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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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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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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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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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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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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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
    나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늙음”과 “죽음”은 늘 나의 관심사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책들은 기회가 되면 읽는다. 이번에도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아무래도 초고령사회다 보니 노년과 죽음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객사”한다. 장례 문화가 바뀐 것이다. 저자는 간병 제도를 통해 각자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80세 중반을 넘어서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마지막이 평안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가능하시면 집에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 이제 고독사의 정의 중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다. 바로 두 번째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입회인의 유무가 그렇게 중요할까? 혼자 사는 고령자라면 당연히 집에 혼자 있다. 다른 사람이 가끔 오갈 수도 있지만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있을 리는 없다. 싱글은 혼자 살고 혼자 나이를 먹으며 혼자 간병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죽는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나도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싸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가족이 자고 있거나 외출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지만 낮에는 일 하러 모두 나가서 간병 필요도 4등급이나 5등급을 받은, 한 마디로 자리보전한 고령자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일이 흔하다. 요즘은 '며느리'라는 이름의 성인 여성이 24시간 집을 지키지도 않는다. 가족이 미처 지켜보지 못할 때 죽으면 그것도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설이나 병원에 있으면 고독사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시설도 직원이 몇 시간 간격으로 보러 올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을 순회한 후 다음 순회를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병원이라고 간호사가 24시간 주시하지도 않는다. 각종 모니터가 붙어 있으니 이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누군가가 달려오겠지만 그도 결국은 기계가 알려주는 죽음이다. 그뿐 아니라 의사가 매뉴얼에 따라 전기 쇼크나 심장 마사지를 시작하면 평온해야 할 죽음이 화재 현장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일본재택호스피스협회 회장인 오가사와라 씨는 이를 병원 내 고독사'라고 부른다. 병원이나 시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인이 있는 죽음'을 보장받지는 않는다. 덧붙이면 오가사와라 씨는 사람은 죽을 때를 “고른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손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죽는다든 지. 가장 좋아하는 요양보호사가 지켜볼 때 숨이 끊어지는, 정말 실화일까 싶은 에피소드를 수없이 들었다. “어떻게든 장남이 올 때까지 버텨달라”는 가족의 강력한 요구에 무리하게 연명 처치를 하는 일도 있다. 오가사와라 씨는 그동안 혼자 사는 사람을 수없이 간호했지만 혼자서 죽는 사례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오가사와라 클리닉에서 혼자 사는 사람을 간호한 사례가 적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사례가 많이 쌓여서 세 자릿수에 달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사람도 있긴 하죠?"라고 물으니 "그렇죠, 이제 다양해요"라고 했다. 아무렴 그렇지 싶었다. 임종관리사를 양성하고 있는 시바타 구미코 씨는 '혼자서 죽게 하지 않겠다', 안아주며 보내겠다'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시바타 씨는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마지막 1%가 행복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며, 그 마지막 1%를 도와주는 사람이 임종관리사라고 말한다. 나는 내 책 『케어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에서 그녀와 대담을 나눴는데, 내가 "전 혼자서 죽을 거예요" 라고 하자 그녀는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가실 때는 제가 꼭 안아드릴게요"라고 말했다(웃음). 그런데 고령자 그룹 리빙 홈인 '코코(COCO) 쇼난다이'에서 지내는 사이조 세쓰코 씨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입소인이 있어 마지막까지 한시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지켰는데, 죽어가던 그 사람이 "가끔은 혼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나는 취재를 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을 때 흥미롭다. 나는 강연 중에 "죽을 때 자녀나 손자에게 둘러싸이고 싶나요?",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면 좋겠나요?"라는 질문을 한 다. 그런데 그 반응을 보면 지역 차가 크다. 