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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날씨가 쌀쌀한데 11월 14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 홀은 후끈 달아올랐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때문이었다. 한장총은 한기총, 한교총, 한기연과 함께 교단연합기관이다. 그러나 큰 존재감이 있는 기관은 아니다. 그런데 상임회장 선거가 합동측의 권순웅 목사와 통합측의 김순미 장로의 경선이 되다보니 난리부르스가됐다. 합동측 총대가 20명인데 모두 참석했다. 먼 지방에서도 빠지지 않고 왔다. 이 선거에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관례에 따라 합동측 직전총회장인 권순웅 목사가 상임회장이 되야하는데 갑자기 통합측의 장로가 출마해 경선이 됐기 때문이다. 직전총회장 출신 합동측 목사와 증경장로부총회장 출신 통합측 장로의 대결이다. 이 배후는 지난번 한교총 회기에 권순웅 목사가 대표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한 모 목사라고 알려졌다. 합동교단이나 권순웅 목사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사람이다. 결국 합동측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권순웅 목사의 당선을 위해 오정호 총회장을 비롯한 증경총회장들과 모든 총대들이 출석해 한표를 행사했고 결국 100대 67로 이겼다. 교단 대표 기관의 장이 장로가 돼서는 안된다는 다른 교단 총대들의 의견도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이제 한바탕의 난리부르스가 끝났다. 잠시 복기를 한다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합동측의 단결력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총대들이 한 마음이 되어 권 목사를 지지함으로써 그 세를 과시하고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두 교단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이날 참석한 합동측 총대들은 자신의 교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주었기에 다행이고 감사한다. 또한 총회 총무를 비롯해 총회 직원까지 동원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두 번째는, 통합 교단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다른 교단도 아니고 합동교단에서 갈려나간 통합측에 의해 벌어졌기에 더욱 합동측 총대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앞에서는 악수의 손을 내밀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합측과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들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해야한다.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통합측은 기회만 되면 어떤 일이라도 꾸밀 수 있기에 이슬람을 대할 때 “사랑하되 경계하라”처럼 그들을 대해야한다. 두 번다시 통합측에 놀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장총 정기총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1시가 넘어 끝났다. 경선 선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다. 이때 합동측 목사 장로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통합측 인사 대부분은 선거에서 지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본전도 못찾은 경선이었다. 차기 대표회장이 될 권순웅 목사의 상임회장 당선을 축하하며 합동교단의 위상과 한장총의 영향력을 높이는 연합회 활동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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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이번 11월 14일에 있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제41회 정기총회가 상임회장 선거 문제로 시끄럽다. 통상 목사가 하던 상임회장에 장로가 경선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상임회장은 차기 회장이 되는데 올해 후보로 주다산교회를 담임하는 권순웅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과 영락교회 장로로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을 역임한 김순미 장로가 나서 경선중이다. 한장총은 1981년 2월 1일 설립됐으며 그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공동 관심사를 협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분열된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필요한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로교회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들은 비록 교단이 갈라져 있으나 서로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 확인과 의식이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대표회장은 1992년 제10회 총회 때 통합측의 한영제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31년만에 통합측이 또 다시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필이면 통합측에 의해 또다시 이 일에 재현되고 있어 연합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참고로 연합기관인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모두 대표는 목사이다.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 대표회장을 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해야하는데 이영훈 목사가 하도록 주도한 인물이 이 일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도 합동교단 증경총회장 권순웅 목사를 “가마니”로 알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사태에는 합동측 인사들도 동조했다는 뒷말이 있으니 교단 연합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정말 “합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만약 통합측이 합동측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합측과는 더 이상의 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단 선언을 해야한다. “보자보자하니 보자기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8회 총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한 고영기 총무는 자신이 종로에서 연합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쓴적이 있고 이것이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고 총무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분담금은 많이 내면서도 자기 자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합동측 교단의 대외 업무 현실이다. 권순웅 목사와 맞서는 김순미 장로는 재벌가로 총대들에게 상당한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로인해 경선 결과를 애측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번에도 권순웅 목사와 합동측이 통합측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면 묵과하지 말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고 연합회 활동 제재를 가해야 하며 그것이 안될시 합동측은 통합측과의 연합활동을 전면 재고하고 중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늘 음모를 획책하는 통합측에 경고하며, 늘 어리석게 당하는 합동측의 자성을 촉구한다. 경선 투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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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합동교단내 교회 목사 사모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있다. 군소교단이나 독립교단을 통해 안수를 받는다. 과거 은퇴를 앞둔 합동측 목사들이 사모를 권사로 임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내가 시무했던 동암교회가 그랬고, 고 최훈 목사가 시무했던 동도교회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동암교회 같은 경우 사모가 권사회 회장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사모들이 목사 안수까지 받고 있다. 결국 사모없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모는 누구인가? 목사의 아내로서 교인들에게는 어머니같고, 언니, 누나같은 역할을 해준다. 남성 목사가 하지 못하는 목회 사역의 한 부분을 사모가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전방에서 목회하는 남편 목사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후방 사역을 사모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과 함께 전방 사역을 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순복음교회 고 조용기 목사 사모도 목사였고, 침례교의 대중적인 목사 장경동 목사 사모도 목사이다. 이처럼 타교단이야 그렇다쳐도 아직 여성목사안수를 금하고 있는 합동교단내에서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과거 장로 제도가 없는 교단이 있었다. 그런데 연합사업을 하다보니 자기는 집사나 남자 권사인데 타교단은 장로가 있어 자기가 열등해 보여 교단과 교회를 옮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교파 구분없이 대부분 장로 제도가 있다. 아무래도 집사나 권사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여서인가 보다. 사모들도 그런가 궁금하다. 왜 사모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단법을 어겨가며, 드러나면 남편 목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목사 안수를 받는가? 물론 이것을 허용해 주는 합동측 목사 남편도 문제긴 문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의 목사 사모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노회가 문제 삼지 않고 쉬쉬하는 것 같다. 그럴려면 교단을 옮기지 왜 합동교단에 있는지 묻고 싶다. 108회 총회는 여성목사안수는 안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엇다. 그러나 선 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하려는가? 사모들이여 자중하시라. 합동측 교단에서 사모가 목사가 되는 것은 일탈이요, 반란이며 또한 치리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합동교단은 각자도생교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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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2004년 한 여성 작가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살한다. 그 여성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이다. 