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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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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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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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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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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아픈 현실을 몇 년째 마주하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라는 절망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의학계에 몸담았고 ‘죽음학 전도사’라 불리는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가 함께 펜을 들었다. 바로 신간 『죽음, 삶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의 저자 정현채, 이현숙 부부의 이야기다-교보문고.
의사가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근사체험 (2) 사후통신 (3) 삶의 종말체험 (4) 사망 시 물리적 현상 (4) 영매 (5)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환생 연구이다. 나는 근사체험만 인정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읽은 책들이 죽어갈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위염이나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및상부위장관 연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을 포함해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죽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공부하면서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중학생부터 80대까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800여 회 넘게 강의를 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비관적이 되거나 자살 충동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예요. 제가 산증인이죠. 인간의 죽음 전후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에 대 해 알면 알수록,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밀도 있고 충만 하게 살아가게 되거든요.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조차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가족과 친구는 더 말할 나위 없죠.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다뤄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갖고 태어나는데, 자살을 한다는 건 그 과제를 너무 빨리 내팽개쳐버리는 거예요. 도망친다고 그 과제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과제를 잘 다루게 될 때까지 형태만 바뀐 채 계속 마주 치게 돼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면서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나요? 해결하지 못 한 채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경험을요(p. 19).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이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잘 아물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 사람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자살 충동을 갖게 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마흔 명 가까이 자살한다고 하니, 매일 200명 내지 400명 넘는 사람들이 지인의 자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서둘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선택만은 하지 않아야 해요. 저는 4년 전 침윤성 방광암 진단을 받고, 방광 전체와 그 옆에 인접해 있는 전립선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소장 60센티미터를 잘라내고 만들어 넣은 인공방광에는 괄약근이 없어서 자율적인 배뇨 조절이 안 돼요. 일정한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해서 밤잠도 세 시간씩 끊어서 자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비관하지는 않아요. 30년 전만 해도 방광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비닐 소변주머니를 밖에서 연결해 부착하고 지내야 했는데, 수술법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p. 23).
자살하는 순간 후회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 신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하며 살아간다고 해요.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3년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교(금문교)에서 투신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2퍼센트의 사람들을 다뤘어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토머스 조이너 교수가 그 사람들과 면담한 결과, 투신해서 수면에 떨어지기까지 4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고 해요.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만 빼고"(p. 38).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곳이 강이였으니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고층 빌딩이었다면 떨어지는 순간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들죠.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중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랬어요.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20층 계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창문틀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때마침 20층에 사는 주민이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 학생은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추락했다고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오피스텔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어요.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이 여성은 이미 사망한 것처럼 보였어요. 호흡도 없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죠. 그런데 출동한 경찰관 중 한 명이 혹시 모르니 응급조치를 해보자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얼마 뒤 이 여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났어요. 그리(p. 39)고 살아나서 한 말이, 경찰이 들어왔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른 경찰관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속상했다는 거였어요(p. 40).
죽는 것 외에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면, 가족이나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세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걸 겁내지 마세요.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금 그곳보다 더 나쁜 곳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요. 70년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p. 42).
케네스 링과 친절 바이러스
근사체험 연구에서 케네스 링 교수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 코네티컷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근사체험에 대해 가르쳤어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데도 근사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마찬가지로 겪었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한 거예요. 케네스 링 교수는 근사체험을 '친절 바이러스Benign Virus'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은 근사체험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체험자와 비슷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런 변화를 저나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발견해요. 한 중견기업의 대표는 평소 까칠한 편이었다는데, 죽음학 강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난 뒤로는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상해졌다고 했어요(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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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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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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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의 만화가 최호철과 만화평론가 박인하가 함께한 여행기『펜 끝 기행』. 같은 학교 교수로 만나 떠난 제주도 교직원 연수에서 결성된 두 만화쟁이 '펜 끝 듀오'의 여행은 이후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다시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된다. 화가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최호철과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박인하. 만화에 붙들린 두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최호철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박인하는 최호철의 크로키 북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함께한 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만화를 봤다. 지금은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만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런 책들을 찾아 읽을려고 한다.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규슈
한 일 두 나라는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 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 축제가 벌어지는데, 가만 보면 두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벚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벚꽃은 봉오리가 오르기 시작해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벚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일기 예보에 민감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 꽃잎이 떨어지면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 반면, 일본 사람들은 화려하게 만개한 뒤 흩날리는 벚꽃을 즐긴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웃. 결국 이런 미세한 차이가 모여 문화의 차이가 되고, 문화의 차이는 풍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본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자마다 여러 설명을 더하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일본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일본 미학이다.
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던 날, 두 만화쟁이는 학생들과 함께 후쿠오카를 찾았다. 후쿠오카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 특별히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나 꼭 가야 할 곳을 생 각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 없이 찾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활화산 아소 산. 그 웅장한 모습은 대단했다. 아소 산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정식 명칭은 아소고다케인데, 다섯 개의 분화구마다 사실 다른 이름, 다카다케(1592미터), 나카다케(1506미터), 에보시 다케(1337미터), 기지마다케(1326미터), 네코다케(1433미터)로 부른다. 버스로 전망대 인근까지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면 쉴 새 없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은근하게 풍겨나는 유황 냄새, 곳곳에 자리 잡은 대피소, 은근히 겁을 주는 가이드의 말이 어우러지(p. 243)면 현재 진행형 활화산의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 피어오르는 활화산의 기운을 바라보니,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배를 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소 산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은 약 400년 전, 전국 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통치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면 낯설지만, 한자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읽으면 익숙하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깨진 바로 그 장군. 적의 공격에 대비한 120개의 우물과 조선 성의 장점을 차용한 축조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거대함 속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마모토 성의 모습 그 자체가 일본, 사무라이를 느낄 수 있는 너무나 일본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일본적인 풍경은 활활 불타오르는 아소 산과 전국 시대 의 칼바람이 담겨 있는 구마모토 성이 아니라 그 살벌함과 함께 일상을 살았을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소 산 자락 아래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모습이었다(p. 244).
이 책을 쓰고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p. 276)
최호철 선생과 나는 같은 직장(청강문화산업대학)에 다닌다. 둘 다 만화창작과 선생이다.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황제펭귄처럼. 낯설지는 않으나 내 주변에서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신기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5월마다 찾아오는 불량 만화 화형식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않은 만화인들이다. 최호철 선생은 화가였다가 만화를 붙들었고, 나는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붙들었다. 더 정확히 우리 둘은 모두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일단 빈 종이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추락하면 농담을 날리고 싶다. 전자가 최호철 선생. 후자가 나다. 하지만 둘 다 천성이 숫기가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은근 부끄럼쟁이들. 그래서 낯선 이들하고 떠들고 노는 것보다, 친한 이들과 수다 떠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선생들은 보통 직장인들과 달리 사우나 아줌마 분위기를 풍긴다.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꽤 많다. 최호철 선생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난 최호철 선생의 화집을 뒤적이며 농담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월간 무가지 〈백도씨〉를 기획할 때였다. "우리 여행 간 거 내가 글 쓰고, 선생님이 그림 그려보세요." "만화? 나 마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일단, 방어막을 친다. 역시, 공력이 대단하다. "그냥 한 쪽짜리 그림을 그리자고요. 한 쪽짜리 만화, 그게 최호철 스타일이 잖아!" 나도 다시 공격한다. 왠지 느낌이 낚은 것 같다(p. 277).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최호철 스타일 아닌가?" 낚았다. 파닥파닥!
