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 【북토크】 집에서 죽고 싶다
    나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늙음”과 “죽음”은 늘 나의 관심사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책들은 기회가 되면 읽는다. 이번에도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아무래도 초고령사회다 보니 노년과 죽음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객사”한다. 장례 문화가 바뀐 것이다. 저자는 간병 제도를 통해 각자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80세 중반을 넘어서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마지막이 평안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가능하시면 집에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 이제 고독사의 정의 중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다. 바로 두 번째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입회인의 유무가 그렇게 중요할까? 혼자 사는 고령자라면 당연히 집에 혼자 있다. 다른 사람이 가끔 오갈 수도 있지만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있을 리는 없다. 싱글은 혼자 살고 혼자 나이를 먹으며 혼자 간병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죽는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나도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싸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가족이 자고 있거나 외출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지만 낮에는 일 하러 모두 나가서 간병 필요도 4등급이나 5등급을 받은, 한 마디로 자리보전한 고령자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일이 흔하다. 요즘은 '며느리'라는 이름의 성인 여성이 24시간 집을 지키지도 않는다. 가족이 미처 지켜보지 못할 때 죽으면 그것도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설이나 병원에 있으면 고독사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시설도 직원이 몇 시간 간격으로 보러 올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을 순회한 후 다음 순회를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병원이라고 간호사가 24시간 주시하지도 않는다. 각종 모니터가 붙어 있으니 이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누군가가 달려오겠지만 그도 결국은 기계가 알려주는 죽음이다. 그뿐 아니라 의사가 매뉴얼에 따라 전기 쇼크나 심장 마사지를 시작하면 평온해야 할 죽음이 화재 현장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일본재택호스피스협회 회장인 오가사와라 씨는 이를 병원 내 고독사'라고 부른다. 병원이나 시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인이 있는 죽음'을 보장받지는 않는다. 덧붙이면 오가사와라 씨는 사람은 죽을 때를 “고른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손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죽는다든 지. 가장 좋아하는 요양보호사가 지켜볼 때 숨이 끊어지는, 정말 실화일까 싶은 에피소드를 수없이 들었다. “어떻게든 장남이 올 때까지 버텨달라”는 가족의 강력한 요구에 무리하게 연명 처치를 하는 일도 있다. 오가사와라 씨는 그동안 혼자 사는 사람을 수없이 간호했지만 혼자서 죽는 사례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오가사와라 클리닉에서 혼자 사는 사람을 간호한 사례가 적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사례가 많이 쌓여서 세 자릿수에 달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사람도 있긴 하죠?"라고 물으니 "그렇죠, 이제 다양해요"라고 했다. 아무렴 그렇지 싶었다. 임종관리사를 양성하고 있는 시바타 구미코 씨는 '혼자서 죽게 하지 않겠다', 안아주며 보내겠다'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시바타 씨는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마지막 1%가 행복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며, 그 마지막 1%를 도와주는 사람이 임종관리사라고 말한다. 나는 내 책 『케어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에서 그녀와 대담을 나눴는데, 내가 "전 혼자서 죽을 거예요" 라고 하자 그녀는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가실 때는 제가 꼭 안아드릴게요"라고 말했다(웃음). 그런데 고령자 그룹 리빙 홈인 '코코(COCO) 쇼난다이'에서 지내는 사이조 세쓰코 씨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입소인이 있어 마지막까지 한시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지켰는데, 죽어가던 그 사람이 "가끔은 혼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나는 취재를 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을 때 흥미롭다. 나는 강연 중에 "죽을 때 자녀나 손자에게 둘러싸이고 싶나요?",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면 좋겠나요?"라는 질문을 한 다. 그런데 그 반응을 보면 지역 차가 크다. 어느 지방에서는 고령의 한 남성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도쿄에서는 500명 이상의 고령 여성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을 잡아주기를 원한다고 한들 아무나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일까, 아니면 요양보호사여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오래 살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진다. 이는 숙명이다. 임종을 맞을 때, 사람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느냐고 호스피스 의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니요, 알 수 없어요. 임종 직전에는 뇌 내 마취약이라고 불리는 엔도르핀이 나와서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라는 답변도 있었고, 누가 손을 잡아줘도 모를 거예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시죠?'라고 물으니 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오감 중 청각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는 의사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도 들었다. 자녀와 손자들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말을 걸었더니 할아버지가 확실한 발음으로 "시끄럽다"고 했다는 일화였다. 죽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죽게 해달라는 그 기분을 나는 이해한다. 오랜 지인 중에 평생 고독하게 산 싱글 남성을 돗토리시의 호스피스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 씨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혀암 수술 이후 목소리를 잃은 지인은 의사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집에서 죽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요양보호사가 방문해보니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홀로 훌륭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서예와 전각, 술과 차를 즐겼던 고고한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 그렇다면 '입회인 없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일까 남겨지는 사람일까? 취재하면서 보니 임종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쪽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를 '임종 입회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오랫동안 간병해온 지인은 자신이 외출한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마지막 잠깐을 놓쳐도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을 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꼭 죽어가는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씨가 임종을 맞았을 때,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동지였던 와타나베 교지 씨는 자리를 피했다고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은 "울러 갔나 봐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작별 인사는 예전에 했다"고 말했다. 임종관리사 시바타 씨는 작가 세토치 자쿠초 씨가 인용한 겐유 소큐의 소설 『아미타바』 속 문구를 나에게 들려줬다.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25m 수영장을 529번 채울 만한 물도 바로 끓게 할 정도의 에너지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의심 많은 나는 “그걸 어떻게 측정할 수 있지?”라며 갸우뚱했지만, 시바타 씨는 죽은 자가 넘겨주는 에너지를 남아 있는 쪽이 받지 않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임종을 지키려는 것이 어차피 남겨지는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호주에서 간병 일을 하는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아들이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방문했다. 호주 사람들은 영어권에 일자리가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이주한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도 많다. 그 어머니가 반년 후에 돌아가시자 간병인이 영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들은 "작별 인사는 이미 해두었으니, 장례식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인은 “그렇게도 하더라고요. 일본인인 저는 좀 이해하기 힘들 있지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일본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상대의 귀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몇 번이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엄마의 자식이라서 행복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다. 일본인은 특히 가족 간에는 부끄럽다고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못 하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고 상태가 점점 나빠져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정신이 온전할 때 물어볼걸', '이런 말도 해드릴걸' 하고 후회하느니 좀 더 빨리 몇 번이고 말해드리자. 나는 요즘 친구들에게도 "그때 네가 친절하게 대해준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너의 이런 점이 좋아'"라고 말해주기 시작했다. 죽고 난 후에 장례식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사를 읽는들 죽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을 만나면 '다음에 만날 때도 모두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다시 만나 기쁘다"라며 진심으로 기뻐하면 된다.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죠?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쁜가.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재택사'라는 말을 만들어버렸다. 현재 일본에서는 나 말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저작권 마크를 붙였다. 아니, 사실은 농담이다. 저작권 따위 쩨쩨하게 굴 생각은 없고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해서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간호사 스가하라 유미 씨는 방문 간호 업계를 이끌고 있으며 '캔너스(CANNUS)'라는 방문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캔너스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서 "입회인이 없는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글을 봤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고독사의 정의를 바꾸면 고독사 통계는 간단히 바뀐다. 조사 방법이나 선택지 카테고리를 바꾸면 통계 데이터는 바뀐다. 간병 필요 인정도 '간병 필요 고령자' 수에서 '지원 필요 고령자'를 빼버리면 간병 필요 고령자의 수가 감소한다. 그중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변경한다면(일본노년학회가 이미 제언 중이다) 고령화율의 수치도 달라진다. 고독사를 없애자는 캠페인은 사후에 빨리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pp. 94-103).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7