그녀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물 『The Rape of Nanking』(역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신실의 기록)을 1997년에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협박과 위협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난징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군들은 무력한 패잔병들과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먹일 것이 없다는 핑계로 다 도륙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칼로 베고 생매장하거나 불에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여자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불문하고 보는 족족 대낮에도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때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선량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은 날조요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난징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왜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자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거나 배상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반성하는 독일과 너무나 다른 행보이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이나 도덕성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국가이다. 최근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산 어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나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너나 없이 바닷물을 마시고 회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 일본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당했다. 정신대로 끌려가고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과연 자주 국가인가를 의심케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한 작가의 유작을 읽으며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으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근성을 어떻게 드러내는 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없이 여전히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과 이를 방조하는 미국 그리고 그 장단에 춤추는 현 정부를 보며 암담함을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기 싶다”는 책에 있는 경고가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볼 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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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지난 9월 13일 "총회회관 1층 인테리어 감사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반이 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1층은 휑하다. 카페 장소에는 의자 등 집기가 들어왔지만 업체가 선정되지 않았고, 역사관은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총회에 갈 때마다 휑한 모습에 알아보니 카페는 월세가 높아 신청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월 500만원을 예상했다가 계속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월세가 얼마로 내려가야 업자가 나설지 궁금하다. 또한 카페에서 얼마의 수입이 날지 궁금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기 위해 별도의 출입구를 냈다고 하지만 과연 일반인들이 총회건물에 들어와 줄지도 미지수다. 이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결국 총회 재정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뾰족한 수가 있는지나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왜 식당을 내보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어차피 식당에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제 총회에 와서 저렴하게 밥 먹을 식당이 없어 인근의 비싼 식당에서 해결해야한다는 불만의 소리가 있다. 한편 역사관도 이전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과연 제대로 역사를 담아낼지 의문이다.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2013년 새로남기독학교를 개교할 때 건물 1층을 과감하게 학생들은 물론이고 만인을 위한 기독교역사전시관으로 꾸몄다. 그 규모와 전시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총회회관 한쪽 절반에 마련된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이 작은 공간에 무엇을 전시할지 궁금하다.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는 명분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새 것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물이 부실하면 왜 옛 것을 없앴느냐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 총회회관 1층의 현실이다. 1층의 휑한 공실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리고 또 얼마의 비용이 추가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활 될수록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론이 재기되고, 의혹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총회유지재단이 공개 입찰을 통해 디자인업체 두로와 3억9780만원에 계약을 맺고 공사를 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총회회관 1층을 생각하면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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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안중근 가족의 비극을 돌아보며
김 훈 작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몇 권 읽은 김 작가의 소설과 수필은 늘 담백하다. 그런데 이 책은 더욱 담백했다. 일체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민족의 영웅으로 대하는 안중근에 대해 이렇게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안중근의 세 자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첫째 아들 분도는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로 키워 달라고 유언했으나 일곱 살에 누군가 건네준 독이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 둘째이자 딸인 현생은 이후 남동생 준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후 그를 위해 마련된 사찰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친일 변절자로 살다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죽었다. 남편 황일청 또한 친일배신자로 낙인찍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된다.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총을 맞고 숨진다. 셋째 준생은 둘째 아들로 30세까지 일제의 감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일제는 그를 회유해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하고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하게했다. 이에 김구는 광복 직후 중경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상하이의 안준생에게 유럽계 세관장이 살던 관사를 내줬다. 그들에게 영혼을 내준 댓가로 난데없는 호강을 누렸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하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들어온다. 그가 왜 가족 없이 혼자 귀국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한 친일행위가 해방된 국가에서 단죄되는 상황을 아내와 자식에게 부담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안준생은 부산 피난지에서 폐결핵을 앓다가 1952년 숨진다. 그의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의박사가 됐다. 안준생은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의사예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 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안중근은 국가의 영웅이지만 가정에게는 재앙이 됐다. 일제의 감시로 가족은 비참하게 살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절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가, 독립투쟁 단체가, 아니면 개인이 안중근의 가족을 돌봤더라면 자식들이 변절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안중근이 사후에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것을 책 말미에 무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안정근, 안공근이 감옥 문 앞에 와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구리하라가 옥리를 보내서 ‘불가하다’라고 통보했다. 안정근, 안공근은 땅을 치며 울었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가서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책 277p). 3월 25일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서른일곱 살의 생일을 맞았다. 아침에 황제는 덕수궁으로 가서 태황제 고종에게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정전에서 생일 하례를 받았다. 소네 통감과 통감부 고위 관리, 내각 대신들, 각국 영사들이 입궐해서 황제의 만수무강과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했다. 황제는 귀빈들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답례했고 시종무관들과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산수유와 매화가 잇달아 피어서 창덕궁의 봄은 화사했다. 후원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책 278p).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서울명동대성당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통감부 관리들과 서양인 기술자들과 신자들이 참례했다. 봄의 햇살이 비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영롱했다. 팔십여명이 영성체했고 예비 신자들이 영세 받고 입교했다(책 278p).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책 279p).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 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책 280p).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내놓고 가정을 포기했는데 세상은 이에 대해 무심하다. 현재도 우리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독립군의 후손들은 비참하게 살고 친일세력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래서 내 두 아들에게 “다시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면 괜히 독립운동하지 말고 친일해라”고 말해야하는 이 현실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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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 날씨가 쌀쌀한데 11월 14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 홀은 후끈 달아올랐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때문이었다. 한장총은 한기총, 한교총, 한기연과 함께 교단연합기관이다. 그러나 큰 존재감이 있는 기관은 아니다. 그런데 상임회장 선거가 합동측의 권순웅 목사와 통합측의 김순미 장로의 경선이 되다보니 난리부르스가됐다. 합동측 총대가 20명인데 모두 참석했다. 먼 지방에서도 빠지지 않고 왔다. 