그렇게 해서 〈백도씨〉에 '두 만화쟁이의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낚은 죄로 글을 썼고, 최호철 선생의 애간장 다 태우는 마감에 동참했다. 몇 번 빼먹은 적도 있지만, 한 스무 번쯤 마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한때 사슴굴이라고 불렀던 최호철 선생의 개성 넘치는 연구실 소파에 앉아 뒹굴면서 이야기를 하다 한번 책으로 묶어보자는 생각이 번득였다. 최호철 선생은 낙서라고 하지만, 그냥 묵히기 아까운 그림이 많은 그의 크로키 북이 생각났다. "〈백도씨〉에 연재한 만화하고, 그와 연관된 크로키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봅 시다." "재미있을까?" "재미없으면 사람들이 만날 선생님 크로키 북 달라고 해서 보겠어요." "너무 성의 없게 그렸잖아." "성의 있게 그리면 마감 못하잖아요." "..." "또 그냥 그 시간에,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이 난 좋던데." "그럽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다. 그림을 모으고, 글을 고쳐 썼다. 최대한 여행지의 느낌을 사람들이 느껴주길 원했다. 여행에는 휴식과 수다가 공존한다.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 좋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지식을 공유하고, 느낌을 나누는 여(p. 278)행이 좋다. 이 만화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글과 함께 그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최호철의 그림은 읽히는 그림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크로키 북에 그린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라본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으며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면 어떨까?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보 같은 개그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수다가 주는 세계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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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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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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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는 야욕과 애증, 배반과 음모로 뒤엉킨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통해 그림 동화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기류 미사오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역사 속 처형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근대 유럽까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이 책은 역사 속 처형장을 통해 인간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광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엄청난 피를 흘려 왔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황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들과 신의 이름을 내건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처형의 만행과 광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품절됐다. 이 저자의 책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도 대출했다.
이처럼 맹수를 이용한 처형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보급되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죄수의 팔다리를 묶어 자유를 구속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몸을 묶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간단한 무기도 사용하게 함으로써 관중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잃기 전에 맹수를 한두 마리쯤 해치우는 강한 죄수도 나타났다. 어쨌든 죄수와 맹수의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처형은 일종의 연극으로 연출되었다. 예를 들면, 죄수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분장시켜 쇠사슬로 바위에 묶은 다음 대머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거나,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죄수가 곤봉을 들고 나와 황소와 싸우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황소가 죄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자 죄수가 생겨나면서 연극 마지막 부분에 음탕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곰이나 당나귀의 습격을 받는다는 설정도 선보였다고 한다(p. 23).
콜로세움에서 펼쳐진 다양한 잔혹극
역대 황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검투사 경기는 범죄자나 반역자의 잔혹한 죽음을 선보이는 것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려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마 콜로세움 안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서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수많은 잔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타르에 적신 셔츠를 입은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또는, 팔다리가 묶인 채 커다란 솥 안에서 끓는 기름에 튀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했다. 성 로렌스(Sento Rorense)는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졌고, 성 포류카르프는 화형대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다. 성 폰시아노(Sento Pontianus)는 쓰러질 때까지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를 걸어야 했고, 성 아르테 미오(Artemius)는 맷돌에 몸이 으깨져 죽었다. 손발이 잘려 나가거나 내 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채 매달린 자들도 있었다. 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 위에서 끌려 다닌 자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남녀 수십 명이 한꺼번에 기둥에 묶여 처형된 적도 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처럼 보였다고도 한다. 관중들은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질지를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p. 24). 당연히, 역대 황제들도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피의 향연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는 기원 전 65년 안찰관이었을 때 검투사들을 320쌍이나 동원해 성대한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us) 황제도 검투사를 1 만 명 정도 동원해 검투사 경기를 여덟 차례, 맹수 3,500마리를 이용해 맹수 사냥을 스물여섯 차례나 개최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황제 시대에는 한 경기장에서 검투사 500쌍이 동시에 겨루는 일도 흔했다. 잔혹한 취미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목이 잘린 검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죽은 자의 투구를 벗기게 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검투사 경기는 잔혹한 취미를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한 절호의 수단이었다. 맹수 사냥에서는 범죄자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죄수가 필사적으로 자비를 호소하면 그 혀를 잡아 빼라고 명령한 다음에 온몸의 상처가 곪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도 박해로 유명한 폭군 네로도 30일에 걸쳐 잇따라 경기를 열었다. 그는 맹수를 풀어놓아 어린이를 포함한 5,000명을 물어 죽이게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로마 제국 안에 존재하는 난쟁이들을 모조리 모아 검투사 집단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미녀들로 이루어진 검투사 집단도 만들게 해서 경기장에서 난쟁이와 미녀를 싸우게 한 뒤 그것을 최고의 유흥으로 삼았다고 한다. 코모두스(p. 25)(Comedits) 황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정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 맡겨 버리고 검투사 경기에만 열중, 자기 자신도 검투사로 자주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 그가 음모를 품은 검투사 한 명에게 침실에서 암살당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p. 26).
사실은 이랬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남자 몇 명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어떤 자는 이쪽, 어떤 자는 저쪽' 하는 식으로 햇불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의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에 따르면, 이 수상쩍은 무리가 네로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집정관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폭력의 피해자
어쨌든, '네로가 방화를 명령했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네로는 소문을 불식시키려고 방화범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단시되어 마법을 부리고 유아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금지 정책을 펴도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교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터라 네로는 이번 화재를 구실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먼저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심문을 당했고, 이어서 그들의 고백을 토(p. 67)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죄 혐의를 받았다. 순교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로와 12사도인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림감이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이는 짐승의 가죽을 덮어쓴 채 개 떼에게 내던져져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원형 경기장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온몸에 타르가 발라진 상태에서 기둥에 묶여 날이 어두워진 뒤 등불 대신 불을 밝히게끔 했다. 네로는 처형 장면을 구경하라며 바티카누스 (vaticanus) 왕실 정원을 제공해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면서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단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도 네로의 인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점차 제국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화재 뒤처리 등으로 인해 그 해의 국고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 결과 재산 몰수라는 극단적 상황에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때문에 다시 막을 연 반역죄 재판의 판결은 모두 유형이나 사형이었다(p. 68).
