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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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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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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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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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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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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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북토크】 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
    나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늙음”과 “죽음”은 늘 나의 관심사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책들은 기회가 되면 읽는다. 이번에도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일본은 아무래도 초고령사회다 보니 노년과 죽음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객사”한다. 장례 문화가 바뀐 것이다. 저자는 간병 제도를 통해 각자의 집에서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고 있다. 80세 중반을 넘어서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마지막이 평안하시기를 바라고 있다. 가능하시면 집에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 이제 고독사의 정의 중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았다. 바로 두 번째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입회인의 유무가 그렇게 중요할까? 혼자 사는 고령자라면 당연히 집에 혼자 있다. 다른 사람이 가끔 오갈 수도 있지만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있을 리는 없다. 싱글은 혼자 살고 혼자 나이를 먹으며 혼자 간병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죽는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나도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싸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가족이 자고 있거나 외출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많지만 낮에는 일 하러 모두 나가서 간병 필요도 4등급이나 5등급을 받은, 한 마디로 자리보전한 고령자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일이 흔하다. 요즘은 '며느리'라는 이름의 성인 여성이 24시간 집을 지키지도 않는다. 가족이 미처 지켜보지 못할 때 죽으면 그것도 입회인이 없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시설이나 병원에 있으면 고독사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시설도 직원이 몇 시간 간격으로 보러 올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을 순회한 후 다음 순회를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병원이라고 간호사가 24시간 주시하지도 않는다. 각종 모니터가 붙어 있으니 이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누군가가 달려오겠지만 그도 결국은 기계가 알려주는 죽음이다. 그뿐 아니라 의사가 매뉴얼에 따라 전기 쇼크나 심장 마사지를 시작하면 평온해야 할 죽음이 화재 현장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일본재택호스피스협회 회장인 오가사와라 씨는 이를 병원 내 고독사'라고 부른다. 병원이나 시설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입회인이 있는 죽음'을 보장받지는 않는다. 덧붙이면 오가사와라 씨는 사람은 죽을 때를 “고른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손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죽는다든 지. 가장 좋아하는 요양보호사가 지켜볼 때 숨이 끊어지는, 정말 실화일까 싶은 에피소드를 수없이 들었다. “어떻게든 장남이 올 때까지 버텨달라”는 가족의 강력한 요구에 무리하게 연명 처치를 하는 일도 있다. 오가사와라 씨는 그동안 혼자 사는 사람을 수없이 간호했지만 혼자서 죽는 사례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오가사와라 클리닉에서 혼자 사는 사람을 간호한 사례가 적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사례가 많이 쌓여서 세 자릿수에 달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사람도 있긴 하죠?"라고 물으니 "그렇죠, 이제 다양해요"라고 했다. 아무렴 그렇지 싶었다. 임종관리사를 양성하고 있는 시바타 구미코 씨는 '혼자서 죽게 하지 않겠다', 안아주며 보내겠다'며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시바타 씨는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마지막 1%가 행복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며, 그 마지막 1%를 도와주는 사람이 임종관리사라고 말한다. 나는 내 책 『케어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에서 그녀와 대담을 나눴는데, 내가 "전 혼자서 죽을 거예요" 라고 하자 그녀는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가실 때는 제가 꼭 안아드릴게요"라고 말했다(웃음). 그런데 고령자 그룹 리빙 홈인 '코코(COCO) 쇼난다이'에서 지내는 사이조 세쓰코 씨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입소인이 있어 마지막까지 한시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지켰는데, 죽어가던 그 사람이 "가끔은 혼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나는 취재를 하면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을 때 흥미롭다. 나는 강연 중에 "죽을 때 자녀나 손자에게 둘러싸이고 싶나요?",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면 좋겠나요?"라는 질문을 한 다. 그런데 그 반응을 보면 지역 차가 크다. 어느 지방에서는 고령의 한 남성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도쿄에서는 500명 이상의 고령 여성이 일제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을 잡아주기를 원한다고 한들 아무나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일까, 아니면 요양보호사여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오래 살면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진다. 이는 숙명이다. 임종을 맞을 때, 사람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느냐고 호스피스 의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니요, 알 수 없어요. 임종 직전에는 뇌 내 마취약이라고 불리는 엔도르핀이 나와서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요"라는 답변도 있었고, 누가 손을 잡아줘도 모를 거예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시죠?'라고 물으니 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오감 중 청각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서 말을 걸어주는 게 좋다는 의사도 있다. 이런 에피소드도 들었다. 자녀와 손자들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말을 걸었더니 할아버지가 확실한 발음으로 "시끄럽다"고 했다는 일화였다. 죽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죽게 해달라는 그 기분을 나는 이해한다. 오랜 지인 중에 평생 고독하게 산 싱글 남성을 돗토리시의 호스피스 의사 도쿠나가 스스무 씨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혀암 수술 이후 목소리를 잃은 지인은 의사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집에서 죽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요양보호사가 방문해보니 침대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홀로 훌륭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서예와 전각, 술과 차를 즐겼던 고고한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 그렇다면 '입회인 없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일까 남겨지는 사람일까? 