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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나눔재단, 경기교회에서 화성1지부 설립 및 사랑의 쌀독 발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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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구촌나눔재단 화성 1지부 설립 및 제132호 사랑의 쌀독 발대식이 4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경기교회(김정태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사)지구촌나눔재단이 주최하고, (사)지구촌나눔재단 화성 1지부가 주관했다.
이날 사랑의 쌀독 출발 격려를 위해 이선구 이사장이 쌀 120kg, 명예 이사장 이 심 장로가 쌀 1가마를 후원했다. 사랑의 쌀독을 통해 후원된 쌀과 생필품은 은퇴목사 중 홀 목사, 홀 사모, 생계가 어려운 목회자 그리고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이웃들에게 지원되며, 미자립교회 등 화성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된다.
예배는 화성 1지부장 김정태 목사의 인도로 금천 1지부장 우충희 목사가 기도, 군포 1지부장 이창범 목사가 요한1서 3:18을 봉독, 서평택중앙교회 방이담 권사가 특송했다.
(사)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 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란 제목으로 “고난 주간을 보내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어려운 자를 도운 양같은 자는 복을 받으나 그렇지 않은 염소같은 자들은 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보살피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택배기사이다. 받은 것을 잘 배달하도록 하자”라고 설교했다.
특별기도
오산 1지부장 김인식 목사가 ‘한국교회 회복과 경기도와 화성 복음화를 위하여’, 인천서구 4지부장 이병현 목사가 ‘지구촌나눔재단과 화성 1지부 발전을 위하여’ 특별기도했다.
평택 2지부장 오병호 목사가 봉헌기도 후 안양일심교회 김상수 원로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지부 설립 및 사랑의 쌀독 발대식은 (사)지구촌나눔재단 협동총무단 회장 김동욱 목사의 사회로 (사)지구촌나눔재단 사무총장 강인중 목사가 기도했다.
임명장, 사모에게 선물 전달 · 천사교회 현판, 뺏지, 책 전달식
이사장 이선구 목사가 신임 지부장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사모에게 선물을 전달 후 임원 및 운영/후원이사들에게 임명장, 화성 1지부장 경기교회 김정태 목사에게 뺏지, 천사교회 현판, 책 ‘사랑의빨간 밥차’를 전달하고 위촉식을 했다.
세무사 황신권 감사가 “귀한 헌신에 감사드린다. 오늘 지부 설립이 1004호 지부 설립에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사)지구촌나눔재단 부이사장 김명현 목사가 “주님의 큰 사랑을 받아 부르심을 받았다.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하자. 그리고 끝까지 하시기 바란다”라고 권면, (사)지구촌나눔재단 총괄본부장 윤성록 목사가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라고 축사했다.
임원진 일동이 축하 테이프 커팅 후 사랑의 쌀독을 채운 후 은혜롭게 모든 순서를 마치고, 동대문지부장 남정은 목사가 식사기도 후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는 2007년 1월 설립된 비영리민간단체로서 저소득층 쌀 지원 및 사랑의빨간밥차, 아동 푸드마켓, 사랑의 쌀독, 시니어 아카데미 등을 통해 쌀 분배 및 노인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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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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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교회, 산불로 전소된 청송 성지교회 찾아 성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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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구리시에 소재한 드림교회(강병국 목사 시무, 수도노회)가 4월 15일 이번 경북 지역 산불로 예배당이 전소된 성지교회를 찾아 교인들의 정성 어린 헌금 1,300여만 원을 전달했다. 경안노회(노회장 남해길 목사) 산불화재대책위원회 본부장 권택성 장로가 이 교회의 피해 상황을 장로 단톡에 올린 것을 드림교회 신웅철 장로가 보고 담임목사에게 전하자, 담임목사는 부교역자들과 함께 먼저 이 교회를 찾아 실사했다. 이후 당회에서 이 교회를 돕기로 결정 후 고난주간을 앞두고 어린아이부터 노인 성도들까지 기도하며 구호 헌금 1,382만 원(실사 갔을 때 전달한 30만원 포함)을 모아 전액을 전달했다.
이번 화재로 전소된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소재 성지교회 경안노회 소속으로 노회에 유일하게 담임전도사가 시무하는 교회이다. 김대근 담임전도사는 17년 전 부임했는데 부임 당시 목회자가 없어서 1년간 공백이 있었다. 김 전도사는 대구의 모 교회 장로로 섬기다가 시골 교회로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시작했다.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신대원을 오가면 교회에 다시 공백이 생기고 수업료 등이 부담될 것을 생각해 전도사로 사명 감당하게 하심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섬겨오셨다.
부임 후 용접과 같은 기술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교회 시설을 보수하고 사택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세운 교회가 이번 산불 피해로 전소된 것이다. 현재 김 전도사 부부는 기거할 곳이 없어서 마을회관과 목사로 사역하는 아들 집과 의성의 형제분 집을 전전하며 지내고 계신다. “아무것도 챙겨서 나오지 못했기에 상황이 막막하다”라고 하면서도 “교회가 불탄 것이 너무 마음이 괴롭다”라고 했다. 지금은 컨테이너를 임시 예배 처소로 삼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드림교회는 2025년을 시작하면서 “손이 따뜻한 교회”라는 표어를 정하고 나누며, 교회 안팎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다. 올해부터 〈드림희망운동본부〉를 신설하고, “만원의기적 프로젝트”(매월 만 원씩 구제헌금하기 운동)를 실행하고 지역과 연약한 이웃을 섬기고 있다. 이처럼 드림교회는 나누고 베푸는 일을 통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건강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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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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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노회, 최석봉목사 노회장 선출·이철우목사 농어촌부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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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노회 40회 정기회가 4월 15일 오전 10시 대망교회(최석봉 목사 시무)에서 모여 최석봉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 이철우 목사를 농어촌부장으로 추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110회 총회 농어촌부장 후보로 추천된 이철우 목사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설려고 최선을 다했다. 농어촌부장이라는 직임이 주어지면 열악한 환경에서 목회하는 분들을 돌아보겠다. 믿음의 사역보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질그릇인 우리 안에 계셔서 능력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셨다. 농어촌부 부원으로 이름 없는 그분들을 섬길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감당하도록 하겠다”고 인사 말했다.
노회 임원
노회장: 최석봉 목사
부노회장: 김기현 목사, 이성희 장로
서기: 여현구 목사, 부서기: 박형선 목사
회록서기: 김길성 목사, 부회록서기: 조현민 목사
회계: 김종섭 장로, 부회계 김종식 장로
목사 총대: 최석봉 이철우 송영식 이춘혁 김기현 김광철
장로 총대: 이성희 김종섭 김종식 양철원 전진식 김완식
개회예배는 노회장 이철우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김성식2 장로가 기도, 서기 심시영 목사가 눅 18: 31-34 봉독 후 대망교회 찬양대가 찬양하고 이철우 목사가 ‘깨닫지 못하였으니’란 제목으로 설교 후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신형진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을 한 후 회무를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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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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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노회, 장봉생목사 만장일치 기립박수 총회장후보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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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노회 107회 정기회가 4월 15일 오전 10시 서현교회(이상화 목사 시무)에서 모여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를 총회장 후보로 만장일치 기립박수로 추대, 이상화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장봉생 목사가 “작년 봄 노회 때 추천해 주시고 선거에 함께 해 주셔서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됐다. 제가 좋은 노회 회원이라는 것을 더 실감하고 감사한 한 해였다. 작년에 약속한 준비된 미래, 성숙한 정책, 진정한 부흥을 잘 준비해 110회 총회에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 총회가 대내외 정책 시스템이 잘 가동되는 총회가 되고, 자랑스러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켜내고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일과 어려운 때 어려운 교회, 교우들과 함께해 합동 측에 속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역시 총회가 필요하다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계속해 같이하시고 도와주시기를 바란다”고 인사말하고 노회원들은 큰 박수로 축하하고 격려했다.
노회임원
회장 : 이상화 목사
부회장 : 서경철 목사, 조성탄 장로
서기 : 김상욱 목사, 부서기 : 최정현 목사
회록서기 : 하의용 목사, 부회록서기 : 정용신 목사
회계 : 송기덕 장로, 부회계: 양희경 장로
목사 총대 : 이상화 한수환 김봉수 장봉생 김삼열 부총대 : 서경철 최성헌
장로 총대 : 송기덕 고동운 한병지 조성탄 전병하 부총대 : 이정원 김철인
개회예배는 노회장 김삼열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조충길 장로가 기도, 남부시찰 서기 이정현 목사가 출 24:12 봉독 후 서현교회 연합찬양대가 찬양했다.
노회장 김삼열 목사가 ‘지나온 자리의 흔적’이란 제목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거기에 있으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 생각이 같이 있어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도 예배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흔적으로 남을 때 후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충성되어 여겨 직분을 맡기셨으니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위한 흔적만을 남기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성찬예식은 노회장 김삼열 목사의 집례로 분병, 분잔 후(분병 위원 / 고동운 고경섭 주기준 류준용 현창식 강기술 이성중 박기웅, 분잔 위원 / 양희경 이종무 여해성 김병조 김두환 양원근 김대회 장민선) 증경노회장 정동진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사무처리는 서기의 회원 호명으로 개회해 임원선거 및 총대선거, 기념품증정(직전임원:노회장,장로부노회장,서기,회계), 서기 사무 보고, 헌의문서 접수 보고, 파송이사, 특별위원, 총회실행위원 선임, 공천부 보고, 시찰 보고 등 회무를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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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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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노회 정기회, 황석형 목사 노회장 선출하고 회무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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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회 평양노회 정기회가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평안교회(황석형 목사 시무)에서 열려 황석형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신임 노회장 황석형 목사는 “부족한 종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노회원들에게 감사드리고 잘 감당하도록 노력하겠다. 1994년에 평안교회에서 사역했고, 이후 21년만에 담임으로 부임했기에 우리 교회에서 노회장을 하게 되어 뜻깊다고 생각한다. 계속해 미래자립교회를 돕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임원
- 노회장 : 황석형 목사(평안)
- 부노회장 : 오만식 목사(드림왕성
백승호 장로(평안)
- 서기 : 길요나 목사(왕성)
- 부서기 : 최광현 목사(열방사랑)
- 회록서기 : 이철승 목사(홍릉)
- 부회록서기 : 이찬영 목사(예광)
- 회계 : 최영일 장로(영암)
- 부회계 : 이병기 장로(애일)
■총회 총대
- 목사 총대 : 고영기, 황석산, 길요나, 장필봉, 조만식 (박광원, 최종근)
- 장로 총대 : 백승호, 이대헌, 임병갑, 안병수, 배경한 (최영일, 이강진)
■총회실행위원 : 고영기 목사
■기독신문이사 : 황석산 목사
■GMS이사 : 장필봉 목사
■총신운영이사 : 길요나 목사
■칼빈운영이사 : 박광원 목사
개회는 부노회장 황석형 목사(평안)의 인도로 부노회장 안병수 장로(홍릉)가 기도, 서기 김남일 목사(동탄큰무리)가 막 4:21-25봉독, 사모•장로•권사 연합찬양대가 찬양, 평안교회 색소폰 찬양팀이 특주했다.
노회장 최종근 목사(서해왕성)가 ‘돌봄과 헤아림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우리는 마음 밭을 관리해야 한다. 진정한 영적생활을 통해 열매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열매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신자는 세상의 빛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듣는 방법은 마 7:4-5에 있는대로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는 것이다. ‘들보’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다. 영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나뉜다(마 25. 달란트 비유). 악하고 게으른 종의 마음도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었다. 세상의 어둠은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신자를 통해 물러나게 된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을 제거해 영적 진보를 이루자”라고 설교 후 증경노회장 강재식 목사(광현)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 홍순일 목사 (송파은혜)의 집례로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분병위원/ 임병갑(왕성), 백승호(평안), 배경한(예수사랑), 마경민(빛과진리), 이병학(보린), 최윤성(새동도)
분잔위원/ 최영일(영암), 안병준(홍대새), 정호철(평안), 유일상(왕성), 이병기(애일), 안병수(홍릉)
사무처리는 최종근 목사의 사회로 회원 호명 후 개회, 임원선거, 신구임원교체, 총회총대 선거, 이사 선정, 공천부 보고, 헌의 보고 및 시찰 보고, 노회산하연합회 보고 후 기타안건을 처리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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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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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순복음교회, 남아공 사랑의빵공장 건립 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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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순복음교회(김명현 목사 시무)가 아프리카 남아공에 사랑의 빵공장 건립을 위한 헌신예배를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드렸다. 이로서 이천순복음교회는 4번째로 빵공장을 세우게 된다.
이선구 목사(지구촌나눔재단 이사장)가 “이천순복음교회가 헌신한 빵공장이 잘 건립되어 맛있는 빵이 생산되기를 바란다. 이번에 김명현 담임목사님과 함께 가서 준공식을 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지구촌나눔재단의 설립목적은 백개 국가에 해외지부 설립, 천개 국내지부에 사랑의쌀독 설치, 만명의 은퇴 홀목사 · 홀사모 등 소외계층에게 쌀과 생필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천순복음교회가 이를 위해 늘 기도하고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지구촌나눔재단 사역을 보고했다.
김명현 목사(이천순복음교회 담임)가 “우리가 세운 빵공장에서 빵을 만들 수 있도록 옥수수 500포대(1포대 2만원)를 헌금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관심과 헌신을 부탁했다.
예배는 이재범 목사(이천순복음교회 사랑의쌀나눔 지도목사)의 인도로 권호연 장로(이천사랑의쌀나눔 본부장)가 기도, 이천순복음교회 사랑의쌀나눔팀이 특송했다.
김정봉 목사(사랑의빵공장 위원장)가 히 9:11-14을 본문으로 ‘보혈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저희 교회가 작년에 우간다에 빵공장을 설립했는데 이를 통해 빵이 주어져 너무나 감사하다. 이 귀한 일에 이천순복음교회가 동참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위기인가?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대한 사람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가 그러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점은 메시야 예수님이시다. 이 예수님이 복음이며 예수님의 중심은 십자가였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귀는 예수님의 보혈을 두려워해 보혈의 역사를 방해한다. 보혈은 우리의 영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사람은 성령이나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이 복이다. 이 세상의 방법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육신의 질병에 영향을 끼친다. 예수님의 보혈로 육신의 병이 치유된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첫째, 예수님의 보혈을 마시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피를 바르라. 셋째, 예수님의 피를 뿌리라. 넷째, 예수님의 피를 부으라”고 설교했다.
특별 안수 기도
씨앗헌금 및 작정 후 강인중 목사(사무총장)가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려운 가운데 살고 있다. 이들은 일찍 결혼해 자녀를 낳는데 질병과 굶어 죽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빵공장을 통해 이들에게 선교하고 먹을 것을 공급하게 된다. 이 일에 계속해 관심과 헌신을 부탁드린다”라고 격려사 후 이선구 목사(지구촌나눔재단 이사장)의 축도로 빵공장 건립을 위한 헌신예배를 은혜롭게 마쳤다. 이렇게 선한 일에 앞장서는 이천순복음교회 주변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있어 교회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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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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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교(주), ‘사랑의빨간밥차’ 부평역 무료급식 기부금 후원 및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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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교㈜는 2025년 4월 10일 경인전철 부평역 북광장에서 (사)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중앙회 ‘사랑의 빨간밥차’와 함께 노숙인 및 홀몸노인..등 250여명에게 따뜻한 무료급식과 생필품 나눔 봉사를 했다. 인천대교㈜는 매년 사랑의빨간밥차에 3회 이상 기부와 봉사를 해오고 있으며, 오늘 기부 및 봉사는 올해 첫 번째로 노숙인 및 홀몸어르신들에게 기부금을 후원하고 사랑의빨간밥차에서 박종혁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들이 참여하여 소외계층들에게 식사봉사를 했다.
사랑의빨간밥차 이선구 이사장은 “지금까지 19년째 서울역, 부평역 북광장, 주안역 남광장, 계양구, 서구 및 전북지부(전주, 군산, 정읍, 고창 등에서 사랑의빨간밥차로 취약계층 어르신들과 장애아동 시설에 따뜻한 식사와 생필품을 제공해 오고 있으며, 중앙회 산하 지구촌나눔재단은 전국 130개 지부와 해외 73개 지부에서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들에게 무료급식과 생필품 나눔을 하고 있다.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지금까지 인천대교(주)와 같은 후원자와 봉사자들이 있었기에 단 한 번도 사랑의빨간밥차 운행을 중단하지 않고 무료급식과 생필품 나눔을 할 수 있었다. 라며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기부해주시고 봉사해주신 박종혁 대표이사님과 모든 임. 직원님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인천대교(주) 박종혁 대표이사는 “그동안 인천대교(주)는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다양한 나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지만 솔직히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이다,”라며 “올 한해도 사랑의빨간밥차 및 지역 사회를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라며, 아울러 “인천대교(주)는 ESG경영의 일환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사회적 책임 활동과 사회적 가치창출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겠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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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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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백령도 목회자 부부 초청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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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이 끊기면 외부와 단절되는 섬, 백령도! 그곳에도 복음을 전하며 묵묵히 사역하는 섬 목회자들이 있다. 외롭고 열악한 사역 환경을 버텨내며 따스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혼을 돌보며 한평생 살아온 이들을 위해 새로남교회가 환대와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는 4월 9일부터 10일까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예장 합동) 총 9가정, 18명을 대전으로 초청했다. 오정호 목사와 성도들은 숙식과 휴식, 그리고 회복의 영적 재충전 시간을 제공하여 동역의 은혜와 형제애로 선대하며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먼저 대전으로 초청된 목회자 부부들은 세종시에 위치한 대통령 기록관 관람, 새로남 기독학교 투어(초,중,고) 및 기독교 역사 전시관을 둘러봤다.
특별히 새로남교회는 9일 수요예배를 ‘백령도 교회와 함께 하는 예배’로 진행했다. 예배 순서 중에 목회자 부부는 ‘은혜’ 찬양으로 선교의 삶에서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했다.
또한 이번 백령도 교회와 함께하는 예배를 기획한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환대의 마음으로 한 가정씩 소개했고, 각자 담당하는 교회를 스스로 소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어 오 목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백령시찰 귀한 목사님들과 사모들을 모시게 되어 감사하며 불철주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백령도와 소청도의 복음을 위하여 힘쓰는 목사님들의 가정이 이번 기회를 통해 새 힘을 얻게 하시고, 가정에 남다른 은혜와 복을 주시고 자손대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도록 육체의 강건함과 필요한 일들마다 도움의 손길을 허락해 주시길” 간구했다. 이와 함께 “특별히 중화동교회는 자생교회로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당회장을 역임한 귀한 교회로, 그 시대에 귀한 선교사님들의 땀과 눈물로 복음사역을 감당하여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졌사오니 그 DNA가 우리에게도 계승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문과 지역과 우리 대한민국이 주의 복음 안에 거하게 역사해 달라”고 선교적 역사의식의 계승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에 말씀을 전한 이봉우 목사(사곶교회 담임)는 ‘나만의 기도 시간’(다니엘 6장 10절)이라는 제목을 통해 “늘 하던 대로 세 번씩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다니엘처럼 나만의 기도시간을 통해 도우시고 역사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한다”며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와 성도들의 기도 덕분이기에 백령도를 위하여 새로남교회 성도분들이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기도요청과 고마움을 전했다. 축도는 두무진교회를 담임하는 김태섭 목사가 했다.
예배 중간에 연지교회 김은호 목사의 아내 김순의 사모가 새로남교인들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김 사모는 “백령도는 어린아이들이 없는 노령화된 교회이기에 사모로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어르신들을 섬길 수 있어 감사하다”며 “연지교회 출신으로서 행복한 주일학교 시절을 보냈지만 다시 와서 보니 백령도 교회가 노화되어 안타깝지만 무릎 꿇고 기도하고 섬길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특히 “오늘은 저의 생일인데 오정호 목사님이 초청해주셔서 예배하며 힘을 얻고, 위로해 주셔서 참 행복하다”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로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린다”고 전했다.
이번 새로남교회의 섬김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동역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의 표현이었다. 예배와 나눔, 기도와 교제가 어우러진 이 시간은 백령도 목회자들과 사모들에게 영적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고, 섬긴 새로남교회 성도들에게도 큰 은혜의 시간이 됐다.
수요예배 다음날 목요일에도 목회자 부부와 함께 대전 미술관에서 <불멸의 화가 반고흐 미술 특별전>과 한남대학교 <선교사촌>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의 흔적들을 발견하며 선교적 마인드를 다지는 계기를 가졌다. 이어 청남대를 방문하고 일정을 마무리 했다.
새로남교회의 초청을 받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백령도 일곱 교회는 중화동교회(조정헌 목사/박민순 사모), 사곶교회(이봉우 목사/김민숙 사모), 진촌교회(이철 목사/박영숙 사모), 가을교회(김상우 목사/나연화 사모), 백령중앙교회(김병수 목사/최선희 사모),두무진교회(김태섭 목사/김경숙 사모), 연지교회(김은호 목사/김순의 사모)이다. 대청도에서는 내동교회(최영권 목사/남궁순원 사모), 소청도에서는 소청교회(박정석목사/김정숙사모)가 초청됐다. 특히 중화동교회는 1883년에 설립된 소래교회에 이어 1896년에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교회이자 백령도의 첫 번째 교회이다.
새로남교회는 지난 3월 23일 주일 저녁예배에 ‘농촌교회와 함께하는 예배’를 통해 영양 예닮교회 이영우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와 간증의 시간을 가진바 있다. 이처럼 새로남교회는 다섯 달란트 받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농어촌 교회를 돕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백령도 목회자 초청도 예장합동총회의 역사가 담긴 백령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향한 새로남교회의 작은 섬김의 행동으로 한국 교회에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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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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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군선교회, 실행위원회 · 나라사랑기도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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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군선교회(회장 박창식 목사)가 주최한 28회기 실행위원회 및 나라사랑기도회가 4월 10일 오전 11시 판안장로교회(명예회장 홍성현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날 • 군선교정책세미나 • 중앙회실무정임원 및 지회장 연석회의 • 군선교사 위로간담회 • 군선교4대기관 연석회의가 있었다.
개회예배는 명예회장 홍성현 목사의 인도로 수석부회장 박장희 장로가 기도, 부회장 김호순 권사가 막 1:1-8 봉독, 실무임원 부부일동이 특송했다.
회장 박창식 목사가 ‘나는 굽혀!’란 제목으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인정받은 위대한 자였으나 자신을 ‘굽혀’ 신발끈도 풀 수 없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낮춘 것이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주님 앞에 자신을 종 보다 더 낮추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세례 요한은 첫째,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둘째, 받은 은혜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주님만이 군선교 사역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나라사랑기도회
회계 이희중 장로가 헌금기도 후(위원 : 이재천 김성원 신동선 장현덕) 사무총장 황성준 목사의 인도로 “나라와 민족 복음화와 군목, 군선교사들을 위해” 지회장 윤상덕 목사가, “육, 해, 공군 해병대 군인교회와 장병들을 위해” 부회장 송정현 장로가, “중앙회와 전국지회를 위해” 총무 박정동 목사가 나라사랑기도회를 했다.
회장이 달서교회, 판암장로교회에 감사패를 증정 후 박창식 목사의 축도 후 수석총무 박순석 목사가 광고했다.