14~17세기 유럽에서는 마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한 뒤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마녀 재판의 폭풍은 약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프랑스 로렌(Lorraine)에서 1576~1606년 동안 2000~3000명. 보르도에서 1577년에만 400명.
• 독일 트리에르(Trier)에서 1587~1593년 동안 368명. 뷔르츠부르(p. 121)크에서 1623~1631년 사이에 900명. 밤베르크에서 1623~1633 년 사이에 600명.
이것만 보아도 마녀 재판의 희생자가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30만 명(9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p. 122). 마녀를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유럽 하늘을 끊임없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불안감을 해소하는 돌파구로 선택된 것이 '마녀'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려 잔혹하게 처형했다. 마녀 사냥이 무서운 것은 증거 없이 소문과 풍문만으로도 마녀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녀 재판이 성행했던 원인으로는 첫째, 당시의 사회 불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혹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를 앗아간 페스트의 유행,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종교 개혁 운동 등, 격동의 상황에서 민중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력을 써서 날씨를 나쁘게 만들고, 밭농사의 수학물을 줄이고, 태아를 유산시키고, 남자를 성불구로 만들고,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악마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유럽에 휘몰아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로마 교황은 수도회를 결성해 이단 탄압에 나섰다. 마녀 재판의 전신은 13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탄생시켰다. 이른바 '이단 심문' 제도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교나 관헌을 능가하는 권한을 가지고 오로지 그리스도교 국가 전역에서 이단을 박멸하는 사명을 맡았다(p. 123). 그리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요한 22세가 내린 1318년 2월 27일 교서에서 '마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 앞으로 보낸 이 교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녀 재판을 시작하고 지속하여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 마녀 재판 해금 명령에 박차를 가하듯,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326년, 1327년, 1330년, 1331년에 계속 마녀 재판 강화 명령을 발표 했다. 이 강화 명령에 따라 이단 심문관의 마녀 사냥이 급격하게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p. 124).
마녀 재판 그 자체도, 심문, 자백의 공술(고문을 통한 자백도 포함해서), 단죄 선고, 그리고 처형(대부분이 화형)이라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피고를 한시라도 빨리 죽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마녀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교회 소유가 되었고, 마녀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여기에서 조달했다. 간수의 식대, 처형 담당자의 술값, 교살을 할 때 들어가는 밧줄 대금, 화형을 할 때 쓰는 장작과 기름값 등, 모든 비용을 여기에서 인출해 썼던 것이다(p. 165).
기요틴에 광란하는 사람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자, 국내의 무거운 공기는 사라지고 단번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장소에 모여 오직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잊고 희망 없는 미래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거리 도처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특히 인기를 모았던 것은 회원이 한정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무도회'였다. 가까운 친척이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들만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일부러 큰돈을 주고 근친자가 기요틴에 처형되었다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 주위에 칼자국을 모방한 빨간 리본을 묶었다. 남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마찬가지로 빨간 리본을 목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현실을 받아들여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면 이런 식으로 불행을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p. 298).
마지막 공개 처형
프랑스에서 기요틴을 이용한 처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그때마다 형장에는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처형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는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이, 당시에 신축된 에펠탑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와 잔혹함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그 뿌리가 무척 강한 듯싶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기요틴 공개 처형은 1939년 와이트만이라는 살 인범의 처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축제 소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처형 전날 밤, 형장이 될 베르사유 감옥 앞 광장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기요틴 처형을 한 번이라도 직접 구경하려고 나무와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들, 건물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소란스럽게 전야제를 보냈다. 가끔씩 말 잘하는 사람이 농담을 던지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의 귀에도 들렸다니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자 정부도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그 뒤로는 기요틴 공개 처형을 금지했다. 이후의 처형은 각각의 감옥이 위치한 안마당에서 이루어(p. 300)졌으며, 처형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관료 아홉 명뿐이었다. 잔혹함의 상징인 기요틴 처형대는 감옥의 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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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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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7】 죽음을 통해 삶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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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의사가 쓴 책이다. 직업상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그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는다.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라도 언젠가 있을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는 독일 격언처럼, 죽음은 말기 암에 걸린 나의 환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우리에게도 내일 당장 올 수 있다. 죽음은 자신이 찾아가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인생에서 얼마나 기막힌 일을 겪었는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자비도 연민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과 접촉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미래에 반드시 닥칠 죽음의 길에 대해서는 아무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p. 7) 아이러니한가(p. 8).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 따르면 사람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p. 8)거쳐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육신이 늙어 가는 것처럼 마음도 육체와 함께 자연스럽게 노화하다 수용의 단계에 이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상에 호락호락하게 얻어지는 건 없는가 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을 배웠거나 삶의 과정에서 죽음과 가까이 맞닿아 있었던 사람들은 죽음을 잘 수용한다. 내가 본 바로는 자식을 앞세운 부모나 장애인이 그랬다. 삶이 고달팠던 사람에게 죽음이 좀 더 쉬운 걸 보면 인생은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아직 죽음이 다가오지 않은 보호자도 환자와 같은 마음의 단계를 거치는 것을 보면 죽음의 5단계는 삶의 5단계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죽음은 예고편 없이 들이닥쳐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므로 폭력적이지만 누구에게나 딱 한 번 오기 때문에 공평하다. 그 한 번을 '잘' 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한다(p. 9).
호스피스 의사로 있으면서 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나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불행의 근원은 내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인생 목표였던 경제적 풍요, 지적 우월, 공부 잘하는 자식, 자상한 남편과 부모는 내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p. 20).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 다잉 지도자 자격증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 없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거나 죽음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자연스레 긍정적인 죽음관에 이르는 것 같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져서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다. 긍정적인 죽음관도 나쁜 소식을 안 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나쁜 소식을 알리는 것은 가족 사이의 정이 두터운 우리나라 사람들이(p. 31) 가장 어려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죽음관도 없다는 것이다(p. 32).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 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쳐버린다(p. 37).
'이제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환자가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으로 숨기기만 하면 환자는 비현실적인 희망 뒤에 드러난 절망을 감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게 환자는 남겨진 삶을 여행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나쁜 소식을 알고 난 뒤의 부정은 참된 긍정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 과정은 반드시 지나간다.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이 그 자체로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 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p. 41)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 42).
