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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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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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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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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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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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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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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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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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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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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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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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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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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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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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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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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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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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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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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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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6】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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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6】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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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5】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건들과 함께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물건들과 인간 사이에는 서사가 생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힌대로 나이를 먹으니 물건을 덜 사게 된다. 사람과도 사물과도 관계 맺는 것이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과 관계 맺지 않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고대 철학의 역사를 가볍게 풀어낸 책 《그리스 철학사 1》에서 저자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는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페피노 루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 할아버지는 대학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인생철학'은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물활론의 연장선에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 낸 모든 장난감이 즉시 영혼을 갖는 것은 아니오. 천만의 말씀이지. 그 순간에는 그저 단순한 물건일 뿐이오. 그런데 어떤 어린애가 인형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영혼이 플라스틱 사이에 스며들어 생명을 가진 물건으로 바뀌어 가는 거요. 그렇게 되면 비록 부서지고 상처 난 인형이라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생명체 로 바뀌는 거고 말이오" 나는 이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홀로(p. 20)선다는 것이 나를 아껴 준 사람의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라면 곧 나를 아껴 준 사람의 영혼과 작별하는 일일 터이다. 그래서 단번에 할 수 없고 세월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물건과 오랜 시간에 걸쳐 나날이 작별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나라는 사람. 나는 그 아침, 이 가혹하고 부조리한 진실을 깨닫고 눈앞이 빙빙 돈 것인지도 모른다. 늘어나는 책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어떤 책장을 마련할 것이냐 하는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고민은 고스란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 일터. 나는 책이 든 상자를 성급하게 풀지 않겠다(p. 21). 친구들의 하소연에서 시작된 비공식 탐구에서 나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얻었다. 엄마가 물려준 살림살이가 우리의 주방을, 아니 집 전체를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어도 딸들은 살림살이를 모으며 취향을 키우고 만족감을 느꼈을 엄마를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그 귀한 살림살이를 당근에 내놓자고 설득하는 딸들을, 혹은 몰래 내다 파는 딸들을 너무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저 나름대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다(p. 48). 마음에 꼭 들지 않으면 사지 않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지는 물건을 사기,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남에게 주거나 버리기. 가만 보니 이 원칙은 새 인연을 만들 때도 쓸 수 있겠다. 특히 폐기가 쉽지 않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꼭 참고 바란다(p. 107). 한편 부모 잘 만난 번역 프리랜서가 뜨끈한 방구석 책상 머리에 앉아 맥이 어쩌고 윈도우가 저쩌고 인간성이 어쩌고 주체성이 저쩌고 할 때, 다른 한편에는 화장실에 갈 시(p. 140)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 일해도 하루 먹을 임금조차 주어 지지 않는다. 인간은 때가 되면 먹고 때가 되면 배설을 해야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기계에 끼이면 팔다리가 잘리고 높은 데서 떨어지면 죽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을 인간 취급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은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리와 남을 구분해서 착취를 합리화한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무수히 되풀이되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 로봇이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건만 반란은커녕 기계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날은 요원하고 일단은 인간의 밥줄을 위협하는 중이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고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의 디자인을 따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한쪽에서는 작업 도구에 사람이 깔려 죽는 지금, 지금은 2022년이다(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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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5】 자기 주변 물건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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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9】 리더는 도전해야 한다
- 리더는 도전해야 한다 믿음은 도전입니다. 리더는 도전하고 모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 구원을 위해 하늘 보좌 버리시고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죽는 도전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긍정적인 자가 도전합니다.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면 도전하지 못합니다! 개척하고 유학 가고 이민 가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 도전입니다. 콜럼버스의 미국, 도전의 결과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는 갈렙의 도전입니다. 리더는 꿈을 가지고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는 도전의 역사입니다. 사업하고 직장 구하고 세계 여행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여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리더는 안주하려 하지 말고 무엇에든지 도전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도전입니다. 남녀가 데이트 하다가 결혼을 위해 프러포즈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글 쓰는 것도 도전입니다. 안 해 본 것을 해보려는 것도 도전입니다. 영적 전쟁 일반 전쟁도 도전입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도전이고 적응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대화해보는 것, 갈등 문제 해결하는 것도 도전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 보는 것도 도전입니다. 리더는 도전 정신이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도전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은 도전이요 모험입니다.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나는 나의 삶에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여 성취된 여러 가지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 이민 목회(시카고), 시카고 교회 협의회 회장, 진주성남교회 담임목사, 미국 Judson University 이사, 총회 세계 선교회 GMS 이사장 등... 도전의 적은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담대히 도전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꿈꾸고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옵니다. 꿈을 가지고 도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도전은 삶의 지혜요 행복과 축복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계획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평생 도전해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는 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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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9】 리더는 도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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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4】 화가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는가?
