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일웨이 맨 - 에릭 로맥스 저자(글) · 송연수 번역, 황소자리 · 2014년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전쟁 포로의 어려움을 이겨낸 피해자와 가해자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어떻게 용서하는지가 잘 그려져 있다. 일독을 권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절판됐다. 기회가 되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라도 읽기를 추천한다.

기차와 철도를 향한 열정은 치유불가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문이 남긴 상처를 치유할 방도도 없다. 이 두 가지 불치병이 내 삶의 여정에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운과 은총의 우연한 조합(p. 10) 덕분에 나는 그 질곡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장장 5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p. 11).
1942년 2월 15일 일요일. 나는 한 장교로부터 우리가 곧 항복하게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날 저녁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우리 요새를 감쌌다. 통신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밀려오는 절망과 피곤을 이기지 못한 채 케이블과 전화선 위에 그대로 매트리스를 깔고 쓰러져 누웠다. 몇 주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긴장의 끈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10시간을 내리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밖으로 걸어 나와보니 4대의 차 량이 차창 옆에 작은 일장기를 휘날리며 천천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군인들은 양팔을 옆구리에 단단히 붙인 채 정좌자세로 앉은 모습이었다. 정문 앞에 차를 줄줄이 세우자마자 일단의 일본군 장교들이 차례로 내렸다. 암록색 제복에 장도가 든 칼집을 차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그 일본군들이 우리 요새 안으로 자신만만하게 걸어 들어왔다. 말라야를 접수한 그들은 인도에서 폴리네시아(태평양 중남부에 널리 산재하는 작은 섬들의 총칭.- 옮긴이)에 이르는 바다까지 장악했다. 아시아에서 최소 3개 유럽국가의 힘을 꺾어놓은 것이다. 나는 이제 전쟁포로가 되었다(p. 91).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캠프를 나서는데 길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 장대 위에 잘려진 머리 6구가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모두 중국인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핼러윈 가면 같았다. 날마다 우리는 그 끔찍한 광경을 지나쳐 행군했다. 그 즈음 일본군이 싱가포르 내 국민당 음 모 혐의자들을 처단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야만적 행위조차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 봐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미 면역된 상태였기 때문일까? 참수당한 머리들은 저들에겐 태평양전쟁에서 얻은 트로피나 다름없었다. 그때 나는 잔인성이라는 게 한번 분출되기 시작하면 통제불능으로 치닫는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p. 98).
그 외의 여정은 별다른 사건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다. 나는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1945년 10월 31일. 드디어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했다. 1941년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군악대가 〈영국은 영원하리〉를 연주해주었지만 이번 귀향 분위기는 겨울 초입 으슬으슬한 잿빛 하늘 아래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우편물이 갑판에 전달되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였다. 어머니가 싱가포르 함락 1개 월 후쯤인 3년 반 전에 돌아가셨으며, 64세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실종자로 보도된 아들이 이미 사망한 줄 알고 몹시 상심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 얼마 전 재혼하셨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재혼 상대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 아니 아버지의 친구였다. 내가 한 번도 친근하게 여긴 적 없는, 진중하지 못하고 집착증이 있는 여자였다. 그 동안 꿈꿔왔던 아늑한 가정의 이미지는 이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내 가슴을 휘저어놓았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바뀌었다(p. 253).
전쟁포로가 겪는 가장 힘겨운 일 중 하나는 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원치 않는 제안이나 지시에 '싫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을 되찾는 것이다. 완강하게 버틸 힘은 있어도 자신의 견해를 끝까지 고수할 의지를 내보이는 일이 내게는 특히 더 어려웠다. 반면 내 고갈된 에너지(p. 256)만으로는 외부적인 사건들, 특히 자유를 찾은 첫 몇 달간 일어난 사건들에 휩쓸리기가 매우 쉬웠다. 이런 부정적인 힘과 정착하고 싶은 긍정적인 욕구가 한데 뒤섞인 가운데 1944년 내가 창이에서 받은 보살핌과 유사한 감정적 도피처를 한시 바삐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쟁포로들은 정착하는 걸 몹시 힘겨워한다. 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어도 마찬가지다. 극동지역 전쟁포로였던 내 또래의 어느 남성은 매일 아침 집을 나와 어두워질 때까지 온종일 걷고 또 걷는다. 편히 앉지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그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 증상을 알코올로 달래느라 여러 해 동안 술집을 드나들더니 얼마 안가 알코올중독 증세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고생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을 시작했지만 애초부터 일은 그에게 버거운 짐이었다. 그나마 일이 그에게 닻을 매다는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알코올중독 치료재단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은퇴자 신세가 되어버리자 그는 또다시 물에 띄운 배처럼 자신만 아는 물길을 따라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극동지역에서 살아 돌아온 이래 평생토록 그를 짓누른 불안증세를 막아줄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불안 증세가 오히려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p. 257).