  • 【북토크】 사고의 유연성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는데 오직 한권만 읽고 거기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생각이 제한적이다.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편협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고의 유연함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이다. 좋은 책은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다. 편식이 좋지 않듯이 편독도 좋지 않다. 다양한 다독을 지향한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 (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 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자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 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 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1
  • 【북토크】 성취감 넘치는 인생
    성취감(成就感)이란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는 느낌’이다. 뿌듯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일에서 이 성취감을 느껴야한다. 우리는 무엇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가?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애를 쓸수록 성취감은 더 커질 것이다. 매순간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며 산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책 한권을 다 읽어낼 때 성취감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지식도 얻고 성취감도 느끼니 독서는 이래저래 좋은 일이다. 직장인의 성취감 한때 각종 예능에 셰프가 많이 등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광고 모델로도 많이 거론되곤 했죠. 수많은 직업 중에 왜 셰프가 갑자기 이렇게 많이 나오나 싶어 내심 궁금했는데 그 원인이 현대인의 성취감과 관련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장의 요지는 현대인에게 충족되어야 하는 중요한 정신적 요소가 '성취감'인데, 그 성취감을 대리 만족시키는게 '셰프의 요리'라는 것이었죠. 요즘은 좀처럼 성취감을 얻기가 힘든 사회구조입니다.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고 직장을 얻어도 승진이 쉽지 않고, 급성장하는 회사나 업종도 찾기 힘든 성장이 멈춘 정체기에, 결혼과 육아 역시 힘든 시기입니다. 요리는 그런 면에서 이런 시대에 가장 쉽게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분야라는 게 요지였습니다. 셰프들이 멋지게 요리하는 과정을 보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경험하고 본인도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과 행복감을 얻는 다는 거죠.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가 사회생활을 하시던 80~90년대는 국가적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시기였죠. 다들 비슷한 나이에 취직을 하고, 나라가 성장하는 만큼 기업도 성장하는 시대였습니다. 작은 회사들은 연차가 쌓이면 승진이 되고, 월급이 오르던, 금리도 높던, 집단적 성취감이 충족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이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던 구조라 요즘처럼 금수저, 흙수저 같은 형평성 문제도 상대적으로 적을 때였죠. 물론 지금의 삶에서도 다양한 부분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밀렸던 소소한 일들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도 있을 테고, 어려웠던 프로젝트를 해내면서 얻는 성취감도, 목표했던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얻는 성취감, 주말 저녁 라면을 맛있게 끓여낸 성취감도 있을 수 있죠. 그런 크고 작은 성취감들이 모여서 힘들어도 살 만하게 되는 건데, 요즘은 그 밸런스가 많이 붕괴된 것 같습니다. 벼락거지라는 말 많이들 하죠. 상대적 박탈감을 자아내는 말입니다. 10년 동안 일해서 열심히 모은 돈보다 10 년 동안 오른 집값이 더 크고, 코인으로 몇백 억 벼락부자가 된 스토리부터 주식으로 대박 난 이야기까지.... 듣기 싫지만 계속 들리는 배 아픈 이야기들. 주말 저녁 맛있게 요리해서 얻는 소소한 성취감 따위, 경쟁PT 이기고 느끼는 희열 따위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겁니다. "경쟁PT 하나 땄어!" "오! 얼마 짜린데?" "50억! 아 진짜 힘들었어." "맞다, 저쪽 대행사 아트 하나가 코인으로 50억 벌고 퇴사했다던데..." 직장생활에서 얻는 성취감들은 대부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게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 험난한 상황을 끗끗하게 이겨내고 따낸 경쟁PT라든가, 10년 근무하고 받은 근속 기념 휴가라든가, 실장 5년 차 두 번의 탈락 끝에 얻게 된 '팀장'이라는 타이틀이라든가....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 몽땅 돈으로 치환되다 보니 맥 빠지는 겁니다. 여러모로 마음을 잡기가 힘들죠. 뭐 방법은 없습니다. 초심을 잃지 말고 그냥 버티는 겁니다.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고 노력으로 얻어낸 것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내 작은 성취감들. 하나 만드는 데 꽤 오래 걸리는 그 조그만 성취감들은 소중한 거니까요(pp. 203-205).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1
  • 【북토크】 작가라는 직업의 숭고한 고통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모든 책의 저자가 고맙다. 어쭙잖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많은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에 책 한 권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 경험했다. 권위 있는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자가 자신들에 대해 쓴 책이라 흥미롭게 봤다. 속된 말로 그들은 참 드센 ‘팔자’로 작가가 됐다. 몇몇 유명한 작가가 아닌 이상 책으로 밥 벌어 먹고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니 이 무슨 천형이란 말인가?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책을 이전보다 덜 본다. 책이 아니라도 볼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책 읽기라는 지루한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출판사도, 작가도 사라질까 봐 미리 걱정이 든다.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나? 이전처럼 책을 사보지 않고 대출해 보니 작가들에게 미안하다. 책을 사도 둘 곳도 없기에 책을 사지 않게 된다. 어쨌든 오늘도 한 땀 한 땀 수 놓듯이 글을 쓰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작가들에게 리스펙! 박민규 작가 글을 쓰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주로 이곳에서 나는 공부를 한다. 문학가니 소설가니, 작가여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이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나 라는 괴물도 실은 알고 보니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턱없이 늦은 공부고, 물론 독학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며, 아무것도 모르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 그렇지 뭐, 라고 하기엔 나 라는 인간이 너무나 불쌍하다. 공부는 불쌍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공양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행위나 방법에 대해선 사실 무관심하다. 내게 소설은 ‘그냥’ 쓰면 되는 것이었다. 창작의 고통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 늘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쓰면 되는 거잖아, 절로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떻게 써야 고통스럽지? 그런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잠시였다. 마조히즘에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내 복이지 뭐, 라고 생각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그냥’ 쓴다. 대신 꾸준히, 열심히 쓴다. 열심히만 하면 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건 그야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히려 관건은 늘 물리적인 것이었다. 체력과 에너지, 어깨의 통증, 프린터에 남아 있는 잉크의 분량, 몇 장 남지 않은 A4지의 매수, 즉 그런 것들(설마 이런 걸 가지고 고통이라 떠드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소설을 정신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질' 이다. 유기적이고 다분히 물러 보이긴 해도 분명한 물질이다. 그래서 오히려 수학과 공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이해다. 글도 자연의 일부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그런데 잠깐, 이런 얘길 왜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무슨 꼭지였더라... 문학적 자서전이란 타이틀을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아, 그렇지. 결국 아무소리나 해대는 거였어, 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다 보니 이런 글을 써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자서전은 무슨 얼어 죽을 자서전인가. 나는 아직 출발도 안 했다. 나는 신인이다. 고작 다섯 권의 책을 냈을 뿐이며, 대부분 실수투성이의 연작이었다. 좋아 좋아, 그리고 갑판에 앉아 이제 막 무거운 닻을 올리려던 참이었다. 항해기란게 있을 수 없다. 사람을 바보로 아나, 심지어 그런 기분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내 견해로는 그렇다. 적어도 문학적 자서전이란, 책을 백 권 정도는 쓴 인간들이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올해로 마흔두 살이 되었다. 지극히 간단한 생활을 하지 않고선 읽고, 쓰는 시간을 얻을래야 얻을 수 없다. 지난 몇 년은, 아무 일 없이 읽고 쓰는 생활을..... 그런 습관을 마련하려 애쓴 시간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나는 몇 가지 원 칙을 세워야만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 볼일을 만들지 않는다. / 화를 내지 않는다. / 겸손해진다(시간 외에도 많은 것을 절약해준다). / 생깐다(경조사들!). /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라고 말한다. / 양보한다. / 손해를 본다(정말 많은 것을 절약해준다). 