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뉴스 검색결과
-
-
진주성남교회. 설교 스캇라빈슨목사/통역 GMS이사장 양대식 담임목사
-
-
진주성남교회 5월 17일 주일낮 설교는 스캇라빈슨 목사가 골 3:13-14을 본문으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통역은 양대식 담임목사가 했다.
-
2026-05-17
-
-
김한욱목사·새안양교회, 이웃과 선교 위한 바자회 개최
-
-
이웃을 섬기고 세계 선교를 앞장서는 새안양교회(김한욱 목사 시무, 108회 총회 서기 역임, 現 재경영남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가 좋은 물건을 이웃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고, 수익금을 선교에 사용하기 위해 “제3회 이웃사랑바자회”를 5월 16일 개최했다. 이날 손수 만든 천연 쑥개떡, 손수 만든 한방 족발, 직접 담근 국산 재료 100% 김치 등 먹거리와 옷가지 생활용품을 저렴하게 판매했다. 새안양교회는 그 동안도 간간히 바자회를 열었는데 3년 전부터는 매년 개최하는 것으로 해 올해 3회째가 된 것이다.
김한욱 목사는 “쑥개떡을 위해 교인들이 경북 청송까지 가서 직접 쑥을 캐왔으며, 한방 족발을 위해 직접 육수를 만들었다.”라고 말하고 “전 교인들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수익금은 선교를 위해 귀하게 쓰여질 것이다. 이를 위해 수고한 많은 교인들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바자회 수익금은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있는 청년부 일본 아웃리치(장소: 일본 미나미 후나바시 교회)와 현지 교회 장성준 · 신경순 선교사 교회 건축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된 바자회에 많은 교인들이 참석해 봉사했으며 인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품질 좋고 저렴한 품목들을 구입했다.
김한욱 목사는 1998년 11월 새안양교회를 개척 후 2004년 현재의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 활발하게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과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연합회와 총회를 섬기고 있다.
관련 기사 링크:
37회 재경영남교직자협의회, 김한욱 목사 대표회장 선출
-
2026-05-16
-
-
거룩한방파제, “음란성 동성애퀴어축제 반대” 통합국민대회
-
-
지난 5월 8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표준오차: 95%, 신뢰수준 ±3.1%)에게 실시한 “동성애퀴어축제”, “동성애퀴어축제 가족과 함께 참가”, “성전환수술없이 성별 변경”, “참여금지법 제정”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인 반대 의견이 나왔다.
Q 동성애퀴어축제
서울광장에서 2015년 개최했던 동성애축제에서 경찰은 경범죄 처벌법을 적용했습니다. 그 후에도 축제 참가자들의 과도한 노출, 성인용품 전시 및 판매 등으로 인해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논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동성애퀴어축제가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열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73.5% 반대한다.
Q 동성애퀴어축제가족과 함께 참가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동성애퀴어축제가 열린다면 자녀 등 가족과 함께 참여할 수 있으십니까? 81.5% 반대한다.
Q 성전환 수술없이 성별 변경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고도, 타고난 성별과 다르게 남성에서 여성으로 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법적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76.9% 반대한다.
Q 차별금지법제정
동성애나 성전환, 그리고 남성 여성 이외에도 개인이 임의로 선택한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 혹은 반대할 경우, 차별로 간주하여 3천 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반복 부과할 수 있고,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 소송이 가능하며, 불이익 조치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으로 형사 처벌 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9.4% 반대한다.
이에 음란성 동성애퀴어축제가 6월 13일(토) 서울 도심 중앙에서 열리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통합국민대회가 당일 오후 1시 서울시의회와 숭례문(시청역2, 3번 출구)에서 열린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 동성애퀴어축제 반대
• 성 전환 수술 없는 성별 변경 반대
• 차별금지법 반대
• 낙태 및 약물 낙태 전면 허용 반대
• 종교의 자유 침해(민법 일부개정법률안) 반대
이 대회는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주최한다(•대회장 김운성 목사 •준비위원장 이용희 교수 •공동준비위원장 길원평 교수 •특별위원장 박한수 목사 •전문위원장 조영길 변호사 •사무총장 홍호수 목사).
-
2026-05-14
-
-
총신대학교 개교125주년 기념 감사예배 및 한마음잔치
-
-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가 개교125주년을 맞아 기념 감사예배를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한 가운데 5월 14일 오전 11시 30분 제1종합관 백남조기념홀에서 드렸다. 이날 대학 총동창회(회장 김영삼 목사)가 재학생들에게 점심식사와 기념품을 제공했다. 동문들은 교정 에덴동산에서 식사 후 카펠라홀로 옮겨 한마음 잔치를 진행했다.
다음은 박성규 총장의 ‘125주년에 드리는 감사’의 글 전문이다.
총신대학교 개교 125주년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스탠포드 리드는 "사람은 자기의 역사적 배경을 알 때 사람으로서 성장한다. 역사를 아는 것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앞선 사람들이 성취한 것을 탐구할 때만 비로소 그들이 성취한 것보다 더 전진할 수 있다."(W. Stanford Reid, 「기독교 역사관, (A Christian View of Fistory). 개교 125주년을 맞아 우리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성장과 도약을 위해서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개교 125주년을 맞이하며 다음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역사를 배우길 바랍니다.
첫째, 개혁신학을 가진 선교사를 평양신학교의 설립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총신의 전신(前身)인 평양신학교를 1901년에 설립한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와 초기 교수들은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습니다.(『총신대학교100년사』, 115.) 평양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에 대해 블레어(Herbert B. Blair, 방해법)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만이 강조된 교과서이며, 연구 교과서이다.... 역사적 칼빈주의 배경을 지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표준을 수납하며....구(舊) 프린스턴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총신대학교 100년사』. 129.) 이렇게 성경적 개혁신학의 토대 위에 우리 총신을 세워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둘째, 부흥운동을 경험한 선교사들을 평양신학교 교수로 세우신 것입니다.
마펫 선교사와 초기 교수는 대부분 맥코믹신학교 출신인데 그들은 무디의 부흥 운동을 경험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의 영적 부흥을 갈망했고 ‘1907년 대부흥 운동’이 평양 장대현교회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때 장대현교회 담임목사가 맥코믹 출신 리(Graham Lee, 이길함) 선교사였습니다. 1907년 평양신학교의 학생은 75명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3개월을 평양에서 공부하고, 9개월은 전국으로 흩어져 목회하였는데 (1920년부터 한 학기를 3개월 반, 1년 7개월), 부흥을 경험한 신학생들은 각자 목회지에서 부흥의 불쏘시개가 되었습니다. 총신에 개혁신학과 부흥의 DNA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총신대학교 100년사』 153-155, 204, 208, 256.)
셋째, 겨레를 사랑하는 민족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신학교에서 1915년 봄~1916년 가을까지 1년 반 공부했습니다. (김기석. 『남강 이승훈』 336-342) 삼일운동의 민족 대표 중, 5명이 평양신학교 출신입니다.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이승훈, 김병조입니다. 평양신학교 이사였던 총회장 김선두 목사와 김창건 목사는 삼일운동에 참여하고 투옥되어 이사회를 개최하지 못했습니다. 산정현교회를 담임했던 강규찬 목사는 삼일운동 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총신대학교 100년사』, 263-264, 267.) 이렇게 총신은 지금까지 겨레를 사랑하는 지도자를 양성해 온 좋은 학교여서 감사드립니다.
넷째,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킨 것입니다.
함경도에서 사역하던 캐나다 선교사 스콧(Wiliam Scott, 서고도)은 그 지역에 자유주의 신앙을 심었습니다. 함경도 출신인 송창근과 김재준은 그의 영향을 받아 평양신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동경에 있는 청산 학원(자유주의 신학 가르침)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을 전파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 50주년(1934년)을 기념하여 감리교는 『아빙돈 성경주석』 (Abingdon Bble Commentsary)을 번역했습니다. 이 주석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따르는 신학자들이 썼습니다. 성경의 절대무오를 믿지 않았습니다. 번역에 장로교의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목사도 참여했습니다. 이때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파도를 앞장서서 막아낸 분이 박형룡 박사이십니다. (『총신대학교 100년사』 328-330) 메이첸 박사는 “내 밑에서 지금까지 지도받은 학생 중 가장 탁월한 동양 학생이 박형룡 박사”였다고 말했습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Ⅱ, 620.) 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남침례교신학교(박사 졸업 시 최우등 졸업) 재학 중 변증학에 대한 수준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메이첸 밑에서 철저한 정통주의를 배우고 귀국하여 한국교회를 지켰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1930년대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의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은 한국교회를 지킨 방파제였습니다. (박용규, 618.) 시간이 흘러 1959년 WCC문제에도 박형룡 박사는 명쾌하게 WCC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교회를 지키셨습니다. 『신학지남』 제25권 1호(1958)에 WCC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운동은 어떤 교리를 포함하고 가지고 있든지 다 좋게 여겨 수납하니 방만한 자유주의에 입각한 자 아닌가. ....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총신대학교 100년사』, 521.) 박형 룡 박사님 외에도 탁월한 개혁신학자들을 우리의 스승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섯째,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배출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1938년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는 무술 경찰관에 포위된 채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결의한 이들도 평양신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숨 던져 한국교회 지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선배인 최봉석(최권능) 목사, 주기철 목사, 한상동 목사, 이기선 목사 등이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최상림 목사 등은 순교로써 한국교회를 지켰습니다.(『총신대학교 100년사』, 360-368) 부끄러운 선배도 있지만, 이렇게 순교로써 믿음을 지킨 선배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섯째,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를 세운 헌신자들을 일으킨 것입니다.
평양신학교 건립에 크게 기여한 분은 맥코믹(Weti MeCornick) 여사입니다. 1908년 5천 평의 대지와 건축비를 후원하였고, 학생이 늘어나자 1921년 신축 때도 5천 불을 후원했습니다. 기숙사를 지을 때도 도와서, 2개 동이 맥코믹 기념관이었습니다.(『총신대학교 100년사』, 272-276.) 통합 측이 분열하여 나갈 때 모든 재산을 가져갔습니다. 선교사들이 WCC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빈털터리일 때 백남조 장로는 사당동 부지를 1만 8천 평을 바쳤으며, 명신홍 박사는 직장암 수술을 4번 받았지만, 미국 모금에 나서 4만 불의 기금을 모아왔습니다. 귀국 시에도 돈을 아끼려고 배 타고 귀국하는 살신성인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총신대학교 100년사』, 575-579.) 오늘까지 총신을 위해 후원하신 수많은 교회와 목사님, 성도님이 있어 감사드립니다.
일곱째, 수많은 동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케 하신 것입니다.
목사와 선교사,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로 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누비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랑스러운 동문들이 계십니다. 신대원 동문이 3만 명에 이르고, 대학 동문이 1만 5천 명에 이릅니다. 이렇게 귀한 동문들을 세우시고 역사의 무대에서 존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주님 오실 그날까지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모든 총신의 교수, 직원, 학생, 동문이 쓰임 받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1부 기념예배는 총동창회장 김영삼 목사의 인도로 총동창회 부회장 최용도 목사가 기도, 한신원비대위원장이 신 32:7을 봉독, 총신대학교 교회음악과(지휘 강기성 교수)가 ‘그리스도의 계절’을 특별찬양했다.
박성규 총장이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모세는 후대에게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역사를 알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총신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건학이념을 기억하고, 경건과 학문을 갖춘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고, 소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야 한다. 지나온 연대를 생각하며 감사하고도약해야 한다.”라고 설교 후 법인이사장 화종부 목사가 축도했다.
기념예식은 대학부총장 백은령 교수의 사회로 총신 개교 125주년 기념 영상 시청, 총신을 빛낸 동창 시상식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Peter Lillback 총장이 영상 축사했다.
총신을 빛낸 동창 시상식
한마음 잔치는 카펠라홀에서 진행했다. 김영삼 총동창회장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행사를 위해 총신을 사랑하시는 오정호 목사님께서 5천만원을 후원하셔서 오늘 한마음 잔치를 하게 됐다. 지난번 60개 교회가 모여 총신을 돕는 모임을 가졌다. 앞으로 1년에 한번 모여 총신을 실제적으로 돕는 일을 하고자 하며 교회에서 총신 주일을 지키고자하는 계획도 했다. 총신이 잘 되어야 우리의 정체성이 명확해진다. 교수님들을 잘 후원하고 격려해 줬으면 좋겠다. 또한 학부의 여러 과에서 사회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데 후배들을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패널
첫 순서로, ‘AI는 교회의 기회인가, 위기인가?’란 주제로 수석부회장 최용도 목사(창대교회)가 사회, 오덕교 총장(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이 개회기도 후 패널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신국원 교수(총신대학교), 함영주 교수(총신대학교), 김용석 목사(서울반석교회)가 심도깊고 유익한 토론을 했다.
참석자 모두에게 주는 경품 추첨
이어 야훼선교단이 특송, 개교 125주년을 기념해 ‘백이오총신대’ 6행시 대회 및 시상, 동문 교수 스승의 날 축하, 빙고게임 및 행운권 추첨 시간에 참여한 모든 동문에게 선물을 주고 김영삼 총동창회장이 기도하고 모임을 마무리했다.
