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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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른 결정과 선택
    바른 결정과 선택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많은 결정들을 내리고 살아간다. 어떤 학교를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어디에 집을 구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와 같은 큰 결정들을 내리기도 하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잠을 조금 더 잘 것인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와 같은 작은 결정들을 수도 없이 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결정들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결정들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으나 나중에 그 결정이 큰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주라고 하는 곳으로 이민을 가기로 하는 결정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는 결정일 수 있다. 호주에 와서 사는 곳, 친구, 직업 등 삶의 대부분의 것이 완전히 바꿔 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어떤 결정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한다’ 라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용서함으로 인해 오는 마음의 평안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과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도 영향을 미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정과 선택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 중 좀 더 탁월하고 완벽해지고 싶은 성향으로 인해 오히려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사람들은 때로 배우자나 타인이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이 면밀한 준비와 조사를 다하고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정권은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바른 선택을 연습하지 않으면 늘 후회와 회피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때로는 선택의 결과가 주는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삶의 선택을 내어주어 버린다면 나의 삶은 자유와 자율성을 상실해 버림으로 더 이상 나의 삶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자꾸 선택하고 결정하는 연습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까? 이 질문에 쉬운 답은 없지만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이익 추구’의 관점이 많다.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필자는 상담을 하면서 종종 내담자의 결정을 돕게 되는데 내담자가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된 결과를 가져올 지를 생각하게 할 때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적 차원이 아닌 이성적 차원에서 손익을 생각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 주의의 논리와도 비슷하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더 이윤이 남으면 그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나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이어지면 나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 나는 어떤 불의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수 있다. 나의 이익이 타인의 이익이나 모두의 이익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사재기를 한 사람에게는 유익이고 안심을 가져다 주는 행동이었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어려움을 주게 되었다. 다수를 위한 결정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공리 주의’의 관점을 띄게 된다. 공리주의에서는 다수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수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한 개인의 인권이 다수의 유익을 위해 희생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무조건 문을 닫아야 한 많은 비즈니스 운영자들은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결정의 피해자일 수 있다.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정부는 그런 결정을 내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고 받아들여야 했으며 누군가는 그런 결정의 결과로 ‘자살’을 선택하는 일도 생겼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는 ‘미덕 추구’의 관점이 있다.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이고 사회의 정의에 가깝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인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정의롭고 청렴하고 사랑과 자비와 존중과 배려와 같은 덕목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어버리고 특히, 임시 비자 소지자들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많은 한국인 상인들이 유학생들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 음식이나 비상용품들을 제공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또한 정부도 어려운 시기에 정부 예산을 다른 것에 쓰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돕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있고 그것에 따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작은 개인의 삶의 결정과 큰 사회적 구조안의 결정과 선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하게 모든 결정에는 개인의 가치관 또는 사회적 담론 (social discourse)그리고 그 이면에는 철학적 이슈와 함께 가는 윤리적 부분이 함께 따라간다. 개인 모두가 성인군자처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이 나 뿐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이라면 전체의 유익과 결정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 전체를 건강하도록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 코로나로 인한 중국의 위상이 내려간 부분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중국이 대처한 방법에 대한 윤리적 부분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그들이 내린 결정이 집단 이기 주의의 결정이 아니라 좀 더 큰 사회의 공익을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복지를 존중하는 윤리적 결정을 할 수 있었다면 전 세계는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나비 효과’처럼 작은 결정이 큰 효과를 가져오는 결정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내리는 결정을 나의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큰 관점으로 바라보고 살펴봄으로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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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9
  • 늘 똑같은 김장환 목사의 움직임
    기사로 나왔기에 올려 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활동이 지난해 대국민 사과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포착됐다. 김씨가 지난 14일 수행비서 1명과 함께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국에서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를 비공개로 만났다고 15일 <국민일보>가 보도했다. 김씨는 이날 약 3시간 가량 김 목사와 대화를 한 뒤 “김 목사께서 인생의 지혜를 말씀해주셨다. 정기적으로 만나 뵙고 좋은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한다. 많은 위로를 받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김장환 목사의 움직임이 언제 나오나 했다. 군사정권 시절 맨날 교회에서 "정치와 교회는 분리해야된다. 아니다 구별이 맞다"는 흰소리를 그리하며 대놓고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장군을 위해 기도하던 목사들... 노욕이다. 그만큼 누리고 혜택받고 그랬으면 됐지... 아직도 정치에 깊숙히 관계를 맺고 있다. 겉으로는 신앙상담이요 전도라고 하면서 뒤로는 면죄부를 주는 이런 짓거리를 수십년째 해오고 있다. 정신 차리라... 아합의 때에 이세벨의 편에 섰던 자들이 850명이나 있었다. 떵떵거리며 어깨 힘주고 지들끼리 신탁이 어떠니, 계시가 어떠니 떠들고 다녔을거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의 의하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가 7,000 명이 있었다. 별 수 없다. 엘리야가 나서야 전쟁이 시작된다. 야훼의 존재를 드러낼 선지자가 나서야 판이 정리된다. 김장환의 언행은 면죄부 주기며 한국교회에 윤씨 부부를 새끈한 후보로 꽃단장 해주는 작업이다. 온갖 귀신과 점술과 법사들에 둘러싸인 자가 이제는 목사에게 상담까지 받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잘 돌아보아 대통령이 되고 싶은거지... 지난 날을 회개하며 뒤로 물러설 일은 1도 없다. 어쩜 그리도 정확하게 예상대로 등장하시어 신앙이라는 미백효과로 힘을 보태 주시는지... 원로들이시여 사리분별이 안되면 기도라도 깊이 하셔야죠... 이 세상을 지옥을 만들어 놓고 본인들은 천국에 가시면 행복 하시겠어요? 총신대학교 졸업총신대학신학대학원 졸업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졸업University of Birmingham, England에서 Interreligious Relations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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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6
  •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79개의 다중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지금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칭함)를 가진 한 여성이 나왔다. 그 여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16세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그 고통으로 생긴 장애로 인해 아주 오래 동안 치료를 받게 되었고 지금은 그녀의 많은 인격들이 상당히 많이 통합 되어서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자신의 삶을 글로 써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너무나도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그것을 기억한 채로는 정상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 그 기억과 단절된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서 삶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는 모습이 생긴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처한 삶의 위기를 극복하게 도와줄 수 있으나 너무나 다르고 다양한 인격들이 자아 속에 존재하면서 그 존재간의 단절과 갈등으로 인해 서로를 기억하지 못해 삶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최근 내면 가족체계 이론(IFS : Internal Family System) 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에도 알려져서 관련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이 이론을 연구한 David C. Schwartz박사는 비단, 다중 인격 장애 즉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진 사람만 다양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다양한 인격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부분(Part)’이라고 지칭한다. 그 다양한 인격은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한 사람의 내면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다중 인격 장애는 그 인격체들 사이에 극심한 단절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고 그래서 인격끼리 서로 소통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박사님의 말이 어쩌면 맞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왜냐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덜 병리적이고, 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가진 사람도 아주 특별하게 이상하게 보기 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는 다양한 인격의 모습이 그 사람에게는 더 도드라지고 더 단절되고 더 고통을 준다고 할 때 그러한 정신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더 열리게 된다. 또한 이런 개념은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과 임상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자아 속에 있는 다양한 다른 자아의 모습을 다른 개념으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참 자아와 거짓 자아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참 자아(있는 모습 그대로의 진짜인 내 모습)로 살아야 하는데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는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의 많은 모습이 거짓 자아의 모습일 때가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자아가 한 가지 인격이 아니고 여러 인격이 어우러져서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심리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는 자아를 원초아, 자아, 초자아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원초아(id)는 욕망과 충동에 의해서 조정되는 자아의 부분, 초자아(superego)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아의 부분이고 자아(ego)는 그 중간에서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 뿐 아니라 교류 분석에서는 한 사람의 자아 속에는 부모자아, 성인 자아, 아동 자아가 있는데 부모의 자아에는 비판적인 부모자아와 양육적인 부모자아가 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인 자아가 있다면 자유로운 아동 자아와 적응된 아동 자아도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벌써 자아 안에 다섯가지 다른 모습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할 때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또는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때로 그 사람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평소에 너무나도 자상하고 좋았던 남편이 화를 낼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좋은 사람이라고만 늘 생각을 했을 때 그에게 ‘화’ 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화를 낸 남편은 남편의 참 자아의 모습이 아니라 거절감과 부당함에 속상함을 나타내는 남편 안에 있는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훨씬 더 잘 이해 하게 된다. 언젠가 자존감이 낮고 대인관계에서 힘들어하는 한 내담자에게 종이에 한 사람의 형태를 그린 다음 그 사람 안에 있는 아주 많은 다양한 장점들과 좋은 인격적 모습들을 그려 놓은 다음에 “당신은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관계하기를 어려워하는데 실제로 그런 당신의 모습은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많은 다른 좋은 점과 함께 당신에게 존재하는 한 부분일 뿐이네요”라고 말해주었다. 내담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지금까지 자신이 사회적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그 부분이 확대되어 자신의 다른 긍적적인 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 안에 여러 부분의 자아가 있다’는 개념은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수용하게 해주며, 한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프레임을 씌워서 그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을 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다. 