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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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 양대식 목사-“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사무엘하 9장 1-13절) 관계가 너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배신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다윗은 실수도 하고 죄를 지은 죄인이나 회개했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우정을 가지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해하려는 아버지의 편을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도와주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의리 지킨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상 18:1-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의리가 무너지고 서로 배신하는 시대에 의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의리의 하나님이시고 의리를 지키는 자들이 신뢰 얻고 성공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의리를 지키면 사람을 얻게 됩니다. 배신은 사탄의 성품입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에서 의리를 지키고 받은 은혜를 갚는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의 인격과 삶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은망덕은 받은 사랑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자는 짐승보다 못한 자입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은혜를 알고 끝까지 주인을 지키다가 죽기도 합니다. 충견입니다. 사무엘하 9:1-13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도와주고 끝까지 의리 지킨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도와주고 함께 식사했던 아름다운 인격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데 다리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므비보셋의 평생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가족 식구처럼 섬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므비보셋을 먹이고 큰 도움이 되어 준 다윗입니다. 요나단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갚는 다윗,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사랑에 감격하여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본다고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아는 므비보셋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사람에게 도움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의 기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복 받은 이유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려 하고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은혜 입고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없고 손해가 된다고 해서 받은 은혜 버리고 의리가 없이 배신하면 복을 받을 수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홉 가지 잘 해준 것은 잊어버리고 한 가지 서운하다고 의리를 버리고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섭섭하고 서운한 것이 있어도 내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고 감사하며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 귀신 들린 병을 고쳐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에 보답하려고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려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저의 인생철학 중의 하나가 ‘의리지키자,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은혜 보답하자’입니다.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인간관계에서 부부관계, 친구관계, 목사와 성도, 직장 안에서의 관계에서 의리 지키고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사랑과 은혜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의리 지키고 감사하고 배은망덕하지 않음은 덕을 세우고 선행의 실천이기에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예수님은 연약하고 흠이 많은 므비보셋 같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도와주신 사랑의 목자와 의리를 지키신 신실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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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5-11-14
  • 【단상】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취재 가다 보면 은퇴 목사들이 순서를 맡는 경우가 있다. 이때 대부분 말이 길다. 설교든, 축사든, 격려사든....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고, 사회자가 “짧게하라”고 요구해도 대놓고 듣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은퇴 후 말할 기회가 없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회중들이 탄식하거나 몸을 비트는 일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라는 말이 있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고 남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짧게 한다고 싫어할 회중은 없다. 짧을수록 회중이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나이 든 사람의 길어진 말 때문에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노인들은 행사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8
  • 【칼럼】 양대식 목사 인생철학
    나의 인생철학이 있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내게 도움 준 자 기억하고 은혜를 아는 자 되자. 배은망덕하지 말자. 주면서 살자. 손해는 입을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매사에 성실하자. 부지런하고 책임감을 가지자. 기도하며 살자. 고난은 힘이 드는데 지나고 보면 유익하다. 지나친 고집 버리고 융통성을 가지자. 주님께 지혜를 구하자. 남에게 상처 주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자. 정직하자. 주님의 은혜 사모하고 긍휼을 구하자. 주님께만 소망을 두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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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5-11-07
  • 【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11-05
  • 【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11-04
  • 【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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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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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 양대식 목사-“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사무엘하 9장 1-13절) 관계가 너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배신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다윗은 실수도 하고 죄를 지은 죄인이나 회개했고,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우정을 가지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해하려는 아버지의 편을 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도와주고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의리 지킨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상 18:1-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의리가 무너지고 서로 배신하는 시대에 의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의리의 하나님이시고 의리를 지키는 자들이 신뢰 얻고 성공하고 복을 받게 됩니다. 의리를 지키면 사람을 얻게 됩니다. 배신은 사탄의 성품입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에서 의리를 지키고 받은 은혜를 갚는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의 인격과 삶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은망덕은 받은 사랑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자는 짐승보다 못한 자입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은혜를 알고 끝까지 주인을 지키다가 죽기도 합니다. 충견입니다. 사무엘하 9:1-13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다윗은 요나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도와주고 끝까지 의리 지킨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도와주고 함께 식사했던 아름다운 인격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데 다리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을 멸시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므비보셋의 평생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가족 식구처럼 섬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므비보셋을 먹이고 큰 도움이 되어 준 다윗입니다. 요나단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갚는 다윗, 배은망덕이 없는 다윗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사랑에 감격하여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본다고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아는 므비보셋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사람에게 도움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의 기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복 받은 이유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으려 하고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은혜 입고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없고 손해가 된다고 해서 받은 은혜 버리고 의리가 없이 배신하면 복을 받을 수 없고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홉 가지 잘 해준 것은 잊어버리고 한 가지 서운하다고 의리를 버리고 배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섭섭하고 서운한 것이 있어도 내게 잘해 준 것만 기억하고 감사하며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 귀신 들린 병을 고쳐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에 보답하려고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보답하려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저의 인생철학 중의 하나가 ‘의리지키자,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은혜 보답하자’입니다.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인간관계에서 부부관계, 친구관계, 목사와 성도, 직장 안에서의 관계에서 의리 지키고 배은망덕하지 말고 받은 사랑과 은혜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의리 지키고 감사하고 배은망덕하지 않음은 덕을 세우고 선행의 실천이기에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예수님은 연약하고 흠이 많은 므비보셋 같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도와주신 사랑의 목자와 의리를 지키신 신실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5-11-14
  • 【단상】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취재 가다 보면 은퇴 목사들이 순서를 맡는 경우가 있다. 이때 대부분 말이 길다. 설교든, 축사든, 격려사든....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고, 사회자가 “짧게하라”고 요구해도 대놓고 듣지 않고 말이 길어진다. 은퇴 후 말할 기회가 없다가 기회가 주어지자 절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회중들이 탄식하거나 몸을 비트는 일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라는 말이 있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고 남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짧게 한다고 싫어할 회중은 없다. 짧을수록 회중이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말을 줄이자. 나이 든 사람의 길어진 말 때문에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앞으로 노인들은 행사에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8
  • 【칼럼】 양대식 목사 인생철학
    나의 인생철학이 있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내게 도움 준 자 기억하고 은혜를 아는 자 되자. 배은망덕하지 말자. 주면서 살자. 손해는 입을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 매사에 성실하자. 부지런하고 책임감을 가지자. 기도하며 살자. 고난은 힘이 드는데 지나고 보면 유익하다. 지나친 고집 버리고 융통성을 가지자. 주님께 지혜를 구하자. 남에게 상처 주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자. 정직하자. 주님의 은혜 사모하고 긍휼을 구하자. 주님께만 소망을 두자. 샬롬!
