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그대의 차가운 손-한강 저자(글), 문학과지성사 · 2002년


9788932013046.jpg

 

이 책은 저자가 2002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지금부터 24년 전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다. 석고 작업을 하는 주인공이 만난 두 여자를 통해 삶의 틀, 아픔의 틀을 깨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가들의 역량은 역시 대단하다. 한강 작가의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신문사로고2.jpg

 

"나, 앞으로 여기 안 와요."

그것은 조금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결의가 들어간 말씨라는 점만 달랐다. "이제부터 다이어트할 거예요. 휴학하구, 다음 학기에 놀랄 만한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 눈빛두 그때쯤은 달라져 있겠죠." L의 얼굴은 진지했고, 차라리 결연했다. 그녀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 아이에게 이런 결단력이, 강(p. 121)한 의지가 있었나. "아저씨가 그랬죠. 내가 예쁘다구. 살이 찐 다음부터, 난 한 번도 내가 예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해봤어요. 그런데 아저씨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까 행복했어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나도 모르게 자신감두 생겼구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내 욕심이 지나친 건 아니겠죠. 그 사람 말예요. 그 사람이 나한테 예쁘다구 말해 주면, 그날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가냘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건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잠시 후 그녀의 거대한 몸이 떠나가자, 작업실은 예전보다 넓고 헐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을 뿐, 더 이상 배웅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짧은 헤어짐의 절차조차 그녀에게는 지루하고 갑갑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3시쯤 나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다. 불을 켜고 찬 물 한 잔을 마신 뒤. 나는 뜻 없이 작업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농담 삼아 말했던 대로, 고개를 웅크리고 L의 틀집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잡았던 포즈대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틀집은 안락 하였다. 누군가 틀집의 앞면을 끌어다 붙여주기만 하면 관(棺)은 완성될 것이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는 그녀의 등이 닿(p. 122)았던 실팍한 곡선 위로 몸을 기댔다.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감은 눈 위로 겹쳐진 것은 L의 눈이었다. 언제나 젖어 있는 것 같던 그녀의 말간 두 눈이 어룽어룽 내 이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조심스럽게 틀집 밖으로 나오고 나자 나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누구든, 자신의 관 속에 미리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낡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나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아침을 기다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공간에 버티고 있었던 L의 육중한 양감이 떠나갔음을,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염려했던 환멸은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3년이 지난 뒤 그녀를 우연히, 그렇듯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p. 123).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p. 312)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p. 313).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 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 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p. 328)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p. 329).

 

KakaoTalk_20230919_112218604.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북토크373】 각자에게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