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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흐르는 남북통일
역사는 내가 싫어하는 분야다. 연도나 인물을 외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사나 세계사 얘기가 나오면 주눅이 든다. 억지로라도 교양인 수준의 역사 지식은 가져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명한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그의 책에서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질문) 남북분단이 오래 지속되어 사람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열망이 많이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단시대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답변) 민족분단시대가 반세기를 훨씬 넘기다보니 분단 타성 같은 것에 빠져서 분단 고통에 대한 인식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느 강연장에서는 같은 민족이 두개 이상의 나라를 이루어 사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되지도 않을 통일, 통일 하지 말고 남북이 싸우지만 말고 이대로 나뉘어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의 지정학적 위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사 이후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고통을 누누이 말했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도 특히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 젊은이들의 열망이 사그라드는 데는 그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늙은 세대의 고질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1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2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부터 육십년 전에 나도 꼭 같은 고민을 하다 결국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입대했었는데, 지금 내 손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예사로운 일일까요? 세계에 이런 민족사회가 또 있을까요? 이십대 초엽의 꽃다운 나이에 어제까지의 일을 백지인지 '백치'인지로 돌릴 것을 강요당하는 군대 생활을 반드시 몇년씩 해야 합니다. 동포인 북녘 젊은이들은 복무기간이 더 길다고 알고 있지요. 대부분의 세계 청년들이 가고 싶은 사람만 받을 만큼의 월급을 받고 군대에 가는데 말입니다. 이게 모두 분단 때문이 아닌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부자 나라 일본도, 그리고 통일한 독일도 상비군이 30만명 미만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는 남북을 합치면 백만명이 훨씬 넘습니다. 그 군사비용이 또 얼마입니까? 동족끼리 반세기가 넘도록 다투고 있는 우리 땅을 두고 세계인들이 '극동의 화약고'요 세계에서 전쟁 위험이 제일 높은 곳의 하나라고 한심해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쪽은 옛 소련과도 또 중국과도 벌써 국교를 열었는데 북쪽은 아직도 미국과도 일본과도 국교가 없고 따라서 우리 땅 전체가 저 무서운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분단 때문인데 통일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든다고요? 도대체 생각이 있는 젊은이들일까요? 더 할 말을 잃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난 20세기보다는 세계 평화가 정착되어가고 우리 젊은이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지리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제 민족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언제까지나 '극동의 화약고'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은 아마 다른 나라 젊은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민족의 평화적 통일 문제는 시일이 지난다고 해서 결코 사그라들 문제가 아닙니다(pp. 14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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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중독자, 김영란 전 대법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붙어 판사의 길을 한평생 간 법조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당시 문과에 점수 높은 학생들은 법대로, 이과는 의대로 진학했다. 아마도 김영란 전 대법관도 높은 점수에 따라 법대로 진학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후 수많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보람을 느꼈을까? 그녀는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고 법조인의 길을 가면서도 그러했다. 글 속에 소개한 책들은 나는 읽기는커녕 들어도 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만큼 그녀는 독서에 있어 고수이다. 나도 한때 소설을 많이 보다가 일부러 끊었던 적이 있다.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으로 한권, 다섯권, 때로 열권을 썼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 로스쿨 교수는 법학도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했는지 모른다. 판사는 남의 인생사를 판단해 주는 사람이기에 차가운 법률이 아닌 공감 능력으로 타인의 인생을 봐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한 독서 고수를 보며 도전을 받고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문학적 재판관 『시적 정의』 저는 제 삶을 가지고 스스로 이분법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요. 법원에 가면 남의 사건을 열심히 연구하는 법률가로 일하지만, 집에 오면 전공이나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만 읽었습니다. 저는 책 읽기와 직업을 늘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꼭 읽어야 하는 법률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댓가가 돌아오지 않는 책들만 읽어왔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만난 책이 『시적 정의』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책을 읽어온 것이 완전히 쓸모가 없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쓴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시카고 로스쿨의 교수입니다.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수업을 맡아 로스쿨 학생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인간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공적 합리성 개념'이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정의가 어떻게 시적일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누스바움은 책의 앞머리에서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나 자신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시적 정의』, 궁리 2013, 7면)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문학적 재판관은, 휘트먼의 시인과 같이, 풀잎사귀들 속에서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 - 또한 성적 갈망과 개인적 자유의 보다 신비로운 이미지들까지도 - 을 본다" (252면)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곧 시적 정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시적 정의의 개념은 재판관에게 문학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스바움은 그것을 과학적 사고와 대비해서 설명합니다. 누스바움은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경제학적 사유는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신비하고도 지극히 복잡한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복잡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73면)라고 지적합니다. 반면 문학은 세상을 환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질적인 차이들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누스바움은 소설의 특징으로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객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83)를 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공평한 관찰자가 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공평한 관찰자'란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또다른 자신, 즉 공평한 관찰자를 내면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해 공평한 관찰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것이지요. 누스바움은 이 개념을 끌어와, 공평한 관찰자는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160면)고 설명합니다. 관찰자로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편향적이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상상한다는 것이지요.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일 자신이 그와 같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동시에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불행한 상황을 현재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함께 생각" (161~62면)한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애덤 스미스 당시에는 공감, 즉 엠퍼시(empathy)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감'의 뜻에 가까운 씸퍼시(sympath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공감이 단순히 당사자들과 일치되는 감정이 아니라 공평한 관찰자로서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재판관이 갖추어야 할 공적 합리성은 바로 이 공평한 관찰자의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문학 작품은 불완전한 길잡이가 될 수도 있고 여전히 기존의 법령과 판례 등에 관한 지식이나 재판의 제도적 역할에 대한 인식 등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문학적 재판관이란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관찰자의 능력을 지닌 재판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요즘 식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보면서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지는 않고 비판적인 거리를 두면서도 그 사람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는 굳이 애덤 스미스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그동안 제가 소설을 많이 읽어온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요. 스스로도 소설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 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내가 읽어온 책들이 내게 '공감'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어서 내가 현실에서 사건을 보고 판결을 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직업적으로도 꽤나 쓸모가 있었던 셈입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어준 것이지요.(pp.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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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의 필요성과 희열
목회할 때나 교계 기자를 하는 지금이나 나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돈을 벌어가면서 책을 읽느라 목회할 때보다 책 읽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목회할 때는 목양실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본 날이 많았다. 목회를 중단하며 넓은 목양실의 책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많은 책들을 버리고, 친구들에게 주고 일부만 가지고 이사를 했다.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책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전업 작가인 유시민은 탁월한 달변가이며 많은 책을 낸 저술가이다. 그는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어휘를 늘려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독서를 해야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또한 책 읽기의 희열을 느껴보라고 한다. 그렇다. 책을 읽다가 기막힌 내용이 나오면 전율한다. 그래서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목사는 책을 읽어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서비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가? 목사에게 독서는 의무이자 특권이다. 뻔한 설교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한다. 책 읽기를 멈춘다면 목회도 멈춰야하지 않을까? 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를 알아야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문장 공부를 하는 분들이 흔히 있는데,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빈약하면 아무리 문장 공부를 해도 글이 늘지 않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에요. 아무리 멋진 조감도와 설계도가 있어도 건축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쓸 수 없어요.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어휘를 늘리라고 권하는 겁니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자기 자신과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생명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좌우합니다. 어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괴상한 편견이 있더군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 논리적이고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아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지극히 단순한 어휘를 반복 사용하면서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간결어법'이라고 칭찬합니다. 생각이 얕고 감정이 메말라서 할 말도 적고 표현하는 능력도 없는 사람을 두고 ‘말이 적고 진중하다’고 하죠. 저는 이것이 일종의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같잖은 말'이 통용되기까지 합니다. 어휘 부족과 문장의 단조로움은 지적 수준이 낮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제대로 된 문명국가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 보셨나요? 진보든 보수든 다들 말을 잘합니다. 2016년 미국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사람들을 보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 버니 샌더스(BernicSanders)는 물론이요 막말로 악명 높았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도 말을 얼마나 찰지게 했습니까. 십육년 동안 집권하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 보수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도 할 줄 아는 언어가 독일말 하나뿐이었고 눌변으로 유명했지만 연방의회에서 토론할 때는 정책 쟁점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곤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임기 내내 단 한번도 토론다운 토론이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전에 짜놓은 각본 없이 누군가와 토론하는 데 기본으로 필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야박한 평가인가요? 어휘를 늘리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독서입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모든 강연에서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토지』 『자유론』 『코스모스』 『사피엔스』 『시민의 불복종』처럼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와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 책을 다섯번 열번 반복해서 즐기며 읽는 거예요. 읽고 잊고, 다시 읽고 잊고, 또 읽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축자재를 끌어 모으게 됩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 대학입시 공부하듯이 책을 읽지는 마십시오. 흥미가 없는데도 입시를 위해 수학 공부를 하면 행복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행복합니다. 행복해지는 책 읽기! 그게 중요합니다. 자기한테 맞는 책을 읽어야 해요. 교양인의 필독도서 목록, 뭐 그런 것에 주눅 들어 끌려다니지 마시고요.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책 읽다 말고, 도저히 계속 읽을 수가 없어서 읽던 책을 가슴에 댄채 '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경험 말입니다. 여자분들이 보통 그렇게 하지요. 이런 순간을 자주 경험하셔야 합니다. 감정이 너무 강하게 일어나서, 그걸 가라앉히기 전까지는 텍스트를 더 읽어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을 누리자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공부와 독서의 '결정적 순간'이라 믿습니다. 남자들은 조금 다르게 행동하더군요. 책을 가슴에 붙이는 게 아니라 읽던 페이지가 아래로 향하게 엎어둡니다. 위를 보면서 한숨을 '후' 내쉰 다음, 창문을 열거나 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물어요. ‘끊어야 할 텐데…………….’ 이러면서요.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고서는, '대박이야' '이러면서 또 책을 봅니다. 바로 이거예요. '결정적 순간'! 이런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한 겁니다. 우리 국민 셋 가운데 한 사람은 일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는 건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는 뺀 통계라서 조금 다행이긴 합니다만, 정말 안타까워요. 읽던 책을 가슴에 대고 한숨을 푹 내쉴 때 우리의 내면을 채우는 그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그 기쁨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pp. 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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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이 책은 여자에게 이혼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남성 의존적인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아내와 결혼한지 30년이 되가는데 여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단지 남자인 나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목회를 중단하고 나는 교계기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내도 이제는 사모로 불리지 않는다. 아마 아줌마로 불릴 것이다. 그것이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목사의 아내인 사모로 “곁들이” 인생으로 살다가 이제는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야하는 과제를 직면하고 있다. 나는 아내의 제2의 인생을 격려하고 있다. 이제는 나의 “시다” 인생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는 씩씩하게 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때로 힘들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격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으리라고 기대한다. 내게 묻어가는 인생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개척하며 나아가는 아내를 나는 리스펙한다. 이 책은 모든 여자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을, 남자에게서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전직 수녀의 심리 상담 책이다. 