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쾌락 독서 - 문유석 저자(글), 문학동네 · 2018년
전직 판사 문유석 작가의 독서에 대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독서가 쾌락이었다고 했다. 동감이다. 공부할 때는 억지로 읽어야 하는 책들도 있지만 나만해도 이제는 재미로 읽는다. 재미있는 게 많은데 굳이 재미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고역일 것이다. 내게 독서가 재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 되니 독서를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한 나 자신이 무모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도대체 『책은 도끼다』 같은 책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떻게 그렇게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해 폭포수 쏟아지듯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당최 그 정(p. 83)도로 섬세한 감성이라고는 타고나지 못한 시큰둥한 나 자신을 잠시 원망해보았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런 독서도 있고 저런 독서도 있는 거다. 카프카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쳐서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는 거냐며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일갈했지만, 수사법은 수사법일 뿐, 책은 도끼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땅콩일 수도 있고 잠을 재워주는 수면제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책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용법이 있기 마련이다. 심심풀이 땅콩 얘기를 하고 보니 내가 청소년기에 길고 긴 소설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릴수록, 젊을수록 하루도 길고 일 년도 길고 남아 있는 살아갈 나날은 끝도 없어 보였다. 시간은 언제나 무한정 남아도는 백사장의 모래알 같은 것이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발견하면 "우와, 한동안 재미있겠다!" 하며 신이 났고, 게다가 그 소설이 열 권 스무 권 밑도 끝도 없이 길기까지 하면 두고두고 퍼먹을 꿀단지라도 발견한 기분이였던 것 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져버렸다. 대하소설은커녕 조금만(p. 84) 두꺼운 책 앞에서도 멈칫거린다. 사실 읽자면 지금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게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도 짧고 일 년도 휙휙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나날이 벌써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내일이 없는 사람마냥 여가가 생겨도 그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먼저 이리저리 찾다가 오 히려 아무 재미도 없이 흘려보내고 말 때가 많다.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p. 85).
편식 독서법
책 수다도 많이 떨고 여기저기 독후감도 올리고 하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나의 답은 '대충 읽는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 위주로 읽는다'다. 편식 독서법이랄까. 엄마가 억지로 먹으라는 토란국은 국물만 몇 수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소시지야채볶음은 소시지만 쏙쏙 골라 먹는데, 운좋게 킹 크랩을 먹게 되면 마지막 다릿살 하나까지 꼼꼼히 발라먹기 마련이다. 모든 음식을 똑같이 정성스럽게 먹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부분만 먹고는 다음 음식으로 넘어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부위는 천차만별. 난 내(p. 167) 취향의 책을 골라서, 그 책 중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휙휙 넘기며 읽는다. 어떨 때에는 한 책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구절만 맛있을 수도 있고, 기적같이 한 문장 한 문장 전부를 꼭꼭 씹어 먹으며 맛있어할 수도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랑은 왜』 『청춘의 문장들』이 쫀쫀하게 모두 맛있는 책들이다. 다만 내 취향의 '편식 독서'라도 많이 하다보면 점점 그와 연관된 다른 메뉴들도 찾게 되는 것 같다. 음식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같은 이치로 읽어봐도 선뜻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책도 백 번, 천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 순간 뜻이 스스로 통한다고 믿었다는데,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랬던 것 은 아닐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시대다. 꼭 그 책이 아니어도 비슷한 내용을 더 쉽게 설명하는 다른 책들이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책을 백 번 천 번 읽고 있는 사이에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달라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지금의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틀인 『국부론』, 『자유론』, 『법의 정신』, 『통치론』 같은 명저들도 결국 그 책들이 쓰(p. 168)인 시대의 과제를 그 시대의 언어와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진입 장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명저라도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고 그 시대에만 의미 있었던 부분도 많다. 우리가 취할 것은 그중에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진 몇몇 부분들인데, 그런 부분들은 실상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졸아서 그렇지 이미 다 배운 '상식'인 것이다. 그보다는 더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현대의 연구자들이 고전의 핵심들을 알기 쉽게 현대의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해설서들도 얼마든지 많다.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떼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 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 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 이야기다(p. 169).
