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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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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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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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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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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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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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
    나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늙음”과 “죽음”은 늘 나의 관심사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책들은 기회가 되면 읽는다. 이번에도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아무래도 초고령사회다 보니 노년과 죽음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객사”한다. 장례 문화가 바뀐 것이다. 저자는 간병 제도를 통해 각자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80세 중반을 넘어서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마지막이 평안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가능하시면 집에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 이제 고독사의 정의 중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다. 바로 두 번째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입회인의 유무가 그렇게 중요할까? 혼자 사는 고령자라면 당연히 집에 혼자 있다. 다른 사람이 가끔 오갈 수도 있지만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있을 리는 없다. 싱글은 혼자 살고 혼자 나이를 먹으며 혼자 간병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죽는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나도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싸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가족이 자고 있거나 외출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지만 낮에는 일 하러 모두 나가서 간병 필요도 4등급이나 5등급을 받은, 한 마디로 자리보전한 고령자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일이 흔하다. 요즘은 '며느리'라는 이름의 성인 여성이 24시간 집을 지키지도 않는다. 가족이 미처 지켜보지 못할 때 죽으면 그것도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설이나 병원에 있으면 고독사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시설도 직원이 몇 시간 간격으로 보러 올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을 순회한 후 다음 순회를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병원이라고 간호사가 24시간 주시하지도 않는다. 각종 모니터가 붙어 있으니 이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누군가가 달려오겠지만 그도 결국은 기계가 알려주는 죽음이다. 그뿐 아니라 의사가 매뉴얼에 따라 전기 쇼크나 심장 마사지를 시작하면 평온해야 할 죽음이 화재 현장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일본재택호스피스협회 회장인 오가사와라 씨는 이를 병원 내 고독사'라고 부른다. 병원이나 시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인이 있는 죽음'을 보장받지는 않는다. 덧붙이면 오가사와라 씨는 사람은 죽을 때를 “고른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손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죽는다든 지. 가장 좋아하는 요양보호사가 지켜볼 때 숨이 끊어지는, 정말 실화일까 싶은 에피소드를 수없이 들었다. “어떻게든 장남이 올 때까지 버텨달라”는 가족의 강력한 요구에 무리하게 연명 처치를 하는 일도 있다. 오가사와라 씨는 그동안 혼자 사는 사람을 수없이 간호했지만 혼자서 죽는 사례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오가사와라 클리닉에서 혼자 사는 사람을 간호한 사례가 적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사례가 많이 쌓여서 세 자릿수에 달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사람도 있긴 하죠?"라고 물으니 "그렇죠, 이제 다양해요"라고 했다. 아무렴 그렇지 싶었다. 임종관리사를 양성하고 있는 시바타 구미코 씨는 '혼자서 죽게 하지 않겠다', 안아주며 보내겠다'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시바타 씨는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마지막 1%가 행복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며, 그 마지막 1%를 도와주는 사람이 임종관리사라고 말한다. 나는 내 책 『케어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에서 그녀와 대담을 나눴는데, 내가 "전 혼자서 죽을 거예요" 라고 하자 그녀는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가실 때는 제가 꼭 안아드릴게요"라고 말했다(웃음). 그런데 고령자 그룹 리빙 홈인 '코코(COCO) 쇼난다이'에서 지내는 사이조 세쓰코 씨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입소인이 있어 마지막까지 한시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지켰는데, 죽어가던 그 사람이 "가끔은 혼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나는 취재를 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을 때 흥미롭다. 