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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이동식 목사가 책으로 전하는 “따뜻함과 쉼”
시산문집인 이 책의 저자 이동식 목사는 무안읍교회 담임목사이다. 《시와사람》으로 수필 등단 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무안지부 지부장, 기독교 호남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예총 무안지회 수석부회장, 전남문인협회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발간한 수필집으로는 『하늘정원으로 통하는 창문』, 『햇살이 머무는 사랑의 뜨락에서』,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 『군불 지피는 보랏빛 마음으로』가 있으며 이 책들은 전국 대형서점 및 쿠팡, 11번가, 네이버, 다음 등 기타 인터넷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본 책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는 표지에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하고 포근한 쉼터”라는 설명처럼 시든 산문이든 따뜻함과 쉼을 준다. 특히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글과 시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분류에 따른 시와 산문을 통해 각 계절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접하게 한다. 책 사이사이에 들어간 작가와 가족들이 직접 찍은 수준 높은 사진들은 책의 품격을 더 높여준다. 일독을 권한다. 종종종 종종종 참새 한 마리 마당을 뛰어 다닌다 날개를 푸덕이며 날아가도 될 터인데 마당에 한 발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오늘도 내 마음 어설픈 뜀뛰기 종종종이 되었다(p. 20). 요즘 청정농사를 지는 사람들이 늘어 농약을 안 치거나 적게 하고 금비보다 퇴비를 사용합니다. 또 오리 농법이라 해서 논 가(p. 80)운데 청둥오리를 키우며 벼농사를 짓는 환경 친화형 농사가 있습니다. 청둥오리는 기러기과로 시베리아에서 번식합니다.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에 날아와서 지내다가 돌아갑니다. 청둥오리는 날개 힘이 좋아 먼 거리를 오가는 철새입니다. 그런데 논에 농사를 위해 넣어둔 청둥오리는 날지를 않습니다. 사육장의 하늘 부분을 막아 놓지 않아 물어보니 청둥오리는 영양가 많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찌면 몸이 무거워 날지 않고 그러다가 자신들이 날아다니는 새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걱정이 없어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날았던 기억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내과 의사인 '래리 도시(Larry Dossey)'는 10명 중 8명이 시간에 쫓기는 '시간병(Time-Sickness)'에 고생한다고 합니다. 늘 시간이 달아난다는 느낌 속에 허둥대며 가속 페달을 밟듯 계속 서두르는 것입니다. 벌판 위의 벼와 보리도, 비행기 속 승객도 모두 시간에 쫓겨 살아갑니다. 오늘도 나를 통해 지나가는 일들과 사람과 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겠습니다. "Carpe Diem Memento Mori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현재를 잡아라. 죽음을 기억하라)"의 명언을 되새겨 봅니다(p. 81). 꿈속의 어머니 지난 밤 꿈속에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떠나가신 후 못 살 것 같던 젖은 마음도 무디어져 말라버리고 제법 씩씩한 척 걸어왔는데 잊고 사는 아들 군불 지펴 뎁혀주시려 사랑스런 그 마음 여전한 모습 그대로 이셨습니다 지는 낙엽 위로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아! 어머니의 품이 또 그리워집니다(p. 24). 자화상 나는 병들어 뒤틀린 굽은 나뭇가지가 좋다 바위 때문에 돌아가는 비뚤어진 길이 좋다 나는 바람에 날려 찢긴 꽃잎이 좋다 누렇게 손때 묻어 찢어진 노트가 좋다 왜냐고요 잉크냄새 나는 새 책 새 옷이 좋고 신상의 세련된 자동차 나도 새 것이 좋다(p. 34) 그러나 내 모습 닮은 애정이 가는 분신 같아서 좋다(p. 35) 여름고개 합창단 매미 합창단 구슬픈 공연이 아직도 계속 되는데 다음 출연자들의 연습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귀뚜라미 노래에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고 익어가는 알곡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었다 아직 무대 위에서는 목청 높이는 여름이 노래하고 있다(p. 122) 가을 리허설 서늘한 새벽 익숙한 길 위 오늘도 하룻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선물처럼 살며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 기대는 이슬 젖은 바람은 가을의 향기를 품었다 무대 뒤 놀란 귀뚤이 리허설 중 침 삼키며 피리 닦으며 숨 죽여 맛 뵈기, 가을의 노래를 부른다(p. 172) 익어가는 가을날의 품격(品格) 저물어 가는 가을날의 오후 햇살이 들어온 창문에 노란 은행나뭇잎이 반사되어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모처럼 휴대폰을 열어 좀 고전적인 클래식을 들어 봅니다. 세계적인 테너들이 부르는 명곡이 흘러나오며 펼쳐진 가을 하늘은 한결 고결한 모습으로 어울립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고상해진 내 모습을 누려 봅니다. 일상의 모든 사물과 현장치고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만 때론 평범하지만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품격이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에는 그에 어울리는 품격이 있습니다. 품위를 소중히 여긴 서구 사람들은 ‘품위’를 ‘dignity’라는 단어로 자존감과 위엄을 지닌 품(p. 223)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존경하던 어떤 분들이 정치에 뛰어들고 세상욕심에 치우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소중한 품격을 상실한 초라한 모습을 보며 온 사회와 지인들까지 실망하는 일을 종종 봅니다. 아집이 드러나고 천한 언어들로 채워져가는 모습에 하루아침에 그들의 품격은 낮은 가치로 추락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에는 그것에 합당한 수준인 격(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준에 맞는 기준을 정한 것을 규격(規格)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격에 맞도록 준비되면 합격(合格)이라 인정해 줍니다. 그것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것이 가격(價格)입니다. 만물과 인생에서 그 위치에 어울리는 격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에 맞는 격(格)이 있듯이 모든 만물과 인생사에도 격이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른 수준의 성품인 사람다운 인격(人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품성과 인격을 가진 인생은 품격(品格)이 드러난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실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격이 상승되어 격상(格上)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품격에 따라 대우와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중에 ‘답다’는 말은 합당하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어른의 수준에 오른 인생을 '어른답다'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사나이답다' '여성스럽다' 사람다운 삶' '신자 답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본질에 도달했다는 말이기에 칭찬이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한 것입니다(p. 224). '제임스 A. 프로우드'라는 분은 그의 저서에서 "인격은 택배처럼 어느 날 집 앞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연단하고 담금질하여 단단히 쌓인다"고 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갈고 닦아야 훌륭한 품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과 본질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다움'을 회복하여 아름다울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금은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되며 설탕은 음식을 달콤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소금과 설탕이 겉보기에 아무리 비슷해도 설탕은 설탕, 소금은 언제나 소금이기에 존귀합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에게는 품격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끌리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꽃의 향기는 십 리까지 퍼지고 인격의 향 내는 만 리까지 알려진다"고 합니다.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자연의 품격에 어울리도록 내 인생의 품격을 마음의 저울에 올려봅니다(p. 225). 꿈 속의 고향 모락모락 정겹게. 어머니가 피워 올린 환영의 손짓 고향 집 굴뚝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일은 명절날 저물어 가는 석양을 붙들고 그리운 가슴 손으로 누르고 고향집 꿈을 꾸며 마음을 달랜다(p. 232) 이동식 목사 관련 기사 링크 무안읍교회, 지구촌나눔재단 전남 무안 지부 설립 및 사랑의 쌀독 발대식 총회 역사위, 『초창기 한국교회 대사회 운동』학술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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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포스럽고 괴기한 그림이 하는 말
처음 보는 장르의 그림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그림들이다. 작가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그림이 다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작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외부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자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아마도 주변부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과 삶의 절규는 있지 않은가? 그것이 글이든, 영상으로든 혹은 그림으로든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신 상태, 예술적 충동, 창작 과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창작한 작품은 ‘예술적 천재성’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미술 치료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한 논문에 따르면 예술 창작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많은 환자가 예술적 재능과는 상관없이 예술 치료를 통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지고 도파민 수치가 높아졌다. 예술 치료가 모든 정신 질환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술 창작 작업은 내밀한 사고를 들여다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게 해주는 좋은 도구이다. 많은 정신 질환자들이 이런 작업을 간절히 원할지라도 질병에 지친 나머지 그럴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이들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정신 질환을 겪을 수 있고 정신 건강 문제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정신적 고통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이런 측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온전히 인간적인 이 경험에 감수성과 공감, 미묘한 뉘앙스를 덧입혔다. 이들 예술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캔버스 위 에 물감으로, 진흙으로 빚어낸 조각으로, 카메라 렌즈를 통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보기 힘들고 부담스러워 차라리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도전적인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같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어둠을 더 잘 이해하고 스스로의 어둠도 역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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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직 인기 소설가의 자기 고백
나는 아직 이 작가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명 작가이다. 이제라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수많은 직업 중 소설가는 창작의 수고와 고통이 있을 것 같다. 이 한 사람의 고통의 결과물을 우리는 책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 모든 작가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비록 우리가 전업 소설가는 아닐지라도 메일이든 문자든 카톡이든 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한다. 글이란 무엇인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7년, 서른셋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편집자 시절 소설 독자들을 사로잡겠다던 목표는 이후 세 편의 부진을 거친 뒤 2021년, 다섯 번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이루게 되었다. 1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비전을 가지고 전업에 뛰어들었고, 무명의 시간을 견뎌 소설가가 되었고, 마침내 독자들의 사랑을(p. 16) 얻었다.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로 담금질되었고 소설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하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지속되어야 하며, 납득할 만한 결말을 제공해야 한다. 대중 상업 소설을 지향하기에 문학성보다는 가독성을 추구한다. 소설이라는 이야기 속 가상 세계에 독자들을 한껏 빠져들게 한 뒤,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며 자신만의 질문을 품게 하려 애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탐구하고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믿기에, 내 소설이 독자들의 삶을 살피는 계기가 되고 ‘인생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 하면서, 쓴다(p. 17). 소설 쓰기는 한 번 배우면 절대 까먹지 않는 자전거 타기와는 달랐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소설이었고 그래서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거기에 맞는 나만의 작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바, 결국 작법은 스스로 만든 기술이고 그 기술을 만드는 능력은 일상의 반복된 작업 패턴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루틴’ 그 루틴을 발휘할 수 있는 고정 공간 ‘작업실’. 그 작업실에서 쓸 글감을 떠올리는 '산책' 그리고 집필 활동의 근육이 되는 '독서' 이 네 가지 요소가 소설 쓰기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계속 나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소설 쓰기도 결국 글쓰기였고, 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한 탐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가. 작가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체화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쓰며 배우고 써서 완성한다. 그리고 그 시간, 삶을 버티며 인생을 추스르며 보낸 나의 시간이 세상에 대해 쓸거리를 만들어 줬다. 이른바 글감. 시간이 만들어준 글감을 정리하는 건 글쓰기의 몫이었고 나는 그 몫을 꾸준히 수행한 자에 불과했다. 이 책은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 당신의 삶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p. 20). 독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아니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글쓰기와 독서와의 상관관계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작가 지망생이 독서에 게으른 경우를 본다. 그럴 때 나는 이 렇게 말한다. "가수가 되고 싶은데 노래를 안 들으시는군요." 독서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글쓰기의 핵심 요소다. 독서는 그냥 작가가 밥 먹는 거라고 보면 된다. 또한 독서는 글 쓰기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배움을 지속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독서 만능주의자 같은 발언을 하는 이유는, 독서 붐이 일어나 내 책이 더 팔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독서인구가 늘어 도서관이 많아지길 바라서도 아니다. 독서가 글쓰기의 기본이고 뼈대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책 읽기 없이 글을 쓴다는 건 뭐랄까, 근육이 안 만들어진 씨름선수라고 할까? 상대를 넘길 기술도 근육에서 올라오는 근력 없이는 불가능하듯, 독서 없이는 글 쓰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p. 43). "그런데 나는 소설 말고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을 쓸 겁니다. 이런 경우엔 독서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게 낫지 않나요?"라는 질문도 받곤 한다. 답하자면,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봐야 한다.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 역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 (장면)를 상상하게 만드는 텍스트(글)를 쓰는 게 대본 작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바로 독서가 아닌가? 글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는 게 소설 읽기의 과정이다. 애초에 대본을 그림 콘티로 그린다거나 혹은 머릿속 상상을 특수 장치로 출력해 구현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글을 써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다. 텍스트 해석력, 텍스트 표현력. 이 모든 것이 독서에서 시작된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수많은 효용 중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디테일을 정리해보았다. 독서는 겸손과 투지의 원동력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겸손해진다. 마치 성전에 들어선 것 처럼. 목차만 훑어봐도 경외감이 드는 책들을 마주한다. 고전. 걸작. 숨은 역작. 좋아하는 작가의 책. 어딘가 부족하지만 매력 있는 책.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생애를 짜내 기록한 이야기. 나는 그것들을 살피며 글쓰기의 겸양을 배운다. 한편으로 투지를 채운다. 더 열심히 써야겠다. 뒤지지 않는 책을 내기 위해 투지로 써야 하겠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이곳에 진열되는 것만으로 망신일 테니. 독하게 써 부끄럽지 않아야겠(p. 44)다는 다짐이 마구 솟아오른다. 독서는 자신감의 원천 한편으로 독서를 많이 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아니 이런 책도 출간이 됐단 말이야?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네’라는 의욕이 솟아오른다.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도서관 혹은 서점에 가보시라. 한 시간 정도 이 책 저 책 들춰보다보면 자신감이 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취재 인터넷 시대에 데뷔한 나는 일정 부분 검색을 통해 취재를 한다. 검색은 편하고, 실용적이며, 절대 쉽게 알 수 없는 사실도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알려주니까. 하지만 때론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며,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정보가 무분별하게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보를 깊이 파고들어 가고자 할 때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것들은 겉핥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런 말을 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인터넷에는 과다한 정보와 부적절한 정보 가 널려 있기에 취사선택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인터넷을 통한 취재는 ‘사려 깊은 검색’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려 깊은 검색을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 바로 책이다. 그러므로 책을 통해 관련 취재를 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실용적이고 또 세밀하게 정보에 파고들 수 있는 길이다(p. 45). 가령 당신이 경찰과 의사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인터넷 검색은 기초적인 조사를 도와줄 따름이다. 직접 만나 취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경찰과 의사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런데 경찰이 쓴 책, 의사가 쓴 책을 읽으면 의미 있는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 대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글로 정리된 직업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저자의 생각과 정보가 내밀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쓰려는 글의 정보를 책에서 찾기 바란다. 독서는 문장 강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다양한 문장과 문체를 접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문장과 문체를 배울 수 있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의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적 용할 수 있게 된다. 독서는 단어 수집 독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건 기본이고, 단어를 수집하는 건 보너스다. 소설을 완성하는 게 집을 짓는 것이라면 단어는 벽돌과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 자재가 많을수록 집은 단단하고 아 름답게 지어질 것이다(p. 46). 독서는 공감 독서는 책을 쓴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엿보고 따라가 보는 행위다. 자연스레 공감을 하고 그로 인해 공감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그 공감능력이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을 공감 가는 인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독서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 무엇보다 소설 읽기는 다른 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해준다. 지금 내 현실이 힘들고 내가 쓰는 이야기가 안 풀려도 이미 완성된 이야기 하나를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소설을 읽는다. 다른 세계에 잠시 머무르며 현실을 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흐뭇한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2013년 여름, 4호선 지하철 맞은편 좌석에서 《망원동 브라더스》를 읽는 독자를 목격한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하마터면 다가가 인사하고 이 책을 어떻게 고르셨냐고 물어볼 뻔 했다. 다행히 꾹 참고 그분의 독서를 훔쳐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책을 읽는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나는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독서의 효용을 하나 더 추가하겠다. 독서는 작가를 기쁘게 한다(p. 47). 소설의 가격 솔직해지자. 여러분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소설을 팔기 위해 서다. 팔린다는 것은 많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는 것, 이것이 소설 쓰기의 핵심이다. 그런데 가격을 모르고 이야기를 쓴다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가격이란 책의 바코드 옆에 적힌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비용이기도 하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처음엔 가늠이 안 되겠지만 어떻게라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간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감사하게도 우리는 소설 쓰는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 당신이 공인된 작가라면 출판사로부터 선인세 혹은 계약금을 받아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시간을 사서 소설을 써야 한다. 이 시간을 사는 것에 대해 당신은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핵심은, 손해를 보더라도 얼마의 가격이 들었는지 알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이다(물론 독자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격이다(p. 67). 마지막으로 묘한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하겠다. 전업작가가 된(p. 122)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나는 그동안의 작업이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생계를 위한 잡문을 쓰며 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걸 후회하던 참이었다. 우연히 옛 출판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 2차에서 한 사람을 마주했다. 그는 출판계에서도 한참 선배인 듯했는데 (자세히 기억 하지 못하는 건 그때가 초면이었고, 이후로도 그를 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이름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에게 나를 ‘출판사 잘 다니다 때려치고 작가 되겠다고 고생하는 친구’라고 소개 했다. 그때 그는 나를 가만히 살피곤 한마디 했다. "당신은 잘될 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난감했다. 이 뜬금없는 덕담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초면인 당신이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당신이 날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쉽게 하지? 신기가 있나? 덕담 남발자인가? 그렇다고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니기에 그도 나도 주변도 그냥 흘려 넘겼다. 술자리 잡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글쓰기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름 모를 그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잘 될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그때 그 말은 어느새 내게 창작의 심해에서 버틸 수 있는 산소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좋은 작품을 쓸 거야. 그 사람이 그랬잖아. 그 사람이 누군지 뭐가 중요해. 근거 따위 뭐가 중요해.'(p. 123) 그러므로 부적이든 주문이든 토템이든 당신의 글쓰기를 도움 어떤 것이라도 기억하라. 수집하라. 옆에 두고 계속 음미하기 바란다(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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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작가가 말하는 글쓰는 방법들
이 땅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이 책들을 쓰는 작가들도 많다. 때로 베스트셀러가 돼서 큰돈을 버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더더군다나 요즘에는 책들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양한 책들을 출간해 주니 감사하다. 이 책을 읽으며 읽어야 할 책들을 발견해서 너무나 기쁘다. 작가들이 숨 쉬며 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자. 수학 연구와 대중적인 글쓰기 가운데 어느 게 더 어렵냐는 질문에 그는 "새로운 수학을 창출하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연구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딱 나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영역이 서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강연하러 가서 이야기를 나 누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연구로 연결하는 식이다. "논문이든 대중서든, 말하자면 모든 게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는 과정"이라며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비슷한 활동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정리한다. 여러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마감에 쫓기며 글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그도 글이 풀리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마감이 다가오는데 글이 선뜻 안 써질 땐 우선 아무렇게나 쓰고, 고치고, 다듬는다(p. 28). "문장도 신경 쓰지 않고 앞뒤가 맞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른 걸 막 씁니다. 그리고 여러 번 다듬죠. 이후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에게 비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김민형은 왜 일반인이 수학에 관심을 갖는 데 목소리를 내게 됐을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현대 생활에서 수학이 쓰이지 않는 곳이 드문 까닭이고, 그만큼 수학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l), 경제 지표, 지금 쓰고 있는 화상 통화 등 오늘날 모든 발전이 고등수학 없이는 불가능해요. 수학을 모르면 막연한 두려움이 커지는 시대죠. 하지만 이해하고 나면 생각보다 변화가 무섭지 않아요. 수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죠. 제 두 아들이 어렸을 때도 이런 이야기 를 하곤 했죠." 그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며 수학을 외면할 수도 있지만, 수학적인 이해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점점 차이가 커질 거라고 지적했다. 세상의 현상을 이해할수록 행동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에 수학을 아(p. 29)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문에 나온 극적인 통계도 정확히 파악하고 나면 두려운 것이 아닐 때가 많아요. 제대로 이해하면 무섭지 않은 상황이 많은 거죠." 코로나 사태도 수학의 역할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였다. 그는 코로나 극복에 수학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감염 확산 예측을 위한 수학적 모델링과 통계 분석,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수학의 역할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수준까지 수학을 이해해야 할까. 수학에 관한 대중서를 집필할 때 김민형의 원칙은 독자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에게 적당히 이해한다는 느낌만 안겨주는 가벼운 책은 지양 한다. "누구든 단번에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한 번 읽고, 다시 돌아와서 보고, 나중에 또 보고, 그러면서 이해가 이뤄집니다. 대중을 위한 책도 그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p. 30)정을 반영해야 한다고 봐요." 그는 오만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대중 과학서나 수학서가 별로 없다고 토로했다. 술술 읽히게, 적당히 이해하는 정도로만 쓰다 보니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타협점을 찾는 게 어렵지만, 독자가 단번에 이해하기보다 여러 번 읽으면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도록 쓰는 게 자신의 원칙이라고 밝혔다. 그의 대표작 『수학이 필요한 순간』 역시 빠르게 넘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이해하고 싶다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이 책에 도전했다. 그는 "수학을 향한 관심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는 건 고맙고, 그저 놀랍고, 감동적"이라며 수학책이 이 정도 관심을 받은 건 그만큼 우리나라 독자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마음에 드는 통계나 정보일수록 틀린 것이 없는지 추궁해보라"는 강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굉장히 흔한 유혹 중 하나가 자기 마음에 드는 통계는 금방 받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통계는 비판적으로 보는 겁니다. 하지만 통계의 질도 여러 가지라 부정확할 수(p. 31) 있어요. 찾아보면 반대의 통계도 많고요. 그러나 대부분 자기 마음과 잘 맞는 것은 스스로 추궁하지 않죠. 그건 ‘고장 난 기계’가 되는 길입니다." 세상에 극적인 데이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숫자로 인한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그는 강조한다(p. 32).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김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래서 답도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의무감으로 쓰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상황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게 의무인 것 같아요. 나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생각이 필요한 사람이나, 읽고 쓸 만한 상황이 아닌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 의무다." 대답을 마친 그는 명랑한 표정으로 "거창하죠? 한 번 거창하게 말해봤어요. 다른 답으로 바꿀까요?" 하더니 활짝 웃었다(p. 45). 서은국이 전하는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행복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속설과는 정반대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 뇌가 주는 보상이 '행복감'이다. 낭만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진화론적 설명이다. 가령 강아지에게 ‘손 줘’를 훈련할 때 보상으로 주는 '간식' 같은 역할이 행복이라는 것.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고쳐먹는 것으로는 안 되고, 간식'(즐거움)을 주는 '행동'과 경험'을 찾아 자주 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때 행복감이라는 뇌의 보상이 극대화된다. "사람들과의 교감과 그들로부터의 긍정적인 반응이 생존과 번식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자원이에요. 누군가 나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할 때 행복이라는 뇌의 신호가 미치도록 켜지죠.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눈을 감고 명상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p. 62). 그는 사람과 교류하기를 즐기는 외향적인 사람, 안정을 지향하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데 유리하다는 것은 수많은 연구의 누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열기가 들어오는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긍정적 사고’만으로 더위로 인한 불쾌감을 행복감으로 바꿔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짧은 시간 성공할 수는 있어도 지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감사 일기’나 '마음 비우기'만으로 행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불편한 환경은 바꾸고,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행동을 자주 하는 것, 이것만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그는 일부 자기계발서나 소셜미디어에서 소개하는 ‘행복 지침’이 진리로 여겨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마음과 태도를 바꿔라’ 같은 지침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연구자 입장에서 행복감은 그렇게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만약 상황과 무관하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 감정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감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p. 63)않는 거예요." 그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주장은 감정이 감당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감정은 상황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을 때 우울함도 느끼고 두려움도 느껴야 이를 깨닫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된 요인은 우주의 별만큼 많지만, 관련성이 너무나도 미약한 요소를 행복해지는 ‘결정타’인양 이야기한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느냐"며 『행복의 기원』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p. 64). 하지만 그가 보는 한국 사회의 행복 온도는 걱정될 정도다. 요즘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가는 길”에 비유했다. 일상 속 "잦은 불쾌가 누적돼 곪아 터지는" 상태, 모두 '자기 권리'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업 종료시간이 다가오는 뷔페의 아이스크림 코너에 초콜릿 맛 두 개와 바닐라 맛 한 개가 남아 있고, 내 뒤에 한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어떤 맛을 택할까. 그가 참여한 최근 연구에서 초콜릿 맛을 골라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는 배려를 하는 사람 숫자는 한국이 거의 꼴찌였다. "논문을 보면 행복하지 않은 문화권이나 사회에 몇 가지 특성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런 점에서 거의 상위권에 자리해요. 과도하게 강한 집단주의적 생각과 수직적인 문화가 그렇죠.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어서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에너지를 투여하면 타인을 배려할 에너지가 남지 않아요. 수많은 사회 구성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예의 없고 불쾌한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참아내(p. 65)야 하는 사회는 행복감이 높을 수 없어요." 그는 "행복해지려면 서로 조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 집단, 내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계단에서,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서로 행복 신호를 켜는 작은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반사되는 빛으로 가장 행복해지거든요."(p. 66). '난처한' 시리즈는 총 열 권으로 기획되었다. 2024년에 나온 8권 '바로크 미술'에 이어, 2025년까지 9권 ‘귀족과 미술’, 10권 ‘시민과 미술’을 쓸 계획이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 책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텐데 왜 계속 쓰는지, 그 동력이 궁금했다. 그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만 알고 있는 게 아깝지 않나? 미술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누리면 좋겠다"고 답했다. "미술은 본디 특정 집단의 소유물, 엘리트 집단의 언어였어요. 유럽에서는 미술품에 대한 태도로 상류층과 대중을 구분할 정도니까요. 대중이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당황할 때가 있어요. 환상이 크다 보니 미술품을 신비화하게 되고, 결국 백안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추상미술의 경우 난해한데 고가에 팔린다는 데 대한 분노도 크고요. 비자금, 탈세 등 미술에 덧씌워진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보면 미술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미술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세계인데 말이에요. 대중이 그 세계로 들어가려면 알파벳 같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미술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싶어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p. 78)가져다주었다면, 저는 미술이 불처럼 우리 삶에 필수 불가결한 세계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p. 79). 장강명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사회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 추측하기 쉽다. 실제로 그렇다. "제가 굉장히 의심이 많아요. 신도 믿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글을 쓰거나 사회를 바라보거나 삶을 살면서 몇 가지 원칙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은 존엄하다, 현실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장강명은 작품 창작 못지않게 사회적 활동에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저작권자가 출판사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책 판매량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출판계 관행을 공론화했다. 소설 『당선, 합격, 계급』을 비롯해 각종 매체 에서 독서 생태계 붕괴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아내와 독서 모임 플랫폼 '그믐'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 모임과 출판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된 문제를 해소하고, 모임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소설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무료 서평집 『한국 소설(p. 86)이 좋아서』를 만들어 온라인 서점에 무료 배포했고, 동료 작가들과 ‘월급사실주의’ 동인도 만들었다. 몸 하나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기자 출신 작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호칭을 넘어 스스로에게 '리얼리스트'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p. 87). 정재찬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성공을 거두면서 50대에 처음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내면에 쓰고 싶은 열정이 넘쳐야 하는데, 자신은 책무에 떠밀려서 쓰는 사람이라 작가라는 호칭이 여전히 낯설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학 내 보직을 겸하면서도 2~3년에 한 권씩 부지런히 썼다. 정재찬의 책은 한 편의 강의처럼 독자를 이해시키고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는 그 비결로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을 아주 많이 읽는다고 했다. 쓰고 있는 글이 술술 읽히는지 반복적으로 확인한다고 했다(p. 95). "저는 대충 거칠게 써놓고 다듬는 '조각가 스타일'이 아니에요. 나무에서 숲으로, 숲에서 나무로 계속 심고 뽑고 자르고 옮기는 스타일이죠. 한 줄을 쓰면 그 앞부터 다시 읽고, 한 단락을 쓰면 몇 단락 앞부터 다시 읽고, 만족할 때까지 되먹임을 거듭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죠. 제 책이 강의를 옮겨놓은 듯해서 수월하게 쓰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수월하게 읽히도록 쓰는 과정은 전혀 수월하지 않답니다." 이렇게 반복해 읽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글의 '리듬'이다. "리듬은 ‘의미의 리듬’일 수도 있고 ‘형식의 리듬’일 수도 있어요. 일종의 감각이죠. '글을 잘 쓰려면 모든 문장을 짧게 쓰라'라는 식의 말을 싫어해요. 짧은 문장도 있고긴 문장도 들어가면서 리듬이 생기는 거죠. 그런 균형 감각이 없으면 좋은 글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용이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통속적이거나, 형식이 너무 멋을 부리거나 너무 단순하면 훌륭한 독자들도 몇 페이지 이상 넘어갈 수가 없어요."(p. 96). 그는 작가는 자기 글의 첫 번째 독자이므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많이 읽어 독자로서 좋은 안목을 갖추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잖아요. 독자로서 안목이 후지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요. 물론 글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보장되진 않지만,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 거예요." 그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무도 읽어주지 않은 초라한 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는 일이라며, 그렇기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스스로 격려하고 비판하며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독자들에게 ‘시 배달부’ 역할을 해온 정재찬은 책을 내며 ‘문학’과 '문학교육' 사이의 경계선을 고민한다. 순수문학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책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p. 97). 『불편한 편의점』 출간 직전인 2020년에 펴낸 에세이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두고 그는 20년 동안의 '작가로서의 생존기'라고 말했다. 이 책 역시 2019년부터 출간할 출판사를 찾았는데, 일곱 곳에서 거절당하고 여덟 번째 출판사에서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를 지난한 참호전에 비유한다. '고립'은 그의 글 쓰기 제1원칙.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더군요. 초고를 쓰는 서너 달 동안은 지방에 작업실을 구해 작업해요. 아내와도 2주에 한 번 만날 정(p. 108)도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죠." 작업실에서는 주로 브릿팝과 록으로 구성된 ‘노동요’를 들으며 글을 써내려간다. 소설을 쓰는 상상력도 고립에서 나온다. 배경 취재와 캐릭터 설정은 참호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끝내놓는다. "『불편한 편의점』은 다양한 접객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과 편의점 취재 내용을 조합해 만든 이야기예요. 상상력으로 취재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죠." 김호연의 '참호전' 루틴은 이렇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걸어서 작업실로 출근하며 그날의 집필 내용을 정리한다. 작업실에 도착한 뒤엔 평범한 직장인처럼 이메일을 확인하고 웹 서핑을 하는 데 한 시간 정도를 쓴다. 그다음은 ‘오늘의 노동요’를 세팅하는 시간. 플레이리스트 선정까지 완료되면 본격적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한 시간쯤 글을 쓰면 커피를 마시며 독서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휴식을 취한다. 정오 무렵엔 글쓰기의 필살기'인 산책이 필수. 그는 산(p. 109)책에서 글쓰기의 길을 찾는다고 했다. 제주의 중산간 길에서 『연적』의 클라이맥스가, 대전의 갑천 산책로에서 『파우스터』의 반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뒤엔 분량과 내용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글쓰기를 반복한다. 배부른 느낌이 작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침과 점심은 먹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일상이다(p. 110). 베르베르의 고민은 세간의 비판이 아닌 작가라는 직업의 본질로 향한다. 그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작품 활동 30년이 넘은 작가의 지나친 겸손은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신간을 낼 때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이 안 서요. 독자들을 만나 사인하고, 해외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저의 글에 대한 타인의 감상을 실감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떠올림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그 힘으로 날마다 꾸준히 글을 써나 갑니다." 그는 오직 펜을 잡고 상상의 세계를 뻗어나가는 지금이 멈추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제게 책을 매년 한 권씩 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어요. 어디까지나 제 선택이죠. 저는 뇌의 생산성을 늘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 기능을 상실할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뇌가 기능하는 한 그 잠재력을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요. 삶(p. 121)의 끝에 다다라 결국 충분히 많은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p. 122). 이슬아가 말하는 '글쓰기란' 밤새워서 쓰는 글은 좋지 않다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는 행운 속에서 살아가는 게 좋으면서도 무섭다. 마감이 반복되면 글은 자연스레 느는 것이 아닌가. 마감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관성을 믿는 편이다. 보통 청소와 운동을 한 다음 늦은 오후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밤새우지 않는다. 