피치 못할 일들이 그래도 가끔 생기지만, 덕분에 내 삶은 지극히 간편해졌다. 그런, 느낌이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나는 생각하고, 글을 쓴다. 필요한 것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다(pp. 154-160). 전경린 작가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등단한 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부터 글쓰기가 맨손으로 굴을 파고 나가는 듯 힘겨웠다. 그 노동이 쉬 돈으로 바뀌지도 않고 스스로 고갈을 느낄 뿐 아니라 평단에서는 비판적 비평이 나올 때, 홀로 글에 파묻혀 사는 사이 일상적인 생활과는 점점 더 유리되는 고립감이 들고 가족들에게 면목이 없어 존재감이 불안정해질 때,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온갖 일을 떠올려보고 상상 해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는 결국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어떤 일로도 살 길을 마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직 글쓰기로만 삶의 방편을 삼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사치스러운 지향이지만 동시에 생이 내게 허용한 유일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피해간다. 내 삶에 대해서는 한 자락도 이 글에서 들키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자신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떤 힘이 나를 이 먼 곳까지 데리고 왔을까, 하는 생각에 잠길 뿐이다. 여기는 내 상상뿐 아니라 나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의 상상을 넘어선 곳이고 보통의 사람들이 세 번쯤 죽고 다시 태어나며 운명을 전복해야 이르렀을 곳이며 내가 삶의 깨어진 조각들에 가슴이 찔리며 피 냄새를 맡으며 걸어온 곳이다. 이곳.... 다행히 이곳에서 미처 예기치 못한 큰 화해가 일어나고 있다(pp. 263-26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북토크】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기 원하나?
    한 예능 PD의 책을 읽게 됐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은 재미있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분야의 삶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대한 말을 했다. 잘하는 사람도 남에게 인정받을 때 감격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데 어떤 사람은 타인의 인정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다. 사람의 평가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사람의 평가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또 가변적인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목사 세계에서 흔히 하는 말로, 부임 이사 왔을 때 제일 환영하는 교인이 나중에 쫓아낼 때 앞장 선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남의 말은 필요하면 듣되 거기에 너무 좌우될 필요는 없다. 신자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순 투성이인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위에 계신 분의 인정이다. 그분이 잘했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람의 인정에 좌우되지 말자. 인정(認定)은 넘치는 법이 없다 2021년 방송가를 장악했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사실 <슈퍼스타K>로 대표되는 기존의 오디션들과 비교하면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문 댄서들의 경연 서바이벌인 <스우파>를 같은 종류의 프로그램으로 보긴 어렵다. <슈스케> 참가자들은 너무 간절하다. 꿈은 있는데 아무 기반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이 꿈을 펼쳐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혹은 이미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해서, 더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 벼랑 끝에 선 간절함이 있고, 그래서 권위자가 보내는 인정은 더욱 자신을 뒤흔드는 경험일 수밖에 없다. 전율을 느끼고 울음을 쏟아내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스우파>의 댄서들은 스스로가 프로인 것을 넘어 그 분야에서 충분히 입지를 굳힌 이들이다. 이미 물심양면으로 적지 않은 인정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심사위원이 가지는 지위도 다르다. <슈스>의 심사위원들은 참가자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권위자인 만큼 심사평 마디마디의 무게가 남다르지만, <스우파>의 심사위원들은 그들의 전문성과 별개로 참가자들이 간절하게 인정을 갈구할 입장은 아니다. 서로 자기 영역에서 충분히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라, 절대적 위계에서 이루어지는 <슈스케>의 평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이상했다. 링 위에 오른 <스파>의 댄서들도 심사 위원들이 심사평을 말할 때마다 입이 마르고 눈물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슈스케>나 <스우파>나, 탈락했을 때의 안타까운 눈물보다 인정받았을 때의 벅차오르는 눈물이 훨씬 자주 보였다는 거다. 마음을 졸이며 열어본 결과가 합격이었을 때 터져 나오는 눈물, 치열하게 고민하며 완성한 무대를 영상으로 다시 지켜볼 때 메여오는 목, 전달하고 싶었던 바를 심사위원이 정확하게 짚어줄 때 피어나는 얼굴들. 어차피 <스우파>의 댄서들은 여기서 떨어져도 인정이 모자라진 않는다. 이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크고 전문적인 무대에서도 충분히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니 여기서 떨어진다 한들 자신을 부정한다고 느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모두 인정이 필요하다(pp. 72-7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21
  • 【북토크】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작은 방법
    저자가 직장생활 중 부당하게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군가 막아 준 감동적인 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곤란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을 대신해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 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을 경험한 사람은 언젠가 누군가를 돕는 일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함께 더불어 살아야하는 곳이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건 대신 목소리를 내준 한 선배 덕분이었다" 내 갈 길 잘 가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발을 걸고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본인 인생에 충실할 것이지 왜 애꿎은 사람에게 꼬인 마음을 푸는 건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직장상사라면 '똥 밟았네' 하고 쉽게 털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나도 직장에서 최악의 인간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출근 전날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사무실에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거나 내 이름을 부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긴장되고, 퇴근 후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울리는 카톡 소리에 놀라 이런 메신저를 만든 회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땐 너무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쁜 기억은 증발되고 그러한 인간 유형에 대한 이해가 남았다. 당시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비슷한 상황에서 선뜻 도움을 구하기 어렵거나 해결책을 찾기 힘들어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이야기이다. 그 사람의 괴롭힘은 다방면으로 이어졌었다. 본인 기분에 따라 매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는데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은 핑곗거리를 찾아서라도 회의실로 불러 호통을 쳤다. 트집 잡히는 게 싫어 요구한 대로 일을 빨리 처리했는데도 '본인을 무시하느냐'며 억지를 부리는 게 황당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행동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선배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선배들에게는 아주 친절하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절대 선을 넘지 않는 강약약강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고 관리자에게는 끔뻑 죽는 시늉이라도 할 만큼 충성을 다 했기에 윗선에선 이런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렵게 빙빙 돌려 힘들다는 사실을 털어놓아 봤지만 둘의 사이는 여전히 공고했고 나는 무력함을 느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한없이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부탁하지도 않은 모니터링을 해주며 '네가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다' 응원하거나 본인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결정적으로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는지 혹은 계속 일을 부려먹기 위한 수작이었는지, 다그치고 달래는 전형적인 괴롭힘의 유형이었다. 신입사원인 나에게 그 사람은 직장이란 원래 이런 곳이라는 주입을 끊임없이 했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니 네가 고쳐야 한다고. 그 사람은 회사를 참 좋아했다. 퇴근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을 벌였다. 본인이 기획한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한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세세한 일을 수행하는 건 늘 후배들의 몫이었다. 물론 공적은 본인의 차지였다. 아, 허무하다. 그때의 그 개고생이 이렇게 몇 줄로 끝나다니. 그때 내가 알게 된 것은, 벌어지는 일을 알고도 방관하는 것은 소극적인 형태로나마 가해에 동참하는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입사 후부터 그 사람과 내 자리는 늘 가까웠는데 처음엔 우연의 일치인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롭게 자리를 옮기는 이삿날, 본래 자리배치엔 분명 나와 그 사람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다시 보니 자리가 그 사람 앞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음대로 자리를 바꾸어버리는 월권을 부장이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승인해준 것이다. 나는 이 또한 가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사람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이유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내가 더 친절하게 다가가야 하나?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하나?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나? 오늘 기분은 왜 저런거지? 왜 이해를 하려는 마음까지도 내 몫이어야 했을까.