    • 오피니언
    • 칼럼
    2025-11-07
  • 【단상】 80만 원 vs 118만 원
    20년밖에 안 된 트라제를 하체 부식으로 폐차해야 할 상황이다. 6년 전 DPF를 설치한 업체에서 폐차와 관련한 톡이 왔기에 연락했더니 80만 원 준다고 했다. 가입한 동호회에 문의하니 헤이딜러라는 곳에 문의해 보라고 해 온라인으로 했더니 폐차비가 118만 원으로 책정됐다. 38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 정말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30여만의 차이라니. 이 정도면 사기꾼과 도둑놈 수준이다. 참 어이가 없다. 폐차 후 쓸 중고차를, 당근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 경차 스파크에 마음이 간다. 잘 구해져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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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5
  • 【북토크】 설탕이 만들어낸 역사의 여러 모습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설탕을 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설탕을 먹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설탕은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 설탕이 불러온 세계의 여러 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다. 설탕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생산 공정의 상당 부분이 기계화되었지만,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에는 여전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없었던 수백 년 전(p. 7)에는 모든 공정을 사람이 직접 했기에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설탕 생산과 유통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륙 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다. 많은 설탕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탕 산업에 뒤따른 잔혹했던 노예제와 대규모 인구 이동은 오늘날 세계 인구 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프리카 노예의 역사와 설탕 산업이 초래한 인구 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단지 설탕 산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큰 흐름과 그 속에서 형성된 현재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도 설탕으로 인한 이주의 역사가 있다. 바로 1900년대 초에 있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이 주다(p. 8). 포르투갈은 일찍이 마데이라제도와 아소르스제도 같은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부려 본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원주민보다 체력이 좋고 노동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섬의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퍼뜨린 병원균에 면역이 거의 없어 각종(p. 54)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발을 들인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원주민 인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렇게 흑인 노예를 동원해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방식은 포르투갈에서 시작되어 점차 영국,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산되었으며 훗날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519년에서 1867년까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흑인은 무려 125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에서 약 15퍼센트가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107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강제 이주는 없었다(p. 55).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자원과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성공하면서, 브라질의 인구 구성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체로 남성 중심이었던 포르투갈 이주민과, 현지 원주민 여성과의 혼혈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는 현대 브라질의 인구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현재 브라질은 백인과 혼혈이 전체 인구 중 각각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둘을 합치면 전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한다. 흑인은 10퍼센트가량이며, 원주민은 1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수백 년 전에는 포르투갈 본토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원주민 인구가 브라질 땅에 거주했지만, 지금은 백인과 혼혈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인종 국가가 된 것이다. 브라질의 공용어 또한 포르투갈어를 기반으로 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포르투갈어를 쓰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에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포르투갈의 플랜테이션 식민 통치 영향으로 브라질 경제의 핵심은 여전히 농업이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기도 한데, 심지어 설탕을 가공하여 에탄올을 추출해 자동차 연료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설탕이 화석 연료마저 대체한, '설탕 왕국' 브라질의 현재 모습이다(p. 124). 설탕이나 커피 생산뿐 아니라 광산업, 식량 농업 및 축산업, 운송업까지 성장해 브라질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 수입만으로 노동력을 충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노예 운송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용이 상승했고,(p. 126) 배 안에서 많은 노예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조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브라질의 포르투갈인 고용주와 관리인들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다름 아닌 브라질 내륙이었다. 브라질에는 초기 플랜테이션에 동원되었던 해안 지역의 원주민 투피 족 외에도, 과라니 Guarani 족 등 여러 부족이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문제는 1755년 이후 브라질 내에서 법적으로 원주민 노예화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지 관리인들은 내륙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는데, 원주민을 일부러 도발해 분쟁을 일으킨 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당시 원주민 사회에는 '전투에서 이긴 자가 패배자를 포로로 삼아 부릴 수 있다'는 오랜 전통이 존재했다. 포르투갈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의도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패배한 원주민을 포로로 삼은 뒤 노예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원주민을 몰래 납치해 광산이나 농장에 팔아 버리거나, 원주민에게 고리대금을 제공한 뒤 갚지 못 하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비열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원주민 착취가 이루어졌다(p. 127). 그러던 중 하와이 설탕 산업에 큰 변화를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남부 주들과 노예제 폐지를 원했던 북부 주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남부의 설탕 산업을 마비시켰고, 그 빈자리를 하와이가 채우게 되었다. 이에 가능성을 본 미국 투자자들이 금세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다만 앞서 하와이의 농지를 점유하고 있던 이주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이미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외부 투자자들이 그들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1875년, 미국과 하와이 왕국은 '호혜 무역 협정 Reciprocity Treaty'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하와이산 설탕을 미국에 관세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되어, 하와이의 설탕 업자들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이렇게 설탕 산업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당시 난립하던 80여 개의 소규모 농장들은 자본력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농장을 중심으로 통폐합되었다. 공급망 역시 간소화되며 불필요한 경쟁이 제거되 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 빅 파이브'로 불리는 다섯 개의 대기업이 등장했다. 이들은 하와이 설탕 산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며 사실상 하와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경제력을 손에 쥔 이들은 곧 정치에(p. 223)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국 하와이 왕국을 무너뜨려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한 뒤 하와이를 미국에 병합하는 과정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배경에도, 이처럼 설탕 산업이 깊숙이 얽혀 있다(p. 224). 한인 이주 역사의 시작 미국의 의사이자 선교사 호러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처음 조선에 들어와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고종과의 친분을 쌓은 알렌은 대한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고, 미국 정부는 그를 주한 공사로 임명했다.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 알렌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1902년 하와이 농장 이주를 알리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하와이라는 곳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먼 이국으로의 이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이 주로 이주를 시도하던 곳은 만주나 연해주로, 모두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에게도 이미 어느 정(p. 230)도 알려진 지역이었다. 반면 하와이는 완전히 생소한 곳인데다 심지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하니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고, 광고를 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의 지원자도 없었다. 결국 인천 내리교회의 헨리 존스 선교사가 자신의 교회 신도들을 설득하여 약 50명의 남녀를 모집해, 이를 계기로 총 121명의 지원자가 겨우 모이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개신교 목사, 유학생, 향리 출신 선비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부, 부두 하역 노동자, 군인 출신, 또는 무직자였다. 1902년 12월 22일, 이들 121명은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호에 탑승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배는 나가사키에 들러 그곳에서 신체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했다. 나머지 102명(p. 231)은 나가사키에서 미국행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남자 56명, 여자 21명, 아이 13명, 유아 12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다. 이들이 바로 최초의 한인 출신 미국 이민자들이다. 나가사키를 떠난 갤릭호는 10일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했고, 102명의 조선인 이민자는 오아후섬 북 서쪽에 있는 모레이아 지역의 와이알루아 농장에 처음 배치되었다. 이후 이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총 64회에 걸쳐 7415명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하와이 전역의 약 40개 설탕 농장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인원은 농장마다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00~300명에 달했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점심시간 30분 정도가 휴식으로 주어졌고, 허리를 펴거나 담배를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루나'라고 불렸던 농장 감독관은 소나 말을 다루듯 채찍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통제했으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릴 정도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하와이 이주 이후에는 멕시코로의 이민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해 독자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해외 이민도 중단되었다. 