이어 판암장로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중식을 위해 충북지회장 문세춘 목사가 기도 후 애찬 및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실행위원회는 회장 박창식 목사의 사회로 애국가 제창,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백만 장병을 한국교회로!”,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청년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표어제창, 대전지회장 김희동 목사가 기도, 서기 김홍진 목사가 회원점명, 회록서기 최상호 목사가 전회의록 낭독, 사무총장 황성준 목사가 경과보고, 서기 김홍진 목사가 조직보고, 사무총장 이인순 장로 사업계획 보고, 회계 이희중 장로가 예산보고, 신안건토의 후 증경회장 신현진 목사가 “힘들어도, 돈이 들어도 군선교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 전도를 통해 한국교회가 살 수 있다”라고, 김형국 목사가 “하양교회 목회 시절 부대 교회를 세우는데 후원했는데 이제 원로 은퇴 후 그때 세운 군인교회에서 군선교에 매진하고 있다”라고 격려사 후 주기도로 폐회했다.
군선교 정책세미나는 전북지회장 오동혁 목사의 사회로, 감사 류성고 장로가 기도 후 강사 예비역 육군소장 서정열 장로(새에덴교회)가 ‘군선교 사역을 위한 효율적 정책’이란 제목으로 “군복무 기간과 병력이 줄고 있다. 신교대에서도 휴대폰 사용이 가능하다. 군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군선교를 위해 협력하고 노력해야 한다. 병사와 늘 접촉 가능한 군종병을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강의했다.
지회 소개
실무정임원 및 지회장 연석회의는 사무총장 이인순 장로의 사회로 제주지회장 박창건 목사가 기도, 지회별 소개 및 인사 후 안건토의했다.
군선교사 위로회 및 간담회는 회록서기 최상호 목사의 사회로 수석총무 황진수 장로가 기도,군선교사회 회장 조재선 목사가 소개 및 인사 후 다같이 간담회 하고 회장 박창식 목사가 참석한 군선교사들에게 격려금을 전달했다.
군선교 4대기관 연석회의는 군선교부장 유광철 목사의 사회로 군목단장 이석영 목사가 기도, 각 기관 대표 인사 및 소개 후 유광철 군선교부장이 “오늘 4개 기관이 함께 해 의미가 있고 감사하다. 그동안 해왔던 군선교 사역은 매우 귀하니 잘 계승하자. 그럼에도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기에 이에 대한 과제가 주어졌다. 기독교 10대 교단 중심으로 공동으로 추구하던 것들이 있지만 교단 간 차이가 있기에 군선교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 그래서 합동군선교부의 정책이 필요하며 군목, 군선교사를 지원하기 위해 민간교회 입양 운동이 필요하다. 또한 내무반에 군종사병만이 들어갈 수 있으니 청년 군선교사 파송이 필요하다”라고 모두 발언하고 건설적인 안건을 갖고 토의하고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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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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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 이사회 총무 정신길 목사 장남, 6월 6일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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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 이사회 총무를 맡고 있는 정신길 목사(교하대광교회 시무)의 장남 민철 군(신부: 최예은)이 오는 6월 6일(금) 낮 12시 서대문장로교회(장봉생 부총회장 시무)에서 결혼식을 한다. 신랑 민철 군이 서대문교회 유치부전도사이기에 장봉생 목사가 주례하고, 신부 예은 양과 총신대학 커플이기에 박성규 총장, 유해석 교수 등이 축사와 축시 등 축하 순서를 맡는다. 정 목사는 “새 가정이 믿음의 가정을 이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축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모바일 정첩장
https://mcard.gyulban.com/wday/4440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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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9
오피니언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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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내가 쓴 글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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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오래됐다. 그리고 여전히 글쓰기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수시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단순한 책이지만 나름의 통찰력을 준다. 저자는 글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보며 신기해한다. 그렇다. 우리가 글을 잘 써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쓴 글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막연히 그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경험자가 그렇다고 하니 더 확신이 든다. 모두 글을 쓰자. 그것도 잘 쓰자!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쓰지 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쓴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전제된 글이 독자가 진정 읽고 싶어 하는 글이 아닐까?(p. 98)
나를 재미있게 하는 글을 쓴다는 건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글, 그러니까 어디서도 볼 수 없던 글을 내 손으로 창작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영화를 봤다고 하자. '이 부분이 재밌었다, 이 장면은 의아하다' 등 다양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영화라는 사상에 의해 심상이 생겨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 글이 넘쳐난다. 영화 팸플릿, 전문 평론가의 의견이 실린 《키네마 준보》(1919년 창간해 현재까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영화 전문 잡지), 《영화비보》(한국계 일본인인 영화평론가 마치야마 토모히로가 창간한 진보적 성향의 영화 전문 잡지) 등의 영화 잡지에 수많은 칼럼이 선보이고 있고, 라디오는 물론(p. 97)유튜브 등 1인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수많은 영화 리뷰, 영화 블로그, 트위터에서의 감상문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감상평을 나보다 풍부 한 어휘로 썼다거나, 내가 느낀 의문점에 대해 납득할 만한 고찰을 충분히 언급했다면 굳이 내가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타인의 글과 같은 내용을 써서 인터넷 세계에 방류하면 당신에게 돌아오는 반향은 "00 씨가 했던 말과 똑같네요"뿐이다. 만약 나쁜 마음을 먹고 다른 사람의 글을 모방한 글로 원고료를 받으려고 한다면, 당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칭찬이 아닌 경찰이다. 또는 저작권자가 보낸 내용증명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쓴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독자의 입장에서 읽고 싶은 글을 쓰는 행위의 출발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요즘은 시사 문제에 대한 의견, 사건이(p. 98)나 사고에 대한 고찰,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책에 대한 감상, 사상에 이끌린 언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런 의미에서 독창성이 있는 나만의 글을 쓰기가 무척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편한 일이다. 특별히 새로운 견해나 의문이 없고, 독자로 만족한다면 마음 편히 독자로 남자. 어디선가 읽은 내용을 고생고생해가며 글로 쓴다고 해도 아무도 읽지 않을뿐더러 자신도 즐겁지 않을 테니 말이다(p. 99).
거인의 어깨 위에서 글 쓰는 법
무작정 쓴 글에서는 새로움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거인이 어깨 위에서 저편을 내다보면서 '그다음'을 이야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p. 160)
배가 난파해서 다섯 살 남자아이가 부모와 헤어져, 판자 조각을 붙잡고 무인도에 홀로 표착했다. 소년은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내고 동굴에서 생활하며 고독 속에 15년을 보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기적적으로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들어보세요! 대발견을 했습니다. 조개껍데기를 늘어 놓고 하나를 더 놓거나 하나를 빼면 다양한 숫자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인도의 대발견이라는 고사다. 아니, 사실은 방금 내가 지어낸 얘기다(p. 161). 이 소년이 조난당하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면 첫 주에 덧셈과 뺄셈을 배웠을 것이다. 그 정도 연산은 인류가 쌓아온 무수한 지식의 기초 중 기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하면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 항간에 넘쳐나는 인터넷상의 글에는 이와 비슷한 모습이 정말 많이 보인다. 옛 선인들이 실컷 고찰해서 아주 옛날에 다 했던 이야기들을 자기 머리로 생각했다며 의기양양하게 펼치는 글이 판을 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연애 관계에 대한 글을 써서 페이지뷰를 올리는 젊은 작가들이 있다. 교제해봤더니 이러하더라, 동거해봤는데 이렇게 생각한다, 결혼해보니 저러하더라, 헤어져보니 어떠하더라 등의 이야기다. 그건 대부분 나쓰메 소세키(일본의 소설가)가 백 년도 훨씬 전에 했던 이야기다. 봉건시대에 느닷없이 외국의 개인주의니 자유연애니 하는 개념이 들어오자, 나쓰메 소세키는 자아가 무엇인지, 연애가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고민(p. 162)하고 생각한 내용을 수많은 글로 남겼다. 미숙하고 서툰 첫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그려낸 《산시로》 부터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자 거짓말을 해서 타인의 행동을 시험하는 《그 후》와 인간의 이중성을 깊이 있게 담아낸 《마음》에 이르기까지, 직설적인 성 묘사는 없지만 그가 쓴 글에는 지금과 다름없는 연애와 관련한 여러 모습이 담겨 있다.
소세키가 너무 위대했기 때문에 근대의 일본 문학가들은 어떻게든 '그 다음'을 쓰려고 도전해왔다. 백수십 년 전의 소세키가 이미 많이 썼으므로, 지금의 젊은 작가들은 그 다음 이야기 를 써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할 수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없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날조한 말이 아니다. 12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가 남긴 말이다. 역사 속에서 인류가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 거인이 고, 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내다보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맨바닥에서 시작하면 조난당한 소년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p. 163). '거인의 어깨 위'라는 말은 뉴턴이 1676년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 베르나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명해졌다. "내가 저편을 멀리 내다봤다면, 그것은 오로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뉴턴과 훅의 일화는 과학자가 거인의 어깨에 오르는 이야기 였지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 음악가도 모두 과거를 인용하면서 조금씩 새로워졌다. 그들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자신만의 성취를 거두었고, 자신들 역시 후세에게 '거인'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가 왜 재미있는지를 거인의 어깨 위에서 보면 평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카메라 앵글은 구로사와 아키라(일본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의 스타일과 굉장히 비슷하지만, 한층 더 기교가 있다"라든가 "히치콕(영국의 영화감독) 감독의 영화 편집 기법을 발전시켰다"라는 식으로 쓰는 것이다. 앞서 말한 도서관에서 1차 자료를 찾으라는 이야기는 오로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기 위함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p. 164)라선다는 것은 '여기까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다음을 이야기하겠다'라는 자세다(p.165).
고수는 맛없는 음식에 대해서도 쓸 말이 있다
쓰려는 대상에 대해 도무지 애정이 생기지 않을 땐 어떤 부분이 어떻게 지루한지, 무엇을 알 수 없었는지, 왜 재미없었는지 쓰면 된다. 그것이 비평이다(p. 166).
'영화를 봤다, 콘서트에 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 감동을 글로 써보고 싶다. 괜찮다면 다른 사람들도 읽었으면 한다.' 그런 충동이 들 때는 괜찮다. 부담도 덜하고 괴롭지도 않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거나 과제를 부여받아 일이 되어버린 경우라면 다르다. 재미없다고 느낀 영화나 맛없었던 음식에 대해서도 써야 한다. 시작도 안했는데 머리부터 아프다. 대상에 대해 어떠한 애정도 느끼지 못한 상태로 글을 쓴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1차 자료에는 '사랑할 기회'가 숨어 있다. 과제를 받았다면 자료 조사 과정에서(p. 167) '사랑할 만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 부분을 찾지 못하면 계속 괴롭다. 글로 써야 할 대상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자료를 찾는 동안 사랑할 만한 포인트를 찾아낸다. 2. 대충 훑어본 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포인트의 자료를 파헤친다. 생각을 강화하기 위해 좋은 재료를 갖춘다. 예컨대 영화라면 '그 장면의 의미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인용했군. 이 감독은 셰익스피어를 무척 좋아하는 거야'라거나 '이 각본가는 어렸을 때부터 성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군' 하는 부분을 찾아내면 없던 애정이 서서히 싹튼다. 영화는 수백 명, 수천 명이 합심해 만든다. 최악의 평가를 받은 영화라도 좋은 부분은 분명 있다. 또한 마지막까지 영화 자체는 재미가 없었더라도 관여한 사람 중 누군가의 개성은 좋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p. 168). 내가 좋아한 부분을 있는 힘껏 말하자라는 마음으로 글을 쓸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포인트만 발견할 수 있다면 주제가 영화든 우유든 과자든 상관없다. 좋아한 그대로 전달하면 글이 된다. 그럼에도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마지막 기회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지루했는지, 무엇을 알 수 없었는지, 왜 재미없었는 지를 쓰는 수밖에 없다. 지루하다거나 모르겠다는 것도 감상의 하나이고, 그 감상을 깊게 파헤치다 보면 눈에 띄는 세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 감상을 가감 없이 쓰면 올바른 의미에서 '비평'의 기능을 하는 글이 될 수 있다. 이런 경우라도 폄하하거나 비웃거나 단점을 지적하는 데 열을 올려서는 안 된다. 글을 쓸 때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자세가 '존중'이다. 에세이에서 사상은 늘 자신의 외부에 있다. 자신 바깥에 있는 '외부의 존재'를 존중하지 않으면 나도 나의 외부로부터 존(p. 169)중받을 수 없다. 자료를 조사하는 일은 사랑을 찾고 키우는 과정이다. 자신이 느낀 감동을 탐색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명확하게 하며, 그 감동을 뿌리내리게 하고, 가지를 싹 틔우기 위해 자료를 조사 한다. 사랑과 존중. 글의 중심에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당신이 쓰는 글은 분명 의미가 있다(p. 170).
독서는 모든 글쓰기에 활용된다
지나치게 당연한 이야기라 송구하지만, 책을 읽는 것이 글쓰기에 활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 “이 정도는 읽어둡시다" 하는 책은 읽으면 득만 있을 뿐 손해될 게 없다. 애초에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남은 고전은 재고가 없어서 계속 인쇄하는 게 아니다. 재미있으니까 지금도 출판 되는 것이다. 독서를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는 일을 문장이나 문체를 배우는 것으로 한정하지 말라는 얘기다. 책이라는 농밀한 정보의 집(p. 197)적이야말로 인생에서 접하는 최고의 사상이자, 우리가 심상을 품어야 할 대상이다. 무엇보다 책에서 느낀 체험과 감동을 쓴 글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글 쓰는 행위는 독서와 구별되기 어렵다(p. 198).
나는 24년 동안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했지만, 긴 글 따위는 써본 적이 없다. 광고에 쓰는 글은 헤드 카피 15자, 바디 카피라고 부르는 상품 설명 200자 정도가 전부다. 게다가 광고의 문(p. 221)장들은 철두철미하게 시켜서 쓰는 것이다. 그런 내가 "한 줄이라도 좋다"라는 말만 듣고 밤새 키보드를 두드리며 내 생각을 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릿속을 글자로 옮겨 썼더니 갑자기 7천 자가 됐다. 그리고 그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읽고 싶어서'라는 충동에 따른 것이었다. 좋아서 시작했지만, 긴 글을 쓰는 일은 정말 괴롭다. 허리는 아프고 늘 졸리다. 쓰는 도중에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반드시 솟아난다. 더욱이 내가 읽고 즐거워하는 거야 내 마음이라 해도, 내가 쓴 글을 먼저 나서서 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동안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서게 된다. 내가 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예상도 못했던 어딘가로 나를 불러줬다. "당신이 쓴 글을 읽고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라며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이 와서 교토역으로 향하던 때(p. 222) "당신 글의 내용이 흥미로우니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해주십시오"라는 요청에 시즈오카까지 가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던 때. "부디 당신이 이 주제로 글을 써주셨으면 한다"라는 부탁에 도호쿠 지방으로 가서 산속 풍경을 올려다보던 순간. "다나카 씨, 책 한 권을 써주십시오. 출판하고 싶습니다"라는 이상한 메일을 보낸 곤노 씨를 만나기로 약속했던 때. 그럴 때 나는 '글자가 나를 데려왔다'라고 생각했다. 나쁜 말을 내뱉으면, 그 나쁜 말은 반드시 자신을 나쁜 곳으로 데려간다. 좋은 말을 하면, 그 좋은 말은 반드시 자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평상시에 그냥 떠들며 지내는 시간은 빈둥거리며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풍경을 바꾸기 위해, 이곳이 아닌 어딘 가로 가기 위해, 나는 괴로워도 산을 오르듯 글을 쓴다. 등산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p.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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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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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내가 잘 모르는 세상: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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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청각장애(김초엽)와 지체장애(김원영)를 지닌 채 살아온 시간과 장애권리운동의 자장 안에서 키워온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장애라는 고유한 경험이 타자, 환경,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과학기술과 결합할 때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다른 내일을 제시한다. 장애인의 인지 세계와 감각, 동작을 중심으로 새롭게 설계한 세계를 상상하는 김초엽, 각기 다른 취약함과 의존성을 지닌 존재들이 더 긴밀하게 접속하여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미래의 기술을 기대하는 김원영. 두 사람은 각자의 오랜 문제의식을 멀리, 또 깊숙이 밀고 나아가 이 세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든 위계와 정상성 규범 너머에서 서로를 재발견하고 환대할 미래를 그린다. 여기,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과해 더 인간적인 미래의 어느 날에 도달할 짜릿한 여행이 준비되어 있다-교보문고
신체장애가 있는 두 남녀의 글은 흥미로우면서도 매우 깊이가 있었다. 나나 가족 중에 중증 장애인은 없다. 그래서 장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않았다. 김원영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이 책까지 읽게 됐다. 모르고 생각도 해보지 않던 세계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얻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파트 경비 노동자 A씨는 1995년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이후 줄곧 의족을 착용한 채 일했다. 2010년 12월 28일 A씨는 근무하던 아파트 단지의 눈을 치우다 넘어졌고, 그 일로 의족이 파손되고 말았다. 업무 중 의족이 부서졌기에 A씨는 근로 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 따른 요양 급여를 청구했다. 이에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법에 따른 요양 급여를 받으려면 근로자가 업무와 관련하여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라야 하는데, A씨는 의족이 파손되었을 뿐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라면서 요양급여 지급을 거절했다. A씨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재판에서 모두 지고 말았다. 법원 역시 근로자의 '부상'이란 신체에 상처를 입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족이 파손된 것을 이유로 요양급여를 지급할 수는 없다는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p. 52). 이 사례에서 근로복지공단과 1심, 2심 법원은 법률에 쓰인 내용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산재보험법은 업무상 근로자의 '부상'이 있어야 보험금(요양급여)을 지급한다고 규정한다. '부상'은 상식적으로도 사전적으로도 인간의 '몸'이 다치는 사태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근로자가 일하던 도중 스마트폰이 망가지거나 타고 온 자전거가 부서져도 보험금을 지급해달라 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A씨의 입장에서는 의족을 휴대폰이나 자전거와 같은 사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족은 다리에 탈착이 가능하지만 신발이나 스마트폰, 자전거처럼 몸과 쉽게 결합/분리되지는 않는다. A씨는 1995년부터 의족을 착용했으므로 그것은 실제로 몸의 일부처럼 작동했을 것이다. 일할 때 늘 몸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체중을 지탱하고, 바닥에 놓인 무거운 물건을 밀고, 택배를 양손에 들었을 때는 현관문을 여는 역할을 하는, 그의 몸 자체였을 것이다. 망가진 의족은 그의 업무뿐 아니라 삶에 완전히 통합된 기본 조건이어서, 다른 보조기기 (휠체어나 다른 의족)로 대체해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장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A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 사건에 장애인 관련 공익 소송을 진행하는 법률가들과 국가인권위원회가 A씨의 입장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원고를 지원하는 이들은 의족 파손에 보험금(요양급여)을 지급하지 않을 경우 장애인들이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논리를 강조하면서, 무엇보다도 의족(p. 53)이 장애가 있는 개인의 신체와 분리 불가능한 몸의 일부라는 점을 재판부에 납득시키고자 애썼다. 장애인의 몸과 보조기기의 관계를 성찰한 대법원은 2심 판결을 뒤집고 A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의학기술 수준으로는 의족을 신체에 직접 장착하는 대신 탈 부착할 수밖에 없어 원고와 같이 의족을 장착한 장애인들은 수면 시간 등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의족을 착용한 상태로 영위하고 있는 사실... 의족 착용 장애인들에게 의족은 기능적, 물리적으로 신체의 일부인 다리를 사실상 대체하고 있는 사실... 신체에 의족을 탈부착하는 것이 용이하지만은 않은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의족은 단순히 신체를 보조하는 기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다리를 기능적, 물리적,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장치로서, 업무상의 사유로 근로자가 장착한 의족이 파손된 경우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요양급여의 대상인 근로자의 부상에 포함된 다고 보아야 한다. 어디까지를 인간의 신체로 볼 것인지는 현실적인 쟁점이다. 위 판결은 물리적인 '탈부착 가능성' 등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스마트폰은 몸에서 쉽게 떨어지고 분리되지만, 시각장애인에게(p. 54)는 문자 정보를 음성으로 전환해주어 그의 인지 기능 일부에 깊이 통합되는 장치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탈부착 가능성'만으로 그 이용자의 신체와 완전히 별개의 물건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설령 스마트폰을 신체와 통합된 장치로 본다 해도 업무 중 스마트폰이 파손된 시각장애인이 '부상'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과 사물(기계)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고, 이는 점점 더 중요한 법률문제가 되어간다.
이렇게 논쟁적이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장애인의 '결함'을 보조하는 장비로 여겨지던 목발, 의족, 휠체어, 보청기, 흰 지팡이, 스마트 기기 등을 더 이상 외부에 부수된 보조장치로만 여길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기들이 그저 나의 '결함'을 보조하는 도구에 불과하지만은 않다는 감각은 장애인들에게는 꽤 오래된 것이다. 법률상 '장애인 보장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고, 이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 받으려면 의사의 의학적 진단이 있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단지 의료기기가 아니었다. 이를 뭐라고 달리 설명할 언어가 없었을 뿐이다. 우리가 장애인의 경험을 '사이보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면, 보장구는 우리 몸의 '결핍감'을 더 선명하게 만들기를 멈추고 우리의 신체를 재구성할 가능성이 될지도 모른다(p. 55).
사이보그 중립
장애가 사라진 미래가 올 수 있을까? 비장애중심주의, 즉 능력차별주의는 취약한 몸, 손상된 몸, 의존하는 몸에 대한 혐오이며, 건강하고 탁월하고 독립적인 몸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 기는 관념이다. 취약하거나 건강한 몸으로부터 산출되는 능력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능력차별주의가 미래에도 지배적인 이념으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몸들은 늘 멸시의 대상이 된다. 지금 장애로 간주하는 것을 이후에 기술이 제거하거나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장애의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노화와 질병과 죽음이 모두 사라진 다소 소름 돋는 유토피아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발전한 미래라도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놀라운 치료 기술이 계속해서 등장하더라도 말이다. 무르 래퍼티Mur Lafery의 장편 『식스 웨이크』에는 휠체어를 타는 의사 조애나가 나온다. 이 소설은 DNA가 동일한 클론으로 정신을 옮겨 몇 번이고 다시 사는 것이 보편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데, 조애나는 DNA 해커를 고용해 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채로 태어나는 유전적 기형을 바로잡는다. 하지만 새로운 몸으(p. 276)로 살게 된 후 새 다리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조애나는 다음 번 클론으로 옮길 때는 다시 원래대로 뒤틀린 다리를 달겠다고 결정하고, 장애를 가진 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조애나는 결국 장애인으로 남았지만 그것이 불행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이 조애나라는 인물이 장애의 미래, 미래의 장애 정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그 사람의 삶에 새겨지는 경험이며, 치료가 반드시 답이 될 수는 없고, 어떤 이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현실에도 이미 조애나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올리버 색스는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한 버질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각장애인으로 살던 버질은 실명된 눈을 다시 검진해보았다가 백내장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가족들은 버질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의 순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버질의 시력 회복 과정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는 수술 이후에 색상과 움직임, 형체를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시각 기억이 없었다. 시력을 되찾았지만 오히려 보이는 세계에 당혹감을 느끼고, 예전처럼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어 갈등하던 버질은 폐렴과 합병증으로 우연히 2차 실명을 맞는다. 버질이 다시 촉각의 세계로 돌아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제 집 같은' 편안함이다. 그는 낯선 자극의 세계에서 혼란을 겪다가(p. 277) 비로소 본래 자신이 속해 있던 친밀한 감각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장애인의 몸으로 물질세계와 직접 상호 작용하는 구체적인 경험이고, 그 경험은 개인의 자아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조애나가 건강한 복제로 태어날 수 있었음에도 다시 뒤틀린 다리를 가진 몸으로 돌아간 것과도 통하는 일이다. 어쩌면 미래의 기술, 미래의 과학은 장애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발전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장애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결함 없는 완전한 기술을 거머쥘 수 없고, 불멸에 도달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능력차별주의를 끝내는 것. 그것은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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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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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한 사람이 있기 위해 필요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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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유홍준 교수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일들을 보여주는 글을 썼다. 재미있게 읽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영향을 주고받았고, 다양한 일들을 통해 인생을 펼쳐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저자에게 더 친근한 마음이 생겼다. 좋은 내용이 많다. 그중 김지하에 대한 것은 관심 있게 봤다. 그가 왜 뜬금없이 변절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좀 관대하고 너그럽게 김지하를 평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 “부록: 나의 글쓰기”를 썼는데 이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영업비밀이라 흥미롭게 봤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기에 유익했다.
