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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소설의 재미-반전
    오래전 소설을 잘 읽다가 안 읽게 되었다. 한 줄이면 될 것을 가지고 책 한 권, 심지어는 열 권을 쓰는 소설이 '사기'처럼 보였다. 이것은 내가 드라마를 안 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TV 드라마는 「모래시계」 이후로 거의 안 본다(이것도 조금 보다가 관뒀다). 최근 본 드라마라고 한다면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수리남」 정도이다. 지금도 소설은 손이 잘 안 간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내 책꽂이에는 읽지 않은 소설이 수십 권이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이 책은 얇아서 먼 취재길에 가져가 왕복하며 다 읽었다. 드라마, 시트콤 같은 책이다. 책 제목 『두려움과 떨림』이란 말은 책 말미에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주인공이 자기를 괴롭힌 일본 상사를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장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에 대한 외국인의 공격이 통쾌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쉽게 읽을 소설이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그리고 어떻게 단순한 주제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네 구름은 그토록 격정으로가득하지.나는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되어 이 구름들이 쏟아 붓는 분노를 기꺼이 받아 내겠어. 얼어붙은 침들이 셀 수 없이 구름에서 쏟아져 내 얼굴에 막 튀고 있어. 나는 그게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야. 네가 모욕적인 말로 내 살가죽을 도려낼 필요를 느끼는 것, 사랑하는 눈보라(주인공의 일본 상사 이름 뜻), 너는 공포를 쏘지, 네 사형 집행반 앞에서 눈을 가리는 게 싫다고 했어, 그렇게 오래 전부터 네 시선에서 기쁨을 읽게 될 날을 고대했기 때문에. 내가 볼 때는 순전히 형식적인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그녀가 포만감을 느끼는 데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뭘 할 생각이죠?」 나는 그녀에게 쓰고 있던 원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얘기로 답변에 대신했다. 「어쩌면 프랑스 어를 가르칠 수도 있을 거예요.」 내 상사가 코웃음을 쳤다. 「가르친다고! 당신이! 당신이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이런 망할 놈의 눈보라, 절대 탄약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니까! 나는 그녀가 뭔가 또 구실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내가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멍청하게 대답을 하지는 말아야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아직도 내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 당신이 어떤 직업인들 가질 수 있겠어요?」 나는 그녀가 엑스터시의 절정에 도달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나는 사무라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 사무라이들이 초인적인 숭배의 감정으로 목소리가 녹아들면서 자신의 두목을 배알하는 모습에 그렇게 딱 부합하는 이 표현을 늘 끔찍이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 처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이 볼 때 사람들이 쓰레기 수거하는 일에는 나를 받아 줄까요?」 「물론이죠!」 그녀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 말을 했다.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성공이었다(pp. 134-135). * 199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 * 일본 사회의 경직성을 고발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 줄거리 이 소설은 한 벨기에 여성이 일본 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본에 대한 나름의 동경을 가지고 있던 이 여성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회사라는 조직이 가지는 비인간적인 모순들에 눈을 뜨게 된다. 회의실에서 그녀가 차를 따르며 일본어로 인사를 건넨 것이 일본인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라고 지적받게 되고 그녀의 보고서가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에 대한 검토도 없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무시당하게 된다. 그녀의 업무는 그녀의 탁월한 외국어 능력, 사안에 대한 분석력에 상관없이 매일 똑같은 서류의 수십 일에 걸친 복사, 숫자들을 다시 베껴 적는 것으로 점점 단순하고 효용 가치가 없는 일로 대체되고 결국 화장실 청소로 전락하게 된다. 그녀가 겪는 모멸감과 잔인성은 그녀의 내면을 황폐화시킨다. 그러나 그녀만의 내적 독백은 유머러스하고 명랑하며 도발적이고 찬란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런 반어적인 구조에 있다. 날이 감에 따라 외부적인 상황이 비천해질수록 그런 모욕에 맞서는 그녀 내면의 무사태평한 태도, 익살맞은 내레이션은 더욱 고조되며 빛을 발하는 것이다. 엄격한 위계질서하에서 개인의 능력보다는 무조건적인 명령에 일률적으로 따라야 하는 상황, 외국인에 대한 노예와도 같은 대우,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종에 가까운 복종 관계, 비효율적인 절차와 형식 등이 풍자적인 시선과 철저하게 절제된 문체로 마치 복수하듯이 냉정하게 묘사되고 있다. 부조리에 대한 무자비할 정도의 시니컬한 야유가 압권이다. 현실을 현실보다 더욱 치열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중압감을 피아노 선율 같은 세밀하고 가벼운 터치로 승화시켰다. 작가만의 명징한 통찰력, 감정을 전혀 섞지 않는 차가운 문체가 글의 재미를 더욱 높인다. 저자 아멜리 노통브는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90년대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벨기에 출신의 젊은 작가. 1967년 출생으로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25세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와 10만 부 이상의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걸머쥔, 자칭 <글쓰기광>인 그녀는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그 밖의 소설로 『사랑의 파괴』1993), 『반박』(1995), 『페플로스』(1996), 『습격』1997) 등이 있고 희곡으로 『불쏘시개』가 있다. 알랭푸르니에 상, 샤르돈 상, 보카시옹 상, 독일 서적상 상, 르네팔레 상(『살인자의 건강법』), 파리 프르미에르 상(『반박』)을 받았다. 유년의 강을 건너기 전의 어린이만이 지닐 수 있는 통찰로 이데올로기와 사랑의 허상을 경쾌하고 진지하게 천착하고 있는 『사랑의 파괴』, 인간 내면의 모순과 열정을 단순한 구성과 우의적인 대사를 통해 형상화한 『반박』은 이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작품들이다. 『두려움과 떨림』은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성숙한 작가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명석한 통찰력과 유머의 작은 향연>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렉스프레스>지에서 9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작품으로 인해 올 한 해 유럽의 가장 촉망받는 작가로 지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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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북토크】 신념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피하라
    우리나라는 정치, 사상적으로 좌우 대립이 극심하다. 여기에는 목사, 장로도 예외가 없다. 친목용으로 만든 단톡방도 좌우 싸움으로 서로 쌍욕을 하고 폭파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몇몇 단톡에서는 여전히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과의 대화는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대화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침을 튀어가며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을 보시고 그 행동을 멈추시기를.....(교보문고를 살펴보니 이 책 개정판이 2023년에 나왔다). 신념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피하라 일본과 우리나라에 탈무드를 소개한 랍비 토케이어가 2009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이다. 그는 준비된 행사를 마친 후, 행사를 주최한 몇몇 우리나라 목사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목사들은 바울이 다른 유대인에게 예수에 대해 논증한 부분에 대해 토케이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토론을 좋아하는 토케이어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는 필자가 한남동에서 랍비와 토라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 차이에 대한 질문이 있을 경우 기본적으로 정통파 유대인이라면 이에 대꾸하지 않고 침묵한다. 이 이유를 랍비 리츠만과 토라 공부를 하며 알 수 있었다. "신념과 믿음의 영역에 대한 토론에서는 침묵하라." 왜 그럴까? 결론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념과 믿음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의 결과물이다.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틀이자 창이다. 엄청난 충격이나 삶의 전환점이 있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어려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부모가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것을 본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공산주의가 무조건 악이라고 생각한다. 빨갱이는 척결의 대상이지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서 공권력에 의해 부모가 억울하게 죽은 경험을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정부와 공권력을 자신을 핍박하는 존재라 생각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신념과 믿음을 대상으로 토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진정한 토론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끝장토론’을 해도 답이 없다. 설령 자신의 주장이 틀렸어도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일 용의가 없어 보인다. 토론이 아니라 설득과 자기주장이다. 생산적 토론이라면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면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견해를 조금 양보하고 타협하면 되는데 그럴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 광기에 논리가 부족하면 감정에 호소하려 하고 인신공격을 서습지 않는다. "당신 친일파 후손이잖아!" "당신 학생 때 주사파였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돌대가리야!"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정치, 사회적 이슈가 이념적 차이에 기반을 둔다. 이런 주제는 아무리 토론을 해도 답이 나올 수 없다. 무상보육에 대한 찬반 논쟁은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없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람은 국가가 보육이나 급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사람은 그것은 개인의 몫이며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발점부터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타협하고 절충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무상보육에 대한 분명히 정의가 내려지고, 이 정책의 필요성에 공감이 이루어진 후에 무상보육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까는 토론이 가능하다. 이미 사회적 합의가 있는 주제에 대해 구체적 시행을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것은 토론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이념 문제와 더불어 종교적 신념에 관한 부분도 토론이 안 되는 부분이다. 많은 사이비 종교나 이단 논란이 있는 종교의 추종자들은 개인적인 토론을 제안한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어느 경전의 내용을 들고 자신의 교주가 설명한 게 맞는지 틀리는지 토론하자고 한다. 이런 토론 역시 백날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양쪽 모두 자신이 논리적으로 부족해도 상대 견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토론을 위해 가져야 할 첫 번째 준비는 과연 이 주제가 토론의 가치가 있는 주제인지 분별하는 지혜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토론할 가치가 없는 주제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는 법 탈무드에서는 이 교훈을 단의 아들 후쉼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야곱이 죽은 후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을 선두로 아버지의 시신을 매고 가나안으로 출발했다. 