새벽에 쓰는 글이 별로 좋지 않고, 밤을 새운 여파가 다음 날까지 이어지더라. 작가가 되려면 푸시업을 열심히 윗몸일으키기랑 플랭크와 스쿼트를 열심히 해야 한다. 어차피 작가가 되는 길에 왕도는 없고, 글쓰기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건데, 코어 근육이 없으면 통증 속에서 이 일을 하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10대들에게 스쿼트, 푸시업, 플랭크, 윗몸일으키기, 데드리프트 5종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이것만 하면 출발할 수 있다고. 작가의 자질은 근육이다. 좋은 글이란 '그럼에도 살고 싶어지는' 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저서 『책으로 가는 문』에서 "어린이에게 좋은 책이란 '태어나기 잘했다'라고 느끼게 하는(p. 136)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어린이문학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삶에서 고단한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이 모든 걸 겪는 게 좋구나' 느끼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독자들이 "오늘을 살아내는 게 너무 버거웠는데 이슬아 책의 한 구절 덕에 하루를 견딜 힘을 얻었다"고 할 때마다 '살고 싶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p. 137). 지금까지 낸 책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은 2006(p. 180)년에 출간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했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어른아이'들에게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며 다독이는 책이다. 나이듦을 두려워하지 말며, 슬픔 앞에서는 굳이 어른인 척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책 제목도 스스로 정했고, 매 꼭지를 책 한 권을 쓰듯 공들여 썼다. "한 꼭지를 쓸 때마다 100여 권의 책을 읽고 관련 논문을 찾아봤어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책이자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가장 안 팔리는 책이기도 합니다."(웃음) 왜 그 주제에 천착한 걸까. 김혜남은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처음 경험한 게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삶을 뒤돌아보니 상실이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끝없이 상실을 겪어요. 결국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죠. 그 여정을 죽 따라가고 싶었어요. 이번에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만 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으로 고쳐 쓰면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p. 181)에 있는 내용을 많이 가져왔어요."(p. 182). 그의 작가 생활은 늘 몸의 고통과 함께였다. "뭐 좀 하려고 하면 (수술로) 또 헤집는" 상황이 반복됐다. 재발할 때마다 회복까지 최소 반년이 걸렸다.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담담해지더라며,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놀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병실에서 책 교정을 보는 일도 대수롭지 않아졌다. "고통이 찾아오면 수용하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몸에 익었어요.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자책하지도 않아요. 그저 차분히 관조하며 건조하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러다 보면 또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요. 그렇게 기다려요." 암과 싸우는 중에도 매년 한 권씩 썼다.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생활인으로서 오랜 기간 훈련된 자기 규(p. 211)율’ 덕분이다. 고등학생 딸을 둔 24년 차 주부이기도 한 그는 딸 등교 후부터 시작해 하교 즈음인 4시까지 '직장 생활'하듯 매일 글을 쓴다. 시간이 귀하다 보니 책상 앞에서 '예열'할 시간도 없이 그냥 쓴다. 주어진 자유로운 몇 시간에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작업하는데, 어떻게든 작가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온 셈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임경선은 힘들어도 버티며 글을 써온 건 사회적인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닫힌 공간에서의 가사 노동은 한계가 있어서 가급적 사회적인 일을 해야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작가로서 해내고 싶은 것도 역시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제가 쓰고 싶은 걸 꾸준히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독자들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걸로 충분해요. 굳이 더 욕심부리자면 젊은 독자들이 꾸준히 유입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p. 212). 특히 소설이든 에세이든 행간의 의미까지 잡아내는 독자들의 후기를 볼 때 자기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느껴 행복하다고 했다(p. 213). 그는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면서 ‘정말 재밌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어야 계속 쓸 수 있다고했다. "처음에는 업계도 의식하고 독자도 의식했지만,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남아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나’ 그것만 바라보게 됐어요. 그 외의 것은 소음 이에요." 그는 작가에게 중요한 문제는 '계속 써나갈 수 있느냐' 라며 "앞으로도 흔들리는 인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밀도 있게 써나가고 싶다"고 했다(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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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마약이 만연하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은 ‘마약청정지대’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다. 마약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유통되고 있다. 이제 마약에 대해 알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익한 책이다. 그럼 누가 주로 마약을 할까? 우리가 뉴스에서 주로 접하는 마약 사범은 연예인이나 재벌 2세다. 하지만 대검찰청 「마약류 범죄백서」(2022)를 보면 마약 사범이 대부분 무직자나 농업인임을 알 수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 8395명 가운데 무직자가 31.5%에 이른다. 회사원이 6.2%이고, 예술/연예계 종사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로 인해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약을 더 많이 한다. 가난은 만성 통증처럼 마약에 중독될 확률을 높인다. 여러 연구에서 가난과 마약 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도 마약 투약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거나 무직이다. 정규직은 30.9%에 불과하다. 마약 투약자 중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비율은 54.4%에 이른다. 게다가 지난 한 달간 수입이 50만 원 미만인 비율은 절반이 넘는 52.2%에 달한다.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p. 95)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p. 96) 우리 몸, 정확히는 뇌에서 소량의 도파민이 나온다. 섹스를 하거나. 상을 받거나, 게임에서 이기거나, 로또에 당첨되면 도파민이 증가한다. 우리 몸은 쾌락을 느끼게 되고, 도파민을 분비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나오는 정도를 중독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 용량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종 중독 하면 도파민이고, 도파민 하면 마약, 그중에서도 필로폰, 그러니까 히로뽕이다. 상자 속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파민을 초콜릿은 55%, 섹스는 100%, 니코틴은 150%, 코카인은 225%,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은 1,000% 증가시키는 것으 로 나타났다." 마약을 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올 수 없는 도파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다. 도파민이 쏟아지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쾌감을 맛본다. 많은 이들이 천국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p. 105). 안타깝지만 많은 약물중독자들이 스스로 중독을 깨닫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가 2021년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의료기관과 재활기관에서 마약 치료를 받거나 심지어 법으로 치료 보호를 받는 사람조차도 10명 중 3명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최근 1년간 특수 시설에서 치료를 받지 않은 12세 이상의 물질 사용 장애 환자 중 975%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1.9%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노력하지 않았고, 0.5%만이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의 마약 사용자들 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p. 118). 약의 효과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단 증상이 심하다. 즉 코카인보다 히로뽕이, 모르핀보다 헤로인이 더 그렇다는 말이다. 업 계열인 코카인이 보통 상태에서 사람을 홍분시켜 쾌락을 느끼게 한다면, 다운 계열인 헤로인은 보통 상태에서 고통 등을 억제해 쾌락을 느끼게 한다. 코카인을 끊으면 몸이 피곤하고(그동안 계속 몸이 흥분해 있었다), 잠이 쏟아지며(그동안 잠을 안 잤다), 식욕이 폭발한다(그동안 밥도 안 먹었다). 하지만 헤로인을 끊으면 오랫동안 약이 억제한 고통과 통증이 치밀어 올라와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업 계열의 약을 하지 않으면 보통으로 돌아가지만, 다운 계열의 약을 중단하면 즉시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업 계열의 약도 앞서 말한 신경구조의 파괴로 얼마 못 가 심한 금단 증상을 일으킨다. "헤로인을 하면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하고, 헤로인을 하지 않으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주먹처럼 아프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즐거움을 위해서 하다가, 결국 아프지 않으려고 한다. 마약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안 된다. 이제 삶에서 마약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내성에 이어 금단 증상과 의존성마저 생겼다. 마약이 없으면 고통스럽다 못해 너무 아프다. 앞서 히로뽕을 하다 경찰에 온 50대 남자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에 벌레가 기어다닌다고 한 것은 전형적인 금단 증상인 '콜드 터키 cold turkey'와 '코카인 버그(p. 122) cocane bug' 또는 '메스 버그meth bug' 다. “뼈에 소름이 돋아Goose-pimple bone” 마약을 하던 비틀스The Beatles의 존 레넌이 아이를 가지기 위해 마약을 끊을 때의 고통을 노래한 〈콜드터키〉의 한 구절이다. 마약을 하지 않으면 안색이 파랗게 되고 온몸이 떨리며 소름이 끼치며 닭살이 돋는다. 이를 영어권에서는 냉동 칠면조의 피부와 같다고 해서 '폴드 터키' 라고 한다. 금단 중상을 뜻하기도 하며, 단번에 약을 끊으려는 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금단 증상은 단 순히 식은땀과 소름에 그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만 마리의 개미가 내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피부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아무리 긁어도 계속 가렵다. 코카인이나 메스암페타민으로 인한 환각 증상으로 코카인 버그 또는 메스 버그라고 한다. 온몸을 긁기에 피부가 성한 날이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긁었던 것 같다. 이렇게 흉터가 많은 것도 이번에 알았다." 재활 중독 치료를 받고 있던 사람의 증언이다. 잠을 잘 수도 없다. 눈 만 뜨고 있어도 눈앞에 뭔가가 아른거리고,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자꾸 소리를 낸다.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것 같다. 초조, 불안에 빠지고 심하면 망상에 사로잡힌다. 말 그대로 미쳐버리게 된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안 아프게 죽여달라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을 달라고 사정하게 된다(p. 123). 마약을 시작하게 되면 삶이 송두리째 추락한다. 얼마 안 가 돈이 바닥나고, 살이 빠지다 못해 근육까지 사라지고,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간다. 감옥, 치료 시설, 재발을 반복한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다. 결국 마약의 끝은 감옥, 응급실, 약물 과용으로 인한 사망, 그것도 아니면 자살이다. 마약은 저주받은 마법이다.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혹은 호기심이나 유혹 등의 이유로 시작해 잠시 천국을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이다(p. 152).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언제 금연을 결심할까? 주로 50대에 몸이 아프거나 심각한 질환에 걸렸을 때다. 그러면 마약 하는 이들은 언제 약을 끊을 결심을 할까?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조사에 따르면, 새 삶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앞으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서)이 들 때가 36.9%(복수 응답 포함)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몸이 너무 망가진 것 같아서가 29%,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서(교도소가 지겨워서)가 188%였다!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렵다. 담배는 평생 참는 것이라고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담배를 끊고 잘 지내다가도 술을 마시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p. 156) 어울리면 '딱 한 번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뇌에는 '술=담배' 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담배가 생각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마약은 담배보다 더 심하다. 욕구와 갈망이 수시로 치솟는다(이를 '똥 마렵다'고 한다). 마약의 쾌감은 워낙 강렬해 단 한 번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까지 있다. 그렇기에 약을 끊는 것이 쉽지 않다. 국내 마약류 사범의 재범률은 매년 35~40%에 달하고, 마약 사범의 재복역률은 45.8%로 범죄자 평균 재 복역률(26.6%)의 2배에 이른다. 마약 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범해지는 특성을 보인다. 그만큼 마약을 끊기가 쉽지 않다. 많은 연예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마약을 한다. 심지어 구속되고 풀려나서도 마약을 끊지 못한다(p. 157).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17세에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로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인 세코날Seconal에 중독되었다. 세코날은 당시 유행하던 대마초에 이어 자연스럽게 필로폰으로 이어졌다. 마약 하는 것을 숨기고 결혼했고, 성인 디스코 바와 룸살롱, 가라오케 등 유통 사업도 성공해 30대에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압구정 한양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전혀 없었다. 단, 딱 하나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필로폰이었다.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잘 조절하면서 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끊고 조절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약이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매일이 되었고, 어느 순간 하루에도 대여섯 차 레 필로폰을 투약했다. 사업은 사장인 자신이 없어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굴러갔다. 마약을 하다 보면 충동적이 된다. 그는 사업장 대신 도박장을 찾기 시작했다. 카지노, 경마, 경정 가리지 않고 모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들렸다. 아내 옆에 한 남성 이 보였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가 흉기를 들자 그 남성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쫓아갔지만 그 남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환청이자 환시였다. 마약으로 인한 환각 때문에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p. 162) 약을 끊길 바라는 아내가 7번, 자신이 1번, 함께 마약 하던 후배가 그의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1번, 총 9번을 신고했다. 1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00억 원의 재산은 도박과 약값으로 모두 사라졌지만, 그는 약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된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마약, 도박은 조금만 하고 나 맛있는 것 좀 사주면 안 돼?" 흘려들었던 그 말이 도박장에서 배팅하는데 떠올랐다. 도박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아내와 함께 한밤중에 중국집으로 향했다. 새우를 좋아하던 아내였지만, 돈이 없어 자장면밖에 사줄 수 없었다. 자장면을 먹던 아내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때 모델을 하던 젊은 아내 대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중년의 아내가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식들이 있었다. 더는 인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는 1999년 국립법무병원(옛 공주치료감호소)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고, 10년의 세월 동안 노력해 2009년 마지막 출소 이후 간신히 단약에 성공했다. 그는 주차 관리 요원과 대리 기사로 하루 4시간만 자고 일하며 10년간 돈을 모았다. 그리고 국립법무병원 조성남 원장님의 지원과 일본 다르크 센터장인 마쓰우라, 마사르 씨의 도움으로 2019년 4월 20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약물중독재활센터인 경기도 다르크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 DARC를 열었다. 오랜 시간 마약을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마약의 폐해와 단약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약(p. 163)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마악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기관을 직접 설립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마약중독 자에서 마약 치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마약은 사람의 삶과 가정을 망쳐놓는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삶이 바뀐다. 가정도 회복된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다. 마약, 함께 노력하면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약을 끊은 당신은 중독에 빠진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p. 164). 모든 상품은 원산지가 가장 저렴하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코카인이 가장 싼 곳은 어딜까? 코카인의 원산지인 콜롬비아다. 미국에서 120달러(15만 원)인 정제된 코카인 1g은 골롬비아에서는 2~10달 러(8000원에서 1만 3000원) 수준이다. 코카인을 포함한 마약중독이 가 장 심한 나라는 어디일까? 콜롬비아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콜롬비아가 코카인을 생산한다는 것과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콜롬비아 마약중독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콜롬비아 정부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마약을 얼마나 압수하고 몇 명을 처벌했는지 업적을 자랑하는 데만 바쁘다. 콜롬비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약으로 죽어가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최근 등장한 필라델피아 마약 거리가 특별할지 몰라도 콜롬비아에서는 오래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콜롬비아의 제3의 도시이 자 카르텔로 유명한 칼리시에는 예전부터 '헤로인 거리'가 있었고, 제2의 도시이자 마찬가지로 카르텔로 유명한 메데인에는 800개 점포에서 각종 마약을 24시간 팔고 있다. 2019년 콜롬비아에서 불법 약물을 사용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명 중 1명꼴인 9.7%에 달했다(p. 206) 하지만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콜롬비아 정부도 자국 내 마약중독자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콜롬비아에서는 마리화나 20g, 코카인 1g이하를 가지고 있으면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치료는 고사하고 약물중독자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나 통계조차 없다. 방송을 보면, 콜롬비아와 관련해서는 범죄자 아니면 부패한 경찰관과 정치인, 그것도 아니면 미녀만 나온다. 하지만 마약중독자나 마약과 관련된 폭력과 살인, 마약 카르텔 간의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콜롬비아의 보통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폭력과 살인에 시달리며 사는 것도 억울한데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로 낙인까지 찍힌다. 코카나무가 콜롬비아 농부에게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마약 산업은 콜롬비아 젊은이들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p. 207). 펜타닐의 장점인 '극소량의 강력한 효과'는 생산자에게는 복음과도 같지만 소비자에게는 저주와도 같다. 퍼듀 파마가 생산한 옥시콘틴의 경우, 약물 과용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에 포함된 양은 일정하고 불순물이 없었다. 하지만 멕시코의 여러 마약 카르텔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생산한 펜타닐은 양이나 농도가 들쭉 날쭉한 데다 각종 불순물까지 첨가되었다. 펜타닐은 치사량(2mg)도 매우 적어서 헤로인 1회 투여량의 5분의 1, 필로폰 1회 투여량의 15분의 1만 투여해도 호흡 마비로 사망에 이르렀다. 마약 중에서 펜타닐이 가장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2년 11월에 미국 마약단속국(p. 277)은 펜타닐이 들어간 가짜 처방약 10개 중 6개가 치사량의 펜타닐을 함유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3차 펜타닐 파동이다. 실제로 2021년 미국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10만 7,522명 중 무려 3분의 2가 펜타닐 사용자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2022년 18~49세 미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자살, 교통사고, 총기사고가 아닌 펜타닐 오남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마약 파동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돈에 눈이 멀어 타락한 제약회사가 1995년 미국 땅에 옥시콘틴을 퍼뜨렸다. 1996년에 시작되어 2010~2011년에 정점을 찍은 옥시콘틴의 1차 파동이었다. 옥시콘틴 공급이 줄자 옥시콘틴에 중독된 사람들이 헤로인으로 갈아탔다. 2010년에 시작해 2015~2016년에 정점을 찍은 헤로 인의 2차 파동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멕시코 카르텔은 펜타닐을 자체 생산했다. 이렇게 옥시콘틴과 헤로인에 이어 펜타닐의 3차 파동이 2013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사망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7분에 한 명씩 펜타닐로 사망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파동이 아직 정점을 지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 제약회사의 탐욕이 결국 펜타닐이라는 지옥을 불러왔다. 죽지 않아야 할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p. 278) 생산과 밀수를 하는 해외 마약상에게 한국은 '신세계'와 같다. 히로뽕 분말 1kg은 우크라이나에서 6,000달러, 미국에서 1만 달러, 홍콩에서 2만 3000달러이지만 한국에서는 8만 4,000달러이다. " 한국에서 히로뽕은 미국에서보다 8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코카인 또한 한국에서 18당 341달러(45만 원)인데 미국에서는 101달러로 한국이 3배 이상 비싸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국산 야바는 현지에서 3000원 이지만 한국에서는 3~5만 원에 거래된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처럼 한국은 전 세계에서 마약 가격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마약상 입장에서는 마약 밀수에 성공만 한다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p. 312)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마약 조직에게 한국은 경쟁이 적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블루오션이다. 호주나 유럽, 미국의 마약 시장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다. 미국 12세 이상 인구 중 1년간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17.9%(일생 동안은 45.7%)이고, 코카인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1.9%(일생 동안 142%)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마약을 경험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생 동안 그야말로 '마약'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동남아시아나 북한 등의 마약 조직이 한국에 마약을 들여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 이미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마약류 밀수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한국인과 손잡고 대규모로 마약을 밀수, 유통, 판매할 경우 국내 마약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p.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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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의사이기에 갖는 남다른 경험들
의사로서 남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사람 사는 모습은 직업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남의 직업에 대해서 읽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길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울면서 웃는 남자 오늘도 그가 왔다. 내가 이 병원에 처음 취직했을 때부터 4년 째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불치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가 아프지도 않았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했고, 키는 나보다 한 주먹 컸다. 머리는 볼륨을 주었으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딱 고정된 7:3 가르마에, 몸에 딱 맞는 남색 정장이 잘 어울렸다. 모델로는 조금 부족하지만,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멋이 차고 넘쳤다. 검은 구두 끝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강아지 코처럼 윤기가 흘렀다. "과장님, 오늘 원장님과 점심 식사 준비했습니다." 나는 다이어트한다고 점심을 안 먹은 게 2년이 넘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근처 맛집을 물색해 음식을 포장해 온다. 지난달에는 초밥, 이번에는 떡갈비란다. "아, 오늘은 집에 청소기가 고장 나서 점심시간에 수리점 가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을 했다. "선생님, 제가 대신 갔다 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런 건 제가 해야죠." "아뇨, 괜찮습니다." "점심 같이 드시고, 제가 맡겨놓고 선생님 퇴근하기 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점심은 정말 안 되겠네요." "선생님, 그런 건 부담 없이 저를 시켜주십시오.? "아닙니다. 원장님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는 다름 아닌 영원한 ‘을’인 제약회사 영업 직원, 이른바 '영맨'이다. 사람의 관계란 <기브 앤 테이크>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대가성 없는 뇌물은 없다. 내가 그에게 부탁을 하면,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의사가 영맨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여러 가 다. 청소기 수리나 자동차 정기 점검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 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을 의사 대신 가 준 영맨도 있었다. 반대로 영맨이 의사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다. 자기 회사 제품을 써 주는 것. 매출은 그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약은 두 종류가 있다. 특허를 받은 신약, 일명 '오리지널'과 20년간의 특허가 풀리자 똑같이 만들었다는 '제네릭' 말이 좋(p. 47)아 제네릭이지, 그냥 짭, 짝퉁, 카피약이다. 오랫동안 독점을 누리 던 신약의 특허가 풀리면, 시장에는 수많은 카피약이 등장한다. 2009년 강력한 진통제인 '울트라셋'의 특허가 만료되자, 국내에서 오르펜, 하이퍼셋, 트라미펜, 도라셋, 듀얼셋, 메가셋 등 무려 67개 카피약이 등장했다. 명품 구찌 가방의 정품 가격이 100만 원이라면, A급 짝퉁은 대략 10~20만 원 선이다. 하지만 정부가 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약값은 오리지널이 100원이면 카피약은 70원이다. 다른 나라도 카피약 가격을 국가가 결정하지만, 유독 한국은 카피약 가격이 비싸다. OECD 평균보다 2.2배, 가장 싼 터키에 비해서는 무려 5배가 높다. 그럼 카피약 원가는 얼마일까? 업계 비밀이지만, 판매가의 10%도 안 된다. 100원 하는 오리지널 약을 그대로 카피한 70원 짜리 약을 팔면, 60원 넘게 남는다. 공장을 세워 직접 만들기조차 귀찮으면, 다른 회사에 약 생산을 맡기고 버젓이 자기 회사 상표만 부착해서 팔아도 된다. 이를 그럴듯하게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이다. 일종의 하청이다. 속된 말로 팔기만 하면 남는 장사다. 그 결과 한국에는 현재 200개가 넘는 제약회사들이 난립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신약 하나(p. 48)없이,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오로지 카피약만 팔아 돈을 번다. 정부가 카피약 가격을 매우 높게 정해, 세금의 일종인 건강 보험료로 제약회사 배를 불려주고 있다.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법. 이익은 제약 회사가, 손해는 국민이 본다. 그럼 또 누가 이득을 볼까? 약 가격만 높으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는 제약회사가 가격을 결정하는 고위 관료를 찾아가지 않을 리 없다. 보험회사는 고위 관료에게 신약 허가를 해달라고 청탁하고, 약 가격을 높게 해달라고 뇌물을 바치기도 한다. 제약회사와 약 가격을 매기는 고위 관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약을 팔아야 하는 영맨으로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그가 팔아야 하는 제품과 성능에 가격까지 같은 약들이 수 십 개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다. 차이점이라고는 고작 제약회사 이름뿐이다. 거기다 제약 회사는 영업 직원에게 매출에 따른 성과급을 주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너에게 달려 있다. 매출이 안 나오는 건 다 네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약이 안 좋거나, 회사가 안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물건이 거기서 거기고, 가격까지 같은 상황에서, 영맨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 하나다. 약을 차별화하는 대신 약을 파는 자신을 차별화 시키기. 매주 부지런히 병원을 찾아와서 의사에게 눈도장 받고, 뭔가를 건넨다. 볼펜이나 포스트잇은 기본이고, 커피, 커(p. 49)피를 싫어하면 주스를 들고 온다. 기꺼이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려 하고, 심지어 누구는 예비군 훈련마저 대신 다녀온다. 원장님과 나, 그리고 영맨과 회식을 한 다음 날이었다. 전날 나와 원장님이 대리 기사를 불러 차를 타고 가는 걸 배웅하고 제일 늦게 퇴근한 영맨이 가장 먼저 병원에 나와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숫자가 새겨진 숙취해 소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그에게서 꼬릿한 땀과 시큼한 위산 냄새가 풍겼다. 내가 음료를 건네받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술이 덜 깬 듯 얼굴이 벌건 데다, 눈마저 붉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눈꼬리는 내려 가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은 울면서 웃고, 웃으며 울고 있었다. 속이 쓰려 눈물짓고, 처자식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으리라. 잔뜩 힘을 준 눈꼬리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p. 50). "선생님, 참 잘생기셨어요, 영화 배우 하세요" 50대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작은 키에 머리는 절반 정도 남았으며 배가 살짝 나온, 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아저씨는 나보고 잘 생겼다고 했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넌 내 아들이지만 잘 생기지는 않았다." 스무 살 무렵,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시던 어머니가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하신 말씀이셨다. 피를 흘리며 낳은 어머니마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나를 잘생겼다고 말한 사람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틀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당시 나는 본과 3학년으로 부산 근교의 중소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실습을 나가 있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Y시 정신병원은 부산 달동네에 위치한 P 대학병원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주변에 다른 건물 없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공기마저 상쾌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여러 병원 건물 속 2층에 자리 잡고서 창문마다 쇠창살이 박혀 있는 것으로(p. 172) 부족해 정문마저 두꺼운 철문으로 된 대학병원 정신 병동과는 천지 차이였다. 급성기 환자를 주로 입원시키는 대학병원과 달리, 만성 환자가 대부분인 Y시 정신 병원은 주위 환경도 병원 분위기도 평화로웠다. 실습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이었고, 정신과 레지던트 선생님은 나, 재훈이, 정수, 지혜에게 각각 환자 한 명을 배정해 주었다. 우리는 담당 환자를 관찰하고 또 면담하면서 환자에 대한 리포트를 써야 했다. 내가 맡게 된 환자는 55세 김재환 씨로, 그는 전문의 과정까지 마친 의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에 병이 생겨, 20년 넘게 정신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앓고 있는 질환은 그 당시에는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렸던 조현병이었다. 100명 중 1명에게서 나타나는 질환으로 주로 환각과 망상을 겪으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 안타깝게 그의 여동생마저도 같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 있었다. 이틀 동안 내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바로, 그는 전혀 이상한 게 없었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거나 신문을 보고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조현병은 환각, 그중에서도 환청이 주 증상이지만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허공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없었다. 가끔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p. 173). 그 말을 들은 조원들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너한테 잘 생겼다는 말을 할 정도니까, 정신병원에 있는 거야” 말하며 웃었다. 조원 중에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재훈이가 자기도 그 말이 듣고 싶었던지 “저는요? 저는 어때요?”라고 묻자, 김재환 씨는 "선생님도 잘 생기셨지만, 이 선생님이 더 나아요. 선생님, 꼭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몇 년째 병원에 있는 김재환 씨가 심심하기도 하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기분 좋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다른 조원들이 배정받은 환자들은 "나는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저 산까지 1초 만에 다녀올 수 있다." "내 머리에 누가 뭐를 심었다." 등의 말을 했기에 누가 봐도 명백한 문제가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인 수요일이 왔다. 김재환 씨에 대한 케이스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나는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초조했다. 3학년 2학기 시작한 첫 병원 실습이 정신과여서 아직 하얀 의사 가운과 목에 걸린 검은 청진기가 어색했고, 내 교육을 위해 환자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뭘 할 때마 쭈뼛(p. 174)쭈뼛했다. 하지만 이대로 ‘특이 이상 없음’이라는 리포트를 냈다가는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3일 동안 환자를 잘 관찰하지 않았다고 혼나는 건 물론, 좋은 성적도 물 건너 갈 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후 5시가 되면 버스를 타고 병원을 나서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김재환 씨를 찾아다녔다. 그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분명히 내가 옆에 있는 걸 인지했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산책을 하다가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 용기를 내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저보고 잘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그러세요?" 김재환 씨는 옆에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가 제 귀에다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켜요. 선생님, 정말 잘 생겼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말하라고요 그랬다. 그는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환청을 겪고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데, 김재환 씨만 보이는 게 있나요?" "예, 예전 여자 친구가 보여요."(p. 175) "혹시 지금도 보여요? "예. 저기요." 그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다른 남자 환자들만 있을 뿐, 여자는 없었다. 전형적인 조현병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남들은 들리지 않는 것을 혼자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김재환 씨가 고개를 돌려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p. 176). 잠이 문제가 아니었다 역세권 사거리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의원을 빼고도, 반경 50m 내에 이비인후과 3개, 내과 3개, 소아과 2개, 피부과 3개, 안과 2개 외에도 비뇨기과, 정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 산부인과가 각각 하나씩 있다. 그중에서도 치과가 무려 5개로 제일 많았고, 약국만 6개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길가에 이렇게 많은 병의원을 볼 수 있 는 곳은 한국뿐이다. 거기다 유럽처럼 예약도 필요 없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병원과 의사를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사람들은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의료 부분에서만큼은 가희 ‘조선천국’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건강의학과, 정신과 가기를 꺼리나 보다. 수면제를 받으러 정신과도 아닌 우리 병원에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선생님, 원장님이 대장 내시경 들어가셔서요, 환자분에게 말 씀드렸고 똑같은 약 처방해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를 접수했다. 63세, 김명순 님, ‘재진’ 같은 약을 그대로 처방하는 '리핏 처방'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p. 180) 인사 한 번 하고, "똑같은 약 그대로 드릴게요." 한 후 마우스 버튼 클릭하면 끝이다. 김명순 씨가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머리에 기본 화장만 하고, 립스틱을 칠하지 않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 었다. "안녕하세요? 김명순 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 네, 제가 원장님께 몇 년째 수면제를 먹고 있는데 그 약 받으러 왔어요.” 병원이 익숙한지 그녀는 긴장 없이 술술 말했다. 차트를 보니, 그녀는 수면제 일종인 졸0뎀을 3년 넘게 복용 중이었고, 내 진료는 처음이었다. 단순 고혈압이나 당뇨 환자를 생각했던 나는 약 이름을 보자 긴장이 되었다. "특별히 약 먹으면서 불편한 점 없나요?" "네, 옛날부터 쭉 먹고 왔고..... 괜찮습니다.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몇 년 전, 이 약이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한 언론에서 이 약을 '악마의 수면제'라 부르며, 이 약을 복용 중이었던 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이 약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환자에게 돌렸다. 모니터에는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국민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생전에 아름다웠던 모습이 있었다. "예전에 뉴스에 이 약을 먹던 연예인이 목숨을 끊어서 이슈(p. 181)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약 부작용으로 죽은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제 생각으로는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가 연예인이다 보니, 정신과 치료를 안 받고 수면제만 처방받아서 먹다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 3명 중에 2명은 불면증을 호소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수면제를 복용하는 분에게 물어봅니다. 혹시 우울하지 않....." "엉엉엉엉~"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명순 씨가 둑이 터진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들뻘인 의사 앞에서. 당황스러웠다.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는 그 특유의 어둡고 짙은 안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김명순 씨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이었다. "자, 어머니, 진정하시고." "제가 몇 년 동안 진료받으면서 우울하냐고 물어보신 분이 선생님이 처음이셨어요. 엉엉엉...... 어떻게든 제가 살아보려 고...... 헉 헉.....” 울음과 말이 섞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어렵게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는 그녀의 굴곡진 삶이 펼쳐졌다. 그녀는 잠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불면증으로 약을 먹을 게 아니라, 우울증을 치료가 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정신과 치료를 권했(p. 182)다.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수면제를 타러 병원에 왔다. 나는 똑같은 뉴스를 보여주며 똑같은 질문을 한다. "우울하지는 않으세요?" 대개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어떤 이는 김명순 씨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부디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좋은 꿈 꾸기를(p. 183). 82년생, 이정민 그는 나와 같은 1982년생 개띠였다. 외동아들인 그는 중고등 학교 때부터 말수가 적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게 좋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항상 혼자였다. 가끔 학교 수업 시간에 뜬금없이 갑자기 앉았다 일어나기도 하고, 멍하게 있을 때가 있어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상담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부모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민이는 20살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았고, 신경증 장애로 4급 판정이 나와 2년간 공익 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런 그가 이상해진 건,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해인 2003년부터였다. 그는 "누군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라며, 환청과 피해 망상을 호소했다. 2008년 결국 그는 조현병으로 진단되었고, 한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씻지 않는 등 이상한 행동은 지속되었다. 조현병은 정신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질환이면서도, 치료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평생 유병률은 1% 정도로, 남자는 15-25세에 주로 발생한다. 환각과 망상이 주요 증상인데, 환각(p. 196) 특히 환청이 너무나 생생하여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내 귀에 도청기가 있다" 1988년 8월 4일 목요일,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도중 한 사람이 난입해서 난동을 피운 적이 있는데, 피해 망상과 조현병을 앓는 환자로 밝혀졌다. 심한 환각을 주 증상으로 하는 조현병의 경우, 20%는 완전 회복, 15-35%는 지속적으로 심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며, 50%가 평생 입퇴원을 되풀이한다. 정민이는 운이 없었다. 완전히 회복되는 20%에 속하지 못했다. 증상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환청과 망상이 심해지면 입원을 했고 호전되면 퇴원을 했다. 2010년, 2013년, 2015년에 6개월씩 장기간 입원했을 뿐만 아니라, 짧게는 일주일간 2번을 포함하여 총 6번이나 정신병원에 들락날락했다. 그가 조현병으로 진단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 동안 2년 가까운 시간을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뚜렷한 직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민이는 자신이 길을 갈 때 처음 보는 여성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그는 빌라 2층에 살았는데, 위층 여자가 끊임없이 쿵쾅쿵쾅 발을 굴려 고통받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하지만 조사해본 결과 3층에 여자가 산 적은 없었(p. 197)다. 2016년 1월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았고, 가족과 지인이 도움 없이 혼자 살았다. 3월부터는 집을 나와 빌딩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갔다. 정민이는 그 사건이 있는 날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서빙을 하고 있다 불결하다는 이유로 주방보조로 담당이 바뀌었다. 그는 어떤 여자가 자신을 험담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뿐 아니었다. 사건 전날, 길거리 공터에서 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고, 그는 깜짝 놀라 피했지만 자신의 신발에 떨어졌다. 역시나 여자들이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괴롭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5월 16일 오후 5시 40분, 일하던 음식점에서 조퇴를 하면서 그는 주방에 있는 흉기를 챙겼다. 지하철을 타고 저 멀리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한 건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2시간 정도를 머물렀다. 그러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이동하여 오후 11시 44분, 사건이 발생한 건물로 돌아왔다. 약 50분간, 강남역 인근 주점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회를 엿보았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남성 6~7명은 그냥 보냈다. 그리고 새벽 1시 7분쯤, 김 씨는 남자 용변 칸에 앉아 대기하다가 여자가 들어오자 식당에서 들고 온 흉기로 마구 찔러 여자를 죽였다. 그가 살해한 22살의 젊은 여자는 정민이에 대해 험담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였다(p. 198) 몇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에 있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여성 혐오 범죄니, 묻지마 살인이니 말이 많았지만, 문제는 단순했다. 환청과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 조현병 환자인 이정민(가명) 씨가 치료 받지 못하고 방치된 채 지내다 피해망상이 심해져 벌인 사건. 이정민 씨가 2016년 1월 정신병원 퇴원 후에도 치료를 잘 받았다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7년 1월 12일 항소심에서 법원은 이정민 씨에게 징역 30년에 치료 감호와 20년의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명령했다. 이어진 민사 소송에서 이정민 씨에게 피해자 부모에게 5억의 배상을 하라고 판결이 났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2021년 5월 5일 남양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20대 아들이 60대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했다. 피해자와 장소만 달랐지, 같은 이유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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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이동식 목사가 책으로 전하는 “따뜻함과 쉼”
