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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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정년제, 과연 성경적인가?
    다음은 원 철 목사의 정년제 폐지를 주장하는 기고문이다. 본 기고는 빛과소금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은 성경말씀을 기본바탕으로 세워진 보수교단이며,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단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 원리로 해서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늘 염려하는 것들이 있다. 과연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이라는 것을 앞세워 정치와 사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슴에 품고 살려고 성도들도 몸부림치며, 목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회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이 우리 교단에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고 몹시 아프다. 교회와 기독교를 보는 사회에서의 시선 때문에 정년제를 사수해야 하거나 정년제를 지금보다 5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습제도가 마치 죄인인 것처럼 보는 것 역시 사회시선을 의식한 것 같다. 이유는 사회가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년을 연장하거나 세습을 하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천주교는 75세 정년이 있으나 자율에 맡겨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은퇴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천주교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에도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불교를 비난하는 소리나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히 기독교만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에서 비난할 것이라고 이유를 댄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사회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는지 교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나 근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왔다.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신앙을 본받아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분들의 영향으로 우리 교단이 보수교단이라는 명분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좋아서 합동이라는 교단이 태어났고 이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정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제108회 총회에서 박00 목사는 정년제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발언하기를 정년제 연장을 해서는 안 되며 40대 50대의 80%의 젊은 목사들이 담임목사 근처도 못 가고 있다며 지금 400~500여명이 담임목사 되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담임목사도 한번 못하고 은퇴해야할 형편”이라며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수 신학은 어디로 가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인간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주장하고 시도하려고 하는가? 우리의 사역과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사역인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젊은 세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 깊이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는(Baby Boom Generation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비붐이 일어난 시기에 출생한 세대를 말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여 이 몸 바쳐 주의 일을 하렵니다”라고 찬양하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이 빈곤한 살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하에 삭월세를 얻고 칸을 막아 살림을 하면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베이비붐 세대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40대, 50대, 80%의 젊은 목사들은, 개척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가 70세가 되어 은퇴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선배들이 열심히 사역하여 이루어 놓은 부흥된 교회에 청빙 받아 안전하게 목회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예로, 대형교회에 담임목사 청빙광고가 나오면, 100~200여통의 이력서가 접수된다고 한다. 중소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생활비를 얼마 주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사택은 몇 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 상여금은 얼마나 주느냐? 자가용은 제공하느냐? 월요일은 쉬느냐? 월요일에 출근하면 출근 수당은 주느냐? 새벽기도회에와 금요기도회를 하면 수당을 얼마나 주느냐? 부터 묻는다고 한다. 반면 시골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아예 이력서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시골교회와 소형교회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담임목사를 모시지 못하여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중소도시에서도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하여 힘들다고 한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도 이대로 가면 2026년부터 목회자가 모자라는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교회들도 교육전도사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은 적은데 베이비붐 세대가 열정적으로 개척하며 교회를 세웠던 분들이 앞으로 10년동안 계속 은퇴하시기 때문이다. 지방도시나 시골에는 부교역자가 없어서 사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담임목사 타령이나하고 있는 세대를 볼 때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박00 목사가 말한 것처럼 기성세대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듣기 좋은 말로서 군중들의 인기를 모으는 이야기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 분은 역사학자로 알고 있는데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유학 가는 신학생들이 부쩍 늘어났으며 유학파들이 40~50대에 주를 이루고 있다. 유학 다녀온 분들 가운데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들고 교회를 개척하려는 뜨거운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의 기성교회의 후임자로 가려고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으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우고,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더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꼭 큰 교회의 빈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대형교회 후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베이비붐 세대가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대안인가? 묻고 싶다. 제104회 총회에서 우리 대전중앙노회가 ‘정년제 연구위원회’를 두어 연구해서 보고하기로 제안하였다. 이를 총회가 받아들였고 결의해 주어 2년동안 정년제연구위원회(위원장 고영기 목사)가 조직되었고 신학자 4분에게 의뢰하여 그분들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공청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20년 4월 21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정년연구를 위한 공청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자 서창원 교수, 실천신학자 양현표 교수, 구약신학자 이희성 교수 3분과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발표하였다. 4분 중에, 한 분만 조심스럽게 사회의 관점이 있음으로 정년제를 현행대로 유지하거나 73세로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 서창원 교수, 이희성 교수, 김근수 교수는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 정년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보수교단들을 조사하여 본 결과 미국교단들도 정년제가 거의 없음을 보고하였다. 제108회기 신학부주최 대전중부지역 ‘교회와 신학세미나’에서 김길성 교수는 정년제에 대하여 ‘교회에는 2가지 직분이 있는데, 하나는 ’항존직‘으로서 영원히 있는 것으로서 목사나 장로가 은퇴하고 사역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목사를 목사로 장로를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무’가 있는데 시무는 기간을 정하여 사역을 하는 것으로서 우리 총회에서 시무연한을 정해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0년 사역을 하고 은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싶다. 시무 연한이 과연 성경적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70세가 되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하는가? 성경적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탕으로 보수를 지향하고 있으며 칼빈의 신학사상과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헌법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디로 가고 인간의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는가? 헌법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경이 우선인가?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정체성이 아닌가? 신학정체성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과연 신학정체성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왜 장로들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정년제 연장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를 나이가 들면 너무 시대적으로 낡은 생각과 열정이 사라져서 교회 부흥에 도움이 안 되므로 정년제를 65세로 하향해서라도 빨리 젊은 목회자로 담임목사를 교체하여야 교회가 신선해지고 젊어지고 부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성경적이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장로들이 이런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목사들이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므로 먼저 목사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성경에 어디에 70세가 되었으니 은퇴하라는 내용이 있는가? 필자가 제안하는 ‘정년제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고자 세워진 교단이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이며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제13장 제3조 장로. 집사 임직서약 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으로 믿느뇨?” 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을 가르켜 선지자라고 했고 모세 역시 선지자라고 했으며 120세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사무엘선지자 역시 죽기까지 사역을 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예언자 대선지자 소선지자 사사 왕 모두 정년이 없는 종신직이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정년이 없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 7집사들도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은사로 사역을 주실 때 사도 목사 교사들에게도 정년이 없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독 장로 집사를 임명할 때에도 정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사도요한은 오히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하고 96세에 순교하였다.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직분에 맞게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가랴제사장 역시 늙었으나(눅 1:8~9, 18) 하나님께서 맡겨준 성전에서의 사역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목사와는 사역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역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왜 성경에서는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사역에 대해서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행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사명을 선언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역자들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정년제를 시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디모데전서 3장에도 장로와 집사를 선발하는 기준에도 정년 규정이 없다. 항존직이란, 옛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終身)토록 시무한다.”고 되어 있다. 항존직(恒存職)이라는 말은 자신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시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창원 교수는 정년제법을 ‘제정하는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실천신학 양현표 교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주제에서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건강지수가 현격히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정년제는 성경과 헌법 정신에 어긋났다’고 지적했다. 지금 현행대로 가면, 2029년부터 목회자의 수가 179명이 모자라며 교회수를 현재대로 유지하고 신학교 지원자들이 감소하는 경우 당장 3년 후인 2027년부터 목사의 수가 140명이 모자라며 2035년에는 무려 2,960명이 모자랄 것이라고 통계를 통하여 전망하였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우며 각 노회마다 교회를 폐교하는 청원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전국신학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총신도 2021학년부터 정원미달이 되었으나 박성규총장이 열정적으로 홍보한 결과 미달은 겨우 면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2029년에는 100명정도 입학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성장이 퇴보하고 있으며 지금은 매년 3천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교인 수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박성규 총장 역시 신대원 입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시점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달로 심각한 현실로 가다오고 있다고 하였으며 유럽의 뒤를 따라 문을 닫는 교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희성 교수는 우리 교단 헌법에는 1992년 제77회총회에서 정년제를 시행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에서는 “목회자의 정년을 교단에서 규정하지 않고 개 교회에 일임하여 교회에서 정하는 것으로 한다”고 보고하였다. 대신교단은 현행 정년제가 성경적이 아님으로 성경말씀에 준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단호하게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개혁교단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교단으로서 당연하게 정년제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개혁, 대신을 비롯한 독립교단들은 일찍이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이희성 교수와 김근수 교수가 미국장로교 10개 보수교단을 조사한 결과 9개 교단이 정년이 없음을 발표했으며 초창기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교회들을 세우고, 우리 총회를 세우고 우리 교단 헌법을 만들 때에도 미국교회의 성경적인 헌법을 기준으로 하여 정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우리 총회는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부터 정년제를 시행하였다. 미국 R.C.A.교단 만이 70세 정년이 있지만 “70세가 된 목사나 은퇴한 목사라할지라도 교회와의 계약에 의하여 위임의 형식으로 사역을 지속할 수 있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미국 남침례교회는 ‘목회자의 청빙에서 은퇴까지 전적으로 개교회의 특성과 자율성에 일임하기에 교단적으로 목사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으며 목사 시무정년은 종신토록 시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년제 폐지를 반대하는 분들의 의견은 대부분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적인 관점에서 지탄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필자가 정치를 잘 하시는 목사님에게 고견을 들으려고 정년제는 성경적이 아님으로 정년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이야기 했더니 “목사님은 정치를 모르는구먼” 하면서 “정치적으로 안돼”하는 것이다. CTV에서 2주전에 “목사 장로 정년연장 필요한가?” 제109회 총회 특집 토론에서 함성익 목사와 박창식 목사가 패널로 나와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이 토론을 보면서 내가 왜 총회에 있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왜 이분들은 통계를 중요시하고 사회시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젊은 목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경청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기는 왜 한 마디도 안하는가? 이들이 우리 교단의 대표하는 목사들이 맞는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정체성을 주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개살구와 같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성경이다. 