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13(화)
 
  •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류시화 저 | 수오서재 |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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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명의 독자가 읽고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에서 번역된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이은 신작 산문집. 많은 작품을 통해 그만의 인생관을 세상에 알린 작가로 여행자로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들이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실의 힘이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더욱 깊어진 이해에 문체의 매력이 더해져 서문을 읽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커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당하는 기분의 연속이다. 그렇듯이, 그의 글에는 가벼움과 깊이가 공존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말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라」 「나의 지음을 찾아서」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성장기에 읽은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 「웃음은 마지막 눈물 속에 숨어 있었어」 「플랜A는 나의 계획, 플랜B는 신의 계획」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등 글의 힘으로 많은 독자의 삶을 변화시켜 온 작가의 글 42편 수록.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고 있으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유리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진다. 청각과 후각의 예민함을 언어화해 나가는 뛰어남이 느껴진다. 그래서 열심히 읽게 된다. 문장에서 힘을 받고 내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예스24

 

생각해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특히 남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심금을 울렸다. 류시화의 책을 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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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 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p. 19).

 

우리는 상처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여행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여행의 방향을 결정한다. 예술가에게 상처를 입혀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가한 상처가 걸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방식이다. 부서진 크레용도 여전히 색을 가지고 있다. 그 부서진 크레용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p. 36).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 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p. 44).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혼이 뼈와 만나는 저 안쪽에서 어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저마다의 가슴에는 있다(p. 49).

 

힘든 시절이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나 자신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리라. 그러나 돈이든 그 무엇이든, 지금 '절벽 끝'에 몰려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갑자기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 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그 절(p. 57)박함과 간절함이 내게는 날개였다. 날개를 잃었다면 떠올려 보라, 날개가 돋았던 어느 순간을(p. 58).

 

저녁 무렵, 한 젊은 여성이 전철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을 감상하며 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중년 여인이 올라탔다. 여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젊은 여성의 옆 자리 좁은 공간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옆으로 밀어붙이며 들고 있던 짐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걸쳐 놓았다. 그녀가 처한 곤경을 보다 못한 맞은편 남자가 그녀에게, 왜 옆 사람의 무례한 행동에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여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걸지 않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p. 84)에서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작자 미상의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가? 진정하라. 함께하는 여행이 짧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고, 속이고, 모욕 주었는가?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함께하는 여행이 곧 끝날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는가? 기억하라, 우리의 여행이 짧다는 것을. 이 여행이 얼마나 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릴 정거장이 언제 다가올지 그들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p. 85).

 

이런 이야기가 있다. 평생을 경건하고 독실하게 살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다섯 시간씩 신에게 기도했다(p. 96). 하지만 무신론자인 동생과 다르게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아내는 그를 떠났으며, 동업자는 배신했고, 자식들도 연락을 끊었다. 반면에 평생 한 번도 기도한 적 없는 그의 동생은 훌륭한 아내와 충실한 자식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삶을 누렸다. 죽어서 신 앞에 선 경건한 남자는 물었다. "저는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불평하는 타입이 결코 아닙니다. 아내가 떠났을 때도 당신께서 정해 주신 섭리를 믿으며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등을 돌렸을 때도 당신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왜 이 모든 불행한 일이 무신론자인 제 동생에게 일어나지 않고 매일 다섯 시간씩 기도한 저에게 일어난 건가요?" 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대는 재미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매일 다섯 시 간씩 그대의 기도를 듣느라 나도 지겨웠어. 지루하게 살지 말라고 내가 그토록 속삭였는데 듣지 않았어." 묘비명에 '최선을 다했다.'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지루하게 살았다.’가 적히면 안 되지 않겠는가(p. 97).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승이 말했다.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p. 109).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말이 옳다.” 상대방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메시지를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돌아서면 나의 가슴과 의지에 따른다. 받아들임과 흘려보냄, 이 전략을 나는 계속 실천해 나갈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논쟁한다면 그것은 죽은 자와 논쟁하는 것이다. 누구나 머지않아 죽을 것이기에.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대신, 빠르게 동의하고 자신의 시간을 창조적인 일에 몰입하는 것이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관계법이다. 무의미한 논쟁을 끝내고 삶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에서 이기는 내공이 아니라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내공이다.

