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박숙자 저, 푸른역사, 2017년

처음보는 특이한 형식의 책으로 흥미로웠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연결된다. 그런면에서 책은 인간이 만든 참으로 특별한 것이다.

‘독서문화’는 시대를 읽어내는 데 유용한 ‘탐침’이 될 수 있다. 당대에 어떤 책이 어떻게 읽혔는지 알면, 지층의 단면을 보고 지형의 변화를 짚어내듯 시대의 풍경이 손에 잡힌다. 이 책은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청년’들의 ‘책 읽기’에 주목한 독서문화사다. 해방 이후 누구든지 ‘제몫’이 없는 ‘청년’으로 살아가야 했다. 문학이란 키워드로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을 파헤치는 데 골몰한 저자는 이 중 문학과 현실에서 4인을, 시대를 읽는 ‘문화적 탐침’으로 주목했다. 이념 과잉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준’, 혁명의 뒤끝을 앓아야 했던 김승옥 소설 『환상수첩』의 ‘정우’ 그리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란 스테디셀러를 쓴 전혜린과 인간답게 살고 싶었지만 결국 스러진 전태일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시대와 불화하며 책을 통해 치열하게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각각의 시대를 상징한다. 이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고뇌했고, ‘혁명’에 좌절했으며, ‘여성’과 ‘노동’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들이 읽고 던진 물음으로 우리 삶의 지도가 단단해졌다. 우리 역사는 그 청년들에게 빚지고 있다. 우리 역사는 이들이 읽어낸 만큼의 역사다. 이 책은 바로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더 나은 세상을 상상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탄탄하고 명징한 문장으로 치밀하게 담아냈다.-예스24
말랑말랑하되 생생한
1960년대 젊은 작가들은 그 전과 분명히 달랐다. 기성 작가들은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고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고 했다. 그런 거였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문장이 달랐고 감성이 달랐다. 이들은 자신들의 느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좋다고 배운 세대였다. 입말의 말랑말랑함이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단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태백산맥》에 이런 일화가 있다. 허명길이라는 학생이 배가 고파 진달래꽃을 많이 따먹어서 밤중에 배가 깨지게 아파 호되게 고생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생생한 일을 글로 쓰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진달래꽃을 따먹고 설사까지 했던 일이 자랑스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느낌을 구태여 '주욱주욱 쏟아진 물은 진달래물똥'이라는 식으로,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경험을 생생한 표현으로 쓰는 것이 칭찬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평론가 김현이 책 읽기의 달달함을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 다닌다고 쓰는 것과 같은 그런 감각이다. ‘주욱주욱’ 쏟아진 진달래물의 고통이나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찐' 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일이지만 그 개인적 감각을 언어로 전달하는 것은 라디오를 듣다가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의용군에 끌려간 것을 한하였다" 라거나 "여기까지 끌려 오는 사이 맥진이 되어" "지난날이 호기스러웠던 것만큼 말로가 애상적이다"라는 식의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남들도 다(p. 89) 하는 표현이 아닌가. 또 자신이 느낀 감정이 한이나 애상이라는 표현으로 쓰는 게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감정을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 그 감정이 어떻게 느껴졌는지를 세세하게 나누어 서술했다.
이를테면, 윤희중이라는 어떤 남자가 있다고 치자, 이 남자가 무진이라는 고향에 내려가는데 그간의 여러 사정으로 무진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마음은 고향에 대한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다" 고 말이다. 안개가 '적군' 같다는 묘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적군과 아군의 대립이 지닌 무서움을 그대로 경험해본 사람일 것이다. 그 적군을 어두컴컴한 새벽에 발견했다면 그 압박감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고향을 두고 이렇게 묘사하다니, 도대체 고향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하다. 한글세대 소설가들은 주관적 느낌과 기억을 객관적인 이미지 재현에 그대로 투사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만의 감정과 감각을 그대로 옮겨낼 수 있었던 사정을 반영한 말이다. 이 간질간질하고 말랑말랑한 청년들의 언어 속에서 새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빛은 자기 언어를 가진 자들의 몫이었고, 자기 언어를 부릴 수 있는 신세대의 권리였다. 1960년대 청년들은 자신들 만의 언어로 매체를 만들고 문학판을 재편하고자 했다. 그래서 '새로운 창작'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안이한 창작 태도와 족벌주의, 그리고 더러는 관권에 대한 하염없는 동경 등의 순수치 못한 기풍에 젖어 있는 이유와 관련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이어 문학이 어떻게 현실과 관계되어야 하는지 물었다. 이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재차 물었다. 그것은 문학 뒤에 숨지 않겠다는 말인 것처럼 보였다(p. 90).