이 선거에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관례에 따라 합동측 직전총회장인 권순웅 목사가 상임회장이 되야하는데 갑자기 통합측의 장로가 출마해 경선이 됐기 때문이다. 직전총회장 출신 합동측 목사와 증경장로부총회장 출신 통합측 장로의 대결이다. 이 배후는 지난번 한교총 회기에 권순웅 목사가 대표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한 모 목사라고 알려졌다. 합동교단이나 권순웅 목사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사람이다. 결국 합동측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권순웅 목사의 당선을 위해 오정호 총회장을 비롯한 증경총회장들과 모든 총대들이 출석해 한표를 행사했고 결국 100대 67로 이겼다. 교단 대표 기관의 장이 장로가 돼서는 안된다는 다른 교단 총대들의 의견도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이제 한바탕의 난리부르스가 끝났다. 잠시 복기를 한다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합동측의 단결력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총대들이 한 마음이 되어 권 목사를 지지함으로써 그 세를 과시하고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두 교단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이날 참석한 합동측 총대들은 자신의 교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주었기에 다행이고 감사한다. 또한 총회 총무를 비롯해 총회 직원까지 동원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두 번째는, 통합 교단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다른 교단도 아니고 합동교단에서 갈려나간 통합측에 의해 벌어졌기에 더욱 합동측 총대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앞에서는 악수의 손을 내밀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합측과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들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해야한다.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통합측은 기회만 되면 어떤 일이라도 꾸밀 수 있기에 이슬람을 대할 때 “사랑하되 경계하라”처럼 그들을 대해야한다. 두 번다시 통합측에 놀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장총 정기총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1시가 넘어 끝났다. 경선 선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다. 이때 합동측 목사 장로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통합측 인사 대부분은 선거에서 지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본전도 못찾은 경선이었다. 차기 대표회장이 될 권순웅 목사의 상임회장 당선을 축하하며 합동교단의 위상과 한장총의 영향력을 높이는 연합회 활동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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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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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 이번 11월 14일에 있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제41회 정기총회가 상임회장 선거 문제로 시끄럽다. 통상 목사가 하던 상임회장에 장로가 경선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상임회장은 차기 회장이 되는데 올해 후보로 주다산교회를 담임하는 권순웅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과 영락교회 장로로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을 역임한 김순미 장로가 나서 경선중이다. 한장총은 1981년 2월 1일 설립됐으며 그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공동 관심사를 협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분열된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필요한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로교회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들은 비록 교단이 갈라져 있으나 서로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 확인과 의식이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대표회장은 1992년 제10회 총회 때 통합측의 한영제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31년만에 통합측이 또 다시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필이면 통합측에 의해 또다시 이 일에 재현되고 있어 연합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참고로 연합기관인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모두 대표는 목사이다.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 대표회장을 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해야하는데 이영훈 목사가 하도록 주도한 인물이 이 일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도 합동교단 증경총회장 권순웅 목사를 “가마니”로 알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사태에는 합동측 인사들도 동조했다는 뒷말이 있으니 교단 연합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정말 “합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만약 통합측이 합동측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합측과는 더 이상의 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단 선언을 해야한다. “보자보자하니 보자기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8회 총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한 고영기 총무는 자신이 종로에서 연합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쓴적이 있고 이것이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고 총무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분담금은 많이 내면서도 자기 자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합동측 교단의 대외 업무 현실이다. 권순웅 목사와 맞서는 김순미 장로는 재벌가로 총대들에게 상당한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로인해 경선 결과를 애측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번에도 권순웅 목사와 합동측이 통합측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면 묵과하지 말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고 연합회 활동 제재를 가해야 하며 그것이 안될시 합동측은 통합측과의 연합활동을 전면 재고하고 중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늘 음모를 획책하는 통합측에 경고하며, 늘 어리석게 당하는 합동측의 자성을 촉구한다. 경선 투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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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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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 합동교단내 교회 목사 사모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있다. 군소교단이나 독립교단을 통해 안수를 받는다. 과거 은퇴를 앞둔 합동측 목사들이 사모를 권사로 임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내가 시무했던 동암교회가 그랬고, 고 최훈 목사가 시무했던 동도교회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동암교회 같은 경우 사모가 권사회 회장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사모들이 목사 안수까지 받고 있다. 결국 사모없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모는 누구인가? 목사의 아내로서 교인들에게는 어머니같고, 언니, 누나같은 역할을 해준다. 남성 목사가 하지 못하는 목회 사역의 한 부분을 사모가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전방에서 목회하는 남편 목사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후방 사역을 사모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과 함께 전방 사역을 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순복음교회 고 조용기 목사 사모도 목사였고, 침례교의 대중적인 목사 장경동 목사 사모도 목사이다. 이처럼 타교단이야 그렇다쳐도 아직 여성목사안수를 금하고 있는 합동교단내에서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과거 장로 제도가 없는 교단이 있었다. 그런데 연합사업을 하다보니 자기는 집사나 남자 권사인데 타교단은 장로가 있어 자기가 열등해 보여 교단과 교회를 옮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교파 구분없이 대부분 장로 제도가 있다. 아무래도 집사나 권사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여서인가 보다. 사모들도 그런가 궁금하다. 왜 사모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단법을 어겨가며, 드러나면 남편 목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목사 안수를 받는가? 물론 이것을 허용해 주는 합동측 목사 남편도 문제긴 문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의 목사 사모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노회가 문제 삼지 않고 쉬쉬하는 것 같다. 그럴려면 교단을 옮기지 왜 합동교단에 있는지 묻고 싶다. 108회 총회는 여성목사안수는 안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엇다. 그러나 선 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하려는가? 사모들이여 자중하시라. 합동측 교단에서 사모가 목사가 되는 것은 일탈이요, 반란이며 또한 치리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합동교단은 각자도생교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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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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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 2004년 한 여성 작가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살한다. 그 여성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이다. 그녀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물 『The Rape of Nanking』(역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신실의 기록)을 1997년에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협박과 위협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난징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군들은 무력한 패잔병들과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먹일 것이 없다는 핑계로 다 도륙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칼로 베고 생매장하거나 불에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여자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불문하고 보는 족족 대낮에도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때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선량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은 날조요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난징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왜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자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거나 배상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반성하는 독일과 너무나 다른 행보이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이나 도덕성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국가이다. 