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나의 어린 왕자 - 정여울 저자(글), 크레타 ·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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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 내면 아이가 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삶을 붙잡는다. 내게도 분명 멈춰버린 내면 아이가 있고 그것이 여전히 지금도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자의 내면 아이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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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내면아이의 일곱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는 돌보미 유형이다. 돌보미 유형은 공의존codependency, 즉 자신의 정서적 욕구나 자존감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성향을 보인다.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고 타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 믿는다. 둘째, 과잉성취 유형은 필사적으로 성공과 성취를 통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낮은 자존감을 숨기기 위해 어떻게든 타인의 검증 을 받으려 하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뿐이라 믿는다. 셋째, 저성취 유형의 내면아이는 비판과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자꾸만 움츠러들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다. 저성취 유형은 투명인간처럼 살기를 꿈꾼다. '밀당'같은 것에는 아예 가까이(p. 9) 가지 않으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넷째, 구조자/보호자 유형은 주변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구원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을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보고, 강력한 힘으로 무장하여 타인이 자신을 우러러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랑받는 길이라 생각한다. 다섯째, 파티 스타 유형은 매우 외향적이고 활기차고 재미있는 내면아이다. 단점이나 힘든 모습을 결코 들키지 않으려 한다. 파티 스타 유형의 내면아이는 행복한 척하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줌으로써 사랑받기를 원한다. 여섯째, 예스맨 유형의 내면아이는 자기희생을 추구하여 인정받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타적이고 착한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자기희생만이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곱째, 영웅숭배 유형은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고, 영웅적인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 그를 성공적으로 모방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p. 10). 

 

정말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린 것일까

조이: 루나, 넌 날 언제 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내가 널 버리다니, 그 말은 너무 심한걸? 그럴 리가 있니? 내가 날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내 안의 어린아이, 조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널 버린 적은 없어. 네가 설마 내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 미처 몰랐던 것이지.

 

루나: 조이, 난 널 버린 적 없어. 네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 거야. 사실 네가 내 안에 살고 있는지도 잘 몰랐어.

조이: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어른들은 자주 날 버리니까(p. 50). 어른들은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잘 잊어버려. 어릴 때 부모님께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어른들이, 자기 아이를 낳으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든 "공부하라"고 말할 기회를 찾잖아. 술 마시는 부모가 싫었던 사람도 나중에 알코올 중독이 되고, 매 맞는 게 너무 싫었던 사람도 자기 아이를 때려. 어른들은 너무 자주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잊어버려.

루나: 조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널 버린듯한 느낌이 들게 했구나. 난, 사느라 너무 바빴어. 핑계인 걸 알지만. 이 세상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남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어. 내 안의 내면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걸 안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매 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벌써 지친 느낌이 들었거든.

조이: 알았어. 널 탓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언제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는지. 그러면 다시, 네가 충격받지 않게, 순한 양처럼 다소곳하게 물어볼게. 루나 너는 언제 날 잊어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응, 결심까진 아니지만 너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어(p. 51). 성적표 사건이야.

조이: 성적표 사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루나: 맞아. 그거야. 초등학교 때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을 때였어. 그전엔 수나 우만 받다가, 미가 가득한 성적표를 받은 거지. 그런데 더 큰 충격은 성적표를 받아든 엄마의 반응이었어. 난 어릴 때부터 엄마를 정말 무서워했거든. 엄마는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불렀어. 나를 향해 사납게 포효하던 엄마의 모습을 매일 봤지.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어. 그런데 성적표를 본 엄마의 반응이 내 성적표보다 더 충격적이었어.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성적표를 찢어버린 거야. 두 조각으로만 찢어도 충분히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성적표는 산산조각나 버렸어. 문제는 성적표를 확인하고 부모님께 도장을 받아서 다시 선생님께 들고 가야 한다는 거였어. 왜 내 주변에는 무서운 어른들밖에 없었을까. 따뜻하고 살갑게 나를 위로하는 어른들이 별로 없었어. 모두 화가 나 있었어. 모두 자기 삶을 사랑하지 않았나 봐. 여하튼 나는 선생님이 너무 무섭고, 엄마도 무서웠는데, 그 무서운(p. 52).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내 성적표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울었지.

조이: 너와 내가 함께 울었지. 어른이 되고 싶은 루나 너도, 아직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나도, 함께 울었어.

