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몸을 살다-아서 프랭크 저자(글) · 메이 번역, 봄날의책 · 2017년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특히 암)에 대해 쓴 개인적인 에세이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던 저자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다. 이런 경험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질병 경험에 대한 ‘서술’을 넘어 질병 경험에 대한 ‘사유’로, 저자 자신이 질병을 경험하면서 배운 것들을 짚어가며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의미를 묻고 재의미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질병은 우리의 유한한 이 땅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된다.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협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 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p. 8)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p. 9).
의원, 병원, 전화통화 등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간에 의학의 진찰과 치료는 오직 질환만이 논의 대상이라고 모든 사람이 믿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서 질환은 측정될 수 있는 것이고 기계론에 기반을 둔다. 의사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내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의식하며, 그래서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들을 때 더욱 입을 다문다. 질환에 관련된 질문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느끼는 것들이 바로 질병이다. 내 삶에 관해 묻고 싶은 질문이 있지만 허용되지 않고 말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는 생각해서도 안 된(p. 29)다. 내가 느끼는 것과 말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내 목소리를 삼킨다. 의사들은 보통 예의 바르게 질문에 대답해주지만, 질문을 하려면 답변이 어떤 용어로 돼 있을지 예상해야 하며 결국은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질문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은 과중한 스트레스와 업무에 시달릴 때가 많고, 그리하여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전문가다운' 활동의 경계 밖으로 너무도 자주 밀려나곤 한다(p. 30).
몸 이외에 잃은 것들도 있다. 캐시와 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친구와 친척들이 우리를 염려하고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이후 최악의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더는 예상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곁을 지켜줬고 어떤 이들은 사라졌다. 질병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부부는 내 질병을 외면한 이들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상실의 일부다. 캐시와 내가 삶에 걸었던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일을 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성취하고, 아이들을 낳아 자라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우리 부부가 함께 늙 어가리라는 기대가 평범해 보이던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무엇이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인지, 캐시와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삶에 거는 순진한 기대를 잃었다는 것이 질병을 겪으며 얻은 수확으로 보일 날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실로 느껴진다.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p. 66),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 캐시와 내가 함께 겪은 것이든 나 혼자 만의 것이든 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운이 좋았기에 아내와 함께 애도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상실 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은 상실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p. 67).
질환은 신이 보낸 메시지가 아니고, 질병은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다. 이런 관념은 질병을 둘러싼 신화 중 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한편 신화는 기회를 보여주기도 한다. 기회는, 질병은 그저 생길 뿐이지만 삶을 의미 깊게 만드는 방향으로 우리가 질병 경험을 엮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믿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의지를 가질 때 바라는 대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의지 둘 다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질병을 몸의 뜻에 맡기는 동시에 의학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깊은 믿음은 가장 적극적이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때 가장 잘 싸운다(p. 144).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자리에선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늘 한구석의 죽음이겠지"라고 폴 사이먼은 노래했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p. 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p. 191).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일상적인 것을 소중히 하며 사는 기회도 준다. 여기서 나는 다시 '덤으로 얻은 삶'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삶을 덤으로 받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건강이나 질병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질병에 대한 공포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건강만을 원하는 욕망 또한 넘어설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질병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 가져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덤으로 얻은 삶이란 강물 위에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 내가 질병을 겪으며 배운 교훈 중 반절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p. 222).
이 시는 내가 배운 것의 반절일 뿐이다. 햇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을 이루는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반쪽들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가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뻗어 나가는 세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암 초기, 통증이 심했던 어느 날 밤에 본 풍경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서리 낀 창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보았다. 창에 비친 자신이자 세계를 보며 내 몸의 통증 밖에 존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창문이 세계의 일부인 것처럼 내 통증도 세계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창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통증도 이 세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창을 보며 배운 교훈을 수 세기 전에 쓰인 중국의 경전인 『도덕경』은 이렇게 표현한다(p. 223).
세계를 네 자신처럼 여겨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믿음을 가져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수 있으리라
강물 위에 빛나는 햇빛을 소중히 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빛이 거기 계속 비칠 것을 상상하고 믿을 수 있을 때, 나는 이 세계 너머에 속하는 평화를 느끼며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 있을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 때, 여기 있어서 행복하다. 하지만 반드시 여기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p. 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