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송길영, 교보문고 ·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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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전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도태는 분명하다. 세상의 흐름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평생 공부하고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각자의 역량을 키워야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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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가장 경계할 것은 학력만이 전부인 이력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 이로운 것을 주는 행위를 사회적 성취라 정의한다면, 배우는 이유는 깨치고 얻은 지혜를 모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력은 사회적 성취의 단계에서 필요한 준비일 뿐, 그 자체가 성취라 보긴 어렵습니다. 학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치열하다 해(p. 72)서 학력 그 자체를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는 돌려줌 없는 이기적 인간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학벌을 성취라 생각하고 안주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내 그것을 잊고 겸허하게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권위의 명패를 벗어 던지고 일신하며 나아가는 이들에게 학위의 끝인 졸업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p. 73).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대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유니섹스unisex'라는 말은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표현으로 진화합니다. 유니섹스는 '내가 옷을 만들었는데 남성도 여성도 입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젠더리스는 '성 구분 자체를 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결국 생각의 변화와 연결되기 시작하여 이전의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거부됩니다. 과거에는 영화 〈300〉의 주인공들처럼 근육과 활동성이 뛰어난 남성을 이상적으로 규정했다면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화장품 광고 모델, 색조 화장 전문가로 남성이 등장합니다. 여성이 근육을 만들고 뽐내는 것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역할에 대한 족쇄가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꺼려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젠더리스라는 말조차 구분을 전제로 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표현은 끊임없이 현행화해야 합니다. 관행적 표현과 차별적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언어를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익숙한 표현일지라도 변화한 사회에 맞추어 낯설게 바라보고 세심하게 언어를 재정의 할수록 계속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p. 85).

 

대학 졸업을 앞둔 어떤 청년들은 부모가 '너 뭐 할건데?'라고 묻는 순간 당황해한다고 합니다. '대학을 가라고 한 것은 부모님인데 왜 나에게 묻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입니다. 이미 부모의 발 빠른 정보력으로 중국어과에 간 선(p. 160)배들은 조선족 중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통번역 대학원에도 태어날 때부터 이중 언어를 사용한 네이티브들이 입학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광경이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간 결과입니다. 부모들은 먼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는 척해야 하는 책무에 놓여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나도 잘 몰라, 함께 고민하며 탐색해 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시 과정과 사교육은 고도화되었는데 입시 후의 대학 생활과 진로에 대한 논의는 유예되었습니다. 행위는 전문화되었으나 목표는 전문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과거와 현재의 단서만으로 미래를 단정 지어 진로와 교육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와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변화에 맞추어 다음 세대의 기여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p. 161).

 

'인재는 영입하는 것이지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리더의 역할 변화도 분명해집니다. 이제 작업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고 작업 분배와 공정 점검, 결과의 취합만 맡는 전업 관리 모델은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업 공정이 시스템에 의해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보일수록 '무임승차자'와 '군림하는 사람'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리더에게는 더 깊은 통찰력과 더 높은 전문가적 자세가 요구됩니다. 핵개인들이 함께 일하는 동료 의 전문성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수록, 훈수만 두고 결과물만 취하려는 구성원이나 '20년 차 나이테'를 관록의 증거로 들이대는 관리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회사의 문화와 사규도 핵개인들의 성향을 반영해 계속 갱신되는 중입니다. 이제 리더와 구성원은 서로의 재능과 역할을 어떻게 조합하고 협력할지, 새로운 상호작용의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과장만 달면 아무 일도 안 했는데." 20년 차 부장님들의 하소연은 이제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입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먼저 경험해 본 자가 유리할 수 있지만,(p. 179) 환경 변화가 빠르면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생성형 Al로 빠르게 학습하며 새롭게 적응하는 구성원들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상급자의 말을 소음으로 믿고 거릅니다. 이제는 각 개인의 축적된 경험보다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러니 '나는 20년 동안 나만의 경험을 쌓아왔다'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혜의 원료는 네트워크상에 있기에 딱딱한 권위의 액상화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서사의 핵심은 목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내가 이 회사에 20년을 다녔는데...,' '1 만 직원들과 함께 10조 매출을 냈는데' 같은 말에 감동적인 리액션을 해줄 인구 집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표정입니다. 수치화된 업적만으로는 존경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때그때 여건과 환경 변수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만의 서사입니다.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기여가 얼마만큼 치열했는지. 그 맥락이 있다면 꽤 괜찮은 선배 직업인으로 마땅한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과거의 권세를 그리워하는 노(p. 180)회한 직장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p. 181).

 

통상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품이 많이 팔리면 마진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급량을 늘리려 합니다. 시장 경쟁으로 인해 마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양적 팽창으로 규모를 늘려야만 성장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엔드 시장은 일반 시장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움직입니다.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는 마진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넬은 매년 가격을 올리고, 올릴수록 더 잘 팔립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선망입니다. 똑같은 산업에서 값이 갈수 록 오르는 물건과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물건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물건을 사고 싶습니까? 하이엔드는 개별성과 고유성이 교차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기업도 개인도 여기서 돌파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량을 만들고, 단가는 높이고, 세계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p. 197).