이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하고 있다. ▲ 스스로 대상이 되어 발현하는 사랑 많은 여성이 사랑에 있어서 최선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느낍니다. 여성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적령기가 되어서, 혹은 주변의 압력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분명 '소속'과 '속함'입니다. 우리가 현모양처라고 이야기하는 전형적 여성들의 모습이 '헌신'처럼 보이나 실은 자신을 일부 포기하고 '그'에게 ‘소속’됨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구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궁극적인 욕망입니다. 가지기 위해서는 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여성 신경중 현상 중 하나는 스스로를 실현하거나 직접적이기보다 타인을 경유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속하든, 누군가를 채우는 방식이든 그것은 모두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필요한 사람으로 타인이 아니라 주체인 나 스스로를 믿는 사람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합니다. 타인을 경유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실현하고 만족시키는 데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타인을 향한 돌봄과 헌신은 돌려받아야 할 무엇이기보다 그 자체로 온전히 타인을 위한 것일 때,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 타인에게 필요한 나’라는 시선에서 조금 떨어져 나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pp 219-220) ▲ 절대적 신뢰 그 요원한 소망 가족이나 연인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과 분석을 진행하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그저 말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참 사랑스러운데, 왜 그토록 상대와 지리멸렬하게 싸우며 살아야 할까 싶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면 사랑스러움이 제대로 보이는데, 우리는 상대와 친밀함과 애정으로 밀착될수록 요구와 욕망에 매몰되어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연인이나 친구로부터 바라는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안전함과 절대적 자아를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처럼요. 아이와의 관계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성인이된 관계 안에서의 신뢰는 서로의 나약함을 허용하는 태도입니다.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다는 또 다른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니까요.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내 맘이 네 맘이고 네 맘이 내 맘인 것은 건강한 친밀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느끼는 실망과 좌절에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려는 충실성,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으려는 발버둥,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어느 만큼 거리를 두어도 서로에게 느끼는 서운함으로 인해 서로를 할퀴지 않겠다는 의지 등이겠지요. 결코 서로에게 온전히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것이 진짜 신뢰가 아닐까요? 우리는 참으로 구멍투성이의 나약한 인간들이니까요.(pp. 2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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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내 자신이 나이들어 가고 있고, 부모님께서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고 있다. 그러자 페이스북에 아는 장로님이 “힘네세요”라고 썼다. 삶이 힘들어서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다. 살아 있기에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다. 의사로서 죽음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고 있는 정현채 교수가 쓴 책을 읽었다. 중간에 윤회나 전생 등은 우리 기독교와 상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의사가 이러한 책을 썼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원래 죽음과 내세는 기독교의 전문 분야 아닌가? 책 말미에 있는 저자의 죽음 준비에 대한 내용이다. 참고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11년 간 죽음학 강의를 해 왔다. 강의가 끝난 뒤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교수님께서는 죽음 준비를 어떻게 하고 계세요?" 필자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필자가 어떻게 죽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말씀드리려고 한다. 필자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공교롭게도 심장병 증상을 보인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미처 주변 정리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필자는 평소에 미리미리 죽음 준비를 해 둬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우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 오고 있다. 40여 년 전 의과대학생 때 필기했던 노트, 30년 전 전임 강사였을 때의 월급명세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 등등 이런저런 자료들을 목록과 함께 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 병원 9층에 위치한 필자의 연구실에는 책이나 물건이 거의 없다. 언제라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도록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또 정년퇴임을 하는 선배 교수들이 버린 물건들 가운데 사료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이 자료들도 100년 뒤에는 우리 대학의 귀중한 기록이요. 발자취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 의과대학 박물관에는 작고한 교수의 사적인 메모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0여 년째 해 오고 있는 죽음학 강의도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3년 가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영화를 통한 현대인의 죽음 이해> 강의를 마쳤을 때 한 1학년 학생이 내게 부탁을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뇌경색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계시다며 강의 내용을 두 분에게 들려 드리고 싶으니 강의에 사용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복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흔쾌히 복사해 줬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로 필자는 강의 자료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저작권 문제가 있는 자료를 제외하곤 가능하면 모두 제공하고 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강의 내용을 자기 주변에 전하게 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2006년부터 1년에 다섯 차례 정도 헌혈을 해 오고 있었다. "이제 너무 늙어서 헌혈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2018년 1월 필자가 암 진단을 받게 되면서 헌혈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어 아쉽게 생각한다. 헌혈로 모은 혈액은 대체로 응급이나 위기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그동안 해 왔던 헌혈이 얼굴 모르는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한다. 장기기증서약서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유언장 등은 이미 작성해 놓았다. 유언장은 가끔 내용을 보완하기도 하고 고쳐 쓰기도 한다. 유언장에는 남길 물건에 대해서도 정리해서 썼지만, 그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두 딸에게 말해 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영정 사진은 10년 전인 2008년 9월 갑작스럽게 폐렴을 앓고 나서 집 소파에 와인잔을 들고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런 데 2013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를 할 때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을 잡지사에서 영정사진으로 쓰기 딱 좋게 사진틀에 넣어 보내와서 그걸로 할까도 생각중이다. 미국의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임종 환자를 많이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펴냈다. 필자는 이 책에 나오는 네 가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또 잘못했던 일에 대해 서도 미안했다고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마음속에서라도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할 일에 대해서는 되도록 빨리 용서하려고 노력한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나비넥타이를 하면서 긴 넥타이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낡은 넥타이는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은 바자회에 갖다 줬더니 인기리에 팔렸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갖기 싫어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기부하거나 선물하는 게 좋다. 30여 년 전부터 와인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책자나 자료는 물론이고 디캔터 · 코르크스크루 같은 도구도 꽤 많이 모았다. 얼마 전부터는 이것들을 의과대학 와인 동아리에 기증하고 있다. 언젠가 사별한 날에 대해 아내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본인의 희망대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남겨진 자식들을 생각하면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훨씬 좋다는 얘기를 한다. 필자의 가장 큰 소망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최소한 한두 달만이라도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면 좋을지에 대해 사전장례의향서도 준비 중이다. 수의는 삼베 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으려고 했지만, 화학제품은 다이옥신 같은 공해 물질이 많이 나온다고해서 면으로 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수의 중에 무명으로 된 것도 있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관도 나무로 된 것은 태울 때 화석연료를 많이 소모하게 될 테니 종이로 만든 관을 사용하려고 한다. 집안에서 경기도 고양시에 200~300기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납골당을 오래전에 마련했다. 별일이 없으면 필자의 유골도 이곳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생각을 바꿨다. 납골당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두 딸이 찾아오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해양장(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정식 인가를 받은 해양장 업체가 전국에 서너 곳이 있다. 서울의 경우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1킬로미터 떨어진 부표까지 가서 유골을 뿌린다고 한다. 해양장은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전문 연구기관도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례인 셈이다. 그밖에도 죽음 준비에 필요한 사항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죽음을 알릴 사람들의 범위를 명시해 두는 일, 제단이나 조화 구성,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서도 사전장례의향서에 포함해야 할 내용들이다. 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위해 틀 음악을 선정하고 이를 USB에 담아 놓는 일은 이미 4년 전에 시작하였는데 수록된 음악이 현재 200곡이 넘었다. 빈소에 놓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틈틈이 추려서 미리 편집해 놓으려고 한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따라서 기일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형식을 벗어나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와인 한잔 나누면서 같이 살던 때를 추억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두 딸에게 얘기해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쓸쓸하면 평소 내가 좋아했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거닐어도 좋고, 작은 꽃다발 하나씩 준비해서 서로 건네줘도 좋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얘기해 놓아야 본인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음의 실체가 소멸이 아니고 옮겨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례 준비가 부담스러울 것이 없다. 또 지구별에 잠시 소풍 왔다가 가는 것이니 주변을 깨끗이 한 후에 떠나야 한다. 다음에 놀러 올 후손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은 먼저 왔다 가는 사람들의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한다(pp. 354-362). 380페이지이나 어렵지 않아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독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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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의학과 과학은 사후 세계를 잘 인정할려고 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치부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심장전문의 핌 반 롬멜 박사는 근사체험을 의학적으로 연구해 인정받은 전문가다. 그는 논문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의학전문 학술지 <란셋>에 근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최초로 실은 사람이기도 하다. <란셋>에 발표하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2001년 《란셋>에 핌 반 롬멜 박사의 근사체험 논문 『심장정지 후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가 실리면서, 근사체험은 학계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약 4년 동안 10개 병원에서, 심장이 멈춘 후 기적적으로 소생한 환자 344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되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8퍼센트에 해당하는 62명의 환자들이 당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이들 중 41명은 근사체험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다음은 근사체험 사례들의 특징이다. 1. 유체이탈 경험 많은 근사체험자들이 심장이 정지된 후 육체를 이탈해 외부에서 사건을 인식하는 경험을 했다. 이런 근사체험자들은 오래된 옷을 벗듯 육체를 빠져나오고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인지 능력, 감정, 그리고 매우 명료한 의식까지 그대로였다. 롬멜 박사의 논문에는 44세의 어느 청색증 환자 사례가 실려 있다. 그는 풀밭에서 뇌사상태가 된 지 30분 만에 발견되었다. 그의 입안에는 의치가 있었고, 간호사는 의치를 뽑아내어 카트 위에 놓았다. 한 시간 반 후에 환자의 심장 박동과 혈압이 되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뇌사상태였다. 1주일이 지나자 그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간호사가 자신의 의치를 꺼내 카트 위에 둔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뇌사상태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었던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보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심폐소생술로 분주하던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심폐소생술을 받던 작은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외양도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 삶의 회고 경험 근사체험자들 중에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경험을 한 체험자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은 한눈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는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삶 전부를 3차원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다음은 한 사례자의 증언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과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어졌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관련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그들의 생각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요. 내가 한 행동과 생각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깨닫게 되었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처럼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재연되는 동안 내내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어요. 모든 주제들이 떠오를 만큼 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눈 깜짝할 새 같기도 했죠. 시간과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는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3. 죽은 이들과의 만남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이미 사망한 지인이나 친지들과 만난 경험을 했다. 그들은 외양으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근사체험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의식과 연결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한다. 한 사례자는 근사체험 동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부를 만난 경험을 고백한다. “심장이 정지된 동안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외에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 체험이 있은 지 10년 뒤에,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에 내게 고백하셨죠. 나는 혼외 정사로 태어난 자식이라고요. 내 아버지는 강제추방당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유대인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가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가 10년 전 근사체험 때 보았던 그 남자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지요.” 4. 몸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만난 빛이나 죽은 친지와의 말 없는 의사소통을 이해하게 된 후에 머리 정수리를 통해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증언했다. 친지들의 말 없는 대화 내용은 대개 "아직은 때가 아니다" 또는 "너는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의식이 신체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매우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다시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한계에 다시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깊은 지식과 앎에 대한 의식의 일부를 다시금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된 순간은 너무나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근사체험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내 육체의 한계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게 매우 어려운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5. 사라진 죽음의 공포 근사체험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주변사람들이나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조차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육체로부터 분리되지만 인지 능력은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죽음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논의하는 것은 내 역량 밖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경험이, 죽음 너머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는 결정적인 경험이었죠.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입니다. 이 경험은 내게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몸과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근사체험자들은 모든 생각과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pp. 105-109). 물론 이 근사체험(임사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할지 관심 갖고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의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는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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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흐르는 남북통일
