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문태준 저자(글), 마음의숲 · 2022년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