내면 가족 체계 이론에서는 크게 자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한 자아는 ‘참 자아’의 모습이다. 이 자아는 다른 모든 부분의 자아를 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리더십을 가지고 소통하며 체계를 이루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순기능을 하는 자아다. 내면아이치료로 잘 알려진 존 브레드 쇼는 어린 아이들은 이런 순기능을 하는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음으로 그 자아의 모습이 손상된다고 보아서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로 인해 머물러 있는 내면의 아이를 잘 돌봐 줌으로 다시 성장하고 성숙한 어른으로 발달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참 자아의 모습 외에 내면 가족 체계 이론에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자아’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잘 기능하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모양으로 채찍질하며 이끌어 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소방관의 역할을 하는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자아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 불이 난 것처럼 많이 힘들 때 빨리 그 불을 끄는 역할을 해주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것은 중독과 같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유배자의 역할’이 있다. 유배자의 모습을 띤 자아의 부분은 상처받고 유약한 자아의 부분이라 보호자나 소방관에 의해서 조정되고 겉으로는 잘 나타내 보이지 않게 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이런 자아의 부분들이 한 사람이 생존해가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지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일을 통해 참 자아가 모두를 통합하여 스스로가 자신에게 바람직한 삶의 선택과 방법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부분들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보호자의 파트만 과도하게 역할을 하여 늘 자신을 쉬지 못하고 엄격하게 다루고 완벽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자아의 부분은 내면 깊은 곳에 숨겨놓은 채 말이다. 우리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부분들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안에서 참자아가 연약한 나의 부분을 돌볼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생겨날 수 있게 된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부분만 나의 부분인 것처럼 살지 말고 나의 모든 부분을 건강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삶의 지혜와 방법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잊지 말자.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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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6
  • 가정의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결혼을 했던 한 부부가 호주에 이사를 온 후에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은 인도에서처럼 아내가 자신에게 복종하고 가정만을 지키며 남편이 어떤 일을 해도 허용해 주어야 한다고 가부장적인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는 반면 여성인 아내는 호주에 온 이후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이 부당하며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혼한 후 남성은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내를 구해 왔는데 그 아내 역시 호주에 와서는 전처가 하던 모든 과정을 밟게 되어 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한 아이는 한국에 있는 동안 착한 아이로 엄마의 교육열에 맞추어서 공부를 잘 하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착하게 지내왔는데 호주에 와서 막상 보니 자신의 주위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하라고 하는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자신의 삶을 보며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한 여성은 최근에 큰 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 병이 생기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지쳐 있었으며 어렵고 힘들게 살았는지 알 지 못했다. 자신은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 주위에 돌봐야 하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돌봐 주며 기쁨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힘들다고 말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 분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여겼기에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순응하며 살았던 것이다. 위의 이야기들은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환경이나 시스템 안에서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다가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시스템 속에 오래 들어가 있을 때 그 시스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시스템이 나의 삶의 일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가족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살면서 ‘눈이 멀어 버린다 ‘ 최근, 인기 많은 TV 드라마인 ‘갯마을, 차차차’ 프로그램에 보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딸을 둔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살아왔는데 치과의사가 된 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데 부모를 일찍 보낸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아주 싫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자녀가 아픈 것은 가엾게 보이지만 타인의 자녀가 아픈 것은 결함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가족으로 인해서 힘들어 한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끌려 다니고 때로 그 가족으로 인해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상담을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부모들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정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자녀들의 자율성을 빼앗고 그 자녀들을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만 살도록 요구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는 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좋은 명분 속에 자녀들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고 부모가 그렇게 원하는 성공적인 삶에서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데도 아랑 곳 않는다. 인형 치료학회의 학회장인 최광현 교수는 “아들이 성공적으로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를 이겨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무슨 이야기일까?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늘이고 전 세상이라고 볼 때 그 부모가 세워 놓은 가정이라고 하는 시스템은 자녀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시스템이요 너무나 강력한 세상이다. 그 안에서 순응하기만 하고 자란 자녀는 강한 부모님의 통제로 인해 이 세상에 나갈 준비를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성장하고 성인이 된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은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구성원이 아니라 나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자라난 아이가 부모님의 대를 잇지 못한다 거나 부모님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해서 열등감과 무기력감 가운데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경험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녀를 자유롭게 내어 주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불안감 때문이다. 알랑드 보통이 말한 ‘사회적 불안’을 많이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를 개인의 가치로 여기는 속물근성의 특성을 가지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또는 유지해야 하는 지위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을 자녀에게 투사함으로 자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과 가치를 아이들에게 요구함으로 똑같은 불안감을 자녀에게 주고 자녀도 그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세대 전수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나의 가정의 시스템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라 생각된다. ‘내가 잘하고 만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내가 속해 있는 시스템을 무조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나의 가정은 건강한 지,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없는 지, 나는 나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며 자녀들에게 나의 가치와 신념을 주입시키고 있진 않은 지, 무엇 보다도 내가 가진 불안감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 지’를 살펴보고 부모의 생각이나 관점이 아닌 아이의 재능과 아이의 관심을 찾아가도록 도움으로 자녀가 부모를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익숙하게 살아오던 시스템을 고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떠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익숙한 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모습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건강하지 못한 가정의 시스템은 결국, 나를 외롭게 만들고 관계의 어려움을 가져오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고 시스템의 리더인 부모들은 자녀를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힘들어서 시스템을 멀리 떠나가도록 만들지 말고 자신들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새가 새 둥지를 떠나고 나서 우는 부모가 아니라 안전하고 건강한 둥지를 지금이라도 자녀를 위해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부모, 자녀가 아니라 나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란다. Rev Dr. HUN KIM (김 훈)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호주기독교대학RTO Provider: 40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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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감사의 능력
    음식을 만들거나 먹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소금의 중요성이다. 음식을 만들 때 먼저 메뉴를 정한 다음 여기에 들어갈 재료들을 신선하고 좋은 것으로 준비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이 없다든지 무엇인가 2% 부족하다고 느낄 때 적당하게 소금으로 간을 하게 되면 갑자기 음식 맛이 살아난다. 결국 음식 맛은 소금이 결정하는 것이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주는 최고의 조미료이자 해결책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거나 풀리지 않을 때 그것을 해결해 주는 키가 무엇이냐? 감사다. 감사는 막힌 것을 뚫어주고,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들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다음은 심리학자이며 크리스챤 작가인 단 베이커(Don Baker)가 쓴 ‘탱큐 테라피’라는 글이다. ‘탱큐 테라피’는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감사요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나는 최근 나의 사무실 스태프들의 월급을 지불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내 아내는 최근 오른쪽 팔꿈치에 혹이 만져져서 MRI 사진을 찍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내 아내 캐롤은 또한 호르몬 불균형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직 효율적인 치료책을 찾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최근 집안 정리나 청소할 시간이 없어서 언제 시간을 내서 산만한 집안 살림을 정리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최근 미국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너무 맘에 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물론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씀을 생각할 때 마다 염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제 자신이 더욱 염려가 됩니다. 저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제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증세가 어떻게 내 관절을 아프게 하는지, 어떻게 내 침을 마르게 하는지, 어떻게 내 손바닥에 땀을 나게 하는지, 어떻게 호흡곤란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소화불량과 위경련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내 아내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완벽하고 강력한 치료책을 찾아냈습니다. 이 치료제의 효율성은 거의 기적적인 것입니다. 저와 저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치료제의 효율성을 임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치료제는 식전이나 식후에 복용하시면 됩니다. 호흡곤란을 느낄 때,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때, 수시로 복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과 함께 드실 수도 있고, 물 없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처방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치료제는 절대로 부작용이 없고 안전합니다. 더욱이 이 치료제는 무료입니다. 저는 이 치료책을 일컬어 ‘탱큐 테라피’(thank-you therapy)라고 부릅니다.” 내일은 추수감사절이다. 기독교에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하면 절기를 만들어서 지키도록 했을까?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고 여기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감사가 있는 감사절을 지키자. 감사함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은혜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감사는 모든 것을 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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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실시간 기고 기사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0 - 죽음의 의미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0 - 죽음의 의미 일반적으로 죽음은 객관적으로 모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회복될 수 없는 정지를 의미하며, 이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일 때 인정된다. 