죽어감과 죽음에 대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죽음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임상의학적으로만 설명하자면 임종의 단계부터 임종에 이르는 시간까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임종에 들어가기 며칠 전부터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잠자는 시간이 길어진다. 사나흘을 내리자고 잠깐 가족의 얼굴을 알아본 뒤 다시 깊은(p. 54)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몸은 탈수현상을 일으키고 분비활동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소변을 볼 수 없고 폐의 점액질이 줄어든다. 그러면서 복부의 고통이 덜해지고 구토감도 없어지고 기침도 하지 않게 된다. 몸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말기 섬망이 와서 정신이 산만해지는 일도 있는데, 그럴 때 병원은 적절한 약을 쓰기도 한다. 대체적으로는 편안히 잠든 상태처럼 보인다. 그래도 가족이 애타게 부르면 눈물을 흘리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 가족들은 환자의 손을 잡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종교 음악을 틀어주거나 성경이나 경전의 구절을 들려주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수포음이라고 하는 호흡 소리가 들리는 일도 있다. 호흡은 불안정해지고 몸과 얼굴에 불수의 수축이 일어난다. 대소변이 나오지 않고 검은 눈동자는 커진다. 근육이 이완되고 심장이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난다. 임상의학적인 '죽음과 죽어감'은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만큼 힘들지 않다(p. 55).
호스피스 병동은 삶과 죽음의 교과서다. 처음 호스피스 생활을 시작한 5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테두리를 벗어난 타인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내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배운 것은 행복, 애정, 이해, 연민처럼 따뜻한 단어들만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히 얽힌 돈과 사랑, 그것들이 빚어낸 갈등과 비극에 관해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죽음과 죽어감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안식이 되지만, 갈등이 있는 가족은 죽음을 비극으로 만든다. 안타깝지만 그 또한 인생인 것이다(p. 80).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있고 그중에는 참고 견디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시간조차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결국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지금 행복하지 않고, 미래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결국 삶과 죽음의 열쇠는 행복과 희망에 달려 있을 것이다(p. 122).
플라톤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와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호스피스 의사가 된 뒤 신이 인간에 게 내린 최고의 선물은 모르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03년 독일의 세터너가 꿈의 신인 몰페우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약을 사람들은 마약이라고만 알고 있고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준다(p. 156).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이라야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 187).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이 멋진 것은 죽음 이전에 빛나는 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남에게 기쁨을 주며 살았던 사람은 갑작스런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 중 하나는 결국 좋은 죽음은 좋은 삶에서 비롯된다는 진실이다. 좋은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야 한다. 좋은 죽음이 좋은 삶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좋은 삶은 좋은 죽음을 상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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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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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중 전장연 회장, "약속 지키고 화합 위해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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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초 북경에서 있었던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 임원수련회 임원회에서 장로 부총회장 예비 후보로 추대된 이해중 장로가 후보직을 고사했다.
이해중 장로는 4월 7일 종로 소재 여전도회관에서 모인 서울·서북지역장로회협의회 고문·임원회의·자문위원회 및 중앙위원연석회의에서 신상 발언했다.
이 장로는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다. 약속은 분명히 지킨다. 저로 인해 서울·서북장로회나 전국장로회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약속을 지키고 화합을 위해 장로회의 본질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해중 장로의 후보직 고사 이유 중 하나는 내년 112회 총회에 같은 노회 진용훈 목사(성림교회, 서울지역노회협의회 대표회장)가 부총회장 후보로 나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동일 노회에서 임원이 두 명이 나올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기에 이해중 장로가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신상발언 전문이다.
존경하는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 임원, 중앙위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장로님 여러분께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오늘 저는 개인의 명예보다 공동체의 안녕을, 그리고 변하지 않는 약속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최근 우리 공동체 안밖에 흐르고 있는 여러 오해와 엇갈린 시선들을 지켜보며, 서울•서북지역장로회 명예회장이자 전국장로회 회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왔습니다. 이에 제 진심을 담아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저의 결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추대의 무게와 고뇌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3월 2일, 북경 임역원 세미나 자리에서 저는 사전에 어떠한 요청이나 의사 표명 없이 제111회 교단 총회 장로부총회장 후보로 추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과분한 신뢰와 기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는 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그 순간부터 저는 '공인' 이라는 이름 아래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의 무게를 깊이 감당해 왔습니다. 그 이후 저는 제 개인의 입장이나 신상을 앞세우지 않은 채 신중한 태도로 임해 왔습니다. 여러 상황 속에서 쉽지 않은 시간도 있었으나, 그 모든 과정은 회피가 아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절제와 인내의 시간이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약속은 제 삶의 근간이자 신앙의 원칙입니다.
저의 거취와 관련하여 교단 안팎에서 보내주신 많은 관심과 지지, 그리고 권면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당회와 노회, 증경단을 비롯한 여러분들께서 간곡한 뜻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왔으며, 이를 한 번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과거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 후보로서 여러분 앞에 밝힌 저의 정견과 약속은 지금도 변함없는 저의 신앙적 양심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개인적인 가능성과 기대를 내려놓고, 오직 '장로회의 화합'이라는 본질적 가치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며, 서로를 세우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때입니다. 장로는 화합의 통로가 되어야 하며, 교회의 본이 되는 존재로 서야 합니다. 저 또한 한 사람의 장로로서 끝까지 약속을 지키며, 이 공동체를 위한 작은 마중물이 되겠습니다.
그동안 저를 믿고 세워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 과정 속에서 저와 함께 마음 고생이 깊으셨을 이희근 회장님께도 진심 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 안의 모든 오해와 감정이 씻겨 내려가고, 부디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장로회의 거룩한 위상을 바로 세우는 이 길에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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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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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6】 베트남 전쟁에 얽힌 인간사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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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여러 해 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그동안 내용을 다 잊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베트남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베트남 다낭은 아직까지는 비싸지 않은 관광지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간다. 오죽하면 ‘경기도 다낭시’라고 하겠는가? 아무생각 없이 쉬고 오다가 갑자기 베트남전이 떠 올랐고 이 책이 떠 올랐다. 역시 황석영은 대단한 작가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전에 대한 여러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권-
영규는 행정이 무엇인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늪지대를 목과 총만 내놓고서 허우적거리며 건널 적에도. 사실은 상황실의 작전 장교들이 커피잔을 들고서 삼각자와 컴퍼스로 내리긋는 좌표 위에 그들이 헤매고 있다는 상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영규는 보급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활주로의 모퉁이에 서서 씨레이션과 탄약을 싣기에 분주한 헬리콥터들을 구경하기만 했다(p. 24).
팜 민의 대답은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엄청난 질문이었다. 그러나 민은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았다. 죽음의 가운데를 향하여 제 발로 찾아들어온 자가,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팜 민은 머리털이 곱슬곱슬하고 치열이 가지런하던 교사 출신의 동료를 떠올렸다. 그의 시체가 지금쯤 중부 산악지대의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이제는 나무와 풀숲의 덩어리 가운데서 거기가 베트남의 어느 곳인지 모두 잊어버렸다. 시체가 일어나서 걷지 않는 한 그것은(p. 114) 그 잊혀진 자리에서 도마뱀과 파리떼에 뒤덮여 소멸되어갈 것이다. 폭격에 맞아 가족들의 곡성에 둘러싸여 죽음을 당하는 것과는 달랐다. 게릴라는 이름도 정체도 과거도, 그리고 얼굴도 없는 자가 아닌가. 탄이 말하고 있었다. "알리지 못하는 게 아니야. 우리의 죽음은 베트남 민족해방에 바쳐지는 거야. 그러므로 네가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야 할 곳은 단 한군데....민족해방전선뿐이다. 신념없는 죽음처럼 참혹한 것은 없어."(p. 115).