김지하: 꽃과 달마, 그리고 '흰 그늘'의 미학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1941~2022)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의 아우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다. 개인적인 연이 아니라 해도 김지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 영웅적인 민주투사였다. 70년대에 그가 7년간 감옥살이를 한 것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넬슨 만델라의 옥살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로 오윤(미술), 김민기(노래), 이애주(춤), 채희완(탈춤), 임진택(창작판소리) 등 민족예술 제1세대들을 길러냈다. 80년대에는 생명사상과 동학을 다시 일으킨(p. 201) 사상가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정확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발표한 이후 민주화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처신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조차 그의 곁을 떠났다. 김지하의 변절이란 오랜 세월 가혹한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이 낳은 후유증이었다. 7년의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그는 말하자면 '상이군인'이었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명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쉼 없이 나아갔다. 거기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하는 가고자 하는 길을 너무 빨리 앞질러 갔다. 눈 앞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민중은 6월민주항쟁으로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는데, 생명운동을 시대의 과제(p. 202)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서 세상이 김지하에게 기대하는 것과 김지하가 세상에 바라는 것이 어긋나고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겼다. 급기야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치 노선마저 달리하며, 진보적 지성과 문인을 매도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김지하는 더욱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병적 징후였다. 그때 김지하는 심신이 많이 아팠다. 정신과 치료도 여러 번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91년 이전까지 김지하의 삶과 예술은 한국 문학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김지하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원주의 한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내가 이제까지 본 장례식 중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가족과 교인, 그리고 끝까지 곁에 남아 있던 벗과 후배 몇 명만이 그(p. 203)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것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지하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벗과 후배들은 서울에서 49재를 열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당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2022년 6월 25일 오후 3시부터 수운회관에서 열린 김지하 49재에는 문인, 학자, 사회운동가, 정치인, 예능인, 시민 등 무려 400명 (주최측 추산 700명)이 강당을 가득 메우고 야외 행사까지 자리를 같이했다. 김지하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이들이 다 모여든 것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추모식 중 가장 성대한 자리였다. 김지하의 영혼이 저승으로 가던 길을 잠시 멈춘 것 같은 감동이 있었다(p. 204).
좋은 글쓰기를 위한 15가지 조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발간 2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회 때 한 독자가 글쓰기의 조언을 말해달라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이야기한 것을 당시 정재숙 부장 (전 문화재청장)이 『중앙선데이』 (2013년 6월 2일 자)에 '유홍준의 대중적 글쓰기 15가지 도움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어주었다. 이렇게 신문에 실린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부끄러웠다. 자기가 무슨 대가라고 이렇게 글쓰기 강연을 하였는가 흉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에 공개된 것이기에 이번에 그 내용을 많이 고치고 보완하여 내 나름의 '문장강화'로 정리하 였다(p. 301).
1. 주제를 장악하라
글쓰기의 핵심은 주제를 장악하는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면 글이 흔들린다. 간혹 소재와 주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재는 글의 재료이고 주제는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비유하자면 깍두기는 주제이고 소재는 무이며 양념의 배합은 글의 구성이다. 제목만으로 그 주제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좋은 글이 된다. 제목만으로 전달이 잘 안 될 때는 부제를 달아보면 명확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 해남 답사기」, 「봄의 전령: 홍제천변의 개나리」 같은 식이다. 나는 제목이 먼저 정해져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다 써놓고 제목을 달려면 늦다. 글만 쓰고 제목은 편집자에게 맡기는 것은 주제가 약한 글이다.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몽타주 이론의 영화감독 예이젠시테인(Sergei Milkhailovich Eisenstein)은 영화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한 것의 장면을 찾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2. 잠정적 독자를 상정하라
글이란 내가 아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읽어 줄 것을 기대하고 쓴다는 점에서 공급자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내 글을(p. 302)읽을 잠정적 독자를 머리에 떠올리고 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내 전공인 미술사 논문을 쓸 때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쓰지만, 산문, 칼럼, 답사기 등 대중적 글쓰기를 할 때는 전공이 다른 독자들을 머릿속에 두고 쓴다. 심지어 미술평론을 쓸 때도 미술평론가나 미술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이 읽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잠정적 독자가 이해 못할 얘기나 용어는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예를 들어 '미니멀 아트'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경우, 전공자들이라면 그 단어로 족하지만 일반인을 염두에 둘 때는 '조형적 표현방식을 최대한(맥시멈)이 아니라 최소한(미니멈)으로 압축한다는 미니멀아트에서는' 하는 식으로 풀어 써준다. 독자는 그 글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독자는 일단 성실하게 읽는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고 글이 시시하면 읽다 말 수 있다. 그 점에서 독자는 매우 단호하다. 글을 쓸 때는 독자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독자에게 호소해야 한다. 신문에 실린 칼럼을 읽다 보면 많은 필자들이 정연한 논리로 정론을 펴지만 어떤 글은 필자가 유식하고 똑똑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독자 입장에서 '야단맞는 것' 같아 끝까지 못 읽는 경우가 많다. 독자를 우습게 보다가는 크게 다치거나 망신당한다. 독자 중엔 나보다 훨씬 명석하고 사회적 경험이 많은 분이 많다. 다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이 나의 독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독자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 이는 글 쓰는 이의 좌우(p. 303)명으로 삼을 만하다.
3. 기승전결을 갖추고, 유도동기를 활용하라
나열식 서술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든다. '지루한 웅변'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절대 금물이다. 하나의 글은 어떤 식으로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글의 짜임새이다. 기승전결에서 기는 들어가는 말로 여러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가을에 열리는 어떤 서예전에 대해 쓴다고 할 때 "9월로 들어서면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라고 편하게 말머리를 시작하는 방법, "지금 예술의전당에서는 근대서예전이 열리고 있다"라고 첫머리부터 치고 나오는 방법, "서예는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대중적 관심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만" 하고 주제를 암시하고 풀어가는 방법 등이 있다. 여러 방법 중 자신의 취향 또는 글의 내용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출발 의식을 갖고 시작했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승은 글의 내용에 해당하므로 있는 사실대로 풀어가면 되지만 전에서는 글에 활력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때 반전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할 수 있으면 좋은 글이 된다. 결에 이르기 전에 주의할 점은 결론은 감추고 전개해와야지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늘어놓으면 맥이 빠진다. 결을 맺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 핵심을 요약하는 법,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p. 304)한번 강조하는 방법, 잔잔하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방법 등이 일반적인 마무리인데 때론 무대에서 마지막에 징을 한 방 울리듯 간결 하게 끝내는 방법도 있다. 내가 이 책의 「꽃차례」에서 "나이가 드니 이제 꽃이 보이기 시작하네요"로, 「우리 어머니 이력서」에서 "우리 어머니 이름은 신자, 영자, 전 자이다"로 끝낸 것이 이 수법이다. 긴 글을 쓸 때는 독자를 계속 끌고 갈 계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오페라나 교향시에서 일정한 곡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유도동기 기법을 빌려올 수 있다. 한 예로 답사기 2권의 청도 운문사 답사기에서 나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절집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하여 내가 잘 알고 있는 지기 스님을 등장시켰다. 이름은 밝히지 않고 계속 그분의 설명, 잊을 만하면 그분과의 대화를 삽입하면서 글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긴 이야기를 이렇게 끝냈다. "나의 지기, 그분의 법명은 진광이다.“
4. 에피소드로 생동감을 불어넣어라
글을 쓰면서 그 주제에 맞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글은 무조건 성공한다. 답사기 1권의 경주 답사기에서 〈삼화령 애기부처〉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애기처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재 해설하듯 하자면 이와 같은 통일신라 직전 고신라의 불상 조각(p. 305)은 절대자의 친절성을 반영하여 인간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애기부처가 보여주는 예술적 감동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 애기부처에 얽힌 생생한 에피소드 하나를 알고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님이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된 내력을 얘기해준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은 절대로 손으로 만지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박물관에 단체로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인솔 교사를 따라 진열장 유물들을 보면서 지루하게 지나가다가 이 애기부처를 보는 순간 그 귀여운 모습에 예술적 공감 내지 어린이로서 동질감을 느껴 경비원 몰래 발가락을 살짝 만지고 돌아서는 바람에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가 있어서 〈삼화령 애기부처〉 답사기를 쓸 수 있었다.
5. 이미지를 차용하라
누구나 글을 쓰면서 가장 애태우는 것 중 하나는 어휘력의 부족이다. 특히 슬프다, 그립다, 안타깝다, 아쉽다 등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의 경우는 너무도 슬프다, 한없이 그립다, 애가 타도록 안타깝기만 하다, 마냥 아쉬운 감정이 일어난다 등 걸맞은 부사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이미지로 대체하여 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p. 306). 답사기 1권의 강진 답사기에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만덕산의 야트막한 산길은 봄이면 길가에 춘란이 피어나고 솔밭 속에서 벌 나비가 날아들고 산새 소리가 답사객을 맞이해주는 우리네 야산의 정겨운 고갯길이다. 그런데 어느 해 찾아갔더니 솔잎혹파리 피해로 소나무들이 모두 죽어 마른 가지가 허공을 향해 뻗어 있고 살충제를 살포하는 바람에 벌 나비가 다 사라져 산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적막강산에 대한 아쉬움을 나는 형용사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면서 아쉬움을 느꼈던 때로 당시의 감정을 대신했다. 솔밭과 산새가 사라진 만덕산의 봄, 그것은 마치 외할머니 돌아가신 외갓집을 찾는 듯한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에서도 이미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답사기에서 불국사 석가탑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고선사탑의 장대한 멋을 이야기하면서 서양 여배우를 예로 들어 석가탑은 잉그리드 버그먼, 고선사탑은 소피아 로렌에 비유한 바 있다. 당시 독자들은 그것을 나의 유머 감각과 함께 절묘한 비유로 받아들이고 그 미감을 선명히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시효가 있어 지금 MZ세대들에게도 통하는지는 알 수 없다(p. 307).
6. 유머를 적절히 구사하라
유머는 글의 재미와 멋을 살려준다. 유머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전개되는 상황과 긴밀히 맞물릴 때 효과가 있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를 보기 힘들고 노인들만 모여 사는데, 안타깝지만 이것이 시골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나는 답사기 6권의 부여 답사기에서 내가 반교리 마을에 휴휴당을 마련하고 이장님에게 마을회비를 건넸을 때 이장님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한 말로 대신 전했다. "아직 환갑은 안 됐지유?" "안 되고말고요." "그럼 청년회로 들어가슈."
또 답사기 2권에서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이하여 동학의 현장을 답사하는데 들판에는 사방으로 교회당 첨탑들이 처처에 있을 뿐 동학의 자취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동학군이 죽창을 들고 집결했던 그 유명한 백산을 찾아갔다. 당시엔 백산에 안내판 하나 없었다. 백산은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우뚝하지만 높이 40미터밖에 안 되는 낮은 언덕이다. 여기가 과연 백산이 맞나 안 맞나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언덕 비탈길로 한 할머니가 내려오고 있어 달려가 여쭈어보았다(p. 308). "안녕하세요. 할머니, 여기가 백산 맞지요?" "맞지라우. 근데 뭐땀시 능가?" "옛날 동학군이 모였던 곳이라서요." "동학군이라구. 잡을 소리 하덜마. 그나저나 학생들인가?" "예, 일요일이라 답사 온 거예요." "에구, 안됐구먼. 배웠다는 사람들이, 쯧쯧. 주일인디 교회는 앙 가구." 유머는 이처럼 예기치 못한 대답에서 나오는데 이 대화 속에는 동학혁명이 불온시되고 동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번성한 것 등 역사와 현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제빛을 발한다. 그림에서도 유머가 구사된 경우가 있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p. 309) <수렵도>는 호랑이를 쫓아 치달리는 장면과 뒤를 돌아보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힘찬 모습으로 유명한데, 화면 한쪽 구석에는 말을 타고 졸면서 서서히 나타나는 고구려 청년이 묘사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7. 은유를 음미하게 하라
문장 속에 은유와 상징이 함축될 때 독자들의 사색을 일으킨다. 설명이 아니라 글의 행간에 서린 의미를 음미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때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답사기 1권의 강진 무위사 답사기에서 극락보전 건축의 단아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답사기 1권의 문경 봉암사 답사기에서는 가양주 9단이 과실주 담는 과정을 설명했다. 가양주 9단이 과실을 맑은 물에 헹구어 병에 넣고 증류주를 넣은 다음 3개월 후에 과실은 빼어내고 엑기스 만 담아 밀봉한 다음 어두운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이 선반에 놓고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양주 9단은 느린 어조로, 그러나 단호하게 반드시 어두운 곳이어야 한다며 이(p. 310)렇게 말했다.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이런 은유 속에는 인생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거기서 끝내야지 여기에 잇대어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라고 풀어놓으면 말의 밀도가 확 떨어진다. 독자가 음미하며 사색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8. 비판하려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라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아둔한 현실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초기의 1권, 2권이 심하다. 그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도 당하였고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에 서툴러 직설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여 불특정 다수를 비판한 경우는 좋은 유머로 받아 들이는 경우도 많다. 『국토박물관 순례』 1권의 부산 영도 답사기에서 나는 부산의 중요한 문화유적지로 복천동 고분군을 말한 적이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가야 고분군으로 여기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복천박물관은 한때 박물관문화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 그런데 정작 부산 사람들에게는 덜 인식되어 있어 이를 비판(p. 311)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를 만났는데 부산 사람이라고 하면 우선 복천동 고분군 이야기를 꺼내 이를 아는 분과 모르는 분, 가본 분과 안 가본 분으로 문화적 소양을 평가하곤 한다. 답사기 1권의 강진 답사기에서는 천일각에서 구강포 바다 건너로 보이는 칠량면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수사기관의 수배망을 뚫고 미국으로 망명한 민주투사 윤한봉의 고향임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민주화운동에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윤한봉의 이름이 낯선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거나 세상을 너무 쉽게 산 사람이다.
9. 인용으로 내용을 보강하라
글의 생명은 거기에 담긴 내용에 있다. 형식이 서툴더라도 내용이 충실하면 독자들이 용서하지만 내용이 빈약한데 형식만 번지르르하면 독자가 흉보거나 욕한다. 내용이 정확하고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인용이다. 답사기 2권에서 부석사 답사기를 쓰면서 최순우 선생의(p. 312)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인용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나의 표현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 내용을 보강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답사기 2권에서 석굴암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남천우 교수가 "신라인들은 사인(Sin) 9도에 대한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는 기하학을 최소한도의 것으로 갖고 있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은 고미술의 과학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예시였다. 답사기 6권의 선암사 답사기에서는 일주문 앞에 있는 삼인당이라는 연못을 설명하면서 연못 속에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 물길을 유도하기 위함이면서 연못이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되는 효과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나의 견해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미술과 시지각』(1954)에서 "하나의 공간에 나타난 물체는 또 다른 공간을 창출해낸다"라는 명제를 인용하였다. 이로써 내 주장에 근거가 있음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를 미학적 사고로 이끄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처럼 적절한 인용은 글의 격조를 높여준다.
10. 각 문체의 특징을 파악하라
문체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간결체, 화려체, 서사체 세 가지가 기본이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대표적인 한시 세(p. 313)편으로 그 분위기를 확인해보기로 한다. 간결체로는 송나라 황정견의 「절구」라는 고요한 시를 들 수 있다. 만리 푸른 하늘엔 구름이 일고 비가 오는데 빈산엔 사람은 없고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화려체로는 당나라 이백의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의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그 이미지의 구사가 현란하다.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모름지기 이 봄을 즐기리 내가 노래하면 달은 서성이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어지러이 움직인다. 서사체는 길게 늘어지는 만연체도 있지만 잔잔히 서술해나가다 반전을 줄 때 극적 효과를 일으킨다. 한 예로 송나라 소동파의 '아이를 목욕시키며 재미 삼아 쓴다'는 「세아희작」을 들 수 있다. 사람들 모두 자식 기르며 총명하길 바라지만(p. 314) 나는 그 총명함 때문에 한평생을 그르쳤다네 원하노니 우리 아이는 어리석고 미련해서 아무 탈도 어려움도 없이 정승판서(공경) 되거라
11. 구어체로 글맛을 살려라
글은 문법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생활 속의 관습이기 때문에 바뀐다. 그래서 문법에 얽매이면 글맛이 사라질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글맛을 내기 위해 구어체를 사용해볼 수도 있다. 구어체는 글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대가인양 단정적으로 말하였다"의 경우 "자기가 무슨 대가라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면 글에 힘이 생긴다. 그렇다고 말하는 투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12. 접속사를 절제하고 '의'를 활용하라
가능한 한 '그리고, 그러나, 그리하여, 그런데, 아무튼, 하지만' 등 접속사 없이 글을 써라. 접속사를 자주 쓰면 글에 맥이 빠지기 십상이다. 글은 문장의 논리로 이어져야 힘을 받는다. 잘 안 될 경우, 앞 문장의 핵심적 단어를 이끌어 다음 문장의 주어로 연결하는 것도 방법이다. 토씨 중 '의'의 용법은 아주 다양하여 이를 잘 활용하면 글이 간(p. 315)명해진다. 특히 글의 길이를 줄이는 데 유용하다. 내가 『중앙일보』에 쓰는 칼럼 '문화의 창' 분량은 2,150자이다. 이보다 많아도 적어도 안 되는데 글을 쓰다 보면 딱 10자 정도만 줄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의'가 약이다. 예를 들어 "단원 김홍도가 단양팔경의 하나로 그린 〈옥순봉도〉는"이라는 문장은 "단원 김홍도의 <옥순봉도>는"하고 줄일 수 있다.
13. 글의 길이에 문체와 구성을 맞춰라
글의 길이에 따라 문체도 달라야 하고 구성도 달라야 한다. 짧은 글(200자 원고지 기준 10매 이하)은 문장이 단문으로 이어가야 좋다. 짧은 글에서 긴 문장은 글의 호흡이 늘어지게 한다. 중간 길이의 글(25매 내외)은 문단을 4~5개의 토막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 경우는 중간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긴 글(30매 이상)의 문장은 긴 호흡으로 써야 한다. 문장이 짧거나 단문으로 이어가면 글의 흐름이 튄다. 중간중간 에피소드나 사례, 또는 인용문을 적당히 배치해야 글에 활력이 생긴다. 요구된 매수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쓸 때 일단 처음에는 글의 논리, 문장의 호흡에 내맡기고 써라. 그러다 3분의 1까지 오면 일단 멈추고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줄이거나 늘리면서 이어간다. 다 써 놓고 매수를 조절하는 것보다 이것이 효과적이다. 여기부터는 끝날 때까지 한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반쯤 써놓고 밖에 나가(p. 316) 다른 일 하다가 뒤이어 쓰면 글이 조각난다. 글을 쓰다 보면 들어가는 말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 다. 그럴 때는 과감히 앞에 쓴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좋은 글이 된다.
14. 문장의 리듬을 생각하며 윤문하라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윤문을 거쳐야 한다. 이발소와 미장원으로 치면 마지막 손질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윤문을 할 때는 독자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 문장이 읽기 편하려면 글 전체에 리듬이 있어야 한다. 독자는 한 문장도 두세 번은 끊어 읽는 것이 보통이니 거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글에 리듬을 줄 때는 부사, 강조어의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때론 주어 앞에 놓아 강조할 수도 있다.
15.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점검하라
글을 쓰기 전에 친구나 동료 등 적당한 대상에게 미리 말로 풀어보면 좋다. 나는 모든 글을 반드시 리허설해보고 쓴다. 내 경우는 친구, 출판사 편집자, 연구실 연구원 등 좋은 스파링파트너가 많다. 나는 이들과 대화하는 식으로 애기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며 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나 개인적으로는 설계도를 그리고 나서 시공하는 방법을 쓴다(p. 317). 나는 답사를 다닐 때 둥근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거기에다 쓸 글을 설계하듯 기본 틀을 적어두고 시간 있을 때마다 추가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한다. 메모지보다 부채가 유리한 것은 글 전체의 구성을 놔두고 계속 덧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부채에 설계도를 그려본 다음 시공을 하고 나중에 인테리어하듯 마(p. 318)무리한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바로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묵혀둔 다음에 다시 읽고 객관적으로 검토한 뒤에 완성시켜라. 한밤에 쓴 연애편지는 아침에 읽어보고 부치라는 교훈이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에게 보일 시간이 없으면 일단 덮어두고 몇 시간이 지나 글 쓰던 무드가 깨진 다음에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이럴 경우 나는 목욕탕을 갔다 와서 새 기분으로 읽어본다. 글이란 자기 논리가 있기 때문에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서술되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읽어보면 독자의 생리에 따라 걸리는 부분이 드러난다. 어떤 구절은 빼는 것이 좋다든지 어떤 사항은 좀 더 설명을 보완하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반드시 나온다. 내 경우는 스파링파트너에게 미리 읽혀보고 조언을 듣는다. 이들로부터 낮은 평, 또는 나쁜 평을 들으면 일단 그 글을 잊어버리고 한참 지나서 새로 쓴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면 손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결론: 대중성과 전문성의 조화
대중적 글쓰기라고 해서 전문성이 약하면 안 된다. 전문성이 떨어지면 내용이 가벼워 글의 격이 낮아진다.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도 알아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성이다. 어려운 내용을 알기(p. 319) 쉽고 재미있게 쓰는 것이 대중적 글쓰기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진정한 프로는 쉽고, 짧고, 간단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내용은 내용대로 충실히 갖추어야 한다. 당송 8대가의 한 분인 당나라 한유 「양양 우적 상공께 올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마디 군더더기가 없고 축약했으되 한마디 놓친 게 없다(p.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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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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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잔잔한 감동을 주는 여자 경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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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속으로』를 쓴 저자로서 두 번째 책인 이것도 재미있게 읽었다. 장애 오빠 후에 태어나 설음 받은 이야기, 이모 이야기 등 매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삭혔기에 글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교보문고를 검색하니 『있었던 존재들』이란 책을 최근 출간했다. 다행히 내가 이용하는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곧 대출해 읽어봐야겠다. 참 원도는 필명이며 현재 여자 경찰이다.