그러는 동안 하와이 이주민 중 일부가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인해 약 1000명이 귀국했고, 2000명 이상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주민 대부분은 하와이에 남아 농장 노동자 또는 자영농, 소상인 등으로 정착했다(p. 232).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몸 바친 조선인 청년들 앞서 말한 대로 하와이 이주민 중 많은 수는 그대로 하와이에 남아 정착했다. 하지만 일부는 열악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며 미국 본토나 멕시코, 쿠바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약 260만 명 규모를 이루고 있는 미주 재외 한인의 출발점이다. 이주민 다수는 비참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적은 수입의 일부를 기꺼이 떼어 독립운동 자금에 보탰다. 강한 민족적 연대를 바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주 조선인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사례인 유대인이 보여 준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p. 233). 한편, 하와이를 떠나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이미 활동 중이던 안창호와 서재필 등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던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된다. 바로 하와이에서 이주해 온 두 청년,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으킨 '스티 븐스 저격 사건'이다.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일하던 미국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조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조선인은 무지하고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 덕분에 문명화되고 있다"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많은 미주 한인의 공분을 샀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가 여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일제를 옹호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발언을 쏟아냈고, 이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 소속의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등이 그가 묵고 있던 호텔을 찾아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를 거절하며, "한국 황제는 무능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백성은 무지하다"라고 발언했다. 스티븐스를 찾아간 공립 협회 회원들은 격분하여, 의자를 들어 그를 구타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러 한인 단체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공립협회의 전명운이 그를 암살하겠다고(p. 234) 자청했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보국회의 장인환 역시 "총만 구해 주면 내가 죽이겠다"라며 나섰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배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인환과 전명운은 각자 권총을 챙겨 부두로 향했다. 전명운이 먼저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격발되지 않아,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그때 도착한 장인환은 전명운의 고함을 듣고 권총을 꺼내 발사했는데, 첫발은 전명운의 팔을 스쳤고 두 번째 총알이 스티븐스를 명중시켰다. 스티븐스는 함께 있던 일본 공사를 향해 쓰러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장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p. 235) 체포했으며,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했다. 이후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장인환은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구명을 위해 대동보국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변호사와 통역사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인환은 10년 후인 1919년 가석방되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산재했던 10여 개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고,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장인환은 1876년생으로 당시 32세, 전명운은 1884년생으로 겨우 24세였다. 두 사람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이민 노동자 출신으로 장인환은 1904년, 전명운은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두 젊은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철도 노동자와 어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 조국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거사를 감행한 것이다. 스티븐스 저격 이후 두 청년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명운은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이름을 '맥 필드Mack Fields'로 바꾸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 갔다. 이후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와 세탁소를 꾸리며 어렵게 살다가, 생활고로 귀국하지 못한 채 1947년 사망했다. 평양 출신이었던 장인환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스티븐스(p. 236) 저격 이후 10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27년 잠시 귀국해 평양에서 결혼하기도 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그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국을 위해 누구보다 청춘을 불사른 이들의 마지막은, 마치 시대가 일부러 외면이라도 한 듯 지독히도 쓸쓸했다. 이후 장인환과 전명운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 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p. 237). 설탕 재벌의 섬에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섬으로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경제의 근간이었던 설탕 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의 노력으로 하와이에서도 설탕 산업이 성공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고래잡이 어부들이 모두 사탕수수 산업에 매달렸고, 설탕 정제 공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즙을 끓이는 데 필요한 땔감은 산의 나무를 베어 마련했고, 하와이의 울창했던 숲은 차차 민둥산으로 변해 갔다. 또한 미국 본토에서는 하와이산 설탕을 구매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건너와 하와이에 직접 회사를 차렸고, 해운사들은 물류망을 구축했으며, 산업 규모가 커지고 정교화되자 금융, 보험, 투자 서비스도 잇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노동력 부족 문제가 더욱(p. 243) 심각해졌다. 하와이에서 생산된 설탕은 모두 미국 본토에 수출되었기에, 미국이 부과하는 수입 관세는 하와이 설탕의 경쟁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관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 준다면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남부나 카리브해에서 생산된 설탕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초기 하와이는 미국 영토가 아닌 원주민들의 왕국이었기에 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하와이 왕국이 1875년 미국과 호혜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잠시 해결되기는 했다. 그러나 협정으로 인한 무관세 혜택은 조약 갱신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는 임시적 특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아예 미국으로 편입되길 원했다. 이에 하와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 출신 이민자들 중심으로 하와이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미국 본토 정치가들의 하와이 병합 야욕 또한 작용해, 하와이 주재 미국 공사였던 존 스티븐스John Stevens는 하와이에서의 쿠데타를 적극 지원 했다. 당시 하와이 왕국의 군주는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으로, 오빠이자 전 왕인 칼라카우아가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 사망하면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1891년 1월 29일 53세의 릴리우오칼라니 공주가 여왕이 된 후, 그는 미국인 자본가가 왕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하와이 왕국은 영영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인의 왕국(p. 244)내 참정권을 제한하고 설탕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당연히 이는 미국 출신 이주민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변호사 샌퍼드 돌Santord Balard Dole과 롤린 서스턴 Lorm A Thuston이 189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임시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하와이 왕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존 스티븐스는 호놀룰루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보스턴호에 해병대 상륙을 지시 했으며, 무장한 미 해병대 164명은 이올라니궁에 진입해 여왕을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여왕은 미국 정부에 특사를 보내 쿠데타가 무효임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 성립이 공식 선포되며 릴리우오칼라니는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으며, 쿠데타에 앞장선 샌퍼드 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존속했는데, 하와이 공화국 자체가 미국에의 병합을 위해 임시 성립된 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이 그토록 합병을 원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설탕 등 각종 농산품을 미국 본토로 수출할 때 관세 면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국 또한 하와이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는데, 1898년 쿠바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 전쟁이 터지자 하와이는 필리핀과 괌으로 향하는 이상적인 중간 기착지로 하와이를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로 편입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이자 유일한 대통령을 지낸 샌퍼드 돌은(p. 245) 1900년 미국 정부에 의해 하와이 준주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03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명으로 하와이 연방 법원의 판사로 재직하다가 1915년 은퇴했다. 한편, 그의 사촌인 제임스 돌은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돌Ddle' 통조림이다. 이후 돌은 하와이 파인애플 산업의 상징이자 세계 과일 통조림 산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하와이를 마음껏 주무르던 설탕 재벌 '빅 파이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1875년 하와이 왕국과 미국 간의 호혜 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산 농산물 무관세 혜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p. 246)두며 독점적 지위를 누려 왔다. 그러나 1959년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자, 그들만의 특혜였던 관세 면제는 더 이상 의미를 잃었다. 하와이가 완전히 미국으로 편입되면서 하와이 설탕은 더 이상 '수입품'이 아니게 되어, 관세 면제의 의미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 이다. 게다가 합병 후 하와이 설탕은 미국 내 다른 주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미국 남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비하면 하와이 설탕은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본토로의 운송비 부담도 컸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하와이의 설탕 재벌과 설탕 산업은, 차츰 경쟁력을 상실하고 쇠락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영구히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미국과의 합병이 자신들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하와이는 이제 소수 재벌의 손아귀에 놓인 섬도, 설탕 산업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곳도 아니다. 매년 약 9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채로운 섬이다. 여전히 섬 곳곳에서 과거 성행했던 설탕 산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하와이의 진면목은 풍부한 자연과 다채로운 문화, 그리고 따뜻한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p. 247).