그러나 죽음에는 이러한 객관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각 개인마다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인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요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김명숙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더욱 고귀하며, 생명은 죽음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존엄하다. 누구든지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의 삶의 뜻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삶의 목적을 주체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따라서 죽음을 염두에 둔 생명의 각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삶에 다가설 수 있게 만든다. 곧 죽음에 대해 가지는 개인의 인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문제로 정신적 생활의 질과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죽음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는 다르게 다양한 배경과 맥락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개인마다 의미를 달리하여 구성된 죽음에 대해서 이이정은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인적이면서도 다차원적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미로서의 죽음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는 존재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미조차도 유한으로 제한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의미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티븐 케이브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역사도 문화도 그리고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죽음에 맞서는 이야기들의 관점은 인간의 문명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미요법의 창시자 프랭클은 자신이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분명한 사람은 히틀러의 수용소 안에서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다르고, 죽음에 응대하는 모습도 분명히 달랐다고 이야기 한다. 곧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갔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 섰을 때에라도 인생을 의미를 갖고 목적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죽음조차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곧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 그 너머를 생각하며 더욱 인생을 아름답게 살 것이라는 것이다. 2. 소멸로서의 죽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곧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생각한다. 곧 캐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의식 혹은 자기다움의 완전한 정지라고 믿으며, 죽음은 무(無)에로의 소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이정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성적 논리로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증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다. 곧 이러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 오관을 통한 체험에 기초를 둔 육체적 물질적 존재로만 전제하고,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만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육체적 물리적 기능의 정지로만 보기 때문에 인간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아의 소멸, 곧 무의 상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멸로서의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 육체, 재산과 명예, 그리고 지식까지 인생을 살면서 땀 흘려 추구했던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캐이건은 그의 책 에서 소멸로서의 죽음의 특징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실제적으로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다. 죽음은 이승과의 단절이며 이승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은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쌓은 모든 경험을 상실하게 한다. 한 사람이 학문적 연구나 배움이 아닌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체득한 모든 지혜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쌓아놓은 명예나 지식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셋째, 죽음으로써 그 동안 쌓은 모든 물질적 재산을 상실하게 된다. 한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넷째, 모든 꿈과의 단절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꿈을 상실한 삶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죽음은 한 사람이 가졌던 모든 꿈을 다 상실하게 한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곧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꿈을 꾸거나 그것을 실현할 기회조차도 상실한 것이다. 다섯 째, 모든 시간을 상실하여 원래 인간이 가진 유한한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출생과 함께 유한한 시간을 부여 받아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그 동안 누렸던 모든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사람의 오관에만 의지하여 이 땅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제를 삼을 때에 모든 것의 끝이며,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3. 변화로서의 죽음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소멸로서의 죽음관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도 내가 계속 존재할 것이란 믿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장결철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로서의 죽음이란 이 세상과는 다른 형태의 존재로의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배경에는 사람의 존재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전제하는 것이다. 곧 육체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더라도 영혼은 다른 존재로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견해이다. 2015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약 93퍼센트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고귀한 정신 작용은 물리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물학적인 원리로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믿는다. 이것에 대해서 캐이브는 “미국인들 71%가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영국과 독일의 사람들은 60%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우는 거의 100%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변화로의 죽음이라는 견해를 가지며,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 환생 등 죽은 후에도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다음 단계의 삶을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은 다음 단계의 삶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병원 사역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환자가 어느 날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은 며칠 후면 주님께서 기다리시고 준비해 두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나의 죽음 후에도 슬퍼하지 말고 가족 간에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잘 믿으면 살 것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직접 경험 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구주 되신 주님을 만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우리 사람에게는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함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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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8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9 - 우리나라의 죽음학의 역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9 - 우리나라의 죽음학의 역사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관한 연구나 사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학교에서의 죽음학에 대한 교육적 상황은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죽음의 인식에 관한 상황은 어떤가?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고, 학문적으로도 이제 막 초기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죽음이나 죽음학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는 대부분 말기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되거나 급증하는 자살 문제와 호스피스 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의학적 연구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문학과 철학 분야의 연구가 그 다음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상황에 대해서 김선숙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죽음학 연구의 시초는 1978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죽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죽음에 대한 심리적 이해>를 출간한 김인자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후 1991년 김옥라에 의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가 결성되어 죽음에 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해 지금까지 죽음에 대한 교육,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어서 1992년에 서혜경의 노인을 위한 죽음 준비의 건강교육 프로그램인 “죽음을 준비하는 건강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제언”이 있었고, 1998년 정경숙의 ”발달수준에 따른 아동의 죽음에 대한 개념과 죽음준비교육에 과한 연구“를 통해서 아동의 죽음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다.” 1978년이면 그렇게 늦지 않은 시기에 죽음학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연구가 이어졌다면 매우 고무적인 발전이 이 분야에서 있었을 것이며, 아울러 사회 곳곳에 죽음과 관련된 연구나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죽음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1997년 한림대 철학과의 오진탁교수가 당시부터 급속히 늘어나고 있던 자살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죽음교육과 생사교육에 근거한 자살예방교육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시작함으로 다시 죽음에 대한 담론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2004년에는 ‘생사학연구센터’가 개설되어 죽음학·생사학에 기초한 자살예방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곽혜원은 “이처럼 척박한 땅에서 2005년에야 비로소 철학, 종교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죽음에 대한 학계와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고자 ‘한국죽음학회’(회장: 최준식교수)가 창립되었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1978년 이후 우리나라 죽음학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최준식교수와 김균진교수 비롯한 죽음학의 선각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원종순의 “죽음을 앞둔 암환자의 돌봄에 관한 연구”(이화여대대학원, 1994), 정영의 “회고 요법이 노인의 죽음 불안, 자아 통합과 생활 만족에 미치는 효과”(카톨릭대대학원, 1994), 한미정의 “대처방식 내외 통제성 자아존중감에 따른 죽음 불안의 발달적 고찰”(서울여대대학원, 2001), 정경숙의 “아동의 보존개념 발달개념 수준과 죽음에 대한 정서 경험 수준이 죽음의 개념과 발달에 미치는 효과”(계명대학교대학원, 2001), 오미나의 “재가 노인과 시설 노인의 자아 존중감 죽음 불안 및 우울에 관한 연구”(영남대학교대학원, 2003) 등을 통해서 죽음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죽음 자체에 대한 깊은 철학적·심리학적·상담학적·신학적 연구가 매우 미흡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죽음을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노인들을 위한 죽음 준비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연구와 함께 자살이나 호스피스와 같은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내용이 주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근자에 외국의 유명한 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연구를 실은 책이 소개되어 우리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대표적으로 셸리 캐이건(Shelly Kagan)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2013) 라는 책과 스티븐 케이브(Stephen Cave)의 <불멸에 관하여>(2015)를 들 수 있다. 특히 셸리 캐이건 교수의 책은 그가 예일대학에서 17년간 가장 인기 있는 강의를 했다는 부연 설명에 힘을 입어 출판과 함께 여러 언론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책들은 현대 과학 문명에 깊이 뿌리를 내린 유물론과 자연주의에 기초를 둔 신기계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서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죽음을 멀리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죽음 관을 갖도록 하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학에 관한 연구가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과학주의적이며 유물론적 사고에 뿌리를 내린 사조까지 소개됨으로 현대인들은 죽음을 더욱 터부시 하는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10연 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죽음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긍정적 의견은 드디어 사람들이 죽음을 좀 더 실제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곧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려는 철학을 가진 의사, 철학자, 종교인, 고인의 마지막 유품을 정리해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 등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경험한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사람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바른 직면을 더욱 도외시하게 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오직 이 땅에서의 성공과 육체만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삶을 살도록 하는 문화가 넘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도 하루 빨리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를 연구하는 바른 죽음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곧 죽음학에 대한 다학제적이며, 성경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짐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명에 대한 사랑 안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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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5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8 -- 죽음학의 역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8 -- 죽음학의 역사 ( 언어적으로 죽음학을 의미하는 ‘thanatology’의 접두어 ‘thanato-’는 고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인화한 신 ‘thanatos’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죽음학은 1908년 노벨생물 화학상 공동 수상자 중 한 사람인 러시아의 생물학자 메치니코프가 1903년 출간한 <인간의 본성>에 ‘죽음학’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7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을 지적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시대를 향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질병이나 고통 그리고 죽음과에 관한 문제가 감추고 멀리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인간의 삶과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늘 인식 되고, 또한 교육을 통해 준비되어야 하며, 아울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중요한 삶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삶을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인간의 유한함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영원과 부활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학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줄 것이다. 