-
2026-05-14
-
-
시은소교회(김철승 목사)·하이라이트브랜즈, 총신대에 5억 원 상당 의류 5000여 벌 기부
-
-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는 5월 11일(월) 오전 11시, 제1종합관 주기철 기념홀에서 의류 기업 '하이라이트브랜즈'와 '시은소교회(김철승 목사 시무)'로부터 약 5억 원 상당의 의류 5,000여 벌을 기부받았다고 밝혔다.
이번 기증식은 글로벌 의류 기업인 하이라이트브랜즈의 사회공헌 의지와 시은소교회의 학교 사랑이 뜻을 모아 성사되었다. 기부된 의류는 총 5,000여 벌로, 시가 5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물량이다.
시은소교회 김철승 목사는 기증식에서 "기업을 통해 후원의 기회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바로 모교인 총신대학교와 사랑하는 후배들이었다"며, "후배들이 더 밝고 건강하게 학업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학교를 섬길 수 있도록 귀한 나눔에 함께해 주신 하이라이트브랜즈 측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이에 박성규 총장은 "경제가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의류 기부를 통해 학생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신 하이라이트브랜즈와 시은소교회 김철승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목사님의 후배 사랑과 기업의 따뜻한 나눔이 우리 학생들에게 잘 전달되어, 이들이 훗날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리더로 성장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번에 기증된 의류는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의 주도로 관리 및 배부될 예정이다. 특히 오는 5월 14일(목) 개최되는 '총신대학교 개교 125주년 기념 행사'에서 재학생들에게 풍성한 축하 선물로 전달될 계획이어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
2026-05-14
-
-
광현교회(한상욱 목사), 총신대에 기숙사건축기금 2억 원 쾌척 "부활의 기쁨, 인재 양성의 밀알로"
-
-
광현교회(한상욱 목사 시무)는 지난 5월 3일(주일) 후배들을 위한 기숙사건축기금 2억 원을 전달했다.
이날 광현교회는 주일 오후 찬양 예배를 '총신 기숙사 건축 모금 전달감사예배'로 드리고, 온 성도의 기도가 담긴 소중한 후원금을 학교 측에 전달했다. 특별히 이번 예배에는 박성규 총장이 직접 강단에 올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본문으로 "당신은 요한복음 몇 장에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이번에 전달된 2억 원의 건축기금은 광현교회 성도들이 부활절을 맞아 사랑과 믿음으로 정성껏 모은 부활절 절기헌금을 전액 후원해 더욱 감동을 준다.
헌금 5,700만 원과 더불어 무명의 헌금 1억 3,000만 원, 그리고 교회 재정 1,300만 원이 더해져 총 2억 원이라는 거액의 기숙사건축기금이 마련됐다.
광현교회 한상욱 목사는 기금을 전달하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학업과 경건 훈련에 매진하는 총신 후배들과 나누게 되어 매우 뜻깊다"며, "성도들의 정성이 담긴 이 기금이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영적 리더들이 머물 쾌적하고 거룩한 기숙사를 짓는 데 귀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박성규 총장은 "광현교회는 지난 2025년에도 학교 발전기금 1억 원을 기탁해 주시는 등 매년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보내주시는 든든한 동역자"라며 감사를 표했다. 이어 박 총장은 "성도님들이 부활절에 담아주신 그 거룩한 사랑과 눈물의 기도를 기억하며, 단순한 건물을 넘어 주님의 일꾼들이 소명을 발견하고 훈련받는 공간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
2026-05-14
-
-
용인제일교회(임병선 목사), 총신대 기숙사 건축기금 1억 원 기탁
-
-
용인제일교회(임병선 목사)가 총신대학교에 기숙사 건축기금 1억 원을 쾌척했다.
임병선 목사는 지난 3월 31일 총신대학교 총장실을 방문해 박성규 총장에게 기숙사 건축기금 1억 원을 전달했다.
전달식에서 박성규 총장과 임병선 목사는 지역사회에서의 교회와 신학교의 역할 및 기숙사 건축 진행 상황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임 목사는 후원금을 전달하며 "후배들이 편안히 쉬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정적으로 경건훈련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마음을 전했다.
전달식에서 박성규 총장은 "방 1개 호실을 짓는데 1억 원이 든다. 용인제일교회가 지어주신 1개 호실에서 많은 학생들이 꿈을 키우고 경건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라며 "후배들을 향한 임병선 목사님의 사랑과 총신을 향한 용인제일교회 성도님들의 섬김에 감사 드린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
2026-05-14
-
-
삼일교회(송태근 목사), 총신대 기숙사 건축기금 2억 원 기탁
-
-
지난 4월 15일(수), 삼일교회(송태근 목사)가 학교를 방문해 총신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건축기금 2억 원을 기탁했다.
특별히 이번 후원금은 삼일교회에서 부활절 헌금을 총신대학교 학생들을 위하여 전달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또한 이날 송태근 목사는 기금 전달과 함께 오전채플에서 사무엘상 1장 15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며, 미래의 목회자가 될 후배들에게 영적 통찰을 심어주었다.
박성규 총장은 "언제나 총신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삼일교회와 송태근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성도님들의 소중한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며, 총신대학교가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한국 사회와 세계 사회를를 이끌어갈 신실한 주의 종들을 배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
2026-05-14
-
-
사랑스러운교회(배만석 목사), 총신대 기숙사건축기금 1억 원 쾌척
-
-
지난 4월 8일(수), 사랑스러운교회(배만석 목사 시무)가 후배들을 위한 기숙사건축기금 1억 원을 기탁했다.
이날 기부금 전달식에는 사랑스러운교회 배만석 목사와 당회 소속 장로들이 직접 총신대학교를 찾아, 교단의 미래를 짊어질 신학생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든든한 동역의 뜻을 전했다.
이날 든든한 후원군으로 나선 배만석 목사는 "한국 교회의 내일을 책임질 영적 지도자들이 생활할 기숙사를 짓는 뜻깊은 사역에 우리 사랑스러운교회가 쓰임 받을 수 있어 영광이고 감사하다"며, "이 기금이 총신대학교의 발전과 후배들의 영적 성장에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마음을 전했다.
박성규 총장은 "총신을 위해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배만석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해 주신 모든 성도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며 "보내주신 귀한 사랑의 결실은 단순한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변화시킬 신실한 인물들을 양성하겠다"고 전했다.
-
2026-05-14
-
-
제63회 전국목사•장로 기도회 폐회예배, 정영교 목사 설교
-
-
셋째날 5월 13일 폐회예배는 부회록서기 이도형 목사(도개중앙)의 인도로 이두형 목사(서인천제일)가 기도, 이철우 목사(새빛)가 눅 5:15-16을 봉독했다.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양문)가 ‘당신의 영혼이 숨 쉴 자리를 만드십시오’란 제목으로 “교회가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우리는 작은 예수로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교회가, 총회가 일어나야 한다. 함성이 아니라 기도에서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교단이 달라진다. 기도를 통해 교단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도는 리더십을 위한 엔진이다. 기도를 통해 영혼의 쉼을 누려야 한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을 때 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쁘신 가운데서도 기도하셨듯이 기도를 통해 영적인 호흡과 위로를 누리기 바란다. ”라고 설교했다.
증경총회장 오정호 목사(새로남)가 축도 후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광고하고, 2박 3일간의 은혜롭고 뜨거웠던 제63회 전국목사•장로 기도회를 마무리했다.
-
2026-05-13
오피니언 검색결과
-
-
【북토크401】 연명치료 문제, 필요한가?
-
-
아직 많은 사람이 존재를 모르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진조차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을 앞두고 대부분이 경험하게 될 병원에서의 임종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자 펴낸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2018년 2월 이후 ‘연명의료결정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한국인의 죽음에선 자기결정권이 커지게 되었다. 의사와 가족이 결정해오던 일이 상당 부분 환자 본인에게 넘어오면서 환자와 그 가족의 가치관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그에 따라 부담도 커지게 되는데, 두렵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30년간 서울대 의대 교수로서 의료 현장에서 무수한 갈등 상황을 겪어온 저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기를 촉구한다. 저자는 연명의료결정법의 가장 큰 관건은 다른 무엇도 아닌 환자의 가치관과 자기결정권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환자가 자신의 임종과 관련해 병의 진행 상태를 알고, 연명의료 결정 여부와 완화의료 문제까지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만 우리의 죽음의 질이 한 단계 올라설 것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잘 마무리하고 떠나고 싶다.
의료에 집착하는 사회
1960년대부터 발전한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 장치는 급성질환으로 생명이 위독한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의학 발전의 커다란 성과다. 문제는 이것이 자연스레 임종을 맞아야 할 만성질환자에게까지 널리 적용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연장시키기보다 고통받는 기간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선진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하지 않도록 대부분 법제화되었다). 한국인 대부분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게 되면서 과연 어느 선까지 연명의료를 해야 하는가를 두고 의료진과 환자 가족 사이의 갈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04년 17개 대형 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한 3750명의 환자를(p. 30) 조사한 적이 있다. 그들 중 30퍼센트는 죽기 한 달 전 시점에 항암제를 투약받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조사를 했을 때 미국에서는 단 10퍼센트만이 항암제 치료를 받은 것과는 대조되는 결과다. 항암제는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부작용으로 오히려 손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사망 전 1~3개월 시점에서의 투여가 그렇다(p. 31).
현대 의학으로 더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중환자실의 의료 기기로 생명 연장만 가능하다고 할 때 그렇게라도 살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진료 현장에서는 의료 분쟁에(p. 48) 휘말리지 않기 위해 상황이 애매할수록 더 많은 검사나 치료를 행하고, 상태가 위중해지면 일단 연명 장치부터 적용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버렸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결정에 대해 사회가 의료진을 보호할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리엔재단이 2010년 발표한 '임종의 질'에 대한 보고서에서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1등을 차지한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국민 1인당 CT, MRI 등 고가 의료 장비 보유 대수는 네 배에 달하고, 항암제를 포함한 약은 두 배 이상 쓰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종의 질은 의료 수준이나 경제적 요인으로 좌우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종의 질을 떨어뜨리는 의료 행위가 이뤄지는 이면에는 투병과 임종 과정에 환자 본인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한국만의 특수한 가족 문화도 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불치병이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부모님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임종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사회 통념으로 인해 환자가 임종 시 심폐소생술을 거부하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직접 작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임종을 자연의 한 현상으로(p. 49) 받아들이고, 신의료 기술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p. 50).
의료진이 "병원에서 치료를 더 진행하는 것은 환자에게 고통과 해를 더할 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제부터는 병의 치료보다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면 할머니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호자가 많다. 환자를 위한 치료 중지인데, 의사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포기하려 한다며 원망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시도할 수 있는 의료 행위를 다 해보는 것이 꼭 환자를 위한 최선은 아니다. 로봇처럼 고장 난 장기는 교체하면 된다고 할 정도로 의료기술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한계는 존재하며, 삶은 길고 짧은 것의 차(p. 63)이만 있을 뿐 인간은 모두 병에 걸리고 마침내 죽는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의료 수준과 병원 접근성이 높은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이런 의료집착적 문화를 더 키우는 것일 수도 있다(p. 64).
임종이 임박해 응급실에 온 식도암 환자
여든네 살의 할아버지는 1년 전 식도암이 간에 전이되어 방사선 치료를 받고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중 두 달 전부터 호흡 곤란이 심해져 가족은 임종이 임박했다고 판단해 대학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 검진 결과 호흡곤란의 원인으로 심낭에 물이 고인 것이 의심되어 중환자실로 입원할 것을 권유했다. 보호자들은 심낭에 물이 고인 것이 조절되면,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 호전될 수 있다는 담당 의사의 설명을 듣고 입원에 동의했다. 하지만 관을 통해 심낭 삼출액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여의치 않자 수술에 들어갔고, 결과는 좋지 못했다. 호흡곤란이 여전해 결국 인공호흡기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소변이 나오지 않아 혈액투석을 했고, 잇달아 기관지절개 등의 시술을 받았다. 매일 평균 15종류의 약제가 투여됐고 많은 검사를 받게 되었지만 환자는 35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에게 마지막 35일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행여 무의미한 삶의 연장은 아니었을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응급실 담당 의사나 중환자실 담당 의사는 왜 치(p. 66)료를 중단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능한 모든 치료법을 동원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는 생각과 함께, '호전 가능성'을 포기하면 법적인 제재를 받을지 모른다는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1998년 보라매병원 사건 1심 판결 직후 정부가 '회생 불가능한 환자일지라도 사망의 순간까지 생명연장장치를 환자에게서 떼어 낼 수 없다'는 고시를 의료 현장에 내보낸 적이 있다. 그 결과 몇 주 만에 각 병원의 중환자실은 퇴원하지 못한 말기 암 환자들로 마비가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들은 인공호흡기를 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판결은 '고통받는 기간'만 늘리는 연명의료를 받도록 할 위험을 지닌다(p. 67).