가나안에 도착해 선조들의 무덤인 막벨라 굴에 도착하자, 큰아버지인 에서가 장례 행렬을 막아섰다. 막벨라 굴에는 여섯 자리가 있었는데,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레베카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가 묻혀 있었다. 당연히 한 자리는 야곱의 몫이었는 데 에서가 억지를 부렸다. 그 한 자리는 큰아들인 자기 몫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야곱의 형제들은 납달리를 이집트로 보낸 다음 야곱이 에서에게 이미 충분한 돈을 지불했으며 다시는 무덤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내용의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납달리가 이집트에 간 사이 후쉼은 왜 장례 행렬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 의아해 했다. 후쉼은 청각장애인이어서 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강의 사정을 친척들에게 간신히 알아들은 후쉼이 에서 앞에 나아갔다. 에서가 뭐라고 하자 후심은 개의치 않고 에서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장례 행렬을 이끌고 막벨라 굴로 들어갔다. 랍비들은 후쉼의 행동을 칭찬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후쉼이 청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들을 수 있던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에서의 궤변에 걸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생산적 토론과 대화를 위해 점검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신념과 가치관, 종교적 믿음에 관한 토론은 아무리 이야기 해도 결론이 나기 힘들다. 차라리 그런 주제의 토론이나 대화에서는 침묵하는 게 더 현명할 수 있다(pp. 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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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1
  • 【북토크】 책을 사랑하는 호모 비블리쿠스
    먼 취재길을 갈 때 가방에 가벼운 책 한권 들고 간다. 얼마전에는 소설을 들고 갔는데 왕복하며 다 읽었다. 취재도 하고 독서도 하고 꿩 먹고 알 먹고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이든 에세이든, 자기 개발서든 작가들에게 고맙다. 책이 없으면 긴 시간 스마트폰이나 하든지 했을 것이다. 독서 인구가 줄지 않아 작가나 출판사나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 비록 ‘호모 비블리쿠스’는 아니나 그래도 오랜 세월 독서가 취미이니 고마울 뿐이다. 호모 비블리쿠스, 서인종의 탄생 무던히도 책을 좋아하는 B가 있었다. 책 읽기도 좋아했으나 그보다는 책 그 자체를 아끼고 사랑한 이였다. 사람들을 만나면 책 이야기만 했다. 이야기는 책 내용일 때도 가끔 있었지만 책의 냄새, 색깔, 종이의 감촉, 디자인, 무게감, 크기와 모양, 글꼴 그런 것들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가 책을 무지막지하게 사들인 것은 당연한 일.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그리 많이 사고 또 사느냐?" 대답은 늘 같았다. “책 맛은 꼭 읽어야만 맛볼 수 있는게 아니다. 제목만 읽어도 책 절반은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책을 사는 순간, 책을 보는 순간, 반은 읽고, 아니 맛보고 들어가는 셈이다." B가 책을 사자마자 하는 일도 늘 같았다. 손으로 책을 들어 이리저리 한참을 돌려본다. 책을 펼쳐 종이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손으로 책장을 살살 쓸어 만진다. 그다음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 팔랑팔랑 스삭스삭 소리를 듣는다. 지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B의 행동은 책 표지와 본문 종이에 입술과 혀끝을 차례로 대며 맛을 보는 것이었다. B가 '책맛'이라고 표현한 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 이렇게 책을 시각, 후각, 촉각, 청각 그리고 미각등 오감(五感)으로 누리곤 하였으니 일상적 삶에서의 책임감은 별로 없는 B가 책오감(五感)에서만큼은 더없이 충실하였다. B가 자신의 서재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소는 두말할나위 없이 서점과 도서관. B가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책을 살피고 있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밝은 빛에 휩싸이는 느낌이 들었다. B는 '서가 사이에 너무 오래 서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썼지만 온몸의 기운이 풀리고 눈이 점점 보이지 않더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B는 눈을 떴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 눌린 기분이랄까. 아무리 힘을 쓰려 해도 몸은 옴짝달싹할 줄 몰랐다. 눈을 돌려보려 해도 마찬가지다. 좀 더 정신을 집중해보니 아까 서 있던 서가 근처인건 분명하다. 두려움이 몰려온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 책이 여기쯤 있을 텐데...." "아니야.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을걸 " B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려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다. '여기요 여기 좀 봐주세요. 제가 어떻게 된 거죠?' 머릿속에서만 말이 맴돌 뿐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B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B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챈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B는 자신이 펼쳐보던 책, 바로 그 책이 되어 서가에 꽂혀버린 것이다. B는 이걸 알아챈 뒤 참 이상하리만치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다. 책과 한 몸이 되어버린, 아니 책이 되어버린 B는 책 내용이 온 신경과 세포가 되어 살아 있다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B는 이제 책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B가 다만 슬퍼한 것은 '한 책에 갇히다니, 아니 한 책이 되어버리다니'였다. B는이내 자신이 즐겨 어루만지던 다른 책을 떠올렸다. 냄새, 색깔, 종이의 감촉, 디자인, 무게감, 크기와 모양, 글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맛. 그 순간 B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 환희에 휩싸였다. 방금 떠올린 그 다른 책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반신반의하며 B는 다시 또 다른 책을 떠올렸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책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B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책을 떠올리며 도서관의 이곳저곳으로 이동, 아니 이 책 저 책이 되어보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수백권으로 산 뒤에야 생각이 났다. 다시 예전 상태로,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나는 사람인가, 책인가? 책이 된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으로 살았던 책, 본래 책이었는데 잠깐 사람으로 살다가 책으로 되돌아온 책인가? B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또 다른 책이 떠올랐다. 온 신경과 세포에 책 내용이 가득 차올라 '책을 살아내는' 충만한 느낌을 계속해서 새롭게 맛보았다. 그러는 사이 자기 존재에 대한 혼란과 물음도 잦아들었다. 이렇게 온전한 서인합일(書人合一)을 통해 '호모 비블리쿠스(homo biblicus)'라는 새로운 종, 곧 서인종(書人種)이 탄생한 것이다. 서인종이 정확히 언제 탄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책이 있었고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그들은 탄생했고 또 살아 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활동한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침볼도가 묘사한 서인종은 신성 로마제국 황실 사서(司書)이자 소장품 관리책임자이며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공식 역사가였다. 지도 제작자로도 유명한 이 서인종의 이름은 볼프강 라지우스(1514~1565).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수도권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문헌을 모아들였다. 때로는 훔치기까지 했다. 사실 이 그림은 라지우스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 속 인물(?)이 쓴 안경은 책을 넣어 두는 서궤(書)의 열쇠, 수염은 책과 서가의 먼지를 털어내는 동물 꼬리 먼지떨이다. 머리 윗부분에 해당하는 책만 펼쳐져 있다. 두 가지 뜻을 담았을지 모른다. 머리에 놓인 책을 눈으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책만 좋아하고 책을 읽지는 않는 사람을 놀려먹는 뜻이 하나다. 책을 읽으면서 지식이 머리에 저장되고 생각이 펼쳐진다 하겠으니, 펼쳐진 책은 곧 지성(知性)의 작동을 뜻할 수 있다. 책 좋아하여 잔뜩 쌓아놓기는 해도 좀처럼 읽지는 않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조롱 받아야 할까? 아니다. 그런 사람도 책 표지만은 읽지 않겠는가. 표지에 실린 제목과 저자, 출판사 정보만 접하더라도, 표지 디자인과 장정(裝幀)을 감상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충분히 독서인이다. 독서 가운데 뜻밖에 보람과 유익이 큰 독서는 바로 '표지 독서'다(pp.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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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북토크】 피카소,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인가?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된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 예술가들 중에는 성폭력 범죄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피카소도 성 범죄자라고 규정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앞으로 피카소와 그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분리해 봐야할지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피카소, 위대한 예술가인가, 그루밍 가해자인가 《화가의 아내>라는 책이 있다. 긴 세월을 화가인 남편과 동고동락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된 아내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각 챕터마다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과 작품은 모두 개성 있고 많이 다른 반면, 아내들의 삶은 거의 다 비슷했다. 나중에는 모든 이야기가 뒤섞여 이 화가의 아내 이야기였던가, 저 화가의 아내 이야기였던가 헷갈릴 정도였다. 예술가는 한 자루의 촛불과 같아서 주변의 모든 산소를 다 빨아들인다고 했던가. 남성 화가의 아내, 연인, 뮤즈인 여성들은 대부분 음지식물처럼 그의 그늘에 살면서 말없이 뒷바라지하다 소멸했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미술 유파인 '라파엘 전파'의 뮤즈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의 경우를 보자. 1849년 런던의 한 모자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시달은 가게를 방문한 남자로부터 갑작스럽게 모델 제안을 받았다. 자신을 화가 월터 데버렐(Walter Deverell)이라고 밝힌 이 남자는 시달의 호리호리한 몸매, 차분한 얼굴 생김새, 타오를 것 같은 빨강 머리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으며 모델의 요건을 다 갖췄다고 강조했다. 스무 살의 시달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호기심이 동했다. 마침내 모델이 되기로 수락하면서 시달은 순식간에 '라파엘 전파'의 뮤즈로 등극한다. 데버렐이 "내가 얼마나 엄청나게 아름다운 창조물을 발견했는지! 맹세코 그녀는 여왕 같다"라며 라파엘 전파 친구들에게 열렬히 시달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데버렐의 말에 호응하듯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은 시달을 이상화된 미인으로 그려냈다. 그녀는 여러 그림 속에서 여리고 우울하며,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됐다.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1852년 작 <오필리아>가 대표적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음을 맞는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사실 시달이 자신의 육체를 갈아 넣다시피 고생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밀레이는 오필리아의 최후를 실감나게 묘사해야 한다며, 시달을 여러 시간 동안 차가운 물을 채운 욕조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달은 폐렴까지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시달의 성실함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것이 모델의 운명이라지만, 어쩌면 시달은 허탈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고민 때문이었을까. 