우리의 헌법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적인 것에 기준을 삼으면 안 된다. 지금의 우리 헌법은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70세 정년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렇다고 헌법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과 바탕으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경말씀에 비추어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성경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성경적이요 개혁주의 정신에 부합한 것이다. 교회법을 사회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전락하는 것으로서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했던 5500여년 전이나 사도들과 바울이 성경을 썼던 2000여년 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해서는 안 된다. 창조시대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기준을 따라야지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년제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보수를 지향하는 신본주의 우리 교단이 단호하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에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필자는 우리 교단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하였구나 충성된 종아! 칭찬받으며 하나님께서 배설한 천국잔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상급받는 신실한 사명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총회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이요, 보수적이며 개혁주의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매년 계속되는 정년제 폐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바로 세워지기까지는 계속 문제가 될 것이다. 정년연장이 아니라 폐지하여야 한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신본주의도 아니며 칼빈주의도 아니고 보수라는 말과 개혁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왜 해마다 수백 교회가 우리 교단을 탈퇴하고 떠나는지 생각해보라?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왜 눈치만 보고 있는가? 성경적으로 그 답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단이 정체성도 확립되고 세계 교단과 교회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신학교도 본래의 신본주의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제109회 총회에서 현명하게 결단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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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8
  • 【북토크】 이야기 창조자, 작가...그 치열한 노력
    명절 연휴를 맞아 모처럼 쉬지 않고 책을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취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22년 9월 3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34년 7개월 만에 퇴사한 문학전문 기자의 글 모음으로 400페이지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작가와 책을 알게 됐다. 계속해서 읽을거리가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책들이 도서관에 있기를 바래본다. 이 책 제목처럼 이야기는 오래 산다. 한때 네러티브 설교 방법이 유행했다. 이 설교를 잘하는 방법의 하나는 소설을 많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통해 상상력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많은 베스트셀러를 쓴 정이정 작가와의 인터뷰 글이다. 몇 년 전 이 작가의 『7년의 밤』을 읽었는데 다 읽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내용이 길어 읽기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이 작가의 글 쓰는 태도가 대단해서 소개해 본다. "저는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잡히면 아무리 길어도 석 달 안에 초고를 끝냅니다. 일단 초고를 마친 다음 1년에 걸쳐 말이 되게 다듬고 필요한 세부 사항을 취재해서 또 고치고 하면서 초고를 완전히 벗겨 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체로 2년 터울로 신작을 발표하게 되네요. 이 소설도 빨라야 2013년 봄에나 책으로 나 올 것 같아요." 초고를 완전한 원고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장면을 그릴 때에도 세 가지 정도의 다른 버전을 써 놓고는 그중 가장 나 은것을 고르는 방식을 택한다.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은행나무, 2009)의 마지막 장면은 ①승민이 병원에 불을 지른다 ②산사태가 나서 상황이 정리된다 ③글라이더를 이용해 탈출한다. 세 가지 결말을 써 놓고 고민하다가 마지막 것을 택했고, 『7년의 밤』에서 현수가 세령을 차로 치는 장면도 그렇게 썼다. 작가로서 모든 것을 이룬 듯한 정유정의 바람은 무엇일까? "‘정유정, 하면 이야기꾼’으로 불리고 싶어요. 문단의 평가에는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저는 『화씨 451』(황금가지, 2009)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한 말 ‘나를 통해 세상을 타오르게 하라’를 10년째 책상에 붙여 놓고 있어요. 제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불을 지르고 싶습니다. 다만, 상업주의니 영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니 하는 말들에는 마음이 상합니다. 저는 소설이 모든 이야기 예술의 샘이자 대지 같은 장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설가인 걸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2012년), (pp. 32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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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9-17
  • 【북토크】 세월은 빠르게 지나간다
    이 책은 중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의 자전 에세이다. 1955년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그가 많은 우여곡절 속에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아울러 초등학교 동창인 '허즈우'가 어떻게 큰 부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루원리'라는 여학생이 두 번의 사별 후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중년의 여인으로 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아래에 인용한 글은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딸을 위해 청탁하러 모엔을 찾아온 루원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추석 명절에 작은 조카가 결혼할 여자와 찾아왔다. 조카 나이가 벌써 34살이다. 아기 때 본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이처럼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늙어가며 추억만 쌓인다. 몇 시간만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책은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인도한다. 독서가 취미인 것이 다행이다(인터넷 교보문고를 보니 이 책은 2012년에 나와 절판됐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어야 할 듯하다.) 모옌 중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포크너, 찰스 디킨스와 비견되며 환각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창조한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2007년에는 중국 문학평론가 10명이 선정한 중국 최고의 작가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본명은 관모예로 글로만 뜻을 표현할 뿐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모옌이라는 필명을 쓴다. 1955년 산둥성 가오미 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학업을 중 단하고 시골 생활을 하다가 1973년, 열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목화 가공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76년,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문학에 눈을 돌려 해방군 예술 단과대학에 입학해 1986년에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그는, 1984년 발표한 「투명한 홍당무」를 통해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대표적인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고, 그 작품의 일부를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중국 최고의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마오둔 문학상과 다자 문학상을 비롯해 프랑스 루얼 파타이아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노 문학상,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국국적 작가로는 첫 수상이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이 책 『모두 변화한다』는 그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지난 30년간 중국의 사회 변화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첫 자전에세이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집 『달빛을 베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장편소설 『열세걸음』, 『개구리』,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술의 나라』, 『풀 먹는 가족』, 『풍유비둔』, 『맹그로브 숲』, 『탄샹싱』, 『사십일포』, 『인생은 고달파』 등이 있다. "류 선생님은 잘 지내셔?"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갔어."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어쩌다가. 류 선생님은 이제 예순 살을 겨우 넘었을 텐데." "나는 과부 팔자인가 봐. 내가 기가 세서 사내를 잡아먹는 건지." "무슨 그런 말을"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눈동자에 눈물이 어리어리 비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내 팔자가 사나워서..." 순간 나는 그녀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다만 술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그녀의 잔에 부딪칠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잔 안에 든 술을 몽땅 비우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건 사실 부탁이 있어서야." 그녀는 품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내 딸이야. 류 환환이지. 마오창 소년반 시험에 등록했고 벌써 2차까지는 시험에 붙어서 60명 안에는 들었어. 학부모들이 저마다 아는 사람을 찾아가 부탁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나도 이 늙은 얼굴이 부끄러운데도 당신을 찾아온 거야." 나는 손으로 사진을 받쳐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류 환환, 입이 크고 눈도 큰 것이 류 선생님을 빼닮았다. 그래도 루원리 쪽을 훨씬 더 많이 닮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심사위원들로부터 류 환환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루 국장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더니 그는 이런 회신을 보 내왔다. '모든 조건이 좋은 아이예요. 아마도 두 학생이 끝까지 남을 것 같은데, 그중 한 아이가 그 학생입니다." 나는 루 국장의 문자를 루원리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말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그녀는 목이 메는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고마워.., 고마...." 내가 말했다. "누구한테 뭘 고맙다는 거야? 당신 딸아이의 조건이 원래 좋았던 거야. 재능도 있고 표현도 잘했고. 시험도 아주 잘 봤다던데!" 그녀가 말했다. "요즘 일들 나도 알아. 고마워, 친구." 그녀는 가방 속을 더듬어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옛 친구, 내 동창, 고마운 친구야. 이거 만 위안이야. 약소하다고 거절하지 말고 루 국장이랑 다른 분들에게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줘." 나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말했다. "알았어, 친구. 내 받아두지." (pp. 16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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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6
  • 【북토크】 아내 폭력
    어떤 책을 읽다 소개받은 책이 이 책이었다. 책 서문에서 처음으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시를 보고 마지막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시를 읽어주니 마지막 부분에 아내가 맞아 죽었다는 결론을 예측했다. 여자였기에 가능한 촉이었던 것 같다.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 아내에 대한 폭력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매맞는 아내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성경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다. 목사나 장로 중 아내를 구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내를 귀히 여기고 대등한 한 인격으로 존중하자. 나와 함께 30년째 살아주는 “아내님”이 고맙다!(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는데,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절판됐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이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지난밤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지요 그리고 그는 잔인한 말들을 많이 해서 제 가슴을 아주 아프게 했어요 그가 미안해 하는 것도 말한 그대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 알아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요 지난밤 그는 저를 밀어붙이고는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정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지요 온몸이 아프고 멍 투성이가 되어 아침에 깼어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머니날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니었어요 지난밤 그는 저를 또 두드려 팼지요 그런데 그전의 어떤 때보다 훨씬 더 심했어요 제가 그를 떠나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아이들을 돌보죠? 돈은 어떻게 하구요? 저는 그가 무서운데 떠나기도 두려워요 그렇지만 그는 틀림없이 미안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바로 제 장례식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드디어 저를 죽였지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제가 좀더 용기를 갖고 힘을 내서 그를 떠났더라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pp. 15-16). "아내 폭력"이 가족 유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권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성별 제도가 여성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는 과정의 의미로 생각되기보다는 선언적 진실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관념적으로는 긍정적, 진보적 가치로 간주되지만, 여성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때는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김은실, 2000). 이러한 문화적 상황이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이유이다. 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은 폭력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이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 버린다. 폭력당하는 아내가 가정에서 어머니, 아내이기 이전에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 글의 요지는, 모든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식의 당위적 선언이 아니다. "아내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불가피하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등 남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개인성, 시민성을 획득하는 문제는 곧 가족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내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가족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중재가 요구된다(조주현, 2000).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을 통해서만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획득해 왔던 여성이 직접 국가/사회와 협상하는 주체, 사회적 시민으로 나서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최근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이 모색 되고 있긴 하지만 이제까지 여성 운동 진영조차 가족/아동 중심의 관점, 가정 폭력의 관점에서 "아내 폭력을 논의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내 폭력"을 비롯한 모든 가정 폭력 현상은 가족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동성애 커플의 가정 폭력과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하는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를 구타한다는 사실은 여성주의자에게 폭력과 권력, 가족과 친밀성, 성과 성별, 성별 제도와 결합한 다른 사회적 모순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pp.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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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5
  • 총회 선거의 “영남 VS 비영남 프레임”...타당한가?