    • 오피니언
    • 책소개
    2025-11-04
  • 【북토크】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알고는 있다. 그녀가 쓴 책은 여러모로 감동을 줬다. 낮은 데서 시작해 정상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도전을 준다. 현재는 개정 증보판이 나와 있다. 우리는 매일 경이로움을 느낄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마다하고 감정의 마비상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퇴근하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 문을 연 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하고 자문한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결코 보고 느끼는 것에 둔감해져서 문을 닫아거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단계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시작이 되길 원한다(p. 41). 내가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훌륭한 소설이나 자서전, 차 한 잔, 몸을 푹 파묻고 앉을 수 있는 아늑한 공간만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정말로 좋다. 종이 위에서 살아나는 사람들과 만나서 느끼는 유대감은 나를 전율케 한다. 그들의 상황이 나와 크게 다르다 한들 대수랴.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나 자신(p. 42)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통찰력과 유용한 정보. 지식과 영감과 힘. 좋은 책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덤도 얹어준다. 독서라는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열여섯 살에 라디오 방송국에 스카우트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어느 날, 내슈빌의 WVOL 라디오 방송국을 견학하던 내게 디제이가 물었다. "네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번 테이프에 녹음해볼래?" 그러고서 그는 내게 뉴스 대본과 마이크를 건넸다. 잠시 후 녹음되어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상사에게 외쳤다.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송국에 고용되었고 방송에서 뉴스 대본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 큰 소리로 글을 읽는 일 -을 하며 돈을 벌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나 붙들고 시를 낭송해대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모조리 읽어댄 끝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p. 43)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p. 44). 내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목표는 영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모두 알아서 해결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나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늘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미래를 앞서 생각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정한 힘을 느끼려고 애쓴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이 바로 기쁨에 찬 삶의 비밀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우리처럼 영혼이 굳어버린 이들이 '순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그처럼 살아간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재미있게 놀고 깔깔대고 웃으며 기쁨을 맛 보면서 산다면 말이다. 내가 여덟 살 꼬마였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시편 37편 4절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마음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니." 나는 여러 경험을 거치면서 이 말을 항상 주문처럼 외며 살아왔다. 주 안(p. 45)에서 - 선량함, 친절함, 연민, 사랑 안에서 - 기뻐해보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p. 46). 하지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삶에 존재 하는 가장 거대하고 가치 있는 도전 중의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가지게 한 씨앗이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씨앗을 바꿔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책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반박 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있다.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이나 불행이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우리는 반드시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서 받지(p. 51)못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내 성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매일 어떻게 찾아오는지 눈여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어머니와 싸우다가 매듭짓지 못하고 묻어둔 의견 차이가 배우자와의 언쟁에서 어떻게 튀어나오는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이 내가 하는 (그리고 내가 하지 않는) 모든 일에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살펴보자.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삶은 우리에게 과거에서 벗어나 온전한 한 인간이 되라고 촉구한다. 주의를 기울여보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나만의 길을 닦을 기회를 준다. 끊임없이 움직이자. 한껏 속도를 내자(p. 52). 어떤 힘든 순간에도 밝은 면은 있는 법. 비밀이 폭로되면서 나를 묶고 있던 속박도 풀렸음을 깨달았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난 상처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치심을 품고 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웠다. 우리가 수치심을 극복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지혜 안에 머물게 된다(p. 57).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실은 우주가 내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배운 가장 위대한 교훈 중 하나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당신도 삶에서 마주치는 경험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면 하나하나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며 기회가 된다. 만약 내가 1977년에 볼티모어의 6시 뉴스 앵커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오프라 쇼를 시작할 기회는 제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장애물을 가치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소망의 장소로 당신을 인도해줄 길에 대해 결코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확실히 안다. 미래의 당신, 즉 당신이 되어야 할 그 운명적인 존재는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진화한다. 당신이 배워야 했던 교(p. 67)훈과 당신이 저지른 실수, 당신이 맛보았던 좌절 모두를 미래를 향한 디딤돌로 여기고 감사하는 법을 배우자.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p. 68). 여러 해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싶다는 소망이다. 소도시 토피카에 사는 주부이든 대도시 필라델피아 시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이해하고 인정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한다. 깊고 아늑한 관계 안에서 생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한다. 언젠가 오프라 쇼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점이었다. 그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고 아주 큰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우리는(p. 75)모두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갖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열망을 확인받기를 원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다. 많은 사람이 - 남녀 구분 없이 - 그저 '나는 정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 자신이 여성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결혼 18년 차의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연녀에게 특별히 대단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흥미를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것이다(p. 76).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을 때 그것은 모두 보너스나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확실히 알고 있는 이 교훈은 라디오에서 일하던 그 시절에 싹튼 것이었다. 당신도 자신에게 평 생 동안 보너스를 주는 건 어떨까? 우리의 열정을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내자. 그리고 그 일을 하자!(p. 149).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군가는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하늘의 뜻이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인터뷰 줄에서 빠져나와 <모크 앤 민디>라는 새 시트콤 드라마에 출연하는 젊은 코미디언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내가 인터뷰한 5분 중 가장 유쾌하며 미친 것 같고 정신이 홀라당 나간 듯한 5분이었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내가 만나본 모든 명사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삐 풀린 말 같은, 기발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사람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그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샘 같았다. '아직은 누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엄청나게 뜨겠어'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난다. 그는 자기가 지닌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인터뷰한 젊은 코미디언은 바로 로빈 윌리엄스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인터뷰가 흘러가는 곳으로 그저 따라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야 했다(p. 154).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순 살이 된다!'고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축하할 수 있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내가 예순 살이 된다. 나는 살아 있다. 건강하게. 튼튼하게. 내가 예순 살이 된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는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그 케케묵은 걱정을 다들 알 것이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남들이 기대하던 수준의 사람이 되었을까' 등등)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금의 내가 될 권리'를 정당하게 획득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점에 당당하다. 데렉 월컷Derek Walcon이 아름다운 시 「사랑 뒤의 사랑Love After Love」에서 묘사한 그 순간에 이른 것이다(p. 199). 격한 기쁨으로 당신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거울 앞에 선 당신 자신을 반길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보내는 환대에 미소 지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와 거니는 이 여행은 실로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심지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그렇다. 나의 탄생이 참나무 그늘에서 남녀가 한 번 놀아난 결과임을 고려한다면.)(p. 200). 나는 그 병이 어디서 옮은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대를 겪은 과거가 있는 사람은 적절한 선을 긋지 못하는 과거 역시 갖고 있다. 