우리 문화에서는 환자에게 병에 대해 정확히 알리는 것을 꺼린다. 서울대병원에서 114명의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중 100명의 가족이 의료진이 직접 환자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임종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거부했다. 환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낙담해서 자해(자살)를 할지 모른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의료진이 환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경우에도 상당수의 환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길 거부한다. 대부분은 가족과 상의하길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의료진은 환자가 회생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통보하고 있다. 가족이 환자와 상의해서 연명의료결정을 해주길 바라지만, 그들도 '곧 돌아가실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환자에게 직접 하지 못하고 있으며 제대로 임종 준비를 하고 있는 가족은 드물다. 서울대병원 내과에서 말기 암 환자 20명을 대상으로 가족끼리의 소통을 조사해보니, 임종기에 가족과 대화를 하는 환자는 7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소통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망 2~3일전쯤 환자 의식 상태가 저하되면, 환자 가족과 의료진 이 급하게 상의해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을 한다. 국내 연구 결과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심폐소생술금지 결정에 환자 자신이 참여하고 있지 않다. 환자 대다수는 자기가 말기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할뿐더러 원칙적으로 직접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여론조사 결과(p. 97)에 따르면, 환자에게 불치병을 알릴 의무가 있고 환자가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는 데 국민 대부분이 찬성하지만 현실은 크게 다르다(p. 98).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의료 기술을 통해 죽음을 피하거나 최대한 연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해왔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이 대형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고 있다. 앞에서도 인용한 건강보험공단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16.3퍼센트만 병원에서 임종을 원하고 대부분은 가정(57.2퍼센트)이나 호 스피스(19.5퍼센트)에서 삶을 마무리하길 원한다. 그럼에도 환자나 그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간병 때문이다. 현재의 의료 제도에서는 심한 통증과 같은 의료 문제를 가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탓이다. 가정에서 편안한 임종을 맞길 원하는 국민 대다수의 바람이 받(p. 174)아들여지려면 환자가 집에 있어도 의료진이 왕진을 통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지역 중심 의료 체계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첨단 기술 중심의 의료 서비스만 있으면 모든 의료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대도시의 대형 병원으로 몰려가는 의료 전달 체계에서는 호스피스•완화의료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p. 175).
"그럼 이제 강아지 키워도 되나요?"
악성림프종으로 6개월 동안 받던 항암 치료를 마치고 외래에서 정기 검진 중이던 환자가 검사 결과가 양호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뭇거리며 꺼낸 말이다. 수년 전 호스피스 봉사자가 임종에 임박한 40대 유방암 말기 환자에게, 만약 건강이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하고 싶은 일이 뭐 냐고 물었더니 '설거지'라고 답했다는 걸 전해 듣고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힘겨운 항암 치료 과정을 견뎌내는 환자 대부분은 아프기 전의 일상을 그리워한다. 청소년기의 환자들에게 '병이 나으면 뭐가 하고 싶니?' 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학교에 가고 싶다 하고, 심지어 기말고사나 수능시험을 치러 가고 싶다고 부탁해오기도 한다. 직장을 가진 환자가 체력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놓(p. 209)지 않으려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는 반드시 경제적 이유에서 만은 아니다. 항암 투병 중 교원임용시험 준비를 해서 합격했지만 병이 진행되어 임종이 임박한 상태인데 연수 교육을 다녀오겠다고 했던 젊은 여성 환자도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다른 '버킷 리스트' 영화에서는 살면서 하지 못해 후회했던 일들을 하나씩 성취해나가지만, 대부분의 암 환자는 지금까지 일상에서 해오던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슬퍼한다. 만약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져가는 입원실에 누워 있는 처지라면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고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게 될까?(p. 210).
병원에서 임종하는 말기 암 환자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전체 암 사망자의 87퍼센트), 그들은 자기가 평소 원했던 삶의 마무리를 하고 있는 걸까? 2012년 서울대병원 자료를 보면, 사망 한 달 전에 응급실을 방문한 비율이 74.8퍼센트, 중환자실 입원 19.9퍼센트, 항암제 사용 비율이 42.7퍼센트였다. 진행 암 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 8~10개월 중 항암제 투약을 받지 않고 지낸 기간은 10.4 퍼센트로 대부분의 진행기 암 환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항암제 투약을 받다가, 임종 직전에야 호스피스의 돌봄을 고려했다. 이런 문제는 암 질환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투병하다가 임종하는 대부분의 만성질환 환자에게도 해당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7340여 명(전체 말기 암 환자의 10.1퍼센트) 이 집에서 임종하는데, 제대로 된 통증 조절을 받을 수 없어 대부분 극심한 통증을 겪으며 죽고 있다. 병원에서는 과도한 의료집착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집에서는 아무런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양극단적 상황이 환자에게는 육체적 고통을 안기고 가족에게는 상처를 남긴다. 환자들과 상담하(p. 216)다보면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이 가까운 가족관계에서 기인한다. 죽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 영적으로도 편안한 임종을 맞고 싶어하지만 그런 기회를 끝내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우리나라의 의료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의료진과 가족이 사전에 충분히 대화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 유지를 위한 의료집착적 시술에 치우치지 말고, 환자의 가치관을 최대한 존중해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가정에서 임종하길 원하는 경우에도 가정 호스피스를 통해 육체적인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는 의료 서비스 지원이 절실하다. 2013년 7월 61세의 나이로 타계한 여성 작가 제인 로터가 암으로 임종하면서 '자기 부고'를 직접 작성해 지역 신문 『시애틀타임스』의 유료 부고란에 실은 일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나 자신의 부고를 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암 투병의 장점"이란 농담으로 시작해 남편,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와 함께 "나는 삶이라는 선물을 받았고, 이제 이 선물을 되돌려주려 한다"고 써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제인 로터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항암 치료를 하고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 장치를 사용했다면 그녀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평소 모습대로 위트 있는 유머 작가, 다정한 아내와 엄마로서 기억을 남기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p. 217).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남은 이들에게 '어떠한 누구로서 기억되고 싶은지' 질문을 던져본다면 그 안에서 '존엄한 삶의 마무리'에 대한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p. 218).
우리나라에서도 ‘웰다잉’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웰빙’과 달리 영어권 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웰다잉'이라는 신조어가 유독 한국에서만 쓰이는 데에는 선진국에 비해 임종기 환자에게 연명의료 장치를 사용하는 빈도가 유난히 높은 의료 환경도 한몫한다. 어떤 모습으로 임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정답은 쉽게 찾을 수 없겠지만 자신의 임종이 어떠한 모습이기를 바라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려본다면 '웰다잉'의 본질에 좀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집을 떠나 외지에서 사망하는 '객사'를 불행으로 여기고,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큰 불효로 생각하는 한국 문화를 곰곰이 되새겨보면 외롭게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좋은 임종이 아니라고 여기는 우리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독신자들은 혼자 집에서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객사가 단순히 장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웰다잉'의 의미를 단순히 병원이 아닌 곳에서 임종하는 것, 혹은 연명의료를 하지 않는 것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사람 입장에서 좋은 임종은 편안하게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해일로 아내를 잃은 57세 남성은 잠수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아내가 이미 사망했(p. 219)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차가운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채로 있는 건 너무 불쌍하다. 내 손으로 아내를 찾아 반드시 집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실종된 아내의 시신을 계속해서 찾았다. 천안함 사태나 세월호 참사에서도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식의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었다. 환자들이 질병으로 인한 통증과 별개로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 받을 때 들여다보면 주로 가족 간의 문제가 원인이다. 그러나 전문 상담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마지막까지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일조차 매우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더 이상 항암 치료에 반응하지 않아 말기 상태라고 이야기하면, 환자와 가족은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잔여 생명의 기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떻게 임종을 준비하면 좋을지를 의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임종 장소,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의 약속, 마지막 남기고 싶은 것들의 정리 등은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연명의료에 매달리다가 환자가 사망한 뒤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가족이 대부분이다 연명의료장치를 제거하고도 장기간 생존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 죽을 것인지는 의료진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모습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미리 준비할 수 있다(p. 220).
하루의 의미가 그 어느 때,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말기 암 환자가 남은 삶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저마다 다양하다. 현실을 받아(p. 222)들이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 연장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지만, 절망감에 더 일찍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환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를 찾아가는 환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은 시간을 평소에 하려 했던 일들을 마무리하는 데 쓴다. 5000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 인구의 3명 중 한 사람이 암에 걸린다.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은 암에 걸리고, 나머지 가족은 암 환자의 보호자로 고통을 나눌 가능성이 크다. 나이가 들고 노년으로 접어들수록 주변에 암에 걸리는 지인이 하나둘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우울해하거나 불안을 느끼는 이도 적지 않다. 우리 모두는 진행기 암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글을 읽는 순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짜증을 내기도 하고, 힘들고 지친 마음에 죽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도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언제 올지 모르는 내일로 미루는 것도 예사다. 내일이 언제나 올 것이라고 믿는 오늘과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오늘의 차이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의 의미를 바꾼다. 힘들다고 불평하던 지난 일상의 시간뿐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시간 자체를 간절히 연장하고 싶은 게 암 환자들의 마음인 것을 안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의 시간은 언제나 축복이고 기쁨일 것이다(p. 223).
말기 암과 같은 중증 질환자와 그 가족들은 경제적 이유와 편의를 위해 진료를 받던 대형 병원에서 임종 기간을 보내고 장례식장까지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와 연명의료결정 과정에 대한 규제 중심의 제도, 이로 인한 의사들의 방어 진료(p. 226)가 겹쳐 매년 3만~5만 명의 말기 환자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와 같은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의지한 채 고통스럽게 임종하고 있다. 투약과 시술, 검사 위주로만 건강보 험급여를 확대할 뿐, 주변 선진국에서 당연히 실시하고 있는 간병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하지 않는 지금의 보험급여 정책은 품위 있는 죽음을 원하는 국민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p. 227).
-
2026-05-17
-
-
GMS이사장 양대식목사·진주성남교회 영어예배담당 스캇라빈슨목사 영어설교
-
-
Scripture: Colossians 3:13-14
Title: Family
Greetings everybody today. I hope all is well and God is blessing you and your family.
May is the month of warming temperatures getting ready for summer.
I hope you had a good spring. God has been so good.
Today I’m thinking of Diane and our children. I am so thankful for my family. Aren’t we all thankful for our families.
Also, we honor those all around us in the family of God.
Dr. Yang, could we nod to the persons beside us and say Hi brother and sister. It is great to be with you this morning in God’s family!
Dr. Yang, today I’d like to preach on the topic of FAMILY.
In a world that is often busy and lonely, God designed the family to be a place of love, support, and happiness.
The Bible shows us that family is not just people living in the same space, it is a gift from God that reflects His love.
Could we start with a small prayer—"Heavenly Father, thank You for the gift of family. Open our hearts today to see the joy You want us to have in our homes and hearts. In Jesus’ name, Amen.”
The very first family began with God.
In the beginning,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Gen. 2:18).
God set forth His plan for a man and woman to leave their parents, join together, and become “one flesh” (Gen. 2:24).
Think of it, this is the foundation of the family. God did not want us to be alone.
He wanted us to have joy in loving and helping each other every day.
The Bible also says, “Children are a heritage from the Lord, offspring a reward from him” (Ps. 127:3).
Children are not a burden—they are a blessing! When we raise them in God’s ways, our hearts are full of joy.
Real joy in the family does not come from having perfect people. It comes from love and forgiveness.
Let’s read our text—“Bear with each other and forgive one another…And over all these virtues put on love, which binds them all together in perfect unity.” (Col. 3:13-14)
And Eph. 4:32 says—“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Love holds the family together like glue. When we are patient, kind, and quick to forgive, our homes become places of peace and joy.
I think we all know the famous old story about Hungbu and Nolbu? May I share it fresh this morning?
You remember that Hungbu was a poor but kind younger brother. Nolbu was rich and selfish. Nolbu treated Hungbu badly and would not even share food with him.
One day, Hungbu helped a wounded swallow. The swallow gave him special seeds that grew into gourds full of treasure.
Hungbu became rich, but he did not keep it for himself. He forgave his older brother Nolbu, invited him into his home, and shared everything.
Because of Hungbu’s kindness and forgiveness, even the selfish Nolbu changed his heart. The whole family was blessed.
This old story reminds us: When we choose forgiveness and love like Jesus, joy returns to the family
I’m sure we can all agree that the greatest joy comes when the whole family walks with God.
Joshua said, “As for me and 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Josh. 24:15)
When parents teach children about Jesus, when families take time to pray together, eat together, and worship together, their hearts are happy.
Ps. 133:1 says,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in unity!”
Another beautiful tale that I have been introduced to here in Korea is about a mother and her two children. I’m sure you remember it.
A dangerous tiger came to their house, the brave sister and brother worked together with love and cleverness to protect their mother and each other.
Their strong family love helped them overcome great danger.
Even today in Korea we see this: Families that pray together, stay together.
We want to stay close and help each other through hard times find deep joy.
When we face problems together with love and redemption, God turns our struggles into strength.
May I share one more? In America there’s a beloved story about a man named Johnny Appleseed.
He walked across the wild frontier and had many dangers and toils and all he had was a sack of apple seeds and a Bible.
Johnny lived simply, helped everyone he met, and shared God’s love with settlers, Native Americans, and strangers alike.
He treated the whole land like one big family.
And he planted orchards everywhere he went so future families would always have sweet fruit to eat.
Because of his generous heart, many families years later could sit under apple trees, enjoy the harvest together, and thank God for His provision.
