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없죠?" 검침원은 내가 시험에 빠졌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큰 불행이 온다고, 더 큰 고난이 기다린다고, 저주처럼 전도를 했다. 지나친 사명감으로 나를 들들 볶더니 확실한 답을 얻으려는 듯 예수님 믿을 생각이냐고 되물었다. "우리 집에서 어서 나가세요."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맡게 되는 가난의 냄새, 오래되고 낡은 가구, 벽지, 문틀 같은 요소들이 사명감을 높여주나 싶었다. 집을 나가면서 검침원은 재빠르게 가방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던졌다(p. 162) "언제든 도울 수 있으니 연락 주세요!" 난데없이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팸플릿은 소년 소녀 가장이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증오하다가 예수를 만나 구원받았다는, 꼭 나를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 채워져 있었다. 찢어버렸다. 사람들은 꼭 이랬다. 아버지하고 함께한 시간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세상이 다 권유하지만, 긍정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어쩌다 내 상황을 직접 듣거나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더군다나 내 나이 또래에게 질병이나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세상은 질병이나 죽음의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누군가는 나를 '효자'라고 불렀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버리고 버려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병든 부모를 챙기는 일만으로도 용하다는 칭찬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효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병원 앞에서 안 가겠다고 떼쓰면 멱살 잡고 끌고 잤어요." "새벽마다 주절거리는 아버지를 잠재우려고 장롱 문을 발로 꽝 꽝 찼어요." 그렇다고 나는 ‘불효자’라고, '효자'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효자라는 말 앞에 서면 아버지를 돌보는 내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용해졌다. 부모 돌봄은 가(p. 163)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꽁꽁 싸매는 사람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병든 아버지하고 함 께하는 나 같은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말이 딱히 없으니까, 가장 적당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쓸 뿐이었다. "으이구, 밥이라도 많이 먹어." 밥은 먹고 다니냐는 연민과 동정도 많이 겪는 반응이었다. 졸지에 비 맞고 있는 안쓰러운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힘들어도 스스 로 버텨냈다는 어떤 자긍심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짓밟혔다. 연민과 동정은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행동한 내 삶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효자라는 말이나 연민과 동정은 차라리 무관심만 못했다. 한 번은 거기에 반박한답시고 이렇게 말해봤다. "아버지랑 함께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랑 함께하면서 겪은 사건들 때문에 사회과학 책을 피부로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에 관한 고민이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자들하고 맞닿은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들은 누군가는 더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합리화할 필요는 없다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고, 무능한 부모를 원망해야 마땅했으며, 이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해야 했다. 그런 내가 사람들이 허락한 내 모습이었다(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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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을 함부로 단정 짓는 편견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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