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축소멸사회 - 이관후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4년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내 나이 60인데 살아 생전에 국가의 위기를 경험할 것 같아 착잡하다. 무엇보다 인구소멸은 절망적이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의 소멸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대한민국은 '수축 사회'를 넘어 '소멸 국가'로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출생률이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2012년 1.3 수준이던 합계출산율은 10년 만인 2022년에 0.78로 떨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속도입니다. 합계출산율 1.0이 붕괴한 때(p. 23)가 2018년입니다. 그해 0.98이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0.78까지 하락했습니다. 1.0에서 0.78까지 4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0.78에서 0.5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인구학자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2022년 8월 29일 자)에서 '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질 것이고, 마지막 골든 타임은 앞으로 5년'이라고 했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전 교수는 출생률 하락의 원인으로 청년의 불확실한 미래와 여성에게 전가되는 '독박 육아'를 꼽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해진 미래'는 229개 지방 자치 단체 중 절반이 직면한 '지방 소멸'이 잘 보여 준다고도 했습니다. 지방이 소멸해도 수도권에 다 같이 모여 살면 되는데, 그게 출생률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2022년 합 계출산율은 0.59로 전국 최저였습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 인구 절벽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국가의 합계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니까요. 일상의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시내의 폐교된 초등학교들이 요양 병원으로 바뀌는 게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요? 병설 유치원은 방문형 노인 돌봄 시설로 탈바꿈하고, 노란색 버스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을 실어 나르게 되겠지요. 그 외에도 의료, 복지, 연금에서 심각한 재정적 부담이 생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은 아(p. 24)직 미지수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0이 안 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한데, 0.5의 상황은 어떤 나라도 겪어 보지 못했기에 예측 자체가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소멸 위험 지역의 상황을 미뤄볼 때 한 가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합계출산율이 0.5 수준이 되면 '회복 탄력성'이 없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듭니다. 이걸 회복 탄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잡아당기면 그냥 끊어져 버리거나 다시 줄어들지 않습니다. 회복 탄력성이 사라진 것이죠. 합계출산율이 0.5 밑으로 떨어지면 지금 지방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초등학교가 사라지듯이 출산, 육아, 교육의 기반이 무너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즉, 다시 출생률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출생률을 회복할 수 없는 대한민국은 조용히 그대로 소멸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p. 25).
기업은 대체로 정치보다 빠릅니다. 위기가 현실화하기 전에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지구적 밸류 체인을 포기할 수 없는 선도적 기술 기업이 먼저 한국을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이런 일이 벌어지면 탈출 러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미래 가치를 내다보는 주식과 금융 시장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오늘내일의 수출 경기에 일희일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p. 35).
심판만 요구하는 무책임한 정치
이렇게 위기를 넘어 소멸로 가는 대한민국에서 국가 경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정부, 국회의 정치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태를 팔짱 끼고 바라만 보는 사람도 바로 그들입니다. 왜일까요? 제22대 총선 때문입니다(p. 36). 충선이 1년 가까이 남았지만 거대 양당의 선거 프레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당은 문재인 정부와 야당 심판이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 심판'입니다. 정부 · 여당이 지난 1년 여간 여러 비판을 받으면서도 '전 정부 탓' 프레임을 지속한 이유는 2020년 총선의 기억 때문입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탄핵된 세력이 아직도 국회 권력을 차지하고 있어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확실한 적폐 청산'을 요구했습니다. 결과는 180석 석권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제20대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 심판'으로 승리한 기억을 갖 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상대를 심판하는 프레임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당은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문재인 정부 심판을 강조하 면 지지층이 결집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역시 '윤석열 정부 심판론' 외에 다른 전략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생 보다는 야당 탄압을 강조하기에 급급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심판 프레임에서 머무는 한 두 정치 세력은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소멸도, 세계 질서의 변화도,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환에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는 국가 경영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여당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집권 세력, 지지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 적입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은 뒷전입니다. 결과가 나쁘(p. 37)면 전 정부와 야당 탓을 하면 됩니다. 야당은 정부가 외교와 경제를 망치고 있으니 반사 이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입니다. 아니, 망하게 방치할수록 좋습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물론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의 공천'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p. 38).