이 항에서는 죽음학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외국의 죽음학 역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 우리나라보다 죽음에 관한 연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도 우리나라보다 죽음학이 훨씬 발전해 있는 상황이다. 이 점에 대해서 대만 학자인 부위훈(傅偉勳, 푸웨이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최근 30년간 미국과 유럽 등에서 죽음학에 과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 의학 지식의 발달과 보급, 의약 설비의 완비, 경제생활의 점진적 개선, 생활의 질의 끊임없는 상승과 요구, 대중 매체의 보편화, 오락산업의 발달, 사회 고령화 현상 등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현재 우리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독일, 일본, 대만 등의 죽음과 관련된 학문적 연구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죽음학(thanatology)의 태동은 대체적으로 1956년 미국의 헤르만 파이펠(H. Feifel)이 새로운 관점에서 죽음을 보는 운동과 다학문적 접근으로 죽음을 연구할 것을 제창한 <죽음의 의미, The Meaning of Death>를 통해서 죽음 현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부터로 본다. 이에 대해 임기운 등은 “파이펠은 죽음 연구와 교육을 정당화 한 최초의 책을 저술한 학자로 인정되는데, 그 이유는 죽음과 그 과정의 연구가 과학적 탐구, 특히 행동과학자들에게 타당하고 필요한 것임을 최초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63년 로버트 풀턴(R. Fulton)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정규 강좌를 개설하면서 미국에서 죽음학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죽음학의 이어지는 발전에 대해서 곽혜원은 자신의 책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1966년에는 죽음학의 실천적 과제를 다루는 죽음 교육 분야의 최초 뉴스레터라고 할 수 있는 <오메가>가 창간됨으로써 죽음 교육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69년에는 미국 전역의 많은 대학교가 죽음교육 과정을 개설하는 한편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학에 관심을 두는 중요한 계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그녀는 죽음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이끌어냄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죽음 인식 운동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70년대에는 미국의 20여개 대학에서 죽음 관련 교과과정이나 학과가 개설되었고, 죽음교육이 학교 강의실 안팎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둘째, 독일은 몇 백 년에 걸친 풍부한 죽음교육의 전통을 지닌 국가로써 학교 정규교육 이외에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 실시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준비교육’은 이 수업 중에 다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독일인으로써 일본 죽음학의 기틀을 세운 데켄(Deeken.)은 “독일에서는 1980년대 이후 죽음 교육 프로그램이 학교 교과과정에 정식으로 포함되었으며, 모든 학교에서 실시되는 종교 수업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4학년까지 13년 동안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 맞추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각적으로 다루는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를 비롯한 여러 행사와 교육을 통해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라면 누구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죽음을 맞이할 준비에 대해 배우면서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고 소개한다. 셋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죽음학과 관련해 상당히 앞서 가고 있다. 사실 일본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서 죽음학·생사학 연구의 활성화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선각자, 곧 독일에서 귀화한 세계적 죽음학자로서 일본 죽음학의 대부라고 하는 알폰스 데켄 교수에 의해 죽음학이 괄목할 만큼 발전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최준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데켄 교수는 1975년 일본 조치 대학에 ‘죽음의 철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한 후 1982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세미나’와 1983년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인들에게 죽음학을 소개하고 죽음교육이 일본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우리 정부의 장학금을 통해 일본에 가서 죽음학 연수를 한 김옥라는 일본의 죽음학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에서는 1999년 웰다잉 교육을 보급하기 위한 ‘죽음교육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리고 있으며, 2004년부터 학교 교육에 죽음교육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죽음교육이 전국의 학교 기관과 다양한 평생교육 시설에서 30년 넘게 시행되고 있다.” 넷째, 대만은 우리와 같은 체면문화와 유교가 중심이 된 국가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담론과 연구를 터부시하였기 때문에 죽음학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까지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 대만에서 죽음학에 대한 결정적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1999년 약 1,500명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기운 등이 연구한 것처럼 “대만은 1999년 대지진 후에 정부가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와 각종 세미나 정도에 머물던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중고등학교까지 확대하여 실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에서 죽음학이 태동된 시기는 1999년 대지진보다 앞선 1993년으로 대만 학자들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미국 템플대학교 종교과 교수인 푸웨이쉰(한국식, 부위훈) 교수가 자신의 10년간의 죽음 관련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생명의 존엄과 사망의 존엄>이란 출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전병술은 “부위훈은 동양 전통 철학(특히 중국 전통의 생명학)의 기초 위에 서양의 죽음학을 결합해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생사학을 제창하였며, 이 책의 출간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죽음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섯째, 미국이나 독일 이외에 근대적 호스피스가 탄생한 영국은 물론 캐나다,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서도 죽음학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그 실천인 죽음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서구 사회의 많은 대학이 죽음학을 필수과목으로 책정하고 있으며, 죽음에 관한 많은 연구 문헌이 발행되고 있다. 최근 서구 신학계도 이러한 일반 사회의 흐름에 부응하여 비교적 적극적으로 죽음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2-10-31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7 --- 의료와 죽음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7 -- 의료와 죽음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죽음을 막아내는 것이 의사들의 최우선 과제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서 현대의 발달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현대는 의료 기술의 현격한 발달로 인해 건강과 100세 이상의 장수가 가능한 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윤영호가 지적하는 것처럼 의학과 과학에 집중하는 의료만으로는 신체적·의료적 의미를 넘어서 죽음이 갖는 정서적·영적·사회적 의미에 역점을 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서 현대는 과거 자연적으로 맞이하던 임종이 점점 의료화 되고 있으며, 지금은 과거에 비해 죽음이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곧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젊음과 건강을 바탕으로 성장을 이룩하는 데만 치열하게 매달리고 소원대로 물질적인 부의 확대를 이루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삶의 외형적 측면은 놀랍도록 확장되었으나 필연적으로 그 뒤에 따라오는 노화나 죽음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삶을 즐기려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즐기고 누리는 삶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은 언제나 생명과 동행하는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출생과 삶의 질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처럼 죽음의 준비와 그 질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중요한 죽음을 잘 맞이하고,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분명하게 갖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해서 전요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과 함께 죽음 앞에 던져진 단독자이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다. 다만 우리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서 그 날과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뿐,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은 다 죽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체험해야 될 것 가운데 마지막 것으로써 모든 인간이 두려움과 호기심과 불안을 가지고 예외 없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참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궁극적이고 가장 강력하고도 위협적이며 고통스러운 불안인 것이다” 생명을 가진 우리 모두는 현재 삶을 살고 있고 언젠가 때가 되면 죽는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충분하면서도 분명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이유를 전요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을 체험한 자는 이미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관찰하거나 단순히 주검을 보는 것으로써 이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모든 반사활동이 소실되어 유기체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기능이 영구적으로 정지된 것을 말한다. 곧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황기석은 “죽음정의연구위원회는 심장 기능 및 호흡 기능과 뇌 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이라고 정의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사회적이면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죽음을 본다면 죽음이라는 현상보다는 그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 심리, 종교, 의학 분야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곧 이이정이 말하는 것처럼 “각 사람의 인격과 삶이 독특한 것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산 사람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음에 관한 제 이론들을 종합하여 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죽음, 심리적 죽음, 의학적 죽음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적 죽음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이일구는 생물학적 생명 현상과 함께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 현상이란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내의 원형질이 쉬지 않고 일으키는 연속적인 화학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죽음이란,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원형질이 쉬지 않고 일으키는 연속적인 화학 변화의 중단, 곧 생물체가 활동을 멈춘 상태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과학적 상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유기체는 생명의 시작부터 각종 조직과 세포로 분리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죽음에 이르러 세포내의 연속적인 화학변화는 줄어든다. 한 사람의 신체의 세포는 그 누구도 한 순간에 총체적으로 죽는 일이 없고, 각 장기나 조직의 구조적인 특징이나 특성에 따라서 상이한 속도로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세포 하나가 완전히 활동을 멈추는 순간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완결된다. 이처럼 생물학적 죽음이란 이을상이 말하는 것처럼 “유기체인 한 생명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기능의 전체적이고 영구적인 정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죽었다’고 정의할 경우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이런 생물학적이며 임상적인 신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곧 생물학에서 말하는 죽음의 정의와 인식에 대해서 “세포 전체가 건강한 상태로부터 생명 현상의 정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삶은 생물학적으로만 보아도 그 시작에서부터 죽음이 늘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세포가 생물학적으로 그 활동을 중지하는 죽음이 일어나면 가장 기본적으로 의료진을 통해 몇 가지 의학적 검사(심전도 검사, 의사에 의한 동공의 움직임 확인 등)가 이루어진다. 그 후에 의사를 통해서 가족들과 증인(의료인이나 간병인)이 보는 앞에서 법적으로 죽음이 선포되고, 사망증명서가 발급된다. 