- 역사는 내가 싫어하는 분야다. 연도나 인물을 외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사나 세계사 얘기가 나오면 주눅이 든다. 억지로라도 교양인 수준의 역사 지식은 가져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명한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그의 책에서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질문) 남북분단이 오래 지속되어 사람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열망이 많이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단시대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답변) 민족분단시대가 반세기를 훨씬 넘기다보니 분단 타성 같은 것에 빠져서 분단 고통에 대한 인식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느 강연장에서는 같은 민족이 두개 이상의 나라를 이루어 사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되지도 않을 통일, 통일 하지 말고 남북이 싸우지만 말고 이대로 나뉘어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의 지정학적 위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사 이후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고통을 누누이 말했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도 특히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 젊은이들의 열망이 사그라드는 데는 그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늙은 세대의 고질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1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2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부터 육십년 전에 나도 꼭 같은 고민을 하다 결국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입대했었는데, 지금 내 손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예사로운 일일까요? 세계에 이런 민족사회가 또 있을까요? 이십대 초엽의 꽃다운 나이에 어제까지의 일을 백지인지 '백치'인지로 돌릴 것을 강요당하는 군대 생활을 반드시 몇년씩 해야 합니다. 동포인 북녘 젊은이들은 복무기간이 더 길다고 알고 있지요. 대부분의 세계 청년들이 가고 싶은 사람만 받을 만큼의 월급을 받고 군대에 가는데 말입니다. 이게 모두 분단 때문이 아닌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부자 나라 일본도, 그리고 통일한 독일도 상비군이 30만명 미만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는 남북을 합치면 백만명이 훨씬 넘습니다. 그 군사비용이 또 얼마입니까? 동족끼리 반세기가 넘도록 다투고 있는 우리 땅을 두고 세계인들이 '극동의 화약고'요 세계에서 전쟁 위험이 제일 높은 곳의 하나라고 한심해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쪽은 옛 소련과도 또 중국과도 벌써 국교를 열었는데 북쪽은 아직도 미국과도 일본과도 국교가 없고 따라서 우리 땅 전체가 저 무서운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분단 때문인데 통일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든다고요? 도대체 생각이 있는 젊은이들일까요? 더 할 말을 잃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난 20세기보다는 세계 평화가 정착되어가고 우리 젊은이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지리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제 민족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언제까지나 '극동의 화약고'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은 아마 다른 나라 젊은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민족의 평화적 통일 문제는 시일이 지난다고 해서 결코 사그라들 문제가 아닙니다(pp. 14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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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흐르는 남북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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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중독자, 김영란 전 대법관
-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붙어 판사의 길을 한평생 간 법조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당시 문과에 점수 높은 학생들은 법대로, 이과는 의대로 진학했다. 아마도 김영란 전 대법관도 높은 점수에 따라 법대로 진학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후 수많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보람을 느꼈을까? 그녀는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고 법조인의 길을 가면서도 그러했다. 글 속에 소개한 책들은 나는 읽기는커녕 들어도 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만큼 그녀는 독서에 있어 고수이다. 나도 한때 소설을 많이 보다가 일부러 끊었던 적이 있다.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으로 한권, 다섯권, 때로 열권을 썼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 로스쿨 교수는 법학도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했는지 모른다. 판사는 남의 인생사를 판단해 주는 사람이기에 차가운 법률이 아닌 공감 능력으로 타인의 인생을 봐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한 독서 고수를 보며 도전을 받고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문학적 재판관 『시적 정의』 저는 제 삶을 가지고 스스로 이분법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요. 법원에 가면 남의 사건을 열심히 연구하는 법률가로 일하지만, 집에 오면 전공이나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만 읽었습니다. 저는 책 읽기와 직업을 늘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꼭 읽어야 하는 법률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댓가가 돌아오지 않는 책들만 읽어왔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만난 책이 『시적 정의』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책을 읽어온 것이 완전히 쓸모가 없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쓴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시카고 로스쿨의 교수입니다.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수업을 맡아 로스쿨 학생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인간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공적 합리성 개념'이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정의가 어떻게 시적일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누스바움은 책의 앞머리에서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나 자신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시적 정의』, 궁리 2013, 7면)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문학적 재판관은, 휘트먼의 시인과 같이, 풀잎사귀들 속에서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 - 또한 성적 갈망과 개인적 자유의 보다 신비로운 이미지들까지도 - 을 본다" (252면)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곧 시적 정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시적 정의의 개념은 재판관에게 문학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스바움은 그것을 과학적 사고와 대비해서 설명합니다. 누스바움은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경제학적 사유는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신비하고도 지극히 복잡한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복잡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73면)라고 지적합니다. 반면 문학은 세상을 환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질적인 차이들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누스바움은 소설의 특징으로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객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83)를 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공평한 관찰자가 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공평한 관찰자'란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또다른 자신, 즉 공평한 관찰자를 내면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해 공평한 관찰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것이지요. 누스바움은 이 개념을 끌어와, 공평한 관찰자는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160면)고 설명합니다. 관찰자로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편향적이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상상한다는 것이지요.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일 자신이 그와 같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동시에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불행한 상황을 현재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함께 생각" (161~62면)한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애덤 스미스 당시에는 공감, 즉 엠퍼시(empathy)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감'의 뜻에 가까운 씸퍼시(sympath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공감이 단순히 당사자들과 일치되는 감정이 아니라 공평한 관찰자로서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재판관이 갖추어야 할 공적 합리성은 바로 이 공평한 관찰자의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문학 작품은 불완전한 길잡이가 될 수도 있고 여전히 기존의 법령과 판례 등에 관한 지식이나 재판의 제도적 역할에 대한 인식 등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문학적 재판관이란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관찰자의 능력을 지닌 재판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요즘 식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보면서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지는 않고 비판적인 거리를 두면서도 그 사람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는 굳이 애덤 스미스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그동안 제가 소설을 많이 읽어온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요. 스스로도 소설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 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내가 읽어온 책들이 내게 '공감'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어서 내가 현실에서 사건을 보고 판결을 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직업적으로도 꽤나 쓸모가 있었던 셈입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어준 것이지요.(pp.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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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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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중독자, 김영란 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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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의 필요성과 희열
- 목회할 때나 교계 기자를 하는 지금이나 나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돈을 벌어가면서 책을 읽느라 목회할 때보다 책 읽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목회할 때는 목양실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본 날이 많았다. 목회를 중단하며 넓은 목양실의 책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많은 책들을 버리고, 친구들에게 주고 일부만 가지고 이사를 했다.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책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전업 작가인 유시민은 탁월한 달변가이며 많은 책을 낸 저술가이다. 그는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어휘를 늘려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독서를 해야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또한 책 읽기의 희열을 느껴보라고 한다. 그렇다. 책을 읽다가 기막힌 내용이 나오면 전율한다. 그래서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목사는 책을 읽어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서비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가? 목사에게 독서는 의무이자 특권이다. 뻔한 설교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한다. 책 읽기를 멈춘다면 목회도 멈춰야하지 않을까? 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를 알아야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문장 공부를 하는 분들이 흔히 있는데,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빈약하면 아무리 문장 공부를 해도 글이 늘지 않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에요. 아무리 멋진 조감도와 설계도가 있어도 건축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쓸 수 없어요.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어휘를 늘리라고 권하는 겁니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자기 자신과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생명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좌우합니다. 어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괴상한 편견이 있더군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 논리적이고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아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지극히 단순한 어휘를 반복 사용하면서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간결어법'이라고 칭찬합니다. 생각이 얕고 감정이 메말라서 할 말도 적고 표현하는 능력도 없는 사람을 두고 ‘말이 적고 진중하다’고 하죠. 저는 이것이 일종의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같잖은 말'이 통용되기까지 합니다. 어휘 부족과 문장의 단조로움은 지적 수준이 낮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제대로 된 문명국가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 보셨나요? 진보든 보수든 다들 말을 잘합니다. 2016년 미국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사람들을 보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 버니 샌더스(BernicSanders)는 물론이요 막말로 악명 높았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도 말을 얼마나 찰지게 했습니까. 십육년 동안 집권하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 보수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도 할 줄 아는 언어가 독일말 하나뿐이었고 눌변으로 유명했지만 연방의회에서 토론할 때는 정책 쟁점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곤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임기 내내 단 한번도 토론다운 토론이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전에 짜놓은 각본 없이 누군가와 토론하는 데 기본으로 필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야박한 평가인가요? 어휘를 늘리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독서입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모든 강연에서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토지』 『자유론』 『코스모스』 『사피엔스』 『시민의 불복종』처럼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와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 책을 다섯번 열번 반복해서 즐기며 읽는 거예요. 읽고 잊고, 다시 읽고 잊고, 또 읽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축자재를 끌어 모으게 됩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 대학입시 공부하듯이 책을 읽지는 마십시오. 흥미가 없는데도 입시를 위해 수학 공부를 하면 행복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행복합니다. 행복해지는 책 읽기! 그게 중요합니다. 자기한테 맞는 책을 읽어야 해요. 교양인의 필독도서 목록, 뭐 그런 것에 주눅 들어 끌려다니지 마시고요.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책 읽다 말고, 도저히 계속 읽을 수가 없어서 읽던 책을 가슴에 댄채 '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경험 말입니다. 여자분들이 보통 그렇게 하지요. 이런 순간을 자주 경험하셔야 합니다. 감정이 너무 강하게 일어나서, 그걸 가라앉히기 전까지는 텍스트를 더 읽어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을 누리자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공부와 독서의 '결정적 순간'이라 믿습니다. 남자들은 조금 다르게 행동하더군요. 책을 가슴에 붙이는 게 아니라 읽던 페이지가 아래로 향하게 엎어둡니다. 위를 보면서 한숨을 '후' 내쉰 다음, 창문을 열거나 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물어요. ‘끊어야 할 텐데…………….’ 이러면서요.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고서는, '대박이야' '이러면서 또 책을 봅니다. 바로 이거예요. '결정적 순간'! 이런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한 겁니다. 우리 국민 셋 가운데 한 사람은 일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는 건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는 뺀 통계라서 조금 다행이긴 합니다만, 정말 안타까워요. 읽던 책을 가슴에 대고 한숨을 푹 내쉴 때 우리의 내면을 채우는 그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그 기쁨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pp. 