어느 지방에서는 고령의 한 남성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도쿄에서는 500명 이상의 고령 여성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을 잡아주기를 원한다고 한들 아무나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일까, 아니면 요양보호사여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오래 살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진다. 이는 숙명이다. 임종을 맞을 때, 사람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느냐고 호스피스 의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니요, 알 수 없어요. 임종 직전에는 뇌 내 마취약이라고 불리는 엔도르핀이 나와서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라는 답변도 있었고, 누가 손을 잡아줘도 모를 거예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시죠?'라고 물으니 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오감 중 청각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는 의사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도 들었다. 자녀와 손자들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말을 걸었더니 할아버지가 확실한 발음으로 "시끄럽다"고 했다는 일화였다. 죽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죽게 해달라는 그 기분을 나는 이해한다. 오랜 지인 중에 평생 고독하게 산 싱글 남성을 돗토리시의 호스피스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 씨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혀암 수술 이후 목소리를 잃은 지인은 의사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집에서 죽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요양보호사가 방문해보니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홀로 훌륭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서예와 전각, 술과 차를 즐겼던 고고한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 그렇다면 '입회인 없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일까 남겨지는 사람일까? 취재하면서 보니 임종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쪽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를 '임종 입회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오랫동안 간병해온 지인은 자신이 외출한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마지막 잠깐을 놓쳐도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을 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꼭 죽어가는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씨가 임종을 맞았을 때,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동지였던 와타나베 교지 씨는 자리를 피했다고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은 "울러 갔나 봐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작별 인사는 예전에 했다"고 말했다. 임종관리사 시바타 씨는 작가 세토치 자쿠초 씨가 인용한 겐유 소큐의 소설 『아미타바』 속 문구를 나에게 들려줬다.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25m 수영장을 529번 채울 만한 물도 바로 끓게 할 정도의 에너지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의심 많은 나는 “그걸 어떻게 측정할 수 있지?”라며 갸우뚱했지만, 시바타 씨는 죽은 자가 넘겨주는 에너지를 남아 있는 쪽이 받지 않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임종을 지키려는 것이 어차피 남겨지는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호주에서 간병 일을 하는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아들이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방문했다. 호주 사람들은 영어권에 일자리가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이주한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도 많다. 그 어머니가 반년 후에 돌아가시자 간병인이 영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들은 "작별 인사는 이미 해두었으니, 장례식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인은 “그렇게도 하더라고요. 일본인인 저는 좀 이해하기 힘들 있지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일본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상대의 귀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몇 번이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엄마의 자식이라서 행복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다. 일본인은 특히 가족 간에는 부끄럽다고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못 하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고 상태가 점점 나빠져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정신이 온전할 때 물어볼걸', '이런 말도 해드릴걸' 하고 후회하느니 좀 더 빨리 몇 번이고 말해드리자. 나는 요즘 친구들에게도 "그때 네가 친절하게 대해준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너의 이런 점이 좋아'"라고 말해주기 시작했다. 죽고 난 후에 장례식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사를 읽는들 죽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을 만나면 '다음에 만날 때도 모두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다시 만나 기쁘다"라며 진심으로 기뻐하면 된다.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죠?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쁜가.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재택사'라는 말을 만들어버렸다. 현재 일본에서는 나 말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저작권 마크를 붙였다. 