외국어 학습법에도 이런 이론이 있다. C.I.와 M.I.가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C.I.는 Comprehensible Input, 즉 자기 수준에서 슥 읽어서 70~80퍼센트 쉽게 이해되는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 나머지 모르는 20~30퍼센트는 뇌 속에서 유추가 가능하므로 학습이 되는데, 절반만 이해되는 걸 읽으면 정보 부족으로 나머지 유추가 불가능하여 아무것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서도 같은 원리 아닐까. 문돌이인 내가 갑자기 유체역학 책을 읽으면 아무런 '인풋'이 되지 않는다. M.I.란 Meaningful Interaction, 즉 유의미한 상호작용이다. 언어란 암기 등 단순 인풋만으로는 내 것이 되지 않고 그 걸 써먹어야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과도 연관 있을 것 같다. 책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몇 가지를 글로 적어보거나 남과 수다를 떨어보는 거다. 나는 페이스북에 독서노트 삼아 짤막한 독후감을 끄적끄적 올리곤 해왔는데 결국 그 책에서 내가 내 것으로 흡수한 것은 달랑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거면 내겐 충분하기도 하고. 다시 요약하자면, 남들이 무슨 대단하고 있어 보이는 어려운 책을 읽든 신경쓸 필요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는 게 엄청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렵다. → 고민 말고 바로(p. 170)『피케티 쉽게 읽기』, 그것도 안 되면 『초딩도 읽는 피케티』 또는 『만화 피케티』를 읽는다. 능력도 안 되는데 『21세기 자본』 원전을 꾸역꾸역 읽은 사람은 노동만 했을 뿐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만화 피케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은 그중 몇 대목만큼은 기억하고 써먹을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유명하다고 해서 집었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공감이 안 된다. 자괴감 느낄 필요 없이 좀더 재미있고 수월해 보이는 딴 책을 집어 읽어본다. 한 50페이지까지만. → 그래도 진도가 안 나간다. → 표지가 만화 같은 『미스 함무라비』를 집어든다. 이건 초딩도 읽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름 재밌네. → 유의미한 상호작용으로 기억에 남기기 위해 완독 후 독후감을 인스타에 올린다. 뭐 이런 얘기....(p. 171).
티브이, 인터넷과 책의 차이
독서에 관한 책을 쓰다보니 자괴감이 든다. 솔직히 어린 시절과 달리 책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뭘 제일 먼저 집어 드는지 스스로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1번이 스마트폰, 2번이 티브이. 책은 3번이다. 예열이 필요 없는 순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순서다. 티브이로 영화 하나 보려고 해도 백 분 정도 몰입해야 한다.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는지, 그 정도로 재미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예능 프로 다시보기를 틀게 된다. 이건 처음이든 중간이든 아무데나 틀어서 보다가 재미없(p. 172)으면 바로 다른 것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자막이 어디서 웃어야 할지를 대치동 강사처럼 딱딱 짚어주기 때문에 웃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 그보다 더 간단한 것이 스마트폰 집어들기다. 아무 생각 없이 엄지를 휙휙 움직이다보면 타임 워프라도 일어난 듯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버린다. 문제는 자괴감이다. 포털 기사 댓글이나 소셜미디어에서의 끝도 없는 그악스러운 말싸움을 보다보면 인류에 대한 마지막 애정도 식어버린다. 그걸 굳이 읽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남는다.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인데도 요즘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나이를 먹고도 말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비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즐겁지조차 않아서다.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마 동안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부족하고, 눈은 피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중독자처럼 끊임없이 다른 걸로 다른 걸로 넘기고 넘기고 넘기게 된다.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인 것이다. 내가 무슨 권독사도 아니고 책이 다른 미디어에 비해 우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쓰레기 같은 내용의 책(p. 173)도 얼마든지 있고, 티브이나 인터넷으로도 훌륭한 콘텐츠를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책은 단편적인 영상이나 인터넷 게시물보다 가볍게 시작하기 어려운 대신, 별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단지 습관적으로, 중독적으로 계속 보게 되지는 않는다. 종이책은 두께와 무게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무한정 넋 놓고 보게 되지는 않는다. 무한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순간에 멈추게 만드는 피로감도 필요한 것이다. 더 중요한 장점은 보다가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티브이는 기본적으로 몰입해서 보는 매체다. 콘텐츠가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 몰입하게 된다. 나의 속도에 맞춰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콘텐츠의 속도에 내가 맞춰 수용해야 한다. 인터넷은 그렇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게시글과 댓글들의 속도가 수용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쉽다. '웹서핑web surfing' 이라는 표현 그대로 링크를 타고 여기저기를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며 표류할 때가 많다. 이와 달리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p. 174)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단지 텍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하다. 3D를 넘어 4D까지 제공하는 영상매체는 오감을 압도하는 정보를 쏟아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여백이 없는 것이다. 책은 빈 공간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여백을 보충하게 만든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든다. 트란 안 홍 감독이 영상화한 〈상실의 시대〉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내 머릿속 이미지들이 훨씬 아름답고 풍성했던 것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특징인 뉴미디어 시대에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독서의 특징은 큰 의미를 갖는다.