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싶다-하시다 스가코 저자(글) · 김정환 번역 · 바이문 그림/만화 21세기북스 ·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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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오싱〉이란 책에 대해 얼핏 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 저자가 노년에 연명 치료 없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다. 저자는 2차대전을 겪으며 이미 죽음에 대해 숱하게 경험했기에 노년에 이르러 죽음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다. 나도 죽음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이 생각한다. 잘 죽기를 바라면서. 현재 이 책은 품절됐고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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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하나

존엄한 죽음을 위한 한 걸음

죽음은 우리 주변을 늘 맴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하고,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려 할 뿐이다. 이는 청춘과 노년을 막론하고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안락사로 죽여주세요!"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하시다 스가코를 만날 수 있다. 하시다는 나이 든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오싱〉이라는 일본 드라마의 각본가다.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가 왜 죽음이라는 두렵기만 한 낱말을 넘어 안락사라는, 어찌 보면 사회적 금기를 공공연히 입에 올리고 법제화(p. 5)를 외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아마도 현대 과학과 함께 발달한 의료의 발전으로 이전 세대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죽음의 패러다임을 바꿨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민감하다. 현대 의학은 중환자의료(intensive care 또는 critical care)라는 분야를 발전시키면서 예전 같으면 사망했을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많이 살려냈다. 또 한편 중환자 의료에도 소생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즉 회색지대(gray zone)에 놓인 환자들이 많아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의 후생노동성은 2007년에 회색지대에 놓인 환자들에 대한 규범적 가이드라인인 '종말기 의료의 결정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 발표했으며, 2015년에 이를 '인생의 최종 단계에서의 의료 결정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으로 개정했다. 하시다는 이에 대해 존엄성에 신경을 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투로 평가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중환자 의료 중지에 관한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p. 6) 일본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8년 2월경에야 '호스피스 • 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매우 길고 복잡한 이름의 법이 시행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안락사, 존엄사, 소극적 • 적극적 안락사 등의 용어에 대한 하시다의 의견은 일본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쟁조차 시도된 바 없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 이들 용어에 대해서 한 번쯤 고심해봐야 한다. 자칫 인터넷 정보에 의지해 용어를 정의한다면 혼란과 논란을 부추길 수 있다.

의학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의 '안락사'는 자발적 안락사, (의사) 조력사망, 연명의료 결정,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안락사(euthanasia)란 사실 오래전부터 쓰였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다. 안락사(安樂死)의 한자어를 해석하자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란 뜻이다. 또 그리스어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를 해석하자면, '에우(eu)'는 '좋은' 또는 '편안한'이라는 뜻이며 '타나시아(thanasia)'는 죽음이란 뜻이니 안락사란 적절한 번역이다. 그러나 안락사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왠지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2차대전 때 독일(p. 7) 나치가 유대인, 집시 및 장애인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일 것 이다. 또한 이 책에서도 기술한 안락사가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으로 연결될 거라는 우려도 한몫한다. 다만 이 책에서도 서술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선진국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안락사(volunatary active euthanasia)를 허용한다. 한편 존엄사(detah with dignity)라는 용어는 보다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2009년 2월 16일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신 날 이후일 것이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여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등의 연명 치료를 거부하였고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였다. 언론은 이를 존엄사라는 용어로 서술하였으나 당시 가톨릭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존엄사로 표현하는 데 극력 반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겸손하게 순응하였습니다"라는 말은 가톨릭교리 문답서(p. 8)에 있는 내용이다. 이는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1997년 실시한, 자발적 ·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 나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미의 존엄사'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존엄사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다는 인권 측면의 의미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살'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고 싶어 하는 지은이의 소망 은 결국 존엄사의 부정적 의미인 자살을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자기 결정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은이는 구체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PAS)과 앞서 언급한 적극적 안락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의사 조력 자살이란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및 미국의 오리건주, 워싱턴주, 버몬트주 등이 허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회생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적극적 안락사와 다른 점은, 스스로 죽음을 결행하는 게 아니라(p. 9) 자신이 방법을 선택한 후 의사 등이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었듯이 의사 조력 자살과 적극적 안락 사는 진보적 국가에서도 첨예한 논쟁거리이다.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 조력사망 법안을 네 차례나 상정하였으나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았으며, 2010년대에도 82퍼센트의 찬성(여론조사)을 얻어서 조력사망 법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메릴랜드주의 상원에서 결의한 조력사망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될 정도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경우 국민 70퍼센트가 존엄사를 찬성(「아사히신문」 조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90퍼센트 정도가 존엄사를 찬성(2008년 국립암센터 조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 스스로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필요성이 있음을 차분히 설득하고 있다. 지은이 하시다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의료 시스템을 꼬집으며 왜 안락사 또는 조력 자살이 필요한지 서술하고 있다. 특히 복수의 의사와 간호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변호사로 구성된 팀이 적극적(p. 10) 안락사를 판단하게 하자는 제안은 하시다가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고해왔음을 방증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은 보통 사람들과 격리되어 의료진의 몫이 된 지 오래이다. 환자가 가족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던 시절에는 의사가 가족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건강하게 장수하는 삶이 강조되면서 죽음의 과정,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관련한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더욱이 환자가 최신 의학 장비에 둘러싸여 사망하게 되면서 고인의 의지 및 마지막으로 남기려 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한편 의사로서 '살리기만 하는' 의료에서 '선택지를 부여하는' 의료라는 하시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도 최근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와 관련해 소통과 윤리적 대응을 배우고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선택(p. 11)지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자'라는 제안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모두 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만 누구나, 언제든 죽음을 맞닥뜨릴 수 있다.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는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다.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p. 12)