    필자는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는 경기도, 어머니는 충청도 분이시나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군목으로 4년간 경기도 북부지역에 살았던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서울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고향인 서울에서 살고 싶다. 그러다보니 영남, 호남, 충청권의 지역정서를 잘 모른다. 어쩌다보니 아내도 경기도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역감정을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다. 단지 지방으로 가서 담임목회를 할려면 그 지방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는 말만 들어봤다. 하지만 담임목회 15년도 서울시 용산구에서 했다. 지역정서, 지역감정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가 되면서 부터였다. 총회 임원이 서울·서북, 중부·호남, 영남의 3개 구도로 돌아간다는 것도 기자가 되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 협의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됐다. 그만큼 서울에서 살기에 지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총회는 지역의 인물들에게 골고루 섬길 기회를 주기 위해 3개 구도로 순환하게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지역과 인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향을 떠나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다보니 생겨난 현상이다. 그래서 같은 지역권내에서 경쟁을 하지만 결국 고향 경쟁이 되어버린다. 노회 소속과 달리 후보자의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 표의 향방이 달라지기도 했다. 금번 목사부총회장 선거를 바라보며 예측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영남 VS 비영남 프레임”이다. 공교롭게 총회장을 역임한 배광식, 권순웅, 오정호 목사와 109회 총회장이 될 김종혁 목사는 모두 고향이 영남이다. 그래서 만약 영남 출신인 장봉생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면 모두 5명이나 내리 영남이 총회의 주도권을 가지기에 혹자는 이것을 “영남 패권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패권주의(覇權主義)”란 ‘권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부정적인 뜻이 강하다. 또한 ‘패권(覇權, 그리스어: ἡγεμονία, 영어: hegemony)’이란 ‘어떤 집단을 주도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이자 어느 한 지배 집단이 다른 집단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정치, 경제, 사상 또는 문화적 영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설명되어 있다. 이 또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영남에서 4명의 총회장이 나온 것에 대해 패권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총회의 다른 임원을 비롯해 총회장은 하나님과 총회를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 남을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 이것은 “종의 리더십”으로서 우리 모든 신자들이 특히 총회를 섬기는 모든 임원들, 기관장들, 상비부장들이 가져야할 기본 자세이다. 그동안 영남에서 4명의 총회장이 나오게 된 이유는 노회 지역과 후보자의 고향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생긴 현상이었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금번 109회 부총회장 후보는 서울·서북지역 서울노회 장봉생 목사, 동안주노회 김동관 목사다. 공교롭게 장봉생 목사의 고향은 영남이고, 김동관 목사의 고향은 경기도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장봉생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면 영남이 내리 5번이나 총회 교권을 쥐는 “패권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억측이요 비논리다. 서울노회가 서울·서북지역에 속하기에 이 지역에 속하는 노회의 모든 목사는 부총회장에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장봉생 목사가 출마했는데 공교롭게 그의 고향이 영남인 것뿐이다. 결국 의도치 않게 영남 출신 목사들이 총회장들이 되어온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영남 VS 비영남”으로 선거 프레임을 짜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 프레임은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며 이는 총회 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후보의 이력과 공략, 비전을 근거로 투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와 고향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이유없이 이것이 불리하게 작용하거나 유리하게 작용해서는 안된다. 세상 선거에서는 이기기 위해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지역 소외론", "지역 견제론" 등을 내세우며 지역으로 뭉쳐 표몰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총회에서마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지역을 떠나 후보 자체를 보고 투표하는 것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아닌가? 타고난 지역으로 “손해”를 보거나 “이익”을 얻는 일이 없는 선거가 되기를 바래본다. 총회 선거는 세상 선거와 달라야하지 않겠는가! 총회 선거 관련 기사 링크: ① 세상정치 vs 교단정치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1990 ② 민찬기 목사, 왜 서북협을 찾아갔는가?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1999
    • 오피니언
    • 논단
    2024-09-13
  • 세상 정치 VS 총회 정치
    사람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다. 정당 등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삶과 관련된 넓은 의미의 정치다. 그래서 총회에도 정치가 있다. 올해도 총회 정치를 위해 여러 후보들이 나섰고 이들 뒤에는 지지 그룹과 사람들이 있다. 부회계를 제외한 모든 직책이 경선이다.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후보들은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각자의 역량과 공약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선거에서 무리하게 이기고자 할 때 유혹이 생긴다. 첫번째는, 금권선거이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이다. 한 증경 총회장은 “돈을 뿌려야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대놓고해서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유권자인 총대와 그를 파송한 노회, 교회를 능멸하는 것이다. 금권 타락선거를 철저히 배제하는 금번 총회 선거가 되어야한다. 먼저 총대들이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후보들이 “공명선거 서약식”을 했듯이 총대들도 “공명투표 서약식”을 해야할 것이다. 총대들이 돈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줘야할지 고민 중이라는 후보들도 있다. 총대들도, 후보들도 바뀌어야한다. “총대들은 받지 말고, 후보들도 주지 말자!” 두번째는,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현재 교단은 3개 지역 구도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출마자가 어느 지역 사람이냐로 결론지어진다. 목회자가 지역 출신지를 떠나 목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후보자들에게 생기는 유혹은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혈연, 지연, 학연이 유별나다. 친인척인지, 고향이 어딘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서로 모르는 가운데 이 중에 하나라도 관련이 있으면 “갑자기” 친근감이 생긴다. 그래서 초면인 경우 열심히 호구조사를 한다. 문제는 여기에 부당한 이권이 개입될 때이다. ‘혈연, 지연, 학연’을 이유로 까닭없이 차별하고, 근거없이 특혜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합동 교단은 3개 지역 구도로 나뉘어 나름 지역 안배를 하고 있으나 지역간 갈등과 대립 양상을 띄는 경우가 많다. 금번 총회 선거에도 전가의 보도처럼 지역주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있다. 우리사회도 지역주의로 수많은 패단이 지속되고 있다. 표를 얻고자하는 자들이 지역 연고를 주장하며 “쉽게” 금뺏지를 다는 것을 본다. 그 지역 출신이면 “막대기”만 꽂아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한탄스러워도 세상 정치는 그러하다. 그러나 총회 정치는 그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총회 임원으로 나서는 자들은 이권을 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 출마했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세상에서 사용하는 지역주의를 이용해서는 안된다. 세상 지역주의는 자기 지역 사람을 뽑아 무엇인가 이득을 볼려고 하지만 총회는 그렇지 않다. 자기 지역 후보를 선출한다고해서 그가 그 지역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 세상은 지역주의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총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총회 선거때마다 지역주의 망령이 활보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후보의 걸어온 길과 그의 역량, 공약과 비전을 보고 선택하면 된다. 총회 선거를 앞두고 총대들은 "금권선거"와 "지역주의"를 배격하며 선택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 오피니언
    • 논단
    2024-09-1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기고】 정년제, 과연 성경적인가?