나는 강연 중에 "죽을 때 자녀나 손자에게 둘러싸이고 싶나요?",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면 좋겠나요?"라는 질문을 한 다. 그런데 그 반응을 보면 지역 차가 크다. 어느 지방에서는 고령의 한 남성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도쿄에서는 500명 이상의 고령 여성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을 잡아주기를 원한다고 한들 아무나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일까, 아니면 요양보호사여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오래 살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진다. 이는 숙명이다. 임종을 맞을 때, 사람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느냐고 호스피스 의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니요, 알 수 없어요. 임종 직전에는 뇌 내 마취약이라고 불리는 엔도르핀이 나와서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라는 답변도 있었고, 누가 손을 잡아줘도 모를 거예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시죠?'라고 물으니 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오감 중 청각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는 의사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도 들었다. 자녀와 손자들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말을 걸었더니 할아버지가 확실한 발음으로 "시끄럽다"고 했다는 일화였다. 죽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죽게 해달라는 그 기분을 나는 이해한다. 오랜 지인 중에 평생 고독하게 산 싱글 남성을 돗토리시의 호스피스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 씨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혀암 수술 이후 목소리를 잃은 지인은 의사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집에서 죽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요양보호사가 방문해보니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홀로 훌륭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서예와 전각, 술과 차를 즐겼던 고고한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 그렇다면 '입회인 없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일까 남겨지는 사람일까? 취재하면서 보니 임종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쪽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를 '임종 입회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오랫동안 간병해온 지인은 자신이 외출한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마지막 잠깐을 놓쳐도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을 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꼭 죽어가는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씨가 임종을 맞았을 때,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동지였던 와타나베 교지 씨는 자리를 피했다고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은 "울러 갔나 봐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작별 인사는 예전에 했다"고 말했다. 임종관리사 시바타 씨는 작가 세토치 자쿠초 씨가 인용한 겐유 소큐의 소설 『아미타바』 속 문구를 나에게 들려줬다.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25m 수영장을 529번 채울 만한 물도 바로 끓게 할 정도의 에너지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의심 많은 나는 “그걸 어떻게 측정할 수 있지?”라며 갸우뚱했지만, 시바타 씨는 죽은 자가 넘겨주는 에너지를 남아 있는 쪽이 받지 않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임종을 지키려는 것이 어차피 남겨지는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호주에서 간병 일을 하는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아들이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방문했다. 호주 사람들은 영어권에 일자리가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이주한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도 많다. 그 어머니가 반년 후에 돌아가시자 간병인이 영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들은 "작별 인사는 이미 해두었으니, 장례식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인은 “그렇게도 하더라고요. 일본인인 저는 좀 이해하기 힘들 있지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일본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상대의 귀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몇 번이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엄마의 자식이라서 행복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다. 일본인은 특히 가족 간에는 부끄럽다고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못 하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고 상태가 점점 나빠져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정신이 온전할 때 물어볼걸', '이런 말도 해드릴걸' 하고 후회하느니 좀 더 빨리 몇 번이고 말해드리자. 