취재하면서 보니 임종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쪽은 죽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를 '임종 입회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오랫동안 간병해온 지인은 자신이 외출한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마지막 잠깐을 놓쳐도 괜찮지 않나 싶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을 전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텐데 꼭 죽어가는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초고령 사회의 죽음은 속도가 느리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다.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리미리 하는 게 좋다. 작가 이시무레 미치코 씨가 임종을 맞았을 때, 오랜 친구이자 둘도 없는 동지였던 와타나베 교지 씨는 자리를 피했다고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은 "울러 갔나 봐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작별 인사는 예전에 했다"고 말했다. 임종관리사 시바타 씨는 작가 세토치 자쿠초 씨가 인용한 겐유 소큐의 소설 『아미타바』 속 문구를 나에게 들려줬다.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25m 수영장을 529번 채울 만한 물도 바로 끓게 할 정도의 에너지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준다”라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의심 많은 나는 “그걸 어떻게 측정할 수 있지?”라며 갸우뚱했지만, 시바타 씨는 죽은 자가 넘겨주는 에너지를 남아 있는 쪽이 받지 않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장은 임종을 지키려는 것이 어차피 남겨지는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호주에서 간병 일을 하는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아들이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방문했다. 호주 사람들은 영어권에 일자리가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지 이주한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가족도 많다. 그 어머니가 반년 후에 돌아가시자 간병인이 영국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아들은 "작별 인사는 이미 해두었으니, 장례식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지인은 “그렇게도 하더라고요. 일본인인 저는 좀 이해하기 힘들 있지만....”이라고 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일본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상대의 귀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몇 번이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엄마의 자식이라서 행복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다. 일본인은 특히 가족 간에는 부끄럽다고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못 하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다가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고 상태가 점점 나빠져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정신이 온전할 때 물어볼걸', '이런 말도 해드릴걸' 하고 후회하느니 좀 더 빨리 몇 번이고 말해드리자. 나는 요즘 친구들에게도 "그때 네가 친절하게 대해준 일을 잊을 수가 없어, 너의 이런 점이 좋아'"라고 말해주기 시작했다. 죽고 난 후에 장례식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사를 읽는들 죽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을 만나면 '다음에 만날 때도 모두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다시 만나 기쁘다"라며 진심으로 기뻐하면 된다.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죠?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쁜가.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재택사'라는 말을 만들어버렸다. 현재 일본에서는 나 말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저작권 마크를 붙였다. 아니, 사실은 농담이다. 저작권 따위 쩨쩨하게 굴 생각은 없고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해서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간호사 스가하라 유미 씨는 방문 간호 업계를 이끌고 있으며 '캔너스(CANNUS)'라는 방문 간호사 모임을 만들었다. 캔너스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서 "입회인이 없는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지 말자"라는 글을 봤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고독사의 정의를 바꾸면 고독사 통계는 간단히 바뀐다. 조사 방법이나 선택지 카테고리를 바꾸면 통계 데이터는 바뀐다. 간병 필요 인정도 '간병 필요 고령자' 수에서 '지원 필요 고령자'를 빼버리면 간병 필요 고령자의 수가 감소한다. 그중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변경한다면(일본노년학회가 이미 제언 중이다) 고령화율의 수치도 달라진다. 고독사를 없애자는 캠페인은 사후에 빨리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pp. 9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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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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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평】 우려스러운 108회 총회 선관위 행보...107회 총회 임원들의 행태가 보인다
    108회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권순웅 목사, 이하 선관위)가 첫 행보부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작년 9월 108회 총회 현장에서 개정된 선거 규칙을 위반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108회 총회에서 개정한 선거 규정은 총회 임원과 기관장, 총무 입후보 예정자에 대해 총회가 파한 후 2년간 총회 산하기관(전국주교, 전국CE, 전국남·여전도회), 상비부 및 각종 단체(협의회) 행사에 참석 및 초빙, 후원을 금지하고, 교단 기관지인 기독신문을 제외한 모든 사설 언론, 기관, 속회, 협의회에 광고를 일절 금지했다. 또한 총회가 파한 후 1년 동안 부흥회 및 강사 초청도 금지했다.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매우 강력한 조치로 금권선거를 예방하고, 깨끗한 선거를 촉진하는 차원이었다. 그래서 총회 현장에서 많은 총대들의 동의로 통과됐다. 그런데 108회 선관위가 5개월도 안 되어 이것을 뒤집는 결정을 내려 파문이 일고 있다. 선관위는 지난 1월 29~31일 제주도에서 워크숍으로 모여 선거 규정 시행세칙을 마련하고 분과 조직을 완료하는 등 안건을 처리했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을 바꾸었다. 총회 임원, 기관장, 총무 입후보 예정자는 소속한 노회에서 공천 받는 4월 말까지 전국주교, 전국CE, 전국남·여전도회, "전국장로회"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 단, 지역협의회와 같은 단체는 허용되지 않는다. 교회 광고는 허용하되, 개인 광고는 불가하며 사진도 게재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현재 총회 임원 출마 예정자들은 벌써부터 각 기관의 지원 부탁에 시달린다는 말이 돌고 있다. 지난 108회 총회 현장에서 개정된 선거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여러 단체에 후원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된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선관위에는 지난 107회기 총회장, 장로부총회장, 서기, 회록서기, 회계 등 5명이 당연직으로 들어가 있다. 선관위원 15명 중 1/3이다. 지난 107회기 임원들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2022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충남노회를 폐지해 놓고서 다음 해 3월 소위 정기회 측에 노회 소집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구 충남노회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났는가? 그때도 총회에서 폐지한 충남노회를 임원회가 소집권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 많았고 임원 금품 로비설까지 나돌았다. 이처럼 현재 선관위원 중 당연직인 107회 총회 임원들 5명은 지난 회기 총회 결정을 무시하는 일을 저지른 경력(?)