Johnny’s life shows us that when we serve God with open hands, joy spreads to many families.
That’s the way we are in God’s church.
Even if we think we have so little to give, keep our hands open.
Even if we just show up, work together and keep a positive mind, we can see problems solved and the abundance of God will appear.
Dear friends, God wants your family to have joy.
Husbands and wives: Love and respect each other as Christ loves the church.
Parents: Teach your children about Jesus with patience and joy.
Children: Honor your parents and obey them.
All of us: Forgive quickly and love deeply.
If your family feels broken today or on any day, bring your loved ones to Jesus. He can heal and restore.
Start small – pray together tonight, speak kind words, and choose forgiveness.
Let’s all remember: The joy of family is a picture of God’s love for us.
In closing, I am so thankful for the family of Sungnam Church—the awesome orchestra, magnificent choir, the lively praise team, and each brother, sister and child!
I want to say I love our family of elders, deacons and all the staff pastors I work with.
I love You, God, for the families of every office worker, the Rhoden Café team, all the Sunday School teachers who do such an outstanding job for our youth.
I love our family of nursery workers who care for the young children who come to church with their parents.
I love You God for allowing Diane & myself to be in the family of God here in Sungnam Church…who have made us feel like family from the first day we arrived.
I love it that even Jesus had younger brothers and sisters (Matt. 12:38) and He loved them—there are no rejects or irregulars in the family of God.
In the Father’s family He gives us a secure place with Him and we can sit by Him and be accepted in the beloved. (Eph. 2:6)
Thank God that in the family of God we receive God’s forgiveness for our sin through the blood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He makes us all clean.
In God’s family when we have broken relationships, He brings healing and restoration.
When our younger members get married that’s just a joyous celebration and we join in the fun and joy.
And when they have children, we are so thankful. And when grand-children come along, we really rejoice—we love our families, Lord.
And friends, do you use Kakao-talk? We love communicating all around the world with our families. How often do you call your families?
Thank God that God chose us as His children in the family of God.
What a privilege to be part of the family of God and be able to worship Him and give Him the glory every day.
Satan does not like families who cherish each other and worship God together and give God all the glory.
And what a joy it is that we are part of Jesus’ own family—the greatest family on earth and in heaven, who never bow to fear.
And may God be with you, your plans for the future summer of 2026, your family, your business and your purpose with Him every day!
Let us pray—Heavenly Father, fill our hearts and homes with Your joy.
Help us love like Jesus, forgive like Jesus, and serve You together.
Make our families lights in the darkness that show the world how good You are. Amen.
-
2026-05-16
-
-
【서기원 목사 선교7】 선교사의 자녀교육
-
-
선교사의 자녀교육
선교사들에게 큰 기도제목 중에 하나는 자녀교육문제이다. 부모들을 따라서 선교지에 나온 자녀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선교사들은 눈물로 기도하면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우리 자녀들은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때에 몽골에 함께 들어갔다. IMF가 발생했을 때이니 선교지에 가서 힘든 기간을 보냈다. 처음에 가서는 다른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국제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3개월 이후에 재정적인 이유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각 교단의 선사들이 MK school을 만들기로 회의를 하고 진행하였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 선교사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 이후 중학교 과정이 없어서 몽골학교로 다니고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흠 스쿨을 하고 그 이후에 한동국제학교가 개교 되어서 그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 이후에 한국학교에 진학을 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정말 다양한 학교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이 혼란스러웠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가운데 자녀들을 훈련하시고 가다듬어 가시었다. 그러한 동안 몽골에 세워진 MK school은 발전하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갖춘 하나님의 학교가 되었다. 많은 선교사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잘 교육을 받고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우리 자녀들도 그 당시는 어려워했지만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이 그 때에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몽골을 사랑하고 현재 몽골 이주민 선교를 하고 있는 우리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하고있다. 선교의 다음세대를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선교사들을 후원 하고 있는 교회나 성도들이 선교사님들의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 깊은 관심과 기도와 후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신 6:2
-
2026-05-15
-
-
【북토크400】 성공의 법칙-일상의 성실함
-
-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 『리추얼』. ‘리추얼’은 의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하루를 마치 종교적 의례처럼 여기는 엄격한 태도이자, 일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유용한 도구, 삶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반복적 행위이다. 이 책은 토마스 홉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지난 400년간 가장 위대한 창조자들로 손꼽히는 161명의 완벽한 하루에서 찾아낸 결정적 리추얼들을 소개한다. 가령, 애거서 크리스티는 글을 쓰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 아닌 튼튼한 탁자와 타이프라이터가 필요한 것의 전부라고 말했으며, 윌리엄 개스는 매일 더럽고 썩은 곳의 사진을 찍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을 일하고 오후에는 달리기나 수영을 하며 저녁 9시에 잠들었다. 소설가, 시인, 극작가, 화가, 철학자, 영화감독, 과학자들이 창작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또 자신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흥미롭게 설명한다. 저자 메이슨 커리는 문학·예술·철학·과학 등의 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일상적인 삶, 예를 들어 그들이 언제 잠들고 언제 밥을 먹었으며, 언제 작업을 하고 언제 고민했는지 등과 같은 사소한 면들을 밝혀냄으로써, 그들의 영감이 특별한 일탈에서가 아닌 자신의 일상에서 얻어낸 산물임을 증명하였다. 이는 곧, 가장 평범한 보통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순간임을 보여주고, 하루를 특별하게 대하는 엄숙한 삶의 태도를 일깨워준다.-교보문고.
자신이 만든 일상의 습관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신 것처럼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8세기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는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주도한 핵심 인물로서, 〈분노한 신의 손아귀에 잡힌 죄인들〉이란 설교로 유명했다. 에드워즈는 아침 4시나 5시부터 서재에서 매일 열세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일기에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신 것으로 판단하건대 우리에게도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충고하신 듯하다"라고 썼다. 서재에서 보내는 긴 시간 때문에 몸이 약해지는 걸 막기 위해 신체 활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는데 겨울에는 장작을 팼고, 날씨가 좋으면 산책 하거나 말을 탔다. 산책을 나갈 때도 펜과 잉크를 갖고 다니며, 번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말을 탈 때는 기억술을 활용했다. 전기 작가 조지 W. 마즈던(George W. Matsden)은 에드워즈의 기억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떠오르는 영감을 기억해두려고 에드워즈는 그 영감과 관(p. 26)련된 옷의 특징 부분에 작은 종이를 핀으로 꽂아두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종이를 하나씩 뽑아내며 그와 관련된 생각을 써내려갔다. 때문에 며칠간의 여행을 다녀오면 에드워즈의 옷은 작은 종잇조각으로 뒤덮여 있을 때 가 많았다.
조너선 에드워즈 1703~1758. 미국이 낳은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 회중교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이 되기도 전에 예일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회심을 경험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회중교회 사역자가 되었다. 엄격한 칼뱅주의 입장에서 설교했는데, 그 힘과 영향력이 대단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순전한 헌신》, 《참된 신자가 되어라》 등이 있다(p. 27).
똑같은 일과의 반복은 일종의 최면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는 소설을 쓸 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여섯 시간을 쉬지 않고 일한다. 오후에는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때로는 둘 다), 이런저런 일을 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저녁 9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그는 2004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런 습관을 매일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고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반복 자체가 중요한 것이 된다. 반복은 일종의 최면으로, 반복 과정에서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더 심원한 정신 상태에 이른다"라고 말했다. 무라카미는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이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 수양이 있어야 하고, "체력도 예술적 감성만큼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도쿄에서 자그마한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 1981년 전업 작가로 나섰을 때, 무라카미는 주로(p. 56)앉아서 생활하는 방식 때문에 체중이 급속히 증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그는 하루에 6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 생활 습관을 완전히 뜯어고치기로 결심한 그는 아내와 함께 시골로 이사하고, 담배를 끊었다. 음주량도 줄이고, 채소와 생선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주로 했다. 또 매일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그 습관은 사반세기 이상 꾸준히 계속되었다. 무라카미가 2008년에 발표한 수필에서 인정했듯이, 이런 자기중심적 시간표는 사교적인 삶을 허용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며 "초대를 반복해서 거절하면 누구나 불쾌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자신의 삶에서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관계가 독자와의 관계라고 확신하 며 "내가 늘 앞선 작품보다 더 나은 신작을 발표한다면, 독자들은 내가 어떤 식으로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로서 내 의무, 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바는 그것이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1949~, 일본의 소설가. 현대 사회의 소외된 군상의 고독을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집요하게 파헤쳤다. 대표작으로 《해변의 카프카》,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이 있다(p. 57).
일정한 규칙성을 도덕적 원칙으로 승화하다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칸트의 전기에서는 외적인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다. 칸트가 평생 프로이센의 외딴곳에서 살며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 담 밖을 나간 적이 거의 없는 데다, 몇 시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닷가조차 여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40년 이상 철학을 강의했다. 그의 삶은 질서 정연한 규칙의 삶이었다. 훗날 칸트의 초상이 아무 개성이 없는 로봇으로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tich Heine)는 칸트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칸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쓰기는 매우 힘들다. 그에게는 삶도 없었고 이야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계처럼 질서 정연하고, 추상적인(p. 60) 삶을 살았다. 그는 독일 북동쪽 국경 근처에 있는 오래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한적한 곳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커다란 벽시계도 이마누엘 칸트보다는 더 재밌고 조금은 규칙에 어긋나게 제 역할을 했을 듯싶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식사를 하고 산책하는 등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칸트가 잿빛 코트를 입고 스페인 지팡이를 손에 쥐고 집 밖으로 나오면, 이웃들이 정확히 3시 30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만프레트 퀸(Vanfed Kuchn)이 2001년에 발표한 전기에 따르면, 칸트의 삶은 하이네와 여러 사람이 주장한 것만큼 추상적이지도 않았고 무색무취하지도 않았다. 칸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걸 좋아했고,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으며, 싹싹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가 눈에 띄게 모험적인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칸트는 선천적인 골격 기형으로 가슴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작아서 심장과 폐를 압박한 까닭에 체질적으로 허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결국 건강염려 증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뇌를 가라앉히기 위해, 칸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머리를 사용하는 대상과 삶의 방식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받아들였다. 이런 규칙적인 삶도 칸트가 마흔 번째 생일을 맞은 다음부터 극단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는데, 인간의 성격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견해가 반영된 결과였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성격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칸트는 인간의 성격이 마흔(p. 61)살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고 믿었다. 또 성격의 중심에는 좌우명, 즉 일단 형성되면 평생 동안 따라야 하는 기본적인 삶의 규칙들이 있다고 생각 했다. 안타깝게도 칸트의 개인적인 좌우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 지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가 삶의 방식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단순한 습관에서 도덕적 원칙으로 승화하려고 결심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마흔 번째 생일을 맞기 전까지 칸트는 가끔 카드놀이를 하느라 자정 까지 귀가하지 않기도 했지만, 마흔 살을 넘긴 후에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행위들을 예외 없이 고수했다. 칸트의 습관은 다음과 같았다. 칸트는 5시에 일어났다. 그를 오랫동안 섬긴 하인이 퇴역 군인인 까닭에 주인이 늦잠을 자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덕분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한두 잔의 옅은 차를 마시며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퀸에 따르면, "칸트는 하루에 파이프 담배를 한 번만 채우겠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프의 대통이 점점 커졌다고 전해진다" 묵상의 시간을 가진 후에는 그날의 강의를 준비하고 글을 썼다. 강의는 오전 7시에 시작해 11시까지 계속되었다. 교수로서의 의무를 끝내면 칸트는 식당이나 술집에 가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그가 실질적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식사였다. 칸트는 동료 교수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주민들과도 함께 식사를 즐겼다. 칸트는 완전히 익힌 고기에 괜찮은 포도주를 곁들인 소박한 식사를 좋아했다. 점심 식사가 3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다음엔 널리 알려진 산(p. 62)책을 시작하며, 절친한 친구 조지프 그린(Joseph Green)의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주중에는 오후 7시까지 대화를 나누었고, 주말에는 다른 친구도 끼어들어 오후 9시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칸트는 귀가해서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정확히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마누엘 칸트 1724~ 1804, 독일의 철학자. 계몽주의 사상가로,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통합했다. 인식론 윤리학• 미학에 걸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작업은 이후의 철학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판단력 비판》 등이 있다(p. 63).