시달은 1852년부터 그림을 개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1857년에는 셰필드의 지역 미술학교에서 인물 드로잉 수업을 정식으로 받는 등 창작자로서의 열정을 드러냈다. 시달은 유화뿐 아니라 스케치, 드로잉, 수채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작품을 쏟아냈다. 그중 시달의 초기작 <샬럿의 여인>은 의미심장하다.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이 1833년에 발표한 시에 영감을 받아 그린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밖을 직접 볼 수 없고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봐야 하는 저주에 걸린 '샬럿의 여인' 성안에 갇힌 채 직물을 짜며 저주가 풀리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창밖을 직접 내다보고 만다. 결국 거울은 깨지고 찢어져버린 직물 속 실들이 '샬럿의 여인'의 몸을 친친 감는다. 이 같은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는 단 한순간만이라도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시달은 '샬럿의 여인'의 심경에 분명 공감했을 것이다. 캔버스 속 박제된 뮤즈 신세였던 자신의 모습과 저주에 걸린 '살럿의 여인'이 겹쳐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1860년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와 결혼하면서, '화가 시달'의 꿈은 멈추고 만다. 불행히도 아내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마저도 실현되지 않았다. 남편의 애정은 식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한 아이까지 사산했다. 이후 시달은 샬럿의 여인처럼 집에 갇혀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결혼한 지 2년도 못 되어 수면제용 아편제를 과다 복용해 죽었다. 그녀의 시신은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온 로세티에 의해 뒤늦게 발견됐다. 죄책감에 휩싸인 로세티는 '시달의 삶에 영감 받아 쓴 소네트를 그녀의 관 속에 함께 묻었다. 하지만 7년 뒤, 로세티는 본전을 뽑고 싶었던 것인지 기어이 시달의 묘를 파헤쳐 소네트 원본을 꺼내 출판했다. 남성들에게 영감을 나눠주는 뮤즈로 사는 대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 되어보려 발버둥 쳤던 시달. 하지만 이번엔 그림이 아닌 소네트였다. 운명이라는 실은 시달이 죽음을 맞은 뒤에도 끝끝내 그녀의 몸을 친친 감고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20세기가 되어서도 뮤즈의 운명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입체파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에게도 시달 같은 뮤즈가 있었다. 바로 마리 테레즈 발테르(Marie-Thérèse Walter)가 그 주인공. 시달은 뮤즈의 올가미를 벗어나려고 애쓰기라도 했지만, 마리 테레즈는 뮤즈의 운명에 순응했다. 그리고 피카소가 행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 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서적 학대)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 1927년 1월 8일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날, 마리 테레즈는 파리의 어느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길을 나섰다. 이제 17세. 세상을 탐색하려고 기지개를 켤 나이였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막 지하 계단에서 올라온 그때, 누군가 난데없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마리 테레즈의 회색 눈동자에 들어온 사람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흥미로운 얼굴을 가졌군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소. 당신과 나는 함께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46세의 파블로 피카소였다. 피카소든 말든, 마리 테레즈는 이 무례한 아저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수영과 등산을 좋아하는 10대였을 뿐, 예술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피카소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집요했다. 그는 6개월 동안 마리 테레즈를 쫓아다녔다. 피카소는 그녀를 서커스와 극장에 데려가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환심을 샀고, 마리 테레즈의 어머니에게도 초현실적인 초상화를 그려주며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 마리 테레즈는 그 과정에서 피카소가 아주 유명한 예술가라는 것, 그리고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카소는 계속 속삭였다. "우리는 함께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마리 테레즈는 그의 숨겨진 정부(情婦)가 된다. 그 후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통해 청춘과 열정을 회복했고 타성에 빠져 있던 그의 그림도 활력을 되찾았다. 17세 미성년자와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는 지인의 말에 피카소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정점에 있고 그 아이도 지금 그애 인생의 정점에 있으니 괜찮다!" 피카소의 말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마리 테레즈에게는 최악의 시작이었고, 피카소는 과거보다 확실히 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카소의 전기를 쓴 친구 브라사이(Brassai)는 이렇게 증언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금발, 빛나는 얼굴색,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 그의 그림은 물결치기 시작했다” 22세의 마리 테레즈를 그린 <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분홍빛 젊음을 내뿜는 마리 테레즈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잠들어 있다. 엷게 미소 띤 입과 부드럽게 감은 눈에서 평온함과 나른함이 느껴진다. 코를 분기점으로 쪼개진 얼굴은 마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꿈을 형상화한 듯하다. 바로 이 모습이 피카소가 본 마리 테레즈였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꿈결같이 평화로운 쉼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바로 그게 문제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의 유순한 성격은 답답함이 되었고, 한때 피카소가 찬미했던 자연스러운 모습은 투박함과 무식함의 증거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에게 싫증난 피카소는 1937년 그녀와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를 새 연인으로 삼았다.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대놓고 연애를 즐기는 와중에도 마리 테레즈에게 희망 고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내 사랑, 여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소. 행복해지는 생각만 하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주겠소?" 그러나 피카소는 다시는 마리 테레즈 곁으로 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과 스캔들을 뿌리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카소를 기다리며 비혼으로 혼자 딸을 키우던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 사망 4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에게는 이런 유서를 남겼다. “내가 저세상에 계신 네 아빠를 돌봐줘야 해” '그루밍(grooming. 길들이기) 성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호감을 얻거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욕을 충족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결과 가해자의 학대 행위가 사랑이라고 믿는 피해자도 있다. 마리 테레즈가 그랬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성범죄자들의 흔한 변명이다. 피카소도 그랬다. 피카소가 이룬 위대한 예술로도 그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그렇지 않은가?(pp. 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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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북토크】 별일 아닌 것이 별일인 별난 세상
    아직도 뉴스 진행하는 여자 앵커가 안경을 쓰는 것이 이슈가 되는 세상이다. 안경 쓰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TV 뉴스를 안 본 지 오래됐다. 이전에 보면 여자 앵커는 탤런트 뺨치게 예뻤었던 기억이 난다. 지나고 보니 앵커라는 사람들은 쓰인 뉴스 원고를 읽어주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인형같이 예쁘기라도 해야 한다. 인형은 안경을 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안경 쓴 것이 이슈가 아니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제대로 된 뉴스를 진행하는 것이 이슈가 되었으면 한다. 일단 저질러야 할 때가 있는 법 "선배님, 저 오늘 안경 끼고 진행하겠습니다." 생방송 10분 전이었다. 원고를 정리하고 뉴스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 보도국 선배에게 말했다. "어? 어, 어." 그날은 평소보다 피곤한 아침이었고 이런 날 안경을 껴야겠다 마음먹은 참이었다. 캐비닛에서 안경을 꺼내 착용하고 보도국으로 향했다. 뉴스 시작 전 그래도 담당 선배에게 알리긴 해야겠다 싶어 간단히 말씀드린 것이다. '아 떨려. 하루 이틀 진행한 뉴스도 아닌데 왜 이리 긴장 되지.' 여느 때처럼 뉴스부조종실과 스튜디오 감독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차는데 카메라 감독님, 조명 감독님, PD 선배까지 하나둘 카메라 앞으로 다가 와 물었다. “현주 씨, 오늘 안경 끼는 거야? 눈 어디 다친 거 아니지? 갑자기 웬 안경이야?" 여러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궁금증과 의아함을 가질 거라 당연히 예상했지만 막상 닥치니 하나하나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유를 나열할수록 변명처럼 들릴 듯했고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네, 오늘 그냥 안경 껴보려고요." 신기하다는 반응과 '쓰읍' 하는 마뜩잖음이 섞여 돌아 왔다. 앵커 앞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 화면이 있어서 본방송이 시작하기 전 모니터로 어떻게 나오나 확인할 수 있는데, 화면 속 모습은 내가 봐도 낯설었다. 시청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까? 아무렇지 않을까? 싫어할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 함께 뉴스를 진행하는 파트너는 내 결정에 지지를 보내주었던 박경추 선배가 아니었다. 마침 그날 출장을 떠나 김대호 선배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긴장한 나를 보고 선배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정말 잘 어울려. 시청자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어쩜 이리 파트너 복이 많은지. 하지만 선배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그날 뉴스는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뉴스가 끝나고, 시작 전과 달리 이번에는 스튜디오에서도 뉴스부조종실에서도 싫다 좋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선뜻 판단하지 못하는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보도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보도국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한 선배가 말을 걸었다. 아까 너무 급작스럽게 들어가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왜 안경을 꼈는지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며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다. 아나운서국과는 협의가 되었는지 묻는 선배도 있었다. 안경을 끼는게 협의를 해야 하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나운서국에 따로 말씀을 드린 건 없다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일부터 안경을 끼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정한 말투로 걱정을 실어 한 선배가 말했다. 현주 씨 이미지도 생각해봐. 너무 냉철해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아나운서국으로 향하며 침울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 앵커는 냉철해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선배가 별달리 나쁜 의도를 실었다기보다 오히려 나를 위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기에 이 벽이 더욱 공고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카페로 글을 쓰러 가는 대신 아나운서국에 앉아 선배들이 출근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국장님이 오자마자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는데, 너무 좋은 시도라며 격려해주셨다. 