루나: 그때부터 결정적으로 너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 어린아이의 놀이 같은 건 다 잊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지. 공부를 해야만 엄마한테 수치스러운 딸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뭔가를 잘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았어. 뭐든 잘해야만 예쁨 받는 것 같았어.

조이: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부모님은 널 사랑하시잖아.

루나: 머리로는 알지. 하지만 마음은 사랑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그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 아주 오랫동안(p. 53).

 

조이: 어렸을 땐 우리 모두 똑똑했어. 어릴 땐 오히려 다 알고 있었어. 학교에 가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취직하고, 결혼하고, 끊임없이 사회 속에 적응하면서,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까지 잃어버려. 어린 왕자를 떠올려 봐. 조종사는 물을 못 찾을 까 봐 겁내는데, 어린 왕자는 두려워하지 않잖아.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어린 왕자는 그냥 알잖아. 많이 배운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많이 배우면서 오히려 원래 알았던 것을 형편없이 잊기도 하지. 넌 두려움으로부터 배운 게 더 많아.

루나: 두려움으로부터 과연 배울 게 있을까.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캄캄해지는데?

조이: 루나, 항상 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편에서 생각하잖아.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난 그런 네가 좋아. 항상 더 아픈 사람들, 더 슬픈 사람들의 입(p. 72)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잖아.

루나: 그러고 싶은데, 마음의 체력이 달려 애는 쓰는데, 자꾸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기도 해.

조이: 루나, 너 요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루나: 뭐? 너한테 어떻게 숨겨. 항상 내 심장에 매달려 다니는 나의 어린 왕자님을.

조이: 아냐, 넌 숨기고 있어. 몸이 약해진 걸 숨기고 계속 무리하고 있잖아.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앉아서 일만 하고 있잖아. 몸이 없으면 내면아이고 성인자아고 없어.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몸부터 챙겨야 해. 거꾸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넌 건강해져야 해. 지금 그 몸 상태로는 트라우마는커녕 작은 스트레스에조차 폭발해 버릴 거야. 며칠 전에도 폭발 했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렸지? 난 다 봤어.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유전되거나 혹은 전염된다고 하잖아. 네가 네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면, 네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같이 다쳐.

루나: 들켰네. 내가 내 몸 못 챙기고, 내가 내 감정도 보살피지 못했다는 거. 정말 신기하게도 《몸은 기억한다》는(p. 73) 책을 보니까, 트라우마가 우리 몸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이끌려서 읽어 보니까, 딱 나에게 하는 말 같았어. 몸과 마음은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 전이되어 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이 나아지면 몸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례를 설명하는 책이야.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어른들은 자주 몸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해. 자기 자신보다 일을 중시해. 하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자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잘 모르지.

조이: 그래. 넌 항상 말은 잘하더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갖 위로의 말들을 화려하게 잘도 챙겨주면서. 넌 너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몰라. 너는 쉬고, 놀고, 뛰고, 몸을 움직여야 해. 넌 마음만 움직여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더라. 그래서 네 몸에 갇혀 있는 난 항상 갑갑해. 하루 종 일 의자에 몸을 결박해 놓고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려고 하는 너 때문에, 예전처럼 아무 멀리, 아주 오래, 여행을 떠나줘. 하루 종일 온 세상을 바지런히 걸어줘. 때로는 마라톤 선수처럼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려봐.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안의 어린 왕자를 위해, 나를 위(p. 74)해, 그렇게 해줘. 내가 숨 쉴 수 있게. 내가 어린 왕자처럼 커다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루나: 내 몸이 문제였구나. 쉴 줄 모르고, 놀 줄 모르고, 내 영혼을 끊임없이 가두려고만 하는 내 몸이.

조이: 자전거 못 타고, 수영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배우는 것도 늦지 않았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네 안의 어린아이를 끌어내도 괜찮아.

루나: 너무 창피해. 이 나이에 어떻게 자전거를? 수영을?

조이: 넌 어린 시절의 너를 잊어버렸구나. 너 자전거도 탔어. 수영도 했어. 그런데 잊어버렸지. 폼이 어색하다고, 비틀거린다고, 누군가 지적하고 나서, 그때부터 자전거 안 탔잖아. 수영도 서툴지만 조금은 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잖아. 안 된다고 생각하 고, 넌 안 된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배려 없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 말을 왜 듣니. 어린애가 수영 배우는데 잘 못할 수도 있지, 그걸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안 된다는 생각이 널 그렇게 만든 거야(p. 75).