- 시산문집인 이 책의 저자 이동식 목사는 무안읍교회 담임목사이다. 《시와사람》으로 수필 등단 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무안지부 지부장, 기독교 호남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예총 무안지회 수석부회장, 전남문인협회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발간한 수필집으로는 『하늘정원으로 통하는 창문』, 『햇살이 머무는 사랑의 뜨락에서』,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 『군불 지피는 보랏빛 마음으로』가 있으며 이 책들은 전국 대형서점 및 쿠팡, 11번가, 네이버, 다음 등 기타 인터넷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본 책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는 표지에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하고 포근한 쉼터”라는 설명처럼 시든 산문이든 따뜻함과 쉼을 준다. 특히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글과 시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분류에 따른 시와 산문을 통해 각 계절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접하게 한다. 책 사이사이에 들어간 작가와 가족들이 직접 찍은 수준 높은 사진들은 책의 품격을 더 높여준다. 일독을 권한다. 종종종 종종종 참새 한 마리 마당을 뛰어 다닌다 날개를 푸덕이며 날아가도 될 터인데 마당에 한 발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오늘도 내 마음 어설픈 뜀뛰기 종종종이 되었다(p. 20). 요즘 청정농사를 지는 사람들이 늘어 농약을 안 치거나 적게 하고 금비보다 퇴비를 사용합니다. 또 오리 농법이라 해서 논 가(p. 80)운데 청둥오리를 키우며 벼농사를 짓는 환경 친화형 농사가 있습니다. 청둥오리는 기러기과로 시베리아에서 번식합니다.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에 날아와서 지내다가 돌아갑니다. 청둥오리는 날개 힘이 좋아 먼 거리를 오가는 철새입니다. 그런데 논에 농사를 위해 넣어둔 청둥오리는 날지를 않습니다. 사육장의 하늘 부분을 막아 놓지 않아 물어보니 청둥오리는 영양가 많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찌면 몸이 무거워 날지 않고 그러다가 자신들이 날아다니는 새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걱정이 없어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날았던 기억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내과 의사인 '래리 도시(Larry Dossey)'는 10명 중 8명이 시간에 쫓기는 '시간병(Time-Sickness)'에 고생한다고 합니다. 늘 시간이 달아난다는 느낌 속에 허둥대며 가속 페달을 밟듯 계속 서두르는 것입니다. 벌판 위의 벼와 보리도, 비행기 속 승객도 모두 시간에 쫓겨 살아갑니다. 오늘도 나를 통해 지나가는 일들과 사람과 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겠습니다. "Carpe Diem Memento Mori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현재를 잡아라. 죽음을 기억하라)"의 명언을 되새겨 봅니다(p. 81). 꿈속의 어머니 지난 밤 꿈속에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떠나가신 후 못 살 것 같던 젖은 마음도 무디어져 말라버리고 제법 씩씩한 척 걸어왔는데 잊고 사는 아들 군불 지펴 뎁혀주시려 사랑스런 그 마음 여전한 모습 그대로 이셨습니다 지는 낙엽 위로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아! 어머니의 품이 또 그리워집니다(p. 24). 자화상 나는 병들어 뒤틀린 굽은 나뭇가지가 좋다 바위 때문에 돌아가는 비뚤어진 길이 좋다 나는 바람에 날려 찢긴 꽃잎이 좋다 누렇게 손때 묻어 찢어진 노트가 좋다 왜냐고요 잉크냄새 나는 새 책 새 옷이 좋고 신상의 세련된 자동차 나도 새 것이 좋다(p. 34) 그러나 내 모습 닮은 애정이 가는 분신 같아서 좋다(p. 35) 여름고개 합창단 매미 합창단 구슬픈 공연이 아직도 계속 되는데 다음 출연자들의 연습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귀뚜라미 노래에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고 익어가는 알곡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었다 아직 무대 위에서는 목청 높이는 여름이 노래하고 있다(p. 122) 가을 리허설 서늘한 새벽 익숙한 길 위 오늘도 하룻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선물처럼 살며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 기대는 이슬 젖은 바람은 가을의 향기를 품었다 무대 뒤 놀란 귀뚤이 리허설 중 침 삼키며 피리 닦으며 숨 죽여 맛 뵈기, 가을의 노래를 부른다(p. 172) 익어가는 가을날의 품격(品格) 저물어 가는 가을날의 오후 햇살이 들어온 창문에 노란 은행나뭇잎이 반사되어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모처럼 휴대폰을 열어 좀 고전적인 클래식을 들어 봅니다. 세계적인 테너들이 부르는 명곡이 흘러나오며 펼쳐진 가을 하늘은 한결 고결한 모습으로 어울립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고상해진 내 모습을 누려 봅니다. 일상의 모든 사물과 현장치고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만 때론 평범하지만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품격이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에는 그에 어울리는 품격이 있습니다. 품위를 소중히 여긴 서구 사람들은 ‘품위’를 ‘dignity’라는 단어로 자존감과 위엄을 지닌 품(p. 223)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존경하던 어떤 분들이 정치에 뛰어들고 세상욕심에 치우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소중한 품격을 상실한 초라한 모습을 보며 온 사회와 지인들까지 실망하는 일을 종종 봅니다. 아집이 드러나고 천한 언어들로 채워져가는 모습에 하루아침에 그들의 품격은 낮은 가치로 추락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에는 그것에 합당한 수준인 격(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준에 맞는 기준을 정한 것을 규격(規格)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격에 맞도록 준비되면 합격(合格)이라 인정해 줍니다. 그것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것이 가격(價格)입니다. 만물과 인생에서 그 위치에 어울리는 격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에 맞는 격(格)이 있듯이 모든 만물과 인생사에도 격이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른 수준의 성품인 사람다운 인격(人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품성과 인격을 가진 인생은 품격(品格)이 드러난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실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격이 상승되어 격상(格上)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품격에 따라 대우와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중에 ‘답다’는 말은 합당하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어른의 수준에 오른 인생을 '어른답다'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사나이답다' '여성스럽다' 사람다운 삶' '신자 답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본질에 도달했다는 말이기에 칭찬이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한 것입니다(p. 224). '제임스 A. 프로우드'라는 분은 그의 저서에서 "인격은 택배처럼 어느 날 집 앞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연단하고 담금질하여 단단히 쌓인다"고 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갈고 닦아야 훌륭한 품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과 본질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다움'을 회복하여 아름다울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금은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되며 설탕은 음식을 달콤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소금과 설탕이 겉보기에 아무리 비슷해도 설탕은 설탕, 소금은 언제나 소금이기에 존귀합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에게는 품격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끌리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꽃의 향기는 십 리까지 퍼지고 인격의 향 내는 만 리까지 알려진다"고 합니다.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자연의 품격에 어울리도록 내 인생의 품격을 마음의 저울에 올려봅니다(p. 225). 꿈 속의 고향 모락모락 정겹게. 어머니가 피워 올린 환영의 손짓 고향 집 굴뚝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일은 명절날 저물어 가는 석양을 붙들고 그리운 가슴 손으로 누르고 고향집 꿈을 꾸며 마음을 달랜다(p. 232) 이동식 목사 관련 기사 링크 무안읍교회, 지구촌나눔재단 전남 무안 지부 설립 및 사랑의 쌀독 발대식 총회 역사위, 『초창기 한국교회 대사회 운동』학술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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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이동식 목사가 책으로 전하는 “따뜻함과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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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포스럽고 괴기한 그림이 하는 말
- 처음 보는 장르의 그림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그림들이다. 작가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그림이 다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작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외부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자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아마도 주변부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과 삶의 절규는 있지 않은가? 그것이 글이든, 영상으로든 혹은 그림으로든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신 상태, 예술적 충동, 창작 과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창작한 작품은 ‘예술적 천재성’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미술 치료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한 논문에 따르면 예술 창작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많은 환자가 예술적 재능과는 상관없이 예술 치료를 통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지고 도파민 수치가 높아졌다. 예술 치료가 모든 정신 질환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술 창작 작업은 내밀한 사고를 들여다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게 해주는 좋은 도구이다. 많은 정신 질환자들이 이런 작업을 간절히 원할지라도 질병에 지친 나머지 그럴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이들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정신 질환을 겪을 수 있고 정신 건강 문제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정신적 고통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이런 측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온전히 인간적인 이 경험에 감수성과 공감, 미묘한 뉘앙스를 덧입혔다. 이들 예술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캔버스 위 에 물감으로, 진흙으로 빚어낸 조각으로, 카메라 렌즈를 통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보기 힘들고 부담스러워 차라리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도전적인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같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어둠을 더 잘 이해하고 스스로의 어둠도 역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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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포스럽고 괴기한 그림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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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직 인기 소설가의 자기 고백
- 나는 아직 이 작가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명 작가이다. 이제라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수많은 직업 중 소설가는 창작의 수고와 고통이 있을 것 같다. 이 한 사람의 고통의 결과물을 우리는 책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 모든 작가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비록 우리가 전업 소설가는 아닐지라도 메일이든 문자든 카톡이든 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한다. 글이란 무엇인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7년, 서른셋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편집자 시절 소설 독자들을 사로잡겠다던 목표는 이후 세 편의 부진을 거친 뒤 2021년, 다섯 번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이루게 되었다. 1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비전을 가지고 전업에 뛰어들었고, 무명의 시간을 견뎌 소설가가 되었고, 마침내 독자들의 사랑을(p. 16) 얻었다.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로 담금질되었고 소설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하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지속되어야 하며, 납득할 만한 결말을 제공해야 한다. 대중 상업 소설을 지향하기에 문학성보다는 가독성을 추구한다. 소설이라는 이야기 속 가상 세계에 독자들을 한껏 빠져들게 한 뒤,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며 자신만의 질문을 품게 하려 애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탐구하고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믿기에, 내 소설이 독자들의 삶을 살피는 계기가 되고 ‘인생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 하면서, 쓴다(p. 17). 소설 쓰기는 한 번 배우면 절대 까먹지 않는 자전거 타기와는 달랐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소설이었고 그래서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거기에 맞는 나만의 작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바, 결국 작법은 스스로 만든 기술이고 그 기술을 만드는 능력은 일상의 반복된 작업 패턴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루틴’ 그 루틴을 발휘할 수 있는 고정 공간 ‘작업실’. 그 작업실에서 쓸 글감을 떠올리는 '산책' 그리고 집필 활동의 근육이 되는 '독서' 이 네 가지 요소가 소설 쓰기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계속 나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소설 쓰기도 결국 글쓰기였고, 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한 탐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가. 작가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체화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쓰며 배우고 써서 완성한다. 그리고 그 시간, 삶을 버티며 인생을 추스르며 보낸 나의 시간이 세상에 대해 쓸거리를 만들어 줬다. 이른바 글감. 시간이 만들어준 글감을 정리하는 건 글쓰기의 몫이었고 나는 그 몫을 꾸준히 수행한 자에 불과했다. 이 책은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 당신의 삶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p. 20). 독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아니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글쓰기와 독서와의 상관관계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작가 지망생이 독서에 게으른 경우를 본다. 그럴 때 나는 이 렇게 말한다. "가수가 되고 싶은데 노래를 안 들으시는군요." 독서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글쓰기의 핵심 요소다. 독서는 그냥 작가가 밥 먹는 거라고 보면 된다. 또한 독서는 글 쓰기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배움을 지속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독서 만능주의자 같은 발언을 하는 이유는, 독서 붐이 일어나 내 책이 더 팔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독서인구가 늘어 도서관이 많아지길 바라서도 아니다. 독서가 글쓰기의 기본이고 뼈대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책 읽기 없이 글을 쓴다는 건 뭐랄까, 근육이 안 만들어진 씨름선수라고 할까? 상대를 넘길 기술도 근육에서 올라오는 근력 없이는 불가능하듯, 독서 없이는 글 쓰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p. 43). "그런데 나는 소설 말고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을 쓸 겁니다. 이런 경우엔 독서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게 낫지 않나요?"라는 질문도 받곤 한다. 답하자면,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봐야 한다.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 역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 (장면)를 상상하게 만드는 텍스트(글)를 쓰는 게 대본 작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바로 독서가 아닌가? 글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는 게 소설 읽기의 과정이다. 애초에 대본을 그림 콘티로 그린다거나 혹은 머릿속 상상을 특수 장치로 출력해 구현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글을 써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다. 텍스트 해석력, 텍스트 표현력. 이 모든 것이 독서에서 시작된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수많은 효용 중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디테일을 정리해보았다. 독서는 겸손과 투지의 원동력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겸손해진다. 마치 성전에 들어선 것 처럼. 목차만 훑어봐도 경외감이 드는 책들을 마주한다. 고전. 걸작. 숨은 역작. 좋아하는 작가의 책. 어딘가 부족하지만 매력 있는 책.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생애를 짜내 기록한 이야기. 나는 그것들을 살피며 글쓰기의 겸양을 배운다. 한편으로 투지를 채운다. 더 열심히 써야겠다. 뒤지지 않는 책을 내기 위해 투지로 써야 하겠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이곳에 진열되는 것만으로 망신일 테니. 독하게 써 부끄럽지 않아야겠(p. 44)다는 다짐이 마구 솟아오른다. 독서는 자신감의 원천 한편으로 독서를 많이 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아니 이런 책도 출간이 됐단 말이야?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네’라는 의욕이 솟아오른다.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도서관 혹은 서점에 가보시라. 한 시간 정도 이 책 저 책 들춰보다보면 자신감이 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취재 인터넷 시대에 데뷔한 나는 일정 부분 검색을 통해 취재를 한다. 검색은 편하고, 실용적이며, 절대 쉽게 알 수 없는 사실도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알려주니까. 하지만 때론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며,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정보가 무분별하게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보를 깊이 파고들어 가고자 할 때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것들은 겉핥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런 말을 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인터넷에는 과다한 정보와 부적절한 정보 가 널려 있기에 취사선택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인터넷을 통한 취재는 ‘사려 깊은 검색’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려 깊은 검색을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 바로 책이다. 그러므로 책을 통해 관련 취재를 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실용적이고 또 세밀하게 정보에 파고들 수 있는 길이다(p. 45). 가령 당신이 경찰과 의사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인터넷 검색은 기초적인 조사를 도와줄 따름이다. 직접 만나 취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경찰과 의사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런데 경찰이 쓴 책, 의사가 쓴 책을 읽으면 의미 있는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 대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글로 정리된 직업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저자의 생각과 정보가 내밀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쓰려는 글의 정보를 책에서 찾기 바란다. 독서는 문장 강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다양한 문장과 문체를 접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문장과 문체를 배울 수 있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의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적 용할 수 있게 된다. 독서는 단어 수집 독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건 기본이고, 단어를 수집하는 건 보너스다. 소설을 완성하는 게 집을 짓는 것이라면 단어는 벽돌과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 자재가 많을수록 집은 단단하고 아 름답게 지어질 것이다(p. 46). 독서는 공감 독서는 책을 쓴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엿보고 따라가 보는 행위다. 자연스레 공감을 하고 그로 인해 공감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그 공감능력이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을 공감 가는 인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독서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 무엇보다 소설 읽기는 다른 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해준다. 지금 내 현실이 힘들고 내가 쓰는 이야기가 안 풀려도 이미 완성된 이야기 하나를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소설을 읽는다. 다른 세계에 잠시 머무르며 현실을 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흐뭇한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2013년 여름, 4호선 지하철 맞은편 좌석에서 《망원동 브라더스》를 읽는 독자를 목격한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하마터면 다가가 인사하고 이 책을 어떻게 고르셨냐고 물어볼 뻔 했다. 다행히 꾹 참고 그분의 독서를 훔쳐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책을 읽는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나는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독서의 효용을 하나 더 추가하겠다. 독서는 작가를 기쁘게 한다(p. 47). 소설의 가격 솔직해지자. 여러분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소설을 팔기 위해 서다. 팔린다는 것은 많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는 것, 이것이 소설 쓰기의 핵심이다. 그런데 가격을 모르고 이야기를 쓴다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가격이란 책의 바코드 옆에 적힌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비용이기도 하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처음엔 가늠이 안 되겠지만 어떻게라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간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감사하게도 우리는 소설 쓰는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 당신이 공인된 작가라면 출판사로부터 선인세 혹은 계약금을 받아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시간을 사서 소설을 써야 한다. 이 시간을 사는 것에 대해 당신은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핵심은, 손해를 보더라도 얼마의 가격이 들었는지 알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이다(물론 독자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격이다(p. 67). 마지막으로 묘한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하겠다. 전업작가가 된(p. 122)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나는 그동안의 작업이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생계를 위한 잡문을 쓰며 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걸 후회하던 참이었다. 우연히 옛 출판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 2차에서 한 사람을 마주했다. 그는 출판계에서도 한참 선배인 듯했는데 (자세히 기억 하지 못하는 건 그때가 초면이었고, 이후로도 그를 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이름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에게 나를 ‘출판사 잘 다니다 때려치고 작가 되겠다고 고생하는 친구’라고 소개 했다. 그때 그는 나를 가만히 살피곤 한마디 했다. "당신은 잘될 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난감했다. 이 뜬금없는 덕담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초면인 당신이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당신이 날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쉽게 하지? 신기가 있나? 덕담 남발자인가? 그렇다고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니기에 그도 나도 주변도 그냥 흘려 넘겼다. 술자리 잡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글쓰기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름 모를 그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잘 될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그때 그 말은 어느새 내게 창작의 심해에서 버틸 수 있는 산소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좋은 작품을 쓸 거야. 그 사람이 그랬잖아. 그 사람이 누군지 뭐가 중요해. 근거 따위 뭐가 중요해.'(p. 123) 그러므로 부적이든 주문이든 토템이든 당신의 글쓰기를 도움 어떤 것이라도 기억하라. 수집하라. 옆에 두고 계속 음미하기 바란다(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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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직 인기 소설가의 자기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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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작가가 말하는 글쓰는 방법들
- 이 땅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이 책들을 쓰는 작가들도 많다. 때로 베스트셀러가 돼서 큰돈을 버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더더군다나 요즘에는 책들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양한 책들을 출간해 주니 감사하다. 이 책을 읽으며 읽어야 할 책들을 발견해서 너무나 기쁘다. 작가들이 숨 쉬며 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자. 수학 연구와 대중적인 글쓰기 가운데 어느 게 더 어렵냐는 질문에 그는 "새로운 수학을 창출하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연구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딱 나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영역이 서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강연하러 가서 이야기를 나 누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연구로 연결하는 식이다. "논문이든 대중서든, 말하자면 모든 게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는 과정"이라며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비슷한 활동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정리한다. 여러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마감에 쫓기며 글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그도 글이 풀리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마감이 다가오는데 글이 선뜻 안 써질 땐 우선 아무렇게나 쓰고, 고치고, 다듬는다(p. 28). "문장도 신경 쓰지 않고 앞뒤가 맞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른 걸 막 씁니다. 그리고 여러 번 다듬죠. 이후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에게 비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김민형은 왜 일반인이 수학에 관심을 갖는 데 목소리를 내게 됐을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현대 생활에서 수학이 쓰이지 않는 곳이 드문 까닭이고, 그만큼 수학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l), 경제 지표, 지금 쓰고 있는 화상 통화 등 오늘날 모든 발전이 고등수학 없이는 불가능해요. 수학을 모르면 막연한 두려움이 커지는 시대죠. 하지만 이해하고 나면 생각보다 변화가 무섭지 않아요. 수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죠. 제 두 아들이 어렸을 때도 이런 이야기 를 하곤 했죠." 그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며 수학을 외면할 수도 있지만, 수학적인 이해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점점 차이가 커질 거라고 지적했다. 세상의 현상을 이해할수록 행동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에 수학을 아(p. 29)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문에 나온 극적인 통계도 정확히 파악하고 나면 두려운 것이 아닐 때가 많아요. 제대로 이해하면 무섭지 않은 상황이 많은 거죠." 코로나 사태도 수학의 역할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였다. 그는 코로나 극복에 수학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감염 확산 예측을 위한 수학적 모델링과 통계 분석,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수학의 역할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수준까지 수학을 이해해야 할까. 수학에 관한 대중서를 집필할 때 김민형의 원칙은 독자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에게 적당히 이해한다는 느낌만 안겨주는 가벼운 책은 지양 한다. "누구든 단번에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한 번 읽고, 다시 돌아와서 보고, 나중에 또 보고, 그러면서 이해가 이뤄집니다. 대중을 위한 책도 그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p. 30)정을 반영해야 한다고 봐요." 그는 오만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대중 과학서나 수학서가 별로 없다고 토로했다. 술술 읽히게, 적당히 이해하는 정도로만 쓰다 보니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타협점을 찾는 게 어렵지만, 독자가 단번에 이해하기보다 여러 번 읽으면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도록 쓰는 게 자신의 원칙이라고 밝혔다. 그의 대표작 『수학이 필요한 순간』 역시 빠르게 넘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이해하고 싶다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이 책에 도전했다. 그는 "수학을 향한 관심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는 건 고맙고, 그저 놀랍고, 감동적"이라며 수학책이 이 정도 관심을 받은 건 그만큼 우리나라 독자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마음에 드는 통계나 정보일수록 틀린 것이 없는지 추궁해보라"는 강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굉장히 흔한 유혹 중 하나가 자기 마음에 드는 통계는 금방 받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통계는 비판적으로 보는 겁니다. 하지만 통계의 질도 여러 가지라 부정확할 수(p. 31) 있어요. 찾아보면 반대의 통계도 많고요. 그러나 대부분 자기 마음과 잘 맞는 것은 스스로 추궁하지 않죠. 그건 ‘고장 난 기계’가 되는 길입니다." 세상에 극적인 데이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숫자로 인한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그는 강조한다(p. 32).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김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래서 답도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의무감으로 쓰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상황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게 의무인 것 같아요. 나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생각이 필요한 사람이나, 읽고 쓸 만한 상황이 아닌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 의무다." 대답을 마친 그는 명랑한 표정으로 "거창하죠? 한 번 거창하게 말해봤어요. 다른 답으로 바꿀까요?" 하더니 활짝 웃었다(p. 45). 서은국이 전하는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행복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속설과는 정반대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 뇌가 주는 보상이 '행복감'이다. 낭만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진화론적 설명이다. 가령 강아지에게 ‘손 줘’를 훈련할 때 보상으로 주는 '간식' 같은 역할이 행복이라는 것.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고쳐먹는 것으로는 안 되고, 간식'(즐거움)을 주는 '행동'과 경험'을 찾아 자주 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때 행복감이라는 뇌의 보상이 극대화된다. "사람들과의 교감과 그들로부터의 긍정적인 반응이 생존과 번식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자원이에요. 누군가 나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할 때 행복이라는 뇌의 신호가 미치도록 켜지죠.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눈을 감고 명상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p. 62). 그는 사람과 교류하기를 즐기는 외향적인 사람, 안정을 지향하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데 유리하다는 것은 수많은 연구의 누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열기가 들어오는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긍정적 사고’만으로 더위로 인한 불쾌감을 행복감으로 바꿔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짧은 시간 성공할 수는 있어도 지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감사 일기’나 '마음 비우기'만으로 행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불편한 환경은 바꾸고,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행동을 자주 하는 것, 이것만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그는 일부 자기계발서나 소셜미디어에서 소개하는 ‘행복 지침’이 진리로 여겨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마음과 태도를 바꿔라’ 같은 지침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연구자 입장에서 행복감은 그렇게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만약 상황과 무관하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 감정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감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p. 63)않는 거예요." 그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주장은 감정이 감당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감정은 상황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을 때 우울함도 느끼고 두려움도 느껴야 이를 깨닫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된 요인은 우주의 별만큼 많지만, 관련성이 너무나도 미약한 요소를 행복해지는 ‘결정타’인양 이야기한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느냐"며 『행복의 기원』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p. 64). 하지만 그가 보는 한국 사회의 행복 온도는 걱정될 정도다. 요즘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가는 길”에 비유했다. 일상 속 "잦은 불쾌가 누적돼 곪아 터지는" 상태, 모두 '자기 권리'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업 종료시간이 다가오는 뷔페의 아이스크림 코너에 초콜릿 맛 두 개와 바닐라 맛 한 개가 남아 있고, 내 뒤에 한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어떤 맛을 택할까. 그가 참여한 최근 연구에서 초콜릿 맛을 골라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는 배려를 하는 사람 숫자는 한국이 거의 꼴찌였다. "논문을 보면 행복하지 않은 문화권이나 사회에 몇 가지 특성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런 점에서 거의 상위권에 자리해요. 과도하게 강한 집단주의적 생각과 수직적인 문화가 그렇죠.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어서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에너지를 투여하면 타인을 배려할 에너지가 남지 않아요. 수많은 사회 구성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예의 없고 불쾌한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참아내(p. 65)야 하는 사회는 행복감이 높을 수 없어요." 그는 "행복해지려면 서로 조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 집단, 내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계단에서,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서로 행복 신호를 켜는 작은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반사되는 빛으로 가장 행복해지거든요."(p. 66). '난처한' 시리즈는 총 열 권으로 기획되었다. 2024년에 나온 8권 '바로크 미술'에 이어, 2025년까지 9권 ‘귀족과 미술’, 10권 ‘시민과 미술’을 쓸 계획이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 책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텐데 왜 계속 쓰는지, 그 동력이 궁금했다. 그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만 알고 있는 게 아깝지 않나? 미술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누리면 좋겠다"고 답했다. "미술은 본디 특정 집단의 소유물, 엘리트 집단의 언어였어요. 유럽에서는 미술품에 대한 태도로 상류층과 대중을 구분할 정도니까요. 대중이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당황할 때가 있어요. 환상이 크다 보니 미술품을 신비화하게 되고, 결국 백안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추상미술의 경우 난해한데 고가에 팔린다는 데 대한 분노도 크고요. 비자금, 탈세 등 미술에 덧씌워진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보면 미술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미술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세계인데 말이에요. 대중이 그 세계로 들어가려면 알파벳 같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미술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싶어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p. 78)가져다주었다면, 저는 미술이 불처럼 우리 삶에 필수 불가결한 세계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p. 79). 장강명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사회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 추측하기 쉽다. 실제로 그렇다. "제가 굉장히 의심이 많아요. 신도 믿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글을 쓰거나 사회를 바라보거나 삶을 살면서 몇 가지 원칙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은 존엄하다, 현실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장강명은 작품 창작 못지않게 사회적 활동에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저작권자가 출판사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책 판매량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출판계 관행을 공론화했다. 소설 『당선, 합격, 계급』을 비롯해 각종 매체 에서 독서 생태계 붕괴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아내와 독서 모임 플랫폼 '그믐'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 모임과 출판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된 문제를 해소하고, 모임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소설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무료 서평집 『한국 소설(p. 86)이 좋아서』를 만들어 온라인 서점에 무료 배포했고, 동료 작가들과 ‘월급사실주의’ 동인도 만들었다. 몸 하나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기자 출신 작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호칭을 넘어 스스로에게 '리얼리스트'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p. 87). 정재찬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성공을 거두면서 50대에 처음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내면에 쓰고 싶은 열정이 넘쳐야 하는데, 자신은 책무에 떠밀려서 쓰는 사람이라 작가라는 호칭이 여전히 낯설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학 내 보직을 겸하면서도 2~3년에 한 권씩 부지런히 썼다. 정재찬의 책은 한 편의 강의처럼 독자를 이해시키고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는 그 비결로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을 아주 많이 읽는다고 했다. 쓰고 있는 글이 술술 읽히는지 반복적으로 확인한다고 했다(p. 95). "저는 대충 거칠게 써놓고 다듬는 '조각가 스타일'이 아니에요. 나무에서 숲으로, 숲에서 나무로 계속 심고 뽑고 자르고 옮기는 스타일이죠. 한 줄을 쓰면 그 앞부터 다시 읽고, 한 단락을 쓰면 몇 단락 앞부터 다시 읽고, 만족할 때까지 되먹임을 거듭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죠. 제 책이 강의를 옮겨놓은 듯해서 수월하게 쓰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수월하게 읽히도록 쓰는 과정은 전혀 수월하지 않답니다." 이렇게 반복해 읽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글의 '리듬'이다. "리듬은 ‘의미의 리듬’일 수도 있고 ‘형식의 리듬’일 수도 있어요. 일종의 감각이죠. '글을 잘 쓰려면 모든 문장을 짧게 쓰라'라는 식의 말을 싫어해요. 짧은 문장도 있고긴 문장도 들어가면서 리듬이 생기는 거죠. 그런 균형 감각이 없으면 좋은 글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용이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통속적이거나, 형식이 너무 멋을 부리거나 너무 단순하면 훌륭한 독자들도 몇 페이지 이상 넘어갈 수가 없어요."(p. 96). 그는 작가는 자기 글의 첫 번째 독자이므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많이 읽어 독자로서 좋은 안목을 갖추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잖아요. 독자로서 안목이 후지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요. 물론 글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보장되진 않지만,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 거예요." 그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무도 읽어주지 않은 초라한 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는 일이라며, 그렇기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스스로 격려하고 비판하며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독자들에게 ‘시 배달부’ 역할을 해온 정재찬은 책을 내며 ‘문학’과 '문학교육' 사이의 경계선을 고민한다. 순수문학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책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p. 97). 『불편한 편의점』 출간 직전인 2020년에 펴낸 에세이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두고 그는 20년 동안의 '작가로서의 생존기'라고 말했다. 이 책 역시 2019년부터 출간할 출판사를 찾았는데, 일곱 곳에서 거절당하고 여덟 번째 출판사에서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를 지난한 참호전에 비유한다. '고립'은 그의 글 쓰기 제1원칙.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더군요. 초고를 쓰는 서너 달 동안은 지방에 작업실을 구해 작업해요. 아내와도 2주에 한 번 만날 정(p. 108)도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죠." 작업실에서는 주로 브릿팝과 록으로 구성된 ‘노동요’를 들으며 글을 써내려간다. 소설을 쓰는 상상력도 고립에서 나온다. 배경 취재와 캐릭터 설정은 참호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끝내놓는다. "『불편한 편의점』은 다양한 접객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과 편의점 취재 내용을 조합해 만든 이야기예요. 상상력으로 취재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죠." 김호연의 '참호전' 루틴은 이렇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걸어서 작업실로 출근하며 그날의 집필 내용을 정리한다. 작업실에 도착한 뒤엔 평범한 직장인처럼 이메일을 확인하고 웹 서핑을 하는 데 한 시간 정도를 쓴다. 그다음은 ‘오늘의 노동요’를 세팅하는 시간. 플레이리스트 선정까지 완료되면 본격적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한 시간쯤 글을 쓰면 커피를 마시며 독서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휴식을 취한다. 정오 무렵엔 글쓰기의 필살기'인 산책이 필수. 