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조형근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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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형근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다. 유익하고 재미있다. 이 책은 역사 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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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7일, 한때 리샹란이었던 야마구치 요시코가 죽었다. 그해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하며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이 호소문마저 삭제했다. '리샹란을 지키는 모임' 중 한 명이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주 아베 총리가 벌인 일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이끈 아베는 2022년, 연설 중 암살됐다. 아베를 향해 사죄를 촉구하던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3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2024년 6월 14일 현재, 한국 정부에 등록된 240명 중 232명이 세상을 떠나고 여덟 명만이 남았다. 2023년 4월,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은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p. 30)일 수 없습니다." 역사적 책임에 관한 오랜 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그 말들 속에서 증발했다.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 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상처"라며 죄를 고백했다. 그러고서도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p.31).

 

두 편의 〈너의 이름은〉이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혜성이 떨어지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둘의 의미가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2016년의 〈너의 이름은〉은 침략 을 은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두 편의 〈너의 이름은〉은 여전히 닮았다. 분명한 원인과 책임이 있는 인간의 비극을 천재지변으로 묘사하는 것, 직면해야 할 정치사회적 문제를 개인들 간의 연결이라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건 동형적이다. 한국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p. 44)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어느 조사관이 쓴 표현처럼 "그날 지켜본 것은 배 한 척의 침몰이 아니라, 사회의 참담한 실패였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거기에 연루된 우리 자신의 고통스러운 변화도 필요했다. 초기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공유됐다. 2014년 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라 는 대표 슬로건이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진행 과정은 달랐다. 처벌은 선원과 출동한 해경, 해운 회사, 해운업계 등 직접 관련자와 하급자들에게 집중됐다. 구조 책임을 진 해경 지휘부와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조사와 책임 규명은 회피됐다. 그렇게 되자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와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 사회적사특별조사위원회를 거 치면서 논의는 책임을 회피한 나쁜 개인을 찾아내는 데 집중됐다. 사과를 보관한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썩은 사과' 한 알만 골라내면 된다는 '썩은 사과' 프레임이 논의를 지배했다. 안전 사회를 위한 구조적 개혁,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라는 과제는 계속 미뤄졌다. 슬픔에 공감한다는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도, 희생자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비극이 남긴 과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데 있다. 3•11과 4•16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질문이다(p. 45).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가해자였다. 이런 사례들을 근거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현실적 함의는 일본에 동조한 같은 전범국이니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쟁 책임 부인에 동조하는 논리 중 하나일 뿐이다. 다른 한편에는 그들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그저 순전한 피해자일 뿐이 라는 생각이 있다. 구조적 악이 있다면 그에 동조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간단히 면제될 수 있을까? 이학래가 수기에서 고백(p. 62)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만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p. 63).

 