팜 꾸엔은 이 낙관에 찬 단순한 동남아 전문가들의 머리에서 나온 신생활운동에 대해서 전혀 확신하지 않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의 상황과 국면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일찍이 고문관의 눈에(p. 154)들었던 모기약논쟁 때처럼 문제제기를 피하는 대신 그들의 사고에 영합하는 쪽이 훨씬 이롭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성장의 기획자인 팜 꾸엔이 이런 계획에서 미국은 무조건 지원하고 빠져라 한다면, 이는 곧 베트남에서 미군이 나가라는 논리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팜 꾸엔은 부서가 바뀌거나 아니면 다른 사소한 일로 책임을 지 고 전선으로 쫓겨가게 될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미국의 전쟁이라는 생각을 퍼뜨리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참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지혜롭게 표현할 줄 알았다. 남부 베트남과 중부 이남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신생활촌을 그들은 미꾸어도(미국촌)라고 불렀던 것이다. 괌 꾸엔은 혼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주의이고, 그러나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입장이며 드디어는 싱가포르나 타일랜드쯤에 정착하고 싶은 개인적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싸이공대학의 우수한 법률학도였다. 그는 이른바 도시부르주아의 자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다낭 시내에서 가장 큰 약종상을 경영했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그의 집 창고에는 투본 일대의 계피가 늘 산더미처럼 쌓여서 다른 지방의 중개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언제나 계피 향내가 났고 온갖 이름도 모를 건과와 약재가 뜨락에 빈틈없이 널려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 세대의 남자들이 반 이상이나 죽었는데도 요행히 수를 누리며 유복하게 살았다. 부친은 고혈압으로 목욕중에 죽었다. 베트남의 여러 촌락들이 네이팜이나 소이탄으로 곤죽이 되던 1940년대와 50년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욕탕에 누워서 운명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숙부가 있었다. 숙부는 후에에 살고 있었다. 그는 부친과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항불운동에도 참가했고 젊을 때에는 프랑스에 가서 노동을 하면서 안남청년노동동맹에도 들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으(p. 155)로 17도선의 분단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을 선택했을 때 그는 후에에 남았다. 그는 한의사였다. 팜 꾸엔은 사남매의 장남이었다. 위로 누나가 있는데 쾅나이로 시집갔다가 몇년 전에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바로 아래 남동생 팜 민은 아주 내성적이고 얌전한 후에의과대학 학생이었고, 그 아래는 리쎄(중고학교)에 다니는 레이라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팜 꾸엔의 모친은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평생 고생 않고 살아온지라 나약하고 결단성이 없는 분이었다. 그러나 교육은 미션 계통의 학교를 나왔고 집에서는 엄한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팜 꾸엔은 내심으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시절 해방전선에서 관여하는 어느 독서클럽에 나갔다가 검거된 적이 있었고, 그의 친구는 두 손 열 손가락의 손톱마다 대나무침을 박고 비명을 지르다가 미쳐버렸다. 그는 칸라오에게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풀려났다. 칸라오는 디엠의 동생 고 딘 누의 비밀경찰조직이었다. 그의 도덕적 결단은 시초에 어긋나버렸고, 디엠이 붕괴할 때까지 그 자괴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때 굳게 다짐했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 그는 허무주의 자였다. 아니 주의도 아니었다. 그는 돈을, 그것도 국제통화인 달러를 모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계속 모아서 그는 이 나라를 빠져나갈 작 정이었다. 그곳은 동양의 낙원 싱가포르였다. 그는 먼지나는 일번도로 위를 행정시찰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싱가포르의 야경을 상상하곤 했다(p. 156).
도 쭈끄: 나는 마흔여덟입니다. 모든 전쟁을 보았지요. 직업은 농부지요. 나는 해방전선이나 정부군이나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발 내 마을에서 전쟁의 포연이 멀리 가기만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날 미군들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우리 가족은 아침을 먹고 있었습니다. 미군들의 명령에 따라 집을 나선 우리는 다른 마을 사람 여러 명과 같이 광장으로 몰려갔습니다. 미군들이 우리에게 모여서 앉으라고 명령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어요. 모든 사람들은 웃고 농담도 하며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미(p. 242)군들이 기관총을 걸어놓은 것을 보고 그제야 눈치를 채고 울고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사람들 몇은 정부 발행의 신분증을 미군에게 보여주었지만 미군은 그저 미안하다고만 말했지요.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다리를 다쳤는데 계속해서 쓰러지는 송장들 틈에 깔려 목숨은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 두 딸과 아내를 그 자리에서 잃었습니다. 한시간쯤 죽은 체하고 누웠던 나는 송장을 헤집고 나와서 밀림으로 달아났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사람들이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웃으면서 미군을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돌아 갈 나의 마을과 가족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다시는 미군을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p. 243).
영규가 병장에게 물었다. "갖다 팔려고 산 건 아니지?" "왜요, 팔다뇨. 사기두 어려운데 어디다 팔아요?" "레이션 카드 없나?" "그게 뭡니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게 당연했다. 어느 놈들 몇몇이 그들이 구입할 수 있는 구매카드를 가로채서 그 수량만큼을 수령해다가 현지에 팔아 먹고 있는 것이다. 영규가 말했다. "연합군은 누구나 레이션 카드가 나오게 되어 있어. 그게 없으니까 물건을 뺏긴 거 아냐" "그런 소리 처음 들었습니다." 병장은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졌다. 영규는 그것도 잘 알았다. 전투에서 방금 풀려난 자는 누구나 그 자리를 떠나면 대단히 섬약해지는 것이다. 술을 마신 것 같은 감정의 흥분 때문에 정상적인 후방의 분위(p. 289)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영규는 작전에서 돌아와 우편물로 도착한 신문들의 극장 광고를 훑어보면서 죽죽 울었던 기억이 났다. 거기에는 자신의 극단적인 순간이 빠져버린 채로 사람들의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무기를 가졌다면 그는 자기를 쏘거나 거리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런 사람이 돌아간다. 집에 가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로 그는 서서히 되살아나거나 변모하겠지. 그런데 이백 달러를 어쩌겠다는 건가(p. 290).