-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데 화가가 그림으로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표현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글이 아니라 그림이기에 더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시간을 내어 미술관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 신화 속 인물인 이카로스(Icaros)의 추락을 내용으로 하는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Pi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년)의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같은 주제의 다른 여러 그림 중에서도 독특합니다.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하늘을 날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카로스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림의 제목을 보지 못했다면, 대부분 여기서 이카로스를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 또는 거리두기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은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화 정도(p. 41)로 보입니다. 농부는 짐승에 의지해 밭을 갈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가축들은 평화롭습니다(도판 A). 저 멀리 바다에는 배가 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도판 B). 어촌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전경입니다. 그런데 그림 오른쪽 아래, 배 앞을 유심히 보면 이상한 물체가 보입니다. 사람의 다리입니다. 화가는 숨은 그림처럼 추락해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의 다리를 그렸습니다(도판 C). 하늘을 날거나 날다가 떨어지는 모습이 아닌, 떨어져 물속에 빠진 순간을 그렸으니 힌트가 없으면 알기 어렵지요. 여기에 하나 더해 주변 그 누구도 물에 빠진 이카로스를 의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매정해 보입니다. 브뤼헐은 자신의 그림 곳곳에 네덜란드(p. 42) 속담을 남겼는데, 이 그림에는 "사람이 죽어도 쟁기질은 쉴 수 없다" 는 속담을 남겼습니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 의 아들로,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미궁에 갇힙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크레타를 탈출할 방안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새의 깃털을 모아 실로 엮고 밀랍을 발라 날개를 만들어, 날아서 섬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비행연습을 시키고 탈출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줍니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에 의해 밀랍이 녹을 수 있으니 너무(p. 43) 높이 날지 말고, 반대로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물기에 의해 날개가 무거워지니 하늘과 바다의 중간으로만 가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탈출하는 날,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카로스는 자유롭게 날게 되자 기분이 좋았던 나머지 너무 높게 날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밀랍이 녹고 맙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이카로스의 평소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미궁을 탈출했다는 것이 더없는 기쁨 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늘을 날며 탈출을 경험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이때 이카로스가 떨어져 죽은 바다는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뜻의 '이카리아 해'로, 오늘날 에게 해의 일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이카로스이지만, 사실 이카로스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그림이 오늘날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무관심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멀리, 저 멀리 밀어두거나 숨겨둡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나와 전혀 상관없는 척,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사는 모습이 바로 이 그림에서 이카로스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로 '풍덩'하고 빠졌는데 모를 수 없겠지요.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며 여기고, 보이는 반응은 무관심입니다(p. 44).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p. 55). 그래서 죽음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두렵습니다. 물론 그런 반응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마주하고 가까이하여 친구가 된다면, 죽음은 오히려 성장의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삶에서 죽음을 마주할 때면 슬픔과 두려움, 안타까움이 몰려 옵니다. 나는 살아 있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니 서로 분리되는 관계에 슬픔이 찾아옵니다. 또 질병 등으로 인해 고통 중에 죽어 가는 이를 바라보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죽음,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을 볼 때면 불쌍한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시선을 바꾸어 죽음에서 삶을 볼 때면 간절함과 신중함에 새로운 열망이 생깁니다. 삶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갈급함, 삶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삶의 소중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금까지 허락되었던 삶에 고마운 마음도 들고요. 그리고 이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삶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p. 56).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란 결국 시간을 먹으며 이어가는 삶이기에, 주어진 시간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마지막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이겠지요. 지금의 건강도 재산도 지식도 관계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때로는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소멸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실존적 특성이며 또 우리 삶의 시간, 인생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이라는 시간의 빈 그릇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아는 것은, 죽음의 때를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락된 삶의 지혜입니다(p. 90). 남녀노소, 신분이나 그 무엇에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알아내려 했고 또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죽음과 관련해 아는 것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것, 미리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이 역시 모른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죽음 준비가 필요하고,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을 수 있음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는 일이 갑자기 일어났을 때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경감시킬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죽(p. 100)음을 알 때 오늘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내가 누구인지 깊이 성찰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 성찰로부터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존엄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p. 101). '지나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서 두 가지 함축된 상징을 발견합니다. 먼저는 앞서 이야기한 지금의 영광과 즐거움이 사라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있음을 알기에, 오늘을 겸허히 살게 됩니다. 동시에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사라질 때가 있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기에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것(p. 118)이지요. 일부러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짐이고 일이라면, 지나갈 때를 기대하는 중에 기다리며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나 고통이든, 영광이나 즐거움이든 지나갈 것임을 깨달을 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의 때라면 지나갈 때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끝나고 이전과는 다른 순간이 펼쳐질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두 가지 상징을 동시에 가집니다. 슬픔과 고통의 끝이라는 것과 함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요. 절망과 단절만이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말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무조건 도망치려 하거나 모른 척만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죽을 존재인 것을 인정하며 삶을 살 때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삶의 시간이 지나고 다가 올 죽음을 인식함으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순간은 바로 죽음을 품은 인간 본연의 존재와 만나는 때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t)에서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하나의 존재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죽음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p. 119).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인 죽음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비롯해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상황에 자신을 둘 때 거기에서부터 내가 누구이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직하게 묻게 됩니다(p. 120).