나는 요즘 친구들에게도 "그때 네가 친절하게 대해준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너의 이런 점이 좋아'"라고 말해주기 시작했다. 죽고 난 후에 장례식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사를 읽는들 죽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을 만나면 '다음에 만날 때도 모두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다시 만나 기쁘다"라며 진심으로 기뻐하면 된다.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죠?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쁜가.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재택사'라는 말을 만들어버렸다. 현재 일본에서는 나 말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저작권 마크를 붙였다. 아니, 사실은 농담이다. 저작권 따위 쩨쩨하게 굴 생각은 없고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해서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간호사 스가하라 유미 씨는 방문 간호 업계를 이끌고 있으며 '캔너스(CANNUS)'라는 방문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캔너스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서 "입회인이 없는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글을 봤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고독사의 정의를 바꾸면 고독사 통계는 간단히 바뀐다. 조사 방법이나 선택지 카테고리를 바꾸면 통계 데이터는 바뀐다. 간병 필요 인정도 '간병 필요 고령자' 수에서 '지원 필요 고령자'를 빼버리면 간병 필요 고령자의 수가 감소한다. 그중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변경한다면(일본노년학회가 이미 제언 중이다) 고령화율의 수치도 달라진다. 고독사를 없애자는 캠페인은 사후에 빨리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pp. 94-103).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7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북토크】좋은 문장을 쓰는 요령
    기자가 되어서 지금까지 늘 느끼는 부담감은 기사를 잘 써야한다는 것이다. 행사 기사야 순서대로, 담당자가 말한대로 받아 적으면 된다지만 논설, 단상, 칼럼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을 써야한다. 그때마다 글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글은 다 쓴 다음에 만족감을 준다. 그래서 계속해서 글을 쓸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글 쓰는 것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 전업 기자가 되었으니 더 글쓰는 공부가 필요하다. 쇠를 두둘겨 날카로운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처럼 글의 칼을 갈고 다듬어야하는데 그 길이 멀고도 멀 것이다. 그러나 해볼만하다. 다음은 책에서 건져낸 인용문이다. 좋은 기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말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능하면 능동형 동사를 써라 - 독자는 적극적인 글을 좋아한다. 특히 동작이 있는 글이 좋다. 그리고 수동형보다는 능동형이 구문도 더 간결하다 문장을 짧게 써라 - 문장이 길면 당연히 이해도 어렵다. 한 문장 안에 여러 개의 주어가 사용되고 동사와 형용사도 많게 된다. 국어학자 박갑수 교수는 신문 기사는 한 문장에 대략 50자 정도만 쓰도록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45~50자 정도가 적절한 기사 문장의 길이로 통한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기사 작성 교재들은 기사 문장의 평균 길이는 25단어 정도가 적당하다고한다. 그러나 저명한 언론인들의 글을 보면 대체로 문장이 이러한 교과서들의 권유보다도 짧다. 복문과 중문은 피하고 단문을 써라 - 주어와 동사는 서로 가까이 있어야 좋다. 수식어도 떨어져 있으면 수식의 대상이 불분명해진다. 복문이나 중문 등 전하는 내용이 한 문장 안에 뭉뚱그려 있는 글은 읽어도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글 호흡에 변화를 주라 - 긴 문장을 반드시 써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긴 문장 다음 문장은 최대한 짧게 쓰는 편이 좋다. 그러면 독자는 지루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긴 문장이 계속 같은 수준의 복합적 구조로 되풀이되면 읽는 사람은 싫증을 내게 된다. 전문 용어의 사용을 피하라 - “절대로 외래어 표현이나 학술 용어 또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쓰는 전문 용어를 쓰지 마라. 특히 평범한 일상용어로 표현이 가능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1984년Nineteen Eighty-Four』(1949)의 저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말이다. 최대한 보통 사람이 쓰는 일상 언어를 사용해 글을 쓰라는 충고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신문 기사에는 부담스런 표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시청각 감각을 자극하도록 써라 - 다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뉴욕타임스」 신문을 위해 스페인 내전을 취재할 때 송고한 기사의 일부다. There is a rifle fire all night long. The rifles go "tacrong, carong, craang, tacrong", and then a machine gun opens up. It was a bigger caliber and is much louder - "rong, cararing, rong, rong." 다양한 의성어를 사용해서 전쟁터의 분위기를 미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 기사다. 세부 묘사를 잘하라 - 세부 묘사가 없는 기사는 건조하다.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채워진 문장은 독자의 주의를 잡기 어렵다. 기사의 맛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 어떠한 정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세부 사실에 대한 관찰과 기록은 필수적이다(pp. 78-86).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12-27