결혼이 열쇠 없는 감옥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한 쪽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대립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냉담한 분노 속에 홀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 나를 껍질로 둘러싸고 아예 꽉 닫아버리는 행동이 아마 우리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치와 갈등은 내 존재 자체를 위협했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건 말 그대로 비극이었다. 밀실공포증 같은 불안감은 교회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사나운 세력다툼, 허세와 거리두기, 빈정섞인 분개가 자리싸움으로 분출되곤 했다. 30년 동안 교회를 다닌 한 여성은 어느 날 나와 내 아내가 자기 자리라 생각하는 곳에 무심코 앉았다며 큰 소리로 화를 냈 다. 그들의 무지와 위선에 진절머리가 났다(p. 267).
반쪽짜리 생각에 불과한 이 욕구조차 실제로 표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은 이제 그만 용서하고 잊으라고 조언했다. 보통 나는 웬만해선 대놓고 논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나도 의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서하라고 충고를 건넨 대다수는 내가 치른 종류의 경험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용서할 의향이 없다. 아직까지는, 아니 아마도 절대로(p. 298).
나가세는 이후 여러 차례 태국을 방문해 생존한 아시아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벌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전후에도 인도나 말라야 같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철도역 인근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나가세는 콰이 강의 다리에 평화의 사찰을 건립하고 군국주의에 소리 높여 반대했다. 존경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모든 내용을 놀랍도록 초연하게 읽어내려갔다. 내 속에서 강렬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저 방관자로 내 고문 현장을 바라보는 듯 묘한 기분 외에는 모든 게 공허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그의 감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은 그를 용서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 한낱 인간의 용서와는 다른 문제이니까 말이다. 나는 책을 치워버렸다.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 패티가 그 책을 집어들더니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칸부리 전쟁묘지에서의 경험을 적은 대목이 나오자 아내는 분노했다. 내가 느낀 감정 그 이상이었다. 그 녀는 나가세가 어떻게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했(p. 311)다. 죄의식이란 게 어떻게 그냥 '사라져' 버릴 수 있는가? 아무도, 더구나 나도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분노감을 주체하지 못한 패티는 나가세에게 당장 편지를 쓰겠다며 내 허락을 구했다. 그녀는 결국 편지를 썼고 1991년 10월 말, 나가세에게 그 편지를 보냈다. 내 사진 한 장을 동봉해서. 이제 그와 갑자기 대면하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p. 312).
나가세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우리가 다른 환경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잘 지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책을 좋아했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으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칸부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가 점점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는 주말에 일본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 와중에도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용서였다. 나가세를 가장 괴롭힌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구현하고 있지 않느냐, 혹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꺼내기에 새삼스럽진 않느냐는 식의 생각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다. 일단 누구든 용서를 문제로 삼는 순간 자칫 판결자의 자리에 서려는 우를 범하기 쉽다. 다만 나는 내 결정의 구속력을 의식하고 있는 나가세에게 어떻게든 응답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 주 우연히 만난 한 태국 여성이 불교에서 말하는 용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이승에서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악(p. 331)행을 속죄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까지 반드시 자신에게 되풀이된다는 얘기였다. 나가세는 지옥을 두려워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 서로의 삶을 이미 지옥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내가 불교신앙을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용서를 거부함으로써 더 이상 그를 괴롭게 만들 이 유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정작 중요한 건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새롭게 맺은 관계이며 나아가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명백한 뉘우침 그리고 부질없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딛고 우리의 만남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상호적인 요구였다. 우리 삶이 겪은 고통과 피해로부터 가능한 한 충분히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어떤 절차를 통해 용서의 뜻을 전할까 하는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p. 332).
나는 미리 써둔 짧은 편지를 그에게 찬찬히 읽어주었다. 그가 모든 문장을 이해하고 있는지, 중간중간 멈추고 확인하면서. 나는 그가 이 편지를 정중한 격식을 담은 내용으로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전쟁은 이미 50년도 전에 다 끝난 일이라는 단언과 함께 나가세가 겪었을 고통, 화해를 위해 그가 한 노력들, 그리고 군국주의에 대항한 그의 용기 있는 자세를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1943년 칸부리에서 겪은 일을 결코 잊을 수는 없지만 나는 당신을 전적으로 용서합니다."(p.339).
