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 과학자들 - 비키 오랜스키 위튼스타인 저자(글) · 안희정 번역, 다른 · 2014년

의사들은 인간의 질병을 고친다는 미명하에 인간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에는 이것을 문제삼지 않았으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에 대한 무한 신뢰는 그들의 방종을 불러 올 수 있다.

천연두 백신의 숨은 진실
가엾은 꼬마 캐서린이 투베르쿨린 주사를 맞기 100여 년 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관한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 대상은 당시 8 세였던 정원사의 아들 제임스 핍스였다. 에드워드 제너는 제임스의 팔에 낙농장 여인 손에 돋아난 우두 종기에서 뺀 고름을 집어넣었다. 제임스는 천연두를 가볍게 앓았다. 1개월 후, 제너는 이번엔 소년의 팔에 치명적인 천연두 종기 딱지에서 뽑은 고름을 집어넣었다. 천연두 고름이 여러 번 몸에 들어갔지만 소년은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너는 우두(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소에서 뽑은 면역 물질-옮긴이)가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험 대상자가 된 제임스 핍스가 제너의 실험에 동의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임스는 아직 어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제너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실험을 거부하기가 힘들었으리라 짐작된다. 게다가 1800년대와 1900년대에는 아이나 성인에게 치료를 할 때 오늘날처럼 꼭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치료를 하기 전에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의료법은 현대에 만들어졌다. 그때는 실험을 할 때 지켜야 할 지침을 정한 그 어떤 법도 없었다. 의(p. 23)사에게는 치료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1865년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의사가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거나 시험할 때 도덕적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또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말한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항상 명심하라고도 했다. 과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중대한 실험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베르나르도 죽음을 앞에 둔 여성에게 하는 실험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이나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들은 따로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여성 사형수는 베르나르가 시키는 대로 억지로 애벌레를 삼켜야 했다. 이 사형수는 죽은 후 애벌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해부되었다. 베르나르는 이 여성은 환자가 아니라 실험 대상 일 뿐이라고 해명했다(p. 25).
앨라배마에서는 외과 의사 제임스 매리언 심스가 노예들에게 소름끼치는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심스는 흑인 유아의 머리뼈를 열어서, 농장 아이들에게 심각한 근육 경련을 일으키던 칼슘 경직(혈액 속 칼슘 농도가 낮아져서 생기는 질병-옮긴이) 치료법을 찾아내려 했다. 심스는 구두 수선 도구로 아이의 머리뼈를 으스러뜨렸고, 출산 도중 뼈의 변형 때문에 칼슘 경직이 일어난다는 잘못된 이론을 주장했다. 심스는 여성 노예들에게 한층 더 소름끼치는 수술을 실시했다. 출산 도중 문제가 생긴 노예들은 소변과 대변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질과 방광 사이에 구멍이 생겨서 질 안으로 오줌이 새어 들어오는 '방광질샛길'이라는 병 때문이었다. 1840년대에 심스는 이 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여성 노예들에게 여러 가지 수술을 실험했다. 아나차라는 노예는 30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심스는 수술을 할 때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는 마취제인 에테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심스는 마침내 '방광질샛길'의 치료법을 찾았고 연습을 통해 수술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이러한 성과를 발판으로 심스는 '미국 산부인과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심스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고, 세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단 동상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내과 의사들은 '치료'라는 명목으로 흑인 노예들에게 저지르는 실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에게 하는 실험은 옳고 그름에 대해 논쟁했다. 1874년, 30세의 지적 장애인 매리 래퍼티에게 행한 실험은 엄청난 비(p. 29)난을 받았다. 오하이오 주의 의사들은 래퍼티의 두피에 생긴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버츠 바솔로라는 의사는 래퍼티가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뇌에 고통스러운 전극 실험을 하기로 했다. 열려 있던 뇌에 전류가 흐르자 래퍼티는 극심한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었고 비명을 질렀다. 래퍼티가 죽은 후 부검을 통해 그녀의 뇌가 손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바솔로는 미국 의사 협회로부터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질책을 당했다. 과학 실험으로 환자에게 상처를 입힐 정당한 이유는 없다며 말이다. 바솔로는 래퍼티의 동의를 구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 장애인의 동의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p. 30).