최근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산 어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나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너나 없이 바닷물을 마시고 회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 일본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당했다. 정신대로 끌려가고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과연 자주 국가인가를 의심케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한 작가의 유작을 읽으며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으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근성을 어떻게 드러내는 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없이 여전히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과 이를 방조하는 미국 그리고 그 장단에 춤추는 현 정부를 보며 암담함을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기 싶다”는 책에 있는 경고가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볼 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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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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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 지난 9월 13일 "총회회관 1층 인테리어 감사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반이 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1층은 휑하다. 카페 장소에는 의자 등 집기가 들어왔지만 업체가 선정되지 않았고, 역사관은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총회에 갈 때마다 휑한 모습에 알아보니 카페는 월세가 높아 신청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월 500만원을 예상했다가 계속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월세가 얼마로 내려가야 업자가 나설지 궁금하다. 또한 카페에서 얼마의 수입이 날지 궁금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기 위해 별도의 출입구를 냈다고 하지만 과연 일반인들이 총회건물에 들어와 줄지도 미지수다. 이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결국 총회 재정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뾰족한 수가 있는지나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왜 식당을 내보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어차피 식당에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제 총회에 와서 저렴하게 밥 먹을 식당이 없어 인근의 비싼 식당에서 해결해야한다는 불만의 소리가 있다. 한편 역사관도 이전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과연 제대로 역사를 담아낼지 의문이다.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2013년 새로남기독학교를 개교할 때 건물 1층을 과감하게 학생들은 물론이고 만인을 위한 기독교역사전시관으로 꾸몄다. 그 규모와 전시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총회회관 한쪽 절반에 마련된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이 작은 공간에 무엇을 전시할지 궁금하다.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는 명분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새 것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물이 부실하면 왜 옛 것을 없앴느냐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 총회회관 1층의 현실이다. 1층의 휑한 공실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리고 또 얼마의 비용이 추가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활 될수록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론이 재기되고, 의혹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총회유지재단이 공개 입찰을 통해 디자인업체 두로와 3억9780만원에 계약을 맺고 공사를 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총회회관 1층을 생각하면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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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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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안중근 가족의 비극을 돌아보며
- 김 훈 작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몇 권 읽은 김 작가의 소설과 수필은 늘 담백하다. 그런데 이 책은 더욱 담백했다. 일체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민족의 영웅으로 대하는 안중근에 대해 이렇게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안중근의 세 자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첫째 아들 분도는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로 키워 달라고 유언했으나 일곱 살에 누군가 건네준 독이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 둘째이자 딸인 현생은 이후 남동생 준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후 그를 위해 마련된 사찰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친일 변절자로 살다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죽었다. 남편 황일청 또한 친일배신자로 낙인찍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된다.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총을 맞고 숨진다. 셋째 준생은 둘째 아들로 30세까지 일제의 감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일제는 그를 회유해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하고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하게했다. 이에 김구는 광복 직후 중경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상하이의 안준생에게 유럽계 세관장이 살던 관사를 내줬다. 그들에게 영혼을 내준 댓가로 난데없는 호강을 누렸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하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들어온다. 그가 왜 가족 없이 혼자 귀국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한 친일행위가 해방된 국가에서 단죄되는 상황을 아내와 자식에게 부담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안준생은 부산 피난지에서 폐결핵을 앓다가 1952년 숨진다. 그의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의박사가 됐다. 안준생은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의사예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 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안중근은 국가의 영웅이지만 가정에게는 재앙이 됐다. 일제의 감시로 가족은 비참하게 살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절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가, 독립투쟁 단체가, 아니면 개인이 안중근의 가족을 돌봤더라면 자식들이 변절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안중근이 사후에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것을 책 말미에 무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안정근, 안공근이 감옥 문 앞에 와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구리하라가 옥리를 보내서 ‘불가하다’라고 통보했다. 안정근, 안공근은 땅을 치며 울었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가서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책 277p). 3월 25일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서른일곱 살의 생일을 맞았다. 아침에 황제는 덕수궁으로 가서 태황제 고종에게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정전에서 생일 하례를 받았다. 소네 통감과 통감부 고위 관리, 내각 대신들, 각국 영사들이 입궐해서 황제의 만수무강과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했다. 황제는 귀빈들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답례했고 시종무관들과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산수유와 매화가 잇달아 피어서 창덕궁의 봄은 화사했다. 후원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책 278p).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서울명동대성당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통감부 관리들과 서양인 기술자들과 신자들이 참례했다. 봄의 햇살이 비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영롱했다. 팔십여명이 영성체했고 예비 신자들이 영세 받고 입교했다(책 278p).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책 279p).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 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책 280p).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내놓고 가정을 포기했는데 세상은 이에 대해 무심하다. 현재도 우리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독립군의 후손들은 비참하게 살고 친일세력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래서 내 두 아들에게 “다시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면 괜히 독립운동하지 말고 친일해라”고 말해야하는 이 현실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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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 날씨가 쌀쌀한데 11월 14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 홀은 후끈 달아올랐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때문이었다. 한장총은 한기총, 한교총, 한기연과 함께 교단연합기관이다. 그러나 큰 존재감이 있는 기관은 아니다. 그런데 상임회장 선거가 합동측의 권순웅 목사와 통합측의 김순미 장로의 경선이 되다보니 난리부르스가됐다. 합동측 총대가 20명인데 모두 참석했다. 