한 마리의 가자미처럼 살았다. 바다 아래에 납작하게 엎드려 여기가 바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한쪽으로 쏠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그저 살아 지니까 살았다. 지겹게도 매일 떠지는 눈을 끔벅거리며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내내 한곳에서 살았지만 동네 맛집이 어디인지, 이쪽 골목 끝은 어느 갈림길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 무엇에도 관심두지 않은 채 납작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모두 개근으로 마무리하며 학교와 집만 오갔을 뿐 다른 길로 빠져본 적도 없다. 버스조차 맨날 타는 것만 탔다. 목적지로 가는 다양한 방법과 노선이 있었지만 아는 것만 탔다. 타본 적 없는 것, 해본 적 없는 일,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은 평생 타볼 일, 해볼 일, 먹어 볼 일 없이 살았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오빠는 뇌병변 1급 장애인이다. 1960년대 당시 머슴을 여럿 거느리고 자가용까지 몰던 멋쟁이 할아버지의 귀한 막내딸,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해 팔자에도 없는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만삭의 몸으로 노동에 시달리던 엄마는 결국 임신 7개월 만에 조산하게 되었고, 오빠(p. 7)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인큐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설상가상 병원 과실로 인큐베이터에 산소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오빠의 뇌 일부가 망가지면서 뇌병변 1급이라는 영구 장애를 얻고 말았다. 어쩌면 그때 우리 다섯 가족의 앞날이 송두리째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오빠 때문에 너를 낳았다." 그 말은 마치 '오빠의 간병을 시킬 목적으로 낳았다'처럼 들렸고, 또 그게 사실이었다. 실제로 엄마는 당시 오빠의 재활 치료를 위해 다니던 재활원에서 임신 계획을 세웠다. 재활원에서 만난 같은 처지의 엄마들 사이에 '장애를 가진 아이만 바라보고 살기엔 너무 힘들다, 동생을 하나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를 가진 아이 하나만 제대로 돌보기도 힘든데 무슨 동생이냐, 그리고 동생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면 어쩌냐'는 반대파와 '살아가는 데 또 다른 희망이 필요하다, 동생을 낳는 것밖에 답이 없다' 는 찬성파로 나뉘었고, 나의 엄마는 찬성파에 선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기계처럼 살았다. 오빠의 수발을 들라고 하면 들었고, 대소변을 치우라고 하(p. 8)면 치웠다. 어디 가서 장애인 누구의 동생이라 소개될 때도 아무 말 못 했다. 어느새 나의 이름은 지워졌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장애인 오빠의 동생' 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 설계된 목숨 같았다. 오빠와 다투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오빠 덕분에 태어난 주제에 왜 대드냐며 무조건 잘하라고 나만 다그쳤다. 그런 부모님에게 질릴 대로 질렸지만 반박할 생각도 못 한 채 존재감 없이 그림자처럼 살았다. 내성 발톱같이 안으로 아프게 파고드는 내향적인 성격은 중학교 때 당한 학교폭력 이후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당시의 학교폭력이 발생한 데에 그렇다 할 원인은 없었다. 설령 원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다. 그저 가족끼리 대형마트에 갔던 날 오빠의 휠체어를 밀다가 학교 친구와 마주쳤고,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돌아섰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장애인 동생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단지 그뿐이다. 재앙은 언제나 은밀하고 신속하게 다가온다(p. 9).
엄마의 언니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장윤정 콘서트에 간 적이 있 다. 공연이 생소한 이모는 한껏 점잖은 차림으로 왔는데, 걷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리고 계단을 잘 오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쌩쌩한(?) 엄마는 그런 이모 옆에 있으니 돌도 씹어 먹을 나이처럼 보였다. 이모가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지. 등이 언제 저만큼 굽은 거야.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릴 땐 누군가의 앞모습만 보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을 반복했다. 굳이 가려진 내면까지 보려 하지 않았고 뒷모습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뒷모습과 함께 그 사람이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까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사람의 앞모습만 봐왔던 어릴 때의 느낌과 그림자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금 마주하는 이미지가 가장 다른 사람은 나의 이모, 그러니까 엄마의 언니다.
엄마는 3남 2녀 중 막내이고, 셋째인 이모와는 일곱 살 차이다. 집안의 늦둥이라 그런지 엄마는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도 좀 명랑하달까, 어딘가 철없는 구석이 있다. 엄마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코미디언을 모집합니다'라는 짤막한 신문 광고를 보고는 혼자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다. 당시엔 교통편이 좋(p. 117)지 않아 서울까지 열 시간이 걸렸단다. 여자들이 학업을 이어가는 대신 일찍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고, 그 친구와 함께 신문 광고에 나온 코미디언 모집 사무실을 찾아 을지로를 하루 종일 헤맸다. 그러나 시골 사람인 엄마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친구도 사무실을 찾지 못해 결국 빈손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기인 것 같다고 엄마는 말했다. 을지로를 쥐 잡듯 뒤졌는데도 사무실을 찾을 수 없었던 걸 보면 유령 회사가 틀림없다고, 그걸로 어린애들을 꼬여내 나쁜 짓을 했을 거라는 게 엄마의 추측이다. 1년 뒤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MBC에서 PD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서울 방송국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열 시간을 꼬박 달려, 전과 달리 친구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시험장에 들어선 엄마를 마주한 방송국 관계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오라 했단다. 엄마는 더 이상 방송국과 인연을 쌓지 못한 채 그 길로 서울에 서 1년간 자취를 하며 방황했다. 결국 희대의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금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엄마한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신은 하고 싶(p. 118)은 대로 살았으면서 딸들의 꿈은 한사코 반대한 이유가 무엇이나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차마 입을 열고 나불대진 못했다.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렇게 발랄한 엄마와 달리 이모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희생으로 점철되었다. 팍팍한 하루하루는 이모의 성격을 방금 자른 나무의 결보다 거칠고 퉁명스럽게 바꿔놓았고, 길고 다정한 문장으로 말하는 대신 고함에 가까운 몇 개의 단어로 의사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어릴 땐 이런 이모가 너무 무서웠다. 왜 이모는 항상 화만 내다 돌아갈까. 왜 우리 집을 이렇게나 무시할까. 왜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싸우는 걸까. 초등학생 때 이모 집에 놀러 갔다가 딸과 싸우면서 전화기를 집어던지는 모습을 본 뒤로 이모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제는 보인다. 이모의 뒷모습이. 천하를 호령하던 독불장군의 허리가 구부정해진 것이. 팔자로 벌어진 다리의 각도가. 어둡게 변한 얼굴색이. 마치 전에 없던 도수를 입힌 안경을 쓴 것처럼, 그저 나의 이모가 아니라 이모라는 한 명의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p. 119).
이모에 대한 엄마의 최초 기억은 다섯 살 때다. 당시 엄마는 껌딱지처럼 이모에게 붙어 다녔는데, 그네를 타던 이모를 발견하고 달려가다가 그만 그네를 매단 쇠줄과 정면충돌하면서 머리가 깨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이모는 외할머니에게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며 혼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 집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동생은 언니에게 억울한 일 하나쯤은 만들어주는 오랜 전통이 있는 것 같다. 이모는 다섯 남매 중 셋째였으나 동시에 장녀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엄마는 늘 말한다. 이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구 제일모직 직포과에 취직해 시집가는 스물세 살까지 회사 기숙사에 기거하며 돈을 벌었다. 명절이 되면 양손 가득 가족에게 나눠 줄 선물을 이고 지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명랑한 엄마는 이모에게 인사도 하기 전에 선물 꾸러미부터 풀어보는 게 일이었다. 이모는 그렇게 번 돈으로 두 오빠의 대학교 학비를 대주고 부모님에게 논과 밭을 사줬으며 고향집 대문을 철문으로 바꿔줬다. 그 시절 시골집 대문은 거의 싸리문이었는데, 이모 덕에 엄마 집 대문만은 삐까번쩍한 철문이었다. 이모 자신에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친구들은 다 초등(p. 120)학교만 졸업하거나 그마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른 집에 식모로 팔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자기는 중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가족에게 늘 감사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런 이모의 속도 모른 채 하루가 멀다하고 이모의 기숙사로 용돈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소풍이라고, 생리를 시작했다고, 사고 싶은 게 생겼다고···. 편지를 받는 족족 용돈을 부쳐주던 이모가 어느 날은 이제 편지 좀 그만 보내라 타이르자 엄마는 발신인을 적지 않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보낸 사람이 자기인 줄 모르면 편지를 뜯어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얄팍한 속임수였다. 그런 동생이 얼마나 철없게 느껴졌을지, 이모가 엄마한테 툭하면 화를 내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토록 가족을 위해 희생한 이모는 스물세 살에 시집을 간 뒤로 이모부와 함께 문 만드는 공장을 차렸고, 바닥부터 시작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정말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은 또 고스란히 가족에게 흘러갔다. 오빠들에게 땅을 사주고, 오빠들의 자식에게 돈을 쥐여주고, 우리 엄마에게도 숱한 도움을 베풀었다. 아픈 자식이 있는 엄마가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기댈 곳은 이모뿐이었다. 병원비로(p. 121)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 사라지는 동안 이모는 어쩌겠냐, 한마디하고 돈을 보내다. 20년이 넘도록 이어진 형제들의 구조 요청을 이모는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희생만 한 탓일까. 이모는 사십대 초반에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억척스럽기가 들판에 피어난 쐐기풀보다 더했던 이모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다. 자식 셋이 나란히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이모는 의사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를 찾아와 암보험 진단금 전액을 건넸다. 내가 아파보니 아픈 자식을 키우는 네 마음을 이제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너무 늦어 미안하다면서. 엄마는 그날 아주 펑펑 울었다. 이모도 같이 울었다. 엄마는 병상에 누운 이모 대신 집안일을 하러 당시 네 살이던 나를 데리고 이모 집에 갔다. 내가 너무 어려서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모는 나와 함께 세제를 사러 마트로 향했는데, 사달은 여기서 벌어졌다. 갑자기 내가 사라진 것이다. 엄마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의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 같(p. 122)았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네 살짜리를 찾기 위해 온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동원되었으며, 회사에 있던 아빠는 급히 조퇴해서 자전거로 동네 곳곳을 누볐다고 한다. 혹시라도 어린 내가 골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을지 모르니까 자동차로 수색할 수는 없었단다. 그 와중에도 이모는 사업가답게 현실적인 계산을 도출했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어렵게 낳은 늦둥이가 사라졌으니, 동생에게 돈을 얼마나 줘야 배상이 될까 고민하는 동시에 차라리 자기가 죽기를 바랐다고 이모는 고백했다. 그냥 암에 걸 려 죽을 걸, 왜 굳이 살아서 동생의 딸까지 잡아먹고 앉았냐며 스스로를 책망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유괴라는 둥 사고를 당해서 벌써 병원에 실려 갔다는 둥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나를 찾아다녔다. 내가 사라진 지 세 시 간쯤 지났을 무렵,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발 딸 좀 데려가이소!" 이모와 함께 갔던 마트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어느 파출소였다. 아빠가 급히 뛰어가 보니 입가에 짜장면 양념 범벅을 한 내가 집 구석에서 전화 안 받고 뭐했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네 살짜리 애가 저런 단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었을 리는 없고, 엄마의 과장이 분명하다). 누가 파출소(p. 123)로 데려간 건지, 스스로 갔는지는 여태껏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지금은 사라진 그 파출소는 자동차로도 꽤 오래 가야 할 만큼 멀었는데, 꼬마의 발걸음으로 어떻게 도달했는지도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다. 어쨌거나 파출소에 간 내가 얼마나 귀찮게 했는지(입을 막을 속셈으로 짜장면을 시켜준 듯하다), 경찰관은 우리 아빠를 보자마자 제발 애 좀 데려가라고 외쳤단다. 집 전화번호 하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해야 할까. 그렇게 미아 소동은 막을 내렸고, 이모는 가뜩이나 좋지 않은 몸으로 너무 진을 뺀 나머지 꼬박 일주일을 앓아누워야만 했다. 좌충우돌하는 시간들이 지나고, 외할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의 기도가 힘을 발휘했는지 이모는 기적적으로 암을 이겨냈다. 하지만 거듭되는 항암 치료로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조금만 무리해도 몇 날 며칠의 요양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고, 10년 뒤엔 갑상선암이 재발하면서 사업을 정리한 뒤 간간히 고향 집을 오가며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이모가 누군가. 비록 몸은 쇠약해졌으나 집안의 대들보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수행 중이다. 이모가 엄(p. 124)마에게 보이는 지극정성은 "내가 너한테 잘한 만큼 하나뿐인 여동생을 잘 챙겨주라"던 외할머니의 유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철마다 콩, 두부, 떡, 자두, 고춧가루, 제철 반찬, 손수 담근 김치를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는 건 그저 이모의 일생인 거다. 그 시대 여자, 장녀의 일생에는 서글픈 구석이 많다. 같은 시절을 지나왔어도 언니와 오빠의 태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왜 여자들은, 언니들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걸까. 또 행여나 희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뭔가. 기둥도 땅이 단단해야 똑바로 세워지는 법인데, 제대로 딛고 일어설 흙담조차 없던 이들이 기울어진다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성격이 급한 이모는 예고도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와 대문 밖에서 엄마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초인종 따윈 누르지 않는다. 벼락같은 호령에 놀란 엄마가 맨발로 뛰쳐나가기도 전에 이모는 갖가지 음식을 때문 앞에 두고 사라진다. 그렇게 건네받은 음식을 반찬 통에 옮겨 담으며 "아이고, 딱 엄마가 살아 돌아온 것 같네"라고 중일거리는 엄마의 눈가에는 새벽안개 같은 눈물이 맺힌다. 얼마 전 이모가 동네 사람들과 나들이를 간다는(p. 125)말에 엄마는 수줍게 용돈을 건넸다. 가는 길 휴게소에서 음료수나 사 먹으라는, 많지도 않은 금액이었는데 이모는 봉투를 받고는 조용히 울었다고 했다. 늘 용돈을 달라고 손편지를 쓰던 철부지 동생, 자신의 신혼집에서 4년이나 하숙 생활을 하던 눈치 없는 동생, 아픈 아들을 키울 땐 꼭 죽는 줄만 알았는데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고 버텨 이제야 숨 돌릴 틈이 생긴 동생이 수십 년이 흐른 뒤 건넨 용돈은 이모, 아니 언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울지 않을 방도가 없었으리라. 엄마에겐 이모가 엄마이자 아빠였고, 언니이자 오빠였으며, 가족이자 영웅이었다. 세상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이모가 없다면 세상의 전부를 얻은들 그다지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없어도 못 사는 건 아니 겠지만, 그렇다고 잘 살지도 못했을 테다. 요즘의 엄마는 이모가 자식이나 남편보다 더 좋다고 한다. 디서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남편과 자식 험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살아가는 소소한 기쁨을 나누는 게 너무 좋단다. 마냥 무섭기만 하던, 한 마리의 야생 호랑이 같던 이모가 이제는 호호할머니로 보인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부는 이제 은퇴다. 대신(p. 126)함께 늙어가는 엄마를 호령하며 하하호호 즐겁게,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지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p.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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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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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남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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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래서 타인의 삶이 큰 교훈을 준다. 나 보다 어려운 삶을 살았던 사람을 보면 ‘안도감’을 느끼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습을 보면 ‘경각심’을 갖는다. 가볍게 읽을 만하다.
서진규
1976년 미 육군에 입대하여 20년 동안의 군 생활 끝에 소령으로 전역 제대했다. 그 후 43세의 나이로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 후 석사학위를, 2006년에는 국제외교사 박사학 위를 취득했다. 현재 희망연구소 소장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특강은 물론 미국 라디오 방송의 MC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영문 책 출판과 영화 제작의 꿈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971년 단돈 100달러를 들고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 나는 스물세 살 난 처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여, 앞날이 캄캄했다. 가발 공장을 거쳐 골프장, 식당에서 일했지만 나에게 미래는 없었다. 미국에서 식모살이할 사람을 구한다는 신문광고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낮에는 한국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밤에는 대학을 다녔다. 단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힘들지 않았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눈에 반한 한국 남자와의 결혼은 나를 지옥 속으로 몰아넣었다. 남편의 폭력보다도 그 폭력을 견디는 내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p. 37)다. 나는 나를 격리시키기로 했다. 1976년 11월, 나는 여덟 달 된 딸아이를 한국에 계시던 내 부모님께 맡기고 미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나는 오직 나 자신과 싸우며 내 꿈에 도전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벽을 내가 열고 나가야 하는 문으로 만들었다. 여군 사병으로 입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대위 시절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중령 진급이 보장된 상황에서 나는 전역을 결심했다. 그리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을 때마다 늘 세 가지 리스트를 작성한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p. 39)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를 믿고 내 꿈을 믿으며 죽을 각오를 하고 도전했다. 그 결과 예순이 넘은 지금, 나는 감히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p. 40).
임웅균
연세대학교 성악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태리의 오시모 아카데미 오페라과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시원하고 풍성한 목소리로 1,200여 회의 기록적인 공연을 한 국민 성악가이다. <방송 대상 성악가상>, 〈미국 대통령상 금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학교폭력대책국민회의 공동대표와 국립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학 4학년, 사업에 실패한 우리 가정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학비 마련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차마 내리기 어려운 결정을 하고야 말았다. 충무로의 한 음식점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학비와 생활비, 어머니의 입원비까지 감당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무조건 주린 배를 채우려고 펌프 물을 마셔 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펌프 물의 수질이 좋지 않아서인지 나는 유사 장티푸스에 걸려 치명적인 열병을 앓으며 병원에 입원했다. 채 병이 낫지도 않았지만 하루하루 늘어나는 입원비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 안에 있던 백과사전을 팔아 입원비를 충당하고 퇴원해 버렸다(p. 79) 하지만 다시 재발한 고열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나는 원무과 직원만 보면 화장실로 도망 다니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입원비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내 열병이 도저히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39도가 넘는 고통스런 열기를 느끼며 마음으로 불어나는 입원비 걱정에 시달리던 청년 시절의 나...그때 나는 그동안 도망만 다니던 한 존재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느꼈다. 그동안 그 존재는 나를 계속 주시하며 내가 최대로 낮 아진 모습으로 무릎 꿇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단순한 한마디 말로 중얼거렸다(p. 81). "하나님,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겠나이다.:" 다음 날 나의 체온은 정확히 36.5도로 돌아왔다. 그랬다. 그 존재는 이후 8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았던 궁핍한 이태리 유학 시절에도 함께했었고 만족하지 않았던 내 성악 발성에 '벨칸토' 창법이라는 선물을 주었던 바로 그였다(p. 82).
홍승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1998년 〈한겨레리빙〉에 일일만화 〈정보통 사람들>을 그리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부터 한겨레 신문에 〈비빔툰〉을 연재하고 있으며, 특유의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와 따뜻한 그림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300원짜리 연습장과 500원짜리 샤프, 그리고 지우개와 자를 사서는 방 안 구석에 엎드려 만화를 그렸다. '손오벌'이라는 제목으로 손오공 이야기에 꿀벌 캐릭터를 대입시켜 그린 거였다. 무척 고심해서 만든 난 다음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친구들에게 만화를 보여 주었는데 꽤 나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저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친구가(이름은 기억하지만 신변의 안전을 위해 말 않겠음) 고급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자기가 그린 만화를 보여 주는 게 아닌가. 고급스런 종이에 검은 펜으로 깔끔하게 그린 탁월한 그림...어떻게 저렇게 잘 그릴 수 있을까? 적어도 반에(p. 107)서만큼은 만화를 제일 잘 그린다고 자부하던 나였는데... 그 순간 나는 2인자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 친구가 마징가제트와 그랜다이저 화보집을 꺼내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 오셨다면서 말이다. 친구들은 모두 그의 주위로 몰려갔다. 말할 수 없는 열등감.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데.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그 친구에 대한 열등감이 들자 지금 당장이라도 만화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날 하굣길에 펜과 잉크, 스케치북을 사서 그 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만화의 재작업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기에 그 사람을 목표로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유치하지만 그때 그 친구가 아니었더라면(p. 109) 나는 지금 만화가가 안 됐을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든 세상에 최고는 없다. 그리고 자기가 최고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더 재능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발전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 친구는 어디에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 만화가로 살아가는 나는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p. 110).
남궁정부
지하철 사고로 오른팔을 잃고 난 뒤, 장애인을 위한 정형제화를 만들어 온 구두 장인이다. 2000년 노동부의 신지식인에 선정됐으며 장애인 복지 향상을 위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4월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그는 현재 세창정형제화연구소의 소장으로 근무하며 희망 구두 학교를 설립해 직업을 얻기 힘든 장애인들이 구두 기술로 자립할 수 있는 날을 꿈꾸 고 있다.
이웃 어른의 소개로 수제화 가게에 들어가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내 구두 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을 구두 밥으로 먹고살던 내가 사고로 오른팔을 잃게 되었다. 동료들과 소주로 시름을 달랜 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다가 그만 선로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눈앞이 깜깜했다. 처음에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입원 3일째 되던 날,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큰 명제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여 “나는 오른팔만 빼놓고는 다 있어!”라며 용기를 냈다. 며칠 후 의수를 맞추러 갔던 의료보조기상 주인이 내게 장애인용 구두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p. 139) 이거다 싶었다. 그러잖아도 수제화가 점차 설 곳을 잃어 가고 있는 데 장애인 신발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해서 수제화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 손으로 구두를 만드는 것은 예상보다 혹독했다. 칼질을 잘못해서 허벅지를 찌르기도 했고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온몸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나를 무시하는 주변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나를 비웃기 전에는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내가(p. 142) 만들어 준 신발을 신고 40년 동안 앉아만 있다가 처음으로 걷게 되었다는 사람, 맞는 신발이 없어 붕대를 감고 다니다가 처음으로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게 되었다는 사람을 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기쁨이 생겼다. 장애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결점을 감추려고 든다. 우리 가게에 구두를 맞추러 오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많이 망설이지만 나의 오른 팔을 보고 경계심을 푸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오른팔이 고맙다. 이제 나는 그날의 사고를 행운이라고 부른다. 그 사고가 없(p. 143)었다면 나는 그저 '예쁜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희망’을 만들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p. 144)
이만재
시나리오 작가와 방송 작가를 거쳐 70년대 초 광고계에 투신, 서울카피라이터즈 클립(SCC) 회장을 역임하는 등 카피라이터의 새로운 직업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광고대상 심사위원, 공익광고 심의위원, 조선, 경향, 국민, 한겨레신문 광고대상 심사위원 등을 지냈 으며 현재 (주)쿠스한트 고문으로 있다.
80년대 초의 어느 아침,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되는 국장(國葬) 행사가 TV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국가 원수와 함께 동남아를 순방하다가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숨져 간 각료들의 유족들이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장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참이었다. 현장을 중계하던 기자가 유족 중의 한 소녀에게 마이크를 대고 현재의 심경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얀 소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조용히 고개를 숙인 조그만 소녀였다. 고개 숙인 소녀의 입이 조그맣게 열렸다.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던 훌륭한 아빠를... 16년 동안이나 제게 보내주신 천주님께 감사드려요."(p. 149). 감사?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열여섯이면 이제 기껏해야 고등학교 1학년쯤 되었으리라. 아빠를 잃고 억장이 무너지는 마당에 소녀의 조그만 입에서 나온 단어가 ‘감사’였던 것이다. 게다가 소녀는 '아빠를 16년 동안이나 제게 보내 주신'이라고 했다. ‘16년 동안밖에’가 아니라 '16년 동안이나'였던 것이다. ‘...밖에 와 ..이나’의 차이를 생각했다. 까닭 없이 내 나이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감사'라는 단어와 ‘16년 동안이나’라는 어휘 그리고 중계를 통해 우연히 보았던 이름 모를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 여러 해 동안이나 떠나질 않고 맴돌았다. 마음속의 엄청난 슬픔과 원망을 그것의 정반대 차원인 감사로 승화시킨 그 불가사의한 힘은 소녀의 말로 미루건대 필시 종교의 힘(p. 151)이었을 것이다. 종교, 종교.... 은연중에 그것은 소녀가 내게 안겨 준 숙명적인 숙제가 되었다.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읽은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나는 기독교에 귀의했다(p. 152).