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유보하고, 의심하고,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는 지성적 사고의 훈련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이 여전히 정도라(p. 175)고 본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며 흥분하는 이들이 있는데,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 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 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집에도, 사무실에(p. 176)도.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다. 티브이나 인터넷의 무수한 선택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수시로 서점에 들러 다양한 책을 구입해놓는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고 보기에 너저분할 정도로 표지가 쉽게 눈에 띄게 눕혀놓는다. 서점에서도 서가에 꽂힌 책과 평대에 누워 있는 책의 생명력은 천양지차다. 책은 고이 모셔놓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그 좋아하던 책을 읽기 위해 이런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의 라이벌들은 막강하다. 책 중독자였던 어린 시절 정도까지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책씨, 분발해주길 바라(p. 177).
그럴 만큼 책을 쓴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굳이 쓸 리 없다. 그 재미 중 첫번째는 의외성이다. 글 이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또는 엉덩이로 쓰는 것 같다.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을 옮겨(p. 180)적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아이디어 조금만 있는 상태에서, 때로는 그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스스로도 생각 못했던 표현이나 명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가끔 정말 뿌듯한 똥이 나오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 스스로는 대견하게 느껴지는 구절이 튀어나올 때면 등골 이 짜릿하다. 그 맛에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두번째는 내 글에 반응하는 타인들을 발견하는 신기함이다. 나는 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글만 쓴다. 쓰기 싫은 글은 쓰지 않는다. 내 삶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재수없음'으로 요약 할 수 있다.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구차하게 그렇게까지? 아님 말구. 너 아니어도 많아. 그래서 욕도 많이 먹어봤지만, 그게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암시이기도 했다. 스스로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차단하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것을 욕심내려면 타고난 그릇이 엄청나게 크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바꾸어 세상에 맞춰야 한다. 언제나 나 자신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덕에 내 그릇은 내가 잘 안다. 외부에서 요구되는 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숨어버리는 체질이다. 죄송한데요, 제가 거리에 좀 민감해서요.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쓰면 보다 많은 이들의(p. 181)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내 셀링 포인트를 살려서 어떤 책을 쓰면 더 구매 욕구를 자극할지 출판기획자의 마인드로 생각해보면 여러 선택지가 나오지만, 우선 내가 쓰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쓰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잘 알면서도 그저 내 취향대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다.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굳이 사랑받고 싶지 않다. 무서운 사람도 많고 싫은 사람도 많거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편해서 좋은데, 그들로부터도 사랑까지는 부담스러우니 호감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하는 취향의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님들아, 번식해라. 세번째는 스스로 책을 쓰다보면 책의 저자들이 어떻게 책을 쓰는지 그 신비의 베일 뒤에 가려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짐작 되는 것들은 생긴다. 무엇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속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학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 위주로 글을 쓸 사람은 없(p. 182)다. 어차피 글쓰기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인스타에 셀카 올리기, 수컷 공작새의 꼬리 펼치기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 다른 점이라면 그걸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하느냐, 세련되게 감추며 하느냐가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기가 지금 잘난 척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는 있느냐,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냐 정도일 것이다. 다시 한번 겸손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고 싶기에 『판사유감』 때부터 언제나 일종의 경고문처럼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찌질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에 불과하고, 책에 나오는 글은 그런 나조차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때때로 느끼게 되는 기특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을 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그게 싫고 인간들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을 보는 게 좋다면 굳이 돈 들여서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공짜로 무수한(p. 183)샘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건 공기와도 같이 이미 세상에 가득차 있다.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 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아,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 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 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좋은 이야기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걸 더 잘 전달할 가능성이 높아질(p. 184) 뿐이다. 물론 그건 대단한 차이를 낳지만 그렇다고 돌멩이를 금덩어리로 바꾸는 연금술은 아닌 것이다(p. 185).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고 세상을 발견해왔다. 직접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들 사이에 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해왔다. 