침묵과 질서의 무아지경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찰스 디킨스는 15편의 장편 - 그중 열 편이 800페이지가 넘는다 - 과 많은 단편소설, 수필 및 편지와 희곡을 쓴 작가였지만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했다. 첫째, 주변이 무조건 조용해야 했다. 그의 서재에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덧문이 추가로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둘째, 서재가 정확히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책상 앞에는 거울이 있어야 했고, 책상에는 그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물건들, 예컨대 거위 펜과 푸른 잉크가 몇 가지 장식품 옆에 반듯하게 놓여 있어야 했다. 장식품으로는 생화가 꽂힌 작은 꽃병, 커다란 종이칼, 토끼가 앉아 있는 모습의 금박을 입힌 잎사귀, 두 개의 청동상(하나는 싸움질하는 한 쌍의 뚱뚱한 두꺼비, 다른 하나는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인 신사)이 있었다. 디킨스의 작업 시간은 일정했다. 장남의 기억에 따르면, "시청 공무원(p. 73)도 아버지보다는 규칙적이거나 꼼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시간을 엄수했고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행동했다. 단조롭고 따분한 들에 박힌 일을 하는 사람도 아버지만큼 정확할 수는 없었다." 디킨스는 7시에 일어나 8시에 아침 식사를 했고, 9시에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오후 2시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그전에 휴식을 겸해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지만, 그동안에도 디킨스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기계적으로 식사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서재로 돌아갔다. 평일에는 이런 식으로 작업하며 2,000단어를 썼고, 때로 상상력에 날개가 더해지는 날에는 그보다 두 배나 많은 양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도 디킨스는 예외 없이 작업 시간을 준수했는데,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정각 2시, 디킨스는 서재에서 나와 시골길이나 런던 시내를 정확히 세 시간 동안 산책하며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했다. 디킨스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내가 표현할 그림들을 찾아다녔다" 한편 다킨스 처남의 기억에 따르면, 산책에서 돌아온 "디킨스는 에너지의 화신처럼 보였다. 감춰놓은 창고에서 흘러나오듯 모든 모공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디킨스는 밤에는 철저히 휴식을 취했다. 6시에 저녁 식사를 한 후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자정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찰스 디킨스 1812~1870,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평가되며. 가진 자에 대한 풍자와 인간 생활의 애환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 당시 사회와 부조리를 명확히 파악하여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 이야기》 등이 있다(p. 74).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바보다
카를 융 Carl Jung
1922년 융은 스위스 취리히 호수 북부 지역의 볼링겐이란 자그마한 마을 근처에 한 필지의 땅을 구입하여, 2층짜리 소박한 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후 12년 동안 그 돌집을 개조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 쌍의 보조탑을 덧붙이고, 마당에 마련한 커다란 화덕을 담으로 쌓은 까닭에 그 돌집은 볼링겐 타워(Bolingen Tower)로 불렸다. 이렇게 계속해서 증축되었지만, 원시적인 거주지라는 볼링겐 타워의 최초 개념은 달라지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카펫은 물론이고 마룻장도 깔리지 않았다. 전기도 없었고 전화도 없었다. 장작을 때서 난방했고, 조리는 석유난로를 이용했으며, 인공의 빛이라곤 등잔 불빛이 전부였다. 물은 호수에서 길어와 서 끓여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수동 펌프를 설치했다. 융은 불링겐 타워에 대해 "16세기 사람이 이 집에 온다면 등유 램프와 성냥만 보일 것이(p. 78)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낼 것 이다"라고 말했다. 1930년대 내내 융은 볼링겐 타워를 도시 생활로부터의 피난처로 이용했다. 도시에서 융은 하루에 8~9시간 정도 환자를 진료하고 강연과 세미나를 주최하며 그야말로 일중독자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융의 저서 대부분은 휴일에 쓰였다. 융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환자가 많았지만 휴가 내는 걸 조금도 꺼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피곤에 지쳐 휴식이 필요한데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바보다." 볼링겐에서 융은 7시에 일어나 냄비와 솥과 프라이팬에 아침 인사를 건넸다. 전기 작가 로널드 헤이먼(Ronald Hayman)의 기록에 따르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침 식사는 주로 커피와 살라미 소시지, 과일, 빵과 버터였다" 융은 아침에 두 시간을 할애해 집필에 몰두했다. 그 후에는 서재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명상하고, 주변 언덕들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방문객을 만나거나, 매일 끝없이 날아드는 편지들에 답장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시나 3시경에는 차를 마셨다. 저녁에는 푸짐한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즐겼다. 저녁 식사 전에는 '해 질 녘에 마시는 술(sun-downer)'이라고 스스로 칭한 아페리티프를 곁들이기도 했다.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융은 볼링겐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요약했다. 볼링겐에서 나는 진정한 삶의 한복판에 있으며, 나 자신에게 가장 가까워진다.... 전기 없이 살아가며, 벽난로와 난로를 직접 관리한다. 저녁에(p 79).는 등잔불을 켠다. 수돗물도 없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 장작을 패서 먹을 것을 조리한다. 이 같은 단순한 행동들이 인간을 단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하게 지내는 일이 무척 어렵다!
카를 융 1875~1961.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의 기조를 세웠고, 내향성과 외형성을 구별하는 성격 유형을 분석하였으며 외향성 · 내향성 성격, 개인의 무의식과 집단의 무의식이란 개념을 제시하며, 그 원형을 신화나 민화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영웅과 어머니 원형》,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인간과 상징》 등이 있다(p. 81).
창조적 리듬을 만들기 위한 규칙적인 시간
헨리 밀러 Henry Miller
젊은 시절 밀러는 주로 자정부터 새벽까지 글을 썼지만, 결국 자신이 아침형 인간이란 걸 깨닫고 그 습관을 바꾸었다. 1930년대 초 파리에 살면서 밀러는 글 쓰는 시간을 바꿔, 아침 식사 후부터 점심 식사 전까지 글쓰기에 몰두했다. 점심 식사 후에 잠깐 낮잠을 즐긴 것 이외에는 오후 내내 글을 썼고, 때로는 밤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밀러는 정오 이후의 작업이 불필요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야기 창고가 고갈된다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도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멀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두세 시간 정도의 작업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창조적인 리듬을 만들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p. 101)며 "진정한 통찰의 순간들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헨리 밀러 1891~1980. 미국의 소설가, 끝없이 자유분방한 예술가이며 성을 솔직하게 표현한 자전적 소설을 발표해 20세기 중반 문화에 자유의 물결을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북회귀선》, 《남회귀선》, 《욕망》, 《신들의 정원》 등이 있다(p. 102).
묵상과 산책의 시간
존 밀턴John Milton
존 밀턴은 세상을 떠나기 전의 20년을 맹인으로 살았지만 꾸준히 글을 쓰며, 1658년부터 1664년까지 집필한 1만 행의 서사시 《실낙원》을 비롯해 불후의 걸작을 빚어냈다. 밀턴은 침대에 누운 채 새벽 4시(겨울에는 5 시)부터 시작해서 아침 시간을 혼자만의 묵상에 할애했다. 먼저 조수가 30분가량 성경을 읽어주면, 밀턴은 혼자 앉아 기억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서사시를 머릿속에 써내려갔다. 7시에 조수가 돌아와서 밀턴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 밀턴의 전기를 쓴 한 작가의 글에 따르면, 조수의 받아쓰는 속도가 느려지면, 밀턴은 "시간을 끌어 수고비를 더 받아내려 하는 게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구술이 끝난 뒤에는 조수가 점심 식사 때까지 밀턴에게 글을 읽어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밀턴은 정원을 서너 시간 정도 산책했(p. 106)다. 늦은 오후와 저녁때 주로 방문객을 맞이하며 가볍게 저녁 식사를 했고,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9시경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존 밀턴 1608~1674. 영국의 시인. 종교 개혁 정신의 부흥, 정치적 자유, 공화제를 지지하다 탄압을 받았고. 실명과 가정불화로 절망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런 비운을 달래면서 《실낙원》을 썼다. 그 밖의 작품으로 《복낙원》과 《투기사 삼손》 등이 있다(p. 107).
내게 필요한 것은 튼튼한 탁자와 타이프라이터뿐
애거서 크리스티 Agatha Christie
자서전에서 크리스티는 열 권의 소설을 발표한 후에도 자신을 '진짜 작가'로 여기지 않았다는 걸 인정했다. 또 직업을 묻는 설문지를 작성할 때도 '가정주부'란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며, "재밌게도 결혼한 후에는 내가 쓴 책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평범한 삶을 즐겁게 받아들여, 글쓰기를 단숨에 폭발적으로 해내는 일이라 생각한 듯싶다. 나만의 방이란 공간이나, 글을 쓰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이유에서 애거서 크리스티는 책상에 앉은 작가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 하던 기자들과 끝없는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에게 그런 공간은 없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튼튼한 탁자와 타이프라이터가 전부였다. 대리석을 위에 덧댄 침실의 세면대는(p. 111) 글쓰기에 정말 좋았다. 식당의 탁자도 글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많은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소설을 언제 쓰는지 모르겠어. 네가 글 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심지어 글을 쓰겠다고 어디론가 떠난 적도 없잖아." 나는 개들이 뼈를 물고 사라질 때처럼 행동해야 했다. 개들은 말없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30분가량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코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수줍어하며 돌아온다. 나도 거의 똑같이 행동했다. 글을 쓰려고 사라질 때 나 자신도 약간은 쑥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어딘가로 사라져서 문을 닫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 내가 하는 일에 몰입 하여 글을 써낼 수 있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1890~1976. 영국의 추리 작가.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발표하여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불린다. 그녀의 작품들은 총 1억 부 넘게 팔렸다. 대표작으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 로이드 살인 사건》 등이 있다(p. 112).
나에게 정해진 시간표는 없다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마흔여덟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특별히 정해진 습관에 따라 글을 쓰지는 않는다고, 2008년의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에게는 정해진 시간표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침 7시에 글을 쓰기 시작해 새벽 3시에 끝내며,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가끔 작업을 중단할 뿐입니다. 때로는 전혀 글을 쓰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뷰 진행자가 거듭해서 묻자, 에코는 글쓰기 습관이 항상 들쑥날쑥하지는 않다는 걸 인정했다. 몬테펠트로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시골집에서 지낼 때는 일정한 습관을 따르는 편입니다. 컴퓨터를 켜면 이메일부터 확인하고, 뭔가를 읽은 후에 오후까지 글을 씁니다. 그리고 마을 술집에 내려가 목을 축이며 신문을 읽(p. 122)습니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와 11시까지 텔레비전이나 DVD를 시청하고, 밤 1시나 2시까지 좀 더 작업을 합니다. 밀라노나 대학교에 있을 때는 내 시간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로운 시간이 없을 때도 에코는 짧은 '겨를'을 활용해 생산 적인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에코는 이런 예를 들었다. "오늘 아침에 당신이 아파트 앞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 집 현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초가 흘렀습니다. 그 몇 초 동안,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요즘 쓰고 있는 새로운 작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기차 안에서도 작업할 수 있습니다. 수영을 하는 동안, 특히 바다에서 수영하는 동안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구상합니다. 욕조에 앉아서는 그런 경우가 적지만, 그래도 내 머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1932~ ,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역사학자. 소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퍼스널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은 학자이며, 지식계의 티라노사우루스로 불릴 만큼 엄청난 양의 독서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비평과 수필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소설로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프라하의 묘지》, 이론서로는 《일반 기호학 이론》, 《기호학과 언어 철학》 등이 있다(p. 123).
규칙적 작업이 만성 불안감을 해소하다
찰스 슐츠 Charles Schulz!
찰스 슐츠는 50여년 동안 1만 7,897편의 '피너츠' 만화 하나하나를 조수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그렸다. 일요판까지 매일 만화를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규칙적인 시간표가 필요했고, 슐츠는 일주일에 닷새씩 하루에 일곱 시간을 '피너츠'에 할애하며 회사원처럼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주중에는 새벽에 일어나 샤워와 면도를 하고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였다(그의 아내가 만든 팬케이크). 8시 20분, 슐츠는 아이들을 스테이션왜건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었고, 가는 길에 이웃 아이들을 태우기도 했다. 그 이후는 집 옆에 마련한 개인 작업실에서 화판 앞에 앉아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은 "화판 앞에 앉아 과거를 생각하며, 아쉽고 고약했던 기억들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p. 174)다. 영감이 마르기 전에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그 아이디어를 종이에 옮겼다. 슐츠는 점심 식사 - 언제나 햄 샌드위치와 우유 한 잔 - 까지 작업실에서 해결하고,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야 하는 4시까지 작업을 계속 했다. 이런 규칙적인 작업 습관은 그의 기질에 맞아, 평생 그를 괴롭혔던 만성 불안감을 극복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언젠가 슐츠는 "만화를 그릴 수 없었다면 두려움에 휩싸여 지냈을 것이다. 만화 그리는 일을 할 수 없었다면 공허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찰스 슬츠 1922~2000. 미국의 만화가, 스누피, 찰리 브라운, 루시 등 '피너츠' 시리즈의 캐릭터들을 탄생시킨 만화계의 거장이다. 탁월한 그림 솜씨에 뛰어난 문장력으로 빚어낸 '피너츠'에는 위트와 유머, 따뜻함 그리고 삶의 지혜와 인생철학까지 담겨 있어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만화집으로 《심술쟁이가 뭐 어때》, 《걱정은 걱정을 낳는다》, 《많이 컸네, 찰리 브라운》 등이 있다(p. 175).
