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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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소위 “스타” 목사 박영선, 김문훈의 몰락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몰락했다. 한때 한국교회를 들썩였던 스타 목사였다. 박영선 목사는 내가 신학교 시절이던 80년대 신학생들을 매혹했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는 잊혀졌는데 최근 뜬금없이 개척교회 40억 요구 건으로 언론에 언급되다 결국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김문훈 목사는 교역자에 대한 욕설 녹음이 공개된 후 고신 교단 부총회장직과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감추었던 그들의 실체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한때 그래도 깊은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었는데 망연자실하다. 목사는 타종교와 달리 쉽게 팬덤이 형성되고 스타 반열에 오른다. 불교, 천주교에서 이들처럼 명성을 떨친 이들이 있었는가? 기독교는 설교 중심이다보니 설교를 잘 하는 자는 주목을 받는다. 과거 전병욱도 그랬다. 스타 목사의 이면과 몰락을 보며 다시한번 다짐한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지 말자.” 인간이란 잘 난 것처럼 보여도 다 그렇고 그러니 너무 높이지 말고 따르지도 말자. 그랬다가 이처럼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것이 없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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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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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단상】 세월은 빠르다
    2026년의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벌써 1월이 사라졌다. 2월은 28일 밖에 되지 않으니 더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세월은 물살과 같다. 빠르게 흘러간다. 이때 그물을 내려두면 물고기를 건질 수 있다. 흘러가는 시간을 넋놓고 있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같은 시간을 어떤 사람은 낭비하고, 어떤 사람은 많은 일을 한다.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기보다는 무엇이라도 의미있는 일을 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시간을 10 시간처럼 생산성 있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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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9
  • 【북토크338】 존엄사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단식 존엄사는 말 그대로 굶어서 죽는 것이다. 다양한 존엄사 방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불법이다. 이 책의 배경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저자의 모친은 단식 존엄사를 택했다. 의사인 딸의 도움으로 단식의 과정을 잘 거치고 3주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도 존엄사가 합법인 국가에까지 가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을 반영한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나 또한 때가 되면 말 그대로 존엄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64세에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서지 못하고, 몸의 쏠림 현상이 생겨 진행성 소뇌실조증 진단을 받았다. 이런 병에 걸리면 동작 간의 조화를 통제해주는 소뇌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말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생활하게 되고, 구음장애가 생기며,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진다. 말기에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나는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요가를 잘했다. 집에서 열정적으로 재활하다가 83세에 몸을 뒤집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 쉽게 사레들리고,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악화됐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매일 온갖 불편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단식을 통한 자주적인 존엄사를 결정했다(p. 6). 3주 동안 점진적으로 단식을 실행했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머니를 돌보고 함께해드렸다. 하늘이 도운 덕분에 모두 순탄했다. 어머니는 육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극락왕생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일련의 과정을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안락사 문제에 몹시 관심 있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완에서 일반 대중은 죽음을 터부시하며, 안락사는 아직 합법이 아니다. 우리와 존엄사의 거리는 여전히 아득하기만 하다. 1. 80퍼센트는 병원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사망한다. 21세기 의학이 각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며 질환 치료율이 대폭 상승하고 인간의 수명도 크게 연장됐다. 그러나 침입성 치료로 인한 고통도 늘었다. 중증 질환을 치료하고도 삶의 질이 낮아진 경우가 숱하다. 반세기 전에는 대부분 집에서 임종했지만 현재는 80퍼센트가 요양 기관에서 사망한다. 임종자에게 병원은 낯설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당치 않은 장소다. 하물며 어떤 환자는 특수병동에 입원해 짧은 면회 시간만 주어지는데 몸에 각종 튜브를 꽂고 있어 말하기도 힘들다. 많은 환자는 말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허락하지 않거나 말기 돌봄을 걱정하는 가족 때문에 고통스럽고 한스럽게 차디찬(p. 7)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임종 때 삽관, 심장충격기, 심폐소생술CPR과 같은 응급 처치를 받는다. 이러한 '의료사' 과정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2.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년에 달한다. 내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전국 평균 수명은 81.3세이고 남성은 평균 78.1세, 여성은 평균 84.7세다. 