그는 산(p. 109)책에서 글쓰기의 길을 찾는다고 했다. 제주의 중산간 길에서 『연적』의 클라이맥스가, 대전의 갑천 산책로에서 『파우스터』의 반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뒤엔 분량과 내용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글쓰기를 반복한다. 배부른 느낌이 작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침과 점심은 먹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일상이다(p. 110). 베르베르의 고민은 세간의 비판이 아닌 작가라는 직업의 본질로 향한다. 그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작품 활동 30년이 넘은 작가의 지나친 겸손은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신간을 낼 때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이 안 서요. 독자들을 만나 사인하고, 해외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저의 글에 대한 타인의 감상을 실감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떠올림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그 힘으로 날마다 꾸준히 글을 써나 갑니다." 그는 오직 펜을 잡고 상상의 세계를 뻗어나가는 지금이 멈추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제게 책을 매년 한 권씩 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어요. 어디까지나 제 선택이죠. 저는 뇌의 생산성을 늘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 기능을 상실할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뇌가 기능하는 한 그 잠재력을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요. 삶(p. 121)의 끝에 다다라 결국 충분히 많은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p. 122). 이슬아가 말하는 '글쓰기란' 밤새워서 쓰는 글은 좋지 않다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는 행운 속에서 살아가는 게 좋으면서도 무섭다. 마감이 반복되면 글은 자연스레 느는 것이 아닌가. 마감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관성을 믿는 편이다. 보통 청소와 운동을 한 다음 늦은 오후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밤새우지 않는다. 새벽에 쓰는 글이 별로 좋지 않고, 밤을 새운 여파가 다음 날까지 이어지더라. 작가가 되려면 푸시업을 열심히 윗몸일으키기랑 플랭크와 스쿼트를 열심히 해야 한다. 어차피 작가가 되는 길에 왕도는 없고, 글쓰기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건데, 코어 근육이 없으면 통증 속에서 이 일을 하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10대들에게 스쿼트, 푸시업, 플랭크, 윗몸일으키기, 데드리프트 5종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이것만 하면 출발할 수 있다고. 작가의 자질은 근육이다. 좋은 글이란 '그럼에도 살고 싶어지는' 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저서 『책으로 가는 문』에서 "어린이에게 좋은 책이란 '태어나기 잘했다'라고 느끼게 하는(p. 136)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어린이문학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삶에서 고단한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이 모든 걸 겪는 게 좋구나' 느끼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독자들이 "오늘을 살아내는 게 너무 버거웠는데 이슬아 책의 한 구절 덕에 하루를 견딜 힘을 얻었다"고 할 때마다 '살고 싶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p. 137). 지금까지 낸 책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은 2006(p. 180)년에 출간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했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어른아이'들에게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며 다독이는 책이다. 나이듦을 두려워하지 말며, 슬픔 앞에서는 굳이 어른인 척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책 제목도 스스로 정했고, 매 꼭지를 책 한 권을 쓰듯 공들여 썼다. "한 꼭지를 쓸 때마다 100여 권의 책을 읽고 관련 논문을 찾아봤어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책이자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가장 안 팔리는 책이기도 합니다."(웃음) 왜 그 주제에 천착한 걸까. 김혜남은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처음 경험한 게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삶을 뒤돌아보니 상실이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끝없이 상실을 겪어요. 결국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죠. 그 여정을 죽 따라가고 싶었어요. 이번에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만 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으로 고쳐 쓰면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p. 181)에 있는 내용을 많이 가져왔어요."(p. 182). 그의 작가 생활은 늘 몸의 고통과 함께였다. "뭐 좀 하려고 하면 (수술로) 또 헤집는" 상황이 반복됐다. 재발할 때마다 회복까지 최소 반년이 걸렸다.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담담해지더라며,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놀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병실에서 책 교정을 보는 일도 대수롭지 않아졌다. "고통이 찾아오면 수용하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몸에 익었어요.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자책하지도 않아요. 그저 차분히 관조하며 건조하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러다 보면 또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요. 그렇게 기다려요." 암과 싸우는 중에도 매년 한 권씩 썼다.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생활인으로서 오랜 기간 훈련된 자기 규(p. 211)율’ 덕분이다. 고등학생 딸을 둔 24년 차 주부이기도 한 그는 딸 등교 후부터 시작해 하교 즈음인 4시까지 '직장 생활'하듯 매일 글을 쓴다. 시간이 귀하다 보니 책상 앞에서 '예열'할 시간도 없이 그냥 쓴다. 주어진 자유로운 몇 시간에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작업하는데, 어떻게든 작가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온 셈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임경선은 힘들어도 버티며 글을 써온 건 사회적인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닫힌 공간에서의 가사 노동은 한계가 있어서 가급적 사회적인 일을 해야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작가로서 해내고 싶은 것도 역시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제가 쓰고 싶은 걸 꾸준히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독자들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걸로 충분해요. 굳이 더 욕심부리자면 젊은 독자들이 꾸준히 유입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p. 212). 특히 소설이든 에세이든 행간의 의미까지 잡아내는 독자들의 후기를 볼 때 자기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느껴 행복하다고 했다(p. 213). 그는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면서 ‘정말 재밌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어야 계속 쓸 수 있다고했다. "처음에는 업계도 의식하고 독자도 의식했지만,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남아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나’ 그것만 바라보게 됐어요. 그 외의 것은 소음 이에요." 그는 작가에게 중요한 문제는 '계속 써나갈 수 있느냐' 라며 "앞으로도 흔들리는 인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밀도 있게 써나가고 싶다"고 했다(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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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마약이 만연하고 있다
- 한때 대한민국은 ‘마약청정지대’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다. 마약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유통되고 있다. 이제 마약에 대해 알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익한 책이다. 그럼 누가 주로 마약을 할까? 우리가 뉴스에서 주로 접하는 마약 사범은 연예인이나 재벌 2세다. 하지만 대검찰청 「마약류 범죄백서」(2022)를 보면 마약 사범이 대부분 무직자나 농업인임을 알 수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 8395명 가운데 무직자가 31.5%에 이른다. 회사원이 6.2%이고, 예술/연예계 종사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로 인해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약을 더 많이 한다. 가난은 만성 통증처럼 마약에 중독될 확률을 높인다. 여러 연구에서 가난과 마약 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도 마약 투약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거나 무직이다. 정규직은 30.9%에 불과하다. 마약 투약자 중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비율은 54.4%에 이른다. 게다가 지난 한 달간 수입이 50만 원 미만인 비율은 절반이 넘는 52.2%에 달한다.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p. 95)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p. 96) 우리 몸, 정확히는 뇌에서 소량의 도파민이 나온다. 섹스를 하거나. 상을 받거나, 게임에서 이기거나, 로또에 당첨되면 도파민이 증가한다. 우리 몸은 쾌락을 느끼게 되고, 도파민을 분비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나오는 정도를 중독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 용량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종 중독 하면 도파민이고, 도파민 하면 마약, 그중에서도 필로폰, 그러니까 히로뽕이다. 상자 속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파민을 초콜릿은 55%, 섹스는 100%, 니코틴은 150%, 코카인은 225%,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은 1,000% 증가시키는 것으 로 나타났다." 마약을 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올 수 없는 도파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다. 도파민이 쏟아지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쾌감을 맛본다. 많은 이들이 천국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p. 105). 안타깝지만 많은 약물중독자들이 스스로 중독을 깨닫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가 2021년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의료기관과 재활기관에서 마약 치료를 받거나 심지어 법으로 치료 보호를 받는 사람조차도 10명 중 3명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최근 1년간 특수 시설에서 치료를 받지 않은 12세 이상의 물질 사용 장애 환자 중 975%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1.9%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노력하지 않았고, 0.5%만이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의 마약 사용자들 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p. 118). 약의 효과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단 증상이 심하다. 즉 코카인보다 히로뽕이, 모르핀보다 헤로인이 더 그렇다는 말이다. 업 계열인 코카인이 보통 상태에서 사람을 홍분시켜 쾌락을 느끼게 한다면, 다운 계열인 헤로인은 보통 상태에서 고통 등을 억제해 쾌락을 느끼게 한다. 코카인을 끊으면 몸이 피곤하고(그동안 계속 몸이 흥분해 있었다), 잠이 쏟아지며(그동안 잠을 안 잤다), 식욕이 폭발한다(그동안 밥도 안 먹었다). 하지만 헤로인을 끊으면 오랫동안 약이 억제한 고통과 통증이 치밀어 올라와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업 계열의 약을 하지 않으면 보통으로 돌아가지만, 다운 계열의 약을 중단하면 즉시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업 계열의 약도 앞서 말한 신경구조의 파괴로 얼마 못 가 심한 금단 증상을 일으킨다. "헤로인을 하면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하고, 헤로인을 하지 않으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주먹처럼 아프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즐거움을 위해서 하다가, 결국 아프지 않으려고 한다. 마약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안 된다. 이제 삶에서 마약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내성에 이어 금단 증상과 의존성마저 생겼다. 마약이 없으면 고통스럽다 못해 너무 아프다. 앞서 히로뽕을 하다 경찰에 온 50대 남자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에 벌레가 기어다닌다고 한 것은 전형적인 금단 증상인 '콜드 터키 cold turkey'와 '코카인 버그(p. 122) cocane bug' 또는 '메스 버그meth bug' 다. “뼈에 소름이 돋아Goose-pimple bone” 마약을 하던 비틀스The Beatles의 존 레넌이 아이를 가지기 위해 마약을 끊을 때의 고통을 노래한 〈콜드터키〉의 한 구절이다. 마약을 하지 않으면 안색이 파랗게 되고 온몸이 떨리며 소름이 끼치며 닭살이 돋는다. 이를 영어권에서는 냉동 칠면조의 피부와 같다고 해서 '폴드 터키' 라고 한다. 금단 중상을 뜻하기도 하며, 단번에 약을 끊으려는 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금단 증상은 단 순히 식은땀과 소름에 그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만 마리의 개미가 내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피부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아무리 긁어도 계속 가렵다. 코카인이나 메스암페타민으로 인한 환각 증상으로 코카인 버그 또는 메스 버그라고 한다. 온몸을 긁기에 피부가 성한 날이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긁었던 것 같다. 이렇게 흉터가 많은 것도 이번에 알았다." 재활 중독 치료를 받고 있던 사람의 증언이다. 잠을 잘 수도 없다. 눈 만 뜨고 있어도 눈앞에 뭔가가 아른거리고,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자꾸 소리를 낸다.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것 같다. 초조, 불안에 빠지고 심하면 망상에 사로잡힌다. 말 그대로 미쳐버리게 된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안 아프게 죽여달라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을 달라고 사정하게 된다(p. 123). 마약을 시작하게 되면 삶이 송두리째 추락한다. 얼마 안 가 돈이 바닥나고, 살이 빠지다 못해 근육까지 사라지고,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간다. 감옥, 치료 시설, 재발을 반복한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다. 결국 마약의 끝은 감옥, 응급실, 약물 과용으로 인한 사망, 그것도 아니면 자살이다. 마약은 저주받은 마법이다.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혹은 호기심이나 유혹 등의 이유로 시작해 잠시 천국을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이다(p. 152).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언제 금연을 결심할까? 주로 50대에 몸이 아프거나 심각한 질환에 걸렸을 때다. 그러면 마약 하는 이들은 언제 약을 끊을 결심을 할까?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조사에 따르면, 새 삶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앞으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서)이 들 때가 36.9%(복수 응답 포함)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몸이 너무 망가진 것 같아서가 29%,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서(교도소가 지겨워서)가 188%였다!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렵다. 담배는 평생 참는 것이라고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담배를 끊고 잘 지내다가도 술을 마시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p. 156) 어울리면 '딱 한 번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뇌에는 '술=담배' 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담배가 생각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마약은 담배보다 더 심하다. 욕구와 갈망이 수시로 치솟는다(이를 '똥 마렵다'고 한다). 마약의 쾌감은 워낙 강렬해 단 한 번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까지 있다. 그렇기에 약을 끊는 것이 쉽지 않다. 국내 마약류 사범의 재범률은 매년 35~40%에 달하고, 마약 사범의 재복역률은 45.8%로 범죄자 평균 재 복역률(26.6%)의 2배에 이른다. 마약 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범해지는 특성을 보인다. 그만큼 마약을 끊기가 쉽지 않다. 많은 연예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마약을 한다. 심지어 구속되고 풀려나서도 마약을 끊지 못한다(p. 157).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17세에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로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인 세코날Seconal에 중독되었다. 세코날은 당시 유행하던 대마초에 이어 자연스럽게 필로폰으로 이어졌다. 마약 하는 것을 숨기고 결혼했고, 성인 디스코 바와 룸살롱, 가라오케 등 유통 사업도 성공해 30대에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압구정 한양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전혀 없었다. 단, 딱 하나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필로폰이었다.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잘 조절하면서 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끊고 조절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약이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매일이 되었고, 어느 순간 하루에도 대여섯 차 레 필로폰을 투약했다. 사업은 사장인 자신이 없어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굴러갔다. 마약을 하다 보면 충동적이 된다. 그는 사업장 대신 도박장을 찾기 시작했다. 카지노, 경마, 경정 가리지 않고 모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들렸다. 아내 옆에 한 남성 이 보였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가 흉기를 들자 그 남성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쫓아갔지만 그 남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환청이자 환시였다. 마약으로 인한 환각 때문에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p. 162) 약을 끊길 바라는 아내가 7번, 자신이 1번, 함께 마약 하던 후배가 그의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1번, 총 9번을 신고했다. 1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00억 원의 재산은 도박과 약값으로 모두 사라졌지만, 그는 약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된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마약, 도박은 조금만 하고 나 맛있는 것 좀 사주면 안 돼?" 흘려들었던 그 말이 도박장에서 배팅하는데 떠올랐다. 도박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아내와 함께 한밤중에 중국집으로 향했다. 새우를 좋아하던 아내였지만, 돈이 없어 자장면밖에 사줄 수 없었다. 자장면을 먹던 아내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때 모델을 하던 젊은 아내 대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중년의 아내가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식들이 있었다. 더는 인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는 1999년 국립법무병원(옛 공주치료감호소)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고, 10년의 세월 동안 노력해 2009년 마지막 출소 이후 간신히 단약에 성공했다. 그는 주차 관리 요원과 대리 기사로 하루 4시간만 자고 일하며 10년간 돈을 모았다. 그리고 국립법무병원 조성남 원장님의 지원과 일본 다르크 센터장인 마쓰우라, 마사르 씨의 도움으로 2019년 4월 20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약물중독재활센터인 경기도 다르크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 DARC를 열었다. 오랜 시간 마약을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마약의 폐해와 단약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약(p. 163)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마악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기관을 직접 설립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마약중독 자에서 마약 치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마약은 사람의 삶과 가정을 망쳐놓는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삶이 바뀐다. 가정도 회복된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다. 마약, 함께 노력하면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약을 끊은 당신은 중독에 빠진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p. 164). 모든 상품은 원산지가 가장 저렴하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코카인이 가장 싼 곳은 어딜까? 코카인의 원산지인 콜롬비아다. 미국에서 120달러(15만 원)인 정제된 코카인 1g은 골롬비아에서는 2~10달 러(8000원에서 1만 3000원) 수준이다. 코카인을 포함한 마약중독이 가 장 심한 나라는 어디일까? 콜롬비아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콜롬비아가 코카인을 생산한다는 것과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콜롬비아 마약중독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콜롬비아 정부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마약을 얼마나 압수하고 몇 명을 처벌했는지 업적을 자랑하는 데만 바쁘다. 콜롬비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약으로 죽어가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최근 등장한 필라델피아 마약 거리가 특별할지 몰라도 콜롬비아에서는 오래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콜롬비아의 제3의 도시이 자 카르텔로 유명한 칼리시에는 예전부터 '헤로인 거리'가 있었고, 제2의 도시이자 마찬가지로 카르텔로 유명한 메데인에는 800개 점포에서 각종 마약을 24시간 팔고 있다. 2019년 콜롬비아에서 불법 약물을 사용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명 중 1명꼴인 9.7%에 달했다(p. 206) 하지만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콜롬비아 정부도 자국 내 마약중독자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콜롬비아에서는 마리화나 20g, 코카인 1g이하를 가지고 있으면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치료는 고사하고 약물중독자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나 통계조차 없다. 방송을 보면, 콜롬비아와 관련해서는 범죄자 아니면 부패한 경찰관과 정치인, 그것도 아니면 미녀만 나온다. 하지만 마약중독자나 마약과 관련된 폭력과 살인, 마약 카르텔 간의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콜롬비아의 보통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폭력과 살인에 시달리며 사는 것도 억울한데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로 낙인까지 찍힌다. 코카나무가 콜롬비아 농부에게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마약 산업은 콜롬비아 젊은이들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p. 207). 펜타닐의 장점인 '극소량의 강력한 효과'는 생산자에게는 복음과도 같지만 소비자에게는 저주와도 같다. 퍼듀 파마가 생산한 옥시콘틴의 경우, 약물 과용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에 포함된 양은 일정하고 불순물이 없었다. 하지만 멕시코의 여러 마약 카르텔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생산한 펜타닐은 양이나 농도가 들쭉 날쭉한 데다 각종 불순물까지 첨가되었다. 펜타닐은 치사량(2mg)도 매우 적어서 헤로인 1회 투여량의 5분의 1, 필로폰 1회 투여량의 15분의 1만 투여해도 호흡 마비로 사망에 이르렀다. 마약 중에서 펜타닐이 가장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2년 11월에 미국 마약단속국(p. 277)은 펜타닐이 들어간 가짜 처방약 10개 중 6개가 치사량의 펜타닐을 함유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3차 펜타닐 파동이다. 실제로 2021년 미국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10만 7,522명 중 무려 3분의 2가 펜타닐 사용자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2022년 18~49세 미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자살, 교통사고, 총기사고가 아닌 펜타닐 오남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마약 파동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돈에 눈이 멀어 타락한 제약회사가 1995년 미국 땅에 옥시콘틴을 퍼뜨렸다. 1996년에 시작되어 2010~2011년에 정점을 찍은 옥시콘틴의 1차 파동이었다. 옥시콘틴 공급이 줄자 옥시콘틴에 중독된 사람들이 헤로인으로 갈아탔다. 2010년에 시작해 2015~2016년에 정점을 찍은 헤로 인의 2차 파동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멕시코 카르텔은 펜타닐을 자체 생산했다. 이렇게 옥시콘틴과 헤로인에 이어 펜타닐의 3차 파동이 2013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사망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7분에 한 명씩 펜타닐로 사망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파동이 아직 정점을 지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 제약회사의 탐욕이 결국 펜타닐이라는 지옥을 불러왔다. 죽지 않아야 할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p. 278) 생산과 밀수를 하는 해외 마약상에게 한국은 '신세계'와 같다. 히로뽕 분말 1kg은 우크라이나에서 6,000달러, 미국에서 1만 달러, 홍콩에서 2만 3000달러이지만 한국에서는 8만 4,000달러이다. " 한국에서 히로뽕은 미국에서보다 8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코카인 또한 한국에서 18당 341달러(45만 원)인데 미국에서는 101달러로 한국이 3배 이상 비싸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국산 야바는 현지에서 3000원 이지만 한국에서는 3~5만 원에 거래된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처럼 한국은 전 세계에서 마약 가격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마약상 입장에서는 마약 밀수에 성공만 한다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p. 312)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마약 조직에게 한국은 경쟁이 적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블루오션이다. 호주나 유럽, 미국의 마약 시장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다. 미국 12세 이상 인구 중 1년간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17.9%(일생 동안은 45.7%)이고, 코카인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1.9%(일생 동안 142%)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마약을 경험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생 동안 그야말로 '마약'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동남아시아나 북한 등의 마약 조직이 한국에 마약을 들여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 이미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마약류 밀수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한국인과 손잡고 대규모로 마약을 밀수, 유통, 판매할 경우 국내 마약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p.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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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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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마약이 만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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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의사이기에 갖는 남다른 경험들
- 의사로서 남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사람 사는 모습은 직업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남의 직업에 대해서 읽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길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울면서 웃는 남자 오늘도 그가 왔다. 내가 이 병원에 처음 취직했을 때부터 4년 째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불치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가 아프지도 않았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했고, 키는 나보다 한 주먹 컸다. 머리는 볼륨을 주었으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딱 고정된 7:3 가르마에, 몸에 딱 맞는 남색 정장이 잘 어울렸다. 모델로는 조금 부족하지만,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멋이 차고 넘쳤다. 검은 구두 끝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강아지 코처럼 윤기가 흘렀다. "과장님, 오늘 원장님과 점심 식사 준비했습니다." 나는 다이어트한다고 점심을 안 먹은 게 2년이 넘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근처 맛집을 물색해 음식을 포장해 온다. 지난달에는 초밥, 이번에는 떡갈비란다. "아, 오늘은 집에 청소기가 고장 나서 점심시간에 수리점 가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을 했다. "선생님, 제가 대신 갔다 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런 건 제가 해야죠." "아뇨, 괜찮습니다." "점심 같이 드시고, 제가 맡겨놓고 선생님 퇴근하기 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점심은 정말 안 되겠네요." "선생님, 그런 건 부담 없이 저를 시켜주십시오.? "아닙니다. 원장님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는 다름 아닌 영원한 ‘을’인 제약회사 영업 직원, 이른바 '영맨'이다. 사람의 관계란 <기브 앤 테이크>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대가성 없는 뇌물은 없다. 내가 그에게 부탁을 하면,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의사가 영맨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여러 가 다. 청소기 수리나 자동차 정기 점검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 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을 의사 대신 가 준 영맨도 있었다. 반대로 영맨이 의사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다. 자기 회사 제품을 써 주는 것. 매출은 그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약은 두 종류가 있다. 특허를 받은 신약, 일명 '오리지널'과 20년간의 특허가 풀리자 똑같이 만들었다는 '제네릭' 말이 좋(p. 47)아 제네릭이지, 그냥 짭, 짝퉁, 카피약이다. 오랫동안 독점을 누리 던 신약의 특허가 풀리면, 시장에는 수많은 카피약이 등장한다. 2009년 강력한 진통제인 '울트라셋'의 특허가 만료되자, 국내에서 오르펜, 하이퍼셋, 트라미펜, 도라셋, 듀얼셋, 메가셋 등 무려 67개 카피약이 등장했다. 명품 구찌 가방의 정품 가격이 100만 원이라면, A급 짝퉁은 대략 10~20만 원 선이다. 하지만 정부가 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약값은 오리지널이 100원이면 카피약은 70원이다. 다른 나라도 카피약 가격을 국가가 결정하지만, 유독 한국은 카피약 가격이 비싸다. OECD 평균보다 2.2배, 가장 싼 터키에 비해서는 무려 5배가 높다. 그럼 카피약 원가는 얼마일까? 업계 비밀이지만, 판매가의 10%도 안 된다. 100원 하는 오리지널 약을 그대로 카피한 70원 짜리 약을 팔면, 60원 넘게 남는다. 공장을 세워 직접 만들기조차 귀찮으면, 다른 회사에 약 생산을 맡기고 버젓이 자기 회사 상표만 부착해서 팔아도 된다. 이를 그럴듯하게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이다. 일종의 하청이다. 속된 말로 팔기만 하면 남는 장사다. 그 결과 한국에는 현재 200개가 넘는 제약회사들이 난립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신약 하나(p. 48)없이,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오로지 카피약만 팔아 돈을 번다. 정부가 카피약 가격을 매우 높게 정해, 세금의 일종인 건강 보험료로 제약회사 배를 불려주고 있다.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법. 이익은 제약 회사가, 손해는 국민이 본다. 그럼 또 누가 이득을 볼까? 약 가격만 높으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는 제약회사가 가격을 결정하는 고위 관료를 찾아가지 않을 리 없다. 보험회사는 고위 관료에게 신약 허가를 해달라고 청탁하고, 약 가격을 높게 해달라고 뇌물을 바치기도 한다. 제약회사와 약 가격을 매기는 고위 관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약을 팔아야 하는 영맨으로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그가 팔아야 하는 제품과 성능에 가격까지 같은 약들이 수 십 개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다. 차이점이라고는 고작 제약회사 이름뿐이다. 거기다 제약 회사는 영업 직원에게 매출에 따른 성과급을 주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너에게 달려 있다. 매출이 안 나오는 건 다 네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약이 안 좋거나, 회사가 안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물건이 거기서 거기고, 가격까지 같은 상황에서, 영맨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 하나다. 약을 차별화하는 대신 약을 파는 자신을 차별화 시키기. 매주 부지런히 병원을 찾아와서 의사에게 눈도장 받고, 뭔가를 건넨다. 볼펜이나 포스트잇은 기본이고, 커피, 커(p. 49)피를 싫어하면 주스를 들고 온다. 기꺼이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려 하고, 심지어 누구는 예비군 훈련마저 대신 다녀온다. 원장님과 나, 그리고 영맨과 회식을 한 다음 날이었다. 전날 나와 원장님이 대리 기사를 불러 차를 타고 가는 걸 배웅하고 제일 늦게 퇴근한 영맨이 가장 먼저 병원에 나와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숫자가 새겨진 숙취해 소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그에게서 꼬릿한 땀과 시큼한 위산 냄새가 풍겼다. 내가 음료를 건네받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술이 덜 깬 듯 얼굴이 벌건 데다, 눈마저 붉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눈꼬리는 내려 가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은 울면서 웃고, 웃으며 울고 있었다. 속이 쓰려 눈물짓고, 처자식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으리라. 잔뜩 힘을 준 눈꼬리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p. 50). "선생님, 참 잘생기셨어요, 영화 배우 하세요" 50대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작은 키에 머리는 절반 정도 남았으며 배가 살짝 나온, 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아저씨는 나보고 잘 생겼다고 했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넌 내 아들이지만 잘 생기지는 않았다." 스무 살 무렵,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시던 어머니가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하신 말씀이셨다. 피를 흘리며 낳은 어머니마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나를 잘생겼다고 말한 사람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틀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당시 나는 본과 3학년으로 부산 근교의 중소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실습을 나가 있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Y시 정신병원은 부산 달동네에 위치한 P 대학병원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주변에 다른 건물 없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공기마저 상쾌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여러 병원 건물 속 2층에 자리 잡고서 창문마다 쇠창살이 박혀 있는 것으로(p. 172) 부족해 정문마저 두꺼운 철문으로 된 대학병원 정신 병동과는 천지 차이였다. 급성기 환자를 주로 입원시키는 대학병원과 달리, 만성 환자가 대부분인 Y시 정신 병원은 주위 환경도 병원 분위기도 평화로웠다. 실습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이었고, 정신과 레지던트 선생님은 나, 재훈이, 정수, 지혜에게 각각 환자 한 명을 배정해 주었다. 우리는 담당 환자를 관찰하고 또 면담하면서 환자에 대한 리포트를 써야 했다. 내가 맡게 된 환자는 55세 김재환 씨로, 그는 전문의 과정까지 마친 의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에 병이 생겨, 20년 넘게 정신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앓고 있는 질환은 그 당시에는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렸던 조현병이었다. 100명 중 1명에게서 나타나는 질환으로 주로 환각과 망상을 겪으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 안타깝게 그의 여동생마저도 같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 있었다. 이틀 동안 내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바로, 그는 전혀 이상한 게 없었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거나 신문을 보고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조현병은 환각, 그중에서도 환청이 주 증상이지만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허공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없었다. 가끔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p. 173). 그 말을 들은 조원들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너한테 잘 생겼다는 말을 할 정도니까, 정신병원에 있는 거야” 말하며 웃었다. 조원 중에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재훈이가 자기도 그 말이 듣고 싶었던지 “저는요? 저는 어때요?”라고 묻자, 김재환 씨는 "선생님도 잘 생기셨지만, 이 선생님이 더 나아요. 선생님, 꼭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몇 년째 병원에 있는 김재환 씨가 심심하기도 하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기분 좋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다른 조원들이 배정받은 환자들은 "나는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저 산까지 1초 만에 다녀올 수 있다." "내 머리에 누가 뭐를 심었다." 등의 말을 했기에 누가 봐도 명백한 문제가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인 수요일이 왔다. 김재환 씨에 대한 케이스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나는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초조했다. 3학년 2학기 시작한 첫 병원 실습이 정신과여서 아직 하얀 의사 가운과 목에 걸린 검은 청진기가 어색했고, 내 교육을 위해 환자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뭘 할 때마 쭈뼛(p. 174)쭈뼛했다. 하지만 이대로 ‘특이 이상 없음’이라는 리포트를 냈다가는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3일 동안 환자를 잘 관찰하지 않았다고 혼나는 건 물론, 좋은 성적도 물 건너 갈 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후 5시가 되면 버스를 타고 병원을 나서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김재환 씨를 찾아다녔다. 그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분명히 내가 옆에 있는 걸 인지했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산책을 하다가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 용기를 내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저보고 잘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그러세요?" 김재환 씨는 옆에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가 제 귀에다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켜요. 선생님, 정말 잘 생겼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말하라고요 그랬다. 그는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환청을 겪고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데, 김재환 씨만 보이는 게 있나요?" "예, 예전 여자 친구가 보여요."(p. 175) "혹시 지금도 보여요? "예. 저기요." 그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다른 남자 환자들만 있을 뿐, 여자는 없었다. 전형적인 조현병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남들은 들리지 않는 것을 혼자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김재환 씨가 고개를 돌려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p. 176). 잠이 문제가 아니었다 역세권 사거리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의원을 빼고도, 반경 50m 내에 이비인후과 3개, 내과 3개, 소아과 2개, 피부과 3개, 안과 2개 외에도 비뇨기과, 정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 산부인과가 각각 하나씩 있다. 그중에서도 치과가 무려 5개로 제일 많았고, 약국만 6개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길가에 이렇게 많은 병의원을 볼 수 있 는 곳은 한국뿐이다. 거기다 유럽처럼 예약도 필요 없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병원과 의사를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사람들은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의료 부분에서만큼은 가희 ‘조선천국’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건강의학과, 정신과 가기를 꺼리나 보다. 수면제를 받으러 정신과도 아닌 우리 병원에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선생님, 원장님이 대장 내시경 들어가셔서요, 환자분에게 말 씀드렸고 똑같은 약 처방해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를 접수했다. 63세, 김명순 님, ‘재진’ 같은 약을 그대로 처방하는 '리핏 처방'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p. 180) 인사 한 번 하고, "똑같은 약 그대로 드릴게요." 한 후 마우스 버튼 클릭하면 끝이다. 김명순 씨가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머리에 기본 화장만 하고, 립스틱을 칠하지 않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 었다. "안녕하세요? 김명순 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 네, 제가 원장님께 몇 년째 수면제를 먹고 있는데 그 약 받으러 왔어요.” 병원이 익숙한지 그녀는 긴장 없이 술술 말했다. 차트를 보니, 그녀는 수면제 일종인 졸0뎀을 3년 넘게 복용 중이었고, 내 진료는 처음이었다. 단순 고혈압이나 당뇨 환자를 생각했던 나는 약 이름을 보자 긴장이 되었다. "특별히 약 먹으면서 불편한 점 없나요?" "네, 옛날부터 쭉 먹고 왔고..... 괜찮습니다.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몇 년 전, 이 약이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한 언론에서 이 약을 '악마의 수면제'라 부르며, 이 약을 복용 중이었던 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이 약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환자에게 돌렸다. 모니터에는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국민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생전에 아름다웠던 모습이 있었다. "예전에 뉴스에 이 약을 먹던 연예인이 목숨을 끊어서 이슈(p. 181)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약 부작용으로 죽은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제 생각으로는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가 연예인이다 보니, 정신과 치료를 안 받고 수면제만 처방받아서 먹다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 3명 중에 2명은 불면증을 호소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수면제를 복용하는 분에게 물어봅니다. 혹시 우울하지 않....." "엉엉엉엉~"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명순 씨가 둑이 터진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들뻘인 의사 앞에서. 당황스러웠다.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는 그 특유의 어둡고 짙은 안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김명순 씨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이었다. "자, 어머니, 진정하시고." "제가 몇 년 동안 진료받으면서 우울하냐고 물어보신 분이 선생님이 처음이셨어요. 엉엉엉...... 어떻게든 제가 살아보려 고...... 헉 헉.....” 울음과 말이 섞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어렵게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는 그녀의 굴곡진 삶이 펼쳐졌다. 그녀는 잠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불면증으로 약을 먹을 게 아니라, 우울증을 치료가 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정신과 치료를 권했(p. 182)다.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수면제를 타러 병원에 왔다. 나는 똑같은 뉴스를 보여주며 똑같은 질문을 한다. "우울하지는 않으세요?" 대개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어떤 이는 김명순 씨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부디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좋은 꿈 꾸기를(p. 183). 82년생, 이정민 그는 나와 같은 1982년생 개띠였다. 외동아들인 그는 중고등 학교 때부터 말수가 적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게 좋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항상 혼자였다. 가끔 학교 수업 시간에 뜬금없이 갑자기 앉았다 일어나기도 하고, 멍하게 있을 때가 있어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상담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부모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민이는 20살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았고, 신경증 장애로 4급 판정이 나와 2년간 공익 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런 그가 이상해진 건,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해인 2003년부터였다. 그는 "누군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라며, 환청과 피해 망상을 호소했다. 2008년 결국 그는 조현병으로 진단되었고, 한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씻지 않는 등 이상한 행동은 지속되었다. 조현병은 정신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질환이면서도, 치료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평생 유병률은 1% 정도로, 남자는 15-25세에 주로 발생한다. 환각과 망상이 주요 증상인데, 환각(p. 196) 특히 환청이 너무나 생생하여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내 귀에 도청기가 있다" 1988년 8월 4일 목요일,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도중 한 사람이 난입해서 난동을 피운 적이 있는데, 피해 망상과 조현병을 앓는 환자로 밝혀졌다. 심한 환각을 주 증상으로 하는 조현병의 경우, 20%는 완전 회복, 15-35%는 지속적으로 심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며, 50%가 평생 입퇴원을 되풀이한다. 정민이는 운이 없었다. 완전히 회복되는 20%에 속하지 못했다. 증상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환청과 망상이 심해지면 입원을 했고 호전되면 퇴원을 했다. 2010년, 2013년, 2015년에 6개월씩 장기간 입원했을 뿐만 아니라, 짧게는 일주일간 2번을 포함하여 총 6번이나 정신병원에 들락날락했다. 그가 조현병으로 진단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 동안 2년 가까운 시간을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뚜렷한 직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민이는 자신이 길을 갈 때 처음 보는 여성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그는 빌라 2층에 살았는데, 위층 여자가 끊임없이 쿵쾅쿵쾅 발을 굴려 고통받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하지만 조사해본 결과 3층에 여자가 산 적은 없었(p. 197)다. 2016년 1월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았고, 가족과 지인이 도움 없이 혼자 살았다. 3월부터는 집을 나와 빌딩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갔다. 정민이는 그 사건이 있는 날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서빙을 하고 있다 불결하다는 이유로 주방보조로 담당이 바뀌었다. 그는 어떤 여자가 자신을 험담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뿐 아니었다. 사건 전날, 길거리 공터에서 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고, 그는 깜짝 놀라 피했지만 자신의 신발에 떨어졌다. 역시나 여자들이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괴롭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5월 16일 오후 5시 40분, 일하던 음식점에서 조퇴를 하면서 그는 주방에 있는 흉기를 챙겼다. 지하철을 타고 저 멀리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한 건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2시간 정도를 머물렀다. 그러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이동하여 오후 11시 44분, 사건이 발생한 건물로 돌아왔다. 약 50분간, 강남역 인근 주점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회를 엿보았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남성 6~7명은 그냥 보냈다. 그리고 새벽 1시 7분쯤, 김 씨는 남자 용변 칸에 앉아 대기하다가 여자가 들어오자 식당에서 들고 온 흉기로 마구 찔러 여자를 죽였다. 그가 살해한 22살의 젊은 여자는 정민이에 대해 험담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였다(p. 198) 몇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에 있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여성 혐오 범죄니, 묻지마 살인이니 말이 많았지만, 문제는 단순했다. 환청과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 조현병 환자인 이정민(가명) 씨가 치료 받지 못하고 방치된 채 지내다 피해망상이 심해져 벌인 사건. 이정민 씨가 2016년 1월 정신병원 퇴원 후에도 치료를 잘 받았다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7년 1월 12일 항소심에서 법원은 이정민 씨에게 징역 30년에 치료 감호와 20년의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명령했다. 이어진 민사 소송에서 이정민 씨에게 피해자 부모에게 5억의 배상을 하라고 판결이 났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2021년 5월 5일 남양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20대 아들이 60대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했다. 피해자와 장소만 달랐지, 같은 이유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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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이동식 목사가 책으로 전하는 “따뜻함과 쉼”