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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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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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의 필요성과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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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 이 책은 여자에게 이혼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남성 의존적인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아내와 결혼한지 30년이 되가는데 여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단지 남자인 나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목회를 중단하고 나는 교계기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내도 이제는 사모로 불리지 않는다. 아마 아줌마로 불릴 것이다. 그것이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목사의 아내인 사모로 “곁들이” 인생으로 살다가 이제는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야하는 과제를 직면하고 있다. 나는 아내의 제2의 인생을 격려하고 있다. 이제는 나의 “시다” 인생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는 씩씩하게 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때로 힘들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격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으리라고 기대한다. 내게 묻어가는 인생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개척하며 나아가는 아내를 나는 리스펙한다. 이 책은 모든 여자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을, 남자에게서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전직 수녀의 심리 상담 책이다. 이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하고 있다. ▲ 스스로 대상이 되어 발현하는 사랑 많은 여성이 사랑에 있어서 최선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느낍니다. 여성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적령기가 되어서, 혹은 주변의 압력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분명 '소속'과 '속함'입니다. 우리가 현모양처라고 이야기하는 전형적 여성들의 모습이 '헌신'처럼 보이나 실은 자신을 일부 포기하고 '그'에게 ‘소속’됨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구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궁극적인 욕망입니다. 가지기 위해서는 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여성 신경중 현상 중 하나는 스스로를 실현하거나 직접적이기보다 타인을 경유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속하든, 누군가를 채우는 방식이든 그것은 모두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필요한 사람으로 타인이 아니라 주체인 나 스스로를 믿는 사람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합니다. 타인을 경유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실현하고 만족시키는 데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타인을 향한 돌봄과 헌신은 돌려받아야 할 무엇이기보다 그 자체로 온전히 타인을 위한 것일 때,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 타인에게 필요한 나’라는 시선에서 조금 떨어져 나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pp 219-220) ▲ 절대적 신뢰 그 요원한 소망 가족이나 연인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과 분석을 진행하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그저 말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참 사랑스러운데, 왜 그토록 상대와 지리멸렬하게 싸우며 살아야 할까 싶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면 사랑스러움이 제대로 보이는데, 우리는 상대와 친밀함과 애정으로 밀착될수록 요구와 욕망에 매몰되어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연인이나 친구로부터 바라는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안전함과 절대적 자아를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처럼요. 아이와의 관계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성인이된 관계 안에서의 신뢰는 서로의 나약함을 허용하는 태도입니다.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다는 또 다른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니까요.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내 맘이 네 맘이고 네 맘이 내 맘인 것은 건강한 친밀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느끼는 실망과 좌절에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려는 충실성,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으려는 발버둥,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어느 만큼 거리를 두어도 서로에게 느끼는 서운함으로 인해 서로를 할퀴지 않겠다는 의지 등이겠지요. 결코 서로에게 온전히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것이 진짜 신뢰가 아닐까요? 우리는 참으로 구멍투성이의 나약한 인간들이니까요.(pp. 2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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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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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내 자신이 나이들어 가고 있고, 부모님께서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고 있다. 그러자 페이스북에 아는 장로님이 “힘네세요”라고 썼다. 삶이 힘들어서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다. 살아 있기에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다. 의사로서 죽음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고 있는 정현채 교수가 쓴 책을 읽었다. 중간에 윤회나 전생 등은 우리 기독교와 상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의사가 이러한 책을 썼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원래 죽음과 내세는 기독교의 전문 분야 아닌가? 책 말미에 있는 저자의 죽음 준비에 대한 내용이다. 참고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11년 간 죽음학 강의를 해 왔다. 강의가 끝난 뒤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교수님께서는 죽음 준비를 어떻게 하고 계세요?" 필자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필자가 어떻게 죽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말씀드리려고 한다. 필자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공교롭게도 심장병 증상을 보인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미처 주변 정리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필자는 평소에 미리미리 죽음 준비를 해 둬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우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 오고 있다. 40여 년 전 의과대학생 때 필기했던 노트, 30년 전 전임 강사였을 때의 월급명세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 등등 이런저런 자료들을 목록과 함께 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 병원 9층에 위치한 필자의 연구실에는 책이나 물건이 거의 없다. 언제라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도록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또 정년퇴임을 하는 선배 교수들이 버린 물건들 가운데 사료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이 자료들도 100년 뒤에는 우리 대학의 귀중한 기록이요. 발자취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 의과대학 박물관에는 작고한 교수의 사적인 메모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0여 년째 해 오고 있는 죽음학 강의도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3년 가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영화를 통한 현대인의 죽음 이해> 강의를 마쳤을 때 한 1학년 학생이 내게 부탁을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뇌경색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계시다며 강의 내용을 두 분에게 들려 드리고 싶으니 강의에 사용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복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흔쾌히 복사해 줬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로 필자는 강의 자료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저작권 문제가 있는 자료를 제외하곤 가능하면 모두 제공하고 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강의 내용을 자기 주변에 전하게 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2006년부터 1년에 다섯 차례 정도 헌혈을 해 오고 있었다. "이제 너무 늙어서 헌혈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2018년 1월 필자가 암 진단을 받게 되면서 헌혈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어 아쉽게 생각한다. 헌혈로 모은 혈액은 대체로 응급이나 위기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그동안 해 왔던 헌혈이 얼굴 모르는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한다. 장기기증서약서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유언장 등은 이미 작성해 놓았다. 유언장은 가끔 내용을 보완하기도 하고 고쳐 쓰기도 한다. 유언장에는 남길 물건에 대해서도 정리해서 썼지만, 그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두 딸에게 말해 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영정 사진은 10년 전인 2008년 9월 갑작스럽게 폐렴을 앓고 나서 집 소파에 와인잔을 들고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런 데 2013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를 할 때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을 잡지사에서 영정사진으로 쓰기 딱 좋게 사진틀에 넣어 보내와서 그걸로 할까도 생각중이다. 미국의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임종 환자를 많이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펴냈다. 필자는 이 책에 나오는 네 가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또 잘못했던 일에 대해 서도 미안했다고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마음속에서라도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할 일에 대해서는 되도록 빨리 용서하려고 노력한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나비넥타이를 하면서 긴 넥타이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낡은 넥타이는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은 바자회에 갖다 줬더니 인기리에 팔렸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갖기 싫어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기부하거나 선물하는 게 좋다. 30여 년 전부터 와인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책자나 자료는 물론이고 디캔터 · 코르크스크루 같은 도구도 꽤 많이 모았다. 얼마 전부터는 이것들을 의과대학 와인 동아리에 기증하고 있다. 언젠가 사별한 날에 대해 아내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본인의 희망대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남겨진 자식들을 생각하면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훨씬 좋다는 얘기를 한다. 필자의 가장 큰 소망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최소한 한두 달만이라도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면 좋을지에 대해 사전장례의향서도 준비 중이다. 수의는 삼베 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으려고 했지만, 화학제품은 다이옥신 같은 공해 물질이 많이 나온다고해서 면으로 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수의 중에 무명으로 된 것도 있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관도 나무로 된 것은 태울 때 화석연료를 많이 소모하게 될 테니 종이로 만든 관을 사용하려고 한다. 집안에서 경기도 고양시에 200~300기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납골당을 오래전에 마련했다. 별일이 없으면 필자의 유골도 이곳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생각을 바꿨다. 납골당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두 딸이 찾아오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해양장(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정식 인가를 받은 해양장 업체가 전국에 서너 곳이 있다. 서울의 경우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1킬로미터 떨어진 부표까지 가서 유골을 뿌린다고 한다. 해양장은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전문 연구기관도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례인 셈이다. 그밖에도 죽음 준비에 필요한 사항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죽음을 알릴 사람들의 범위를 명시해 두는 일, 제단이나 조화 구성,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서도 사전장례의향서에 포함해야 할 내용들이다. 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위해 틀 음악을 선정하고 이를 USB에 담아 놓는 일은 이미 4년 전에 시작하였는데 수록된 음악이 현재 200곡이 넘었다. 빈소에 놓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틈틈이 추려서 미리 편집해 놓으려고 한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따라서 기일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형식을 벗어나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와인 한잔 나누면서 같이 살던 때를 추억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두 딸에게 얘기해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쓸쓸하면 평소 내가 좋아했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거닐어도 좋고, 작은 꽃다발 하나씩 준비해서 서로 건네줘도 좋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얘기해 놓아야 본인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음의 실체가 소멸이 아니고 옮겨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례 준비가 부담스러울 것이 없다. 또 지구별에 잠시 소풍 왔다가 가는 것이니 주변을 깨끗이 한 후에 떠나야 한다. 다음에 놀러 올 후손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은 먼저 왔다 가는 사람들의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한다(pp. 354-362). 380페이지이나 어렵지 않아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독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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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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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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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 의학과 과학은 사후 세계를 잘 인정할려고 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치부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심장전문의 핌 반 롬멜 박사는 근사체험을 의학적으로 연구해 인정받은 전문가다. 그는 논문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의학전문 학술지 <란셋>에 근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최초로 실은 사람이기도 하다. <란셋>에 발표하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2001년 《란셋>에 핌 반 롬멜 박사의 근사체험 논문 『심장정지 후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가 실리면서, 근사체험은 학계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약 4년 동안 10개 병원에서, 심장이 멈춘 후 기적적으로 소생한 환자 344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되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8퍼센트에 해당하는 62명의 환자들이 당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이들 중 41명은 근사체험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다음은 근사체험 사례들의 특징이다. 1. 유체이탈 경험 많은 근사체험자들이 심장이 정지된 후 육체를 이탈해 외부에서 사건을 인식하는 경험을 했다. 이런 근사체험자들은 오래된 옷을 벗듯 육체를 빠져나오고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인지 능력, 감정, 그리고 매우 명료한 의식까지 그대로였다. 롬멜 박사의 논문에는 44세의 어느 청색증 환자 사례가 실려 있다. 그는 풀밭에서 뇌사상태가 된 지 30분 만에 발견되었다. 그의 입안에는 의치가 있었고, 간호사는 의치를 뽑아내어 카트 위에 놓았다. 한 시간 반 후에 환자의 심장 박동과 혈압이 되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뇌사상태였다. 1주일이 지나자 그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간호사가 자신의 의치를 꺼내 카트 위에 둔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뇌사상태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었던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보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심폐소생술로 분주하던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심폐소생술을 받던 작은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외양도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 삶의 회고 경험 근사체험자들 중에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경험을 한 체험자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은 한눈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는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삶 전부를 3차원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다음은 한 사례자의 증언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과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어졌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관련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그들의 생각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요. 내가 한 행동과 생각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깨닫게 되었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처럼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재연되는 동안 내내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어요. 모든 주제들이 떠오를 만큼 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눈 깜짝할 새 같기도 했죠. 