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108회기의 선관위 법을 위반하는 결정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총회가 파한 후에 총대들은 총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거기에 대해 의견을 표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총회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각 노회의 대표자인 총대가 모여 결의했는데 어찌 몇 달이 안 돼 그 결정을 뒤집는 결정을 위원회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자는 108회 총회 현장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봤을 때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총대들이 받아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규정에 대해 많은 말들이 나왔고 결국 선관위는 그 여론에 따라 규정을 벗어나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난 총회 현장에서 선거법 개정안이 결정되기 전에 논의했어야 했다. 107회 선관위가 개정안을 내기 전에 108회 선관위원이 될 그 당시 임원들과 의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총회 현장에서 전직으로 물러나 108회 선관위 당연직이 될 당사자들이 개정안에 대해 발언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이러한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가혹한 법률이라도 사회가 합의한 이상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108회 총회에서 개정된 선거법이 엄격하다고 해도 적어도 1년은 실행을 해보고 109회 총회 현장에서 재론해야 할 것이다. 총회 현장에서 가결해 놓고 이후 쉽게 뒤집을 수 있다면 총회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총회 결정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108회 총회 선관위의 첫 행보가 위태로워 보인다. 가뜩이나 이번 회기에는 부총회장에 3회 출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벌써부터 시끄러운데 과연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옛말을 벗어나는 신뢰할 만한 행보를 보여주는 선관위가 되기 바란다. 총회 때 총대들 앞에서 선관위원들이 사과하는 불행한 역사는 작년 한 번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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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7
  • 【북토크】 어느 변호사가 신앙을 갖게 된 여정
    우연히 한승헌 변호사의 자서전을 읽게 됐다. 작은 활자로 400페이지가 넘다보니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책을 통해 지나온 민주화 과정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오늘날의 자유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저자는 책 말미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신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것이라 관심있게 봤다. 역시 주변에 있는 기존 신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저자는 2022년에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도 책을 통해 그분과 좋은 만남을 갖게되니 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신앙 여정에 대한 글이니 길지만 읽어볼 만하다.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하니 책이 절판됐다. 도서관에 있기에 대출해서 읽었는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의 신앙 내 어린 시절, 어머님은 조왕님께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도 드리고, ‘단골에미’ 불러다 굿도 하는, 어찌 보면 다종교주의자였고, 달리 보면 범신론자였다. 나는 어머니가 신앙은 있으나 종교는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아니, 신앙이나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 염원인 기복의 마음이 간절했다고 본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샤머니즘 류의 신앙에 젖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도 무종교로 자라고 사회생활에 들어갔다. 사실, 대학 2학년 때 선배 한 분의 권고로 교회에 처음 나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사이에 반목과 음해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신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의 반신앙적 행태에 실망했던 것이다. 입으로 하는 설교나 기도보다 행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검사가 되어, 이름 난 목사와 장로 사이의 고소사건을 맡게 되었다. 서로 말이 달라서 대질신문을 하려고 두 사람을 동시에 나오도록 했다. 예정된 시각에 검사실에 출석한 두 사람은 내 책상 앞에 앉자마자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끝날 줄을 몰랐다. 마치 기도경연대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의 화해 권유를 끝내 거부했다. 양측이 조금씩만 양보하면 어렵지 않게 화해가 될 사건이었건만, 피차 막무가내였다. 기독교인 아닌 일반인보다 훨씬 이기적으로 보였다. 이래서 나의 마음은 기독교에서 한발 멀어졌다. 말과 실천 사이의 이중성이 싫었다. 그 후 변호사로 전신하면서 어쩌다가 여러 시국사건의 변호인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얽힘이 늘어갔다. 1973년 5월의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에서는 박형규 목사와 젊은 기독청년들이 박정권의 유신통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살포했대서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나는 KNCC 측의 의뢰을 받고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기독교인들이 피고인으로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변호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974년 정초에 터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과 그해 4월에 세상을 놀라게 한 긴급조치 4호 사건을 계기로 많은 기독교 목사, 전도사, 장로, 신학생, 기독청년들을 감옥과 법정에서 만나게 되었다. 박 정권의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주장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겠다는 긴급조치가 나오자 세상이 온통 얼어붙었다. 그런 공포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간 구속자들이 속출했는데, 그 대부분이 (또는 주동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긴급조치의 협박에 맞서 유신통치를 공격하고, 법정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내세워 의연하게 싸웠다. 나는 당시 신자가 아니어서 그들의 '신앙적 결단'을 이해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소나기식으로 공부하여 법정 신문과 변론에 엉성하게나마 활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를 외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정교분리를 이유로 유신독재에 눈감는 판국에 일신의 위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반독재운동에 나선 기독교인들의 용기에 나는 감동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부터 수유리에 있는 크리스천아카데미의 각종 모임에 제법 열심히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주워들은 넌크리스천적인 크리스천', '크리스천적인 넌크리스천' 이란 말에 마음이 끌렸다.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1975년 1월에 이어 3월에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간 나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구속된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을 사퇴하라는 요구를 거듭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이없는 투옥에 분개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성경도 읽었다. 1심은 ‘묻지마 유죄다’ 실형으로 끝났고,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나왔다. 아홉 달 동안의 감옥살이 (독방생활)는 나에게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와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아울러 체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사건으로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생각다 못해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많은 기독교서적을 발행하게 되었다. 여직원 한 사람만 두고 꾸려나가는 형편이고 보니, 모든 책의 원고 손질이나 교정을 내가 직접 보게 되어, 나는 훌륭한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 지도자들의 책을 몇 번씩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고, 깨달음의 기회가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의 거리가 가까워져갔다. 그 무렵 내가 힘을 기울이던 앰네스티운동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성을 보였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억압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을 대할 적마다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그 무렵, 아내의 인척 할아버지 되시는 주형옥 목사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목사가 전도하는 일이야 다반사다 싶어그냥 있었는데, 그 다음 주에 또 편지가 왔다. 