아니, 사실은 농담이다. 저작권 따위 쩨쩨하게 굴 생각은 없고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해서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간호사 스가하라 유미 씨는 방문 간호 업계를 이끌고 있으며 '캔너스(CANNUS)'라는 방문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캔너스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서 "입회인이 없는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글을 봤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고독사의 정의를 바꾸면 고독사 통계는 간단히 바뀐다. 조사 방법이나 선택지 카테고리를 바꾸면 통계 데이터는 바뀐다. 간병 필요 인정도 '간병 필요 고령자' 수에서 '지원 필요 고령자'를 빼버리면 간병 필요 고령자의 수가 감소한다. 그중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변경한다면(일본노년학회가 이미 제언 중이다) 고령화율의 수치도 달라진다. 고독사를 없애자는 캠페인은 사후에 빨리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pp. 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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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27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단상】 살아있는 자의 소명
    뜬금없이 이른 아침에 “이안류”, “다낭 미케비치 이안류”등을 검색했다. 고 박상은 안양샘병원 원장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지난 11월 5일 주일 베트남 다낭 현지 바닷가에서 일행과 물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런 이안류에 의한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이안류(離岸流)는 한두 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흐르는 좁은 표면 해류로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이 해안에 높은 파도를 이루고,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현상이다. 역조(逆潮), 거꾸로 파도, 립 커런트(영어: rip current 또는 rip)라고 하며 해안에서 바다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로, 역파도, 역물살이라고도 부른다. 폭이 좁고, 물살이 매우 빠르다.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 넓은 면적을 가진 해변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모래톱이 해안 주변에 많이 만들어져 있으면 이러한 해류가 자주 발생한다. 이 해류는 파도의 특징과 연관이 있다. 파도는 수심이 깊으면 빠르고, 반대로 수심이 낮으면 느려지는 특성이 있다. 깊은 바다에서 빠르게 온 파도는 수심이 얕은 해안가 부근에서는 이 파도가 깨진다. 이 깨짐현상은 이안류 발생의 원인인 역류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대한민국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이안류로 인해서 2009년에는 106명, 2008년에는 150명의 구조가 발생했다. 미국인명구조협회는 이안류 때문에 해마다 100여명이 사망한다고 발표했다. 종종 뉴스에서 해수욕장에서 발생하는 이안류로 인한 사고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이안류는 바다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다. 나는 9월 말 아내와 베트남 다낭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숙소에 구비된 수영장과 그 앞쪽 미케비치 해변에서 놀았다. 이 해변은 백사장에서 대략 50미터 앞까지는 수심이 낮았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이 그 지점에서 파도를 맞으면서 놀았다. 나는 수영을 못하기에 그들보다 뒤에서 파도를 맞으며 놀았다. 이후 수영장에서 잠시 놀다 혼자 다시 바닷가로 갔는데 그많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2-3명만이 해변가에 있었다. 다시 바다에 들어가 파도를 맞으며 노는데 이상하게 무섭다는 느낌이 들어 곧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비록 내가 머문 숙소의 바닷가는 아니지만 박 원장은 그 미케비치 해변 어딘가에서 의료선교하러간 일행들과 잠시 물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생긴 이안류에 희생이 된 것이다. 이안류에 휘말리면 급속하게 바다쪽으로 200-300미터 끌려가게 되고 이때 당황해서 해변가로 수영을 할려고해도 유속으로 인해 나아갈 수 없어 힘이 빠지고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나도 파도가 그리 높지 않고 수심이 얕은 그 해변에서 더 멀리 나갔더라면 같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수영을 할줄 모른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박 원장은 취재 현장에서 한번 본 사이지만 그의 죽음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내가 갔던 베트남 다낭 미케비치 해변에서 한달 반 후에 사고를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 원장은 65세라 아직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이미 많은 일을 이루었다. 반면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때 같은 장소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 남았는지 모른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산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며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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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2