시간과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는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3. 죽은 이들과의 만남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이미 사망한 지인이나 친지들과 만난 경험을 했다. 그들은 외양으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근사체험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의식과 연결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한다. 한 사례자는 근사체험 동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부를 만난 경험을 고백한다. “심장이 정지된 동안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외에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 체험이 있은 지 10년 뒤에,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에 내게 고백하셨죠. 나는 혼외 정사로 태어난 자식이라고요. 내 아버지는 강제추방당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유대인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가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가 10년 전 근사체험 때 보았던 그 남자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지요.” 4. 몸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만난 빛이나 죽은 친지와의 말 없는 의사소통을 이해하게 된 후에 머리 정수리를 통해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증언했다. 친지들의 말 없는 대화 내용은 대개 "아직은 때가 아니다" 또는 "너는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의식이 신체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매우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다시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한계에 다시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깊은 지식과 앎에 대한 의식의 일부를 다시금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된 순간은 너무나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근사체험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내 육체의 한계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게 매우 어려운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5. 사라진 죽음의 공포 근사체험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주변사람들이나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조차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육체로부터 분리되지만 인지 능력은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죽음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논의하는 것은 내 역량 밖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경험이, 죽음 너머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는 결정적인 경험이었죠.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입니다. 이 경험은 내게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몸과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근사체험자들은 모든 생각과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pp. 105-109). 물론 이 근사체험(임사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할지 관심 갖고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의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는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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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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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흐르는 남북통일
- 역사는 내가 싫어하는 분야다. 연도나 인물을 외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사나 세계사 얘기가 나오면 주눅이 든다. 억지로라도 교양인 수준의 역사 지식은 가져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명한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그의 책에서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질문) 남북분단이 오래 지속되어 사람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열망이 많이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단시대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답변) 민족분단시대가 반세기를 훨씬 넘기다보니 분단 타성 같은 것에 빠져서 분단 고통에 대한 인식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느 강연장에서는 같은 민족이 두개 이상의 나라를 이루어 사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되지도 않을 통일, 통일 하지 말고 남북이 싸우지만 말고 이대로 나뉘어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의 지정학적 위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근대사 이후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고통을 누누이 말했지만, 그런 문제를 떠나서도 특히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 젊은이들의 열망이 사그라드는 데는 그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늙은 세대의 고질이다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1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2학년 마치고 입대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부터 육십년 전에 나도 꼭 같은 고민을 하다 결국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입대했었는데, 지금 내 손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예사로운 일일까요? 세계에 이런 민족사회가 또 있을까요? 이십대 초엽의 꽃다운 나이에 어제까지의 일을 백지인지 '백치'인지로 돌릴 것을 강요당하는 군대 생활을 반드시 몇년씩 해야 합니다. 동포인 북녘 젊은이들은 복무기간이 더 길다고 알고 있지요. 대부분의 세계 청년들이 가고 싶은 사람만 받을 만큼의 월급을 받고 군대에 가는데 말입니다. 이게 모두 분단 때문이 아닌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부자 나라 일본도, 그리고 통일한 독일도 상비군이 30만명 미만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는 남북을 합치면 백만명이 훨씬 넘습니다. 그 군사비용이 또 얼마입니까? 동족끼리 반세기가 넘도록 다투고 있는 우리 땅을 두고 세계인들이 '극동의 화약고'요 세계에서 전쟁 위험이 제일 높은 곳의 하나라고 한심해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쪽은 옛 소련과도 또 중국과도 벌써 국교를 열었는데 북쪽은 아직도 미국과도 일본과도 국교가 없고 따라서 우리 땅 전체가 저 무서운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분단 때문인데 통일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든다고요? 도대체 생각이 있는 젊은이들일까요? 더 할 말을 잃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난 20세기보다는 세계 평화가 정착되어가고 우리 젊은이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지리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제 민족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언제까지나 '극동의 화약고'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세계무대에서의 활동은 아마 다른 나라 젊은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민족의 평화적 통일 문제는 시일이 지난다고 해서 결코 사그라들 문제가 아닙니다(pp. 14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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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무관심 속에 세월만 흐르는 남북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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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중독자, 김영란 전 대법관
-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붙어 판사의 길을 한평생 간 법조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그당시 문과에 점수 높은 학생들은 법대로, 이과는 의대로 진학했다. 아마도 김영란 전 대법관도 높은 점수에 따라 법대로 진학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후 수많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보람을 느꼈을까? 그녀는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고 법조인의 길을 가면서도 그러했다. 글 속에 소개한 책들은 나는 읽기는커녕 들어도 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만큼 그녀는 독서에 있어 고수이다. 나도 한때 소설을 많이 보다가 일부러 끊었던 적이 있다.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으로 한권, 다섯권, 때로 열권을 썼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서 마사 누스바움 로스쿨 교수는 법학도들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했는지 모른다. 판사는 남의 인생사를 판단해 주는 사람이기에 차가운 법률이 아닌 공감 능력으로 타인의 인생을 봐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한 독서 고수를 보며 도전을 받고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문학적 재판관 『시적 정의』 저는 제 삶을 가지고 스스로 이분법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요. 법원에 가면 남의 사건을 열심히 연구하는 법률가로 일하지만, 집에 오면 전공이나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만 읽었습니다. 저는 책 읽기와 직업을 늘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꼭 읽어야 하는 법률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댓가가 돌아오지 않는 책들만 읽어왔으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만난 책이 『시적 정의』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책을 읽어온 것이 완전히 쓸모가 없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쓴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시카고 로스쿨의 교수입니다.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이라는 수업을 맡아 로스쿨 학생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인간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공적 합리성 개념'이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정의가 어떻게 시적일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누스바움은 책의 앞머리에서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나 자신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시적 정의』, 궁리 2013, 7면)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서 "문학적 재판관은, 휘트먼의 시인과 같이, 풀잎사귀들 속에서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 - 또한 성적 갈망과 개인적 자유의 보다 신비로운 이미지들까지도 - 을 본다" (252면)라고 말합니다. 서로를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곧 시적 정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시적 정의의 개념은 재판관에게 문학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문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스바움은 그것을 과학적 사고와 대비해서 설명합니다. 누스바움은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경제학적 사유는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신비하고도 지극히 복잡한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복잡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73면)라고 지적합니다. 반면 문학은 세상을 환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질적인 차이들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누스바움은 소설의 특징으로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세계에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마치 개미나 기계 부품의 움직임이나 동작같이 객관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의 삶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듯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83)를 꼽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공평한 관찰자가 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공평한 관찰자'란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또다른 자신, 즉 공평한 관찰자를 내면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대해 공평한 관찰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는것이지요. 누스바움은 이 개념을 끌어와, 공평한 관찰자는 "자신이 목격하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염려하는 친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160면)고 설명합니다. 관찰자로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편향적이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상상한다는 것이지요.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일 자신이 그와 같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동시에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불행한 상황을 현재의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함께 생각" (161~62면)한다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공감'이라고 말합니다. 애덤 스미스 당시에는 공감, 즉 엠퍼시(empathy)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감'의 뜻에 가까운 씸퍼시(sympath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공감이 단순히 당사자들과 일치되는 감정이 아니라 공평한 관찰자로서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재판관이 갖추어야 할 공적 합리성은 바로 이 공평한 관찰자의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문학 작품은 불완전한 길잡이가 될 수도 있고 여전히 기존의 법령과 판례 등에 관한 지식이나 재판의 제도적 역할에 대한 인식 등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이 자신 앞에 놓인 사건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고상하게 거리를 두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구체성과 정서적 응대를 바탕으로 현실을 철저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문학적 재판관이란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관찰자의 능력을 지닌 재판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요즘 식으로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그리스 비극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보면서 '저러면 안되는데'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지는 않고 비판적인 거리를 두면서도 그 사람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는 굳이 애덤 스미스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그동안 제가 소설을 많이 읽어온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요. 스스로도 소설이 나에게 주는 효용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 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내가 읽어온 책들이 내게 '공감'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어서 내가 현실에서 사건을 보고 판결을 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직업적으로도 꽤나 쓸모가 있었던 셈입니다. 제게 큰 위로가 되어준 것이지요.(pp.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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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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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 중독자, 김영란 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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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의 필요성과 희열