- 시산문집인 이 책의 저자 이동식 목사는 무안읍교회 담임목사이다. 《시와사람》으로 수필 등단 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문인협회 무안지부 지부장, 기독교 호남신문 칼럼니스트, 한국예총 무안지회 수석부회장, 전남문인협회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발간한 수필집으로는 『하늘정원으로 통하는 창문』, 『햇살이 머무는 사랑의 뜨락에서』,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 『군불 지피는 보랏빛 마음으로』가 있으며 이 책들은 전국 대형서점 및 쿠팡, 11번가, 네이버, 다음 등 기타 인터넷서점에서 판매 중이다. 본 책 『꽃비 내리는 창가에 서서』는 표지에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따뜻하고 포근한 쉼터”라는 설명처럼 시든 산문이든 따뜻함과 쉼을 준다. 특히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글과 시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분류에 따른 시와 산문을 통해 각 계절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접하게 한다. 책 사이사이에 들어간 작가와 가족들이 직접 찍은 수준 높은 사진들은 책의 품격을 더 높여준다. 일독을 권한다. 종종종 종종종 참새 한 마리 마당을 뛰어 다닌다 날개를 푸덕이며 날아가도 될 터인데 마당에 한 발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오늘도 내 마음 어설픈 뜀뛰기 종종종이 되었다(p. 20). 요즘 청정농사를 지는 사람들이 늘어 농약을 안 치거나 적게 하고 금비보다 퇴비를 사용합니다. 또 오리 농법이라 해서 논 가(p. 80)운데 청둥오리를 키우며 벼농사를 짓는 환경 친화형 농사가 있습니다. 청둥오리는 기러기과로 시베리아에서 번식합니다.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에 날아와서 지내다가 돌아갑니다. 청둥오리는 날개 힘이 좋아 먼 거리를 오가는 철새입니다. 그런데 논에 농사를 위해 넣어둔 청둥오리는 날지를 않습니다. 사육장의 하늘 부분을 막아 놓지 않아 물어보니 청둥오리는 영양가 많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찌면 몸이 무거워 날지 않고 그러다가 자신들이 날아다니는 새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걱정이 없어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하고 날았던 기억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내과 의사인 '래리 도시(Larry Dossey)'는 10명 중 8명이 시간에 쫓기는 '시간병(Time-Sickness)'에 고생한다고 합니다. 늘 시간이 달아난다는 느낌 속에 허둥대며 가속 페달을 밟듯 계속 서두르는 것입니다. 벌판 위의 벼와 보리도, 비행기 속 승객도 모두 시간에 쫓겨 살아갑니다. 오늘도 나를 통해 지나가는 일들과 사람과 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겠습니다. "Carpe Diem Memento Mori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현재를 잡아라. 죽음을 기억하라)"의 명언을 되새겨 봅니다(p. 81). 꿈속의 어머니 지난 밤 꿈속에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떠나가신 후 못 살 것 같던 젖은 마음도 무디어져 말라버리고 제법 씩씩한 척 걸어왔는데 잊고 사는 아들 군불 지펴 뎁혀주시려 사랑스런 그 마음 여전한 모습 그대로 이셨습니다 지는 낙엽 위로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아! 어머니의 품이 또 그리워집니다(p. 24). 자화상 나는 병들어 뒤틀린 굽은 나뭇가지가 좋다 바위 때문에 돌아가는 비뚤어진 길이 좋다 나는 바람에 날려 찢긴 꽃잎이 좋다 누렇게 손때 묻어 찢어진 노트가 좋다 왜냐고요 잉크냄새 나는 새 책 새 옷이 좋고 신상의 세련된 자동차 나도 새 것이 좋다(p. 34) 그러나 내 모습 닮은 애정이 가는 분신 같아서 좋다(p. 35) 여름고개 합창단 매미 합창단 구슬픈 공연이 아직도 계속 되는데 다음 출연자들의 연습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귀뚜라미 노래에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일어나고 익어가는 알곡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었다 아직 무대 위에서는 목청 높이는 여름이 노래하고 있다(p. 122) 가을 리허설 서늘한 새벽 익숙한 길 위 오늘도 하룻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선물처럼 살며시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 기대는 이슬 젖은 바람은 가을의 향기를 품었다 무대 뒤 놀란 귀뚤이 리허설 중 침 삼키며 피리 닦으며 숨 죽여 맛 뵈기, 가을의 노래를 부른다(p. 172) 익어가는 가을날의 품격(品格) 저물어 가는 가을날의 오후 햇살이 들어온 창문에 노란 은행나뭇잎이 반사되어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입니다. 모처럼 휴대폰을 열어 좀 고전적인 클래식을 들어 봅니다. 세계적인 테너들이 부르는 명곡이 흘러나오며 펼쳐진 가을 하늘은 한결 고결한 모습으로 어울립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고상해진 내 모습을 누려 봅니다. 일상의 모든 사물과 현장치고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만 때론 평범하지만 고상하고 세련된 모습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품격이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모든 만물에는 그에 어울리는 품격이 있습니다. 품위를 소중히 여긴 서구 사람들은 ‘품위’를 ‘dignity’라는 단어로 자존감과 위엄을 지닌 품(p. 223)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존경하던 어떤 분들이 정치에 뛰어들고 세상욕심에 치우치면서 그에게 나타났던 소중한 품격을 상실한 초라한 모습을 보며 온 사회와 지인들까지 실망하는 일을 종종 봅니다. 아집이 드러나고 천한 언어들로 채워져가는 모습에 하루아침에 그들의 품격은 낮은 가치로 추락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에는 그것에 합당한 수준인 격(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준에 맞는 기준을 정한 것을 규격(規格)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격에 맞도록 준비되면 합격(合格)이라 인정해 줍니다. 그것에 대한 가치를 매기는 것이 가격(價格)입니다. 만물과 인생에서 그 위치에 어울리는 격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에 맞는 격(格)이 있듯이 모든 만물과 인생사에도 격이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른 수준의 성품인 사람다운 인격(人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품성과 인격을 가진 인생은 품격(品格)이 드러난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실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격이 상승되어 격상(格上)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품격에 따라 대우와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 중에 ‘답다’는 말은 합당하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어른의 수준에 오른 인생을 '어른답다'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사나이답다' '여성스럽다' 사람다운 삶' '신자 답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본질에 도달했다는 말이기에 칭찬이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한 것입니다(p. 224). '제임스 A. 프로우드'라는 분은 그의 저서에서 "인격은 택배처럼 어느 날 집 앞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연단하고 담금질하여 단단히 쌓인다"고 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갈고 닦아야 훌륭한 품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과 본질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다움'을 회복하여 아름다울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금은 요리에 없어서는 안 되며 설탕은 음식을 달콤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소금과 설탕이 겉보기에 아무리 비슷해도 설탕은 설탕, 소금은 언제나 소금이기에 존귀합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에게는 품격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끌리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꽃의 향기는 십 리까지 퍼지고 인격의 향 내는 만 리까지 알려진다"고 합니다.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자연의 품격에 어울리도록 내 인생의 품격을 마음의 저울에 올려봅니다(p. 225). 꿈 속의 고향 모락모락 정겹게. 어머니가 피워 올린 환영의 손짓 고향 집 굴뚝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일은 명절날 저물어 가는 석양을 붙들고 그리운 가슴 손으로 누르고 고향집 꿈을 꾸며 마음을 달랜다(p. 232) 이동식 목사 관련 기사 링크 무안읍교회, 지구촌나눔재단 전남 무안 지부 설립 및 사랑의 쌀독 발대식 총회 역사위, 『초창기 한국교회 대사회 운동』학술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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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이동식 목사가 책으로 전하는 “따뜻함과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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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포스럽고 괴기한 그림이 하는 말
- 처음 보는 장르의 그림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그림들이다. 작가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그림이 다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작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외부의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자주 접할 기회는 없었다. 아마도 주변부 취급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과 삶의 절규는 있지 않은가? 그것이 글이든, 영상으로든 혹은 그림으로든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신 상태, 예술적 충동, 창작 과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정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창작한 작품은 ‘예술적 천재성’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미술 치료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한 논문에 따르면 예술 창작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많은 환자가 예술적 재능과는 상관없이 예술 치료를 통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지고 도파민 수치가 높아졌다. 예술 치료가 모든 정신 질환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술 창작 작업은 내밀한 사고를 들여다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게 해주는 좋은 도구이다. 많은 정신 질환자들이 이런 작업을 간절히 원할지라도 질병에 지친 나머지 그럴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이들이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정신 질환을 겪을 수 있고 정신 건강 문제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정신적 고통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이런 측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온전히 인간적인 이 경험에 감수성과 공감, 미묘한 뉘앙스를 덧입혔다. 이들 예술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캔버스 위 에 물감으로, 진흙으로 빚어낸 조각으로, 카메라 렌즈를 통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보기 힘들고 부담스러워 차라리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도전적인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같은 인간들이 경험하는 어둠을 더 잘 이해하고 스스로의 어둠도 역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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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포스럽고 괴기한 그림이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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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직 인기 소설가의 자기 고백
- 나는 아직 이 작가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명 작가이다. 이제라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수많은 직업 중 소설가는 창작의 수고와 고통이 있을 것 같다. 이 한 사람의 고통의 결과물을 우리는 책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책을 읽는 독자로서 모든 작가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비록 우리가 전업 소설가는 아닐지라도 메일이든 문자든 카톡이든 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한다. 글이란 무엇인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2007년, 서른셋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편집자 시절 소설 독자들을 사로잡겠다던 목표는 이후 세 편의 부진을 거친 뒤 2021년, 다섯 번째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이루게 되었다. 1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비전을 가지고 전업에 뛰어들었고, 무명의 시간을 견뎌 소설가가 되었고, 마침내 독자들의 사랑을(p. 16) 얻었다.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로 담금질되었고 소설 쓰기의 기쁨과 슬픔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하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지속되어야 하며, 납득할 만한 결말을 제공해야 한다. 대중 상업 소설을 지향하기에 문학성보다는 가독성을 추구한다. 소설이라는 이야기 속 가상 세계에 독자들을 한껏 빠져들게 한 뒤,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며 자신만의 질문을 품게 하려 애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탐구하고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믿기에, 내 소설이 독자들의 삶을 살피는 계기가 되고 ‘인생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 하면서, 쓴다(p. 17). 소설 쓰기는 한 번 배우면 절대 까먹지 않는 자전거 타기와는 달랐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소설이었고 그래서 새 작품을 쓸 때마다 거기에 맞는 나만의 작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바, 결국 작법은 스스로 만든 기술이고 그 기술을 만드는 능력은 일상의 반복된 작업 패턴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루틴’ 그 루틴을 발휘할 수 있는 고정 공간 ‘작업실’. 그 작업실에서 쓸 글감을 떠올리는 '산책' 그리고 집필 활동의 근육이 되는 '독서' 이 네 가지 요소가 소설 쓰기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계속 나를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소설 쓰기도 결국 글쓰기였고, 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한 탐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가. 작가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체화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쓰며 배우고 써서 완성한다. 그리고 그 시간, 삶을 버티며 인생을 추스르며 보낸 나의 시간이 세상에 대해 쓸거리를 만들어 줬다. 이른바 글감. 시간이 만들어준 글감을 정리하는 건 글쓰기의 몫이었고 나는 그 몫을 꾸준히 수행한 자에 불과했다. 이 책은 글을 쓴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 당신의 삶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p. 20). 독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아니 작가가 아닌 누구라도 글쓰기와 독서와의 상관관계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작가 지망생이 독서에 게으른 경우를 본다. 그럴 때 나는 이 렇게 말한다. "가수가 되고 싶은데 노래를 안 들으시는군요." 독서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글쓰기의 핵심 요소다. 독서는 그냥 작가가 밥 먹는 거라고 보면 된다. 또한 독서는 글 쓰기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배움을 지속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독서 만능주의자 같은 발언을 하는 이유는, 독서 붐이 일어나 내 책이 더 팔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독서인구가 늘어 도서관이 많아지길 바라서도 아니다. 독서가 글쓰기의 기본이고 뼈대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책 읽기 없이 글을 쓴다는 건 뭐랄까, 근육이 안 만들어진 씨름선수라고 할까? 상대를 넘길 기술도 근육에서 올라오는 근력 없이는 불가능하듯, 독서 없이는 글 쓰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p. 43). "그런데 나는 소설 말고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을 쓸 겁니다. 이런 경우엔 독서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 게 낫지 않나요?"라는 질문도 받곤 한다. 답하자면,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봐야 한다.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 역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지 (장면)를 상상하게 만드는 텍스트(글)를 쓰는 게 대본 작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바로 독서가 아닌가? 글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는 게 소설 읽기의 과정이다. 애초에 대본을 그림 콘티로 그린다거나 혹은 머릿속 상상을 특수 장치로 출력해 구현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글을 써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텍스트를 쓰는 사람이다. 텍스트 해석력, 텍스트 표현력. 이 모든 것이 독서에서 시작된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수많은 효용 중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디테일을 정리해보았다. 독서는 겸손과 투지의 원동력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겸손해진다. 마치 성전에 들어선 것 처럼. 목차만 훑어봐도 경외감이 드는 책들을 마주한다. 고전. 걸작. 숨은 역작. 좋아하는 작가의 책. 어딘가 부족하지만 매력 있는 책.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생애를 짜내 기록한 이야기. 나는 그것들을 살피며 글쓰기의 겸양을 배운다. 한편으로 투지를 채운다. 더 열심히 써야겠다. 뒤지지 않는 책을 내기 위해 투지로 써야 하겠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이곳에 진열되는 것만으로 망신일 테니. 독하게 써 부끄럽지 않아야겠(p. 44)다는 다짐이 마구 솟아오른다. 독서는 자신감의 원천 한편으로 독서를 많이 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아니 이런 책도 출간이 됐단 말이야? 나도 이 정도는 쓸 수 있겠네’라는 의욕이 솟아오른다.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도서관 혹은 서점에 가보시라. 한 시간 정도 이 책 저 책 들춰보다보면 자신감이 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는 취재 인터넷 시대에 데뷔한 나는 일정 부분 검색을 통해 취재를 한다. 검색은 편하고, 실용적이며, 절대 쉽게 알 수 없는 사실도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알려주니까. 하지만 때론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며,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정보가 무분별하게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보를 깊이 파고들어 가고자 할 때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것들은 겉핥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런 말을 했다. "인터넷은 신이다. 하지만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인터넷에는 과다한 정보와 부적절한 정보 가 널려 있기에 취사선택이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인터넷을 통한 취재는 ‘사려 깊은 검색’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려 깊은 검색을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모아놓은 것이 바로 책이다. 그러므로 책을 통해 관련 취재를 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실용적이고 또 세밀하게 정보에 파고들 수 있는 길이다(p. 45). 가령 당신이 경찰과 의사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인터넷 검색은 기초적인 조사를 도와줄 따름이다. 직접 만나 취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경찰과 의사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런데 경찰이 쓴 책, 의사가 쓴 책을 읽으면 의미 있는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 대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글로 정리된 직업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책은 저자의 생각과 정보가 내밀하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쓰려는 글의 정보를 책에서 찾기 바란다. 독서는 문장 강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다양한 문장과 문체를 접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문장과 문체를 배울 수 있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의 글쓰기에 자연스럽게 적 용할 수 있게 된다. 독서는 단어 수집 독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건 기본이고, 단어를 수집하는 건 보너스다. 소설을 완성하는 게 집을 짓는 것이라면 단어는 벽돌과 인테리어 소품과 같다. 자재가 많을수록 집은 단단하고 아 름답게 지어질 것이다(p. 46). 독서는 공감 독서는 책을 쓴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엿보고 따라가 보는 행위다. 자연스레 공감을 하고 그로 인해 공감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그 공감능력이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을 공감 가는 인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독서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 무엇보다 소설 읽기는 다른 인물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해준다. 지금 내 현실이 힘들고 내가 쓰는 이야기가 안 풀려도 이미 완성된 이야기 하나를 즐길 수도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소설을 읽는다. 다른 세계에 잠시 머무르며 현실을 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흐뭇한 경험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2013년 여름, 4호선 지하철 맞은편 좌석에서 《망원동 브라더스》를 읽는 독자를 목격한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하마터면 다가가 인사하고 이 책을 어떻게 고르셨냐고 물어볼 뻔 했다. 다행히 꾹 참고 그분의 독서를 훔쳐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책을 읽는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나는 소설을 쓴 게 아닐까. 독서의 효용을 하나 더 추가하겠다. 독서는 작가를 기쁘게 한다(p. 47). 소설의 가격 솔직해지자. 여러분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소설을 팔기 위해 서다. 팔린다는 것은 많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는 것, 이것이 소설 쓰기의 핵심이다. 그런데 가격을 모르고 이야기를 쓴다면, 가격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가격이란 책의 바코드 옆에 적힌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설을 쓰는 데 들이는 비용이기도 하다. 당신은 소설을 쓰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처음엔 가늠이 안 되겠지만 어떻게라도 시간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시간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혹은 감사하게도 우리는 소설 쓰는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 당신이 공인된 작가라면 출판사로부터 선인세 혹은 계약금을 받아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시간을 사서 소설을 써야 한다. 이 시간을 사는 것에 대해 당신은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핵심은, 손해를 보더라도 얼마의 가격이 들었는지 알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이다(물론 독자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격이다(p. 67). 마지막으로 묘한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하겠다. 전업작가가 된(p. 122)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나는 그동안의 작업이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생계를 위한 잡문을 쓰며 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걸 후회하던 참이었다. 우연히 옛 출판관계자들과 함께한 자리 2차에서 한 사람을 마주했다. 그는 출판계에서도 한참 선배인 듯했는데 (자세히 기억 하지 못하는 건 그때가 초면이었고, 이후로도 그를 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이름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에게 나를 ‘출판사 잘 다니다 때려치고 작가 되겠다고 고생하는 친구’라고 소개 했다. 그때 그는 나를 가만히 살피곤 한마디 했다. "당신은 잘될 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난감했다. 이 뜬금없는 덕담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초면인 당신이 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당신이 날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무슨 근거로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쉽게 하지? 신기가 있나? 덕담 남발자인가? 그렇다고 따져 물을 상황도 아니기에 그도 나도 주변도 그냥 흘려 넘겼다. 술자리 잡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글쓰기가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름 모를 그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잘 될겁니다. 반드시 좋은 작품을 쓸 거예요." 그때 그 말은 어느새 내게 창작의 심해에서 버틸 수 있는 산소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좋은 작품을 쓸 거야. 그 사람이 그랬잖아. 그 사람이 누군지 뭐가 중요해. 근거 따위 뭐가 중요해.'(p. 123) 그러므로 부적이든 주문이든 토템이든 당신의 글쓰기를 도움 어떤 것이라도 기억하라. 수집하라. 옆에 두고 계속 음미하기 바란다(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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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현직 인기 소설가의 자기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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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작가가 말하는 글쓰는 방법들
- 이 땅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이 책들을 쓰는 작가들도 많다. 때로 베스트셀러가 돼서 큰돈을 버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더더군다나 요즘에는 책들을 많이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양한 책들을 출간해 주니 감사하다. 이 책을 읽으며 읽어야 할 책들을 발견해서 너무나 기쁘다. 작가들이 숨 쉬며 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자. 수학 연구와 대중적인 글쓰기 가운데 어느 게 더 어렵냐는 질문에 그는 "새로운 수학을 창출하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연구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딱 나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영역이 서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강연하러 가서 이야기를 나 누다가 얻은 아이디어를 연구로 연결하는 식이다. "논문이든 대중서든, 말하자면 모든 게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는 과정"이라며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비슷한 활동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정리한다. 여러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마감에 쫓기며 글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그도 글이 풀리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마감이 다가오는데 글이 선뜻 안 써질 땐 우선 아무렇게나 쓰고, 고치고, 다듬는다(p. 28). "문장도 신경 쓰지 않고 앞뒤가 맞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른 걸 막 씁니다. 그리고 여러 번 다듬죠. 이후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에게 비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김민형은 왜 일반인이 수학에 관심을 갖는 데 목소리를 내게 됐을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현대 생활에서 수학이 쓰이지 않는 곳이 드문 까닭이고, 그만큼 수학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l), 경제 지표, 지금 쓰고 있는 화상 통화 등 오늘날 모든 발전이 고등수학 없이는 불가능해요. 수학을 모르면 막연한 두려움이 커지는 시대죠. 하지만 이해하고 나면 생각보다 변화가 무섭지 않아요. 수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죠. 제 두 아들이 어렸을 때도 이런 이야기 를 하곤 했죠." 그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며 수학을 외면할 수도 있지만, 수학적인 이해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점점 차이가 커질 거라고 지적했다. 세상의 현상을 이해할수록 행동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에 수학을 아(p. 29)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문에 나온 극적인 통계도 정확히 파악하고 나면 두려운 것이 아닐 때가 많아요. 제대로 이해하면 무섭지 않은 상황이 많은 거죠." 코로나 사태도 수학의 역할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였다. 그는 코로나 극복에 수학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감염 확산 예측을 위한 수학적 모델링과 통계 분석,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수학의 역할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수준까지 수학을 이해해야 할까. 수학에 관한 대중서를 집필할 때 김민형의 원칙은 독자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독자에게 적당히 이해한다는 느낌만 안겨주는 가벼운 책은 지양 한다. "누구든 단번에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한 번 읽고, 다시 돌아와서 보고, 나중에 또 보고, 그러면서 이해가 이뤄집니다. 대중을 위한 책도 그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p. 30)정을 반영해야 한다고 봐요." 그는 오만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대중 과학서나 수학서가 별로 없다고 토로했다. 술술 읽히게, 적당히 이해하는 정도로만 쓰다 보니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타협점을 찾는 게 어렵지만, 독자가 단번에 이해하기보다 여러 번 읽으면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도록 쓰는 게 자신의 원칙이라고 밝혔다. 그의 대표작 『수학이 필요한 순간』 역시 빠르게 넘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이해하고 싶다는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많은 독자가 이 책에 도전했다. 그는 "수학을 향한 관심으로 책을 사서 읽는다는 건 고맙고, 그저 놀랍고, 감동적"이라며 수학책이 이 정도 관심을 받은 건 그만큼 우리나라 독자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마음에 드는 통계나 정보일수록 틀린 것이 없는지 추궁해보라"는 강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굉장히 흔한 유혹 중 하나가 자기 마음에 드는 통계는 금방 받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통계는 비판적으로 보는 겁니다. 하지만 통계의 질도 여러 가지라 부정확할 수(p. 31) 있어요. 찾아보면 반대의 통계도 많고요. 그러나 대부분 자기 마음과 잘 맞는 것은 스스로 추궁하지 않죠. 그건 ‘고장 난 기계’가 되는 길입니다." 세상에 극적인 데이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숫자로 인한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그는 강조한다(p. 32).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김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래서 답도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의무감으로 쓰는 것 같아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상황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게 의무인 것 같아요. 나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생각이 필요한 사람이나, 읽고 쓸 만한 상황이 아닌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 의무다." 대답을 마친 그는 명랑한 표정으로 "거창하죠? 한 번 거창하게 말해봤어요. 다른 답으로 바꿀까요?" 하더니 활짝 웃었다(p. 45). 서은국이 전하는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행복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속설과는 정반대다.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행동을 할 때 뇌가 주는 보상이 '행복감'이다. 낭만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진화론적 설명이다. 가령 강아지에게 ‘손 줘’를 훈련할 때 보상으로 주는 '간식' 같은 역할이 행복이라는 것.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고쳐먹는 것으로는 안 되고, 간식'(즐거움)을 주는 '행동'과 경험'을 찾아 자주 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때 행복감이라는 뇌의 보상이 극대화된다. "사람들과의 교감과 그들로부터의 긍정적인 반응이 생존과 번식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자원이에요. 누군가 나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할 때 행복이라는 뇌의 신호가 미치도록 켜지죠.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눈을 감고 명상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에요."(p. 62). 그는 사람과 교류하기를 즐기는 외향적인 사람, 안정을 지향하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데 유리하다는 것은 수많은 연구의 누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열기가 들어오는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긍정적 사고’만으로 더위로 인한 불쾌감을 행복감으로 바꿔보려 했다면 어땠을까. 짧은 시간 성공할 수는 있어도 지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감사 일기’나 '마음 비우기'만으로 행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불편한 환경은 바꾸고,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행동을 자주 하는 것, 이것만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그는 일부 자기계발서나 소셜미디어에서 소개하는 ‘행복 지침’이 진리로 여겨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마음과 태도를 바꿔라’ 같은 지침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연구자 입장에서 행복감은 그렇게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만약 상황과 무관하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 감정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오히려 감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p. 63)않는 거예요." 그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주장은 감정이 감당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감정은 상황을 감지하고 그에 맞춰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있을 때 우울함도 느끼고 두려움도 느껴야 이를 깨닫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된 요인은 우주의 별만큼 많지만, 관련성이 너무나도 미약한 요소를 행복해지는 ‘결정타’인양 이야기한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느냐"며 『행복의 기원』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p. 64). 하지만 그가 보는 한국 사회의 행복 온도는 걱정될 정도다. 요즘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가는 길”에 비유했다. 일상 속 "잦은 불쾌가 누적돼 곪아 터지는" 상태, 모두 '자기 권리'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업 종료시간이 다가오는 뷔페의 아이스크림 코너에 초콜릿 맛 두 개와 바닐라 맛 한 개가 남아 있고, 내 뒤에 한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어떤 맛을 택할까. 그가 참여한 최근 연구에서 초콜릿 맛을 골라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는 배려를 하는 사람 숫자는 한국이 거의 꼴찌였다. "논문을 보면 행복하지 않은 문화권이나 사회에 몇 가지 특성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런 점에서 거의 상위권에 자리해요. 과도하게 강한 집단주의적 생각과 수직적인 문화가 그렇죠.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어서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에너지를 투여하면 타인을 배려할 에너지가 남지 않아요. 수많은 사회 구성원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예의 없고 불쾌한 일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참아내(p. 65)야 하는 사회는 행복감이 높을 수 없어요." 그는 "행복해지려면 서로 조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 집단, 내 사람만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계단에서,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서로 행복 신호를 켜는 작은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반사되는 빛으로 가장 행복해지거든요."(p. 66). '난처한' 시리즈는 총 열 권으로 기획되었다. 2024년에 나온 8권 '바로크 미술'에 이어, 2025년까지 9권 ‘귀족과 미술’, 10권 ‘시민과 미술’을 쓸 계획이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 책이 팔리지 않아도 생계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텐데 왜 계속 쓰는지, 그 동력이 궁금했다. 그는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만 알고 있는 게 아깝지 않나? 미술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누리면 좋겠다"고 답했다. "미술은 본디 특정 집단의 소유물, 엘리트 집단의 언어였어요. 유럽에서는 미술품에 대한 태도로 상류층과 대중을 구분할 정도니까요. 대중이 가지고 있는 미술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커서 당황할 때가 있어요. 환상이 크다 보니 미술품을 신비화하게 되고, 결국 백안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추상미술의 경우 난해한데 고가에 팔린다는 데 대한 분노도 크고요. 비자금, 탈세 등 미술에 덧씌워진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보면 미술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미술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흥미로운 세계인데 말이에요. 대중이 그 세계로 들어가려면 알파벳 같은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미술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싶어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p. 78)가져다주었다면, 저는 미술이 불처럼 우리 삶에 필수 불가결한 세계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p. 79). 장강명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사회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를 지녔으리라 추측하기 쉽다. 실제로 그렇다. "제가 굉장히 의심이 많아요. 신도 믿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글을 쓰거나 사회를 바라보거나 삶을 살면서 몇 가지 원칙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은 존엄하다, 현실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장강명은 작품 창작 못지않게 사회적 활동에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저작권자가 출판사에 기대지 않고서는 자신의 책 판매량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출판계 관행을 공론화했다. 소설 『당선, 합격, 계급』을 비롯해 각종 매체 에서 독서 생태계 붕괴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아내와 독서 모임 플랫폼 '그믐'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 모임과 출판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된 문제를 해소하고, 모임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고자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소설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무료 서평집 『한국 소설(p. 86)이 좋아서』를 만들어 온라인 서점에 무료 배포했고, 동료 작가들과 ‘월급사실주의’ 동인도 만들었다. 몸 하나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기자 출신 작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호칭을 넘어 스스로에게 '리얼리스트'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p. 87). 정재찬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성공을 거두면서 50대에 처음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내면에 쓰고 싶은 열정이 넘쳐야 하는데, 자신은 책무에 떠밀려서 쓰는 사람이라 작가라는 호칭이 여전히 낯설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대학 내 보직을 겸하면서도 2~3년에 한 권씩 부지런히 썼다. 정재찬의 책은 한 편의 강의처럼 독자를 이해시키고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는 그 비결로 글을 쓰며 자신의 글을 아주 많이 읽는다고 했다. 쓰고 있는 글이 술술 읽히는지 반복적으로 확인한다고 했다(p. 95). "저는 대충 거칠게 써놓고 다듬는 '조각가 스타일'이 아니에요. 나무에서 숲으로, 숲에서 나무로 계속 심고 뽑고 자르고 옮기는 스타일이죠. 한 줄을 쓰면 그 앞부터 다시 읽고, 한 단락을 쓰면 몇 단락 앞부터 다시 읽고, 만족할 때까지 되먹임을 거듭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죠. 제 책이 강의를 옮겨놓은 듯해서 수월하게 쓰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수월하게 읽히도록 쓰는 과정은 전혀 수월하지 않답니다." 이렇게 반복해 읽으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글의 '리듬'이다. "리듬은 ‘의미의 리듬’일 수도 있고 ‘형식의 리듬’일 수도 있어요. 일종의 감각이죠. '글을 잘 쓰려면 모든 문장을 짧게 쓰라'라는 식의 말을 싫어해요. 짧은 문장도 있고긴 문장도 들어가면서 리듬이 생기는 거죠. 그런 균형 감각이 없으면 좋은 글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용이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통속적이거나, 형식이 너무 멋을 부리거나 너무 단순하면 훌륭한 독자들도 몇 페이지 이상 넘어갈 수가 없어요."(p. 96). 그는 작가는 자기 글의 첫 번째 독자이므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많이 읽어 독자로서 좋은 안목을 갖추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했다. "작가는 자기 글의 최초 독자잖아요. 독자로서 안목이 후지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어요. 물론 글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보장되진 않지만,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 거예요." 그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무도 읽어주지 않은 초라한 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는 일이라며, 그렇기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스스로 격려하고 비판하며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독자들에게 ‘시 배달부’ 역할을 해온 정재찬은 책을 내며 ‘문학’과 '문학교육' 사이의 경계선을 고민한다. 