어린 시절에 사적인 영역을 침해받은 이들의 경우,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막을 용기를 쉽사리 내지 못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거부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게 부탁을 하는 거의 모든 사 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다른 이들이 내게 품고 있는 기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며 나는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자신을 다그쳤다(p. 206).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나눠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텅 비게 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과 가족,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 나라는 우물을 다시 채우자.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나 자신에게 줄 삶도, 나를 위해서 살 삶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아갈 삶이 없다면,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0여 년 전, 나는 커다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일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따로 떼어놓았음에도 전화벨은 어김없(p. 222)이 울려댔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스테드먼이 물었다. "오프라, 통화하고 싶지 않으면서 왜 자꾸 전화를 받는 거요?" '아하!'의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린다고 해서 내가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설혹 시간과 일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다. 당신의 시간을 보호하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p. 223). 후퍼 선생님의 5교시 수학 시간. 내가 곧 치를 시험을 걱정하며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인터콤을 통해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별한 손님이 강연하러 오셨으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살았다! 만세!' 오늘 수학 수업은 이걸로 끝이란 생각에 나는 혼잣말을 했다. 반 친구들과 한 줄로 서서 강당 안에 들어갈 때 내 머릿속에는 수업에서 탈출했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지루한 시간에 대비해 졸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제시 잭슨 목사가 강연자로 소개되었고, 킹 목사가 저격당한 날 그와 함께 있던 흑인 인권 운동가가 그날의 강연자임을 알았을 때 나는 몸을 좀 곧추어 세웠다. 그 순간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그날 내 일생일대의 강연을 들을 운명이었다. 1969년이었다. 나는 성적표에서 A와 B를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잭슨 목사는 내 안에 불을 지피(p. 247)며 내가 삶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강연은 우리 선조들이 치른 개인적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와서 머무르게 되었건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을 치렀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류의 희생에 관해서도 덧붙였다. 또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와서, 우리가 내슈빌의 흑백 통합 고등학교에 앉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의 우리는 자신에게 탁월함을 빚지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보다 더 탁월해질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탁월함은 인종차별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해지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집에 갔을 때 나는 마분지를 찾아내서 그가 말한 문구를 적어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 포스터는 그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내내 거울 위에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포스터에 나의 글귀들을 덧 붙여나갔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탁월해져라."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최상의 것을 원한다면 너 또한 세상에 최상의 너(p. 248)를 제공하라." 그러한 구절들은 내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는 네 도움을 주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했을 때조차 그랬다. 지금도 나는 탁월해지려고 한다. 나눔에 탁월할 것. 호의를 베품에 탁월할 것. 노력하는 것에 탁월할 것. 투쟁과 대결에 탁월할 것. 내게 있어 탁월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돈 미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약속』에 나오는 마 지막 약속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우리가 자유로 가는 가장 만족스러운 길임을 나는 확실히 안다. 루이스에 의하면, 우리의 최선은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판단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우리는 최상의 삶을 산다는 위대한 과업에 탁월해질 수 있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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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4
  • 【북토크】 집 하나 마련하기도 어려운 인생살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나는 서울 출생으로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 “서울특별시”라고 주소를 적을 때 “특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쪽방으로 몰리거나,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이 쪽방같은 원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날 때부터 집을 갖고 태어나는 달팽이보다 못한 것이 요즘 대부분의 삶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쪽방은 개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겨우 한 사람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도 없어 난방이 되지 않았다. 공동수도에서는 냉수만 쏟 아졌다. 타지에 사는 건물주는 안전 관리는커녕 기본적인 수선 의무도 다하지 않아, 행정 당국에서 세금을 들여 땜질식 수리를 해주고 인근 교회나 쪽방상담소에서 뻗는 온정의 손길로 어설프게 사람이 사는 거처의 형상을 갖춰가는 곳. 이런 곳에서 세입자는 노숙을 겨우 면한 대가로 매달 22만 8188원(서울시 평균)을 세로 낸다. 폐가에 가까운 건물의 수리는 당국의 세금으로 하고, 세입자에게 받는 면적 대비 월세는 강남 타워팰리스 월세의 수배에 이르는 쪽방, 그 이면에서는 세를 모은 건물주들이 빌딩을 세우고도 남을 부를 증식하는 이 황당한 상황이 창신동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p. 48). 쪽방촌 주민 가운데 4명 중 1명(27퍼센트)은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소비를 하고 노동할 쓸모가 없으면 구조에 부담이 되는 비용으로 바라보는 사회 에서 이들이 건강한 심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안전망이 되어주는 '관계'라도 있으면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건져내줄 수 있으련만, 쪽방촌 주민 가운데 75.5퍼센트가 '가족 중 연락할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쪽방촌에 사는 자신을 방문한 가족이나 친지가 전혀 없는 비율도 61.1퍼센트에 달했다(p. 66). 2010년 여름, 캘린더상 계절은 가을이었으나 날씨는 폭염에 가깝게 더워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월세를 내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300원뿐이었다. 근 10년 전엔, 후불 교통카드가 없어 매번 일정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마포구 성산동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덩그러니 앉아 묘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원룸이 있던 서대문구 연희동 북쪽 끄트 머리까지는 마음먹고 걸으면 1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녹아내릴 듯 더웠고, 걷기에는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30분을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그때 일을 하고 있었을 고향의 엄마에게 SOS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만 원만 보내줘. 잠깐 돈이 부족하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으로 문자를 보냈을지 짐작할 리 없는 엄마는 1만 원을 '딱' 맞춰 입금해줬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자마자 근처 김밥천국에서 냉면을 한 그릇 해치웠다.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나 자신이 불쌍해 길 한복판에서 눈물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통장 잔고가 4000원가량 남았다. 나의 가난과 직면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p. 127). 청년 주거는 한국 사회가 앓는 문제를 다면적으로 품고 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나 다름없다. 기성세대 건물주가 청년 세대 세입자에게서 폭리를 취하고 그들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대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또,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주거 비용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서울로의 쏠림'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는 '서울에 사는 것이 스펙'이라는 관용어처럼, 청년 안에서도 서울 출신 중산층 청년과 지방에서 올라온 도전자 청년이 분화(p. 144)할 것이다. 여러 측면이 있지만 결국 본질은 가지지 못한 자는 애면글면하며 계단 하나를 올라서지 못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비정한 도시의 면모다. "과거에는 이렇게까지 잔인한 방식으로 착취하진 않았어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결국 청년들이 못 살겠다며 저출생 등으로 반응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서울 지역 청년 주거빈곤율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이어질 겁니다." (최은영 한국도 시연구소 소장) "'민달팽이 유니온'은 대학생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태 조사를 벌여요. 그런데 최근 들어 주관식 답변에 '청년 피 빨아 먹는 임대업자' 같은 표현이 출현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저는 청년 세대의 분노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청년들의 주거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최지희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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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4
  • 【단상】 4개월 만에 북토크가 300 권이 됐다
    지난 7월 북토크가 250권이 되었을 때 “북토크의 호응에 감사드리며”라는 기사를 썼었다. 4개월이 안 되어 50권을 더 읽어 이제 300권이 됐다. 책은 늘 대출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 취재하러 갈 때 가방에 책 한 권 넣고 다니며 지하철, 버스에서 읽고, 집에서도 열심히 읽고 있다. 왜 읽는가? 알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읽는다. 물론 대단한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고 관심 있는 책을 주로 읽는다.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저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다. 딱히 다른 취미가 없으니, 책을 읽기도 한다. 물론 유튜브가 재밌기에 자주 보지만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 앞으로 얼마나 더 책을 읽을지는 모르나 아마도 죽기 전까지 읽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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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5-11-03