타인들이 성 큼 내게 다가오면 불쑥 겁부터 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책이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고통, 욕망을 배워왔다. 판사가 된 이후의 삶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은(p. 189) 실제 삶이 아니다. 재판 기록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삶이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읽고 바라보며 살아온 것 이다.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 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 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교과서에 몇 줄 추가된 설명만으로는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p. 190) 무서운 피물이 될 수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대학에 들어 간 후 접하게 된 대부분의 책들은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간 세상이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라는 책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그런 세상을 바꾸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책들에 대해서는 섣불리 믿음을 가질 수 없었지만(애초에 '믿음'과는 거리가 먼 체질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냉엄하게 존재하는 부조리와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 틀어박혀 교과서와 다른 실제 세계에 대한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내게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사당동 더하기 25』나 『힐빌리의 노래』처럼 빈곤이 가정과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책들, 『인구 쇼크』 같이 지구 곳곳에서 인구 집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려 주는 책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같이 저성장시대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책들을 읽는다.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어가기 때문에(p. 191) 읽어도 읽어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런 독서를 '쾌락'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는 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의무감만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걷고 싶지는 않다는 생존 본능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라서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윤리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은 나를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구원해준다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 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체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 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p. 192)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을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p. 193)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p. 194)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 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p. 195).
셰익스피어가 흉악범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십 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라는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삼십 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저자는 2003년 가장 위험한 죄수를 장기간 격리수용하는(p. 196) ‘감옥 안 감옥’ 슈퍼맥스supermacx서 독방에 갇힌 적수들에게 강의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십대에 살인죄를 저질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는 무기수 래리 뉴턴을 만난다. 이후 십 년간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이 책은 법관으로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 흉악범도 교화될 거야. 어쩌면 이 역시 지식인의 선입견에 불과할 수 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지? 영문학에서 그가 갖는 위상 때문에 막연히 선택된 것 아닐까? 더구나 무기수라면 비단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뭐가 됐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는 한 줄기 통로'인 교수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까? 교수 역시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라도 '죄수가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쪽으로 애써보려 할 것이다. 실제로 사형수와 지식인 간 미묘한 관계 형성 과정을 다룬 문학도 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실제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범을 장기간 인터뷰해 쓴 걸작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카포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p. 197). 의심 많은 성격을 탓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문체에서 벽을 만났다. 이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데 역시 난 너무 선하고 건전하며 훌륭한 글엔 금방 지친다. 독실한 종교인이나 진실한 상담 전문가, 열정에 불타는 사회운동가의 좋은 글을 접하면 박수는 치면서도 재밌게 읽진 못한다. 내 취향은 살짝 삐딱하고(이때 포인트는 '살짝'이다, '열심히' 삐딱하면 지루하다) 느긋하며 가끔 비루한 글이다. 그래도 분명 참고할 만한 내용이었으므로 죽 읽어나갔다. 그런데 중반 이후 이런 구절들이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빠져들게 될까?'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살인은 열정적으로 계획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멍청하게 저지른 행동일 뿐이에요." "살인을 저지 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약간의 영향만 있어도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책 속 경찰관 살해범의 말이다. 이는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봐도 틀리지 않다. 특히 '멍청하게'란 표현은 정말 적절하다. 악마 같은 흉악범이 계획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드물다. 평범한 사람이 사소한 분쟁에 휘말려 순간 울컥해 저지르는 범행이 더 많다. 심지어 동네에서 막걸리 내기 윷놀이를 하던 오십대가 옆에서 자꾸 귀찮게 훈수하는 이웃을 때려 숨(p. 198)지게 한 경우도 봤다.