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내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 말라고 항의하거나, 왜 힘들다고 호소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했다. 나 또한 그러한 일을 직접 겪지 않았다면 다른 이에게 쉽게 말했을 것이다. 대체 왜 그 상황을 그냥 참고만 있었느냐고. 성희롱이나 성추행 사건의 경우 그러한 질문은 더욱 집요해진다. 왜 그때는 말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그러느냐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힘들었던 시간을 어렵게 토로하는 당사자에게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묻는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싫으면 더 강하게 말했어야지. 더 적극적으로 항의했어야지. 문자도 친절하게 답했던데?' 잘 지내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고, 상황을 바꾸어보기 위해 하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다분히 노력해서 입사한 소중한 직장이고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니까. 문제를 제기했을 때 역으로 입지가 좁아지거나 낙인이 찍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상대의 권위와 권력이 강할수록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선뜻 이겨내기 쉽지 않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건 나와 같은 후배 입장인데도 대신 목소리를 내준 한 선배 덕분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이, 이미 승인이 난 내 휴가를 본인 마음대로 취소하는 것을 본 선배가 대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대신 묻는 선배의 모습에 나도 놀랐고, 후배들도 놀랐고, 그 사람도 놀랐다. 침묵을 깬 선배의 용기에 혼자 끙끙 앓던 후배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각자 겪었던 일들을 조금씩 공유하기 시작했고 그 사람은 점점 놀란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 선배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회사의 시스템으로 보호받지 못할 때, 리더가 방관할 때 대신 나서서 목소리를 모으는 시작이자 용기가 되어 주었으니까. 결국 그 사람은 그동안의 만행이 알려지며 동료들에게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당연히 후배들에게 하던 갑질과 괴롭힘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엔 몇 년 만에 나에게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 그다지 진심이라고 믿진 않았지만(pp. 108-11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13
  • 【북토크】 우리는 모두 문학하는 사람들이다
    책을 왜 읽을까? 사람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지식이나 감동을 얻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농구에 관심이 생겼는데 먼저 농구에 대한 책을 찾아봤다고 한다. 참 특이하다. 농구에 관해 관심이 있다면 당장 농구장에 가서 농구공을 만질 것 같은데 그는 먼저 농구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알고 시작했다. 이처럼 무엇인가 알고 싶을 때 관련 서적을 찾아본다. 세상에는 알고 싶은 것이 많기에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다. 또한 책은 감동을 주기에 읽는다. 책을 읽다가 전율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것을 또 느껴보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마치 낚시꾼이 손맛을 보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읽어 내려간 수많은 책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이 말과 글로 드러난다. 거창하게 작가는 아니더라도 말과 글을 사용하는 우리는 또 하나의 작가다. 그리고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평론가와 작가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다리기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무의식 깊숙이 뿌리박힌 '시나 소설을 써야 문학 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작가님은 소설 안 쓰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당황스러움은 '내가 언젠가는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리 쉽게 들켰나' 하는 마음 때문이고, 고마움은 '내 글을 보고 이 사람이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내 숨은 재능에 대한 칭찬이 아닐까' 하는 설렘 때문이다. "왜 소설을 쓰지 않나"라는 질문이 여전히 서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에세이나 평론은 문학의 본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뿌리 깊은 무의식 때문이다.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아도 나는 항상 문학의 길 위에 있었다. 평론이든 수필이든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는 모든 노력은 문학의 자장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설가나 시인이 아님에도 '문학 하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나도 소설가처럼 내 이야기의 플롯을 짜고 시인처럼 내 문장의 운율을 고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학 하는 마음은 어떤 장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사람을 어루만진다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름다운 말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면, 당신은 오늘 문학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따스한 언어로 누군가에게 깊은 위로를 받았다면, 그는 당신에게 문학이라는 선물을 듬뿍 안겨준 것이다.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이야기의 오랜 울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아름다운 언어의 맛과 향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문학은 어디서나 당신의 마음에 기쁘게 노크할 것이다(pp. 224-225).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13
  • 【북토크】 미련 없이 죽는 한 방법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이다. 나카무라 쓰네코는 1929년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나기 두 달 전에 의사가 되기 위해 히로시마에서 오사카로 떠나 혼란의 시대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되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2019년(90세)까지 풀타임으로 외래 및 병동 진료를 계속했다. 저서로는 16만 판매고를 올린, 오쿠다 히로미와의 공동 집필한 《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잊은 당신에게》가 있다. 현재는 은퇴해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오쿠다 히로미는 1967년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원래는 내과 전문의였으나 2000년에 나카무라 쓰네코 선생님을 만나 정신건강의학과로 전과했다.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외에 도내 20여 개 기업의 산업의로서 직장인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있다. 일본 마음챙김보급협회 대표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잊은 당신에게》, 《어디서나 1분 마음챙김》 등이 있다. 이 두 의사는 많은 환자들을 상대했고 또 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 사람은 노년을, 또 한 사람은 중년을 살아가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과 자기들의 인생 경험을 통해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술이 개입하는 것은 말년에 고통을 더할 뿐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나도 아내와 연명치료는 서로 하지 않기로 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공식 절차를 밟아 확정해야겠다. 이미 어머니는 해 놓으셨는데 아버지는 여러 해 침상에 누워 계시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 오쿠다: 호스피스 병동에는 오륙십 대도 있었는데요.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살았으니, 만족해요"라며 평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환자들도 꽤 보았습니다. 그런데 칠팔십 대의 고령자가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라고 후회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도 보았지요. 이를 보면서 나이가 인생의 만족을 느끼는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하게 깨달았습니다. 나카무라: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의식하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게 되지요. 그런 나날을 쌓아가다 보면 마지막 때가 다가와도 후회가 적을 거 같아요. 설령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이 있다 한들 그 또한 열심히 살아온 결과니까요. 오쿠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에 죽음을 거부하며 후회하는 환자들은 ‘몇 년만 더 살면 ㅇㅇ 하려고 했는데, 은퇴하면 ㅇㅇ 하려고 했는데' 같은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나카무라: 그러면 반대로 평안하게 마지막을 맞이한 사람은 어땠나요? 오쿠다: 그런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은 대체로 다 해봤으니, 후회는 없어, 내 마음대로 살아봤으니 괜찮아' 같은 말을 하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건강할 때부터 죽음을 의식하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을 가능한 한 미루지 않고 실행해 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카무라: 그렇지요.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것만큼은 피하는 것이 좋답니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마음껏 해보면 좋겠어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요. 보통 우리는 동조 현상에 휘둘리기도 하는데요. 조금이라도 주위 사람과 다르게 행동하면 '괴짜'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말해요. 사회 분위기상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미루는 게 더 좋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해요. 최대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간다면 평균수명보다 짧은 생을 맞이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거예요. 오쿠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말씀이죠? 더불어 하루하루를 최대한 나답게 자기 마음에 솔직하게 지내는 것이 이상적이란 뜻이 되겠네요. 물론 완벽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그래도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좋으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마음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pp. 143-146).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12
  • 【북토크】 노년의 공포, 치매....예방법은?