다른 선배들도 깜짝 놀랐다면서도 대부분 내 결정을 지지한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우려를 표하는 의견도 있었다. 취지를 이해하고 응원하지만, 다소 보수적일 수 있는 보도국이나 여타 부서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힘을 키워 나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건 어떨까 하는 제안도 있었다. 물론 판단과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임현주 앵커 번호 맞죠? 연합뉴스 기자입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오늘 아침 뉴스 잘 봤어요. 저희 보도국장님도 아침 뉴스 보고 너무 신선하다며 언제부터 안경을 꼈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좋았고요.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생각지도 못하게 연합뉴스에서 인터뷰 요청이 온 것이다. 잠시 후 인터넷에 기사가 실렸고 이내 온갖 매체에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태어나서 가장 많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매체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사마다 수백 개의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런 반응은 상상해본 적 없었기에 그저 얼떨떨했다. 방송국 안에서 호불호와 찬반이 엇갈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만큼 반향이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연합뉴스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다음 날 안경을 또 낄 수 있었을까? 그날 아침 전화는 운명의 전화였던 걸까? 그리고 만약, 그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안경을 끼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뉴스가 끝나고 이런저런 누군가의 얼굴과 말을 떠올리며 고민하다 다음 날부터 안경을 벗었다면...? 수많은 '만약'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떤 일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거나 너무 많은 얼굴을 떠올리는 대신 ‘저질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pp. 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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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북토크】 돈을 다루는 유대인의 방법
    살아가는데 돈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돈을 어떻게 벌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돈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이 없다. 그런면에서 유대인은 참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손주들이 생기면 이들의 방법을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러 전문가의 대담을 실은 책인데 가볍게 읽어볼 만 했다.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돈은 버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버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가 뭐예요? 홍익희: 한번 더 유대인의 예들 들면요, 이들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 남성은 만 13세 때, 여성은 만 12세에 성인식을 하는데요. 그때 부모나 친척들에게 큰돈을 받습니다. 친척들은 마치 자기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의미에서 큰돈을 줘요. 큰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액수인가요? 한 백만 원 단위입니까 천만원 단위입니까? 홍익희: 서민 자녀들은 성인식이 끝나면 평균 6만 달러 정도가 모이고요. 잘사는 집의 아이들은 몇십만 달러가 모입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넘으면 완전한 성인의 권리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예요. 그렇게 큰돈을 받은 뒤에 부모들의 지시를 받지 않고 친구들과 의논을 해서 분산투자를 합니다. 주식과 채권 심지어는 부동산과 적금 이렇게 포트폴리오를 짜서,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돈을 불리기 위해 돈의 흐름과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친구들하고 의논하면서 '지금은 활황기니까 주식의 비중을 높여야지, 지금은 불경기로 진입하니까 채권 비중을 높여야지' 하며 스스로 판단하면서 자기 돈을 불려나가죠.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취직할 것인지, 자기가 불린 돈을 갖고 창업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창업률이 압도적으로높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면 이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요. '돈을 번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죠. 그런데 유대인은 이미 13세부터 돈을 불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돈을 불린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평생 동안 어떻게 돈을 불릴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죠. 그러니까 돈에 대한 시각과 개념이 우리의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서민 계층이 만 13세 정도에 우리 돈으로 6천만 원 이상의 목돈을 쥘 수 있게끔 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니까 '버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금방 이해가 되네요. 버는 것은 몸을 움직여 일해서 뭔가 얻는 것이고 만드는 것은 이미 있는 자산을 불리는 것이다. 그 말이네요. 전범선: 제 대학교 때 룸메이트가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었는데요. 어쩐지 대학생활 내내 저보다 좀 여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저랑 생각 하는 방식도 굉장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요(pp. 24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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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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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소설의 재미-반전
    오래전 소설을 잘 읽다가 안 읽게 되었다. 한 줄이면 될 것을 가지고 책 한 권, 심지어는 열 권을 쓰는 소설이 '사기'처럼 보였다. 이것은 내가 드라마를 안 보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TV 드라마는 「모래시계」 이후로 거의 안 본다(이것도 조금 보다가 관뒀다). 최근 본 드라마라고 한다면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수리남」 정도이다. 지금도 소설은 손이 잘 안 간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내 책꽂이에는 읽지 않은 소설이 수십 권이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이 책은 얇아서 먼 취재길에 가져가 왕복하며 다 읽었다. 드라마, 시트콤 같은 책이다. 책 제목 『두려움과 떨림』이란 말은 책 말미에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주인공이 자기를 괴롭힌 일본 상사를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장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에 대한 외국인의 공격이 통쾌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쉽게 읽을 소설이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그리고 어떻게 단순한 주제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네 구름은 그토록 격정으로가득하지.나는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되어 이 구름들이 쏟아 붓는 분노를 기꺼이 받아 내겠어. 얼어붙은 침들이 셀 수 없이 구름에서 쏟아져 내 얼굴에 막 튀고 있어. 나는 그게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야. 네가 모욕적인 말로 내 살가죽을 도려낼 필요를 느끼는 것, 사랑하는 눈보라(주인공의 일본 상사 이름 뜻), 너는 공포를 쏘지, 네 사형 집행반 앞에서 눈을 가리는 게 싫다고 했어, 그렇게 오래 전부터 네 시선에서 기쁨을 읽게 될 날을 고대했기 때문에. 내가 볼 때는 순전히 형식적인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그녀가 포만감을 느끼는 데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뭘 할 생각이죠?」 나는 그녀에게 쓰고 있던 원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얘기로 답변에 대신했다. 「어쩌면 프랑스 어를 가르칠 수도 있을 거예요.」 내 상사가 코웃음을 쳤다. 「가르친다고! 당신이! 당신이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이런 망할 놈의 눈보라, 절대 탄약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니까! 나는 그녀가 뭔가 또 구실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내가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고 멍청하게 대답을 하지는 말아야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아직도 내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죠. 솔직히 말해, 당신이 어떤 직업인들 가질 수 있겠어요?」 나는 그녀가 엑스터시의 절정에 도달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나는 사무라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 사무라이들이 초인적인 숭배의 감정으로 목소리가 녹아들면서 자신의 두목을 배알하는 모습에 그렇게 딱 부합하는 이 표현을 늘 끔찍이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 처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이 볼 때 사람들이 쓰레기 수거하는 일에는 나를 받아 줄까요?」 「물론이죠!」 그녀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 말을 했다.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성공이었다(pp. 134-135). * 1999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 * 일본 사회의 경직성을 고발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 줄거리 이 소설은 한 벨기에 여성이 일본 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본에 대한 나름의 동경을 가지고 있던 이 여성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회사라는 조직이 가지는 비인간적인 모순들에 눈을 뜨게 된다. 회의실에서 그녀가 차를 따르며 일본어로 인사를 건넨 것이 일본인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라고 지적받게 되고 그녀의 보고서가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에 대한 검토도 없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무시당하게 된다. 그녀의 업무는 그녀의 탁월한 외국어 능력, 사안에 대한 분석력에 상관없이 매일 똑같은 서류의 수십 일에 걸친 복사, 숫자들을 다시 베껴 적는 것으로 점점 단순하고 효용 가치가 없는 일로 대체되고 결국 화장실 청소로 전락하게 된다. 그녀가 겪는 모멸감과 잔인성은 그녀의 내면을 황폐화시킨다. 그러나 그녀만의 내적 독백은 유머러스하고 명랑하며 도발적이고 찬란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런 반어적인 구조에 있다. 날이 감에 따라 외부적인 상황이 비천해질수록 그런 모욕에 맞서는 그녀 내면의 무사태평한 태도, 익살맞은 내레이션은 더욱 고조되며 빛을 발하는 것이다. 엄격한 위계질서하에서 개인의 능력보다는 무조건적인 명령에 일률적으로 따라야 하는 상황, 외국인에 대한 노예와도 같은 대우, 서양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주종에 가까운 복종 관계, 비효율적인 절차와 형식 등이 풍자적인 시선과 철저하게 절제된 문체로 마치 복수하듯이 냉정하게 묘사되고 있다. 부조리에 대한 무자비할 정도의 시니컬한 야유가 압권이다. 현실을 현실보다 더욱 치열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중압감을 피아노 선율 같은 세밀하고 가벼운 터치로 승화시켰다. 작가만의 명징한 통찰력, 감정을 전혀 섞지 않는 차가운 문체가 글의 재미를 더욱 높인다. 저자 아멜리 노통브는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90년대 프랑스 문학의 독특한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벨기에 출신의 젊은 작가. 1967년 출생으로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25세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와 10만 부 이상의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걸머쥔, 자칭 <글쓰기광>인 그녀는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그 밖의 소설로 『사랑의 파괴』1993), 『반박』(1995), 『페플로스』(1996), 『습격』1997) 등이 있고 희곡으로 『불쏘시개』가 있다. 알랭푸르니에 상, 샤르돈 상, 보카시옹 상, 독일 서적상 상, 르네팔레 상(『살인자의 건강법』), 파리 프르미에르 상(『반박』)을 받았다. 유년의 강을 건너기 전의 어린이만이 지닐 수 있는 통찰로 이데올로기와 사랑의 허상을 경쾌하고 진지하게 천착하고 있는 『사랑의 파괴』, 인간 내면의 모순과 열정을 단순한 구성과 우의적인 대사를 통해 형상화한 『반박』은 이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작품들이다. 『두려움과 떨림』은 그녀의 작품들 중 가장 성숙한 작가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명석한 통찰력과 유머의 작은 향연>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렉스프레스>지에서 9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작품으로 인해 올 한 해 유럽의 가장 촉망받는 작가로 지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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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북토크】 신념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피하라
