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나이드는 존재 - 고금숙, 김하나, 김희경, 송은혜, 신혜우, 윤정원, 정희진, 정수윤, 이라영, 휴머니스트 · 2025년

여성에게 노년은 남성보다 힘들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 외적인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노년에도 자기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건강을 유지하기 원한다. 남자나 여자나 다 늙는다. 하루라도 일찍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편소설이나 문학 전집을 번역하는 일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생각이나 감정에 동요 없이 매일 조금씩, 여덟 쪽에서 열 쪽을 일본어에서 우리말로 옮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일정 부분은 매일 조금씩 쉬지 않고 꼬박꼬박 무심하게 앞으로 나가는 힘을 요구한다. 무슨 일을 하든 나아가기를 멈추면 거기서 끝이니까. 끝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래오래 한 가지 일을 지속하다 보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가닿기도 한다(p. 20).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필요하지만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일도 필요하다. 나를 계속 열어 두는 연습을 한다. 내가 세상을 궁금해하는 만큼 세상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칭이다. 새로운 경험만큼 나는 더 유연해질 것이다. 나이가 더 들(p. 53)면서 점점 조개가 되어 간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자주 입을 벌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세상을 못마땅해하기보다는 끝까지 세상을 선물로 여기고 싶다. 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늘 실험하고 기꺼이 허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호기심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꼭 붙들고 싶다. 이것이 바로 김 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그들의 삶으로써 내게 전해 준 가장 값진 가르침일 것이다(p. 54).
죽음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내가 좋아하는 일상, 옳다고 여기는 대의, 누구를 더 사랑하고 돌볼지, 어떤 일에 집중할지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래서 김영민 선생께서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게다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내게 묻는 거고, 죽음은 아랑곳없이 닥친 결과다. 그러니 죽음이 뜬금없어 보일 때 지금 당장 죽어도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p. 69).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멋진 언니 중 한 분인 시몬(p. 75) 드 보부아르 님의 잘 늙는 방법을 몇 가지 공유한다.(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실린 글을 참고했다.)
과거를 받아들이자. 삶을 의미 있게 해 주는 친구를 사귀고, 타인의 생각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자. 호기심을 잃지 말고,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을 추구하자. 인생에서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오랫동안 즐겼으므로 때로는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한 때를 보내자. 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은 다음 세대가 끝마쳐 줄 것이다.
부디 120세에 내가 뿌듯한 마음으로 이 글을 보면 좋겠다.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늙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것은 더 좋아하고 싫은 건 눈치 보지 않고 버리고, 건강 염려 없이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나이, 나는 늙어 가는 시간이 기대된다(p. 76).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예전과 달라졌다. 번잡한 일정이 빼곡했던 예전엔 종종 선약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모임을 빠져나왔다. 선약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롯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2~3시간, 1주일에 최소 하루는 있어야 번다한 일과 만남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2~3시간은 나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거꾸로다. 워낙 혼자 지내는 시간을 즐기다 보니 점점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연락이 뜸해진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고립된 외톨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슬며시 찾아온다. 관계 속에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은 그저 변덕일까(p. 87).
노년기에 들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아니,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혹은 '비참' 하지 않으려면 건강과 돈이 꼭 필요하다. 모든 불안은 이 두 가지에서 온다. 나이 든다는 것. 노안이 오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살이 찌고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눈, 치아, 머리술 등 몸의 모든 부분이 관심을 요구한다. 이때 짜증이 난다면 아직 나이 들지 않은 것이다. 나이 듦은 그만큼 수용하기 힘든 인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타자가 되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경험이기도 하다. 죽음과 마주하는 문제다(p. 145).
글을 쓰다 보면 막히는 때가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다.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쓰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 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거나....이 과정을 통해 내가 모르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는 쓰기를 반복해야만 알 수 있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p. 155)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 이유다. 거듭하는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데, 이는 몸에 익을 만큼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 인생은 있지 않을까라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그래서 부동산 매매로 인한 불로소득보다 표절로 인한 불로소득이 내용상으로는 더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금도 내고 비난도 받는다. 발품도 팔아야 한다. 표절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다. 표절은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을 죽인다.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쓰기를 반복하는 일은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니 무조건 계속 쓸 수도 없다. 길을 잃는 공포가 엄습한다. 사유보다 힘든 일이 쓰기다. 그래서 우울은 공부의 벗이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p. 157)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내가 역사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인물이 있는데, 프랑스 의 사상가 볼테르의 친구인 니콜라 클로드 티에리오이다. 그는 당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책만 읽으며 거의 매일 볼테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단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볼테르의 친구로서 볼테르와 관련한 문헌에 언제나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다. 한 줄도 안 썼는데! 일상의 노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백인 중산층 남성의 특권이다. 쓰기의 고통은 김승옥이 스물두 살에 쓴 단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에도 등장한다. 너무나 솔직하다. 그는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왜 글을 쓰는가"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한 대로 생계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내가 주변인이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자원으(p. 158)로 작용하는 분야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 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20)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적 약자가 가장 가질 수 없는 자원은 폭력이다." 이와 달리 국가, 자본, 권력층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구조적으로 폭력의 총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의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의 경험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성을 자각한 이들의 글은 독창적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이야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창의적인 이야기는 쓰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통한 모색에서만 가능하다.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다. '노가다', 공부(工夫)가 되는 것이다(p. 159).
왜 인간은 이토록 말하지 못해 안달일까. 자신의 말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깊은 곳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싶은 욕망과 기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은 사라지는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전달하면 구전되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낯선 사람들이 내게 전한(p. 199)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다.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말은 살아 있으며, 내가 이 말을 나눈다면 그들은 계속 살아 있게 될 것이다(p. 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