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 - 조앤 디디온 저자(글) · 이은선 번역, 시공사 · 2006년
이 책의 저자는 40년간 결혼생활을 해오던 남편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사별하게 된다. 이후 생겨진 마음의 굴곡을 책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때 당시 결혼한 딸이 아팠었는데 그 딸도 몇 년 후 사망하게 된다. 작가도 2021년 작고했다.
사망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다.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 옅어지는 가운데 함께 가야 한다. 그런면에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판됐다.
UCLA에서 몇 주를 지내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뉴욕에서건 캘리포니아에서건 아니면 다른 곳에서건,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은 아주 성공한 사람들 특유의 사고방식 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자신의 수완을 전적으로 신뢰 했다. 그들은 손에 쥔 전화번호와 알맞은 의사, 주요 장기 기증자, 정부나 사법부에서 편의를 도모해줄 수 있는 사람의 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들의 수완은 사실상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화번호의 힘은 사실상 천하무적이었다.
나도 거의 평생 동안 그들처럼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만약 어머니가 튀니스에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면 나는 미국 영사를 통해 어머니에게 영자신문을 보내고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타고 파리에서 오빠를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만약 퀸태나가 니스공항에서 갑자기 발이 묶이면 브리(p. 130)티시 에어웨이의 누군가에게 연락해 그 회사 여객기를 타고 런던에서 사촌을 만나도록 주선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어느 정도 불안감에 시달렸다. 내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천성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는 것(p. 131).
나는 1년 내내 작년 달력을 보며 날짜를 따졌다. 작년 이날에는 무슨 일을 했더라? 어디에서 저녁을 먹었더라? 작년 이날에 퀸태나의 결혼식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날아갔던가? 작년 이 날에 파리에서 돌아왔던가?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렉싱턴가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다.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인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신탁계좌의 이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물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물속으로 쉽게 떠나보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p. 283)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차들을 잊어버렸다(p. 284).
역자 후기
나는 집착하기 쉬운 내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집착할 만한 대상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이것 역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착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며, 이로 인한 괴로움이 생긴다. 집착은 원래 독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집착 중에서도 가장 독한 것이 인간에 대한 집착이며, 가장 나쁜 것 또한 인간에 대한 집착이다. 태생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 만의 하나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니까. 하지만 과연 인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상실』은 조앤 디디온의 집착과 그로 인한 슬픔에 관한 책이다. 40여 년을 함께했던 남편을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건네는 작별의 인사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집착과 죄책감이 이 책에서 유난히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결혼 생활 동안 거의 날마다 한 공간에서 보낸 이들 부부의 남다른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장영희 선생님도 극찬한 저자의 필력 때문이기도 할 텐데, 아무튼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막막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쓸쓸하고 아득하고(p. 286) 외로운 그 단어가 이 책의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행간을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역자가 되고 싶었다. 이 책에서 행간은, 냉정으로 무장한 저자의 가면 뒤로 드러나는 시뻘건 생살과 같았다. 의연한 표정 사이로 터지는 흐느낌과 같았다. 나는 원서를 읽었을 때 처음에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로 그런 분위기를 전할 수 있는 디디온의 능력에 놀라워했고, 그 다음으로는 그 느낌을 과연 제대로 살릴 수 있을까 두려워했다. 원문의 느낌을 완벽하게 살려 옮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을 읽고 내가 원서를 접했을 때 경험했던 막막함을 느낀 독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6월 이은선
덧붙임: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난 뒤 어느 서평에서 그녀의 딸 퀸태나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님을 알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할 따름이다(p. 2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