순수문학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책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p. 97). 『불편한 편의점』 출간 직전인 2020년에 펴낸 에세이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두고 그는 20년 동안의 '작가로서의 생존기'라고 말했다. 이 책 역시 2019년부터 출간할 출판사를 찾았는데, 일곱 곳에서 거절당하고 여덟 번째 출판사에서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는 글쓰기를 지난한 참호전에 비유한다. '고립'은 그의 글 쓰기 제1원칙.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더군요. 초고를 쓰는 서너 달 동안은 지방에 작업실을 구해 작업해요. 아내와도 2주에 한 번 만날 정(p. 108)도로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죠." 작업실에서는 주로 브릿팝과 록으로 구성된 ‘노동요’를 들으며 글을 써내려간다. 소설을 쓰는 상상력도 고립에서 나온다. 배경 취재와 캐릭터 설정은 참호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끝내놓는다. "『불편한 편의점』은 다양한 접객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과 편의점 취재 내용을 조합해 만든 이야기예요. 상상력으로 취재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죠." 김호연의 '참호전' 루틴은 이렇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걸어서 작업실로 출근하며 그날의 집필 내용을 정리한다. 작업실에 도착한 뒤엔 평범한 직장인처럼 이메일을 확인하고 웹 서핑을 하는 데 한 시간 정도를 쓴다. 그다음은 ‘오늘의 노동요’를 세팅하는 시간. 플레이리스트 선정까지 완료되면 본격적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한 시간쯤 글을 쓰면 커피를 마시며 독서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휴식을 취한다. 정오 무렵엔 글쓰기의 필살기'인 산책이 필수. 그는 산(p. 109)책에서 글쓰기의 길을 찾는다고 했다. 제주의 중산간 길에서 『연적』의 클라이맥스가, 대전의 갑천 산책로에서 『파우스터』의 반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뒤엔 분량과 내용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글쓰기를 반복한다. 배부른 느낌이 작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아침과 점심은 먹지 않는다.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일상이다(p. 110). 베르베르의 고민은 세간의 비판이 아닌 작가라는 직업의 본질로 향한다. 그는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작품 활동 30년이 넘은 작가의 지나친 겸손은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신간을 낼 때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신이 안 서요. 독자들을 만나 사인하고, 해외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저의 글에 대한 타인의 감상을 실감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독자들과의 만남을 떠올림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그 힘으로 날마다 꾸준히 글을 써나 갑니다." 그는 오직 펜을 잡고 상상의 세계를 뻗어나가는 지금이 멈추지 않기를 희망할 뿐이다. "제게 책을 매년 한 권씩 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어요. 어디까지나 제 선택이죠. 저는 뇌의 생산성을 늘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 기능을 상실할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뇌가 기능하는 한 그 잠재력을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데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요. 삶(p. 121)의 끝에 다다라 결국 충분히 많은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p. 122). 이슬아가 말하는 '글쓰기란' 밤새워서 쓰는 글은 좋지 않다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는 행운 속에서 살아가는 게 좋으면서도 무섭다. 마감이 반복되면 글은 자연스레 느는 것이 아닌가. 마감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관성을 믿는 편이다. 보통 청소와 운동을 한 다음 늦은 오후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밤새우지 않는다. 새벽에 쓰는 글이 별로 좋지 않고, 밤을 새운 여파가 다음 날까지 이어지더라. 작가가 되려면 푸시업을 열심히 윗몸일으키기랑 플랭크와 스쿼트를 열심히 해야 한다. 어차피 작가가 되는 길에 왕도는 없고, 글쓰기 공부는 알아서 하는 건데, 코어 근육이 없으면 통증 속에서 이 일을 하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10대들에게 스쿼트, 푸시업, 플랭크, 윗몸일으키기, 데드리프트 5종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이것만 하면 출발할 수 있다고. 작가의 자질은 근육이다. 좋은 글이란 '그럼에도 살고 싶어지는' 글 미야자키 하야오가 저서 『책으로 가는 문』에서 "어린이에게 좋은 책이란 '태어나기 잘했다'라고 느끼게 하는(p. 136)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어린이문학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삶에서 고단한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이 모든 걸 겪는 게 좋구나' 느끼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독자들이 "오늘을 살아내는 게 너무 버거웠는데 이슬아 책의 한 구절 덕에 하루를 견딜 힘을 얻었다"고 할 때마다 '살고 싶어지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p. 137). 지금까지 낸 책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은 2006(p. 180)년에 출간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라고 했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어른아이'들에게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며 다독이는 책이다. 나이듦을 두려워하지 말며, 슬픔 앞에서는 굳이 어른인 척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책 제목도 스스로 정했고, 매 꼭지를 책 한 권을 쓰듯 공들여 썼다. "한 꼭지를 쓸 때마다 100여 권의 책을 읽고 관련 논문을 찾아봤어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책이자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가장 안 팔리는 책이기도 합니다."(웃음) 왜 그 주제에 천착한 걸까. 김혜남은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처음 경험한 게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삶을 뒤돌아보니 상실이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더라고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끝없이 상실을 겪어요. 결국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죠. 그 여정을 죽 따라가고 싶었어요. 이번에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를 『만 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으로 고쳐 쓰면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p. 181)에 있는 내용을 많이 가져왔어요."(p. 182). 그의 작가 생활은 늘 몸의 고통과 함께였다. "뭐 좀 하려고 하면 (수술로) 또 헤집는" 상황이 반복됐다. 재발할 때마다 회복까지 최소 반년이 걸렸다.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담담해지더라며,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놀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병실에서 책 교정을 보는 일도 대수롭지 않아졌다. "고통이 찾아오면 수용하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몸에 익었어요.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자책하지도 않아요. 그저 차분히 관조하며 건조하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러다 보면 또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요. 그렇게 기다려요." 암과 싸우는 중에도 매년 한 권씩 썼다.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생활인으로서 오랜 기간 훈련된 자기 규(p. 211)율’ 덕분이다. 고등학생 딸을 둔 24년 차 주부이기도 한 그는 딸 등교 후부터 시작해 하교 즈음인 4시까지 '직장 생활'하듯 매일 글을 쓴다. 시간이 귀하다 보니 책상 앞에서 '예열'할 시간도 없이 그냥 쓴다. 주어진 자유로운 몇 시간에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작업하는데, 어떻게든 작가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온 셈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하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임경선은 힘들어도 버티며 글을 써온 건 사회적인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닫힌 공간에서의 가사 노동은 한계가 있어서 가급적 사회적인 일을 해야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작가로서 해내고 싶은 것도 역시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제가 쓰고 싶은 걸 꾸준히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이해해주는 독자들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걸로 충분해요. 굳이 더 욕심부리자면 젊은 독자들이 꾸준히 유입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고요."(p. 212). 특히 소설이든 에세이든 행간의 의미까지 잡아내는 독자들의 후기를 볼 때 자기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느껴 행복하다고 했다(p. 213). 그는 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면서 ‘정말 재밌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어야 계속 쓸 수 있다고했다. "처음에는 업계도 의식하고 독자도 의식했지만,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남아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나’ 그것만 바라보게 됐어요. 그 외의 것은 소음 이에요." 그는 작가에게 중요한 문제는 '계속 써나갈 수 있느냐' 라며 "앞으로도 흔들리는 인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밀도 있게 써나가고 싶다"고 했다(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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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마약이 만연하고 있다
- 한때 대한민국은 ‘마약청정지대’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더는 그렇지 않다. 마약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유통되고 있다. 이제 마약에 대해 알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익한 책이다. 그럼 누가 주로 마약을 할까? 우리가 뉴스에서 주로 접하는 마약 사범은 연예인이나 재벌 2세다. 하지만 대검찰청 「마약류 범죄백서」(2022)를 보면 마약 사범이 대부분 무직자나 농업인임을 알 수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1만 8395명 가운데 무직자가 31.5%에 이른다. 회사원이 6.2%이고, 예술/연예계 종사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 보도로 인해 연예인이나 재벌 2세가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몇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약을 더 많이 한다. 가난은 만성 통증처럼 마약에 중독될 확률을 높인다. 여러 연구에서 가난과 마약 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도 마약 투약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거나 무직이다. 정규직은 30.9%에 불과하다. 마약 투약자 중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 비율은 54.4%에 이른다. 게다가 지난 한 달간 수입이 50만 원 미만인 비율은 절반이 넘는 52.2%에 달한다. 가난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약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고 알코올 등에도 더 취약하다. 가난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더 아프고, 아프니까 일을 할 수 없어(p. 95) 더 가난해진다. 뭐가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가난해서 마약을 하고, 마약을 하니 가난해진다(p. 96) 우리 몸, 정확히는 뇌에서 소량의 도파민이 나온다. 섹스를 하거나. 상을 받거나, 게임에서 이기거나, 로또에 당첨되면 도파민이 증가한다. 우리 몸은 쾌락을 느끼게 되고, 도파민을 분비하는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나오는 정도를 중독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 용량하기도 한다. 그래서 각종 중독 하면 도파민이고, 도파민 하면 마약, 그중에서도 필로폰, 그러니까 히로뽕이다. 상자 속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파민을 초콜릿은 55%, 섹스는 100%, 니코틴은 150%, 코카인은 225%,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은 1,000% 증가시키는 것으 로 나타났다." 마약을 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나올 수 없는 도파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다. 도파민이 쏟아지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쾌감을 맛본다. 많은 이들이 천국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p. 105). 안타깝지만 많은 약물중독자들이 스스로 중독을 깨닫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가 2021년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의료기관과 재활기관에서 마약 치료를 받거나 심지어 법으로 치료 보호를 받는 사람조차도 10명 중 3명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최근 1년간 특수 시설에서 치료를 받지 않은 12세 이상의 물질 사용 장애 환자 중 975%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1.9%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노력하지 않았고, 0.5%만이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의 마약 사용자들 은 자신이 중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p. 118). 약의 효과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단 증상이 심하다. 즉 코카인보다 히로뽕이, 모르핀보다 헤로인이 더 그렇다는 말이다. 업 계열인 코카인이 보통 상태에서 사람을 홍분시켜 쾌락을 느끼게 한다면, 다운 계열인 헤로인은 보통 상태에서 고통 등을 억제해 쾌락을 느끼게 한다. 코카인을 끊으면 몸이 피곤하고(그동안 계속 몸이 흥분해 있었다), 잠이 쏟아지며(그동안 잠을 안 잤다), 식욕이 폭발한다(그동안 밥도 안 먹었다). 하지만 헤로인을 끊으면 오랫동안 약이 억제한 고통과 통증이 치밀어 올라와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업 계열의 약을 하지 않으면 보통으로 돌아가지만, 다운 계열의 약을 중단하면 즉시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업 계열의 약도 앞서 말한 신경구조의 파괴로 얼마 못 가 심한 금단 증상을 일으킨다. "헤로인을 하면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하고, 헤로인을 하지 않으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주먹처럼 아프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즐거움을 위해서 하다가, 결국 아프지 않으려고 한다. 마약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안 된다. 이제 삶에서 마약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내성에 이어 금단 증상과 의존성마저 생겼다. 마약이 없으면 고통스럽다 못해 너무 아프다. 앞서 히로뽕을 하다 경찰에 온 50대 남자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몸에 벌레가 기어다닌다고 한 것은 전형적인 금단 증상인 '콜드 터키 cold turkey'와 '코카인 버그(p. 122) cocane bug' 또는 '메스 버그meth bug' 다. “뼈에 소름이 돋아Goose-pimple bone” 마약을 하던 비틀스The Beatles의 존 레넌이 아이를 가지기 위해 마약을 끊을 때의 고통을 노래한 〈콜드터키〉의 한 구절이다. 마약을 하지 않으면 안색이 파랗게 되고 온몸이 떨리며 소름이 끼치며 닭살이 돋는다. 이를 영어권에서는 냉동 칠면조의 피부와 같다고 해서 '폴드 터키' 라고 한다. 금단 중상을 뜻하기도 하며, 단번에 약을 끊으려는 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금단 증상은 단 순히 식은땀과 소름에 그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만 마리의 개미가 내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피부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린다. 아무리 긁어도 계속 가렵다. 코카인이나 메스암페타민으로 인한 환각 증상으로 코카인 버그 또는 메스 버그라고 한다. 온몸을 긁기에 피부가 성한 날이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긁었던 것 같다. 이렇게 흉터가 많은 것도 이번에 알았다." 재활 중독 치료를 받고 있던 사람의 증언이다. 잠을 잘 수도 없다. 눈 만 뜨고 있어도 눈앞에 뭔가가 아른거리고,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자꾸 소리를 낸다.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것 같다. 초조, 불안에 빠지고 심하면 망상에 사로잡힌다. 말 그대로 미쳐버리게 된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너무 아프다. 차라리 안 아프게 죽여달라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약을 달라고 사정하게 된다(p. 123). 마약을 시작하게 되면 삶이 송두리째 추락한다. 얼마 안 가 돈이 바닥나고, 살이 빠지다 못해 근육까지 사라지고,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간다. 감옥, 치료 시설, 재발을 반복한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다. 결국 마약의 끝은 감옥, 응급실, 약물 과용으로 인한 사망, 그것도 아니면 자살이다. 마약은 저주받은 마법이다.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혹은 호기심이나 유혹 등의 이유로 시작해 잠시 천국을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이다(p. 152).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언제 금연을 결심할까? 주로 50대에 몸이 아프거나 심각한 질환에 걸렸을 때다. 그러면 마약 하는 이들은 언제 약을 끊을 결심을 할까?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조사에 따르면, 새 삶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앞으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서)이 들 때가 36.9%(복수 응답 포함)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몸이 너무 망가진 것 같아서가 29%,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서(교도소가 지겨워서)가 188%였다!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렵다. 담배는 평생 참는 것이라고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담배를 끊고 잘 지내다가도 술을 마시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p. 156) 어울리면 '딱 한 번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뇌에는 '술=담배' 로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담배가 생각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마약은 담배보다 더 심하다. 욕구와 갈망이 수시로 치솟는다(이를 '똥 마렵다'고 한다). 마약의 쾌감은 워낙 강렬해 단 한 번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게다가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까지 있다. 그렇기에 약을 끊는 것이 쉽지 않다. 국내 마약류 사범의 재범률은 매년 35~40%에 달하고, 마약 사범의 재복역률은 45.8%로 범죄자 평균 재 복역률(26.6%)의 2배에 이른다. 마약 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범해지는 특성을 보인다. 그만큼 마약을 끊기가 쉽지 않다. 많은 연예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마약을 한다. 심지어 구속되고 풀려나서도 마약을 끊지 못한다(p. 157).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17세에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로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인 세코날Seconal에 중독되었다. 세코날은 당시 유행하던 대마초에 이어 자연스럽게 필로폰으로 이어졌다. 마약 하는 것을 숨기고 결혼했고, 성인 디스코 바와 룸살롱, 가라오케 등 유통 사업도 성공해 30대에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압구정 한양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전혀 없었다. 단, 딱 하나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필로폰이었다.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잘 조절하면서 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끊고 조절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약이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매일이 되었고, 어느 순간 하루에도 대여섯 차 레 필로폰을 투약했다. 사업은 사장인 자신이 없어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굴러갔다. 마약을 하다 보면 충동적이 된다. 그는 사업장 대신 도박장을 찾기 시작했다. 카지노, 경마, 경정 가리지 않고 모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들렸다. 아내 옆에 한 남성 이 보였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가 흉기를 들자 그 남성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쫓아갔지만 그 남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환청이자 환시였다. 마약으로 인한 환각 때문에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p. 162) 약을 끊길 바라는 아내가 7번, 자신이 1번, 함께 마약 하던 후배가 그의 증상이 너무 심각해서 1번, 총 9번을 신고했다. 1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00억 원의 재산은 도박과 약값으로 모두 사라졌지만, 그는 약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된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마약, 도박은 조금만 하고 나 맛있는 것 좀 사주면 안 돼?" 흘려들었던 그 말이 도박장에서 배팅하는데 떠올랐다. 도박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아내와 함께 한밤중에 중국집으로 향했다. 새우를 좋아하던 아내였지만, 돈이 없어 자장면밖에 사줄 수 없었다. 자장면을 먹던 아내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때 모델을 하던 젊은 아내 대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중년의 아내가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식들이 있었다. 더는 인생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는 1999년 국립법무병원(옛 공주치료감호소)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고, 10년의 세월 동안 노력해 2009년 마지막 출소 이후 간신히 단약에 성공했다. 그는 주차 관리 요원과 대리 기사로 하루 4시간만 자고 일하며 10년간 돈을 모았다. 그리고 국립법무병원 조성남 원장님의 지원과 일본 다르크 센터장인 마쓰우라, 마사르 씨의 도움으로 2019년 4월 20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약물중독재활센터인 경기도 다르크Drug Addiction Rehabilitation Center, DARC를 열었다. 오랜 시간 마약을 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마약의 폐해와 단약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약(p. 163)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마악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기관을 직접 설립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마약중독 자에서 마약 치료사로 새롭게 태어났다. 마약은 사람의 삶과 가정을 망쳐놓는다. 하지만 약을 끊으면, 삶이 바뀐다. 가정도 회복된다.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이다. 마약, 함께 노력하면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약을 끊은 당신은 중독에 빠진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p. 164). 모든 상품은 원산지가 가장 저렴하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코카인이 가장 싼 곳은 어딜까? 코카인의 원산지인 콜롬비아다. 미국에서 120달러(15만 원)인 정제된 코카인 1g은 골롬비아에서는 2~10달 러(8000원에서 1만 3000원) 수준이다. 코카인을 포함한 마약중독이 가 장 심한 나라는 어디일까? 콜롬비아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콜롬비아가 코카인을 생산한다는 것과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콜롬비아 마약중독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미국 정부도 콜롬비아 정부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마약을 얼마나 압수하고 몇 명을 처벌했는지 업적을 자랑하는 데만 바쁘다. 콜롬비아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약으로 죽어가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최근 등장한 필라델피아 마약 거리가 특별할지 몰라도 콜롬비아에서는 오래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콜롬비아의 제3의 도시이 자 카르텔로 유명한 칼리시에는 예전부터 '헤로인 거리'가 있었고, 제2의 도시이자 마찬가지로 카르텔로 유명한 메데인에는 800개 점포에서 각종 마약을 24시간 팔고 있다. 2019년 콜롬비아에서 불법 약물을 사용한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명 중 1명꼴인 9.7%에 달했다(p. 206) 하지만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콜롬비아 정부도 자국 내 마약중독자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심지어 콜롬비아에서는 마리화나 20g, 코카인 1g이하를 가지고 있으면 처벌조차 받지 않는다. 치료는 고사하고 약물중독자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나 통계조차 없다. 방송을 보면, 콜롬비아와 관련해서는 범죄자 아니면 부패한 경찰관과 정치인, 그것도 아니면 미녀만 나온다. 하지만 마약중독자나 마약과 관련된 폭력과 살인, 마약 카르텔 간의 전쟁 등으로 고통받는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콜롬비아의 보통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폭력과 살인에 시달리며 사는 것도 억울한데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로 낙인까지 찍힌다. 코카나무가 콜롬비아 농부에게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마약 산업은 콜롬비아 젊은이들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p. 207). 펜타닐의 장점인 '극소량의 강력한 효과'는 생산자에게는 복음과도 같지만 소비자에게는 저주와도 같다. 퍼듀 파마가 생산한 옥시콘틴의 경우, 약물 과용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에 포함된 양은 일정하고 불순물이 없었다. 하지만 멕시코의 여러 마약 카르텔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생산한 펜타닐은 양이나 농도가 들쭉 날쭉한 데다 각종 불순물까지 첨가되었다. 펜타닐은 치사량(2mg)도 매우 적어서 헤로인 1회 투여량의 5분의 1, 필로폰 1회 투여량의 15분의 1만 투여해도 호흡 마비로 사망에 이르렀다. 마약 중에서 펜타닐이 가장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2년 11월에 미국 마약단속국(p. 277)은 펜타닐이 들어간 가짜 처방약 10개 중 6개가 치사량의 펜타닐을 함유하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3차 펜타닐 파동이다. 실제로 2021년 미국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10만 7,522명 중 무려 3분의 2가 펜타닐 사용자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2022년 18~49세 미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자살, 교통사고, 총기사고가 아닌 펜타닐 오남용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마약 파동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돈에 눈이 멀어 타락한 제약회사가 1995년 미국 땅에 옥시콘틴을 퍼뜨렸다. 1996년에 시작되어 2010~2011년에 정점을 찍은 옥시콘틴의 1차 파동이었다. 옥시콘틴 공급이 줄자 옥시콘틴에 중독된 사람들이 헤로인으로 갈아탔다. 2010년에 시작해 2015~2016년에 정점을 찍은 헤로 인의 2차 파동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멕시코 카르텔은 펜타닐을 자체 생산했다. 이렇게 옥시콘틴과 헤로인에 이어 펜타닐의 3차 파동이 2013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사망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7분에 한 명씩 펜타닐로 사망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파동이 아직 정점을 지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 제약회사의 탐욕이 결국 펜타닐이라는 지옥을 불러왔다. 죽지 않아야 할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p. 278) 생산과 밀수를 하는 해외 마약상에게 한국은 '신세계'와 같다. 히로뽕 분말 1kg은 우크라이나에서 6,000달러, 미국에서 1만 달러, 홍콩에서 2만 3000달러이지만 한국에서는 8만 4,000달러이다. " 한국에서 히로뽕은 미국에서보다 8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코카인 또한 한국에서 18당 341달러(45만 원)인데 미국에서는 101달러로 한국이 3배 이상 비싸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국산 야바는 현지에서 3000원 이지만 한국에서는 3~5만 원에 거래된다.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처럼 한국은 전 세계에서 마약 가격이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마약상 입장에서는 마약 밀수에 성공만 한다면 돈을 가장 많이 벌 수(p. 312)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마약 조직에게 한국은 경쟁이 적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블루오션이다. 호주나 유럽, 미국의 마약 시장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다. 미국 12세 이상 인구 중 1년간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17.9%(일생 동안은 45.7%)이고, 코카인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1.9%(일생 동안 142%)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마약을 경험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생 동안 그야말로 '마약'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동남아시아나 북한 등의 마약 조직이 한국에 마약을 들여오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 이미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마약류 밀수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한국인과 손잡고 대규모로 마약을 밀수, 유통, 판매할 경우 국내 마약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p.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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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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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마약이 만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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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의사이기에 갖는 남다른 경험들
- 의사로서 남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사람 사는 모습은 직업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가끔은 남의 직업에 대해서 읽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길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울면서 웃는 남자 오늘도 그가 왔다. 내가 이 병원에 처음 취직했을 때부터 4년 째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불치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가 아프지도 않았다.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했고, 키는 나보다 한 주먹 컸다. 머리는 볼륨을 주었으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딱 고정된 7:3 가르마에, 몸에 딱 맞는 남색 정장이 잘 어울렸다. 모델로는 조금 부족하지만,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멋이 차고 넘쳤다. 검은 구두 끝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강아지 코처럼 윤기가 흘렀다. "과장님, 오늘 원장님과 점심 식사 준비했습니다." 나는 다이어트한다고 점심을 안 먹은 게 2년이 넘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병원 근처 맛집을 물색해 음식을 포장해 온다. 지난달에는 초밥, 이번에는 떡갈비란다. "아, 오늘은 집에 청소기가 고장 나서 점심시간에 수리점 가야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을 했다. "선생님, 제가 대신 갔다 오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런 건 제가 해야죠." "아뇨, 괜찮습니다." "점심 같이 드시고, 제가 맡겨놓고 선생님 퇴근하기 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점심은 정말 안 되겠네요." "선생님, 그런 건 부담 없이 저를 시켜주십시오.? "아닙니다. 원장님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는 다름 아닌 영원한 ‘을’인 제약회사 영업 직원, 이른바 '영맨'이다. 사람의 관계란 <기브 앤 테이크>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대가성 없는 뇌물은 없다. 내가 그에게 부탁을 하면,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의사가 영맨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여러 가 다. 청소기 수리나 자동차 정기 점검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 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을 의사 대신 가 준 영맨도 있었다. 반대로 영맨이 의사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다. 자기 회사 제품을 써 주는 것. 매출은 그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약은 두 종류가 있다. 특허를 받은 신약, 일명 '오리지널'과 20년간의 특허가 풀리자 똑같이 만들었다는 '제네릭' 말이 좋(p. 47)아 제네릭이지, 그냥 짭, 짝퉁, 카피약이다. 오랫동안 독점을 누리 던 신약의 특허가 풀리면, 시장에는 수많은 카피약이 등장한다. 2009년 강력한 진통제인 '울트라셋'의 특허가 만료되자, 국내에서 오르펜, 하이퍼셋, 트라미펜, 도라셋, 듀얼셋, 메가셋 등 무려 67개 카피약이 등장했다. 명품 구찌 가방의 정품 가격이 100만 원이라면, A급 짝퉁은 대략 10~20만 원 선이다. 하지만 정부가 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약값은 오리지널이 100원이면 카피약은 70원이다. 다른 나라도 카피약 가격을 국가가 결정하지만, 유독 한국은 카피약 가격이 비싸다. OECD 평균보다 2.2배, 가장 싼 터키에 비해서는 무려 5배가 높다. 그럼 카피약 원가는 얼마일까? 업계 비밀이지만, 판매가의 10%도 안 된다. 100원 하는 오리지널 약을 그대로 카피한 70원 짜리 약을 팔면, 60원 넘게 남는다. 공장을 세워 직접 만들기조차 귀찮으면, 다른 회사에 약 생산을 맡기고 버젓이 자기 회사 상표만 부착해서 팔아도 된다. 이를 그럴듯하게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이다. 일종의 하청이다. 속된 말로 팔기만 하면 남는 장사다. 그 결과 한국에는 현재 200개가 넘는 제약회사들이 난립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신약 하나(p. 48)없이,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오로지 카피약만 팔아 돈을 번다. 정부가 카피약 가격을 매우 높게 정해, 세금의 일종인 건강 보험료로 제약회사 배를 불려주고 있다.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법. 이익은 제약 회사가, 손해는 국민이 본다. 그럼 또 누가 이득을 볼까? 약 가격만 높으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는 제약회사가 가격을 결정하는 고위 관료를 찾아가지 않을 리 없다. 보험회사는 고위 관료에게 신약 허가를 해달라고 청탁하고, 약 가격을 높게 해달라고 뇌물을 바치기도 한다. 제약회사와 약 가격을 매기는 고위 관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약을 팔아야 하는 영맨으로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그가 팔아야 하는 제품과 성능에 가격까지 같은 약들이 수 십 개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다. 차이점이라고는 고작 제약회사 이름뿐이다. 거기다 제약 회사는 영업 직원에게 매출에 따른 성과급을 주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너에게 달려 있다. 매출이 안 나오는 건 다 네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약이 안 좋거나, 회사가 안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다)" 물건이 거기서 거기고, 가격까지 같은 상황에서, 영맨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 하나다. 약을 차별화하는 대신 약을 파는 자신을 차별화 시키기. 매주 부지런히 병원을 찾아와서 의사에게 눈도장 받고, 뭔가를 건넨다. 볼펜이나 포스트잇은 기본이고, 커피, 커(p. 49)피를 싫어하면 주스를 들고 온다. 기꺼이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려 하고, 심지어 누구는 예비군 훈련마저 대신 다녀온다. 원장님과 나, 그리고 영맨과 회식을 한 다음 날이었다. 전날 나와 원장님이 대리 기사를 불러 차를 타고 가는 걸 배웅하고 제일 늦게 퇴근한 영맨이 가장 먼저 병원에 나와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이며 숫자가 새겨진 숙취해 소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그에게서 꼬릿한 땀과 시큼한 위산 냄새가 풍겼다. 내가 음료를 건네받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술이 덜 깬 듯 얼굴이 벌건 데다, 눈마저 붉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눈꼬리는 내려 가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의 눈은 울면서 웃고, 웃으며 울고 있었다. 속이 쓰려 눈물짓고, 처자식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으리라. 잔뜩 힘을 준 눈꼬리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p. 50). "선생님, 참 잘생기셨어요, 영화 배우 하세요" 50대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작은 키에 머리는 절반 정도 남았으며 배가 살짝 나온, 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아저씨는 나보고 잘 생겼다고 했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넌 내 아들이지만 잘 생기지는 않았다." 스무 살 무렵,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시던 어머니가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하신 말씀이셨다. 피를 흘리며 낳은 어머니마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나를 잘생겼다고 말한 사람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틀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당시 나는 본과 3학년으로 부산 근교의 중소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실습을 나가 있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Y시 정신병원은 부산 달동네에 위치한 P 대학병원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주변에 다른 건물 없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공기마저 상쾌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여러 병원 건물 속 2층에 자리 잡고서 창문마다 쇠창살이 박혀 있는 것으로(p. 172) 부족해 정문마저 두꺼운 철문으로 된 대학병원 정신 병동과는 천지 차이였다. 급성기 환자를 주로 입원시키는 대학병원과 달리, 만성 환자가 대부분인 Y시 정신 병원은 주위 환경도 병원 분위기도 평화로웠다. 실습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이었고, 정신과 레지던트 선생님은 나, 재훈이, 정수, 지혜에게 각각 환자 한 명을 배정해 주었다. 우리는 담당 환자를 관찰하고 또 면담하면서 환자에 대한 리포트를 써야 했다. 내가 맡게 된 환자는 55세 김재환 씨로, 그는 전문의 과정까지 마친 의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에 병이 생겨, 20년 넘게 정신병원에서 입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가 앓고 있는 질환은 그 당시에는 정신분열병이라고 불렸던 조현병이었다. 100명 중 1명에게서 나타나는 질환으로 주로 환각과 망상을 겪으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 안타깝게 그의 여동생마저도 같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 있었다. 이틀 동안 내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바로, 그는 전혀 이상한 게 없었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거나 신문을 보고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조현병은 환각, 그중에서도 환청이 주 증상이지만 그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허공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없었다. 가끔 나를 볼 때마다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p. 173). 그 말을 들은 조원들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너한테 잘 생겼다는 말을 할 정도니까, 정신병원에 있는 거야” 말하며 웃었다. 조원 중에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재훈이가 자기도 그 말이 듣고 싶었던지 “저는요? 저는 어때요?”라고 묻자, 김재환 씨는 "선생님도 잘 생기셨지만, 이 선생님이 더 나아요. 선생님, 꼭 영화배우 하세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몇 년째 병원에 있는 김재환 씨가 심심하기도 하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기분 좋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다른 조원들이 배정받은 환자들은 "나는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저 산까지 1초 만에 다녀올 수 있다." "내 머리에 누가 뭐를 심었다." 등의 말을 했기에 누가 봐도 명백한 문제가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인 수요일이 왔다. 김재환 씨에 대한 케이스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나는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초조했다. 3학년 2학기 시작한 첫 병원 실습이 정신과여서 아직 하얀 의사 가운과 목에 걸린 검은 청진기가 어색했고, 내 교육을 위해 환자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뭘 할 때마 쭈뼛(p. 174)쭈뼛했다. 하지만 이대로 ‘특이 이상 없음’이라는 리포트를 냈다가는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3일 동안 환자를 잘 관찰하지 않았다고 혼나는 건 물론, 좋은 성적도 물 건너 갈 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지났다. 오후 5시가 되면 버스를 타고 병원을 나서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김재환 씨를 찾아다녔다. 그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와 나란히 서서 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분명히 내가 옆에 있는 걸 인지했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산책을 하다가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 용기를 내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저보고 잘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그러세요?" 김재환 씨는 옆에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가 제 귀에다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켜요. 선생님, 정말 잘 생겼어요, 영화배우 하라고 말하라고요 그랬다. 그는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환청을 겪고 있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데, 김재환 씨만 보이는 게 있나요?" "예, 예전 여자 친구가 보여요."(p. 175) "혹시 지금도 보여요? "예. 저기요." 그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다른 남자 환자들만 있을 뿐, 여자는 없었다. 전형적인 조현병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남들은 들리지 않는 것을 혼자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김재환 씨가 고개를 돌려 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잘 생기셨어요. 영화배우 하세요.“(p. 176). 잠이 문제가 아니었다 역세권 사거리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의원을 빼고도, 반경 50m 내에 이비인후과 3개, 내과 3개, 소아과 2개, 피부과 3개, 안과 2개 외에도 비뇨기과, 정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 산부인과가 각각 하나씩 있다. 그중에서도 치과가 무려 5개로 제일 많았고, 약국만 6개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길가에 이렇게 많은 병의원을 볼 수 있 는 곳은 한국뿐이다. 거기다 유럽처럼 예약도 필요 없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병원과 의사를 선택해서 갈 수 있다. 사람들은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의료 부분에서만큼은 가희 ‘조선천국’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건강의학과, 정신과 가기를 꺼리나 보다. 수면제를 받으러 정신과도 아닌 우리 병원에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선생님, 원장님이 대장 내시경 들어가셔서요, 환자분에게 말 씀드렸고 똑같은 약 처방해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환자를 접수했다. 63세, 김명순 님, ‘재진’ 같은 약을 그대로 처방하는 '리핏 처방'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p. 180) 인사 한 번 하고, "똑같은 약 그대로 드릴게요." 한 후 마우스 버튼 클릭하면 끝이다. 김명순 씨가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머리에 기본 화장만 하고, 립스틱을 칠하지 않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 었다. "안녕하세요? 김명순 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 네, 제가 원장님께 몇 년째 수면제를 먹고 있는데 그 약 받으러 왔어요.” 병원이 익숙한지 그녀는 긴장 없이 술술 말했다. 차트를 보니, 그녀는 수면제 일종인 졸0뎀을 3년 넘게 복용 중이었고, 내 진료는 처음이었다. 단순 고혈압이나 당뇨 환자를 생각했던 나는 약 이름을 보자 긴장이 되었다. "특별히 약 먹으면서 불편한 점 없나요?" "네, 옛날부터 쭉 먹고 왔고..... 괜찮습니다.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몇 년 전, 이 약이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한 언론에서 이 약을 '악마의 수면제'라 부르며, 이 약을 복용 중이었던 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이 약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환자에게 돌렸다. 모니터에는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국민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생전에 아름다웠던 모습이 있었다. "예전에 뉴스에 이 약을 먹던 연예인이 목숨을 끊어서 이슈(p. 181)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약 부작용으로 죽은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제 생각으로는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가 연예인이다 보니, 정신과 치료를 안 받고 수면제만 처방받아서 먹다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 3명 중에 2명은 불면증을 호소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수면제를 복용하는 분에게 물어봅니다. 혹시 우울하지 않....." "엉엉엉엉~"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명순 씨가 둑이 터진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들뻘인 의사 앞에서. 당황스러웠다.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는 그 특유의 어둡고 짙은 안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김명순 씨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이었다. "자, 어머니, 진정하시고." "제가 몇 년 동안 진료받으면서 우울하냐고 물어보신 분이 선생님이 처음이셨어요. 엉엉엉...... 어떻게든 제가 살아보려 고...... 헉 헉.....” 울음과 말이 섞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어렵게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썼다는 그녀의 굴곡진 삶이 펼쳐졌다. 그녀는 잠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불면증으로 약을 먹을 게 아니라, 우울증을 치료가 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정신과 치료를 권했(p. 182)다.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수면제를 타러 병원에 왔다. 나는 똑같은 뉴스를 보여주며 똑같은 질문을 한다. "우울하지는 않으세요?" 대개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어떤 이는 김명순 씨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부디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좋은 꿈 꾸기를(p. 183). 82년생, 이정민 그는 나와 같은 1982년생 개띠였다. 외동아들인 그는 중고등 학교 때부터 말수가 적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게 좋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항상 혼자였다. 가끔 학교 수업 시간에 뜬금없이 갑자기 앉았다 일어나기도 하고, 멍하게 있을 때가 있어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상담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부모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민이는 20살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았고, 신경증 장애로 4급 판정이 나와 2년간 공익 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런 그가 이상해진 건,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해인 2003년부터였다. 그는 "누군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라며, 환청과 피해 망상을 호소했다. 2008년 결국 그는 조현병으로 진단되었고, 한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씻지 않는 등 이상한 행동은 지속되었다. 조현병은 정신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질환이면서도, 치료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평생 유병률은 1% 정도로, 남자는 15-25세에 주로 발생한다. 환각과 망상이 주요 증상인데, 환각(p. 196) 특히 환청이 너무나 생생하여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다. "내 귀에 도청기가 있다" 1988년 8월 4일 목요일,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도중 한 사람이 난입해서 난동을 피운 적이 있는데, 피해 망상과 조현병을 앓는 환자로 밝혀졌다. 심한 환각을 주 증상으로 하는 조현병의 경우, 20%는 완전 회복, 15-35%는 지속적으로 심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며, 50%가 평생 입퇴원을 되풀이한다. 정민이는 운이 없었다. 완전히 회복되는 20%에 속하지 못했다. 증상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환청과 망상이 심해지면 입원을 했고 호전되면 퇴원을 했다. 2010년, 2013년, 2015년에 6개월씩 장기간 입원했을 뿐만 아니라, 짧게는 일주일간 2번을 포함하여 총 6번이나 정신병원에 들락날락했다. 그가 조현병으로 진단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 동안 2년 가까운 시간을 정신 병원에서 보냈다.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뚜렷한 직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민이는 자신이 길을 갈 때 처음 보는 여성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그는 빌라 2층에 살았는데, 위층 여자가 끊임없이 쿵쾅쿵쾅 발을 굴려 고통받았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하지만 조사해본 결과 3층에 여자가 산 적은 없었(p. 197)다. 2016년 1월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았고, 가족과 지인이 도움 없이 혼자 살았다. 3월부터는 집을 나와 빌딩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갔다. 정민이는 그 사건이 있는 날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다. 서빙을 하고 있다 불결하다는 이유로 주방보조로 담당이 바뀌었다. 그는 어떤 여자가 자신을 험담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뿐 아니었다. 사건 전날, 길거리 공터에서 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고, 그는 깜짝 놀라 피했지만 자신의 신발에 떨어졌다. 역시나 여자들이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괴롭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5월 16일 오후 5시 40분, 일하던 음식점에서 조퇴를 하면서 그는 주방에 있는 흉기를 챙겼다. 지하철을 타고 저 멀리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한 건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2시간 정도를 머물렀다. 그러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이동하여 오후 11시 44분, 사건이 발생한 건물로 돌아왔다. 약 50분간, 강남역 인근 주점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회를 엿보았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남성 6~7명은 그냥 보냈다. 그리고 새벽 1시 7분쯤, 김 씨는 남자 용변 칸에 앉아 대기하다가 여자가 들어오자 식당에서 들고 온 흉기로 마구 찔러 여자를 죽였다. 그가 살해한 22살의 젊은 여자는 정민이에 대해 험담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였다(p. 198) 몇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에 있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의 전말이다. 여성 혐오 범죄니, 묻지마 살인이니 말이 많았지만, 문제는 단순했다. 환청과 피해 망상에 시달리는 조현병 환자인 이정민(가명) 씨가 치료 받지 못하고 방치된 채 지내다 피해망상이 심해져 벌인 사건. 이정민 씨가 2016년 1월 정신병원 퇴원 후에도 치료를 잘 받았다면,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7년 1월 12일 항소심에서 법원은 이정민 씨에게 징역 30년에 치료 감호와 20년의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명령했다. 이어진 민사 소송에서 이정민 씨에게 피해자 부모에게 5억의 배상을 하라고 판결이 났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2021년 5월 5일 남양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20대 아들이 60대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했다. 피해자와 장소만 달랐지, 같은 이유로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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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궁금한 직업의 세계 - 의사
