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 김연숙, 천년의상상 ·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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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들어 인간됨에 대해 쓴 책이다. 진작에 『토지』를 구입했지만 묵혀두고 있다. 그러다 먼저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아직도 언제 20권의 대하소설의 대장정을 시작할지 엄두가 안 난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토지』에는 600여명의 인물이 나온다니 그 안에는 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다양한 등장인물처럼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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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에서는 양반이라는 절대적 기준점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위치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양반 때문에 죽음조차 불사하고, 누군가의 삶은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질질 끌려 다녔고, 또 누군가는 양반이 아니어서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우리 삶을 장악하는 절대적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기준의 크기나 영향력보다 그것이 생겨난 근원이 궁금합니다. 내 삶의 기준이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타인의 기준이나 사회의 기준을 그대로 옮겨다가 중심으로 삼은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삶을 움직여나가고 있는지 혹은 끌려가고 있는지, 짓눌려 있는지.....곰곰 돌이켜볼 일입니다(p. 48).

 

이렇게 자기 삶의 가치를 확보한 조병수는 그제야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꼽추라는 첫 번째 혹덩어리도, 추악한 부모라는 두 번째 혹덩어리도 말입니다. 말년에 외로워 진 조준구가 아들을 찾아왔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마지막 순간까지 병수에게 가학적 행패를 부리는데도 말입니다. 그 시궁창 같은 인연 앞에서 병수는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때 병수가 운명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에 복종하는 일과는 좀 다릅니다. 자신이 '꼽추'이고 자기 부모가 저런 사람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병수 는 이제 그런 것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자기 힘으로 살아(p. 63)나가는 자기 삶의 창조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짓누른다고 생각했던 두 개의 혹덩어리를 선선히 짊어지고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만나 살아가는 병수. 그의 삶이 신산해 보이지만,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세상과 그 자신을 변환시킨 예술이다 싶습니다(p. 64).

 

독립운동 자금 전달과 아들 영호의 학생운동, 이 두 가지로부터 한복이는 비로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벗은 것이지요. 결국 인간이 뭔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어디어디에 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지, 그저 다짐한다고 혹은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다른 일을 해봐야, 다른 행동에 나서야 그야말로 다르게 살게 된다는 것을 한복이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p. 70).

 

이처럼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에 필요한 힘을 여러 방식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그 힘이 배치되는 관계를 새롭게 조직해냈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으로 나를 옮겨놓고, 또 다른 새로운 장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바꾸어나가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나와 '약속'하기 즉 '미래에 대한 명령'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가 '약속'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I am the master of my face)이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수감 생활 27년을 버티게 해주었다는 시 한 구 절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리라

(…)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인빅투스Invictus」,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p. 79).

인빅투스(Invictus)는 '정복되지 않는 굴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합니다. 『토지』에서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운명의 주인이 된 한복이는 늘그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산다는 거는.....참 숨이 막히제? 억새풀같이 자라고, 벼랑에 매달려 살고......그래도 나는 나다!"(p. 80).

 

강청댁, 왜 질투합니까? 용이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p. 117)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남자가 월선이한테는 이러저러하게 하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월선이와의 비교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만 끝없이 추락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자신이 피폐해져간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치 추구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나와 비교되는 대상 때문에 발동하는 질투의 감정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질투는 다른 사람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나가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결코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강청댁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날이 피폐해져가고 자신을 스스로 추스를 수 없게 됩니다. 그녀도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띠는 새댁이었는데 말 입니다.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은 질투로 인해 극단으로 치닫는 한 여성의 모습을 더욱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급 술집의 어리고 예쁜 게이샤는 주인 아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주인아줌마 몰래 사랑을 나누는 정도였지만, 그 사랑이 점점 깊어져 주인 아저씨와 게이샤는 술집을 나옵니다. 둘이서 방을 얻어놓고 둘만의 사랑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됩니다. 게이샤는 자신이 벌어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지만 남자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또한 즐겁기만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뭔가 이 남자가 완전히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남자를 내 방에 데려다놓았을 뿐 남자를 완전히 가졌다는 충족감 이 안 드는 겁니다(p. 118). 그러자 그녀의 집착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집니다. 급기야 남자를 외출도 하지 못하게 감금이나 마찬가지의 상태를 만들어버 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남자에 대한 충족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남자의 성기를 잘라 손에 쥐고 거리를 활보하는 기괴한 극단으로 치닫고야 맙니다. 1936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아베 사다' 사건을 재구성했다고 알려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을 소유의 방식으로 볼 때 욕망이 끝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p. 119).

 

'팩트'만 말해라, 이것이 '팩트'다 따위는 꽤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임을 자부하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따지겠다는, 일종의 법리와 증거를 주장하고 논박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이런 태도로 봉기에게 접근한다면 봉기가 저지른 명백한 죄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미역 한두 오리,(p. 204) 체 한 개 따위의 소소한 물품을 가로챘을 뿐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해낸 정도입니다. 간혹 복동네의 자살처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도 있긴 했습니다만, 봉기의 뻔뻔한 말마따나 그가 곧바로 살인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사실은 이런 삶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죄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곳, 자기 성찰과 공감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악이라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토지』에서는 봉기라는 밉살스러운 사람을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란 의미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유대인 학살자)의 일화도 그러했습니다. 성실하고도 효율적으로 나치의 과업을 완수했던 관료 아이히만은 늘 당당했습니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고 말했고, 아니 그 부끄러움을 느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관료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 그것은 인간일 수 없다는 가장 잔혹한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토지』에서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 말기 여학교에서 상의(홍이의 딸)가 전쟁 지원 활동에 동원되어 주먹밥을 만들다가 남몰래 동생 상근이에게 주먹밥 하나를 건네줍니다. 상근이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서 부끄러운 마(p. 205)음에 얼른 자리를 피합니다. 나중에 상근이는 누나 때문에 망신스러웠다고 투덜거립니다. 당장의 배고픔보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치는 배부른 사람이 챙기는 거지, 너처럼 그랬다가는 굶어 죽을 기다"라며 웃습니다. 그런데 멀찍이 앉아 있던 노인이 불쑥 끼어듭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기찹아도 염치를 채리야만 그기이 사람이제. 있고 없고가 상관없는 기라. 있다고 해서 어디 염치 채리더나?" 20권 292쪽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삶, 그 이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문제입니다. 염치를 차려야, 부끄러움을 알아야 그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p. 206).

 

-'나'를 위로하는 나쁜 방식

일상생활에서는 이유 없는 일, 이유를 모르는 일 혹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 들면,(p. 214) 오히려 힘만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쩌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나요? 물론 설명하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서두에서 제가 『토지』를 읽어왔던 내력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얼마든지 여기저기서 이유를 찾아와 다시 맞춰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 설명까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애써 찾아온 이유들을 반대로 확 뒤집어서 진짜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이래서 그렇게 되었나? 하고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이 또한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풍파를 겪어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가끔씩 "그게 팔자야, 운명이야" 하며 무덤덤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이 패잔병 같아 보여서 참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아주 오래된 삶이 전해주는 지혜가 빛나고 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말들은 "아이고, 내 팔자야"라며 한탄하는 넋두리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의 방식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내 그것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것은 그렇게 했을 때 내 마음이 좀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를 위해서 그게 이유라고, 원인이라고 꾸며대는 방식, 그리하여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긍정적이고 솔직한 자세는, 내게(p. 215) 일어난 일을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금의 내가 밀고 나가는 겁니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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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0】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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