그런데 사망 전 건강하지 않은 상태(와상 상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상태)로 보내는 여명이 8.47년에 달한다. 급사 사례를 제외하면 와상 기간이 수십 년에 달하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이 된 왕샤오민은 와상 47년 만에 임종했다. 우리 시아버지와 시숙부님 두 형제는 치매로 인해 누워서 12년을 보낸 후 돌아가셨다. 나는 임신했을 때 안정을 취하느라 집에 누워서만 지낸 적이 있다.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하루가 일 년 같고 머리는 멍했다. 반신불수로 오랫동안 와상생활을 하는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 저를 보내주세요!"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간병하던 사람은 가족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으니 다음 대에 똑같이 넘겨주고 싶을 리 없다. 나는 나중에 이렇게 안 사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무(p. 8)엇 때문에 국민 수십만 명은 이런 무의미하고 존엄하지 못한 삶 을 살아가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서양 선진국과 비교하면 일본은 타이완과 비슷한 실정이다. 마쓰바라 준코는 『장수 지옥』이라는 책에 이 현상을 담았다. 3.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에 대해 미리 의논하거나 당부하지 않는다. 죽음 이야기를 기피하는 일은 인류의 공통된 맹점인 듯하다. 아시아인은 더 심하다. 이미 나이가 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주제를 부모와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화교 중에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에 본인의 사후 처리 당부는 하면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나 생애 말기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사고는 갑작스레 발생하기 마련인데 당사자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되면 당황한 가족은 의견이 분분해진다. 소송을 당할까 두려운 의료기관은 환자를 최대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와상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가족들은 나중에야 후회하곤(p. 9)한다. 이런 적도 있다. 방사선과 교수가 세미나 중에 우리 재활학과에 입원한 환자의 뇌 CT를 보고 상황이 안 좋다며 탄식했다. "CT를 보니 나을 기미가 전혀 없네요. 이 환자의 부인은 나이도 젊은데 생과부로 지내야겠군요!" 가족이 살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한 건지, 외과 의사가 반드시 노력해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평소 죽음에 대해 가족끼리 자주 얘기하고, 의사는 치료 예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4. 당사자가 존엄하지 못한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도 가족이 꼭 그 바람대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위독해지면 중환자실에 보내지 말고, 어떤 튜브나 의료기기로 연명치료를 하지도 말라고, 차디찬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 싫다는 의사를 살아 있을 때 분명히 밝혀두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인투베이션, 심장충격기, 비위관, 도뇨관 같은 것을 모조리 거부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p. 10)을지라도 여전히 그를 깊이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연명치료를 거부했음에도 가족들이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바람에 의사가 어쩔 수 없이 무의미한 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보험금이나 퇴직 연금 때문에 어르신의 생명유지장치 제거를 거부하며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이어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서글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5. 안락사를 위해 원정 가는 일은 비인간적이다. 췌장암에 걸린 푸다런 선생은 담낭을 절제하고 위도 절반이나 절제한 탓에 소화 능력이 떨어져 무엇을 먹어도 고통스러웠다. 푸 선생은 총통에게 안락사법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보냈다. 총통부에서는 호스피스 도움을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에 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나는 푸 선생에게 며칠만 단식을 하면 스스로 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디어에 나온 푸 선생은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사명감을 갖고 사회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안락사를 공론화하려는 듯했다. 법치, 민주, 인권을 중시하는 선진국에 이러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나라(p. 11)도 신중히 관련 법률을 입법해 국민을 위해줬으면 하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후 푸 선생은 먼 스위스로 건너가 평가를 받고 안락사했다. 경비가 만만치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6. 장기 간병으로 심신이 지친 나머지 가족을 살해하고 양심과 법의 제재를 받는 상황은 인간 지옥이다. 원린현 더우류시에서 2021년 8월 반인륜적인 비극이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을 앓던 장 씨는 세상에 적대심이 생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조력자살을 부탁하고 유서를 남겼다. 장 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 했다. 원린지방법원은 자살방조죄로 장 씨 아버지에게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선고했다. 전에도 어떤 남편이 장기 와상 환자인 아내를 살해한 비극이 있었다. 이런 사건은 자주 일어난다. 간병을 하는 사람과 간병을 받는 사람에게는 살든 죽든 인간 지옥이 따로 없다. 이런 상황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7. 의사는 사망을 의료 실패로 여겨 무의미한 의료가 이뤄진다. 의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고통스럽지만 치료 효과가 없는 질환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치료를 포기(p. 12)할 권리가 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환자, 심지어 의료인조차 의사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확률은 50퍼센트 이하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한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시작 하면 사망해서야 퇴원한다. 