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정혜신의 사람 공부 - 정혜신 저자(글), 창비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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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때 정부가 이것을 어떻게 덮을려고 어떤 만행을 했는지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결국 박근혜는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됐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한 집단과 인간 군상들이 있었다. 반면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아예 거처를 안산으로 옮긴 이 책 저자같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많이 동의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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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을 떠나고 한참 지나서야 그걸 알았다. 진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입체적인 탐구에 게을러도 그닥 불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의학 지식과 약 물치료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상담도 잘하고 싶었고 어떤 사람의 핵심적인 문제를 빠르게 파악해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도 싶었다.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의 비대칭적 구도와 지나치게 의료(p. 10)적이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한 인간의 핵심에 제대로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료실의 환자는 의료적• 병리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철학적 존재이자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영적 존재이자 예술적 존재이고 물질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신과 진료실 구조 안에서 자신의 '환자'를 그렇게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진료실 구조 안에 있을 때 나도 그랬다. 진료실은 내 의식과 인식을 제한했다. 물론 내담자도 제한당했을 것이다.

진료실 무용론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진료실 안의 심리적 구도와 공기를 바꿔야만 그 안에 있는 의사나 환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극단적일 정도로 진료실 문제를 거론하는 건 진료실을 떠난 후 내가 정신의학 방면의 직업인으로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이다. 진료실이 아닌 세팅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면서 나는 삼십 대의 안개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상담 후의 개운(p. 11)함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내담자들이 느끼는 홀가분함도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고 피부로 느낀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 후보인 정치인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을 때, 고문생존자나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서 촛농 눈물 같은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무차별하다. 한 개별적 인간에게만 집중한다. 그런 순간 나는 예전 진료실의 의사였을 때보다 유능하다. 나와 상담한 이들의 변화와 반응을 보면서 그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진료실 밖 현장은 나의 스승이다. 그런 스승들로부터 사사받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더 따뜻하고 더 편안하고 더 수월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정신과 후배들에게도 말하곤 한다. 진짜 실력을 키우려면 병원에 있지 말고 현장으로 나오라고. 흰 가운도 없고 전문가 아우라를 지켜주는 어떤 장치도 없는 곳에서 수평적인 관계의(p. 12) 개별적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스승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통찰이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 오랜 현장 치유자의 경험으로 가지게 된, 신념에 가까운 믿음이다. 나의 진짜 사람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13).

 

상담이란 건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갖는 깊고 집요한 감정은 다름아닌 죄의식입니다. 내가 죽인 거다, 나 때문이다, 그런 감정과 생각에 마치 늪처럼 빠져들어요. 내가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더 힘있는 부모였더라면, 내가 안산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 이런 끝도 없는 '내 탓'으로 초주검이 됩니다. 생존학생이나 유가족들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죠. 그런 죄의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피해자들의 이런 어마어마한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한 상(p. 33)태에서는 심리치유가 한발짝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사고 초기의 심리치유 대책들은 그러니까 피해자 개인에게는 와닿지 않는 행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p. 35).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는 '외부적 요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유지해오던 심적•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이에요. '심리내적 요인'(자기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퍽치기를 당해서 머리를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p. 42) 하게 된 사람이지 본래 고혈압 환자였다가 중풍으로 쓰러진 사람이 아니란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마치 원래부터 환자였던 사람 취급을 하면서 치료를 하려 들면 안 되는 거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지 않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환자화(化)하는 듯한 전문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자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봅니다. 멀쩡했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그렇게 돼버렸고, 내 삶은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버렸어요.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다 망가져버린 느낌(p. 43)을 가지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명백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 라고 느껴야 무너져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갑자기 자신을 정신과 환자 취급하는 전문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로 봅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나까지 망가졌다고 느끼면 피해자는 더 버틸 기력이 없어요. 결국엔 삶을 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트라우마 피해자, 생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들을 대하는 모든 치유행위의 전제가 되어야 해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p. 44)는 거예요. 그 사람이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과 같아요. 고백 하건대 정신과 의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을 환자로 치환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전문가들이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데 이런 시각은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장애물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대해서 다 알고 깨우친 자, 너는 병들고 모르는 자,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와라. 이건 명백하게 반치유적인 시각이에요. 의사가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으면 쉽게 그렇게 됩니다.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거예요. 저도 여태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하고 성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p. 45).