최상식
1971년 KBS TV PD로 입사하여 드라마 제작 국장을 역임했다. 〈전설의 고향〉, 〈딸부자 집〉, 〈젊은이의 양지〉, 〈첫사랑〉, 〈용의 눈물〉 등 인간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는 드라마를 만들었 다. 한국방송대상 특별상 및 연출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는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4년, 나는 한국방송공사 드라마를 총괄하는 제작 주간이 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딸부자 집〉, 〈젊은이의 양지>, 〈첫사랑〉, 〈용의 눈물〉 등은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드라마 제작 국장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나의 신앙은 오직 드라마였고 내 마음속은 드라마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던 내 인생의 항로에 빨간불이 켜 진 것은 1997년 10월이었다. 사내 정기검진에서 뜻밖에도 간에 종양이 발견되었고 정밀진단 결과 종양이 직경 7센티미터나 되는 악성 간암으로 판명되었다(p. 157). 병원 문을 나서자 거리에는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새삼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 단풍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 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병원에서는 내 남은 삶이 1년 정도라고 했고 나중엔 2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도 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웠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바빠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미완성뿐.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아내가 돌아누운 채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아내의 눈물을 닦아 주며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밀려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의사는 기적적일 정도라고 했다. 내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다행히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삶이 얼(p. 159)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고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해 보고서야 인생에 있어서 내일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내일보다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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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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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영화감독의 좌절과 환희를 통한 삶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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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영화감독이다. 영화를 그렇게 즐겨보지 않기에 영화에 대해, 감독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 이 책을 통해 영화감독이 얼마나 어려운 직업인가를 알게 됐다. 그럼에도 영화감독을 운명, 숙명으로 알고 묵묵히 그 길을 가는 감독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절판됐다. 관심 있는 분들은 대출해서라도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형 감독
내가 살던 성산동 자취방은 버스 정류장에서 20여분 걸리는 고 갯길에 있었다. 촬영장에서 돌아오는 그 길이 늘 힘겨웠다. 그렇게 나(p. 23)에 대한 희미한 좌절감, 부모님의 기대와 걱정을 비롯한 이런저런 시선들, 먼저 치고 나가는 동료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 등으로 점점 자신 감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동 양천고등학교에서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를 촬영하던 때였다. 김성홍 감독의 데뷔작으로 무려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충무로의 베테랑 중 베테랑이던 서정민 촬영감독이 참여한 작품이었다. 특히 서정민 감독님은 충무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으로, 고대 럭비선수 출신의 건장한 체구에 사 자머리를 한 외형부터 카리스마가 넘쳤다. 현장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그를 비롯해 이제는 세상에 없는 김진도 조명감독님과 스탭들이 모여 가끔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김성홍 감독님은 술을 잘 못 하는 분이라 조감독인 내가 끝까지 남아 대작해야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두 분이 술을 드시고 계셨는데, 갑자기 서정민 감독님이 내게 술잔을 딱 건네더니 "김 감독도 한잔해" 그러셨다. 갑자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히 술만 받아 마셨다. 그날 자취방 고갯길을 올라가며 엉엉 울었다. 나를 ‘감독’이라고 불러준 것 때문에. '내가 감독 이 될 수 있을까?'라며 고민했던 수많은 간절한 순간들이 오버랩되면서 눈물콧물 다 흘리며 울었다. 쉽게 말해 이 영화판이란 게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단계를 밟아 나가는 도제제도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운데 무게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 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또 지금이야 촬영감독, 조명감독이라 부르지만 그때만 해도 촬영현장에서 '감독'이라 불리는 사람은 오직 영화감독 단 한 명밖에(p. 24)없던 시절이었다. 그 외에는 촬영기사, 조명기사라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화계의 산역사인 분이 나를 감독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내겐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물론 술김에 생각 없이 나온 말일 수 도 있지만(웃음) 거의 아들뻘이나 다름없는 나를 감독이라고 불렀다는 것 자체가 현장에서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말 한마디로 내가 진짜 감독이 된다거나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간의 말못할 내 고생과 노력에 대한 합격통지서 같은 말 이었다. 뭐랄까,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 나기도 한다(p. 25).
영화를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 혹은 영화과 학생들이 내게 제일 궁금해하는 것은 '영화감독으로 밥 먹고 살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네가 하는 만큼은 살 거다'라고 답한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잘 살고 있잖나.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감독들이 증거다. 아이 키우고 학교 보내고 잘살고 있다.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미래가(p. 31) 불안정한 것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어디든 똑같다. 물론 영화판의 일이라는 게 다른 직업보다 더 불안해 보이는 것은 맞다. 비교적 예측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텐데 오히려 나는 이쪽 일이 더 스릴 있고 좋다.(웃음) 1년 뒤, 2년 뒤의 내 모습을 다 예측하고 산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요즘은 영화과 학생들 중에서도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다더라. 그들의 선택에 대해 나는 왈가왈부할 입장이 못 된다. 각개인의 사정을 다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러한 선택을 폄하할 생각도 전혀 없다. 재능과 열정이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한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떤 시도라도 해 봐야 그걸 알 수 있다는 거다. 말 그대로 ‘영화 일’이라는 게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는 그 세계를 조금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옆에 동료를 두기를 권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남들보다 더 힘 들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더 불안했고 막막한 터널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편히 나눌 수 있는 동료와 자신을 발전시켜줄 수 있는 경쟁자들을 옆에 두어야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 서 상처를 받고 극복해내는 힘을 기를 수 있다.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거다. 언제나 주변에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된다. 데뷔하기까지 10년은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다른 계획은 전혀 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내가 항복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시나리오가 엎어지면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는 그걸 들(p. 32)춰보기 힘들다. 그런 경험이 많거나 영화판에 네트워크가 풍부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물어보고 하소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경험도 네트워크도 없었다. 그래서 버려진 건 옆으로 밀어놓고, 다른 걸로 심기일전하는 법을 택했다. 어쨌든 그때의 나로서는 그게 가장 쉽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이었다. 힘들 땐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를 즐겨 부르며 열심히 자기최면을 걸었다.(웃음) 어떤 일이든 10년은 매달려봐야 그 일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재능이 있는지, 이 일을 좋아하긴 하는지 그런 감은 적어도 10년은 해봐야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퇴로를 끊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는 절대로 못한다. 카페 차려서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한 다음 영화에 매진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아니, 불가능하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살벌하고(웃음)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배수의 진을 칠 필요가 있다. 자꾸 겁먹고 퇴로를 확보해놓으려고 기웃거리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이든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정면승부다(p. 33).
김대승 감독
혼나는 날이 늘고 조감독으로서 책임질 것들도 많아지니, 순간 '더 배우고 싶다는 내 욕심 때문에 계속 감독님 옆에 있으면 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굳게 마음먹고 연출부, 촬영부 퍼스트를 비롯해 주변 동료들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다들 "아니, 형 왜 그래요"라며 말렸지만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퇴근하던 감독님이 웬일로 먼저 "오늘 수고 많았어" 그러시는 거다. 너무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을 감독님이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 나도 모르게 화장실에 가서 펑펑 울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웃음) 〈노는계집 창〉이 개인적으로 사고 많이 치며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영화라면 조감독으로 두 번째 참여한 작품인 〈춘향뎐〉은 이를 갈면서 시작한 영화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일했다. 가령 그 유명한 어사출두 장면의 경우 엑스트라만 3백 명이고 악기 연주자와 주요 배우들까지 합하면 거의 4백 명에 달한다. 사극에서 4백 명이라는 숫자는, 의상에다 헤어스타일까지 완료한다고 가정했을 때 동 트기 전부터 준비해도 점심 먹고 촬영 들어가면 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싫었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출부와 치밀하게 준비하고 시뮬(p. 50)레이션까지 다 끝낸 다음 오전 10시에 촬영을 시작했다. 그때 감독님으로부터 "야, 너가 이제 좀 빨라졌구나." 하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면 그 말씀에 또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했다(p. 51).
류승완 감독
연출부 막내여서 닥치는 대로 그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게 영화 현장은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것 같았다. 그래도 누(p. 80)군가 내게 거저 데뷔 기회를 주는 건 아니었다. 내 기회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영화제에서 성과를 거두고, 그렇게 상금이라도 생기면 또 다음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되는 단편 〈패싸움〉(1998)을 만들었는데 1년 동안 모든 영화제에서 떨어졌다. 1년이 지나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긴 했지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도 떨어지면서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아예 영화 일을 그만두려고 지하철공사 시험과 중장비기사 자격증, 속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려고 마음먹었다. 당시 비슷한 처지의 봉준호를 충무로의 한 호프집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는 제과제빵 기술도 좋다며 의기투합하기도 했다.(웃음) 그때 충무로 호프집 '베어가든'에서 나눴던 박찬욱 감독님의 얘기가 큰 힘이 됐다. 사실 그도 〈3인조〉를 끝내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 를 하기 전이니까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때였다. 내가 영화를 그만두려 한다니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하자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기억이 바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하는 힘이 됐다. 긴 기다림 끝에 〈패싸움>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이 다음 단편을 시작하 는 원동력이 됐고, 그것이 쌓여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장편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p. 81).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꽤 다양한 직업들을 경험하면서 가장 나를 덜 지치게 했던 일이 영화였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나 영리함이 있었다기보다 매순간 가졌던 절박함이 나의 무기였다. 그래서 나는 동생 승범이나 박찬욱 감독님처럼 '아님 말고' 식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물론 그 역시 진짜 여유라기보다 자기 자신만 아는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뱉어 낼 여유조차 없다. 지금도 한 편, 한 편 만들 때마다 전쟁 같고 너무 많은 상처가 남으며 항상 불안하다. 내겐 너무 생명 같고 소중한 영화라 그 영화의 운명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우울증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서는 불면증까지 더해졌다.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 2007)과 〈마담 뺑덕〉(2014)을 만든 임필성 감독이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며 내게 붙여준 별명이 '안달복달지랄발광'이다.(웃음) 어쩌(p. 82)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건 내 작품 속 주인공 캐릭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나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도 같다. 살면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다양한 경험을 한 것과 별개로 엄청난 모험을 한 적은 없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내게 조언을 구하면 ‘모험을 하지 마라?’ 같은 난감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데(웃음) 그만큼 나는 여차하면 현재에 안주하려고 하는 나의 태생적인 안전지향의 기질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해야 한다. 설령 안전한 것만 골라서 시도하더라도 그냥 혼자 방구석에 앉아 고민만 하는 것보다는 몇 백 배 더 낫다. 나는 〈패싸움〉을 만들기 전까 지 모든 영화제,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떨어졌고 주변에서는 포기하라고 했다. 정말 비참했다.(웃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들이밀었다. 선택받지 못한 지난 작품을 자책할 시간이 있다면 새로운 작품을 고민하는 데 써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면서 겁먹지 않는 태도를 키워야 한다. 챔피언은 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p. 83).
민규동 감독
영화를 만드는 건 물론 좋아하는 일이지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렇진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또한 완전히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언제나 스스로를 '기적적으로 영화감독이 된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 경우를 좇거나 기대하는 건 무의미 하다. 지금도 쉽게 데뷔하여 흥행도 잘하는 신인감독들이 있다. 물론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가 좋은 사람도 많다. 어쩌면 나처럼 '행운' 혹은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실력과 재능을 갖춘 감독들도 분명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데뷔작 그 이후 두 번째, 세 번째라고 생각한다. 직장인들에게 첫 직장이 끝이 아니고, 감독에게 데뷔작이 끝이 아니듯 지금은 지속적으로 만족할 만한 생산성을 유지하는 감독의 삶이란 뭘까 고민 중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엄청난 데뷔작을 만들고 난 다음부터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 감 독들도 있지 않은가. 물론 데뷔작을 설렁설렁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웃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번 내 인생의 바꿀 수 없는 한 챕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p. 108).
박찬욱 감독
'진짜 이 길이 내 길인가' 하는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할 줄 아는 다른 게 없으니 '선택의 여지'니 그런 게 없었다(웃음) 오래전 〈깜동> 연출부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순간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다. 그렇게 오직 영화로 먹고살 기로 결심한 이상, 머나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자기가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 같은 착각이라도 하며 살아야 그(p. 125)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다고, 나와 친구들 또한 이미 자리잡고 성공한 사람들을 하고 험담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 젊은 친구들도 어디선가 내 영화를 본 다음 '어이구, 저것밖에 못 만들어?, 아니면 ‘송강호 데리고 몇 십 억 퍼부은 게 저따위야? 그 돈의 10분의 1만 나한테 줘도, 어우 씨발’ 그러면서 욕한다 해도 얼마든지 상관없다. (웃음) 돌이켜보면 그런 게 다 힘이 됐던 것 같다. 애초에 화가가 아니라 미술비평을 하려고 한 것도 동생인 박찬경 감독에 비해 미술가로서 소양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동생은 너무 그림을 잘 그리는데 나는 좀...(웃음) 능력이 안 되어 창작자가 될 수 없다면 창작자 가까이에서, 적어도 좋은 감식안을 가지고 정당하게 평가하고 소개하는 사람이라도 되고 싶다는,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너른 세계의 언저리에서라도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발견하여 창작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더라. 마음속으로는 역시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좌절할 때마다 남 욕하고 나 잘났다고 위로하면서, 그런 분리할 수 없는 한 가지 태도로 버텨온 것 아닐까. 실제로 그렇게 확신했다기보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 틸 수 없었다. 영화를 문학이나 미술과 비교하자면 철저히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그래서 사실 내 적성과는 맞지 않다. 그냥 안 맞는 게 아니라 나처럼 안 맞기도 힘들다고까지 생각했다.(웃음) 일단 영화감독이란 사람은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논쟁에서도 이길 줄 알아야 하며, 어쩔 땐 완력으로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난 정말 내성적인(p. 126) 사람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극복했냐고 묻는다면, 그게 참 이상하게도 성격이 일에 맞게 좀 변한 것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답은 찾게 돼 있다. 먼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감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런 단계를 지나 집단창작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어려움이자 동시 에 감독만이 가지는 즐거움이다. 반면 감독들 중에는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많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이 직업과 잘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적당히 둔한 편이라 '저 새끼가 나를 어떻게 보지?' 그런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웃음) 작품을 대하는 태도야 치밀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둔하다. 많은 감독들이 일사분란하고 능숙하게 현장을 지휘하면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모습을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난 별로 그런 강박이 없다. 붙임성과 친화력이 별로 없으면서도 지금까지 감독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한국영화 현장이 점점 나 같은 기질의 사람도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모해간 이유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직업과 맞지 않다고 걱정하기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직업과 맞다고 여기는 편이 훨씬 더 중요하다(p. 127).
방은진 감독
처음에는 연기를 더 잘하고 싶어서 감독을 꿈꿨고, 세 번째 장편을(p. 148) 만든 지금도 배우에서 감독으로 완전히 전업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제 연출이 배우보다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 재미는 두 가지다. 첫째, 애초에 의도했던 것을 배우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표현해냈을 때 느끼는 희열이 배우일 때보다 감독일 때 훨씬 더 크다. 둘째,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변수로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이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렵사리 촬영을 시작한다 해도, 술 취한 아저씨가 촬영현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다 한 컷도 찍지 못한 채 동이 트기 시작할 때의 기분이란.(웃음) 영화 찍어보지 않은 사람은 경험하지 못 할 우리들만의 특권이다(p. 149).
변영주 감독
그즈음 다큐멘터리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푸른영상을 만들기도 전, 멋진 다큐멘터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은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1991년 7월 4일, 산리츠카 7부작(1968~1977년)을 만든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와 처음 만난 날이다. 아오키 겐스케라는 분의 권유로 도쿄에 있는 그분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작자와 촬영감독도 동석했다. 당시 나는 중앙대 대학원생이었는데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 일본에 가면 좋을 거라고 해서 무작정 갔던 거였다. "돈도 없이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나요?"라고 문자 그는 "너도 몸이 튼튼하니까 피 팔면 돈 생기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그렇게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또 내가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기쁨과 미학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떻게 영화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저 '사랑합니다'라고 열 번 외치 더니 어느 순간 작품이 나왔다고 했다. 당시 나는 농담 같은,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담고 있던 그의 말을 듣고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다큐멘터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p. 164) 그전엔 충무로에서 스크립터를 시작으로 연출부 생활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촬영하며 다큐멘터리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첫 작품을 끝내고 보니 더 잘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 ‘다큐멘터리가 중요해!’라는 지향점이 중요했다기보다 ‘이걸 더 잘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중요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오가와 신스케와의 만남을 경유하여 10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니까. 그 10년은 단순히 세상을 공부하는 수준을 넘어 나란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놓은 시간이었다. 물론 감독으로서의 태도도 그렇다. 어지간해서는 잘 놀라지 않는 것?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워낙 험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보니, 이제 극영화 현장에서 누군가 '큰일났어요!'라고 소리쳐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웃음) 언제나 얘기하는 나의 지론은 이렇다. ‘하루하루 사는 게 원래 큰일이다!’ 더구 나 한국사회에서는 말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뭐가 잘 안 된다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반대로 별것 아닌 일에 기뻐하지 않는 걸 이미 그때부터 배운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감독으로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다(p. 165).
내가 이토록 미치게 좋아하는 영화를 내가 만들 수 있다면, 이들처럼 훌륭하진 않아도 그저 흉내내는 작품만 만들어도 부끄럽지 않고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영화를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때 파리에 가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일찌감치 깨달았다.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당시 신혜은과 파리에서 말도 안 되는 저렴한 숙소에 머무르며(웃음) 그 미래의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후진 숙소였냐면 한 층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샤워실과 화장실이 딱 하나씩 있었다. 정말 돈이 없는 날은 '바게트를 살까, 영화를 한 편 더 볼까' 고민하면서 한 달 반을 지냈다. 나중에 김소영 언니가 파리에 들러서 우리를 비싼 중국집에 데려갔다. 파리에서 처음으로 푸짐하게 먹었던 그 '청요리'의 맛이 지금도 기억난다.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또 다시 다짐했다. 내가 앞으로 영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해야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p. 167).
봉준호 감독
결국 미래에 대한 고민은 싸이더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살인의 추억〉(2003)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싹 털어냈다. ‘난 싸이더스에서 데뷔한 감독이다, 다 잊어버리자!’ 그런 마음으로 마치 설국열차가 직진하듯 두 번, 세 번 계속 돌진하자고 결심했다. 물론 내가 속 시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느 길이 맞는지 고민할 때, 〈플란다스의 개>의 실패를 겪고도 계속 마수(?)를 뻗쳐온 차승재 대표의 믿음이 컸다. 비슷한 시기에 김성수 감독님이 나의 고민을 듣고 있다가 ‘유치한 고민’이라며 호되게 일갈한 적 있다. "야, 너 애도 있잖아. 영화는 찍을 수 있을 때 무조건 찍는 거야." 차승재 대표가 두 번째 영화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왜 바보같이 망설이냐고 했다. 또 승완이가 메인스트림 예산으로 〈피도 눈물도 없이〉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내가 너무 철없이 찔찔거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오직 작품에만 쏟자고 생각했다(p. 203).
나의 경우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폴란다스의 개> 첫 촬영까지 정확하게 4년 2개월 걸렸다. 물론 힘들 때는 대학 동창에게 쌀을 얻어 먹은 적도 있지만 그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고, 어쨌든 단편 〈지리 멸렬〉 덕분에 나름 수월하고 행복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착실 하게 준비해도 데뷔작을 만들기까지 10년 넘게 걸리는 사람도 무지 많으니까. 〈플란다스의 개〉 연출부 중에는 아직 15년 넘게 입봉 못 했지만 맷집 좋게 버티는 친구도 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살인의 추억〉 10주년 특별상영’을 할 때 배우와 스탭들이 거의 다 모였는 데, 여섯 명의 연출부들 중 이용주 감독만 데뷔한 상태였고 그로부터 1년 뒤 심성보 감독도 〈해무〉(2014)로 데뷔했다. 두 명은 영화계를 떠났고, 다른 두 명은 여전히 분투 중이다. 나 역시 힘들었던 그 분투의 시간을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다면, 사실 내게는 포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다른 감독들처럼 직장을 다니다 때려치우고 영화계로 뛰어든 것도 아니고,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이후 딴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오직 영화 하나뿐이었다. 영화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뒤 그냥 직진만 해왔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 다행히 영화아카데미에도 합격했다. 아마 그때 한 번에 바로 붙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지만(웃음) 분명 다시 도전했을 것 같다. 다른 일을 한다는 상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물론 영화 아카테미를 졸업한 뒤 장선우,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에 모두 낙방해 크게 흔들렸고, 평소 좋아하던 박종원 감독님 연출부로 들어가게 되어 '이제야 진짜 뭔가 풀리나보다' 생각했다가 이상한 옴니버스 영화(p. 204)를 하면서 더 좌절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온실에서 만들어진 나의 데뷔작과 달리 맨땅에 헤딩하듯 완성했는데도 탁월한 성과를 일구어 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또한 여러 솔깃한 제안들을 다 뿌리치면서까지 '연출부-각본-입봉' 이라는 우노필름의 데뷔 코스를 밟았던 것도, 딱히 진득한 '의리'였다기 보다 '남들 하는 것처럼 흘러온' 안전한 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눈팔지 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는 생각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청난 실패나 대단한 도전이 없는 나의 데뷔 이야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을 의심하지 말고 걸으라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좌절감이 수시로 엄습하겠지만, 이미 발을 내딛은 이상 그저 묵묵히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오직 그것만이 답이다(p. 205).
양익준 감독
그러려면 놀기 위한 돈이 필요해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받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며칠 못 채우면 24만 원이나 26만 원을 받기도 했고 방학 때는 하루 10시간 넘게 일했다. 호프집에서 일한 적 있는데 미성년자를 고용하면 안 되니까 주인이 나와 내 친구의 나이를 스물일곱 살로 올렸다. 그런데 재떨이 안 비웠다고 친구를 화장실에 데려가서 막 때리질 않나, 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우리에게 맥주잔을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인상이 험악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나는 안 때렸는데 친구는 엄청 맞았다.(웃음) 그래서 월급 받고 나오던 날 새벽, 벽돌로 그 집 간판이고 뭐고 다 깨버린 적도 있다. 그게 바로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었던 날의 기억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날 그 돈으로 중국집에서 일하는 친구와 배달원으로 일하는 그의 또 다른 친구까지 함께 숨을 마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p. 215)맹이였던 나는 막 돈 벌었다고 자랑했는데, 술에 취해 잠깐 자고 일어 나보니 그 새끼가 훔쳐갔더라. 그때가 설날이었고, 정말 서러웠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훔쳐갔어, 어떡해" 그러며 우니까, 우리 엄마가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괜찮으니까 들어와" 그러셨다. 아버지와 싸울 때도 늘 "쌍놈의 새끼야!" 그러시던 분인데(웃음) 그날의 그 따뜻했던 한마디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어른스러운' 느낌을 받았던 날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p. 216).