    다음은 원 철 목사의 정년제 폐지를 주장하는 기고문이다. 본 기고는 빛과소금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은 성경말씀을 기본바탕으로 세워진 보수교단이며,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단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 원리로 해서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늘 염려하는 것들이 있다. 과연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이라는 것을 앞세워 정치와 사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슴에 품고 살려고 성도들도 몸부림치며, 목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회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이 우리 교단에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고 몹시 아프다. 교회와 기독교를 보는 사회에서의 시선 때문에 정년제를 사수해야 하거나 정년제를 지금보다 5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습제도가 마치 죄인인 것처럼 보는 것 역시 사회시선을 의식한 것 같다. 이유는 사회가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년을 연장하거나 세습을 하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천주교는 75세 정년이 있으나 자율에 맡겨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은퇴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천주교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에도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불교를 비난하는 소리나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히 기독교만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에서 비난할 것이라고 이유를 댄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사회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는지 교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나 근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왔다.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신앙을 본받아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분들의 영향으로 우리 교단이 보수교단이라는 명분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좋아서 합동이라는 교단이 태어났고 이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정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제108회 총회에서 박00 목사는 정년제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발언하기를 정년제 연장을 해서는 안 되며 40대 50대의 80%의 젊은 목사들이 담임목사 근처도 못 가고 있다며 지금 400~500여명이 담임목사 되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담임목사도 한번 못하고 은퇴해야할 형편”이라며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수 신학은 어디로 가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인간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주장하고 시도하려고 하는가? 우리의 사역과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사역인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젊은 세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 깊이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는(Baby Boom Generation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비붐이 일어난 시기에 출생한 세대를 말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여 이 몸 바쳐 주의 일을 하렵니다”라고 찬양하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이 빈곤한 살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하에 삭월세를 얻고 칸을 막아 살림을 하면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베이비붐 세대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40대, 50대, 80%의 젊은 목사들은, 개척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가 70세가 되어 은퇴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선배들이 열심히 사역하여 이루어 놓은 부흥된 교회에 청빙 받아 안전하게 목회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예로, 대형교회에 담임목사 청빙광고가 나오면, 100~200여통의 이력서가 접수된다고 한다. 중소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생활비를 얼마 주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사택은 몇 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 상여금은 얼마나 주느냐? 자가용은 제공하느냐? 월요일은 쉬느냐? 월요일에 출근하면 출근 수당은 주느냐? 새벽기도회에와 금요기도회를 하면 수당을 얼마나 주느냐? 부터 묻는다고 한다. 반면 시골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아예 이력서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시골교회와 소형교회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담임목사를 모시지 못하여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중소도시에서도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하여 힘들다고 한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도 이대로 가면 2026년부터 목회자가 모자라는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교회들도 교육전도사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은 적은데 베이비붐 세대가 열정적으로 개척하며 교회를 세웠던 분들이 앞으로 10년동안 계속 은퇴하시기 때문이다. 지방도시나 시골에는 부교역자가 없어서 사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담임목사 타령이나하고 있는 세대를 볼 때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박00 목사가 말한 것처럼 기성세대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듣기 좋은 말로서 군중들의 인기를 모으는 이야기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 분은 역사학자로 알고 있는데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유학 가는 신학생들이 부쩍 늘어났으며 유학파들이 40~50대에 주를 이루고 있다. 유학 다녀온 분들 가운데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들고 교회를 개척하려는 뜨거운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의 기성교회의 후임자로 가려고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으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우고,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더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꼭 큰 교회의 빈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대형교회 후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베이비붐 세대가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대안인가? 묻고 싶다. 제104회 총회에서 우리 대전중앙노회가 ‘정년제 연구위원회’를 두어 연구해서 보고하기로 제안하였다. 이를 총회가 받아들였고 결의해 주어 2년동안 정년제연구위원회(위원장 고영기 목사)가 조직되었고 신학자 4분에게 의뢰하여 그분들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공청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20년 4월 21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정년연구를 위한 공청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자 서창원 교수, 실천신학자 양현표 교수, 구약신학자 이희성 교수 3분과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발표하였다. 4분 중에, 한 분만 조심스럽게 사회의 관점이 있음으로 정년제를 현행대로 유지하거나 73세로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 서창원 교수, 이희성 교수, 김근수 교수는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 정년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보수교단들을 조사하여 본 결과 미국교단들도 정년제가 거의 없음을 보고하였다. 제108회기 신학부주최 대전중부지역 ‘교회와 신학세미나’에서 김길성 교수는 정년제에 대하여 ‘교회에는 2가지 직분이 있는데, 하나는 ’항존직‘으로서 영원히 있는 것으로서 목사나 장로가 은퇴하고 사역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목사를 목사로 장로를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무’가 있는데 시무는 기간을 정하여 사역을 하는 것으로서 우리 총회에서 시무연한을 정해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0년 사역을 하고 은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싶다. 시무 연한이 과연 성경적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70세가 되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하는가? 성경적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탕으로 보수를 지향하고 있으며 칼빈의 신학사상과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헌법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디로 가고 인간의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는가? 헌법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경이 우선인가?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정체성이 아닌가? 신학정체성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과연 신학정체성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왜 장로들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정년제 연장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를 나이가 들면 너무 시대적으로 낡은 생각과 열정이 사라져서 교회 부흥에 도움이 안 되므로 정년제를 65세로 하향해서라도 빨리 젊은 목회자로 담임목사를 교체하여야 교회가 신선해지고 젊어지고 부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성경적이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장로들이 이런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목사들이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므로 먼저 목사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성경에 어디에 70세가 되었으니 은퇴하라는 내용이 있는가? 필자가 제안하는 ‘정년제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고자 세워진 교단이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이며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제13장 제3조 장로. 집사 임직서약 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으로 믿느뇨?” 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을 가르켜 선지자라고 했고 모세 역시 선지자라고 했으며 120세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사무엘선지자 역시 죽기까지 사역을 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예언자 대선지자 소선지자 사사 왕 모두 정년이 없는 종신직이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정년이 없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 7집사들도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은사로 사역을 주실 때 사도 목사 교사들에게도 정년이 없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독 장로 집사를 임명할 때에도 정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사도요한은 오히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하고 96세에 순교하였다.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직분에 맞게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가랴제사장 역시 늙었으나(눅 1:8~9, 18) 하나님께서 맡겨준 성전에서의 사역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목사와는 사역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역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왜 성경에서는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사역에 대해서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행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사명을 선언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역자들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정년제를 시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디모데전서 3장에도 장로와 집사를 선발하는 기준에도 정년 규정이 없다. 항존직이란, 옛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終身)토록 시무한다.”고 되어 있다. 항존직(恒存職)이라는 말은 자신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시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창원 교수는 정년제법을 ‘제정하는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실천신학 양현표 교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주제에서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건강지수가 현격히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정년제는 성경과 헌법 정신에 어긋났다’고 지적했다. 지금 현행대로 가면, 2029년부터 목회자의 수가 179명이 모자라며 교회수를 현재대로 유지하고 신학교 지원자들이 감소하는 경우 당장 3년 후인 2027년부터 목사의 수가 140명이 모자라며 2035년에는 무려 2,960명이 모자랄 것이라고 통계를 통하여 전망하였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우며 각 노회마다 교회를 폐교하는 청원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전국신학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총신도 2021학년부터 정원미달이 되었으나 박성규총장이 열정적으로 홍보한 결과 미달은 겨우 면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2029년에는 100명정도 입학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성장이 퇴보하고 있으며 지금은 매년 3천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교인 수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박성규 총장 역시 신대원 입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시점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달로 심각한 현실로 가다오고 있다고 하였으며 유럽의 뒤를 따라 문을 닫는 교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희성 교수는 우리 교단 헌법에는 1992년 제77회총회에서 정년제를 시행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에서는 “목회자의 정년을 교단에서 규정하지 않고 개 교회에 일임하여 교회에서 정하는 것으로 한다”고 보고하였다. 대신교단은 현행 정년제가 성경적이 아님으로 성경말씀에 준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단호하게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개혁교단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교단으로서 당연하게 정년제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개혁, 대신을 비롯한 독립교단들은 일찍이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이희성 교수와 김근수 교수가 미국장로교 10개 보수교단을 조사한 결과 9개 교단이 정년이 없음을 발표했으며 초창기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교회들을 세우고, 우리 총회를 세우고 우리 교단 헌법을 만들 때에도 미국교회의 성경적인 헌법을 기준으로 하여 정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우리 총회는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부터 정년제를 시행하였다. 미국 R.C.A.교단 만이 70세 정년이 있지만 “70세가 된 목사나 은퇴한 목사라할지라도 교회와의 계약에 의하여 위임의 형식으로 사역을 지속할 수 있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미국 남침례교회는 ‘목회자의 청빙에서 은퇴까지 전적으로 개교회의 특성과 자율성에 일임하기에 교단적으로 목사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으며 목사 시무정년은 종신토록 시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년제 폐지를 반대하는 분들의 의견은 대부분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적인 관점에서 지탄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필자가 정치를 잘 하시는 목사님에게 고견을 들으려고 정년제는 성경적이 아님으로 정년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이야기 했더니 “목사님은 정치를 모르는구먼” 하면서 “정치적으로 안돼”하는 것이다. CTV에서 2주전에 “목사 장로 정년연장 필요한가?” 제109회 총회 특집 토론에서 함성익 목사와 박창식 목사가 패널로 나와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이 토론을 보면서 내가 왜 총회에 있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왜 이분들은 통계를 중요시하고 사회시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젊은 목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경청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기는 왜 한 마디도 안하는가? 이들이 우리 교단의 대표하는 목사들이 맞는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정체성을 주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개살구와 같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성경이다. 