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 - 이민진 저자(글), 인플루엔셜 · 2022년

모처럼 760여 페이지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파친코라는 책은 드라마가 된 후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됐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일제 말과 이후의 세월 속에 선자라는 한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얻을 수 없어 파친코 사업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자식들은 이와 연관된 일을 하게 된다. 유부남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는 목사 백이삭의 제안으로 결혼한다. 그리고 낳은 아들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차남에게는 모자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런데 이들이 믿는 기독교는 그들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 소설에 기독교적인 요소를 가미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알듯말듯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이삭이 말했다. 선자는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삭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압니다.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되겠죠. 시간이 걸릴 거예요. 다 이해합니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게 했다면 더욱 그랬다. "예. 선자가 말했다."그럴 수 있어예!." 나룻배가 부두에 닿자 이삭이 선자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부산은 아주 추웠고, 선자는 외투 소매 속으로 시린 손을 쏙 넣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선자는 매서운 날씨가 목사의 몸에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p. 128). 두 사람 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에 선자가 나루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번화한 상점가를 가리켰다. 선자가 부모님과 부산에 와서 가본 유일한 곳이었다. 선자가 그쪽을 향해 걸었다. 선자는 앞장서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삭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삭이 선자의 뒤를 따라갔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보겠다니까 참 기뻐요.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에요.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신앙을 가진다면 결혼 생활을 잘해나갈 수 있을 거예요." 선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이삭이 이유가 있어서 그런 부탁을 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겠지만, 하나님께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할 거예요. 우리와 아이에게요." 선자는 이삭의 기도가 두꺼운 외투처럼 그들을 감싸 보호해주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p. 129).
선자는 아들이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한수의 자동차 문을 두드렸다. 운전사가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희망에 차서 웃음을 지었다. 한수가 선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노아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잘됐십니더. 다음 주에 요코하마로 온다갑니더. 모자수가 억수로 기뻐할 기라예." 한수가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하고 선자가 두 사람의 만남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노아에게 전화가 오지 않자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p. 599)날 아침, 한수에게 전화가 왔다. 선자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몇 분 후,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p. 600).
고한수는 지팡이를 짚고 걷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걸어가는 선자를 발견하자 큰 소리로 불렀다. 선자가 고한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를 넘어선 짓이었다. "네 어머니는 강한 여자였어. 난 항상 네 어머니가 너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어." 선자가 고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에 이 남자가 선자의 삶을 망쳤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까? 고한수(p. 654) 덕분에 노아가 생겼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이삭과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삭이 없었다면 모자수와 손자 솔로몬도 없었을 터였다. 선자는 더 이상 한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성경에서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뭐라고 말 했던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선자가 이 세상의 악에 대해 물었을 때 이삭이 이 구절을 가르쳐주었다(p. 6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