  • 【북토크】 부러운 것 중 하나, 세상을 보는 지식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가진 지식이다. 어려서부터 앎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알고 싶고, 아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알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 읽었다. 독자적인 어휘로서 지식인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의 폴란드였다. 인텔리겐치아라는 말이 여기서 탄생했다.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등장한 인텔리겐치아는 특기할 만하다. 그중 결의 높은 이들이 농노제와 차르 전제를 비판하면서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들어가고 있었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또 하나의 원형이라 하겠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자기 계급에 맞서는 운명을 걷게 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삶에는 어떤 슬픔의 정조가 배어 있다.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1880년대 작품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에 그 느낌이 선연하다. 가족이 머무는 단란한 거실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초췌한, 하지만 형형한 눈빛의 지식인풍 남성이 막 들어서는 중이다. 갑자기 시베리아 유형이 풀리면서 등장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 인물을 바라보는 어머니, 부인, 아이들, 하녀들의 반응이 저마다 극적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기쁨도 당혹도 아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저 찰나의 정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비판적 인텔리겐치아가 걷는 길이 그랬던 것처럼(p. 36).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 추방과 주변화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에서 등장한 지식인에게는 가시밭길 뒤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 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은 이 시기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가 독일에 기밀정보를 누설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에 사로잡힌 군부는 따로 진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퓌스에게 반역자의 누명을 씌웠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일군의 사람들이 나섰다. 에밀 졸라 Emile Zola를 비롯한 문필가, 언론인, 교수, 의사 등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에 나섰다. 지식인이라는 집단이 출현한 시기다. 프랑스 사회가 두쪽으로 갈라졌다. 에밀 졸라는 유죄 선고를 받고 망명에 올라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진범이 잡혔고 드레퓌스는 명예를 회복했다. 지식인들이 승리했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공화국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대혁명 이래 100년을 넘게 이어온 왕당파, 보수파의 반격을 종식시켰다. 혁명이 완성됐다. 지식인의 손으로. 그들의 펜으로! 이렇게 등장한 지식인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입을 빌려서 생각해보자. 사(p. 37)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다. 친절하게 좋은 사례까지 덧붙여준다.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일 뿐이다. 이 학자들이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나머지, 핵폭탄의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지식인이 된다. 첫째, 그들은 폭탄을 연구하고 제조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와 권한을 넘어서 폭탄의 용도에 대해 판단하는 일에 개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준 그들의 명성 또는 권한을 이용해서 여론에 압력을 가한다. 셋째, 그들은 폭탄의 안전에 대한 기술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최상의 기준으로 취하는 가치체계를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반대한다. 지식을 토대로 하되, 직분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과 행동을 수행하는 집단이라는 지식인 집단의 특징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그 누구도 지식인에게 무언가를 위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위고, 스스로 걸머지는 책무다. 지식(p. 38)인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그 자신도 해방될 수 없는 존재다. 해방을 위한 지식인의 과업은 무엇인가? 민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민중 속에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현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뿌리까지 내려가서 비판적으로 되는 것, 즉 급진적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런 지식인상이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지식인은 반전과 평화,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와 해방을 외치며 지식인적 실천에 앞장섰다. 사르트르가 말하듯 지식인은 자신의 고유한 목표, 그러니까 지식의 보편성과 사유의 자유, 즉 진리를 위해 싸웠다. 그 목표가 노동계급과 인민의 해방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쓰고 서명하고 토론하고 행진했다. 지식인의 신화시대라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죽었다(p. 39).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현상은 단지 청년세대 남성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사회적 균열이 동반되어 있다. 첫째, 청년 세대에서 젠더 대결의식이 격화되면서 일부 청년 남성이 두드러지게 반여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들은 할당제를 포함한 각종 여성 우대 정책에 의해 자신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믿는다. 둘째, 이들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기성세대인 86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모두 누린 다음, 청년세대에게 돌아갈 상승의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믿는다. 여기에 셋째 항목이 추가된다. 기득권이 된 진보 86세대 남성들은 성불평등 시대에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린 다음, 이제는 성평등을 내세우며 현재 청년세대 남성을 희생양 삼아 그 죄의식을 덜어내려고 한다. 기득권도 유지하고, 좋은 남자도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성세대 중에서도 특히 진보 586세대, 그러니까 나 같은 부류에 대해 극도로 분노하는 이유다(p. 68). 다른 한편으로 이 현상은 역설적이다. 조사들은 능력주의 신념을 강화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기는 흐름이 주로 경제적 상층에 속하는 청년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들이 보수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하층의 20대는 상층보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 친화적이다. 20대 남성 안에서도 경제적 계층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크게 다르다. 물론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추정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현실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대 남성이라는 단일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0대 남성 보수화라는(p. 78) 현상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나 자신이 속한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싶다. 20대 남성이라는 범주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86세대라는 범주도 남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에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매우 좁았다. 이 시기에 30대가 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동세대 집단 중 어느 정도나 될까? 사회학자 신진욱이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한줌에 그친다. 1980년대 동안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겨우 12%다. 386세대라는 말은 그중에서도 소위 '메이저 대학' 출신의 운동권을 주로 가리켰다. 그야말로 한줌이다. 이들은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절정기부터 마지막 시기에 걸쳐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쉽게 전문직과 화이트칼라로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벤처기업 전성기에 큰돈을 벌기도 했고, 문화산업 팽창기에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자산시장 상승의 혜택을 입은 이도 꽤 있다. 정치나 사회운동에 뛰어든 이들 중에(p. 79)는 세 차례의 민주당 계열 정부를 거치며 두루 요직을 차지한 이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부까지 따지면 훨씬 많다. 중산층에서도 상위로 분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한갖 말석에 있을 뿐이지만, 나 또한 그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득권이 맞다. 하지만 극소수다. 50대라는 세대 전체로 보면 10명 중 7명은 판매•서비스직, 생산직, 단순노무직 종사자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던 이들도 일찍이 퇴직해서 치킨집을 몇번쯤 차렸다가 말아먹었을 시간이 지났다. 이 소수의 메이저 대학 운동권 출신이 기득권이 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도 부족하나마 일익을 맡아왔다. 나의 뼈 아픈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청년세대 남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86세대에게서 초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한국자본주의의 저성장과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을 이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다. 그 추세는 이들이 기득권에 편입되기 훨씬 전부터, 훨씬 높고 강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잘못이라면 그 흐름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덧 그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애에 걸쳐 단 한번도 기득권이 되어본 적 없이 열심히 살아 온 우리 세대의 절대다수는 기득권이라는 비판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이 겪는 고통의 원으로 지목되(p. 80)어 황당하기도 하고 분노도 치미는 기득권 86세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20대 남성 보수화를 이끄는 것이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20대라는 사실에 고무되어 '20대 남자 개새×론' 같은 데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답이 아니다. 20대 남성이야 어떻든 우리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20대 남성에게 '찌질하다'고 힐난하기 전에, 우리가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약자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거기에 답해야 한다(p. 81). 기억도 생생한 일이지만, 유가족 김영오 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하던 2014년 9월 6일에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자유 청년연합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 유가족과 반정부 선동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추모의 노란리본을 직접 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이 모든 공격이 희생자 가족들이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보이지 않던 사고 직후부터 과감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와 야당은 오히려 세월호 사건 개입에 극도로 신중하게 대응했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역공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은 세월호를 빌미로 정치적 내전을 벌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p. 110). 