    우리나라는 정치, 사상적으로 좌우 대립이 극심하다. 여기에는 목사, 장로도 예외가 없다. 친목용으로 만든 단톡방도 좌우 싸움으로 서로 쌍욕을 하고 폭파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몇몇 단톡에서는 여전히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과의 대화는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대화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침을 튀어가며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을 보시고 그 행동을 멈추시기를.....(교보문고를 살펴보니 이 책 개정판이 2023년에 나왔다). 신념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피하라 일본과 우리나라에 탈무드를 소개한 랍비 토케이어가 2009년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이다. 그는 준비된 행사를 마친 후, 행사를 주최한 몇몇 우리나라 목사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목사들은 바울이 다른 유대인에게 예수에 대해 논증한 부분에 대해 토케이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토론을 좋아하는 토케이어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는 필자가 한남동에서 랍비와 토라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 차이에 대한 질문이 있을 경우 기본적으로 정통파 유대인이라면 이에 대꾸하지 않고 침묵한다. 이 이유를 랍비 리츠만과 토라 공부를 하며 알 수 있었다. "신념과 믿음의 영역에 대한 토론에서는 침묵하라." 왜 그럴까? 결론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념과 믿음은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의 결과물이다.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틀이자 창이다. 엄청난 충격이나 삶의 전환점이 있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다. 어려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부모가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것을 본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공산주의가 무조건 악이라고 생각한다. 빨갱이는 척결의 대상이지 대화의 상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서 공권력에 의해 부모가 억울하게 죽은 경험을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정부와 공권력을 자신을 핍박하는 존재라 생각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신념과 믿음을 대상으로 토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진정한 토론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끝장토론’을 해도 답이 없다. 설령 자신의 주장이 틀렸어도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일 용의가 없어 보인다. 토론이 아니라 설득과 자기주장이다. 생산적 토론이라면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면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견해를 조금 양보하고 타협하면 되는데 그럴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 광기에 논리가 부족하면 감정에 호소하려 하고 인신공격을 서습지 않는다. "당신 친일파 후손이잖아!" "당신 학생 때 주사파였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돌대가리야!"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정치, 사회적 이슈가 이념적 차이에 기반을 둔다. 이런 주제는 아무리 토론을 해도 답이 나올 수 없다. 무상보육에 대한 찬반 논쟁은 제대로 된 토론이 될 수 없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람은 국가가 보육이나 급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사람은 그것은 개인의 몫이며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발점부터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타협하고 절충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무상보육에 대한 분명히 정의가 내려지고, 이 정책의 필요성에 공감이 이루어진 후에 무상보육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까는 토론이 가능하다. 이미 사회적 합의가 있는 주제에 대해 구체적 시행을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것은 토론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이념 문제와 더불어 종교적 신념에 관한 부분도 토론이 안 되는 부분이다. 많은 사이비 종교나 이단 논란이 있는 종교의 추종자들은 개인적인 토론을 제안한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어느 경전의 내용을 들고 자신의 교주가 설명한 게 맞는지 틀리는지 토론하자고 한다. 이런 토론 역시 백날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양쪽 모두 자신이 논리적으로 부족해도 상대 견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토론을 위해 가져야 할 첫 번째 준비는 과연 이 주제가 토론의 가치가 있는 주제인지 분별하는 지혜이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토론할 가치가 없는 주제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는 법 탈무드에서는 이 교훈을 단의 아들 후쉼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야곱이 죽은 후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을 선두로 아버지의 시신을 매고 가나안으로 출발했다. 가나안에 도착해 선조들의 무덤인 막벨라 굴에 도착하자, 큰아버지인 에서가 장례 행렬을 막아섰다. 막벨라 굴에는 여섯 자리가 있었는데,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레베카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가 묻혀 있었다. 당연히 한 자리는 야곱의 몫이었는 데 에서가 억지를 부렸다. 그 한 자리는 큰아들인 자기 몫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야곱의 형제들은 납달리를 이집트로 보낸 다음 야곱이 에서에게 이미 충분한 돈을 지불했으며 다시는 무덤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내용의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납달리가 이집트에 간 사이 후쉼은 왜 장례 행렬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 의아해 했다. 후쉼은 청각장애인이어서 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강의 사정을 친척들에게 간신히 알아들은 후쉼이 에서 앞에 나아갔다. 에서가 뭐라고 하자 후심은 개의치 않고 에서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장례 행렬을 이끌고 막벨라 굴로 들어갔다. 랍비들은 후쉼의 행동을 칭찬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후쉼이 청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들을 수 있던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에서의 궤변에 걸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생산적 토론과 대화를 위해 점검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신념과 가치관, 종교적 믿음에 관한 토론은 아무리 이야기 해도 결론이 나기 힘들다. 차라리 그런 주제의 토론이나 대화에서는 침묵하는 게 더 현명할 수 있다(pp. 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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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1
  • 【북토크】 책을 사랑하는 호모 비블리쿠스
    먼 취재길을 갈 때 가방에 가벼운 책 한권 들고 간다. 얼마전에는 소설을 들고 갔는데 왕복하며 다 읽었다. 취재도 하고 독서도 하고 꿩 먹고 알 먹고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이든 에세이든, 자기 개발서든 작가들에게 고맙다. 책이 없으면 긴 시간 스마트폰이나 하든지 했을 것이다. 독서 인구가 줄지 않아 작가나 출판사나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 비록 ‘호모 비블리쿠스’는 아니나 그래도 오랜 세월 독서가 취미이니 고마울 뿐이다. 호모 비블리쿠스, 서인종의 탄생 무던히도 책을 좋아하는 B가 있었다. 책 읽기도 좋아했으나 그보다는 책 그 자체를 아끼고 사랑한 이였다. 사람들을 만나면 책 이야기만 했다. 이야기는 책 내용일 때도 가끔 있었지만 책의 냄새, 색깔, 종이의 감촉, 디자인, 무게감, 크기와 모양, 글꼴 그런 것들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그가 책을 무지막지하게 사들인 것은 당연한 일.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읽지도 않는 책을 왜 그리 많이 사고 또 사느냐?" 대답은 늘 같았다. “책 맛은 꼭 읽어야만 맛볼 수 있는게 아니다. 제목만 읽어도 책 절반은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책을 사는 순간, 책을 보는 순간, 반은 읽고, 아니 맛보고 들어가는 셈이다." B가 책을 사자마자 하는 일도 늘 같았다. 손으로 책을 들어 이리저리 한참을 돌려본다. 책을 펼쳐 종이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손으로 책장을 살살 쓸어 만진다. 그다음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 팔랑팔랑 스삭스삭 소리를 듣는다. 지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B의 행동은 책 표지와 본문 종이에 입술과 혀끝을 차례로 대며 맛을 보는 것이었다. B가 '책맛'이라고 표현한 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 이렇게 책을 시각, 후각, 촉각, 청각 그리고 미각등 오감(五感)으로 누리곤 하였으니 일상적 삶에서의 책임감은 별로 없는 B가 책오감(五感)에서만큼은 더없이 충실하였다. B가 자신의 서재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소는 두말할나위 없이 서점과 도서관. B가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책을 살피고 있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밝은 빛에 휩싸이는 느낌이 들었다. B는 '서가 사이에 너무 오래 서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썼지만 온몸의 기운이 풀리고 눈이 점점 보이지 않더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B는 눈을 떴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위 눌린 기분이랄까. 아무리 힘을 쓰려 해도 몸은 옴짝달싹할 줄 몰랐다. 눈을 돌려보려 해도 마찬가지다. 좀 더 정신을 집중해보니 아까 서 있던 서가 근처인건 분명하다. 두려움이 몰려온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 책이 여기쯤 있을 텐데...." "아니야.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을걸 " B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려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다. '여기요 여기 좀 봐주세요. 제가 어떻게 된 거죠?' 머릿속에서만 말이 맴돌 뿐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B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B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챈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B는 자신이 펼쳐보던 책, 바로 그 책이 되어 서가에 꽂혀버린 것이다. B는 이걸 알아챈 뒤 참 이상하리만치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다. 책과 한 몸이 되어버린, 아니 책이 되어버린 B는 책 내용이 온 신경과 세포가 되어 살아 있다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B는 이제 책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B가 다만 슬퍼한 것은 '한 책에 갇히다니, 아니 한 책이 되어버리다니'였다. B는이내 자신이 즐겨 어루만지던 다른 책을 떠올렸다. 냄새, 색깔, 종이의 감촉, 디자인, 무게감, 크기와 모양, 글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맛. 