가족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암 말기였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요양 하던 몇 달 내내 힘이 조금 없을 뿐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진통제도 필요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는 소파에 기댄 채 나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기도 했다. 떠나기 하루 전에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음식을 못 먹더니 다음 날 평온히 눈을 감았다. 이 것이 의료의 개입이 없는 전통적인 자연사다.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현재 중환자실에서 20퍼센트에 이르는 자원이 무의미한 의료에 사용되어 건강보험 부담을 높이고 다른 환자들이 응급 처치 받을 기회를 간접적으로 박탈하고 있다(p.13). 8. 삶의 의미를 잃고 고통만 남았을 때, 자주적 존엄사의 권리는 엄격한 법률의 제한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불의의 사고와 각종 질환 그리고 의료적 개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유지장치에 기댄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삶에 고통만 남은 채 아무 즐거움 없이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 줄 때, 우리에게 자주적으로 존엄사할 권리가 있을까?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주적 권리까지 제한할 자격이 있는가? 얼마 전 통과된 '환자 자주 권리법'은 어떠한 상황이 됐을 때 환자는 치료 거부, 응급 처치 거부, 자주적 존엄사를 선택할 자격이 있음을 규범화했다. 그러나 20세 이상의 온전한 행위능력이 있는 일부 질환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정부가 정한 범위는 합당한가? 빈틈없이 고려되었는가? 사람들에게는 왜 스스로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없는가? 위와 같은 이유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한 자주적 단식 존엄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국민이 평소에 가족과 존엄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환기하고자 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안락사에 찬성한다는 민간 조사도 있었다. 정부가 하루 빨리 완벽한 대책을 강구해 '존엄사법'이 통과되도록 국민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독려했으면 좋겠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태(p. 14)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자연사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p. 15). 어느 날, 어머니는 가만히 앉은 채 평생 한 적 없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분은 한 번도 '루이야! 이리 와봐'라고 한 적이 없었어." (루이는 어머니의 아명이었다.) 나는 놀란 눈초리로 물었다. "누가?" "네 할아버지 말이야!(p. 142). 어머니는 푸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날 딸로 생각 안 했어. 큰언니랑 큰오빠만 예뻐했지. 중학교 졸업 전에 우리는 남이나 다름없어서 난 아버지에게 말도 못 걸었고 아버지가 염라대왕 같았어. 졸업하고 나서는 돼지 두 마리를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는 내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돼지가 안 큰다고 하루 종일 혼냈어. 근데 난 아버지 안 미워해. 왜냐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난 땅이거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 노년에 투병생활 하실 때 엄마가 제일 자주 찾아 뵀잖아. 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일 효녀라고 하셨어. 아마 하늘에서 후회하고 계실걸. 엄마한테 잘 좀 해줄걸, 하고." 이런 위로의 말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증조할머니가 된, 나이 든 여든셋의 어머니가 떠나기 직전까지 유년기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니 깜짝 놀랐다(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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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2
  • 【단상】 무례한 사람들①
    구굴은 무례(無禮)란 “(사람이) 예의가 없거나 예의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의가 왜 필요한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 빨가벗고 살든,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놓든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살아야하기 때문에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 불편한 것이 있다. 나중에 좌석에 앉는 사람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가운데 자리가 비면 나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중간쯤에 앉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를 밀고 들어온다. 양쪽 사람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불편한다. 그런데 나처럼 가운데 자리에 앉을 때 양 편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자리가 비면 산모를 위한 여성 좌석 옆에 앉는다. 이 자리에 산모가 앉는 경우가 거의 없어 한쪽은 비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좁은 지하철 좌석인데 겨울이라 모두 두꺼운 옷을 입어 더 비좁은데 제발 가운데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앉지 마시기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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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 【단상】 아내와 보리굴비