우리의 헌법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적인 것에 기준을 삼으면 안 된다. 지금의 우리 헌법은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70세 정년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렇다고 헌법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과 바탕으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경말씀에 비추어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성경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성경적이요 개혁주의 정신에 부합한 것이다. 교회법을 사회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전락하는 것으로서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했던 5500여년 전이나 사도들과 바울이 성경을 썼던 2000여년 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해서는 안 된다. 창조시대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기준을 따라야지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년제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보수를 지향하는 신본주의 우리 교단이 단호하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에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필자는 우리 교단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하였구나 충성된 종아! 칭찬받으며 하나님께서 배설한 천국잔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상급받는 신실한 사명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총회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이요, 보수적이며 개혁주의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매년 계속되는 정년제 폐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바로 세워지기까지는 계속 문제가 될 것이다. 정년연장이 아니라 폐지하여야 한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신본주의도 아니며 칼빈주의도 아니고 보수라는 말과 개혁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왜 해마다 수백 교회가 우리 교단을 탈퇴하고 떠나는지 생각해보라?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왜 눈치만 보고 있는가? 성경적으로 그 답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단이 정체성도 확립되고 세계 교단과 교회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신학교도 본래의 신본주의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제109회 총회에서 현명하게 결단해 주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9-18
  • 【북토크】 이야기 창조자, 작가...그 치열한 노력
    명절 연휴를 맞아 모처럼 쉬지 않고 책을 읽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취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22년 9월 3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34년 7개월 만에 퇴사한 문학전문 기자의 글 모음으로 400페이지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작가와 책을 알게 됐다. 계속해서 읽을거리가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책들이 도서관에 있기를 바래본다. 이 책 제목처럼 이야기는 오래 산다. 한때 네러티브 설교 방법이 유행했다. 이 설교를 잘하는 방법의 하나는 소설을 많이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을 통해 상상력이 계발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많은 베스트셀러를 쓴 정이정 작가와의 인터뷰 글이다. 몇 년 전 이 작가의 『7년의 밤』을 읽었는데 다 읽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내용이 길어 읽기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이 작가의 글 쓰는 태도가 대단해서 소개해 본다. "저는 일단 이야기의 얼개가 잡히면 아무리 길어도 석 달 안에 초고를 끝냅니다. 일단 초고를 마친 다음 1년에 걸쳐 말이 되게 다듬고 필요한 세부 사항을 취재해서 또 고치고 하면서 초고를 완전히 벗겨 냅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체로 2년 터울로 신작을 발표하게 되네요. 이 소설도 빨라야 2013년 봄에나 책으로 나 올 것 같아요." 초고를 완전한 원고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장면을 그릴 때에도 세 가지 정도의 다른 버전을 써 놓고는 그중 가장 나 은것을 고르는 방식을 택한다.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은행나무, 2009)의 마지막 장면은 ①승민이 병원에 불을 지른다 ②산사태가 나서 상황이 정리된다 ③글라이더를 이용해 탈출한다. 세 가지 결말을 써 놓고 고민하다가 마지막 것을 택했고, 『7년의 밤』에서 현수가 세령을 차로 치는 장면도 그렇게 썼다. 작가로서 모든 것을 이룬 듯한 정유정의 바람은 무엇일까? "‘정유정, 하면 이야기꾼’으로 불리고 싶어요. 문단의 평가에는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저는 『화씨 451』(황금가지, 2009)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한 말 ‘나를 통해 세상을 타오르게 하라’를 10년째 책상에 붙여 놓고 있어요. 제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불을 지르고 싶습니다. 다만, 상업주의니 영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니 하는 말들에는 마음이 상합니다. 저는 소설이 모든 이야기 예술의 샘이자 대지 같은 장르라고 생각해요. 제가 소설가인 걸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2012년), (pp. 32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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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9-17
  • 【북토크】 세월은 빠르게 지나간다
    이 책은 중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의 자전 에세이다. 1955년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그가 많은 우여곡절 속에 어떻게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아울러 초등학교 동창인 '허즈우'가 어떻게 큰 부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루원리'라는 여학생이 두 번의 사별 후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중년의 여인으로 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아래에 인용한 글은 책의 마지막 부분으로 딸을 위해 청탁하러 모엔을 찾아온 루원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추석 명절에 작은 조카가 결혼할 여자와 찾아왔다. 조카 나이가 벌써 34살이다. 아기 때 본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이처럼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는 늙어가며 추억만 쌓인다. 몇 시간만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책은 또 다른 책으로 나를 인도한다. 독서가 취미인 것이 다행이다(인터넷 교보문고를 보니 이 책은 2012년에 나와 절판됐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어야 할 듯하다.) 모옌 중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포크너, 찰스 디킨스와 비견되며 환각적 리얼리즘의 정수를 창조한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2007년에는 중국 문학평론가 10명이 선정한 중국 최고의 작가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본명은 관모예로 글로만 뜻을 표현할 뿐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모옌이라는 필명을 쓴다. 1955년 산둥성 가오미 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학업을 중 단하고 시골 생활을 하다가 1973년, 열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목화 가공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1976년, 고향을 떠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문학에 눈을 돌려 해방군 예술 단과대학에 입학해 1986년에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과 루쉰 문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그는, 1984년 발표한 「투명한 홍당무」를 통해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대표적인 장편소설 「홍까오량 가족」을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고, 그 작품의 일부를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제작해 198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중국 최고의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마오둔 문학상과 다자 문학상을 비롯해 프랑스 루얼 파타이아 문학상, 이탈리아 노니노 문학상, 홍콩 아시아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국국적 작가로는 첫 수상이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이 책 『모두 변화한다』는 그의 작품세계와 더불어 지난 30년간 중국의 사회 변화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첫 자전에세이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집 『달빛을 베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장편소설 『열세걸음』, 『개구리』,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술의 나라』, 『풀 먹는 가족』, 『풍유비둔』, 『맹그로브 숲』, 『탄샹싱』, 『사십일포』, 『인생은 고달파』 등이 있다. "류 선생님은 잘 지내셔?"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갔어."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어쩌다가. 류 선생님은 이제 예순 살을 겨우 넘었을 텐데." "나는 과부 팔자인가 봐. 내가 기가 세서 사내를 잡아먹는 건지." "무슨 그런 말을"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눈동자에 눈물이 어리어리 비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내 팔자가 사나워서..." 순간 나는 그녀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다만 술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그녀의 잔에 부딪칠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잔 안에 든 술을 몽땅 비우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건 사실 부탁이 있어서야." 그녀는 품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내 딸이야. 류 환환이지. 마오창 소년반 시험에 등록했고 벌써 2차까지는 시험에 붙어서 60명 안에는 들었어. 학부모들이 저마다 아는 사람을 찾아가 부탁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나도 이 늙은 얼굴이 부끄러운데도 당신을 찾아온 거야." 나는 손으로 사진을 받쳐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류 환환, 입이 크고 눈도 큰 것이 류 선생님을 빼닮았다. 그래도 루원리 쪽을 훨씬 더 많이 닮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심사위원들로부터 류 환환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루 국장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더니 그는 이런 회신을 보 내왔다. '모든 조건이 좋은 아이예요. 아마도 두 학생이 끝까지 남을 것 같은데, 그중 한 아이가 그 학생입니다." 나는 루 국장의 문자를 루원리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말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지?" 그녀는 목이 메는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고마워.., 고마...." 내가 말했다. "누구한테 뭘 고맙다는 거야? 당신 딸아이의 조건이 원래 좋았던 거야. 재능도 있고 표현도 잘했고. 시험도 아주 잘 봤다던데!" 그녀가 말했다. "요즘 일들 나도 알아. 고마워, 친구." 그녀는 가방 속을 더듬어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옛 친구, 내 동창, 고마운 친구야. 이거 만 위안이야. 약소하다고 거절하지 말고 루 국장이랑 다른 분들에게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줘." 나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말했다. "알았어, 친구. 내 받아두지." (pp. 16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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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6
  • 【북토크】 아내 폭력
    어떤 책을 읽다 소개받은 책이 이 책이었다. 책 서문에서 처음으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시를 보고 마지막 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시를 읽어주니 마지막 부분에 아내가 맞아 죽었다는 결론을 예측했다. 여자였기에 가능한 촉이었던 것 같다.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 아내에 대한 폭력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매맞는 아내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성경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다. 목사나 장로 중 아내를 구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내를 귀히 여기고 대등한 한 인격으로 존중하자. 나와 함께 30년째 살아주는 “아내님”이 고맙다!(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는데,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절판됐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이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지난밤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지요 그리고 그는 잔인한 말들을 많이 해서 제 가슴을 아주 아프게 했어요 그가 미안해 하는 것도 말한 그대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 알아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결혼 기념일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요 지난밤 그는 저를 밀어붙이고는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정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지요 온몸이 아프고 멍 투성이가 되어 아침에 깼어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머니날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니었어요 지난밤 그는 저를 또 두드려 팼지요 그런데 그전의 어떤 때보다 훨씬 더 심했어요 제가 그를 떠나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아이들을 돌보죠? 돈은 어떻게 하구요? 저는 그가 무서운데 떠나기도 두려워요 그렇지만 그는 틀림없이 미안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바로 제 장례식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드디어 저를 죽였지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제가 좀더 용기를 갖고 힘을 내서 그를 떠났더라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pp. 15-16). "아내 폭력"이 가족 유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권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성별 제도가 여성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는 과정의 의미로 생각되기보다는 선언적 진실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즉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관념적으로는 긍정적, 진보적 가치로 간주되지만, 여성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때는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김은실, 2000). 이러한 문화적 상황이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이유이다. 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은 폭력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이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 버린다. 폭력당하는 아내가 가정에서 어머니, 아내이기 이전에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 글의 요지는, 모든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식의 당위적 선언이 아니다. "아내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불가피하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등 남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개인성, 시민성을 획득하는 문제는 곧 가족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내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가족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중재가 요구된다(조주현, 2000).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을 통해서만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획득해 왔던 여성이 직접 국가/사회와 협상하는 주체, 사회적 시민으로 나서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최근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이 모색 되고 있긴 하지만 이제까지 여성 운동 진영조차 가족/아동 중심의 관점, 가정 폭력의 관점에서 "아내 폭력을 논의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내 폭력"을 비롯한 모든 가정 폭력 현상은 가족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동성애 커플의 가정 폭력과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하는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를 구타한다는 사실은 여성주의자에게 폭력과 권력, 가족과 친밀성, 성과 성별, 성별 제도와 결합한 다른 사회적 모순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pp.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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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5
  • 총회 선거의 “영남 VS 비영남 프레임”...타당한가?
