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5-17(일)
 
  •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한만청 저자(글), 시그니처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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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만청은 서울대 명예 교수, 前 서울대 병원장이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의대 펠로 3년을 거쳤으며 서울대 의대 교수와 서울대 병원장을 지냈다. 서울대 병원장 재직 당시 ‘ 연구 중심, 환자 중심 병원으로의 개혁’을 이끌며 체계화된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국내 최초로 북미, 일본, 유럽 방사선의학회 명예 회원이 됐으며 한국의 영상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교보문고. 암에 걸린 의사가 자신의 치유기를 적은 책이다. 98년 간암 후 폐로 전이됐지만 완치되었다가 91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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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게 찾아온 악동 같은 친구, 암

병이란 게 무엇인가. 어느 날 문득 내 몸에 찾아와서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가는 손님 같은 존재가 아닌가. 암이라고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암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손님이 아닌 친구 같은 존재다. 다른 병과는 달리 애초에 내 몸 안에서 함께 자라다가 뭔가 좀 못마땅한 구석이 있어 내게 반기를 들고 심통을 부리는 악동 같은 친구 말이다. 암이란 내 몸 안에서 착실히 제 몫을 해내던 세포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변종이 된 것이다. 아직 원인은 찾지 못했지만 DNA 수준에서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어 내 몸 안에서 정상적인 세포의 역할을 포기하고 변해버린 것이 다름 아닌 암이다. 마치 영화 〈헐크〉(p. 37)에서 얌전한 주인공이 분노를 느낄 때마다 녹색 괴물로 변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놈 역시 처음에는 내 몸 안에서 충실히 제 역 할을 하던 존재였다. 그래도 지금은 어떻게든 없애야 할 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암은 적으로 돌려 싸운다고 해서 물러날 존재가 아니다. 애초에 내 몸의 일부였기 때문에 내 몸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내 몸을 잠식해갈 수 있는지 잘 안다. 그런 암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적대시하고 경계하며 아우성치는 건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암이란 존재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무조건 싸워 이기겠다는 마음 보다는 어떻게든 잘 구슬리고 달래서 되돌려 보내야겠다는 그런 마음가짐 말이다(p. 38).

 

암과 맞닥뜨린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암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싸워서 이겨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면하고 거부해서 암이 떨어져 나간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암은 그렇게 호락(p. 40)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너 이놈 왜 왔느냐, 나가 떨어져라" 하며 도망 다니고 숨을 곳을 찾는 사이에 암은 이미 승전고를 울리며 우리 몸을 잠식해 버리고 만다. 단언컨대 두려워해서는 절대 암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하고 싸우기엔 암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하다. 그렇다면 찾아온 암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막연한 두려움 속에 방황만 할 것인가, 거부하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포기하고 말 것인가. 가끔 조언을 구하려는 암 환자들에게 내가 해주는 말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그 맛을 씹으며 살자.' '맛'이라는 말이 너무 과장되었다면 이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 다. '차라리 잘 달래며 끼고 살자.' 암 환자가 기나긴 투병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면 머릿속에 있는 암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암을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닌, 함께 있는 동안 잘 끼고 살아야 할 친구라고 여기라는 말이다. 미국 임상암학회 회장은 200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차학술대회에서 새로운 연구 성과와 앞으로의 치료 전망에 대해 발표를 하면서 "암은 결국 당뇨병, 고혈압, 심장질환 등과 같은 만성질환의 대열로 들어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암이란 존재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난치병(p. 41)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말이 얼마나 무게가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동반자로서의 암의 새로운 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희망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 마음속의 억압과 두려움을 버리고 이렇게 한번 외쳐 보면 어떨까. '너랑 나랑 한번 잘 살아보자, 그러다가 때가 되면 기분 좋게 돌아가라."(p. 42).

 

암에 걸린 당사자 입장에서 볼 때 내가 그 5퍼센트 안에 들어가 완치될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다. 결국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암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와 검사 수치들은 지금까지의 결과론적인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통계가 어떤 개인의 경우를 저울질 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어떤 암은 기수 자체를 명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떤 암이라도 생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는 없다. 생존율이 떨어지고 검사 수치가 나쁘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내가 이 통계의 긍정적인 수치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차라리 통계 자료를 희망의 증거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나는 암 환자에게 누가 어떠한 자료를 제시하더라도 '나는 단 1 퍼센트의 생존자로 계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p. 48)다. 그리고 통계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취한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연구하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수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의지, 그리고 암을 돌려보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p. 49).