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첫 걸음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어진 삶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죽음의 속성을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이곳에서 함께하는 이들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만일 지금 나의 죽음 이후를 보았다면, 오늘 어떤 결정과 선택 속에서 삶을 살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시간은 모아둘 수도 없고 잡아둘 수도 없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고 귀합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p. 175). 어느 날일지 모르는 내 삶의 마지막 언제일지 모를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봅니다. 그때 일상에 찾아온 죽음이 너무 낯설어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맞이하고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평안한 가운데 이르는 죽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따스함을 전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 가면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기념도서관이 있습니다. 2018년 2월 이곳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99년의 일기로 모셔졌습니다. 이 도서관에는 2007년 먼저 세상을 떠난 빌리 그레이엄의 아내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앞 비석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End of Construction - Thank you for your patience. 공사 끝!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묘비명을 정하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남편과 자주 운전하며 가던 길에서 늘 보던 "공사 중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공사(p. 183) 표지판이 "공사 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표지판으로 바뀌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든 루스 여사는 남편에게 그것을 묘비명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 이 묘비명이 되었습니다. 하나 더 특별한 것은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던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난 루스 여사는 좋아하던 중국어 '의'(義) 자를 묘비에 크게 써 넣었습니다. 자신의 인생 즉 '공사구간'에서 적지 않은 허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셨고 또 자신을 아는 많은 이들이 잘 참아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잊고 살았던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p. 184). 삶과 죽음은 둘 다 공통적으로 일상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삶과 죽음은 매일 이어집니다. 죽음은 언제라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단절로 엉망이 되는 건 아닙니다. 놀랍게도 죽음의 순간은 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이 질문은 삶의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닫혔던 삶의 지평이 열리면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함축적인 시간이 펼쳐지고 농밀한 삶의 순간과 만나는 때입니다(p. 217). 오늘 나의 삶은, 죽음으로 인해 다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소중한 자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생각할 때 더욱 선명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죽음이 삶에 들려주는 잊지 말아야 할 대답입니다(p.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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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4】 화가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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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세월은 빠르다
-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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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세월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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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3】 사별, 그 무엇보다 큰 상실감
- 이 책의 저자는 40년간 결혼생활을 해오던 남편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사별하게 된다. 이후 생겨진 마음의 굴곡을 책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때 당시 결혼한 딸이 아팠었는데 그 딸도 몇 년 후 사망하게 된다. 작가도 2021년 작고했다. 사망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옅어지는 가운데 함께 가야 한다. 그런면에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판됐다. UCLA에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뉴욕에서건 캘리포니아에서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건,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은 아주 성공한 사람들 특유의 사고방식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자신의 수완을 전적으로 신뢰 했다. 그들은 손에 쥔 전화번호와 알맞은 의사, 주요 장기 기증자, 정부나 사법부에서 편의를 도모해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들의 수완은 사실상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의 힘은 사실상 천하무적이었다. 나도 거의 평생 동안 그들처럼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만약 어머니가 튀니스에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면 나는 미국 영사를 통해 어머니에게 영자신문을 보내고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파리에서 오빠를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만약 퀸태나가 니스공항에서 갑자기 발이 묶이면 브리(p. 130)티시 에어웨이의 누군가에게 연락해 그 회사 여객기를 타고 런던에서 사촌을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어느 정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내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는 것(p. 131). 나는 1년 내내 작년 달력을 보며 날짜를 따졌다. 작년 이날에는 무슨 일을 했더라? 어디에서 저녁을 먹었더라? 작년 이날에 퀸태나의 결혼식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날아갔던가? 작년 이 날에 파리에서 돌아왔던가?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렉싱턴가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다.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인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신탁계좌의 이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물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물속으로 쉽게 떠나보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p. 283)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차들을 잊어버렸다(p. 284). 역자 후기 나는 집착하기 쉬운 내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집착할 만한 대상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이것 역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착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며, 이로 인한 괴로움이 생긴다. 집착은 원래 독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집착 중에서도 가장 독한 것이 인간에 대한 집착이며, 가장 나쁜 것 또한 인간에 대한 집착이다. 태생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 만의 하나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니까. 하지만 과연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상실』은 조앤 디디온의 집착과 그로 인한 슬픔에 관한 책이다. 40여 년을 함께했던 남편을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건네는 작별의 인사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집착과 죄책감이 이 책에서 유난히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거의 날마다 한 공간에서 보낸 이들 부부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장영희 선생님도 극찬한 저자의 필력 때문이기도 할 텐데, 아무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막막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쓸쓸하고 아득하고(p. 286) 외로운 그 단어가 이 책의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행간을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역자가 되고 싶었다. 이 책에서 행간은, 냉정으로 무장한 저자의 가면 뒤로 드러나는 시뻘건 생살과 같았다. 의연한 표정 사이로 터지는 흐느낌과 같았다. 나는 원서를 읽었을 때 처음에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로 그런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디디온의 능력에 놀라워했고, 그 다음으로는 그 느낌을 과연 제대로 살릴 수 있을까 두려워했다. 원문의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 옮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내가 원서를 접했을 때 경험했던 막막함을 느낀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6월 이은선 덧붙임: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난 뒤 어느 서평에서 그녀의 딸 퀸태나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님을 알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따름이다(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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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3】 사별, 그 무엇보다 큰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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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2】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 내가 관심 있는 책 분야 중 하나는 독서법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입장에서 남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하는지 관심이 많다. 그래서 눈에 띄는대로 읽고 있다. 이동진 작가를 통해서도 한 수 배웠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세요?