 

조이: 루나, 어른이 된 너의 기억은 좀 아름답게 윤색된 것 같아. 난 그때 많이 외롭고 힘들었어.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내 곁에 없었던 거야. 어떻게 딸을 어린이날에 그렇게 혼자 있게 내버려둘 수 있어. 다들 너무해.

 

조이는 아직도 입술을 비쭉거리며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루나: 그래, 부모님은 분명 급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날 혼자 내버려 둘 분들이 아니야. 그리고 J를 보냈잖아. J도 겨우 열여덟이었으니 친구랑 놀고 싶었을 거고. 어쩌면 그때 난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까 홀로 낯선 동네를 헤매는 상황에서 신기함보다 외로움이 더 컸을 거야. 하지만 어른이 되(p. 98)어보니 그런 시간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겠어. 추억은 항상 다른 빛깔로 채색되거든. 기억은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어른이 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 물론 365일 혼자 있을 수는 없지 만, 혼자 글 쓰는 사람이 되었잖아. 혼자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쁘고 좋아. 이런 사람이 된 이후로 혼자 있었던 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더라. 어릴 때는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던 그 순간이, 어른이 되니 '혼자 있음의 자유'를 경험했던 소중한 시간으로 다시 채색 되는 거야. 다행이지 않니? 슬픈 기억조차도 아름답게 다시 채색될 기회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니, 조이?

 

조이는 한참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환하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어떤 양을 그려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던 어린 왕자에게 조종사가 '빈 상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그려주니, 그제야 마음에 든다며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 양이 상자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처럼. 내 안의 내면아이 조이는 그제야 내 이야기에(p. 99) 공감하는 얼굴이 되었다(p. 100).

 

조이: 루나, 넌 또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구나. 재능이 어중간(p. 125)하다는 생각도 너무 어른스러운 판단이야. 난 누군가가 정말로 무언가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면, 일단 한번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 달리기든, 그림 그리기든, 노래 부르기든, 과학실험이든, 그게 뭐든! 정말로 꿈꾸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넌 계속 꿈꿀 자격이 있었어. 그런데 꿈꾸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어른들이 가라고 하는 길로 가버린 거야.

루나: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학교 합창단 피아노 반주를 했거든. 그때가 참 좋았는데, 왠지 그런 시간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피아노 학원에 나가지 않았어. 공부만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참 좋은데, 나만 혼자 그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 외롭더라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나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었어.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합창단의 한 파트를 맡아 노래하고 싶지는 않았어. 피아노 의자 위에, 꼭 앉아 있고 싶었어. 아무리 외롭더라도, 하지만 부모님이 예중, 예고에 보내주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더(p. 126) 가슴 아픈 것은, 아빠가 나를 예중, 예고에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거야. 아빠는 내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계셨던 거지. 엄마 아빠가 공부하라고 다그치실 때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렇게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일 수가 없어. 부모와 자식 사이는 항상 그래. 하지만 완벽한 사랑은 없어도, 완벽한 존중은 가능하지. 부모님이 좀 더 자주, "네가 가는 길을 완전히 응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표현해 주셨다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지냈을 텐데. 그때 잠깐뿐이었지. 그 후로 오랫동안 내가 가는 길을 반대하셨어. 지금은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이해해 주시지만, 하하!(p. 127).

 

조이: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봐. 난 그날 도대체 왜 그렇게 슬펐던 거야?

루나: 과학실습실이었어. 비커와 시험관이 가득한 실험실이었지. 그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이미 담임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어, 담임 선생님이 날 싫어한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였지. 도대체 왜 나는 선생님의 눈 밖에 난 것 일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 게 촌지를 요구했대. 그런데 엄마가 학교에 못 갔대. 그 일 이후로 내가 미움을 받은 것 같다고, 엄마가 나중에(p. 142)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해 주었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더라. 그 시절엔 어떻게 교사가 학부모에 게 당당히 촌지를 요구할 수 있었지? 엄마는 잔뜩 겁을 먹었대. 내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때 우리 막내가 너무 어렸거든. 엄마는 그 세 살배기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어. 그리고 엄마가 촌지를 주지 않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는 정말 파렴치하게도 학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대. 참 기막히지. 그런데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던 내가, '촌지'라는 단어도 몰랐던 내가,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겁을 먹은 나머지 비커를 깨버린 거야. 그날의 그 공포를 기억해. 선생님이 나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거든. 50명이 넘는 아이 중에, 선생님이 유독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어. 그러니 더 떨리더라고. 내가 이 비커를 깰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정말 무슨 예언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커가 와장창 깨져버렸지.