 

한번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자, 항간에 떠도는 그 많은 약이 정말 안을 고치는 네 탁월한 효과가 있다면 전 세계적으로 암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가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우리나라에만도 밤을 새워가며 암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수천에 이르는데 말이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사는 방법은 가만히 있는 것밖에 없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대신 가만히 힘을 빼고 있으면 몸이 절로 떠오른다. 나는 암 환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싶다. 살고자 하는 의욕도 좋지만 약 복용에 있어서 만큼은 가만히 있는 게 수다. 약 이야기가 나오거든 차라리 귀를 틀어막아 버려라. 필요할 때는 담당 의사의 지시에 따라 그 효과와 부작용이 정확히 밝혀진 것만 쓰되, 가급적이면 쓰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약이다. 특히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는 암 환자들의 경우에는 말이다(p. 126).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태도

내가 보아온 암 환자들은 대개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환자 한 명이 있었다. 나처럼 의사였던 그는 누가 보아도 그리 낙관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치료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언제 어떻게 상태가 악화될지 몰라 스스로 생활을 조절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본인이 의사였으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죽음에 이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p. 214)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죽음의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평소보다 더 무리해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마치 이런 내게 어찌 죽음이 찾아들겠냐며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있어야 할 시기에 여행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심지어 수술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지방에서 친구가 출마를 하는데 자기가 직접 선거 유세를 도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던 그는 막무가내로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고, 수술은 뒤로 미뤄졌다. 물론 나중에 수술도 받고 치료도 계속했지만, 그는 결국 별다른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는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이게 마지막이라 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은 죽음의 실체를 외면하려 한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눈 가리고 귀를 막고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 치면서 스스로를 세뇌한다. "나는 절대 죽지 않아. 암에 걸린 사람이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을 거야. 난 지금 죽어선 안 되니까." 죽는 순간까지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맞게 되는 죽음을 그저 외면만 하다가 결국엔 미완성인 채로 삶을 끝내고 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보이는 상태는 정신적인 공황이다(p. 21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수감자 중 95퍼센트가 처형당했던 생지옥에서 3년간이 나 죽음을 지켜보면서 자기 자신을 포함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들의 심리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후에 정신과 의사가 된 그가 기술한 죽음의 실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같이 끌려온 사람의 90퍼센트가 30분 내에 가스실에서 죽는다. 포로들은 그것을 보면서 충격과 공포에 빠져드는 1단계에 진입한다. 이들은 극도의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너무 두려워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지내던 포로들도 한 달 정도 지나면 처음과는 다른 2단계 상태로 진입한다. 이때부터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일념만 남을 뿐이다. 일주일을 빵 한 조각으로 연명하며 얇은 천 조각만 몸에 걸친 채 혹한의 날씨에 철로 공사를 하고도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지금껏 배워왔던 의학 지식이 다 거짓투성이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에 전율을 느낀다. 노동력이 있어야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기 때문에 포로들은 아침이면 돌을 주어다 면도를 한다. 면도를 하면 젊어 보이기 때문이다. 병약자를 골라 가스실로 보내는 명단을 작성할 때면 자기 이름을 빼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렇게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며 살아가던 포로들의 마음에 또 다른 변화가 오면서 3단계로 진입한다. 자신의 인간답지 못함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포로들은 점차 정신적인 무감각 상태에 빠져든다. 살겠다는 열망도 없어지고 죽겠다는 생각도 없어지는 정서적인 자멸 상태(p. 216)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죽음을 눈앞에 둔 암 환자들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암 환자들은 닥쳐올 죽음을 무시한 채 맹목적인 낙관론을 펼치는가 하면, 아우슈비츠의 포로들처럼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한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 즉 정신적 공황을 맞는 것이다. 그런 단계에 이른 암 환자들은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도 절대 산 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 앞에 닥친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삶도 죽음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정서적인 자멸 상태에 놓인 아우슈비츠의 포로들처럼 말이다 암과 함께 찾아든 죽음을 앞에 두고 애써 눈 돌려 외면하거나 고통에 겨워 정신적인 공황을 맞는 것, 나는 두 모습 중 어떤 것에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아들여야만 하는 때가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죽음의 형태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죽음 아닌가. 삶에 있어서 단 한 번 찾아오는, 내 삶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죽음 아닌가. 처음 화학 치료를 받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p. 217). "만일 이 화학 치료가 효과가 없다면 한 번쯤 다른 약을 쓰는 2차 화학 치료에 응할 용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듣지 않는다면 그 때는 치료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겠다." 고백하건대 그것은 결코 치료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 위엄 있게 죽을 권리, 내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할 권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있거나, 아니면 그 실체를 모르는 척 외면만 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죽음을 맞기는 싫었다. 나의 죽 음이므로 내가 선택해서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맞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를 놓지 말라