    필자는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는 경기도, 어머니는 충청도 분이시나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군목으로 4년간 경기도 북부지역에 살았던 것을 빼고는 지금까지 서울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고향인 서울에서 살고 싶다. 그러다보니 영남, 호남, 충청권의 지역정서를 잘 모른다. 어쩌다보니 아내도 경기도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역감정을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다. 단지 지방으로 가서 담임목회를 할려면 그 지방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는 말만 들어봤다. 하지만 담임목회 15년도 서울시 용산구에서 했다. 지역정서, 지역감정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교계 기자가 되면서 부터였다. 총회 임원이 서울·서북, 중부·호남, 영남의 3개 구도로 돌아간다는 것도 기자가 되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 협의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됐다. 그만큼 서울에서 살기에 지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총회는 지역의 인물들에게 골고루 섬길 기회를 주기 위해 3개 구도로 순환하게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지역과 인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향을 떠나 다양한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다보니 생겨난 현상이다. 그래서 같은 지역권내에서 경쟁을 하지만 결국 고향 경쟁이 되어버린다. 노회 소속과 달리 후보자의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 표의 향방이 달라지기도 했다. 금번 목사부총회장 선거를 바라보며 예측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영남 VS 비영남 프레임”이다. 공교롭게 총회장을 역임한 배광식, 권순웅, 오정호 목사와 109회 총회장이 될 김종혁 목사는 모두 고향이 영남이다. 그래서 만약 영남 출신인 장봉생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면 모두 5명이나 내리 영남이 총회의 주도권을 가지기에 혹자는 이것을 “영남 패권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패권주의(覇權主義)”란 ‘권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부정적인 뜻이 강하다. 또한 ‘패권(覇權, 그리스어: ἡγεμονία, 영어: hegemony)’이란 ‘어떤 집단을 주도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이자 어느 한 지배 집단이 다른 집단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정치, 경제, 사상 또는 문화적 영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설명되어 있다. 이 또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영남에서 4명의 총회장이 나온 것에 대해 패권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총회의 다른 임원을 비롯해 총회장은 하나님과 총회를 섬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 남을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 이것은 “종의 리더십”으로서 우리 모든 신자들이 특히 총회를 섬기는 모든 임원들, 기관장들, 상비부장들이 가져야할 기본 자세이다. 그동안 영남에서 4명의 총회장이 나오게 된 이유는 노회 지역과 후보자의 고향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생긴 현상이었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금번 109회 부총회장 후보는 서울·서북지역 서울노회 장봉생 목사, 동안주노회 김동관 목사다. 공교롭게 장봉생 목사의 고향은 영남이고, 김동관 목사의 고향은 경기도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장봉생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면 영남이 내리 5번이나 총회 교권을 쥐는 “패권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억측이요 비논리다. 서울노회가 서울·서북지역에 속하기에 이 지역에 속하는 노회의 모든 목사는 부총회장에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장봉생 목사가 출마했는데 공교롭게 그의 고향이 영남인 것뿐이다. 결국 의도치 않게 영남 출신 목사들이 총회장들이 되어온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영남 VS 비영남”으로 선거 프레임을 짜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 프레임은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며 이는 총회 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후보의 이력과 공략, 비전을 근거로 투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와 고향을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이유없이 이것이 불리하게 작용하거나 유리하게 작용해서는 안된다. 세상 선거에서는 이기기 위해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지역 소외론", "지역 견제론" 등을 내세우며 지역으로 뭉쳐 표몰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총회에서마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지역을 떠나 후보 자체를 보고 투표하는 것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아닌가? 타고난 지역으로 “손해”를 보거나 “이익”을 얻는 일이 없는 선거가 되기를 바래본다. 총회 선거는 세상 선거와 달라야하지 않겠는가! 총회 선거 관련 기사 링크: ① 세상정치 vs 교단정치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1990 ② 민찬기 목사, 왜 서북협을 찾아갔는가?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1999
    • 오피니언
    • 논단
    2024-09-13
  • 세상 정치 VS 총회 정치
    사람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다. 정당 등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삶과 관련된 넓은 의미의 정치다. 그래서 총회에도 정치가 있다. 올해도 총회 정치를 위해 여러 후보들이 나섰고 이들 뒤에는 지지 그룹과 사람들이 있다. 부회계를 제외한 모든 직책이 경선이다.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후보들은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각자의 역량과 공약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선거에서 무리하게 이기고자 할 때 유혹이 생긴다. 첫번째는, 금권선거이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이다. 한 증경 총회장은 “돈을 뿌려야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대놓고해서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유권자인 총대와 그를 파송한 노회, 교회를 능멸하는 것이다. 금권 타락선거를 철저히 배제하는 금번 총회 선거가 되어야한다. 먼저 총대들이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후보들이 “공명선거 서약식”을 했듯이 총대들도 “공명투표 서약식”을 해야할 것이다. 총대들이 돈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줘야할지 고민 중이라는 후보들도 있다. 총대들도, 후보들도 바뀌어야한다. “총대들은 받지 말고, 후보들도 주지 말자!” 두번째는,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현재 교단은 3개 지역 구도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출마자가 어느 지역 사람이냐로 결론지어진다. 목회자가 지역 출신지를 떠나 목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후보자들에게 생기는 유혹은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혈연, 지연, 학연이 유별나다. 친인척인지, 고향이 어딘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서로 모르는 가운데 이 중에 하나라도 관련이 있으면 “갑자기” 친근감이 생긴다. 그래서 초면인 경우 열심히 호구조사를 한다. 문제는 여기에 부당한 이권이 개입될 때이다. ‘혈연, 지연, 학연’을 이유로 까닭없이 차별하고, 근거없이 특혜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합동 교단은 3개 지역 구도로 나뉘어 나름 지역 안배를 하고 있으나 지역간 갈등과 대립 양상을 띄는 경우가 많다. 금번 총회 선거에도 전가의 보도처럼 지역주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있다. 우리사회도 지역주의로 수많은 패단이 지속되고 있다. 표를 얻고자하는 자들이 지역 연고를 주장하며 “쉽게” 금뺏지를 다는 것을 본다. 그 지역 출신이면 “막대기”만 꽂아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한탄스러워도 세상 정치는 그러하다. 그러나 총회 정치는 그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총회 임원으로 나서는 자들은 이권을 취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총회를 섬기기 위해서 출마했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세상에서 사용하는 지역주의를 이용해서는 안된다. 세상 지역주의는 자기 지역 사람을 뽑아 무엇인가 이득을 볼려고 하지만 총회는 그렇지 않다. 자기 지역 후보를 선출한다고해서 그가 그 지역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 세상은 지역주의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총회는 그래서는 안된다. 총회 선거때마다 지역주의 망령이 활보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후보의 걸어온 길과 그의 역량, 공약과 비전을 보고 선택하면 된다. 총회 선거를 앞두고 총대들은 "금권선거"와 "지역주의"를 배격하며 선택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 오피니언
    • 논단
    2024-09-11
  • 【북토크】 그래도 교회가 잘한 한 가지
    유용주 시인의 글은 몇권을 봤다. 시, 수필, 이번에는 소설이다. 2001년에 나온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현재는 절판됐다. 나는 한 작가에 꽂히면 그 작가가 쓴 책을 계속 찾아본다. 이 책도 모처럼 그가 쓴 수필을 읽다가 시와 함께 읽게 된 초기의 소설이다. 소위 자전적 소설로 그가 가난한 살림살이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야학을 통해 검정고시를 보게 되었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광화문에 있는 정동교회에서 야학을 했다. 요즘같이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에 그래도 교회가 잘한 일중 하나는 야학이었다. 교회는 고립된 게토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와 소통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한다. 그것이 과거에는 야학이었다. 이 시대에는 무엇으로 이 세상과 이웃을 품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pp. 154-157.) 1978년 9월, 드디어 정동 제일교회 배움의 집에 입학을 했다. 은근하게 깊어가는 가을이었다. 노래로만 들었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덕수궁 돌담길보다 건너편에 있는 미 대사관저 담장이 훨씬 높고 경비도 삼업했지만 가을은 낙엽이 있어 아름다웠다. 배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많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정동교회는 1885년, 그 유명한 아펜젤러 목사가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였다. 국가 사적 제256호로 지정된 문화재 예배당은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키 큰 버드나무가 전봇대를 압도하고 담쟁이덩굴이 붉은 벽돌을 핥아 먹으며 휘감아 돌아 이끼와 함께 푸르렀다. 