- 의사이자 책을 몇 권 저술한 작가의 또 다른 책이다. 의대 공부, 의사의 일을 하느라 바쁠텐데 다양한 책을 읽고 또 책을 쓰고 있다. 저자의 일상에 대한 내용이 재밌다. 저자의 다른 책을 읽고 끌려 이 사람이 쓴 책을 계속해 보고 있다. 이처럼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볼 책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 18세가 되면, 무조건 보육원을 퇴소하여 자립해야 한다. 매년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만 18세가 되어 세상 밖으로 던져진다. 아이들 손에 쥐어지는 것은 100만 원에서 500만 원 남짓한 돈이 전부이다. 그 돈으로는 대학은커녕, 방 한 칸 얻기도 힘들다. 2015년 서울시의 경우 보육원을 나온 아이들이 취업을 하는 경우가 다섯 명 중에 세 명, 그 세 명 중에 두 명은 월 임금 150만 원 이하를 받는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12,448명의 아이들이 아동 양육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p. 72). 하루는 토요일에 가족과 함께 경기도에 있는 00 리조트에 묵고 있었는데, 대학교 때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던 친구 정민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목소리가 불안하고 떨렸다(p. 172). "친구야, 둘째가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열이 계속 나서 응급실에 왔어. 병원 의사가 입원해서 보자네. 뇌척수액 검사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는데 어떡하면 좋노?" "애 상태는 어떻노?" "잘 놀고, 다른 증상은 없어. 그런데 어제부터 열이 계속 나더니 안 떨어지네." 어떤 상황인지 눈에 그려졌다. 친구에게는 처음이겠지만, 똑같은 상황이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 아이가 크면 문제없는데, 세상에 나온 지 100일도 채 안 된 아이는 항상 어렵다. 도대체 왜 열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열 말고는 다 괜찮아 보이는데, 상태가 반나절 만에도 의식이 처질 정도로 급속도로 나빠지기도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뇌수막염 검사를 여섯 시간 늦게 했다고, 병원 잘못이므로 손해 배상을 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사가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숫자와 사진 으로 볼 수 있는 검사뿐이다. 팔뚝만 한 그 조그만 갓난아이는 각종 검사를 받느라 울고불고 난리고, 그런 아이를 보고 있는 부모는 혹시나 큰 병은 아닐까,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입원까지 하라고 하니, 당장 집에 가서 짐을 싸 와야 할지, 다음 주 회사 출근은 어떻게 해야(p. 173)할지, 첫째는 또 누가 돌볼지 머리도 마음도 아파온다. 거기에다 뇌척수액 검사라니. 10cm가 넘는 바늘을 척추 사이에 넣어 뇌척수액 일부를 뽑아내야 한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그 작은 아이 등에 커다란 바늘을 꽂아 넣는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대개 2개월 미만의 영아가 명확한 이유 없이 열이 나면, 거의 대부분 뇌척수액 검사를 하는 게 루틴(기본 절차)이다. “....아 정민아, 그게 의사는 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특별한 증상도 없고 그러면 검사 안 하고는 알 수가 없다.” "해열제 먹고, 집에 가서 좀 지켜보면 안 되나?" 갓난아이 아빠인 친구 정민이는 당장이라도 집에 가고 싶을 것이다. "대개는, 대충 한 95% 아니 97%(그 어떤 근거도 없는 막연한 추측이다) 는 괜찮거든. 내가 환자나 보호자면 당연히 집에 가겠지. 근데 또 그 1~2%가 막상 터지면 100%거든. 의사 입장에서는 99% 확실해도, 그런 환자를 100명, 천 명 보니까. 그러면 꼭 몇 명은 문제가 생겨. 그러니까 의사는 무조건 검사를 하자고 할 수밖에 없지."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흐른다. 의사인 나도 말이 없고, 환자 보호자인 친구도 말이 없다. "야....니아같으면 어떡할거고?" "내 아면. 하아. ...일단은 집에 가서 마음 졸이며 지켜보겠(p. 174)지....." "그래, 알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여하튼 고맙다." "참, 이게 어렵다. 어떻게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데...." 이렇게 의학은 불확실하다. 게다가 서로 입장이 다르다. 아이에게는 괜찮을 가능성이 99%이지만, 천 명의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는 그 1%가 열 명이다(p. 175). 꼰대의 잔소리 날이 따뜻해지던 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고3 남학생이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어머니와 함께 왔다. 문진과 신체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전형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자극성 장증후군이었다. 장운동을 조절하는 약을 처방하고, 주의할 음식을 설명하고 1차 진료가 끝났다. "고3이죠?" "네." "많이 힘들죠? 근데 학생,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왜냐하면 슬프게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큰 인생 분기점이 바로 대학이거든요. 인생에 다섯 번의 기회가 와요. 그 첫 번째는 부모님이에요. 딱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죠. 학생이 결정할 수는 없어요. 사람들이 아무리 '헬조선, 헬조선' 그러지만, 우리나라 꽤 살기 좋(p. 178)은 나라예요. 방글라데시 알죠? 거기서 여자로 태어나면 지금 학생 나이에 딱 세 개 할 수 있어요. 옷을 만들거나, 옷을 빨거나, 아니면 옷을 벗어야 해요. 슬픈 현실이죠. 동남아 사람들이 왜 말도 안 통하는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 대접 못 받아가며 일 하는 줄 알아요? 거기, 시간당 임금이 500원에서 1,000원이거든요. 한 달 내내 벌어도 10만 원에서 30만 원 받아요. 근데 한국에서 일하면 200만 원 가까이 벌거든요. 그러니까 그 고생에 천대받으면서도 우리나라에 와서 아무도 안 하는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는 거예요. 열 배 더 받으니까. 1970년대, 우리나라 사우디 건설 현장, 독일 광부, 간호사가 딱 지금 모습이에요. 근데 학생은 좋은 나라,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어요." "두 번째는 대학이에요. 의사 하고 싶어요? 시험 잘 쳐서 의대만 가면 돼요. 그러면 95%는 의사 돼요. 제가 17년 전에, 수능 못 쳐서 시급 2,000원 받으며 아르바이트하다가, 1년 만에 수능 한번 잘 쳐서 과외하니까 시급이 25,000원이 됐어요. 열 배 넘게 올랐죠. 술집에서 서빙할 때는 사람들이 다 저한테 반말했어요. 수능 잘 쳐서 1년 만에 과외하니, 학생 어머니가 아들인 저한테 꼬박꼬박 존댓말해요. 그뿐만 아니에요. 시급 2,000 원일 때는 길가에 떡볶이 하나 못 먹었어요. 왜? 저(p. 179)거 먹으려면 한 시간 일해야 하거든요. 근데 1년 지나 시간당 25,000원 버니까, 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스테이크 썰어요. 지금 힘들겠지만, 수능 한 번으로 학생 인생이 바뀌어요. 그것도 당장." (다만 지금은 수시 확대로 어렵다.) "세 번째는 결혼이에요. 근데 결혼 상대는 결국 주위 사람이거든요. 사람들이 의사 남편 만나고 싶다고 그러죠? 제일 쉬운 방법은 자신이 의사가 되는 거예요. 사실 이것도 거의 대학으로 결정돼요." "네 번째는 자식이죠. 로마 시대 오현제 가운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명상록』까지 쓴 철인 황제 아들이 망나니 코모두스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에요. 세상에서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되면 범죄자가 어디 있겠어요." "다섯 번째는 평생 동안 해서, 그 분야에 1등 하는 거죠. 웹툰 봐요? 저는 가끔 깜짝 놀라요. 연재 웹툰 말고 '베스트 도전, 도전 만화'에 얼마나 많은 만화들이 있는지. '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재하는 거구나.' 진짜 어렵죠. 인생을 다 바쳐서 도전해도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어른들이 '공부해 라, 공부해라' 하는 거죠. 힘들지만 딱 1년만 고생해요. 이제 6 개월 남았네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전(p. 180)환점이에요." 과외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였다. 못 해도 수십 번은 한 오래된 닳고 닳은 이야기. "선생님 말씀 잘 들어. 돈 주고도 못 듣는 이야기니까." 어머니는 진지하게 듣지만, 학생은 '나는 그냥 배가 아파서 왔는데, 왜 저딴 이야기를 하지' 이런 표정이다. 실패다. 나는 꼰대다(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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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궁금한 직업의 세계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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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공감제로인 사람들이 늘어간다
- “전체 인구의 4%, 사람 25명 중 1명은 공감제로, 양심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 주위에는 공감제로가 없는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면 당신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아니면 당신이 양심이 없는 공감제로이거나. 전체 인구의 4%, 사람 25명 중 1명이 양심이 없는 공감제로라고 한다. 이 문제는 최근에 이르러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양심이 없는 사람이 25명 중 1명이나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하다. 양심이 없는 공감제로는 겉으로 거의 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이 함께 지내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일상 곳곳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으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고 우리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있다.”(인터넷 교보문고) 이 책은 공감제로인 사람들에 대한 책이다. 물론 공감제로인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가능성은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이 볼 가능성이 많다. 이기적으로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피하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 피해야 될 부류의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를 비롯해,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자기애적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극단적인 강박성 인격장애obssessive personality disorder 등 여러 가지 인격적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대하면서 한가지 공통점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신과 영역에서는 한 사람이 꼭 한 가지 진단에 들어맞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정신과적 진단의 문제점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조합해 진단을 내리는 체계이므로 진단명으로만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이러다 보니 한가지 진단명에 해당이 되더라도 다른 진단의 특성들을 공유하는 것이 종종 관찰된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인격장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이 있다면 거기에 집중했을 때 이런 사람들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여러 가지 진단명보다는 특성에 대한 정보를 더 단순하게 제공해 준다면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일까? '공감능력의 부재' 바로 이것이 우리가 피해야 할 사람들의 공통 적인 특징이다(p. 21). 세대를 넘어 전달되는 공감장애 후성유전학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당시, 독일은 네덜란드 서부지방으로 가는 철도를 봉쇄하고 식량 운송을 차단했다. 이 일로 인하여 1944년에서 1945년으로 넘어가던 약 7개월 동안의 겨울에 대기근이 일어나 약 1만 8천여 명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그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자궁 속에 있던 약 4만 명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기록된 데이터를 토대로 보면, 임신 마지막 3기에 엄마가 기근을 겪었을 경우 태어난 아기들은 대부분 성인이 되어 당 뇨병을 앓았다. 아마 세상에 나오기 전의 지독한 기근이 앞으로도 이런 시련이 지속될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전자에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일으켜 당대사에 관한 유전적 표현이 검소하게 변화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장한 이후 풍부한 식량에 의한 당대사를 감당해낼 수 없어 당뇨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 외에도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3배가 높아지고, 정신분열병에 걸릴 위험이 2.7배가 높아지는 결과를 보였다. 놀랍게도 기근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아이들은 정상 체중으로 태어났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어 아기를 낳았을 때에는 마치 기근이 있었던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작은 아기를 출산했다. 자신의 초기 영양상태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치는 기이한 효과에 대해 당시에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흉작과 기근이 자주 닥치는 스웨덴의 외딴 지역(p. 153)을 조사하여, 조부모들의 사춘기 이전 영양상태가 손자들의 당뇨병 및 심장병에 걸릴 위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유전자의 후성유전적 변화가 유전되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최근에 단일 정신과적 질환에서도 후성유전적 변화가 보고되고 있다. 거식증 환자들은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 OXTR에서 화학적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선천적 요인으로 나타나기보다 환경과 심리적 상태에 의한 후천적 변화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 우리의 유전자와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나의 성격적 결함이 유전자에 그대로 각인이 되어 나의 후손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성격의 결함이 단일유전자 질환처럼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가령 아버지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위선자이 더라도 어머니의 공감능력이 살아 있다면 자식은 공감능력이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한쪽 부모의 애정이 다른 쪽에서 온 후성유전적 문제를 완화시켰을 수도 있다. 생애 초기의 긍정적인 경험 역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조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손들이 똑같지는 않더라도 대를 이어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정신적 문제의 대물림은 물론 인성과 양육 태도의 대물림으로 인한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후성유전학에 의한 변성된 유전자의 대물림 역시 그에 못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결론적으로 유전자의 이상이든 환경의 문제이든 어느 한 가지로만 공감능력을 떨어트리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유전적 문제만(p. 154)해도 알려진 것만 수십 가지라서 한두 가지만 가지고 공감능력을 떨어트린다고 보기 힘들다. 설령 매우 강한 유전적 성향을 지녀 어쩔 수 없이 평생을 사이코패스로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초기 경험과 안정적인 양육 여부에 따라 범죄에 빠져들지 않고 사회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 친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p. 155).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억압적인 문화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사회 전체가 신경증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면서 자살률이 치솟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억압적이고 군사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아동학대 발생 건수는 매해 꾸준히 늘어 2015년에 처음으로 1만 건을 넘어 2010년에 비해 77.2%나 증가했다. 이중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가 전체의 81.8%로 가장 많다. 대부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버릇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 때리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인다. 때려서 버릇을 기른다는 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혐오감을 최대로 줘서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목표로 삼은 나쁜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때리지 않고 심한 벌을 세우지 않더라도 나쁜 행동을 못하게 충분히 훈육할 수 있다. 당신이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화를 낼 때,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자신의 분노를 아이에게 전가시키거나, 당신이 느낀 모멸감을 아이에게 전가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너의 이런 행동 때문에 화가 났어"라고 조용하게 말하더라도 충분히 화를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당신의 마음은 좀 더 편해질 것이다. 또한 아이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문제였다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하고 고쳐나갈 수 있게 한다. 이제는 폭력을 합 리화하는 사회적 문화의 대물림을 끊고, 우리 후손들을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길러 공감능력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 제로들이 최소화될 것이며, 설령 있더라도 사회의 규칙을 잘 받아들여 누군가를 쉽게 착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p. 167). 뉴올리언스 대학의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폴 프릭Paul Fick에 따르면, 사이코패스가 될 가능성이 있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전조로써 행동장애를 보이는 아이들의 경우, 5세 이전에 치료를 시작하면 공감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어야 하고, 가정과 교육시설에서 공감능력을 키우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공동체적 생활이 회복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상호연관성은 사이코패스들이 그 사회의 규율을 어릴 때부터 습득하게 만들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활동하게 한다. 한 연구에서 공동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서구 세계에 비해 현(p. 246)격하게 낮은 사이코패스 유병률을 보였다.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생명의 존엄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자란다면 어릴 적부터 개구리 한 마리를 죽이더라도 주위에서 생명의 가치와 존중의 마음을 가르쳤을 것이다. 비록 사이코패스라도 어린 나이일수록 그런 가치의 내면화가 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자본의 가치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며, 비열한 기업인이나 투자자가 돈만 벌어도 우상화한다. 국가는 전쟁을 통해 혹은 전쟁을 대비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면서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 가정에서의 형편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공감의 원천인 가정에서 아이들과 눈 맞출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다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이들과의 시간을 소홀히 하고, 대학입시를 위한 사교육이 진정한 교육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기회의 불평등과 결과의 불평등이 교정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공감 제로들이 우상화되는 세상일수록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이다(p. 247). 죄책감을 갖지 마라 공감제로들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할 때 주로 죄책감을 이용한다. 죄책감을 유발시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흔하게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 시키는 것이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 죽겠어."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다.)(p. 247) "네가 정신 차리지 못하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네가 안 태어났으면 우리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야."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도덕적 신념을 들먹거리기도 한다. "가족끼리 돕는 건 당연한 것 아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심지어 상대방의 가치를 심하게 폄하하기도 한다. "네가 이기적인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이런 말들은 누구든지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공감제로들은 상대를 조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니 주의해야 한다. 죄를 짓거나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무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면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대부분은 스스로를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비난을 들으면 처음에는 자신의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내가 친절하지 않고 무관심하며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쉽게 죄책감을 느끼고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거절을 못하게 된다. 특히 자신에 대한 확신이 떨어질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크지만,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거절을 못하는 데에는 사회적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p. 248)려 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거나 상처 줄까 봐 두려워한다. 또한 배은망덕하다는 평판이 날까 봐 두렵고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한 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흔드는 일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이런 두려움을 심어 주면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원하는 대로 조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처음 가지고 있는 생각과 원칙들을 고수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통스런 현실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언젠가 좋아질 거라며 위로하며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자세는 당신을 조종하기를 원하는 공감제로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분명히 밝히지만, 당신이 인정받고 싶은 다른 사람들 중에 그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의심하지 마라. 그리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 사회가 가진 통념을 무시해야 한다. 가령 부모나 자식과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통념 말이다. 그래야 객관적인 시선과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과정이 괴로울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이전 패턴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스스로 이전 패턴들에서 벗어나 변화를 주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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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로또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팍팍한 삶
- 이 책의 저자는 30대 초반의 현직 여경이다. 우연히 이 저자의 책을 읽고 계속해 짬짬이 찾아 읽고 있다. 이 책 제목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는 로또 당첨금은 농협 본점에서 주기 때문에 1등에 당첨되어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경찰이 되어 평생 복무하면 15억을 받는다고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로또를 사게 된 삶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서민 대부분은 삶이 팍팍하다. 로또라도 기대하는 서민들의 마음이 애잔하다. 정식 공무원 신분으로 2017년 7월에 받은 월급의 실수령액은 1,581,130원이었다. 심지어 정근 수당(공무원의 근무 연수에 따라 지급하는 수당으로, 1년에 두 번 지급됨) 77,870원이 추가로 나온 달이었는데도 그랬다. 정근 수당도 뭣도 없는 2017년 10월엔 실수령 1,221,940원이 찍히는 기염을 토했다. 시간 외 근무를 24시간이나 했는데도 그랬다. 1호봉도 아니고 2호봉이었는데도 그랬다. 아무리 공제회에 넣은 금액이 차감되었어도 그거 얼마나 된다고. 현실이 그랬다. 본가에 거주하고 있어 주거와 관련된 고정비가 들지 않았음에도 쓸 돈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드는 청첩장과 부고가 성과 평과 C등급보다 두려웠다. 사는 일이, 무엇보다 돈 없이 사는 일이 가장 무서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일평생 중장기 재정 계획이나 확보된 여유 자금 없이(p. 19) 턱걸이 사업으로 생계를 책임진 아빠 밑에서 자란 나는, 수중에 당장 융통할 수 있는 현금이 없으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삶이 무너지는지를 한글보다 먼저 깨우쳤다. 사채업자가 구둣발로 우리집 현관에 들어와 언니의 유년기 평생소원으로 갖게 된 피아노를 무참히 짓밟을 때, 엄마가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광이 나도록 닦던 집안 살림들에 빨간딱지가 우수수 붙을 때,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미취학 아동이라도 위기감을 느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너무 일찍이 경제적 어려움이 가져다준 술잔을 마신 통에 숙취에서 도통 헤어 나오질 못했다. 위기감에 취해, 목숨의 위협에 취해 유년 시절부터 현금이나 비상금에 집착하던 습성이 30년 만기 15억 케이크와 결합하게 된 이후 삶은 불안 그 자체가 되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이놈의 15억짜리 케이크는 나의 숨통을 더욱 조여왔다(p. 20). 쪽방촌 변사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떠났던 길. 쪽방촌 주민들은 익숙한 듯 담담하게 변사자의 신상을 공유해주었다. 쪽방촌은 너무 작아서...정말 '작다'는 표현도 사치스러울 만큼 작았다. 170센티미터 남짓한 변사자가 양다리를 일자로 펼 수도 없는 크기의 방. 방이라기보다는 사각형의 상자와 같았던 그 공간. 캐리어 하나에 담긴 짐이 전부인(p. 149) 세월. 주민들이 어떻게 볼일을 해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쪽방촌 건물에는 변기 달린 화장실이 없었다. 방 안에서 바지에 볼일을 본 뒤 사망한 변사자를 장례식장에 안치하기 위해 장정 다섯 명이 달라붙었다. 좁은 방에서 시신을 운구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동네에서 또 다른 변사 사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역시나 쪽방촌이겠거니 생각하며 갔는데 웬걸.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으리으리한 주택이 즐비한 부촌이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쪽방촌과 부촌이 나뉘어져 있는 풍경이란. 고령의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집은 4층짜리 주택이었고 내부에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사건을 처리하는 척 들어가 남는 방 하나에 숨어들어도 즉각 발각되기 어려울 만큼 으리으리한 규모. 똑같이 여성의 몸을 빌려 태어나 주어진 삶인데 그 모습이 이리도 다를 수 있다니. 빈부격차는 어디에나 있는 사회 현상이지만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끝을 본 뒤로는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p. 150). 우울하다거나, 가진 것 없는 나의 미래도 암담하다거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린 건 아니다. 단지...이렇게도 삶의 모습이 다르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비단 재정적인 문제를 떠나서, 삶이라는 바다를 어디에 방점을 두고 헤엄쳐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 로또에 당첨되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지금 당장 한 달에 만 원이라도 후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바꾸었다고 해야 할까(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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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로또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팍팍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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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읽고, 미래를 대비하자
- 현직 의사가 쓴 500여 페이지의 흥미로운 대중 역사책이다. 재미있게 봤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으니’ 개인이든, 사회와 국가든 과거를 통해 현재의 방향을 정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 다행히 도서관에 3권의 책이 더 있어 바로 대출 신청했다. 책 읽기 참 좋은 세상이다. 책 읽느라 늘 바쁘다. 윌슨의 십계명, 아니 십사계명 장로 교회 목사인 아버지에게 성경이 복음이었다면, 학자이자 정치인인 윌슨에게는 민주주의가 복음이었다. 윌슨은 어느 순간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의 아버지가 목사였던 점, 그가 일생을 정치보다는 학문에 쏟았다는 점 등이 그의 이러한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18년 12월 13일 그는 세계 1차 대전을 마무리 짓고 전후 세계 질서와 평화 구상을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지워싱턴호를 타 고 대서양을 건너 9일간 항해 끝에 프랑스의 브레스트항에 도착했다. 당시 윌슨의 곁에는 나중에 대통령이 될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함께 했다. 윌슨은 그 유명한 '14개 조 평화 원칙'을 내세웠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10조 모든 민족은 자치적인 발전을 하도록 자유스러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라는 민족 자결주의와 마지막 14조 ‘모든 국가의 정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상호 보장키 위해 특별한 협약으로 국가들의 일반적인 연합을 구성한다.’, 즉 국제 연맹이었다. 윌슨이 미국의 건국과 함께한 전통인 '유럽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립주의를 버리고 개입주의에 나선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가(p. 57)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유럽의 구원자라고 부르며 칭송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에는 윌슨의 모험이 성공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협상은 월슨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승리하긴 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은 미국과 달리 독일을 용서할 수 없었다. 거기다 두 국가 모두 세계 1차 대전 이전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의 힘이 약했다. 윌슨의 14개 조 평화 원칙을 들은 당시 프랑스 수상인 강경파 클레망소는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겼다. 이제 윌슨이 우리에게 14개 조를 주지만, 그것이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라며 빈정거렸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윌슨과 얘기하다 보면,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얘기하는 것 같다." 거기다 한발 더 나아가 윌슨은 독일을 관대하게 대하자고 했다. 그는 독일에 과도한 압박을 가하여 독일의 상황이 나빠지면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 2차 대전을 예견한 듯했다. 그의 말대로 협상국이 독일에 좀 더 너그러웠다면,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여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19년 1월 18일 열린 파리 강화 회의는 윌슨이 주장한 국제 연맹을 만장일치로 채택한다. 하지만 그의 14개 조 평화 조항 중 유일하게 채택된 것은 국제 연맹의 창설뿐이었다. 민족 자결주의는 오로지 패전국에만 적 용되었고, 승전국은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했다(p. 58). 혁명의 좌절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서 연설을 마치고 차에 오를 무렵이었다. 뒤에서 한 여자가 소리치며 레닌을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세 발의 충성이 울려 퍼졌다. 한 발은 레닌의 왼쪽 어깨에, 한 발은 턱에 박혔고, 한 발은 옷을 스치며 지나갔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총을 쏜 사람은 적군에 반대하는 백군도 아니었고, 극우파도 아니었다. 암살자도 레닌만큼 사회주의와 혁명에 투철한 혁명가였다.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16살에 시베리아 유형지에 끌려가 11년간 고초를 겪다 2월 혁명으로 풀려난, 28살의 파니 예피모브나 카플란이었다. 농민 중심의 사(p. 66)회혁명당원인 그녀가 보기에 의회를 해산시켜 독재를 하는 레닌은 권력에 눈이 멀어 혁명을 버린 배신자였다. 볼셰비키가 완전히 장악한 언론은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신문들은 레닌의 빠른 회복을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더 나아가 언론은 그가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힘의 보호를 받는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차르와 예수의 초상 대신 레닌의 초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독재를 끝내기 위한 암살 시도가 오히려 그의 독재를 강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레닌은 ‘혁명의 배신자’에서 총을 맞고 살아난 ‘혁명의 수호자’가 되었다. 레닌을 반대하는 자에게 무자비한 적색 테러가 시작되었다. 총조차 그의 혁명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키는 작았지만 몸이 튼튼했다. 누군가 그를 괴롭히면 곧장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제압할 정도로 힘이 세서 학교에서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20대에는 카약을 타고 3~4일간 볼가강을 따라 내려갔다 노를 저어 거슬러 오기도 하는 등 체력도 좋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혁명에 나서기 전까지였다. 오랜 망명 기간의 굶주림과 혁명의 과로는 그의 몸을 갉아 먹고 있었다(p. 67). 이상의 좌절 다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드로 윌슨은 강력한 세계 기구인 국제 연맹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던 중,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주의 푸에블로에서 연설한 후, 심한 두통으로 한 차례 쓰러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0월 2일 뇌졸중이 왔다. 좌측 뇌혈관이 막힌 레닌과는 반대로 우드로 윌슨은 우측 뇌혈관이 막혔다. 몸 왼쪽이 거의 마비되었다. 대뇌는 운동과 감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담당하기에 뇌경색 이후 우드로 윌슨은 성격마저 변했다. 그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고, 감정적으로 균형을 잃거나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했다. 뇌경색 이후, 우드로 윌슨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나머지 임기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윌슨의 꿈이었던 국제 연맹은 만들어졌으나 미국조차 가입하지 않은 국제 연맹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뇌경색까지 온 그가 얻은 것은 이름뿐인 국제 연맹과, 국제 연맹을 창설한 공로로 그에게 수여된 노벨 평화상뿐이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과 노벨 평화상만으로는 장차 일어날 세계 2차 대(p. 71)전을 막을 수 없었다. 윌슨은 독일을 용서하기 바랐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게 복수를 가했다. 독일은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을 떠안았다. 안 그래도 어려웠던 독일의 경제는 단숨에 붕괴하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1923년 10월 초가 되자 전쟁 전 단 1마르크가 601만 4,300 마르크로 평가 절하되었다. 달걀 1개의 값이 3천만 마르크였다. 사람들은 돈을 지갑이 아니라, 수레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돈을 가득 담겨 있는 수레를 길가에 잠시 세워두고 돌아와 보니, 돈은 그대로 있는데 수레만 사라졌다. 절망에 빠진 독일인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고, 그렇게 잡은 지푸라기가 바로 히틀러였다(p. 72). 혁명이 막혀버린 후 레닌이 쓰러지자 권력을 잡은 것은 혁명가 트로츠키가 아니라 학살자 스탈린이었다. 공산당 우두머리가 된 스탈린은 새로운 차르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레닌에 의해 볼셰비키 독재로, 볼셰비키 독재는 레닌이 죽자 스탈린 1인 독재로 변해버렸다. 우드로 윌슨이 추구한 이상적이었던 '강력한 국제 연맹의 설립'과 '독일에 대한 용서'가 사실은 세계 2차 대전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최고의 복수는 바로 용서였다. 윌슨과 레닌이 건강했더라면 어땠을까? 우드로 윌슨은 이상인 평화를 실현하고, 레닌은 꿈인 혁명을 완성했을까? 그랬다면 독재자 스탈린과 히틀러가 출현하지 않고, 세계 2차 대전과 냉전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 똑같은 질병으로 쓰러 지면서, 그들의 이상과 꿈이 동시에 무너졌다. 레닌의 혁명과 윌슨의 이상을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거대한 적이 아니라 몸 안의 작은 뇌혈관이었다(p. 73). 처칠이 성공해서 그가 간절히 원했던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도 전에 아버지는 45세에 미쳐서 죽었다. 성병인 매독이 뇌까지 침범한 신경성 매독이었다. 지금이야 페니실린 주사로 쉽게 치료되는 매독이지만(단 유독 다른 주사에 비해 주사 자체의 통증이 심하다), 그때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매독은 걸린 후, 수십 년이 지나면 결국 신경까지 침범해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인 처칠을 끝내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p. 84).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 급하게 처칠을 출산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인 처칠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5년 후인 1900년에 46살의 나이로 20살 연하의 근위대 대위와 재혼했다. 새 아빠는 처칠과 동갑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 후, 63살에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이번에는 새 아빠가 처칠보다 세 살 어렸다. 처칠은 넘치는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인정과 어머니의 사랑만은 받지 못했다(p. 85).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남자 처칠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귀족 가문의 궁전에서 눈을 뜨고, 스탈린이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러시아 변방 조지아의 방 한 칸짜리 오두막집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다면, 루스벨트는 신흥 부르주아 가문에 1만 평 넓이의 땅이 35개 방이 딸린 3층짜리 저택 스프렁우드에서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는 철도 회사의 부사장으로 윤택한 삶을 살았다. 그는 아내를 사별하고, 52살에 26살의 세라 델러노를 만나 사랑에 빠져 재혼했다. 1882년 1월 29일 바로 옆으로 허드슨강이 흐르며 넓은 녹색 정원이 펼쳐진 스프링우드에서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출생했다. 전적으로 유모의 손에서 자란 처칠, 아버지가 집을 나간 스탈린과 달리 루스벨트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루스벨트가 태어날 당시 53세였던 아버지 제임스와 27세였던 어머니 세라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그는 처칠이 그렇게 갈망했던 부모의 관심을 넘치게 받았다. 처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경멸이라면, 스탈린은 폭력이었고, 루스벨트는 사랑이었다. 처칠은 부모에게서 얻지 못한 인정과 사랑을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신 받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던 스탈린에게 세상은 한없이 어둡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스탈린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 둘과 다르게 부모의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스벨트에게 세상은 더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은 곳이었다. 그는 자존감이 충만했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p. 88)을 것 같았다. 스탈린은 신학교를, 처칠은 기숙학교에 다녔지만, 루스벨트는 14살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에게 배웠다. 그리고 14살이 되는 해에 명문 사립인 그로톤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자연스럽게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제 발로 때려친 스탈린, 낙제생이었던 처칠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170cm도 되지 않는 처칠, 처칠보다 더 작은 스탈린과는 다르게 루스벨트는 190cm에 가까운 장신이었다.