생물학적 죽음의 최종 확인은 법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법적인 죽음은 의학적 진술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심리적 죽음 심리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이정은 “심리적 삶이란 자아나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고, 심리적인 죽음이란 이러한 인식의 정지, 즉 정신 작용이 정지되었을 때 일어난다. 심리적인 죽음은 종종 나이 많은 노인, 혹은 사고나 알츠하이머병 등으로 뇌의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된 사람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곧 임찬란 등이 말하는 것처럼 “심리적 죽음에 대한 정의와 인식의 정도는 나이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죽음에 대한 수용의 정도는 인지적·정서적 성숙도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온전한 정신 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심리적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심리적으로 죽음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서 꼭 육체적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곧 심리적 죽음의 상태는 육체적 생명은 유지되고 있으나 온전한 의식이 없어서 정신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 것이라고 보는 죽음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한 평생을 열심히 살고 그 후에 정신적인 문제나 뇌의 질병 등으로 인해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더욱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때로 심리적 죽음이라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도 주변 환경이나 뇌의 어떤 화학적 작용에 의해서 이전의 기억을 회복하기도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나 사람들을 다시 알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더욱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더욱 따뜻한 사랑으로 남은 생물학적 생명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공존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서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서 심리적 성숙과 죽음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에서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3) 의학적 죽음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의학이 발달하여 최첨단의학을 통해서 인간복제와 줄기 세포 등의 장기 배양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런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현대 의학은 암을 비롯한 많은 질병을 치료함으로 현대인들의 수명을 더욱 연장시켜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학은 질병을 치료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의학에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김정우는 “의학적 측면에서 생명이란 호흡하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을 하고 모든 세포가 자기가 맡은 신지대사를 원활하게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유기체의 역할을 이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죽음은 일반적으로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눈동자가 빛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반사 현상이 소실된 상태, 곧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생명이 존속되거나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를 볼 때에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생물학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몬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의 생명은 세포로 이루어진 생체의 각 조직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몸 밖에서 섭취하여 이를 몸 안에 흡수 분배하여 몸 안의 각 조직과 장기를 통괄하고 생체에 특유한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는 한 생물의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영구적으로 멈추었음을 확증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학적인 죽음의 판정 기준은 죽음에 대한 개념의 포인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호흡 정지, 심장박동의 정지, 피부색의 변화(청색증), 근육의 이완과 경직이 죽음의 판정을 위한 지침이었다. 사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정지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이상의 논쟁이나 이의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의학적 죽음의 기준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곧 노유자 등이 말하는 것처럼 “현대에 이르러 의학계에서는 심폐소생술의 발달로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의 활동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심장이 멈추었다고 해서 사망했다고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학적 죽음 판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죽음을 정의하고 선언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역할은 의학과 의사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적인 죽음의 정의는 심폐기능설과 뇌사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심장과 폐장 그리고 뇌의 활동 정지가 죽음의 판정 기준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이 세 기관이 인간의 생명 현상을 특징짓게 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이부영은 <의학개론II>(1995)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먼저, 심폐기능설에 의한 사망은 ‘심장’(心腸)사(heart death)와 폐장(肺腸)사(lung death)로 구분 된다. 심장사는 심장 박동이 멈춘 후 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말하고, 폐장사는 호흡이 먼저 정지되고 다음으로 심장 박동이 정지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뇌사설은 뇌 기능의 영구적인 정지를 인간 죽음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보는 입장이다. 곧 뇌가 완전히 파괴되어 다른 모든 장기의 기능적 중지가 절박하고 불가피한 상태를 말한다.” 문제는 이처럼 한 인간의 생명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의료적인 이유를 따라서 이해하고 정의하게 되면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와 마지막 임종의 시간을 인간으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의료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해 제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말기 질병의 경우 적극적 치료를 주장하는 의료진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환자나 가족들과 평행선에서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병원에서 종종 목격하는 것이다. 곧 현대에는 병원에서 온갖 의료적 기계 장치와 각종 약물에 의해서 생명을 연장하다가 중환자실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한 생물체가 아침에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가 저녁에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비참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임종이 다가온 시점에 이르렀을 때 무조건적이며 무의미한 의료적 행위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며 죽음을 맞이하도록 해야 한다. 곧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관점의 죽음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목회자들이 목회상담적으로 잘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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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10-1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6 --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나의 소망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6 --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나의 소망 출생과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출생은 말 그대로 삶의 시작이며, 죽음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마무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의 출생이 축하와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마지막 인생의 무대를 내려가는 죽음의 자리 또한 축복이 깃든 고귀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적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띠는가? 1) 현실성과 실제성이 배제된 장례식 모든 사람의 죽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 죽음학이나 죽음과 관련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근 10년 어간에 시중에는 죽음과 관련된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죽음의 담론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좋은 죽음과 좋은 삶에 대한 담론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안에서는 죽음에 대한 깊은 연구와 준비가 매우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적 죽음의 문제는 당장 목회의 수적 증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없는 관심밖의 문제로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기독교(개신교)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연구 혹은 신학교나 교회 내에서의 교육은 사회의 다른 영역이나 다른 종교보다 앞서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다양한 장례식(기독교, 타종교, 전통적 장례 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솔직하게 우리 기독교의 장례식이 고인과 가족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하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 실천신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매우 미흡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곧 대부분의 목회자나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조직신학 종말론과 인간관을 기초로 한 신학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는 신학교에서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교회 제자훈련이나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에도 죽음에 관한 것은 거의 다루지 않는 실정이다. 다만 수련회 프로그램에서 관을 이용하거나 유서 쓰기 등을 통해서 소명에 대한 사명감을 강화하는 1회성 이벤트의 도구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서 터부 하고 금기시 하는 가운데 죽음을 설교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는 목회를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병원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당장 환자나 그 가족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미화하고 근거가 매우 인위적인 치유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기에만 급급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울러 장례식장에서도 현실성 없는 피상적 천국을 외치는 설교를 들을 때면 너무 마음이 공허해 지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솔직히 죽음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고, 시신을 한 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 젊은 목사(부목사)들의 형식적인 30분 미만의 입관, 발인예배 설교와 인도는 죽음의 무게를 넘어서기에는 매우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되는 것이다. 2) 다양한 죽음의 얼굴 실상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막상 나 자신의 문제로 죽음을 마주할 때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 가지이다. 죽음의 존재를 일대일로 직면해야 할 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믿음의 사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곧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의 얼굴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주는 의미와 가치, 인생의 성과와 가장 크게 느끼는 슬픔의 무게도 가지각색이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는 매우 당황하고 긴장하고 불안해 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90세가 넘은 노년의 자연사 앞에서도, 60세 이전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20세 이하의 죽음이나 자살로 인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죽음은 본인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매우 당황하고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죽음 죽에 어렵지 않은 죽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당황과 불안을 어느 순간에 넘어서는 평강과 은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병원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많은 죽음을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목사라는 신분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서 가장 깊고 깊은 마지막까지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참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그 내밀한 마지막을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사역하면서 죽음의 다양한 면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죽음의 모습도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나 절망과 분노와 투정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에 그렇다. 반면,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말기암의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평안과 감사로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그 동안 사랑했어. 정말 사랑해, 그 동안 미안했어.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내 딸이고 아들이라 너무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면서 인생의 여정을 마감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럽다. 3)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죽음의 모습 사실 처음에는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이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실체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병원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다는 이유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회피함으로 나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갑작스럽게 다가올 위기에 대해서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는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회피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의 죽음의 과정에 동참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마지막을 정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목사라는 타이틀과 자존심을 접어놓고, 믿음의 사람답게 죽음을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근거로 하는 믿음은 죽음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나의 죽음을 대면하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부활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때로 육신으로부터 죽음의 문제를 제거하는 능력이 됨을 확실히 믿는다. 