밀림 속에서 동물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불필요한 의견 충돌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도와 가며 평화롭게 지냈다. 어느 날 호랑이와 당나귀 사이에 사소한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아는 동물은 없지만, 당나귀가 한 말에 호랑이가 짜증을 내며 "풀은 초록색이야!" 하고 외치는 것이 들렸다. 당나귀는 모두가 놀랄 정도로 더 크게 외쳤다. “아니야, 풀은 파란색이야!” 그 후 “초록색!” “아니야, 파란색!,” "초록색이라니까!", “파란색이라니까!” 하고 연거푸 고성이 오갔고 시간이 가도 논쟁은 멈(p. 110)추지 않았다. 둘의 논쟁에 다른 동물들도 덩달아 편이 갈려 ‘초록색!’ ‘파란색!’을 외쳤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밀림의 세계가 파국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동물들은 그들의 왕 사자를 찾아가 판결을 부탁했다. 사자는 당나귀와 호랑이의 주장을 듣고 나서 잠시 심사숙고한 후, 호랑이가 틀렸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판결에 따라 호랑이는 소란을 일으킨 죄로 1년 동안 밀림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다. 떠나기 전에 호랑이는 사자를 찾아가, 풀이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다 아는데 왜 당나귀 편을 들고 자신을 벌했느냐며 하소연했다. 사자가 말했다.

"물론 나도 풀이 초록색인 걸 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너를 벌한 것이다. 논쟁을 하려면 자신보다 지식과 지혜가 높은 자와 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와 무의미하게 논쟁함으로써 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것이 네가 벌을 받는 진짜 이유이다."(p. 111).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며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에게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밤 늦게 전화를 걸어 곧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랭클은 새벽까지 그 여성에게 말을 걸 었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씩 제시했다. 긴 설득 끝에 그녀는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그에게 다짐했다. 나중에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 빅터 프랭클은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단순히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랭클이 의아해하며 설명을 부탁하자, 그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그의 자세가 그녀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게 하고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기차 안에서 만난 그 인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p. 120).

 

일상의 순간에 예술적 생명감을 불어넣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죽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재미있게'라는 단어를 넣으면 더 완벽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재미있게' 죽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좋아하는 것이 세상과의 유쾌한 승부가 된다(p. 132).

 

우리는 시도하고, 시도하다가 생을 마치는 운명이다. 그것이 시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그대가 '이룬 것'을 들고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툴고 거칠더라도 혼을 담아 ‘시도한 것’을 들고 오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삶에서 시도한 것들을 보여 줄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을 시도하고, 불완전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시도하고, 굴레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깨달음을 시도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많이 다른 존재가 아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또 다른 일화가 있다. 그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푸가를 한 곡씩 연주했다. 그런 다음에야 10시간 작곡에 몰두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음악가라고 느끼는 의식이, 악보와 자신을 연결시키는 연주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영웅인 바흐를 존경하며 그날의 작업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기를 비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가락을 유연하게 하고, 일에 발동이 걸리게 하고, 마음이 음악을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였든, 작업실에서 매일 아침 반복하는 그 똑같은 행위가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의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대의 바흐 푸가곡은 무엇인가? 그대가 하는 일이 단순히 취미 생활이 아니라면, 그 일을 그대의 삶 자체로 여긴다면 그대가 매일 하는 의식은 무엇인가? 나(p. 136)의 경우는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내 시집을 열어 내가 쓴 시를 한 편씩 읽는다. 지난 30년 동안 이것을 건너뛴 날이 거의 없다. 산문을 쓰든, 번역일을 하든, 다른 시인들의 시를 모아서든, 나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내 안의 시인에 연결되기 위해. 시인이며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죽을 만큼 그것에 빠져 보라"고 했다. 영혼의 작업에 다만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불꽃을 계속 태우는 것이 삶이다. 생을 불태우려면 자신이 불타는 것을 견뎌야 한다(p. 137).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파머는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조언을 듣거나 바로잡아지거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고, 들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절을 할 때, 우리의 그러한 존중은 그 사람이 고통을 극복하는 중요한 치유 자원이 된다."(p. 144).