  • 신문 창간 2주년,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 세상에 “빛과소금뉴스”가 만들어진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감사의 글을 적어 봅니다. 3년전까지는 평범한 목회자였습니다. 만39세에 증경총회장 한석지 목사가 원로로 계신 서울의 중심 용산에 있는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5년 만에 갈등이 생겨 다섯 번째로 나오게 됐습니다. 이후 어쩌다보니 교계 기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교계 기자를 하는 학부 때 동기를 졸업 후 그 즈음에 다시 보게 되어 그 친구가 저를 이쪽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후 제 신문사를 만들어 2년간 많은 글을 써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지향하는 지는 제가 쓴 기사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지지를 통해 여기까지 왔음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제게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따라 어둠을 밝히고 긍정적인 것을 드러내는 빛의 역할, 세상을 맛나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언론이 되고 싶습니다. 읽을 거리와 볼 거리가 있는 언론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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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1-12
  • 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이번 11월 14일에 있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제41회 정기총회가 상임회장 선거 문제로 시끄럽다. 통상 목사가 하던 상임회장에 장로가 경선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상임회장은 차기 회장이 되는데 올해 후보로 주다산교회를 담임하는 권순웅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과 영락교회 장로로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을 역임한 김순미 장로가 나서 경선중이다. 한장총은 1981년 2월 1일 설립됐으며 그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공동 관심사를 협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분열된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필요한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로교회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들은 비록 교단이 갈라져 있으나 서로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 확인과 의식이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대표회장은 1992년 제10회 총회 때 통합측의 한영제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31년만에 통합측이 또 다시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필이면 통합측에 의해 또다시 이 일에 재현되고 있어 연합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참고로 연합기관인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모두 대표는 목사이다.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 대표회장을 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해야하는데 이영훈 목사가 하도록 주도한 인물이 이 일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도 합동교단 증경총회장 권순웅 목사를 “가마니”로 알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사태에는 합동측 인사들도 동조했다는 뒷말이 있으니 교단 연합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정말 “합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만약 통합측이 합동측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합측과는 더 이상의 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단 선언을 해야한다. “보자보자하니 보자기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8회 총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한 고영기 총무는 자신이 종로에서 연합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쓴적이 있고 이것이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고 총무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분담금은 많이 내면서도 자기 자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합동측 교단의 대외 업무 현실이다. 권순웅 목사와 맞서는 김순미 장로는 재벌가로 총대들에게 상당한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로인해 경선 결과를 애측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번에도 권순웅 목사와 합동측이 통합측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면 묵과하지 말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고 연합회 활동 제재를 가해야 하며 그것이 안될시 합동측은 통합측과의 연합활동을 전면 재고하고 중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늘 음모를 획책하는 통합측에 경고하며, 늘 어리석게 당하는 합동측의 자성을 촉구한다. 경선 투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1-11
  • 【단상】 짧은 인연, 긴 여운
    일주일만에 訃告를 들었다. 안양샘병원 박상은 원장이 지난 11월 5일 베트남 다낭에서 소천했다. 그 전 주일인 10월 29일, 박상은 원장의 큰형되는 박재천 목사의 저서 출간 감사예배를 취재가서 박 원장을 처음 뵈었다. 온화하고 유머있게 순서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일주일만에 소천 소식을 접한 것이다. 고인은 큰형님의 행사 후 샘병원 팀과 베트남 의료선교 일정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며, 이후 응급의료팀이 CPR 등을 시도했지만 소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에 의하면, 박상은 원장은 1958년 생으로,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고신대 의대 신장내과 교수, 미국 세인트루이스 의대 생명윤리센터 교환연구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신장내과 교환교수 등을 거쳐 2001년 안양샘병원에 부임했다. 진료부원장, 병원장, 대표원장 등을 거쳐 현재 미션원장에 이르기까지 병원 성장을 이끈 것과 더불어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 이웃을 위한 진료봉사 등 의료적 취약 계층을 돕는 일에도 힘써왔다. 