입시와 일자리, 어른들이 흔히 청년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인 이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90% 청년에게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선진국들이라고 이런 괜찮(p. 46)은 일자리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들의 성장률도 그렇게 높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입니다. 외환 위기를 맞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나라였습니다. 새로운 일자리, 좋은 일자리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입시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 중 다수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우라'는 말이 일리가 있었지요. 개인들의 여건은 다르겠지만 누구든 열심히 노력을 한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믿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청년들의 삶이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생애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후로는 달라졌습니다. 7~10% 성장 시대의 경험과 1~2% 성장 시대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여건이 어렵거나 한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의 대한민국은 각자도생과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부자 되세요 이데올로기'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적 차이의 문턱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도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평가, 곧 행복의 기준을 입시와 일자리가 아니라 더 다양한 요소들이 채우고 그것을 얻(p. 47)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충분히 주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태어난 배경에 따른 기회 요인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국가의 복지, 20대 초반에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 물질적 풍요 이외에 건강, 자유, 가족, 일에서의 보람, 여가, 친구들과의 교제 등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 아마도 이런 것이 행복도가 높은 선진국들에 존재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절망할 이유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사고방식과 제도를 지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대 간의 인식 차이와 갈등, 청년들의 절망감을 부르고 있습니다(p. 48).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BTS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가진 문화 대국이라는 자부심에 우리의 어깨가 좍 펴집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OECD 부동의 1등 항목이 있습니다. 그것도 평균치를 2배나 넘기는 압도적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살률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
한국이 원래 자살이 많지 않았냐고요? 아닙니다.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1990년 초반까지 OB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자살자 수도 1983년에서(p. 60) 1992년까지는 연간 3천 명대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20년 동안 자살자 수가 급등합니다. 1993년에 4천 명대, 불과 3년 뒤인 1996년에는 5천 명을 넘어섰고 이때부터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집니다. 매년 1천 명 가까이 늘더니 2005년에는 1만 2천 명이 됐습니다. 12년 동안 인구는 불과 10% 늘었는데 자살자 수는 3배가 된 겁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두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30년 동안 OECD 회원국들과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극단적으로 반대 경향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988년에 한국의 자살률은 8.4명으로 당시 OECD 평균인 17.2명의 절반에 불과했습니(p. 61)다. 그러나 1997년에는 13위, 1998년에는 7위로 올라가다가 2003년에 1위를 차지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다른 OECD 국가들의 자살률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전 지구적인 추세나 인류사적 변화가 아니라 순전히 '한국적인' 일임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특정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1997~1998년, 2001~2003년, 2008~2009년에 각각 크게 증가했습니다. 외환 위기, 카드 대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시기입니다. 이는 한국의 자살이 개인적 •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 경제적 요인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많이 자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원인과 이를 방기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인이 가장 치명적이었을까요? 가장 연관 관계가 높아 보이는 것은 '불평등'입니다. 한국의 불평등도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높아집니다. 1994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막 1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지금은 3만 달러 수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3배나 잘살게 되었는데 자살자 수도 3배나 늘었습니다. 자살의 원인이 이렇게 구조적인 데에 있다면, 국가가 자살률과 관련해 신경 써야 할 부분도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어야 할 겁니다(p. 62).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저출생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2021년 대한신경과학회는 출생률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자살률 증가라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2023년 3월, 서울시자살예방 센터장을 맡은 황순찬 인하대 교수도 대한우울자살예방학회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과연 그렇습니다. 1992~2005년 자살자 수가 330% 늘어나는 사이 출생률은 1.76에서 1.08까지 떨어졌습니다(p. 63).
결국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체 평균과 달리 출생률과 관련 있는 세대의 자살률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고 그 주요 원인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 그리고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 체제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맹률은 낮고 대학 진학률은 높으며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죽어 가고, 경쟁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p. 64).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 통했던 시스템이 앞으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무한 경쟁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소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 따지자면 최상위권 대학,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집중된 관심과 지원을 수도권 밖 대학과 전문대학,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들에게 넓혀야 합니다. 특히 전문대학이 지방에 많고 전문대학 재학생 중 저소득층과 여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의과대학 정원을 몇 명으로 할 것인가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역진적 사회 보장을 누리게 되는 소수의 정규직 일자리가 아니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일자리에서도 괜찮은 임금과 산업 안전, 보(p. 68)편적 공적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회 개혁, 제도 개혁의 과정에서 일과 돌봄의 균형, 성별에 따른 불평등 문제도 고려되어야 저출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
지금 한국은 '자살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자살을 말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저출생•고령화나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정책이 제안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살은 단지 의료 분야에 한정된 정신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에 자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자살이지만 마지막은 국가의 소멸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1만 3천 명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루 평균 36명,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이 땅에서 36분마다 1명이 자살합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살률을 낮춰서 사회의 소멸을 막아 보겠다는 정치인과 정당은 과연 없는 걸까요?(p. 69).
'가해자에게 스토리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범죄 행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세우는 이유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다음의 모방 범죄를 막(p. 84)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칙을 구실로 사실은 더 쉽고 나쁜 선택을 해 왔습니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범죄의 경우 개인에게서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범죄자 검거를 목적으로 하는 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사 기관에는 프로파일러라는 전문가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범인을 검거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사후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대중은, 범인을 잡고 그들이 어떤 일을 벌였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이런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거나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정부나 국회에서도 이런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일에는 시간이 걸리고 대책은 복잡하며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p. 85).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육아와 가사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세대 간, 성별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여성이 출산 뒤에도 일할 수 있는 사회 인식의 변화와 이를 이끌어 낼 제도적 장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말로만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고 이런 부분을 고치려는 노(p. 112)력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p. 113).
백승욱은 《연결된 위기》의 '한반도 핵 위기의 극단적 시나리오'라는 작은 항목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북한 사이 공중전 중심의 국지적 위기가 고조되고, 남북한 중간 지대가 분쟁 지역의 특징을 띠게 되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전투기가 연이어 격추된다. 북한이 남한의 전투기 발진 기지인 남한의 공군 기지를 대상으로 제한적 전술핵을 발사한다. 동시에 북한은 미국이 공격하면 미국과 서울에 전략핵을 쏘겠다고 위협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한반도의 소멸입니다(p. 127).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Bemard Crick은 정치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여러 공적인 사안들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정치란 이견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내 의견만 말해서는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한 사람만 발언한다는 것은 독재의 강력한 징후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정치가 소멸하게 됩니다. 정치가 소멸해도 일이 없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소멸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행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p. 166).
좌든 우든 사람들은 살 만하면 일단은 두고 봅니다. 심지어 부패한 정부라도 유능하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능은 선거에서 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우연으로 가능 합니다. 전두환 정부에서 우리나라는 3저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우연이 없습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던 김영삼 정부에서 우리는 외환 위기를 맞았고, 결과는 헌정 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였습니다(p. 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