그 순간 B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 환희에 휩싸였다. 방금 떠올린 그 다른 책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반신반의하며 B는 다시 또 다른 책을 떠올렸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책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B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책을 떠올리며 도서관의 이곳저곳으로 이동, 아니 이 책 저 책이 되어보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수백권으로 산 뒤에야 생각이 났다. 다시 예전 상태로,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나는 사람인가, 책인가? 책이 된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으로 살았던 책, 본래 책이었는데 잠깐 사람으로 살다가 책으로 되돌아온 책인가? B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또 다른 책이 떠올랐다. 온 신경과 세포에 책 내용이 가득 차올라 '책을 살아내는' 충만한 느낌을 계속해서 새롭게 맛보았다. 그러는 사이 자기 존재에 대한 혼란과 물음도 잦아들었다. 이렇게 온전한 서인합일(書人合一)을 통해 '호모 비블리쿠스(homo biblicus)'라는 새로운 종, 곧 서인종(書人種)이 탄생한 것이다. 서인종이 정확히 언제 탄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책이 있었고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그들은 탄생했고 또 살아 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활동한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침볼도가 묘사한 서인종은 신성 로마제국 황실 사서(司書)이자 소장품 관리책임자이며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공식 역사가였다. 지도 제작자로도 유명한 이 서인종의 이름은 볼프강 라지우스(1514~1565).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수도권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문헌을 모아들였다. 때로는 훔치기까지 했다. 사실 이 그림은 라지우스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 속 인물(?)이 쓴 안경은 책을 넣어 두는 서궤(書)의 열쇠, 수염은 책과 서가의 먼지를 털어내는 동물 꼬리 먼지떨이다. 머리 윗부분에 해당하는 책만 펼쳐져 있다. 두 가지 뜻을 담았을지 모른다. 머리에 놓인 책을 눈으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책만 좋아하고 책을 읽지는 않는 사람을 놀려먹는 뜻이 하나다. 책을 읽으면서 지식이 머리에 저장되고 생각이 펼쳐진다 하겠으니, 펼쳐진 책은 곧 지성(知性)의 작동을 뜻할 수 있다. 책 좋아하여 잔뜩 쌓아놓기는 해도 좀처럼 읽지는 않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조롱 받아야 할까? 아니다. 그런 사람도 책 표지만은 읽지 않겠는가. 표지에 실린 제목과 저자, 출판사 정보만 접하더라도, 표지 디자인과 장정(裝幀)을 감상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충분히 독서인이다. 독서 가운데 뜻밖에 보람과 유익이 큰 독서는 바로 '표지 독서'다(pp.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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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북토크】 피카소,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인가?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된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 예술가들 중에는 성폭력 범죄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피카소도 성 범죄자라고 규정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앞으로 피카소와 그의 작품을 어떤 식으로 분리해 봐야할지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피카소, 위대한 예술가인가, 그루밍 가해자인가 《화가의 아내>라는 책이 있다. 긴 세월을 화가인 남편과 동고동락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된 아내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각 챕터마다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과 작품은 모두 개성 있고 많이 다른 반면, 아내들의 삶은 거의 다 비슷했다. 나중에는 모든 이야기가 뒤섞여 이 화가의 아내 이야기였던가, 저 화가의 아내 이야기였던가 헷갈릴 정도였다. 예술가는 한 자루의 촛불과 같아서 주변의 모든 산소를 다 빨아들인다고 했던가. 남성 화가의 아내, 연인, 뮤즈인 여성들은 대부분 음지식물처럼 그의 그늘에 살면서 말없이 뒷바라지하다 소멸했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미술 유파인 '라파엘 전파'의 뮤즈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 1829~1862)의 경우를 보자. 1849년 런던의 한 모자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시달은 가게를 방문한 남자로부터 갑작스럽게 모델 제안을 받았다. 자신을 화가 월터 데버렐(Walter Deverell)이라고 밝힌 이 남자는 시달의 호리호리한 몸매, 차분한 얼굴 생김새, 타오를 것 같은 빨강 머리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으며 모델의 요건을 다 갖췄다고 강조했다. 스무 살의 시달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호기심이 동했다. 마침내 모델이 되기로 수락하면서 시달은 순식간에 '라파엘 전파'의 뮤즈로 등극한다. 데버렐이 "내가 얼마나 엄청나게 아름다운 창조물을 발견했는지! 맹세코 그녀는 여왕 같다"라며 라파엘 전파 친구들에게 열렬히 시달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데버렐의 말에 호응하듯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은 시달을 이상화된 미인으로 그려냈다. 그녀는 여러 그림 속에서 여리고 우울하며,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됐다.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1852년 작 <오필리아>가 대표적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음을 맞는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사실 시달이 자신의 육체를 갈아 넣다시피 고생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밀레이는 오필리아의 최후를 실감나게 묘사해야 한다며, 시달을 여러 시간 동안 차가운 물을 채운 욕조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달은 폐렴까지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시달의 성실함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것이 모델의 운명이라지만, 어쩌면 시달은 허탈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고민 때문이었을까. 시달은 1852년부터 그림을 개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1857년에는 셰필드의 지역 미술학교에서 인물 드로잉 수업을 정식으로 받는 등 창작자로서의 열정을 드러냈다. 시달은 유화뿐 아니라 스케치, 드로잉, 수채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작품을 쏟아냈다. 그중 시달의 초기작 <샬럿의 여인>은 의미심장하다.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이 1833년에 발표한 시에 영감을 받아 그린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밖을 직접 볼 수 없고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봐야 하는 저주에 걸린 '샬럿의 여인' 성안에 갇힌 채 직물을 짜며 저주가 풀리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창밖을 직접 내다보고 만다. 결국 거울은 깨지고 찢어져버린 직물 속 실들이 '샬럿의 여인'의 몸을 친친 감는다. 이 같은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는 단 한순간만이라도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시달은 '샬럿의 여인'의 심경에 분명 공감했을 것이다. 캔버스 속 박제된 뮤즈 신세였던 자신의 모습과 저주에 걸린 '살럿의 여인'이 겹쳐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1860년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abriel Rossetti)와 결혼하면서, '화가 시달'의 꿈은 멈추고 만다. 불행히도 아내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마저도 실현되지 않았다. 남편의 애정은 식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한 아이까지 사산했다. 이후 시달은 샬럿의 여인처럼 집에 갇혀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결혼한 지 2년도 못 되어 수면제용 아편제를 과다 복용해 죽었다. 그녀의 시신은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온 로세티에 의해 뒤늦게 발견됐다. 죄책감에 휩싸인 로세티는 '시달의 삶에 영감 받아 쓴 소네트를 그녀의 관 속에 함께 묻었다. 하지만 7년 뒤, 로세티는 본전을 뽑고 싶었던 것인지 기어이 시달의 묘를 파헤쳐 소네트 원본을 꺼내 출판했다. 남성들에게 영감을 나눠주는 뮤즈로 사는 대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 되어보려 발버둥 쳤던 시달. 하지만 이번엔 그림이 아닌 소네트였다. 운명이라는 실은 시달이 죽음을 맞은 뒤에도 끝끝내 그녀의 몸을 친친 감고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20세기가 되어서도 뮤즈의 운명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입체파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에게도 시달 같은 뮤즈가 있었다. 바로 마리 테레즈 발테르(Marie-Thérèse Walter)가 그 주인공. 시달은 뮤즈의 올가미를 벗어나려고 애쓰기라도 했지만, 마리 테레즈는 뮤즈의 운명에 순응했다. 그리고 피카소가 행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 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서적 학대)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 1927년 1월 8일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날, 마리 테레즈는 파리의 어느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길을 나섰다. 이제 17세. 세상을 탐색하려고 기지개를 켤 나이였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막 지하 계단에서 올라온 그때, 누군가 난데없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린 마리 테레즈의 회색 눈동자에 들어온 사람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흥미로운 얼굴을 가졌군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소. 당신과 나는 함께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46세의 파블로 피카소였다. 피카소든 말든, 마리 테레즈는 이 무례한 아저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수영과 등산을 좋아하는 10대였을 뿐, 예술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피카소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집요했다. 그는 6개월 동안 마리 테레즈를 쫓아다녔다. 피카소는 그녀를 서커스와 극장에 데려가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환심을 샀고, 마리 테레즈의 어머니에게도 초현실적인 초상화를 그려주며 마음의 벽을 무너뜨렸다. 마리 테레즈는 그 과정에서 피카소가 아주 유명한 예술가라는 것, 그리고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피카소는 계속 속삭였다. "우리는 함께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마리 테레즈는 그의 숨겨진 정부(情婦)가 된다. 그 후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의 관계를 통해 청춘과 열정을 회복했고 타성에 빠져 있던 그의 그림도 활력을 되찾았다. 17세 미성년자와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는 지인의 말에 피카소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정점에 있고 그 아이도 지금 그애 인생의 정점에 있으니 괜찮다!" 피카소의 말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마리 테레즈에게는 최악의 시작이었고, 피카소는 과거보다 확실히 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카소의 전기를 쓴 친구 브라사이(Brassai)는 이렇게 증언했다. “피카소는 그녀의 금발, 빛나는 얼굴색,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 그의 그림은 물결치기 시작했다” 22세의 마리 테레즈를 그린 <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분홍빛 젊음을 내뿜는 마리 테레즈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잠들어 있다. 엷게 미소 띤 입과 부드럽게 감은 눈에서 평온함과 나른함이 느껴진다. 코를 분기점으로 쪼개진 얼굴은 마치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꿈을 형상화한 듯하다. 바로 이 모습이 피카소가 본 마리 테레즈였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꿈결같이 평화로운 쉼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바로 그게 문제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의 유순한 성격은 답답함이 되었고, 한때 피카소가 찬미했던 자연스러운 모습은 투박함과 무식함의 증거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에게 싫증난 피카소는 1937년 그녀와 정반대의 매력을 지닌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를 새 연인으로 삼았다.