    80중반의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내 입장에서 가장 크게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치매”이다. 이 책은 치매가 한자로 ‘어리석을 癡, 어리석을 呆’이기에 ‘인지 장애’나 ‘인지 저하증’등의 용어로 바꾸었으면 하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치매에 대한 책을 읽게 됐다.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 유익했다. 치매 없는 건강한 노년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다. 의사들이 제안하는 예방법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WHO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인구는 3초마다 1명, 해마다 대략 천만 명씩 증가해 2030년에는 8,200만 명, 2050년에는 현재보다 3배 넘는 1억5,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렇게 급증하는 암울한 현실 속에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전 세계적으로 치매를 정복하고 하는 의학계와 과학계의 노력이 무척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p. 195). 치매 없는 건강한 뇌를 위한 전문가들의 제언 333 치매 예방수칙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기웅 교수는 '333 치매 예방 수칙'으로 치매를 예방하는 건강습관을 알리고 있다. 열심히 해야하는 3권勸, 하지 말아야 하는 3금禁, 정기적으로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3행行으로 333 이다. 3권 중 첫 번째는 잘 먹는 것이다. 보약을 따로 챙겨 먹기보다는 매일 끼니를 빠트리지 않고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두 번째는 머리를 자주 쓰는 것이다. 특별한 방법을 찾을 필요는 없고 멍하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순간을 일상에서 줄여야 한다. 예를 들어 수동적으로 TV만 보는 생활보다는 집안일, 독서, 봉사 활동, 종교 활동, 취미 생활 등 능동적으로 내가 머리를 쓰고 생각을 해내는 활동을 일상에 꾸준히 집어넣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 번째는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세번, 한 번에 3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치매를 예방하는 데 단일한 방법으로 가장 확실하게 효과가 크고 검증되어 있는 예방법은 유산소 운동이다. 다음은 3금으로 첫 번째는 금연이다. 흡연은 혈액 순환을 억제하고, 혈액 순환이 나빠지면 혈관성 치매뿐만 아니라 치매와 같은 퇴행성 치매의 위험도 증가하므로 반드시 금연해야 한다. 두 번째는 절주다. 하루에 세 잔 이상 한 번에 술을 마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한다. 한 잔을 더 마실 때마다 치매 위험이 그에 비례해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금주의 이유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는 머리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 운동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다가 머리를 다칠 수가 있는데 머리를 다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4배 정도 높아지고, 불리한 치매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10배까지 높아질 수 있다. 만약 운동 등 위험 소지가 있는 활동을 할 때는 머리 보호대를 착용하고, 집안에서 물건을 정리할 때는 높은 곳에 물건을 두지 않아 머리를 다칠 수 있는 소지를 제거하는 것이 권장된다. 3행 중 첫 번째는 흔한 성인병인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불편한 증상이 없으면 관리가 소홀해지기 쉬우나, 이 질환들은 치매 위험을 각각 1.5배 이상씩 높이기 때문에 질환들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정기적으로 투약하는 등 생활 습관을 챙겨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질환이 없는 사람은 예방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두 번째는 우울증 관리다. 우울증은 두 배 이상 치매 위험을 높이기 때문에 노인들은 우울증의 위험이 젊을 때보다 높으므로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 질환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기억 검진의 정기화다. 예방수칙을 잘 지켜도 치매에 걸릴 확률은 여전히 있으므로 60세가 넘은 사람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건강 검진하듯 기억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배운다음 줄이자 뇌과학자 서유현 박사는 건강한 뇌를 통한 치매 예방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건넨다. 요약하면 배운다음 줄이자'다. '배'는 배움이다. 나이가 들수록 독서를 즐기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치매 예방과 거꾸로 가는 길이다. 집안일, 봉사 활동, 타인과의 교류 등 여러 활동이 뇌에 자극을 준다. 배움의 요지는 새로움이다. 본인이 익숙한 것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다면 아는 음악을 똑같이 듣기만 하는 건 큰 자극이 아니다. 가사를 바꾸거나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게 두뇌 활동에 도움을 준다. '운'은 운동이다. 뇌도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뇌와 운동의 연관 관계를 밝힌 논문은 수없이 많다. 육체적인 운동은 뇌를 깨우고 뇌로 다양한 혈류를 많이 보낸다. 핏속에 들어 있는 산소나 뇌세포를 자극한 뇌 성장 인자들이 활발해지고 노화로 인한 염색체의 쇠퇴를 막아준다. '다'는 마음 다스림이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자세가 치매를 막는다. 나이가 들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폐쇄적인 태도를 갖기 쉬운데, 이러한 태도와 동반되는 부정적인 생각은 뇌신경 세포의 활동을 억제한다. 또 자기표현을 줄이거나 감정을 억제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참을성 없이 화를 내는 것도 치매에 부정적이다. 화를 자주 내거나 화가 나도 참거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 모두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치매 위험이 높다. 그러므로 애초에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최선이다. '음'은 적절한 영양 섭취다. 몸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몰라서 못 먹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결국 실천이 관건이다. 골고루 필요한 성분을 섭취하면서 몸에 나쁜 것은 가급적 피해야 치매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다. 이어지는 '줄'은 몇 가지를 줄이자는 의미다. 우선은 술과 담배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반 잔 정도의 술은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을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치매 발생의 원인이 된다. 담배의 해악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같은 맥락에서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도 생활 습관을 교정해 그 수치를 낮추는 데 노력해야 한다.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스마트폰 사용률도 뇌 건강에는 악재다. 전자파는 뇌에 좋지 않다. 엘리베이터 같은 폐쇄된 공간이나 지하철 같이 다수의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는 가급적 쓰지 말고 잘 때는 가까운 곳에 스마트폰을 두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뇌손상을 줄여야 한다. 머리에 지속적인 타격을 받은 레슬링 선수나 권투 선수가 치매에 많이 걸린다는 연구가 있듯 뇌의 작은 충격도 큰 여파를 불러올 수 있다. '이'는 치아 건강이다. 밥을 먹을 때는 30분 이상 잘 씹어서 넘기는 게 중요하다. 기억의 중추인 해마는 우리가 잘 씹을수록 두터워지고 기능이 좋아진다. 꼭꼭 씹어 먹는 게 기억력 손상을 막아준다는 의미다. 이가 빠져서 잘 씹지 못하는 사람의 치매 발병률은 정상 치아를 가진 사람에 비해 두 배 높다. 치주염이 있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발병률이 9배 높다는 보고도 있다. '자'는 잠을 잘 자자는 말이다. 상당히 많은 연구 결과가 뇌 건강에서 숙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수면 장애가 지속되면 뇌 크기가 줄어들고 60세 이상이 되면 수면 장애와 뇌 크기의 상관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뇌의 위축은 자연히 치매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새벽부터 일어나기 쉽다. 잠을 잘 자야 뇌 속에 독성 물질을 배출해 치매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 치매를 예방하려는 사람이든 치매 환자든 햇볕을 쬐어 정상적인 호르몬이 흐르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따라서 낮에 햇빛 아래에서 활동하고 밤에는 푹 자는 일반적인 생활 패턴으로 유지, 관리해야 한다. 잠은 무엇보다 첫잠 90분이 중요하다. 이때가 꿈이 없는 가장 깊은 수면을 취할 때이기 때문이다. 첫잠을 잘 자면 뇌 피로 회복에 큰 효과가 있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침실은 어둡고 조용하게 유지하고,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일정하게 하면서, 낮에는 30분 정도 햇볕을 쬐고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밤에 몸이 이완되며 잠에 잘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고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이재홍 교수가 건네는 치매 예방법 '진인사대천명고'의 맥락도 다르지 않다. '진'땀나게 운동을 하고, '인'정사정 없이 담배를 끊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대'내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천'박하게 술 마시지 말며 '명'에 이로운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고지혈증, 고혈압, 고혈당증 같은 혈관성 위험인자를 일찍 발견하고 조절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중요하다는 이야기다(pp. 186-19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10