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 엘리너와 결혼까지 했다. 루스벨트는 28살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공화당 텃밭인 더치스 카운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뉴욕주 상원의원이 되었다. 거기다 민주당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해군 차관으로 임명하여 군 경력에 행정 실무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쉽게 흘러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데다 키마저 커서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았기에 "굉장히 거만한 친구, 루스벨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라는 평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1932년 미국 대통령이 되어 내리 4선을 하는 도중 세계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류의 재앙이었던 세계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 모두 그다지 큰 시련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절체절명의 고비를 이미 맞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8월 메인주에 있는 가족 별장 캄포넬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p. 89). 살아 있는 일인자가 이인자를 확정 지으면, 일인자는 자신이 죽기 전 까지 이인자와 권력 투쟁을 해야한다. 그건 설령 부자 사이에서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일인자가 후계자를 정해 놓지 않으면, 일인자가 죽은 후 부하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죽을거라고 생각 하지도 못한 레닌이 후계자를 정해 놓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레닌 사후에 권력 투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가장 강력한 두 라이벌은 누가 뭐래도 스탈린과 트로츠키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트로츠키에게는 딱 두 개가 부족했는데 하나가 겸손이었다면, 나머지 하나는 권력에 대한 의지였다. 모든 것을 믿지 않았기에, 세상 모든 것이 적이었던 스탈린은 오로지 절대적인 힘과 권력만을 추구했다. 그에게 권력이란 생존을 위한 필수 도구였고, 권력을 잃는 건 목숨을 잃는 것이었다. 능력이 부족했던 스탈린에게는 권력에 대한 의지만은 차고 넘쳤다. 그동안 참고 있던 트로츠키가 마침내 반격을 가했다. 1923년 10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에서 당내에서 스탈린이 권력을 위해서 분파를 만들고 있다고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오히려 "트로츠키는 예나 지금이나 레닌의 뜻을 어기며 분열을 조장할 뿐"이라며 역공격을 가했다. 투표(p. 96)가 열렸다.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가 114표, 트로츠키에 대한 옹호가 겨우 2표로, 트로츠키의 완패였다(p. 97). 스탈린은 "인생에서 제일 유쾌한 일은 희생자를 정하고 조심스럽게 공격을 준비하여 강력히 타격한 다음 침대에 누워 편히 자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스탈린에게는 모든 것은 잠재적인 적이었기에 그는 죽는 날까지 단 한 번도 편히 잘 수 없었다. 1929년 끝내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100여 편의 논문과 책(p. 100)을 쓰면서, 스탈린을 공격하며 소련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주장했다. 심지어 자서전의 제목이 〈배반당한 혁명〉이었다. 또한 독일에 나치가 등장 하자,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치의 위험성을 알아차리고, 히틀러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용 없었다. 총을 든 군대로 혁명을 완성한 그였기에 펜과 말로는 소련을 바꿀 수 없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총과 권력을 빼앗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저 멀리 멕시코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트로츠키에게 실비아 에이지 프로라는 여비서가 있었다. 그 여비서에게는 1년 넘게 사귄 라몬 메르카 데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사실 그는 트로츠키를 죽이기 위해 소련에서 보낸 암살자였다. 그는 즉시 트로츠키를 죽이려고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고, 트로츠키 여비서의 애인으로 행세하며 스탈린처럼 긴 시간을 끈기 있게 기다리며 절호의 기회를 노렸다. 피켈이라는 등산 도구가 있다. 등산용 지팡이의 일종으로, 일반 등산용 스틱과는 다르게 한쪽 손잡이 끝에 날카로운 곡괭이가 달려 있어, 단순 등산부터 전문적인 빙벽 등반뿐 아니라, 산에서 마주칠 수 있는 맹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1940년 8월 20일, 메르카데르는 우연히 트로츠키와 둘이 남게 되었다. 트로츠키가 등을 보이자, 메르카데르는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 회가 왔음을 직감하고는 미리 준비한 피켈로 그의 머리를 찍었다. 트로츠키의 비명을 듣고 경호원이 달려왔고, 경호원이 메르카데르를 제압한 후 구타하기 시작하자, 트로츠키가 말했다. "죽여서는 안 된다. 자백을... 시켜야...한다." 트로츠키는 의식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암살 배후를 밝(p. 101)히려 했으나, 다음 날 외상에 의한 뇌출혈로 사망하고 끝내 누가 시켰는지 를 밝히지 못했다. 트로츠키의 죽음은 살아있는 스탈린에게는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스탈린 대신 트로츠키가 정권을 잡았다면 소련이 달라졌을 거라 주장하기도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은 항상 아름다워 보인다. 트로츠키는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동시에 갈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트로츠키가 죽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암살자 메르카테르의 어머니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암살은 곧 스탈린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되었다. 자신도 트로츠키처럼 언제든지 암살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스탈린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제국주의자이자 귀족 출신인 처칠과 부르주아 가문의 루스벨트를 처음 부터 신뢰할 리가 없었다. 신뢰하는 척할 뿐이었다(p. 102). 3년 후, 1924년 그는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처음으로(p. 105)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특수 제작된 보조기를 차고 목발에 의지해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몇 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소아마비에 굴복하지 않은 그의 의지에 박수와 함께 찬사를 보냈고, 그렇게 루스벨트는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역경의 극복은 소아마비 이후 그에게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에게 세계 대공항과 세계 2차 대전이라는 큰 고비가 찾아오지만, 그 어떤 것도 소아마비보다 힘들지 않았다. 세계 대공황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아마비에 걸려 온 몸이 마비된 채, 평생을 누워서 보낼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절망을 이겨낸 자, 루스벨트뿐이었다. 그는 구호(Relief), 회복(Recover), 개혁(Revolution), 3R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당선되어, 새롭게 판을 짠다는 뜻의 뉴딜(New Deal) 정책을 실행하며 대공황에 맞서 싸웠다(p. 106). 스탈린의 딸 스베플라나에 따르면, 스탈린은 고혈압이 있었지만, 그 어떤 의사에게도 치료받지 않았다. 그대신 고혈압에 효과 있다는 민간 치료법을 어디서 듣고는 알 수 없는 약을 먹거나 물에 요오드 몇 방울을 떨어뜨려 마신 게 전부였다. 쓰러진 스탈린을 처음 발견한 당시, 의사들이 확인했을 때 그의 혈압은 190/110이었다. 루스벨트는 더 심했다. 현재 고혈압의 기준은 140/90 이상이지만, 1937년 이미 그의 수축기 혈압이 160을 넘어섰고, 진주만 공습 당시에는 188/105, 알타 회담 직전에는 200을 오르락내리락했다. 혈압이 고혈압 진단 기준인 140을 넘어, 180이 넘어가는 중증 고혈압 상태였다. 혈압이 높은 상태로 지속되다 보니, 펌프인 심장이 정상일 리 없었다. 1944년에는 심장의 기능이 떨어지는 심부전으로 숨이 차는 증상을 보였고, 1945년 1월 취임식에는 협심증으로 흉통을 호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혈압의 위험성이나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실제로 루스벨트의 죽음으로 고혈압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1950년대부터 고혈압의 위험성이 알려지며 적극적으로 고혈압을 치료하기 시작하게 된다(p. 136) 루스벨트는 죽기 직전 혈압이 300을 넘어섰다. 피의 압력이 높으니, 혈관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한 동맥 중 하나인 뇌혈관이 터지고 말았다.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온몸으로 맞서며 받아야 했던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과로와 더불어, 줄곧 피워 담배는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더 올렸고 결국 뇌출혈을 일으켰다. 뇌출혈이 생기면 머리에 피가 가득 차지만, 정작 뇌세포에는 피를 공급하지 못한다. 홍수가 나면 어디든 물이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는 상황과 같다. 히틀러와 독일 제국에 맞서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스탈린과 루스벨트는 결국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로 나란히 사망했다. 1941년 독일(p. 137)군이 쌍안경으로 크렘린궁 첨탑이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도 수도인 모스크바를 버리고 퇴각하지 않았던 스탈린도, 소아마비를 이겨내며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맞서 싸워 승리한 루스벨트도, 가느다란 뇌혈관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폭탄처럼 터져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했지만, 정작 작은 뇌혈관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란히 뇌출혈로 63살에 사망한 루스벨트와 74살에 죽음을 맞이한 스탈린과는 다르게,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전에 그에게 찾아온 두 번의 뇌경색은 잘 견뎠으나, 세 번째로 찾아온 뇌경색으로 그의 몸 왼쪽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끝내 그는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스탈린과 루스벨트처럼 혈관이 터진 뇌출혈로 사망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히틀러라는 악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낸 세 거두를 쓰러뜨린 건, 자신들의 머릿 속에 있는 작은 뇌혈관이었다(p. 138). 유럽 밖에서는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이 지속되었다. 산업 혁명과 식민지 개척에서는 무엇보다도 크기가 중요했다. 공장이 크면 물건 단가가 낮아져 이윤이 높아졌고, 군대가 크면 원료 생산지인 동시에 소비 시장인 식민지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규모의 경제에서 큰 공장이 더 효율적인 것처럼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은 국가가 유리했다. 19세기 초 단일 국가였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강대국으로 급속한 성장을 거두었지만,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작은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던 이탈리아와 독일은 이류 국가에 머물렀다. 종교 개혁으로 종교가 권위를 잃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신분마저 자리를 잃어가는 프랑스에서는 국민들을 뭉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같은 민족'을 강조하고,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민족주의였다. 분열된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의 당위성을 위해 '같은 민족'을 구호로 내세웠다. 식민지에서도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민족끼리 뭉쳐 다른 민족'을 물리쳐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힘을 얻었다. 열강으로부터 독립할 때는 열강이 다른 민족이고, 식민지는 같은 민족이었다. 하지만 막상 식민지가 독립을 하면 이전까지는 같은 민족이 다른 민족으로 갈라져 또 싸우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렇게 열강이든, 식민지든, 신생 독립국이든 모두가 민족주의를 외쳤다. 민족주의에는 '우리' 아니면 '너희'였고, 중간은 없었다. 민족주의는 안으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끈이자, 밖으로는 '너희'를 공격하는 칼이었다(p. 142). 간신히 종교 문제에서 벗어난 19세기 유럽은 기존 국가 간의 전쟁과 민족 간의 다툼에 더해, 나라 안에서 왕과 귀족, 부르주아, 노동자가 정치 체제와 권력을 두고 싸웠다. 절대군주제-입헌군주제-공화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p. 143). 1918년 독일군이 협상국에 항복할 때도 독일은 여전히 서부 전선에서 벨기에 땅과 프랑스 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 본토는 단 한 번도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언론은 엄격히 검열되고 통제되었기에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오로지 승전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고 전투에서 패했다고 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전쟁에 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큰 충격이었다. 독일의 패배는 벨기에 북부 전선에서 영국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시력을 잃고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한 부상병에게도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던 그 부상병은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파묻고 울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독가스 공격을 받고 서서히 회복되던 눈이 다시 악화되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독일의 패전 소식에 병상에서 울던 그 군인은 두 달 전, 전화 통신 설비가 망가진 상황에서 사령부에서 최전선까지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화를 뚫고 중요한 명령을 전달한 용기로 철십자 일등 무공훈장을 받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는 두 눈만 회복되면, 다시 전선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상에서 회복되어도 다시 돌아갈 전장은 없어졌다. 그렇게 갈 곳이 없어진 상병은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독일, 더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 놓게 될 결심을 했다. 전쟁이 아니라, 정치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황제였고, 전쟁을 수행한 것은 군대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하자, 황제는 퇴위했고, 군대는 패전 협상을 국회에 넘겼다. 혁(p. 168)명과 패전이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전쟁에 패해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사람들은 혁명이 일어나서 패했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은 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포기했다고 여겼다. 전쟁이 끝나고 1년 후, 패전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열린 위원회에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던 힌덴부르크가 출두했다. 힌덴부르크는 패전의 원인에 대해서 독일의 역량 부족이나, 군대 전략 전술의 실패를 언급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어떤 영국 장군은 독일군은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한 영국 장군이 누구인지, 누가 등을 찔렀는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같은 편의 등 뒤를 찌른 이는 '빨갱이'와 '유대인'이라고 믿었다. 오스트리아 상병이었던 서른의 한 남자는 누구보다도 더 맹렬히 빨갱이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p. 169). 히틀러는 이번에는 군을 설득하거나 군과 타협하는 대신 공격에 나섰다. 히틀러는 전쟁부 장관 블롬베르크보다 무려 33살 어린 그의 아내가 창녀이고, 총사령관 프리치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려 사임시켰다. 동시에 고위 장성 16명을 해임하고, 44명을 전보 조치하며 군대를 완벽히 장악했다. 군대는 저항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계속 성공을 거두었을뿐 아니라, 군대와 군비를 확장하면서 군대의 환심을 샀기 때문이다. 베르사(p. 200)유 조약에서 규정한 10만 군대에서 히틀러가 백만 대군을 앙성하자 옛날 국방군 소위들은 대거 대령이 되었고, 대령들은 장군이 되었으며, 장군들은 원수가 되었다. 승진을 싫어할 장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히틀러는 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국회를 장악하고, 돌격대를 이끌던 룀을 숙청하여 군부의 호의를 얻는 동시에 당 내부의 반란을 잠재웠다. 거기다 블룸베르크- 프리치 사태로 군마저 완전히 접수했다. 히틀러가 군에 단순히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연봉을 장교들 에게 주었다. 1940년 8월부터 원수와 대제독은 해마다 72,000마르크를 상급대장과 제독은 48,000마르크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비숙련 노동자의 일년 연봉이 1,500마르크 정도임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 1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정치에 이어 군대마저 장악한 그를 막을 사람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p. 201).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에 이어 쿠르스크의 전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독일의 장기인 전차전에서마저 소련이 독일을 꺾었기에, 이 쿠르스크 전투로 사실상 세계 2차 대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독일에게 남은 건 길고 긴 후퇴뿐이었다. 다음 해인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영국과 미국의 연합국이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결국 독일은 서쪽의 영미 연합국과 동쪽의 소련군을 양쪽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 국방군 내에서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까지 일어났다. 회의가 열리는 늑대소굴에서 폭탄이 터져서 회의에 참여한 사람 중에 4명이 사망했다. 히틀러 암살 세력은 권총 하나 대신 번거롭게 시한폭탄을 택했다. 시한폭탄을 설치한 가방을 테이블 아래 놓아두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 혹시나 가방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폭발할 것을 두려워한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테이블 다리에 기대 세워 놓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히틀러 쪽이 아니라 히틀러 반대쪽에. 폭탄과 히틀러 사이에는 있던 두꺼운 테이블 다리가 폭발 당시 방패 역할을 하면서 히틀러를 살렸다. 실제로 사망한 4명 모두 폭탄 쪽에 앉은 사람이었고, 테이블 다리 반대편에 있던 사람은 히틀러를 포함해 아무도 죽지 않았다. 히틀러는 우측 고막이 파열되었으며, 뇌진탕을 겪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p. 235). 오래전부터 히틀러는 불면증, 복통, 피부 습진 등을 겪고 있었는데, 1936년 히틀러 전속 사진사인 호프만이 테오도어 모렐 박사를 추천했다. 모렐 박사가 이전에 임질에 걸린 호프만을 깔끔하게 치료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질과 매독은 지금도 흔하지만, 그때는 더 흔한 질환이었다. 성병 중 다수는 성기에 궤양과 고름뿐 아니라, 피부에 발진이 나타났기에 과거에 독일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피부-비뇨기과를 묶어서 보았다. 어떤 이는 성병 전문인 모렐 박사가 히틀러의 주치의를 담당했다는 사실과 다른 여러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히틀러가 1908년에 유대인 창녀에게서 매독에 걸렸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을 저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계 2차 대전 말기 히틀러가 손을 떨며, 성격이 변한 것을 신경 매독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나 의학적 근거가 희박하다. 복통은 평생 히틀러를 괴롭혔다. 히틀러의 병명은 큰 이상 없이 복통, 혹은 복부 불쾌감, 배변 후 증상 완화가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이었다. 서구인의 7~10%4 에서 발생하는 질환으로 스트레스(p. 239)를 받으면 심해진다. 시험 당일 아침, 학교 화장실에 길게 사람들이 줄 서는 이유가 다 이 질환 때문이다. 히틀러는 발에 습진도 심했는데, 구두를 신을 때마다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히틀러는 사진사 호프만을 통해 소개받은 테오도어 모렐에게 습진과 복통을 일 년 안에 고쳐준다면, 자신의 주치의로 고용하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저명한 의사들이 모두 도전했다가 포기한 상태였다. 모렐의 아내가 말렸지만, 모렐은 이를 그에게 찾아온 큰 기회로 보았다. 그는 히틀러에게 복통과 습진을 1년 안에 고치겠다 장담했다. 그리고 그는 불과 1개 월 만에 히틀러의 복통과 습진을 고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적의 의사가 내 생명을 구했어!”라고 외쳤다. 그렇게 모렐 박사는 단번에 히틀러의 신뢰를 얻어 개인 주치의가 되었다. 그렇게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p. 240). 독일의 패배가 임박한 1944년 9월부터 히틀러는 심각하게 몸이 나빠졌다. 몇 번이나 쓰러지고, 왼팔을 벌벌 떨었으며 몸에 마비를 겪었다. 우리 몸에서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 세포가 파괴되는 파킨슨의 초기 증상 일 수도 있었고, 코카인을 비롯한 히로뽕 같은 과도한 각성제의 투여로 인한 부작용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루는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한 명이었던 기장 박사가 모렐 박사의 처방한 약을 우연히 보다, 독약으로 사용되는 벨라돈나와 스트리크닌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벨라돈나는 마녀들이 하늘을 나는 데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극소량으로도 하늘을 나는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모렐 박사의 처방을 알게 된 기장 박사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사람을 실험 도구로 이용했지만, 실력만은 뛰어났던 카를 브란트, 그리고 히틀러를 자주 진찰했던 하셀 바흐, 이 셋이 히틀러에게 모렐 박사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셋 모두를 총통부 의사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세계 2차 대전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도 “충성스러운 모렐이 없었다면, 나는 완전히 쓰러져 버렸을 거야. 그런데 다른 멍청한 의사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했지.”라고 말할 정도로 히틀러는 자신의 주치의 를 굳게 믿었다. 히틀러가 코카인, 모르핀, 벨라돈나, 메스암페타민까지 맞았고 주로 코카인을 자주 찾았기에 일부에서는 그가 마약 중독자라고 주장하며, 모(p. 243)렌 박사가 히틀러의 몰락을 가속화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약 중독자는 삶의 목적이 마약이다. 마약을 위해 돈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바친다. 마약을 위해 살고, 마약을 위해 죽는다. 히틀러는 자주 마약을 찾았지만, 적어도 마약 중독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어떤 약이나 환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마약은 단지 정신을 집중하고 때로는 몸을 쉬게하는 용도였다. 히틀러에게 마약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었다. 또한 히틀러가 만약 삶의 목적이 마약인 마약 중독자였다면 결코 자신에게 마약을 제공하는 의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떠나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는 56번째 그의 생일 당일 날이자, 죽음을 10일 앞둔 날 주치의인 모렐 박사와 다투었다. 테오도어 모렐은 히틀러를 떠났고, 히틀러는 그를 잡지 않았다. 모렐 박사는 4월 23일 베를린을 떠나 연합국이 점령한 곳에 도착했다(p. 244). 절망밖에 남지 않은 총통의 벙커로 이번에는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에서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롤모델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짐 밖에 되지 않았던 무솔리니의 죽음이었다. 연합국을 피해 도망치던 부솔리니가 코모호숫가 근처에서 애인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잡혀 충살당 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렸고, 분노한 사람들은 시체에 욕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장대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다. 무솔리니의 얼굴은 짓이겨져 알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 치욕스러운 삶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준비하던 히틀러에게 이제 죽음마저도 안전하지 못했다. 4월 29일 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히틀러는 그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히틀러는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사무실에서 17살의 에바 브라운을 처음 만났다. 결혼식은 히틀러 때문에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던 그녀를 위해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4월 30일, 베를린을 둘러싼 소련군이 총통 벙커 몇백 미터까지 접근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히틀러도 무솔리니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지경이었다. 그는 부하에게 자신과 아내 에바 브라운의 유해가 소련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명령하고는 심지어 서면으로도 확인받았다. 그리고 그는 에바와 벙커에 있는 한 방에 들어갔다. 얼마 안 가 총성 한 발이 울려 퍼졌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그는 생전에 한 말을 지켰다(p. 248). 히틀러에 모든 것을 걸었던 독일 국민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인구 8,000만의 독일은 전체인구 10%에 해당하는 800만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1938년 미국, 소련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던 독일은 전쟁이 끝난 직후 국내 총생산량(GDP)이 5,457억 달러에서 2,285억 달러로 무려 60% 감소에 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수도인 베를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p. 250). 모든 것이 부족한 베롤린에는 딱 세 개의 일자리만이 넘쳐났다. 매춘부와 암거래상, 그리고 스파이였다. 나치를 위해 일했던 이들은 소련이나 미군에게 정보를 팔았다. 팔 정보 조차 없는 이들은 암시장에서 음식을 구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헐값에 넘겼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리 후 개선식이 열렸던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배를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파는 암시장이 열렸다. 팔게 없는 여자들은 몸이라도 팔아야 했다. 초콜릿 따위의 군인 보급품을 얻기 위해 몸을 팔던 여자를 초코레이디라 불렀다. 독일판 양공주였다. 돈 많은 미군은 다리를 벌린 독일 여자에게 푼 돈을 주었고, 돈 없는 소련군은 다리를 벌리지 않는 여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실제로 10-80세 사이의 독일 여성들 중 베를린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동독의 다른 지역에서는 150만 명 이상이 1945년 초반 6개월 동안 소련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나치에 가입하기 위해 줄을 섰던 이들은 이제 퍼실샤인(Persilschein, 세탁 세제인 Persil에서 유래한 말로 깨끗한 과거란 뜻으로 비나치화 증명서)을 구하기 위해 또다시 줄을 섰다. 사람들은 빨간 셔츠(공산당)에서 갈색 셔츠(나치)로, 다시 흰색 셔츠(비나치)로 갈아입었다. 일부 남자는 왼쪽 팔 안쪽에 새긴 자신의 혈액형을 지우기 위해 자기 팔을 칼로 긁거나 불로 지져야 했다. 그건 영원히 감춰야 할 친위대의 표시였다. 독일 국민은 모든 것을 묻은 채 새로 시작해야 했다. Stunde Nall, 즉 0시로 돌아갔다(p. 251). 히틀러의 주치의이자, 사람을 실험 도구로 사용했던 카를 브란트는 독일의 패전을 앞두고,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연합국 쪽으로 보내려다 독일군에 사로잡혀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독일이 항복하여 히틀러의 손에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직후 뉘른베르크 재판 중 나치에 협조한 의사 재판에서 그는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의료인 23명 중 대표로 또다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재판 이름마저 United States of America v. Karl Brand, et(p. 252)al.(미합중국 대 카를 브란트 외)였다. 단, 나치의 인체 실험에서 카를 브란트와 쌍벽을 이뤘던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요제프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하여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재판에서 카를 브란트는 자신의 안락사 프로그램이 매우 인도적인 방법이며, 모두 친위대 수장인 힘러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수형에 처하기 직전 “나는 발판 위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 보복일 뿐,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했다”는 말을 남기며 끝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는 시키는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라고 변명한 것과 유사했다. 의사인 카를 브란트의 치명적인 실수는 잔인한 인체 실험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잘못은 인체 실험을 통해 얻은 귀중한 데이터를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독일과 함께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에 있어서는 독일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인체 실험에 있어서는 나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일본은 만주 하얼빈의 6제곱킬로미터에 걸친 면적에 150동이 넘는 건물로 이루어진 대규모 복합시설에서 다양한 인체 실험을 수행했다. 이는 면적으로만 따지면 현재 아산 병원의 20배 정도 규모이다. 사람을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라 부르며 차마 말로 하기조차 두려운 행위를 저질렀던 731부대가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731부대 출신들은 우두머리인 이시이 시로 준장을 포함하여 대부분 미국의 신변 보호를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그들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인체 실험 데이터를 가지고 미국 정부와 범죄자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 사면받는 플리바겐에 성공했기 때문이다(p. 253). 1948년 공산당은 만주 제1의 도시인 선양과 제3의 도시인 창춘을 포위했다. 당시 공산당 최고의 군사 전략가인 린바오는 1918년 5월 30일 명령을 내렸다.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 공산당은 도시 전체에 철조망을 두르고 4미터 깊이의 참호를 팠다. 그리고 군인은 물론이고 민간인마저 도시를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야 식량 부족이 더 심 해질 터였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었다. 그중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춘에서만 16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었다. 이 작전에 대해 공산당 중위인 장정릉은 이렇게 기록했다.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다. 사상자 수도 대충 비슷했다. 다만 히로시마는 9초가 걸렸고 창춘은 5개월이 걸렸을 뿐이다.” 그 후로도 전투는 여러 곳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공산당은 국민당이 점거한 도시를 포위한 다음, 철도선을 끊고 적들을 고립시키고, 대량의 무기를 노획했다. 철도 요충지인 쉬저우에서 벌어진 화이하이 전투는 물론이고, 베이징-톈진에서도 공산당은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가고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했다. 소련이 1917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같은 해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질 때까지 8개월이 걸린 반면,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질 때까지 38년이 걸렸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했지만, 마오쩌둥의 승리라기보다는 장제스의 패배였다. 장제스가 진 건 크게 4가지 이유였다. 가장 큰 부분은 군사였다.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에서 실패한 전략을(p. 329) 그대로 따라 했다. 장제스는 일본이 하듯 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점과 전을 장악했고, 마오쩌등은 농촌을 중심으로 면을 차지했다. 결국 점인 도시가 면인 농촌에 포위당하고, 선인 철도가 절단되면서 완벽하게 도시가 봉쇄 당하며 패했다. 둘째는 경제 실패였다. 마오쩌둥은 농촌을 점령했지만, 장제스는 도시를 차지했다.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돈이 부족했던 국민당 정부는 돈을 더 많이 찍어냈는데 이는 세계 1차 대전 이후의 독일처럼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1948년 9월 106이었던 상하이 도매 물가지수는 5개월 후인 1949년 2월 40,825로 400배가 뛰었다. 이에 20년 전 독일에서 돈을 수레에 싣고 나르던 상황이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많은 도시에 비해 식량을 직접 생산하는 농촌이 상대적으로 초인플레이션의 피해가 적었다. 셋째는 장제스의 오랜 권력 독점과 부패였다. 1927년 4월 상하이 사변으로 국민당 정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20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장제스와 그의 친인척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재하는 동시에 돈을 물 쓰듯 썼다. 부유한 장제스와 그의 친인척과는 반대로 내전에 강제로 끌려온 군인들은 형편없는 대접과 낮은 임금을 받았다. 이에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조금만 불리해지면 땅을 나눠준다는 공산당에 항복했다. 미국이 국민당에게 지원해준 각종 무기는 곧장 암시장에 팔려 공산당 손에 들어가 오히려 국민당군을 공격하는 데 쓰였다. 이에 실망한 미국은 결국 국민당에게 지원을 관두었다. 마지막으로 장제스 또한 쑨원처럼 백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에게 중국인이란 게으르고, 무감각하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오만하고, 사(p. 330)치를 즐기고, 규율을 지키지 못하고, 법을 존중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 고, 도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대다수는 반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산송장 이었다. 장제스에게 백성이란 자신을 추종하며 따라야 하는 신하이자 부하에 불과했다. 그렇게 장제스는 민심을 잃었다. 장제스는 배부른 늙은 사자였고, 마오쩌둥은 배고픈 젊은 사자였다. 결국 배부른 늙은 사자는 자신보다 6살이나 젊고 배고픈 사자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말았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기념식이 열렸다. 커다란 쑨원의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쑨원이 내세운 삼민주의 중 겨우 첫 번째인 청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의 나라를 세운다는 민족주의만 이루었을 뿐이었다. 마오쩌둥에게는 민권주의와 민생주의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근대화를 이뤄내야 하는 과제 가 남아 있었다. 거기다 여전히 공산세계의 일인자 스탈린은 이인자 마오쩌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p. 331). 마오쩌둥은 10대, 흔히 말하는 중 2병에 걸린 아이들을 동원했다. “홍위병”이었다. 10대를 정치에 동원한 건 마오쩌둥만이 아니었다. 원조는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10세부터 18세의 아이들로 히틀러 유겐트를 조직해 자신을 우상화했다. 그래도 히틀러의 아이들은 유대인과 공산당을 공격했지, 자기 선생과 이웃, 친지, 더 나아가 가족에게는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아이들에게 자신의 우상화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시켰다. 심지어 그는 "가족을 희생하고, 대신 조국에 공을 세우라"라고 아이들을 부추겨 부모와 친구마저 고발하게 했다. 마오쩌둥은 아이들에게 몽둥이를 쥐어주며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피를 맛본 이리 새끼"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습격했다. 홍위병이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대상은 교사였다. 대학 교수들도 린치를 피할 수 없었다. 학생이 교사를, 대학생은 교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았다.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교사를 때렸던 아이들은 집에 와서 부모와 형제, 자매를 고발하기 시작했다(p. 352). 마오쩌둥 옆에서 평생 충성을 바쳤던 영원한 이인자 저우언라이도 마오쩌둥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일본과 프랑스 유학파로 우리나라의 3.1 운동에 해당하는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하는 등 이미 젊은 나이에 명성을 널리 알렸다. 1924년 쑨원이 세우고, 장제스가 교장이었던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에서 정치부 부주임까지 맡은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보다 먼저 공산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거기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보다 다섯 살이나 적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평생 충성을 맹세했다고 할지라도 마오쩌둥의 마음속에는 저우언라이는 경쟁자인 동시에 미래의 흐루쇼프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둘이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저우언라이가 숙청당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단 한 번도 일인자 자리를 넘보지 않고 평생 이인자 자리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오쩌둥 앞에서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로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1972년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의사로부터 알게 된 마오쩌둥은 의사들에게 저우언라이에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며, 별도의 지시를 내릴 때까지 수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암에 걸린 지 2년 후에야 저우언라이는 뒤늦게 수술받았지만 암이 전신에 퍼진 상태였다. 저우언라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총리로서 중국을 위해 잠시도 일을 쉬지 않았고, 그 결과 마오쩌둥이 원하는 대로 마오쩌둥보다 빨리 죽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조차 단 한(p. 356)번도 문병을 가지 않았고, 죽고 나서도 공식적인 조문조차 없었다. 마오쩌등에게는 동지는 물론이고 친구조차 없었다(p. 357). 그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지개혁과 구리 광산의 국유화였다. 두 정책 모두 아옌데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토지개혁은 이미 1962년 우파인 국민당의 알렉산드리 정부 때부터 시작하여 다음 정권인 중도 기독민주당의 프레이 정부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참고로 칠레의 기독민주당은 종교에 기반을 둔 점. 중도 성향이지만 때로는 우파와 때로는 좌파와 연합을 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중앙당과 비슷했다. '자유 속의 혁명'을 외쳤던 전직 대통령 프레이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성장에 근거한 사회개혁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땅을 경작하는 이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로 대농장을 몰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했다. 토지도 토지였지만 더 큰 문제는 구리였다. 지금도 칠레하면 구리이고, 구리하면 칠레다. 전 세계 구리 생산량의 1/4을 차지하며, 1970년 당시 칠레는 재정의 83%를 구리를 포함한 광물 자원 수출을 통해서 채웠다. 아옌데는 “구리는 칠레의 임금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광물 수출에서 번 돈의 대부분을 케네콧, 아나콘다, 브레이든 등의 미(p. 408)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가 모든 이집트인의 소망이었던 것처럼, 구리 광산의 국유화 또한 모든 칠레인의 꿈이었다. 구리 광산의 민영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이는 아옌데가 아니었다. 아옌데 이전 대통령인 프레이 몬탈바가 먼저 미국 기업이 소유한 칠레 구리 광산 회사들의 51% 지분을 칠리 정부 이름으로 인수했다. 또한 아옌데가 대통령이 된 후 열린 국회에서 우파와 좌파 가리지 않고 만장일치로 구리 국유화에 찬성했다. 이에 아옌데 는 미국과 협상에 나섰으나, 미국으로서는 아옌데의 구리 광산 국유화에 찬성할 리 없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러자 아옌데는 미국 기업의 지분을 강제로 인수하며 대신 배상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 기업이 그동안 구리 광산으로 거둔 과도한 이익을 배상금에서 공제할 것이며, 15년간 미국 기업이 벌어들인 7억 7,400만 달러 규모의 이익이 배상금보다 커서 배상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강제 무상 몰수였다. 15년 전, 이집트가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실제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 제2차 중동 전쟁을 일으켰듯, 미국 또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더욱이 냉전의 시대였다. 아옌데가 집권하기 11년 전인 1959년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거기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미국의 턱 밑에 소련 핵미사일을 들여와 미국을 위협했다. 미국으로서는 또다시 중남미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인 아옌데는 피델 카스트로를 칠레에 초청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아옌데의 인연은 1950년 쿠바에서 피텔 카스트로가 쿠(p. 409)바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후, 아옌데가 쿠바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아옌데의 요청으로 칠레를 방문한 카스트로는 원래 일주일간 머물 예정이었으나 무려 25일간 머물며 아옌데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아옌데는 1954년에는 소련에 한 달간, 중국에 3개월간 체류하면서 마오쩌둥을 만나기도 했다. 또한 북한과 베트남을 순방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1971년 1월 중국과 외교 관계마져 수립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칠레가 제2의 쿠바가 될까 두려웠다. 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이었지만, 속으로는 반공이 더 중요했다. 미국 외교의 목표는 쿠바 혁명의 ‘수출’을 막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만 아니라면, 독재라도 상관없었다. 이미 미국의 정보기관인 CLA는 1954년 콰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쿠바, 도미니카, 파나마, 베네수엘라 등 중남 미 좌파 정권을 상대로 군부에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지원하고 있었고, 칠레도 그중 하나였다. 아옌데는 국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리 광산을 국유화해서 그 수입으로 국민 복지를 늘릴 생각이었다. 의도는 선했고, 의지 또한 강했다. 하지만 방법은 서툴렀고, 결과는 처참했다.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100% 국유화하자, 미국 대통령은 CIA 국장인 리처드 헬름스에게 짧은 메모를 남겼다. 이에 미국은 오늘날 이란과 북한에 하듯 칠레에 경제 봉쇄를 가하는 동시에 미국이 가지고 있던 구리를 대량으로 시장에 풀었다. 구리 가격이 순식간에 폭락했다. 특정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고 가격을 낮춰 상대 기업을 파산시키는 이른바 ‘치킨 게임’을 미국이 시작한 것이었다. 칠레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정부 재정의 대부분을 구리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구리 가격이 곤두박질(p. 410)치자, 곧바로 칠레 정부의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칠레 정부가 벌인 강제 국유화의 다음 목표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겁먹은 수많은 다국적 기업과 자본가들이 썰물처럼 칠레를 빠져나갔다. 칠레 화폐인 에스쿠도화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 칠레 정부는 재정 수입이 감소한 데다 자국 화폐가치마저 하락하자 더 이 상 빛을 갚을 수 없었다. 구리 광산 국유화를 시작한 지 겨우 4개월만인 1971년 11월 칠레 정부는 빛을 갚을 수 없으니 기다려달라는 지불 유예,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구리 국유화의 여파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1972년 10월 트럭 소유주들이 파업에 나섰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럭을 운전사나 정부가 빼앗아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파업한 이들이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라, 트럭 즉 생산 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의 파업이어서 '사장들의 파업'이라 불렸다. 남북으로 4,800킬로미터의 긴 지팡이 같은 나라에서 수송이 멈추자, 생필품 부족 현상이 극심해졌다. 북쪽에서는 생선이, 남쪽에서는 채소와 과일이 썩어 나갔다. 들판에서는 수확하지 않은 농작물이 썩어가며 악취를 풍기는데, 가게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가끔 들어오는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긴 줄을 서야 했다. 사람은 많은데, 물건은 부족했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으나, 대개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암시장에서 정부가 정한 가격의 몇 배에 팔렸다. 당장 재정이 부족한 정부는 돈을 찍어내는 동시에 임금을 급격히 올렸다. 식량과 생필품은 부족한데, 돈만 넘쳐나자 물가가 상승했다. 뭐가 원(p. 411)인이고, 결과인지 모를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71년 정부의 50퍼센트 임금 인상과 가격 통제를 통해 경제는 8% 성장하고, 인플레이션을 22%로 낮추어 성공한 듯 보였지만, 잠시뿐이었다.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과도한 통화량 증가로 1972년 인플레이션은 260%에서, 1973년에는 무려 605%를 기록했다.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다.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만 갔다. 노동자도, 사장도 심지어 이를 해결해야 하는 정부마저도 다 같이 비명을 질렀다. 칠레가 구리 광산 국유화를 추진했을 때, 닉슨 대통령이 CIA 국장인 리처드 헬림스에게 남긴 메모가 그대로 이루어졌다. "칠레 경제에 비명을. (Make the Economy Scream)" 1973년 봄 세계에서 가장 큰 구리 광산인 엘 테니엔테(el Teniente)의 광부들이 41%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를 위한 정부에 노동자가 파업으로 맞선 것이었다. 파업은 또 다른 파업으로 번졌다. 무려 76일만에 구리 광산 노동자의 파업이 끝났지만, 이로써 구리가 전부인 칠레는 어마어마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식료품 부족 사태로 길게 늘어선 줄에는 자취를 감춘 물건 대신 출처를 알 수 없는 폭동과 쿠데타에 관한 소문만 넘쳐났다. 거기다 정치마저 혼란스러웠다. 사회당과 공산당에 다른 4개의 정당까지 더해진 아옌데의 인민 전선은 단 한번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아옌데가 정책을 추진하려면, 오른쪽과 왼쪽을 왔다갔다 하는 기독민주당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p.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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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읽고, 미래를 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