말씀과 기도로 죽을병을 치유 받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치유를 받은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정직한 직면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느 순간에는 죽음의 문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준비는 에녹처럼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만약에 인생을 살다가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투병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루하루를 나음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질병 가운데서도 영원을 바라보는 소망과 감사로 채우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나의 믿음의 확실성이 빛을 발하고,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능력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님과 능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갑작스러운 죽음도 결코 재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 하는 가족들에게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큰 놀람과 슬픔과 아쉬움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지점이 한 인간으로서 큰 숙제이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부활과 영생과 죽음과 삶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면 가족들도 슬픔 속에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좀 더 빨리 정리하고, 회복과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지막의 모습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가족들과 죽음과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담론을 가정 안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충분히 나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통해 자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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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10-14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5 - 기독교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의 증언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5 - 기독교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의 증언 (*** 이번 글은 좀 깁니다. 그러나 진료의 현장에서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직접 경험한 생생한 나눔이기에 끝까지 읽어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하면서 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한국 기독병원 협회에 소속된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 중에서 3년 이상의 호스피스 경력을 가진 크리스천 간호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였다. 왜냐하면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들의 생생한 증언이 죽음학 연구의 중요한 이유가 되며, 아울러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 호스피스에서 근무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① 3년 미만 ② 3-5년 ③ 5-10년 ④ 10년 이상 2) 다음 중에 기독병원 호스피스 캐어 중에 가장 힘들었던 대상은 누구였나요? ① 불교 신자 ② 기독교 신자 ③ 무교 ④ 가톨릭 신자 ⑤ 기타(이단 등) 종교 신자 3) 다음 중에 호스피스 캐어 중에 가장 힘들었던 대상은 누구였나요? ① 호스피스에서 세례 받은 분 ② 믿은 지 5년 이하인 환자 ③ 집사, 권사, 장로 등의 평신도 직분자 ④ 목사, 선교사 등의 사역자 4) 호스피스에 입원하는 환자들 중에서 목회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주관식,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해 주세요.) 5) 목회자들의 입원 기간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주관식,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해 주세요.) 이 설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질문1)에 대답한 간호사를 중심으로 한 의료인들 근무 연수는 최소 3년 이상의 것만 취합하였다. 질문2)의 호스피스를 통한 돌봄 중에 가장 힘들었던 환자는 기타(이단 등) 종교 신자, 기독교 신자, 그리고 불교, 가톨릭의 순이었다. 질문3)의 호스피스를 통한 돌봄 중에 가장 힘들었던 기독교 신자의 순서는 목회자, 호스피스 병동에서 세례 받은 자 순으로 나타났다. 끝으로 질문4,5)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4번 질문에 대한 대답 정리 간호사 A: 죽음 앞에서 심리적 상태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예민했고, 캐어 제공자들을 평가하며 때로는 훈계하기도 하고, 특권주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환자 개인의 특성도 있겠지만 그 주변의 가족, 교인들에 의해 VIP로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의료진들에게 지워지는 부담감이 매우 컸다. 호스피스 대상자로 일반인에 비해 어려운 대상으로 느껴졌다. 간호사 B: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호스피스에 입원과 임종시에 평온하기보다는 왠지 더 억울해하고 사소한 것에도 불만이 많아 간호사 및 의료진에게 더 힘든 환자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선교사역지에서 온 젊은 선교사님들은 호스피스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고, 사망 시까지 기적을 바라거나 본인의 질병 상태에 대한 의사들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타깝게 임종을 한 사례가 많았다. 가족관계가 많이 단절 되거나 해결 안 된 선교사님들은 집단치료 및 웃음치료, 환자 및 봉사자와의 친목 등에도 참여율은 없거나 저조했다. 사회복지사 A: 환자의 입장보다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신앙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것 같은 모습을 통해서 죽음에 임박해서도 목회적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목회자의 부담감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간호사 C: 실제 사역현장에서 보여 지는 목회자와 환자로서의 목회자의 모습은 상반되는 경우가 있었다. 환자의 입장보다는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호사 D: 호스피스에서 2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지다 보니 환자들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자면, 1)인격이 성숙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며 전반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왔던 목회자, 2)인격은 미숙하고 권위적이면서 가정에서 폭군처럼 군림하여 전반적으로 원만하지 못했던 목회자, 3)정직하고 믿음은 좋지만 성숙 단계는 아니어서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맹목적인 목회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인격적으로 성숙한 목회자는 겉과 속이 일치하여 가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고, 병동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의료진에게 매사에 협조적이고 원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긍정적인 태도로 호스피스완화돌봄을 받아들여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잘 보내었고, 임종 시에도 조용하고 평화롭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아름답게 생을 완성하였다. 2)인격이 미숙한 목회자는 남들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성공적이고 대단한 목회나 선교를 하였더라도 폭군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여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받지 못했고 그의 언어적 및 행동적 폭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대화가 불가능하였고, 매우 교만한 태도로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폐쇄적이고 방어적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남을 하나님처럼 판단해 왔으므로 자신도 타인들에게 판단을 받을까 두려워서 공동체에 자신의 질병을 알리지 않으려는 폐쇄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임종 시까지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분들에게 호스피스완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자신만의 독선적 주관을 가지고 소통과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인 지시만을 하고, 모든 이들이 굴복하기를 바라며 요구하므로 가장 힘들었다. 3)믿음은 좋지만 인격적으로 미숙한 목회자는 병이 들었을 때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맹신적인 모습으로 의료를 거부하고 기도원을 전전하다가 악화되어 오는 경우들이 많았고, 반면에 어린아이처럼 가족들을 의지하면서 큰 부담을 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거라는 기적만 바라는 중에는 의료진과 소통이 어려웠고 자신의 주장만 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말기를 수용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임종 시에는 결국 받아들이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가족에게 감사를 전하고 떠났다. (2) 5번 질문에 대한 대답 정리 5번 항목에 대한 대답을 소개 해 보면, 4번에 비해서 훨씬 더 진솔하게 호스피스 담당자로서 목회자들에게 느낀 점을 기술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간호사 A: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죽음을 수용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가족, 의료진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목회자이기에 반드시 죽음을 잘 수용해야 하고, 천국을 소망하기에 마지막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낮에는 의연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홀로 고민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많이 경험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솔직한 인간적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있을 때만 표현할 수 있었던 목회자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목회자 이기에 어떠해야만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고, 어떤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하나님 앞에서 한낱 인간임에 지나지 않은 그런 모습으로 정직하게 서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간호사 B: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기는 하는가 싶을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내려놓지 못한 모습을 가끔 대하게 되면, 본인이 가장 힘들 때 남한테 상처를 더 준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사회복지사 A: 확실한 것 같았던 믿음이 죽음 앞에서 목회자들조차도 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 C: 죽음의 대한 이해가 실제적으로는 깊지 않은 모습이었고, 일반인이 죽음을 대하는 두려워하는 모습은 목회자들도 비슷해 보였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이며, 누구나 죽음 관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고, 오늘 주어진 삶 속에서 소중히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겠다는 교훈을 받았다. 간호사 D: 목회자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으로서 동일한 모습이었고, 죽음 앞에서 믿음의 시험을 겪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격의 성숙도와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얼마나 영적으로 바른 중심을 가지고 전인적으로 삶을 통합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임종 시와 내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목회자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평신도나 동일하였고, 각 자의 성품이나 인격,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입원기간이나 죽음의 모습이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 중에서도 인격과 신앙이 일치된 분들의 모습은 자신의 직함이나 성공적인 사역을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가족이나 의료진 등 그 누구를 대할 때에도 늘 겸손한 모습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였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으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축복을 전해주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영적인 고뇌와 내적 갈등은 하나님과 단독 대면하여 해결하였기에 자신의 문제로 인해 주위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고, 자신이 이룬 업적들을 내려놓으면서 가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늘 자신의 부족함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가족들의 헌신과 의료진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섬김에 감사하는 모습이었고, 같이 입원한 환자와 가족들을 배려하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증상이 악화되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영적인 성숙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잘 견디고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잘 대처하였으며,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바른 영성은 현실과도 조화롭고 지혜롭게 대처함을 보여주었다. 현실적으로도 잘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요행이나 기적만 바라지 않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자신의 죽음 이후의 가족의 삶에 대해 실질적으로 미리 준비하였으며, 호스피스완화의료사역을 위해 후원하거나 생전에 미리 기부하거나 유언을 남기셨다. 이런 분들의 안정된 모습은 환자 본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가장의 말기라는 가족의 위기상황에서도 가족이 서로 단합하며 잘 대응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족의 체계도 개방적이어서 믿음의 공동체에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으며 기꺼이 교회 안에서 영적 지지와 함께 실질적인 지지를 받는 모습이었다. 목회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누구든지 동일하게 죽음의 과정에서 시험을 받지만 전인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분들의 반응과 대처 양상은 달랐다. 