쌍가락지, 올빼미, 바꿔치기 등등 자유당 시절의 유물들이 되살아나고 빈대표 유령표 기표 감시 따위의 새로운 전통을 착착 기록하면서 6•8공명선거는 전무후무한 막걸리 선심 속에 비틀비틀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처음엔 그것이 축하시위인지 규탄시위인지 분간하기 썩 힘들었다. 이번 선거가 공명선거였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은 후의 일이었고 학생들의 주장엔 옳은 데도 없지 않다는 평가가 따랐으니까. 어쨌든 축하인지 규탄인지 모를 그 학생들의 시위는 쉬 끝나지 않을 기세였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간 채 학교문은 닫혔고 거리는 연일 최루가스와 경찰봉이 휩쓸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청년들도 세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결국 유럽 전역을 휩쓸며 68혁명으로 불렸지만 "극좌학생의 유혈데모"라고 보도됐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6월 8일 6·8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4•19 이후 10년도 안 되었지만 또다시 발생한 부정선거로 저 멀리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만 붙잡혀 왔다. 이름하여 동백림사건. 이 명칭은 정직하지 않았다. '동베를린 학생 납치사건'이라고 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텐데 ‘동백림사건’이라고 하니 살기 바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사건뿐이랴. 4•19와 6•3한일회담, 6•8부정선거에 이어 동백림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가 말의 난장이었다(p. 91).
혜린은 죽기 전 편지 한 장을 남겼다. "장 아제베도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다. '장 아제베도'를 향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라고 쓰면서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라고 간절히 말한다. '장 아제베도'는 프랑수아 모리악의 소설 《테레즈 데케루》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혜린(p. 168)은 자살하기 직전에 《테레즈 데케루》를 다시 인용한다. 테레즈는 답답한 가정을 벗어나서 열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공이었다. 그가 이 작품을 죽기 직전에 붙잡았다는 것은 이 세계에 번역되지 않은 그 무엇을 이 책에서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전에 그가 뮌헨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장 아제베도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장 아제베도'는 번역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덫에 걸린 세대〉라는 글에서 "원을 긋고 달리면서 너는 빠져 나갈 구멍을 찾느냐? 알겠느냐? 네가 달리는 것은 헛일이라는 것을". 혜린은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고 싶다고 했지만 혜린이 발견한 것은 빠져 나갈 수 없는 '쥐덫'뿐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까지 독자들은 혜린을 잊지 않았다. 혜린이 남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1970년대까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말 자체가 역설적이었다. 번역되지 못한 말, 말해지지 못한 말이 있다는 사실이 그 어떤 메시지 보다 강력했다. 각자의 내면 안에 번역되지 못한 언어가 있다는 짐작은 수많은 청년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혜린은 스스로의 삶을 번역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남겼다. 독자들은 혜린이 하고자 한 말에 응답했다. 아마도 혜린이 꿈꾸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p. 169).
더 리더
책을 읽는 것은 '나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나는 일인 동시에 '타인'을 경유해서 내가 속한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는 나와 다른 나, 타인 너머의 타인, 그 있음직한 세계의 상상이다. 이 책에서는 해방 이후의 문화사를 다루면서 청년들이 무엇을 읽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보았다. 이 세계 속에서 주목한 청년은 모두 4 명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가가 무엇이고 국민이 누구인지 생각했던 '전후세대'의 청년, 1960년대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경험한 한글세대 대학생, 그리고 해방 이후의 삶 속에서 차별과 배제를 겪어낸 ‘여성들’, 마지막으로 가난한 삶 속에서 소외를 경험했던 노동하는 '소년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국가와 언어, 성별과 노동의 한복판에서 벌거벗은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서 살고 싶었던 삶을 꿈꾸면서 책을 붙잡았다(p. 236).
그럼에도 이들이 마주한 막다른 골목은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흔적이다. 해방 이후 어느 국가를 선택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국가를 선택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응답했던 (명)준, 그리고 4•19혁명 이후 "가만히 있어라"라는 명령이 야기한 삶의 파괴를 증언하고 있는 정우, 번역되지 못하는 말들 속에서 제 자리를 얻지 못했던 혜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인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되물었던 태일까지, 이들은 국가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떠해야 하며, 여성은 어떻게 다른 언어를 품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누구인지 물었다. 우리는 이들이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한다.