아무래도 〈똥파리〉가 내 개인의 삶과 너무 밀접한 영화였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컸던 것 같다. 지난 시간 동안 에너지원이 되기도 했고 뱉어내고 싶은 쓰레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여전히 소화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그사이 TV드라마건 영화건 연기를 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도 생기고 나 스스로의 변화도 생겼다. 지금은 진짜 좀 달라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영화가 내게 너무 중요해졌다는 사실이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영화가 내게 성경과도 같아졌다. 〈똥파리〉로 내 에너지를 너무 써버려서 다시 차오르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 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말 하고 싶은 영화만 하고 싶다. 그러려면 나를 백수로 만들어야 한다.(웃음) 〈바라만 본다〉나 〈똥파리〉를 쓸 때 1년이든 2년이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나리오만 썼다. 이것도 내 기질인데, 버릴 것 다 버리고 깔끔한 상태에서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 언제라도 한 이야기에 매달리게 된다면 5년이든 10년이든 연기를(p. 230)안 해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견디면 된다’ 혹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당장 눈앞의 저 봉우리를 오르지 못해 쓰러져 죽어가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미 그 산을 넘어간 선배가 '누구나 한번쯤 겪는 과정일세'라고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웃음)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고 싶은 걸 하라! 그리고 그것만 해도 된다. 그러니 전혀 걱정하지 마!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하고 싶은 게 더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한다. 거리낌 없이 그러다보면 결국 자기만의 길을 찾게 된다. 나는 이십대 초반까지 평생 해야 할 '지랄'을 다 해버렸다. 그랬더니 이제는 별로 지랄할 게 없다.(웃음) 하루도 조용할 날 없었던 집 얘기를 계속 했지만, 그럼에도 다행이었던 것은 식구들 중 누구도 내게 이래저래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들 자기 문제가 더 급하고 심각했으니까.(웃음) 나는 입시가 뭔지도 몰랐다. 물론 보기 싫은 걸 보고 산다는 것은 괴로웠지만 통제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p. 231)
이준익 감독
도무지 정리라고는 되지 않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무턱대고 영화감독이 되려 했는지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호기심의 영역 안에서 영화는 그리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가 특별히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지레 어렵게 생각하거나,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군대를 포병으로 다녀왔는데, 일찌감치 그 작업이 영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p. 256)적 있다. 수동으로 포신이 쭉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거대한 대포에 열 두 명이 달라붙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정확한 시작과 타이밍을 익 히기 위해 반복훈련을 통해 기술적으로 깔끔하게 숙련되어야 한다. 영화 현장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슛과 컷은 각각 장전과 발사, 카페라가 대포라면 타깃은 배우다. 다만 설계도가 다를 뿐 협업이라는 속성은 같다. 그런 관점에서 시나리오는 작가가 쓰고 카메라는 촬영감독이 전담하니까 감독이란 사람은 그저 '레디고'와 '스톱'만 외치는 편한 자리라고까지 생각한 거다. 생각해보라, 영화 현장에서 전문 기술이 없는 사람은 오직 영화감독 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기술도 없는 그를 아티스트라 부르며 우러러본다. 아마도 아티스트란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아무 것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그저 함께 놀고 싶었다. 지금도 딱히 감독이란 자의식이 별로 없다. 내게는 영화 현장이 아직도 한판의 마당극처럼 느껴진다. 다행인 것은 감독이 되면서 가졌던 그 호기심의 에너지가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점이다. 반복을 통한 매너리즘에 빠질지언정 끝없이 지금의 자리로부터 멀리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게 아티스트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머물거나 되돌아가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물론 가끔은 뜻대로 되지 않아 '픽사리'가 나기도 하지만 그 픽사리의 연속이 또한 인 생 아닌가 (웃음) 나 또한 소 뒷걸음질치다 〈왕의 남자〉라는 작품을 밟기도 했는데, 뭐 잘됐으니까 그런 게 전혀 겁나지 않는다. 매번 조심스럽게 안전한 선택을 하면 무슨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난 철저히 '재미형 인간'이다. 발을 헛딛고 쓰러지더라도 매순간이 재미있어야(p. 257)한다. 물론 데뷔작 〈키캅〉이 완전히 망했을 때 '멘붕'이 왔지. 오죽하면 은퇴까지 했겠나 (웃음) 내가 영화감독으로서 함량 미달이라는 자괴감이 극심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원인을 파악했다. 영화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최소한의 학습이 부족했다. 그래서 10년을 쉬었던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서 2차 은퇴선언까지 번복한 지금,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따라한다는 것에 대한 혐오가 있다. 지금껏 제작한 영화든 연출한 영화든 어떤 관습이나 장르적 속성에 휘둘린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고 자부한다. ‘킬링 타임’보다는 '세이빙 타임'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 은데, 지금도 그 세이빙 타임 영화에 관심이 많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언제나 불확실성을 좇아왔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다.(웃음) 이런 무계획적인 삶을 살아온 나를 영화계의 롤모델로 삼고자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나를 흉내내려 했다가는 인생 망친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력보다 운을 좇았다. 실력 있는 작가나 스탭들과 일하면 되지, 굳이 내가 거기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와 ‘확신’이라는 표현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감독이 되려는 꿈도 없었고 연출부 생활도 안 해 본 내게 위기 극복의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만 어떤 순간에도 낙담하지 말라는 얘기는 해주고 싶다. 나처럼 인생 자체가 정리가 안 되고 가방끈도 짧은 데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온 인간도 여기까지 왔다. 빚이 수십 억이었으니 왜 나라고 한강 다리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웃음) 간혹 주변 사람들은 이런 무계획적인 내게 불안하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잘 모르는 길로 들어가서 실패하(p. 258)는 경우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걸어가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내 지나온 인생도 그랬던 것 같다(p. 259).
정리 못 하는 내가 정리해보자면, 종점이 보이는 인생은 불행하다. 오래도록 그림을 그려왔지만 최종적으로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몰라야 그릴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만드는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야 신이 난다.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은 지겹다. 그건 도무 지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촬영현장에서 리허설이나 테스트도 잘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약속만 정해두고 느낌대로 간다. 그런 상태에서 촬영한 첫 번째 테이크가 주는 짜릿한 쾌감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무조건 지르고 본다. 아티스트는 바로 불 지르는 사람이다. 그걸 끄는 게 스탭이라는 테크니션들이다. 불이 어떻게 번질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작업이 가치 없는 것이라면 아예 불조차 붙지 않을 테니까. 주변의 테크니션들을 믿고 멋지게 불을 붙일 생각만 하면 된다. 그런 가운데 극단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는 그게 심해져서 〈공포택시〉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웃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황산벌〉도 〈왕의 남자〉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p. 260).
이해영 감독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동구(류덕환)와 왕년의 복서인 아버지(김윤석)의 관계에 은연중에 담아내려고 했지만, 나는 아버지로부터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시나리오 쓸 때도 “돈이나 벌어, 네가 무슨 글 쓰는 재능이 있냐”며 무시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게 절대적인(p. 281)목표는 아니었지만, 그런 무시가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편견과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더 강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방법은 내 재능을 믿는 것 말고는 없다. 당시 혼자 되새겼던 말이 '내 재능에 내가 열광하자'는 단 한 줄이었다. 자기 자신을 후지다고 생각하면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괜찮은 대사 한 줄을 쓰면 과도하게 열광했다.(웃음) 남들 눈에는 혼자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지만 내가 뭘 가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고, 그 상태로 밖에 나가서 그게 쌀이 될지 흙이 될지 기약도 없이 기나긴 시간을 버티려면 스스로 열광하고 소중히 여기는 태도야말로 중요하다.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한 기억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태도가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영화 촬영할 때까지 아버지의 극단적 무시는 계속됐는데, 촬영 중에는 바빠서 당연히 집에 들를 수 없었고 개봉 전 VIP 시사회에 가족과 친지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시사회에 참석 못 할 것 같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무리 싫은 아들이라도 어떻게 감독 데뷔하는 영화인데 시사회도 못 오냐"고 했더니 어이없게도 "아버지는 화장실을 자주 가기 때문에 영화 보러 못 갈 것 같다"는 답이 돌아 왔다. 이머니도 오죽 답답하셨을까만 서운한 마음에 크게 화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전국 아버지가 다른 집안 어른들과 함께 극장에 오시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언짢아서 아버지에게 따로 인사도 안 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직후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한 사람이 일어나 쩌렁쩌렁 박수를 치는 거다. 관객들 모두 누군가 싶어 쳐다보는데, 바로 아버지였다(p. 282). 이제 막 치매가 오기 시작한 아버지가 엔드크레덧을 역광으로 받으며 혼자 기립박수를 치셨다. 뇌가 파괴되기 시작한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으로 가장 열정적인 박수를 보내신 거다. 〈천하장사 마돈나〉가 손상되기 시작한 아버지 뇌의 어떤 부분을 자극해 기립박수를 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급격하게 몸이 나빠진 아버지는 몇 년 뒤 결국 세상을 뜨셨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는데, 치매가 시작된 아버지의 기립박수를 받고는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분이, 누군가에게 내 영화를 보여준다는 것이 궁극적인 희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박수를 누군가에게 또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런 마음으로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 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기사 제목이 “동구처럼 아버지를 한번 던져봤으면 했다”여서 무척 상처받았던 기억이 난다.(웃음)(p. 283).
더 이상 그런 류의 사치가 젊은 친구들을 영화의 세계로 유혹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은 안다. 1980년대가 굉장히 주눅들어 있던 시대였다면 내가 보낸 1990년대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누리면서 해방의 기운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궁핍한 세대였지만 새로이 무언가를 누린다는 기쁨이 있었다. 분명 그때까지도 경제적 조건을 초월한 낭만이 분명히 존재했는데, 2000년대는 이미 청소년기에 충분히 누린 상태에서 성인이 되는 느낌이라 오히려 역으로 더 공허할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를 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더라도 많은 걸 해보고, 보다 낭만적인 체험이 필요할 텐데 그 공허함이 제약이 된다면 무척 비극적인 일이다. 갈수록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적인 꿈을 꾸는 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더 큰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젊음' 그 자체다. 대책 없이 내 재능에 도취돼 있었고, 시나리오팀 진.도.희라는 말도 안 되는 찌라시를 돌렸던 ‘무대뽀’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가 젊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그것(p. 285)이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시행착오가 낭만이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기가 바로 지금 당신의 청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무서운 것은 한번 지나가버린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p. 286).
임순례 감독
프랑스는 1988년에 가서 1992년에 귀국했고, 중간에 학위 때문에 6개월쯤 쉴 때 일본에 머물렀던 적도 있다. 미조구치 겐지로 논문을 썼는데 마침 일본에서 미조구치 겐지 회고전이 열려서 3개월 정도 가서 지냈다. 그런데 도쿄가 파리보다 더 물가가 비싸더라. 그래서 얼마 간이나마 돈을 벌지 않고는 도저히 지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데도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네 라멘 집에 씻을 세자를 포함한 어쩌고 하는 종이가 붙어 있길래 ‘설거지할 사람을 구하는가 보다’ 싶어서 무작정 들어갔다. 내 사정을 대충 영어로 얘기한 다음 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다행히 위층의 불고깃집 주인이 한국 사람이어서 내 얘기를 일본어로 옮겨줬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본어를 전혀 못하니까 주인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손님이 불러도 절대 가지 말고, 무조건 설거지만 하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돼서 낮에는 라멘 집에서 설거지하고 저녁에는 불고깃집에서 불관을 물에 불려 닦는 일을 했다. 그래도 중간에 몇 시간 영업을 쉬고 저녁을 준비할 때 교자 만드는 일 정도는 했다. 만두피 주름을 열 개 만드는 기술을 익혔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 주방에서 일하는 일본 남자아이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일본어를 조금 익히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어는 여성과 남성 간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주로 그 남자아이로(p. 301)부터 배우다보니, 나중에 파리로 돌아가서 괜히 일본인 친구들과 일본어로 얘기했다가 난리가 났다. 그건 약어와 속어가 마구 뒤섞인 전형적인 '쇼쿠도 니혼고'(식당 일본어)라며 나중에 일본 가서는 절대 그런 말 쓰지 말라는 거다.(웃음) 그때를 돌이켜보면 굴곡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일본어를 하나도 못하면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도대체 윗집에 한국 사람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나. 그래서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 살면서 되지 않는 일이 많은 만큼 되는 일도 많다고.
대학교 4학년쯤 되면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텐데,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은 길로 뛰어드는 것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저 '난 조직생활과는 어울리지 않아'랄지 ‘남이 나한테 그게 어울려 보인다고 했어’라는 생각 정도로는 안 된다. 이게 싫고 저게 싫어서 가지를 쳐나가다보니 영화감독이라는 미래가 남았다가 아니라, 이게 진짜 나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절대 버틸 수 없다. 한국영화계가 활황이라고는 하지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은 여전히 불투명,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한 작품의 성패가 가르는 희비는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감독은 현장에서 작품을 만들 때의 희열보다는 작품을 만들고 있지 않을 때의 초조와 불안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이다. 지금도 힘들 때면 오래전 치악산의 한 민박집에 틀어박혀 미래를 고민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그날의 심사숙고에 대해 앞으로 언제까지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정상적인 궤도로부터의 이탈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허송세월했던 2년 정도, 또래에 비해 흔치 않은 그 굴곡의 삶이 이후 내가 다시는 영화감독이라는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는 든든한 자기 믿음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도 같다. 그때 놀고먹 있다고는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는 읽지 못했을 좋아하는 소설들을 거의 다 읽으면서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 황석영을 만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고전들도 접할 수 있었다. 그 2년이 없었다면 나(p. 305)중에 더 많은 세월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살면서 결코 '버리는 시간'이란 없다. 당신이 무의미하다고 느낄지도 모를 그 시간이 바로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수 있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p. 306).
장철수 감독
간영화제에 초청받으면서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느꼈지만, 극장 개봉은 또 다른 문제였다. 갑작스러운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쉽게 개봉도 하고 홍행도 잘되리라 기대했는데, 개봉일을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예상과 달리 배급사를 찾는 데만 6개월가량 걸린 끝에 소규모로 배급하게 됐고, 좋은 평가를 받은 것과 별개로 관객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영화를 찍으면서 기자나 평론가들보다 관객들이 더 좋아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 거다. 그래도 후반부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속도감이나 새로운 장르적 요소 등 직접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가가 좋았고, 대한민국영화대상과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까지 받았으니 나로서는 자랑스러운 데뷔작이라 생각한다. 2010년은 감히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한 해였다.(웃음) 마음 같아서는 빨리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 또한 데뷔작을 만드는 것만 큼 힘든 일이더라. 예전에 썼던 〈하이에나〉를 1년 정도 준비하다 중단(p. 328)했고 그 뒤로 다른 두 편을 더 준비하다가 3년 만에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에 들어갔다. 남들은 데뷔작의 성공(?)을 발판 삼아 쉽게 들어간 줄 아는데 그런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 게다가 옌렌커의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원작인 세 번째 영화 〈복무〉(가제)를 준비하는 지금,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흥행 성공으로 역시나 쉽게 착수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연히 그렇지 않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한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말하자면 영화감독이 되려는 사람들은 '힘든 것이 숙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웃음)(p. 329).
지금껏 세상을 살며 느낀 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그 말에는 이 정도 뿌렸으면 이만큼 되돌아와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깔려 있다. 특히 자신만만하고 의욕 넘치는 젊은 날에는 원하는 만큼 회수하지 못할 때 쉽게 분노하거나 괴로워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래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어쨌건 뿌려야만 거둘 수 있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뿌리지 않는다면 그냥 거기서 끝이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더 많이 더 넓게 뿌려야 한다. 가령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영진위 HD영화 제작지원작에 선정되어 3억 원이란 지원금을 받고도 추가 투자가 쉽지 않았다. 어느새 지원금 소멸 시기가 다가왔고 다급해진 마음에 안 가본 투자사, 제작사가 없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돌아다녔다. 방송국은 물론 돈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면 그저 딱 한 번 만난 사람에게도 전화를 걸었다.(웃음) 그러다보니 지원금을 받은 지 1년 만에 크랭크인을 하게 되더라. 말하자면 뿌린 대로 거두는 게 아니라 '뿌릴수(p. 331)록 거둔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하고 최대한 남들이 갖고 있는 것만큼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도 자신을 믿지 못한다. 그런 다음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어야, 아니 지어야 한다. 영화는 공산품처럼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마음으로 계절이 바뀜에 따라 정성껏 돌보며 짓는 것이다. 고난의 시간을 견디며 배운 것은 그것 하나다.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아닌 '짓는다'는 마음가짐이다(p. 332).
정윤철 감독
나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영화감독을 꿈꾸게 됐다. 다른 꿈이 없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불현듯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어떤 학과가 인기라며 등 떠밀려 학과를 결정하고, 또 단지 성적에 맞춰 학과를 결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한 번의 결정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 아닌 가. 거의 모든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기회도 못 가진 채 부모와 선생의 기준에 의해 원서를 쓰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연극 영화과가 아니더라도 고집을 부려 가고 싶은 학과가 꽤 있었다. 물리에 비해 수학을 못해서 좀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웃음) 제어계측공학 과나 컴퓨터공학과에 가고 싶었다. 또 실기를 좋아해서 어쩌면 벤처(p. 349)열풍을 타고 뭔가 대단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다가 지금 감방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 (웃음) 하지만 영화감독이라는 꿈이 명확 했기 때문에 다른 진로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거다. 당연히 이 길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1년 내내 머리를 짓눌렀고 미치도록 그 꿈에 대해 고민했다. 이 꿈이 단지 막연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했다. 이과생이 예체능으로 가는 게 쉽지 않은데도, 그렇게 치열한 고민을 거친 다음에는 조금도 그 길을 의 심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신경써야 할 것은 재능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과학을 좋아했고 그 꿈을 이루려고 재능을 갈고 닦은 것처럼, 그 이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했다(p. 350).
연출 제의가 들어왔는데 거절한, 하지만 다른 감독들에 의해 결국 만들어진 영화들의 홍행을 합쳐보니 어림잡아 2천만 관객쯤 되더라(웃음) 감독으로서 언제나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직업감독으로서의 삶을 폄훼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오직 내 각본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4,5년을 허비하는 것이야말로 허영이고 사치다. 이를 통해 지금의 내게도 되묻고 있는 것, 그리고 미래의 영화감독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바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다.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나 스타일을 고민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후자에 대한 고민이 앞서는 것 같다. 뮤지컬이든 만화든 게임이든 영화든 모두 '이야기 산업'이고, 결국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자기 혼자 보면 그만인 영화를 만들 게 아닌 이상 언제나 맨 위에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관객과의 소통이다. 지레 겁먹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한 편에 자신의 인생과 세계관을 꾹꾹 눌러 담으려고 애쓴다. 차근차근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말아톤〉을 준비하며 인생이 참 안풀린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풀려고 집 앞 고등학교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 바퀴도 뛰기 어려웠는데 일주일 지나니까 다섯(p. 352)바퀴, 열 바퀴까지 뛰게 됐다. 한 바퀴가 400미터니까 열 바퀴면 4길로미터, 백 바퀴를 뛰면 40킬로미터니까 '이러면 마라톤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하다보면 숨을 헐떡이게 되는 피로의 순간, 도저히 저 언덕을 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의 순간이 분명 닥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보다 멀리 내다보라(p. 353).
최동훈 감독
영화아카데미에 연출 전공 15기로 들어갔는데, 부모님께는 방송국 PD를 준비한다고 거짓말하고 2년을 다녔다. 실제로 대학 시절 신문 방송학이 부전공이었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동기들과 몰려다(p. 366)니며 영화 보러 다니는 게 즐거웠다. 우리끼리는 학교를 고아원이라 부를 정도로 커리큘럼과 무관하게 어울려 다녔다. 다른 동기들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허우 샤오시엔을 좋아했고 나는 히치콕을 좋아했다. 집에 모여서 비디오 보면서 장면 이야기하고, 또 다들 한 성격 하는지라 종종 싸우기도 했는데 그때 가장 많이 싸웠던 동기 이기철과는 나중에 〈도둑들〉을 함께 썼다. 성적으로 보자면, 내가 들어갈 때는 1등 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꼴등이었다.(웃음) 그때 황규덕 주임교수님이 내게 꼴등이라며 인생이 걱정된다고 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서강대 국문학과를 졸업할 때도 꼴등이었다. 나는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보면서 나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있었다. 꼴등은 일회적인 순간이지만 인생 전체는 결국 다른 것들이 결정한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전혀 없다(p. 367).
시나리오를 쓰는 나만의 작법이 있다면, 일단 초고를 빨리 쓰라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 초고는 그 2년 중 초반 4개월 만에 썼다. 내 지론은 그렇다. 어차피 쓰레기가 나올 테니 일단 빨리 쓰고 보자.(웃음) 초고 때부터 마지막 신까지 완벽하게 쓰려고 마음먹으면 질질 끌려다 닐 수밖에 없으니, 묘사할 자신이 없는 신은 '이런 내용일 듯'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때는 제목에 무조건 '범죄'를 넣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있었다. 하지만 현재 시점의 플롯인데 거의 절반을 플래시백과 진술, 회상으로 채우면 다소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나중에 촬영에 들어갈 때는 영화사에서 '제발 이해만 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웃음) 시나리오가 완료된 다음에도 캐스팅이 안 돼서 8개월 정도 더 쓰게 됐다. 그때 봉준호 감독이 앞방에서 〈살인의 추억〉(2003) 막바지 작업 중이었다. 캐스팅 등 다른 문제로 인해 영화가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때 조바심이 나지 않냐고들 묻는데, 나로서는 배우가 늦게 합(p. 370)류하게 됐으니 계속 시나리오도 고치고 콘티도 다듬으며 조금씩 더 나아져서 좋았다. 말하자면 내 성격의 장점은 잘했건 잘못했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도 자동차를 후진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차 뒤쪽이 거의 반파가 됐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간다. 마침 아침에 할 일도 없었는데 보험사랑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뭔가 잘 안 풀리는 걸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돈 없던 대학 4학년 때 전세금 1800만 원을 떼이고 고소했던 적도 있는데, 살다보면 스트레스를 피할 길이 없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나의 친 구로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범죄의 재구성〉도 막판까지 배우 캐스팅이 안 되면서 회사에서 방을 빼야 할 지경까지 갔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는데 왜 캐스팅이 안 되는지 답답했다. 진짜 엎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박신양이 캐스팅되어 크랭크인할 수 있었다. 그 직전 까지도 딱히 불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다음 작품을 준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여동생이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거의 백수로 지내며 여동생을 뜯어먹고 살았던 사람치고는 나름 당당하고 오만했다. 〈범죄의 재구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거의 4년 동안 수익 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병신처럼 있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동생의 믿음을 사지 않았나 싶다. 옷도 골프복만 입고 살았다. IMF 때 골프복을 무게 단위로 팔았는데, 집에서든 밖에서든 늘 ‘아놀드파마’만 입고 살았다. 진짜 쌌다. (옷 음) 그렇게 백수라고 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p. 371).