    취재 가서 보리굴비를 먹게 되었다. 보리굴비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는데 아내 생각이 났다. 30년을 함께 산 내 반려자. 이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먹으면서 목이 메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보리굴비 먹은 것을 말하고 보리굴비를 주문해 먹으라고 했다. 이때 아내 왈 “이제 보리굴비 별로 안 좋아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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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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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넷플릭스 K-드라마, 지옥
    솔직히 말해 별로였다. <오징어 게임>은 흥미진진해서 다음 편이 기대되고 또 기대되었지만, <지옥>은 플롯의 전개가 밋밋하고 진행이 느려서 지루했다. 기대를 뒤엎는 반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깊은 감동을 주는 장면도 없고, 그냥 연상호다운 괴기스러운 장면들만 펼쳐질 뿐이었다. 늘 한국 영화에서 느끼는 스토리의 부재가 문제였다. 겨우겨우 1편을 참아가며 마친 후에는 더 이상 볼 동력이 내 안에 없음을 발견하고 이만 접으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본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에, 그리고 <오징어 게임>에 이어서 또다시 1등을 했다는 소리에, 그리고 주제 자체가 종교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끝까지 보았다. 2편부터는 그래도 1편보다는 진행이 좀 빠르긴 했지만 지루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종교적 질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아니었더면 안 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지옥>이 다루고 있는 주제만큼은 관심이 갔다. 아무튼 연상호의 <지옥>은 왜 전능하고 선하시며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는가라는 문제인 신정론(theodicy)을 다룬다. 드라마에서는 새진리회라는 이단종파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죽을 날짜와 시간을 예고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시간이 되면, 죽음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사람을 태워버린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정진수 의장(유아인 분)은 그건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신(神)이 있다면 분명 공의로운 신(神)일 것이고, 그런 신(神)의 사자(使者)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분명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을 고지당한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자신이 정말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나보다 더 악하게 산 다른 사람들은 왜 멀쩡하게 살아가는가? 죽음이 신(神)의 심판이라는 해석이 그럴 듯 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한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고지를 받은 송소현의 아기이다. 변호사 민혜진은 송소현의 아기 케이스야말로 종교단체 새진리회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상호는 이 드라마를 통해, 이 세상에 신(神) 따위는 없는 것이라고 외치는 셈이다. 그냥 자연 현상일 뿐인데 사람들의 약한 심성을 이용해 종교권력을 사용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훈계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자에 의한 죽음의 고지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사람의 고통들이다. 누구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누구는 암에 걸리고, 누구는 이혼을 하고, 누구는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누구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결국 어느 때인가는 죽는다. 도대체 그런 불행한 일이 그 사람에게 왜 일어나는 것일까? 연상호는 말한다. 그거 그냥 일어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의 잘못을 책벌한다는 것은 저 새진리회라는 사이비 종파나 화살촉 회원들과 같은 사악한 무리들의 주장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를 비웃는다. 사실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를 까는 셈이다. 그는 하나님이란 없다고 외친다. 그러니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죄책감에 시달릴 것도 없고 그냥 무덤덤하게 그게 인생이려니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연상호의 메시지는 들을 게 있다. 종종 탐욕적인 종교인들이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종속화시키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은 종종 사람의 탐욕을 위해 봉사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그건 이단종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통 교회 안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지도자에게 대들어서 병에 걸렸다느니, 헌금을 충분히 바치지 않아서 사고가 났다느니, 종교적 의무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해석"에만 무조건 맹목적으로 추종할 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그게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성경의 해석을 교회로부터 일반인에게로 돌려준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지옥> 드라마는 우리의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참된 사랑뿐이라고 제시한다. 송소현의 아기는 죽음의 고지를 받았지만, 죽음의 사자들이 죽이러 왔을 때 배영재와 송소현은 아기를 감싸 살리고 아기 대신 죽는다.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사랑만이 소망이란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에게 죽음의 고지가 온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박정자가 부활하는 것일까? 그는 억울한 죽음이었으며, 사랑만이 소망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C. S. 루이스는 영화나 소설 같은 것들은 우리 안의 절대자(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메시야를 영화나 소설에서나마 그려냄으로써 그러한 갈망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영화는 – 심지어 반기독교적 영화라 할지라도 – 메시야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연상호의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이고 황당한 엉터리 ‘개독교’에 소망이 없다고 묘사하면서, 동시에 어디 우리를 구원할 참 사랑이 없는가를 외쳤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너만은 살아 나가라” 했던 그런 지영이와 같은 사람 어디 없느냐고 외친다. 