 

이연된 보상, 불공정한 거래

효도가 대를 이은 보상의 체계라면 그 보상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도 궁금합니다.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처럼 기대 수명이 70세가 안 되던 시기라면,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20년 동안 받은 양육의 은혜를 부모의 60세 이후 갚아 나가는 것이 꽤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부양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두세 명 이상 존재했기에 1인당 모시는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1990년 이후 출생률이 1.x 명대를 지나 이제 0.x명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장수의 축복은 기대 수명 100세 시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자식이 두 분의 30년이 넘는 여명을 책임져야 한다면 60(p. 221)년의 돌봄이 책무로 다가오는 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생존하시면 한 명의 젊은이가 6명의 노인을 돌봐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20년 양육의 되 갚음이 산술적으로는 누계 100년 이상의 돌봄으로 길어질 터이니 효도란 다음 세대에게는 불공정한 거래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연된 보상'입니다. 부모의 은혜는 하늘과 같기에 다 갚을 수도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하기에 한참 후 부모의 삶이 쇠약해졌을 때 보은합니다. 스승의 은혜 역시 너무 크기에 카네이션을 다는 것만으로는 갚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배의 은혜 역시 후배에게 베품으로 갚아 나갑니다. 이처럼 이연된 보상은 지금의 상하관계가 지속적으로 구조화되길 희망하며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도록 작동합니다. 연공서열과 기수 문화 모두 이런 이연된 보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유동성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이 보상 체계에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경력의 연한이 짧은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시장 가치에 맞는 성과급과 급여 현실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의문을 반영합니다(p. 223).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한쪽에서는 '오래 다니면 이익을 보니 당신도 수혜자다. 그러니 기다려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좋은 이야기지만 난 곧 그만둘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현재의 환경과 역학이 항구적이라면 이 전제의 수혜는 믿을 만합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성장과 세계화, 지능화와 글로벌화의 무한 경쟁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 어떤 약속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믿지 못하니 '즉각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도날지도 모를 어음 말고 현금을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p. 224).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큰딸의 희생 서사도, 친정 어머니의 도우미 역할도 정당한 대가와 세세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고마워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이나, 미안해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라는 마음의 신호입니다. 이러한 '돌봄 과도기'의 핵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p. 236)요? 각자 독립체로 스스로를 관리해 폐 끼치지 않는 사회가 좋은 것인지, 적당한 민폐로 서로의 정이 관계 자본으로 쌓이는 사회가 건강한 것인지 그 정도를 합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삶도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이나, 내 삶이 누군가를 돌보기 위한 자원으로 인식되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현재 극단적인 출생률 저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집단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라도 생로병사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공적 시스템'으로 세밀하게 설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대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립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지원과 협 력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효도의 종말이 인륜의 저버림이 아니라 준비된 사회의 안전판이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각자가 모여 더 크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본권이 될 것입니다(p. 237).

 

늙는 모습도 천차만별

일상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만 보아도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31세 이후에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뇌 과학 분야의 연구가 있습니다.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10대와 20대에 들었던 음악을 나이 들어서도 듣습니다. 새로운 취향을 탐색하는 호기심에도 노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완고함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낯선 것을 수용하려는 적극성이 줄어듭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관성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p. 240).

 

지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입니다. 나이를 기반으로 선을 긋고 구분 짓기를 반복한다면 각자가 서 있는 삶의 토대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생애주기에 대한 적응은 어떤 연령대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래가고 함께 가는 공존을 위한 전제는 타자화를 멈추는 것입니다(p. 259).

 

선배보다 선구자가 되어야

한 분야 전문가가 갖는 권위는 어느 분야든 예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의 정점인 메이저리그로 가고자 달렸다면, 이제는 자기 마당에 차린 아틀리에에서 장인으로 살기를 꿈꾸는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세일즈를 해야 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팔아야 할까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trative'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무의 나이가 그러하듯 서사는 결코 급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진정성으로 만들어집니다(p. 286).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맨 앞에 있다면, 먼저 최대한 많이 고민해 본 것이라면, 그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야 산의 높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p. 297)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유성과 진정성의 단서가 내가 오랫동안 쌓아둔 내러티브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필수 전제가 됩니다(p. 299).

 

상호허겁의 평형

인생은 짧고 자신의 삶을 형벌처럼 받아들일 이유는 없(p. 318)습니다. 언제든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으며 꾸준히 자신의 삶을 수정해 나가려는 용기는 이 시대에 큰 미덕이 됩니다. 이 용기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그만둔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입니다. 이는 직장을 그만두진 않지만 딱 주어진 만큼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그 이상의 기여는 하지 않겠다는 삶의 방식입니다. 직장의 의미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치 교환의 장소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문제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업을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소극적 태도는 자아 발전에 도움될 리 없습니다. 직업에서 얻는 경험과 자산이 자신의 자아를 발전시키는 연료로 쓰이길 바란다면, 명시적인 그만둠이 아닌 묵시적인 그만둠은 일종의 '수동 공격'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주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힙니다.

비전 없다고 여기는 직장에 계속 머물거나 서로를 갉아 먹는 인간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스스로 정한 반환점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고 그에 도달하면 그만두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만둘 수 있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불균(p. 319)형한 관계가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두어서 대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해지는 것 입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대안이 있을 때 상대는 나를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인용하여 '상호허겁(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저 사람은 갈 곳이 없다.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가 보이면 경쟁 서열 집단에서는 조심성이 사라집니다. 상대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선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p. 320).

 

지금까지 많은 개인들은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조직의 안정성이 나의 미래를 담보하고 그 안에서 나의 성장을 위한 단계별 기준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각자의 목표가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을 넘어서야만 타인에 의한 평가로부터 해방되고 시험 보는 꿈이 악몽처럼 평생을 괴롭혔던 과거와 작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넘어 나만의 지향점으로 새로운 가치를 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핵개(p. 333)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기려는 경쟁에서 내려오고 보여지는 것의 구속을 벗어던질 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위를 자신있게 인정하는 사 회로의 변화를 꿈꿔 봅니다(p.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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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2】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경쟁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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