  • 【단상】 총회임원...사소한 직책은 없다
    지난 108회 총회 전 임원선거 정견발표에서 한 후보가 자신의 직책이 영향력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듣기 거북했는데 또 한 임원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해서 한마디 해야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총무 포함 10명의 임원 중 중요하지 않은 임원은 하나도 없다. 물론 총회장이 총회를 대표하고, 어떤 사안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나 모두가 다 총회장이 될 수는 없다. 나머지 임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면 된다. 어차피 자기가 출마한 임원 자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출마한 것이 아닌가? 모르고 출마했다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수천만원의 총회발전기금을 내고 당선되기 위해 피말리는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작 자기가 할 일이 뭔지도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막상 당선된 후 “이럴줄 몰랐다”고 하면 믿고 찍어준 총대들은 뭐가 되는가 말이다. 총회 임원 중 어느 직책도 사소하거나 미미한 것이 없다. 임원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임원은 정말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각자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임원이 된 것이고, 그 일을 맡기기 위해 총대들이 뽑아준 것이다. 부임원일 때 열심히 배우고, 정임원이 되면 그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임원은 정, 부 임원일 때 다양한 소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임원 후에도 선관위를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회록서기는 당연직으로 다음 회기에 선관위 심의분과장을 한다. 회록서기를 했기에 그 직책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심의분과장으로 인해 현재 총회가 얼마나 시끄러운가 말이다. 이것을 보면서도 자기가 맡은 임원직이 중요하지 않다고 발언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맡은 직분이 사소하다고 말하지 말고 각자 맡은 직분에 더욱 충실한 임원들이 될것을 부탁한다. 계속 지켜볼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6
  • 【단상】 목회세습...최순실과 정유라가 떠오른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모두의 공분을 살만한 글을 썼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몰 원망해” 목회세습을 볼 때마다 기분 나쁘게 최순실과 정유라가 떠오른다. 어미가 국정을 주무르는 댓가로 주어진 많은 특혜를 누리며 공주처럼 살았던 자가 정유라가 아니던가? 최근 합동 교단내 두 교회가 목회세습에 성공했다. 큰 잡음없이 아버지는 원로가, 아들은 위임목사가 되는 예식을 무사히 치러냈다. 합동 교단에는 세습 금지 규정이 없다. 그래서 암암리에 크고작은 교회들이 세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 세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 말년에 세습에 실패해 교회가 쑥대밭이 되고 목회를 말아먹는 경우도 왕왕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꿈꾸고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된 말로 남주기 싫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로는 주님의 은혜로 목회했다고 하지만 자기가 노력해서 이룬 목회지를 남에게 주기 싫어 아들에게, 사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타교단에서는 3대 세습을 한 교회도 있다. 세습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교회 재정으로 자식들을 해외유학 보낸다. 그정도 실력이 안되면 아는 선교사가 있는 선교지로 보내 해외 물을 먹게 만든다. 이처럼 교회 돈으로 자기 자식을 최대한 교육 시킨 후 “봐라 이만한 스펙이 있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하며 자기 자식과 사위를 후임자로 디민다. 그러면 양같이 순한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고생했다는 이유로, 큰 교회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 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치밀한 세습 계획은 완성이 된다. 종종 취재를 가면서 알게된 부목사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40대 후반인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교회에서 안보는 날이 빨리 와야할텐데”라고 말해준다. 빨리 담임목회하러 나가라는 말이다. 그러면 계면쩍은 웃음을 보인다. 담임으로 나가고 싶어도 갈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신문을 보고 담임지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수십 수백통의 이력서가 쌓이기에 섣부르게 이력서를 지원했다가는 담임목사에게 찍혀 사임 압박을 받을 수 도 있다. 혹시 담임목사가 목회지를 소개해주면 좋은데 그도 여의치가 않다. 이래저래 세월만 가서 어느덧 50줄을 바라보는 부목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슬슬 사임 압박을 한다. 문제는 나이 많은 부목사를 받아줄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이든 부목사의 현실인데 세습 시켜주는 아버지를 둔 아들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교회 돈으로 일찍 유학해 스펙을 갖췄으니 경쟁력도 있고, 세습을 반대해 일부 교인들이 떠나도 큰 분란만 없으면 무혈입성을 하니 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세습한 목사에게 묻고 싶다. 교회는 주님의 것인가? 당신의 것인가? 교회가 주님의 것이라면 어찌 자식에게 세습할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사를 선택할 권한을 무시한 채 어떻게 세습을 시킬 수 있는가? 세습 목사와 그 아들에게서 최순실과 정유라를 떠 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 피해망상인가?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5