준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을 경험한 전후세대 청년이다. 국가는 그 청년에게 네가 누구인지 물었고, 이곳은 너의 국가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다.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네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말과 말이 서로 들려지고 말해지는 광장, 그런 국가를 기대했다. 그러나 준에게 남은 것은 삶이 지워진 생명뿐이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삶이 지워진 생명이 아니라, 그런 삶의 형식을 거부하는 것, 그래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고민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삶 사이에서 갈등했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청년들은 "무관심 하라", 다시 말해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제 목소리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는 그간의 인간관계를 무참히 지워내는 일이다. 친구 수영은 이를 기꺼이 선택했다. 그래서 감정을 지워내고, 윤리적 판단을 거부하며 생존만을 목표로 삼았다. 정우가 그 얼굴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괴물’의 모습이었다. 정우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한 정우는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그(p. 237)의 죽음은 한 세계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어야 했다. 소설은 그 이후에 쓰이는 인간의 이야기였으면 했다.
혜린은 두 개의 언어를 가진 여성 번역가이다. 그가 번역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와 개념이 이입되는 것, 이를테면 《데미안》이 번역된다는 것은 이미 있는 세계에 앞선 '실존'에 대한 이야기이며 《생의 한가운데》가 번역된다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엔 번역해야 하는 세계는 있는데 번역을 기다리는 세계는 없었다. 그래서 번역이 되지 못한 채 두 개의 언어가 나란히 같이 쓰이기도 했다. 혜린은 마지막 순간에 번역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가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번역될 수 있는 언어였고 세상이었다. 번역된다는 것은 알을 깨고 이 세상 속에 태어나는 일일지도 몰랐다.
태일은 국가와 법을 믿었다. 그래서 법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기대, 노력하는 자에게 내일이 있다는 믿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상식. 그러나 이 당연한 상식과 믿음은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았다. 태일은 '이름'이 불리는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불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아는 모든 나"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수많은 '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었고, 기억해 달라는 외침이었다.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친 그의 절규 이후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묻기 시작했다.
이 청년들이 멈춘 그 지점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 독고준이 몰래 읽고 버젓이 읽으며 내면의 망명국가로 잠수하는 순간, 정우가 가만히 있어라, 라는 말을 끝내 어긴 채 구구절절한 사연을 한 권의 일기로 남긴 순간, 그리고 혜린이 번역되지 않는 언어를 붙들고 번역(p. 238)했으나 그 언어가 이 현실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마지막으로 태일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광장에 자기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깨닫는 순간, 그 순간들이 모여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었다.
그 결과, 홀로 남았던 명준의 광장은 수많은 자들이 같이 손잡는 광장으로, 정우가 되물었던 양심 있는 소설에 대한 물음은 '문학'으로, 혜린이 멈춰 섰던 번역할 수 없는 세계는 읽혀지는 세계로, 태일의 외침은 민중으로서의 인간을 발견하는 광장으로 이어졌다.
준, 정우, 혜린, 태일은 다른 세계를 읽어낸 리더reader 였다. 이들은 국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읽었고, 언어를 가진 자들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엿보았으며, 성차가 삶의 질곡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노동을 문자와 문자의 행간 사이에서 상상했다. 세계의 심연을 엿보았기에 그 중심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자기 신념과 존재를 버리지 않았다. 있어야 할 세계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를 저버리지 않았고, 공동체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미래의 삶을 반납하지 않았다. 이들은 읽은 것은 나의 삶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삶이었고, 인간이 살아갈 만한 세상에 대한 이해였다. 그리고 타인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우리 역사는 그들이 상상한 만큼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리더leader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이 청년들은 제몫을 가지지 못한 벌거 벗은 자들이었으나, 그럼에도 국가와 난민, 혁명과 언어, 여성과 번역 (반역), 노동과 인간이 무엇인지 상상했고, 그 상상이 지금 현재의 삶이 되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더 강렬하게 희망을 품었고, 또 그만큼 정직하게 절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은 자들의 신념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역사 속에서 같이 살아갈 세상을 읽어낸 이들. 그렇게 책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읽어낸 이들, 우리 역(p. 239)사는 이들이 읽어낸 만큼의 역사이다. 오래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그들, 그들은 언제나 리더이다(p. 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