먼 지방에서도 빠지지 않고 왔다. 이 선거에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관례에 따라 합동측 직전총회장인 권순웅 목사가 상임회장이 되야하는데 갑자기 통합측의 장로가 출마해 경선이 됐기 때문이다. 직전총회장 출신 합동측 목사와 증경장로부총회장 출신 통합측 장로의 대결이다. 이 배후는 지난번 한교총 회기에 권순웅 목사가 대표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한 모 목사라고 알려졌다. 합동교단이나 권순웅 목사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사람이다. 결국 합동측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권순웅 목사의 당선을 위해 오정호 총회장을 비롯한 증경총회장들과 모든 총대들이 출석해 한표를 행사했고 결국 100대 67로 이겼다. 교단 대표 기관의 장이 장로가 돼서는 안된다는 다른 교단 총대들의 의견도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이제 한바탕의 난리부르스가 끝났다. 잠시 복기를 한다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합동측의 단결력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총대들이 한 마음이 되어 권 목사를 지지함으로써 그 세를 과시하고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두 교단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이날 참석한 합동측 총대들은 자신의 교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주었기에 다행이고 감사한다. 또한 총회 총무를 비롯해 총회 직원까지 동원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두 번째는, 통합 교단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다른 교단도 아니고 합동교단에서 갈려나간 통합측에 의해 벌어졌기에 더욱 합동측 총대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앞에서는 악수의 손을 내밀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합측과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들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해야한다.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통합측은 기회만 되면 어떤 일이라도 꾸밀 수 있기에 이슬람을 대할 때 “사랑하되 경계하라”처럼 그들을 대해야한다. 두 번다시 통합측에 놀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장총 정기총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1시가 넘어 끝났다. 경선 선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다. 이때 합동측 목사 장로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통합측 인사 대부분은 선거에서 지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본전도 못찾은 경선이었다. 차기 대표회장이 될 권순웅 목사의 상임회장 당선을 축하하며 합동교단의 위상과 한장총의 영향력을 높이는 연합회 활동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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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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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 이번 11월 14일에 있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제41회 정기총회가 상임회장 선거 문제로 시끄럽다. 통상 목사가 하던 상임회장에 장로가 경선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상임회장은 차기 회장이 되는데 올해 후보로 주다산교회를 담임하는 권순웅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과 영락교회 장로로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을 역임한 김순미 장로가 나서 경선중이다. 한장총은 1981년 2월 1일 설립됐으며 그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공동 관심사를 협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분열된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필요한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로교회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들은 비록 교단이 갈라져 있으나 서로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 확인과 의식이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대표회장은 1992년 제10회 총회 때 통합측의 한영제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31년만에 통합측이 또 다시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필이면 통합측에 의해 또다시 이 일에 재현되고 있어 연합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참고로 연합기관인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모두 대표는 목사이다.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 대표회장을 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해야하는데 이영훈 목사가 하도록 주도한 인물이 이 일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도 합동교단 증경총회장 권순웅 목사를 “가마니”로 알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사태에는 합동측 인사들도 동조했다는 뒷말이 있으니 교단 연합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정말 “합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만약 통합측이 합동측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합측과는 더 이상의 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단 선언을 해야한다. “보자보자하니 보자기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8회 총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한 고영기 총무는 자신이 종로에서 연합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쓴적이 있고 이것이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고 총무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분담금은 많이 내면서도 자기 자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합동측 교단의 대외 업무 현실이다. 권순웅 목사와 맞서는 김순미 장로는 재벌가로 총대들에게 상당한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로인해 경선 결과를 애측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번에도 권순웅 목사와 합동측이 통합측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면 묵과하지 말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고 연합회 활동 제재를 가해야 하며 그것이 안될시 합동측은 통합측과의 연합활동을 전면 재고하고 중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늘 음모를 획책하는 통합측에 경고하며, 늘 어리석게 당하는 합동측의 자성을 촉구한다. 경선 투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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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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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 합동교단내 교회 목사 사모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있다. 군소교단이나 독립교단을 통해 안수를 받는다. 과거 은퇴를 앞둔 합동측 목사들이 사모를 권사로 임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내가 시무했던 동암교회가 그랬고, 고 최훈 목사가 시무했던 동도교회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동암교회 같은 경우 사모가 권사회 회장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사모들이 목사 안수까지 받고 있다. 결국 사모없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모는 누구인가? 목사의 아내로서 교인들에게는 어머니같고, 언니, 누나같은 역할을 해준다. 남성 목사가 하지 못하는 목회 사역의 한 부분을 사모가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전방에서 목회하는 남편 목사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후방 사역을 사모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과 함께 전방 사역을 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순복음교회 고 조용기 목사 사모도 목사였고, 침례교의 대중적인 목사 장경동 목사 사모도 목사이다. 이처럼 타교단이야 그렇다쳐도 아직 여성목사안수를 금하고 있는 합동교단내에서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과거 장로 제도가 없는 교단이 있었다. 그런데 연합사업을 하다보니 자기는 집사나 남자 권사인데 타교단은 장로가 있어 자기가 열등해 보여 교단과 교회를 옮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교파 구분없이 대부분 장로 제도가 있다. 아무래도 집사나 권사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여서인가 보다. 사모들도 그런가 궁금하다. 왜 사모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단법을 어겨가며, 드러나면 남편 목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목사 안수를 받는가? 물론 이것을 허용해 주는 합동측 목사 남편도 문제긴 문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의 목사 사모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노회가 문제 삼지 않고 쉬쉬하는 것 같다. 그럴려면 교단을 옮기지 왜 합동교단에 있는지 묻고 싶다. 108회 총회는 여성목사안수는 안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엇다. 그러나 선 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하려는가? 사모들이여 자중하시라. 합동측 교단에서 사모가 목사가 되는 것은 일탈이요, 반란이며 또한 치리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합동교단은 각자도생교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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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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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 2004년 한 여성 작가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살한다. 그 여성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이다. 그녀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물 『The Rape of Nanking』(역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신실의 기록)을 1997년에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협박과 위협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난징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군들은 무력한 패잔병들과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먹일 것이 없다는 핑계로 다 도륙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칼로 베고 생매장하거나 불에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여자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불문하고 보는 족족 대낮에도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때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선량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은 날조요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난징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왜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자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거나 배상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반성하는 독일과 너무나 다른 행보이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이나 도덕성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국가이다. 