 

추천의 글, 둘

삶은 선물, 죽음은 선택

"삶에 더는 미련이 없다. 이제는 기꺼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노인이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선뜻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힘껏 말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왠지 죽음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느낌이 든다. 생판 남이라도 이럴진대, 지인이거나 가족이라면 제발 그런 생각일랑 멈추라며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노인이 나라면 어떨까. 작가 하시다 스가코는 어린 시절부터 스무 살까지의 청춘을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보냈다. 군수 공장 배전반의(p. 13) 나사를 조이고, 또래 자살 특공대원에게 기차표를 건네며 '인간은 왜 태어난 걸까'를 수없이 되뇌던 시절을 거쳐 전쟁이 끝난 후 영화사 '쇼치쿠'의 첫 여성 각본가로 입문해 훗날 일본의 국민 드라마 작가가 된다. 그녀의 대표작인 NHK 아침 드라마 〈오싱〉에서, 오싱의 장남은 전쟁터에서 죽고 남편 또한 전쟁의 부채감에 시달리다 자결한다. 하시다는 평범한 인물들도 어떤 이유와 상황에서든 전쟁에 협력했기에 이에 대한 벌을 내려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전쟁의 책임은 지도자뿐 아니라, 소녀였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 역시 철저히 부정당했을지언정, 그녀는 타인의 존엄을 잊지 않고 반성 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하시다가 나이 여든이 되고부터 유언장을 쓰기 시작하고, 여든아홉이 되면서 본격적인 종활(죽음을 준비 하는 활동)에 들어갔다. 각본 쓰는 일에서 은퇴하고, 지금까지 집필해온 원고와 소장한 비디오테이프, 주고받은 편지 모두 정리하고 책도 기증했다. 모아온 핸드백들도 팔아버리고,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일기 쓰기 역시 그만둔다. 옛(p. 14) 문서들을 꺼내 줄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버릴 때는 파쇄기까지 구입해 끝장을 낸다. 그렇게 정리를 시작하고 완성 하는 데 무려 2년이 걸렸다. 자못 처량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체력이 충분할 때 시작하라고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도리어 꼿꼿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이제 텔레비전 출연을 사양하고, 주변의 장례식과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하시다가 2016년, 「분게이 슌주」에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라는 글을 싣자마자 수많은 독자의 동의가 뒤따르며 전국적으로 안락사 논쟁이 일었다. 그녀는 그제야 정색하며 "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생각을 요구받은 적이 없으며, 주변 사람이나 사회 역시 절대 이런 입장을 강요해선 안 된다"라고 말한다. 안락사는 고려장이 아니다. 인공 호흡기에 의존할지라도 끝까지 숨을 붙여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의 입장도 있고 이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종활에 들어간 그녀에겐 법안 통과를 위해 앞장설 여력도 없다. 다만 자신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응급차를 부르지 말아달라, 혹시나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할 경우 위에 관을 삽(p. 15)입하지 말아달라, 불필요한 연명 조치 대신 가능하다면 잠 들듯이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등의 부탁을 할 뿐이다.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더라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적었다. 장례식과 주도회는커녕, 혹시 각본을 쓴 드라마가 재방송되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조차 싫다는 마음은, 나로서는 아직 가늠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라는데, 말리는 것은 오히려 내 마음 편하자는 행동이 아닌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사람들이며 물건들을 붙잡고, 아픈 몸을 이끌고 치료를 다녀야만 하는가. 세상에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달라며 끝없이 외치는 삶이 진정 존엄한 것인가. 자존심이 센 그녀는 이미 30여 년 전 죽은 남편 곁이 아닌 곳에, 자신이 묻힐 자리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우리는 언젠가 이별이 온다는 사실을 줄곧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때가 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면서도. 하지만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녀에겐 그런 상상조차 사치일 뿐이다. 이러다 치매라도 걸린다면, 연고도 없는 누군가에게 병수발을 부탁해야 한다. 스스로 끝을 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다(p. 16).