-하권-
중대장도 말했다. 팜 꾸엔은 풀밭의 사방에 널린 갖가지 모양의 시체들을 또 한번 돌아보았다가 풀 위에 엎질러진 흰 뇌수와 그 위의 파리떼를 보았다. 갑자기 구역질이 울컥 솟았다. 파리는 죽은 자에게뿐만 아니라 또한 산 자의 살냄새와 땀냄새를 찾아서 차별없이 날아들었다. 팜 꾸엔이 코와 입을 막고 대숲을 빠져나오자 뒤에서 대대장이 따라오며 물었다. "실장님, 괜찮습니까?" "괜찮소. 속이 좀 거북하군." 대대장은 침을 뱉더니 팜 꾸엔의 팔을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런 일은 정글의 작전지역에서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또 실장님께서 명령을 문서로 내려준 것도 아니잖습니까?" 팜 꾸엔은 이젠 대대장의 교활함에 진저리가 나서 쏘아주었다. "이봐요 소령, 이 작전의 지휘관은 바로 당신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나는 연락장교야." 그러나 대대장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요, 우리야 사단과 군단의 계통에 따른 명령을 수행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시라니까요." "염려?" "네, 여기가 어딥니까? 그들은 거의 우리 베트남 민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라오스 국경까지의 산악에 사는 카투족입니다. 저들은 온 부족이 해방전선측에 가담했습니다. 카투족은 호찌민 루트의 안내인들입니다. 병사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p. 245). "여기서 정글의 서쪽까지 다 그런가?" "그렇다고 봐야죠." 팜 꾸엔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글과 산은 베트남 사람의 것이오. 이제부터 어느 마을에서도 잔류한 주민들은 후송하지 마시오." 수색소대가 협곡 안으로 출동했고 다른 소대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참호를 파고 방벽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팜 꾸엔은 이번의 계피작전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곧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계피가 거기 있는 한,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p. 246).
"행운을 빈다."
스태플리는 돌아보지 않고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탐조등 불빛이 가끔씩 번쩍, 하면서 바다 위로 미끄러져가는 게 보였다. 토이와 영규는 담배를 한대씩 물고 지켜보았다. 그 다음부터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스태플리의 껑충한 몸집이 왼편 초소로 다가가자 초병과 뭐라고 얘기하고, 이어서 그 중위인 듯한 자가 나와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철망 울타리를 통해서 그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게 보였다. 오른편 초소에서 미군 SP가 나왔다. 그의 흰 헬멧이 보였다. 뭐라고 묻는 듯했다.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다시 다른 SP가 초소에서 나왔다. 그들은 경계선 철망 쪽으로 다가서면서 또 뭐라고 물었다. 중위가 돌아서서 대꾸하는 듯했다. 그때 스태플리가 부두 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헤이,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뒤에는 길 건너편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돌아와, 정지, 정지, 곧이어서 짧은 연발사격의 총성이 들렸다. 토이와 영규는 스태플리의 몸집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맞았다, 라고 토이가 중얼거린 듯했다. 영규는 초소를 향하여 달려 갈 자세로 몇걸음 내디뎠고 토이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소용없어. 우리에게 불리하다." 울타리 안쪽에서 차츰 여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늘어가고 있었다. 토이가 영규를 잡아끌었다. 그들은 세워둔 지프차로 돌아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 질주했다. 영규는 펜던트를 손아귀에 꽉 쥐고 있었다. 토이가 핸들을 잡고 전방을 응시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는 운이 나빴어." 영규는 꼭 스태플리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울고 싶었(p. 314)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p. 315).
"잘 아는군. 너는 뭐 해먹고 사나? 너는 배신자야, 여기서 우리 전선의 약식재판을 하겠다. 첫째, 너는 피치 못할 병역의무를 마친 뒤에 도적의 정보기관에 자진해서 투신했다. 더구나 그 적은 외국세력이다. 둘째, 너는 현재의 전민족적 투쟁을 외면하고 해방전선의 역사적 과업을 정탐 방해하여왔다. 셋째, 그것을 미끼로 애국자를 협박하고 금전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전선 남지구위원회는 인민의 이름으로 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말을 마치고 그가 차례로 돌아보자 사내들이 각각 사형, 이라고 되받았다. 토이는 미처 변명할 틈도 없었다. 마주앉은 자가 말했다. "우리는 파렴치한과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한다. 우리의 투쟁이 올(p. 334)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곁에 있던 사내가 팔을 크게 휘둘렀고 토이는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멍청하게 자기 배를 내려다보고는 옆으로 넘어졌다. 그의 배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짧은 대나무막대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지방게릴라들이 마을에서 처형하는 식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토이의 몸을 뒤져 보관증을 찾아내고는 재빨리 그 집을 떠났다. 길 건너편에서 박스 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그들은 차에 탔다. 구엔 타트는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났다. 사내가 그에게 종이쪽지를 내밀자 그가 말했다. "찢어버려." "어떡하실 겁니까?" 구엔 타트는 명랑하게 대꾸했다. 지하로 들어가야겠지(p. 335).
스태플리와 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토이의 죽음은, 무수히 죽고 다쳐서 한줌의 재로 아니면 팔다리를 잘리고 병신이 되어서 실려간 다른 한국군 병사들의 것처럼 욕스러운 것이었다. 영규는 자기연민 때문에 자신을 향하여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영규의 뺨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나는 이제 지쳤다,라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목이 아팠다(p. 339).
폭음과 함께 불길과 화약냄새가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중사가 먼저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드르륵 하는 연발사격의 소리가 들렸고 뒤미처 달려들어간 영규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어림하여 사격했다. 거의 천장에 닿을 듯이 쌓아올려진 밀가루포대가 넘어져오면서 검은 사람의 몸집이 한데 밀려 떨어졌다. 천장에 매달린 갓 달린 전등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영규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영규는 얼핏 총구를 그 사내의 몸 위에 겨누었다. 사방에 찢겨진 포대에서 날아오른 밀가루의 흰 연기가 자욱했고 베트남 사내는 영규를 올려다보았다. 영규는 그가 팜 소령의 아우임을 알아보았다. 그의 구부러진 팔 옆에 AK47 자동소총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총을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영규는 그대로 몇발 더 쏘았다. 사내의 몸이 근거리 사격의 충격으로 꿈틀거리더니 곧 동작이 멎었다. 밀가루포대는 붉게 젖어갔다(p. 340).
혜정이 말을 꺼냈다. "제 부탁은 딴게 아니구요, 짐은 부쳤거든요. 이게 화물넘버하고 확인증이에요. 부산에 내리시면 통운에다 이 주소로 부쳐만 달라구요." "그렇게 하죠." 영규는 의정부 어딘가로 적혀 있는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사는 집의 주소 쪽지를 건네받았다. "잘 가세요" 혜정이 일어났다. 영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열식을 하는지 연합군의 노래가 취주악으로 연주되고 있었다. 영규는 탁자 위에 돈(p. 347)을 놓고 일어섰다. 길 건너편에서 흰 원피스 자락이 흔들리며 인파 속에 묻히고 있었다. 영규는 배를 향해 걸어갔다. 새벽까지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며 빈둥거리겠다던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알았던 그 어느 얼굴과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p. 348).