생각해보자. 환자에게 큰 충격이라는 생각에 가족들조차 환자 본인에게 사실을 감춘다. 그러다 우연히 그 사실이 밝혀지면 환자는 현실을 감당해 내기가 어려워 갈팡질팡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되면 지나간 삶을 정리하고, 떠날 자와 남을 자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한정되어 있어 더욱 소중한 남은 날들을 지켜 갈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불현듯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으로써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어찌 보면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 그저 방황과 절망으로 일관하다 부지불식간에 끝나고 마는 거다(p. 218). 그 시간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고 보상해줄 수도 없다. 그뿐인가. 결코 보상받지 못할 그 시간들은 남은 자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게 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모든 암 환자들에게도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암에 걸린 그 순간 나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정확하게 파악 하라.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 명확히 알라." 물론 최선을 다해 암을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이 왔을 때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를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위엄 있게 죽을 권리, 지난 한평생을 정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낼 권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가짐이 생길 때, 다시 말해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를 자신의 손으로 과감히 취할 마음가짐이 들 때, 비로소 암이란 놈이 온전히 끼고 살아갈 수 있는 친구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암에 대한 두려움이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이 사라진다면 그 매개인 암이 두려울 까닭은 더더욱 없다. 나아가 그 마음은 암을 끼고 살아 가는 모든 순간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 결과가 설혹 죽음이라는 형태로 찾아올지라도 그것은 형벌이 아닌 선물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고가 나는 순간에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이것은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p. 219)하는 신의 배려가 아닐까?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어르신들은 저승 갈 때 입고 갈 수의를 미리 지어두곤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입을 옷이기에 더욱 정성을 들여 한 땀 한 땀 손수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대면하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도 그런 여유가 필요하다.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여유만 있다면 남은 시간이 1년이든 10년 혹은 그 이상이 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피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마지막 형태인 죽음. 그러나 죽음 역시 내 삶의 일부이기에 내 손으로 맞아들여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언젠가 찾아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p. 220).

 

에필로그-'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은 내 안에 있다

병상에 있을 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노인은 멕시코 만류에 조각배를 띄우고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살라오'를 만났다고 수군거린다. 살라오란 스페인어로 '최악의 불운'을 뜻한다. 마을 사람들은 끝끝내 고기잡이를 포기하지 않는 노인에게 연민과 조소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만나 싸움을 벌이게 된다. 사흘 동안이나 계속된 그 싸움에서 노인은 승리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청새치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 들고 만다. 노인은 변변한 무기도 하나 없이 상어 떼에 맞서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마침내 노인이 항구로 돌아왔을 때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거대한 뼈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침묵으로써 노인이 승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내 처지가 노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자신의 배보다 큰 청새치와 차례로 맞서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순(p. 288)간 가장 어려운 상어 떼와의 사투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간암 선고를 받고 가장 먼저 마주해야 했던 것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평생 환자를 돌본 의사도 결국 암으로 죽는구나.' 하지만 나는 간암이라는 존재와 대적한 끝에 내 몸에서 병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사이에 더 큰 난관이 나를 덮쳐왔다.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폐로 전이된 것이다. 나는 처음 간암 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암이 폐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흔들렸다. 그렇지만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절대 이겨낼 수 없다.' 의료진과 가족은 최선을 다해 치료에 매달릴 각오가 되어 있는 데, 정작 암에 걸린 당사자인 내가 흔들린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자명했다. 그때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치료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는 상상했던 것 이상의 고통이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고통이 더해갈수록 삶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삶에 대한 희구는 내게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를 불러 일으켰고, 나는 결국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지독한 살라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단 환자 자신이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치료의 주체로 서야 한다.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암을 몰아낼 수 있다는 믿(p. 289)음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감히 말하지만 환자 자신이 믿음과 자 신감을 가지고 치료의 주체로 서지 않는 한 암과 지내는 시간은 혼란과 방황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환자가 치료의 주체로 서지 못하면 어떤 명약이나 치료법으로도 효과를 볼 수 없다. 특히 치료의 진전이 없거나 다른 치료법을 모색해야 할 경우, 환자가 겪게 되는 불안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때 많은 이들이 암 치료에 대한 갖가지 비방에 귀를 열고 마음을 내주게 된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더라도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마저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 하랴 싶어 출처도 분명치 않은 건강식품이나 비방에 몸을 내맡기고 마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환자 스스로 치료의 주체로 온전히 섰을 때만이 암에 대한 갖가지 뜬소문과 그릇된 정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그랬을 때만 현대 의학도 자신이 가진 한계를 넘어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암에 걸리고 나서야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40년 동안이나 의사 노릇을 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암에 걸린(p. 290)뒤 나는 의술이나 치료 행위만으로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바꿔 말하면 의사나 의사의 역할을 하는 제3자가 병 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 인해 끝난다. 내 몸에 생겨난 암이라는 녀석을 잘 끼고 살다가 다독거려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런저런 이야기에 현혹되거나 현대 의학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돌아보자. 나는 과연 내 몸에 찾아온 암과 제대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낼 수 있는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암이라는 존재가 찾아온 이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노인과 바다』에서 마을 사람들은 꼬박 84일 동안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으면서도 끝내 고기잡이를 포기하지 않는 노인을 비웃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 올린다. 비록 청새치(p. 291)는 상어의 공격을 받아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노인은 진정한 승리자였다. 노인은 자신을 믿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킴으로써 불운 한 어부가 아닌 진정한 승리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암 환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암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싸움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남의 말에 현혹되어 불안해하고, 남이 하는 대로 쫓아가려는 나약한 자신을 먼저 다독이자. 그리고 자신을 치료의 주체로 단단하게 세워야 한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자기 의지로 암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자신을 말이다. 그렇게 흔들림 없는 의지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 희망은 어느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그때 암은 잠시 머물렀던 친구처럼 내 몸에서 멀리 떠나갈 것이다(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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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4】 만약 암에 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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