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대놓고 연애를 즐기는 와중에도 마리 테레즈에게 희망 고문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내 사랑, 여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소. 행복해지는 생각만 하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주겠소?" 그러나 피카소는 다시는 마리 테레즈 곁으로 가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과 스캔들을 뿌리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피카소를 기다리며 비혼으로 혼자 딸을 키우던 마리 테레즈도 피카소 사망 4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딸에게는 이런 유서를 남겼다. “내가 저세상에 계신 네 아빠를 돌봐줘야 해” '그루밍(grooming. 길들이기) 성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호감을 얻거나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욕을 충족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그결과 가해자의 학대 행위가 사랑이라고 믿는 피해자도 있다. 마리 테레즈가 그랬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다' 성범죄자들의 흔한 변명이다. 피카소도 그랬다. 피카소가 이룬 위대한 예술로도 그가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하리라. 그렇지 않은가?(pp. 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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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북토크】 별일 아닌 것이 별일인 별난 세상
    아직도 뉴스 진행하는 여자 앵커가 안경을 쓰는 것이 이슈가 되는 세상이다. 안경 쓰는 인구가 얼마나 많은데…. TV 뉴스를 안 본 지 오래됐다. 이전에 보면 여자 앵커는 탤런트 뺨치게 예뻤었던 기억이 난다. 지나고 보니 앵커라는 사람들은 쓰인 뉴스 원고를 읽어주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인형같이 예쁘기라도 해야 한다. 인형은 안경을 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다. 안경 쓴 것이 이슈가 아니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제대로 된 뉴스를 진행하는 것이 이슈가 되었으면 한다. 일단 저질러야 할 때가 있는 법 "선배님, 저 오늘 안경 끼고 진행하겠습니다." 생방송 10분 전이었다. 원고를 정리하고 뉴스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 보도국 선배에게 말했다. "어? 어, 어." 그날은 평소보다 피곤한 아침이었고 이런 날 안경을 껴야겠다 마음먹은 참이었다. 캐비닛에서 안경을 꺼내 착용하고 보도국으로 향했다. 뉴스 시작 전 그래도 담당 선배에게 알리긴 해야겠다 싶어 간단히 말씀드린 것이다. '아 떨려. 하루 이틀 진행한 뉴스도 아닌데 왜 이리 긴장 되지.' 여느 때처럼 뉴스부조종실과 스튜디오 감독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차는데 카메라 감독님, 조명 감독님, PD 선배까지 하나둘 카메라 앞으로 다가 와 물었다. “현주 씨, 오늘 안경 끼는 거야? 눈 어디 다친 거 아니지? 갑자기 웬 안경이야?" 여러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궁금증과 의아함을 가질 거라 당연히 예상했지만 막상 닥치니 하나하나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유를 나열할수록 변명처럼 들릴 듯했고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네, 오늘 그냥 안경 껴보려고요." 신기하다는 반응과 '쓰읍' 하는 마뜩잖음이 섞여 돌아 왔다. 앵커 앞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 화면이 있어서 본방송이 시작하기 전 모니터로 어떻게 나오나 확인할 수 있는데, 화면 속 모습은 내가 봐도 낯설었다. 시청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까? 아무렇지 않을까? 싫어할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 함께 뉴스를 진행하는 파트너는 내 결정에 지지를 보내주었던 박경추 선배가 아니었다. 마침 그날 출장을 떠나 김대호 선배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긴장한 나를 보고 선배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정말 잘 어울려. 시청자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어쩜 이리 파트너 복이 많은지. 하지만 선배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그날 뉴스는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뉴스가 끝나고, 시작 전과 달리 이번에는 스튜디오에서도 뉴스부조종실에서도 싫다 좋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선뜻 판단하지 못하는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보도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보도국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한 선배가 말을 걸었다. 아까 너무 급작스럽게 들어가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는데 오늘 왜 안경을 꼈는지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며 이유를 묻는다는 것이다. 아나운서국과는 협의가 되었는지 묻는 선배도 있었다. 안경을 끼는게 협의를 해야 하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나운서국에 따로 말씀을 드린 건 없다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내일부터 안경을 끼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정한 말투로 걱정을 실어 한 선배가 말했다. 현주 씨 이미지도 생각해봐. 너무 냉철해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아나운서국으로 향하며 침울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 앵커는 냉철해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선배가 별달리 나쁜 의도를 실었다기보다 오히려 나를 위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기에 이 벽이 더욱 공고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카페로 글을 쓰러 가는 대신 아나운서국에 앉아 선배들이 출근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국장님이 오자마자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는데, 너무 좋은 시도라며 격려해주셨다. 다른 선배들도 깜짝 놀랐다면서도 대부분 내 결정을 지지한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우려를 표하는 의견도 있었다. 취지를 이해하고 응원하지만, 다소 보수적일 수 있는 보도국이나 여타 부서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힘을 키워 나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건 어떨까 하는 제안도 있었다. 물론 판단과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임현주 앵커 번호 맞죠? 연합뉴스 기자입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오늘 아침 뉴스 잘 봤어요. 저희 보도국장님도 아침 뉴스 보고 너무 신선하다며 언제부터 안경을 꼈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좋았고요.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생각지도 못하게 연합뉴스에서 인터뷰 요청이 온 것이다. 잠시 후 인터넷에 기사가 실렸고 이내 온갖 매체에서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태어나서 가장 많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매체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사마다 수백 개의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런 반응은 상상해본 적 없었기에 그저 얼떨떨했다. 방송국 안에서 호불호와 찬반이 엇갈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만큼 반향이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연합뉴스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다음 날 안경을 또 낄 수 있었을까? 그날 아침 전화는 운명의 전화였던 걸까? 그리고 만약, 그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안경을 끼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뉴스가 끝나고 이런저런 누군가의 얼굴과 말을 떠올리며 고민하다 다음 날부터 안경을 벗었다면...? 수많은 '만약'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떤 일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거나 너무 많은 얼굴을 떠올리는 대신 ‘저질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pp. 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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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8
  • 【북토크】 돈을 다루는 유대인의 방법
    살아가는데 돈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돈을 어떻게 벌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돈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이 없다. 그런면에서 유대인은 참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손주들이 생기면 이들의 방법을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러 전문가의 대담을 실은 책인데 가볍게 읽어볼 만 했다.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돈은 버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버는 것과 만드는 것의 차이가 뭐예요? 홍익희: 한번 더 유대인의 예들 들면요, 이들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불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 남성은 만 13세 때, 여성은 만 12세에 성인식을 하는데요. 그때 부모나 친척들에게 큰돈을 받습니다. 친척들은 마치 자기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의미에서 큰돈을 줘요. 큰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액수인가요? 한 백만 원 단위입니까 천만원 단위입니까? 홍익희: 서민 자녀들은 성인식이 끝나면 평균 6만 달러 정도가 모이고요. 잘사는 집의 아이들은 몇십만 달러가 모입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넘으면 완전한 성인의 권리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예요. 그렇게 큰돈을 받은 뒤에 부모들의 지시를 받지 않고 친구들과 의논을 해서 분산투자를 합니다. 주식과 채권 심지어는 부동산과 적금 이렇게 포트폴리오를 짜서, 부모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돈을 불리기 위해 돈의 흐름과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친구들하고 의논하면서 '지금은 활황기니까 주식의 비중을 높여야지, 지금은 불경기로 진입하니까 채권 비중을 높여야지' 하며 스스로 판단하면서 자기 돈을 불려나가죠.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취직할 것인지, 자기가 불린 돈을 갖고 창업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창업률이 압도적으로높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면 이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요. '돈을 번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죠. 그런데 유대인은 이미 13세부터 돈을 불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돈을 불린다'는 개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평생 동안 어떻게 돈을 불릴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죠. 그러니까 돈에 대한 시각과 개념이 우리의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서민 계층이 만 13세 정도에 우리 돈으로 6천만 원 이상의 목돈을 쥘 수 있게끔 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니까 '버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금방 이해가 되네요. 버는 것은 몸을 움직여 일해서 뭔가 얻는 것이고 만드는 것은 이미 있는 자산을 불리는 것이다. 그 말이네요. 전범선: 제 대학교 때 룸메이트가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었는데요. 어쩐지 대학생활 내내 저보다 좀 여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저랑 생각 하는 방식도 굉장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요(pp. 24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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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북토크】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일이다!
