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