- 목회할 때나 교계 기자를 하는 지금이나 나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돈을 벌어가면서 책을 읽느라 목회할 때보다 책 읽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목회할 때는 목양실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본 날이 많았다. 목회를 중단하며 넓은 목양실의 책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많은 책들을 버리고, 친구들에게 주고 일부만 가지고 이사를 했다.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책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전업 작가인 유시민은 탁월한 달변가이며 많은 책을 낸 저술가이다. 그는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어휘를 늘려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독서를 해야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또한 책 읽기의 희열을 느껴보라고 한다. 그렇다. 책을 읽다가 기막힌 내용이 나오면 전율한다. 그래서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계속해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목사는 책을 읽어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서비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가? 목사에게 독서는 의무이자 특권이다. 뻔한 설교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한다. 책 읽기를 멈춘다면 목회도 멈춰야하지 않을까? 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를 알아야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문장 공부를 하는 분들이 흔히 있는데,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빈약하면 아무리 문장 공부를 해도 글이 늘지 않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을 늘리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에요. 아무리 멋진 조감도와 설계도가 있어도 건축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쓸 수 없어요.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어휘를 늘리라고 권하는 겁니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자기 자신과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생명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좌우합니다. 어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괴상한 편견이 있더군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 논리적이고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아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지극히 단순한 어휘를 반복 사용하면서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간결어법'이라고 칭찬합니다. 생각이 얕고 감정이 메말라서 할 말도 적고 표현하는 능력도 없는 사람을 두고 ‘말이 적고 진중하다’고 하죠. 저는 이것이 일종의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같잖은 말'이 통용되기까지 합니다. 어휘 부족과 문장의 단조로움은 지적 수준이 낮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제대로 된 문명국가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 보셨나요? 진보든 보수든 다들 말을 잘합니다. 2016년 미국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사람들을 보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과 버니 샌더스(BernicSanders)는 물론이요 막말로 악명 높았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도 말을 얼마나 찰지게 했습니까. 십육년 동안 집권하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 보수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도 할 줄 아는 언어가 독일말 하나뿐이었고 눌변으로 유명했지만 연방의회에서 토론할 때는 정책 쟁점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곤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임기 내내 단 한번도 토론다운 토론이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사전에 짜놓은 각본 없이 누군가와 토론하는 데 기본으로 필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야박한 평가인가요? 어휘를 늘리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독서입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모든 강연에서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토지』 『자유론』 『코스모스』 『사피엔스』 『시민의 불복종』처럼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와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 책을 다섯번 열번 반복해서 즐기며 읽는 거예요. 읽고 잊고, 다시 읽고 잊고, 또 읽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축자재를 끌어 모으게 됩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이 대학입시 공부하듯이 책을 읽지는 마십시오. 흥미가 없는데도 입시를 위해 수학 공부를 하면 행복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행복합니다. 행복해지는 책 읽기! 그게 중요합니다. 자기한테 맞는 책을 읽어야 해요. 교양인의 필독도서 목록, 뭐 그런 것에 주눅 들어 끌려다니지 마시고요.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책 읽다 말고, 도저히 계속 읽을 수가 없어서 읽던 책을 가슴에 댄채 '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경험 말입니다. 여자분들이 보통 그렇게 하지요. 이런 순간을 자주 경험하셔야 합니다. 감정이 너무 강하게 일어나서, 그걸 가라앉히기 전까지는 텍스트를 더 읽어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을 누리자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공부와 독서의 '결정적 순간'이라 믿습니다. 남자들은 조금 다르게 행동하더군요. 책을 가슴에 붙이는 게 아니라 읽던 페이지가 아래로 향하게 엎어둡니다. 위를 보면서 한숨을 '후' 내쉰 다음, 창문을 열거나 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물어요. ‘끊어야 할 텐데…………….’ 이러면서요. 그렇게 감정을 추스르고서는, '대박이야' '이러면서 또 책을 봅니다. 바로 이거예요. '결정적 순간'! 이런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생은 불행한 겁니다. 우리 국민 셋 가운데 한 사람은 일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는 건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는 뺀 통계라서 조금 다행이긴 합니다만, 정말 안타까워요. 읽던 책을 가슴에 대고 한숨을 푹 내쉴 때 우리의 내면을 채우는 그 벅찬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그 기쁨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pp. 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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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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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의 필요성과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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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 이 책은 여자에게 이혼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남성 의존적인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아내와 결혼한지 30년이 되가는데 여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단지 남자인 나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목회를 중단하고 나는 교계기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내도 이제는 사모로 불리지 않는다. 아마 아줌마로 불릴 것이다. 그것이 아내를 많이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목사의 아내인 사모로 “곁들이” 인생으로 살다가 이제는 독립적인 인생을 살아야하는 과제를 직면하고 있다. 나는 아내의 제2의 인생을 격려하고 있다. 이제는 나의 “시다” 인생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내는 씩씩하게 그 길을 가고 있다. 물론 때로 힘들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격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으리라고 기대한다. 내게 묻어가는 인생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개척하며 나아가는 아내를 나는 리스펙한다. 이 책은 모든 여자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을, 남자에게서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전직 수녀의 심리 상담 책이다. 이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하고 있다. ▲ 스스로 대상이 되어 발현하는 사랑 많은 여성이 사랑에 있어서 최선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느낍니다. 여성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적령기가 되어서, 혹은 주변의 압력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분명 '소속'과 '속함'입니다. 우리가 현모양처라고 이야기하는 전형적 여성들의 모습이 '헌신'처럼 보이나 실은 자신을 일부 포기하고 '그'에게 ‘소속’됨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구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궁극적인 욕망입니다. 가지기 위해서는 또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여성 신경중 현상 중 하나는 스스로를 실현하거나 직접적이기보다 타인을 경유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속하든, 누군가를 채우는 방식이든 그것은 모두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필요한 사람으로 타인이 아니라 주체인 나 스스로를 믿는 사람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합니다. 타인을 경유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실현하고 만족시키는 데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타인을 향한 돌봄과 헌신은 돌려받아야 할 무엇이기보다 그 자체로 온전히 타인을 위한 것일 때,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 타인에게 필요한 나’라는 시선에서 조금 떨어져 나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pp 219-220) ▲ 절대적 신뢰 그 요원한 소망 가족이나 연인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과 분석을 진행하면서 종종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그저 말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참 사랑스러운데, 왜 그토록 상대와 지리멸렬하게 싸우며 살아야 할까 싶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면 사랑스러움이 제대로 보이는데, 우리는 상대와 친밀함과 애정으로 밀착될수록 요구와 욕망에 매몰되어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이 연인이나 친구로부터 바라는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안전함과 절대적 자아를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처럼요. 아이와의 관계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성인이된 관계 안에서의 신뢰는 서로의 나약함을 허용하는 태도입니다.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다는 또 다른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니까요. 모든 것을 공유하고 내 맘이 네 맘이고 네 맘이 내 맘인 것은 건강한 친밀함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느끼는 실망과 좌절에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려는 충실성,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으려는 발버둥,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어느 만큼 거리를 두어도 서로에게 느끼는 서운함으로 인해 서로를 할퀴지 않겠다는 의지 등이겠지요. 결코 서로에게 온전히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안은 채로 함께 가는 것이 진짜 신뢰가 아닐까요? 우리는 참으로 구멍투성이의 나약한 인간들이니까요.(pp. 2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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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남편을 버려야 내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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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내 자신이 나이들어 가고 있고, 부모님께서 연세가 많으시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고 있다. 그러자 페이스북에 아는 장로님이 “힘네세요”라고 썼다. 삶이 힘들어서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아닌데, 그래도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다. 살아 있기에 죽음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다. 의사로서 죽음에 대해 많은 강연을 하고 있는 정현채 교수가 쓴 책을 읽었다. 중간에 윤회나 전생 등은 우리 기독교와 상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의사가 이러한 책을 썼다는 것이 신기하기는 하다. 원래 죽음과 내세는 기독교의 전문 분야 아닌가? 책 말미에 있는 저자의 죽음 준비에 대한 내용이다. 참고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난 11년 간 죽음학 강의를 해 왔다. 강의가 끝난 뒤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교수님께서는 죽음 준비를 어떻게 하고 계세요?" 필자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필자가 어떻게 죽음 준비를 하고 있는지 말씀드리려고 한다. 필자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공교롭게도 심장병 증상을 보인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미처 주변 정리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필자는 평소에 미리미리 죽음 준비를 해 둬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우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 오고 있다. 40여 년 전 의과대학생 때 필기했던 노트, 30년 전 전임 강사였을 때의 월급명세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 등등 이런저런 자료들을 목록과 함께 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 병원 9층에 위치한 필자의 연구실에는 책이나 물건이 거의 없다. 언제라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도록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또 정년퇴임을 하는 선배 교수들이 버린 물건들 가운데 사료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이 자료들도 100년 뒤에는 우리 대학의 귀중한 기록이요. 발자취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 의과대학 박물관에는 작고한 교수의 사적인 메모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0여 년째 해 오고 있는 죽음학 강의도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13년 가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영화를 통한 현대인의 죽음 이해> 강의를 마쳤을 때 한 1학년 학생이 내게 부탁을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뇌경색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계시다며 강의 내용을 두 분에게 들려 드리고 싶으니 강의에 사용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복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흔쾌히 복사해 줬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로 필자는 강의 자료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저작권 문제가 있는 자료를 제외하곤 가능하면 모두 제공하고 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강의 내용을 자기 주변에 전하게 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2006년부터 1년에 다섯 차례 정도 헌혈을 해 오고 있었다. "이제 너무 늙어서 헌혈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2018년 1월 필자가 암 진단을 받게 되면서 헌혈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어 아쉽게 생각한다. 헌혈로 모은 혈액은 대체로 응급이나 위기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그동안 해 왔던 헌혈이 얼굴 모르는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한다. 장기기증서약서 ·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유언장 등은 이미 작성해 놓았다. 유언장은 가끔 내용을 보완하기도 하고 고쳐 쓰기도 한다. 유언장에는 남길 물건에 대해서도 정리해서 썼지만, 그보다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두 딸에게 말해 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영정 사진은 10년 전인 2008년 9월 갑작스럽게 폐렴을 앓고 나서 집 소파에 와인잔을 들고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런 데 2013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를 할 때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을 잡지사에서 영정사진으로 쓰기 딱 좋게 사진틀에 넣어 보내와서 그걸로 할까도 생각중이다. 미국의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임종 환자를 많이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펴냈다. 필자는 이 책에 나오는 네 가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사랑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또 잘못했던 일에 대해 서도 미안했다고 용서를 구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마음속에서라도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할 일에 대해서는 되도록 빨리 용서하려고 노력한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나비넥타이를 하면서 긴 넥타이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낡은 넥타이는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은 바자회에 갖다 줬더니 인기리에 팔렸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갖기 싫어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기부하거나 선물하는 게 좋다. 30여 년 전부터 와인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책자나 자료는 물론이고 디캔터 · 코르크스크루 같은 도구도 꽤 많이 모았다. 얼마 전부터는 이것들을 의과대학 와인 동아리에 기증하고 있다. 언젠가 사별한 날에 대해 아내와도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본인의 희망대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남겨진 자식들을 생각하면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훨씬 좋다는 얘기를 한다. 필자의 가장 큰 소망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최소한 한두 달만이라도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면 좋을지에 대해 사전장례의향서도 준비 중이다. 수의는 삼베 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으려고 했지만, 화학제품은 다이옥신 같은 공해 물질이 많이 나온다고해서 면으로 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수의 중에 무명으로 된 것도 있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관도 나무로 된 것은 태울 때 화석연료를 많이 소모하게 될 테니 종이로 만든 관을 사용하려고 한다. 집안에서 경기도 고양시에 200~300기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납골당을 오래전에 마련했다. 별일이 없으면 필자의 유골도 이곳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생각을 바꿨다. 납골당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 두 딸이 찾아오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해양장(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재 정식 인가를 받은 해양장 업체가 전국에 서너 곳이 있다. 서울의 경우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고 1킬로미터 떨어진 부표까지 가서 유골을 뿌린다고 한다. 해양장은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전문 연구기관도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례인 셈이다. 그밖에도 죽음 준비에 필요한 사항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죽음을 알릴 사람들의 범위를 명시해 두는 일, 제단이나 조화 구성,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어떻게 할지 등에 대해서도 사전장례의향서에 포함해야 할 내용들이다. 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위해 틀 음악을 선정하고 이를 USB에 담아 놓는 일은 이미 4년 전에 시작하였는데 수록된 음악이 현재 200곡이 넘었다. 빈소에 놓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틈틈이 추려서 미리 편집해 놓으려고 한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따라서 기일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형식을 벗어나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와인 한잔 나누면서 같이 살던 때를 추억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두 딸에게 얘기해 놓았다. 그래도 마음이 쓸쓸하면 평소 내가 좋아했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거닐어도 좋고, 작은 꽃다발 하나씩 준비해서 서로 건네줘도 좋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얘기해 놓아야 본인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음의 실체가 소멸이 아니고 옮겨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례 준비가 부담스러울 것이 없다. 또 지구별에 잠시 소풍 왔다가 가는 것이니 주변을 깨끗이 한 후에 떠나야 한다. 다음에 놀러 올 후손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은 먼저 왔다 가는 사람들의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한다(pp. 354-362). 380페이지이나 어렵지 않아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일독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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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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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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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 의학과 과학은 사후 세계를 잘 인정할려고 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치부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심장전문의 핌 반 롬멜 박사는 근사체험을 의학적으로 연구해 인정받은 전문가다. 