최근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산 어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나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너나 없이 바닷물을 마시고 회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 일본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당했다. 정신대로 끌려가고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과연 자주 국가인가를 의심케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한 작가의 유작을 읽으며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으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근성을 어떻게 드러내는 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없이 여전히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과 이를 방조하는 미국 그리고 그 장단에 춤추는 현 정부를 보며 암담함을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기 싶다”는 책에 있는 경고가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볼 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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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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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 지난 9월 13일 "총회회관 1층 인테리어 감사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반이 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1층은 휑하다. 카페 장소에는 의자 등 집기가 들어왔지만 업체가 선정되지 않았고, 역사관은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총회에 갈 때마다 휑한 모습에 알아보니 카페는 월세가 높아 신청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월 500만원을 예상했다가 계속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월세가 얼마로 내려가야 업자가 나설지 궁금하다. 또한 카페에서 얼마의 수입이 날지 궁금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기 위해 별도의 출입구를 냈다고 하지만 과연 일반인들이 총회건물에 들어와 줄지도 미지수다. 이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결국 총회 재정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뾰족한 수가 있는지나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왜 식당을 내보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어차피 식당에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제 총회에 와서 저렴하게 밥 먹을 식당이 없어 인근의 비싼 식당에서 해결해야한다는 불만의 소리가 있다. 한편 역사관도 이전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과연 제대로 역사를 담아낼지 의문이다.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2013년 새로남기독학교를 개교할 때 건물 1층을 과감하게 학생들은 물론이고 만인을 위한 기독교역사전시관으로 꾸몄다. 그 규모와 전시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총회회관 한쪽 절반에 마련된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이 작은 공간에 무엇을 전시할지 궁금하다.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는 명분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새 것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물이 부실하면 왜 옛 것을 없앴느냐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 총회회관 1층의 현실이다. 1층의 휑한 공실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리고 또 얼마의 비용이 추가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활 될수록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론이 재기되고, 의혹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총회유지재단이 공개 입찰을 통해 디자인업체 두로와 3억9780만원에 계약을 맺고 공사를 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총회회관 1층을 생각하면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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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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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안중근 가족의 비극을 돌아보며
- 김 훈 작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몇 권 읽은 김 작가의 소설과 수필은 늘 담백하다. 그런데 이 책은 더욱 담백했다. 일체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민족의 영웅으로 대하는 안중근에 대해 이렇게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안중근의 세 자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첫째 아들 분도는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로 키워 달라고 유언했으나 일곱 살에 누군가 건네준 독이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 둘째이자 딸인 현생은 이후 남동생 준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후 그를 위해 마련된 사찰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친일 변절자로 살다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죽었다. 남편 황일청 또한 친일배신자로 낙인찍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된다.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총을 맞고 숨진다. 셋째 준생은 둘째 아들로 30세까지 일제의 감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일제는 그를 회유해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하고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하게했다. 이에 김구는 광복 직후 중경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상하이의 안준생에게 유럽계 세관장이 살던 관사를 내줬다. 그들에게 영혼을 내준 댓가로 난데없는 호강을 누렸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하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들어온다. 그가 왜 가족 없이 혼자 귀국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한 친일행위가 해방된 국가에서 단죄되는 상황을 아내와 자식에게 부담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안준생은 부산 피난지에서 폐결핵을 앓다가 1952년 숨진다. 그의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의박사가 됐다. 안준생은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의사예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 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안중근은 국가의 영웅이지만 가정에게는 재앙이 됐다. 일제의 감시로 가족은 비참하게 살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절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가, 독립투쟁 단체가, 아니면 개인이 안중근의 가족을 돌봤더라면 자식들이 변절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안중근이 사후에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것을 책 말미에 무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안정근, 안공근이 감옥 문 앞에 와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구리하라가 옥리를 보내서 ‘불가하다’라고 통보했다. 안정근, 안공근은 땅을 치며 울었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가서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책 277p). 3월 25일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서른일곱 살의 생일을 맞았다. 아침에 황제는 덕수궁으로 가서 태황제 고종에게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정전에서 생일 하례를 받았다. 소네 통감과 통감부 고위 관리, 내각 대신들, 각국 영사들이 입궐해서 황제의 만수무강과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했다. 황제는 귀빈들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답례했고 시종무관들과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산수유와 매화가 잇달아 피어서 창덕궁의 봄은 화사했다. 후원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책 278p).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서울명동대성당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통감부 관리들과 서양인 기술자들과 신자들이 참례했다. 봄의 햇살이 비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영롱했다. 팔십여명이 영성체했고 예비 신자들이 영세 받고 입교했다(책 278p).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책 279p).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 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책 280p).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내놓고 가정을 포기했는데 세상은 이에 대해 무심하다. 현재도 우리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독립군의 후손들은 비참하게 살고 친일세력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래서 내 두 아들에게 “다시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면 괜히 독립운동하지 말고 친일해라”고 말해야하는 이 현실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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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안중근 가족의 비극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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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Why so serious?