그렇게 해서 전후 열네 통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곳을 순례하던 끝에 '회원교회'라는 개척교회를 내 신앙의 첫 둥지로 정했다. 개척단계라 예배당도 따로 없고 교인 수도 적었지만, 거기 나오는 교우들이 한 시대의 '부상자' 혹은 그 동지들이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을 가꾸어나갔다. 그러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서울구치소의 ‘재수생’이 되었다. 남산 지하실에서 조사와 고문이 범벅이 된수모를 겪고 자술서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데, 그 첫머리에 '종교' 란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라고 쓸 자신이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무(종교)'라고 쓸 수도 없어서 생각 끝에 앞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자는 다짐의 뜻으로 기독교 라고 써 넣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들은 거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사와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사형이 구형된 김대중 선생의 의연하면서도 절절한 최후진술은 참으로 기독교의 사랑을 증언하는 명연설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끝에 1981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석방되었다. 감방에서는 면학 분위기가 좋아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경을 몇 독하고 기독교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앞서 적은 대로,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셨다. 반면, 아내는 어릴 적부 터 기독교인이어서 혹시 신앙문제로 고부간의 갈등· 불화가 생길까 봐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께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간다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아닌가. 나와 아내는 깜짝 놀랐다. 1962년부터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는데, 어쩌다보니 식구들이 각기 다른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교회 나가시기가 어렵게 되자, 가족회의를 열어 어머님께서 나가시던 교회(양광감리교회)로 온 가족이 일원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도 기독교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이어서 아주 다행스러웠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을 변호하다가 그들의 올바른 신앙 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흔히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았든 몰랐든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못지 않게 이 세상 형제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신앙이란 자신의 심령의 평안을 구하기보다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것이란 점도 깨달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sin of commission) 못지않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sin of omission)를 명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아울러그것을 이겨낼 힘과 지혜도 주신다는 것, 이유 없는 고난은 있을지 몰라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 하나님의 역사는 단막극이 아니라는 것, 신앙이란 패배 가운데서도 승리를 찾는다는 것. 하나님을 입술로만 사랑해서는 안 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 이 세상의 불의에 눈 감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 이런 생각이 나의 신앙관이다(pp. 38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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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4
  • 【북토크】 책의 오탈자…격을 떨어트린다
    책을 읽다 보면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은 거의 오탈자가 없다. 그런데 마이너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읽다 보면 오탈자가 많이 나온다. 이때 어린 시절 밥을 먹다 돌을 씹는 것처럼 오탈자는 책을 읽는 자들에게 괴로움을 주고 책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린다. 전에 읽은 한 책은 내용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오탈자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일일이 그것을 표시해서 그 책을 쓰신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갈 일이 있을 때 사무원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부디 책이 다시 나온다면 오탈자를 수정해서 나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최근 책을 내신 한 목사님이 주신 책을 읽고 있다. 그런데 페이지마다 오탈자 풍년이다. 혹시 저자가 오탈자 문제를 일으켰다면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교정보는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결국 저자의 오탈자를 잡아낼 수 없다. 그래서 오탈자가 한가득한 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책은 독자에게 고통을 주며 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도 꾸역꾸역 읽어 원 저자에게 넘겨줄까를 생각하고 있다. 말은 녹음하지 않는 한 듣고 사라지지만 인쇄된 글은 그렇지 않다. 오탈자를 수정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책을 낼 때는 수없이 교정을 해야 한다. 기사를 쓰는 기자 입장에서도 오탈자가 생긴다. 혼자 쓰고 혼자 검토하다 보니 오탈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후 자기 기사를 다시 볼 때 오탈자가 보이면 인터넷 신문은 수정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지면 신문과 다른 장점이 있다. 때로 독자들이 지적해 주어 고치는 경우도 있다. 오탈자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오탈자가 날 수 있음을 널리 양해 부탁드린다. 그리고 오탈자를 지적해 주면 곧 수정할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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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1
  • 【북토크】 가끔은 시를 읽자
    ‘연탄재’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이 좋아하는 시 65편을 소개했다. 그중에는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것도 여럿 있다. 일반인과 시인은 다르다는 것을 많이 절감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종종 시집을 사 읽었고, 또 시집을 사서 모을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럴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시를 자주 빌려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시인의 감성, 시인의 표현력을 느껴보고 따라 해보기 위해서이다. 65편의 시 가운데 그나마 내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했던 시 2편을 올려본다. 결국 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다. ‘어머니’나 ‘인생’은 결국 대부분 사람의 화두 아니던가? 젓갈 - 이대흠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 해설) 젓갈은 어패류의 몸을 소금에 오래 삭힌 것. 이 시의 젓갈은 멸치젓이거나 갈치속젓일 것이다. 남도의 바닷가에서 나는 전어속젓일 수도 있겠다. 원래 물고기의 형체는 거의 사라지고 비릿한 냄새와 짠맛만 남은, 거무튀튀하고 질척하고 때로는 달달한 젓갈 말이다. 젓갈에서 어머니의 몸을 발견하는 순간, 이런, 시는 순식간에 짠해지는 어떤 공간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오랜 시간 간장이 짓물러지도록 살아온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속을 태우며 살아온 화자의 모습이 이 짧은 시 속에 다 들어 있다. 우리는 시가 반성의 양식이라는 걸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젓갈 때문에 잠시 숙연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속을 절여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건네줘 보았나. 나는 벌써 - 이재무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해설) 사람은 인생의 계획을 수정하면서 나이를 먹는가 보다. 마음먹은 것들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후회하면서 또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는 일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행의 통찰이 아프고 서늘하다. 시인은 수포로 돌아간 시간을 죽음이라고 규정한다. 이 모든 게 노동과 관련이 있다. 꿈꾸는 대로 놀지 못하고 꾸역꾸역 일해야 하는, 늦게까지, 무언가를 위해 밥을 벌어야 하는 당신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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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31
