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정상 가족 - 김희경, 동아시아 · 2022년

제목처럼 이 책은 소위 정상 가족이라고 하는 가족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보여준다. 반면 이상해 보이는 가족이 실은 정상일 수 있음도 보여준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가정은 평안한가?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때린다는 주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항변 1순위다. 상담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 조사를 나가면 “내 자식 내가 가르치는데 웬 참견이냐" 라며 상담과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대 신고를 받아도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에 불성실한 경찰들도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p. 26)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의 답은 '상관있다'이다. 국가가 체벌을 금지하면 학대도 줄어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법으로 체벌을 금지한 나라에서 아이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당 평균 0.5명 미만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낮았다. 반면 체벌금지 법률이 없는 한국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이 10 만 명당 1.16명이었고, 29개국 중 세 번째로 높았다(p. 27).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p. 28)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p. 29).
매를 들고 무섭고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무수한 실증적 데이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체벌의 긍(p. 30)정적 효과는 그저 믿음뿐이고, 체벌의 부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은 워낙 많아서 이건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2016년에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 분야의 거의 '끝판왕' 이라고 할 만한 연구를 발표했다. 체벌과 관련한 50년치 데이터를 메타 분석한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도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보이게 될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아이들 16만 1,000여 명에 대한 데이터가 포함된 이 연구에서 연구진은 체벌의 정의를 '손바닥으로 아이의 엉덩이나 팔다리를 때리는 정도'로 한정했다. 보통 사람들이 학대라고 생각하 지 않는 정도의 체벌을 대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 인지 장애 등 부정적 행태 17개 중 13개와 연관된 행동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체벌을 '잠재적 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체벌과 신체적 학대는 동일한 수준으로 아이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체벌은 아이의 행동과 발달 측면에서 부정적 결과를 낳는 반면, 부모가 애초 아이를 체벌할 때 의도했던 목표의 달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p. 31).
방송도 마찬가지다. 2017년 1월 초 한 방송 프로그램에선 가수 김건모 씨가 어린 시절 '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방송은 "건모를 키운 건 8할이 엄마의 매", "매를 통해 전해진 엄마의 사랑" 등의 자막을 내보냈다. 가족 간 갈등을 단골 소재로 다루는 '막장 드라마'에선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모욕하는 장면들이 예사롭게 등장한다. '폭력도 정'이라고 바라보는 듯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회초리에는 "어른들에게 옛 향수를, 아이들에겐 참교육을 알려줄 좋은 선물이 된다"라는 홍보문구가 달렸다(p. 34).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 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p. 35).
사랑과 폭력
사랑을 폭력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하다. 체벌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에서도 그렇고 대학입학 시즌만 되면 군기잡기성 체벌이 문제가 되는 신입생 환영회의 일그러진 모습도 그렇다. 어쩌다가 '환영'의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나는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할 만한 것'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하위문화 중 첫손에 꼽을 만한 것이 부모의 체벌이라고 생각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부모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신체적 체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힘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불평등함을 인지한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힘과 권력에 따른(p. 39) 불평등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비교적 일상적으로 어린이에게 신체적 체벌을 가하는 지역에서는 부인이나 형제자매를 향한 과도한 폭력도 함께 관찰됐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폭력성의 역사를 살핀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체벌 찬성율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했다. 체벌을 용인하는 하위문화가 성인의 극단적 폭력도 부추긴다는 뜻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체벌 근절이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줄이고 방지 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p. 40).
유교문화권 특유의 가족주의?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참극을 자녀의 인권유린(p. 91)과 폭력, 범죄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동정하는 시선에는 가족주의가 진하게 배어 있다. 살해의 비윤리성보다는 가족이 운명공동체이므로 부모가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식의 목숨을 처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이처럼 부모의 무한 책임 정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여기에 자녀의 독립적 인격과 개별성은 없다. 그런데 이게 흔히들 가족주의가 강하다고 하는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공통된 현상일까?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동반자살'이라며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오야코 신주(부모자녀 동반자살)라 부르며 온정적으로 대해 왔다. 『유년기 인류학』에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심리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실려 있다.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 일본인 이혼 여성이 각기 생후 4세와 6개월 된 두 명의 자녀를 데리고 태평양에 투신했다. 그녀 는 구조됐지만 아이들은 익사했다. 엄마는 두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는데, 당시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받은 2만 5,000명의 서명과 함께 이 사건은 살인이 아(p. 92)니라 '부모자녀 동반자살'에 해당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들은 "그녀가 결코 악의를 갖고 아이들을 죽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호소했다. 아 이들을 '엄마에게 순종하는 아이' 정도가 아니라 엄마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행동조차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문화권 중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은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모두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마치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자발적 결정인 양 다루지만 중국 본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그런 사건이 발생해도 언론은 이를 한국•일본과 달리 '가족 자살'로 부르지 않고 '윤리참극'이라는 단어를 사용 한다. 중국 본토에서는 엄격히 살인을 강조하고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함부로 부모가 그 생사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국가의 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족' 윤리가 우위지만 중국에서는 '개인' 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p. 93)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 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 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비된다(p. 94).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고, 생존의 책임을 떠맡은 핵가족이 위기 상황에서 해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공고한 가족주의로 인해 부모 자녀 사이에 자아가 분리되지 못한 자아혼란이 함께 만들어내는 참극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양극화와 가족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구조,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핵가족 내 부모의 성별 분업에 달려 있고,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가 없는 자녀는 정상적 사회 성원으로 자라기 힘든 사회구조.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아이들이 깔려 목숨을 잃고 있다(p. 95).
그런데 미혼모가 혼자 이 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 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미혼부나 그들의 가족은 자녀에 대한 권리를 미혼모에게 쉽게 떠넘겨버리거나 부모 자녀 관계를 부정해버린다. '가족 제도' 주변에 둘러쳐진 금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그 강력한 가족주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p. 118)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출산에 동의한 미혼부조차 출산 후에는 소식을 끊거나 책임을 방기한다. 아무도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계는 임신, 출산, 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경우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일 뿐이다. 이런 불균형을 보면 한국의 가족주의는 매우 남성 편의적인 가족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미혼모가 미혼부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가 78%이고, 미혼부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9.4%에 불과하다고 한다.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양육비 청구를 하면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를 빼앗길까 봐 미혼모가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있지만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는 수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p. 119).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정상가족'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미혼모, 이주 노동자,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심성도 이처럼 내 가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에 처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2016 OECD 사회지표〉를 보면 거의 모든 지표들이 나쁘지만 사회통합성을 보여주는 타인 신뢰도, 정부 신뢰도, 사회 관계는 35개국 중 24~29위를 오가는 바닥 수준이다. 우리가 이토록 각박해진 이유는 흔히들 말하는 가족 해체, 개인주의화 때문이 아니라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p. 1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