해설: 베트남전쟁과 제국의 정치-임홍배
베트남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이 가장 야만적인 폭력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 전쟁이다. 알다시피 북베트남의 잠수함이 미군함정을 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을 자작극으로 날조하여 침공의 구실로 삼은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시작한 것은 1964년이지만, 이미 그전부터 미국은 냉전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베트남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이 베트남에서 물러난 공백을 틈타 다시 베트남의 식민지배를 노린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는 과정(1946~54)에서 미국은 후에 그들 자신이 직접 10 년 동안 벌인 전쟁에 쏟아부은 군사비의 절반이 넘는 막대한 군비를 프랑스에 지원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항불투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제네바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어 있(p. 349)었지만, 구식민지 지배권력을 충실히 계승한 남쪽정권에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6년 제네바협정의 합의사항인 총선거를 무산시키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군대의 장교집단으로 구성된 남베트남의 부패한 독재 권력을 무조건 지원하는 모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거대 제국의 의지를 작동시키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지배고리를 보철하기 위해 미국은 냉전체제의 종주국답게 남베트남을 잃으면 자유세계가 무너진다(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발언)는 이른바 '도미노이론'을 앞 세워서 베트남에 대한 무력개입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지작업을 병행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표면상 2차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과는 달리 식민지배가 목적이 아니라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대의 명분을 얻는 듯했지만, 정작 서방세계 안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한 그러한 명분과 무관하게 중요한 것은 2차대전에 투입된 연합군의 군비 총량을 능가하는 엄청난 무력으로 미국이 베트남을 유린했다는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제국주의적 침략의 딱지를 떼어내려는 온갖 호도지책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책략이 침략의 명분으로 동원될수록, 종전의 제국주의를 능가하는 폭력이 아무런 금기 없이 그만큼 더 무자비하게 행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제국적 독선과 제국주의적 폭력의 완벽한 결합물이라는 사실은 베트남 민중의 입장에서 본 베트남전쟁의 성격과, 미국의 '우방국'으로 참전한 한국의 역할, 그리고 베트남전쟁의 이 모든 국면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파헤친 황석영의 역작 『무기의 그늘』을 이해 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p. 350).
미국과 함께 집단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우리로서는 전쟁에 짓밟힌 베트남인들이 과연 승리한 투쟁의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되묻게 된다. 해방전선의 투사로 참여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예담 1999)에서도 통절하게 확인되지만, 해방투쟁에 승리한 베트남인 자신들에게 정작 전쟁의 승패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승리를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동족에 대한 사랑을 죽음으로 지켜낸 무수한 베트남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이 살아남은 자에게 고통스런 중압만은 아니라는 것도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바오 닌 과 마찬가지로 해방전선 투사였던 또다른 베트남 작가는 전선에서 죽은 친구의 이름으로 작품활동을 하면서, 해방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뜨거운 인간애야말로 전쟁도 파괴하지 못한 베트남인들의 영혼임을 역설하고 있거니와, 전쟁의 상처와 폐허를 딛고 베트남인들이 그들(p. 364)이 갈망하던 평화로운 삶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일구어갈 수 있는 희망의 조건도 그런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무기의 그늘』을 30년 전 베트남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소설로 읽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1991년 걸프전을 끝낸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제 베트남전쟁의 악몽을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고 호언함으로써 걸프전이 베트남전쟁의 연장선에 있음을 본의 아니게 실토한 적이 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이라크를 강점 한 채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강요하고 있다. 『무기의 그늘』을 통해 베트남전쟁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냉정하게 되새기는 독자에게는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명할 것이다(p.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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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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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5】 미술가 이면의 흥미로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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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기에 적당한 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술가들의 이면에 있는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어떻게 영웅시되고 또는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언제나 이런 책이 재미있다.
고흐의 명성이 사후에 폭발적으로 확산된 데에는 동생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봉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형의 죽음 직후 테오마저 요절하자, 요한나는 고흐의 유작과 서신을 정리하며 형제의 편지를 엮은 《반 고흐 서간집》을 출간했다. 이를 통해 고흐는 단순한 인상주의 화가가 아닌, 내면의 고뇌와 예술적 열정을 지닌 비극적 천재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요한나는 고흐의 작품을 유럽 각지의 전시에 출품하며 그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갔고,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과 맞물리며 고흐를 '잊힌 거장'에서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끌어올렸다. 고흐가 '고통받는 천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된 데에는 당시 예술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의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낭만주의 이후 예술가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세속과 타협하지 못하는 순수한 존재, 혹은 사회에 의해 오해받는 비극적 영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고흐는 그러한 인식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생전에 정신 질환을 앓았고, 가난에 시달렸으며, 귀를 자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일화는 그의 예술적 고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색채와 고통은 분리되지 않은 채 수용되었고, 이는 20세기 대중문화 속에서 고흐를 '예술가-순교자'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앞서(p. 16) 말한 대로 《반 고흐 서간집》은 이러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수많은 전시와 평론, 영화와 소설, 심지어 팝송까지 고흐를 현대인의 정서적 우상으로 만들었다. 고흐는 더 이상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삶과 예술, 고통과 창조의 상징이 되었다. 고흐의 명성은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미술 시장에서도 폭발적인 상승세를 보이게 된다. 198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붓꽃〉이 5,390만 달러에 낙찰되며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고, 1990년에는 일본의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가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구입하며 또 한 번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에도 고흐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상징적인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꾸준한 수요와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제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전 지구적 문화 자산이자 시장 가치가 입증된 하나의 예술 브랜드로 기능하고 있다(p. 17).
미술사학자 낸시 모울 매슈스Nancy Mowl Mathews 역시 "고갱은 마치 에로틱한 에덴을 발견한 양 세상을 속였지만, 실제 그는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묘사한 낙원은 허구일 뿐"이라며 신화 너머의 고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갱은 유럽에서 부인 메트를 학대해 가정을 파탄 냈고, 타히티에서도 현지 주민 및 프랑스 식민 당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마르키즈 제도에서 경찰과 성직자들에 의해 '문제 인물'로 지목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고갱이 편지와 저작에서 그린 '남태평양의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자화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폴 고갱의 타히티 생활은 모순으로 가득한 이중적 삶이었다. 그는 문명을 떠나 낯선 땅에서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며 빈곤과 병고에 시달렸고, 실제로 고독하고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타히티는 결코 '오지'가 아니었고, 고갱 역시 완전히 현지에 동화된 예술가라기보다는 식민 사회의 이방인으로 서구와 원주민 세계를 오가는, 복합적 위치에 놓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히티의 현실을 왜곡했고, 상상 속 원시 낙원의(p. 39) 신화를 창조해냈다. '타히티의 고갱'은 결국 고된 현실과 이상화된 환상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신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가 남긴 찬란한 색채와 풍경 뒤에는 병든 몸과 외로운 정신, 그리고 식민적 시선으로 형성된 왜곡된 '낙원'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갱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그 예술이 만들어진 배경 역시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 속 타히티는 예술적 열매이자 식민적 욕망이며, 예술가를 이해하는 그간의 방식이 남긴 문제적 유산이다(p. 40).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켈란젤로가 만년에 다수의 스케치와 밑그림을 스스로 불태웠다는 일화다. 그는 제작 과정의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작품이 마치 신의 손에서 '완성된 상태' 로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는 또한 '천재'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자기 신화 전략의 일부였다. 즉, 서명뿐 아니라 '과정' 자체를 감추는 것 역시 자기 연출 방식이었던 셈이다(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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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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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4】 아픔을 통한 삶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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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특히 암)에 대해 쓴 개인적인 에세이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던 저자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다. 이런 경험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질병 경험에 대한 ‘서술’을 넘어 질병 경험에 대한 ‘사유’로, 저자 자신이 질병을 경험하면서 배운 것들을 짚어가며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의미를 묻고 재의미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질병은 우리의 유한한 이 땅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된다.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협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 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p. 8)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p. 9).