  • 【내이야기】 달라진 설 명절 풍경
    설 명절 연휴를 보낸다. 이제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이 기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명절날 미리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부모님 댁에 와 아침을 동생네와 같이 먹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담임목회 중단 후 부모님 댁에 같이 살기에 명절날 아침 일찍 차 타고 올 일이 없다. 그리고 장모님께서는 재작년인 2022년에 세상을 떠나셨기에 처가댁에 갈 일도 없다. 처가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명절에 부모님 드실 것, 우리 식구 먹을 것 간단하게 준비해 밥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찾아갈 곳도, 찾아올 사람도 없다. 연휴 기간에는 취재할 일도 없기에 미리 대출한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그러다 심심하면 밥 먹고 운동 삼아 뒷동산 한바퀴 돌고 오면 된다. 참으로 평안한 설 연휴이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명절을 맞아 긴 시간 차에 시달리며 고향을 찾아간다. 젊을 때 텔레비전에서 귀성길로 고속도로에 막혀 있는 차들을 보며 지방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경기도 여자이다. 나 또한 서울 태생이라 지방과는 관계가 없다. 아버지는 경기도 분이신데 젊을 때 서울로 올라오셨고, 어머니는 충청북도 분이신데 결혼 후 서울에서 사셨고, 외가댁도 사라졌기에 더 이상 지방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고향을 찾아가는 긴 행렬은 세월이 흐르면 아마 사라지지 않을까? 설레고 좋았던 어린 시절의 명절과는 너무 다른 명절이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려나?
    • 오피니언
    • 칼럼
    2024-02-09
  • 【북토크】 거짓말이 일상인 한국사회
    한국만큼 사기 사건이 많은 나라도 없다고 한다. 일본에 비하면 그 숫자는 엄청나다. 사기는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결국 한국은 “사기 공화국”, “거짓말 공화국”이다. 나도 몇 번의 사기를 당해본 적이 있다. 또 최근 남의 거짓말로 피해를 본적도 있다. 그래서 거짓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거짓말에 대한 책을 읽으며 거짓을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울러 남의 거짓말에 휘둘리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거짓 뉴스, 거짓 기사, 거짓말이 판치는 세상이다. 속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리고 거짓말을 한 당사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한 소녀의 거짓 눈물로 인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90년 미국 연방 하원 공청회에 한 소녀가 등장했다. 그는 공청회에서 당시 진행 중이었던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전쟁에서 이라크군이 벌인 만행을 고발했다. 소녀는 이라크군이 민간 병원에 난입해 인큐 베이터에서 자고 있는 아기들을 바닥에 던져 죽였다고 전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소녀의 생생한 증언으로 미국에서는 이라크 전쟁 참전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고,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곧 걸프전쟁이 발발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0개가 넘는 국가에서 6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밝혀지게 된다. 눈물을 흘리며 이라크군의 만행을 고발한 소녀의 증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쿠웨이트 정부가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쿠웨 이트 대사의 딸인 나이라흐Nayirah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한 것이다(p. 116). 한국인이 거짓말에 잘 속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거짓말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기관들의 조사에 의해 이제 한국인들이 무슨 거짓말을 하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대중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서 직관에 의존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뿐이다. 흔히 얘기하는 '여성의 감'이라는 표현처럼, 한국인의 상당수는 자신의 직관적 사고를 '촉'이라고 칭하면서 상당히 신뢰한다. 하지만 이러한 촉에 대한 믿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본 데서 비롯된 심리적 함정일 뿐이다. 직관에만 의존하다가 잘 속는 사람들에게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과도한 자신감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자신만은 거짓말에 속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다. 우리는 거짓말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거짓만을 말하지 않고 대부분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한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다. 결혼을 한 여성들은 배우자와 자녀의 거짓말을 매우 높은 확률로 구분한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그 확률은 매우 떨어진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무주의 맹시'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집중해서 보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거짓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눈 맞춤을 못한다는 것이다. 눈은 혀처럼 많은 말을 한다는 격언이 있다. 거짓말의 신호는 눈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눈 깜박임, 눈동자 움직임, 눈썹과 눈 주변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도 있다. 한국인들은 똑바로 마주보는 것을 무례함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과의 눈 맞춤에 익숙하지 않다. 마주한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잘 구별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처럼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기 어려운 문화도 있다. 세 번째는 공감 능력의 부족함이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거짓말쟁이들은 가짜 감정을 전달한다. 거짓 미소, 거짓 눈물이 대표적인 거짓 감정의 표현이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들은 가짜 감정을 쉽게 알아차린다. 하지만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읽는데 서투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가짜 감정 표현에도 쉽게 속을 수 밖에 없다. 네 번째는 언어 중심의 소통 방식이다. 비언어는 언어를 초월해 그 사람의 성격, 감성, 지성, 태도를 전달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의사소통방식이다. 언어의 역사는 고작 6,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서양의 비언어 연구는 50년이 넘은 데 반해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비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지 못한다. 다섯 번째는 타인에 대한 관심 부족이다. 사람은 말을 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을 우리가 읽지 못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타인의 감정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만 배워왔다. 