옮긴이의 말
전쟁과 야만, 용서에 관한 어느 전쟁포로의 가슴 저린 이야기
이 책은 철도와 증기기관차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바로 그 기차와 철도로 인해 아이러니한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담은 실화다. 타고난 운명 혹은 '팔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평생 철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레일웨이 맨》이라는 책 제목마저 절묘하다 못해 기묘하게까지 들린다. 에릭 로맥스는 어려서부터 기차와 철도에 깊이 매료된 철도광railway mania 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장교로 군에 입대한 그는 싱가포르 함락과 동시에 일본군 포로가 되어 버마-시암 간 죽음의 철도를 건설하는 현장에 철도노동자로 징용된다. 그러다 라디오를 제작하고 철도 지(p. 342)도를 그려 소지했다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심지어 종전 후에 그가 거친 주요 이력 중에도 철도 관련 직무가 포함되어 있다. 훗날 고문 당시 통역자였던 나가세 다카시의 정체를 알게 된 것도 나가세가 철도 희생자들의 유해와 묘지를 찾는 활동에 헌신한 덕분이다. 이후 그의 삶을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운명의 여인 패티를 만난 것도 바로 기차역에서였다. 또한 이 책의 첫머리는 자신의 집에 걸린 던컨 맥켈러의 그림 속 기차역 풍경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해 나가세 다카시 부부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에 관한 회상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듯 자신의 생각이나 심리 보다는 상황과 주변환경 묘사에 치중해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여러 인물들의 이름과 직책을 포함해 특정 장소는 물론 정확한 날짜와 시각까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펼쳐놓았다. 성장 과정과 기차에 관해 길게 서술한 첫 장은 그의 성품과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단원이며 2장과 3장에서는 시시각각 전쟁이 다가오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그러다 4장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저자의 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4장은 생각지도 못한 전쟁포로가 되어버린 심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5장과 6장의 '라디오 사전'과 고문 현장으로 넘어가면 마치 기록영화를 보듯 가슴이 아프도록 생생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가령 수용소 앞마당에서 심한 체벌과 구타를 당하는 과정은 원문의 무려 6페이지, 그리고 물고문의 전 과정은 2페이지에 걸쳐 세밀하게 기록돼(p. 343)있다. 7장과 8장에서는 죽기 일보직전의 극한상황까지 몰린 포로생활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서대문 형무소나 거제도 포로수용소,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둘러보며 막연히 떠올리던 전쟁의 참상이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오는 대목들이다. 9장과 10장에서는 전쟁이 끝난 직후의 혼란스런 주변상황, 기대와는 다르게 닥친 현실과 심리적인 후유증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심적 트라우마가 얼마나 힘겨운 것인 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온 과정을 보면(포로생활 중 용기를 내 감행한 일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지닌 불굴의 인간정신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온다.
1995년 영국에서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용서의 문제를 다른 작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용서에 관한 내용은 뒷부분에 짤막하게 나온다. 게다가 11장 대부분은 지난하고 고통스런 나가세 추적 과정임을 감안할 때, 용서의 문제를 다룬 대목은 패티의 편지를 매개로 직접 만나 용서를 전하는 12장에 한정돼 있다. 물론 로맥스와 나가세 두 사람의 화해에 결정적 계기가 된 두 개의 편지 전문(패티의 편지와 나가세의 답장)을 비롯해 사건 당사자들이 반세기 동안 겪어온 고통과 화해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더할 나위없이 감동적이다. 하지만 로맥스가 말한 대로 '뜻하지 않은 행운과 운총이 결합된' 이 특별한 사연을 '이상 적인 용서'의 대표 사례로 미화해 '용서에 관한 책'으로 보는 것은 다소(p. 344) 경계해야 할 시각이라 여겨진다. 그보다는 "일본인들이 철도노동자들에게 전혀 무관심한 걸로 비춰지는 게 두려웠다."라고 말하며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태도에서 탈피해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나가세 다카시와 혹독한 포로생활과 전후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도 결코 생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에릭 로맥스, 강인하고 올곧은 두 사람이기에 이뤄낸 '특별하고 아름다운 재회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 속에서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물론 우리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도 많다. 유럽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과 유대인 대량학살은 여간해선 못 믿겠다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또렷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겪은 경험이 참담한 역사의 한 페이지 끄트머리로 무조건 격하되어야 할까? 영국인 대다수는 극동지역 전쟁범죄 재판에 별 관심이 없다. 게다가 공식 정책마저 일본을 서구사회의 동맹국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그 사건들을 폄하했다. 칸부리 사건이 그저 사소한 범죄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재판에 회부된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에게 그 사건은 결코 사소하거나 부차적일 수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치의 만행에 관해서는 《안네의 일기》나 〈쉰들 러리스트〉 〈게르니카〉 등 대표적인 도서와 영화, 미술작품이 넘쳐나는 데 비해 일제의 만행을 다룬 내용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안타까운(p. 345) 현실을 돌이켜볼 때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이 책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해주길 기대해본다(p. 346).