수많은 독일인 의사들이 인종 위생학(독일의 우생학-옮긴이)에 끌렸다. 위생학 정책이 독일의 미래 세대를 특정 질병으로부터 막아줄 거라고 기대했다. 범죄 행동 같은 사회적 질병도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 아래, 의사들은 독일 사회에 만연한 '전염병'을 '치료'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나치 정부는 인종 위생학을 실행하기 위한 법률과 정책을 만들었다. 그중에는 실명이나 난청, 신체 기형 같은 유전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불임 수술을 강요하는 단종법도 있었(p. 50)다. 이 법률에 따라 35만여 명 이상의 독일인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1939년, 독일 의사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정신 질환자와 장애인, 그리고 계속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유대인 또한 열등하다고 생각됐고 '게토'라는 비좁고 더러운 빈민가에 강제로 몰려 살았다. 1941년에 나치는 거리에서 체포한 유대인들을 가스실 안에 몰아넣고 가스를 살포하거나 총으로 쏴서 죽였다. 유대인 수백 만 명이 쌍둥이 자매 에바와 미리암처럼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독일 의사들은 인종 위생학을 실행하기 위한 법률과 정책이 마련되자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 사람들에게 온갖 잔혹한 실험을 했다. 유대인을 비롯해 집시, 동성애자, 기형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 러시아인과 폴란드인 같은 슬라브인들도 실험에 동원되었다. 나치 정부에 반대하거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처럼 다른 정치 이념을 가진 사람들 또한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나치가 볼 때, 이 열등한 사람들은 실험 대상으로 아주 적합했다(p. 51).
미국의 우생학
독일 정부는 인종 위생학을 국가 정책으로 정해서 잔인하고 극단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를 실행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생각이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고, 1883년 영국의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은 사촌 형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이런 생각을 가리키는 '우생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골턴과 다른 우생학자들은 인간 종족을 개선하기 위해 최고의 자질을 지닌 사람들끼리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00년대와 1900년 초에 유대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같은 유럽 대륙의 다른 민족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자 우생학자들은 미국인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범죄자들, 지적 장애인들이 정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어 세금이 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했다. 1910년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우생학 기록 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사무소는 인종과 유전, 그리고 이와 비슷한 문제에 대한 자료를 보관했다. 수많은 사회 저명인사들이 우생학을 지지했는데, 그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찰스 윌리엄 엘리엇 하버드대학 총장도 있었다. 나치들은 미국의 우생학 운동을 부러워했다. 히틀러는 미국의 우생학자들에게 우생학에 관한 책을 써준 것에 대해 편지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 발 앞서 완벽한 인종 개량을 이룰까 봐 걱정했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우생학을 이유로 전 세계 32개 나라에서 불임 수술이 실시되었다. 미국에서만 6만여 명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강제 불임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정신 질환자나 가난한 10대, 강간당한 어린 소녀들, 뇌전증(간질)을 앓는 사람들과 정신 지체자들이었다(p. 56).
연구의 윤리성은 결국 연구를 시행하는 사람들 손에 달려 있다. 규칙의 개정은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이 있다. 그리고 사회는 연구자에게 적절한 배려의 수준을 결정해야 한다. 언제까지 조작하기 쉽고 속이기 쉬운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을 상대로 임상시험을 계속할 것인가? 누군가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위험의 부담을 짊어지워도 되는 것일까? 의학 임상 연구 윤리는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도덕 수준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과학 발전은 중요하다. 사회는 엄청난 의학적 발견과 치료법 덕에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학 연구는 어떤 경우라도 생명 존중과 혜택과 정의라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사회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가 대립할 때 우리는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결정이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p. 149).