윤치호(1865~1945)도 미국 유학 중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인종차별을 겪고 오히려 '힘이 곧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의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 물론 윤치호는 유길준보다는 내면이 복잡한 인물이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과 사회진화론 사이의 부조화로 고민했다. 1892년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고뇌한다. "나의 신앙이나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은 인종 간의 불평등 과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여러 해악들이다. 왜 하나님께서 코카 시안과 몽골리안, 아프리카인 등에게 평등한 기회와 동등한 심신의 능력을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자 하심에도 못 하셨을까? 그렇다면 그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심에도 일부러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오호, 수수께끼로다!"(p. 95). 약육강식의 질서를 승인하게 되면 약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벌이는 투쟁이 무의미해진다. 강자는 지배할만해서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할만해서 지배당한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는 윤치호의 말은 유명하다. 1919년 3월 2일의 일기에서 그는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물리적 진압이라는 당장의 결과만 보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3•1운동이 조 선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염원을 남겨놓았는지, 일제가 3•1운동으로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한국인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피 지배자가 이런 자학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다면 지배자로서는 최상이었다(p. 96).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였다. 크리스처럼 잠시 베트남에 온 미군의 시각으로는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베트남전쟁은 30여 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인도차이나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이 진주한다. 나치의 괴뢰 비시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군은 전투도 없이 일본군의 온순한 포로가 됐다. 종전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이, 북부에는 중국군이 진주한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프랑스군에게 다시 무기를 쥐여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지배하겠다고 선언한다. 일본군과 싸우면서 베트남 북부 상당 지역을 스스로 해방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던 호찌민(1890~1969) 등 독립 운동 세력과 베트남인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호찌민은 그래도 프랑스와의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다. 파리 해방 전투의 영웅이자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이던 르클레르 장군과 협상하여 당분간 독립 대신 자치에 만족한다는 합의에 이른다. 피를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정식 협정을 맺기 위해 파리로 향하지만, 본국 정부의 대답은 자치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피를 뿌리기로 결심한 쪽은 프랑스였다. 협상 결렬 후 프랑스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북베트남은 공산당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독(p. 141)립 운동 세력의 연합정권하에 있었다. 이 전쟁의 본질이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연장하려는 더러운 전쟁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유다. 이 전쟁에서 북베트남은 1954년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프랑스에게 승리를 거뒀다. 기적 같은 승리였다. 중립국 등 관련 9개국이 참가한 제네바협정에서 2년 내 자유 총선거거 실시와 단일 정부 수립이 합의됐다. 막상 당사자인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합의 이행을 거부했다. 질게 뻔한 선거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내세웠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내쫓고 좀 더 유능해 보이던 응오딘 지엠의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지엠 정권은 비판자들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정권은 극도로 부패했고, 지배층은 나라를 사익을 위한 사기업으로 여겼다. 나라를 지킬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때 프랑스를 앞세우며 전비의 80퍼센트를 댔던 미국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는 아예 직접 나섰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쓴 전비만큼을 퍼부었다. 그러고도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패배였다. 이 쉬운 전쟁에서 미국은 왜 졌을까? 그들이 지켜주겠다던 남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국민 절대다수가 전쟁의 명분에 수긍하지 않았다. 남베트남 정권이 정통성도 없고 부패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근본 적인 이유가 있었다. 남베트남은 농민이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농업 사회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기득권이던 소수 대지주가 토지를 장악하고, 절대다수 농민은 고율의 소작료(p. 142)로 고통받고 있었다. 농지개혁이 지상 과제였지만 바오다이 정권도, 지엠 정권도 계속 거부했다. 1956년, 지엠 정권은 농지 소 유 불평등이 가장 극심하던 곡창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마지 못해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농촌 인구의 0.025퍼센트에 불과한 대지주 2500명이 쌀 생산 농지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개혁안은 농지 소유 상한선을 100헥타르(30만 2500 평)로 정했다. 남베트남 농지개혁 몇 년 전에 실행된 남한, 일본, 대만 농지개혁에서의 상한선인 3정보(9000평)의 33배가 넘는 크기였다. 지주도 소작농도 사라지고 자기 땅 가진 소농들의 평등한 나라가 된 이 동아시아 3국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경제 기적을 이뤘다. 반면 응오 딘 지엠 정권의 농지개혁안은 대지주 체제를 온존하겠다는 방안이니 개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극소수 대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는 부패한 정부를 농민이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이익을 보위하자는 전쟁을 지지할 이유도 없었다(p. 143).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비 '검은 벽'에는 전몰자 5만 80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베트남전쟁에 종군한 영(p. 144)국 사진작가 필립 존스 그리피스는 통계 수치를 계산해본다. "미국 전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워싱턴 D.C의 주모비는 약 137미터다. 같은 간격으로 베트남 전몰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비를 만든다면 아마 15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다." 베트남 사람 300만 명이 그 전쟁에서 죽었다. 〈미스 사이공〉도, 《지옥의 묵시록》도, 그리고 오바마도 침묵하는 사실이다. 베트남전쟁으로 상처 입은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 5000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그중 5000여 명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미국 다음으로 전쟁에 깊이 개입한 나라가 한국이다. 왜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한국이 연루되어야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제대로 묻기 어렵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항의를 했다. 전몰자를 추념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당연한 권리라며 한국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면 한국 정부와 여론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 논리와 똑같은 논리를 한국 정부와 사람들이 내세웠다. 일본에게 이런 것까지 배웠다.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한사코 외면하면서. 참전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연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 먹고 살려고, 가족을 도우려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쟁에 나섰고 피를 흘렸다. 침략 전쟁이라는 걸 알고 간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p. 145)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p. 146).