그런데, <지옥>도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표방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는 새진리회같은 엉터리 종교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아무런 힘도 없이 죽어나가게 되어 있던 아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을 당하면서까지 아기를 지켜낸 그런 부모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외친다. 그런 참 사랑만이 우리를 살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현실 속에서 부모는 어설픈 사랑뿐이다. 사랑으로 한 일인데, 오히려 아이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정말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참 사랑은 어디 없는가? 그게 <지옥>이 부르짖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여기 참 사랑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분은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고 천한 이 땅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 자신의 살을 내주고 피를 내주어 우리가 살게 되었다. 그게 참 사랑이다. 전능하시면서 동시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왜 이 세상이 이 모양 요 꼴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새진리회식 섣부른 대답은 조롱만 당할 뿐이다.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며,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을 믿는다.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함부로 정죄할 것도 아니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만할 것도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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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애국목회자들”이라... 답답하네요
    김동일 목사 1. “교파를 초월한 애국목회자들이 부산 세계로 교회로부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약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회개대성회를 개최하였다.” 이 따옴표는 친구목사님께서 답답해하면서 올려주신 한 기독교언론사의 기사 내용입니다. 지난 11월 11일 세계로 교회라는 곳에서 “국가 비상 긴급 기도대성회”라는 집회가 열린 모양입니다.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는지 걱정스럽고 한숨만 나옵니다. 2. 우선 기자양반에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기사 첫머리부터 비문(非文)인건 알고 계시려나... “부산 세계로 교회로부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가 무슨 뜻입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애국목회자’와 ‘국민회개대성회’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합니다. ‘애국’ 목회자님들 회개할 일이 있으면 당신들 회개하시면 되지 왜 ‘국민’을 회개시키려고 하나요? 우리나라가 기독교국가입니까? 우리나라가 비상사태라고 말하면 세계가 웃어요... 3. 포스터를 보니,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의 용사들이여, 영적 전쟁 낙동강 전선 세계로 교회로 모입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포스터대로 하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그리고 경상도 일부는 무슨 영적전쟁에서 이미 패한 듯합니다. 도대체 무슨 영적 전쟁에서 이렇게 나라를 다 빼앗기고 자기들만 남았다는 것인지 알아듣게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라면 나머지는 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인데... 저는 제가 왜 ‘무릎 꿇은’ 목사가 되었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어요. 4.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깨닫지 못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치를 하면서 자신들의 극우적 입장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할 목사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삶을 통해 예수를 드러내야할 목사들이 철지난 ‘공산주의’ 타령하면서 결국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 가지 가르쳐드릴까요? ‘목사’라는 타이틀에는 ‘애국’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어요. 그냥 담백하게 ‘목사’면 됩니다. 5. 한국교회가 희망을 회복하려면 우선적으로 태극기 기독교가 망해야 합니다. 신학도, 기독교 역사도 모른채... (어쩌면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해석과 편협한 지식에 경도되어)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없어져야 합니다. 마치 자신들에게 우리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는 듯이 행동하는 ‘애국’목사들에게 회개의 영이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당신들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로도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정립된 ‘정교분리’의 역사적 배경과 내용을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6. ‘애국목사’가 아닌 그냥 ‘목사’로서 부끄럽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화평을 주도해야 할 텐데, 오히려 분열과 갈등과 혐오와 배제에 주력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주장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강화시키는 주동적인 정치목사들, 이념으로 장사하는 목사들에게 마태복음 23:13-36으로 ‘권면’드립니다. ‘Woe to you, 화있을진저’... 『예수로 성경읽기』의 독특성은 저자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성경의 각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 어려운 성경이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고 성경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드러내준다. 