- 기자가 되면서 남의 얼굴만 찍는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표정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며 타이밍을 기다리고 이때다 싶으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카메라의 액정을 통해 결과물을 확인한다. 이때 원하는대로 나오면 한장으로 마무리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계속해서 찍어야한다. 총회 인물 중에 사진 찍기 곤란한 인물들이 몇 있다. 자세가 비뚤거나, 머리가 비뚤거나 또는 얼굴 표정이 밝지 못하거나, 정면을 안보고 좌우로 시선을 두는 경우 등이다. 그러면 사진 한 장 찍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날 나도 모르게 남에 의해 사진에 찍힌 적이 있다. 보내준 사진을 보고 놀랬다. 표정이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취재장에서 오정호 총회장이 갑자기 취재 기자들을 앞으로 불러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이 장면을 누군가 찍어 보내줬는데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심각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으며 사진을 보이면서 내 표정이 이상하게 찍혔다고 하니 “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한다. 큰 충격을 받았다. 하긴 일상의 내 표정을 내가 볼일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누군가는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그래야겠다. 어느 배트맨 영화에서 죠커가 말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Why so serious?” 난 왜 이리 심각한 얼굴이 됐을까? 웃는 얼굴로 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내 표정을 찍어보니 여전히 심각하다. 죠커가 비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Why so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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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Why so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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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박성규 총신대학 총장의 강점
- 17년째 부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성규 목사가 총신대 총장으로 나선다는 소문이 돌았다. 통상 교수들이 하는 총장을 목회만하던 목사가 했던 경우는 앞서 2번 있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3번째로 목사 총장이 나올 수 있는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고, 박성규 목사를 밀고 있다고 의심받는 총회 목사들이 속한 교갱협에 대해 “너희들이 다 해먹느냐?”는 비난도 있었고, 일부 부전교회교인들의 반대도 있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박성규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사임했고, 총장에 도전하는 4명의 현직 교수와 경쟁했다. 이후 3명으로 압축된 가운데 최종 2명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총장에 당선됐다. 이후 총신대학은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총신신대원 전액 장학금을 목표로 박성규 총장이 뛰고 있는 가운데 총장 취임식 당일 총신신대원 80회 동창들이 동기의 총장 취임을 축하하며 1억 2천만원을 발전기금으로 내놨고, 최근 오정호 총회장은 10억을 전달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학교를 위해 헌신하는 가운데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가? 바로 박성규 총장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과거 2명의 목사 총장은 자기 정치를 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총신대학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박성규 총장은 소위 “정치꾼”이 아니다. 오직 모교 총신을 살리고자하는 마음으로 부산의 대표적인 부전교회를 사임했고, 3년만 있으면 원로목사가 될 수 있는 권리도 내려놨다. 그리고 앉으나 서나 어떻게하면 총신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성장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발로 뛰고 있다. 박성규 총장을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그 머리 속에 총신에 대한 꿈과 비전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수치와 근거를 가지고 총신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그의 열정에 감동을 받고 나도 무언가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그래서 박성규 총장을 만날 때는 조심해야한다. 그 열정에 전염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박성규 총장이 최근 『참된 장로』(익투스)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 안에는 그동안의 본인 목회 경험이 자주 등장한다. 내용이 학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오랫동안 목회자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안수집사, 권사 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책을 쓸 계획이다. 총신을 다닐 때 김의원 교수가 “학자가 될 사람과 목회자가 될 사람을 구분해서 가르쳐야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신대원생 대부분은 목회를 할 사람이다. 그런데 교수들은 공부만 한 분들이다. 그래서 목회의 실제에 대해 배우는 것이 미흡했다. 이전에 장신은 장례식 염하는 것도 실습한다는 말도 들었다. 목회의 실제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심방에 대해서도, 장례식 집례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전도사 생활을 하며 담임목사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웠을 뿐이다. 이처럼 총신은 목회 실제에 약하다. 그런면에서 박성규 총장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비록 바쁜 총장일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는다해도 그동안 배운 것과 목회한 것을 종합해 목회 실제에 관련한 책을 저술해야한다. 그 첫 번째 책이 이번에 발간된 직분자 시리즈 1인 『참된 장로』(익투스)이다. 이후 목회 전반에 대한 책을 써주기를 바란다. 목회 행정, 당회 운영, 교회 건축 등등 그동안 박성규 총장이 목회자로 있으면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을 학문적인 것과 잘 섞어서 책을 만들어 준다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총신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를 배출하는 곳이다. 목회를 위해 성경신학, 조직신학 등 많은 것들을 배워야하지만 무엇보다 목회 실제에 대한 것을 가르쳐야한다. 그렇지 않기에 정작 총신을 졸업한 후 이곳저곳 세미나를 기웃거리며 목회에 대한 것을 배우는 웃픈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직분자 시리즈 1인 『참된 장로』를 읽으면서 이 책은 목회 경험자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박성규 총장의 그 동안의 학문 여정이 함께 녹아 있는 수준 높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목회학 박사와 담임목사라는 두 가지의 경험이 잘 어우러진 질 높은 이 책의 출간을 이어 앞으로도 현장 목회를 위한 좋은 책을 계속해서 저술해 줄 것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이것이 목회자 출신인 박성규 총장이 목회자를 배출해야할 총신대학의 총장으로서 가지는 그만의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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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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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박성규 총신대학 총장의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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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총회와 총신, 비정상의 정상화