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은 더 이상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필요할 때마다 구글링을 통해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필요한 내용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 용이하고 빠르다는 점은 이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빠른 검색 결과로 나온 정보는 잘게 잘라진 것이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맥이나 전체적인 체계까지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위계나 질서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파편화된 정보에만 의지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정보를 얻는 주요한 매체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책의 중요한 용도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책의 정보는 신뢰할 만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정보 중 조작되거나 잘못된 것을 일일이 다 거르기는 아주 어렵지요. 게다가 책을 읽는 것이 정보 습득에 오히려 더 빠른 방법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파편화되(p. 22)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구성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말하자면 미처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 들인 거죠. 흔히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역설적으로 정보를 얻는 더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맥락과 위치를 아는 게 정보의 핵심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또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주 '있어 보이니까'라고 농담처럼 답하기도 합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이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허세일까요.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도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p. 23)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 일 거예요. 오늘날 많은 문화 향유자들의 특징은 허영심이 없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각자 본인의 취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있어 보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지적인 허영심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고 말하는 것을 지지합니다(p. 24).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다시 한번 누군가가 "이동진 씨, 왜 책을 읽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사실 제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목적 독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이 사라지면 독서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지속적이지 않죠.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책을 읽는다면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오래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니, 책을 읽는 게 뭐가 재미있어,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수십, 수백 가지 예를 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기준은 다를 텐데요, 제 경우는 이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딱 두 가지예요. 일과 독서. 저는 영화평론가 이지만 영화를 매일 집중적으로 많이 보게 되면 일종의 체증이 생깁니다. 영화를 보는 제 일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도 하루에 3편 이상 보기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 매일 12시간씩 한 달도 읽을 자신이 있어요.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p. 26). 우리는 매일 하루 8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죠. 그게 불행이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 8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죠. 여기에 저는 책 읽기도 더 해서 매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재미있으면서 덜 지치는 일이니까요. 게임이 더 재미있지, 영화 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책 읽는 게 뭐가 재미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맞아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죠. 그런데 저는 재미의 진입 장벽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몸에 안 좋고 정신에 안 좋은 재미일수록 처음부터 재미있어요. 상대적으로 어떤 재미의 단계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재미라기보다는 고행 같고 공부 같은 것일수록 그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신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독서가 그러한데요, 책을 재미로 느끼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단위 시간이 있습니다. 화학에서 용액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어요. 불포화용액, 포화용액, 과포화용액이죠. 예를 들어 1리터의 물에 설탕을 100그램까지 녹일 때, 1그램을 녹이든 10그램을 녹이든 처음에는 보기에 차이가 없어요. 포화용액에 이르기 전까지 불(p. 27)포화용액일 때는 아무리 많이 녹여도 다 녹아버려서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100그램에서 조금만 더한 후 유리병을 유리막대로 살짝 긁어주면 결정이 침전된단 말이에요. 그다음부터는 용질을 넣으면 그대로 다 가라앉게 돼요. 그게 과포화용액인 거죠. 책을 읽을 때의 효과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억지로 계속 책을 읽는 것 같은데 그 단계를 넘어서면, 넣는 족족 가라앉듯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라는 건 어떤 단계에 가기까지 전혀 효과가 없는 듯 보여요.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효과가 확 드러나는 순간이 오죠. 양이 마침내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게 독서의 효능, 또는 독서의 재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독서의 재미가 바로 얻어지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가면 책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요. 그 재미가 한 번에, 단숨에 얻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욱 의미가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호기심이라는 건, 한 번에 하나가 충족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거든요. 한(p. 28)가지 호기심이 충족되는 단계에서 너덧 가지로, 그다음에 또 더 많은 것으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이에요. 그러니 책을 좋아하고 책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 한 권으로도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요(p. 29) 문학을 읽어야 하나요? 가끔 "소설은 전혀 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문학 자체에 흥미를 못 느껴서이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것이 역사서나 경영서를 읽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낭비로까지 생각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문학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말해요. 하나는 인간이 한 번밖에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천 번 만 번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양한 삶을 경험해보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한 번밖에 살 수 없어요. 그러 니까 인생에서의 모든 것은 시연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딱 한 번 시행하는 연극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타인이라면 다양한 상황과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주고 감정을 이입하게 해 줍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 그 한계를 좀 더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인 설정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고민을 숙고하게 만들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p. 35).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 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완벽하게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겠어요. 인생에는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소설은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고 정리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관계에 대한 문제인지, 인간이 고독을 즐길 수 없는 무능력에 관한 문제인지, 과연 어떤 문제인지를 보게 해주죠. 그러니 우리는 직접적인 체험보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문학은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보통 언어는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라는 것은 자꾸 쓰다 보면, 특히 좋은 말일수록 먼지가 내려앉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정말 곡진하게 마음을 표현 하기 위해서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은 워낙(p. 36) 감정적으로 강력하고도 유용한 말이기 때문에 상업적 이유를 포함해서 지나치게 과용되고 있죠. 심지어 114 전화안내원조차 한때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시작하고는 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말을 진짜로 하고 싶어도 멈칫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문학은 오랜 세월 말에 쌓여 있는 수많은 먼지 같은 것을 털어서 그 말의 고유한 의미나 다른 의미를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 자체이면서 표현 방식이기도 한 언어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봐요(p. 37).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내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질문을 받으면 난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 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조차 그 책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때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겁니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베스트셀러들도 물론 그렇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어떤 책들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무엇이 결여되었다고 느끼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책들을 주로 읽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것을 돈이든 성격이든 관계든 삶에서 뭔가를 급하게 허겁지점 욕망할 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삶의 문제들이 즉각적으로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그 책이 약속한 천국이나 금은보화는 현실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봤자 시간 낭비만 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읽었더(p. 44)니 좋았던 책이 있고, 내가 읽어보았지만 좋지 않았던 책이 있으며, 내가 아직 펼쳐 들지 않은 책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내 손을 기다리는 좋은 책은 많습니다(p. 45). 