주입식 교육처럼 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거짓말을 함으로써 어떤 일들이 발생 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하고 무조건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 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한국인의 거짓말에 대해 객관적 자료를 가지고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도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거짓말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단 둘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프로파일러라는 특수한 직업인이었다. 그 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 결과는 촉에 의지해 거짓말 공화국에서 적당히 속이고 속아주면서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들이다. 외국의 경우 거짓말에 관한 연구는 물론 대중들의 이해 역시 한국에 비해 상당히 높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CIA, FBI 기관 출신자들이 직접 거짓말에 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한다. 또 그 결과는 곧 대중에게 공개된다. 그러다보니 거짓말에 관한 지식들이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고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정보들 또한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거짓말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한국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영악하게 살아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모순되고 막연하기만한 잔소리를 교육이라고 착각한다. 거짓말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것도 아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거짓말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거짓말도 훌륭한 사교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쉽게 속지 않을 수도 있다(pp. 40-43).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거짓말쟁이로 손가락질 받는 누군가를 다시 비난하거나 또는 거짓말에 대해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지는 않다. 한국 사회에서 거짓말이 줄어들기를 바라지만, 그동안 축적해온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거짓말이 줄어들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거짓말에 대해 그 본질을 추적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한국인의 거짓말을 분석하면서 우려되는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가 거짓말을 많이 하거나 또는 쉽게 속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거짓말을 지적받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모욕이다. 그리고 모욕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을 시도할 때 사회에서의 신용과 관련된 모든 자격이 상실될 수 있음을 각오하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속였다가 들키는 사람의 회복보다 속은 사람의 회복이 훨씬 어렵다. 한국인의 거짓말이 가진 고유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게임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p. 21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09
  • 【논평】 우려스러운 108회 총회 선관위 행보...107회 총회 임원들의 행태가 보인다
    108회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권순웅 목사, 이하 선관위)가 첫 행보부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작년 9월 108회 총회 현장에서 개정된 선거 규칙을 위반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108회 총회에서 개정한 선거 규정은 총회 임원과 기관장, 총무 입후보 예정자에 대해 총회가 파한 후 2년간 총회 산하기관(전국주교, 전국CE, 전국남·여전도회), 상비부 및 각종 단체(협의회) 행사에 참석 및 초빙, 후원을 금지하고, 교단 기관지인 기독신문을 제외한 모든 사설 언론, 기관, 속회, 협의회에 광고를 일절 금지했다. 또한 총회가 파한 후 1년 동안 부흥회 및 강사 초청도 금지했다.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매우 강력한 조치로 금권선거를 예방하고, 깨끗한 선거를 촉진하는 차원이었다. 그래서 총회 현장에서 많은 총대들의 동의로 통과됐다. 그런데 108회 선관위가 5개월도 안 되어 이것을 뒤집는 결정을 내려 파문이 일고 있다. 선관위는 지난 1월 29~31일 제주도에서 워크숍으로 모여 선거 규정 시행세칙을 마련하고 분과 조직을 완료하는 등 안건을 처리했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을 바꾸었다. 총회 임원, 기관장, 총무 입후보 예정자는 소속한 노회에서 공천 받는 4월 말까지 전국주교, 전국CE, 전국남·여전도회, "전국장로회"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 단, 지역협의회와 같은 단체는 허용되지 않는다. 교회 광고는 허용하되, 개인 광고는 불가하며 사진도 게재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현재 총회 임원 출마 예정자들은 벌써부터 각 기관의 지원 부탁에 시달린다는 말이 돌고 있다. 지난 108회 총회 현장에서 개정된 선거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여러 단체에 후원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선관위에는 지난 107회기 총회장, 장로부총회장, 서기, 회록서기, 회계 등 5명이 당연직으로 들어가 있다. 선관위원 15명 중 1/3이다. 지난 107회기 임원들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2022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충남노회를 폐지해 놓고서 다음 해 3월 소위 정기회 측에 노회 소집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구 충남노회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났는가? 그때도 총회에서 폐지한 충남노회를 임원회가 소집권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 많았고 임원 금품 로비설까지 나돌았다. 이처럼 현재 선관위원 중 당연직인 107회 총회 임원들 5명은 지난 회기 총회 결정을 무시하는 일을 저지른 경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108회기의 선관위 법을 위반하는 결정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총회가 파한 후에 총대들은 총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거기에 대해 의견을 표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총회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각 노회의 대표자인 총대가 모여 결의했는데 어찌 몇 달이 안 돼 그 결정을 뒤집는 결정을 위원회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자는 108회 총회 현장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봤을 때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총대들이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규정에 대해 많은 말들이 나왔고 결국 선관위는 그 여론에 따라 규정을 벗어나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난 총회 현장에서 선거법 개정안이 결정되기 전에 논의했어야 했다. 107회 선관위가 개정안을 내기 전에 108회 선관위원이 될 그 당시 임원들과 의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총회 현장에서 전직으로 물러나 108회 선관위 당연직이 될 당사자들이 개정안에 대해 발언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이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가혹한 법률이라도 사회가 합의한 이상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108회 총회에서 개정된 선거법이 엄격하다고 해도 적어도 1년은 실행을 해보고 109회 총회 현장에서 재론해야 할 것이다. 총회 현장에서 가결해 놓고 이후 쉽게 뒤집을 수 있다면 총회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총회 결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108회 총회 선관위의 첫 행보가 위태로워 보인다. 가뜩이나 이번 회기에는 부총회장에 3회 출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벌써부터 시끄러운데 과연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옛말을 벗어나는 신뢰할 만한 행보를 보여주는 선관위가 되기 바란다. 총회 때 총대들 앞에서 선관위원들이 사과하는 불행한 역사는 작년 한 번으로 족하다.