하얀 아치형 창문 앞에는 돌계단이 있고 정원에는 향나무와 진달래가 소담스레 가꾸어져 있었다. 배움의 집은 정동교회의 장기 선교계획에 포함된 불우 청소년 선도사업의 일환으로 1976년 9월 2일, 처음 문을 열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불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을 일 년간 가르쳐서 고 등학교에 진학케 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프로그램의 하나로, 1977년 8월에 제1기 수료생 스물네 명을 배출하였으며, 제3기부터는 학생수가 많아져서(우리 3기는 이백 명이 넘었다) 젠센기념관에서 문화재 예배당으로 옮겨 수업을 했다. 예배당은 넓고 서늘했지만 우리는 희망에 부풀어 반짝거렸다. 입학식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자, 기도합시다." 고개 숙인 자세에서 실눈을 뜨고 길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옆 사람들을 엿보았다. 동료들도 나처럼 교회 의식에 낯선 표정들이다. 기도라는 말을 듣자 우선 전포동 살 때 전도관이 떠올라 슬그머니 웃음부터 삐져 나왔다. 여기는 신발 훔쳐가는 교회가 아니다, 여기는 우리를 위해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 주는 곳이다, 엄숙한 자리다, 진지해져야지, 마음을 다잡았으나 '길 잃은 양떼를 저희에게 보내사....' 대목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도를 집전하는 목사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곱게 늙어 점잖은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들은 '아멘'을 연발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선생님 한 분이 가만히 다가와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기억이란 얄궂은 놈인가 보다. 하필 이런 자리에서 부산 전도관과 누나 친구들이 생각날 게 뭐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더니 눈물이 나왔다. 첫날부터 실수를 하다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우리들은 긴 시간을 참회하고 반성하고 뉘우쳤다. 공장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수없이 만들었지만 한번도 기도하거나 참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그저 만들기도 쉽고 광내기도 쉬워 편하게 생각했다. 첫날부터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주인을 잘못 만난 것이다. 기분 좋아서 크게 웃어야 할 때 오히려 울음이 나오고, 정작 슬퍼 울어야 할 때 웃음이 나 오질 않나, 말을 꼭 해야 할 때 바위덩어리로 돌아앉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거짓말이 술술 나와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얼마나 많은가. 녹여서 다시 만들든지 보링을 하든지 갈아치워야 제 명대로 살 것 같다. 주기도문 낭독을 마지막으로 입학식은 끝이 났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우리에게 따뜻한 손들이 다가와 격려의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선생님들과 학생들만 남았다. "아까 목사님 기도하실 때 웃었던 사람 일어나요." "......" 화사하게 화장을 한 여선생님이 싸늘하게 좌우를 훑었다. 뜨끔했다. 물개똥을 싼 강아지처럼 엉거주춤 일어났다. "앞으로 나오세요." 여전히 군복 바지에다 재홍이 형이 산에 갈 때 신었던 등산화 차림이었다. 쭈뼛쭈뼛 앞으로 나갔다. 마룻바닥에서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백여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다. 여기저기서 튀밥 튀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앞으로 여러분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가장 많이 할 사람인데요, 배움의 집 실무간사를 맡고 있는 정수진이라고 합니다." 숱 많은 퍼머넌트에다 늘씬한 키다. 여선생님 중에서는 제일 키가 컸다. 정수진 선생님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첫 인상은 차고 쌀쌀하고 매웠다. "여러분, 어때요? 이 학생을 3기 회장으로 뽑고 싶은데, 다른 의견이 없는 사람은 박수를 쳐주세요." "좋아할 필요 없어요. 회장은 여러분을 위해 저와 함께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일꾼이에요. 체격이 좋아서 많이 부려먹어도 괜찮을 것 같죠?" 한바탕 웃음바다가 넓은 예배당 안을 넘실거렸다. 각 과목별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부회장을 뽑고 반을 편성했다. 반 편성은 성적순도 아니고 키순서도 아니고 주로 사는 동네와 버스정류장을 같이 이용하는 사람들끼리 묶었다. 시장 좌판에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열무 단이나 배추 단, 쪽파 단 속에는 오이나 가지나 풋고추나 씨감자도 너댓 개씩 들어 있어, 늦은 시각에 집으로 돌아갈 때 여학생들 안전까지도 책임을 지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힘든 일과 영양 부족으로, 자라기도 전에 타들어가 비쩍 마른 마늘쪽들은 얼떨결에 맡은 반장이라는 감투에 싯누렇게 웃었다. 우리만큼이나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는 선생님들은 서울 시내 중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현직 교사들이었고 상업이나 음악과 미술은 대학생으로 충당했다.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이분들은 낮 시간 동안 파김치가 되도록 근무하고 밤늦게까지 우리들을 위해 온 정열을 다 쏟았으니 나도 뜻밖에 얻어 쓴 감투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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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8
  • 【북토크】 뒤통수는 아는 사람이 친다
    가까운 사람이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많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친구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무리에게 암살당하면서 브루투스를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라틴어: Et tu, Brute?)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님도 12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을 때로 경계해야 한다.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이 뒤통수를 치고, 배신을 하면 더 아프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상종하면 안 된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되면 그런 짓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 백석도 친구에게서 그런 일을 당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자.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굳게 믿지 말자. 서글프지만 그것이 인간사인가보다! 백석의 슬픔과 사랑 1936년 4월, 백석은 경성 생활을 정리하고 함흥으로 건너갔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7일, 짝사랑한 박경련은 하필이면 통영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던 친구 신현중과 결혼을 하게 되고, 백석은 충격에 휩싸인다. 신현중은 파혼남이었다. 신현중이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파혼까지 하며 결혼한 상대가 하필이면 백석이 오매불망, 짝사랑한 박경련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과 결혼한 상대가 친구였으니 이 소식은 그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에서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라는 시구를 통해 백석의 상심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시는 1938년 〈여성> 4월호에 발표된 시인데 시인은 밖이 아닌 하이얀 이불 위에서 ‘마른 팔뚝의 /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 가진 것’을 생각하며 울분을 삭히고 있는 중이다. 백석의 생각에는 박경련 모친이 백석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신중현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 다 자신의 가난 때문인 듯하고, 갑자기 마른 팔뚝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온기 없는 마른 인생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누구보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백석이 신간서 하나도 없는 시절을 견뎌야 하고, 편시춘의 서두에서 노래하는 ‘아서라 세상사’로 시작하는 판소리 단가조차 들을 수 없는 가난이 새삼 슬퍼진다. 너무나 가난했던 백석에게 짝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슬픔인지도 모른다. 박경련의 모친 입장에서는 백석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보다 신현중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남 하동 출신 신현중은 경성제대를 입학한 수제였는데 시국관련 저항운동에 가담한 죄로 3년형을 살다가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지냈지만, 결혼 후 통영에 정착하며 다양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pp.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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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3
  • 【북토크】 영화 『밀양』...값싼 은혜의 부작용
    『밀양』의 이창동 감독은 내가 신일고등학교 다니던 1982년도에 국어 선생님이셨다. 직접 배우지는 않고 다른 국어 담당 변인식 선생님께 배웠다. 이분은 유명한 영화평론가로 가끔 영화 얘기를 해주셨던 것 같은데 기억은 없다. 신일고등학교는 한국유리 재단 소속으로 지금은 서울사이버대학교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 당시 넓은 교정은 대학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대학을 설립하지는 못하고 대신 사이버대학을 운영하는 것 같다. 신일고는 미션 스쿨이라 이창동 선생님도 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신자로서 기독교의 값싼 은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한다. 갓 신앙을 갖게 된 여주인공이 자기 아들을 유괴해 죽인 범죄자를 기독교의 용서를 실천하기 위해 찾아 갔는데 그 ‘물건’은 감옥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며 자기 죄는 이미 다 용서 받았다는 ‘막말’을 한다. 이에 여주인공은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냐?”고 실성한다. 누가 그 살인자에게 기독교를 그렇게 전했는지 모르지만 잘못 가르쳐 준 것이다. 살인자는 피해자에게도 용서를 구해야지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용서 받았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용서가 얼마나 천박해지고 값싸질 수 있는지, 그리고 범죄자의 이런 반응을 볼 때 피해자가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밀양은 값싼 은혜에 만족하는 한국교회와 신자를 가시같이 찌르는 영화다. 이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본 책이 있어 소개해본다. 같은 영화지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한 특징이다.