  • 모 신문의 비난, 거짓 기사에 대한 대응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어 바쁜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본 기자의 기사에 대해 황당한 소설을 쓴 비판 기사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는 본 기자와 본 기자가 운영하는 신문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1월 19일 서대문교회(장봉생 목사 시무)에서 서울노회가 임시회를 열어 「총회선거규정 제3장 9조 6항의 해석과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관한 질의의 건」을 가결했다. 이는 올해 109회 총회 부총회장에 3번 출마하고자 하는 민찬기 목사에 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언론사는 18일에 기사를 작성해 단톡에 19일에 공개했고, 한 언론사는 20일에 동영상을 올렸다. 본 기자는 이것을 보고 연초부터 선거 과열이라는 취지의 기사를 21일 오후 4:58분에 올렸다. 그러자 모 신문 기자가 이 기사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를 당일 오후 8시 40분에 올렸다. 다음은 그 기사 내용이다. 기자의 생각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내 뱉으면 심각한 후유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유사한 내용을 보도하려면 다른 보도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보도해야 한다. 또한 선정적인 용어인 '선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면, 더욱이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누가 선빵(?)을 날렸으며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선빵(?)날린 북서울노회, 과연 어떻게 전망되는가? 교계의 한 기자는 1월 20일 보도에서 "서울 북노회가 2024년 4월 봄노회 전에 너무 성급하게 서울북노회에 소속된 해당 목사의 부총회장 3번 출마 자격에 대한 질의서를 제출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라고 했다. 이는 서울북노회가 법무법인의 자문을 받았는데 출마가 가능하다고 했기에 질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다른 매체가 1월 20일 영상보도를 통하여 이 부분을 이미 밝혔다. 이 보도에서는 '총회 선거관리 규정이 변천사까지 정리하면서 보도했으며, 서울북노회에서는 3회 출마가 가능한 것으로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또 다른 매체의 김OO 기자가 1월 21일 보도에서 『부총회장 후보 자격 논쟁 … 선빵은 위험하다』라는 제목과 「장봉생 목사 측에서 왜 이렇게 조급히 서두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라는 소 제목으로 보도를 했다. 이 보도에서 "장봉생 목사 측 서울노회에서 잠정 경쟁 상대인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 그러나 기자 사견으로는 너무 일찍 시작한 느낌이 든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보이다. 이미 앞선 보도에서 "북서울노회가 너무 성급하게 질의서를 제출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었다. 즉, 북서울노회가 선빵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후발 기사에서 "장봉생 측 서울노회가 경쟁상대인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라는 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정확한 보도로 부총회장 후보의 과열 선거를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해당 기자는 반복해서 "장봉생 목사 측이 먼저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라고 허위 사실을 근거로 보도하는 이유에 관해서 이유가 궁금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속담까지 소개하면서 이렇게 선거의 경쟁을 부추기게 만들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함으로 심각한 법정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의 배경이 궁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떤 배후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면 이는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학연에 의한 글인지, 아니면 어떤 정치 집단의 음모론인지 알 수 없으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함으로 해당 기자가 당할 후폭풍은 만만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차제에, '선빵'과 같은 선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든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보도를 한다든가?, 개혁주의에 반하는 사상인‘인도 브라마 쿠마리스 명상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는 자들이 본 교단의 일에 관하여 횡설수설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를 쓴 기자는 본 기자와 기사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해당 기자는 반복해서 "장봉생 목사 측이 먼저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라고 허위 사실을 근거로 보도하는 이유에 관해서 이유가 궁금하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속담까지 소개하면서 이렇게 선거의 경쟁을 부추기게 만들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함으로 심각한 법정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의 배경이 궁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본 기자는 민찬기 목사 측 서울북노회에서 부총회장 3회 출마 건에 대해 총회에 질의했다는 것은 몰랐다. 단지 권순웅 목사의 선관위원장 자격에 대해 질의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다. 기자가 몰랐던 이유는 서울노회처럼 임시회를 열어 정식으로 안건으로 올리지 않고 임원 이름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기자가 몰랐던 것이다. 그래도 서울북노회와 달리 서울노회가 임시회를 요란하게(?) 열고 공개적으로 안건을 결의해 올렸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선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 언론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제목과 내용을 수정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사를 쓰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함으로 심각한 법정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가? 어이가 없다. 필요하면 장봉생 목사 측이나 서울노회가 본 기자를 고발하기 바란다. 또한 본 기자의 기사를 비난한 그 기자는 황당한 소설을 썼다. 어떤 배후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면 이는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본 기자에게 어떤 배후 세력이 있는지 부디 알려주기 바란다. 나도 모르는 배후 세력이 내게 있나보다. 이게 왠 음모론인가? 원래 기사는 연초부터 선거 과열이 되는 것에 대해 지적하며 잘못하면 역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배후의 사주를 받은 기사인가? 본 기자가 민찬기 목사 측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인가? 본 기자에 대해 비난의 기사를 쓴 기자는 본 기자와 한동안 같이 다녔기에 본 기자가 민찬기 목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알면서도 “배후 세력의 사주” 운운하는 것은 선을 넘었다. 본 기자는 작년 1월에 민찬기 목사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3번 출마하는 것에 대해 좋게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도대체 본 기자의 배후 세력은 누구인가? 오히려 몇 언론사들이 비슷한 시점에 같은 논조의 글을 썼는데 이 뒤에 배후 세력이 있는 것 아닌가? 그 배후 세력이 누군지 먼저 밝히기 바란다. 또한 그 기자는 “학연”을 언급했다. 학연에 의한 글인지, 아니면 어떤 정치 집단의 음모론인지 알 수 없으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함으로 해당 기자가 당할 후폭풍은 만만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 기자는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민찬기 목사도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그래서 학연에 의해 내가 그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는 것인가? 