  • 【북토크】우리는 조지 오웰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조지 오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1940년대 작가이다. 그의 책 『동물농장』과 『1984』는 여전이 많이 읽히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 대해 이 책을 쓴 저자는 머리말에서 『동물농장』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를 알려준다. 이 책을 펴든 사람이면 누구나 오웰이 『동물농장』 과 『1984』를 썼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영어로 쓰여진 『동물농장』이 세계에서 최초로, 다른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것도 원서가 나온 지 3년 만인 1948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1948년에 쓴 『1984』도 그후 곧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모를 것이다. 그래서 오웰은 우리와 특별한 인연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을 반가워 해야 할까? 아니면 악연이라 해야 할까? 더욱이 미국 해외정보국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오웰의 작품을 번역 출판하게 하였으며, 이를 위해 미국 정부가 작품의 판권료까지 지불했다는 것은 앞의 사실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다(p. 7). 이처럼 조지 오웰의 책은 처음부터 왜곡된 방향으로 읽혀졌다. 그는 단지 공산주의를 반대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작가이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전체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에 매몰될 때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는가를 작품으로 밝힌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국가 형태가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모두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면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당연함을 누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195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책은 여전히 읽혀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바르게 읽혀져야한다. 다음은 책 인용문이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러시아혁명에 대한 풍자를 의도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큰 교훈 '그런' 종류의 혁명(무의식적으로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지도하는 음모적인 폭력 혁명)은 지배자를 바꿀 뿐이라고 하는 교훈만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에서 끌어내야 할 교훈은, 혁명에 의해 근본적인 개선이 가능해지는 경우는, 대중이 경계심을 갖고 지도자가 그 역할을 다하면 바로 추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때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돼지가 우유와 사과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삼은 때였다고 생각되리라(크론슈타트 요새의 수병들이 탄압받은 것에 대응된다). 만일 다른 동물들이 그 시기에 확고하게 반대했다면 잘 되었으리라. 내가 현재의 상태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비관적이 되어, 독재나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자비에 가득 찬 독재 체제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p. 278-279). 오웰은 1950년에 죽었다. 그후 반세기 동안 그에 대해 끝없는 논쟁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논쟁에 무관하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비록 미국 정부에 의해 읽기를 강요당한 최초의 쓰라린 역사가 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읽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오웰은 사회주의자이고, 그의 모든 책은 사회주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소련이나 중국 또는 북한 등 이미 존재했거나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는 그 어떤 실존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명백히 반대했다. 그것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따라서 그의 작품이, 특히 『동물농장이나 『1984년』이 그런 관점에서 읽혀져야 하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결코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본주의를 찬양한 적이 없다. 물론 그의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에 대응될 정도의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권이 중시되는 반독재, 반계급, 반차별의 사회를 그가 추구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완전한 이상 사회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읽히고 있고, 앞으로도 여전히 읽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pp. 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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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5