 

어려울 때는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우리는 희망하고, 절망하고,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의 날갯짓이다. 물에 얼굴을 박고 넘어져 있다면 당신이 할 일은 얼른 일어나는 일이다. 물속에서 산소를 찾거나, 아가미를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한다. 키가 하늘 높이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p. 150)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찬다. 새끼 기린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땅바닥에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이다니!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나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찬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차이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찬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아기를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 한다. 엄마 기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새끼 기린이 자기 힘으로 달리지 않으면 하이에나와 사자의 먹잇감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을 무조건 걷어차는 것이다. 일어서서 달리는 법 을 배우라고. 당신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적이 몇 번인가? 별로 기억나지 않(p. 151)는다면 각오하는 게 좋다. 조만간 연타로 발길질 당할테니. 당신이라고 해서 삶이 살살 기분 좋게 굴리는 법은 없다. 그러나 걷어차이고 또 걷어차여도 당신은 일어설 힘이 있다. 당신은 기린 이니까. 카뮈는 "눈물 나도록 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세상에 내놓은 그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요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엄마 기린과 같다.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진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채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다(p. 152).

 

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이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비록 이것을 깨닫는 데 생의 반이 걸렸지만.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몸짓을 읽는 연민과 공감의 눈이 필요하다. 홀로된 그녀의 분노와 싸움 역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비록 방법은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그 몸짓이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살아 있어요. 나는 연결되고 싶어요.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에요." 혹시 당신도 고립된 감정의 덫에 걸려 있다면, 다히 카엥기?(p. 165).

 

내가 아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이다.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 주어야 한다.(조셉 캠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시키 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 난다. 플랜A보다 플랜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p. 181).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소설 『열흘 밤의 꿈』 에서 일곱째 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큰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넌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있는 이유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뱃사람을 붙잡고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만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언제 육지에 닿을지도 모른다. 배에는 외국인도 있고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난간에 기대 울고 있는 여자도 있다. 자신이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불안하고 따분해진 나머지 남자는 죽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배의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발이 갑판을 떠나 배와 인연이 끊긴 그 찰나, 그는 갑자기 목숨이 아까워진다. 뛰어내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어져 가는 배 안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문(p. 193)득 다시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더 이상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몸은 바다를 향해 다가가고 검푸른 물에 점점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배일지라도 역시 타고 있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이용하지도 못한 채 한없는 후회와 공포를 안고 검은 파도 속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내가 선택한 이 길, 나에게 손짓하던 그 많은 무화과 중에서 이 열매가 나에게 최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배를 끝까지 타고 가서 목적지를 확인할 것이다. 내일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실함이다. 어차피 나는 죽음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다. 심장이 침묵한 것 같으면 스스로 심장을 깨워 그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p. 194).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p. 218).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앨리스 카하나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이다. 열다섯 살 때 독일군에 의해 가족 전체와 함께 아우 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해 텍사스 주에서 살며 화가로 활동했다. 그녀에게 일생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은 뼈아픈 기억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그녀는 강제로 부모와 분리되었고, 여덟 살 남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다시 트럭에 실려 어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동생이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중의 어딘가에서 다른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나가 어린 동생에게 흔히 하듯이 그녀는 부주의한 동생을(p. 242) 나무라며 소리쳤다.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밀어닥친 혼란과 비극 속에서 모두가 신경이 불안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동생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앨리스 카하나는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없는 그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그 사람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전시관에 가면, 그곳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신발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갈 때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카하나의 남동생도 그곳 가스실에서 숨졌다. 어떤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부분 옳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이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할 수도 있으며, 나(p. 243)아가 다른 인간관계까지 공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p. 244).

 

인간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도 입술의 형태로 그 사람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헤어진 후에도 남는 그 말은?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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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443】 후회 없기 위해서 삶을 돌아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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