총신대 출신은 모두 총신대 출신을 지지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 코미디 수준이다. 그러면 나를 비난한 그 기자는 본인이 졸업한 칼빈신학교 출신의 후보가 나오면 무조건 지지해 줄 것인가? 그러면 총신대 출신이고 군목 출신인 김영우 전 총장을, 총신을 나오고 군목 출신인 본 기자가 지지하고 있는가?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남의 기사에 대해 횡설수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차제에, '선빵'과 같은 선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든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보도를 한다든가?, 개혁주의에 반하는 사상인 ‘인도 브라마 쿠마리스 명상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는 자들이 본 교단의 일에 관하여 횡설수설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본 기자가 쓴 기사가 “횡설수설”이라는 것인가? 본인의 기사에 대해 황당한 소설을 쓴 그 기자의 글은 그러면 “정론직필”인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남의 기사를 그렇게 함부로 폄하할 수 있는가? 선거에는 "역풍"이라는 것이 있고, "동정표"라는 것이 있다. 한쪽을 일방적으로 패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돼 있다. 그것을 염려해 글을 썼는데 “오독”을 해도 심하게 했다. 본 기자는 그 기자가 쓴 대로 “심각한 법정 소송”을 기대하고 있으며, “만만하지 않은 후폭풍”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기자가 볼 때 “횡설수설”하는 기사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쓸 것이다. 그리고 본 기자와 그 기자의 기사에 대한 판단은 현명한 독자들과 총대들이 할 것이다. (연초부터 언론끼리 논쟁해 일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다음은 원래 올렸던 기사 원본이다. 【기자생각】 부총회장 후보 자격 논쟁...선빵은 위험하다 장봉생 목사 측에서 왜 이렇게 조급히 서두르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서울노회(노회장 정동진 목사)가 지난 1월 19일 서대문교회(장봉생 목사 시무)에서 118명의 총대들이 참석해 임시회를 열고, 총회에 “부총회장 출마 자격 선거 규정에 대해 질의”키로 가결했다고 한다. 현재 109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는 장봉생 목사와 민찬기 목사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장봉생 목사는 오랫동안 이를 위해 준비해 왔고 노회적으로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반면 민찬기 목사는 본인의 입으로 출마하겠다는 구체적인 말은 없이 출마할 것 같다는 말만 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월 18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있었던 전국호남협의회 제24회 정기총회·신년하례회에 대표회장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총회 임원으로 나설 자는 협의회 등 모임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선거 규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찬기 목사가 자신의 출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이를 통해 출마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부총회장에 2번 출마해 낙선한 민찬기 목사가 과연 3번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들이 가타부타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것은 선관위가 결정할 사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번 선관위원장은 민찬기 목사에게 18표 차이로 이긴 권순웅 직전 총회장이다. 과연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총회 임원 후보는 3, 4월에 있는 봄 정기노회에서 결정된다. 그런데도 정초부터 벌써 후보 자격 문제로 시끄럽다. 이 상황을 보면 재작년 부총회장 후보 문제가 오버랩된다. 2002년 107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는 오정호 목사와 한기승 목사였다. 두 후보는 그해 4월 자신들이 속한 노회에서 후보 추천을 받았다. 이후 한기승 목사가 속한 전남제일노회는 7월 18일 임시회를 열고 오정호 목사를 22건의 선거법 위반으로 선관위에 고발키로 가결했다. 그러나 이것이 역풍이 되어 한기승 목사는 8:2로 유리하게 예측한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했다. 장봉생 목사 측 서울노회에서 잠정 경쟁 상대인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 그러나 기자 사견으로는 너무 일찍 시작한 느낌이 든다. 9월 총회 선거까지는 아직 기간이 긴데 왜 장 봉생 목사 측에서 먼저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과연 본인 선거에 유리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민찬기 목사에 대해서는 이미 2번이나 낙선했음에도 또 나오려고 한다는 비판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번째 출마한 106회 총회에서 부실한 선거 관리로 본인이 18표 차이로 진 것에 대해 사법 당국에 고소할려고 했지만 당시 선관위원장 소강석 목사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근소한 차이로 진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3번째 도전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찬기 목사에 대해 동정표도 상당수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2024년, 아직 108회기가 많이 남아 있는 가운데 9월에 있을 109회 총회 부총회장 선거전이 벌써 링 위에 올랐다. 그리고 장봉생 목사 측이 먼저 민찬기 목사 측에 선빵을 날렸다. 선빵은 유리하기도 하지만 불리할 수도 있다. 기자의 단견으로 볼 때 “굳이 왜?”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정호 목사를 고발했던 한기승 목사 측 전남제일노회가 떠오르는데 그나마 그때는 7월이었다. 1월은 빨라도 너무 빠르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속담도 있다. 민찬기 목사의 3번째 출마 계획에 대해 1년 전 쓴 단상: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정말로!
    • 오피니언
    • 논단
    2024-01-24
  • 【단상】선관위원회 당연직, 당연한가?
    총회 임원들을 선출하는 업무를 맡는 선거관리위원회에는 당연직이 있다. 직전 총회장, 장로부총회장, 서기, 회록서기, 회계가 그들이다. 그런데 요 몇 년 선거관리위원회로 인해 총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제대로 선거를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당연직 위원들의 자질 부족으로 인한 문제는 심각하다. 지난 108회 총회 선관위에 대한 총대들의 원성은 자자했다. 그래서 선관위를 조사 처리해 달라는 헌의가 여러 곳에서 올라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연직에 대한 반성이나 제도 개선이 없는 것이 현 실태이다. 올해 109회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우려가 벌써 제기되고 있다. 당연직 위원들 때문이다. 그들이 임원으로 있을 때 한 잘못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선관위 직책을 맡겨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있는 것이다. 이번 당연직 위원 중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기에 처벌받아야 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고 또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 제기가 곧 터질 것으로 보인다. 임원으로 있을 때 문제를 일으킨 인사들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선거를 어떻게 관리할지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같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방지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다. 9월 총회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 당연직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다음 기회에 문제 되는 인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4-01-21