이 책엔 비행청소년이 많은 한 고등학교에서 십대 때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의 충고를 녹화한 동영상이 상영되자, 그 어떤 교사 애기도 듣지 않던 소년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일화 도 등장한다. 해당 동영상을 본 소년들의 반응은 이랬다. "형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어떤 교사도 그 말을 더 낫게 얘기하진 못할 것 같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얼마나 신세를 망칠지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거죠. 당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면 난 잠을 잤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막가는 소년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엔 귀기울인다. 저자는 살인 등으로 종신형을 받은 소년 죄수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각색 작업을 맡겼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이들은 사랑 얘기가 아니라 (로미오처럼 착한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압박하는) '또래 집단의 압력'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이들의 각색 희곡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되는 걸로 끝난다. 이 희곡으로 연극을 공연한 후 소년수들은 말했다. "전 열네 살에 살인으로 교도소에 들어와 199년형을 살고 있습니다." "전 열일곱 살에 교도소에 들어와 가석방(p. 199)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습니다.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 다." "우린 여러분이 로미오의 잘못에서 뭔가 배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에서도." 래리 뉴턴은 베이츠 교수의 '교도소 제자'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영문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셰익스피어에 관한 독창적 글을 많이 남겼다. 오랜 수업 끝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가 저지른 폭력 행위와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칭찬받고 싶은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어요. (....) 이젠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요. 제 지적 능력이나 뭐 그런 걸로요."
소외 계층 청소년이 그리도 쉽게 범죄에 빠지는 이유 중에는 '내 소속 집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가정과 사회에서 이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보다 나은 집단에의 소속감을 제공해주지 못한 결과가 범죄로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소년범들과 대화를 나누던 베이츠 교수는 그들의 범죄 경험이 대부분 7~8세 때 시작된다는 얘길 듣고 놀란다. 한 소년범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아이의 경험이 십대와 성인으로서의 행동을 결정해요." 교육 전문가나 심리학자의 말이 아니라, 소년범의 말이다(p. 200). 실제로 베이츠 교수가 가르치던 소년수 한 명은 전학을 자주 다니던 아이였는데 가벼운 장난 몇 건 때문에 교사의 미움을 샀다. 교사는 그를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세워둔 채 한 학기를 보내게 했다. 이후 소년은 거리로 나섰고 그의 인생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 소년수는 말했다. "학생을 교실 뒤쪽 칸막이 뒤에 두면 그는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거예요." 베이츠 교수와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통해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룬 래리 뉴턴이 한 학술지에 기고한 에세이가 있다.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수많은 죄수들이 결국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 어떤 종류의 죄수가 여러분 옆에 살길 원하십니까? (...) 여러분에겐 그들이 좋은, 혹은 나쁜 이웃이 되도록 도와줄 힘이 있습니다. 교육만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과학입니다." 그렇다. 죄수들 중 대부분은 결국 사회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무기 복역시키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고,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일 때가 많다. 범죄자들은 선천적으로 위험한 괴물이고, 장기간 사회(p. 201)로부터 격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범죄자가 구제불능의 괴물일까.
히스 형제의 책 『스위치』에 어린 자녀를 구타해 골절상을 입히는 등 아동학대 부모들을 대상으로 행동치료를 수행한 사례가 나온다. 처음 부모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녀와 매일 단 5분씩만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집중해야 한다. 전화도 받지 말고, 뭘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들은 명령을 내려서도 안 되고, 비평을 해도 안 되고,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부모도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부모의 크레용을 빼앗으며 "나 이거 할래!" 하고 외치면 마음껏 쓰라고 내주고 다른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이가 심술궂게 또 부모가 쓰는 크레용을 못 쓰게 하면 그에 순순히 따른다. "네 말이 맞아. 이 색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아동학대 부모들에게 이 5분은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자기통제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동 중심 상호작용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칭찬하는 법,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면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법 등을 배우게 된다. 110명의 학대 부모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p. 202) 절반은 일반적인 분노조절 요법 치료를, 나머지는 위와 같은 부모-자녀 상호작용 치료를 받았다. 치료 후 3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자의 60퍼센트가 다시 아동학대를 한 반면, 후자의 20퍼센트만이 다시 아동학대를 했다. 아동학대 부모 중 상당수는 선천적인 괴물이어서 아이를 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너 살짜리 아이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 교육 방법에 대해 무지했다. 제대로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교육받자 그들 중 80퍼센트가 아동학대를 멈추였다.