 

그렇다면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상담받으라고 등 떠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상황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극도의 혼돈 속에 있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가 구축해온 모든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지만 나 자신까지 무너진 건 아니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심리적•물리적 폐허 속에서도 그 사실을 최소한의 기반으로 삼아서 일어날 수 있습니(p. 46)다. 그 힘이 있어야, 그게 살아 있어야 전문가의 도움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자기면역력이 전혀 없으면 의 사가 아무리 좋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병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p. 47).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상황에 대한 자기주도권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비로소 상황에 대한 자기통제력이 생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문제에 대해 전문가와 상의할 수도 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불안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자기 의지가 그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때는 예측 불가능할 때 입니다. 혼돈과 불안이 극심해지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고, 그에 압도되면 마침내 탈진하고 말아요. 무력한 상태로 추락하는 거지요. 이런 상황으로 치닫지 않 도록 막는 것이 트라우마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할 일입(p.48)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치유는 시작도 할 수 없어요(p. 49).

 

'상담이란 모름지기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거나 '내 전공은 무슨무슨 심리치료 기법이다'라며 상황보다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몰입이 더 강한 경우가 현장에서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을 더 쓸모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이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전문지식이 현장에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다면 그때의 전문가란 무엇일까요. 그가 그간 공부해왔던 공부는 그럼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본래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건강성, 온전함이 있습니다. 저는 병원 상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던(p. 55) 시절보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확신이 더 또렷해졌어요.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다 벼랑 끝 나뭇가지에 간신히 걸린 듯한 아득한 존재들을 만나면서, 어쩌다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곳에 처박힌 삶들을 접하면서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인했어요. 그것이 궁극적인 치유의 동력이자 치유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젠 한톨의 의심도 없이 확신합니다. 그래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 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있다면 오로지 그걸 하는 데 모두 쏟아야 한다고 느껴요. 내 지식, 내 힘, 내 명민함, 나의 분석과 계몽, 내가 배운 치유기법 등으로 사람이 구해지지 않더라고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능적인 존재가 아니니까요(p. 56).

 

아무리 빼어난 이론이라도 이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 적인 치유적 태도라 생각해요. 울어야 할 상황인데 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복잡하고 초조한 마음, 자신에 대해 드는 이상한 생각들, 그런 것들을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 어야 편안하게 울 수 있어요. 울어야 한다고, 안 우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저절로 울게 되어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론 너머의 이론이에요. 그런데 치유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 이론적인 틀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공부한 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거예요. 공부가 덫이 되는 거죠.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 사람들, 그런 지식이 많은 사람(p. 72)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p. 73).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를 원한다면 우선 자격증에 대한 이상화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요. 사실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자격증 중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격증이나 학위, 자기 실력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있는 거죠. 우리나라에서 심리상담과 관련한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별도의 수련 기간이 따로 있고요. 그 끝에 얻는 것이 관련 자격증입니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어도 직업적 전망이 매우 암울한 수준인 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열매가 없는 길을 다른 분야보다 더(p. 122) 오래, 더 많은 비용을 들이며 공부하다보니 자기가 가진 자격증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그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보수화 경향이 더 강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매우 심하게 저항할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한 공부, 내 자격증의 효용성 자체에 더 많이 몰두하기 쉽습니다. 내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생생하고 뜨거운 집중과 주목 없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요. 전문가 집단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그동안 현장에서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접했고 그러면서 깨달은 경험칙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진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너무 고생스럽게 학위를 따는 건 하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의미없다는 게 아니고 자격증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p. 123) 봐왔습니다. 학문과 학위에 대한 이상화 또는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낼 수 있다면 진짜 공부에 접근하는 것이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합니다(p. 124).