이런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대 교회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분명히 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제시하는 그런 책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타내러티브를 집어냄으로 우리에게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가를 잘 짚어준다. 책 속으로 [저자 서문]『예수로 성경읽기』는 성경공부다. 먼저, 역사와 함께 읽는 성경공부다. 아브라함을 수메르-아카드 문명과 함께, 출애굽기를 이집트 문명과 함께, 신약을 그리스-로마 문명과 함께 읽음으로써 각 시대의 삶의 자리(Sitz im Lseben)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신학과 함께 읽는 성경공부다. 초대 교회 이래로 사도적 전통 하에서 성경을 연구해온 수많은 신학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수고가 오늘날 우리의 바른 성경 읽기와 건강한 신앙의 초석이 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통전적으로 읽는 성경공부다. 성경을 부분이 아닌 통(전체)로 읽으며, 신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촘촘하게 탐구하고 연결하고자 한다.『예수로 성경읽기』는 인본주의(Anthropocentric) 성경읽기가 아닌 신본주의(Theocentric) 성경읽기다. 인본주의 성경읽기란 인간중심(man-centred) 또는 내 중심(me-centred)으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자유주의와 번영 신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신적 저작권을 부인하고 인간의 기록으로만 치부했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을 무의미한 조각들의 모음으로 해체하는 우를 범했다. 번영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함의 목적을 땅에서 형통한 복, 자녀들이 잘되고 번성하는 복과 같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들에 둔다. 샤머니즘의 기독교적 버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와 번영 신학은 다른 출발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중심의 성경읽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에 비해 신본주의 성경읽기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다. 성경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올바른 성경읽기란 성경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웅장한 계획을 깨닫는 것이다.『예수로 성경읽기』는 통전적 성경읽기다. 성경전체의 목적,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통일성을 읽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서는 구약과 신약을 부분적(partial), 분석적(analytic)이 아닌 통전적(holistic)으로 읽어냄으로써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자 한다.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는 “거대담론, 전체적 그림, 전체를 포괄하는 이야기, 전체의 주제”를 의미하는데 통전적 성경읽기의 최종적 목표는 바로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곧 메타내러티브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큰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밝힌다. 목차 추천사·5프롤로그·9제1부 통전적 성경읽기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19제1장 통전적 성경읽기를 위한 두 개의 핵심용어·37제2장 예수 그리스도와 새창조의 시작·65제2부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제3장 첫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구원·87제4장 세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십자가·119제5장 다섯 번째 아브라함 언약과 부활·151제6장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181제7장 절기의 종말론적 성취와 예수·213제3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제8장 다윗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247제9장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275제10장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303제11장 예수의 육체로 일으킨 참 성전·337제12장 종말과 요한계시록·369제4부 믿음의 결국제13장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진 예수의 교회·411제14장 교회의 이중적 지위·451제15장 구원의 확신·485제16장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511에필로그·540참고문헌·542미주·545 추천사 심창섭(역사신학 교수) 30년 전, 신학교에서 만난 김동일 전도사님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원우회장으로 좋은 리더십을 가진 실천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곧 도미한 김동일 목사님과는 미국에서 호주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만남을 가지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내가 아는 김동일 목사님은 학위나 여타 스펙을 쌓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만나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신학교 시절의 순수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교회와 목회 현장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진단하는 날카로움과 예리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김동일 목사님의 목회 여정과 닮은 책입니다. 올바로 말씀을 가르치고 자신의 삶을 그 가르침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그의 인생관과 목회관이 이 책에서도 그대로 묻어납니다.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김동일 목사님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성경을 보는 특별한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성경해석학적 안목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어냅니다. 또한 성경을 통해 시대를 읽어갈 수 있는 역사적 지식과 안목도 겸비했습니다. 역사 연구가로서 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책은 그 결정체입니다.