그는 논문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의학전문 학술지 <란셋>에 근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최초로 실은 사람이기도 하다. <란셋>에 발표하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2001년 《란셋>에 핌 반 롬멜 박사의 근사체험 논문 『심장정지 후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가 실리면서, 근사체험은 학계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약 4년 동안 10개 병원에서, 심장이 멈춘 후 기적적으로 소생한 환자 344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되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8퍼센트에 해당하는 62명의 환자들이 당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이들 중 41명은 근사체험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다음은 근사체험 사례들의 특징이다. 1. 유체이탈 경험 많은 근사체험자들이 심장이 정지된 후 육체를 이탈해 외부에서 사건을 인식하는 경험을 했다. 이런 근사체험자들은 오래된 옷을 벗듯 육체를 빠져나오고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인지 능력, 감정, 그리고 매우 명료한 의식까지 그대로였다. 롬멜 박사의 논문에는 44세의 어느 청색증 환자 사례가 실려 있다. 그는 풀밭에서 뇌사상태가 된 지 30분 만에 발견되었다. 그의 입안에는 의치가 있었고, 간호사는 의치를 뽑아내어 카트 위에 놓았다. 한 시간 반 후에 환자의 심장 박동과 혈압이 되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뇌사상태였다. 1주일이 지나자 그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간호사가 자신의 의치를 꺼내 카트 위에 둔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뇌사상태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었던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보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심폐소생술로 분주하던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심폐소생술을 받던 작은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외양도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 삶의 회고 경험 근사체험자들 중에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경험을 한 체험자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은 한눈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는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삶 전부를 3차원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다음은 한 사례자의 증언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과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어졌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관련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그들의 생각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요. 내가 한 행동과 생각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깨닫게 되었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처럼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재연되는 동안 내내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어요. 모든 주제들이 떠오를 만큼 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눈 깜짝할 새 같기도 했죠. 시간과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는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3. 죽은 이들과의 만남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이미 사망한 지인이나 친지들과 만난 경험을 했다. 그들은 외양으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근사체험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의식과 연결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한다. 한 사례자는 근사체험 동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부를 만난 경험을 고백한다. “심장이 정지된 동안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외에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 체험이 있은 지 10년 뒤에,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에 내게 고백하셨죠. 나는 혼외 정사로 태어난 자식이라고요. 내 아버지는 강제추방당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유대인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가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가 10년 전 근사체험 때 보았던 그 남자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지요.” 4. 몸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만난 빛이나 죽은 친지와의 말 없는 의사소통을 이해하게 된 후에 머리 정수리를 통해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증언했다. 친지들의 말 없는 대화 내용은 대개 "아직은 때가 아니다" 또는 "너는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의식이 신체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매우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다시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한계에 다시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깊은 지식과 앎에 대한 의식의 일부를 다시금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된 순간은 너무나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근사체험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내 육체의 한계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게 매우 어려운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5. 사라진 죽음의 공포 근사체험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주변사람들이나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조차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육체로부터 분리되지만 인지 능력은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죽음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논의하는 것은 내 역량 밖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경험이, 죽음 너머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는 결정적인 경험이었죠.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입니다. 이 경험은 내게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몸과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근사체험자들은 모든 생각과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pp. 105-109). 물론 이 근사체험(임사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할지 관심 갖고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의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는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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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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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엔도르핀...죽을 때 부어지는 은혜
- 제대로 아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알지 못하면 막연히 두렵고 답답하나 제대로 알면 마음이 편하다. 죽을 때의 고통도 그렇다. 죽을 때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불안이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의사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pp 55-57).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고 신체적으로는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감정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와 자기 성찰을 통해 이별을 준비하는 정리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조금씩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신체적인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투병 기간 내내 감정을 어둡게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죽음의 순간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한다면 막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뇌의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의식을 잃어가게 됩니다. 통증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것은 뇌의 기능이 정상일 때 가능한 것이어서 죽음이 가까워져 점차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에서 고통스럽다는 감각 자체는 극도로 무뎌지거나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죽음에 이르면서 뇌에는 산소 결핍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신호가 되어 뇌에서는 일종의 방어 기전으로 통증 완화 효과가 있는 아편성 단백질인 엔도르핀을 포함한 각종 신경 전달 물질을 다량으로 분비하여 고통을 억제하고 극도의 안도감을 줍니다. 일부 신경학자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는 고통은 커녕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행복감과 쾌감을 느낄 것이라고도 합니다. 죽는 순간에 뇌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몸에서는 아편성 물질인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고통을 억제하게 된다고 한다. 몸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이다. 죽음에 대한 평이한 책이라 읽기가 어렵지 않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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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엔도르핀...죽을 때 부어지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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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참된 장로-저자 박성규 총장...모든 장로의 필독서
- “장로 직분에 대한 이해와 사역의 폭을 넓히라” 오랜 목회현장의 경험과 신학적 깊이를 담은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의 최신작 “한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큰 복이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돌보고 지키고 세우는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장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우면서도 장로로 살아내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통하여 장로로 피택된 분들과 앞으로 장로가 될 미래의 직분자들이 장로직에 대한 사명감과 영광스러움에 대한 참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대 총장 박성규 목사가 개혁주의적 관점과 오랜 목회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로 직분에 대해 현실적이고 깊이 있게 다룬 최초의 장로 관련 도서가 될 것이다. 장로 피택자 교육에 꼭 필요한 책이며, 시무 장로에게는 자신의 직분을 더 잘 감당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책이다. 1부는 장로와 교회로 장로가 사역할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하여 성경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으며, 2부는 장로의 직분으로 장로의 자격과 사명에 관해, 3부는 장로의 사역으로 장로 사역의 본질과 기능을 분명히 알도록 함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장로, 성도에게 본이 되는 장로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준다. 또한, 부록으로 실제적인 장로의 휴먼스킬과 장로와 목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저자 박성규 총장 총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군 군목, 나성한미교회 담임목사, 부산 부전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믿음은 물러서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 『벽 앞에서』, 『사도신경이 알고 싶다』, 『주님이 꿈꾸신 그 교회』 외 다수가 있다. 목차 저자서문 용어설명 제 1 부 | 장로와 교회 1장 성경적 교회 이해 2장 성경적 교인 이해 3장 성경적 교회 현장 이해 제 2 부 | 장로의 직분 1장 장로직 이해 2장 장로의 역할 제 3 부 | 장로의 사역 1장 장로사역의 본질 2장 장로사역의 기능 3장 장로사역의 출발점과 종착점 책을 마치며 부록 1, 교회의 사명은 무인가 2. 장로의 휴먼 스킬 3. 목사와 장로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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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참된 장로-저자 박성규 총장...모든 장로의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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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 지난 5월 20일 오후 행사취재로 남현교회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본당 앞 로비에서 남현교회 이춘복 원로목사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목사님께 기자임을 밝히고 목사님께서 쓰신 「쉬운 목회」를 한 권 얻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목사님께서 책 출간 기자회견을 했는데 오지 않았느냐고 묻길래 연락 받은바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담당자인 누군가가 일부 기자에게는 고의로 연락하지 않은 것 같다). 결국 다른 기자의 기사를 통해 출간 기자회견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책에 대한 관심이 있어 목사님께 한권 받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만에 다 읽고 내용이 너무나 훌륭해 이 책에 대한 기사를 싣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목사님의 인품이 참으로 훌륭하시다는 것이다. 인격목회, 화평목회, 인내목회, 섬기는 목회 등등이 개척해서 40년 목회를 가능하게 했고 크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탈무드에 보면 “노인은 다음 세대를 위해 책을 써야한다”는 말이 있다. 삶의 경험을 글로 남김으로써 다음세대에게 교훈을 주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목사님의 책은 40년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권으로 준비하고 있는 「쉬운 성장, 쉬운 은퇴」도 기다려진다. 책을 꼼꼼히 보면서 여러 군대의 오탈자를 잘 표시해뒀다. 다음번에 뵙게되면 전달해 드려 책이 재판될 때에 교정됐으면 한다. 모든 내용이 좋았지만 특히 교회 후임자 선정과 세습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이 귀하기에 이 부분의 전문을 게재한다. 이 목사님은 세습에 대해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전도 길이 막히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세습이 너무나 일반화되어있다. 그러나 결코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동안 목회한 아버지의 은퇴 말년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아들 목사에게 평생 “세습 목사”라는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결코 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명성교회처럼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된다. 아울러 후임자를 잘 선정해 교육시켜 목회를 이어받게 하는 것도 참 신선하다. 보통은 자격을 다 갖춘 목사를 후임자로 선정하는데 교회에서 후임자 유학비까지 부담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이것이 규모있는 교회의 트랜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에 “뼈가되고 살이되는” 이 책의 일독을 강추한다! 다음은 저자의 교회 세습에 대한 확고한 견해와 후임자 목회 승계에 대한 좋은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의 전문이다. 이 년만 배우게 해주세요(p 159-163) 2015년 연말에 아들을 우리 교회 부목사로 청빙하는 문제 때문에 큰 홍역을 치렀다. 아들이 신학을 하면서 나에게 부탁을 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 목회가 제 모델입니다. 아버지 밑에서 이 년만 배우게 해주세요. 아버지의 목회 철학과 목회 운영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내가 말했다. "나에게 와서 배우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 교회 오려면 후계자가 다 결정된 다음에 와라. 그래야 오해를 받지 않는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세습 문제로 상처가 크기 때문에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면 오해를 받는다.” 남현교회는 내가 은퇴하기 십 년 전 후임을 정했고 유학까지 시켜 목회를 이양했다. 은퇴 십년 전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후임을 정하자고 했을 때 장로님들이 반대를 했다. "목사님, 지금 새 성전을 건축하고 입당해서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운데 후계자 문제는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목사님 은퇴가 십 년도 더 남았는데 벌써 후계자를 정해야 하나요? 목사님 은퇴 문제를 꺼내면 레임덕 현상이 있어 교회가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장로님들 말씀도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요 은퇴는 총회 헌법에 정한 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준비하는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은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교회들 후계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후계자를 미리 정하고 잘 키워서 은혜롭게 교회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당회에서 잘 말씀드려 허락을 받고 후임을 모셔오게 되었다. 오래 전 우리 교회에서 사 년을 시무했고 분당우리교회에서 육 년을 시무한 목사님이다. 목사님은 다시 남현교회에 오셔서 삼 년을 시무하고 유학을 떠났고 유학 사 년 후 돌아오셔서 이 년 동안 동사 사역을 하고 목회를 이양했다. 내가 후임을 일찍 정한 것은 네 가지 이유가 있다. 1) 후임을 일찍 정하고 잘 키워서 물려주고 싶었다. 한국 교회가 후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준비만 잘하면 되는데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후임을 정하니까 어려운 일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은퇴하기 십년 전에는 후계자를 정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 왔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은혜롭게 후임에게 이양한 모델 교회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2) 사람은 나이가 육십오 세가 넘으면 명예욕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3) 담임 목사 나이 육십오 세가 넘으면 본인이 원하는 후임을 정하기 힘들다. 4) 아들이 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반대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전도 길이 막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은사도 덕이 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장로님들에게 여러 번 말씀드렸다. "만약 교회 전체가 아들을 후계로 결정해도 나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건덕상의 문제입니다." 