늦은 아침의 성찰 시간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아침나절에야 눈을 뜨고 11시 남짓까지 침대에서 뒹굴며 사색하고 글을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다. 1629년부터 생을 마치기 수개월 전까지 살았던 네덜란드에서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이곳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매일 열 시간씩 잠을 잔다네. 꿈속에서 내 정신은 숲과 정원과 마법의 궁전을 헤매고 다니며,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맛본 후에 잠을 깨면 밤의 몽상과 낮의 몽상이 뒤섞이기 시작한다네" 라고 썼다. 이처럼 늦은 아침의 성찰 시간이 그에게는 하루 중에서 지적 능력을 유일하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데카르트는 정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빈둥거리는 습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머리를 무리하게 학대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른 시간에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데카르트는 산(p. 321)책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편지를 읽거나 답장을 썼다. 이처럼 편안한 독신의 삶은 1949년 말 갑자기 끝났다. 데카르트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철학 과외 교사 초빙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여왕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였는데, 데카르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권위를 더 확실히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나, 젊은 지도자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욕망에 끌렸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 도착한 때는 하필이면 인류의 기억과 스웨덴의 역사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아침 5시부터 크리스티나 여왕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데카르트는 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 시간과 매서운 추위를 데카르트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 달 만에 폐렴에 걸렸고, 열흘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프랑스의 물리학자•철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합라론의 대표 주자이며 《방법 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근본 원리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방법 서설》 이외에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이 있다(p. 322).
한 페이지씩 쌓이는 것이 중요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Joyce Carol Oates
조이스 캐럴 오츠는 지금까지 50여 편의 장편소설과 36편의 단편집, 수 십여 권의 시집과 수필집 및 희곡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로 유명하다. 오츠는 대체로 아침 8시나 8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쓴다. 점심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후에 오후 4시부터 저녁 식사를 하기 전, 7시까지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때로는 저녁 식사 후에도 작업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책을 읽는 데 저녁 시간을 할애한다. 오츠의 지적대로, 그녀가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다작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나는 글을 쓰고 또 쓰고, 틈만 나면 쓴다. 하루 종일 작업해서 겨우 한 페이지를 완성하더라도 그 한 페이지가 중요하다. 그 한 페이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작의 작가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만큼 열심히 일하(p. 372)지도 않고 오랫동안 일하지도 않는 작가들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오츠가 항상 재밌고 쉽게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니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처음 몇 주는 무척 힘들고 좌절감까지 맛본다며 "초고 작업은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땅콩을 코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조이스 캐럴 오츠 1938~ 미국의 소설가, 소설·시·산문·비평·회곡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직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춰 평단과 일반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얼베이니 가족》, 《좀비》, 《블론드》 등이 있다(p. 378).
권투 선수처럼 끊임없이 훈련할 뿐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
아이라 거슈윈은 동생 조지 거슈윈에 대해 "조지는 일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내게는 항상 적잖이 슬퍼 보였다"라고 말했다. 조지 거슈원이 하루에 평균 열두 시간 이상을 일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는 아침 늦게 작업을 시작해 자정 넘어서까지 계속했다. 달걀과 토스트, 커피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 식사를 끝내면 파자마에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슬리퍼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곧바로 작곡을 시작했다. 오후 중간 쯤 점심 식사를 위해 잠시 쉬었다가, 오후 늦게 산책을 다녀와서는 8시경에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에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 자정 넘어 귀가해서도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슈윈은 영감이란 것 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뮤즈의 여신을 기다렸다면 1년에 기껏해야 세 곡 정도 작곡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작곡에 매진하는 게 훨(p. 389)씬 낫다면서 "작곡가는 권투 선수처럼 끊임없이 훈련을 해야 한다" 라고 덧붙였다.
조지 거슈원 1898~1937, 미국의 작곡가·피아니스트, 대중적인 경악을 작곡하면서 재즈 기법으로 관현악곡과 오페라도 창작했으며, 20세기 전반에 현대 음악에서 미국적인 성격과 기법을 가장 잘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오페라 《포기와 베스》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p. 390).
-
2026-05-14
-
-
【쓴소리】 신앙집회에서 ‘경품추첨’을 퇴출하라!
-
-
올해 열리는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경품추첨이 등장했다. 과연 이것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주제와 맞다고 생각하는가?
교단의 여러 연합회 행사를 취재가다보면 많은 경우에 경품추첨 혹은 행운권추첨을 한다. 어느새 이것이 자연스럽게 순서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문제점은 없는가?
구굴 AI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때 경품추첨하는 것의 장단점은?” A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이에 동의한다.
'전국 목사장로기도회'는 한국 교단들의 영적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권위 있고 엄숙한 자리입니다. 이런 대규모 교단 행사에서 경품 추첨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 행사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장단점을 가집니다.
장점
▲참석 독려 및 이탈 방지: 수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 특성상, 마지막 순서까지 자리를 지키게 하는 실질적인 유인책이 됩니다.
▲긴장 해소 및 교제 활성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와 장로들이 엄숙한 기도회 중간에 잠시나마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목회 현장 지원: 승합차나 고가의 IT 기기 등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미자립 교회나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인 목회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단점
▲기도회의 영성 훼손: 가장 큰 비판 지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회의 본질이 경품이라는 세속적인 이벤트에 가려져, 영적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행성 및 위화감 조성: 과거 일부 기도회에서 수천만 원의 현금을 경품으로 내걸어 "어려운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실망시키는 과시성 행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도자적 품격 논란: 한국 교회를 이끄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 외부나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 영적 지도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제언
최근에는 경품 추첨을 아예 없애고 '기도에 전념하는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만약 경품을 진행한다면, 단순한 '운'에 맡기는 추첨보다는 미자립 교회 지원이나 목회 아이디어 공유에 대한 시상 등 의미 있는 명분을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는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정리한 것이다. 결국 경품추첨의 문제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장기도회 주최 측은 기도회 참석률을 올리거나 유지하기 위해 경품추첨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앞으로 교단 행사에서 “경품추첨”이라는 값싼 방법을 퇴출시키기 바란다! 행사의 수준을 높이면 끝까지 참석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사행심에 기대면 안 된다. 우리 교단의 수준을 스스로 낮추어서야 되겠는가?
-
2026-05-12
-
-
【북토크399】 죽을 때 후회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
-
20년 전 출간되어 5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가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간되었다. 1000명 넘는 이들의 임종을 목격한 호스피스 전문의인 저자가 기록한 ‘죽기 전에 하는 후회’의 목록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사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하게 한다.-교보문고.
“죽을 때 후회가 없어야 할텐데” 이것을 늘 생각하며 매일을 산다.
"선생님, 동생이 고맙다고 했어요." "고맙다고요?" "네, 이 천하의 악동이 고맙다고...." 나는 Y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의 험상궂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한 미소가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고맙다고요?" "네, 고맙다더군요. 동생과 오래도록 옛날이야기를 했어요. 마지막에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선생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시간 후 Y선생은 눈을 감았다. 까칠하고 괴팍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선생은 어쩌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 형의 사랑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마지막 숙제를 다 마친 아이처럼 평온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p. 48). "고마워." 후회 없는 마지막을 위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p. 49).
요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나친 인내와 희생이 마음의 부조화를 야기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평소에는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기고 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이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사고를 칠 때도 있지만 덕분에 무조건 참는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내 마음을 내가 돌본다고 할까? "할 말 다 했다가 상사한테 미운털 박혀서 나중에 진급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밥줄이 달려 있는 데 바른말 하기는 쉽지 않지요."(p. 54). 분명 이렇게 투덜대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나는 책임감이 다소 부족한 가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면서 참고 또 참는 일은 분명 내면을 다치게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두가 성실하다. 시간에 쫓기고 부족한 잠에 허덕이면서 해방구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낸다. 보이지 않는 족쇄로 자신을 꽁꽁 옭아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좋은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반대로 '악랄한 파렴치한'은 오래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조리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묵묵히 참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p. 55)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괜찮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슴을 치며 후회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지 않길 바란다(p. 57).
하지만 모든 인간은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한계, 부족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걸음 물러서서 차분히 사물을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성공과 더불어 후회 없는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귀를 '순하게' 하는 일. 그것은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p. 64).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후벼 파는 후회는, 이루지 못한 꿈이나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실인 것이다. 물론 평생 동안 꿈과 열정을 품고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갈수록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조금씩 줄어든다. 이런 잔인한 현실에서 꿈과 열정을 계속 간직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도 저 멀리 빛이 있음을 믿고 다시 두 주먹 을 불끈 쥐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좇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p. 83)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꿈을 외면하고 중간에 꿈의 끈을 놓았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한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향해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후회는 한결 줄어들 것이다(p. 84).
일만 하느라고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p. 114) 매우 많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위해 일부러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좀 더 풍요로운 인생을 꿈꾼다면 취미 하나 정도는 갖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삶의 기쁨을 느낀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놀이'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그 모습에 '후회'는 없다(p. 115).
치료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되찾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술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병이 있는데, 이럴 때 치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은 병이 더는 악화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다. 한편 환자 입장에서 완치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가장 가치를 두어야 할 인생 목적은 무엇일까? 단순히 병마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있을까? 물론 병이 더 진행되지 못하게 막는 치료는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p. 222)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환자와 의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을 접고 남은 생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이 한정된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연명'이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 사는 일, 목숨을 부지하는 일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 은 아닐 것이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이 꿈과 희망을 이루는 데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아닐까? 이 세상에 빨리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렸을 때, 단순히 살아 있는 시간을 일 초라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시술하는 치료는 상상 이상의 고통을 동반한다. 어쩌면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치료에 빼앗길 수도 있다. 특히 말기 암에서 암세포가(p. 223)어느 정도 세력을 확장했다면 항암제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암 치료뿐 아니라, 말기 환자를 위협하는 치료는 너무나 많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수액과 수혈이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항암제로 다스리기 어려운 말기 암의 치료 목적은, 시간 확보와 아울러 질병에서 비롯된 통증과 항암제 부작용을 덜어주는 것이다. 완치가 어렵다면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그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 치료의 진정한 목적인 것이다. 이는 조금만 진 지하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 분, 일 초,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이 있다. 그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연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생명의 시간을 앗아간다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말기 치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확(p. 224)보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p. 225).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가 죽음을 앞두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희망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남아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p. 226).
나는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내세를 믿으면 좋은 점은, 이 세상의 이별은 일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안을 받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세의 존재는 이별의 슬픔을 치유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사람이 꽤 많다(p. 229).
-
2026-05-12
-
-
【북토크398】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는?
-
-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언어를 공부하는 걸까? 다문화가정의 구성원으로 자라 미국에서 응용언어학을 공부하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김미소가 삶에서 언어와 함께하는 법, 언어와 함께 성장하는 법을 들려준다. 우리는 영어를 그 자체로 공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반복해서 읽고 외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른 나이에 배울수록 더 능숙하고 원어민답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김미소는 말한다. 언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보다는 해당 언어로 쌓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언어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고, 따라서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가 중요하다고.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숙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다. 영어광풍인 우리사회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틀에 박혀 있던 내 사고가 산산이 깨져버렸다.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아기 시절의 큰아이를 마지막으로 봤었는데, 지금은 가족 간에 이중언어를 편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 내내 3개월 단위로 베트남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살기를 반복해 온 덕이었다. 물론 아직 대화라(p. 26)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맥락상 상대가 아빠나 나나 오빠일 때는 7세 또래들이 쓸 정도의 한국어로, 상대가 엄마나 할머니일 경우에는 베트남어로 편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종종 엄마와 이야기할 때는 두 언어를 섞어 쓰기도 했다. 가족과 이야기해 보니 베트남으로 돌아가서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p. 27).
외국어는 이른 시기에 배울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한 예로 사춘기(대략 12세 이후)까지 제2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화(lateralization)'되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의 가소성이 떨어지므로, 새로운 언어를 배워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는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 제2언어 실력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현상을 '화석화(fossilization; Selinker, 1972)'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인일수록 언어를 배우기 어려워지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뇌의 가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일 수도 있고 (Long, 1990) 자신이 쓰는 제2언어와 원어민이 쓰는 언어 간의 차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Schmidt & Frota, 1986).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어릴수록 외국어 학습에 유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제2언어에 노출된다 해도 이중언어자가 된다는 걸 보장하지는 못하며, 아이보다 성인이 제2언어를 초기에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제2언어를(p. 33) 배우기 시작한 나이보다는 그 언어를 통해 쌓아온 경험이 능속도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Ortega, 2019). 언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그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사람은 지식이나 능력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아니고, 제2언어 역시 뇌 안에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능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를 배워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사회와 교류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처럼 언어는 관계, 사회, 삶 속에 존재한다. 아이가 제1언어 또는 제2언어로 만들어나가는 세계는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다. 아이는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고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므로 아직은 어른의 개념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보통은 주변의 성인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해준다. 아이들은 아직 단단히 만들어진 세계가 없는 만큼 새로운 변화에 유연할 수 있다. 반면 성인이 제2언어를 통해 만들어가는 세계는 아이의 세계만큼 친절하고 말랑말랑하지 않다. 성인이 될수록 언어를 배우는 게 힘들어지는데, 단순히 발음을 잘할 수 없거나 문법에 능숙하지 않은 게 문제는 아니다. 성인은 이미 모국어로 구축해 놓은 정 체성과 사회관계망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 벽을 깨고 제2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게 큰 도전이 된다. 화석화되는 건 제2언(p. 34)어 능력이 아니라, 이미 모국어로 단단히 형성된 자신의 자아다. 모국어로 쌓아 올린 자아는 이미 편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모국어 세계에서 이뤄놓은 성취도 많고 친척, 친구, 동료와의 관계도 탄탄하다. 그렇지만 제2언어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때로는 부당함과 무시도 감수해야 한다. 세상은 성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으며, 제2언어를 통해 성인 대 성인으로 맺는 관계는 꼭 평등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 외국어를 배우는 건 숨 쉬듯 편안했던 자신의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과정이구나. 너무 당연해서 자아라고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을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부끄러워질 기회를 일부러 더 만들고, 자존심을 굽히고, "내가 한국에서는~" 같은 생각을 전부 내려놓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구나. 이 관계에서는 수도 없이 불편한 일이 일어나고, 원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권력관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상대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모호함을 견뎌야 하고, 지나가는 여섯 살 아이에게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모국어 세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제2언어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p. 35). 자아가 말랑말랑해야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자존심을 세우면 자신이 고립될 뿐이다(p. 36).