    이 책은 설명이 필요없는 최재천 교수와 안희경 작가의 대담집이다. 읽으면서 많은 것을 공감하고 배웠다. 당분간 최 교수의 책을 찾아 읽을 것 같다. 일독을 권한다. 과거 독서를 취미라고 했는데, 일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좀 더 빡세게 독서를 해야겠다. 독서는 빡세게 한다 ▲최재천.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한동안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독서를 하자는 말까지 버젓이 권해졌어요. 그러다보니 아주 말랑말랑한 책만 팔렸죠. 김난도 교수님과 친하긴 하지만, 가끔 저는 '아프냐?'라고 묻는 책을 뭐 하러 읽느냐고 대중 앞에서 말합니다. 언젠가 제 강의가 끝나고 김난도 교수님이 다음 차례로 대기하고 있으셨는데요. 제가 그렇게 말하니, "선생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 도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은 마음을 살살 건드리는 책 혹은 자기계발서입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를 읽고 성공했다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대한 책을 써서 돈을 더 번 사례는 아는데, 그 책을 읽고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요.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이건 아니죠. 독서는 일입니다. 빡세게 하는 겁니다.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늘에 가서 편안하게 보는 건 시간 낭비이고 눈만 나빠져요. 책은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도 최악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3차원을 보게끔 진화 했어요. 책은 평면에 글자를 새겨서 만든 2차원 물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눈이 아파요. 책은 눈을 망가뜨린 원흉이에요. 우리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공략해야죠.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분야의 책을 공략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 번도 배우지 않았는데 술술 읽힐까요? 난생처음 붙든 양자역학 책의 책장이 척척 넘어갑니까? 진화심리학이 하도 뜬다니까 좀 읽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곤 붙잡았는데, '와! 잘 읽히네' 하면 거짓말이에요. 당연히 안 읽힙니다. 그런데 그 책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읽고, 또 비슷한 진화심리학 책을 사서 읽다 보면, 세번째 책은 참 신기하게 술술 넘어갑니다.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내 지식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요. 제가 해봐서 아는 이야기 하나를 할게요. 진화심리학을 공략을 한 다음에 양자역학을 공략하겠다고 마음먹고 읽으면 어떨까요? 힘들어요. 그런데 요런 투쟁을 몇 번 하다 보면 그다음에 생판 모르는 분석철학을 읽고 문화인류학을 읽을 때, 묘하게 쉬워집니다. 독서량이 늘어날수록 완전 새로운 분야의 책을 접할 때, 전보다 덜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할 거예요. 평생 다양한 책을 읽으며 살아온 제 경험담입니다. 학문은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요. 어떤 분야를 기어 올라가면서 3층에서 보려고 애써도 안 보이던 게, 다른 분야를 올라가면서 4층에서 건너다보니 저쪽 분야 3층 구조가 훤히 보이더라고요.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나가다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나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일'입니다. ▲안희경. 수명이 길어지면서 직업을 여러 번 바꿀 상황이 도래했다는 판단이신데요. 나를 찾기 위해서 나를 찾는 법에 대한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지식을 탐구하면서 그 안에서 나를 만들어가자는 말씀이신가요? ▲최. 네. 그래서 저는 '지식의 영토를 넓힌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왔어요. ▲안. 40대 중반이면 직장에서 밀려나고 직업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요즘입니다. ▲최. 대기업에서 임원이 못 되면 퇴사를 합니다. 보통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이죠. 그 후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요? 저는 대학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점에 있는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도록 대학이 다변화하고 지금보다 서너 배는 늘어나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관료들도 있는 자리에서 했더니 교육부장관이 싫어하시더라고요. 어른이 배우고 훈련받을 곳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지금, 결국 책밖에 없어요. 취미 독서는 아예 깨끗이 잊으세요. 독서는 일입니다(pp. 14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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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북토크】 ‘절판’ 앞에서....책이란 무엇인가?
    과거 취미란에 ‘독서’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클래식 음악 듣기, 영화 감상’등도.. 독서가 취미인 나로서는 책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책을 쓰는 작가,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매우 심심할 것이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 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어떤 책을 읽다 소개 되어 읽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이라 소개된 책 중에는 ‘절판’된 책들이 많았다. 책에도 수명이 있고 유행이 있다. 무수한 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것이 감사하다! (기사 화면에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 사진을 실을려고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 다행히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된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고결한 단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고요? 유희처럼, 하룻밤 욕망 해소처럼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장편소설 『카불의 책장수』를 읽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에게 '사랑'은 금기어입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펴내는 시집에 사랑을 표현하려면 피어린 절규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거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답례를 표하기는 하지만, 외방인 앞에서 절대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들키면 죽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적용되던 이슬람 율법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비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비켜가기 위해 그녀들은 란다이(landay)라고 불리는 시를 읊습니다. 란다이는 "비명이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짧고 율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구의 다른 쪽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교양이고, 그것이 문화적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여성 종군기자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가 있었고, 그해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테러 비호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공습을 때립니다. 2002년 봄 사이에르스타드는 카불에서 책장수로 살아가는 술탄 칸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릅니다. 이 책은 그때 목격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국가재건, 그리고 근본주의 이슬람 문화 밑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 빈곤 문제를 소설 형식으 로 묘사합니다. 폐허가 된 카불의 방 네 칸짜리 아파트에서 술탄 칸은 홀어머니와 아내 둘, 그리고 아이 다섯과 동생, 사촌 두어 명을 데리고 삽니다. 가혹한 시련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혼례를 준비하고, 혼례를 치르고, 경찰서와 감옥을 왕래하며 갈등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책장수의 가족이란 원래가 드문 경우지만, 주인공 술탄 칸은 30여 년 간 서적 판매업에 종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을 사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여러 정권의 하수인들은 차례로 쳐들어와서 책을 불태웁니다.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습니다. 책을 숨기고, 감옥에서 살아나오고, 서점을 다시 세웁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출판하려고 하고, 부르카를 감옥이라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술탄 칸은 집안에서는 누구보다 억압적인 또 다른 가부장일 뿐입니다. 전통의 고수와 근대화 사이에 끊임없이 혼란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마치 증기탕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카가 얼마나 머리를 죄고 두통을 일으키는지, 얼마나 밀폐된 공간인지, 얼마나 공기가 부족한지, 얼마나 금방 땀이 삐질삐질 나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책을 덮고서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 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 청년이 탈레반 치하에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간을 찾는다는 내용의 『연을 쫓는 아이』란 베스트셀러에 필적합니다.(※1996년 9월 탈레반은 연날리기를 금지했었습니다.)(pp. 93-96).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6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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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 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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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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