-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약속을 지켰다. 총회장 첫 공식 행보로 총신대를 방문하기로 약속했었다. 오 총회장은 지난 10월 10일 오전 총신대를 방문해 학우들을 격려하고 학교발전기금으로 10억을 전달해 큰 박수를 받았다. 연이어 오후에는 총회 임원들과 양지 총신신대원 기숙사 뒤편에 있는 소래교회를 찾아 간절하게 기도한 후 신대원 교수들을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 그리고 10월 17일 오전에 신대원 80회 동기들과 함께 총신신대원을 방문해 설교하며 교수들에 대한 존경과 원우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 오정호 총회장이 늘 주장하는 것은 ‘원팀’으로, 총회와 총신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이미 108회 총회 현장에서 총신대학 화종부 이사장, 박성규 총장의 양손을 치켜들며 외쳤던 것이다. 나는 총회 현장에서, 총신대와 신학대학원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남다른 감회를 가졌다. 나는 1985년 총신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군목후보생이라 휴학하지 않고 1989년 신대원에 입학해 1992년 2월 졸업했다. 내리 7년을 총신에서 공부했다. 그런 가운데 학내 문제로 또는 총회 문제로 자주 수업거부를 하거나 농성하고 총회 현장을 찾아 총대들에게 호소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구체적으로 어느 문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때 당시는 신학도로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학내, 총회 문제로 학생이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공부를 해야하는데 공부를 할 수 없는 여건이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말이다. 졸업 이후에는 군목으로, 부목으로, 담임으로 목회하면서 학교나 총회 일에 관심 둘 여력이 없었다. 그 사이에 김영우 총장으로 인해 학교가 어려웠고 자격 미달의 총회장으로 총회가 시끄러웠지만 총회 정치를 하지 않는 입장에서 그런 일에 크게 관심 갖지 않았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로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분들이 희생할 때 나는 그 사태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관심 갖지도 못했다. 이때 가장 많이 희생 당한 것은 결국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학생일 것이다. 오정호 총회장은 지난 17일 총신신대원에서 설교를 하면서 서두에 자신과 총신을 다니고 있었던 아들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저는 80회 제 아들은 113회입니다. 어느 날 제 아들이 저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뭐 하는 겁니까? 아버지가 책임을 지세요. 그래서 내가 아들아 너무 심하지 않냐? 나는 총회장도 아니고 이사도 아닌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 그러면서 “우리 학우들의 주님 앞에 대한 애절함과 또 우리 교수님들 가운데 우리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서 몸을 던진 분들로 인해 이제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총신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 뿐만 아니라 후배들도 학내와 총회 문제로 제대로 수업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비정상적인 때는 지나갔다. 총회와 총신이 정상화되고 있다. 오 총회장은 총신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수들을 존중하며 학생들을 사랑하고 물질로 구체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과거처럼 총회가 총신을 어렵게하는 일을 오정호 총회장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총장도 학교를 세워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17일 예배 후 총신신대원 80회 동기 모임에서 80회 박성규 총장은 “과거 김인환 총장 때 월 3000원 모금 회원이 10만명이라 30억원의 기금이 모였었는데 학내사태가 벌어지면서 회원이 2만여명으로 준 것”을 언급했다. 학교가 혼란스러워지면 실망하게 되어 기금 후원이 중단된다. 그러나 박성규 총장 취임 이후 기금 운동이 많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것은 박성규 신임 총장을 믿고 신뢰한다는 증거이다. 박 총장은 본인도 이미 1000만원을 발전기금으로 냈고 매월 50만원을 내기로 작정 했다는 것을 밝히고, 앞으로 월 1만원 후원 회원 10만명을 모으는 것이 목표이고 각 교회별로 월 10만원, 노회별로 월 10만원을 후원해 주기를 바라고, 어느 기업가가 100억을 후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총회와 총신이 과거의 비정상화를 벗어나 이제 정상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총신대, 총신신학대학원 출신인 필자는 너무나 감격스럽다. 과거 학창 시절 학내, 총회 문제로 수업을 듣지 못하던 때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총회와 총신을 어지럽혔던 인사들은 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총회와 총신의 정상화를 이룬 오정호 총회장과 박성규 총장에 대해 후배와 동문의 입장에서 감사와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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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총회와 총신, 비정상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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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다단계에 빠진 교인
- 전에 있었던 교회 모 권사가 다단계에 빠져 교회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목회할 때도 어떤 권사가 두 권사에게 다단계를 권해 한 권사는 같이 하고, 다른 권사는 남편 집사가 난리를 쳐서 그만둔 적이 있었다. 목사로서 교인들이 다단계를 할 때 불러다가 “하지 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설교를 할 때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라고 에둘러서 말했었다. 물론 그런다고 다단계에 빠진 교인들이 그것을 그만 두지는 않았었다. 가족들이 난리를 쳐도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봤다. 근근이 벌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됐다. 집값이 장난이 아니고 생활비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보니 다단계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러나 다단계는 결국 사기이며 금전적인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다단계에 빠져 교회를 떠난 권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내쫓는데 앞장 선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3년도 안돼 다단계에 빠져 교회를 떠났으니 참 할 말이 없다. 교회를 떠난지 3년이 되가면서 나는 떠난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간간이 풍문으로 들리는 소식을 접할 뿐이다. 나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교인들이 곱게 보일리 없다. 교회를 떠나며 나는 아비멜렉을 생각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 자식으로 자기 고향 사람들과 공모해 자기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고 “자칭” 왕이 됐다. 그러나 삼년만에 그들의 공조는 깨지고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다 아비멜렉은 비참하게 죽었다. 나를 쫓아내고 그들은 싸움에서 이긴 양 들떠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간에 이견이 생겨 곧 몇 가정이 떠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자체 존립이 어려워 다른 교회와 합병하고자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기득권은 내려놓지 않을려고 하고 있다. 과연 합병이 제대로 될지나 모르겠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고 축복하지도 않는다. 내 기억 속에서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방송국에서 아이돌 지망생들을 모아놓고 경연하는 프로그램을 했다. 아내가 불러 가보니 나를 반대해놓고 서로 이견이 생겨 떠난 한 안수집사 가정의 딸이 출연했다. 어릴 때부터 아이돌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준비하더니 몇 년 새 몰라보게 성장해 출연한 것이다. 나는 “부모는 별로라도 딸이라도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당한 것이 분했는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다 경선에서 탈락했다. 나를 내쫓을 때 4명의 장로 중 1명은 이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부인 집사가 이 일에 관여하면 이혼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장로 부부가 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내쫓는 일에는 적극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교회를 옮겼다. 나는 이 부부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이 없다. 그러나 가끔 결혼한 큰 딸의 근황이 페이스북에 랜덤으로 올라오면 이 아이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말이다. 다 잊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이전 교회 소식을 들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위에 계신 분이 다 보고 계시니 알아서 하실 것이다. 내가 부족했다면 나를 책망하실 것이고 그들이 부족했다면 그들을 책망할 것이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이 하나같이 씁쓸한 것이라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 어쨌든 나는 15년간 그들의 담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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