믿을 수 없는 실험들
731부대에서는 31가지 정도의 다양한 인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일본 의사들은 우선 나치 의사들이 자행했던 동상 실험과 감압 실험을 하며 인간에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와 그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자세히 관찰했다. 또 인간이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실험,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죽음에 이르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사람을 죽게 하는 방사능의 양은 얼마인지 알아보는 실험, 독가스 실험, 체액 대용으로 쓰일 생리 식염수를 찾기 위해 사람 몸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실험, 사람의 몸에 말의 피를 주입하고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실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형 원심분리기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고속으로 회전시키는 실험,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실험 대상의 피부를 살아 있는 상태에서 벗겨 내는 실험,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하여 각각 상(p. 160)대방에게 이식하는 성전환 수술 실험, 성병 실험, 세균을 배양하여 인간의 몸에 주입시킨 후 경과를 살펴보는 실험 등 온갖 잔혹한 실험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 같은 실험을 진행한 후에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 대상을 모두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해부했다. 또 해부된 몸에서 꺼낸 장기는 포르말린 액이 든 병에 담아 진열실에 보관했다고 한다. 731부대가 자행한 일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들이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실험을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험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세균전을 위해 세균 무기와 독가스탄을 만들어 민간에 살포했는데, 총 1600차례에 걸쳐 중국 일대에 살포된 독가스탄으로 인해 무려 57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 다른 731부대
더욱 놀라운 것은 이처럼 비윤리적인 실험들이 자행된 생체 실험 부대가 731부대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00부대(창춘), 8604부대(광저우), 1855부대(베이징), 1644부대(난징), 516부대(치치하얼), 543부대(하이라얼),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부대들 역시 731부대와 비슷하거나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뒷받침 하는 역할을 했다(p. 162).
묻지 않은 범죄의 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의 만행은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계속된 패배와 8월 8일 구 소련의 선전포고로 인해 전쟁의 패망을 예견함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 731부대는 비밀리에 철수를 준비했다. 이시이 시로는 중요한 실험 자료만 일본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증거 인멸을 위해 모두 소각했다. 세균 연구실과 특별 감옥 등 731부대의 모든 건축물도 함께 폭파했다. 그리고 특수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실험 대상자들은 독가스를 살포하여 모두 살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세균 무기 연구와 생체 실험 문제로 재판이 열렸다. 모두가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는 악랄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이들은 대부분 죄를 묻지 않고 석방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731부대의 연구 자료들 때문이었다. 731부대는 오랜 시간 다양한 생체 실험을 한 끝에 수많은 연구 자료와 실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은 이 자료들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731부대의 연구 자료만 얻게 된다면 세계 의학계를 좌지우지하고 눈부신 의학 발전과 수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 실험 기록과 일본의 세균전 실험 자료 등을 넘겨받는 대가로 731부대 책임자들을 석방하게 된다.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치 의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비윤리적인 행위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부족하(p. 163)게나마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았고, 그들의 행위를 함께 지켜본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본보기 삼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진행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인 뉘른베르크 강령을 제정했다. 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들의 죄는 철저히 가려지고 숨겨졌다. 731부대의 주요 책임자들은 전후 일본의 고위 관직에 올랐고, 일본 정계 및 의료계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731부대에서 얻은 생체 실험의 결과를 활용하며 호위호식했다. 반성하지 못한 역사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기타노 마사지와 나이토 료이치는 731부대 공개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 때, 전쟁으로 혈액이 부족해지자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비싸게 되팔아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경제적 부를 얻게 된 두 사람은 일본 최대 제약사인 녹십자를 세우고 이후 에이즈 약해 사건(혈우병 환자들이 오염 된 혈액으로 만든 치료제 주사를 맞고 에이즈에 감염된 사건. 이 약으로 일본에서 1800여 명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그중 400여 명이 숨졌다)의 주범이 된다. 이처럼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역사는 언제든 다시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들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불편한 역사를 똑똑히 지켜보고 성찰해야 한다. 인간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줬다. 하지만 우리는 과(p. 164)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 과학이 인간을 희생시키며 나아가도 되는 거냐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개인의 인권보다 더 중요하냐고 말이다. 이러한 성찰과 고민들은 우리가 자칫하면 잊기 쉬운, 진정으로 인류를 위한 과학의 길을 알려 줄 것이다(p. 1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