임종의 과정이나 임종의 순간에 있어서도 성숙된 목회자나 평신도는 죽음 앞에서 부활 신앙을 잘 적용하였고, 믿음의 시험을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족들에게도 믿음의 확신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영적인 성숙이 자신의 전인적인 삶의 조화와 통합성으로 나타나 주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의 완성과 내세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끝까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죽음을 부인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조차도 삶의 과정으로 수용하고 영원한 내세를 믿으며, 성숙한 신앙의 모습과 함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과 본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에서도 신앙과 인격이 성숙된 분들에게는 천국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빛을 본다든지 하는 믿음의 영적 보상이나 확신을 강화시켜주는 체험을 하였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테스트를 받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영적 지지와 도움을 받아들이고 잘 감당하였으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나 남의 탓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에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시험을 이겨내고 체험적인 신앙을 나타내며 구원의 확신과 성경에 있는 말씀이 진실됨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제가 경험한 환자 중에는 죽음이 임박하여 성경말씀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분들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활의 확신을 가진 분들은 기쁨으로 천국을 들어가시며, 임종 전 까지 남아있는 시간 동안 앞으로 자신과의 사별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격려하고 축복기도를 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호스피스완화간호를 오랫동안 제공해 왔던 간호사로서 말기 질환을 통해 앞서 가신 믿음의 선배님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과 부활의 신앙을 ‘여기서(HERE)-지금(NOW)’ 적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호스피스사역을 통해 기독의료인으로서 기독교의 핵심 신앙인 부활의 신앙을 화석화된 관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삶 속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 사람은 누구나 끝(죽음)을 보기까지는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해 성경적인 종말론적 관점을 갖고 있어도 확실한 자세를 갖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곧 상담적 입장에서 본다면 목회자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어렵고, 말기 질병과 죽음 앞에서 당당하기가 쉽지 않은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끝과 죽음은 항상 막연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도 상담적·심리적으로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들이 지식으로 알고 사역으로 전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는 말씀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목회자들조차도 자신들의 삶에서 배제된 주제로 은연중에 멀리하면서 오직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은연중에 성경의 하나님도 성공과 현세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만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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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3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3 -- 죽음학 연구의 가치 죽음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이 사역이 주는 가장 유익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 죽음학 연구는 죽을 때까지 삶의 방법을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새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되고, 아울러 인생을 영원한 의미와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해 주는 유익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은 나와 동떨어진 것이며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왠지 불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가리켜 ‘죽음에 대한 터부’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하면 은혜 없는 목사,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목사, 능력 없는 목사로 치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처럼 그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죽음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군가에게, 아니면 나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늘 목격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죽음이 자신의 문제가 되는 순간에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두려움과 아픔이 이성을 완전히 점령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곧 이 둘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분명한 지식과 의식을 갖고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 나아가 모든 자연만물에 대해서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현대는 사람들이 죽음을 거부하고, 오직 이 땅에서 잘 살고, 더욱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는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좋은 교회의 역사를 버리고, 교회 조차도 오직 이 땅에서 먹고 사는 삶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가 좋은 죽음이라는 비전을 잃어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삶은 그 시대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한 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진화론과 데카르트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기계론적 철학과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낸시 피어시는 그의 책 <완전한 진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더 높은 도덕적·종교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널리 용인되며, 그것을 경청할 만한 소리로 받는 시대이다”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낸시 피어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화론에 근거를 둔 자연주의 철학에서는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라고 믿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생물학적 현상들은 오직 물질적인 원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유물론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연주의나 유물론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진화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다윈의 진화론은 경험론적 발견이 아니라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추론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진화론적 세계관과 과학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삶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오직 성공과 성장만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할 죽음의 문제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고 가게 되는 가장 큰 과제이며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함께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 보는 것은 인생의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을 인생의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면 삶의 질이 성장하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공포와 불안을 완화시키는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유명한 죽음학의 대가 알폰스 디켄(Alfons Deeken)은 죽음에 대한 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유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과 유머가 연결된다는 부분은 참으로 신선하며, 모순되게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상기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죽음을 터부시 하고 오직 현실과 이 땅의 삶에 집중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그릇된 성공주의 목회관에 따라서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영생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통해 이 땅에서 주님을 닮은 의미 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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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2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병원 사역 속에서 참 감사한 것은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곧 죽음의 시간과 장소에서 그의 마지막 손을 잡아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목사라는 이유로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하고도 내밀한 시간에 초청받은 것은 실로 대단한 자격이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는 정신적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영적인 불안과 무서움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에 가장 의미 있는 목회적 돌봄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 함께하는 것은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섬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종 과정에 함께하다 보면 나의 자리, 곧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 자리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사람이 인생을 마치는 그 순간에 그의 손을 잡고 둘러선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에 진짜 목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거룩하게 쓰임받고 있다는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체험하며 감사가 넘치게 된다. 병원 사역의 특성상 꼭 기독교인만 임종의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의 임종에도 가족들의 부탁으로 인해 동참해야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모든 임종의 순간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임종 과정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분명히 육체를 넘어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것,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의 순간에 분명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종 돌봄의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강한 임재와 구원의 은혜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며, 영적으로 충만하고, 마음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과 소망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15년 동안 병원에서 200여회의 죽음을 목격했다. 처음 5년간은 열정을 갖고 호스피스와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죽음에 다 참여를 하여 영적 돌봄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정적 한 사건 후에 한 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었다. 바로 10여 년 전에 우리 병원 암병동에 입원 후 호스피스까지 약 4개월간 삶의 마지막 여정을 동행했던 22살 청년의 죽음 이후에 마음이 너무 힘 들어서 한동안 의욕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18살 때 대장암에 걸려서 이곳저곳의 병원에서 여러 치료를 받다가 우리 병원 호스피스에서 22살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여러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나머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고 갑작스럽게 떠났다. 그 청년의 죽음을 품에 안고서 한 참을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서 전남 해남이 고향이었던 그 청년의 시신을 그의 어머니가 구급차에 태워 운구해서 떠날 때에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해도 좋으니 이런 죽음은 앞으로 더 이상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마음의 악다구니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 사건도 더욱 삶의 의미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은혜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후에 거의 1년 정도 임종 돌봄을 할 때마다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었다. 전통적으로 목회에서 죽음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졌다. 곧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목회를 통해서 잘 죽는 법을 배움으로 이 땅에서 잘 사는 법도 배우게 되고, 아울러 분명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통해서 영원까지 준비하는 복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이며, 무엇보다도 영생을 위한 시작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까지 교회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은 다른 성도의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처럼 이전시대 목회자들은 죽음을 포함한 성도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깊은 준비와 통찰과 실천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한 사람의 죽음 또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병원에서의 임상적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서 원목으로서 호스피스 사역과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는 영적인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주면서 깨달은 사실은 많은 성도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죽음을 부정하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곧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께서 자신만은 죽지 않게 하실 것이며, 말기 질병에서도 자신만은 고쳐줄 것이라는 신념으로 임종의 순간까지도 죽음을 부정하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여러 명 목격하였다.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영생의 소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죽음을 묵상하고 준비하고 영원을 준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축복이며 특권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함을 믿는다면 죽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과 부활을 소망하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진리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꼭 회복해야 할 중요한 가치는 죽음 자체의 극복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존재이므로 죽음과 과정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의 수립과 그 가치관을 따르는 목회적 사역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단순히 그 길이로만 평가 하지 말고, 인생의 깊이와 의미로써 평가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의미와 목적을 갖고서 믿음으로 응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삶은 마무리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인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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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 - 죽음학(생사학) - 가을이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에 기온이 떨어지고 있다. 