  • 【사설】 오광춘 회장의 전장연 미래는 밝을 것이다
    지난 12월 21일 제53회기 첫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오광춘 장로, 이하 전장연) 전국임원회의 및 기도회가 오전 11시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예년과 달리 회의는 오전 예배와 축사 등을 끝내고 중식 후 하는 것으로 했다. 오 회장은 회의를 충분히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의는 총 30여분간 했다. 첫 회의라 사업계획, 예산 등 민감한 주제를 다뤄야했다. 이때 특별위원장, 부위원장, 역원, 실행위원 선정의 건으로 여러 의견이 오갔다. 인원 구성에 있어 지역 안배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서로 각자의 지역을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 예민할 수 있는데 오 회장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앞서 오 회장은 예전과 다른 여러 사업 계획을 소개하면서 먼저 자신이 그 일을 위해 호주머니를 열 것을 약속했고 자원자들의 헌신으로 감당할 것을 말했다. 이에 회원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호응했다. 결국 아무탈 없이 회의는 마무리 됐다. 그동안 회의를 취재가면서 고성이 오가는 것도 많이 보고, 감정이 격해져 막말을 하는 것도 많이 봤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목사와 장로가 맞는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영상 취재를 해놓고 남부끄러워 유튜브에 올리지 못하고 버린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 전장연 회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취재하면서도 마음이 편했고 굳이 이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회기 오광춘 회장은 본인이 솔선수범하고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이에 회원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안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 자기 주장을 먼저 하지 않고 발언할 기회를 주고 원만하게 결론을 도출하기에 큰 충돌없이 회의가 진행됐다. 이 또한 좋은 모습이다. 그리고 증경회장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대하기에 소위 “괘씸죄” 논란을 피해갔다. 앞으로도 이러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다른 연합 단체에 본이 되는 전장연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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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2-23
  • 【사설】 이이복 장로에게 미안하고 사과한다
    소위 선관위 1000만원 뇌물 수수 사건에 대한 감사부 보고서가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먼저 이이복 장로에게 미안하고 사과한다. 명색이 기자라는 나도 이이복 장로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란 속담처럼 후보 통과를 위해 뇌물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취재 과정 중에 이이복 장로를 볼 기회가 있을 때 좋게 보지 않았다. “왜 뇌물 사건을 일으켜 총회를 어지럽히는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사부 최종 보고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감사부는 “이이복 장로에 대해선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주홍동 장로에 대해선 이견 없이 선관위 뇌물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독신문에 의하면, 선관위원이었던 주홍동 장로는 이이복 장로의 후보 확정을 위해 이종철 목사에게 1000만원을 전달해 현역 선관위원이 개입된 초유의 뇌물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감사부는 심의분과장 이종철 목사도 선관위 뇌물 사건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이종철 목사가 이이복 장로에게 소명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은 점, 이이복 장로와 주홍동 장로의 대질심문을 진행하지 않은 점, 이이복 장로에게 후보 탈락 통보를 하지 않은 점 등에 의도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감사부는 이종철 목사가 주홍동 장로에게 1000만원을 받은 것도 문제 삼았다. 애초에 이종철 목사가 1000만원을 받지 않고 주홍동 장로를 돌려보냈다면, 지금처럼 사건이 확대될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감사부는 선관위 뇌물 사건은 이종철 목사와 주홍동 장로, 두 사람 간에 있었던 일로서 이들은 총회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켰기에 이들에게 상응한 징계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임원회에 보고서를 올렸다. 앞으로 이 소란을 일으킨 이종철 목사와 주홍동 장로에 대해 총회가 어떤 식으로 징계할지를 지켜볼 것이다.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라 신상필벌, 일벌백계의 강력한 징계가 있어야 총회 기강이 바로 선다. 필요하다면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이복 장로가 무고한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뇌물 사건으로 인해 이이복 장로는 후보 박탈을 당해 돌이킬 수 없는 명예 실추를 당했다. 또한 그가 속한 노회와 교회 그리고 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는가? 피해자가 당한 것만큼 가해자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래서 민형사상의 처벌도 불사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이복 장로가 후보 탈락함으로써 그를 지지했던 총대들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경선에 나섰다면 당선될 가능성도 있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총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가? 