한 번에 열 권 읽기 『오두막』(윌리엄 폴 영), 『감각의 제국』(문강형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김혜리), 『사랑의 생애』 (이승우), 『스페이스 크로니클」 (닐 디그래스 타이슨), 『모던 팝 스토리」 (밥 스탠리),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애슈턴 애플화이트), 『온』 (안미옥), 『영국 남자의 문제』(하워드 제이콥 슨), 『존재의 수학』(루돌프타슈너), 『국기에 그려진 세계사』 (김유석). 지금 현재 제가 읽고 있는 책들입니다. 시집인 『온』은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가지고 다니고 있고, 차에 있는 책은 『나는 에이지에 반대한다』와 『감각의 제국』입니다. 가방 안에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이 있고요, 사무실에서 읽는 책은 『존재의 수학』이고, 나머지 책들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두고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책 여러 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제가 자연스럽게 갖게 된 스타일인데, 보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육지책으로 갖게 된 습관 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렇게 읽으면서 몸에 배니 장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씩 늘어놓(p. 69)고 읽게 되면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좀 어렵고 지겨워지면 잠깐 덮고 『인 골드 블러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가면 거기 있는 책을 읽는 거예요. 물론 이 책들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을 빨리 읽어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책만 재미있으면 되는 거죠. 또한 서로 다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 상승효과를 일으켜서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진화심리학에 흥미가 있으니까 그에 관한 책 열 권을 두고 읽으면 진화심리학을 체계적으로 파고들어 정말 좋을 것 같잖아요. 저의 경험으로는 그것보다는 진화심리학과 역사에 관한 책, 지리에 관한 책을 동시에 읽으면 그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게 뇌에 자극을 주기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입장에서 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영화에 관한 게 아닙니 다. 오히려 문학, 교양과학책들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책과 책을 읽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는 게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예로 들어(p. 70)볼까요. 만약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 싶다면 데이비드 버스의 책으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진화심리학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책들이 대체로 쉽고 재미있습니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헬렌 피셔의 책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둘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상이한 면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은 지적으로도 더 자극이 되고 만약 겹치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중요한 핵심이라는 뜻도 되지요. 문학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것보다는 유사한 스펙트럼에 있는 다른 사람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저처럼 동시에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 방법을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한 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이 더 맞을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한테 맞는 독서법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는 독서가 습관이 되었다는 뜻이니까요(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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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2】 남의 독서법을 통해 내 독서법이 향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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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8】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리더만큼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리더는 계속 성장해야 하며 인격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계속 배워야 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책을 읽고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여 강의를 듣고 멘토에게 자문과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성장이 없고 퇴보하는 리더는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겸손해야 배우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회가 있으면 여행을 해야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여 여러 면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성장합니다. 무엇인가에 도전하면서 성장합니다. 말하는 기술도 성장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강의하면서 성장합니다. 계속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성숙은 사람 됨됨이 입니다. 인격에 문제가 있으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인간미가 넘쳐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된 후에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면 인격도 성숙해집니다. 인격의 성숙은 내면의 평안, 정직, 겸손, 배려심, 이해심으로 섬기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인격이 성숙해지면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인격의 성숙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인격은 사람들이 안 보는데도 온유와 정직한 삶을 삽니다. 인격이 성숙해야 존경받고 남에게 감동을 줍니다. 나의 삶을 보고 영감을 받고 누군가가 도전받아야 합니다. 리더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장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성장이 없으면 매력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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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8】 리더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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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1】 장례식장과 연관된 듣기 힘든 이야기들
- 대만 장례식 직원이 겪은 일을 쓴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다.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 소개되어 읽었는데 재밌었다. 그런데 이미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시기를.. 그러니 경고하건대 이 글을 보고 있는 고도 비만 오타쿠들은 체중을 감량하는 게 좋을 것이다. 비만인 채 이곳에 오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른다. 옆으로 누운 채 관에 들어간 시신도 있었다. 너무 뚱뚱해서 바로 뉘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시신의 몸집이 너무 커 관이 부서진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을 너무 크게 짜 화장터의 화장로 안으로 집어넣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장로 입구는 정해진 규격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대해 잘 모르는 업자들이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하다가 뒤늦게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러다 시신에 지방이 너무 많아 화장로에까지 불이 붙기도 하는데, 이럴 때 가장 난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가뜩이나 상심해 있는 가족들 아니겠는가(p. 30). 남의 차 안에서 힘든 현장을 말하자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차 안 번개탄 자살 현장이다. 이런 사건 현장은 정말 힘들다.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시신이 앞좌석에 있는지 뒷좌석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뒷좌석은 그나마 수월한데 앞좌석에 있으면 무척 힘들다. 거기에 시신이 늦게 발견됐다면 차 안은 번개탄 냄새, 시신 냄새, 차량 방향제 냄새로 진동을 한다. 앞좌석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냐고? 체구가 작다면 좌석을 뒤로 젖히고 곧장 끌어내리면 된다. 체구가 크다면 일단 좌석을 뒤로 젖혀 평평하게 만든 다음, 한 명은 발을 들고 다른 한 명은 뒷좌석으로 가서 몸을 잡고 뒤쪽으로 끌어 당겨 바로 누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이 설명만으로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p. 43)지만 상상해보라. 차 안에서 고약한 냄재를 쌓기는 시신을 꺼낼 때 체구가 작아서 곧장 끌어내리든 체구가 커서 뒤로 끌어당기든 시신의 얼굴과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며 눈알을 파먹는 모습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면 아마 그 장면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p. 44).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나는 시신 복원 과정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운 좋게도 그 과정을 지켜본 적은 있다. 그 시신은 손자가 내려친 향로에 머리를 맞고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백수인 손자는 할머니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런 짓을 저질렀다. 휴가 중일 때여서 내가 할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시신 복원사가 왔을 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동의하에 복원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저녁 5시가 넘어서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안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복원사는 브이넥의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는 커다란 눈과 보조개, 그리고 치명적으로 귀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바늘을 들고 할머니 시신을 봉합하기 위해 허리(p. 46)를 숙이는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목을 지나서 가슴팍의 타투에 닿던 그 장면이. 