책에는 이런 그녀가 매년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혈당이나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을 복용하며 매일 200그램의 고기를 챙겨 먹는다는 사실이 쓰여 있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수영을 즐기고, 일주일에 사흘 트레이닝으로 근력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일면 모순된 노력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생에 미련이 없는 사람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삶의 존업성을 지키기란 이렇게 힘이 든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할 뿐, 끝을 늘리는 것이 해답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 매년 노인 대상 의료 서비스가 폭증하고 복지 분야 재화와 일손 부족이 심화되며 연금 고갈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인류의 장수가 과연 축복이냐고 묻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 허용 국가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등 몇 곳에 불과 하며, 미국의 나머지 주와 유럽,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제한적 존엄사만을 허용한다. 일본의 경우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지만 존엄사를 허용하며, 한국에서도 일명 웰다잉법, '연명의료결정법'이 올해 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여러 절(p. 17)차를 거치긴 하지만, 임종기 환자가 연명 의료 중단을 원할 경우 이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길이 열렸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존엄사와 적극적 안락사의 간격 역시 크다. 적극적 안락사 허용이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 등에게 삶을 포기할 것을 직간접으로 강요하게 될 거라는 우려도 남아 있다. 죽음을 고민하는 이들 가운데, 하시다와 같이 사회적 • 경제적으로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소유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서 먼 이야기로 느껴진다 했지만, 죽음이 병자 또는 나이 든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모습이든 간에 이를 연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인가. 작가는 결국 자신에게 안락사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의 법제화를 기다리기 전에 스위스로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선택의 때가 오면 실행할 수 있을지, 역시나 죽음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안락사가 합법적 자살을 늘릴 것이라는 주장에, 그녀는 미국 오리건주에서 스스로 안락사 약을 받은 사람의 40퍼센트가 결국은 약을 복(p. 18)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다. 살아 있는 동안 제대로 살고,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도록, 부디 배려해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노인이 여기 있다. 그녀를 도와야 할까 여전히 주저하게 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삶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죽음 또한, 그 삶의 일부다. 김소영 당인리책발전소 대표(p. 19).

 

전쟁의 기억

내 생사관의 밑바탕에는 전쟁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했더랬다. 일본은 강해, 특별하고 위대한 나라야, 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생각하건대, 지금의 북한 주민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세뇌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1925년 5월 10일에 당시 한국의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에서 '조선물산'이라는 토산품(p. 31) 가게를 운영하셨다. 스가코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경성에 있던 조선 신궁에 가서 받아 오신 것이다. 그렇게 경성에서 살다가 교육은 역시 일본에서 받는 편이 좋겠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둘이서 귀국해 오사카의 사카이에서 살았고, 1943년에 오사카 부립 사카이 고등 여학교를 나와 도쿄의 일본여자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학생도 전쟁에 동원되어, 나는 수업을 받는 대신 전투기의 배전반을 조립하는 군수 공장에서 배전반의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볶은 콩과 볶은 쌀을 챙겨 들고 방공 두건에 작업용 바지 차림으로 공장에 출근했다. 배는 항상 고팠지만, 일이 끝나면 '오늘 하루도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구나' 하는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참으로 장한 군국 소녀라 스스로를 여겼던 것이다(p. 32).