"Whats your hobby?"도 "What do you do for fun?"도 좋은 문장이다. 만약 여러 언어를 넘나드는 친구라면 Whats your 취미?" "What do you do after 퇴근?"처럼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의미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스마트폰 사진 앱을 켜서 직접 사진을(p. 84) 보여주며 이게 내 취미인데 너는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원어민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나쁘다. 언어는 진공 속에서 존 재하지 않으며, 원어민의 언어가 항상 맞는 것도 아니다.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미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다(p. 85).
영어 말하기라는 여정을 시작할 때는 이 두 가지를 꼭 기억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p. 229).
-
2026-05-12
-
-
【북토크397】 의사가 밝히는 질병 통해 돈버는 병원 민낯
-
-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에서 저자 김현아 교수는 의사로서, 교수로서, 의료 정책 연구자로서 한국 의료 시스템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수많은 환자가 한국 의료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의사와 병원에 대한 불신은 커져간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구조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표면적인 문제 현상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구조를 추적한다. 통제된 의료수가는 수익이 되는 의료 행위를 유도하고, 그 과정에서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강해진다. 이 상황을 통제하고 개선해야 하는 정부도 현실을 방치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믿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교보문고.
이 책은 병원 비즈니스의 민낯을 보여준다. 흥미롭게 읽었다. 이러한 책을 저술한 의사의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다. 한 인간이 잘 살았는지는 그가 어떻게 죽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젊은 시절 영민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이들이 나이 들면서 추한 욕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내린 끝에 젊은 시절의 공덕을 모두 까먹고 가는 일을 숱하게 본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아예 지워버렸고, 인간은 이제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다 끝나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원에 가면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고, 점점 더 죽음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죽음은 이제 삶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할 수 있으며 피해야만 하는 재앙이 되어버렸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없어진 현대인들을 포섭한 신흥 종교는 의료 산업이다. 병원은 신전이고 교리는 자본주의이다(p. 31).
길버트 웰치Gilbert Welch 교수는 『과잉 진단』이라는 저서에서 인체에서 발견되는 이상의 정의를 자연의 복잡계 이론을(p. 36)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포 앞바다에는 몇 개의 섬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고 해보자. 이때 섬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내리지 않는 한 "모른다"가 답이다. 축척을 늘려서 들여다보면 낮은 배율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무수한 섬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섬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가?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복잡계의 최고봉인 인체에도 적용된다. 인체에서는 매일같이 이상 세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검사의 정밀도가 높아질수록, 검사를 자주 할수록 의미 없는 이상 소견은 늘어난다. 이미 큰 논란이 된 갑상선암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갑상선암 광풍은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 잉글랜드 의료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까지 대서특필되는 망신을 당했음에도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나는 지금도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유 없이 갑상선에 초음파를 대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역부족이다. 다 알만한 사람들 중에도 갑상선 초음파 검사 후 이상 소견 발견→침생검→암세포 검출의 수순을 밟아 갑상선 절제술을 하는 일을 보곤 한다. 갑상선암 조기 발견 시스템이 가동되기 전이나 후나 사망률에는 차이가 없다는, 갑상선암은 무병장수하고 사망한 사람의 부검에서 가장 흔히 보는 암이라는, 그래서 어쩌면 발견할 필요가 없는 암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기 진단에 의한 수술을 담보로 죽음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공포 마케팅의 무서운 위력이다(p. 37).
연골이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는 골관절염이다. 일명 퇴행성 관절염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할머니들이 무릎을 짚으며 절룩거리는 이(p. 74)미지로 상징되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해마다 연구비는 타야겠기에 시류에 맞는 연구 과제들을 제출하면서 연구의 활용 방안 란에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근거를 제공하여 10조 원 규모의 바이오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허풍을 떤다. 연구비를 받으면 감사히 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연구가 이 병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은 몹시 쓰 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연구(신약 개발과는 거리가 있지만 질병의 이해를 깊게 하고 건강 불평등을 개선시키는)를 하겠다고하면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10여 년 전 미국 학회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유레카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발표된 내용은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서 키우는 원숭이에 대한 연구 결과였는데 부자나라답게 미국 국립 보건원은 한 마리당 1억 원 정도는 들여야 데이터를 낼 수 있는 원숭이들을 대량 사육하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원숭이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면 모든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자기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장기를 떼어 간다. 이렇게 해서 얻은 원숭이의 무릎 사진을 한 컷 보여주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 관절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자연 서식지에서 원숭이들의 수명이 4~5년인데 비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는 천적으로부터 보호받고 먹이 걱정도 없기 때문에 그보다 두세 배 정도를 더 산다. 퇴행성 관절염(p. 75)도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번뜩 들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석기 시대에 약 20세였던 것이 20세기 초반 40세 정도로 늘기까지 수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00년도 안 되어 인류의 평균 수명은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버렸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무릎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내재하고 있는 거였다. 수만 년 진화의 역사를 역행해서 무릎 연골에 무슨 마술을 부려서 관절염을 고치겠다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러고 몇번은 완전히 다른 연구 과제를 써서 냈다가 연거푸 미역국을 먹고, 신념은 멀고 먹고사는 건 당장인지라 할 수 없이 다시 "손상된 연골을 회복시켜"로 복귀해서 연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상은 희한하게 돌아갔다. 많은 환자가 무릎에 연골 주사(연골을 보호하는 효능이 입증된 적이 없는)를 맞고 다녔고 연골을 재생하려고 몇백만 원 주고 줄기세포를 맞 았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자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우리 아들이 치료비 냈다"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치료가 효도 상품으로 등극했고, 어르신들 사이에 무의미한 경쟁심과 좌절감이 양산되었다. 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진 사람의 3분의 1 이상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보건의료 연구원의 신의 료 기술평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줄기세포 연골 재생 치료에 대하여 "환자에게 돈을 받기 전 임상 시험부터 제대로 하라"라(p. 76)는 권고를 했다가, 편협하고 신기술에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비난만 받기도 했다(p. 77).
극우파 의사
대한민국 의사들은 보수 정당 지지자가 많다(개인적 견해로 우(p. 153)리나라의 보수는 극우에 가깝다), 최대집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태극기부대 지지자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굳이 말을 안 하겠다는 내게 의견을 묻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했다가 거의 '빨갱이' 취급을 당한 이후로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식견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의료 사회주의'이다. 이 말을 지은 분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의료만 사회주의로 운용되어야 하느냐"라는 강한 불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의사가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은 세력 중 하나가 '미국의사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도했을 때 미국의사협회 회장인 에드워드 애니스Bdward Annis는 이렇게 말하며 반대했다. "모든 사람에게 의료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은 사회주의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와 우리나라 의사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뉘앙스가 물론 같지는 않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냉전이 한창인 시점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와 동의어였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의 통제하에 살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랑이에게 곶감보다 더 무서운 말이(p. 154)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의사들에 동조했고 대표적으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사회에 침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치는 영역이 의료이다”라고 주장했다.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미국의 공적 보험인 메디케어를 도입할 당시에도 공화당에서는 사회주의의 전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독재 정권에 의한 압제를 오래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의료에 간섭하는 것이 처음부터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당시 의료 보장이 되던 북한과 비교했을 때 남한의 체제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와 강권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비용으로 국민건강보험을 이룬 것은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의 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부르짖는 '의료 사회주의'라는 말은 돈이 없는 국가가 필수 의료수가를 형편없이 후려쳐서 강제로 국민 개보험을 만들고, 의사들을 통제 하면서 정작 개별 의사들은 자영업자로 내몰아 병원 경영의 모든 위험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모순에서 나온 것이다. '의료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의료가 미국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의 의료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굳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의 〈식코〉를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은 미국의 공화당과는(p. 155) 달리 의사들의 편을 들어줄 마음도 별로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들을 지지하니까.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도 더 이상 의사들의 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정치인들은 거대 제약 회사와 사보험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고, 그 경향은 미국 민주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정치적 성향은 미국과 같이 공적 의료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이는 '상인 우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이 자영업자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지식을 익히느라 너무 바빠서 사회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읽는 능력도 부족해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오히려 해가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온 면도 있다. 의사들의 행동이 공공선에 반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개개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정책이 의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의사들이 건강보험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유달리 사악한 집단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각자 도생의 논리가 의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세한 사회가 되면 의사들은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 우파 의사'의 미래도 별로 밝지는 않다. 미국은 이미 대형 병원, 사보험회사 등의 자본이 의료를 포섭한 상황이다. 미국 의사들은 날로 덩치가 커져가는 병원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며 전문성을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다. 또한 진료에 할애할 시간이 보험회사 서류 작성 때문에 뭉텅이로 잘려 나가는 것에 대해 번아웃까지 생긴다(p. 156)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건 우리나라 의사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던 일이다(p. 157).
현대 의료는 이제 노화를 병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몰아내(p. 260)겠다고 선언하고 많은 과학자는 인간의 한계 여명인 120살을 넘겨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평균 수명이 고작 10여 년 길어지면서 야기된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이 모든 인본적•사회적 함의를 집어 삼킨 결과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인간이 필요 없는 의료가 도래할 수 있다. 땀 한 방울을 넣으면 수십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AI가 나타날 수도 있고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99퍼센트의 정확도로 알려주는 알고리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없는 의료의 시대에는 환자 또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듯 기술이 지배하는 의료의 시대에 인간은 그저 하나의 이상 수치로 환원되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맥락은 지워진다. 다시 인간을 소환해야 하는 문제는 비단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이 지나면 기꺼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어긋난 일이 없는 진실을 기억하고 체화하는 것만이 인간이 소거되는 현실에 맞서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p. 261).
-
2026-05-12
-
-
【북토크396】 글쓰는 자들의 고통
-
-
매 시절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서정 시인 문태준. 그가 접한 부드러운 자연과 고유한 사물, 생명과의 교감에서 길어 올린 샘물 같은 사유를 엮었다. 문태준의 산문은 익숙한 일상에서 사유를 펼쳐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흔들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던 사물들이 시인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언어의 정수를 담은 문장과 만나 호흡하고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자체이다. 특히 그의 이번 산문집은 이야기의 정서에 꼭 맞는 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독자에게 산문의 따스한 감각과 함께 시적 상상력을 한껏 선물한다. 그가 써 내려간 진실한 깨달음은 시와 어우러지며 여태 몰랐던 색깔로 아름답게 빛난다. 이 순수한 기록은 시인 문태준이 기다렸던 첫 문장이자 우리가 찾아 헤맸던 바로 그 문장이리라.-교보문고.
전업 시인,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문학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로서 책을 써주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시인의 일
시를 쓰기 위해 새벽에 혼자 방에 앉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은 깊고 세상은 고요하다. 백지에 첫 생각을 펼쳐놓고 첫 생각이 그날의 우연하고 특별한 선택들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시가 만들어지는지 명백하게 알기는 어렵다. 시는 잘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이득도 없이 흐지부지 시간만 흐르다 날이 새면서 그 흰빛 속으로 아주 사라지고 마는 때도 있다(p. 23). 나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어떤 시적 기미를 알아채는 일에 더 마음을 사용한다. 그래서 날마다 시를 읽고, 음악을 옷처럼 두르고, 세계에 질문을 하고, 미술과 영화와 사진을 만나고, 생활의 시장에 가고,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하나의 생각이 걷는 미로를 따라간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첫말에 따라 시의 높이와 깊이가 열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를 쓰는 사람이 된 지도 25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에 등단해서 벌써 쉰 살이 되었다. 나는 가끔 갓 등단했을 때의 나를 떠올린다. 시단의 어른들이 모인 허름한 술집 말석에 앉아 어른들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어른들은 속이 깊었고, 정이 많았고, 눈매가 선했으며, 세상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셨다. 그분들에게 적어도 시를 짓는 일은 한가한 일이 아니었다. 개인의 한가한 심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p. 24)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궁리하는 것이 내 시였으므로 시는 내가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해 뜨면 논밭에 나가 땡볕에서 일하지만 큰 빚더미에 눌려 밥과 돈을 구하러 매일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캄캄한 절망과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삶의 채탄장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단단한 의지의 근육과 희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처럼 관심했던 곳으로 내 시가 돌아가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p. 25).