의원, 병원, 전화통화 등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간에 의학의 진찰과 치료는 오직 질환만이 논의 대상이라고 모든 사람이 믿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기서 질환은 측정될 수 있는 것이고 기계론에 기반을 둔다. 의사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내가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의식하며, 그래서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들을 때 더욱 입을 다문다. 질환에 관련된 질문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느끼는 것들이 바로 질병이다. 내 삶에 관해 묻고 싶은 질문이 있지만 허용되지 않고 말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는 생각해서도 안 된(p. 29)다. 내가 느끼는 것과 말해도 괜찮다고 느끼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내 목소리를 삼킨다. 의사들은 보통 예의 바르게 질문에 대답해주지만, 질문을 하려면 답변이 어떤 용어로 돼 있을지 예상해야 하며 결국은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질문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의사와 간호사들은 과중한 스트레스와 업무에 시달릴 때가 많고, 그리하여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전문가다운' 활동의 경계 밖으로 너무도 자주 밀려나곤 한다(p. 30).
몸 이외에 잃은 것들도 있다. 캐시와 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친구와 친척들이 우리를 염려하고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이후 최악의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더는 예상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곁을 지켜줬고 어떤 이들은 사라졌다. 질병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와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부부는 내 질병을 외면한 이들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상실의 일부다. 캐시와 내가 삶에 걸었던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일을 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성취하고, 아이들을 낳아 자라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우리 부부가 함께 늙 어가리라는 기대가 평범해 보이던 때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무엇이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인지, 캐시와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삶에 거는 순진한 기대를 잃었다는 것이 질병을 겪으며 얻은 수확으로 보일 날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상실로 느껴진다.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p. 66),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 캐시와 내가 함께 겪은 것이든 나 혼자 만의 것이든 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운이 좋았기에 아내와 함께 애도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상실 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은 상실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p. 67).
질환은 신이 보낸 메시지가 아니고, 질병은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다. 이런 관념은 질병을 둘러싼 신화 중 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한편 신화는 기회를 보여주기도 한다. 기회는, 질병은 그저 생길 뿐이지만 삶을 의미 깊게 만드는 방향으로 우리가 질병 경험을 엮어낼 수 있음을 깨닫는 데 있다. 믿음을 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의지를 가질 때 바라는 대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의지 둘 다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질병을 몸의 뜻에 맡기는 동시에 의학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깊은 믿음은 가장 적극적이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때 가장 잘 싸운다(p. 144).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자리에선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하늘 한구석의 죽음이겠지"라고 폴 사이먼은 노래했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p. 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p. 191).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일상적인 것을 소중히 하며 사는 기회도 준다. 여기서 나는 다시 '덤으로 얻은 삶'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삶을 덤으로 받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건강이나 질병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질병에 대한 공포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건강만을 원하는 욕망 또한 넘어설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질병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 가져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덤으로 얻은 삶이란 강물 위에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 내가 질병을 겪으며 배운 교훈 중 반절이 있다.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p. 222).
이 시는 내가 배운 것의 반절일 뿐이다. 햇빛을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혼자만의 것이다. 삶이 주는 기쁨을 이루는 나머지 반절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기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반쪽들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가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정하고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나만의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나만의 것은 하늘은 파랗고 강물은 반짝인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내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나는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뻗어 나가는 세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암 초기, 통증이 심했던 어느 날 밤에 본 풍경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서리 낀 창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보았다. 창에 비친 자신이자 세계를 보며 내 몸의 통증 밖에 존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창문이 세계의 일부인 것처럼 내 통증도 세계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창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통증도 이 세계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창을 보며 배운 교훈을 수 세기 전에 쓰인 중국의 경전인 『도덕경』은 이렇게 표현한다(p. 223).
세계를 네 자신처럼 여겨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믿음을 가져라
세계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수 있으리라
강물 위에 빛나는 햇빛을 소중히 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빛이 거기 계속 비칠 것을 상상하고 믿을 수 있을 때, 나는 이 세계 너머에 속하는 평화를 느끼며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 있을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 때, 여기 있어서 행복하다. 하지만 반드시 여기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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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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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S 미래전략 포럼...“변화시대 속 지속적 발전방안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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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S(이사장 양대식 목사) 미래 전략 포럼이 4월 6일부터 8일까지 화성 서해마루유스호스텔에서 열렸다. 현재 세계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이는 세계 선교 현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GMS 선교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 미래를 대비하고, 함께 지혜를 나누는 나눔의 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날 양대식 이사장은 '리더와 문제해결'이란 제목으로 설교하고, 최근 발간한 『리더와 문제해결』을 선교사들에게 한권씩 선물했다.
개회예배는 허성회 선교사무총장의 인도로 이성수 선교사가 기도, 약 1:5을 봉독했다.
양대식 이사장이 ‘리더와 문제해결’이란 제목으로 “포럼을 위해 전세계에서 참석해주신 선교사님들의 열정이 대단하시다. 최근 『리더와 문제해결』이란 책을 발간했는데 리더는 매우 중요하다. 첫째, 리더는 문제 해결자이다. 저는 이민목회 17년, 현 교회 목회 19년을 지나오며 담임목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문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한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둘째, 초기에 문제 해결해야 한다. 리더는 신뢰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진실해야 한다. 인정 받아야 된다. 셋째, 리더는 희생해야 한다. 넷째,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다섯째,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여섯째,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적은 자와 관계가 깨져도 힘들어진다. 관계는 주고받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설교하고 축도로 예배를 마무리했다.
예배 후 허성회 사무총장이 참석한 이사들을 소개했다. 이후 발제와 토의, 논찬의 시간을 가졌는데 GMS 선교 사역을 위해 이후 내용은 비공개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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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