조이: 이제 기억 나. 두려움 때문에 기억들이 마구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었는데, 네가 조리 있게 설명해 주니(p. 143)까 생생하게 기억이 나, 루나.

루나: 그래, 비커가 깨진 순간, 선생님의 그 차가운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지. 선생님의 이름도, 선생님의 얼굴도, 선생님의 목소리도 정확히 기억나. 사람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게 하는 맹렬한 차가움을 간직한 목소리로,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지. "또 너니?" 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왜 '또 너니'라고 말했는지. 게다가 비커가 깨졌는데, 열 한 살짜리 아이인데, 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가가서 괜찮냐고, 다치지 않았냐고, 그것부터 물어볼 것 같거든. 그런데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열한 살짜리 아이를 그렇게 찍어놓고 미워한다는 것이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아무리 촌지에 목마른 닳고 닳은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이: 루나, 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구나. 어른이 되어도 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 거구나. 어쩐지 마음이 놓여, 어른이 되면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어.

루나: 응, 아무리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생각해 봐도,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어린아이를 그토록 격렬하게 미워할 수(p. 144) 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 그리고 사람은 자기 마음을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게 마련이거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이 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조이: 그래서 너무 착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거구나? 사악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고, 자기처럼 나쁘고 고약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루나: 맞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야(p. 145).

 

당신을 아직도 잠 못 이루게 하는 아픈 기억이 있나요? 그 기억이 당신의 어떤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를 기억하는지요?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들, 그중에서도 유독 더 아픈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적어두세요. 기록하다가 눈물이 나거나 너무 힘들면, 잠시 멈추어도 됩니다. 그리고 기운을 다시 차리면 다시 기록해 보세요. 핵심 트라우마를 다 적고 나서, 그 기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열어보세요. 그리고 그 핵심 트라우마 중에서 '내가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을 적어보세요. 두꺼운 노트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넉넉하게 나의 생각을 적어둘 수 있는 노트를 마련하고, 되도록 종이와 펜으로 내 손을 움직여 트라우마를 기록하고, 그 상처를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극복하고 싶은지, 6개월 동안 매주 써보세요. 그리고 1년 후, 2년 후에도 써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핵심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조금씩 친밀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p. 162).

 

조이: 가엾은 루나, 넌 그렇게 세상의 더러움에 쉽게 감염되고 물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넌 항상 아이들의 환상 속 세계를 이해했잖아. 피터팬과 웬디는 물론 온갖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속에서 넌 항상 너만의 네버랜드를, 어린 왕자와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언덕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잖아. 네가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너의 낭독 소리를 듣곤 했어. 그거 알아? 어른들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동화를 다시 한 번 열심히 읽을 때마다, 어른들 속의 내면아이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 어른들이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갸우뚱하면서 때아닌 어린 시절 동화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면아이는 미친 듯이 설레고 두근거려. 어른들이 내면아이에 게 다가오는 가장 어여쁜 발자국 소리야.

루나: 동화책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소리가?

조이: 응, 어린아이들의 미소를 뿌듯하게 바라볼 때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데 왜 어린 시절의 동화책들이 그리(p. 233)워지는 걸까,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동네 놀이터에 다시 가볼 때도, 놀이터의 그네를 다시 타는 순간도. 그 모든 순간이 내면아이의 심장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야(p. 234).

 

이제 너무 늙고 약해진 엄마에게 때늦은 사과를 받아봐야 뭐하겠냐고 하시겠지만, 사과는 분명 의미있어요. 저도 그렇게 부모님의 사과를 뜻밖의 순간에 받아낸 적이 있거든요(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어요. 엄마에게 왜 날 가둬 키우기만 했냐고. 아이들(p. 261)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게 하고, 항상 집에 들어오는 시간만 체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그런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다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사실은 그때는 엄마를 안 볼 생각이었어요. 다신 안 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엄마에게 서운한 걸 다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저는 당연히 엄마가 늘 그랬듯이 화를 내고 저를 혼내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최초의 순간 이었어요(p.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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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4】 어른이 되어 만나는 나의 ‘내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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