내 재판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범죄자 중 다수는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교도소에서라도 이들이 제대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들 모두를 영원히 가두어 둘 수는 없고, 이들 중 대부분은 언젠가는 이 사회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 뉴턴의 에세이는 정확히 이 지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라는 첫 의문에 대해서도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갱스터 생활을 하던 소년수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목한 지점은 (내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또래 집단의 압력'이었다. 뉴(p. 203)턴의 셰익스피어 해석이 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도 당연하다. 그는 일반인과 다른 지점에서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다양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들의 오욕칠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고전은 거울이다. 그 앞에 서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마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난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을 발견, 탐독하면서 현란한 언어유희의 묘미에 빠졌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그 정도였다. 반면, 소년 시절에 폭력• 마약• 살인을 저질러 지하 독방에 갇힌 무기수들은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셰익스피어를 통해 천국에서 무간지옥 바닥까지 경험한 것이다(p. 204).
일자리를 빼앗기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할 거라는 공포의 밑바탕에는 '노동' '쓸모' '일' 등에 관한 오래된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이런 관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인간이 바꾸어온 것 아닌가. 영국의 1833년 공장법이 9세 미만 아동 고용 및 18세 미만 소년의 야간노동을 금지하자 공장주들은 시장 경제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이들이 지금 시대의 의무교육을 보면 어리둥절할게다. 어린 녀석들이 자기 밥벌이를 하기는커녕 세금으로 공짜로 공부를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고. 탄광 노동자들에게 하루 열몇 시간씩 석탄을 캐도록 시키던 이들이 오후 네시에 퇴근하는 현대 유럽의 사무직 노동자들을 보면 이 미친 시대에는 그냥 앉아서 잠깐 놀게 하고는 공짜로 돈을 준다고 놀라(p. 227) 자빠질 거다. 시대가 달라지면 관념 자체도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알파고 이후 쏟아진 온갖 요란한 기사들 보다 '멍때리기 대회' 기사가 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고 느꼈다. '미래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지?'라는 질문만 하지 말고 그런데 우리는 꼭 일을 해야 되나? 그런데 일이라는 게 뭐지?'라는 질문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기계에게 일을 빼앗기는 상상만 할 뿐 기계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는 노는 상상은 하지 못할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과거 시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쓸데없는 놀이나 미친 짓일 뿐일 거다. 혀와 배꼽에 피어싱해주는 직업, 프로 스케이트보더, 먹방 찍어 돈 버는 유튜 버들, 주기적으로 돌고 도는 유행의 패션 산업... 인간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유희의 축적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동굴 생활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우리를 단조로운 동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모험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쾌락의 카탈로그를 늘리고 늘리며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상력도 재미도 없는 성공충들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엔 즐기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p. 228).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 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 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 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 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p. 229).