이런, 이 장면이 아닌데! 할머니는 머리의 반쪽이 없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충전재를 얼마나 넣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은 채 온몸이 땀에 젖도록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70퍼센트쯤 복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곱게 화장을 마치고 유가족들을 불렀을 때, 드디어 할머니의 생전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생각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유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복원사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우연찮게 들었다. '나는 심하게 훼손된 시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작업하던 분이 뭘 보고 이렇게 놀랐을까?' 궁금해하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퀴벌레!"(p. 47). 가장 잔인한 일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보살핀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아내는 매일 남편을 보러 왔다. 문자 그대로 매일을 말이다. 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 역시 자주 찾아왔다. 할머니는 여성 요양보호사보다 힘이 센 내가 와서 일하는 걸 반겼다. 할아버지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데 문득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이봐, 젊은이. 치매의 가장 잔인한 점이 뭔지 알아?"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할머니의 말만 기다렸다. "가장 잔인한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한평생 살 부대끼고 살던 사람이, 하루하루 나를 천천히 잊어가다가 어느 날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야. 봐봐, 내가 그렇(p. 192)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날 봐도 사랑은커녕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남편은 나를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지. 이게 가장 잔인한 일이야." 나는 용감하지 못해서, 만약 이런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 할머니처럼 용기 있게 견뎌내지 못하고 분명 도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용감한 할머니도 그리고 딸도 나중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간호사들한테 전해 들었다. 놀라진 않았다. 병간호를 오래 한 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p. 193). 죽었으니 다 벗어난 걸까? 이 사건은 라오자이가 연락을 받았다. 기둥에 사람이 '달려 있다'는 경찰의 말에 라오자이는 밧줄을 자를 칼과 사다리 등을 챙겨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라오자이는 의사소통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경찰이 말한 건 기둥 위로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투신자살이었던 것이다. 온갖 도구를 챙겨서 간 라오자이는 조금 민망해졌다. 라오자이는 내장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다. 다행히 현장에 도착 한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 탓에 구조대원들은 시신을 바닥으로 내린 후 재빨리 사진을 찍은 다음 서둘러 시신을 가져왔다. 사실 나는 시신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알(p. 232)지 못한다. 내가 본 그 시신은 배에 난 구멍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온 상태로, 그저 너무나 끔찍했을 뿐이다. 게다가 유가족 대기실 문 앞에는 임신한 부인이 두 아이의 손을 붙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직 어렸는데, 내가 문을 열어줄 때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여기 왜 온 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다른 가족이 하나둘 도착하고, 의사와 검사가 도착해 검시가 시작됐다. 그때 검시실 앞을 지나던 도박꾼 사부님을 만나 내가 물었다. "사부님, 이 경우처럼 6층에 살던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 가 뛰어내려 죽였으면, 그 사람이 살던 6층 집은 흉가라고 해야 되나요?" "이론적으로는 그가 6층에서부터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옥상이 아니라 6층에서 그 기둥 위로 떨어지는 윤회를 매일 겪고 있을 거야. 그 집을 사고 싶으면 불사를 지내는 게 좋을걸." "지금 저한테 불사 비용 뜯어가려고 거짓말하시는 건 아니죠?"(p. 233) "세상에,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구나. 솔직히 내 법력으로 불사는 아직 무리야. 하지만 다른 경쟁이를 소개시켜줄 순 있지. 꽤 실력 좋은 분으로." "공짜로요?" "중개비는 받아야지." 나는 사부님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사부님은 한참 생각하다 대답했다. "영혼이 생전에 살던 집에 머무는 건 익숙함 때문이지. 그러니 집 안의 칸막이를 다 허물고 문을 전부 열어서 이삼 일쯤 통풍을 해준 다음 리모델링을 해봐. 그럼 영혼이 돌아 와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 거야!"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내게 사부님이 덜컥 명함 한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내 작은 처남이 인테리어 일을 하는데 말이야....." 다시 유가족 이야기로 돌아와, 자살한 남자와 부인은 원래 지방 사람인데 타이베이로 상경해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편이 집 대출금이며 아이들 양육비를 감당치 못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모든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p.234).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부인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을 팔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니 결국 집을 팔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고별식 당일, 초췌해진 부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관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물며 라오자이에게 말했다. "죽은 저 남자는 이제 다 벗어난 걸까요?" 결혼해서 자식도 있는 라오자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 이기적인 놈은 모든 문제를 가족들에게 떠넘긴 것뿐이야."(p. 235).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살하지 마라. 자살은 남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여러 건의 자살을 목격했다. 먼저 요즘 가장 각광받는 번개탄으로 자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보겠 다. 번개탄 자살 건수는 진심으로 너무 많다.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심한 성격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생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한참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온몸이 까맣게 부패하고 냄새도 고약한,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발견자는 대부분 집주인이거나 불쌍한 이웃이다. 그중 80 퍼센트는 집 안에서 발견되고 15퍼센트는 차 안, 나머지는(p. 248) 여관에서 발견된다. 자살한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가족에게 남겨진 번거로움은 굉장히 크다. 일단 업체를 불러 청소하고 유품을 처리 하는 데 비용이 든다. 정리할 게 별로 없는 경우 약 8천 위안 부터 시작해, 현장이 엉망이고 시신이 늦게 발견돼 흔적이 깊이 남은 경우에는 요금이 증가한다. 그다음 경쟁이를 불러 자살 장소에서 송경을 해야 하는데 중부에서는 한 번에 최소 4만 위안부터 시작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더 비싸다. 차 안에서 죽은 경우는 그나마 낫다. 만약 죽은 지 얼마 안 됐다면 차를 청소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래됐다면 폐차 시키는 외에 도리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목을 매 죽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집 안과 야외가 반반이다. 이들은 번개탄을 피운 사람들보다 자살 의지가 더 확고한 것 같다. 집 안에서 목을 맨 경우 발견자는 모두 똑같다. 바로 가만있다 똥 밟은 처지의 집주인이다. 그러고 보면 집주인도 참 못할 짓인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세가 한참 밀린 세입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옆집에서 악취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고 문을 열어보면 이미 온몸이 썩어가는 시신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집주인을 반긴(p. 249)다. 이보다 비참할 수 있을까. 야외를 선택한 사람들은 의외로 외진 곳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쉽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깊은 산속 같은 외진 곳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 초등학교 정문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 공원 정자에서 목을 매단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혀를 길게 빼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부 대변과 소변을 지린 상태다. 다음으로 투신자살이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투신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가장 용감한 것 같다. 지금까지 세 번의 투신자살 현장을 봤는데, 첫 번째 사망자는 6층에서 뛰어내린 후 머리가 다 깨져 뇌까지 보였다. 두 번째 사망자는 8층에서 뛰어내려 기둥에 꽂히는 바람에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세 번째 사망자는 훨씬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보디 백 안에 사방으로 흩어진 뇌를 주워 담은 비닐봉지도 함께 넣었다. 이 정도면 가장 흔한 자살 방법에 대한 묘사를 충분히 한(p. 250)것 같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온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그 견디기 힘든 순간을 정말로 견디지 못하면, 당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의사와 검사가 장례식장에 와 검시를 진행할 때, 나는 유가족들을 휴게실로 안내하는데 어떤 가족들은 매우 슬퍼한다. 언젠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자마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남겨진 네 명의 딸은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어떤 사망자는 친척들에게 4백만 위안을 빌려 흥청망청 써버린 다음 집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또 어떤 가족들은 어리둥절해한다. 한 번은 20년 동안 본 적 없는 동생이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유가족이 있었는데, 시신을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망한 눈빛으로 앉아 한없이 울기만 하는 부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절망적인 경우다.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라, 유가족을 못 찾았거나 찾았지만 시신 인계를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온 집주인들이다. 내가 만난 가장 멀쩡한 시신은 어느 오타쿠였다. 