 

과학은 세상을 구원했지만, 막상 세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국들의 팽창 욕망은 비료 따위로 채워지지 않았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왕국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사건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하버는 이 전쟁에 열광했다. 이후 염소가스 제조법 발명으로 화학전의 길을 열었다. 1915년 벨기에 전선에서 치러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 실행됐고, 6만 7000명 이 상이 사망했다(p. 156). 하버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최초의 여성 화학박사였다. 여권운동에도 참가할 정도로 여성 인권에도 열정적이었다. 화학자 동료인 하버와의 결혼으로 화학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하버는 마리 퀴리를 전폭 지원한 피에르 퀴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코 앞치마를 벗을 틈이 없었다" 하버와 연구서 《기체반응의 열역학》을 공동 집필했지만, 사람들은 하버가 혼자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버의 독가스 개발에 대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규율을 타락시키는 야만성"의 상징이라며 반대했다. 제2차 이프르전투의 참상이 전해지고, 하버가 다시 독가스 공격을 위해 전선으로 떠나려던 날, 클라라 임머바르는 그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하버는 어린 아들에게 장례를 맡기고 전선으로 떠났다. 1991년 국제핵전 쟁예방의사연맹 독일지부는 과학의 악용에 죽음으로 항거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클라라 임머바르상'을 제정했다. 독가스 개발로 비난받게 되자 하버는 항변했다. "평화의 시기에 과학자는 세계에 속하지만, 전쟁의 시기에 그는 조국에 속한다." 가정 파괴를 무릅쓸 정도로 독일에 대한 애국심이 넘쳤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망명을 떠나야 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이듬해 스위스에서 죽었다. 하버가 개발진으로 참여해서 만든 살충제 치클론 B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널리 쓰였다. 즉사시키지 않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만드는 참혹한 독가스였다. 그가 이 참극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장남 헤르만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46년에 미국에서 자살했다. 헤(p. 157)르만의 딸 클레어는 미국에서 화학자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염소가스의 해독제를 개발하는 데 전념하던 중 연구 예산이 핵폭탄 개발에 우선 투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었다. 1949년이었다. 과학이 세상을 구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던 어떤 과학자를 구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p. 158).

 

나치 친위대였던 '전후 독일의 양심'

그리고 이제 귄터 그라스Gunter Grass(1927~2015)의 양파 껍질을 벗길 차례가 왔다. 2006년 8월 12일, 유소년 시절을 담은 회고록 《양파껍질을 벗기며》의 출간을 앞두고 《슈피겔》과 인터뷰를 하던 중 그라스는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정규군인 방공부대에서 복무했다고 수십 년간 거짓말을 해왔으며, 실은 친위대로 복무한 자발적 나치였다는 것이다. 그라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는 열다섯 살 때 자발적으로(p. 261) 잠수함부대에 입대하려 했지만 어리다며 거절당했고, 이듬해에는 제국노동대에 징집됐다. 노동대가 너무 싫어서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4년에 다시 입대를 자원했지만 그곳이 친위대인 줄은 배치받은 다음에야 알았다고 한다. 무장친위대 제10기갑 사단에 입대하여 종전까지 무장친위대원으로 복무했다. 약칭 SS로 불리는 친위대는 정규군과는 달리 징병이 아니라 자원으로 들어가는 특권 집단이었다. 히틀러 광신자들의 집합체였고, 인종 청소 등 반인륜 범죄의 대명사였다. 물론 나치가 붕괴하던 전쟁 말기에는 그런 구별도 희미해져서 친위대 입대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기도 했다. 친위대인 줄 모르고 자원했다는 그라스의 해명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게다가 당시 그는 기껏 열일곱 살이었고, 이른바 '히틀러 청소년단 세대'이기도 했다. 문제는 고백이 너무 늦었다는 것(p. 262)이었다. 오랫동안 다른 이의 고백과 반성을 촉구해온 그가 아니었던가? 위선을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노벨상을 반납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는 복무하는 동안 총알 한 발 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치친위대 복무 당시에는 전혀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었 다". 문제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다음이었다. . “어떤 범죄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했다." 그라스의 뒤늦은 고백은 독일 과거사 극복의 전형적인 패턴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진실에 대한 뒤늦은 자각과 죄책감의 뒤늦은 증폭. 그리고 이어지는 비난과 논란. 한국에서는 과거사에 대해 매우 무책임한 일본과 대비하여 독일의 과거사 처리가 곧잘 칭송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일본과 비교할 때 독일이 낫다고 해도, 독일의 사정이 그리 명쾌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인들이 패배하자마자 곧장 과거와 단절하고 반성했을까? 천만에, 사람들은 어제까지의 그 독일인이었고, 사회 곳곳에는 예전의 나치가 가득했다(p. 263).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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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95】 흥미로운 역사 이면의 인간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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