이 비가 내린 후에 가을의 정취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산마다 단풍이 여름의 초록을 벗고 붉게 타오르겠지. 이 가을에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일을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바로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제목으로 병원에서의 15년의 사역 경험과 목회상담학 논문을 중심으로 “죽음학(생사학)”에 대한 글들을 써 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논문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문을 그대로 옮겨올 생각은 없다. 페북의 성격에 맞게 논문의 내용 중에 꼭 필요한 것들과 병원 사역 중에 만난 실제적 이야기, 그리고 죽음학(생사학)과 관련하여 읽었던 여러 책들을 소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유는 독서 모임 ‘세함’에서 <위그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현재 나의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서 급변하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정립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다. 그래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실상은 잘 살지도 못하고, 더더욱 잘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현실의 노예들이 된 것은 아닐까? 위그노들, 개혁자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삶의 자리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의 삶은 분명 달랐다. 무엇보다도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선교사로서 중국 실크로드 지역에 살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우연히 병원 사역에 몸담은 지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200여 정도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주면서 얻게 된 확신은 잘 죽는 문제는 결국 잘 사는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믿음 안에서 잘 죽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한 영생의 확신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 인간의 삶의 매순간은 동시에 죽음이 공존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실존의 본래성을 목회자들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할 것이다.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중심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고서 사역을 할 때에 교회와 성도들도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며, 영원과 부활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 도전적깨달음을 통해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던 중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곧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죽음, 그 중에서도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일반목회자, 선교사, 병원 원목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불안, 삶의 만족도 및 신앙성숙도 비교를 중심으로 설문하여 비교 분석하는 것을 토대로 한 내용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가장 먼저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며, 성도들이 바른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아울러 한국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함으로 한국 교회 안에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함으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부터 성경적 죽음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경적 죽음관 위에 형성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생명을 바라보는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여 이 시대를 새롭게 조명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었다. 첫째, 목회자들의 죽음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많은 이론 중에서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 할 죽음에 관한 제 이론을 중심으로 이론적 연구를 하였다.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할 죽음의 인식에 필요한 이론으로는 죽음의 정의, 죽음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타 종교의 이론, 죽음에 대한 각 학문 분야의 관점 등이 있다. 둘째, 목회자들이 교회와 성도를 바르게 목양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기초가 분명하고 튼튼해야 한다. 특히 인간의 죽음은 기독교의 영생과 부활의 신앙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적 인간론·기독론·종말론을 통해 성경적 기초에 대해서 연구했다. 아울러 죽음은 결국 생명의 문제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셋째, 한국교회 목회자들(일반목회자, 선교사, 원목)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설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곧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 정도는 어떠하며, 목회자들 상호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앞으로 한국의 신학교와 교회가 죽음과 죽음 교육에 대해서 가져야 가치관과 목회상담적 자세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넷째, 한 사람의 죽음과 종말론적 신앙과 삶을 위해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안하여 죽음과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곧 한 사람의 죽음에 있어서 목회상담자이며 삶의 상담자로서 목회자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결론적 대안으로 연구한 것이다. 다섯째,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결론을 내리면서 후속 연구를 위한 과제로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죽음준비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제언하면서 병원 원목들의 사역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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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4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 4, 원목사역을 통한 임상적 경험 병원 사역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목회자로서 힘든 일은 동료 목회자들이 과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말기 암에 걸려서 입원하는 것이다. 목회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40대, 혹은 30대나 50대에 말기 암으로 인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아울러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평생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죽음 앞에서 전혀 준비 되지 못한 모습으로 오직 병이 낫기만을 원한다거나 죽음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전했던 복음을 부정할 때이다(그러나 일반적으로 긍정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가끔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 15년 동안 병원에서 경험한 여러 사건들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준비되지 못하고, 부정적인 모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한 목회자들, 입술로 전한 말씀과 삶이 괴리된 안타까운 모습의 목회자들,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오직 죽어서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나의 가슴 속에 아픔과 믿음과 사역에 대한 숙제로 남아 있다. ① 목사 A씨: 목사인 A씨는 말기 암으로 인해 임종을 맞으면서 마지막 유언을 “하나님은 안 계시니까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남겼던 죽음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말기 암으로 인한 마음과 육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실망감,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그런 극단적 부정의 상태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부활의 복음의 믿고 그 복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목회자가 자신의 뜻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습은 같은 목회자로서 우리가 입으로 전하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며, 과연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죽음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참 믿음이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 선교사 B씨: 선교사로 해외에서 사역을 했던 B씨는 젊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말기 암으로 인해 우리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또 다른 형태로 죽음을 거부한 경우인데, 날마다 친분이 있는 여러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했다. 물론 원목인 나에게도 하루에 두세 번씩 꼭 자기를 찾아와 기도해 주고 예배 인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예배와 말씀 그리고 기도는 오직 병이 나을 것이며 다시 회복시켜 더 큰 선교(본인의 표현)를 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에게 묻는 질문은 단 한 가지였다. “목사님, 하나님이 나는 미워하시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지만 목사님에게는 말씀하실 것 같은데,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다고 말씀 안 하셨나요?” 그분은 임종하는 날까지 죽음을 철저히 배제한 채 그렇게 사는 것만 소망하다가 아무런 죽음에 대한 준비도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 ③ 선교사 C씨: 선교사이며 미혼이었던 50대의 C는 하나님 앞에 섭섭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자기 앞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 것이며, 예배를 비롯한 기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평생을 하나님과 복음만을 위해 살았는데 이렇게 모진 질병에 걸리도록 한 하나님이 싫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권면과 믿음의 형제들의 방문에 대해서 입을 꼭 다물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질병과 함께 점점 마음이 닫히면서 급기야 모든 면회와 방문마저 거절함으로 인해 임종의 순간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을 경험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병원 사역을 통해 직접 경험한 많은 사례 중에서 대표적으로 목회자(선교사)들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이다. 병원에서 사역을 하면서 목회자들이라고 해서 꼭 모두가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며,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히려 현대의 과학과 의술을 맹신하면서 성경의 주님은 오직 질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주님, 곧 나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죽음의 문제는 어떤 사람이든지 직접적으로 겪어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최재락은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의 특성과 상황이라는 측면에서는 특수한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진홍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실존적으로 볼 때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이 다가오면 두려움 속에서 부정적이며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최재락은 “인간의 존엄성은 자기 자신의 삶의 특수성과 죽음의 특수성을 실현시킬 때 가능하다. 곧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한 주체로써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특징은 죽음을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현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총체적 죽음의 위기 속에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김균진은 “인간의 세계는 생태학적 위기의 차원을 넘어 총체적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리고 물질 생활이 편리해지고 풍요해 짐에 비례하여 죽음의 위험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라고 주장한다. 곧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적인 분위기는 죽음을 우리 인간의 삶에서 점점 몰아내고 배제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연구가 필요한 것이며, 아울러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요소로 설명할 때에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①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누구나 존중 받으며,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적이며 사회적인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부활과 영생에 관한 소망과 기대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데 있다. ②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 깨달음이 있을 때 사람들은 죽음의 건전한 철학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삶의 만족도도 매우 높아질 것이다. ③ 목회자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 관점과 신앙을 갖고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④ 목회자들로 하여금 목회를 하는 중에 임종에 임박한 성도에게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목회상담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늘 차지하고 있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영적인 돌봄의 사역을 해야 한다. 아울러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족 간에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새로운 천국 소망을 갖도록 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죽음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사용하셔서 가장 중요한 축복의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신앙이 바로 우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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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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