그는 자(p. 251)살이 아니라 돌연사였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죽은 지 3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시신을 보자마자 "죽기 전에 한 발 쏘셨네" 라고 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런 걸 아시는지 눈으로 묻자, 의사는 사망자의 중요 부위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가자 젠장, 그곳엔 여전히 휴지조각이 붙어 있었다.....(p. 252). 에필 로그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으니까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편집장님 말씀처럼 일종의 '제사'의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는 전부 내가 요양보호사와 장례식 정직원으로 일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다. 만약 내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요양보호사가 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장례식장에서 일할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교육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나자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완전히 변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한 건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였으니까. 아버지는 정말이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이를(p. 266) 가슴 깊이 새긴 나는 모르는 아저씨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나중에야 그 아저씨들이 빚쟁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는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나는 왜 어떨 땐 아버지가 집에 있다고 대답해도 되면서 또 어떨 땐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가 또 갑자기 빚쟁이로 둔갑하는 것도 이상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누가 와서 자길 찾거든 집에 없다고 하라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한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와서 나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냈다. 그날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그런 다음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서류를 들이밀고 서명을 받아냈다. 떠나기 전 그는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나중에 커서 네 아빠처럼 되고 싶냐?" 집으로 들어갔더니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게 말(p. 267)했다. "망 하나도 제대로 못 보는 놈!” 나는 힘들었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어째서 선생님 말씀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까? 어째서 아버지 말씀대로 거짓말을 했는데 역시 욕을 먹는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성적표를 감췄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있다. 아버지는 왜 자신을 속이려 드느냐고, 왜 감추려고 하느냐고 나를 혼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비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 말, 빛쟁이들 앞에서 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집 앞에 늘 빚쟁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 명이 가면 또 한 명이 왔다. 어머니는 그 모든 수모와 노동을 묵묵히 견뎌냈고,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사고를 치고 도망쳤다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우리 집은 늘 돈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촌과 고모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교 학(p. 268)비도 고모가 대신 내줬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경제 사정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없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갔다. 그날은 지갑에 5백 위안이 있으니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마친 후 지갑을 열었는데, 그 5백 위안은 이미 아버지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하. 나는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다. 다 큰 남자가 맥도날드에서 주문을 하다 전 재산을 아버지에게 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하하하! 너무 웃겨서 흘린 눈물인지 너무 슬퍼서 흘린 눈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가 돈을 대신 내준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밥을 산다. 그 친구에게 입은 은혜는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때의 굴욕도.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건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 아버지가 먼저 어머니를 때렸다. 어머니는 늘 일을 하다 밤늦게 오셨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가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것도 화가 나는데, 외할머니까지 욕하는 모습에 나는 폭발해버렸다. 우리는 경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싸움을 멈췄다(p. 269). 이 일로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드디어 아버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갈 데 없어진 아버지가 어머니께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서 빼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스스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 일까? 나는 아버지께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지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이 일로 우리는 몇 번이나 싸웠고, 아버지는 중풍에 걸렸다. 처음엔 심각하지 않았다. 몸의 왼쪽 반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른쪽 반은 문제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할 의지가 없었다. 자기가 중풍에 걸려도 결국 고생하는 건 나와 어머니일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아버지를 병원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택시 안에서 자꾸 바지 뒤를 잡아당겼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차 안이 배설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히고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렸다.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한탄하던 기사님은 천(p. 270)위안을 더 받고 가셨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배설물이 복도를 따라 똑똑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내내 크게 웃으며 내가 너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어머니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고, 나는 직원에게 대걸레를 빌려 바닥을 닦았다. 바닥을 다 닦은 후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건 울 일이 아니야. 얼른 웃어! 웃는 거 잘하면서 왜 지금은 못 웃는 거야?"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방금 택시 기사 아저씨 표정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그의 오늘 일진이 얼마나 사나울지 떠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는 없는 사람 취급 하면서. 나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아쉽다. 나 역시 어릴 땐 어른이 돼서 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날을 꿈꿨다. 그날이 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하신 건가요?"(p. 271) 굳이 꼽아보자면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번째 중풍이 와 식물 인간이 됐을 때였다. 나는 병상 옆에 앉아 옛날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만약 아버지 치료를 포기하면, 당신은 이 불효자를 어떻게 할 셈이냐고. 또 한 번은 아버지의 발인 전날이었다. 나는 복원을 마친 아버지 옆에 앉아 말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끝났으니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진심이었다.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상태, 그뿐 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처참하게 우셨다. 나는 내 부모에게서 진짜 사랑을 봤다. 물론 평생을 싸우며 지내느라 어머니가 다정하게 "여보"라고 부르는 건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후 처음 들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보살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다정한 손길로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아버지를 정성스레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을 보는 게 나는 좋았다. 그제야 나는 부부는 싸워도 진짜 싸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둘 중 한쪽이 말을 하지 못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비로소 보인다는 것도(p. 272). 아버지가 어머니께 의지한 만큼, 어머니 역시 그런 아버지를 후회 없이 보살피고 깊이 사랑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버지가 중풍에 걸리기 전, 그날도 나를 흠씬 두들겨 팬 후 씩씩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냐? 넌 나랑 닮았어. 너도 나중에 나처럼 친구도 없고 놀기만 좋아하다 도박에 빠질 거야. 너도 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도 없고 사귈 생각도 없으며 놀기 좋아 하고 도박을 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책을 쓸 결심을 했을 때, 반드시 이 책을 완성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어요. 나는 아버지와 조금은 달라요. 적어도 나는 책을 한 권 써냈거든요."(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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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0】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 어느 책을 읽다 소개 받아 읽은 책인데 20년 사이 절판됐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40대 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됐으니 더 이상 자전거 여행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하기 원했던 것을 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세월은 빠르다. 늙기 전에, 죽기 전에 하나라도 하고 가자.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 같은 행위다. 