레이건과 공화당의 승리는 1932년 뉴딜연합에 기초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승리 이래로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연합에 기초한 승리였다. 루스벨트의 승리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연합이 아니라 뉴딜연합으로 불렸다. 반면 레이건을 당선 시킨 세력은 '보수주의연합'이라고 불렸다. 이 노골적인 보수주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연합은 극우파, 복음주의자, 자유 지상주의자, 민중주의자, 호전주의자,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구파 보수주의자 등 심하게 이질적인 신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정부가 도덕심판소가 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다수파 복음주의 운동가들과, 개인 가족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혐오하는 자유지상주의자는 상극이었다. 신보수주의는 마치 잡종 키메라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니스벳은 『보수주의』에서 이 기묘한 혼란을 이렇게 표현했다(p. 128). "동화에 나오는 요술거울이 오늘의 워싱턴에 실제로 등장한다 면, '그 모든 이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보수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을 위해 차라리 일종의 국가적 복권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니스벳은 이제 보수주의가 더이상 버크적 전통으로 귀속되는 본래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키메라 보수주의는 버크 대신 하이에크를 구루로 섬기고, 절제와 균형에 대한 온건한 설교 대신 '자유'와 '도덕'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었다. 자유시장과 그리스도교적 도덕•가치가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적 목표가 되었다. 신보수주의의 성립과 키메라적 잡종화의 과정에서 보수주의는 '자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시장의 '형이상학'으로 퇴화했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시장은 오랫동안 골 칫거리였다. 사적 소유권의 정당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보수주의 자들도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동시에 이성중심주의에 맞서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이 오직 합리적•이기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즉 경제적 인간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자유시장론자들의 교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매매되어서는 안 될 가치들을 상품화함으로써 우리의 정서(p. 129)적 애착을 소멸시키는 리바이어던 같은 존재였다. 보수주의자에게 시장은 다루기 힘든 난제였다. 드디어 타협이 이루어졌다. 하이에크를 경유하며 자유시장을 조상과 이웃들의 지혜가 축적된 빛나는 '전통'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전통은 단지 임의적 관습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타인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다가 생긴 여러 시행착오의 잔여물이 담긴 축적물이다. 자유시장도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정보교환의 과정이자 축적물로 간주된다. 전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조정 문제를 둘러싼 자생적 해법인 것처럼, 자유시장은 생산과 교환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 온 자생적 질서이자 조상과 우리 지혜의 축적물로 찬미된다. 이 지혜의 교환과 축적을 위해 시장의 자유는 옹호되어야만 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제약의 필요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장이 전통과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생적 질서라면 그런 제약은 관습, 법, 도덕 등의 형태로, 요컨대 전통의 형태로 이미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축적된 지혜를 위협할 별도의 입법, 명령은 불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보수주의는 더이상 자유시장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 자유시장론자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여전히 수긍하지 않은 채,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을 지키고 보전해야 할 '전통'으(p. 130)로, 그에 더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서구 보수주의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와 함께 시장을 새로운 종교로, 보편적 가치로 섬기는 형이상학의 길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우파의 혁신 프로젝트와 뉴라이트 운동 한국에는 합리적 보수의 기본 전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두가지 이유가 꼽히곤 한다. 첫째, 한국 정치사회를 지배한 우파는 오랫동안 폭력적 배제에 기초해 권력을 독점해왔다. 레이건과 대처 세력이 추진해야 했던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전략이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는 불필요했다. 둘째, 정당성 없는 지배세력의 장기집권 아래, 한국사회에는 보수 할만한 가치 있는 전통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보수할 것 없는 보수주의는 형용모순이다. 역으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의 출현 여부는 보수해야 할 참된 전통의 '발견 · 발명'과 '보급 · 확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를 둘러싼 담론이 본격화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제도적 민주화의 진전,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강화, 특히 대북 화해 정책의 진행 등과 맞물리면서 기존 지배세력은 심대한 위기감을(p. 131) 느끼게 되었고, 보수주의 이념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됐다. 바로 이 시점에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부상한 뉴라이트의 궤적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p. 132).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개신교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진보 쪽의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종교시설발 집단감염의 대다수를 개신교가 차지한 것은 맞다. 분노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다. 개신교계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국민 평가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코로나19 확진자의 44% 정도가 개신교회발이라고 믿는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감염원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회발 확진자는 11%였다. 저지른 것 이상의 비난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된다면 자신들이 비난하는 이른바 '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p. 166). 행복경제학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의문은 과연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왕이면 날씨가 좋길 바라지만, 좋은 날씨가 우리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러 종류의 날씨가 있고, 때로는 비와 천둥이, 때로는 태풍이 필요하다. 삶은 복잡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한 삶보다는 바람직한 삶이나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추구한다. 각각은 겹치면서도 다르고, 때로는 상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불편함을 무릅쓰는 내부고발자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면서 공적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주류의 견해에 반대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하는 소크라테 스형 비판가들이 나오는 사정이다. 사람들이 단지 행복한 삶만(p. 230)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사실은 행복이든 무엇이든 삶에 목적이 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의문스럽다. 우리는 목적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삶은 이유 없는 출발일 뿐이다. 삶을 행복을 위한 '과업'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나 공동체가 개인의 삶에 모델을 제시하고 강요하던 시대에 비해 이것이 진보임은 맞다. 문제는, 행복을 성취해야 할 개인적 삶의 과업으로 제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와의 관련성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행복경제학이 자유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선'이라는 문제 의식 속에서 행복경제학은 '바람직한 상태'를 향한 지향과 만나려 한다. 거기서 좀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세상에 대한 지향과, 시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결합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둘은 둘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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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 【북토크】 책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책이 없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소설이다. 대놓고 책을 없애지는 않아도 요즘은 미디어에 밀려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 등 동영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결국 사고 기능이 떨어진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재앙이며, 이 책과 저자가 경고하는 것이다. "집을 통째로 태워 버릴 거야." 비티가 소리쳤다. 사나이들은 문 쪽으로 엉거주춤 몰려갔다. 그들은 여자 가까이 서 있는 몬태그를 뒤돌아보았다. "이 여자를 데려가지 않을 거야?" 몬태그가 말했다. "안 가겠다잖아."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비티가 손을 들었다. 손아귀에는 점화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집은 법적으로 태워 버리도록 되어 있네. 게다가 이런 경우에 저 미치광이들은 대개 자살하려고 하지. 흔히 있는 일이야."(p. 68). 몬태그는 여자의 팔꿈치를 잡았다.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됐어요. 아무튼 고맙군요." 여자가 말했다. "자, 열을 세겠다. 하나, 두울." 비티가 소리쳤다. "기다려요, 서장." "계속하라고." 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엣, 네엣." "나갑니다." 몬태그는 여자를 잡아 끌었다. 여자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여기 그냥 있고 싶어요." "다섯, 여섯." "그만 세어도 좋을걸."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한 손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손바닥에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있었다. 부엌에서 주로 쓰는 성냥 한 개비였다. 사나이들은 그걸 보자마자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비티 서장만은 품위를 잃지 않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한밤중의 광기와도 같은 일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치러 왔던 그의 그을린 얼굴엔 조금도 동요된 기색이 없었다. 맙소사. 몬태그는 생각했다. 어째서(p. 69) 한밤중에만. 언제나 경보는 밤중에 울려 댔다. 낮에는 결코 울런 적이 없다! 불꽃은 밤에 봐야만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 더 멋지고 더 장관이기 때문일까? 비터의 그을린 얼굴에도 희미하게 광기가 서린 것 같다. 여자가 성냥개비를 들어올렸다. 그녀 주위에선 등유 냄새가 촉촉 할 정도로 피어 오르고 있다. 몬태그는 겨드랑이에 숨겨 가지고 나온 책이 심정처럼 그의 가슴을 쾅쾅 치는 것만 같았다. "나가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 몬태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문 쪽으로 갔다. 그는 비티의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갔다. 악마의 발자국처럼 그들이 지나간 길에 등유 냄새가 남았다. 발코니에 여자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시선으로 방화수들을 압도한 채, 침묵으로 그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비티는 손가락을 튕겨 점화기의 불꽃을 켰다. 