  • 【기자생각】 부총회장 후보 자격 논쟁....선관위의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서울노회(노회장 정동진 목사)가 지난 1월 19일 서대문교회(장봉생 목사 시무)에서 임시회를 열고, 총회에 “부총회장 출마 자격 선거 규정에 대해 질의”키로 가결했다고 한다. 현재 109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는 장봉생 목사와 민찬기 목사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장봉생 목사는 오랫동안 이를 위해 준비해 왔고 노회적으로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반면 민찬기 목사는 본인의 입으로 출마하겠다는 구체적인 말은 없이 출마할 것 같다는 말만 돌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월 18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있었던 전국호남협의회 제24회 정기총회·신년하례회에 대표회장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총회 임원으로 나설 자는 협의회 등 모임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선거 규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찬기 목사가 자신의 출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이를 통해 출마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부총회장에 2번 출마해 낙선한 민찬기 목사가 과연 3번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들이 가타부타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것은 선관위가 결정할 사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번 선관위원장은 민찬기 목사에게 18표 차이로 이긴 권순웅 직전 총회장이다. 과연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민찬기 목사에 대해서는 이미 2번이나 낙선했음에도 또 나오려고 한다는 비판 여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번째 출마한 106회 총회에서 부실한 선거 관리로 본인이 18표 차이로 진 것에 대해 사법 당국에 고소할려고 했지만 증경총회장 소강석 목사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근소한 차이로 진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3번째 도전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선관위가 이 문제를 판결해야하는 처지이다.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하느냐는 초미의 관심사이다. 여론에 따르지 않는 바른 법리적 판단만이 후유증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총회 임원 후보는 3, 4월에 있는 봄 정기노회에서 결정된다. 그런데 정초부터 벌써 후보 자격 문제로 시끄럽다. 모두가 선관위의 판단을 주목하고 있다. 바르고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
    • 오피니언
    • 논단
    2024-01-21
  • 【화제의신간】 이은철 목사 저술, 『출애굽의 비밀』
    나름대로 신앙생활은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과연 나는 천국은 갈 수 있는 것일까? 누가 보장하지? 그 증거는 무엇일까? 교회가 복음과 천국을 선포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천국의 확신, 증거, 구원의 증거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있다. 저자 이은철 목사도 오랜 세월 이런 고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영적경험과 성경연구를 통해 구원, 거듭남의 확신과 증거를 가지게 됐고 이를 한국교회에 나누고자 ‘출애굽의 비밀’을 저술하게 됐다. 먼저 저자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 쇠퇴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이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생명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 삶과 인격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따라서 이제 한국교회는 영적인 출애굽의 기적이 일어나야 하며 성경적인 온전한 출애굽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출애굽의 비밀은 출애굽의 원리로 출애굽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과 같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성장하는 과정이 있고 성장의 과정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발달 과업이 있다. 영적 출애굽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은 우연히 시간만 지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과정, 과정의 성취 과업이 있다. 이 책은 총 일곱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 애굽 : 애굽의 의미와 애굽의 진단과 과업 2. 출애굽 : 출애굽의 의미와 출애굽의 진단과 과업 3. 홍해 : 홍해의 의미와 홍해의 진단과 과업 4. 광야 : 광야의 의미와 광야의 진단과 과업 5. 요단강 : 요단강의 의미와 요단강의 진단과 과업 6. 신 벗음 : 신 벗음의 의미와 신 벗음의 진단과 과업 7. 가나안 : 가나안의 의미와 가나안의 진단과 과업 그리고 결론으로 각 과업의 원리를 기술했다. 본 책은 가능한 누구나 정독해서 읽으면 이해가 되고 적용이 될 수 있도록 기술되었으며 체계적으로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성경해석에 있어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고 있다. 믿음의 삶이 어려운가?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있는가? 목회가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교회 성장이 멈춰있는가? 구원의 증거가 없어 두려운가? 이 같은 무수한 질문에 대한 답이 ‘출애굽의 비밀’에 담겨 있다. 〈출애굽의 비밀〉이 개인, 소그룹, 설교, 목양, 상담에서 융통성 있게 적용해서 사용하여 성도들 개개인들이 기초가 튼튼하고 건강한 신앙으로 성장하고 교회들은 건강하게 부흥 성장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저자: 이은철 임마누엘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숭실대학교 대학원 풀러신학교 목회학 박사 한서노회, 서한서노회 노회장 역임 제102회 총회선거관리위원장 역임 서북지역노회협의회 대표회장 역임 재경호남협의회 회장역임 전국호남협의회 대표회장 총회 사무총장 역임 극동방송 소망의 기도 인도 저서: 목자의 비밀, 믿음의 비밀 추천사 박성규 (총신대학교 총장) 출애굽을 다양한 각도에서 세밀하게 조명한 이 책은 성도들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의 건강을 잴 수 있는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개인이 읽으면서도 큰 도움이 되고, 목회자들의 설교와 목양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소그룹 성경공부 교재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성도 개인과 교회의 건강을 진단함으로써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통치를 받아 더 건강한 교회, 나아가 승리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김의원 (前 총신대학교 총장) 이 책은 출애굽의 신학을 아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목회 현장과 삶의 현장에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과정별로 자신의 현재 영적, 신앙적 상태를 점검할 수 있고 치유의 원리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정독하고 연구하면 성도들은 영적 기초가 튼튼한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고 목회자들은 신앙지도, 교육, 목회상담, 영적 내적치유, 설교, 집단상담, 제자훈련, 소그룹 교재 등에 매우 유용합니다. 목회학 교재로도 매우 유익하며 구원의 증거를 성경적으로 제시하고 성령의 역사를 신학, 신앙,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장영일 (前 장신대 총장)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출애굽 여정의 각 과정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개개인의 신앙을 점검하게 되고, 그와 같은 신앙 상태의 검진을 토대로 자신을 치유하고 훈련할 수 있는 원리를 배우게 될 것이며, 특히 제1차 출애굽 여정을 시작으로 제5차 출애굽 여정에 이르기까지 영생을 향한 영적 출애굽의 여정을 걸어가는 성도나 교회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적 진리를 터득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변충구 (신학·철학·의학 박사 / 세계로교회 원로목사) 이 책은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신 ‘말씀의 원리’, ‘교회 생활의 원리’, ‘삶의 관습의 틀’로 보았습니다. 특히 출애굽을 5차에 걸친 사건으로 세분하고, 단계적으로 보아 알파와 오메가로 논증하여 신앙교육의 매뉴얼로 사용하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목차 추천사 들어가면서 출간의 목적(동기) 출애굽의 틀/신학·신앙의 틀/신앙의 뿌리 -출애굽 여정(과정)의 중요성 -출애굽의 유형 -출애굽의 의의 -출애굽의 틀: 여정 -출애굽 과정에 따른 과업 출애굽 여정의 의미/과정별, 단계별 적용/전인적 성장, 상담 -제1단계 출애굽 여정의 도표 이해하기 -제2단계 도표에 자신의 지금까지의 여정 대입 -제3단계 자신을 대입해서 진단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분석하라. -제4단계 그룹별로 모여 진솔하게 자신의 대입 결과를 나누어라. -제5단계 전인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성경을 배우고 제자 훈련을 받으라. -제6단계 영적 심적 아픔, 상처가 있다면 집단 상담이나 개인 상담을 진행하라. 애굽/세상/자연인/구원의 필연성 -애굽의 삶과 상징 -애굽의 실제 -애굽의 진단 -애굽의 과업 출애굽/거듭남/구원의 길 -유대 백성의 출애굽 -출애굽의 목적 -출애굽의 실제 -출애굽의 진단 -출애굽의 과업 홍해/세례/구원의 확증 -홍해의 중요성 -홍해의 영적, 신앙적 의미 -홍해(세례)의 실제 -홍해 과정의 진단 -홍해(세례)의 과업 -성령 내주의 증거 광야/교회/구원의 삶 -광야의 의의 -광야의 필연성 -광야의 목적 -광야의 실패 -광야교회에서 실패 이유 -광야교회에서 실패한 결과 -광야의 실제 : 교회의 본질 -교회의 은혜 -수르광야 : 수르교회 -수르광야 : 수르교회의 목적 -신광야 : 신교회 -시내광야 : 시내교회 -바란광야 : 바란교회 -광야의 메시야(아사셀) -광야의 진단 -광야의 과업 요단강/성령임재/믿음의 능력 -요단강의 의미 -요단강의 영적, 신앙적 의미 -요단강의 표징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과 성령의 사역 (관계) -요단강의 영적 실제 -요단강의 진단 -요단강의 과업 신벗음/낮아짐/영점/구원의 성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는 의미 -신벗음의 실제 : 영점 -영점의 진리 -영점의 은혜 -영점에서의 승리 -신벗음의 삶 -신벗음의 진단 -신벗음의 과업 가나안/영적 전쟁/약속의 땅/구원의 번성, 창대 -가나안 -가나안의 의미 -가나안의 영적 의미 -가나안 정복 원리 -가나안 교회의 진단 -가나안 교회의 과업 마치면서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1-19