 

Q. 세월호 참사와 같은 트라우마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문제와는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트라우마에 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없을까요?

 

A. 유가족 부모들이 아이가 떠났다는 걸 빨리 인정해야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도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많은 분들이 합니다. 그런 얘기들 때문에 유가족들이 계속 상처를 받고요. 그게 왜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지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억이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힌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억이란 끊어낸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죠. 사고가 나서 다리나 팔을 절단한 사람이 수술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나면 절단해서 없어진 부분에 통증을 호소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걸 '환상통'이라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없어졌어도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있는 거죠. 기(p. 134)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적으로 종료되었다고 마음에서도 딱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나 컴퓨터죠.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한 집단은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주고 다른 한 집단은 결말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수개월 뒤에 이 두 집단에게 그때 봤던 영화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집단이 더 분명하게 기억할까요?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집단이 영화에 대해 더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집단은 처음부터 결말 까지 다 보았기 때문에 완성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은 완성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결말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는 거죠.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멈춰 있게 되고요. 모든 인간은 완료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갑자기 자녀와의 관계가 뚝 끊어져버린 거예요(p. 135). 그러니 완료되지 않고 도중에 중단된 그 관계를 마음 안 에서 충분히 완료할 수 있도록 곁에서 심리적으로 도와줘야 해요. 그래야 이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도의 과정이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애도하려고 하면 불안해서 막아요. '이젠 그만 울어야지, 이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해요. 어떻게 보면 유가족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없어요. 그런데 누구하고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면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또 곱씹게 되죠. 결국 평생 그 기억 언저리에서 배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이 아이에 대해 더 얘기하고, 더 많이 느끼게 해서 마음속에서 완료되지 않고 중단된 것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해요(p. 136).

 

Q. 전공서적을 모두 정리하고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만 남겼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데 시집과 소설 같은 문학책이 도움이 되나요?

 

A. 그럼요. 심리학 공부를 하다보면 여러 심리학자들의 이론, 그들이 주창한 개념과 틀을 중심으로 사람을 분석 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이론과 개념이 전부인 것처럼 절대화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사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전문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탁월하고 근본적인 이론이라 해도 어느 한 학자의 개념과 틀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틀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얼마나 많고 깊은데요. 사람을 깊이 접하는 시간이 많아 질수록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p. 143).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어둠 속을 걸을 때 손에 쥘 수 있는 지팡이가 있으면 그에 의지해서 주위를 천천히 더듬으면서 감을 잡고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어둠 속에서 내 시력으로도 주위를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면 지팡이 끝으로만 세상을 인지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 눈을 통해서 내 주변이 어떠한지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세상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도구가 심리학 지식이라면, '내 시력'으로 세상을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강력한 도구가 문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분적이기보다 통합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입체적 입니다. 인간을 유형으로 말하지 않고 한 인간의 개별성에 끝까지 집중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은 인간에 대한 치유적 접근에 적합한 도구입니다. 심리학 공부는 지팡이 역할로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p. 144). 

정신의학, 심리학 분야도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 중심, 학문과 학파 중심의 전문가가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 중심의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전문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치료가 아닌 치유의 영역이라 명명했습니다. 치유의 영역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죽기 전날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특급호텔의 요리를 꼽는 사람은 없습니다. 엄마가 해주었던 김치찌개나 어릴 때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요. 전문가(p. 149)적 치료가 칠성급 호텔의 요리라면 엄마나 외할머니의 밥상이 치유입니다. 우리가 모두 요리사 자격증을 가질 수 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리를 못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집밥을 오래 못 먹으면 심리적으로 황폐해집니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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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46】 정신과 의사가 밝히는 ‘상담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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