이 책의 독특성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성경의 각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 어려운 성경이 구체적이고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한 점입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고 성경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드러내 줍니다. 이런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대에 교회로써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분명히 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제시하는 그런 책입니다. 쉽게 읽히면서도 성경 전체에 흐르는 메타내러티브를 집어냄으로 우리에게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가를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성경과 교회와 삶의 현장이 괴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전달되는 그의 책이 무디어진 우리의 가슴과 지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모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평신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합니다.[전 총신대신학대학원 원장 및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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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6
  • 인생의 목적이 있어야합니다
    현대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 중의 하나가 다이어트입니다. 많은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든 미용을 위해서든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려고 운동으로, 음식으로 많은 애를 쓰기도 합니다. 이 다이어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한 뚱뚱한 남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너무 살이 쪄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고 사회생활에도 자신이 없어 했습니다. 당연히 여자 친구가 없었고 교회에서도 관심 밖의 대상이었지요. 자신의 뚱뚱한 몸 때문에 고민을 하던 청년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다이어트를 결심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조깅과 운동을 생각하고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기도까지 부탁을 했습니다. 청년의 굳은 결심을 보고 목사님은 흔쾌하게 청년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까지 매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하려고 일어나니 목사님의 약속대로 누군가 문 밖에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문을 열어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교회에서 너무 예쁘고 성격도 좋아 남자 청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자매가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자매가 믿을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형제님! 제가 목사님의 부탁으로 형제님의 다이어트를 진심으로 돕기 위해 왔으니 일 년 동안 매일 달리기를 같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당신이 달리기를 해서 나를 잡을 수 있다면 당신과 데이트를 하겠습니다.” 이 놀라운 제안에 홀딱 넘어간 청년은 그 날부터 예쁜 자매를 잡기 위해 죽어라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뚱뚱한 몸으로 달리기도 오래 못하고 자매 또한 얼마나 잘 달리는지 뒤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달리다 보니 점점 자매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달리기 실력도 늘면서 몸도 멋지게 변해 갔습니다. 약속했던 1년이 되기 하루 전 날은 거의 자매를 잡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슬아슬하게 달리기가 끝이 났습니다. 청년은 너무 신이 나고 흥분이 되었습니다. 약속했던 마지막 날이 하루 남았지만 내일은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고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아침을 기다렸지요. 드디어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고 변함없이 청년을 부르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청년은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황당하게도 문 앞에는 예쁜 그 자매가 아니라 일 년 전의 자기 모습처럼 뚱뚱한 다른 자매가 목사님의 약속을 믿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멋진 몸매를 가지게 된 형제는 일 년 동안 그 뚱뚱한 자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다이어트에도 나만의 만족이나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아름다운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또는 “내가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인생 속에서 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질문을 스스로 하는 것만으로 이미 의미 있는 인생의 첫 단추를 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인생의 목적도, 삶의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100% 하나님을 통해 인생의 사는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왜 내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정하셨냐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살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지금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또는 “내가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 열심히 살아도 이 질문을 던질 때 허무한 마음이 든다면 아무리 바빠도 한 번쯤은 이 질문의 답을 알기 위해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평안교회 황석형목사 E-Mail : sughy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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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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