  • 【북토크】 장애인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현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한평생을 목발에 의지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난 장연희 교수의 에세이를 또 읽었다. 그녀는 1952년 9월 14일 태어나 2009년 5월 9일 57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장애인으로 사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있다. 한번은 대학교수 시절 여동생과 명동에 갔다가 의류 가게 앞에서 옷을 구경하다 거지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갈 때는 많은 대학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부되었다. 그나마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서강대에 입학이 가능해 그곳에서 영문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원하는 대학에서 거부당하자 결국 미국으로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서강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해 이처럼 가혹한가? 장애인으로 태어났거나 혹은 중도에 장애인이 되었거나 이 세상에는 장애인이 많다. 그런 데 장애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조롱하고 배척하는 그 심보가 참으로 고약하다. 그나마 장영희 교수는 미국으로 유학했기에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교수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장애인으로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에 가야만 한다. 그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여전히 후진국이다. 킹콩의 눈 나는 영화에 문외한이고 또 영화를 볼 기회도 별로 없지만, 누군가 내게 이제껏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영화를 꼽으라면 아마 주저 없이 <킹콩>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줄거리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인상 깊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킹콩>은 내가 일부러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이고, 그 영화를 본 날짜와 장소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1978년 1월 12일, 나는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난 후, 명보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그날은 Y 대학에서 박사 과정 시험을 친 날이었다. 석사 졸업반이었던 나는 딱히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당시 나의 모교에는 박사 과정이 개설되기 전이라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응시자들은 오전에 필답고사를 보고 오후에 면접을 하게 되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실에 들어서니 네 명의 교수들이 반원으로 앉아 동시에 나와 내 목발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중 한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 과정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한 사람의 운명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하게 선언하는 그 교수 앞에서 나는 차라리 완벽한 좌절, 완벽한 거절은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고, 미소까지 띠며 차분하게 "그런 규정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인사까지 하고 면접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날 집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연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본 영화가 <킹콩>이다. 그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단편적 이미지의 연속뿐이다. 거대한 고릴라가 사냥꾼들에게 잡혀 뉴욕으로 옮겨지는 도중에 우리를 탈출하고,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옆에 앉아 있는 킹콩은 건물만큼이나 크고 거대하다. 어떤 이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킹콩은 한 여자를 손에 쥐고 있고,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킹콩은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러나 킹콩은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포획되기 전, 킹콩은 그녀를 자신의 눈높이로 들고 자세히 쳐다본다. 그 눈, 그 슬픈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닌 커다랗고 흉측한 고릴라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 없이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삶, 그것은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편견과 차별에 의해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토플책을 샀고, 다음 해 8월 내게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 주립 대학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이제 나는 돌아왔고, 나를 면접하기조차 거부하고 '운명적'인 선언으로 내 삶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그 위원회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다(pp. 289-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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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7
  • 【내이야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4년전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나올 때 두 명의 목사님이 떠 올랐다. 같은 노회, 같은 시찰회에 내가 시무했던 교회의 나쁜 것을 따라하는 교회가 있었다. 나는 다섯 번째로 담임목사직에서 내쫓겼는데, 같은 시찰회의 그 교회는 3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았다. 첫 번째 목사는 노회에 문제를 일으켜 면직됐고, 이후 부임한 목사는 몇 년 못있다가 갈등하고 결국 사임했다. 이후 또 한 목사가 왔는데 얼마 안있다가 내쫓겼다. 두, 세 번째 목사들과는 시찰회에서 교제를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결국 사임했을 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내가 그 일을 당해보니 그 두 목사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당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나왔던 교회 근처에서 목회하다 이전했는데 나중에는 노회를 옮겨 지방으로 갔다. 3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두 목사가 어려울 때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내가 어려울 때 다른 목사들의 무관심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도 그랬기에 ‘사람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어려움 당하고 있는 목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게 됐다. 과부가 다른 과부에 대해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된 것이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해보면 안다. 그래서 함께 울어주는 자가 진짜 나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24년 새해에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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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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