너무 늦었다. 몬태그는 숨이 막혔다. 여자는 경멸에 찬 눈초리로 손을 들고는 성냥개비를 난간에다 세차게 부볐다. 사람들은 한밤중의 거리를 마구 내달았다(p. 70). 우리는 매클런 일가가 시카고에 살 때부터 경고했지. 책을 찾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야. 그 삼촌이란 자는 복잡한 기록을 갖고 있어. 반사회적인 인간이지. 그 소녀? 그 앤 시한폭탄이었다고. 가족들은 그 애의 잠재의식을 부추겨 왔던 게 틀림없어. 학교 기록을 보면 확실하지. 그 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 싶어했어. 정말 골치 아픈 일이지. '왜?'라고 의문을 품고 그걸 고집할수록 불행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야. 그 불쌍한 애는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그래요. 그리고 죽었지요(p. 102). 몬태그의 머리 속이 어지럽게 빙빙 돌았다. 눈썹을, 눈을, 코를, 입술을, 볼따구니를, 어깨를, 그리고 팔을 마구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오, 입 닥쳐요!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그만둬!' 비티의 우아한 손가락이 뻗어 와서 몬태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런, 이거 왜 이리 맥박이 빨리 뛰나! 내가 이렇게 만들었나, 응, 몬태그? 맙소사,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맥박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구먼. 사이렌하고 종소리만 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얘기를 계속해 줄까? 자네의 그 혼란스런 표정이 보기 좋구먼. 스와힐리어, 인도어, 영어, 나는 죄다 말할 수 있네. 저 유명한 신비의 이야기꾼, 셰익스피어도!" 몬태그의 귓속이 앵앵거렸다. "몬태그, 정신차려요! 그자는 흙탕물을 마구 휘젓고 있소!" "이런, 의기소침한 모양이군. 자네가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는 책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으니. 책이란 원래 그렇게 이율배반적일세. 자네는 책이 자네를 각성하게 해 주고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하겠지. 남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자네는 황무지 한 가운데 길을 잃고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들의 덩굴 속에 갇혀 버린 걸세. 아까 내 꿈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네. 방화차에 탄 채로 물어 보았지. '나와 함께 갈 텐가?' 자네는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말은 안 했지만 뿌듯한 기쁨이 감도는 침묵 속에서 방화서로 돌아왔네. 모든 골(p. 175)치 아픈 건 잊어버리고 말이야." 비티는 몬태그의 손목을 놓았다. 손은 맥없이 책상 위로 축 처졌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 _ 옮긴이)”(p. 176). 다들 조용히 웃었다. 몬태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레인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책 방화수이기도 하지. 일단 읽은 책은 태워 버립니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축소 필름도 소용없지요. 늘 돌아다녀야 하는 신세라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가 다시 찾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발각될 위험은 언제나 따라다니지. 늙은 머릿속에다 감춰 두는 게 제일 안전하오. 다른 사람이 보거나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린 역사와 문학, 그리고 국제법 덩어리들이라오. 바이런, 톰 페인, 마키아벨리, 또 예수가 바로 여기에 있소. 그리고 시간은 없고,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고, 도시는 저기에 있소. 수천 가지 색깔로 포장된 채. 몬태그, 뭘 생각하시오?"(p. 232). 몬태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뒤처져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레인저가 지나가게 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를 쳐다보며 어서 가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몬태그는 앞장서서 걸었다. 강과 하늘과 녹슨 철로를 보았다. 농장이 있고, 건초가 가득 찬 헛간이 있는 곳, 밤을 틈타 도시에서 빠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로. 나중에, 한 달이나 여섯 달, 아니 1년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나중에, 이 길을 다시 걸으리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혼자서 정의를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오가 될 때까지 긴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다른 사(p. 248)람들이 조용한 이유는 생각하고 기억할 게 많기 때문이리라. 아마 얼마 뒤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리 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전도서 3장 1~8절 부분 인용.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 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옮긴이) 하지만 다른 뭔가가. 달리 무엇이? 무언가, 무언가…'그리고 강의 양쪽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내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 계시록 22장 2절-옮긴이) 그래, 바로 이거야, 정오를 위해 간직해 두어야 할게. 정오를 위해...우리가 도시에 도착할 때(p. 249). 이제 성서의 욥기 2장과 같은 마지막 시험이 여기 있다. 나는 한 달 전에 「리바이어던 99」라는 희곡을 어느 대학극단에 보냈다. '모비 딕' 신화에 바탕을 둔 내용으로서 멜빌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눈먼 선장이 이끄는 로켓과 승무원들이 용감하게 거대한 흰색 혜성과 맞닥뜨려서 마침내 그 파괴자를 파괴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올 가을에 파리에서 오페라로 초연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공연으로 올리기가 곤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만약 공연이 강행될 경우 학교의 평등 위원회 여성들이 공과 방망이를 들고 난입할 것이라고 하면서. 난 부부득 이를 갈면서 그럼 이제부터는 「보이즈 인 더 밴드」나 「여자들」(모두 미국의 유명한 연극이다- 옮긴이)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냐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들 중에서 남녀 성비가 맞지 않는 작품들은, 특히 남성들이 좋은 역할을 하는 문단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거냐고 되물었다(p. 261). 나의 희곡을 공연으로 올리고, 그 다음 주에는 「여자들」을 올리면 될 거라고 나는 답장을 썼다. 그들은 아마 내가 농담을 한다고 여겼겠지만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는데다, 우리가 그런 소수자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다 보면 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난쟁이나 거인, 오랑우탄이나 돌고래, 핵탄두 혹은 수자원 보존주의자, 컴퓨터 옹호 주의자 혹은 네오 러다이트, 바보 혹은 현인 등등 모두가 자기들만의 미학적 잣대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상은 그 모든 그룹들 각각이 나름의 주장을 내세우며 법을 만들기도 하고 폐기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운동장이다. 하지만 내 소설은, 희곡은, 시는, 그들의 권리가 끝나고 나의 지배 명령이 시작되어 행사되는 통치령이다. 몰몬교도들이 나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 쓰라고 하라. 아일랜드인들이 내 더블린 이야기를 싫어한다면 타이프라 이터를 줘 버려라. 교사와 편집자들이 나의 불친절한 문장들 때문에 그 허약해빠진 치아가 부서질 것 같다고 하면 곰팡내 나는 케이크나 그 구미에 맞을 멀건 차에 적셔 먹으라고 해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 인 - 옮긴이) 지식인들이 내 단편 '멋진 아이스크림색 양복'을 축약 하기를, 그래서 더 세련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허리띠가 풀어지고 팬티가 흘러내릴 것이다. 탈선은 위트의 정수이기도 하다. 단테나 밀튼, 햄릿 아버지의 유령 이야기에서 철학적인 방백을 빼 버리면 남는 건 말라붙은 뼈다귀들 뿐이다. 로렌스 스턴이 말했다. 탈선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햇살이며 삶이며 독서의 생명이라고! 그것들을 죄다 없애버리면 오로지 끝없(p. 262)이 추운 겨울만이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작가에게 다시 돌려주자. 작가는 신랑신부처럼 반갑게 다가갈 것이고,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온갖 먹을거리를 차려오고, 우리의 입맛을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 작품을 가지고 머리를 베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허파를 뚫어 버리는 식으로 나를 모욕하지 말아 달라. 나는 흔들거나 끄덕거릴 머리가 있어야 하고, 내젓거나 주먹을 쥘 손도 있어야 하며, 소리 지르거나 속삭이려면 허파도 있어야 한다. 나는 배알도 없이 내 작품들이 책도 뭣도 아닌 꼴로 책장에 가도록 고분고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네 심판들이여, 부디 외야석으로 모두 돌아가길. 링 위의 주심들도 가서 샤워를 하시길.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가 던지고, 내가 치고, 내가 잡는다. 그리고 내가 베이스를 돈다. 해가 질 때쯤이면 내가 지던지 이기던지 할 것이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나가서 이 오래된 시도를 또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 당신일지라도(p. 263). 작가와의 대담 문 : 사람들이 『화씨 451』을 읽으면서 간혹 간과하는 것이,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책읽기를 싫(p. 268)어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랬지요.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들게 하는 습관에서 떨어진 사람들이요.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요.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가 건강하기 위해서 독서는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답 : 어떤 학술 도시(도시의 기능적 분류의 하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따위가 밀집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된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 옥스퍼드, 미국의 프린스턴 버클리, 독일의 라이프치히 • 하이델베르크 등이 이에 속한다. 옮긴이)에 내일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 다. 지진이 끝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두 채밖에 없다고 할 때, 손실된 것들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물들은 가장 먼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선 첫 번째 건물은 병원이 되어야겠지요. 부상자들을 속히 치료해서 살려내야 할 테니까요. 다른 하나의 건물은 도서관이 될 겁니다. 다른 모든 건물들이 죄다 그 하나에 담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것을 뭐든지 얻게 됩니다.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읽는 겁니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에요.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 죠.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습니다(p. 269). 문 : 당신의 독자들과 당신의 책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받아서 그 중 두 가지만 골라봤습니다. 먼저 교사의 질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기 위해서 교사들이, 교육자들이, 그리고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갈수록 영상이 문자를 압도해가고 있는 문화적 현실에서 글의 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말입니다. 답 : (웃음) 책을 건네주세요. 그게 답입니다. SF와 판타지 같은 제 책들은 정말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어요. 제 책들은 이미지와 은유가 넘쳐나지만, 전부 다 지적인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지요. 책읽기를 싫어하는 열두 살짜리 남자애한테 제 책 한 권을 줘 보세요. 그럼 그 애는 사랑에 빠져서 독서를 시작할 겁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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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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