 

아아, 어머니,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

그때 나는 '아아, 어머니,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생각했다.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심경이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다 한들 나을 것이 없었다. 내일에 대한 희망 따위는 가질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매일 같이 공습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이대로는 어차피 조만간 죽을 것이다, 나 또한 틀림없이 죽는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 일찍 돌아가셔서, 일찍 편해지셔서 다행이에요'라는 심정이었다. 더는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오사카 교외에 사는 큰어(p. 37)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는 연기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잠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 구호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내 큰어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뭐야, 살아 계셨어?'라며 실망했다. 이른바 생사관이 지금하고는 전혀 달랐다. 어제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이 오늘 죽더라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죽는 것이 당연하고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시대였다. 당시의 일본인이 전부 그러진 않았지만, 나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전쟁의 승패보다도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젊은 여자들은 모두 같은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미군이 상륙하면 치욕을 당하기 전에 기필코 죽는다, 그 동안 훈련한 대로 죽창을 휘두른 다음 자신의 목을 찌르든 목을 매든 어떻게 해서라도 죽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단노우라에서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던 헤이케 가문의 여성들처럼. 그것이 일본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p. 38)

 

청춘이 없던 청춘 시절

사실 그때 해군 경리부에서 어떤 서류를 태워버렸는지 나도 모른다. 해군 경리부에는 민간 은행이나 대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다 군인이 된 사람이 많아서 군대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멋진 사람들로 가득했고, 개중에는 이사생으로 일하던 여학생과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나와 같은 세대의 수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 돌아온 남자들은 자신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 했다. 우리는 외면받은 세대였다. 남자 한 명당 여자 한 트(p. 42)럭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다. 일본여자대학교 동창 중 절 반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무서운 이야기다. 전쟁은 내가 여학교 4학년일 때 시작되어 여대 3학년일 때 끝났다. 그렇다 보니 내 삶에 청춘은 없었다. 열대여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낭만적이거나 아름다운 기억은 전혀 없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먹고살기 급급해서 연애 같은 것 을 할 여유가 없었다. 돈 많은 남자 있으면 시집이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한창일 때는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이 대체로 건강한 이유는 어쩌면 소박한 식생활을 한 덕인지도 모른다. 우리 어렸을 때는 햄버거나 콜라는 꿈도 못 꾸고 채소와 감자, 고구마 따위만 먹으며 자랐던 것이다. 행복의 의미도 달랐다. 그때는 돈이 없어도, 배불리 먹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죽어라 일해서 빵 하나를 샀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지금 호화로운 3만 엔짜리 코스 요리를 먹을 때보다 더 컸다. 기차도 지금은 쾌적한 신칸센을 탈 수 있지(p. 43)만 당시에는 차창으로 연기가 꾸역꾸역 들어오는 콩나물시루 같은 3등석을 이용했다. 그래도 감사했고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p. 44).

 

인절미가 가르쳐준 삶의 고마움

이윽고 우리는 야마가타의 아테라자와에 도착했다. 10월 말 야마가타 분지는 눈 닿는 곳 어디나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폐허가 된 도쿄와 달리 벼들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세상에, 저게 다 쌀이야!' 하며 감동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풍요로운 정경은 여전했다. 두보의 시 한 구절처럼 "나라가 망했어도 산천은 변함이 없구나"였다. 나는 야마가타의 경치를 보고 비로소 '이 나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어쩌면 나도 계속 살아(p. 47)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큰어머니는 목재상의 헛간을 빌려서 살고 계셨다. 목재상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차와 인절미를 내주셨다. 대체 몇 년 만에 제대로 달인 차를 맛보는지, 또 이렇게 고물을 듬뿍 묻힌 인절미를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입안에 집어넣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야마가타 사투리로 뭐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여기도 물자가 부족할 텐데, 생각 없이 너무 많이 먹었어' 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얼마 후 콩가루에 깨, 호두, 풋콩을 으깬 것을 비롯해 일곱 종류나 되는 인절미가 나왔다. 아까 아주머니께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직 나올 게 많은데 벌써 그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하니?" 야마가타는 내게 구원의 땅이었다. 매일 곁에 바싹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내일은 기필코 나라와 함께 죽겠노라 각오한 만큼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내게 삶과 희망, 미래를 꿈꾸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전쟁이 불행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후의 생명, 이후의 인생은 선(p. 48)물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받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수 는 없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힘들어도 고생으로 느낀 적이 없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된다. 돈이 없어도 전혀 괴롭지 않다. 전쟁 중에는 먹을거리를 구할 수만 있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줄곧 이런 마음가짐으로 '새로 받은 생명', '새로 받은 인생'을 살아왔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욕심 내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p. 50).