이는 과거 고신대 복음병원 근무 당시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폈던 고 성산 장기려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으며 영향을 받은 데 따른 것으로, 그는 이후 장 박사의 뜻을 기리는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설립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아직 할 일이 많으신데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나처럼 우연히 한번 본 사이인데도 이렇게 만감이 교차한데 가족들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요즘은 취재 가서 동영상을 찍어 기사에 덧붙이는데 이때도 다행히 행사 동영상을 찍어뒀다. 이것이 아마도 온 형제자매들이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날 그 행사를 취재한 기자는 나밖에 없었다. 단톡 등에 광고를 했지만 초청된 나만 왔기 때문이다.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간 기자로서 기사를 작성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는데 이것이 그 가족들에게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기자의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어떤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정리하는 기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날 짧은 시간 만났지만 때이른 사별로 인해 긴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인생의 덧없음과 이것을 극복케 하는 천국의 소망을 생각하며 순간의 만남과 인연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해본다. 천국에서 평안하소서! 다음의 글은 박상은 원장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샘병원 원목 김성은 목사가 자신의 페북에 올린 애도의 글들이다. 박상은 미션원장님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며...① 어제 오후 2시30분 베트남 다낭에서 온 급한 전갈. 박상은 미션원장의 부고. 이 무슨 일인가?!! 병원 공식 단기 선교사역팀. 주일 예배 후 오후 예배까지 3시간 정도 시간이 있어서 현지 선교사들과 우리 팀 전체가 바다에 갔다가 원장님만 너울성 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연락 받음(바다가 얕고 물결이 잔잔했는데, 원장님만 급하게 깊은데로 빨려들어갔다고, 손쓸 경황이 없었다고...). 2005년 선교사 시절. 환자와 의사로 첫 만남. 그후 건강이 더 안 좋아져서 사역의 변경이 필요 할 때 내가 샘병원에서 치료 받으며 사역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 그렇게 만난 시간이 어언 19년. 이번 다낭 단기팀에 나도 함께 하기를 원장님이 원하셨으나 나는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하고 단기팀 출발할 때에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며 나눈 악수. 그 악수가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긴급한 샘병원 대책회의를 통해 그 동안 누구보다 선교에 헌신적이셨고 병원의 결의에 따른 공식적 단기 선교사역 중 사고를 당하셨으니 '순교'로, '순교자'로....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샘병원은 특별 애도의 주간으로. 사모님과 둘째 딸 형제 대표 목사님과 행정부원장님이 06시10분 비행기로 다낭으로 출발. 오늘 12시 30분. 샘누리홀에서 "샘병원공동체, 순교자 박상은미션원장 애도 모임(예배)"을 갖고 다낭 현지와 연락하며, 관계 기관 및 단체와 소통하며 장례식을 진행하기로 함. 어제 2시 30분 비보를 들었을 때 슬픈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이사야 61장 1-6절 말씀을 묵상함. 삼가 조의를 표하며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소망합니다. 박상은 미션원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② 어제 오후 5시경 베트남 현지에서 입관 및 천국환송(발인) 예배를 드리고 곧바로 화장 시작.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마지막에 주어진 황금색 작은 관 하나. 슬픔에 잠긴 사모님과 둘째 딸 그리고 소수의 조문객. 그렇게 많은 관계 속에서 열정적으로 일하신 생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참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사신 그 열매는 앞으로 한국과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3-25절의 한 알의 밀알에 관한 말씀처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ㅃ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오늘 인민위원회의 사망확인서가 발급되면 유해를 한국으로 ....그 이후 한국에서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예상대로 수요일에 도착하면, 곧바로 8일(수)~10일(금)에 안양샘병원 장례식장에서 샘병원장으로 장례 예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박상은 미션원장을 애도하며 ③ 확정된 장례 일정 지금은 04시 40분. 베트남에서 유해로 돌아오는 원장님과 가족들을 영접하기 위해 병원장님과 G샘병원의 최목사님과 공항으로 가는 길.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 무거운 마음이지만 원장님이 생전에 늘 외치시던 "전생의 비전"-전인치유, 생명사랑, 의료선교- 을 마음에 새겨 본다.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는 사건과 아픔과 슬픔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창조주를 바라보며...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박상은 장로께서 소천 하셨기에 아래와 같이 부고를 전해 드립니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고 박상은미션원장 애도 ④ 어제 새벽 유해가 한국에 도착하여 어제 오후 3시부터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어제 저녁 출석하시는 교회 주관으로 임종 후 첫 공식 예배가 드려졌고 오늘 12시30분에 샘병원 직원들이 참석하는 문상예배가 드려진다. 내일 점심 같은 시간에 고인의 형제들로 구성된 '영파선교회'가 주관하는 예배 그리고 토요일 아침 6시30분 발인예배까지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사람이,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유가족과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울어 주고 때로는 조용히 기다려 주고 다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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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9
  • 【칼럼】 소환불응 주홍동 장로....숨는 자가 범인이다(?)