후임을 정해서 유학 보냈고 은퇴할 때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목사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목사로 청빙하려고 했다. 그것도 아들 목사를 이 년만 있다가 유학을 보내겠다고 당회에서 분명히 말했는데 이상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게 퍼져나갔다. "담임 목사님께서 아들 목사를 부목사로 데려오는데 세습할지도 모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일생 목회하면서 그래도 진실하게 목회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중직자 중에서 몇 분이 아들 목사 데려오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교역자들은 담임 목사 편을 들어야 한다. "우리 목사님 결코 세습하실 분 아니십니다. 이미 후임까지 결정하셨는데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십 년 동안 진실하게 목회하신 목사님을 못 믿으시면 누구를 믿습니까?" 그런데 그렇질 않았다. 부교역자 중 한두 명이 성도들에게 부채질을 했다. "어떤 교회는 세습 안 한다고 약속했다가 갑자기 세습했습니다." 나는 그래도 교역자들만은 적극적으로 내 편인 줄 알았다가 큰 실망이 왔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했다. "부교역자들은 내 자녀나 마찬가지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얼마나 말을 안 듣는가? 얼마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아빠! 이제부터 내 아빠 아냐? 아빠하고 안 놀 거야. 아빠 미워 투정부릴 자격이 없는데도 투정을 부린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부교역자들 아무리 속을 썩여도 내 자녀지. 성도들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내 자녀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거야! 자녀에대한 부모의 사랑은 짝사랑이야!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일방적으로 사랑만 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니 모든 소란이 잠잠해졌고 아들이 부목사로 왔다. 그리고 이 년 동안 잘 시무하고 후임 목사가 유학을 마치고 들어오기 두 주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는 부목사님 중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일 한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목사님을 불러 “그럴 수 있느냐? 왜 그랬느냐?" 한 번도 묻지도 책망하지도 않았고 다 용서하고 계속 시무하게 했다. 우리 교회는 부교역자가 오면 다른 교회 알아보라는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때까지 계속 있게 한다. 그리고 부교역자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개척시켜주던지 선교사로 파송시켜 준다. 나는 문제를 일으켰던 부교역자들도 다른 부교역자와 똑같은 예우를 했다. 목사님들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나는 용서하고 사랑만 하면 된다. 이것이 짝사랑 아버지 사랑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목사님은 십 년 전에 후임을 정해 유학까지 시켰는데 목사님 은퇴하신 후 후임 목사님이 목사님을 배반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 “후임 목사님을 일찍 정한 것은 제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물려주어야 교회가 안정되고 유익할까? 오직 교회를 위해 일찍 정한 것입니다. "후임 목사님이 나를 배반하지도 않겠지만 혹시 배신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계속 일방적으로 사랑만 하면 됩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니까 마음이 편하고 성도들을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하나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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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덕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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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깊이 읽는 여덟가지 복」
- 김남준 목사는 여러 베스트셀러 책을 쓴 작가로, 이 책은 팔복에 대한 설교문이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하드 카바로 만들어 가격이 비싸지고, 여백 많은 편집으로 인해 페이지가 늘어났다. 맘 먹고 읽으면 몇 시간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팔복에 대한 설교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준비할 때 출판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더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을만한 설교, 내용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박해받는 자(p 219-236) 들어가는 말 죄가 들어온 후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세상에는 다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반목과 갈등, 분노와 억압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자 평화롭게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 만물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2).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첫걸음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 갑니다. 두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박해가 일어납니다. 박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 박해란 '약한 처지의 개인이나 세력을 억누르거나 괴롭혀 해를 끼침'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박해받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믿음이나 신념을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디오코에서 온것입니다. 신자의 부도덕한 행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진정한 의미의 박해는 하나님 나라의 의(義)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가리킵니다."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이때 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으로서, 사람의 내면 세계와 외면 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합치된 상태다." 박해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를 위해서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애쓰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은 먼저 신자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육체를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질 때는 욕망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둘은 한 마음 안에서 서로 싸움질하며 고통을 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의를 위한 고통은 마음의 갈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세상만사가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어떤 고통은 원인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세상 것들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릅니다. 신자의 마음은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구원과 함께, 삶에는 새로운 질서가 도입 됩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충돌하면 저항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박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형벌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이로써 신자는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박해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면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하늘나라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박해받을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커질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추구하던 것이 그 나라의 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핍박받아 흘린 눈물은 세상 사랑으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천국을 소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의 울음 속에 하나님이 함께해 위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박해라는 주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 공동체가 현재적으로 받고 있던 고난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박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세상이 그리스도를 박해했으니, 신자도 핍박받지 않겠습니까? 희생과 고난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눅 9:23-24) 핍박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박해의 피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원래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색으로 칠해졌던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박해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겼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의 불의함을 지적하였습니다(마 14:3-4).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어미의 지시를 따라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마 14:8).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의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헤롯의 불의를 꾸짖었을 뿐입니다. 그냥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과의 갈등을 의미합니다(히 11:36-38).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대의(大)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 노(老)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만나 목회에 헌신하였습니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목회자들은 가혹한 고문 끝에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 이 목회자는 약 15년 동안 수용소에서 죽음 같은 세월을 이어 갔습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단한 번도 면회는 물론 서신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만기 출소한 후 고향집에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없어졌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정든 집은 거의 폐허 상태였습니다. 큰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화병으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동네 주민으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목회자는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더욱 목 놓아 통곡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흐느꼈습니다. 스스로 떠올린 주님의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 바울의 평생 소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입니다(빌 3: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다음의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빌 3:10-11).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 황혼의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습니다(고전 11:1). 바울의 생애는 박해의 연대기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습니다.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여러번 여행하였습니다.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또한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어야 했습니다(고후 11:24-27).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마 6:33). 소명을 따라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습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5:41). 박해받는 것을 특권처럼 여겼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들이 그리스도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이 본향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박해받을 때 자기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단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확인합니다. 하늘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히 11: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혼과 정신에서, 육체와 생활에서 크고 작은 섭리로 나타납니다(약 1:17).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이것들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소망이 단지 세상에 있다면 어찌 인생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변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불멸할 영혼을 땅에 묶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날지 못하는 새가 되게 하니, 거기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자유가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사랑에서 옵니다. 행복은 악한 것을 올바르게 미워한 것이고, 불행은 선한 것을 그릇되게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선한 것이 늘 아름답고 악한 것이 항상 추루하게 보였다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박해는 우리를 깨어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살전 5:6). 박해를 견딜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쏟는 눈물에 세상 사랑은 씻겨 나가고, 흘리는 핏물에 사랑은 깊어져 갑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박해받는 자의 행복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에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어린 양처럼 애통하였으나 박해를 받을 때는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박해를 받는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동일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둘 모두 같은 선언으로 끝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팔복이 아니라 칠복(福)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핍박받는 자의 복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는 동일한 복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는 여덟 개지만, 행복의 선언으로는 일곱 개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의 종류와 관련해서 보면 칠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행복의 선언이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동일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조건으로 본다면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두 가지 복됨에 관해 동일한 선언,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첫 번째 복이 존재의 변화를 말해 준다면, 여덟 번째 복은 변화된 존재가 세상에서 무엇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도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찾아오는 모습이고, 후자는 세상나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천국을 두 국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마 12:18). 신자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박해받는 자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육체로는 박해를 받지만 영혼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로,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권세들이 있습니다(엡 6:12). 이러한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나라의 질서는 파괴되고 하늘나라의 질서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또한 상속받을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나라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초월성과 역사성입니다. 하나는 초월성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영적인 은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가진 이런 초월적인 은혜의 성격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또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시대적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역사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불의에 항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땅끝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사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비난과 멸시, 조롱과 고난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모든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강인함과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셨기에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 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세상 욕심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을 때만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박해가 아무리 거칠고 강해도 하나님은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의지하는 자를 더욱 강하게 하십니다. 신령한 은혜와 거룩한 능력을 주십니다. 매일 부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 합니다. 그래야 박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박해의 크기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잠시 머물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으로 이기며 사십시오. 맺는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한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 5:13-14).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 없어집니다.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마 5:13). 하나님을 누림으로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의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박해를 견디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은혜가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마10:28). 그 믿음으로 박해를 견딥니다. 그들이 욕하면 우리는 모욕받을 것이고, 때리면 맞을 것이며, 죽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팔복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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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깊이 읽는 여덟가지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