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pp. 113-118) 밀양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 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둘 다 어려운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년)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광주 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반드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소설에서, 아이를 살해한 남성은 피해자 가족에게 “제 영혼은 이미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저는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간증하고, 이 말을 들은 아이 엄마는 자살한다. 작품은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와 가해를 이야기 할 때의 주제들-더는 인간의 선을 믿지 않으며,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 저주, 복수심이라는 현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용서마저도 가해자의 권리인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 반이다. 처음 볼 때는 유괴 살인범(조영진 분)과 아이의 엄마(전도연 분)의 교도소 면회 장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중에 나왔다. 나의 어떤 경험과 겹치면서 더 볼 수 없었다. 극장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했다. 나는 그녀와 동일시했지만, 내 몸은 그녀를 담을 수 없었고 당연히 몸이 비틀리고 다리가 풀리고 휘청거렸다. 다행히 다음 두 번은 온전히(?) 다 보았다. 나는 이 영화의 두 장면을 가슴에 담고 산다. 하나는 여자 주인공이 경찰서에서 가해자와 마주쳤을 때의 태도이다. 가해자 앞에서 겁먹고 주눅 들었던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행동에 분노한다. "내가 왜 그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을까!" 이 장면은 그녀가 '부동산이 좀 있다고 자랑'한 것이 유괴의 원인이었다고 자책할 것이라는,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다. 감독은 범인과 마주쳤을 때 피해자의 반응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엄마의 이전 행동이 어떠했든 간에, 그것은 아이의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는 이 간단한 윤리, 아니 상식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흔히 사회가 보이는 반응은 "당신은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평소 네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런 일에 휘말리다니,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인데...)"이다. 자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머니의 고통과 대비되는 가해자의 마음의 평화. 이 이야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80년 광주'를 연상한 것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 즉 피해자 비난, 낙인, 고립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더구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구원'을 받은 데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반민특위의 실패부터 ‘나쁜 사람들’, ‘기회주의자’만이 살아남았던 것이 한국 현대사이고 우리의 일상이었다. ‘악한 자의 승리, 악한 구조의 승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 4·3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세월호, 최근 포항 지역의 지진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는 몸을 숨기고 사죄했다. ("저희들 때문에 수능이 연기되어 죄송해요.") 억울한 일로 평생을 불면의 밤과 싸우고 절망과 분노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가해자가 처벌 받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문제는 두 장면 중 나머지 한 장면으로 연결된다. ‘신앙의 힘으로 잠시 구조된 듯한’ 여주인공이 교인들과 다과를 나누면서 의기양양하게 소회를 밝힌다. "하느님이 제게 구원을 주셨으니, 저도 그분께 뭔가를 드려야겠어요."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의미다. 나는 이 장면에서 '피해자'라는 주제(主題)를 깨달았다. 맙소사.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과 동급인 줄 알고 있었다.(여기서 하느님은 절대성, 운명. 인생이라는 짧은 시간... 을 뜻한다.) 그녀는 '하느님'과 대적하려고 한다. 일 대일로 주고받는 관계. 그러니 자기도 하느님께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는가. 더 큰 고통만이 그녀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하느님(우주)’은 모든 것을 관장하는 원리지, ‘나(우주의 먼지)’와 무엇인가를 교환하는 상대가 아니다. 아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감히’ 갚겠다는 것인가. 이런 황당하고, 망상적이고, 확대된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이후에도 그녀는 물건을 훔치고, 유부남을 '유혹'하고, 집회 마이크를 끄는 등 계속 하느님과 협상하고, 대결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피해자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잃고 피해자가 되었을 때, 너무나 억울할 때, 고통이 숨통을 죄고 있을 때, 죽음만이 육체의 구원일 때····고통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일상인데도 고통은 줄지 않는다. 이자에 이자가 붙어 고통은 쌓여만 간다. 이때 유일한 출구는, "나는 순수한 피해자"라는 정체성이다.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그런데 이 우월함의 근거는 피해자가 생각하는 정의(justice)가 전부다. 피해=정의도 아닐뿐더러 누가 그것을 공감해주겠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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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8
  • 【북토크】 『헌법 해설 문답서』...방대한 자료의 집대성
    현(現) 교회 헌법 상담 연구소 소장인 정진모 목사의 오랜 총대 생활과 교회법 관련 직무를 통해 알게된 이론과 실제가 모아진 책이 『헌법 해설 문답서』이다. 519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양에 걸맞게 교회법과 관련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교보문고에 보면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발간 의도 1) 교회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님들이 영혼을 구원 하며 목양에 전념 해야 하는데 원치 않는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여 2) 교회가 혼란하여 목사와 장로가 당황하면서 질의 및 상담을 요청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으므로 그동안 ‘헌법해설 강의’와 질의, 답변을 해오던 중 많은 분들이 책 발간요청이 옴으로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2. 책의 내용이 문답식으로 쉽게 구성되었다. 1) 제1부 ‘장로회 정치’ 부분이 1장-22장 까지 문답식으로 해설하였다. 2) 제2부 제108회 예장(합동) 총회 재판국 워크숍에서 ‘교회 정치를 중심’으로 강의한 내용이 실려있다. 3) 제3부 헌법 ‘권징 조례’에 있는 ‘법률용어의 뜻’을 풀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4) 제4부 ‘장로회 3심제 재판’인 당회, 노회, 총회 재판에 대하여 헌법 ‘권징 조례를 중심’으로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기록되므로 참고하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5) 제5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합동) 총회 제1회부터-108회 총회결의를 요약하여 놓으므로 헌법의 유권해석과 행정적으로 질서 있는 목회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6) 제6부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정건, 재판건에 해당되는 문제를 격식없이 질문 답변 상담 내용을 가감없이 기록하므로 ‘질서 있는 교회’를 세워가는데 많은 유익을 줄 것을 확신하면서 내용을 담아 놓았다. ‘헌법 해설 문답서’ 1권을 구입하여 내용을 살피면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릴 것이다. 관련기사 링크: 교회헌법상담연구소, 『헌법 해설 문답서』 출판기념감사예배 6부를 먼저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질의159] 목사 위임식 때 부부서약이 헌법에 맞는지요? 목사 위임식 때에 목사와 아내(사모)가 같이 서약하는 모습을 간혹 보는데 부부가 같이 서약하는 것이 맞는지요? 답변] 헌법정치15장11조에 보면 위임예식에 있어서 위임서약은 위임받는 목사에 대한 서약이다. 부부서약으로 되어 있지 않다. 질의233] 장로장립 때 부인과 함께 서약하는 것 합법입니까? 장로장립 때 부인하고 함께 동석하게하고 같이 일어서서 서약을 하기도 하고 권면도 같이 합니다. 답변] 장로로 피선되어 고시합격하고 노회고시부 보고 후 승낙 된 자를 장립식 때 교회 앞에서 일어서서 서약하게 한다.(정치13장3조) 부인과 함께 서약하게 하는 것은 헌법 사항이 아니다. 질의237] 설교시간에 헤드셋을 쓰고 돌아다니면서 설교 가능합니까? 답변] 예배모범 위반이다. 질의262] 예배에 관한 총회결의를 알려주세요? 답변] 1) 열린예배 금지(84회총회결의) 2) 주일예배 외 임직식, 야외예배금지(41회 63회 84회) 3) 기도 설교 찬양할 때 강단에 올라가 촬영을 금하는 것이 좋다.(45회 총회 결의) 4) 녹회방송 예배는 예배모범에 위배됨(74회총회) 5) 찬송가 582장 “어둔밤 마음에 잠겨”는 교회에서 부르지 않기로 하다.(제73회, 93회 총회 확인 결의) 6) 예배시 복음성가와 선동적 악기사용은 금함(제78회 총회 결의) 7) 본 총회가 설정한 교직자 주초는(술, 담배) 강단에 세움을 금한다.(85회 총회) 8) 사순절을 성경적 절기로 지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더 연구키로하다(83회 총회결의). 사순절 교독문 사용하지 않기로 하다.(제93회 총회 결의) 9) 십자가 강단 부착 건은 부착할 수 없다.(42회, 74회) 10)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 않기로 하다.(62회 총회 결의) 11)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호칭은 부당하다.(84회 총회) 12) 공예배시 강단에 설 수 있는 자격자는 목사와 장로이다.(65회총회) 13) 본 총회가 허용치 않는 여목사나 여장로는 강단에 세울 수 없다.(85회 총회 결의) 14) 예배당경내 예배와 관련 없는 형상, 사람을 기념하는 시설물, 모양을 만들지 말아야한다.(제58회 총회 결의) 질의263] 총회에서 전광훈목사와의 관계를 신학부가 어떻게 정리했는지요? 답변] 제105회총회 이단사이비 대책 조사연구위원회보고 전광훈 목사의 건 결의. 1. 전광훈목사의 순간적 발언에 이단성이 있었고에 대해 1) 이단옹호와 관계된 적은 있었지만 2) 아직 명백하게 이단으로 규정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겨진다. 3) 그의 광적 신앙, 편양된 정치성향, 투사된 면이 있기에 앞으로 예의 주시 하고 4) 목사로서 지나치게 편향된 정치활동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로 하다. 5) 그가 공개적으로 회개 할 때까지 전광훈목사와 관련된 모든 집회에 교류 및 참여 자제를 촉구하도록 하기로 하다로 결의됨. 2. 106회 총회 이단 사이비 관련의 전광훈 씨 관련 동전주노회 헌의 이단성 조사의 건은 105회 총회 결의대로 처리하기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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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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