    주홍동 장로가 지난 11월 6일 있었던 총회 임원회의 소환에 불응했다. 범죄 수사관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숨는 자가 범인이다” 그러면 1000만원 게이트의 범인은 주홍동 장로인가? 이날 관계자인 이이복 장로와 이종철 목사는 참석해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임원회는 2차로 주홍동 장로를 다시 출석시켜 조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때 국가 사법에 의뢰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1000만원 게이트를 심층 취재한 기독교종합신문 기사에 의하면, 주홍동 장로는 그 돈이 이이복 장로의 돈이라고 했다. 주홍동 장로가 전달한 현금 천만원은 주 장로의 사위가 시무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OOO교회(담임 김OO 목사)의 봉투 2개에 나눠서 담겼다고 전해진다. 기자는 이종철 목사를 통해 주 장로가 천만원을 전달하기 위해 늦은 밤 이종철 목사에게 전화했던 녹음을 들었다. 그 녹음에 의하면, 이 돈의 주인이 '이이복 장로'라고 주홍동 장로가 육성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반환하는 확인서의 내용 가운데 『일천만원은 이이복 장로의 돈이며, 이이복 장로에게 반환한다』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었고, 주 장로가 서명했다. 이 확인서의 서명에 관하여 제108회 총회가 있었던 지난 9월 19일 새로남 교회 그레이스 홀 입구에서 기자가 주 장로에게 "서명을 했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물었다. 주 장로는 "이종철 목사가 확인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작성하지 않았고, 이 목사가 하고 싶은대로 작성했으며 나는 그냥 서명만 했다. 그래서 그 확인서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이에 기자가 "확인서에 서명하면 그 내용을 동의한 것이 되지 않느냐?"라고 재차 물었지만, "내가 쓴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로 흐지부지하며 자리를 옮겼다. 위 기사를 보면 주홍동 장로가 확인서에 서명한 내용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서명을 하기 전 내용을 읽어 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동의하니까 서명하지 않았겠는가? 도대체 주홍동 장로의 말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의 행태이다. 오정호 총회장은 108회 총회를 시작하면서 과거 일로 발목 잡히고, 시간과 재정을 소진하고 싶지 않아 선관위원들이 사과로 이 일을 덮기를 원했다. 그러다 결국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기에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칼을 빼든 이상 끝장을 볼 것이라는 것이 모두의 기대이다. 진작에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했다면 쉽게 넘어갈 일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커져버렸다. 주홍동 장로가 진실에 대한 고백을 미룰수록 본인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총회를 기망한 죄는 결국 사법처리나 영구총대 제명도 불러올 수 있다. 이 사건은 시간이 藥이 아니라 毒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총회 임원회와 모든 총대, 합동 교단을 농락하지 말고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한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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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9
  • 【여자목사논쟁4】 사모없는 교회, 사모의 일탈인가? 반란인가?
    합동교단내 교회 목사 사모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있다. 군소교단이나 독립교단을 통해 안수를 받는다. 과거 은퇴를 앞둔 합동측 목사들이 사모를 권사로 임명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내가 시무했던 동암교회가 그랬고, 고 최훈 목사가 시무했던 동도교회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동암교회 같은 경우 사모가 권사회 회장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사모들이 목사 안수까지 받고 있다. 결국 사모없는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모는 누구인가? 목사의 아내로서 교인들에게는 어머니같고, 언니, 누나같은 역할을 해준다. 남성 목사가 하지 못하는 목회 사역의 한 부분을 사모가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전방에서 목회하는 남편 목사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후방 사역을 사모들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남편과 함께 전방 사역을 하겠다는 것인가? 물론 순복음교회 고 조용기 목사 사모도 목사였고, 침례교의 대중적인 목사 장경동 목사 사모도 목사이다. 이처럼 타교단이야 그렇다쳐도 아직 여성목사안수를 금하고 있는 합동교단내에서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과거 장로 제도가 없는 교단이 있었다. 그런데 연합사업을 하다보니 자기는 집사나 남자 권사인데 타교단은 장로가 있어 자기가 열등해 보여 교단과 교회를 옮긴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교파 구분없이 대부분 장로 제도가 있다. 아무래도 집사나 권사보다는 계급이 높아 보여서인가 보다. 사모들도 그런가 궁금하다. 왜 사모로 만족하지 못하고 교단법을 어겨가며, 드러나면 남편 목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목사 안수를 받는가? 물론 이것을 허용해 주는 합동측 목사 남편도 문제긴 문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의 목사 사모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노회가 문제 삼지 않고 쉬쉬하는 것 같다. 그럴려면 교단을 옮기지 왜 합동교단에 있는지 묻고 싶다. 108회 총회는 여성목사안수는 안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엇다. 그러나 선 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하려는가? 사모들이여 자중하시라. 합동측 교단에서 사모가 목사가 되는 것은 일탈이요, 반란이며 또한 치리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합동교단은 각자도생교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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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1-08
  • 【내일】 나는 성범죄자가 아닙니다