통근길의 고통을 반전시킨 계기는 전철 승객들의 분포도 및 승하차 패턴 학습, 그리고 어디서 내릴지 관상 보는 법에(p. 248)서 비롯되었다.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 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 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 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 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 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 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쪽이 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지하고 무거운 책은 지하철에서 읽고, 만화책은 조용한 곳에서 정독하곤 했다는 점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 때문에 주변(p. 249)이 어수선해도 불편하지 않은 반면, 감각적• 정서적 체험이나 기억과 연관된 책들은 조용한 곳에서 봐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 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 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 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 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 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을 보고 놀란 나머지 메모까지 해둔 일이 있다. 노량진에서 종합운동장 가는 9호선 안이었는데,(p. 250) 책 읽는 이가 무려 아홉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키위새나 갈라파고스땅거북을 떼로 만난 느낌이었다. 여덟 명이 사십대 정도의 양복 입은 남성이고 한 명은 영어회화책 보는 여학생. 책 제목은 『아프리카의 별』 『대장정」 『기업경영에 숨겨진 101 가지 진실』 등인데 객차 사이 통로에 서서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는 신사가 이채롭다. 아니 그거 지하철에 사린가스 살포하는 얘기.....(p. 251).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p. 252)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 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p. 253)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끝에는 결국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좋아하는 책만 잔뜩 있다면 무인도에 있어도 행복할 것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욕심내면서 무엇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는 크고 대단한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본받고 싶은 '습관이 행복한 사람'은 따로 있다. 한 세기,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고 계시면서도 아직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이다.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님이다. 언론은 교수님의 장수 비결에 관한 기사를 앞다투어 싣곤 한다. 사십 년째 매주 세 번은 꼭 수영을 하고, 아침식사로는 무엇 무엇을 드시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더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은 나의 처외조부 되신다. 내가 생각하는 교수님의 건강 비결은 먼저 '부지런함'이다. 이십 년째 댁에 갈 때마다 서재엔 언제나 읽고 계신 책이 있고, 쓰고 계신 새 원고가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뭐하셨는지 묻지만 실은 언제나 똑같았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강연을(p. 254) 하셨다. 그중 어떤 것은 알려지고, 어떤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거리 두기'다. 총장이니 장관이니 남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탐내는 자리들에 한 점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다. 자식들 일도 그들이 묻기 전에는 먼저 말씀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은 얘기를 저기에 전하지도 않는다. 철없는 아들 걱정에 하소연을 늘어놓는 딸에게 그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철이 나야 걔가 철이 들지" 한마디 하시더란다. 냉정하게 보일 정도로 간섭하지 않는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맹목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교회나 목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을 뿐이다. 뭔가에 열광하거나 뭔가에 분노해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들이 가득한 시대에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성공한 인생이라 아쉬운 게 없어 그럴 거라며 입을 삐죽일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1947년 맨손으로 월남한 후 여섯 남매를 키우셨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부부싸움도 아이들이 못 듣게 방에 들어가서 하며 언제나 웃음으로 남편을 맞던 부인이 그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육십 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며 이십 년 세 월을 자리에 누웠다. 그는 그런 부인을 차에 태워 돌아다니며(p. 255) 세상을 보여주고 맛난 음식을 입에 넣어주었다. 결국 부인을 떠나보낸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부인의 손때 묻은 낡은 집에서 홀로 지낸다. 하지만 아주 가끔 딸에게 울고 있는 모습을 들키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정초에는 송추에 있는 이북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드시며 고향을 생각한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 시인과 함께 숭실학교를 다니던 고향이다. 어느 날 노교수는 딸에게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저 인내 하나 배우러 오는 것 같다." 감히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습관이 행복한 사람,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 책과 함께하는 사람(p. 256).
에필로그
쓸데없음의 가치
내게는 큰 즐거움을 주었던 책들에 관한 기억을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마칠 때가 되니 역시 읽을 분들의 책망이 두렵기도 하다. 독서에 관한 수많은 책들처럼 결국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책들을 소개해주겠지, 하고 기대했던 분들 말이다. 프롤로그에서도 밝혔듯이 언급한 책들은 그저 그 시기에 거기 있었기에 우연히 내게 의미가 있었다.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도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니 스쳐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 로 책이 당신 인생에 무슨 쓸모가 있었다는 얘기냐고 묻는 분들께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p. 257).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 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 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 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 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 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p. 258).
'인문학적 경영' 운운하며 문사철 공부하면 스티브 잡스같이 떼돈 벌 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CEO들께는 죄송하지만, 잡스는 나중에 뭘 하려고 리드대학에 가서 인문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히피, 외톨이, 괴짜들과 어울려 쓸데없이 놀다가 한 학기 만에 중퇴한 후 예쁜 글씨 쓰기에 매료되어 서체학calligraphy 강좌를 청강했다.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 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 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 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p. 259)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p. 2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