 

제발 장례식은 사절!

젊었을 때부터 나는 죽었을 때 장례식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가기도 싫어하지만 장례식에 가기도 싫어한다. 일본여자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장례식은 번거롭고 낡은 계급 제도의 상징으로 치부했다. 화족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호화로웠다. 가족 말고는 두세 명만이 찾은 쓸쓸한 장례식에도 가봤다. 그러는 가운데 '장례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왜 이런 차별의 상징 같은 행위를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세상을 뜬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데 다들 무엇(p. 69)을 위해 모이는 걸까? '이 장례식에 가면 아무개와 아무개 를 만날 수 있으니 가볼까?' 하고 이해타산을 따져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도 가봤다. 유명인이 죽으면 커다란 장례식장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리거나 일류 호텔에서 고별식이나 추도회가 열려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그중에 정말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자식이나 친척이 많으면 장례식은 그들을 위한 행사이다.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유족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내게는 육친이 없다. 개중에는 생전 장례식에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지인들과 떠들썩하게 이별을 고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야 열 사람 다 다른 법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장례식도 회상 모임도 원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사교의 빌미로 이용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 장례식을 치른다 해도 어차피 의리상 찾는 사람밖에 없을 터이니 굳이 발걸음을 하게 만들기가 미안하다. 의리 때문이라면 굳이 안 와도 된다. 그냥 화장해서 무덤에 넣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내 무덤은 이미 아버지의 고향인 에히메현 이마바리시(p. 70)에 만들어놓았다. 28년 전에 죽은 남편의 무덤은 시즈오카에 있으니 또 한 번 이별하는 셈이다. 마마보이였던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는데 이 묘소에는 남편의 부모님과 아주버님 부부도 함께 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아주버님은 내게 "미안하지만 제수씨는 우리 묘에 들어올 수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하고 기뻐하면서 이유 따위 묻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어머니 문제로 꽤나 고생했기 때문에 죽어서도 함께 사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p. 71).

 

〈오싱〉의 경우 어디를 가든 안 보는 사람이 없었고 나를 떠받드는 사람까지 있었다. 소설은 안 읽는 할머니들도 〈오싱〉을 즐겨 보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아, 각본가가 되기를 잘했어.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가 있었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좋은 글을 더 많이 쓰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동안은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건강하게 살아야만 모두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각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건강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각본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끝났다. 필요 없는 인생이 된 것이다. 당연히 '슬슬 죽을 생각을 해야겠구나'라는 심정이 들었다(p. 86).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일을 할 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프로듀서나 감독이 수정을 요구하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괜히 반항했다가는 잘려서 생계에 지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싫어서 각본가를 그만두고 결혼이라는 평생직장을 구했던 것이다. 결혼한 뒤로는 남편의 월급이 있는 이상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으면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미있게 도,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썼더니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p. 108).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자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엔딩 노트'를 나도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 정해진 항목에 적어 넣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는 참 편리한 물건이라고 감탄했는데, 잘 들여다보니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알리고 무엇을 남기는지 적게 돼 있다. 친척이나 친구의 연락처와 메시지도 적어야 했다. 나처럼 친척이 없는 외톨이는 사용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적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복잡한 물건이 아니라 보통 공책에 필요한 항목을 최소한도로 메모하고 있다(p. 223). 나는 아흔 살을 목전에 두고 이걸 시작했지만, 좀 더 일찍 시작하면 더 좋다. 젊었을 때부터 '안락사가 좋다'라든가 '숨만 쉬고 있다면 의식이 없더라도 계속 살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고 매년 글로 남기면 좋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떤 재난에 휘말릴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바로 죽는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생일에 적어놓았던 의사 표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안락사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뇌경색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 산책을 하다가 난폭 운전을 하던 자동차에 치여 반신불수가 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생일이 올 때마다 지나온 삶의 의미와 기쁨을 곱씹으면서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습관이란 말인가. 이것이 싫은 사람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죽으면 된다. 성인이 되었을 때를 계기로 삼아 자신이 어떻게 죽고 싶은지, 장기 기증을 할지 말(p. 224)지 등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이다. 애초에 죽음을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말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의사가 나오지 않고, 죽음에 관한 법률과 의료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데 역시 이런 풍조 탓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좀 더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면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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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3】 생일 때 죽음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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