얼마 전 문득, 내가 부정적인 생각에 꽤 많이 휩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곧 일어날 미래의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어둡게 전망하고, 결과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밝은 날의 장면들도 많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암울한 날들의 장면들도 많았기 때문일 테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잡아함 41권 1,136경 《월유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에 달을 비유로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p. 8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읽으면서 나는 평소의 내 얼굴빛과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너무 자주 일그러져 있거나 화냄의 불길에 휩싸여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줍고 부드러운 얼굴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해보았다. 그런 얼굴이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산길에서 본 노란 복수초와도 같은 얼굴이요, 또 돌담 아래서 피어나기 시작한 수선화 같은 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런 얼굴은 내가 맞을 미래의 시간에 더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인 내심으로부터 맑은 샘물 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로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 해 극도로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이 환하게 활짝 펴(p. 88)질 날이 드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구실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도 내가 만든 것이다. 스트레스는 알고 보 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전문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바닷가를 산책할 때, "오늘은 바다가 잠잠하다" "물질 나갔던 해녀가 헤엄쳐 돌아온다" 같은 말처럼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질 것이다(. 89).
다섯 수레의 책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나의 마음의 어둑한 고요의 공간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로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소리의 회색 황혼"이라고 가을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다. 가을에는 조용한 공간이 내면에 생겨난다. 조금 쓸쓸하면서 잠잠한 시간을 살게도 된다. 이런 시간은 자신을 우물처럼 들여다보는 때이기도 하다. 또 책을 펼쳐 읽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도 좋은 때이다. 책을 새로이 많이 구입하진 못하더라도 읽고 싶었던 한두 권의 책을 이 가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도(p. 186) 좋은 때이다. 얼마 전 산문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을 만나는 여러 행사를 치렀지만, 최근 한 책방으로부터 온 제안은 특별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회원들을 위해 책에 직접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백 명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낼 책에 하나하나 사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방의 기획이 참신했고, 또 책을 지은 사람으로서 책방의 북클럽 회원들이 내 책을 구입해 함께 읽는다니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이 책방에서는 매달 좋은 책을 골라 북클럽 회원들에게 그 책을 고른 이유를 밝힌 '책방마님'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책을 다 읽은 후 서로 토론하고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정 분야를 정해놓고 책을 고르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소설, 시와 에세이, 역사, 경제,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망라한다고 했다. 다만 '생각의 경계를 넓혀주는 책, 통찰력을 품고 있는 책, 혹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책방 주인과 북 큐레이터, 외부 자문단이 참여해 최종적으로 회원들에게 보낼 책을 선정한다고 했다. 어떤 책을 고르느냐에 북클럽의 성(p. 187)패가 달린 만큼 성심껏 한다고 했다. 이 책방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고 또 돋보이는 것은 책방이 독자를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독서열'을 지퍼 이끌어간다는 데에 있다. 또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책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독자는 독서의 총량을 늘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거서'라는 말이 있다.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시 〈부독서성남시〉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이 시에서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한유(p. 188)는 이 시에서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또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p. 189).
-
2026-05-11
-
-
【북토크395】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
-
베트남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우리사회의 역사적 매듭을 풀어내는 중요한 기회이다. 《빈딘성으로 가는 길》은 참전군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가 주도한 기억의 왜곡과 강요된 망각, 과도한 국가주의,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정의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한국에서는 전쟁 특수만을 강조할 뿐,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 않았고, 파월장병 또한 어느 곳에서도 주역으로 평가받지 못했고,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어쩌다 태극기를 들었을까?
특히 이 책은 사과하고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윤리학적인 차원과 역사적 사례를 교차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파월장병들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진실의 다면성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고루 담아내는 이 책은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전쟁시대의 우리 아버지들과 베트남전쟁을 현재의 사건으로 여기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를 잇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베트남전의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가 맡았던 악역에 대해 잘 기술한 책이다. 이제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에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솔직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베트남전에 관심이 생겨 책을 챙겨보고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직면해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팩트와 이에 대한 바른 해석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도덕적 책임추궁의 주체에 대해서도 되물을 필요가 있다. 과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흔히 비쳐지듯이 양심세력과 진실을 막는 거짓 세력 간의 한판 승부인가? 아니면 좌우 진영 간의 정치투쟁일까? 만약 그렇다면 판단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은 사안의 핵심을 놓친다. 만약 민간인학살 문제를 제기한 '양심세력'이 가해자들을 오로지 심판의 대상으로, 즉 자신과는 실질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피해자의 처지와 동일시하며 감상적 연민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이다. 흔히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독일(p. 17)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기억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희생당한 유대인들에 공감하지, 가해한 나치 전범들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물론 방문객들이 느끼는 도덕적 분노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은연중에 스스로를 면책시키면서 우리 세대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 동독은 나치 수괴 히틀러를 '서독인' 이라고 얼버무리지 않았던가(p. 18).
맹호 용사들이 이처럼 위험천만한 전장에 오게 된 것은 대체로 자의반 타의반이였다. 군은 처음에는 지원자를 모집 했으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금전적 이득을 부각하며 지원을 독려했다. 1965년 맹호와 청룡부대의 3차 파병 그리고 이듬 해 백마부대의 4차 파병 때는 부대 단위로 차출이 이루어졌다. 맹호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서는 자원병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전쟁(p. 33)터로 내몰린 측면이 없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한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가족을 위해 나 한 몸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쟁에 자원했다. 당시 3년이나 요구되던 가혹하고 진절머리 나는 병역을 벗어날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젊음의 객기로 전쟁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다. 복무기간이 1년으로 훨씬 짧고 한밑천 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전장은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온갖 일에 시달리면서 툭하면 보안대나 헌병대에 불려 가 얻어맞고 정해진 의례처럼 일명 '줄빠따'를 맞거나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기합만 받는 유격훈련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영화 속 장면 같은 전쟁터에 나가 멋지게 싸우리라, 살아 돌아온다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리라 기대되었다(p. 34).
프랑스제국의 주구였던 바오다이 '황제'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웅오던지엠 대통령으로, 이후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출신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남베트남의 지배세력은 부정과 부패, 무능으로 일관했다. 북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의 토지개혁이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갔던 데 반해, 북위 17도선 이남에서는 봉건적 지주들과 기득권 관료들이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인들의 전반적인 민심이 남북 중 어느 쪽을 선호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트남에서 남북간 대결은 결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체제 대결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던 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북베트남의 조력을 받으며 외세 및 그 부역자들과 싸운 통일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대체 누구를 돕기 위함이었나? 남북한이 정면대결을 펼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에서 주역이 아니었다. 베트남 분단선인 17도선(p. 53) 이남의 민족해방투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이미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우면서부터 게릴라전에 길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네바 평화협정의 불이행을 문제 삼으며 민족해방전선의 기치 아래 모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거치는 공급선인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해방전사들은 주민들 사이에 깊숙이 침투해 그들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정규전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970년대로 접어들어 전세가 확실히 기울게 된 다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파월군이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한통속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트콩보다 따이한 군대를 선호할 확률은 매우 적었다. 미군은 마치 물과 물고기처럼 결속된 마을 주민과 베트콩을 떼어놓기 위해 물을 퍼내 물고기를 말려 죽이는 역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패착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이른바 '전략촌'을 서둘러 조성하여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베트콩이 머물지 못하도록 마을을 불태워버리는 무리한 전략을 구사하여 남베트남 인민의 마음에 적대감만을 키워놓았다. 사실상 군 주둔지들만 제외하면 베트남 전국이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p. 54).
설령 불편한 과거사를 얼버무리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베트남전 참전을 반공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모순적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베트남전은 적어도 베트남인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약소국이 열강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지켜내고자 참으로 질기게 싸 웠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동병상련해야 마땅할 나라의 자주독립을 훼방 놓은 것일까?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나라처럼 북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남베트남은 우리가 수호해야 할 자유세계의 보루이기는 커녕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었던가?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해 제 국민에 의해서도 완전히 버림받은 나라임을 병사들 눈으로 스스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위해서 싸웠단 말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반공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경제적 활로 개척이라는 실용적 논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그것은 참전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논리이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파병은 악마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정당성의 결핍을 무색하게 할 만큼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국(p. 88)가나 병사 개개인 모두 형식적인 반공의 주문을 외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내달렸다. 따라서 불꽃 튀는 전투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내용이 없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낯선 베트남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증이 있었을 리도 없다. 오로지 '생존' 말고는 별 다른 이유가 없는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가 타오르면서 진정으로 원초적인 본능이 작동하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무의미한 전장의 어슴푸레한 포연을 뚫고 나와 작열했던 것이다(p. 89).
베트남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확실히 선례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폭력의 사슬이 대한민국의 역사 전체를 휘감고 있다. 1948년 4월 제주와 1980년 5월 광주 사이에 빈안사와 퐁넛 • 퐁니 • 퐁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했던 사람들에게 폭력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폭력의 놀라운 창조력 이었다. 폭력은 한순간에 노예를 주인으로 뒤바꿀 수 있다. 약자는 두려워하고 인내하지만 강자는 주저 없이 우월함을 입증할 뿐이다. 한국인에게 폭력이란 피해자를 가해자로 역전시키는 감정의 연금술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베트남에서 한국인은 자기 자신과 싸운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떨치고 싶은 과거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따이한 군대의 폭력이 전략적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광기를 띤 것은 무언가 깊은 혐오의 발로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은 마치 깨뜨리고 싶은 거울처럼 자신을 닮은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국적인 야자수와 옛 프랑스제국이 남긴 서구문명의 자취가 가득한 꿈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뒤로하고 신상 감독의 194년도 영화 〈빨(p.107)간 마후라〉에 나오는 멋진 공군 조종사들처럼 직선의 활주로를 달려 푸르른 미래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싶었으리라(p. 108).
폭력이야말로 역사를 전환시키는 힘이었다. 그것은 어엿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 의례와도 같았다. 베트남전 참전은 제국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폭력의 유산을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국제적 지분을 확보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뚜렷한 변곡점이었다. 비록 베트남전은 패전으로 종결되었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어엿한 가해자로서 폭력을 행사한 유례없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총력 전시동원 체제인 유신체제야말로 대한민국이 원조물자나 받던 궁색한 처지에서 공세적 위치로 전환했음을 웅변한다. 냉전의 최전방 국가인 대한민국은 '부'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 시킬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의 공화국이 되었다. 긴급조치와 통금, 새마을운동과 민방위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남성들 사이의 군사문화와 성폭력적 언사, 그리고 학교 교실 안 의 가혹한 훈육 방식에 이르기까지 고삐 풀린 폭력이 난무했다. 우리의 골수에 사무쳐 있는 폭력의 유전자를 온존시키는 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유신체제의 꺼림칙한 망령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 폭력의 에너지로 뜨겁게 달아오른 냉전은 본연의 냉혹한 묵시록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여전히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p. 110).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냉전 논리는 국가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은 시장경제체제인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이라는 상투적 논리와 직결된다. 특히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p. 145)한 향수는 젊음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는 개인적 자부심과 접목되어 일종의 순환논리를 이룬다. 결국 참전용사들의 사고는 국가유공자라는 자기정체성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린 피해자인 동시에 침략과 학살에 연루된 가해자라는 자기성찰의 여지는 거의 없으며 확고한 자기정체성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이처럼 꽉 막힌 사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자기성찰의 결여가 아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타인의 죽음을 경시한다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다(p. 146).
민간인학살에 대해 책임을 추궁 받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주로 상황논리를 통해 책임을 희석시키려 한다. 게릴라 전쟁은 그야말로 잔혹했다. 아군의 월등한 군사력 앞에서 게릴라는 정정당당하게 맞서지 않고 비열한 테러와 저격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게릴라와 싸우는 정규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마을 주민을 그저 순진한(p. 208) 양민으로 믿으며 경계를 게을리해도 될까? 그들 중 일부는 양민으로 위장한 게릴라일 수 있는데다, 설령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더라도 게릴라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했을 터인데 어찌 적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게릴라를 무서워하는 만큼은 이쪽도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나 정말로 순수한 양민이 피해를 당했다면,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전쟁이란 원래 비정한 것이다. 변명의 이유는 그 밖에도 차고 넘친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로 인해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기 쉬웠 다. 만약 무고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쟁터에 동원된 병사 개개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든 국가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따라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병사는 죄가 없다...이런 식의 논리는 분명히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면책하는 논리라면 설령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참전용사들이 여전히 국가 차원의 사과조차 반대하는 걸 보면, 베트남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p. 209).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 파병군이 보여준 엄청난 폭력성은 그저 우발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전략적인 학살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이 20세기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이완과 조선에서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민중을 무참하게 학살한 메이지 일본군, 간도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을 약탈하고 번연히 살육을 자행했던 중국인들, 중일전쟁중에 수많은 중국 민간인을 학살한 제국 일본의 군인들, 만보산 사건 후 평양에(p. 256)서 중국인을 대량학살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군중,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건너가 현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대량학살을 자행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 그리고 독립국가 건립 이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은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묻게 만든다. 폭력은 도덕적 반성을 요구하지만 도덕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20세기의 한반도는 동아시아 여느 지역에 못지않게 폭력에 물들어 있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행된 집단적 폭력은 다른 곳들과 공통된 점도, 물론 아주 색다른 요소들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유신 및 군사독재 체제를 거치면서 여느 곳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파급력과 지속성을 가지고 폭력이 사회 깊숙이 뿌리를 내렸지만 그럼에도 일반 국민이나 병사들 개개인이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 도 없는 독종들이 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경우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파월용사들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었을 것 이다. 그들은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전장에 동원되고는 부지불식간에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역을 배정받았을 것이다(p. 257).
-
2026-05-08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