이이복 장로에게 충분한 보상과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야한다. 총회 산하기관인 선관위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연대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9회 장로부총회장으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는 아직도 많은 의혹이 있다. 이 일에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이복 장로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나왔기에 다시 한번 그를 의심한 기자로서 공개적으로 사과한다. “이이복 장로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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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2-22
  • 【감사】 함께 이룬 도너월
    총신대에서 카톡으로 사진이 왔다. 종합관 1층 우측에 있는 도너월에 내 신문사와 이름이 기록된 명패가 제작된 것을 알려주는 사진이었다. 감사한 일이다. 지난 총회 이후 아내의 허락으로 500만원을 발전기금으로 내기로 했다. 원래 매월 10만원씩 모아 4년 후 500만원을 만들어 내기로 한 것이었는데 일시불로 미리 내기로 한 것이다. 이후 송금하고 얼마있다 도너월에 이름이 등록됐다. 내 신문사와 내 이름으로 등록이 됐지만 이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4년간 신문사를 마음과 물질로 협력하고 후원할 모든 분들과 함께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빛과소금뉴스가 만들어진지 2년밖에 안됐지만 좋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감사하다. 멋모르고 뛰어들었는데 나름의 역할을 앞으로도 잘 감당하고 싶다. 이 일에 많은 분들의 지도와 격려를 부탁드린다. 인터넷 신문은 지면 신문과 달리 기사 분량에 제한이 없다. 그래서 많은 내용을 실어줄려고 했고 또 사진도 수십장을 넘게 게재한다. 그리고 요즘은 동영상도 첨부해준다. 기사로 다 전달할 수 없는 현장의 내용을 영상으로 보충하기 위해서다. 영상 촬영을 위해 그동안 쓰던 아이폰 12미니 64기가에서 아이폰 15프로 256기가로 기변하고 휴대용 삼각대도 갖고 다닌다. 그래서 볼만하게 영상이 나온다. 그런데 이 모든 기사와 영상은 신문사가 존속해야 볼 수 있다. 어느 날 신문사가 문을 닫고 사라지면 그 동안의 모든 기록과 기사는 사라진다. 그것이 지면 신문과의 차이점이다. 앞으로 오랫동안 빛과소금뉴스가 살아 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함께 해 주실 것을 믿고 발전기금을 미리 낼 수 있었다. 늘 독자와 함께 하는 신문으로 오랫 동안 동행하기를 소원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2-19
  • 【북토크】 사람답게 살기의 그 어려움
    조정래는 역사 소설에 강하다. 그는 건조한 역사 서술에 이야기를 엮어 역사를 생동감있게 보여준다. 그것이 『태백산매』,『아리랑』, 『한강』과 같은 대하소설이다. 그의 책 『인간의 탈』을 읽었다. 과거 일제 강점 시대 조선의 하층민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려가야했다. 그들은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으로 싸웠고, 포로가 되어 소련군이 되고, 또다시 포로가 되어 독일군이 되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소련으로 포로 송환된 뒤 비참하게 처형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다. 이전에 한 방송국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프로를 방영했다. 이것과 맥을 같이하는 소설이다. 국가의 책임자가 나라를 지키는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오롯이 그 고통을 당해야한다. 무능한 고종에 의해 국가는 일본의 지배를 당하고 그 밑에서 백성은 목숨을 잃어야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다음은 소설의 일부이다. 그들의 마음은 급했고, 배는 더디 갔다. 이십여 일 만에 배는 소련땅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린 포로들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을 탔다. 수십 대의 트럭은 금방 항구를 벗어나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트럭들은 가을 기색이 비치기 시작한 들판을 한 시간 남짓 달렸다. 야트막한 야산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 앞에 달리던 트럭이 어느 야산 자락에 멈추어 섰다. 뒤따르던 트럭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다붙어 멈추었다. 그곳은 네댓 개의 야산들이 어깨동무하듯 모여 반원의 분지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여기서 삼십 분 쉬어 간다. 모두 내려 트럭선(線) 안에서 소변도 보고 자유롭게 쉬어라.” 장교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포로들에게 일렀다. 사병들은 트럭 사이사이에 서서 포로들을 분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나무들 많은 야산으로 에워싸인 그 분지는 수많은 포로들이 용변을 보면서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지막 트럭에서 포로들이 다 내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타당탕탕탕탕·····. 타당타타타타……… 드득드드드드...... 야산 숲 속 여기저기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쉬고 있던 수많은 포로들은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나뒹굴고 뒤엉키고 있었다(pp 212-213).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12-17
  • 【북토크】 외골수의 인간 승리,이국종 의사