    • 오피니언
    • 논단
    2024-02-07
  • 【북토크】 어느 변호사가 신앙을 갖게 된 여정
    우연히 한승헌 변호사의 자서전을 읽게 됐다. 작은 활자로 400페이지가 넘다보니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책을 통해 지나온 민주화 과정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오늘날의 자유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저자는 책 말미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신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것이라 관심있게 봤다. 역시 주변에 있는 기존 신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저자는 2022년에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도 책을 통해 그분과 좋은 만남을 갖게되니 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신앙 여정에 대한 글이니 길지만 읽어볼 만하다.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하니 책이 절판됐다. 도서관에 있기에 대출해서 읽었는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의 신앙 내 어린 시절, 어머님은 조왕님께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도 드리고, ‘단골에미’ 불러다 굿도 하는, 어찌 보면 다종교주의자였고, 달리 보면 범신론자였다. 나는 어머니가 신앙은 있으나 종교는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아니, 신앙이나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 염원인 기복의 마음이 간절했다고 본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샤머니즘 류의 신앙에 젖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도 무종교로 자라고 사회생활에 들어갔다. 사실, 대학 2학년 때 선배 한 분의 권고로 교회에 처음 나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사이에 반목과 음해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신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의 반신앙적 행태에 실망했던 것이다. 입으로 하는 설교나 기도보다 행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검사가 되어, 이름 난 목사와 장로 사이의 고소사건을 맡게 되었다. 서로 말이 달라서 대질신문을 하려고 두 사람을 동시에 나오도록 했다. 예정된 시각에 검사실에 출석한 두 사람은 내 책상 앞에 앉자마자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끝날 줄을 몰랐다. 마치 기도경연대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의 화해 권유를 끝내 거부했다. 양측이 조금씩만 양보하면 어렵지 않게 화해가 될 사건이었건만, 피차 막무가내였다. 기독교인 아닌 일반인보다 훨씬 이기적으로 보였다. 이래서 나의 마음은 기독교에서 한발 멀어졌다. 말과 실천 사이의 이중성이 싫었다. 그 후 변호사로 전신하면서 어쩌다가 여러 시국사건의 변호인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얽힘이 늘어갔다. 1973년 5월의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에서는 박형규 목사와 젊은 기독청년들이 박정권의 유신통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살포했대서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나는 KNCC 측의 의뢰을 받고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기독교인들이 피고인으로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변호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974년 정초에 터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과 그해 4월에 세상을 놀라게 한 긴급조치 4호 사건을 계기로 많은 기독교 목사, 전도사, 장로, 신학생, 기독청년들을 감옥과 법정에서 만나게 되었다. 박 정권의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주장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겠다는 긴급조치가 나오자 세상이 온통 얼어붙었다. 그런 공포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간 구속자들이 속출했는데, 그 대부분이 (또는 주동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긴급조치의 협박에 맞서 유신통치를 공격하고, 법정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내세워 의연하게 싸웠다. 나는 당시 신자가 아니어서 그들의 '신앙적 결단'을 이해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소나기식으로 공부하여 법정 신문과 변론에 엉성하게나마 활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를 외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정교분리를 이유로 유신독재에 눈감는 판국에 일신의 위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반독재운동에 나선 기독교인들의 용기에 나는 감동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부터 수유리에 있는 크리스천아카데미의 각종 모임에 제법 열심히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주워들은 넌크리스천적인 크리스천', '크리스천적인 넌크리스천' 이란 말에 마음이 끌렸다.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1975년 1월에 이어 3월에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간 나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구속된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을 사퇴하라는 요구를 거듭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이없는 투옥에 분개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성경도 읽었다. 1심은 ‘묻지마 유죄다’ 실형으로 끝났고,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나왔다. 아홉 달 동안의 감옥살이 (독방생활)는 나에게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와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아울러 체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사건으로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생각다 못해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많은 기독교서적을 발행하게 되었다. 여직원 한 사람만 두고 꾸려나가는 형편이고 보니, 모든 책의 원고 손질이나 교정을 내가 직접 보게 되어, 나는 훌륭한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 지도자들의 책을 몇 번씩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고, 깨달음의 기회가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의 거리가 가까워져갔다. 그 무렵 내가 힘을 기울이던 앰네스티운동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성을 보였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억압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을 대할 적마다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그 무렵, 아내의 인척 할아버지 되시는 주형옥 목사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목사가 전도하는 일이야 다반사다 싶어그냥 있었는데, 그 다음 주에 또 편지가 왔다. 그렇게 해서 전후 열네 통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곳을 순례하던 끝에 '회원교회'라는 개척교회를 내 신앙의 첫 둥지로 정했다. 개척단계라 예배당도 따로 없고 교인 수도 적었지만, 거기 나오는 교우들이 한 시대의 '부상자' 혹은 그 동지들이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을 가꾸어나갔다. 그러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서울구치소의 ‘재수생’이 되었다. 남산 지하실에서 조사와 고문이 범벅이 된수모를 겪고 자술서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데, 그 첫머리에 '종교' 란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라고 쓸 자신이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무(종교)'라고 쓸 수도 없어서 생각 끝에 앞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자는 다짐의 뜻으로 기독교 라고 써 넣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들은 거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사와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사형이 구형된 김대중 선생의 의연하면서도 절절한 최후진술은 참으로 기독교의 사랑을 증언하는 명연설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끝에 1981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석방되었다. 감방에서는 면학 분위기가 좋아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경을 몇 독하고 기독교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앞서 적은 대로,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셨다. 반면, 아내는 어릴 적부 터 기독교인이어서 혹시 신앙문제로 고부간의 갈등· 불화가 생길까 봐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께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간다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아닌가. 나와 아내는 깜짝 놀랐다. 1962년부터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는데, 어쩌다보니 식구들이 각기 다른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교회 나가시기가 어렵게 되자, 가족회의를 열어 어머님께서 나가시던 교회(양광감리교회)로 온 가족이 일원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도 기독교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이어서 아주 다행스러웠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을 변호하다가 그들의 올바른 신앙 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흔히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았든 몰랐든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못지 않게 이 세상 형제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신앙이란 자신의 심령의 평안을 구하기보다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것이란 점도 깨달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sin of commission) 못지않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sin of omission)를 명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아울러그것을 이겨낼 힘과 지혜도 주신다는 것, 이유 없는 고난은 있을지 몰라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 하나님의 역사는 단막극이 아니라는 것, 신앙이란 패배 가운데서도 승리를 찾는다는 것. 하나님을 입술로만 사랑해서는 안 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 이 세상의 불의에 눈 감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 이런 생각이 나의 신앙관이다(pp. 381-385).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04
  • 【북토크】 책의 오탈자…격을 떨어트린다
    책을 읽다 보면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은 거의 오탈자가 없다. 그런데 마이너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읽다 보면 오탈자가 많이 나온다. 이때 어린 시절 밥을 먹다 돌을 씹는 것처럼 오탈자는 책을 읽는 자들에게 괴로움을 주고 책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린다. 전에 읽은 한 책은 내용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오탈자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일일이 그것을 표시해서 그 책을 쓰신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갈 일이 있을 때 사무원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부디 책이 다시 나온다면 오탈자를 수정해서 나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최근 책을 내신 한 목사님이 주신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페이지마다 오탈자 풍년이다. 혹시 저자가 오탈자 문제를 일으켰다면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교정보는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결국 저자의 오탈자를 잡아낼 수 없다. 그래서 오탈자가 한가득한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책은 독자에게 고통을 주며 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도 꾸역꾸역 읽어 원 저자에게 넘겨줄까를 생각하고 있다. 말은 녹음하지 않는 한 듣고 사라지지만 인쇄된 글은 그렇지 않다. 오탈자를 수정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책을 낼 때는 수없이 교정을 해야 한다. 기사를 쓰는 기자 입장에서도 오탈자가 생긴다. 혼자 쓰고 혼자 검토하다 보니 오탈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후 자기 기사를 다시 볼 때 오탈자가 보이면 인터넷 신문은 수정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지면 신문과 다른 장점이 있다. 때로 독자들이 지적해 주어 고치는 경우도 있다. 오탈자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오탈자가 날 수 있음을 널리 양해 부탁드린다. 그리고 오탈자를 지적해 주면 곧 수정할 것을 약속드린다.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2-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