    성범죄자로 오해받을 뻔 했다. 전립선 약 ‘하루날’ 처방을 위해 3개월에 한번 가는 동네 비뇨기과가 있다. 최근 사타구니에 염증이 생겼는데 전에도 있다가 사라져서 그냥 뒀더니 너무 커지고 음낭까지 부어올라 병원을 찾았다. 초음파 검사를 하니 별 문제가 없어 주사와 항생제 약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의사가 음낭에 생긴 쥐젖같은 것에 대해 말하면서 혹시 음경사마귀인지 모르니 떼서 조직 검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생겨 그냥 뜯어 버릴까하다가 내버려두었는데 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그것을 보고 한 말이다. ‘음경사마귀’라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는데 종이에 설명을 해가며 그것을 성병이라고 기재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조직 검사 결과 음경사마귀이면 아내가 자궁경부암에 걸릴 수 있기에 검사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가보다 하다가 음경사마귀가 성병에 의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내 히든 카드를 꺼냈다. “저는 목사라 다른 여자를 만나본적이 없는데요” 그러자 의사가 당황해하며 곧 태세전환을 했다. “아 그러면 쥐젖일 가능성이 많겠네요” 그 의사가 신자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목사라면 외도나 불륜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으니 다행이다. 만약 내가 목사라는 것을 밝혔는데, “요즘 목사님들도 성병 많이 걸리던데요”하거나 “목사라고 별다른가요? 같은 남자인데요”했다면 참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목사라면 적어도 외도나 불륜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조직검사를 해도 쥐젖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목사는 절대로 외도, 불륜 안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기대이다. 그러나 이 기대를 깨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잊을만하면 목사의 성범죄가 드러나 전체 목사를 망신주는 일들이 많다. 목사에 대한 세상의 기대를 저버리는 목사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사직을 내려놔야한다. 세상 사람들도 잘 하지 않는 성범죄자가 무슨 목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얼굴 들고 사는 인간들이 많아 참 깝깝하다. 성범죄자에게 하고픈 내 말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어 게재한다. 불륜과 외도를 하고자하는 자는 “거시기”를 걸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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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1-07
  • 【단상】 월 1만원의 재정 후원....티끌모아 태산
    나는 1989년 2월 총신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총신신대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화곡동에 소재한 람원교회에 교육전도사로 갔다. 그당시 장년부가 대략 800여명 가량 모이던 교회였고 신학교에 재학 중인 교육전도사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줬다. 그래서 신대원 2, 3학년 때 혜택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현재도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는 신학생들에게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는 일부라도 학비를 지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총신대학의 박성규 총장은 신대원생 전액 장학금 지급을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다. 매년 장학금에 필요한 액수는 68억이다. 이를 위해 총회에 지원금을 요청했고 총회는 10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동문, 선후배, 교회, 개인 등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재정을 후원하고 있다. 총신의 재정 후원 약정서를 봤다. 제일 위에 “한국교회를 살리는 10만 재정 후원인이 되어주세요”라고 적혀 있다. 여기 10만명은 월 1만원씩 연 12만원을 후원할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10만명이 월 1만원씩 내면 10억이다. 1년이면 120억이다. 요즘 만원 가지고 할게 별로 없는데 이것도 모이니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또한 교회적으로는 월 10만원씩 연간 120만원을 후원할 교회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 모여진 돈으로 무엇을 하는가? 신학대학원생 전액 장학생화 기금 / 신학생 경건훈련과 복지 기금 / 교원학보와 교수연구지원 기금 / 기숙사 건립 / 도서관 건립 / 결식 학생을 위한 사랑의 식권 등의 사업을 한다. 총신신대원은 한국교회의 보수 개혁 신학의 보루요, 합동측 모든 목사의 모교이다. 합동측 모든 목사는 정규나 특별, 편목 등의 과정을 거쳐 합동측 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그런 모교에 재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는 못해도 월 1만원 회원이 되기로 했다. 목회를 하면 월 10만원 후원도 할 수 있을텐데 현재는 중단한 상태라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쉽다. 모든 합동측 목사의 모교인 총신신대원을 위해, 우리의 후배들을 위해 선배들이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티끌모아 태산의 정신으로 재정 후원에 동참했으면 한다. 참고로, 학교에 500만원을 후원하겠다고 나팔이 터지도록 불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후원 약정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번만 주면 정이 없다”는 말이 이번에도 내 발목을 잡았다. 지난번에는 GMS의 만만만 운동이 그러더니만.... 사족으로, 후원금을 보내겠다고 하니 박성규 총장이 차일피일 미뤘다. 아마도 "기자가 뭔 돈이 있어서 후원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군목 선배로서의 마음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꾸 미루면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반 협박해서 간신히 처리할 수 있었다. 박성규 총장은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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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6