각본과 연출을 겸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묻는 사람도 종종 있다(p. 374) 반대로 나는 시나리오를 써서 욕먹고 고치는 그 과정의 연속을 즐긴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웃음) 남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작업이 내게는 가장 재미있다. 그래서 그 재미를 다른 작가에게 뺏기기 싫어서 직접 쓴다. 어쨌든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다. 그걸 갖기 위해 끊임없이 취재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어야 시나리오 작업부터 영화 완성까지 보통 3년은 걸리는 그 긴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수 있다. 내가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남도 설득시킬 수 있고 내가 재미있어야 남도 재미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아무래도 보는 사람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어쨌든 플롯이 날뛰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소망이 끼어든다. 스티븐 킹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노벨문학상을 받고 싶은 꿈은 없다. 다만 독자가 LA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다 읽을 때까지 뉴욕에 도착 안 했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것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라고. 정말 멋지지 않나? 비행기에서 내 영화를 보고 있는데, 끝나기 전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것.(웃음) 사실 아버지는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 실망을 많이 하셨다. 아들이 영화감독이라니까 〈벤허〉 같은 작품을 만들 줄 알았는데 도대체 그게 영화냐는 거다. 일단 이야기가 이해 안 된다고 하셨다. (웃음) 그러다 〈도둑들〉을 보시고는 '본격적'이라며 좋아하셨다.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데뷔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칭찬을 들었으니까. 다행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우연과 운으로 점철된 이야기는 대부분 다 우연이다. 우연을 필연인 척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p. 375) 에서 중요한 것은 재능보다는 의지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내 생각에, 인간은 워낙 복잡한 존재여서 사실 그 어떤 충고도 잘 먹히지 않는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뿐이다. 하지만 이 말은 분명히 할 수 있다. 나는 '하면 된다'는 말보다 '하면 는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다. 재능은 의지가 만드는 것이다(p. 376).
한지승 감독
왜 나는 그때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을까. 뒤늦게 후회하는 것 중 하나다. 막상 현장에 나가보면 촬영 시스템이나 기타 진행에 대한 부분(p. 395)들, 그리고 필요한 영화적 지식은 자동적으로 배우게 되더라. 물론 내가 학과 커리큘럼을 깊숙이 공부한 모범생이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웃음) 종종 철학과 미학, 혹은 사회학을 전공했더라면 더 나은 감독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은 평생에 걸쳐 탐구해야 하는 것인데 '영화는 바로 이거야!'라는 인식을 연극영화과에서 너무 빨리 규정해버린 건 아닌지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물아홉 살이 뭘 안다고, 너무 정신없이 데뷔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너무 빨리 대중적인 성공을 맛보고, 그 성공에 맞춰 작업해오다보니 '아, 영화가 이런 거구나'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된 것이 지금 나의 부족함의 근본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부족한 나를 계속 지탱해주는 힘은 지금도 여전히 영화만 생각하면 흥분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지만(웃음) 그렇다고 진지하게 포기하려는 마음으로까지 가지는 않고, 어쨌거나 이 일이 가장 재미있다. 오히려 요즘 들어 무서운건 갈수록 영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매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도 그렇지만, 스스로도 무려 20년 동안 어느 정도 결과를 내면서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영화가 좀 쉬워야 하는 거 아냐?' 하는 불만 섞인 생각이 든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답이 빨리 나와야 정상인데, 예전보다 확신을 갖기가 어렵고 고민은 더 커져만 간다. 지금까지 거대한 하나의 과정이었다면 지속적으로 시행착오를 줄이려고 했던 시도들의 총합일 텐데, 오히려 지금이 가장 힘들다. 당연히 이전 영화보다 더 나은 영화가 나와야 할 텐데 그게 아니니까 어렵다. 요즘 은 그런 근본적인 생각에 몰두할 때가 많다. 영화가 뭘까, 앞으로 어떤(p. 396) 방향으로 가는 게 맞을까. 얼마 전 이준익 감독님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네가 이제야 영화를 좀 알게 된 거야"라고 하시더라. 진정으로,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웃음)
지난 20년 넘게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과연 내가 재능이 있는 건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무도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이 길에서 과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고민을 들은 한 선배가 이렇게 얘기했다.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 자체도 너의 재능의 일부"라고. 재능은 어딘가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집요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그래도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면, 어쨌든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시작해보고 나중에 찾아도 늦지 않다. 물론 그 확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한 치밀한 '점검'은 필요하다. 관심과 열정에 대한 아무런 점검 없이 어느 순간 관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분명 막다른 길에 부딪힐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게 너무 힘든 일이니까.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재능과 힘만으로 뚝딱 찍어내는 작업이 아니니까.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물론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점검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쉬이 지치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거대한 세계다. 영화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극복하게 해준 것은 늘 다음 ‘영화’였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볼까 하는 기대와 흥분으로 극복했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갈수록 힘든 만큼 그런 기대와 흥분의 크기가 줄어들어간다(p. 397).
영화계에서 일하며 빠질 수 있는 함정 혹은 딜레마는 오히려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일 수 있다. 평생 고독한 길을 걸어야 하는 예술가로서 그것은 분명 중요한 자질이지만, 그런 확신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p. 398) 어쩔 때는 남이 나를 바라보는 인식이나 평가가 더 맞을 때도 많았다. 〈고스트 맘마〉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존심 등 여러 이유로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물론 〈고스트 맘마〉를 통해 내 안의 의외의 멜로적 성향을 발견하고는 한동안 우쭐해하며, 오직 그것만 확장시켰던 것이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잠재운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전혀 다른 것을 해보는 용기도 필요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찾는 중이다. 이 세계의 그런 불확실성으로 인해 많은 젊은 친구들이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장점이자 단점 인게 너무 많고, 기회이자 함정인 게 너무 많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때때로 점검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불확실성의 매력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것이다. 답을 빨리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올바른 질문을 갖고 있다면 반드시 원하는 답을 얻게 되어 있다(p. 399).
허진호 감독
돌이켜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 단편영화로 주목받았고,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를 거치며 늦게 시작했지만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보통 영화하는 젊은 친구들이 가장 많이 방황하는 이유가 '소속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작품을 옮겨다니면서 연출부로 일하고, 그냥 미래를 위해 막연히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이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p. 419)어 그야말로 막막하다.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라는 건 언제나 주목받는 자리였다. 주변에서 관심도 제안도 많았다. 그래서 언제나 박광수 감독님에게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자칫 망망대해에 떠 있었을지도 모를 내게 명확한 좌표가 되어주셨으니까. 그리고 깊은 고민 끝에 드디어 데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촬영 중반 이후 현장에 적응하면서 제자리를 찾긴 했지만, 조감독으로서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그 중심에 서는 것은 전혀 달랐다. 물론 나의 데뷔작만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임상수 감독도 〈처녀들의 저녁 식사〉를 만들 때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다더라.(웃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원하던 데뷔작을 최고의 배우, 스탭들과 함께 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예상 가능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p. 423)이의 괴리가 그렇게 큰지 몰랐다. 그래서 새삼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삶은 시련의 연속'이라는 말이다(p. 424).
게다가 서른 살에 입학했으니 '늦어서 어떡하나'라는 불안감과, 남들처럼 뚜렷한 주관으로 들어온 게(p. 424)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들어 정말 방황했었다. 그 방황을 극복하는 힘을 얻기 위해 먼저 '잘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고민을 시작했고, 서로 다른 그 두 가지를 오가는 여행을 즐기려 했다. 내가 동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두 가지가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영화감독으로서 무엇이든 잘 만들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욕망이지만 가능한 욕망은 아니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시야를 좁혀서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 잘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 창작자들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영화감독은 세계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세상 그 모든 것에 대한 엄정한 관찰자여야 한다. 가령 고 박철수 감독이 연출과 주연까지 겸한 〈학생부군신위〉(1996)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들은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찬우(박철수)는 영화 촬영을 접고 고향에 내려오는데,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와중에도 계속 자신이 만들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린다. 한국 장례 절차의 비극성과 희극성 사이에서, 끝까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그 모습이 어쩌면 영화감독의 천형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영화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며, 감정을 끌어내고 표현하는 데도 필요하다. 어쨌든 영화감독의 길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는, 미리 서둘러(p. 425) 고민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민하고 걱정할 것들은 미리 예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찾아온다.(웃음) 나로서는 '그때'가 위기였다기 보다 언제나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는 '바로 지금'이 위기다. 미래는 결코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다(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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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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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글쓰기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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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나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처럼 영상이 대세인 시대에 활자는 외면받고 있다. 그러나 활자는 우리의 사유를 넓히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글쓰기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이 책은 어떤 책을 보다가 대출해 읽었는데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보니 절판됐다.
왜 기사는 역피라미드 스타일인가
수습기자로 들어가서 방송기사 쓰는 법을 선배들한테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바로 '역피라미드'다. 삼각형 형태의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으면 밑변이 위로 올라가는 형태의 역피라미드가 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먼저 전하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을 전개하라는 것이다. 이런 역피라미드 형태는 방송기사 뿐만 아니라 신문기사 등 뉴스전달 문장뿐만 아니라 보도자료나 주요한 브리핑 자료 작성 등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전형적인 형태의 문장스타일이다. 방송기사쓰기 강의를 할 때 첫 번째로 강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키key’ 내용이 맨 앞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역피라미드 방식의 기사작성 방법은 방송뉴스를 편집할 때 가장 유용하다. 전체 지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인쇄매체와 달리 방송은 한정된 시간에 많은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 첫 2, 3문장에 거의 모든 중요한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 어떤 뉴스를 낼 것인가를 전체 뉴스시간(p. 122)에 맞추어서 배열하지만 정확하게 초 단위까지 맞추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방송의 특성상 뉴스시간은 거의 10초 단위까지는 맞춰줘야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뉴스 한 아이템의 길이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뉴스 진행자들의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역피라미드 방식으로 작성된 방송기사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뉴스 말미에 편집되는 기사들은 최악의 경우 1, 2문장만 읽어도 된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10분 단위로 편성되는 라디오 뉴스의 경우 30~40초 길이의 짧은 단신들이 15개 안팎으로 들어가게 된다. 방송국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표준시에 맞춰져 있는 초정밀 시계이다. 오후 3시 정각에 뉴스가 시작됐다는 것은 정확하게 3시를 알리는 시보와 함께 바로 앵커의 멘트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 이제 분침은 10분을 향해 가고 있고 정확하게 초침이 3시 9분 40초를 막 지나고 있을 시점에 앵커가 뉴스 한 아이템을 다 읽었다고 가정하자. 남은 시간은 20초, 그 다음 아이템은 아무리 긴 뉴스라도 리드(주요 내용을 요약해 전하는 뉴스의 첫 문장-예를 들면 교통사고 기사에서 ‘고속도로에서 관광버스가 마주오던 트럭과 부딪혀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라는 뉴스 첫문장을 말한다.)를 포함해서 2문장 밖에 읽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역피라미드 방식으로 작성된 방송기사는 가장 유용한 역할을 한다. 지면을 분할해서 각종 기사를 배분하는 신문과 달리 시간을 특정해서 프로그램을 배정하는 방송사에서 시간은 곧 돈이라는 인(p. 123)식이 강하기 때문에 초 단위의 시간 준수는 필수적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이른바 골든 타임대의 광고 단가는 15초 단위로 1천만 원을 넘기는 수도 있다. 1초가 1백만 원인 셈이다. 따라서 방송 편성에서 가장 중요한 준수 사항은 프로그램에 배정된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역피라미드 기사의 문제점
오랜 역사 속에 정착된 역피라미드 방식에 대해서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역피라미드 스타일은 기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핵심위주로 기사를 나열하게 됨으로써 과정이나 절차에 대한 내용이 결여되어 결과 중심적이고 피상적인 소식만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피라미드 방식의 기사 작성 스타일에 대해서 '낡고 오래된 전통의 피로증후군'이라는 비판적 시각으로 문제점을 제기한 이는 지난 2001년 『새로운 신문 기사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연구서를 발표한 한국 언론진흥재단의 유선영 박사다. 유선영 박사는 역피라미드형 기사서술과 관련해 다양한 분석을 제기했다. 즉, 역피라미드 방식은 19세기 중반 전보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봤다. 많은 내용을 적을 수 없고 가장 중요한 핵심 몇 자만을 전해야 하는 전보의 특성이 뉴스 문장 작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구질구질한 수식어와 주관적 느낌, 인상, 논평 등을 제외하고 핵심적인 사실만을 제시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주관이 배제된 객관적인 정보와 데이터에 가치를 두는 기사작성 방식은 객관주의 저널리즘이(p. 124)라는 이름으로 해방 이후 주로 미국식 저널리즘을 공부한 젊은 언론인들과 학자들에 의해 정착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 박사는 이런 ‘역피라미드형 기사 방식이 언론자유를 탄압한 군사정권시대의 산물이다.’라는 아주 독특한 시각을 보였다. 즉 당시 언론들이 독재 정권과 타협하면서 5W 1H, 내용이 아닌 형식적인 불편부당성, 책임기피적인 사실 위주의 정보 제공에 주력하는 보도 테크닉을 발전시켰고, 이를 구현한 글쓰기 방식이 바로 역피라미드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피라미드 스타일은 객관주의라는 명분 하에 총체적 사실을 다루기보다는 '선택적인 개별 사실'에 중점을 두게 되어, 한국 저널리즘의 전반적인 문제로 지적되어온 파편적이고 맥락 없는 보도와 분리될 수 없는 요소라고 주장했다(p. 125).
어색한 문어체나 번역체
흔히들 다른 문맥으로 전환할 때 '한편'이라는 말을 쓴다. 한편이라는 말은 영어 'by the way'나 'mean while'의 번역체에서 나온 말이다. 신문 등 문어체에서 쓰는 것도 번역체라서 어색한데 하물며 방송 문장에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일상대화에서 과연 ‘한편’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따르면 - 영어의 ‘according to’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전형적인 번역체다. 나중에 우리말에서 쓰지 않는 영어 번역체의 사례를 따로 설명하겠지만 ‘따르면’이 가장 많이 쓰는 번역체중의 하나여서 전반부에서 특별히 지적한다. ‘따르면’을 쓰지 않고도 ‘~를 보면’ ‘-조사 결과'(p. 144)등 충분히 대신 쓸 수 있는 말이 있다.
그런데 - 구어체에서 ‘그런데’라는 말을 쓸 때가 있다. 화제가 전혀 동떨어진 경우에 이야기를 새롭게 전개하기 위해 쓴다. 일관된 전개의 틀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송뉴스 문장에서는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한다(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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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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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집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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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했다. 사람은 집이 있어야 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투기와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아파트 한 채에 수십억이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가만히 깔고 앉아도 아파트는 저절로 값이 오른다. 그러나 땀 흘려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살면서 하나도 관심이 없던 건축과 건물. 이것을 소유할 가능성이 없었기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건축가의 이단아 같은 저자의 글을 읽으며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는 기회가 됐다.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다...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의식, 성적인 특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되 모험적인 용기의 대담성과 변화의 표현을 지향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나아가는 것에 반응하는 자다."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1978)이라는 책을 통하여 서양이 오랜 세월 지닌 제국주의적 편견을 날카롭게 비판한 지식인인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 그가 1993년 BBC의 리스Leith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들을 모아서 『지식인의 표상』 Representations of Intellectual(1996)이란 제목으로 출간한 책의 이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나는 그때 김수근 건축이라는 견고한 영역에서 이탈하여 내 건축의 정체성을 찾아 검은 밤바다의 선원처럼 분투하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어서 기댈 곳을 찾고자 이 집단 저 부류의 세계들을 연신 기웃거리고 있었으므로, 내 초라한 행색을 준열하게 꾸짖는 듯한 이 글에 궤멸당하듯 전율하였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라니.....
건축가는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고유 직능으로 한다. 그 직능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수반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객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p. 9) 중요하다. 예컨대 건축가가 설계 작업에서 거의 첫 번째로 그리는 도면인 평면도는 집을 중간 높이에서 수평면으로 잘라서 보는 그림인데, 이 그림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시점을 무한대의 높이로 올려야 한다. 무려 신적 위치에 도달해야 하는 일이니, 이는 남이 사는 모습을 객관적 위치에서 보며 그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것이 평면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뜻이어서, 도면을 그리는 건축가는 스스로를 세상의 경계 밖으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축가의 직능이란 게 항상 새로운 상황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일이다. 새로운 건축주와 만나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사용자와 만나며, 새 땅과 만난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타성과 관습의 도구를 꺼내어 종래의 삶을 재현한다? 이건 건축이 아니다. 그냥 관성적 제품이며, 그래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을 배반하는 일이 되며, 어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 땅을 범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건축가는 늘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으며,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과 같다(p. 10).
그러나, 이 폐기된 마스터플랜이 우리 땅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했으니, 1970년대 경제개발이 광풍처럼 몰아치면서 000종합계획도, 000개발구상도 같은 이름의 지도들이 이 땅에 난무한 것이다. 모두 마스터플랜의 다른 말인 이 지도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우선 각종 색으로 칠해져 있는 데, 이 색채에는 중요한 권위가 있어서 붉은색은 상업지구, 노란색은 주거지구, 보라색은 공업지구를 나타내며 색채마다 건폐율과 용적률이 달라 땅값의 차이로 등급을 갖게 된다. 도로에도 계급이 생겨, 고속도로•간선도로·분산도로•집적도로 등 도로별로 속도제한을 두고 도로 폭을 정하며, 도로변에 짓는 건물의 종류와 높이, 모양까지 규제하고 등급을 둔다. 공간 구조도 위계적이다. 도심이 있고 부도심이 있으며 변두리도 있어, 변두리 근린생활시설에 사는 이들은 도심 중심상업시설에 오면 괜한 주눅이 들게 된다. 게다가 그 마스터플랜이 기적을 이뤘다. 50만 명이 사는 분당이라는 도시가 5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전율적 속(p. 36)도는 세계의 도시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세계의 도시학자들은 분당을 교과서에 기록하지 않는다. 분당이 이미 그 효용 가치를 폐기한 마스터플랜의 복제라는 것을 알고 난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실패했을까? 아니다. 분당은 성공하였다. 도시가 성공했을까? 아니다. 도시가 아니라 부동산이 성공한 것이다. 주뼛거리며 산 아파트 가격이 오르자 주민들은 행복해했다. 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치가가 지나칠 리 없다. 몇만 호를 짓겠다고 공약하면, 건설자본이 붙어서 마스터플랜을 찍어댔다. 바야흐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하여 만든 마스터플랜의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나타나 수도권의 땅들을 도륙 내더니, 영남으로 호남으로 심지어는 제주에까지 신기루처럼 연일 솟아났다. 이런 도시에서의 삶이 행복해졌을까? 이들의 원본이던 프루이트아이고 같은 도시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 (1901-1991)는 "이렇게 철저히 프로그램화된 거주기계(이 단어는 르 코르뷔지에가 주거를 정의하며 사용한 바 있었다)에서는 모험도 낭만도 없으며, 우리 모두를 구획하고 분리하여 서로 멀어지게 한다"라며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이 모더니즘의 거주 형식을 질타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나는 건축가임에도 이런 도시들에 서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가 다른 땅이며 다른 삶이었는데 표준적 모형, 표준적 지침을 강제하여 천편일률의(p. 38) 풍경으로 만든 까닭이니 장소가 가진 고유함이 사라지고 지역의 정체성은 소멸된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전가의 보도인 마스터플랜을 도시 만들기로만 휘두르지 않았다. 국토 개조라는 시대착오적 용어를 내세우며 4대강을 절단하고 만다. 우리 땅은 곳곳이 다르며 부분마다 독특하고 고유하여 금수강산이라 했다. 특히나 강은 물길마다 구비마다 유별한데, 이를 표준적 단면을 갖는 마스터플랜으로 일관하며 뒤집고 파헤쳤다. 양식 있는 많은 학자들이 대자연의 복수를 경고하며 말렸지만, 마스터플랜에 경험이 많다며 그 효능을 과신한 당시 대통령에게는 다소 불편한 잡음으로 들렸다. 잃어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은 언감 생심이라, 생태학자들이 예언하는 미증유의 불행이 닥쳐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녹조라테와 큰빗이끼벌레라니...불안과 공포가 이제 강마다 내재한다. 마스터플랜의 망령을 빠져나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가....(p. 40).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서양화를 근대화로 착각하며 서양식 도시를 흉내 내고자 서양에서 폐기된 마스터플랜을 가 와 우리 땅에 앉혔다.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인 우리 땅에서 평지는 귀한 경작지이므로 신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은 메우고 물길은 돌려야 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켜 신기루 같은 신도시가 이곳저곳에 나타났다. 모두가 터에 새겨진 무늬를 깡그리 지운 결과여서 이른바 터무니없는 도시였다. 특히 아파트가 그러했다. 지형을 바꾸면서 지은 집들이니 터무니없는 집이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게 말장난일 뿐일까? 모든 땅은 고유하다. 적어도 위도와 경도가 다르다. 땅마다 자연이 새긴 무늬가 다르고 그 위에서 우리 삶을 영위하며(p. 73) 새긴 무늬도 달라 모든 땅은 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땅은 그 스스로 어떤 건축이 되고 싶은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기로는 모름지기 좋은 건축가, 좋은 도시계획가는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이며 좋은 건축, 좋은 도시란 그 터가 가진 무늬에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지난 시절의 무늬와 함께 그 결이 더욱 깊어 가는 곳일 게다. 그게 터무니 있는 건축이며 그러함으로 터무니 있는 삶이 생겨난다. 요즘, 우리 사회 도처에서 왜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질까?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그 도시가 또한 사회를 만든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지난 시대에 잘못 만든 터무니 없는 도시 때문 아닐까(p. 75).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의 개념을 현실에 끌어들인 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9)다. 그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특별한 단어를 소개하며 도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새롭게 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부모 몰래 숨고 싶어 찾는 2층 다락방 같은 공간, 신혼의 달콤한 꿈을 꾸는 여행지,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듯한 카니발의 세계나 놀이공원 같은 공간이 실제화된 유토피아인데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이름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헤테로토피아적 공간과 시설이 대단히 많다. 일상의 피로를 보상하는 듯한 노래방이나 디스코텍, 공연장이나 전시, 심지어 박물관이나 공원도 그 범주에 들어갈 게다. 이런 공간은 도시에 활력을 부른다. 