    10여년전 큰 뉴스거리가 있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이다. 2011년 1월 15일 아브디 리스케 샤크가 이끄는 소말리아 해적 일파에 의해 피랍된 1만톤급 화물선 삼호 주얼리(SAMHO JEWELRY)호를 구출하기 위해 같은 달 18일 대한민국 해군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통칭 청해부대)가 실시한 해상 작전이다. 이는 한국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최초의 인질 구출 작전이었으며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주도 아래 미국, 오만, 파키스탄 등 항구적 자유 작전에 참가한 국가의 함정 및 병력이 작전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은 납치 6일 만인 2011년 1월 21일, 청해부대 소속 해군 특수전전단(UDT/SEAL) 팀의 급습을 통해 해적 8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인질 21명(한국인 8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전원을 구출하여 작전에 성공하였다. 이때 석해균 선장이 해적 일당이 쓴 총으로 인해 중상을 입는다. 그를 살리기 위해 나선 이가 바로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중증외상 치료 센터장 이국종 교수이다. 그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수많은 위급 환자의 생명을 살려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가 드러난 사건이 바로 아덴만 여명 작전 때 중상을 입은 석 선장을 살려낸 일이다. 이로인해 한동안 매스컴은 그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중증외상치료 센터가 필요하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그러나 곧 잊혀졌다. 이국종 교수는 8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통해 그가 걸어온 중증외상치료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 얼마나 묵묵히 그 일을 감당했는가를 토해내고 있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목숨을 건지게 됐다. 이 책을 보면서 이순신을 생각했다. 수많은 모함에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갖고 결국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이국종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는 2020년 아주대 권역외상센터 센터장 자리에서 물러나 해군 명예 중령으로 활동하며 해군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석해균 선장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 없는 환자의 부서진 몸 곳곳에 핏줄 같은 라인들이 꽂혔다. 인공호흡기와 각종 모니터, 약제 투입기 등이 연결됐다. 너덜거리는 사지의 위는 스플린팅하고 아래는 견인장치를 걸어 당겼다. 비행중에는 강심제와 혈압 상승제, 항생제 등을 계속 투여했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 그칠 새 없이 솟는 이마 위의 땀을 김지영이 끊임없이 닦아냈다. 김지영은 한국에서 출발한 이래 한숨도 자지 못 한 채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나는 김지영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으나, 그는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무심하게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해야 할 일. 우리가 석 선장을 살려와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계속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외과 의사로서의 내 업무 범위에 대해 갈등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생계유지에 어려움이 없는데 나는 자꾸 극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나로 인해 기인되는 것인지 밖으로부터 벌어지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환자는 나의 갈등을 알지 못했으나 이제 그와 나에게 생사의 조건은 같았다(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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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3-12-17
  • 【북토크】 불륜은 짜릿한 몰락의 입맞춤이다
    어느 책을 읽다가 프랑스 아니 에르노 작가의 『단순한 열정』이라는 책을 소개 받고 읽었다. 이 작가는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이 작가를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수상 이유로 들어 에르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에르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17번째 여성 작가가 됐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118명 가운데 16명만이 여성이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20년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 받은 바 있다. 이혼녀인 그녀는 가정이 있는 외국 남자와 불륜에 빠진다. 불륜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불륜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생의 환희를 만끽했다. 그 자전적인 소설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왜 불륜에 빠지는가? 특별히 중년의 남자인 목사들이 왜 불륜에 빠지는가? 잃어버린 생의 환희를 느껴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륜은 신기루이며 환상이다. 생의 모든 것을 댓가로 지불해야한다. 그럼에도 여러 목사들이 불륜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과거 불같은 사랑을 하고 삶의 환희를 주었던 아내, 사모에게 만족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불륜으로 새로운 남자을 만난 작가의 심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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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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