안장에 오르면 아득해 보이던 지평선도 도전해볼만한 거리로 다가온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짓이다. 운전대나 조종간을 잡으면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다. 오로지 킬로미터로만 표시되는 무감각한 세계로 변질된다. 그 힘도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p. 12)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한꺼번에 25퍼센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퀘이커이자 자전거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내 친구 버넌 포브스는, 어느 날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한마디 했다가 다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사람치고는 드물게 차가 없는 그는 자전거를 타고 모임에 갔다. 미국 정부를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료 퀘이커들에게 자기 말고 또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없자 그는 "석유를 한 방울이라도 쓰고 있는 당신들은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그 뒤로 다시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완전한 고립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그가 괴팍한 사람이다. 페달을 밟는 일은 혁명이 아니라 자동차가 나오기 전인 19세기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나가는 차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 는 내게 경적을 빵빵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는 한 시간을 달리면 무려 1만 8600칼로리를 소비한다. 같은 시간에 자전거는 350 칼로리를, 그것도 허리둘레에 끼인 지방을 소비한다. 자동차로 운전하는 거리의 80 퍼센트가 집에서 13킬로미터 이내에 집중된다.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p. 13) 삶의 방식, 자전거타기 자전거를 타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며 안전하고 자동차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퀘이커 친구가 말한 게 맞다. 자전거타기는 교통사고로부터 진정 해방됨을, 소비적인 사회와 전쟁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석유와 비만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자전거타기가 정착된 사회는 속도와 경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다. 자전거타기가 왜 위협적인 일인지 이(p. 14)제 눈치챘을 것이다. 그것은 사치스럽고 빨리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대안이다. 미국에는 이미 5500만 명의 혁명 동조세력, 다시 말해 자전거 인구가 있다. 이 중 열성당원 300만 명은 자전거로 통근하거나 통학한다. 해마다 자전거가 1300만 대나 팔린다. 이 혁명의 무기고에는 이미 1억 2000만 대의 자전거가 입고돼 있다. 해마다 차보다 세 배나 더 빨리 늘어난다. 볼셰비키 혁명 직전의 차르 시대와 같다. 자전거타기는 매우 선동적인 행위다(p. 15). 지평선이 이어진 하늘 향해 달리다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버지니아주로 향하는 동진 라이더들이 많은 것은 바로 바람 때문이다. 미국 대륙에서 지배적인 바람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서풍이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면 여행이 한결 수월하다. 그런데도 내가 맞바람을 받으며 서진하는 이유는 동진하면 마치 역사책을 뒤에서부터 읽는 듯한 느낌일 것 같아서였다.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을 찾아와 정복하고 식민하는 과정을 뒤밟아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의 방향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놀라운 것은 동진하는 라이더들도 바람의 방향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때로는 나처럼 불평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 부는데, 정반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바람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물론 남풍이나 북풍이 불어서 똑같이 옆바람을 받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바람이 뒤에서 웬만큼 불어줘서는 그 후광을 느끼기 어렵다. 만약 시속 16킬로미터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의 바람이 시속 16킬로미터로 분다면 바람의 영향을 느낄 수 없다.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달을 세차게 밟아 시속 20킬로미터로 달리면 시속 16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공기보다 빨라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뒤에서 부는 바람인데도 맞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반대로 달려보면 그 동안 바람의 음덕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뒤에서 바람이 불어줘서 남보다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자유경쟁이 아름답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p. 196). '일 예찬론'은 이데올로기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는 놀 줄 모른다. 어쩌다 사람들이 춤을 추는 곳에 휩쓸려 들어가도 뻣뻣하게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 내가,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을 정도로, 싫다. 나뿐 아니라 우리들은 집단적으로 잘 놀 줄 모른다. 그게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나는 30대가 넘어서 신문사에 다닐 때에도 다음 날 할 일을 생각하다가 "국•영•수 해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도 아니던 내가 그럴 정도라면?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그건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가, 오락'을 뜻하는 'recreation'은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 다시 뭔가를 만들어낼 힘을 충전하기 위해 논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p. 286).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술가 같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아닌 이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발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일이 생활비를 벌거나 축재 또는 출세의 도구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때로는 눈치를 봐야 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참아야하는 노역일 뿐이다. 사람이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몇몇을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다수를 부려먹는 소수의 논리다. 하지만 그다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사람들을 더 지탄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시간을 헛되이 쓰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자식들에게도 맘껏 놀아보라고 하지 않고, 시켜서 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러니 인생이 뻔해진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다 간다. 쉼 없이 일하고 쉼 없이 사들이고 너도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판이니 세상에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다. 찬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하는 찻잔 세트들이 즐비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 것들을 사 모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자원들이 고갈돼간다. 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p. 287)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다.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호모 파베르'이던 나는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뒤 '호모 루덴스'로서의 나를, 그리고 장거리 여행의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내 몸을 발견한다. 그래서 미국 단독 횡단이라는, 그 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판의 유희에 하루하루 희희낙락하면서 그 꿈을 한발 한발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로키 산맥이 나를 부른 것은 바로 크게 한 판 놀아보자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오늘이 최상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점점 더 좋은 날로 가는 도중의 하루라는 뜻이다. 오늘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부질없는 희망처럼 들린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것들은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바닥에 깔리고 모여지는 것이다. 나는 바퀴를 굴리면서 내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후지어 패스를 넘었어도 여전히 성취해야 할 험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더는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교문을 열고 뛰어들어 가는 운동장이 된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면서 역동적으로 바뀐다.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의지와 몸은 정반합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며 하루하루 더 나를 강건하게 한다. 하루는 의지가, 하루는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나는 물질과 정신, 가능성과 불가능성, 무한과 유한,(p. 288). 순간과 영원, 자유와 당위, 절대와 상대, 진짜와 가짜, 확실성과 불확실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끊임없는 충돌이자 화해의 접점이다. 노동이 충돌이라면 페달밟기는 화해다. 달리면서 세계와 나의 거리가 줄어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후지어 패스를 넘은 뒤 나는 더 세게 놀아보기로 했다(p. 289).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안의 콜터 베이 빌리지 캠프장은 한여름에도 밤 기온이 섭씨 5도 안팎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모기도 없고 습기도 적어 공기가 파삭파삭 하다. 여기서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년째 자전거 여행을 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 4600킬로미터, 형인 카를로스는 3 만 킬로미터를 달려 각각 지구의 둘레 4만 77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 돈 스페인 형제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 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 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릴리스 레버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이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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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0】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죽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