이 시설들에 공통된 특징은 그 속에서의 활동이 늘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그런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그 공간은 그에게 결코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헤테로토피아는 한시적으로 유효한 유토피아이며 그러함으로 일상의 도시공간에서 유용한 존재 가치를 가진다. 문제는 이 한시적이어야 할 헤테로토피아가 영구적 유토피아를 꿈꾸면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도시의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다. 고층의 집합주택은 로마(p. 80) 시대에도 있었을 정도로 아파트의 역사는 오래고, 이제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 공통의 주거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 땅에 세워진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형식을 띄는데 바로 ‘단지’라는 개념 때문이다. 이 땅의 아파트는 그 세대수가 얼마이든지 들어서기만 하면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주변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단지가 된다. 이 단지 속에는 그네들만을 위한 길(아파트 단지 내의 도로는 일반 도로가 아니니 도로교통법을 적용받지도 않는다)을 비롯해 놀이터와 공원과 상가, 유치원과 학교, 마을회관과 행정조직까지 두어 자치적 공동체를 염원한다. 환상적인 조감도 위에 '래미안', '힐스테이트' 등 영어 단어를 조작한 듯한 이름을 붙이고 몽환을 꾸게 하는 이 독존적 조직, 불과 몇 개의 출입구로 출입을 통제하는 그네들만의 이 낙원을 도시의 일반 도로는 가로질러 통과할 수 없다. 그냥 둘러서 지나야 하니 아파트 단지는 도시 속의 섬이 되고야 만다. 이런 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마치 군도처럼 도시 곳곳에 둥둥 떠 있는 이 섬들은 자기들끼리 부동산 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는 적대적 공동체다. 더구나 지난 시대 우리가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 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 아닌가? 정치가가 몇 채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건설자본은 이를 뒷받침하여 임기 내에 졸속으로 지어댔으나 어디에도 우리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담론이 없었고 건축의 시대적 정신도 없었다. 오로지 고립된 부동산(p. 81) 공동체로 나타난 이 아파트 단지는 분별없는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얼마 전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우리의 이웃이, 주민으로부터 먹다 남은 음식물을 받은 모멸감을 끝내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곳에서는 그런 식의 비인간적 행위가 거듭되어왔다고 했다. 낙원의 삶을 만끽하는 단지의 거주자에게 경비원은 이웃이 아니었으니 폐쇄적 낙원에 소속될 수 없는 그의 인간적 존엄은 웃기는 단어였다. 이 일이 하나의 극단적 사건이라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게다. 그러나 이는 단지라는 울타리를 가지는 한 늘 잠재되어 있는 비극이며, 단지는 폐쇄된 공동체 들의 역사에서 보듯 늘 디스토피아의 결말을 가진다. 단지를 해체하라(p. 83).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언제부턴가 교보문고에서 '건축'을 '책'으로 바꿔 쓰고 있는 이 문장은, 원래 윈스턴 처칠 Winston Churchill(1874~1965)이 1943년 10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의회 의사당을 다시 짓겠다고 약속하며 행한 연설의 한 부분이었는데, 1960년 『타임스」The Times가 이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시 인구에 회자되었다. 내가 아는 한 건축과 우리 삶의 관계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한 말이 없다. 예컨대, 오래 산 부부는 닮는다고 한다. 서로 달리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한 공간에 같이 살면서 그 공간의 규칙에 따르다 보면, 습관과 생각도 바뀌어서 결국 얼굴까지 닮게 된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산간벽지의 암자나 수도원을 굳이 찾는 이유가 그 작고 검박한 공간이 자신을 번뇌에서 구제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 오래 걸리고 더디지만 건축은 우리를 바꾼다. 즉 이런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삶이 되고, 나쁜 건축에서는 나쁘게 된다는 것. 이게 맞는다면, 건축을 통해 인간을 조작하는 일도 가능할 게다. 그래서 옛날부터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건축을 통해 대중의 심리와 행동을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고대에는 신전과 피라미드 등을 지어 민심을 장악했고, 이후 궁전이나 기념탑 같은 건축물도 절대권력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는 도구로 지어졌다(p. 121) 건축의 이런 효과를 가장 잘 이용한 독재자로는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가 단연 앞선다. 사실 건축가가 되기 위해 빈 미술아카데미에 지원했다가 연거푸 낙방한 이력이 있는 그는 건축가 못지않은 스케치를 그렸고 어떤 집은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권좌를 잡자마자 최측근으로 기용한 이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1905~1981)라는 유능한 젊은 건축가인데, 건축의 효능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두 사람은 수없이 많은 건축물을 계획하며 히틀러를 신격화했다. 예를 들어, 알베르트 슈페어는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 회장의 무대 풍경을 기획하여, 이를 계기로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 어두운 저녁 무렵, 조명이 켜지지 않은 경기장에 수십만 명의 군중을 집합시켜 몇 시간을 방치한다. 모두가 그 침묵과 어둠의 공포에 질릴 즈음 무대 위에 한 줄기 조명이 비취면서 그 아래 히틀러가 극적으로 등장하고, 가운데의 연단에 오르면 경기장 둘레에 설치된 130개의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에 강력한 빛을 분출하듯 쏘아댄다. 순식간에 환각에 사로잡힌 군중은 일제히 손을 뻗으며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더러는 눈물까지 흘리게 한 감격적 풍경, 이른바 ‘빛의 궁전’이라는 프로젝트였다. 인간을 도구화하는 건축, 소위 이념의 건축은 ‘제3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은 히틀러에게 대단히 매력적이고 유효한 통치 수단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프로젝트가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베를린 개조계획이다. 베를(p. 122)린의 전통적 중심가로인 '운터텐린덴'을 직교하면서 템펠호프 공항에서 출발하는 이 새로운 가로, ‘세계 수도의 중심가로’라고 이름 지은 이 이념의 축 주변에는 로마제국의 건축 형식을 모방한 관청들이 연이어 들어섰고 그 가로의 끝에는 인민의 전당을 지을 계획이었다. 가운데 둥근 지붕 높이가 290미터, 직경이 250미터, 무려 15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 거대 건축은 돔형 지붕을 열주가 받치는 형상이다. 둥근 돔은 그들만의 세계를 뜻하고 열주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 집체화되고 평준화된 대중을 상징했으니, 모든 시민을 나치제국의 신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이 건축의 중요한 목표였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풍경이 상시적으로 연출될 예정이었던 이 건축물은, 다행스럽게도 나치 패망과 더불어 기록으로만 남는다. 나치 시대에 실현되지 못한 이 건축이 부분으로나마 실현된 곳이 바로 유신 시절 준공한 우리의 국회의사당 아닐까? 이 건축은 설계할 때부터 말썽이 일었다. 권위적으로 보이고 싶었을 게다. 이 건물을 둘러싼 열주는 본체의 구조와는 아무 관계없이 갖다 놓은 장식일 따름인데, 이를 정당화하느라 처마가 나중에 돌출되었으니 건축을 만드는 논리 절차가 틀렸다. 게다가 고위층의 압력으로, 애초에는 평지붕 형식으로 설계되었던 이 건축에 설계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돔이 억지로 얹혀졌다. 가장 중요한 공간일 것 같은 이 돔의 내부는 본회의(p. 123)장이 아니라 현관 로비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또 가짜다. 내부의 치졸한 장식이나 난삽한 색채, 무당집처럼 보이게 하는 최근에 만든 야간 조명 등등은 거론도 않겠다. 이런 곳에서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국회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하나같이 인격자요,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모인 이곳에서 만드는 정치 풍경은 늘 파행적이고 꼴불견이어서, 국회의사당은 국민을 걱정하는 곳이 아니라 국민이 걱정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이를 볼 때마다,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어떨까. 우선 그 장소가 불순하다. 일제가 경복궁을 아래로 보기 위해 지은 총독 관저의 터였으니 우리의 자긍심을 짓밟은 곳이다. 우러러보아야 하는 곳이어서, 부지불식간 이곳에 사는 분들은 우리에게 늘 높은 존재로 여겨지니, 그들은 밑에 사는 백성이라고 우리를 늘 아래로 보고 있지 않을까? 런던의 다우닝가 관저나 워싱턴의 백악관이 괜히 시민과 같은 눈높이에 있는 것이 아닐 게다. 건물은 더 심각하다. 지금의 청와대는 전두환을 이은 노태우 대통령 때 지었는데, 정통성에 콤플렉스를 갖는 통치자일수록 권위적 건물을 짓고 싶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이다. 조선왕조의 궁을 탐했을까, 봉건 시대 건축의 형식을 빌려 지었으니 이 건물은 시작부터 또한 시대착오적이었다. 우리의 옛 건축은 의당 목조로 지어야(p. 125)하건만 이 큰 규모에서는 무리여서, 콘크리트로 모양만 목조 건축의 흉내를 냈을 뿐인 천하 없는 가짜다. 게다가 내부 공간은 외부의 크기를 유지하느라 어마어마하게 높고 크다. 방문하는 이들이야 잠깐 머물다 가면 되지만,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는 그 허망하도록 경직된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 결국 몸도 마음도 정신도 그렇게 될 개연성이 짙다. 그래서 그런가? 이곳에서 산 우리 대통령들의 마지막은 늘 불우하였다. 게다가, 안 그래도 소통이 안 된다고 공격받는 현재의 대통령인데, 시대와 불통하고 진정성과 담을 쌓은 이 건축에서 살고 나면 그분의 끝 무렵이 또 어떻게 될까?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말을 믿는 나로서는 심히 걱정스럽다. 대통령을 위해서, 우리 국민과 이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 청와대를 다른 장소로 옮겨 다시 지어야 한다. 어쩌면 그게 새로운 시대를 결심하고 알리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p. 127).
사실은 우리 땅의 지명들도 가만히 보면 죄다 그 장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이름 아닌가?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종로에는 원래 종루가 있었으며, 동숭동은 유학을 가르치는 숭교방의 동쪽에 있었다. 인근의 삼선동, 원남동, 연지동 등 모두가 그 이름만으로도 동네의 성격을 알 수 있어 정체성이 분명하니 찾기도 쉬웠다. 사람 이름을 갖다 붙인 서구의 도로와는 품위부터 다르다(p. 150). 2014년에 정부가 전국의 주소를 도로 중심의 체계로 바꾸고 말았다. 서양도시를 흉내 낸 신도시의 지리에는 효율적일 수 있다 쳐도, 골목 많은 오래된 동네에서는 그 공간 형식과 새로운 주소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 강제된 주소이니 민초들이야 어쩔 수 없이 노력하여 익숙해지겠지만, 명심하시라. 새 주소가 우리의 전통적 공간 개념을 지워 동네를 잃게 하고, 결국 땅과 밀착된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그게 두려운 나는 아직도 옛 주소를 쓴다(p. 152).
1989년 내 건축을 하겠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내 건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15년을 김수근 건축 속에서만 파묻혀 산 까닭이었다. 방황을 거듭하다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에 가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내가 의문하던 건축과 도시의 모든 지혜와 해결책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는 각자 가진 게 적어 많은 부분을 서로 나누며 살 수밖에 없다. 그 나누는 삶이 집 밖의 길에서 이뤄진다. 이곳의 길은 통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며 모이고 즐긴다. 특히 산비탈 지형에 따라 이뤄진 길은 그 형태가 절묘하여, 넓다가 좁다가 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내 어릴 적 살던 곳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해방 후 월남하여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하신 까닭에 나는 피난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물 하나, 화장실 하나를 가운데 둔 마당에서 북새통을 이루며 모여 살던 풍경, 많은 것을 나누며 살던 어릴 적 정겨운 모습들이 그 달동네에서 현재화된 것이었다(p. 213). 삶에 대한 진정성으로 가득한 이 절묘한 공간들을 어떤 현대건축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달동네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위험하기도 해서 재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건축이 우리 삶을 지속시키는 기억의 저장소인 한, 이런 아름다운 공간은 재개발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라면 내가 건축하는 이유일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울의 달동네라는 곳을 모두 가보고 확인하며 내 건축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92년 가을, 새로운 건축에 뜻을 같이하며 논쟁하곤 했던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4•3그룹'이 건축전을 가지면서 서로의 주장을 내어놓자고 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빈자의 미학’이라고 이름하며 이 방향으로 내 건축을 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더러는 이 말의 뜻을 높이 사며 격려도 했지만, 일부는 너무 종교적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내 건축을 미리 한정하는 데 대한 질책과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갖는 아름다운 가치를 이미 감지했으므로 실천만이 내가 안아야 할 과제였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 방법론이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도시와 건축은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했으며, 20세기 초 서양에서 주장한 기능주의를 비판했고, 그들의 목적적 건축 공간보다는 비어 있는 우리의 옛 공간이 삶을 훨씬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p. 214) 말했다. 그리고 이 소란한 시대에 침묵의 건축이 더 가치 있다고 그 책에 썼다. 졸렬한 책이며 거친 글이라 해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 내용을 고칠 수 없다. 그사이 시대는 21세기로 변해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으며 기술도 더욱 발달했지만,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이 나아졌을까? 하루에도 마흔 명이 가난 혹은 외로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절망의 사회, 3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수장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만 한 이 야만의 시대....'헬조선'이며 ‘혼용무도’라고 했다. 결단코 우리는 20여 년 전보다 나은 사회에 있지 않다. 그러니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 하다고 한 다짐을 나는 아직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나를 가둔 이 '빈자의 미학'이 때로는 위험한 무기가 되었다. 그 책에 발문을 쓴 건축가 민현식 선배는 나를 근본주의자라고 낙인하며 그렇게 살라고 일렀다. 타협하지 않아야 했으며 내 영역이 아니면 얼씬거리지 않아야 했고, 나를 더욱 달구기 위해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서 등을 돌려야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남은 게 무엇일까? 수많은 적들? 비아냥거림과 욕설? 가난한 내 주변들? 아니다. 이런 결과는 오히려 스스로를 다듬게 하는 동기가 되니 감당할 몫이다. 요즘 들어 내가 못 견뎌하는 것은, 내가 쏟은 말과 글이 누구에게는 상처로 남은 일이다(p. 216) 좋은 글쓰기가 좋은 건축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글쓰기 자체가 너무도 두려워지니 이제야 주변이 보이는 까닭일까?(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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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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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안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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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저자 가운데 한 명인 유홍준의 책이다. 안목(眼目)이란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이라고 설명한다. 분별력이든, 안목이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독서도 안목을 넓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읽는데 언제나 만족할 만한 안목이 생길려나?
높고, 깊고, 넓은 안목
박규수는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의 어지러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분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62년 임술농민봉기 때는 백성을 무마하는 안핵사로 진주에 파견되었다. 그곳의 상황을 살펴본 후에는 지금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단순히 이 지역 수령들의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p. 18) 전정, 군정, 환곡 등 사회 전반의 문제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역사책에서 진주민란은 삼정의 문란 때문에 일어났다고 배우고 있는 대목이다. 박규수에게는 이처럼 세상의 추이를 보는 안목도 있었다. 그는 말년엔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가회동 집에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 모아 개화사상을 가르칠 정도로 안목이 원대했다. 지금 시대에는 찾아 보기 힘든 대안목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이 시기 역사를 전공하는 내 친구인 안병욱 교수에게 그의 안목에 대해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안 교수, 박규수는 안목이 대단히 높았던 것 같아." 그러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박규수의 안목은 깊었어." 이에 우리는 안목이 높으냐, 깊으냐를 놓고 한참 논쟁을 하였다. 이때 마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만나게 되어 누가 옳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신의 대답은 또 달랐다. "둘 다 틀렸어. 박규수의 안목은 넓었어." 확실히 박규수의 안목은 보기에 따라 높고, 깊고, 넓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같은 안목이라도 분야마다 그 뉘앙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고, 현실정치•경제•사회를 보는 안목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굴지의 안목들이 버티고 있어야 역사가 올바로 잡히고, 정 치가 원만히 돌아가고, 경제가 잘 굴러가고,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를 보는 눈이든 세상을 보는 눈이든 당대의 대안목을 기리는 뜻이 여기에 있다(p. 9).
고려청자의 허망한 마지막
그러나 일반인들은 여전히 고려청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려청자는 대부분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정확히는 도굴된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사용할 수저, 거울, 도장 등과 함께 청자 다완·주전자•향로•꽃병•술병•연적 등을 부장품으로 넣어주었다. 그 장례 풍습 덕에 고려청자가 훗날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무덤 속의 고려청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말 개항 이후 일본, 미국, 유럽 등의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의 민속 자료를 수집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대포를 앞세우기 전부터 민속학자, 지리학자, 고고학자, 식물학자를 보내 식민지로 삼을 지역의 실상을 조사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고분들이 대낮에 도굴되었다.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미국, 유럽으로 국보급 고려청자들이 무더기로 실려나갔던 것이다(p. 48) 1905년 초대 통감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최고의 장물 아비였다. 그는 고급 청자를 마구 사들여 메이지 일왕과 일본 귀족들에게 선물하였다. 그 숫자가 수천 점에 이른다. 그런 이토가 어느 날 고종에게 고려청자를 보여주자 고종이 "이 푸른 그릇은 어디서 만든 것이오?"라고 물었단다. 이에 이토가 "이 나라의 고려시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고종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것이오" 이 허망한 말이 결국 고려청자에 대한 조선의 마지막 기록이다(p. 49).
간송의 전설, 넷
이런 증언들을 통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간송이 우리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것이 불과 23세 때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이 23세 때 나는 육군 일등병이었다. 다른 사람도 그나이엔 아직 입지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자도 나이 서른에 뜻을 세워 30세를 이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둘째로, 간송이 전 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수집하였다고 하는 데 재산 규모가 그렇게 방대한 줄은 몰랐다. 간송의 증조부는 지금의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의 모태인 배오개시장의 상권을 쥐고 있는 거상이었고, 그 재력으로 전답을 구입하여 6만 석을 갖고 있어 당시 1년에 수확하는 쌀로 기와집 150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양자로 들어간 작은 집 또한 4만 석 부자여서 결국 간송은 10만석 지기로, 당시 국내 자산 서열 및 연간 소득이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간송이 이를 상속받아 자산을 늘리는 대신 우리 문화재 수집과 육영사업으로 돌린 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셋째는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책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간송은 생전에 〈고미술품 수집여담〉을 간혹 남겼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자신(p. 186)의 수집벽은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도쿄의 유명한 고서점 거리인 간다에 무시로 드나들며 고서를 모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학생 시절 이미 수장 목록이 공책 한 권을 채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간송은 미술품뿐만 아니라 '간송문고'로 불리는 수만 권의 고서를 소장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서점인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고서 수집과 아울러 출판까지 하고 또 이를 통하여 《훈민정음 해례본》도 구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집안에 재력이 없었다면 간송은 책과 함께 사는 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넷째는 간송의 그림과 글씨 솜씨가 참으로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1991년 간송미술관 정기 전시회에서 처음 본 간송의 그림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 간결함과 갈끔함, 거기에 어린 고고한 멋과 은은한 문기는 당대 최고가는 문인화로 꼽아 한 점 과장됨이 없다. 그런 서정의 뿌리가 결국 간송미술관을 이루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다 간송에게는 불굴의 집념과 집요한 추구, 그리고 사업을 해도 얼(p. 187)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추진력과 실천력이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일본에 있던 영국인 미술품 수집가 존 개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을 인수한 과정이다(p.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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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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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불치의 병에 걸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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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집에 시집간 여동생. 그 남편이 가망없는 암 환자가 되어 오빠의 병원에 입원했지만 그 누구도 환자에게 암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말만 하다 결국 죽게 된다. 그 모든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동생은 그 집을 떠나는 일을 감행한다. 죽을 병이라면 환자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겠는가?
환자에게 병명을 끝까지 숨기고 싶어하는 환자 가족이 제일 싫었다. 좋은 예후가 예상되는 초기암의 경우에 숨기고 싶어하는 가족은 거의 없다. 환자와 가족이 서로 격려해가며 씩씩하게 투병 태세를 갖추는 걸 볼 때처럼 의사로서 보람을 느낀 적도 없다. 환자의 상태가 중기나 말기라는 걸 알았을 때는 어떤 가족이든지 충격을 우려해 환자에게 알리는 걸 망설이게 되지 만 항암치료나 그 밖의 민간요법을 받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중에는 집요할 정도로 환자(p. 141)에게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속이려 드는 가족이 있다. 점점 나 빠지는데도 환자로 하여금 점점 좋아진다고 믿게 하는 걸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효자도 있고, 여러 형제 중에서도 장남이나 어느 한 사람이 정확한 병세를 자기만 알고 딴 형제한테는 비밀로 해 두는 경우도 있다. 영빈은 그런 효자가 가장 미심쩍다. 직업 외적인 육감 같은 거긴 하지만, 죽음을 이용해서 뭔가를 꾸미고 있구나, 음흉한 계략이 개입된 것처럼 느낀 적도 있다. 임종이 임박해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상 바로 옆에서 또는 병실 복도에서 유산을 둘러싼 동기간, 친척간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런 가족들이다. 환자가 생전에 숨겨놓은 자식이라도 있다면 이런 염치 불구한 분쟁은 영안실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복잡한 이유 없이도 충격 받으면 투병의지를 잃고 더 일찍 죽을까 봐 우려하는 착한 마음으로 환자를 속이는 경우가 실은 더 많다. 영빈은 그런 착한 마음에도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죽을병 들었을 때, 그의 주치의나 가족이 어떡하든 그를 속이려 든다고 바꾸어 생각해도 그는 모욕감을 느낀다. 개인정보가 예금액서부터 지문까지 어딘가에 차곡차곡 입력되어 있을 이 공포스럽도록 발랑 까진 대명천지에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변고를 나만 모 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내 몸은 무언가? 이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가장 확실한 나의 것이기도 하고 내가 일생 받들어 모신 나의 주인 이기도 하다. 내 몸을 가지고 비록 자식이라도 나를 속여먹으려 든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영빈은 암 전문의답게 그 정복되(p. 142)지 않는 미친 세포 때문에 수없이 절망하기도 하고, 치를 떨기도 여러 번 했지만, 그놈의 세포에도 미덕은 있다고 생각한다. 거의 확실하게 죽음과 생존기간을 예고해주고, 죽을 때까지 정신은 말짱하다. 그 짧은 기간이야말로 마음속 깊이 원하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동안이 아닐까.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너무 적다. 영빈은 특히 자기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시간을 낼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도 그가 원해서 된 건 아니었다. 피할 수가 없어서 되었을 뿐이다. 결혼도 피할 수가 없으니까 했고, 일을 피할 수가 없어 휴식을 못 해봤고, 여행도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여행만 해봤지, 여행이 목적인 여행은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선택은 아니지만 어떻게 죽느냐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선택을 아주 잘함으로써 생존기간을 의사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연장시킨 환자를 영빈은 많이 알고 있다. 영빈도 좋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죽을병을 아니라고 속이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를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p. 143).
그 대신 저녁엔 집에 일찍 들어가 같이 고수부지로 조깅도 나가고, 늦도록 베란다에 마주 앉아 포도주도 마시면서 술주정이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얘기를 담아두지만 말고 털어놓도록 유도를 했지. 술이 하루하루 세지면서 차츰 말을 하기 시작하더군. 그 애는 시집 식구들이 합세해서 교묘하게 송 서방과 자기를 속여먹었다고 믿고 있어. 송 서방이 암이라는 걸 알까 봐, 온 식구가 그렇게 철통(p. 260)같이 뭉쳐서 그가 죽는 순간까지 비밀을 지킨 것은 순전히 송 서방 이 처자식을 위해 유언이나 그 밖에 대책을 세울 기회를 안 주기 위한 거였다는 거야. 어때? 형, 고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의 상상력치곤 너무 끔찍하잖아. 그렇지만 난 지금까지의 각종 정황으로 미루어 그게 사실이라는 걸 믿어. 송 서방도 그 애도 철저하게 속은 거야. 송 서방은 모르고 속고, 그 애는 알고도 속아주고. 둘 다 속여먹기 좋은 순진덩어리들이었으니까. 그 맹한 계집애는 이제 와서 Y그룹 맏며느리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손인가, 그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미치고 팔짝팔짝 뛸 것 같은가 봐. 만약 송 서방이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 자기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바로 알았더라면 이렇게 처자식을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죽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거지. 원망이나 후회, 의심 따위가 결국은 다 돈 문제로 귀결되더라구. 우린 가난뱅이도 아닌데 그 모든 게 다 돈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 이가 갈리는지. 영묘 말에 의하면 식구 중에선 시할머니 한 분만 손자가 죽을 병 걸린 걸 모르고 끝까지 살려보려고 애썼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이 가고 의지가 됐었는데 지금은 또 한 번 속는 것 같아 그분도 밉다는 거야. 하루하루 치매기가 더해 가는 할머니 시중을 영묘한테 만 전담시키면서 시어머니가 한다는 소리가 잘만 하면 할머니 명의로 돼 있는 이 집을 너한테 물려주실지도 모르니까 잘해보렴, 비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한다는군(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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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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