  • 【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2004년 한 여성 작가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살한다. 그 여성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이다. 그녀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물 『The Rape of Nanking』(역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신실의 기록)을 1997년에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협박과 위협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난징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군들은 무력한 패잔병들과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먹일 것이 없다는 핑계로 다 도륙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칼로 베고 생매장하거나 불에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여자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불문하고 보는 족족 대낮에도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때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선량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은 날조요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난징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왜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자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거나 배상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반성하는 독일과 너무나 다른 행보이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이나 도덕성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국가이다. 최근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산 어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나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너나 없이 바닷물을 마시고 회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 일본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당했다. 정신대로 끌려가고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과연 자주 국가인가를 의심케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한 작가의 유작을 읽으며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으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근성을 어떻게 드러내는 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없이 여전히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과 이를 방조하는 미국 그리고 그 장단에 춤추는 현 정부를 보며 암담함을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기 싶다”는 책에 있는 경고가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볼 때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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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0-28
  • 【단상】 부품비 2200원, 기술료 107000원
    18년된 차에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 없는 날에 장안동을 들려 12만원에 마후라를 교체하고, 동네 현대차 블루핸즈를 찾아 윈도우를 수리했다. 언제부턴가 차 유리창 내리는 것이 됐다 안됐다했다. 108회 총회 후 운전석과 조수석에 내린 유리창이 올라가지 않아 다음날 베트남 다낭에 갈 때 차를 인천공항 주차장에 주차하면서 빗물 들어가지 말라고 비닐로 막고 다녀온 코미디를 연출했다. 혹시나 하고 했는데 정말 그 주간에 비가 왔었다. 그러다 어쩌다 다시 작동해 유리창을 올렸는데 그 후 더 이상 작동을 안해 할 수 없이 블루핸즈를 찾은 것이다. 엔지니어가 운전석 아래를 뜯고 점검하더니 원인을 알아내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내민 청구서를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차 유리창을 조절하는 파워 스위치에 전기를 전달하는 릴레이가 고장났는데 부품값은 2,200원, 기술료는 107,000원, 세금 10,900원으로 총 120,120이 나왔다. 부품값의 60배라니 참 어이가 없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울며 겨자먹기로 결제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없어 전문가에게 의뢰했기에 그 값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단돈 2천원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입한 자동차 동호회에서 수리 정보를 찾아 봤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원이 수리를 할 때 곁에서 유심히 지켜봤다. 이후 똑같은 문제가 생기면 고쳐볼 요령으로 한 것이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한 수 배웠다는 생각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이게 바로 전문가의 값어치라는 것이다. 그 직원은 차 수리의 전문가이다. 그래서 2천원짜리 부품으로 60배의 이익을 남겼다. 이런 기술을 갖기 위해 많은 시간 노력했기에 전문가의 기술비는 그만큼 비싸게 책정된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무엇의 전문가인가? 이제는 신문사를 운영하기에 운영의 전문가, 취재의 전문가, 기사의 전문가가 되야한다. 그를 통해 나의 가치와 몸값을 올려야하는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도전이 됐다. 한동안 60배의 놀라운 이익을 낸 이 일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성경에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에 대한 말씀이 있기는 하다. 이렇게 현대자동차가 성경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니.... 하긴 오너가 신자가 아님에도 현대자동차에는 GRACE란 이름의 승합차도 있었고, 지금은 GENESIS(창세기)란 브랜드도 갖고 있다. 그래서 요즘 목사들이 이 차를 많이 타는 것 같다. 나는 신약 바울서신으로 Th.M을 했기에 이 차는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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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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